삼가야 할 대상 본문: 261-28

 

잠언은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조심하고 삼가해야 할 대상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그것은 미련한 자와 다투기를 좋아하는 자 그리고 게으른 자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1. 미련한 자에 대하여 (1-12)

성경은 미련한 자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미련한 자는 마치 "여름에 눈에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은 있어야 할 자리, 서야 할 자리, 해야 할 일을 분간 못하는 지혜없음을 말한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유익이 아닌 폐를 주게 되고 분별력이 없어서 누를 끼치게 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그리고 미련한 자는 마땅히 깨우쳐야 할 진리에는 고집스럽게도 우리는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강팍하고 끝까지 불신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미련한 자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은 대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매로 다스림을 받는다 (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 지혜자는 매를 맞지 않아도 매가 필요 없고 채찍이 필요없다. 그러나 나귀를 부리기 위해서는 채찍과 재갈이 필요하듯이 미련한 자를 바르게 징책하려면 막대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도록 얻어 맞고서야 "손들고 옵니다"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있다. 미련해서 그렇다. 그에게는 매가 없이는 도저히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렇게 짐승과 비교되어 매를 통해서 깨닫게 되고 책망받을 자리에 있다고 하면 이것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미련한 자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2) 일을 맡기기가 부적합하다 (6)

"미련한자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같이 해를 받게 되느니라"

지혜가 없고 미련한 사람에게 시간을 다투는 중대한 일을 맡긴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만한 일을 처리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충성스럽고도 지혜있던 엘리에셀이라는 늙은 종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인의 며느리를 간택할 수 있는 권한까지 위임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축복이고 주인에게도 너 할 나위 없는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에게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맡긴다는 것은 자기가 발로 수고할 것을 대신 맡기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마치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리는 것 같은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3) 명예가 부적합하다 (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돌을 멀리 던리려고 할 때 그것을 물매에 매면 던질 수가 없게 된다. 이말은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면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예는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즉 진주는 그것을 지닐만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빛이 난다는 말이다. 매사가 그렇다. 복도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값이 있지 그것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면 오히려 화가 되고 타락하기 쉽다.

권세도 지닐만한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선용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게 되는 것이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면 마구 휘둘러서 독재를 하게 되고 사람을 다치게 한다. 영예가 더빛이 나고 영광되게 보전되려면 미련한 자에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4) 지혜로운 말이 부적합하다(9)

"미련한 자의 입은 잠언은 술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미련한 자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그 말에는 해독성까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테면 술 취한 사람이 손에 가시나무를 들고 있으면 여러 사람을 찌르게 하고 다치게 하는 것과 같이 미련한 자가 하는 말에는 하나님의 무시하고 겁 없이 마음대로 지껄이고 성경을 마음대로 곡해하는 해를 끼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자는 미련한 자들이 지껄이고 해석해 놓는 말을 잠언이라고 해서 무분별하게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5) 발전이 없다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은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개는 아무 것이나 마구 먹고 나서 탈이 나면 토해내서 위기를 모면하고 평안을 얻는다. 그런데 조금 후에는 다시 그 토해낸 더러운 것을 먹어버린다. 그래서 추하고 미련한 사람을 일컬어서 개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미련한 사람은 죄를 짓고 나서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때는 잠시 회개하고 눈물로 통회를 하게된다.

그래서 평안을 되찾고 원상으로 회복이 되게 되면 토해냈던 것을 다시 주어 먹는 개처럼 얼마 못가서 또 다시 죄를 짓고는 고통을 당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이같은 사람은 발전이 없다. 깊이 인격이나 신앙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은 그래서 결단력이 필요하고 용단을 내리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2. 게으른 자에 대하여 (13-16)

잠언은 게으른 자에 대하여 여러번 말씀하고 있다. 게으름과 나태함의 습관은 버려야 할 폐습이라는 것이다. 게으른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잠을 즐겨 한다 (14)

"문짝이 돌저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느니라"

게으른 자가 안일에 빠져 있는 모습을 잠언은 문짝이 돌저귀를 따라서 이리저리 도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마치 문짝과 돌저귀가 항상 붙어 있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침상 한쪽에서 뭉개다가 그쪽이 싫증이 나면 다른 쪽으로 돌아 누우면서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인데도 일어날 줄을 모른다. 이렇게 잠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잠을 자고 또 자도 한이 없고 가난은 열려진 창을 통해서 도적같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래서 잠언은 게으른 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사탄이 아니라 게으름과 잠이라는 것을 명싱해야 한다. 잠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이다. 잠은 기도를 하려고 하면 찾아와서 방해하고 성경을 모처럼 읽으려면 찾아와서 못 읽게 하고 설교시간만 되면 찾아와서 졸개 만든다. 그리고 이 잠은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언제나 생활이

빈긍하고 영적으로 심령이 빈약한 것이다.

 

2) 발전이 없다 (14)

게으른자는 언제나 "문짝이 돌저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처럼 그 구태의연한 자리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거기에 성취의욕도, 새로움 추구하는 노력도, 창의적인 욕구도 없다. 여기에는 새로운 발전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잠언은 이같이 미련하 자와 게으른 자와는 가까이 하기를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게으름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까지 나쁜 옇야을 줄 뿐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15)

"게을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 하느니라"

잠언은 게으른 자를 표현하기를 일하기만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밥을 먹는 일조차도 괴로워 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게으름의 극치라고 하겠다. 이런 사람이 갈 곳은 무덤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과 사귀거나 상대해서 얻을 것이라고는 정서적 해독이나 생활자세에 대한 회의 말고는 그 밖의 유익이라고는 없을 것이다.그래서 잠언은 게으른자와는 상대하기를 조심하라고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3. 다툼을 일으키는 자에 대하여 (17-18)

본문은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와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을 삼가 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같은 좋지 않은 생활 습성이나 태도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건실한 신앙인들에게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간섭하는 습성 (17)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분별 없이 남의 일에 끼어 들거나 간섭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무분별하게 남의 일에 끼어 들거나 참견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개의 귀를 잡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봉변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개가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 귀와 꼬리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언젠가는 개에게 물리고야 말 것이다. 이 말은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대하거나 간섭하거나 참견하지 말고 자신의 일에 열중하라는 말이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남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고 참견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쓸데 없이 간섭하고 참견하므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못된 습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다. 이런 사람은 가까이 해서 유익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2) 불성실의 습관 (18-19)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이웃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고 명예와 정신적으로 큰 손해를 끼치고도 전혀 책임을 느끼거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이웃이나 친구에게 거짓말로 욕되게 하고 누명을 씌우고 명예를 추락시켜 놓고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장난으로 한 짓이라고 변명하는 불성실을 말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 보다는 그 품성이 성실치 못해서 그렇다 사람이 진지하지나 못하고 매사 불성실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인격이나 신의 따위는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성숙치 못한 생활태도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같은 사람을 경계하라고 교훈한다.

 

3) 이간질 (22)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데로 내려 가느니라"

언어의 습관 중에서 아주 나쁜 습관은 이간하는 습성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을 해치는 중상, 비방, 모략, 무고, 험담, 등이다.

이것이 다름아닌 이간질이다. 이같은 이간하는 말장난은 남을 헐뜯게 되고 비밀을 누설시키고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 하여금 미움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남의 말을 하게 될 때에 우리는 얼마나 조심하여야 하고 신중하여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교훈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어를 구사하는 일에 아름다운 습관을 지녀야 하고 남에 관한 말을 하게 될때는 이같은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신중해야 한다.

 

= 결론 =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남다른 지혜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사람들과 사귐에 있어서도 그렇게 관계를 맺는 일에서도 역시 신중해야 한다. 그래서 잠언을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와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고 교훈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유익될 것이 없을뿐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습관과 나쁜 모습이 악영향으로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서 말씀한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데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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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정복시의 규례들      신명기 71-26

1. 가나안 정복 시에 할 일들(1-11)

 

* 가나안 족속과 그 문화를 말살하라(1-5)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1().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이 숫자도 많고 강하지만(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 붙이실 것이라고 하셨다(2()). 여기에서 '붙인다'('나탄')는 말은 '배당하다', '주다'라는 말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7족속의 심판을 이스라엘에게 양도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 헷 족속

B. C. 2000-1800년경 소아시아의 수리아 지방에 정착하여 철기 문화를 사용하여 강력한 제국을 세우고 발전하다가 B.C. 1200년경에 멸망한 힛타이트족(Hittites)

 

* 기르가스 족속

요단 서편에 살다가 이스라엘에 의해 쫓겨난 족속인데, 그 후 주변 여러 족속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은 주로 베니게 지역의 해변가와 요단 계곡에 거주하였는데, 가나안 정복 전쟁후, 점차 히브리인들에게 흡수되었다.

 

* 브리스 족속

팔레스틴 외곽 지대나 산간 지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시까지 종족으로서의 명백을 유지했다(9:1).

 

* 히위 족속

본래 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시 여호수아를 속여 화친을 맺고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살면서, 나무 패고 물긷는 자들이 되었으며(9:3-21), 주로 팔레스틴 북부 산간 지대와 기브온에 거주하였다.

 

* 여부스 족속

가나안의 아들 여부스의 후손(10:16), 예루살렘과 그 주변 산지에 살았다.

 

모세는 그 땅의 거민들을 완전히 전멸시키고 어떠한 언약을 맺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또한 그들과 결혼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2-3). 이러한 명령은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금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민족을 심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마치 판사가 사형 판결을 내린 사람을 형 집행자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살릴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들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것은 통혼(通婚)으로 야기될 문화적 혼합과 우상숭배 감염 현상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4). 왜냐하면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가 다른 신을 섬길 때에 그 가운데에서 신앙을 지키는 일은 심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가나안 인들이 행하던 제사 의식들은 실로 방탕하기 짝이 없었으며, 음란한 성() 의식을 통해서 시행되었는데,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조금도 본 받아서는 안되었다. 이스라엘이 이들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다 보면, 자연히 각종 방탕과 음란, 도덕성 부패 등과 같은 심각한 죄악에 빠질 것은 뻔한 이치였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멸망당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갑자기'('마헤르')라는 말은 '서두르다', '속도를 내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이는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속히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4:26). 그러므로 모세는 그 땅에 있는 모든 종류의 우상들을 파멸시키라고 지시하였다(5). 모세는 그들이 세운 제단을 헐어버리고, 그들이 세운 주상들을 깨뜨려 버리라고 하였다. 주상(맛체바)'세우다'란 뜻의 '나차브'에서 온 단어로서, 문자적으로는 '고정적인 위치에 세워진 어떤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상'이란 비단 세워진 우상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목적으로 세운 기념 비석도 포함된다(28:18). 모세가 찍어 내버리라고 한 아세라 목상은(5) 본래 두로의 신이었으나, 후에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들, 특히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이 숭배하게 된 여신이다.

 

 

* 율례를 지켜 행하라(6-11)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모든 지상 만민 중에서 하나님 자신의 기업으로 선택한 거룩한 백성이었다(6). '거룩한 백성'이란 말은 '바치다', '구별하다'란 뜻의 '카도쉬''무리', '백성'이란 뜻의 ''이 합쳐진 말로서, 이 말은 곧 '구별된 백성'이란 뜻이다. 이스라엘은 천하 만민 가운데서 특별히 구별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로 바쳐진 거룩한 백성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다. 신약 시대에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을 '성도'('하기오스)라고 부른다(1:7). 베드로 사도는 신약의 성도들을 가리켜서, '거룩한 나라'''왕 같은 족속'이요,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기업'에 해당하는 '세굴라''특별한 보석', '재산'을 가리킨다. 이는 (19)에서 맺은 언약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구별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상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었다(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불러 주신 때는, 이스라엘의 수효가 많고 강성할 때가 아니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방 나그네(아브라함)가 되었을 때였으며(12:1-4),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기뻐하셨으며(사랑), 조상들에게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함(신실하심)이었다(8). '기뻐하신다'('하솨크')는 말은 '열렬히 사랑하다', '갈망하다', '매달리다'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연련(戀戀)하다', '반하여 사모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야말로 이스라엘을 선택하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태에서 나기 전에 미리 야곱을 선택하신 것과 같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두 번째 이유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여러 열조와 맺으신 언약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었다(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축복하시고 인애를 베푸실 것이다(9). 여기에서 '인애'('헤세드')라고 표현된 말은 '인자', '은혜', '은총', '긍휼', '자비'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이 없는 언약에 근거한 불변의 사랑을 나타낸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행치 않는 자를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10). 본문에서 사용된 '당장에'('엘파나우')라는 말은 ''(에 관하여)'파네'(앞쪽에)가 합쳐진 말로,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면전에서'(LXX)라는 말이다. 본문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게끔 '그들의 면전에서' 지체하지 않고 즉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하도록 힘써야 한다(11).

 

< 적 용 >

1> 성도들은 죄의 세력과 단호히 싸워야 하며, 타협하지 말고, 죄를 지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신실하심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는 말씀 준행자에게 축복을, 불순종자에게 심판하시는 일에 신실하시다.

 

 

2. 순종에 대한 축복(12-16)

 

* 하나님의 인애(사랑)를 베푸심(12-15)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준행하는 자들에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12). 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며, 2) 그 후손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3) 토지 소산의 열매, 즉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땅에서 나는 모든 소산들)을 풍성케 하시고, 그들의 4) 소와 양들(산업)도 번성케 하실 것이다(13). 5)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을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뛰어나게 하시고, 그들과 가축이 불임이 되지 않게 하실 것이다(14). 당시에는 국력을 좌우하던 주요 요인이 백성의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었다.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는 것은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다(1:28). 6) 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씀 준행자들이 모든 질병에 걸리지 않게 지켜 주실 것이다(15).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알고 있던 모든 악질들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이다. 애굽의 악질은 애굽의 풍토병(風土病)인 여러 가지 악성 피부병과 옴(scabies), 장티푸스, 이질, 천연두, 안질, 흑사병 등을 가리키는데(Hengstenberg, Wycliffe), 이러한 각종 질병은 애굽의 고온 다습한 기후와 사막의 먼지 등에 의해 자주 생겼다. 그리하여 근래에도 어떤 사람(Pliny)은 애굽을 가리켜 '모든 질병의 본산지'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좆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과 보호가 얼마나 완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말씀을 듣고 삼가 지키며 행하는 자들에게는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과 축복이 주어지고, 그 자손이 번성하며, 토지 소산이 풍요해지고, 불임이 제거되며, 그리고 모든 육체적인 질병이 제거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말씀 준행자에게 그들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영적, 정신적, 신체적,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었다.

 

* 가나안 거민들을 진멸시키고 그들을 본받지 말라(16)

모세는 다시 한 번 가나안 거민들을 전멸시키고 그 신을 섬기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덫과 올무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16).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는 말은 가나안 족속들의 온갖 부패한 죄악을 심판할 때에, 그 거민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후에 타락의 원인이 될 요인을 단호히 없앨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멸하라'는 말('아칼')'삼키다'(2:30), '잡아먹다'(37:20)는 뜻으로, 마치 굶주린 맹수가 먹이를 삼키듯이 하나도 남겨둠이 없이 철저히 멸절시키는 것을 가리킨다(2:34).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될 것을 경고하셨는데, 여기서 '올무'에 해당하는 원어 '모케쉬''유혹하다'(ensnare)란 뜻의 '야코쉬'에서 파생된 말로, '짐승을 잡는 밧줄', '코를 꿰는 갈고리'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가나안 족속과의 교제 및 통혼 등은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trap)이 됨을 시사하는 말이다(3).

 

< 적 용 >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애가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그 자손들과, 모든 토지 소산과 가축, 태의 열매를 풍성케 하시고, 그들을 모든 질병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위의 죄의 세력들에 적당히 타협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된다. 신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좆는 문화를 형성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가나안의 거민을 두려워하지 말라(17-26)

 

* 하나님의 신실하심(17-19)

모세는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둔 백성들에게 가나안 거민들의 외형적 우세함을 보고 미리 겁먹지 말도록 권면하였다(17). 모세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이전의 불신 사건이 재현되자 않도록 그 거민의 강함과 많음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 것을 거듭하여 경고하였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과 광야에서 행하신 큰 일들을 기억하라고 권하였다(18). 신자들이 환난 중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전에 자신들을 인도해 오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최대 강국인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도 그들을 구원해 내셨으며, 곡식 하나 없는 광야에서 20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을 40여 년간 부족함 없이 먹이고 입히셨다. 그리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다(19). 이스라엘에게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이 아무리 강하고 많다고 해도 능히 그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사단과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단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게시지 때문이다.

 

* 왕벌을 보냄(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이스라엘을 피하여 숨은 자들까지 멸하실 것인데, 이는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0). '왕벌을 보낸다'는 말은 (23:28)에 약속된 내용인데, 여기서 '왕벌'에 해당하는 원어 '치르아''고통을 주다', '채찍질하다'란 뜻의 어근 '차라'에서 파생된 말로서, 사해 주변의 사막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말벌'(hornet)을 가리킨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 팔레스타인에 자생(自生)했던 독한 말벌

(2) 자연적인 재해

(3)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인한 초자연적 재해

(4) 이스라엘의 광야 체제시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가나안 족속을 약화시켰던 애굽군대

(5) 과거 출애굽사건 및 최근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정복 사건을 인해 가나안 족속들에게 심겨진 공포심.

 

이상과 같은 견해들 중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인지를 가려내기란 매우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왕벌'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에 영향을 끼친 '하나님의 모든 도움'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21)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계시기 때문이었다(21).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사단의 세력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 주위 사람들은 분명히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신의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흔적이 있고, 주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떠는 일이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 구원 사역의 점진성(22-24)

그러나 가나안 정복은 당장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가나안 족들을 갑자기 쫓아내게 될 때에 야기될 국토의 폐허화와 맹수들의 번성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는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을 시험하려는 목적도 내포되어 있었다(2:22, 23). 우리는 우리의 구원 사역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신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 때에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들을 크게 소란케 하여 필경은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23). 여기에서 '크게 요란케 한다'는 말은 정확히 번역하면 '심하게 파괴하다' 또는 '심히 혼란스럽게 하다'란 의미이다. 진멸한다는 말('솨마드')'황폐케 된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는 철저한 파멸을 뜻하는데, 이 말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들을 심히 혼란케 하며 그들을 철저하게 멸망시키실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들의 왕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일 것이며,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24). 고대 세계에 있어서 왕은 곧 국가였으며, 왕의 이름은 그 종족과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쟁에 있어서 왕의 전사(戰死)는 바로 그 나라 전체의 패배를 의미하였는데, 여기서도 가나안 왕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塗抹)하라는 것은, 곧 가나안 족속을 멸망시키라는 것을 말한다.

 

* 탐심을 금하라(25-26)

모세는 이러한 승리의 보장에 이어서 경고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민족을 멸할 때에 우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는 일이었다(25-26).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로서, 만일 이스라엘 자손들이 탐심으로 우상 위에 입힌 은이나 금을 취하고 그것을 자기 집에 들이게 되면, 그 사람도 하나님께 드려져서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세의 우상 소유를 금지한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들을 직접 섬기지는 않더라도, 전리품으로 그것들을 취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나안의 어떤 우상은 공교(工巧)할 뿐 아니라, 값비싼 금이나 은으로 도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태워 버리기에는 매우 아까운 것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모세는 이러한 우상이 하나님께 심히 가증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가증한 것'('토에바')이라는 말은 '몹시 싫어하다', '지독하게 미워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모세는 여기서 이러한 우상, 곧 가증한 것에 대해 백성들이 취할 태도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명령했다.

 

(1)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라

(2) 우상을 탐하여 그 위에 입힌 은이나 금을 취하지 말라.

(3) 그것들을 결코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

(4) 그것들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우상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나 방관적인 태도를 취할 때에 분명히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여 넘어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죄의 세력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미워하는 자세를 지녀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 성도들은 온갖 유형, 무형의 우상과 죄의 세력에 대해 그 모양도 미워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도록 힘써야 한다.

 

< 교 훈 >

1. 우리는 주위의 죄의 세력이 커보일 때에도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2. 우리는 극복하기 어려운 환경에 부딪쳤을 때에 과거에 우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하나님의 구원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나, 반드시 그 약속은 이루어 질 것이다.

4. 우리는 죄의 세력에 대하여는 모양이라도 취해서는 안되며, 그들의 꺼리고 심히 미워해야 한다. 만일 죄의 소유를 취하면 하나님께 바친 것이 되어 함께 멸망당한다.

 

 

 

 

 

 

 

 

 

 

 

 

 

 

가나안 정복시의 규례들 71-26

1. 가나안 정복 시에 할 일들(1-11)

* 가나안 족속과 그 문화를 말살하라(1-5)

* 율례를 지켜 행하라(6-11)

2. 순종에 대한 축복(12-16)

* 하나님의 인애(사랑)를 베푸심(12-15)

* 가나안 거민들을 진멸시키고 그들을 본받지 말라(16)

3. 가나안의 거민을 두려워하지 말라(17-26)

* 하나님의 신실하심(17-19)

* 왕벌을 보냄(20)

*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21)

* 구원 사역의 점진성(22-24)

* 탐심을 금하라(25-26)

(1)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라

(2) 우상을 탐하여 그 위에 입힌 은이나 금을 취하지 말라.

(3) 그것들을 결코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

(4) 그것들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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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 중에서 용서하는 것 보다 더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용서란 틀림없이 잘못을 범한 쪽에서 용서를 구할 때 베풀어주는 관용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베드로에 대한 용서는 그런 것과 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맹세하면서,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부인했으니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괘씸한 일입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한번의 그런 추궁도 없이 도리어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했던 제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같은 말을 세 번씩 반복하여 물었습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이 세 번 물은 것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한 것을 다시 회복 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1. 주님은 자기를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지 못했던 제자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자기를 맹세하며 부인했던 제자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오늘 이 질문은 자기를 저주하면서 까지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자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묻는 질문이기도합니다. 
우리도 몇 번씩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존재들이 아니겠습니까? 
정치적 위협 앞에서, 아니면 경제적 위기 앞에서, 세상의 출세와 명예의 이해 관계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존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와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질문은 그렇게 가볍게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의 성숙도를 묻는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하지 아니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속에 담긴 뜻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성숙 단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인가를 살펴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2. 주님을 대하는 신앙의 단계를 보면 몇 가지 단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보면서 이 신앙의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먼저 '본토, 일가 친족 네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첫 단계는 <떠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뜻은 구별시킴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던 그런 자리에서 구별시켜 떠나게 합니다. 
구습을 좇아 행하던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단계가 믿음의 첫 단계입니다. 
     
EX: 그래서 옛날에 선교사들이 세례 문답을 할 때 물었던 질문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떠날 자리에서 떠났는가를 확인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일을 다 없이 했습니까? 
단지들을 다 버렸는가? 
술, 담배 하던 일을 다 끊었는가? 
놀음하던 일을 다 끊었습니까? 
이중생활 두 집 살림하던 일을 다 그만 두었는 가? 등등... 
모두 떠나야 할 자리에서 떠났는가를 물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첫 출발은 떠나는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2) 다음 단계는 따라가는 단계입니다. 말씀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실은 지금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사를 들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따라 순종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그렇게 편안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의심도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는가?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가는 생활입니다.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등이 심합니까? 
때로는 의심도 생깁니다. 
때로는 괴롭기도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는 생활이 그렇게 편한 삶은 아닙니다. 
그래도 순종하면서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대부분 아마 이 단계가 제일 많은 단계이라고 봅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드리는 단계입니다. 
아브라함은 고민하면서 모리아 산에 올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헌신이라고 합니다. 
헌신이란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헌신하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단계를 보면, 
① 떠나는 단계, 
② 따르는 단계, 
③ 그리고 드리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베드로에게 물은 질문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베드로의 신앙의 성숙의 단계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이 그저 좋아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가 좋아서, 목사님이 좋아서, 성가대가 좋아서 이렇게 무엇인가 좋아서 예수를 따르는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즉, 그런 신앙을 좋아하는 단계의 신앙이란 말입니다. 
EX: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좋아해서 결혼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자기 나 좋아해?" 그렇게 묻습니다. 
상대방이 그저 좋아서 하는 결혼이 있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감정이 없으면 어떻게 결혼이 성립되겠습니까 마는... 
결혼이란 것을 좋아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아서 교회에 나오고, 좋아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고, 좋아서 교회 일에 참여도 해봅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좋아서 했던 결혼이기에 싫어지면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좋아서만 예수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기쁠때나 슬플때나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 참 신앙생활입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이 언제나 도와달라고만 하는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결혼 생활이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대하여 언제나 도와만 달라고 한다면 그것도 온전한 관계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에서 어려울 때 도와달라고 하고, 의지해 보려고 예수를 믿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뭐 나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모두 약한 존재들이요, 제한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전능자의 도움을 구하고 바라는 것이 나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단계를 보통 <믿음의 단계>라고 봅니다. 
대부분, 우리는 모두 도와 달라는 것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주님 앞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도와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러나 가장 깊어진 단계는 좋아하는 단계도 아니고, 무엇인가를 도와 달라는 단계도 아니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것을 내어 주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코 자기만을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주려는 행위입니다. 
이 주려는 것은 어떤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마음에서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귀한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능가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묻고 있습니다. 
믿고, 따르고 하는 그런 단계에서 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날 율법사가 어느 계명이 제일 큰 계명인가하고 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모든 계명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마22:36-40) 
     
3.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얼마나 믿느냐? 네가 나를 얼마나 따르느냐? 보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좋아하느냐?' 
'네가 나를 믿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주님이 좋아서만 주님을 따르는 단계는 아닌지? 
아직도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 마음에서만 따르는 단계는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한 단계 더 깊어진 사랑의 단계에 들어서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우리는 말씀의 법을 따라 살기를 무척이나 애씁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사람들만 의식하게 됩니다. 
누가 주님을 제일 가깝게 따르는 제자인가? 
누가 주님께 인정을 받는 제자인가? 
그래서 서로 시기하고 경쟁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서 베드로도 그렇게 주님께 말했었습니다. 
이런 단계의 신앙생활은 아직도 율법주의적 신앙의 단계입니다. 
어느 계명이 더 크냐고 물었던 율법사와 같은 단계의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주님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몬 베드로! 아직도 네가 다 
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 앞에 베드로는 이제 달라졌습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감히 주님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 
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내 속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바로 우리들도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① 사랑에는 내가 없어집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아직도 그 사랑은 깊어진 사랑은 아닙니다. 
② 사랑은 내 것이란 것도 없어집니다. 
내 것을 주장하는 한, 아직도 그 사랑은 깊어진 사랑은 아닙니다. 
③ 사랑은 자존심도 없어집니다. 
자존심이 살아있는 한 아직도 그 사랑은 깊어진 사랑은 아닙니다. 
④ 사랑은 오직 그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옥합을 깨어 향유를 주님 발에 부었던 여인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이 여인의 신앙은 주님 당시에 다른 사람들의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신앙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자신의 행위가 인정받기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값비싼 향유를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를 칭찬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들 곁에 있지만 이 여인은 내 죽음을 예비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일도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최대한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분명 성숙한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그렇게 고백하면서 삽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잘 믿는다고, 더 주님의 말씀대로 지키면서 산다고, 그렇게 말할 수야 있겠습니까?" 마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것을 주님이 아시지 아니합니까!" 
이런 단계에까지 이르는 신앙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 여호와를 사랑하라-(64-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상기시킨 후에 율법의 세부 사항으로 말머리를 돌리고 있다(5:25-27). 이제부터 전개될 6-11장에서는 율법에 대한 근본 정신과,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일에 대한 세부 사항들이 논의되고 있다.

 

2-1. 율법의 목적과 축복(1-3)

 

모세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재자로 세워서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신 율법들에 대하여 언급하기 시작했다. 모세는 이것들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구세대에게 가르쳤으며, 이제 또 다시 새로운 세대들에게도 이것들을 가르쳤다. 모세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들"이라고 불렀다. 이 규례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들을 위해서 주신 것이었다(1).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첫째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외한다'('야례')라는 말은 '두려워하다'란 말에서 온 말로, 두려워하고 존중히 여기며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10:12). 둘째로 이 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게 함으로, 그들의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날을 장구하게 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순종하여 가나안에서 오래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글을 듣고, 삼가 조심하여 그것들을 행하라고 다시 한 번 촉구하였다. 여기서 '삼가'(솨마르타) 라는 말은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말씀을 준수하라는 뜻이다(5:32). 모세는 그들이 이 규례와 법도들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게 되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그들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3).

 

 

2-2. 크고 첫째 되는 계명(4-9)

 

모세는 율법의 내용을 모든 율법의 가장 기본 계명인 첫째 계명을 강조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본문의 명령은 모든 유대인들의 신앙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그들은 이 구절을 '쉐마'(이 구절의 시작은 "쉐마"인데 그 뜻은 "들으라"는 말이다)라고 부른다.

 

*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4)

본문에서 '오직 하나'('에하드')라는 말은 절대적인 유일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당시 주변의 모든 민족들이 다신론(多神論)적이고 범신론(凡神論)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신관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신관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신앙의 근본으로 삼아, 매일 조석(朝夕)으로 읽거나 암송할 만큼 중요시 여겼다.

 

*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5)

'마음'('레밥')은 지, , (知情意)를 포함하는 인간의 정신적 본질을 가리키고, '성품'('네페쉬')는 전 인격(全人格)을 의미하며, ''('메오드')은 육체적, 정신적 활동력 및 모든 능력을 가리킨다. 본문에서 이 세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인간의 전 인격과 모든 노력을 강조하기 위한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전적인 헌신과 사랑'을 촉구하고 있다(22:37; 10:27; 12:1). 모세가 율법의 서두에서 이 명령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함으로서 모든 율법의 준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명령은 모든 율법 정신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계명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2:37-40, 12:29-31, 10:27). 인간은 그 마음에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한편을 사랑하다 보면 자연히 다른 한편은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능력의 한계이기 때문이다(6:24). 모세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절대자이므로, 다른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 마음을 분산시키지 말고, 오직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만을 전인격을 다해서 사랑하고, 섬기며, 경외하라고 촉구하였던 것이다(10:37).

 

*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6)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들(특히 성경 말씀)은 단순히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 위에 항상 머물러 있게 해야 한다. 만일 성도들이 말씀이 자기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사도들이 경고한대로 그 마음이 부패하고 방자해져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성도들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온갖 궤계를 가지고 덤벼드는 사탄의 교활한 공격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항상 머물러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곁길로 가지 않고 정도(正道)를 걸을 수 있는 데, 이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lamp)과 같기 때문이다(1:8,9, 119:105).

 

*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7)

모세의 부모님만 말씀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자세히 설명해 주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가르치라'는 원어 '솨난'은 원래 '찌르다','(무기 등을)뾰족하게 하다'. 또는 '(칼을)연마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말이 강조형으로 사용되면(피엘형) '자상히 가르치다'. '반복하여 가르치다.' '마음에 뿌리 박히게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말은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모범을 보인 후에, 그 말씀들을 자녀들에게도 자세히, 또는 철저하게 가르쳐서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지도하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 신앙교육의 정수를 발견하게 된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4:12)을 자세히 가르쳐주고, 그대로 살아가는 자녀를 만드는 일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모세는 또한 이 말씀을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가르치라고 하였다(7). 이 가르침은 일상 생활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적용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오늘날 크리스챤 부모들이 이 역할에 실패함으로서 자녀들을 사탄의 유혹에 방치해두고, 또한 그러한 유혹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유약한 심성을 만들어 놓고 있다.

 

*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표를 삼으며....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8-9)

모세는 이러한 명령이 효과적으로 실행되게 하기 위하여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손목, 이마, 문기둥, 바깥문)에 말씀을 기록하여, 기호와 표를 삼으라고 지시하였다. 손에 매어 기호를 삼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행동의 지침이 되게 하라는 의미이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고와 판단의 기준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활 곳곳에 깊이 스며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이 말이 문자 그대로 지켜지게 된다면, 우리는 도저히 말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집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집 문설주에 붙어있는 말씀들이 눈에 띌 것이고, 바깥에 나갈 때나 들어올 때에는 바깥문에 기록된 말씀이 눈에 띌 것이며, 여행을 하거나, 집밖에 있을 때에는 우리의 손과 이마에 붙어있는 말씀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 어디서나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떠나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받아들여 본문과 같은 구절이 있는 율법의 4구절(6:4-9; 11;13-21; 13:2-10, 11-16)을 양피지에 베껴서 성구 함에 담아, 손목과 이마에 부착하고 다니는 풍습으로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이 풍습이 점차 외식(外飾)의 수단으로 전락되어졌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호된 책망을 받았다(24:5).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들을 항상 기억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명령과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원칙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 적용과 교훈 >

1> 유일하신 절대자 여호와 하나님만을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다른 모든 계명을 이루게 하는 핵심이 된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이 우리의 마음에 항상 있게 해야 한다.

 

3> 우리는 우리의 자녀에게도 이모든 말씀들을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야 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자상하게 설명하고 말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4> 우리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말씀이 자신의 삶에서 떠나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2-3. 자만과 우상 숭배 금지(10-15)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10-11). 모세는 그들이 차지하게 될 기업들을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으로 채워진 집',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들', 그리고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 라고 묘사했다. 이 묘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들이 가장 좋은 것이며, 그것을 얻게되는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고 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2:8-9).

 

그러므로 모세는 그들이 이러한 기업들을 얻고 배불리 먹게 될 때에 조심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 호렙산 언약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유를 얻게 된 사건이며, 호렙산 언약은 하나님 백성된 이스라엘이 마땅히 살아갈 율법을 받은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태동시킨 사건이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길을 제시받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구원받은 일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성경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원은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출애굽 사건과 율법을 잊지 말아야 했던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성경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경외하고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였다(13). 성도들은 형통하게 될 때에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해야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줄 알아야 한다.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듯이 반드시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모든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섬기는 다른 신을 좆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14). 다른 신들을 좇는다는 것은 그 신을 섬기며 그 종교가 제시하는 가치관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고 가나안의 헛된 신과 우상들을 좆아 행한다면, 그들이 제시하는 헛되고 탐욕적인 사상에 물들어서 타락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했다(15). 여기에서 말하는 '질투'는 당신에게 돌아올 찬양이나 영광과 헌신이 다른 대상에게 돌아가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속성상 자연히 우러나오는 거룩한 분노를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이 헛된 우상들에게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빼앗기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34:14; 24:19).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다른 것을 추종하게 될 때에 느끼는 거룩한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비유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적용과 교훈 >

1>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그 분 앞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생활해야 한다.

 

3>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신랑이 신부가 간음하는 것을 보고 질투하듯이 거룩한 진노를 느끼시고 보복하신다.

 

4)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삼가 그 규례를 지키라.(16-19)

 

 

2-4.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하고정직한 일을 행할 것

 

*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16)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모세는 맛사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시험했던 사건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나아지는 것 같이 보이지 않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신지 아닌지에 대하여 시험을 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에서는 위기를 맞을 때에 맛사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도록 권면했다. 성도들은 사는 도중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칠 때가 있다. 이런 때에는 자칫 구원의 감격을 잊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심에 빠지기 쉽다. 이 때에 우리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모든 환경이 우리를 낙심케 만들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잊어서는 안된다.

 

* 율례를 지키고,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고 정직한 일을 행하라(17-19)

모세는 또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지킬 것을 격려하였다(17). 성도들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이때에 성도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한 일을 행하도록 권했다(18-19).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한다. 여기에서 '정직하다'(야솨르)는 말은 '곧다'는 말로, 여기서는 '사리에 합당하며(왕상 11:38) 의로운 것'(12:25)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량하다'(토브)는 말은 '좋다' 또는 '아름답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아름답고, 호의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일을 가리킨다(1:4). 성도들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같이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실 3가지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19).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며(축복), 그들의 대적을 쫓아내실 것이고(승리), 조상에게 주시기로 맹세하신 땅을 얻게 하실 것이다(기업).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준수할 때에만 '축복''승리''기업'이 보장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생기는 어려움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고 하나님을 어리석게 원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도들은 축복과 승리와 기업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보장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교 훈 >

1>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을 당해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에 대하여 시험해서는 안된다.

 

2>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선하게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승리와 기업을 주신다.

 

 

2-5. 자손들에게 가르칠 것(20-25)

 

* 자녀들이 신앙에 대하여 질문할 때

모세는 후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거와, 그것이 주어지게 된 이유, 그리고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에 대하여 물으면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라고 하였다(20). 모세는 부모들이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이 애굽에 종으로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인도하여 내시되,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10대 재앙)를 베푸셨고, 친히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가르치라고 명하였다(21-23).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유래와 율법이 주어지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후대의 자손들에게 구속주 여호와 신앙을 전수하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신앙 교육을 해야 했다. 오늘날 성도들도 비록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육의 방법과 도구는 변할 수 있을지라도, 신앙의 중심 내용(하나님의 선택과 구원, 성경말씀)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또한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복을 위한 것임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24). 모세는 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그대로 살아서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여호와 앞에서 주의하여 지키면 그것이 그들에게 의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라고 하였다(25).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따라 여호와 앞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공의를 이루는 것임을 설명해 주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케 만들어 주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게 해준다(딤후 3:15-16).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킴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적용과 교훈 >

1>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의 핵심을(하나님의 선택과 구원, 말씀을 주신 이유, 말씀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 자세히 가르치고 전달해 주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백성의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온전한 의를 이루게 해준다.

 

 

 

 

 

 

 

 

 

 

 

여호와를 사랑 하라. (6장4-9)

 

1. 율법의 목적과 축복(1-3)

 

 

2. 크고 첫째 되는 계명(4-9)

 

*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4)

 

*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5)

 

*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6)

 

*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7)

 

*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표를 삼으며....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8-9)

 

3. 자만과 우상 숭배 금지(10-15)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경외하고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였다(13).

가나안 땅에서 섬기는 다른 신을 좆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14).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했다(15).

 

4.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하고정직한 일을 행할 것

*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16)

 

* 율례를 지키고,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고 정직한 일을 행하라(17-19)

 

5. 자손들에게 가르칠 것(20-25)

* 자녀들이 신앙에 대하여 질문할 때

 

 

 

 

 

 

처신의 지혜 잠 2515-22

 

잠언 25장은 히스기야왕 시대에 그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으로 전해지는 솔로몬의 잠언이다. 본장에서는 왕을 존경하고 경우에 합당할 것,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지혜롭게 제어할 것 등을 권고하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신의 지혜로운 교훈이 제시하고 있다.

 

1. 인내와 부드러움의 지혜 (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여기서 "오래 참으면" 이라는 말은 인내의 지혜를 말한다..

현대의 삶에는 거짓과 허위와 이간이 난무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중상하고 모략하기를 거침없이 해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때에 실수를 하게 되고 다투게 되어 결국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그 때에는 침착하게 격동하거나 흥분하지 말고 초연한 자세를 잃지 말라고 지혜자는 권구하고 있다. 이같은 처신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이 지혜자의 할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관원"이라는 말은 중재자나 재판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카친"이다. 중재자나 재판관은 결국 침착하고 냉정하게 사리를 따지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신뢰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일에 앞서서 먼저 변명부터 하려 하거나 흥분을 하며 따지려 하지 말고 침착하게 인내하고 참으면서 냉철하게 사리를 따지라고 지혜자는 권고하고 있다.

그러면 결국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꺽게 된다"(15) 는 것이다.

이말은 침착하게 인내 하면서 냉철하게 사리를 따져 들어가는 부드러운 말 앞에서는 중상도, 모략도,거짓도 모두 녹는다는 말이다. 기드온의 부드러운 설득이 흥분해 있던 에브라임 사람들의 노를 쉬게 하였다.

(8:1-3) 아비가일의 조리 있고도 진지했던 호소는 다윗의 살기어린 흥분도 잠재울 수가 있었다. (삼상 25:23-31) 결국 인내와 부드러운 혀가 상대방의 뼈를 꺾은 것이다. 그래서 지혜자는 어떤 경우에든지 신중함과 부드러은 말을 잃지 말라고 교훈한다.

 

2. 과식하지 말라 (16)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 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러우니라" 꿀은 과하게 먹을 것이 못된다. 입에 달기 때문에 과식하게 되지만 후에는 속이 메스껍고 불타서 토하게 된다. 과식은 무엇이나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이 세상에는 굶어서 생긴 병 보다 많이 먹어서 생긴 병이 더 많다고 한다. 굶어서 생긴 병에는 먹고 영양을 공급해 주면 쉽게 낫지만 많이 먹어서 생긴 병에는 약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자는 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꿀을 만나거든 족하게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과식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할까 염려해서다. 여기서 지혜자가 말하는 꿀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기쁨과 적당한 쾌락은 즐길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만족하고 누리되 그것에 빠져서 침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할 본분 까지도 져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절제다. 삼손이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죽은 사자의 몸속에 있던 꿀은 먹지를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곧 나실인인이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달콤한 꿀을 찍어 먹는 사이에 삼손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꿀을 과하게 먹지 말라는 말은 세속에 맛들려 빠지지 말라는 지혜자의 애정어린 충고요 교훈이다.

 

3. 이웃간의 예의 (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러우니라" 친구와 이웃은 가장 가까운 상대요 벗이다. 그래서 허물없이 자주 왕래하고 이야기하고 만나게 된다. 그런데 지혜자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가까울수록 예의가 무시되고 함부로 말을 하게되고 결례를 하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고 상대방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게 되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지혜없는 사람의 행동이다.

무엇보다도 지혜 없는 행동은 이웃에 대한 거짓증거다. 이간하는 말이나 흉을 보거나 약점들을 남에게 말하게 되는 경우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발생되고 있는 무서운 독소들이다. 그래서 지혜자는 말하기를 "이웃을 쳐서 거짓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라고 했다. 그것이 의도적인 말이든 실수에 의한 말이든 이웃에게 있어서는 뾰족한 살일수 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방망이는 "멤피츠" 즉 곤봉이나 절구를 말한다. 즉 이웃에 대한 이간하는 말을 하는것은 이웃을 절구에 넣고 찧어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찔러대는 칼이고 살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있는 ""이라는 말은 한자의 ""이다. 즉 무교에서 말하는 저주의 살이고 고기를 잡는 작살을 말하고 전쟁에서나 사용되는 화살을 말한다. 얼마나 무서운 상처를 낼 것인가 그래서 옛부터 중상모략은 세사람을 해친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과 상대방과 말을 듣는 사람이다. 모두에게 부덕을 끼친다. 그래서 잠언은 필요 이상으로 쓸데없이 이웃집에 자주 드나들지 말라고 했다.

이를테면 처신과 행동에 신중하라는 말이다.그리고 가까울수록 예의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4. 믿음직한 이웃을 두라 (19)

"환란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같으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는 과정에서 환란의 날들이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날에 가장 요긴하게 도움이 되는 의지자는 이웃이고 치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위급한 때에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란 때에 의지할만한 이웃이 없거나 있어도 신실치 못한 사람을 의지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과 같다는 것이다. 부러진 이는 정작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위골된 발은 급하게 뛰어야 할 때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아픔을 주듯이 환란날에 진실치 못한 이웃을 의지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아니라 오히려 고통만 더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외경집회서`37장에 보면 몇가지 지혜로운 권고를 해주고 있다.

'너는 언제나 경건한 살마과 가까이 하라' "10계명을 가장 잘 지킨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사귀라"" 네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과 가까이 하라" "네가 실패했을 때 네 고통을 함께 나눌만한 사람을 사귀라" 즉 너는 그런 사람이 되고, 되어주고, 그런 사람을 만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완전한 이웃이나 친구가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이 위급한 환란의 때에 이웃과 친구만을 의지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말씀은 환란날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진실치 못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를 지니라는 말씀이다.

 

5. 합당한 처신 (20)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도다" 합당한 처신이라는 말은 적절한 때, 적절한 행동을 말한다. 이를테면 모든 일에는 적합한 때가 있으므로 어떤 일을 할 때에는 경우에 맞게, 적합한 때에 하라는 말이다.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적합하지가 않다는 말이다.

울어주어야 할 집에 가서 웃는 것은 마치 쏘다 위에 식초를 붓는 격이고 겨울에 옷을 벗기는 경우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즐거워 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사람과는 함께 울어주라"고 하셨다 (12:15)

그러나 잠언이 너무나 당연한 기초적인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처신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웃는 사람과 함께 웃고 기뻐해 주는 일에 너무나 인색하다. 오히려 질투심과 시기심이 유발되기 쉽다.

그래서 진정한 축하하는 마음이 우러 나오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우는 자로 하여금 함께 울어주는 일도 역시 쉽지 않다. 오늘이 무관심의 시대이기 땜누이다. 함께 아파하고 울어 주기에는 모두 아량들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웃을 모르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본문에서 합당한 처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분별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교훈이지만 동시에 신앙인들은 함께 기뻐해 주고 함께 울어주는 아량과 용기도 가지라는 말씀이다. 참 신앙인은 동참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6. 참된 승리 (21-22)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이 말씀은 기독교에서 말하고 대표적인 정신이다.

쉽게 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원수를 미워하고 욕하지 말고 그 원수가 배고파 할 때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할 때 물을 마시게 하라는 말이다. 결코 쉽지 않은 주문임에 틀림없다. 보통의 인간으로서 이같은 마음과 아량이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 다툼이 있고 미움과 갈등과 증오가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혜자는 무리한 말씀 같지만 이같은 용기 있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원수에게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랑이 그 원수의 마음을 변화 시키고 참회와 회개로 이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용기있는 행동은 참회와 회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 핀 숯으로 원수의 머리에 놓는 격이 되고 하나님께로 부터 상까지 받게된다는 것이다.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화로에 불을 담아 간단한 음식을 조리하고나 난방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불은 그

집안이 소중하게 여기는 불씨였고 또 여러 용도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만일 이 불을 꺼트리게 되면 화로를 가지고 옆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와야 하는데 이웃 사람이 마음이 너그러울 경우 화로에 숯불을 가득 채워준다는 것이다.그러면 불시를 얻은 사람은 그 화를 머리 높이 까지 쳐들고 온다고 한다. 그것은 지극히 관대와 친절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는 것이다. 평소 원수와 같이 지내던 이웃이 불씨를 얻으러 왔을 때 관대하게 불씨를 화로에 충분하게 채워주면 그것이 곧 원수의 머리위에 핀 화를 놓는 격이 되는 것이다. 이같은 용기 있는 행동에는 하나님께서도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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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강수가 흐르게 하라 겔47:1-12, 1:8

 

존 번연이 쓴천로역정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독도가 한번은 어느 방에 들어갔더니 먼지가 한 30센티미터 정도나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빗자루를 들고 들어와서 쓸으니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온 방안에 자욱하더니 도로 바닥에 갈아 앉습니다. 안내자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율법이라'고 대답합니다. 다음 방에 들어갔더니 똑같이 먼지가 쌓였는데 이번에는 한 소녀가 들어와서 물로 깨끗이 씻어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은혜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리 죄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먼지 속에 매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모든 죄가 씻음 받고 정결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인생을 살려고 애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려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불러내어 성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가 흘러가게 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살게 하시려는 거룩한 뜻이 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생명 강수가 흐르게 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생명 강수가 흐르게 하는 일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의 말씀은 에스겔서에서 가장 소망과 감동을 주는 내용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생명수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써 장차 나타나게 될 기적을 소망적으로 예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온 생수가 그 양이 점점 많아져서 죽음의 바다인 사해까지 흘러가서 사해에서 죽었던 생물들이 다시 소생하게 되고, 그 강둑에는 달마다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며, 그 잎사귀가 약 재료가 되며, 그 주변의 땅들은 옥토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까이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로 이방 민족의 포로가 된 백성들이 포로에서 해방 되고 황폐화 된 예루살렘이 회복 되리라는 비전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전 573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왔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을 완전히 초토화 시켜버렸고, 예루살렘 성전은 내외부가 황폐화 되어버렸으며, 당시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혀 손발을 묶인 채 말에 끌려 다니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1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25세의 젊은이 에스겔도 같이 갔습니다. 에스겔은 그발강 가 데루빕이라는 포로수용소에서 14년째 포로로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자기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했는지,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환상을 기록한 것이 에스겔서요, 그 중의 가장 절정의 장면을 기록한 것이 오늘 에스겔 47장 본문 말씀입니다. 지금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에스겔이 처해 있는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준 환상은 대단히 소망이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해방이 될 것이며, 무너지고, 황폐화 된 예루살렘이 새롭게 소생하게 되리라는 비전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크게는 온 세계에 전파 될 복음의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타락하고, 황무지처럼 쓸모없이 되어버린 세상을 치유하고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교회를 세우셨고, 성령을 보내 사명 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 새롭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약 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권능을 받게 됩니다. 권능이라는 말은 '두나미스' 입니다. 이 말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권능을 받고' 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권능을 받는 다' 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권능을 받고 그 능력을 의지 할 때 대적을 이길 수 있고,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로 살 수 있고,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일랜드 북방에 가면 봄철에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치고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우며 재미있게 산답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고 늦가을이 오면 무섭게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이 하도 세차서 새끼들이 다칠세라 둥지가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바람에 날아오는 흙덩이에 얻어맞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합니다. 이렇게 끝까지 버티는 새가 있는가 하면 모든 걸 포기하고 그 발로 아내와 새끼들만 움켜쥐고 양 날개를 크게 벌리면서 그 세찬 바람에 몸을 맡겨버리는 새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함께 날아간다고 합니다. 얼마를 그렇게 모진 바람 속에 날려서 어떤 곳에 떨어지게 되는데 정신을 차려 깨어보니 따듯한 잔디 위에 누워있더라는 겁니다. 아내와 새끼들도 바람을 타고 무사히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산등성이에서 바람을 거슬려 버티고 있던 새들은 자기 힘과 꾀를 써서 별수단을 다해 싸웠지만 그만 닥쳐온 겨울 속에서 꽁꽁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직까지 내 힘으로 남은 생애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연약합니다. 내 힘으로 버티다가는 멸망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 올 때 양 날개를 펴듯이 가슴으로 성령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얻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귀히 쓰임을 받게 됩니다.

 

2.하나님의 성전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믿음 생활 하면서 은혜의 정도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진벌과 갯벌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소금 땅에는 생명이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나오되 예수님의 보혈에 그 영혼이 적셔지지 못한 사람, 은혜와 구원의 강물에 적셔지지 못한 사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해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곁에도 늘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주님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곳곳마다 그곳에 함께 있으면서도 늘 구경만 하며 방관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은혜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은혜 받지 못하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채 여전히 불신앙의 자리, 병든 자리, 영적 죽음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물 가운데 있으면서 목말라 죽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발목 은혜를 체험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3절에 성전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은 점점 불어나게 되었는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사자를 따라서 거룩한 산에서 물을 따라 일천 척(4,500미터)을 내려온 후 건넜는데 물의 깊이가 발목까지 이른 것입니다.

 

발목만 물에 잠그는 신앙의 모습은 신앙의 초보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왔다 갔다 하지만 말씀의 지식이 초보적이고, 말씀을 깨달아 아는 비밀의 체험, 은혜의 감격이 적은 자들, 헌신이 약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런 신앙인은 내 마음대로 자행자지 하며 세속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연속극을 너무 좋아하여 토요일 밤 늦게까지 보고, 보지 못한 지나간 것까지 보다가 잠을 설쳤습니다. 주일 날 기도 순서를 맡아서 기도하는데, “하나님 아버지,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러더랍니다.

 

무릎 은혜를 체험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다시 물이 흘러가는 동쪽으로 안내자를 따라 일천 척을 내려오니 물이 계속 불어서 무릎까지 차게 되었습니다. 무릎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목 은혜라도 받으면 교회에 출석하는 열심이 생기게 되고, 다음에 무릎까지 차는 은혜를 받으면 무릎 꿇어 기도하는 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게 되면 기도에 열심히 생기게 되고, 기도를 통해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8:17 "나를 간절히 찾는 자는 나를 만날 것이니라."했고,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고 했고, 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했습니다.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 무릎으로 은혜 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허리 은혜를 체험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4절 하반부에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했습니다. 허리는 중심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중심이 잡히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전에는 불신앙의 말, 세상의 말을 들으면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미혹을 받아 넘어지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시험 들기도 했는데, 이제는 중심이 서 있어 어떤 시련이 와도, 무슨 말을 들어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이 내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으로 다가 오고, 믿어집니다. 감격이 되고, 눈물이 나고, 교만한 마음이 깨어져 허리를 굽히는 겸손의 사람이 되고, 허리를 동여 주의 일에 열심을 내는 결단이 생기고 삶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은혜의 강물에 잠겨 헤엄치는 신앙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5절에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했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을 물에 자기 몸을 맡겨버립니다. 성도가 은혜 충만한 믿음 생활을 하는 모습입니다.

은혜의 생활이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려고 애쓰고 노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저절로 믿어집니다. 축복도 내가 노력한대로 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장마 비처럼 위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어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성도가 성령 충만을 받고, 은혜 충만을 받으면 남들이 알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놀라운 권능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무리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은혜 충만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성도는 복의 근원이 되고,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복의 근원이 되고, 은혜의 통로가 되려면 먼저 생명 강가에 뿌리를 내리고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생명 강가는 복과 생명과 사랑과 은혜의 근원이신 성삼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가 복의 근원이 되고,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17:8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22:1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했습니다.

 

예수님은 요7:37-39에서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복의 근원이 되고,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가 은혜를 받고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면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성전으로서, 나를 통해 흘러나오는 생수는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 흐르는 물을 보면, 흐르다가 앞이 막히면 낮은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흘러가고, 낮은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면 어느 정도 고이다가 뒤 따라 흐르는 물로 인하여 물은 웅덩이에서 넘치게 되고, 넘치는 물은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입이 생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습니다. 만약 나로 하여금 흐르지 않는다면 살아야 할 생명이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꼭 명심하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라면 생수이신 예수가 흘러나오는 성전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이 불신자들에게 흘러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모든 구원과 속죄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축복이 여러분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물처럼 흘러갑니다. 그 물이 흐르는 곳곳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낙심한 자들이 희망을 얻고, 억압과 눌림 가운데 있는 자들이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립니다. 또 귀신들린 자 병든자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복음은 물이 바다를 덮듯 온 세상을 덮게 됩니다.

 

그리고 기회 있는 대로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오늘 하라, 지금 당장 하라, 미루지 말라라고 쓰여 있는데, 마귀의 사전에는 내일 하라, 다음에 하라, 차차 하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안일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두 본문을 중심으로 생명 강수가 흐르게 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1.생명 강수가 흐르게 하는 일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입니다.

2.하나님의 성전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3.성도는 복의 근원이 되고,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고,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는 사역을 잘 감당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믿음의 집 (잠 24:3-4)


3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4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이 시간에 “믿음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은 어떤 집일까요? 벧후 1장에 보면 베드로는 7층짜리의 멋진 믿음의 집을 말씀합니다. 벧후1:5-7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 위에 지어진 신의 성품의 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고 예수님을 닮은 위대하고 멋진 믿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아름다운 집은 어떻게 지어지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집니다.


3절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여기 집은 일반 건축물을 의미하지 않고 잘 세워나가야 할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가령 각 사람이 이루고 있는 가정, 각인의 인생, 혹은 교회 정권 국가 등 사람이 경영하고 있는 어떤 단체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삼하3:1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했는데 이 말씀은 다윗의 가정을 넘어 그의 정권까지 말한 것입니다.


한문으로 수신재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죠?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가정도 나라도 천하도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집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신령한 집입니다. 우리 믿음의 집입니다. 우리 믿음의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본문에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려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롬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무럭무럭 자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3년 반이나 말씀과 이적으로 수없이 증거하자 어느 날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벧전2:1-3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했습니다.


어떤 부인은 글을 읽을 수 없어서 하루 품삯을 주며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고용했는데 읽어 주던 그 사람이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 부인보다 더 신실한 믿음을 갖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했기 때문입니다.


2. 진리를 알고 행하므로 견고하게 지어집니다.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우리가 말씀으로 믿음의 집을 짓되 더 견고히 짓기 위해서는 진리를 더 확실히 알아 바른 진리에 서야 하고 알고 설 뿐 아니라 행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심판 날에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통과되는 건 아닙니다. 진정 주여라 불렀다면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 그 관계가 분명해야 하고 예수님이 주인이시므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마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했는데 왜 주의 이름이 통하지 않을까요? 말로만 주의 이름이었지 주의 뜻대로 하지 않는, 내가 주인이지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심부름꾼이 되어야지 예수님만 이용해 먹는다면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절).


그러시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24-27절). 우리가 말씀을 행하는데 그냥 행하는 것과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냥 행하는 것은 자기 의로움이나 율법적일 수 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에는 신앙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알되 예수를 마음에서 확실히 만나야 미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를 못 만나서 미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를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잠시 미혹되었더라도 뭔가 아니다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옵니다. 예수 터전이 아니라면 크게 불탈 날이 옵니다.


그것을 바울은 고전3:11-15에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여기 불이 무엇입니까? 멀리는 지옥불이지만 가깝게는 시험입니다. 예수 말고 가짜 예수 가짜 성령 가짜 하나님으로 시험을 이겨나갈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가짜 예수로 지옥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가짜 구원론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천주교와 직제와 교리를 일치시키려는 예수 말고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다원주의 구원론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배울 때 잘 배워야 합니다.


교리는 진짜일지라도 믿음생활에 문제가 있어도 역시 시험에 넘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테스트 시험은 우리 믿음을 점검하는 일종의 은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있어서도 바르고 그 진리를 순종함에도 바르시기 바랍니다.


전12:11에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쉽게 풀이하면 부흥사도 하나님이 내셨고 목회자도 하나님이 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부흥회인지 목회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고 부흥회도 목회처럼 하는 것이 신실한 것인 양 자랑하는데 자랑할 것 없습니다. 이건 부흥사 같은 부흥사가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부흥사도 있어야 하고 신실한 목회자도 있어야 하고 신실한 학자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성도들을 견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3.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보배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4절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집만 잘 지으면 되나요? 방에 좋은 물건이 많아야지요. 방에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들로 채워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보물이 많았습니다. 성전도 금으로 지었으니 성전부터 시작하여 성전이 모든 물건이 다 보물입니다. 그리고 지성소 법궤 위에도 값진 금은보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좌우 3층의 제사장 방에도 금나팔 은나팔 온갖 보물들이 가득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보배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 보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보물이십니다. 욥22:24-28에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사33:6에도“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학개도 말했습니다. 학2:7에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여기 모든 나라의 보배는 성전에 임재하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하는 지식은 무엇일까요? 잠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그러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행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면 우리 마음에 보물이 가득 찹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이 보물이요, 그 보물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진짜 보물이신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그런데 호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을 잊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니 하나님께서도 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보배 삼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배 삼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외쳤습니다. 호6:3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경외할 때 보배로운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집을 아름답게 지으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초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축하고 진리를 앎으로 더욱 견고하게 건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그 안에 가득히 채우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보배 되신 하나님이 기뻐 거하시며 영광 받으시고 우리들을 보배와 같이 여겨주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 십계명 선포(5:1-33)

 

신명기의 본론을 이루고 있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는 모든 율법의 기본이 되는 십계명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본문은 그 십계명을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1-1. 서론(1-5)

 

* 들으라, 배우라, 지켜 행하라.(1)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의 회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율법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 되는 남자가 60만 명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26:51), 모세가 백성들의 대표인 장로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들이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대언 하는 형식을 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떠한 과정을 거쳤든 간에 이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들을 위한 것이었다. 모세는 이 말씀에 대하여 4가지 명령을 했다. 첫째는 이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둘째는 '배우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자세히 배우고 상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깊이 생각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설명하고 가르칠 사람들도 준비해 주신다. 셋째는 그 말씀을 '지키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조심하여 그 말씀을 잊을까 삼가 마음을 지켜야 한다. 넷째는 그 말씀을 '행하라'는 것이었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은 것을 알고서 닦지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 이 언약은 오늘의 너희에게 하신 언약이다(2-3).

모세는 시내산 언약이 그들의 조상들 뿐 아니라, 현재에 살아 있는 이스라엘 자손과도 맺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믿음의 세대들에게 세우신 것이지만, 동시에 지금의 인류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그러므로 각 시대의 성도들은 그 언약을 자기 세대에게 적용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에, 그 기도가 그 당시의 제자들 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주님을 믿는 자들을 위해서도 하신 것이라고 언급하셨다(17:20). 하나님께서는 약 39년 전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여호와의 백성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19:5, 6). 이 약속은 이스라엘 모든 세대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 이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4-5).

이 말씀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대면하여 말씀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인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가 중보 자가 되어 이 말씀을 전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 말이 자신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이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새 언약은 모세보다 완전한 그리스도를 중보자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또한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다. 주님의 신적인 영광은 모세의 얼굴에 있던 영광과 같이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옛 언약의 중보자였던 모세는 자신의 죄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선고를 받았으나,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험과 죄를 이기셨고 완전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모세를 통해 전달된 율법은 완전한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그 길로 행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이것은 마치 나침반을 가진 항해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알면서도 폭풍우 앞에서 그 길을 이탈하여 파선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님 복음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어떠한 것이 옳은지를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모든 말씀들을 자세히 읽고,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해야만 한다.

 

 

1-2. 십계명(6-21)-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요약-

 

* 참고-1: "십계명의 해석 원리"

 

. 동기적 원리

이 계명들은 외적인 행동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시키는 내적인 동기까지도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마음으로 하는 내적인 음란한 생각까지도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 적극성의 원리

십계명에서 '하지 말라'는 명령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금지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도적질하지 말라고 한 말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뿐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가난한 자들을 돕고 구제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 포괄성의 원리

십계명은 한 계명이 그것과 비슷한 다른 명령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비단 자신의 부모뿐 아니라, 스승이나 다른 어른 같은 모든 권위에까지 순복하라는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

 

. 연결성의 원리

십계명의 각 계명은 각 계명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계명을 어기는 일은 다른 모든 계명들을 어기게되는 현상을 초래한다.

 

. 선후의 원리

십계명의 앞에 있는 계명은 뒤에 나오는 계명의 기초가 된다. 즉 제 1계명은 모든 십계명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앞에 나오는 대신 관계의 4계명은 뒤에 나오는 대인 관계의 6계명의 기초가 된다.

 

 

참고-2: "십계명의 목적"

 

. 만인을 위한 목적:

십계명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뜻을 알게 해주며, 인간의 무능과 죄악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오게 하는 구원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 불신자를 위한 목적:

십계명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더 이상 핑계할 말이 없도록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심판의 척도로서의 역할을 한다.

 

. 성도를 위한 목적:

십계명은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이룰 수 없는 의를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성도들에게 더욱 더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십계명은 완전수인 10과 증거의 수인 2로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과 뜻을 나타내주며, 백성들에게 주시는 마땅한 삶의 지침서이다.

 

 

. 서 론 (6)

"나는...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다."-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언약을 맺거나 율법을 선포하실 때 당신의 호칭을 먼저 언급하셨다(17:1,2; 3:6;20:1,2). 이것은 당시 고대 근동의 종주권 맹약(宗主權盟約)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입법자의 권위를 먼저 내세움으로써 뒤에 이어지는 언약이나 율법에 확고한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십계명(十誡命)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이름 위에 근거하고 있었다.

 

"너를 애굽 땅에서...인도하여 낸"-여기서 십계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은 심판주가 아니라, 구속주로 선포하고 있다. 이는 십계명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언약'임을 말해준다 (20:2).

 

. 1계명(7)

"나 외에는...있게 말지니라."-직역하면 '나와 대립하여...두지 말라', 또는 '나와 병립하여 두지 말라'란 뜻이다. 이 첫 계명은 하나님만이 인간의 유일한 신이며, 그 분만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의무(22:37, 38)라는 것을 밝혀 주는 계명으로 참 종교의 기초가 되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 2계명(7-10)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지며..."-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왜냐하면 그 같은 행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만족과 위안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부패한 종교적 심성에서 비롯된 이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4)고 교훈하고 있다.(20:4참조)

 

"절하지 말며...섬기지 말라"-'절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솨하''복종하다'란 뜻을 지니며, '섬기다'에 해당하는 '아바드''예속시키다', '노예가 되다'란 뜻을 지닌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외적(外的)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內的) 정신상태로 우상을 섬기는 것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질투하는 하나님"-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죄에 대하여 불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동시에 적절히 표현된 구절이다<4:24>.

 

"3, 4대까지 이르게..."-이 말은 부모의 죄악이 그 후손들에게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말은 후손들이 조상의 죄 때문에 멸망당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20:5)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하나님의 진노에 비하여 그 은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강조한 수사학적 표현이다.(20:6)

 

. 3계명(11)

" 망령되이"-이 말의 기본 원어 '솨웨''무익하게', '거짓되이', '헛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인간의 거짓 맹세나, 저주 등에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며 그분을 모독하는 행위이므로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18:21; 29:2; 6:9).

 

"일컫지 말라."-이름은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인격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이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대상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갖고 있는가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면서 그 성호(聖號)를 가볍게 취급하거나 외람 되게 사용하는 것 같은 죄를 결단코 범해서는 안된다(20:7 참조).

 

. 4계명(12-15)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안식일 계명은 천지창조 후에 제정되었으며(2:1-3) 호렙 산에서 입법화되었다(20:8).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동등 되게 지음 받은 대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고전 11:11, 12). 아울러 이는 주인이 지키는 안식일이 단순한 육체적 유혹만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에 관계된 묵상과 예배를 위한 것이었듯이, 안식일만큼은 종들에게도 영혼의 일에 힘쓸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20:10).

 

"인도하여 내었나니...안식일을 지키라"-(20:11)에서는 안식일 성수(聖守) 계명이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에서 비롯된 제 7일의 안식(安息) 사건(2:1-3)에 근거하여 주어졌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계명이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역사적 구속(救贖)사건에 근거하여 주어지고 있다. 전자가 안식일의 창조적 의미를 말하고 있다면, 본문은 안식일의 구속사적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안식일 개념에 대한 계시(啓示)의 심화 및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안식일(安息日)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원을 기념하는 주일(主日)로 승화된 것과 같은 원리이다.

 

. 5계명(16)

"공경하라"-이 말의 원어 '카베드'의 기본 뜻은 '무겁다', 곧 상대방을 무게 있게(존중히) 대우하라는 뜻이다(20:12).

 

"복을 누리리라"-(20:12)에서 약속된 장수(長壽)의 축복에다, 유복(有福)한 삶의 축복까지 덧붙여 약속되고 있다. 사실 인간이 장수할지라도 그 삶이 복된 것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장수 자체가 저주스런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 자에게 주어진 이 약속은 매우 적절하고 중요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도의 가장 본질적인 축복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 6계명(17)

"살인하지 말지니라"-사람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행위를 통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증거 해주고 있는 계명이다. 신약 시대의 예수께서는 직접적 살인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증오나 내면적 분노 등과 같은 간접 살인도 금하셨는데(5:21, 22), 이로 보아 본 계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진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7계명(18)

"간음하지도 말지니라"-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은 다산(多産) 종교에 물들어 성적(性的) 방종이 널리 횡행하였으며, 심지어 제사 의식을 통해 이를 장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고 있는데(22:22-24), 그 까닭은 간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창조 질서인 일부 일처제를 깨뜨리는 행위로서, 곧 입법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2:24, 25).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이 계명의 근본 정신을 더욱더 고양시켜 심지어 마음에 품는 음욕조차도 간음이라고 해석하였다(5:28).

 

. 8계명(19)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도적질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가나브''속이다'란 뜻도 있다. 따라서 본 계명은 이웃의 재물을 빼앗거나 몰래 훔치는 것 뿐 아니라, 이웃의 권익을 사기 혹은 협박 따위로 침해하는 것까지 금하는 것이다.

 

. 9계명(20)

"거짓 증거하지도 말지니라"-법정에서 위증(僞證)하는 것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경우의 거짓말은 일절 용납될 수 없다. 이는 제 8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데, 거짓은 사람을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10계명(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탐내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와''사모하다','바라다'(desire)는 뜻이다. 이는 남의 아내에 대하여 욕정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러므로 이는 간음죄와 동일시될 수 있다.

 

"그의 밭이나...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지니라"-이 말은 (20:17)에는 없던 내용으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이 차이는 처음으로 십계명을 받은 때인 출애굽 제 13(19:1)과는 달리, 현재는(출애굽 제4011) 아모리 족속의 왕들로부터 요단 동편 땅을 탈취하여 밭이 생긴 때이므로 생겼을 것이다. 여기서 '탐내다'에 해당하는 원어 '하마드''몹시 열망하다','심히 사랑하다'는 뜻이다. 이는 타인의 소유에 대하여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적으로 욕심을 품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탐심은 정당한 노력이 없이 자신에게 하락되지 않은 것을 불법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마침내 그 대상을 소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범죄 행위를 낳기 마련이다(1:15). 아뭏든 이러한 탐심(貪心)은 이웃 사랑에 반대되는 사악한 욕망이니, 성도들은 이를 마땅히 제어할 뿐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3. 모세의 중재로 선포된 율법(22-33)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산 위의 불과, 구름, 그리고 흑암 중에서 큰 음성으로 이스라엘의 총회에 말하셨다(22). 이 세 가지 현상들은 하나님의 호렙 산 현현(顯現)시 수반된 세 가지 현상이었다(4:11). 그리고 십계명을 말씀하신 후에 그것을 두 돌 판에 써서 모세에게 주셨다(22). 그리고 그 외 다른 율법들은 당시 하나님과 백성간의 중보자였던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셨다. 이 일은 각 지파의 '두령''장로'들의 건의로 이루어졌다(23). 여기에서 각 지파의 '두령'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각 1명씩 있던 지파의 지도자들이었으며, '장로'는 나이가 많고 덕이 높아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던 유력한 인사들로서(24:9;11:16), 이들은 그 당시 백성들의 실질적인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에게 나와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광대하심, 위대하심)을 자신들에게 보이셨으며,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직접 듣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하였다(24).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리를 듣게 되면, 이번에는 자신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25-26).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에게 자기들 대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전해달라고 간청하였으며, 그러면 자신들이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준행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27). 이 말은 모세의 중보(仲保) 사역이 백성들의 합의(合意)와 요청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준다.

 

<중보자로서의 모세와 그리스도>

 

성경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예비 되어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 길은 바로 성도들의 영원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나아가는 길이다(14:6; 3:12; 10: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소멸시키셨다. 여기에 나오는 중보자 모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딤전 2:5)를 상징하는 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 말을 듣고 그들의 말이 다 옳다고 하셨다(28).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간구를 다 듣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이번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복 받기를 원한다고 하셨다(29).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청을 수락하셨다. 그 결과 모세에게는 신적 권위가 부여되었고, 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중보자가 되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후 모세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모든 말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임을 인정하고 그에 전적으로 순종하여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각자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3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내 곁에 서 있으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듣고,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31). 모세가 새 세대들에게 자신의 중보자의 직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게 하여 그 율법에 순종하여 축복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명령('미츠와')'계명'(10; 20:6; 대상 28:8), '금령'(4:2;5:17) 등으로도 번역되는데, 이 말은 직접적 명령에 의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 그리고 '삼가 행하라'('솨마르')는 말의 본래 의미는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치다'이다. 여기서부터 '신중하게 행동하다', '조심스럽게 처신하다'는 뜻으로 발전되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인간 삶의 유일한 정도라는 것을 말한다.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들을 행하면 그들이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아, 그들이 얻은 땅에서 그들의 날이 장구할 것이라고 하였다(32-33). 하나님의 계명은 그것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만 삶을 윤택케 해주는 축복의 원리가 된다.

 

< 적용과 교훈 >

1.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직접 전해 주셨으나, 나머지 세부 율법들은 백성들의 합의와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모세를 중재로 하여 전달되었다. 우리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각 교회의 상황에 따른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각 사도들이 주님의 마음과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 해주셨다.

 

2. 우리는 모세가 전해준 말씀과 사도들이 하나님께 받아 전한 말씀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전해주신 말씀과 같이 받아야 한다.

 

3.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 삼가 조심하며, 그 말씀에 기록된 대로 행할 때에만 그 안에서 있는 모든 약속된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것만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축복의 길이 된다.

 

 

 

 

 

 

 

 

 

 

5장 십계명 선포(5:1-5)

1). 서론(1-5)

* 들으라, 배우라, 지켜 행하라.(1)

* 이 언약은 오늘의 너희에게 하신 언약이다(2-3).

* 이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4-5).

 

2). 십계명(6-21)-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요약-

. 서 론 (6)

. 1계명(7)

. 2계명(7-10)

. 3계명(11)

. 4계명(12-15)

. 5계명(16)

. 6계명(17)

. 7계명(18)

. 8계명(19)

. 9계명(20)

. 10계명(21)

3). 모세의 중재로 선포된 율법(22-33)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  고전15:20-28

한 사냥꾼이 있었는데,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면서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뱀을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뱀을 쳐다보았더니 뱀도 어딘가를 노려보았는데,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개구리를 노려보았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로 꿈쩍 않고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개구리는 무당벌레를 잡으려고 노려보았습니다. 무당벌레도 꼼짝 않고 있었는데, 진딧물을 잡아먹으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냥꾼은 그 먹이사슬을 보다가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이 경이로운 현장을 목격한 후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혹시 누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 것은 아닐까?” 사냥꾼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언제인가는 죽음에 의해 잡아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피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통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분이 있습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본문 고전15:20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했습니다. 첫 열매가 열리고 나면, 그 뒤를 이어 계속해서 열매들이 열리게 되는 것처럼 성도들이 그 뒤를 이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와 죽음과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입니다. 한 사람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범할 때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죽음의 형벌도 모든 인간이 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의 길이 열려지고, 이 예수님 안에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의 사슬로 하나로 묶여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는 ‘의로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담 안에서 하나로 묶여있던 사슬을 끊어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함께 죄에 묶여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베다니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지만 말씀 한마디로 다시 살게 하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침체된 신앙이 살아나게 되고, 사명이 살아나게 되고, 삶의 의욕이 살아나게 되고, 인간관계가 새로워지고, 예배생활에 활력이 생기게 되고, 봉사와 헌신이 살아나게 됩니다. 기쁨, 감사, 영생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많은 순교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고난을 당해도 그 고통은 잠깐이고, 장차 받을 영광은 영원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모든 제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다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2.말씀을 신뢰하여 믿을 때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고전15:3-4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한동안 부활을 믿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던 것도 주님이 이미 여러 차례 십자가의 일과 부활에 대한 예고의 말씀을 믿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주류라고 항상 티격태격하는 적대적인 사이였는데,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협력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종파 모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주류라고 한 것은 다 거짓되고, 헛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리새파는 자기들이 가장 경건한 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 구약성경 외에 추가로 조상들의 유전을 신앙과 생활의 한 표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지 않았고, 주님이 책망하신 것처럼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자들이었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계급의 사람들로 헤롯 왕가와 로마인들에게 호의적이며, 일반 서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바리새인들과 교리적으로 부딪히는 적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거부하면서 구약성경의 권위를 일부만 인정하고 대부분 부정하였습니다.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도는 성경대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성경이 약속한 복을 받게 되고 생명의 부활과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요, YMCA의 운동을 일으켰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일제의 무수한 협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가 작전을 바꿔서 그를 돈으로 매수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루는 총독부가 보낸 한 청년이 돈 뭉치를 들고 이상재 선생을 찾아와서 선생 앞에 돈 뭉치를 건네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 정도의 돈이면 남은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 시골에나 가서 조용하게 사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 사람아, 나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생각은 버리게' 그러자 청년은 선생을 겁내 줄 생각으로 넌지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인도의 간디나 영국의 처칠은 100세를 산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으름장입니다. 그러자 선생은 대뜸 말하기를 '이 사람아!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죽지를 말아야지, 죽기는 왜 죽어?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거야' 이 청년이 그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선생님, 불로초까지 먹었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겠다고 장담합니까? 무슨 불사약이라도 드셨습니까?'   선생이 대답을 합니다. '그럼, 먹었지! 나는 너희 천황도 먹지 못했던 불사약을 먹었지. 그래서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걸세. 나는 살아서 너희 나라 일본이 망하고 군국주의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 것 거야' 청년은 웃긴다는 듯이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이상재 선생은 옆에 놓여 있는 성경을 손에 쥐고서는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그 약일세. 이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일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었네. 그러니 그까짓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게' 그러면서 그 청년을 쫓아내 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믿는 자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신뢰 하고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성도는 장차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서 신명기 25:5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좀 과장해서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어었다가 죽어 후사에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는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이 질문은 예수를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서 억지로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유치한 질문이었습니다. 창세기 38:8에 보면 유대 민족의 풍속 중에는 가문의 대를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맡아 후사를 얻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풍속은 아랍민족, 힌두교도, 일본인 등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30절의 말씀에서 "부활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5:42-49절에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썩지 않는 몸,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영생하는 몸입니다. 전혀 새로워진 몸입니다. 연못 바닥에 잠자리 애벌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 줄기를 타고 물 위로 올라 간 수많은 친구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는 누구든지 일단 물 위로 올라 간 후에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 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 와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물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도저히 불가능 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도의 부활도 애벌레와 같이 탈바꿈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두 번째 답변은 31-32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 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말은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데, 과거에는 조상의 하나님, 또는 역사적인 하나님이란 뜻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산 자의 하나님으로 더 의미를 새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과거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은 육은 비록 죽었지만 지금도 하나님나라에 가서 살아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찌 그 분들 뿐이겠습니까? 앞서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다 영원한 천국에 가서 살아계십니다. 이 분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는 산자의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의 하나님으로 살아 계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현재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다고 믿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 아버지이심을 믿게 될 때 인생길이 괴로워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고, 험한 시험과 환난이 와도 두렵지 않게 살 수 있고, 좌절과 절망이란 있을 수 없고, 마음을 바로 가지고 의롭게 살게 되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현재로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고 믿고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2.말씀을 신뢰하여 믿을 때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3.성도는 장차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시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멘.

신앙생활의 4대 요소 (잠 23:22-25)


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이 시간에 “신앙생활의 4대 요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을 말씀 드리기 앞서 본문의 부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모공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혹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인륜의 기본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성경도 십계명 중 인간에 관한 계명 중에서 첫 번째로 부모공경을 말씀했습니다.


즉 인간의 삶에서 그 어떤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보다 앞설 뿐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계명입니다. 즉 인간이라면 최소한 꼭 지켜야 할 법이란 말입니다. 다른 죄도 사람 구실 못하는 것이지만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야 말로 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므로 성도의 구실을 하려면 잘해야 하려면 닦아야 할 신앙생활의 기초들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 공경을 잘하는 것입니다.


22절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부모공경이 자녀의 마땅한 의무라는 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강조되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삶의 오랜 경험을 통해 자녀가 의지할만한 지혜를 갖춘 자일 뿐 아니라 부모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고 사랑을 베푼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조건이 없습니다. 부모가 가졌든 못 가졌든,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건강하든 약하시든, 존경 받을 만하든 그렇지 못하든, 나에게 잘했든 못했든 부모공경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려면 이 기초가 잘 닦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공경하는데 다른 이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6:4-5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마22:37-40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다하여 라는 말씀을 첨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섬기는 훈련이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예배생활이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정기예배는 물론 매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잘못되어 있으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든지 영적으로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받들기 때문에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기초가 잘되어 있지 않으면 겉만 교인인 일명 나이롱 신자가 되고 맙니다.


2. 신앙생활의 기초는 말씀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23절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믿음 없는 사람들은 진리 즉 믿음을 잠시 저버리더라도 우선 육신적인 무엇을 성취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범하고 양심을 범하는데 그렇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하시는 일을 보세요. 우리 믿음을 훈련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값진 수업료를 내게 하십니까? 때로는 우리 재물을 치기도 하시고, 건강을 치기도 하시고, 우리 명예나 권세나 더 귀중한 것도 치시잖아요? 상상할 수 없는 수업료를 지불하게 하시면서 믿음의 기초를 닦게 하십니다. 이것이 진리를 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닦아야 할 신앙생활의 기초는 말씀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를 잘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2:2에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어린이가 어머니 젖을 먹지 않으면 자랄 수 없음같이 우리가 말씀을 먹지 않으면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23:12에 욥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음식은 거를지라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거르지 않았습니다.


이 삶의 기초만 잘 닦이면 삶은 탄탄대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119:165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로다” 했기 때문입니다. 시1:3에도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말씀대로 사는데 왜 막히겠습니까?


믿음의 삶도 형통합니다. 우리가 어둠에서 방황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천국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험하다 했는데 이 천국 길이 왜 험합니까? 천국길이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방황과 핍박과 어려움을 말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알 때 예수를 구주로 모실 수 있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고, 성경을 알 때 구원의 문제 승리의 문제 풍성의 문제 내세의 문제 등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해 주니까 하나님도 구원도 천국도 확신하고 신앙개념이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성경 보는 일을 우리의 중요한 신앙의 기초초 삼아야 합니다.


3. 신앙생활의 기초는 날마다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24절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부모는 의롭고 지혜로운 자녀를 기뻐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의인은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죄와 싸우되 자신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박해를 받고 죽기까지 의를 외쳤습니다.


의인이 되자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철저히 출애굽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한 발 세상에 한 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라도 용납하실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배울 때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엡4:19-20에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죄 지어도 좋다는 식으로 배우지 말란 말입니다.


의인이란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불의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나 어떤 핍박 속에서도 내가 피흘리고 죽기까지라도 믿음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엎드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죄와 상관이 새로워 져야 합니다(히9:28).


어느 정도해야 합니까? 죄 씻음은 물론이고 나아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함과 같이 우리들도 형제를 온전하게 사랑할 만큼 성장해야 합니다. 벧전1:22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 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그러므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IS가 이집트의 기독교인 125명을 납치했는데 언제 어떻게 처형할지 모릅니다. 이 기사를 보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뽑아 흡입해 가시는 것처럼 간절하게 감동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풀려날지 순교를 당할지 모르지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악에서 떠나 내가 변화되는 일에 열중해야 합니다. 성결함을 날마다 구하시기 바랍니다. 형제는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뒤를 따라갈 수 있는 믿음에 도달하기까지 새로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의로운 변화 없이는 영적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 신앙생활의 기초는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25절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자식의 기본적인 의무는 부모를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즐겁게 하되 특별히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강조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머니가 사랑으로 대해주니까 어머니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벧전5:13에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에서 교회를 개역성경 난하주에 여자라고 했지만, 혹 다른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영의 양식을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위로합니다. 교회는 양우리와 같습니다. 우리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미를 기쁘게 하듯 교회생활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로 알고 존중하고 그 법도를 지키며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일군으로 알고 따르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감정으로 교회를 대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 교회를 핍박할 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 주여 누구시니이까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4-5)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후에 딤전1: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정말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개인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못 되도 교회가 잘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하나님께서 버리시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몸담고 충성할 교회가 없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정을 주시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충실한 교회생활이 잘 안되면 모든 것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하신 반석이십니다. 이 예수의 기초 위에 견고히 서십시다. 기초가 흔들리면 어떤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경 읽기와 성결 추구와 교회생활의 기초를 튼튼히 하십시다. 그래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성도의 구실을 다 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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