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도우셨으니 여기부터 / 삼상 7:3-12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는 풀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양을 치는 목동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습관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목동들이 양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풀을 뜯어 먹게 합니다. 날마다 해질 무렵이면 산 위에 있는 목동은 산밑에 있는 목동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그 이름을 찬양합시다>
이 소리는 조용한 공기를 타고 산 아래로 널리 퍼지게 됩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다른 목동들도 그 소리를 듣고 응답합니다.
<주 여호와를 찬양합시다. 주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모두가 하산을 시작합니다.
한낮에 양을 치면서 목동들은 한가로이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피리를 불기도 합니다. 때로는 갑자기 비가 쏟아 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양들을 급히 나무 아래로 피신시키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갑자기 나타난 맹수와 싸우기도 합니다. 때로는 낭떨어지도 떨어진 양을 구하기 위하여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하루를 지내다 보면 갖가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그들의 한결같은 구호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루를 마감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목동들입니다.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가장 훌륭한 사사였습니다. 당시는 왕이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사사가 다스렸습니다. 말하자면 사무엘은 당시 왕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사가 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우상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사무엘의 이런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신을 버렸습니다. 아스다롯 신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두 미스바로 모였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는 출발 예배를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여서 같이 하나님만 찬양하며 율법을 공부하며 경건하게 살기로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블레셋 백성들이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모여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오해를 하였습니다. 자기 나라를 쳐들어 오려고 작전을 짜고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공격을 당하기 전에 공격하자. 당하기 전에 해치우자>
그래서 먼저 쳐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갑자기 당하는 일에 당황하였습니다. 무기가 없었습니다. 당하여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무기는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 7;8)

사무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기도하였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가 오는 데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우박을 맞으며 블레셋 군대는 이리 저리 피하였습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그 곳에 돌로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붙였습니다. 에벤에셀이라는 뜻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 7;12)입니다.
한국의 크리스천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10분 이하>라고 대답한 사람이 남자 응답자의 60%, 여자 응답자의 50%였습니다.
크리스챤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24시간 중 10분도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가 무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도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쳐들어 오지 못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에그론과 가드 땅까지 회복하였습니다(삼상 7;14)
오늘 우리는 사무엘이 한 말 에벤에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말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가요?

1. 어제를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금년 수많은 어려움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습니다. 온 국민들이 다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나는 지난 주간 뉴질란드에 있었습니다. 오크란드에 한국인이 약 25,000명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워서 지금은 8,000명 남았습니다. 대부은 한국인을 중심으로 음식점이나 선물가게를 하는 데 한국 관광객이 안 오거나 와도 물건을 적게 사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에벤에셀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마지막 주일을 맞아야 합니다.


2. 오늘도 도우실 것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은 여기까지만 도우시고 여기서부터는 안 도우시고 멀리 가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신 것은 여기에서도 도우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어제까지 도우신 것은 오늘도 도우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도 도우셨습니다. 광야에서도 숫한 어려움속에서도 도우셨습니다. 물이 없어도 물을 주시고, 먹을 것이 없어도 만나를 주셨습니다. 옷이 없어도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더워도 구름기둥으로 막아 주셨습니다. 추워도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어제도 도우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여기에서 블레셋이 쳐들어 올 때 도우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여기부터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오늘부터도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제리 레빈이라고 하는 50대의 미국 해외 특파원이 있었습니다. 그의 간증입니다. 그는 레바논에서 취재를 하다가 회교도들에게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독방에 가두었습니다.
대개 독방에 감금된 사람들은 한 달이 채 못되어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역시 독방에 감금된 지 며칠이 지나자 정신착란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갑자기 아내 생각이 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평소 그에게 늘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요. 어려움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그래서 그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여기까지 내가 지낸 것은 아내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도우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도우실 것이다. 내가 왜 외롭게 지내는가?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지>
그는 하나님께 말을 걸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 정말 살아 계시다면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이 감옥 안에서도 저를 돌봐주시고 나가게 하옵소서>
무신론자가 독방에 갇히니까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안과 두려움, 공포 속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마음속에 평강이 넘쳐났습니다. 기쁨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가둬 놓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도 없어지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1년 후 그가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 때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정상이었습니다. 무신론은 완전히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오늘도 도와 주십니다. 이것이 에벤에셀입니다.

3. 내일도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에벤에셀,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여기서부터도 영원토록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미스바에서 생긴 일입니다. 미스바에서 도우신 오늘의 하나님은 그 후 에그론, 가드까지 땅을 빼앗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미스바까지는 사막지대입니다. 그러나 에그론, 가드는 곡창지대입니다. 이스라엘 땅중에 가장 기름진 땅에 속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도우시고 오늘도 도우시더니 내일은 더 좋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에벤에셀,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여기서부터도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사람의 두 사건을 늘 마음속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세 불꽃이고 다른 하나는 요나 고래뱃속입니다. 이 두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가시떨기에 불꽃속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계속 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불이 이스라엘에 떨어져도 이스라엘을 타게는 못 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스라엘을 타버리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불과 재앙도 이스라엘을 재로 만들 수는 없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래가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요나가 고래뱃속에 들어갔습니다. 3일 3야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래는 요나를 소화시키지 못 하였습니다. 결국은 토해놓고 말았습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삼켜도 소화시키지 못 할 것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삼켜도 먹어 치우지는 못 할 것입니다. 튀어나오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굳굳한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백성입니다. 그리고 요나 백성입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오늘도 돕고 영원토록 도우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벤에셀이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특허를 1000종 이상 낸 발명왕이 에디슨(Thomas Alva Edison.1847-1931)입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말 중에 하나가 이 말입니다.
<과거는 모두 잊었다. 나는 미래만 보고 있다>
그는 이미 받은 특허만으로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들어오는 돈만으로도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어제 받은 특허는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계속 개발하여 나갔습니다. 수많은 특허를 냈습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어으면 오늘도 있을 것이고 내일도 있을 것을 믿었습니다. 어제까지 그렇게 하나님이 좋은 지혜를 주었으니 오늘도 주시고 내일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개발하여 나갔습니다.
그래서 에디슨은 세계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체격도 작고 공부도 못 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크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부모조차 시원치 않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좋지 않은 과거는 깨끗하게 잊어버리자. 오늘 내게 맡겨진 일은 반드시 오늘 해내고야 만다>
이런 인생관이었습니다. 그는 남북전쟁 당시 책임감과 용맹성을 발휘하였습니다.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18 대 대통령인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1822~1885)입니다.
오늘을 지켜주신 하나님은 내일도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벤에셀, 여기까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은 3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2. 하나님은 오늘도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3. 여기서부터도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오늘은 금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까지 도우셨으니 내일도 거기까지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 분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러시아가 낳은 문호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1918~ )은 지금 미국으로 망명와서 살고 있습니다. <이반 데디소비치의 하루>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솔제니친은 러시아에 공산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20년대에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 때 공산혁명이 일어나 수많은 이들이 끌려 가 죽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며 자라났습니다. 그 후 50년 동안 러시아는 6천만 명이 죽였습니다. 닭 6,000만 마리도 대단한 것입니다. KGB 쏘련 비밀 경찰에 끌려 가면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는 한 평생 연구 과제였습니다.
<어째서 쏘련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생겼을 가?>
솔제니친은 미국에 와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 미국의 템플턴 대학에서의 강연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 끔찍한 공산 혁명이 왜 러시아에서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 이유는 쏘련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 버린 것이 그런 끔찍한 일의 원인이라고 당당하게 강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셨고, 도와 주시고 계시고, 또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그 분이 아니면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한 부부가 착실히 교회에 출석을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만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교회에 나가면 십일조를 내야 한데요. 헌금도 해야 한데요....>
남편이 말했습니다.
<우리까지 낼 필요 없어. 다른 사람들이나 내라고 해....>
그 집은 옷 장사를 하는 집이었습니다. 그 동안 번 돈을 은행에 넣으면 세금 추적을 받기에 꼬깃꼬깃 접어서 집 안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들어 그릇에 담아서 부엌에 둔 돈도, 양말 속에 감춰 둔 돈도 다 귀신같이 찾아 갔습니다. 도대체 돈을 어디다 감추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을 찾다가 남편은 돈을 쓰레기통 밑에 두꺼운 종이를 깔고 그 밑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아무리 도둑이 들어도 쓰레통 밑바닥까지 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돈만 벌면 쓰레통 밑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가장 안정한 곳같았습니다. 그리고 1년이 무사히 지났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출장을 갔습니다. 한 마디하였습니다.
<문 단속 잘해요>
그런데 아내는 남편이 쓰레기통 속에 돈을 넣어 두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쓰레기차가 오니까 남편의 서재에 있던 쓰레기통을 들고 나가서 통째로 부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돌아온 남편은 쓰레기통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쓰레기통에 있던 쓰레기 다 어쨌어?>
<쓰레기차가 왔기에 부어 버렸죠>
<그 안에는 10만 불이 들었단 말이야!>
그래서 그 부부는 쓰레기장으로 황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돈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산더미같은 쓰레기 어디에 그 돈이 있는 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나는 금년 마지막으로 외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도와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내년도도 도와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여, 어디계십니까! 사무엘상 4:1-11

 

서론

 

암흑의 사사시대가 끝나는 시간이 서서히 다가옵니다. 삼백 년이 넘는 긴 어둠의 터널이 한 줄기 빛 앞에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한나의 간절하며 뜨거운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의 탄생은 여명의 신호였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엘리의 눈은 어두웠고, 그 아들들의 범죄는 더욱 짙은 어둠을 드리웠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벨리알의 아들처럼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삼상 2:12).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던 하나님의 역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찾아와 폭탄선언을 합니다. 그 집안에 노인이 사라지며, 자손들은 젊어서 죽을 것이며, 두 아들은 같은 날 죽을 것이요, 대대로 이어지는 제사장 직분도 끝날 것이라 합니다(삼상 2:27-36).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낱낱이 알려줍니다.

 

어두움의 사사시대와 제사장 집안의 타락과 범죄,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 사무엘이 등장하자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쟁은 어두움의 시대와 새 시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믿음의 실질이 없고 형식만 남은 예배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와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제: 교회는 형식만 남은 예배를 개혁하여 온전한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1. 전쟁의 시작

2. 전쟁의 진행

3. 전쟁의 결과

 

본론

 

1. 전쟁의 시작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태생적으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은 먼 옛날, 함의 아들 미스라임에게서 난 후예였습니다(10:14).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함의 후손 블레셋과 적대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때에 잠시 언약을 맺기도 했지만 그들은 생명의 복음을 열열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21:22-34, 26). 그러다가 블레셋은 성경 역사에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블레셋은 다시금 소환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을 치는 막대기로 사용했습니다(3:1-6). 사사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습니다(3:31). 블레셋이 다시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기는 바로 사사 삼손 때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불충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의 손에 던졌습니다(13:1). 사사 삼손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된 대업은 다윗에 이르러 마무리 되었습니다(13:5, 삼하 6:17-25, 8:1, 23:9-17).

 

사사시대가 끝날 무렵,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삼손이 활동시기와 사무엘이 활동하던 시기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아무튼 사사 삼손은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언약 백성들을 해방시켰고 이스라엘은 조금씩 회복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 가운데 선지자로 인정된다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삼상 3:19-4:1).

 

여호와의 계시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지고, 특별히 선지자 사무엘이 실로에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실로가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성막이 실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을 쳤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될 때의 형편은 이러했습니다.

 

어두운 사사시대가 끝나가고, 여호와의 빛이 사무엘을 통하여 비추는 때였습니다. 옛 시대의 인물인 엘리 집안에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지고, 새 시대의 선지자 사무엘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시기였습니다. 사사 삼손을 통하여 블레셋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용기도 얻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블레셋을 무찌를 수도 있다는 용기를 갖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벤에셀 곁에 진을, 블레셋은 아벡에 진을 치고 서로 대치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 비참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사천 명이나 죽은 이 전쟁의 패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거하는 족속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7:1-5). 그러니 블레셋을 정복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는 잘못이 아닙니다. 사사 삼갈, 삼손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위대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 정복을 통해 가나안 정복은 칼과 창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전쟁임을 가르쳤습니다.

 

전쟁으로 블레셋을 정복해야 된다는 당위는 옳습니다. 그러나 명분이 옳다고 해서 실제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리고를 정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이 성을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모든 실패에는 분명 그 원인이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이제 그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사무엘 상 1-3장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에벤에셀 전투가 시작되기 전, 제사장 엘리 집안의 영적 상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한나와 사무엘의 출생은 엘리 집안과 대조를 이룹니다. 어두운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서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산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열망하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두 가지 큰 흐름은 에벤에셀 전투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산 불순종의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대적을 물리치는 승리는 무조건 전쟁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언약 백성들의 승리는 오직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 충실할 때 가능합니다. 곧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지 대적과의 전투력 문제가 아닙니다. 에벤에셀 전투에 임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살펴야 했습니다. 엘리의 눈이 어두워지며, 그 자녀들의 타락한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더 이상 사라진 모습은 마치 이스라엘이 믿음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와 성도들은 날마다 죄와 사단의 권세와 싸우는 일상을 보냅니다. 우리가 죄와 더불어 싸울 때, 때로는 실패하며 때로는 승리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사단의 권세로부터 자유하며 승리를 거두는 비결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며 그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응답할 때,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는 불충성하면서 죄와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고, 참 예배자의 삶을 살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하지 못합니다. 참 예배자가 되어 원수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2. 전쟁의 진행

 

사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장로들이 모여 긴급회의를 했습니다. 패배의 원인을 궁리해 보았지만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장로들은 드디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자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장로들의 의견에 찬성했고, 급히 실로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도 언약궤와 함께 전쟁터로 왔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제사장입니다.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백성들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얼마나 큰 함성이었든지 땅이 울릴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사기는 충천했고,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블레셋 진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말대로 이루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알듯이 이스라엘은 무참히 패배했습니다.

 

장로들의 해법은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해법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진실이 살아 숨 쉽니다. 언약궤를 가져오겠다는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성찰이 담겼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장로들의 생각을 따라 가 볼 필요는 있습니다. 백성들도 장로들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그들의 찬성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 재앙으로 애굽을 파멸시킨 여호와 하나님을 떠 올렸습니다. 애굽에서의 마지막 밤에 뿌려진 죽음의 그림자와 그 아침에 애굽 전역에 처절히 울려 퍼진 울음소리들. 바다에 길이 열리고 바로의 전차들이 맥없이 죽어간 순간들. 시내 산꼭대기에서 으르렁 거리던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 언약궤가 없어도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기 백성들에게 승리를 선물했다는 생각. 장로들과 백성들은 바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모세가 힘주어 외치던 소리도 기억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올라 움직이기 시작하고, 여호와의 궤가 서서히 이동할 때,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우렁차게 선포했습니다(10:35). 그 당당하고 우렁찬 포효에 백성들은 전율했습니다.

 

그 어떤 성읍이나 강력한 군대도 여호와의 궤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질 것이라 백성들은 기억의 저편을 더듬었습니다. 다름 아닌, 미디안 다섯 왕의 목을 끊고 발람을 죽일 때에 성소의 기구와 제사장 비느하스의 나팔 소리를 생각해 냈습니다. 요단 동편에 거하던 아모리 족의 왕 시혼과 옥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여호와의 능력도 기억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40년 만에 드디어 광야를 통과하여 요단 강을 건널 때에 제사장들의 어께 위에 앉은 하나님의 보좌, 바로 그 언약궤의 행진을 어찌 그들이 잊겠습니까.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무너뜨린 일주일간의 행렬에 핵심적 역할을 한 황금 빛 언약궤는 어떻습니까. 조상들의 함성과 함께 무너진 여리고가 지금도 폐허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드디어 300여년 기나긴 시간 잊혀 사라진 것처럼 취급 받은 실로의 언약궤를 떠 올렸습니다. 그 황금 빛 언약궤가 블레셋을 무참히 무너뜨릴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들의 기억은 정확했고, 백성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쟁을 위해 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삼백 여년의 사사시대를 흐른 사상.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언약궤가 무슨 큰 능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삼백 여년 사사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바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언약 백성들의 능력과 대적을 물리치는 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함으로 생깁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그 마음으로는 결코 승리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여기에서 넘어졌습니다. 마치 중세의 교회가 세례의 물이나 성찬의 포도주 자체가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양 여긴 것과 같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누리지는 않으면서 예배 시간만 채우면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형식주의.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실로의 언약궤를 가져와야 될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실로의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지름길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바로 사무엘을 통해 확인합니다.

 

사무엘은 온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우상을 버리고 미스바에서 언약을 갱신했습니다(삼상 7:3-11). 미스바에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멈추고, 회개하며, 금식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곧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야말로 전쟁 승리의 비결입니다. 예배는 언약 갱신이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먼저 지키지 않으면서 복을 먼저 받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은 언약궤를 아주 의도적으로 여호와의 언약궤”,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 “하나님의 언약궤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두 돌 판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보좌인 궤를 철저하게 언약의 관점에서 호칭합니다. 심지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라는 긴 호칭은 이토록 풍성히 언약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강력합니다.

 

그룹만군은 군사용어입니다. 강국과 약소국이 서로 언약을 맺은 후에 약소국이 어려움을 당하면 강국은 그 약소국을 군사적으로 반드시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기꺼이 자기 백성들을 도와야 합니다. 여호와의 도움은 천사들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힘찬 공격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언약궤 자체가 이미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칩니다. “언약그리고 ”. 약속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입니다(4:19-22). 그 믿음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10:35)라고 외친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10:36)라고 간청한들 어찌 하나님께서 응답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약궤는 하나님이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도구입니다. 언약궤 앞에 백성이 선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늘 예배합니다. 그 일은 잘하는 것이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예배가 형식만 남고 내용은 사라진 것이 아닌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인 언약궤가 우리에게 있다고 모두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예배에 참여했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예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드려지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려도 그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를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의 예배를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그리하여 진리의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예배 자들이 됩시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13-17)

 

3. 전쟁의 결과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오자 백성들은 환호했습니다. 땅이 진동할 정도로 큰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블레셋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안 블레셋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이라 했습니다(본문 8). 이 모습은 그동안의 블레셋과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블레셋은 대부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으로 오기 며칠 전에도 이스라엘 군사 사천 명이나 죽였습니다. 하지만 언약궤 때문에 분위기는 반전되었고, 전쟁은 끝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 진에서는 승리의 환호가 울려 퍼지고, 반대편 블레셋의 진영에서는 두려움의 공포가 드리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힘을 내었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자고 외쳤습니다. 다시 전투는 시작되었고 결말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패배했습니다. 삼만 명의 보병이 죽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삼만 명이 칼에 죽으면 전투장은 피로 물듭니다. 그 처참한 광경을 어떻게 눈을 뜨고 보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언약궤는 빼앗겼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두 사람도 죽었습니다. 실로에 있던 엘리도 죽었습니다. 언약궤가 빼앗긴 것과 자식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았다가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해산을 하며 이가봇이라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엘리 집안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제사장 엘리에게 예언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삼상 2:27-36). 사무엘에게 주어진 계시대로 되었습니다(삼상 3:10-14).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직분자의 범죄는 이렇듯 무섭고 두려운 결말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은 무엇을 행하는 직분입니까? 제사를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제사는 오늘날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 자신도, 그 아들들도 여호와를 예배하는 일을 타락시키고 파괴하니, 그들이 파괴되고 부서졌습니다. 이렇듯 예배를 온전히 드리지 못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행위입니다. 누구든지 교회의 예배를 공격하고, 거룩한 예배를 타락케 만들면, 하나님은 반드시 보복하십니다.

 

끝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묵상하겠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빼앗긴 일을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그렇게 빼앗기도록 두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보좌인 언약궤가 다곤의 신전에서 행한 일과 블레셋의 도시들에 내린 재앙을 보십시오(삼상 5:1-9). 결코 여호와의 능력 없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음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스스로 대적의 손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상과 한편이 되어 죄와 비참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친히 원수의 포로가 되셨습니다(78:60-61).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배를 파괴시키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불쌍한 자기 백성들, 죄의 종이 되어 허덕이는 가련한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의 희생을 보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포로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과 죽음을 떠 올립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기꺼이 사단의 권세인 죽음 아래 들어가셨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 예배의 근거요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이 은혜에 감격하며, 이 은혜를 찬송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예배는 시대를 읽는 좌표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예배가 건강하면 교회가 힘 있게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전진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파괴되고 타락하면 그 시대의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공격받고 세상의 포로가 됩니다. 교회는 형식만 남은 예배를 개혁하여 온전한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갖 핍박과 환난을 인내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능력 있는 공동체로 우뚝 서는 우리 고신교회가 됩시다. - 아멘 -.

 

 

 

 

 

 


성도가 지닐 영적 무기 삼상17:41-54, 6:10-20

 

어린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앞에 큰 돌 덩이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니는데 지장이 될 것 같다. 내가 저 돌을 치우고 가야겠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잠깐만 저 나무 그늘 밑에 가서 쉬고 계세요. 제가 저 돌을 치울 때까지요'

 

그리고 그 돌을 치우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지렛대를 사용하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있는 힘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오시더니 물었습니다. '안 되니?' '. 방법을 다 써보았어요.'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제일 쉬운 방법을 잊고 있단다.' '아버지! 그 방법이 뭐예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에게 도와 달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데...' 아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군요. 아버지! 도와 주세요.' 아버지의 도움으로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의 이름 권세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검이 있습니다. 기도의 특권이 있습니다.

 

성도의 싸움은 우리 지혜와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사단은 우리 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힘이 강합니다. 그러나 사단 보다 더 큰 힘을 가진 분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무장을 하고 영적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가 지닐 영적 무기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가 지닐 영적 무기는,

 

 

1.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구약 본문의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 시대에 블레셋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엘라 골자기에 나가 대결한 지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 중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심히 도전함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전쟁에 나간 아들들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음식을 전하고 오라며 전쟁터로 심부름을 내보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했을 때 골리앗이 나와서 한참 시위하며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고 협박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마음에 치솟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사울 왕 앞에서 자원하여 이스라엘의 대표로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골리앗과 대결하여 물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넘어뜨리고 칼로 그 목을 베는 대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의 군인 중 허다한 역전의 용사들도 다 겁에 질려 못했던 일을 어린 소년 다윗이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구약 본문 삼상17: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라는 말씀에서 그가 하나님을 신뢰 하는 믿음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고 환경을 바라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을 믿고 귀로 듣는 것을 믿고 손으로 만지는 환경을 믿습니다. 여건이 좋을 때는 자신감이 넘치고, 담대함이 있고, 믿음도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어려워지면 쉽게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람이나 환경을 보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 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신약 본문에도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기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며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방패란 우리의 믿음이 사탄의 화전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패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단이 불화살로 믿는 자들을 공격해 올 때 이것을 방어하는 무기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사탄이 아무리 결정적인 화전을 쏘아대도 그것을 능히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먼저,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32) 낙심은 불신앙에서 나옵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10명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심하고 낙담한 마음이 들어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애급의 종살이에서 구해 낸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들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 다니엘, 모세, 여호수아, 갈렙, 요나, 다윗, 히스기야, 느헤미야, 바울, 스데반 등 등의 믿음의 사람들은 아무리 나뿐 환경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한 것입니다. 다윗은 거의 3미터에 육박하는 골리앗을 보면서 '저렇게 큰 장수를 내가 이까짓 물맷돌을 가지고 쓰러뜨릴 수 있을까?' ‘내가 괜히 호기를 부리다가 망신당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어 능히 이기게 하시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46-47절에서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충분한 분량의 준비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충만한 믿음은 결코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소리로 "믿습니다."라고 외치기만 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결실하기까지는 충분한 기도와 연단과 주님과의 동행하는 경험과 각가지 은혜 체험 등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소중하고, 더 많은 유익을 줍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담대한 것은 과거 그의 신앙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그가 사울에게 한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36-37절에서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했습니다.

 

다윗은 물매 돌을 하나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다섯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것은 분명 하나입니다만 다윗은 충분한 다섯 개의 물매 돌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이처럼 충분히 예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성령 안에서 무시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신약 본문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디어져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이 자라가기 위해서는 충실한 예배 생활과 성경 공부, 성도의 교제와 봉사활동도 필요하고, 영적으로 무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적극적으로 영적인 싸움에 승리하고 자신을 지키며, 다른 생명도 악한 영으로부터 구원하고 살리는 데까지 이르려면 능력 있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윗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시편에 보면 영감어린 기도와 찬양으로 되어 있어 많은 은혜와 위로와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 말씀을 보면 예수님도 항상 기도에 힘을 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벽에도 기도 하셨고,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기도 하셨고, 때로 밤을 새워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기도에 실패하면 시험에 들게 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승리하였고, 제자들은 기도에 실패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막으려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눅21:34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이 생활의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방탕하지 않고, 술 마시지 않아도 마음이 둔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해진다는 것은 영적으로 감각이 무디어지고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넘치게 되는데, 기도하지 않게 되면 영적으로 둔하여져 근심, 원망, 두려움, 염려가 떠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늘 깨어 기도하게 되면 어떤 환경을 만나도 두려움과 염려가 물러나고 기쁨과 평강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멕스웰 화이트 목사가 쓴 <보혈의 능력>이라는 책에 보면 목사님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살았는데, 계속되는 독일 폭격기의 공습으로 인하여 몹시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특히 밤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매일 밤잠자리에 들기 전에 예수님의 보혈로 그가 살던 집과 가족을 덮어달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매일 밤 한 번도 깨지 않고 편안히 누워서 잘 수 있었다. 그 때 우리를 보호해 주셨던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너무도 생생해서 마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폭탄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방공호 속에서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우리 집 중심으로 반경 1,2Km 이내에 13개의 폭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우리 집 건물의 일부가 사소한 피해를 입었을 뿐 가족 모두가 무사했다." 성도가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 하게 될 때 성도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단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 주시면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하나님 말씀의 검입니다.

 

신약 본문 엡6:14-15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했습니다. 여기 서서란 말은 군인들의 전투태세를 말합니다. 마귀와의 싸움을 싸울 때 전쟁에 임하는 군인처럼 임전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허리입니다. 사람이 허리에 띠를 띠지 않으면 몸에 힘을 쓰기 어렵습니다.

 

진리란 사탄과의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입니다. 사탄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면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탄과의 투쟁에 이 진리의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성도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함을 받은 자라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때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뜻을 안 다음에 하나님 말씀에 항상 순종하기를 힘을 씀으로 주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사단을 공격하는 성령의 검으로 성도의 무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며 기도 하시다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주님은 신명기에 있는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살면서 마귀의 시험이 올 때 주님처럼 진리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불신의 생각, 바른 길에서 떠나게 하는 유혹을 심어주는 마귀는 떠나가라!” 하며 대적해야 합니다. 성도가 말씀으로 무장하게 되면 유혹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단,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어 사람을 변화시켜 새롭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말씀을 증거 할 때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믿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멀린 캐더로스 목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느 날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을 때,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불쌍하게만 보였습니다. ‘불쌍한 사람들, 바깥세상의 재미있는 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창고에서 밤을 허비하려고 는 하지 않을 텐데!’

 

찬송이 시작됐고 그는 찬송가를 부르는 시늉이라도 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바로 자신의 귀에 바짝 대고서 말하는 무거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뭐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그는 뒤를 돌아보고서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렸습니다. "너는 오늘밤 나를 믿기로 결심해야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자동적으로 말했습니다. "뭐라고?" "반드시 늦고 말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릴까? 내가 헛소리를 들은 것인가? 그러나 그 음성은 확실히 들렸습니다. 하나님이다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바로 나를 알고 계시구나! 그는 섬광처럼 깨달았습니다. ‘왜 이전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을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내가 지금까지 갈구 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바로 내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그 순간 그는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예배 시간에, 기도 하다가, 성경 읽다가, 길을 걷다가,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 중에 있다가, 밤에 잠을 자다가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시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조롱하던 생활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에 복종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검 곧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가 지닐 영적 무기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도가 지닐 영적 무기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성령 안에서 무시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검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다윗 (삼상161-23)

 

성경에서 다윗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그리고 역대서라는 기나긴 분량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윗이 쓴 시편을 비롯하여,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까지 합하면, 구약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다윗에 대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은 구약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흥케 하고 번영케 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합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가장 아름다운 명칭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명칭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던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주신 이스라엘 민족 역시 잘 지도하고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영광스러운 임금을 항상 다윗으로 꼽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다윗왕 때의 영광을 회복하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던 믿음과 겸손의 왕 다윗,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었고, 백성들에게도 가장 많은 존경을 받았던,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윗을 통해서 그의 후손으로 메시야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다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첫 페이지 마태복음 1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신약성경의 첫 번째 시작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에도 보면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천사들이 전할 때 (1:32)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라고 선포핳니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를 보면 (11:1)(23;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세워진다.’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즉 이새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대단히 영광스럽고 놀라운 한 인물이 탄생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다윗의 혈통을 타고 영광스러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오신다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주님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준비하셨고, 이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쓰임 받았던 사람이 다윗인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이 처음 성경에 등장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왕위를 폐하시기로 결정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면서 부터 다윗의 등장은 시작됩니다.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리게 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와 법규를 어기고,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사울왕이 해버립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 왕을 대신할 사람을 찾기 시작하십니다. 131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사무엘 선지자가 말합니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불순종과 더불어 회개할지 모르는 사울 왕을 버리기로 작정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 백성들의 지도자로 삼으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시던중, 하나님은 마침내, 다윗이라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십니다.

 

시편 8920절에 보면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시려고 두루 살펴보시다가, 마침내 하나님이 다윗을 찾으시고, 그에게 거룩한 기름을 부었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신다고 할 때찾는다는 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쓰여 집니다. 하나는 구원의 차원쓰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명의 차원에서입니다. 구원의 차원이라 함은 하나님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와,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로 영혼에 대한 구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고분 분토하는 목자의 모습, 집나간 탕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 이것이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찾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라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찾음과 더불어 또 하나는 소명 적 차원에서의 찾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로만 삼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찾아 구원시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사람들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 중에서 주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의 마음에 맞는 일꾼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분에 마음에 맞는 사람, 그분의 사명을 감당할 주의 일꾼들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도 이처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귀한 주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다윗의 이야기를 배웁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다윗을 찾아서 선택한 이유를 살펴봄으로써, 저와 여러분 역시도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귀한 일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이유를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적인 측면에서이며 또 하나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신적인 측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뻐하신 뜻대로 다윗을 선택하셨다고 이야기할 때 그 의미는 다윗이 뛰어나고 훌륭해서 그 조건만 보시고 그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적 조건을 초월해서 그분의 주권대로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16장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왕을 이을 사람들 선택하라고 하셨고, 그 사람을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라는 사람의 집에가서 이새의 아들들을 한명한명 살펴 보머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이 누구인지를 봅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보는 와중에 엘리압이라는 이새의 장자를 보고 이 사람이 하나님이 기름부으실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무엘의 눈으로 볼 때 엘리압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사무엘의 마음을 아시고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7절에서 하나님이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이새의 장자 엘리압이 아마 사울처럼 외모적으로 준수하고 듬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볼 때 용모와 신장에 뛰어났고, 장자였던 엘리압을 사울의 후계자로 뽑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압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무엘에게 이런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는 이 사실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조건 이 인간적인 조건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봅니다. 이새의 아들들은 총 8명이었습니다. 8명 가운데 제일 마지막인 말째 다윗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삼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나중에 보시면 나오지만, 다윗은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된 일은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 다윗에게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 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림을 받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과 개성, 은사를 가지고 주님과 주님이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야할 것은 사람들의 조건과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시 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인간들의 상식을 깨뜨리십니다. “당연히 저 사람이면 하나님의 일을 능히 잘 감당할 수 있을거야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하나님은 쓰시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저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에게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의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 (27-29)“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쓰시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는 세상적으로 능력과 지혜 뛰어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를 미약하고 약한 것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있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27-29 ). 만일 세상적으로 능력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본래 똑똑하니까저 사람은 본시 뛰어났으니까 그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인간적인 조건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하나님 앞에 놀랍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선생님을 만나면 모두 변하는데,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비밀이 무엇입니까?’이때 아시시의 성자 프랜시스는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 땅 위 모서리 한구석에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눈동자는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저 사람 이다. 저를 통해서 나의 강함과 나의 지혜로움과 나의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다윗을 주목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새조차도 실제로 다윗을 제외시켜 놓고 다른 아들들을 사무엘에게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민족의 선지자 사무엘이 집안에 왔는데, 다윗은 저 멀리 양이나 치는 곳에 보내버렸습니다.집 안에서도 큰 사랑과 대접을 받지 못하던 그러한 사람이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고 관심을 주지 않는 다윗에게 시선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선택하셔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셔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때때로 인간적인 선택 기준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를 따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당신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부족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이유요, 그분의 백성으로써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이 은혜라고 부릅니다. 은혜란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럼에도 부룩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받는 축복과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럴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는데 하나님 앞에 이러한 축복과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 이러한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하고, 늘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적인 측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때 먼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시고 쓰신 것이, 다윗의 능력이 출중하고, 그가 훌륭한 공로나 업적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선택받은 것,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분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인간 적인 측면을 간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다윗을 선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윗에게는 하나님 앞에 선택을 받을 만한 인격적인 자질이 있었다는 사실도 동시에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신적인 측면과 동시에 인간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사울을 버리시기로 작정하고 사람을 찾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내가 찾으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의 자질인격적인 특성을 이 다윗이라는 한 목동에게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13:22)“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아직 그 자질은 개발되거나 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다윗 속에 움직이고 있는커다란 가능성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찾아 그를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13절과 14절에서는 다윗과 사울왕이 모습이 비교되어 나옵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선택받아 하나님 앞에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된 순간, 사울왕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합니다. 악령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하는 사울왕을 위해서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택하여 사울왕의 치료를 돕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선택을 받아 궁중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이때부터 다윗이 궁중 출입을 하기 시작합니다. 궁중 안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눈과 귀로 나라 돌아가는 일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다윗이 사람들에 의해서 선택을 받아 궁중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보면 다윗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나와 있습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이 말씀은 다윗에 관한 인물 묘사입니다. “악기를 잘 타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사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한 사람"이라고 다른 이들이 다윗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편들을 작성했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자와 곰과 싸워서 양떼를 지키는 용기도 가졌습니다. 또한 그는 구변과 지혜가 뛰어나 사람들 잘 관리하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허락 하시는 놀라운 지혜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준수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소개합니다. 준수라는 말은 단순히 인간적인 매력만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어떤 자질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사울왕 역시도 외모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내면의 아름다운 인격적인 성품과 자질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의 겸손함을 잃어버리고, 내면의 아름다운을 더럽히는 때까지, 타락해 버려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인생의 말년에 까지 하나님 앞에 겸손함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증거함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다윗의 아름다운 인간적 측면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의 은혜안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로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마음과 믿음이 준수하고 아름다운 사람, 사람들이 볼 때도, 진정 하나님을 믿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러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분의 마음에 맞는 사람,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람들이 볼 때, 정말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증거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 다윗처럼 아름답고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사무엘상16)(삼상161-23)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사무엘 상하 강해설교)|작성자 섬김의 교회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삼상26:5-12, 12:14-21

기독교인으로 애국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김구 선생을 죽이려고 권총을 가지고 김구 선생을 만나러 오다가 독립군에게 잡혔습니다. 독립군이 이 청년을 죽이기 전에 김구 선생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을 본 김구 선생은 맨발로 뛰어나와 그 청년을 얼싸안고 이 객지에서 또 우리 조국 동포를 만났군요. 반갑습니다. 이 김구를 만나러 왔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구 선생을 죽이려고 한 자기를 죽일 줄 알았는데 맨발벗고 뛰어나와서 반갑다고 끌어안고 뺨을 비비는 김구 선생을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은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날로 김구 선생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면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자임을 보여주는 삶이 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은 사단에 속한자의 모습입니다.

 

구약 본문 삼상26:5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했습니다. 다윗을 잡기 위해 사울 왕이 군사들을 이끌고 진을 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울 왕은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하고 준수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한 때 성령을 받고 예언까지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백성들이 왕 세우기를 원하자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을 때 이웃나라와 전쟁이 일어나 위기를 만나기도 했는데, 위기의 때 다윗이 나타나 불레셋의 골리앗 장수를 대적하여 이김으로 다윗은 민족을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 공신이요, 사울 자신을 위기에서 구원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나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연전연승하여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자기의 딸과 결혼하게 하여 사위를 삼기도 했습니다.

사울 왕은 왕이 되고 난 후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가 되었고,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역사했던 성령이 떠나고 대신 악신이 그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악신이 그의 마음을 주장하게 되니 다윗이 행한 선을 선으로 갚는 자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선을 악으로 갚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탈 때도 창을 던져 죽이려 했고, 함께 밥을 먹는 도중에도 창을 던져 죽이려 했으며, 자객을 시켜 죽이려고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군사를 동원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가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사단 마귀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역사하고, 시기 질투하는 자의 마음에 역사하여 선을 악으로 갚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게 합니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고, 전쟁에 패하고 자기 칼로 자기 배를 찔러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마귀의 길을 가게 되면 결국 패배와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가 역사하니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대해주신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단의 종노릇 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불의의 도구로 쓰임 받다가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미국 한 마을에서 한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의 형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굉장히 많은 공로를 세워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은 주지사를 찾아가 자기 동생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주지사는 그의 동생을 위해 탄원하는 형의 공로를 참작하여 그 동생의 죄를 사면해 주었습니다.

양복 안주머니에 주지사의 사면장을 받아 넣은 형은 곧바로 감방 안에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가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만일 사면을 받아서 나간다면 뭘 하겠느냐?" 그러자 동생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하였습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감방을 나간다면, 우선!!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그 판사 놈을 찾아가 죽일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던 놈을 찾아서 그 녀석도 총을 쏴 죽일거야!" 형은 자기 양복 주머니 안에 사면장을 넣어둔 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버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악함을 버리고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천사도 가지고 왔던 하나님의 축복을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사단에게 속한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번한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중에는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2.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은 보통 세상 사람들이 취하는 방식입니다.

 

삼상 26:8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했습니다. 밤에 다윗이 장군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의 진영에 들어갔더니 마침 지키던 군인들과 사울 왕이 다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비새는 하나님이 원수 갚을 기회를 주신 것이니 내가 당장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겠다고 청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비새는 세상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비새의 말은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는 보복 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 취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의 태도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 본문 롬12: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했습니다. 예수님은 마5:44-48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하셨습니다.

본문 롬12:17-18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했습니다. 화평에 대한 교훈은 주님이 가르치신 팔복 중에서 일곱 번째에 나오는 복입니다. 5: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성경에는 화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진정한 화평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고 불화의 모든 근본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하는데 이 응답은 바로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 부부는 결혼을 한 후 인도에 정착하여 교회 뒤뜰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세 자녀를 낳아 기르며 나환자 병원과 교회 일을 해오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두 아들은 성경연구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힌두교 광신도로 보이는 폭도들이 캠프를 덮쳐 이들이 자고 있던 차에 불을 질렀고, 그들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폭도들은 곧 쫓겨났지만 그들은 새까만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집에 머무르고 있던 선교사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딸을 안으며 절망이 가득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돌보던 나환자들과 그곳의 원주민들은 종교에 상관없이 장례식에 참가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인도를 떠나지 않고 남편이 생전에 몸 받쳤던 나환자를 돌보기 위해 남은 인생을 다 바치겠노라고 다짐하며 말했습니다. “매우 힘들고 혼란스러웠지만 남편을 죽인 이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편과 아이들이 천국에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지요. 남편은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수마저 용서해야 하는 사랑의 향기를 지녀야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도우시고 사랑을 부어주시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모든 허물과 죄를 덮을 수 있습니다. 원수가 있다면 용서하며 기도하므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사단을 좇아 사는 사람이 선을 악으로 갚는다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입니다. 구약 본문에 보면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왔을 때 아비새 장군이 죽이자고 명령만 내리라고 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고 하면서 사울 왕의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왔습니다. 건너편 산으로 와서는 사울 왕을 지키던 아브넬 장군과 부하들을 왜 왕을 지키지 못했느냐고 도리어 책망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에게 간곡히 말하기를 '이 종을 어찌하여 쫓으시나이까? 죽여 마땅한 죄가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할 때 사울 왕은 일시나마 자신의 잘 못을 인정하고 내가 어리석은 일을 행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네게 복이 있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고 말하면서 뒤 돌아갔습니다.

사울 왕은 전에도 다윗을 죽이려고 쫒아 다니다가 오히려 죽을 번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사울 왕은 자기를 살려준 다윗에게 대하여 이렇게 응답 했었습니다. 삼상24:17-19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를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어떻게 자신을 괴롭게 하며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울 왕을 용서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다윗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분노할 줄을 알고 용서할 줄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그는 계속 용서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오직 `하나님 중심' 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윗은 어떤 일을 행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중심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행하였습니다. 사울 왕을 살려주는 것도, 그리고 그를 용서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 중심으로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삶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다윗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먼저 정치적인 입지를 극복하게 했습니다.

그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 왔을 때, 이스라엘 나라의 온 여인들이 사울은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선호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심은 그가 사울 왕을 죽이기만 하면 그는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록 생명을 구하기 위한 쫓김을 당하고 있음에도 결코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정치적인 출세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없으면 그는 아주 쉽게 정적인 사울 왕을 죽였을 것입니다.

 

다음에 사람들의 일반적인 판단을 극복했습니다.

본문에서 아비새 장군이 사울을 죽이라 권고 했고, 삼상24:4에서 그를 따르던 자들이 하나님이 원수 갚을 기회를 주셨노라 말하면서 사울을 죽이기를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었기에 충분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외에 다른 것도 하나님의 중심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신약 본문 롬12:19-20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했는데, 다윗은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자기가 죽이지 아니하고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도 수용했습니다.

본문 삼상26:19에서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했습니다. 이 말은 만일 자신이 사울 왕에게 쫓김을 당하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은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사울 왕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중심에 있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었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을 보고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윗과 같은 이런 마음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한 어머니가 5살짜리 외아들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동네의 또래친구들에게 얻어맞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얻어맞고 울면서 집으로 오면 그 집에서는 날카로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골목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아들! 바보같이 매일 매만 맞고 다녀. 당장 나가서 때리고 들어 와!! 다시는 얻어맞고 들어 와서 울면 가만 안 둬. 얼른 나가서 때리고 와!“

 

자신의 아들이 친구에게 얻어맞고 우는 모습을 기분 좋게 생각할 어머니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응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친구와 싸워서 얻어맞은 것도 속이 상하는데 엄마에게까지 꾸중을 듣고 얻어맞으면 그 어린 마음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럴 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다윗 같은 신앙의 사람은 아마 이렇게 반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는 아이를 꼭 안아 주며 "어머나, 우리 아들, 얼마나 아플까? 가엾구나!“ "아들아, 그래도 넌 참 훌륭했단다. 네가 끝까지 친구를 때리지 않고 참은 건 아주 훌륭한 행동이야. 남을 아프게 하는 일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란다. 우리 그 친구를 용서해 주자.“ 이처럼 말하면서 어린 아이의 마음속에 복수심과 원망을 사랑으로 녹여 주고, 오히려 용서해 줌으로써 진정한 승자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다투고 나면 끝까지 말을 안 하면서 요리조리 골탕을 먹이며 복수를 하는 아내나 남편의 모습이나 우리 집에 조금 손해를 끼친 이웃 사람을 향해 미움과 원망을 품고 적대시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이들은 그대로 배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인간의 모든 한계를 초월한 온유함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만큼' ‘선으로 악을 이길 만큼온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고 이 세상도 바로 그러한 사람들 때문에 아름답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은 사단에 속한자의 모습입니다.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은 보통 세상 사람들이 취하는 방식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아멘.



감동이 있는 신앙 삼상19:18-24, 7:24-35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이아가라는 매우 거대한 폭포로 물이 떨어지는 곳은 거센 급류를 이루지만 그 지점으로부터 10미터 전까지는 물살이 잔잔해 충분히 조심만 한다면 아무 문제없이 배를 타고 탐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잘 몰랐던 한 관광객들이 잔잔한 물살만 보고는 안심한 채 아무 경계를 하지 않고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폭포 위를 기구를 타고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그 상황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10m만 더 가면 급류가 있소, 어서 배를 멈춰요!”

 

하지만 배에 있는 관광객들은 이렇게 잔잔한데 급류가 있을 리가 없다며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떠내려갔습니다. 10m가 지나고 나서야 자신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손쓸 도리가 없게 되고 나서였습니다. 결국 급류에 휩쓸려 애석하게도 관광객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신호가 오듯이 우리의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무감각 하여 말씀을 통해 주시는 경고, 성령이 주시는 깨우침과 감동에 곧 반응을 하지 않으면 금방 회복되어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감동이 있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감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어떤 이는 현대를 삼무시대(三無時代)라고 말합니다. 무감각, 무감동, 무감사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받은 은혜를 잊게 되어 감동이 없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기쁨도, 감동도, 감사도 없고 이웃에 대한 배려나 사랑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의 경우와 같이 됩니다. 사울 왕은 본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보면 사울이 자기 집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기 위하여 사환을 데리고 여러 곳으로 다니던 중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산당에서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무엘은 그 전날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기스의 아들 사울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 주신대로 사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곧 잃어버린 암나귀는 집에 돌아왔다는 것과 그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전한 후 사울을 따로 불러 그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입을 맞추며 왕이 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삼상 10;1).

 

그 후 사울은 성령에 감동되어 선지자의 무리와 함께 예언을 하였습니다(삼상 10:10). 그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고 사무엘의 손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으로 은총을 받은 자입니다. 한때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예언을 하는 등 성령의 은사를 크게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된 다음에 시험에 들어 교만해 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임했던 성령의 은혜와 감동이 떠나게 되니 악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믿음에서 떠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늪으로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6:4-6).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던 사울이 그 지위에서 버림을 받고 패가망신하는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악신에게 사로잡힌 사울은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대적하는 일만 하고 다녔습니다. 충신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단창을 던지기도 하고(삼상 18:11), 본문에도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여러 차례 보내고, 급기야는 자신이 이곳에 왔습니다. 그 곳에서 다시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까지 했지만 다시 악령에 사로잡혀 계속 군사를 풀어 토벌 작전을 펴기도 하였습니다(삼상 24:2). 그는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찾아가서 다윗을 은신시키고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제사장과 그의 가족 팔십 오명을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습니다(삼상 22:18). 이토록 시험에 들어 날뛰는 사울이야말로 문제를 지닌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신약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를 장터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에 비유하셨습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소꿉장난을 합니다. 혼인잔치 놀이를 하면서 피리를 불지만 아이들은 춤을 추지 않습니다. 저쪽에서는 장례식 놀이를 하기위해 애곡을 하지만 누구하나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무감각한 죽은 신앙을 가지게 되니 세례 요한이나 주님의 말씀과 하시는 일을 보고 회개하여 은혜를 받기는커녕 계속 시비만 걸면서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본문 눅7:33-34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했습니다.

 

이 시대는 주님 당시의 시대 보다 더욱 영적 무감각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교통이 발달되고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가고 싶은 곳이 많아졌습니다. 문화와 문명이 발달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피리를 불지만 피리 소리는 요란한 노래방의 소리에 묻히고 맙니다. 애곡을 하지만 영화나 텔레비전의 드라마에 마음을 뺏기고 맙니다. 강단에서는 수없이 말씀이 전파되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신앙으로 은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는 감동이 있는 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감동이 있는 성도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다윗 역시 어려서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도구로 귀히 쓰임을 받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는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감동으로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가 되고, 거듭나 새사람이 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자들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게 무엇인가 막힌 것이 있고, 뒤얽힌 것이 있으면 기도가 안 됩니다. 기도가 안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거나,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거나, 기도하려 해도 기도의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거나, 입에서 침이 바짝바짝 마르게 됩니다. 감동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 받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거나, 시험에 들어 받은 은혜를 소멸했거나 하게 되면 하나님과 교제가 막히고, 소통이 되지 않게 됩니다. 그런 마음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무엇보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는 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은밀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속이는 것이 소통을 가로막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속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본문 32절에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그때부터 감동이 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말씀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말씀 한마디 한 마디가 마음에 전율을 일으키면서 떨림이 옵니다. 말씀의 은혜가 가슴을 벅차게 하면서 아멘! 아멘!’을 연발하게 합니다. 눈물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기꺼이 드릴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감동이 은혜입니다. 감동이 축복입니다. 감동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로 이런 감동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찬양해야 합니다.

32절에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라는 말씀은 찬양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피리를 불면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면 춤을 추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메말라 버리면 마음이 차가워져 기쁨도 감사도 찬송도 사라지게 됩니다. 예배드릴 때 찬송 부를 때에도 입을 꼭 다물고 찬송을 부르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찬송에 기쁨이 있고, 힘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이러한 찬송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찬송은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찬송은 위기를 돌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22: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했고, 34:1-2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했습니다. 이 시편들은 다윗이 고난 중에 지은 시편들입니다. 다윗이 곤고한 중에 세상과 온통 단절된 가운데에서도 찬송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찬송은 고난을 이기는 힘입니다. 찬송은 시험을 이기는 길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소중한 통로입니다.

 

셋째로 참 예배와 헌신입니다.

성도가 예배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감격을 맛보게 되고 하늘 소망이 넘치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주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 하는 자가 되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는 1980년 폐수종으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는 입원하여 있던 한 달 동안 소리 지르고 찾아오는 방문객들 앞에서 발악을 하였습니다. 자유에 대한 글과 수필을 써서 큰 명성을 얻었던 그가 죽음 앞에서 실로 너무 비참하여 졌습니다. 그는 그 해 416일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프랑스의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 하면서 죽음에서 자유를 외친 그가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 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한 독자가 신문에 투고하기를 왜 그가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였는가 하면 그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반면 독일 고백교회의 본 훼퍼 목사는 나치에 반대하다 감옥에 갇혀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간수가 그를 부르자 감옥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웃으며 이제 저는 죽음을 향해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저는 아주 유쾌합니다. 여러 동지들 천국에서 즐거운 만남을 가집시다.” 라고 하면서 나갔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이나 그 어떤 것도 그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감동이 있는 산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라마나욧은 성령 충만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라마 나욧은 어떤 곳입니까? “라마는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 “나욧은 가르치는 곳, 학교의 교사(校舍) 즉 건물이란 뜻입니다. 라마 나욧은 사무엘 선지자가 운영하는 라마에 있는 선지학교입니다. 이곳은 신앙의 뿌리가 있는 곳입니다. 사무엘의 부모 엘가나와 한나가 그곳에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1:1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진 신앙의 인물입니다. 한나의 기도로 낳은 사무엘은 성령 충만한 이스라엘의 기둥 같은 인물로 그 곳에 사무엘과 함께한 선지자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20). 그들은 사무엘과 뜻을 같이 하여 그와 더불어 기도하며 제단을 쌓고, 성령에 감동하여 예언을 하는 등 신령한 삶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곳은 성령 충만한 곳이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삼상19:20"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다시 사자를 보내었을 때도 성령에 사로잡혔고 세 번째 보낸 사자들도 전과 똑같이 성령에 감동되어 선지자들의 무리와 함께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울 왕 자신까지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예언을 하였으며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니라."는 속담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24). 이곳에 오는 자들마다 성령의 감동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주도하는 기관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의 성향이나 그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면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고전 12:4-6"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 했습니다. 성령이 주도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신비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라마 나욧은 성령에 감동된 무리들이 모인 곳으로 은혜가 충만한 현장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피난 온 다윗의 무리나, 악신에 사로 잡혀 미친 듯이 날뛰던 사울의 무리나, 모두가 다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부터 쫓는 자도 쫓기는 자도 구별 없이 모두가 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령한 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 모습이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성령 충만한 교회를 이루는 성도로 삽시다. 정리합니다.

 

1.감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2.성도는 감동이 있는 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찬송함으로, 참 예배와 헌신을 통해 감동 있는 신앙을 가집시다.

 

3.라마나욧은 성령 충만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아멘.

 

 


말씀을 받는 바른 자세 삼상3:10-18, 9:1-11

 

유머 가운데 사오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사오정은 온몸이 쭈글쭈글 주름으로 덮여 있습니다. 특히 귀가 주름으로 덮여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언제나 동문서답을 하는 것이 그의 특징입니다. 신세대들은 이 시리즈를 통해 기성세대가 가는귀먹은 사오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시리즈 가운데 이런 유머들이 있습니다. *사오정이 드디어 보청기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 중에 맨 뒤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선생님 : . 거기 맨 뒤! 필기 안하고 뭐해? 사오정 : 안 보여서요. 선생님 : 그래? 니 눈 몇인데? 사오정 : 제 눈은 둘인데여. 선생님 : 아니, 아니. 그거 말고 니 눈이 얼마냐고? 사오정 : 제 눈은 안 파는데여. 선생님 : ~! 니 눈이 얼마나 나쁘냐고? 사오정 : 선생님 제 눈은 ... 나쁘고 착하고 그런 거 없는데요. *다음은 국민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국민과 상관없이 따로 노는 국회를 풍자한 것입니다. 레스토랑에 간 사오정 친구들은 '나는 콜라' '나는 주스'라며 각각 다른 메뉴를 주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맨 나중에 주문하는 사오정은 "여기 커피 셋이요"라고 제멋대로 주문하였습니다. *또 이런 유머도 있습니다. 사오정이 오토바이 뒤에 애인을 태우고 신나게 달리자 뒤에 타고 있던 애인이 "나 무서워"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사오정은 더욱 속도를 높였습니다. 다시 애인이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자 사오정이 하는 말. "나도 사랑해" 제가 서두에 사오정 이야기를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 성도들이 가는 귀 먹은 사오정처럼 말씀의 뜻과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오해하거나 말씀과 단절 되어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성도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받는 바른 자세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바른 자세는

 

1.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경청은 집중하여 말씀을 듣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집중하여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취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청취는 말씀에 대한 갈망과 사모함이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청취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의 생각도 마음도 알 수 없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4: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했습니다. 구약 본문의 엘리 제사장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하게 여기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임하는 은총의 모습이 아니라 말씀이 희귀하여 영의 양식과 은혜가 고갈되어 암흑과 같은 상황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내 속에 좌와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이 차 있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청취하는 자세로는 바른 지식도, 순종하는 마음도 가질 수 없어 좋은 자세가 안입니다.

 

또한 내 관점에서만 말씀을 듣는 것 역시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관점에서 보게 되면 사오정처럼 됩니다. 잘 못 알아듣고, 잘 못 이해하고, 동문서답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한 신자의 모습으로, 불순종하는 신자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 신자는 아담과 하와처럼 사단의 말을 듣고 미혹에 넘어가 시험에 들게 되고, 사울 왕처럼 불순종에 대한 책망을 받을 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자가 됩니다. 요나처럼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환란을 자초하게 되거나 발람 선지자처럼 자기와 남을 망하게 하며 사는 자가 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사울도 자기 관점에만 말씀을 대하다 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이단의 괴수로 오해 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성도는 말씀을 잘 경청하여 들어야 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말씀을 주실 때 어린 사무엘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어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찾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의 권고를 듣고서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에 문제가 생긴 사람이 스승의 충고를 청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충고를 가슴 깊이 받아들였고, 한 달 후에 와서는 자기 아내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스승이 미소를 띠우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집에 가서, 부인이 말하지 않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시오. 침묵의 체로 거르지 않은 말은 사실 소음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때 진정한 소통의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들려옵니다.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경청할 때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고, 깨닫게 되어 그 말씀이 나의생각과 말과 행동이 되어 전해질 때 진정한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청취하거나 내 관점으로만 듣지 말고 잘 경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갖지 못하면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런 자는

 

주님을 불신하거나 대적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믿는 열심 있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단의 괴수고 예수를 믿는 자들 역시 잘 못된 길을 가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앞장섰던 사람으로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가지고 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혈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가고 있는 도중에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비취면서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누구시냐고 묻는 그의 물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답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나름대로 아무리 선하게 산다 해도 불신앙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오히려 대적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주님을 노엽게 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사울의 그런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되었습니까? 그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죄를 더하여 가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을 때 늘 그 때 일을 생각하며 나는 죄인 중에도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이 확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 했다면 자식들이 잘 못된 길로 갈 때 단호한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 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일을 함부로 자행했겠습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다면 어떻게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자를 범하는 죄를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갖지 못하여 가정이 망하고, 나라가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두 아들은 전쟁에서 죽고, 엘리는 충격의 소식을 듣고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되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 모든 소식을 듣고 배가 아파 아들을 낳고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자는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자가 됩니다.

사무엘은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엘리 제사장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을 사랑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제사장으로, 기도하는 자로, 왕을 세우는 일을 감당하는 자 등으로 귀한 역할을 감당하는 나라의 기둥 같은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바로 듣을 수 있는 귀가 열리고,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 주님이 자신의 구주가 되심을 깨닫고 믿는 자가 되었고, 그의 입이 열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박해자가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가 되었고, 복음의 훼방 자가 복음의 전파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신뢰 하고 믿어 주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말씀에 대한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었다 해도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순종하지 못하거나, 들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지 못하고 잊거나 말씀과 관계없이 살 때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경청하여 들을 뿐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순종에는 겸손과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10)라고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종의 역할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철저하게 주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착하고 진실 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사무엘이 바로 이러한 종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잠언 3:34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성도는 항상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주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4:6). 자신을 낮추면 주님이 도리어 높여주십니다(4:10).

 

홉니와 비느하스는 겸손함도 진실함도 없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대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지만 교만하고 거짓으로 가득 찬자들이었기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순종에는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참아 말하기 어려운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듣기 좋은 말은 하기 쉬운데, 상대방이 들어서 불쾌하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씀을 받은 자는 들은 그대로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받은 자들의 본분입니다. 어린 사무엘의 말을 들은 엘리야는 그 말씀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듣기 싫어도 불신앙의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암 환자에게 충격이 될까봐 보호자들이 사실을 본인에게 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숨기기보다 그 사실을 알려 병을 담대히 대처 하게 해서 병을 이기게 하거나, 잘 수용해서 자신의 삶을 잘 정리하게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안수 하여 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워낙 유명한 박해자였기에 그에 대한 의심이 풀리지 않았으나 자기 생각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이 지시한 곳으로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사흘 동안 보지 못하던 눈이 다시 열려 보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순종으로 사울에게 새로운 인생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인내로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앞으로 사울이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행9:15-16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사역 가운데 당한 고난의 목록 가운데 고전 4:9-13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는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 인내로 달려갈 길을 다 마쳤습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과 진실함이 있는 순종, 내 생각 버리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내로 달려갈 길 다 마치고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말씀을 받는 바른 자세는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수용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취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또한 내 관점에서만 말씀을 듣는 것 역시 좋은 자세가 안입니다.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불신하거나 대적하는 자로 살게 되고, 주님을 노엽게 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자는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자가 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의 자세를 가지자 했습니다. 순종에는 겸손과 진실이 있어야 하고, 또한 순종에는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인내로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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