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자 욘3:1-10, 17:10-15

 

구약 본문인 요나서의 배경을 보면 요나는 사십년 이상 이스라엘을 다스린 여로보암 왕 2세 때(B.C 793-753)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린 그 기간은 앗수르 제국에서는 아다드-니라리(Adad-Nirari) 3, 살만에셀(Shalmaneser) 4, 아슈르-(Ashur-dan) 3세가 연이어 다스린 시기와 일치합니다. 살만에셀 3세 말년부터 앗수르의 황금기가 끝나고, 그의 죽음 이후 아들들의 시대를 거치며 내분과 반란이 일어나고 침체기로 들어섰습니다.

 

이스라엘 주변국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히는 나라들 중에는 앗수르, 바벨론, 모압, 암몬, 미디안, 불레셋과 같은 민족들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채찍으로 사용 하셨기에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주변의 이런 나라들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의 큰 성읍 니느웨는 세계적인 도시였고, 악의 도시였습니다.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1:2)는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이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도록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싫어하고 피한 것도 그들이 망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약 본문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말씀을 전하실 때나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지역은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고, 어떤 지역에서는 환영을 받고 말씀을 잘 받아드려 믿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자는,

 

1.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사는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지 못하면 잘못을 지적하고 죄를 책망하면 싫어하고, 미워하며, 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은혜로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자들은 책망하시는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달아 회개합니다. 요나서의 말씀을 보면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된 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먼저 요나의 회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하라는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가기 위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그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중 엄청난 풍랑을 만났을 때 배 안에 있는 자들에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 일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1:12)하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그는 결국은 바다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거기서도 요나를 은총의 손길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생명을 구원해 주시는 은총을 깨달은 요나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라고 다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불순종으로 음부의 고통과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로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로 작정했을 때 3일 만에 극적으로 구원함을 받아 사명 감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에 백성들의 회개입니다. 본문 욘3: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했습니다. 요나가 회개하고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요나 자신도 믿기지 않는 백성들의 놀라운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대를 이어가며 죄를 계속 쌓아오던 니느웨 백성이 요나의 단 하루의 선포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고 회개한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여리고성에 살았던 기생 라합도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룻도 시모가 전해준 말을 듣고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어머니의 나라가 나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고백했으며,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도 여종의 말을 듣고 믿음이 생겨 엘리사를 만나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 역시 요나가 전해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사는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회개입니다. 백성들의 회개운동의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즉시 백성들의 회개운동에 동참을 했습니다.(6-9) 본문에 보면 왕은 대신들과 더불어 회개하며 금식을 선포하는데 심지어는 짐승들에게까지도 먹을 것을 주지 말고 금식시키라고 하였습니다. 참 멋있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니느웨의 회개 운동은 이방인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전도자 요나의 회개와 말씀을 선포한 순종, 백성들의 회개, 왕의 회개로 이어진 것입니다.

 

남 탓 하지 않고 이런 회개로 인해 죄악으로 관영한 니느웨 성을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대신 뜻을 돌이켜 그 성에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회개가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할 때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와 내 가정, 내 민족이 죄로 인해 심판을 받지 않고 사는 길, 은총을 받는 길은 회개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회개 운동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말씀을 가까이 하고 간절함으로 말씀을 받아 믿음이 성장합니다.

 

기독교와 말씀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가 말씀에 근거한 바른 지식의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며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어 큰 시련을 만나게 되어도 낙심하게 되거나, 큰 영광을 얻게 되어도 교만하게 되거나 세상으로 기울지 아니하게 되며, 갑작스런 죽음에 이르게 되어도 소망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의 사람이 되고,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선한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의 승리자가 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은 어떻게 말씀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행17:11-12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에 대해 완고하거나 편견을 갖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모함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논쟁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훼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베뢰아인들은 너그럽고 부드러운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10:11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당시에 바울이나 실라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한 복음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유대교를 믿으면서 율법을 따르는 것과는 차이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 말도 그들에게는 생소한 말이었습니다. 그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예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 등등의 내용들이 지금까지 율법을 따라 살던 사람들에게는 이해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들처럼 성경을 가까이 하다보면 믿음이 생기고 신앙 성장이 일어납니다. 유명한 성경학자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목사는 "나는 젊었을 때에는 주로 기적의 그 능력을 느끼기에 힘썼다. 장년기에 이르러서는 성취된 예언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두었다. 노경에 들어와서는 내 속에 복음의 말씀이 무르익는 것을 찾아보고 크게 만족함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급한 사람아, 조용히 앉아서 욥과 교제하라. 완고한 사람아, 베드로와 모세의 기사를 자세히 읽으라. 유약한 사람아, 엘리야를 만나라. 마음의 노래가 없는 사람아, 다윗에게 들으라. 정치가가 된 사람아, 다니엘서를 읽으라. 실망과 암흑에 빠진 사람아, 이사야서를 읽어라. 마음이 차가 와진 사람아, 사랑의 사도를 가까이 하라. 신앙이 엷어진 자여, 바울을 주의해서 보라. 안일한 자리에 있는 자여, 야고보서를 잊지 말라. 장차 소망을 잃은 자여, 계시록에서 약속의 땅을 받도록 하라!" 우리 모두 말씀을 가까이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여 믿음의 성장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3.말씀을 전하여 남을 살리고 세우며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말씀 듣는 귀를 가지고 믿음이 생겨 믿음이 자라면 전도자가 됩니다. 복음을 전하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게 됩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요나는 자신이 전한 말씀을 인하여 니느웨 백성이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게 되므로 기뻐할 일인데, 도리어 매우 싫어하고 성을 내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조국 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수르에 대해 상처와 불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에게 박넝쿨 사건을 통해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계획을 깨우치십니다. 요나는 초막에 거쳐 하면서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는 박넝쿨로 크게 기뻐 하다가 주께서 벌레를 예비하여 다음 날 시들게 하시니 성을 내는 요나에게 네가 심지 않은 박넝쿨도 그렇게 아끼는데,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나 되는데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반문하셨습니다. 어쩌든 시기를 버리지 못한 요나의 전도로 니느웨는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는 귀가 열려 믿음을 가지게 되면 말씀을 통해 약속해 주시는 복을 받고 유익을 얻는 자들이 됩니다. *말씀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약 본문 12절에 바울 일행의 전도로 인하여 "그 가운데 믿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적지 아니하더라." 했습니다. 주님의 분부를 따라 복음을 전할 때 그 전하는 말씀을 듣고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10;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온전하게 됩니다. 딤후3:6-17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말씀은 죄를 책망하고 버리도록 이끄십니다. 말씀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주님의 온유 겸손한 성품을 닮게 하여 온전케 되도록 이끄십니다.

 

*말씀을 통해 선한 일을 하게 하는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 던 죠지 뮬러(George Mueller)의 전기를 읽어보면 3개월마다 한 번씩 성경 전체를 읽었다는 것이고, 일생 동안에 200번이나 성경을 정독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가 그에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힘이 어째서 이렇게 약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뮬러가 대답하는 말이 항상 성경을 읽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정독해 가면서 성경을 통하여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오천 명의 고아를 길러 내고 교육시키는 그런 위대한 일을 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믿는 자들을 성결케 만듭니다. 119:9에 보니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개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했습니다. 이 말씀 우리가 듣고 지킬 때에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이 죄 많은 땅 위에 성결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말씀과 가까이 하고 말씀으로 무르익고 말씀에 이끌림 받아 살 때에 우리는 죄를 멀리할 힘이 생기고 죄를 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고 성결한 모습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말씀은 지혜롭게 합니다. 119:105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장래의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잠시 후에 될 일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여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 사람들을 살리고 세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자는,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사는 길이 열립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간절함으로 말씀을 받아 믿음이 성장합니다.

 

.말씀을 전하여 남을 살리고 세우며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아멘.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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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설교

요 '나'가 문젭니다(4) : 삐치는 요나 (욘 3:10 - 욘 4:1-11)

< 그동안의 요나서 줄거리>

오늘 우리는 요나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복습하는 의미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요나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즉각적으로 반발했습니다.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던 요나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 나라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혀온 원수나라였던 앗수르 제국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습니다.
그런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니요,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이었던
다시스, 즉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타고서는 도주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탄 배에 큰 풍랑이 일어나 다 죽게 생겼습니다.
자기 때문에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난 것을 깨달은 요나는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시퍼런 바다 속에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삼야를
뒹구는 동안 요나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메시지를 듣고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각 순종했습니다.

변화된 요나가 사흘 길을 걸을 필요도 없이 겨우 하룻길을 걸으며
“앞으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외쳤더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 밑에 이름 없는 백성으로부터 위로 임금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거족적인 영적 대각성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자 왕은 칙령을 내렸습니다.
금식을 하되 사람만 하지말고 짐승도 금식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자신의 죄악에 대해 회개하되 짐승들에게도 베옷을 입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을 비롯해서 살아 움직이는 전 동물들에게 철저한 회개를 촉구한 것이지요!

자, 이렇게 거족적인 회개운동을 일으킨 니느웨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 10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았다는 말이지요!

사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죄악이 하늘 끝까지 사무쳐 있던 곳입니다.
나훔서 3장은 니느웨가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니느웨는 우상숭배가 창궐한 피의 도성이요,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이었습니다.

스바냐 2: 15은 니느웨 성의 죄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라고 외치는, 자만으로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 하면서 속으로 뽐내며 자아도취에 빠진 도시였습니다.
실제로 앗수르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의 약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온갖 약탈과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마저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욘 1: 2절의 말씀 그대로 마침내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던 것입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는 말이 있지요.
참으로 눈뜨고 그 광경을 볼 수 없다는 말인데,
꼭 니느웨 사람들을 두고 생겨난 말 같았습니다.

이렇게 진노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던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을 둘러보는 데에만 꼬박 사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요나는 그저
하룻길을 걸으며 외쳤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모든 죄악을 털어놓고 회개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려던 계획을 거두어들이셨습니다.
가증한 우상숭배가 넘쳐나던 이방 백성이요,
온갖 악독으로 부패하던 니느웨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도무지 민족과 국경을 몰랐던 것이지요!

<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반발>

자, 문제는 이 광경을 지켜본 요나가 보인 태도에 있습니다.
본문 4: 1절을 보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치 않으시고 건져주신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삐쳤습니다.
‘삐친다’는 말은 마음이 삐뚤어져 토라진다는 뜻이지요.
요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못마땅해 토라졌던 것입니다.
아니, 토라지고 삐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성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3장에서 요나는 하루 종일 니느웨 성을 돌아다니며
40일만 지나면 니느웨 성이 망한다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망하기는커녕, 아직 40일은커녕 며칠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토라진 가장 큰 이유는 자기의 메시지대로
되지 않고 정반대 결과가 일어났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망한다고 선포했는데 망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자기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일어났기 때문에 삐쳤던 것이지요!

여러분,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이 이다지도 어렵습니다.
고난의 바다 속에 풍덩 빠져 사방이 꽉 막히고 어두 침침한 무덤 속과 다를 바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밤을 뒹굴며 요나는 완전히 거듭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100% 변화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도 모르게 죽지 않은 옛 자아가 은근히 살아납니다.
비록 참마음으로 회개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교만과 욕심은 마치
손톱과 머리카락이 소리 없이 자라나듯이 우리 마음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사가 아닌 한, 한번 회개로 족하지 않습니다.
회개한 사람도 계속해서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를 좀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작정한 요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셔도 겸손히 수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자기가 외친 대로 되지 않고 거꾸로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에 투정을 부립니다.
자기 체면이 깎였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더욱 더 본질적인 문제는
요나의 편협한 민족주의 선민의식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으면
기뻐해야지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원망을 퍼부을 것은 또 뭡니까?
그만큼 요나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었던 민족
우월의식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심령 깊은 곳에 내재해 있는 편견과 고집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요나를 생각해보세요.
삼일삼야의 물고기 뱃속의 연단과 시련을 통과한 저
대 선지자 요나도 저렇거늘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요나를 보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 삐치고 성을 내던 요나는 급기야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기 보세요.
요나는 자기가 다시스 가는 배를 타고 서둘러 달아났던 이유도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하실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 시려던 재앙마저도 거두실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무작정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나라인 앗수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이지요!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셔서 외치기는 했지만
그들이 구원받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다는 태도가 아닙니까?

자, 그러면서 요나는 선지자로 해서는 안 될 아주 극단적인 말까지 합니다.
3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니, 자기 목숨을 거두어 달라는 청원이지요!

요나의 요 ‘나’는 이렇게도 깨어지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물고기 뱃속의 3일 체험 가지고서는 요나의 요 ‘나’가
깨어지는 것은 누구 말대로 ‘택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40일간 있다가 나온다고 해서 달라질까요?
인간으로서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사는 한 100%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4절을 보면 이런 요나의 철부지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지요!

자, 이렇게 삐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겠다고 난리를 치던
요나가 니느웨 성읍을 빠져나와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거기다가 초막을 지은 뒤, 그 그늘 아래 앉아
그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 볼 셈이었지요.

참 요나도 지독한 사람이 아닙니까?
이미 다시스로 가는 배를 잡아타고 도주할 때부터 알아봤고
물고기 뱃속에서 뒹굴 때도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니느웨 성읍이 혹시 자기가 선포한 그대로
망하지나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물고기 뱃속을 통과한 새 사람 요나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이것은 역으로 요나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만큼 이스라엘 선민의식과
앗수르 제국에 대한 증오심이 절절히 배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요나의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철부지 같은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 ‘박 넝쿨의 비유’를 통해서 요나를 깨우치시는 하나님>

4: 7-11절은 저 유명한 ‘박 넝쿨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그것이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요나를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사막 지대인 중동의 낮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기에 뭔가
조그만 그늘이 있어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박 넝쿨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요나의 머리에
그늘을 만들어서 더위를 피하게 해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렇게 기분 좋게 니느웨 성을 관망하던 요나에게 불편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씹어 쏠아버리니 이내 박 넝쿨이 시들고 말았습니다.
사막 뙤약볕에 그 박 넝쿨이 별 것 아니라고 할지라도 요나에게
큰 힘이 되었는데 그 박 넝쿨이 벌레 때문에 시들고 말았습니다.

자, 이렇게 그늘이 사라진 것도 괴로운 일인데 해가 뜨자마자
하나님께서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습니다.
여기서 동풍은 ‘시로코’(Sirocco)라고 하는 바람인데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으로서 일사병을 일으킬 정도로 뜨겁고 매서운 바람이라고 합니다.
시로코 동풍을 타고 불어오는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에
인정 사정없이 내리쬐니 요나는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8절에 보면 또 한 차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하고 울부짖습니다.
3절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내뱉은 것이고, 여기에서는 더위를 참지 못해서였습니다.
앞에서는 영적인 불만을, 그리고 여기에서는 육적인 불만을 각각 토로한 것이지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6-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박 넝쿨을 마련하신 분도 주 하나님이셨고,
벌레 한 마리를 마련하여서 박 넝쿨을 쏠아버리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모든 자연현상이 요나를 깨우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셨다는 것이지요!

자, 이와 같은 박 넝쿨 소동으로 인해 또 한 차례 토라지고 삐쳐서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응답하십니까?

9-11절이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묻습니다.
“이 박 넝쿨이 죽었다고 해서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왈, “옳다 뿐입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점잖게 가르치십니다.
“네가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버린 이 식물도 네가 그토록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 그것도 오른쪽 왼쪽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만
12만 명이나 되고 가축들도 수없이 많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여기 보세요.
하나님께서 ‘박 넝쿨’ 하나와 어린 아이만 12만 명이 넘는
‘니느웨’를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요나와 상관없이 하루살이처럼 스러져 간 박 넝쿨 하나만 가지고서도
사니 죽니 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네가 어린아이들만 12만 명 이상 사는
니느웨 성읍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며 책망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요나는 편협한 민족주의에 빠져서 인간 영혼의 중요성을 간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때 민족이나 국경을
훨씬 초월하신다는 구원의 우주적 보편성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요나의 요 ‘나’가 얼마나 형편없이 자기중심적인 편견과
이기심으로 뒤틀려 있었던가를 보여주지요!

< 또 다시 요 ‘나’가 문젭니다!>

이제 요나서의 결론을 내립니다.
또 다시 문제는 요 ‘나’에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보다는 일신의 안일부터 먼저 구하는 것이 요 ‘나’의 편협한 마음입니다.
박 넝쿨 하나 때문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생떼를 쓰는 요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요 ‘나’의 그릇된 이데올로기, 편협한 민족주의, 폐쇄적 영토주의,
이런 것들이 요 ‘나’를 사로잡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 없습니다!

요 ‘나’의 편견과 아집과 교만을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계획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요 ‘나’의 개똥철학과 이기심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세상을 판단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는 한 번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도 요 ‘나’의 안을 한 번 들여다보며, 다른 이들이
아니라 요 ‘나’부터 고치고 다듬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요 '나'가 문젭니다(3) : 외치는 요나 (욘 3:1-9)  펌  

< 요 '나'가 변화된 요나의 외침이 있기까지>
요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선민의식과 민족적 우월감으로 가득찼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습니다.
그리하여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문제는 요나가 탄 배에 미친 듯한 풍랑이 불어 닥쳤습니다.
배에 탄 사람이 꼼짝없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고요한 바다에 이 노도가 일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가리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털컥 걸려들었습니다.
요나는 이 모든 문제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 까닭에 생겨난
하나님의 징벌임을 깨닫고 자기를 들어 바다 속에 던져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을 깨닫고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한 것이지요.

바다 속에 내던져진 요나는, 그러나,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요나는 꼬박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서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합니다.
모든 구원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되돌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흘 낮밤을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한 요나를 다시 육지로 내보내셨습니다.

요 '나'의 아집과 교만과 편견과 불신앙 때문에 고난과 위기의
바다에 빠진 요나를 하나님은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고난과 위기이든지 간에 요 '나'의 잘못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솔직히 자인하고 그 징계를
달게 받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과 위기의 바다 한 가운데 풍덩
빠져 들어갈 때 절대로 그냥 내팽개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큰 물고기라는 피난처를 예비해두십니다!

그런데 그 큰 물고기 뱃속이 요나를 거듭나게 한 장소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요나의 고집 사납고 불순종적이었던 요 '나'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진 장소였습니다.
옛 자아가 산산조각이 나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장소였던 것이지요!

물고기 뱃속이라는 것이 사방이 막혀 있고 무덤처럼 어둡기만 합니다.
출구가 없이 답답하고 막막하고 절망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요 '나'가 변화되었습니다.
철저한 각성과 회개를 통하여 요나의 요 '나'는 예전의 요 '나'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칠흑같이 어둡기만 한 물고기 뱃속에서 절망이 소망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바꾸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요 '나'의 어리석음과 죄악 때문에 우리의 가정과 주변에
문제가 생길 때, 고난과 위기의 바다가 우리를 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물고기 뱃속은 고통과 연단의 세월을 의미합니다.
당장 그 어떤 해결책이나 출구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어두 침침하고 사방이 꽉 막힌 듯이 보이는
물고기 뱃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새사람으로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뜨거운 눈물과 철저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쓰실만한 그릇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삼일삼야라는 말처럼 요나가 정금처럼 연단이 되어서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물고기 뱃속의 연단은 저절로 끝이 납니다.

오늘 요 '나' 때문에 고난과 위기의 바다 한 가운데 빠져 허우적거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 큰 물고기 뱃속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평안한 길이 아니며, 오히려 절망스럽고 사방으로부터의
도움이 완전히 차단된 곳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우리는 진짜 신앙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요 '나'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옛 자아가 산산조각이 날 수 있습니다.
나의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는 삼일삼야가 끝나게 될 때,
큰 물고기는 마침내 우리를 다시금 세상의 뭍으로 뱉어낼 것입니다.
이제 물고기 뱃속의 연단이 완전히 끝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닙니다.
예전의 요 '나'는 전혀 새로운 요 '나'로 바뀌어지기 때문이지요!

< 요 '나'가 변화된 요나의 외침으로 일어난 니느웨의 기적>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물고기 뱃속의 시련과 연단을
통과한 요나는 전혀 새로운 요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고난의 바다에 빠져 그 어두컴컴한 물고기 뱃속의
시련과 연단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면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로 외쳤다고
할지라도 과연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마지못해, 억지로 말씀을 전하기 쉬웠을 테고
사람들의 반응 역시 시큰둥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꼬박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면서 눈물콧물
다 흘리며 깨어지고 부서진 요나가 외친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을 몰고 왔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무후무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할례 받지 못한, 하나님의 은총 바깥에 놓여있다고 생각된,
이스라엘 민족의 철천지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이 위로 가장 높은 왕에서부터
아래로 가장 낮은 무명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온 백성들이 내남없이 구원받는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요나가 뒤집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이지요.
첫 번째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1: 1-2절 참조).

그런데 그 반응은 첫 번째 반응과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주님께서 처음 명령을 내리셨을 때 요나는 그
명령이 싫어서 주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바다에 풍덩 빠져 물고기 뱃속을 통과한 다음의 요나는 예전의 요나가 아닙니다.

3절을 보세요.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 길이라."

여기 보세요.
물고기 뱃속에서 뛰쳐나와 거듭난 요나는 똑같은 말씀이 두 번째로
임했을 때, 이제는 아무 군소리 없이 즉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3절 말씀이 흥미로운 것은 요나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했다는 말을 해놓고서는, 니느웨는 굉장히
큰 성읍인데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 된다는 토를 달아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니느웨는 서울 못지 않게 큰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 저리 둘러보는 데에만 꼬박 사흘을 걸어야 한다니 대단히 큰 도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옛날 자동차도 없이 사흘을 맨발로 걸어다닌다는 것은 보통 큰 고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거듭난 요나는 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족(蛇足)같이 보이는 이 말씀이야말로 사흘이
걸리든 열흘이 걸리든 주님의 뜻이라면 어떤 고생도 감수하겠다는
요나의 달라진 모습을 암시하는 구절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자, 이렇게 해서 요나가 니니웨 성읍으로 들어가서 외칩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이십 일도 아니고, 삼십 일도 아니고, 사십 일을 말한 것은 40이 완전 숫자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올 완전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흘 동안 외치지도 않고 겨우 하룻길을 걸으며
외쳤는데 벌써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고난의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의 연단을 통과한 새사람
요나가 외친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5-6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참으로 놀라운 것은 니느웨의 대각성 회개 운동이 저 일반 백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위로 왕에게까지 올라간 '밑으로부터의 운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왕은, 무엇보다도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앗수르 제국의
왕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마 왕이 요나의 메시지를 먼저 듣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즉 이것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 회개운동'이었다면,
백성들은 권세와 외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개하는 시늉은 했을지
모르지만 참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는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수도 니느웨에서 일어난 영적 대각성 운동은 풀뿌리, 저 낮은
백성들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높은 자리 왕에게까지
파급된 '자발적 상향적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상명하달(上命下達) 식의 '하향적 회개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요나의 메시지가 그 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요나의 메시지는 앗수르 제국의 심장부인 니느웨에 떨어진 핵폭탄과도 같았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요나의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그런 뒤,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 위해서 금식을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심으로 받아들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금식한 뒤, 높고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베옷은 너무 거칠고 색깔이 어두워서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옷입니다.
그야말로 슬픔과 회개를 상징하는 옷이지요.

이렇게 밑으로부터 온 백성들의 자발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위로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소식을 들은 왕도 회개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6절을 보면, 소문을 들은 니느웨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어 던진 뒤,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아래로부터 일어난 거국적인 회개 운동에 자신도 동참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왕은 이와 같은 회개운동, 영적 대각성 운동을 더욱 더 조직적으로,
가열 차게 전개시키기 위하여 니느웨 모든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렸습니다.

7-9절 말씀을 보세요.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여기에 보면 금식을 하되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입는 베옷을
사람만 입지말고 짐승들에게도 입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요나의 말씀 선포로 촉발된 니느웨의 회개운동이 건성으로 적당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축들까지 총동원된 철저히 거국적인 구원운동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영적인 회개운동이
윤리적 실천행위와도 병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울부짖으며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할 뿐 아니라, 즉각 모든 악한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윤리행위를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요나의 선포로 일어난 니느웨 회개운동은 '수직적인 영성 차원'과
'수평적인 윤리 차원'이 함께 조화를 이룬, 보기 드물게 건전한 대각성 운동이었습니다!

자, 이러한 거국적인 회개운동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본래, 그 지은 죄 때문에 모조리 멸망당할 사람들이 남김없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이 진실된 모습으로 회개하는 것에 감동을 받으셔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하신 재앙을 하나도 내리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인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지요!
한 사람 요나가 변화되어 말씀을 선포하니 이다지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 '요나와 니느웨' 對 '하디와 1903 원산 대각성 운동>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泳, 1865-1949)에 의해 일어난 대각성 운동을 생각했습니다.
하디는 근 5년 동안 원산과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지만
눈에 띄는 열매를 거두지 못해서 항시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에서 하디는 자신의 죄악을 공개적으로 자백했습니다.
민족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교만했던 죄,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요 '나' 때문에 선교적 결실이 없다는 사실을 회개했던 것이지요.
하디 한 사람이 변화되었을 때, 이내 감리교인들을
주축으로 한 조선 교인들이 하나 둘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악을 털어놓고 울부짖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하디 한 사람의 변화로 촉발된 대각성 운동은
곧바로 요원의 불길처럼 서울, 평양, 개성, 인천 등지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인 민족회개운동으로 변했으며, 마침내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을 주축으로 해서 일어난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과 1909년의 백만명구령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역사 기록물을 보면 1904년 11월 1일부터 1주일 동안 우리 내리교회에서도
하디 선교사가 직접 와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집회가 수일 동안 계속되면서 1백 명에 달하는 교인들이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하고 뜨거운 성령충만을 체험했습니다.
특히 우리 내리교회 집회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질투와 사랑이 없었던 죄를 회개한'
전도부인들과 여성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고서는 자원해서
부평, 남양, 강화 등지로 나가 전도하는 열기를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1903년 하디에 의해서 촉발된 영적 대각성 운동이 한 해 뒤인 1904년에는
우리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인천 지역까지 파급되었던 것입니다.

1903년의 원산 대부흥 운동, 1905년의 개성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 등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철저한 회개와 윤리적 변화였습니다.
이 때 우리 선조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큰 죄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해오던 봉건적 행위들, 예컨대 축첩과 조혼, 노비제도, 주초 문제 등도
공중 앞에 낱낱이 털어놓고 대대적인 회개를 했으며 중단했습니다.

요나의 니느웨 회개운동과 너무나 닮지 않았습니까?
'요나와 니느웨,' '하디와 조선하고도 원산,' 너무나 비슷합니다.
요나 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니
사흘 길을 다 갈 필요도 없이 하룻만에 저 아래로 이름 없는
백성으로부터 위로 왕까지 대대적으로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멀리 캐나다로부터 날로 망국의 길로 치달리던 조선, 원산 땅에 온 푸른 눈의
이방인 선교사 하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더 의지했을 뿐 아니라,
은근한 인종적 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인들을 우습게 여기기까지 했던 하디,
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되니 거족적인 대각성 운동이 파죽지세로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요 '나'가 문제입니다.
요 '나'가 변화된 요나가 외치니 이방 민족 니느웨 사람들이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요 '나'에 기쁨과 확신이 없었던 하디가 변화되니 놀라운
영적 대각성 운동이 조선 반도를 휩쓸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요 '나'가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요 '나'가 문젭니다(2) : 뉘우치는 요나 (욘 1:17 - 욘 2:10)    펌 

< 주님 뜻보다 내 뜻이 앞설 때>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사님이 미국 동부
테네시 주의 작은 동네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마을에 원자 에너지를
개발하는 공장이 들어서자 엄청난 붐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일산이나 분당에 신도시가 들어설 때 전국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듯이,
그 작은 동네에도 미국 각처에서 온 외지 사람들로 북적대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님이 담임한 교회는 역사가 112년이나 된 유서 깊은 교회로서
예배당이 참 아름답기는 했지만 매우 작고 비좁았습니다.

이제 이 작은 동네에 타지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자
목사님은 교회를 좀 증축도 하고 해서 그들을 교회로
다 끌어들이는 전도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반대가 여간 거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잠시 여기 있다가 경기가 죽으면 다시 떠날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오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우리끼리만 잘 해보겠다는 뜻이었지요.
크게 낙담한 목사님은 그러면 이 안건을 다음 주에
교인 총회에 붙여서 투표로 결정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드디어 투표할 때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사님이 아직 이 교회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애송이 목사이기 때문에 투표권도 줄 수 없다며,
자기들끼리 표대결을 해서 목사님의 제안을 부결시켜 버렸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그 교회를 떠나서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사모님과 함께 그 교회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 마을이 너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도 있듯이, 그 동네는 예전의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간신히 물어 물어 옛날 교회자리를 찾았는데, 맙소사 그 아름답고 고즈넉한
옛날 예배당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바비큐 식당으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차장에는 온갖 종류의 자동차, 오토바이, 트럭 등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막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오르간과 의자들은 한 구석으로 밀쳐져 있었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바비큐 음식을 먹느라고 소란스러웠습니다.
넋을 잃은 목사님이 사모님께 한 마디 했습니다.
"여기가 여전히 교회가 아닌 것이 참 다행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 곳에 올 수 없었을 것 아니오."
(It's a good thing this is not still a church, otherwise these people couldn't be in here.)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실화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보다는
우리 생각을 더 앞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인가를 따지기보다는
내 이기심과 내 명예와 내 고집을 더 앞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 한인 교회에 부흥회 인도 차 갔는데 예배당
건물 앞에 어울리지 않는 게시판이 하나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어울리지 않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기에
치우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할 게시판이었습니다.
이 게시판을 왜 치우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담임목사님 왈,
창립 멤버가 되는 아무개 권사님이 이 게시판을 세웠는데
자기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못 치운다고
하도 고집을 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강사님이 한마디했습니다.
"목사님, 지금부터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 권사님 눈에 빨리 흙 들어가게 해 달라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고집을 앞세운 적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먼저 구하기보다 내 이기심과 체면을 앞세운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때가 참 어리석고 불신앙적이었다는 후회가 들지 않습니까?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요나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폭삭 망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메시지를 전하라니요!
요즈음 젊은이들의 코미디 프로에서 하는 말처럼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무작정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보다는 자기의 알량한
신학, 편견, 자존심, 고집을 더 앞세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가 탄 배에 엄청난 풍랑이 일게 하셔서 요나를 바다 속에 내던지게 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그리해서 요나는 고요한 바다에 풍랑이
일게 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서는 바다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바다에 내던져졌으나 물고기를 예비하신 하나님>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은 바다 속에 던져진 요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편안히 항해하던 배에 요나 때문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용케도 제비뽑기를 해서 요나가 딱 걸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나가 자기 잘못을 시인했다는 사실입니다.
1: 12절을 보세요.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여러분,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하여 요 '나' 때문이라는 고백이 필수적입니다!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고 요 '나'가 욕심 사납고 고집 세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나의 경우도 그렇지 않습니까?
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잠잠하고 평안하던 바다가
갑자기 노한 풍랑이 일어난 까닭이 자연 때문도, 선장 때문도, 그 어떤 뱃사람
때문도 아니고 바로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문제의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깨달음만 있으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요 '나'에게 모든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바다 속에 뛰어드니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배가 안전해졌고 뱃사람들도 살았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자기 과오를 깨닫고 인정하니 모든 풍파가 일시에 그쳤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에 보면 요나가 자기 책임을 통감하고 바다 속에
뛰어드니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큰 물고기가 도대체 어떤 물고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고래나 큰 상어를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요나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고전 10: 13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옳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나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되 버리시지 않습니다!
요나를 바다 속에 내던지신 하나님은 또한 물고기도 예비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밤낮으로 삼일 동안을 있게 됩니다.
물고기 뱃속은 무덤처럼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곳입니다.
사방이 막혀 있어서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이 끊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바로 이 물고기 뱃속에서 거듭납니다.
이 모든 고난이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대한 징벌임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합니다.

욘 2: 2-9절에 나타난 요나의 회개 기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 스올 즉 음부(陰府)와 같이 사방이 막히고
인간의 기대와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곳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그동안의 자기 삶이 삐뚤어진 삶이었음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바다 속 깊은 곳에 내던져져 큰 물결이 자기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머리를 휘감을 정도로, 저 바닥에까지 내동댕이쳐진 것이
다 요 '나'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합니다.

이제 요나의 기도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눈앞에서 쫓겨났어도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다고 결단합니다.
4절을 보세요.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아, 얼마나 좋은 말인지요!
지금 이렇게 저 밑바닥에까지, 무덤 속과 같이 사방이 막히고 절망스러운, 물고기
뱃속 한 가운데 들어와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다는 결심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힘들고 절망스러운 일을 당해도
다시 내리 성전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고난 한 가운데에 혈육이나 세상을
의지하면 멸망하지만 다시 주님 계신 성전을 바라보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둘째로, 저 절망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세요.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바다 속에 내던져서 죽은 자들이나 들어가는 구덩이
속에 빠졌지만 하나님께서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우리를 외면할지라도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요나가 바다 속에 풍덩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해두셨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일을 당하여 고난과 위기의 바다 속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냥 바다 속에 죽게 하지 않으시고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8-9절을 보세요.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여기 보세요.
요나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저버리며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달리 살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먼저 요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과 마지못해서 억지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께 찬미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지키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비록 내게 손해가 오고 내 자신이 고달파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신실한 마음으로 지키고야 말겠다는 결단이지요!
그러면서 요나는 맨 크뜨머리에서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고백이지요!
바다 속에 던져져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자기가 살길은 오직 주님 한 분께 있다는 것이지요.

옳습니다.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체 절명의 위기 앞에서
서게 될 때 그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참된 구원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자,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해볼까요.
우리의 요 '나'가 어리석고 고집 사나워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요 '나' 때문에 풍랑이 불어닥치고 주변 사람들이 다 힘들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는 빨리 깨닫고 요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 '나'가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지고 고난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 때
하나님은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릴, 물고기를 예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이 물고기 뱃속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요나는 어두컴컴하고 사방이 꽉 막혀, 그 어느 곳에서도 출구를 발견할 수 없는
물고기 뱃속 한 가운데에서 부서지고 깨어지는 회개의 기도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요나가 고난과 위기의 바다에 빠져들었지만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을 예비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징계의 바다에 뛰어들면
하나님은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살길을 열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물고기 뱃속 한 가운데에서, 아무도 의지할 곳 없고 칠흑같은
어둠과 사방이 꽉 막힌 이 물고기 뱃속에서 진실한 회개와 결단이 일어나야 합니다.
요나의 요 '나'는 이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회개하는 가운데 깨졌습니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변화되었습니다.
지난 날 자기 고집대로 막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순종하며 살겠다고 매서운 결단을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나'가 옛사람을 청산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물고기 뱃속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무덤 같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오직 주님의 빛만을 바라며,
사방이 꽉 막혀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주님만 바라보며
가장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과를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새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결론 말씀은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물고기 뱃속에서 온전한 회개가 일어나니 마침내
그 뱃속에서 나오는 날이 왔다는 것이지요!
그 지긋지긋한 노아의 홍수가 끝나는 날이 마침내 왔던 것처럼
요나의 물고기 뱃속 시련도 드디어 끝나는 날이 왔습니다.
요나의 요 '나'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고 새사람 되니
물고기 뱃속 시련도 끝이 나고 육지로 토해내는 날이 왔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새사람 되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되면 물고기 뱃속 시련은 반드시 끝날 날이 옵니다.
욥 23: 10절은 말씀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餘地를 만들어보자>
안자가훈(顔子家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밟는 폭은 겨우 몇 치에 불과한데
왜 한 자가 넘는 언덕길에서 굴러 넘어지며,
한 아람이나 되는 통나무 다리에서 자칫하면 강물로 떨어지는가?
좁은 언덕길, 좁은 다리에 여지(餘地)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사무친 말도 남이 믿어 주지 않고, 천지에 부끄럽지
않은 주장도 남의 수긍을 얻지 못할 때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내 언행, 내 사람됨에 여지가 부족한 까닭이다.
나를 비방하는 이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 점을 반성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여지가 필요합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내가 하는 일은 다 좋고 옳은 일이다, 그 빡빡함이 문젭니다.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헤아릴 여지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바다 속 물고기 뱃속 안에 들어가 부서지고 깨지고 나서야
자기 뜻이나 자기 고집이나 자기 편견이나 자기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니느웨를 생각할 여지가 생겼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여지를 여러분도 가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도망치는 요나 (욘 1:1-16)   퍼옴

도망치는 요나 (욘 1:1-16)


< 요 '나'가 문제였던 요나>
우리는 앞으로 4주 동안 요나서를 집중적으로 살펴 볼 것입니다.
요나서는 전체가 4장으로 된 아주 짧은 책이지만 아주 해학이 넘치는 책입니다.
저는 이번 요나서 연속 강해 설교의 제목을 『요 '나'가 문젭니다』로 정해봤습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외부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요 '나'가 문젭니다.
나만 변화되고 새로워지면 세상은 확 달라집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 선포를 위해 특별히 고용하신 종업원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막 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오직 자기를 고용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움직여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 멋대로 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종업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고객인 것처럼 착각을 했던 것이지요!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고대 근동 지역 전체를 정복했던 대제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철천지원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적의 심장부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과
민족주의 의식으로 가득 찼던 요나는 즉각적으로 반항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가 폭삭 망해도 시원찮은 판인데
그 원수 나라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와 구원을 선포하라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고객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고용된 하나님의 종업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정반대 길로 무작정 도망치고 맙니다.

요나의 반항을 쉽게 풀이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일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 때 애국적 민족주의로 불타 올랐던 젊은 선교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일본의 수도인 도쿄(東京)로 가서 일본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본이 쫄딱 망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구원받도록 메시지를 전하라니요!
그 선교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산에서 도쿄로 가는 배를 타는 대신에
정반대로 중국 가는 배를 타고 도주하기로 했습니다.

요나가 꼭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 사랑하신다고 믿었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와 같은 이방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다고 믿었던 요나였기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욥바'라고 하는 곳에서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시스는 오늘로 치면 '스페인'인데 앗수르 제국의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3절 말씀에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나는 원수 나라인 앗수르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좀 피해서 멀리 멀리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을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요나가 탄 다시스로 가는 배에 엄청난 풍파가 몰아닥쳤습니다.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태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부서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울부짖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때 요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5절 후반부를 보세요.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깊은 잠, 이것은 영적인 무감각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요나에게는 하나님과 교신하는 영적 안테나가 끊어졌습니다.
자기가 탄 배에 엄청난 풍랑이 몰아닥쳐 배가 파선하기
일보 직전인데도 이것을 모르고 태연히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리의 고집대로 살 때 엄청난
풍파가 몰아닥침에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해져서, 영적인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선장이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는 요나를 깨웁니다.
그러면서 요나가 믿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자기들이 구원받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모든 인간적인 수단이 끊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때 뱃사람들이 제비뽑기를 제안합니다.
도대체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가려보자는 것이지요.
제비뽑기를 했더니만 제비가 요나에게 뚝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8절을 보세요.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뱃사람들은 요나에게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무슨 까닭으로 이 재앙이 일어났는지?"
"요나의 직업이 무엇인지?"
"어디서 오는 길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민족에 속해 있는지?"

요나의 신분을 확인하려는 뱃사람들의 물음에 대해서 요나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9-10절을 보세요.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자신의 신분에 관하여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을 받은 요나의 대답은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자신은 히브리 사람인데,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제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고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고용된 종업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기를 다그치는 이방 뱃사람들을 향하여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히브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러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털어놓았습니다.
요나는 자기 때문에 이 엄청난 소동이 일어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뱃사람들이 요나를 심문하는 사이에 파도는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절에 보니까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이 엄청난 태풍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불어닥친 것을 시인합니다.

요나는 자기 때문에 위기가 일어난 것을 솔직히 자인하고
그 책임을 달게 지겠다는 의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뱃사람들이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더니
무섭게 폭풍이 일던 바다가 금새 잔잔해졌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잔잔해진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이방인들이었던 뱃사람들의 변화였습니다.
16절을 보세요.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 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서 회개하니 니느웨로 가기 전에
벌써 이방 뱃사람들부터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고서, 하나님을 섬기기로 약속까지 했습니다.
요나 한 사람이 변화되니 주변 사람들이 변화된 것이지요!
요나 한 사람이 회개하니 요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 것이지요!

< 요 '나'가 변화되니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살아나네>
자,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요나서의 연속 강해설교의 제목은 『요 '나'가 문젭니다』.

여러분, 요 '나'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생활을 하니 가정이 어렵게 됩니다.
나만 아니라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풍파가 불어닥칩니다.
요 '나'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제 고집을 피우니 하는 일마다 막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 '나'가 깨닫고 변화되어야지만 요 '나'도 살 수 있고,
나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다함께 살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서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사랑입니다.
철저한 선민주의자요 국수주의자였던 요나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나에게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기 원하십니다.
영토에 대한 포기를 종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에서도 역사하십니다.

황우석씨가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르치시려는 진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국경이 없으며 선교사에게도 국경이 없다."

요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는 곳, 니느웨로 가기가 싫어서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이 길이 아님에도 그 길을 고집하고 갈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길로 가다가는 반드시 탈이 납니다.
자기만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어렵게 합니다.

저와 함께 신학교를 졸업한 친구들 중에 목회를 하지 않고
다른 길로 접어든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동창회 모임 때 가끔 그런 친구들과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목회하는 친구들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제법 사업에 성공해서 생활은 괜찮아 보이지만 영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배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피아노 판매를 하는 사업을 해서
꽤 돈도 벌었지만 결국 그 사업을 다 포기하고 목회를 새로 시작한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할 때 기꺼이 그 뜻에 따라야 하는데 내 좁은 생각이 문젭니다.
내 욕심이 문젭니다.
내 편견과 고집이 문젭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철학과 내 견해와 내 영토를 고집하는 것이 문젭니다.
결국 요 '나'가 문제인 것이지요!

요 '나'가 문제였던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바다에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잔잔했던 바다가 미친 듯이 뛰놀기 시작했습니다.
뱃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각자 자기들이 믿는 신들에게 부르짖었지만 여전했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실은 짐들을 바다에 내던졌지만 풍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뱃길에 익숙했고 해양 기상에 능통했던 뱃사람들은
아무리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보아도 그 원인을 통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인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려는 요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원인을 제공한 요나가 책임을 지기 전까지는 풍랑이 멈출 수 없습니다.
요나는 노한 풍랑을 일으키시고 또 잠잠케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입니다.

요나는 즉각적으로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바다 속에 내 던졌더니 노한 풍랑이 멈추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업원이라는
신분을 회복했더니만 다른 사람들이 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요 '나'가 문젭니다.
요 '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널리 퍼지지 못합니다.
요 '나'의 좁은 생각, 짧은 안목, 무모한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요 '나'가 죽어야 합니다.
요 '나'가 요나와 함께 수장(水葬)되어야 합니다.
요 '나'의 불신앙과 고집과 편견이 물에 빠져 죽게 될 때,
요 '나'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요 '나'가 죽음으로 주변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낯을 피하여 정처 없이 도망치던 요 '나'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우리가 "주님에게서 돌아설 때 넘어지게 되고,
주님을 향해 되돌아설 때 일어나게 되며, 주님 안에 머물 때 든든히 서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온전한 믿음으로 욘2:1-10, 7:20-27

 

팔레스타인의 우기는 겨울입니다. 우기가 되면 많은 비로 인해 집을 지을 수 없기에 유대인들은 비가오지 않는 건기에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집을 짓다 깊이 파는 것이 힘들면 그만 굳어진 모래 위에 집을 지어버립니다. 우기가 닥치고 비가 내리면 없던 시내가 생겨지고, 지대가 낮은 곳에는 물웅덩이가 생깁니다. 그러면 모래 위에 지은 집들이 하나씩 무너지며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힘이 들어도 깊이 파고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집들은 무너지지 않고 서 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의 건축학 교수인 살바도르(M. Salvador)는 건축물은 세 가지 하중을 고려해야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고정하중' 은 콘크리트 벽돌, 철골, 빔 등 구조물 자체무게를 버틸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적재하중' 은 건축물 안에 실려 있는 사람이나 각종 물건의 무게를 잘 받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동하중' 이란 건축물에 가해지는 각종 외부의 영향이나 압력인 비, 바람, , 태풍, 지진도 잘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을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말씀을 들어도 외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고, 롯의 처처럼 반신반의하다 망하는 사람도 있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요동치 않는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견고한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소망 하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1.주님 앞에서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구약 본문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로서 티그리스강 상류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 동쪽으로 700km 떨어진 곳입니다. 니느웨 성읍 둘레는 걸어서 3일 이상 걸리는 큰 도시입니다.(3:3) 이 성에 어린아이만 12만 명이니 총 인구는 100만을 육박하는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4:11)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우상숭배가 성행했고 포로를 다루는데 잔인했습니다.

 

당시에 니느웨는 역병이 2번이나 돌고 있었고(B.C.765, 753) 일식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B.C.763)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에 대한 암시를 느끼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멸망을 선포하므로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욥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1:1-3). '욥바'는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변 항구입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에서 서쪽으로 3,000km나 떨어진 지금의 스페인 지방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회개를 외치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죽임 당할 위험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폭삭 망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메시지를 전하라니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코미디 프로에서 하는 말처럼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일이었기에 반대 길로 무작정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보다는 자기의 알량한 선입관, 편견, 자존심, 고집을 더 앞세웠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자기중심으로 고집하며 계속 나가는 사람은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지 못하고 믿음의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헤밍웨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평생 동안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신앙으로 키우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에 주일학교 성가대복을 입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신앙에서 이탈했고, 급기야는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위대한 소설가로서는 세상에 남았을지 몰라도, 믿음에서 떠나 주님을 외면 한 체 하늘나라의 역사에는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타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즈음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어야 하는 모래위에 집을 지어 허무하게 무너지는 무의미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 이 고귀한 유업을 내던졌던 에서와 같은 경솔한 자리에 들어가지 맙시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느 상태에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고 확인해 봅시다. 신앙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확실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처신하다 보면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신앙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결단을 하며 온전한 믿음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잘 못을 깨닫는 순간 회개하고 돌이키는 믿음입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길을 가면서 마음이 괴로워 배 밑창으로 내려가 잠을 자면서 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편안히 항해하던 배에 요나 때문에 엄청난 풍랑이 일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제비뽑기를 해서 요나가 딱 걸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탄 배에 엄청난 풍랑이 일게 하셔서 요나를 깨우고 급기야 요나는 이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고백하면서 나를 바다 속에 내던지라고 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 12)

 

이렇게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큰 물고기에 삼킴을 당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17) 큰 물고기에 대해 영어성경도 “great fish”(NIV KJV NASB)로 번역하고 있어 큰 물고기는 어류임이 분명합니다. 어류는 적어도 3가지를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 척추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둘째, 지느러미를 가지고 헤엄치며 셋째, 아가미로 호흡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사람을 삼킬 수 있는 물고기로 흔히 고래나 상어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고래는 아가미로 호흡하지 않고 허파로 호흡하기 때문에 분류학적으로 어류가 아닌 사람과 같은 포유류에 해당하므로 고래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부적절 하다고합니다.

 

요나가 욥바에서 배로 가려 했던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으로 당시 광물이 풍부하고 무역이 성행했던 곳입니다. 이 때문에 요나가 타고 있던 배는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어류학의 발달로 이곳은 백상아리의 집단 서식지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백상아리는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어류일까? 또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백상아리라고 한다면 백상아리 위 안에서 3일 동안 호흡하면서 회개한 요나(1:172:3)는 어떻게 소화·흡수되지 않고 살 수 있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어류 학자들은 현존하는 상어의 종류는 대략 400종에 이르는데, 크기로 볼 때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상어는 고래상어, 돌 묵 상어, 큰 입 상어, 백상아리, 뱀 상어, 흉상어류 등 10여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래상어, 큰 입 상어, 돌 묵 상어는 플랑크톤과 작은 물고기 등을 먹기 때문에 생태학적으로 사람을 삼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 어류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백상아리와 고래, 물개, 바다사자, 바다표범 등은 주로 해상 포유류를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난폭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상어는 백상아리와 일부 흉상어류라 할 수 있는데 서식분포도를 볼 때 요나가 던져진 지중해에는 흉상어류가 서식하지 않는다 합니다. 뱀 상어와 흉상어류는 북위 40도 미만의 열대해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백상아리의 위에 대한 특징은 요나를 삼킨 물고기에 대한 고민에 종지부를 찍기에 충분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어는 다른 동물과 달리 먹이를 자주 먹지 않기 때문에 위가 먹이로 채워져 있을 때보다 비어 있을 때가 더 많고, 대체적으로 잘 소화되지 않는 먹이를 삼켰을 때에는 일단 그대로 위에 저장하고 있다가, 거북등처럼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을 때에는 토해내는 경우가 종종 목격된다고 합니다. 실제 길이 5m 이상인, 사육된 뱀 상어의 경우 먹이를 1개월 이상이나 소화시키지 않은 채 위에 저장하고 있는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합니다.

 

백상아리의 경우 큰 먹이를 먹기 때문에 위의 용량(보통 사람 위 부피의 3배 정도)이 클 뿐만 아니라 비어 있는 시간이 일반 상어에 비해 더 긴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보통 비어 있는 위에는 일부 위액과 기타 점액 물질, 그리고 대부분 공기로 채워집니다. 요나는 사람 위 부피의 3배 정도에 달하는 일종의 온실 속 공기주머니에서 3일 동안 견디다가 자신의 신발과 옷 등 도저히 소화되지 않는 물질 덕분에 토해진 것입니다. <도움말 주신 분 한국 창조과학 회 최윤 교수(군산대 해양생명과학부 어류분류생태학) >

 

중요한 것은 요나가 자신의 불순종을 깨닫고 나의 탓이라 하며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되 버리시지 않습니다.

 

요나의 기도에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눈앞에서 쫓겨났어도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다고 결단합니다. 본문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세상에서 힘들고 절망스러운 일을 당해도 요나처럼 주의 성전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절망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 구원해주시리란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본문 6절에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우리를 외면하고,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본문 8-9절에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불순종 하다가 혹독한 징계를 맛본 후 정신을 차리고 불평 버리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순종하며 살기로 서원하며 결단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킬 줄 아는 자가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죄를 깨닫는 순간 회개하여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갖기를 소망합니다.

 

 

3.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요나가 처음부터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런 고난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보시고 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는 징계의 고난을 당하며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오직 참된 구원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각 죄에서 돌이켰을 때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고, 그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도록 다시 기회를 주셔서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신약 본문은 주님이 가르치신 유명한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7: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어리석은 사람도 집을 지었습니다. 물론 자기가 사는 집이니 열심히 집을 잘 지었을 것입니다. 기초를 닦는데,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외적인 면에, 더 많은 비용을 드려 신경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반석 위에 지은 집 보다 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초를 반석에 세우지 아니하고 모래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건조기에는 굳은 땅처럼 보여 외관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비바람이 불 때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있었고, 스스로도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산다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구제했고, 열심히 기도도 했고, 십일조도 드리고, 금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데 있었고, 높은 자리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이익을 취하는 일에는 마음을 기울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박해하고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구원 받는 자가 될 수가 없기에 주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사람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드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행하는 자들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요, 지혜로운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자기 의, 욕심, 고집, 생각, 사상, 철학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 바라보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닮기를 소망하고, 주님 발자취 따라가는 자들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밥 버포드(Bob Buford)하프 타임(Half Time)" 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과 감동을 줍니다. 그는 책에서 인생을 운동경기로 보면서, 이미 인생의 전반전을 치르고 후반전을 남겨놓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모든 운동 경기가 그렇듯이 하프 타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경기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남은 삶은 지금의 하프타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는 삶이 되도록 기초가 분명한, 지혜가 분명한, 순종이 분명한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의 삶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서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잘 못을 깨닫는 순간 회개하고 돌이키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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