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하는 자가 복 되다(약5:1-11)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무조건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가난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실하게 잘 살아서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예수를 잘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떠했겠습니까? 초대교회는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부자가 되기보다 가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초대교회 때는 부자도 예수를 믿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더 많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는 예수를 믿지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부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부자들에게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예수를 믿지만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대한 말씀들이 많습니다. 야고보서1장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1:9 만일 (예수를 믿음에도) 가난하거든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적인 부자로 만드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약1:10 만일 (예수를 믿지 않아도) 부하거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영적인 부족함을 보여 주신 것을 자랑하십시오. 그것은 부자도 들에 핀 꽃과 같이 결국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1:11 해가 떠올라 점점 더 뜨거워지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돌보다가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부자들에게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1. 들으라 (예수를 믿지 않는)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예수를 믿지 않는 부자인) 너희는 (예수를 믿는 가난한)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음에도 가난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5:7.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에도 가난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예수를 믿음에도 가난한) 형제들아 (가난하다고)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고 합니다

그리고 10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10. (예수를 믿음에도 가난한)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여기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란 자신의 뜻대로 말한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바르게 전한 선지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들은 이 땅에서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에게 그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을 본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 인내함으로 복을 받은 사람의 예로서 욥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욥은 고난의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종합적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욥은 먼저 그의 모든 자녀들과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욥이 그가 가진 모든 자녀와 재산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렸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예배입니다.

욥1장 20절입니다. “욥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라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한순간에 자녀와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면 제일 먼저 예배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도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또 예배를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같으면 먼저 하나님께 왜 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의롭게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예배를 드리면서 어떻게 합니까?

욥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고 합니다.

그리고 욥은 그의 모든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욥2:9).

그때 욥은 어떻게 말합니까?

욥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여러분 욥의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욥의 마지막 시험은 욥의 친구들로 인한 시험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처음에 어떻게 합니까?

욥2: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여기까지가 제일 큰 위로였습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제일 큰 위로가 무엇입니까? 함께 같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하는 마음으로 욥에게 충고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충고를 할 때 누구에 의해서 충고를 하는 줄 아십니까?

욥기 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욥기 4장은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가 누구에 의해서 말씀을 받았는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4:12. ○어떤 말씀이 내(엘리바스)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러분 여기서 엘리바스가 말씀을 받은 그 영이 누구의 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에 대해서 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교수이신 김성진교수님은 이 영을 성령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욥기를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시고, 고려신학대학원에 구약학 교수로 오셨습니다.

왜 이 영이 사탄이냐 하면 성령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는 영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들은 그 영은 엘리바스를 두렵게 하는 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욥4장 14절을 다시 보시면 “욥4:14. (악영의 소리가 들릴 때)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고 합니다.

또 욥기 4장 15절을 다시 보시면 “욥4:15. 그 때에 (악)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여기서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악한 영이 들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김성진 교수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 그 악한 영이 어떻게 말합니까?

욥4:17절입니다.

욥4:17. (악한 영이 이르기를)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욥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고 합니다.

이 말에 앞서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욥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까 엘리바스는 욥에게 네가 죄가 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이런 생각이 김성진교수님에 의하면 모두 악한 영인 사탄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5장부터 37장까지 욥의 친구들의 모든 말들은 엘리바스의 말에 근거한 것이고, 엘리바스의 말은 악한 영인 사탄에 의한 것이라고 김성진교수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욥의 가장 큰 시험이 무엇입니까?

욥의 친구들이 끊임없이 욥을 정죄한 것입니다. 네가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은 모두 너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욥을 향한 사탄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욥이 어떻게 이런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제가 작년 한해동안 주일 새벽마다 욥기를 강해하면서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욥기 처음을 보면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욥기를 통해서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로 절망하거나 낙심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기도에 집중하고 더 말씀에 집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욥이 친구들로 인한 시험이 있을 때 욥의 탄원이 나오는데, 그 모든 탄원들은 모두 시편에서 시편 기자가 기도할 때 사용했던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욥은 어떻게 시험을 이겼습니까? 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시험을 이겼습니다.

또 욥은 사탄의 시험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 가운데서 그가 느껴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겼습니다. 욥은 고난가운데 하나님이 선하지 않은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말씀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그 어떤 사탄의 시험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의 시험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기도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시탄의 시험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11절에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축복의)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욥과 같이 기도와 말씀으로 인내하여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축복의 결말을 볼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고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어째서 이 사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하고 도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가 우리들의 모든 죄의 저주를 끊어내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가 죄의 삯인 사망을 정복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하신 주님처럼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날 누리게 될 영광스런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어찌 부활의 소식이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정하면서도, 성도들의 부활은 믿지 못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부활하셨다는 것은 납득하면서도, 한 번 죽은 인간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 당시 사람들은 육체는 한 번 죽으면 그 용도가 다 한 것이고, 오직 사람의 영혼만이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육체를 부정하게 생각했고, 인간의 몸을 ‘영혼의 감옥’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당시 그리스-로마 제국 아래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악한 육체로부터 몸이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 부활을 통해 새로운 몸과 재결합한다는 것은 영혼이 다시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 여기며 부활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성도가, 어찌 주님의 백성들도 그와 같이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 성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는 것이 거짓이라면, 같은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논쟁했습니다. 13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2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들의 부활도 없다고 말하고, 13절에서는 순서를 바꾸어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고 말한 것이죠. 이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곧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나 같다고 말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죽은 자의 부활을 거부하는 태도는 그의 신앙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입니까? 14절을 봅시다. “(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복음 전체가 무너지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되고, 심지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언하는 바울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인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의 수고가 모두가 헛것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이것이 내 이성적인 판단으로 볼 때 가능한 것인가?’하고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것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도 다시 살리시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일이 없었다면, 우리의 모든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잠자는 자들도 부활이 없기에 망한 사람들이며, 자신과 같이 모진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요, 구원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라면 우리 인생에는 허무함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의 삶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가져야 하는 진정한 소망이 바로 ‘부활’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저주를 끊으시고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에게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영광스러운 존재의 시작 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산 소망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소망이 바로 이 부활의 소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과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우리들도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소망, 부활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눈을 위한 금식 (마 6:16~18)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단순히 건물을 이룬 예배당이 아니라, 천상의 진리가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가장 깊은 본질, 곧 우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누구의 인정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의’의 세 가지 행위, 즉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은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는 세 기둥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세 가지 행위에 대해 놀랍도록 일관된 경고를 주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이 경고는 우리의 모든 영적 행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6장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은 얼마나 아픈 지적입니까? '외식하는 자들', 헬라어로는 '휘포크리타이(ὑποκριταί)'라고 불리는 이들은 본래 고대 극장의 '배우'를 뜻했습니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라가 다른 사람의 역할을 연기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이 곧 인간의 박수갈채를 위한 하나의 연극 무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금식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영적 행위조차도, 타인의 시선과 칭찬이라는 값싼 동전을 얻기 위해 공개적인 퍼포먼스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무대 위에서 배우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여 표현합니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고, 옷차림은 흐트러져 있으며, 그들의 걸음걸이와 말 한마디는 "보십시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위해 고통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보다 더 경건합니다!"라고 소리치는 듯합니다. 그들은 금식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 곧 영혼의 양식을 끊고 오직 주님께 집중하려는 그 순수한 의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아니라, 인간의 찬사를 향한 갈증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 순간, 그들의 상은 소진되고 끝난 것입니다. 인간의 칭찬은 너무나 가볍고 빨리 시들며, 영원한 하늘의 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시적인 만족일 뿐입니다. 그들이 받은 것은 '박수갈채'라는 흙먼지뿐이며, 그것은 영혼을 채워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공허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이 '외식의 유혹'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우리는 금식의 형태가 아닌 다른 영적 행위에서도 '슬픈 기색'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희생적인 봉사를 하면서도, '내가 이만큼 수고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냅니다. 밤늦게까지 기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졌음을 굳이 설명하려 합니다.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항상 '나의 경건함을 인정해 달라'는 외로운 외침이 깔려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가장 교묘한 가면이며, 이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이 곧 진정한 영적 자유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주님은 이 외식의 무대에서 우리를 불러내십니다. 17절, 18절 초반부의 명령은 이 부름의 구체적인 행동 지침입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이 명령은 단순한 몸단장의 지시가 아닙니다. 고대 근동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도유)'은 기쁨과 축제의 상징이었으며, '얼굴을 씻는 것'은 일상적인 깨끗함을 의미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금식의 기간에도 일상의 평안함과 기쁨을 유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 '기쁨의 기색'을 가지라는 역설적인 명령입니다.

왜 우리는 기쁨으로 금식해야 합니까? 금식은 고통을 광고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성스러운 데이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즐거움을 잠시 내려놓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귀하고 영원한 만족, 곧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을 듣는 기쁨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는 자의 얼굴은 억지로 찡그린 고난의 표정이 아니라, 은밀히 사랑하는 이를 만날 기대감에 부풀어 환하게 빛나는 비밀의 기쁨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머리에 바른 기름은 우리의 고난을 가려주는 위장막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곧 있을 영적 잔치를 기대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축복의 향기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행위가 '은밀한 중'으로 옮겨지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사람들의 기분에 맞추어 우리의 경건을 조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봉사한 일이 잊혀져도 상관없습니다. 나의 눈은 오직 한 분,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고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정수는 바로 18절 마지막 구절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말씀은 단순한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갚으시리라(ἀποδώσει)'는 이 단어는 '돌려준다', '보상한다'는 뜻을 넘어, '온전한 관계를 완성한다'는 의미까지 내포합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은밀한 수고와 진실된 마음을 놓치지 않고 보시는 분입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금식했는지의 '양'을 계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금식하는 '이유'와 그 깊은 '갈망'의 진정성을 읽어내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갚으시는 '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 상은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은 바로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와의 친밀함'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홀로 서는 그 순간,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안정감과 존재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 영혼의 진정한 거처를 찾고,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는 완전한 만족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 수행의 끝에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수행의 과정 자체가 가져다주는 은혜입니다. 숨겨진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자체가 이미 상이요, 기쁨이요, 위로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무대와 조명 아래 펼쳐집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와 판단의 시선 아래 놓입니다. 이 시선들은 때로는 우리에게 짐이 되고,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는 무게가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 무대의 조명을 끄고, 세상의 소음을 잠재우며, 아버지와의 비밀스러운 방으로 들어가라고 초대하십니다.

사랑하는 청중 여러분, 이제 우리의 금식과 기도, 구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물어봅시다. 우리의 섬김이 세상의 박수갈채를 위한 싸구려 연극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경건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향해 눈을 드십시오. 당신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당신의 얼굴을 씻으십시오. 슬픈 기색 대신, 은밀한 만남이 주는 기쁨과 평안을 온몸으로 드러내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는 당신의 침묵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작은 희생 속에서, 오직 하늘 아버지 한 분만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드리십시오. 은밀한 중에 보시는 그 아버지께서 오늘 이 시간, 당신의 영혼을 깊이 만나주시고, 당신의 삶의 방향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어주시며, 가장 크고 영원한 상, 곧 아버지와의 온전한 사랑과 친밀함을 선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비밀스러운 사랑의 깊은 울림 속에서 매일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요약 (Summary)

본문은 산상수훈 중 '의'의 세 가지 행위(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의 마지막 부분으로, 금식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경고하고 참된 경건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 슬픈 기색을 보이고 얼굴을 흉하게 만드는 '외식하는 자들(배우)'의 금식을 비판하시며, 그들은 이미 사람의 인정을 통해 '자기 상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금식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은밀한 경건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이라는 영원하고 온전한 상으로 보상받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핵심은 **'누구의 시선'**을 구하느냐에 있습니다.

2. 묵상 포인트 (Meditation Points)

  1. 나의 '외식하는 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금식이 아닌 다른 영적 행위(봉사, 헌금, 기도)에서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2. '이미 받은 상'의 허무함: 인간의 칭찬이라는 일시적인 상이 하늘의 영원한 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됨을 인식하고, 그 상의 가벼움을 묵상하라.
  3. 기름과 씻음의 의미: 고난의 순간에도 일상의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라는 주님의 역설적 명령을 어떻게 삶에서 실천할 것인가? 금식은 고통의 광고가 아닌 기쁨의 비밀이 될 수 있는가?
  4.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의 임재: 아무도 보지 않는 나의 은밀한 삶의 영역(생각, 습관, 동기)까지 주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로와 동시에 도전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3. 강해 (Exegesis - 구조 및 흐름)

  • A. 외식하는 금식의 금지 (6:16a-c): 외식하는 자들(ὑποκριταί)처럼 슬픈 기색(σκυθρωποί)과 흉한 얼굴(ἀφανίζουσιν τὰ πρόσωπα)을 보이지 말라. 목적은 '사람에게 보이려고(ὅπως φανῶσιν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 B. 외식의 결과 (6:16d):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ἀπέχουσιν τὸν μισθὸν αὐτῶν). 'ἀπέχουσιν'은 '영수증에 이미 받음'이 찍힌 것처럼, 받을 것을 완전히 수령하여 끝났음을 의미하는 상업적 용어입니다.
  • C. 은밀한 금식의 명령 (6:17): 대조적인 명령.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ἄλειψαί σου τὴν κεφαλὴν) 얼굴을 씻으라(νίψαι τὸ πρόσωπόν σου)." 일상의 평온과 기쁨을 유지하라는 적극적인 지시.
  • D. 은밀한 금식의 목적과 보상 (6:18):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τῷ Πατρί σου τῷ ἐν τῷ κρυπτῷ)'. 이 순수한 동기에 대한 보상은 '갚으시리라(ἀποδώσει)'는 약속으로 연결되며,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온전한 보상입니다.

4. 주석 (Commentary - 핵심 용어)

  • 외식하는 자들 (ὑποκριταί, hypocrites): '배우'라는 뜻에서 유래하여, 가면을 쓰고 연기하듯 신앙을 가장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내면의 진실이 아닌 외부의 시선에 의해 조종됩니다.
  • 슬픈 기색 (σκυθρωποί, skythrōpoi): '어두운 얼굴', '침울한 모습'이라는 뜻으로, 금식의 고통을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경건함을 과시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ἀπέχουσιν τὸν μισθὸν αὐτῶν): 상을 '다 받았다', '완불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주는 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의 기회를 소진했다는 극명한 경고입니다.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금식 기간 동안에도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외형적으로 금식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금식으로 인한 초라함을 숨기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진실함을 유지하라는 명령입니다. 기름은 또한 기쁨과 성령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5. 원어 주석 (Original Language Notes)

  • κρυπτῷ (크륍토, Krypto): '은밀한 곳', '숨겨진 곳'이라는 뜻의 명사.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자, 우리의 내면의 진실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은밀한 중에 계신(ἐν τῷ κρυπτῷ)' 아버지로 묘사하시며, 우리의 경건이 외부가 아닌 내면의 깊은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 ἀποδώσει (아포도세이, apodōsei): 동사 'ἀποδίδωμι(apodidōmi)'의 미래형. '돌려주다', '보상하다', '갚다'는 의미로, 단순히 보답한다는 뜻을 넘어 **'빚을 갚듯이 확실하게 이행한다'**는 강력한 약속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경건에 대해 반드시 온전한 갚음을 하시는 신실한 분임을 보여줍니다.

6. 금언 (Aphorisms)

  • "사람의 박수갈채는 연기처럼 사라지지만,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은 영원한 불꽃을 남긴다."
  • "당신의 경건이 세상의 무대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경건이 아니라 위선이다."
  • "참된 금식은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더 큰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이다."
  • "가장 위대한 영적 승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당신의 내면의 방에서 이루어진다."

7. 신학적/주제별/목회적 정리 (Theological/Thematic/Pastoral Summary)

  • 신학적 정리: 하나님 중심의 의(義): 본문은 종교 행위의 동기가 인간의 인정(Man-centered)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God-centered)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참된 '의'는 관계적이며, 그 관계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외식은 인간의 영광을 훔치는 신성 모독적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 주제별 정리: 외식과 진실: 본문의 외식 비판은 금식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종교 생활에 적용됩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존재론적 도전입니다. 진실함(Sincerity)은 은밀함 속에서 시험받고 완성됩니다.
  • 목회적 정리: 영적 자유와 상급: 목회적으로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기대치와 평가에 묶여 영적으로 피로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세상의 눈이 아닌 아버지의 눈을 의식하며, 그 친밀함 자체를 최고의 상급으로 누리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진정한 치유와 위로는 은밀한 중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는 사람의 삶  야고보서 4:1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야고보서 4장 13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 삶의 가장 실제적인 부분인 계획과 미래, 성공과 관련된 영역에서 성도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특히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자율적으로 인생을 설계하며, 그 속에서 경건을 명목상으로만 두고 살아가는지를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야고보는 당대의 상업 중심 사회 속에서 믿는 이들이 계획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신자의 계획과 인식, 그리고 행함에 있어 신학적, 실천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겸손한 삶의 태도를 회복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삶의 길로 다시 들어서야 합니다.

1.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4:13)

야고보는 실명하지 않지만 매우 구체적인 예를 제시합니다. 당시 상업과 교역이 활발했던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신자들은 보통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상업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종종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동하고 거래처를 정하고, 일정 기간을 계획하며, 효율을 추구하는 구조 속에 살아갔습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을 머물며”, “이익을 보리라”는 표현들은 단지 미래를 계획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닌, 하나님 없는 확신과 자기중심적 사고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경제활동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정직하고 부지런한 노동을 긍정하며, 청지기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 중심에 하나님을 포함시키지 않은 채, 자신의 능력과 계산만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태도, 곧 하나님의 뜻 없이 살아가는 실천적 무신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 구절을 주석하며,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은 모든 계획은 그 뿌리부터 썩은 것이며, 겉보기엔 선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자기의 무너짐으로 끝난다"고 경고했습니다. 칼빈은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신뢰하는 순간, 하나님의 뜻을 자신도 모르게 배제하며, 그것이 교만의 시작이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곧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얼마나 쉽게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의 주권을 잊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2.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4:14)

야고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내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정보의 부족이 아닙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미래를 아는 자가 없다는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며, 인간의 통제력과 지혜에 대한 맹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고발하는 선언입니다.

 

‘안개’(ἀτμὶς, atmis)는 고대 성경 문학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 이는 잠시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것, 곧 인생의 덧없음과 본질적 연약함을 상징합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는 성경 구절은 전도서, 시편, 욥기 전반에서 반복되며, 이는 단지 부정적 현실 인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겸손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이 자기 자신과 인생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주의를 촉구합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장기 프로젝트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생명은 안개 같고, 모든 계획은 그의 뜻 아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확실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시선의 전환입니다.

3.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4:15–16)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4:15–16)

 

야고보는 ‘주의 뜻이면’이라는 고백을 삶의 태도로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말버릇이나 형식적인 신앙 언어가 아닙니다. 이는 신자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지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세이며, 삶 전체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려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눅 22:42)라 하신 것처럼, 참된 믿음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 믿음은 근거 없는 자만일 뿐입니다.

 

야고보는 그 자만을 ‘허탄한 자랑’이라 부릅니다. 헬라어 ‘ἀλαζονεία’는 실제보다 더 높이 자신을 생각하거나, 하나님 없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는 행태를 뜻합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에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며, 자기 자랑과 교만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뿌리라고 경고합니다. 이 자랑은 단순히 잘난 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자기를 인생의 주인 삼는 실천적 불신앙이며 죄입니다.

 

루터는 “신자의 언어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며, 주의 뜻이라는 말은 단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겠다는 믿음의 실천이다”라고 강조합니다.

 

결론: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4: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4:17)

 

이 결론은 단지 앞서 나온 말씀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책임을 강조하는 무게감 있는 선언입니다. ‘선을 행하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행동이나 선행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신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삶의 태도와 실천 전체를 말합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다’라는 이 말씀은 신앙생활에서 소극적 회피가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옳은 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음을 행함으로 드러내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이는 야고보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핵심 주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선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시기상조’, ‘현실적으로 불가능’, ‘내 사정이 좀 나아지면’이라는 핑계로 미루고 있습니까? 야고보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미룸이 곧 죄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순종함으로 실천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결정 앞에 “주의 뜻이면”이라는 고백이 자리하길 바랍니다. 그 고백은 단지 한 마디 말이 아니라, 겸손과 믿음의 결단이며, 그 고백을 따라 사는 삶은 진정 하나님께 의탁된 인생입니다. 오늘도 그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복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생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가정(假定)들이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하지만 복음에 있어서 가장 끔찍한 가정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일 것입니다. 왜 그런 가정은 성립될 수 없습니까? 있어서는 안 됩니까?

 

  • 예배 상황에 대한 것을 끝내고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부활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2절로, 바울이 듣고 독자에게 전한 복음에 대해 소개합니다. 둘째는, 3-8절로, 부활과 관련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셋째는 9-11절로, 바울과 관련한 추가 정보를 제공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1-2)

 

이 부활신앙은 지금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입을 통해 고백되어지고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에 대한 구체적 문제를 상술하기 전에, 과거에 바울이 전하고 고린도 성도들이 들었던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바울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과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과 모든 사도들이 공유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말합니다.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1-2)

 

 

바울이 말한 ‘알게 하노니’는 표현과 복음이란 말로 이전 부분과 주제적 단절을 보입니다. 11-14장이 교회 모임에 대한 것이라면, 15장은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알게 하노니’라는 말로 운을 떼고 추가 설명으로 그 복음의 성격을 말합니다. 그 복음은 바울이 독자인 ‘너희’에게 전한 것입니다. ‘너희’가 받아들여 이미 그 안에 서 있고, 바울이 전한 것을 잘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복음의 진리와 연결된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바울의 증거는 복음이 아닙니다. 또한 성도 몸의 부활이 없으면 역시 복음이 아닙니다.

 

둘째, 부활의 복음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예수 메시아로 교회의 터를 잘 닦을 때(3:10) 가르쳤던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 진리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셋째, 부활과 관련해 고린도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비상식적인 것이고, 영에 비해 몸을 중시하지 않는 당시 생각 속에서 몸의 부활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넷째, 고린도 성도들은 진리에 계속 서야 합니다. 그는 복음의 내용을 상기시켜 굳게 붙잡으라고 하고, 그들이 가진 믿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계속 부활 내용을 뺀 채로 복음을 믿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결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진리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활 진리는 세상 사고를 따를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일하심의 진리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다섯째, 구원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계속 진리 안에 서 있음으로 완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완성을 향해 가는 ‘구원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활과 관련한 복음의 내용(3-8)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신비한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성경대로 사는 것을 열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3-8)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바울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1) 복음의 내용: 메시아의 죽음(3-4)

 

바울은 부활과 관련한 복음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바울이 받은 것을 독자들에게 전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접속사로 시작하는 네 가지 일련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사건은 메시아의 죽음입니다. 메시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었습니다. 구약 약속의 성취로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더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적은 십자가에 대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 이미 가르쳤기에 더 설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열쇠는 ‘성경대로’입니다. 메시아 고난에 대한 구약 본문들이 여럿 있지만, 특별히 죄 용서와 관련해 신명기 21:22-23과 이사야 53장이 대표적입니다. 신명기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사람들 죄를 대신 지고 고난당한 자의 이야기입니다. 신명기 내용과 연결시키면 메시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서 죽은 것은 사람들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둘째 사건은 메시아의 장례입니다. 성경 예언(이사야 53:9)의 성취이지만, 바울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건은 부활입니다. 성경대로 제 3일에 다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모든 과정은 구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의 성취이며 요소들 모두가 구원사건의 핵심입니다.

 

(2) 복음의 내용: 메시아의 부활과 증인들(5-8)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한 네 번째 사건은 예수 부활을 목격한 것입니다. 바울은 상대적으로 이 부분을 길게 언급합니다. 전하고 싶은 주된 초점이라는 말입니다. ‘그후에’를 통해 시간 순서로 목격자들을 소개합니다. 처음은 게바, 곧 베드로이고 그 후는 열두 사도입니다. 그 후는 오백 명 넘는 형제들이고 그 후는 야고보이며 그 후는 많은 사도들이고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입니다.

이런 설명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부활과 관련한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목격자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본 것이 아닙니다. ‘보다’동사의 수동형과 대상을 의미하는 여격(~에게)을 통해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이 보게 되었음을 묘사합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따라 목격자들을 네 그룹으로 구분합니다. 베드로와 열두 사도, 오백 명 넘는 형제들, 야고보와 많은 사도들, 그리고 바울입니다.

둘째,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여러 목격자를 열거한 것은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오백 명 넘는 형제 중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첨가한 것(6)도 그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 역시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한 자입니다. 비록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 같은 자이지만, 그에게도 주님이 나타나셔서 부활하심을 알게 했습니다.

 

바울 자신에 대한 추가 정보와 결론(9-11)

온전한 복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나타내고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은 결코 ‘더 많이 수고하면서’ 부활을 전하는 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9-11)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는 표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나’라는 1인칭 강조 지시어를 통해 사도 중 가장 작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설명은 바울의 구원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의 대조로 진행됩니다. 먼저 구원 이전 상태입니다(9). 그는 감히 사도라고 불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1-2 내용을 반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에서는 주의 제자들을 핍박했다고 표현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참조, 갈라디아서 1:13, 23; 빌립보서 3:6)라고 말합니다. 몇 가지 생각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교회관입니다. 그는 교회를 건물이 아닌 사람들, 곧 하나님 백성의 모임으로 이해합니다(1:2). 더 나아가 교회를 메시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반영한 듯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는데,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왜 자기를 핍박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을 예수님과 동일시한 표현입니다. 이 경험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서로 뗄 수 없는 한 몸으로 인식하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바울이 편지를 쓰는 의도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자였습니다. 지금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그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 교회를 핍박하던 자가 사도가 되어 교회를 세웠고, 지금 어지러운 교회를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10절은 ‘그러나’를 통해 구원 이후의 반전 상태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비교하거나 경쟁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것에 응답해 충성스럽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은혜입니다. 구원과 은사와 지식을 도구 삼아 비교와 경쟁으로 교회를 어지럽힌 고린도 성도들과 다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그간 언급한 복음의 내용과 부활에 대해 결론짓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의 복음 전파 내용이 다르지 않다는 것과 그 내용을 독자들이 믿어 구원을 경험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의 내용이 담긴 복음은 바울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만 전한 것도 아닙니다. 목격자가 있는 역사적 사실로, 초대 교회 모든 사도와 전도자들이 공유하고 있고 또 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 역시 경험으로 확증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난 모든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삶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그간 모든 역사를 설명할 수 없고, 우리가 선 가리를 알 수 없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생명도, 소망도, 삶의 의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 6:9-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인 송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이 부분을 괄호 안에 넣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불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 부분을 괄호 안에 넣어서 처리하거나 어떤 역본에는 생략을 한 것은 이 부분이 오래된 중요한 사본들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원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원본이 있다고 한다면 수천억 수조원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원본을 보고 쓴 사본들이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후대 사람이 기도를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고 끝내니까 좀 이상하고 또 다른 기도문에는 보통 송영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에는 빠져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채워 넣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시시한 부분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없었던 것을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본을 만든 사람들이 실수로 이 부분을 놓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놓쳤든 누군가가 삽입을 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이 꼭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기자를 통하여 기록하신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본문의 송영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대개”라는 말에 대한 것입니다.

예날 성경찬송가 앞에 나오는 주기도문에는 “대개”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없었지만 주기도문에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버릇이 돼서 대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찬송가를 편집하신 분에게 왜 대개라는 말을 뺐는지 질문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이유를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대개라는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 대개라고 쓰는 단어는 한자어가 다른 대개(大槪)라는 말로 이해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대강, 대부분”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서 대개라는 말은 한자어가 다른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쓰는 대개는 한자어는 개(槪)자를 대개 개자를 써서 대개(大槪)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서는 뚜껑 개(蓋)자를 써서 대개(大蓋)라고 합니다.

“일의 큰 원칙”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대개(大蓋)입니다.

 

 

헬라어 원어는 호티(ὅτι)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왜냐하면”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for로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기도를 마치고 왜 이렇게 기도하느냐 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죄 사함을 구하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느냐 하면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지 알지 못하고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권세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기도문처럼 기도하는 이유를 바르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이 송영의 부분이고 그래서 그것을 연결하는 대개라는 말이 참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생략하지 말고 그대로 사용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비단 주기도문만 그 이유를 알고 기도할 것이 아니리라 모든 부분에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참 중요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믿음 말고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고 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새로 정하신 의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우리의 삶이 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구원해 주셨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찬송을 불러야 합니까?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설교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까?

비록 목사라는 한 인간이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말씀을 하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왜 매주 이렇게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왜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기도를 마친 후 송영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왜 이렇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 참된 기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나라"라는 말은 "주권" 곧 “다스림”을 뜻하는 말입니다.

천국의 가장 첫째 되는 뜻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이나 화려한 환경이 아니라 왕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를 다스리시고 내가 그 다스림에 복종할 때 우리도 이미 하나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으면 그 가정이 천국이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관계가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면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사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다스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는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와 같을 수 없습니다.

누가 대통령을 한다고 해도 거기는 온갖 실수들이 있게 마련이고 공평과 정의가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공평과 정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실 수 있는 만왕의 왕이시오 참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권이라는 말을 하나님께 쓸 때 절대주권이라는 말로 씁니다.

하나님은 상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대주권이 있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다스리실 때 거기 공평과 정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절대 권력을 준다면 거기는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자들에게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싫어하고 순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교회에서 순종하라고 하면 사람들이 참 싫어합니다.

권력에 희생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순종은 사람에게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기도가 달라집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같은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먼저 기도합니다.

 

 

그들은 나 자신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게 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완전한 나라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이미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종이나 혹 회사의 사원이 그 주인이나 사주에게 결재를 올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그 결정의 권한을 절대적으로 그 주인이나 사주에게 있는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원이 사주에게 종이 주인에게 결정해줄 것을 강요할 수 없고 다만 그의 생각을 말하고 주인의 뜻과 일치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주인이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도 이러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온갖 것을 구할 수는 있지만 주시고 안 주시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구하는 자의 태도나 공로나 열정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혹시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거나 잘못 구한 것이나 불리하게 구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고집스럽게 하는 기도는 이 하나님의 주권에 반항하는 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도 끝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덧붙였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2.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권세"→"두나미스"→"다이내믹"→"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권세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강력한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마치면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실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기도가 잘 못 되었거나 응답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기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무한하십니다.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일은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를 위하여 안 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제단과 대결하던 바알의 제사장이 하던 것처럼 광적으로 상처를 내면서 자학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도할 때에 마치 하나님께서 주무시기나 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를 드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영원토록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권세라고 할 때 능력이라고 할 때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본 말씀은 복음의 능력일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라고 했습니다.

여기 능력이라는 말이 권세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이 바로 의인이 되고, 사탄의 종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히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신비한 몸으로 부활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도 믿지 못합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가셨다고 하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 위로 걸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돌을 밟고 지나가셨는데 제자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그 전능하심으로 못하실 것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3.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많이 씁니다.

개혁주의자들의 주장 중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주제가 있을 만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막상 영광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마땅히 대답할 말을 잘 모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말하고 비슷한 말로는 명예, 광영 등이 있고 반대말로는 치욕, 불명예, 굴욕 등의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이란 최고로 빛나는 것이고 최고로 아름다운 것이며 최고로 선한 것이며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이며 최상의 기쁨 최고의 명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최고의 칭찬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순간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영원토록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최고의 가치와 칭찬을 사람에게 돌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만 이런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마라톤 선수가 세계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습니다.

정말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순간입니다.

시상대에 올라서 금메달을 받고 인터뷰를 합니다.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예 저를 이렇게 훈련시켜주신 감독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 저를 낳아주시고 뒷바라지 해 주신 부모님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예 저와 함께 이 고난의 길을 걸어온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립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일을 하지도 못하고 또 했다고 해도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미화하고 자랑하기에 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세상에서나 선하시고 좋으신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뿐이십니다.

칭찬을 받으실만한 분은 인정을 받으실만한 분은 영광을 받으실만한 분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도와주실만한 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만한 분은 우리가 잘못기도했을지라도 더 좋은 것을 주실만한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주기도문 강해를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할 것은 그저 주기도문을 시간에 따라 순서에 따라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뜻을 깨닫고 그 뜻을 깊이 새기면서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로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기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뜻이 이루어 지이다. 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몇 십 년 먹을 것을 쌓아 놓고 싶으면서 이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받을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이나 마귀의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개, 즉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권세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올바른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야고보서 4:11–12

 

율법의 판단자가 아닌, 율법의 행위자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날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의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말과 판단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깊은 영적 무게를 가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도덕적인 언어생활의 권면을 넘어서, 하나님의 통치와 권위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위치를 재정립하게 합니다.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단지 인간 간의 문제를 넘어서, 결국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 자신을 판단하려는 태도임을 밝힙니다. 이러한 언행은 곧 구속사 안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이 지녀야 할 경외심과 겸손함에서 벗어난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입술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반영인지, 그리고 진정한 복음의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어떤 자세로 공동체를 섬겨야 하는지를 함께 묵상해보겠습니다.

 

1.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4:11上)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4:11上)

야고보는 따뜻한 호칭인 ‘형제들아’로 이 권면을 시작합니다. 이는 단호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가족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권면입니다. 여기서 '비방하다'(καταλαλεῖτε, katalaleite)는 헬라어로 '비하하다', '험담하다'는 의미로, 단지 비판이나 건설적인 충고가 아니라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의 말입니다. 이는 곧 형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보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비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무서운 죄입니다. 비방은 상처를 남기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자녀를 향한 언어는 곧 그분을 향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형제를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피조물을 조롱하는 자이다”라고 말하며, 비방의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비방합니까?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상대를 낮춤으로써 자신이 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보이고 싶어하는 숨은 교만이 작용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마 12:34). 즉, 비방은 내면의 정죄와 교만이 외형화된 언어입니다. 성도는 입술을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형제를 축복하는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2. 형제를 판단함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다 (4:11下)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4:11下)

 

야고보는 단순히 형제를 향한 말이 아니라, 그 판단의 태도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무서운 영적 원리를 선포합니다. 율법은 인간이 평가할 대상이 아니라, 순종할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은 그의 뜻과 성품을 반영하며, 그 율법 안에서 모든 공동체는 공의와 자비의 질서를 유지하게 됩니다.

 

‘판단한다’는 말은 단지 도덕적 평가나 올바른 권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누가 율법을 어겼고 누가 자격이 없는지를 결정하는 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사람은 율법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율법 위에 서는 자는 곧 하나님 위에 서려는 자”라고 경고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욕망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교만이 바로 이 판단하는 마음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준행자, 곧 율법에 순종하는 자는 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며, 동일한 긍휼이 자신에게 필요함을 압니다. 그러므로 그 입에서는 판단이 아니라 자비와 인내가 흘러나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우리가 무자격자임을 먼저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본 자만이 타인을 향해 정죄하지 않고,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십니다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4:12)

 

이 구절은 야고보서 전체의 윤리적, 신학적 중심을 담고 있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일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시며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입법자와 재판관, 이 두 개념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위입니다. 사람은 판단받는 자이지, 판단하는 자가 아닙니다.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심판의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 가치를 정하는 자리에 서는지를 일깨우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판단은 공의롭고 완전한 기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야고보는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무지를 드러냅니다. 이 질문은 욥기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일련의 질문들과 유사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지닌 연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격려하며 함께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려던 군중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판단을 멈추라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자들이라는 본질적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정죄의 집단이 아니라, 은혜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결론: 비판이 아닌 은혜의 통로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은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무서운 영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단지 상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는 시도이며, 이는 구속사의 흐름 안에서 매우 심각한 배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제정자이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앞에 겸손히 서야 할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정죄의 도구가 아닌, 축복과 중보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은혜로 말합니다. 자비를 입은 자는 자비를 베풉니다. 그럴 때 우리는 율법의 판단자가 아닌, 진정한 율법의 행위자로, 복음의 통로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말과 판단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겸손히 살아가며, 공동체 안에서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복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출처: https://392766.exbible.net/entry/야고보서-411–12-강해-형제를-비방하지-말라 [Pensées:티스토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6:9-13

오늘은 주기도문에서 인간에 대한 마지막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을 위한 첫 번째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였습니다. 두 번째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셋째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시험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이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시험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험입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 단련하시기 위한 시험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사탄의 시험입니다.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리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같은 기도입니다. 여기서 악이란 악도 되고 악한 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악한 자는 사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악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기도는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이 전혀 없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이 기도는 사탄의 시험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사탄의 시험이 있어도 그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기도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끊임없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시험이 끝나고 난 다음에 눅4장 13절에 “눅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잠시동안/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얼마 동안”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잠시 동안”이라고 하고, 또 공동번역에서는 “다음 기회를 노리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았지만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은 “히4:15.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히 4:15)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있냐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또 왜 사탄이 이렇게 나를 시험하는가 라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또 사탄은 예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시험하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시험이 있어도 시험에 들지 않으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시험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늘은 저렇게 맑고 푸른데 하나님은 왜 내 삶을 저렇게 맑고 푸르게 하지 않습니까? 라고 원망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극심한 사탄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도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26장 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에게 시험을 해 와도 그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합니까?

 

1)먼저 우리는 사탄의 존재와 시험에 대해서 영적으로 항상 깨어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이구나라고 깨어 있으면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사탄의 시험에 대해서 깨어있지 않을 때 사탄의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사탄의 시험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 응답이 보이지 않고,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시험을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께 대하여 낙심하게 만들고, 기도에 대해서도 낙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또한 기도의 응답을 받고, 일이 잘될 때도 시험을 합니다. 기도응답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 이제 이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하고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만듭니다. 이것도 사탄의 시험입니다.

또한 일이 잘 되면 그 일이 마치 사람의 힘으로 된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도 사탄의 시험입니다.

또 이제 모든 일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사탄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절대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죽기까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에도 시험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면 무얼 하겠는가? 남들은 쉬는데 왜 나만 일하는가?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가 일을 중단하고 포기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은 우리가 일을 다 한 후에도 시험을 합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일을 하였으니 쉬어야겠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사탄은 우리가 일을 할 때만 아니라 일을 다 하고 쉬려고 할 때도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건강할 때도 시험을 합니다. 그래서 건강하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육신의 안락과 게으름과 편안 가운데 젖어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또한 사탄은 우리가 건강하지 않을 때도 시험을 합니다.

그들 육신이 약하여져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사탄은 시험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바쁘고 육신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해해주시지만 우리를 노리고 있는 사탄은 절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육신이 약하니 사탄이 이해해주겠지-기도하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 육신이 약할 때 더 강하게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 사탄은 평안 할 때도 시험을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평안이 아니라 “편안해 편안해 내 육신 내 육신 편안해” 할 때 영적 무지와 나태와 거짓 평안으로 빠지게 해서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또한 사탄은 극심한 환난가운데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환난을 당할 때는 몇 가지의 일들이 갑자기 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우리가 평안 할도 시험을 하고, 또 극심한 환난가운데서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 오늘 이 시대는 사탄이 우리 가정과 교회를 향해서 끊임없이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에 대해서 항상 깨어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둘째로 우리는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 현재적 약점에 대해서 항상 깨어있어합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현재적 약점을 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현재적 약점이 무엇인지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마26장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의 현재적 약점은 육신의 피곤함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기도해야할 때 잠을 자게 되고, 결국 사탄의 시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지금 나의 현재적 약점이 무엇인지를 깨어서 살펴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습니다. 돌도 떡덩이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때 사탄이 무엇을 시험합니까?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지금 경제적인 빈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탄은 항상 그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여러분을 시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여러분들의 현재적 약점이 감정의 우울함에 있습니까?

 

“빌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합니다.

왜 사도바울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언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합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없을 때입니다. 감정적으로 우울하고 여유가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안에서 항상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항상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여러분들의 현재적 약점이 감정의 흥분에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또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합니다.

왜 성을 내더라도 더디 내어야합니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흥분하다 보면 마귀가 틈을 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현재적인 약점이 감정의 흥분에 있을 때는 잠잠히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시37: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의 현재적인 약점이 제자들처럼 육신적으로 연약과 피곤함에 있습니까? 너무 바빠서 피곤해서 기도할 시간조차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사탄은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시험하고 있음을 명심하시 바랍니다. 바쁠수록 더 기도 해야합니다. 피곤할수록 더 하나님께 엎드리고 나와야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무엇보다 기도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마26장 41절에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가 중단될 때 시탄이 항상 우리를 시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기도는 스페어타이어가 아니라 핸들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페어타이어는 항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필요합니다. 그런데 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핸들은 항상 붙잡고 있어야합니다. 핸들을 놓치는 순간 사고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도를 위기의 순간에만 필요한 스페어타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한 순간도 놓을 수 없는 핸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항상 깨어서 기도함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4:1-10) 

 

사람은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가 생긴 것입니다. 사람은 가까이 하는 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까이 하고 있나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야고보서 4장 7절과 8절은 우리에게 마귀는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가까이 하지 말고, 대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피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귀는 멀리하고 대적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사람입니다. 시편 65편 4절은 “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시편 73편 28절에서는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야고보서 4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싸우지 말고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1-3절)
야고보서 4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보면,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정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심지어 살인까지 해도 원하는 것을 결국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고, 기도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툼을 그치지 않고 세상 정욕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와 다투고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다툼을 그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대부분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가려면 반드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6절)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을 보세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으려면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교만한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오히려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는 사울의 퇴장과 다윗의 등장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도 왕이 되기 전에는 아주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겁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는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기의 능력인양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제사장인양 제사를 집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을 버리셨고, 겸손하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소년 다윗을 택하셔서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로 죄를 떠나야 합니다.(8절)
야고보서 4장 8절 말씀을 보세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한 다음에 바로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품고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죄인을 가까이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를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욕심쟁이라 그런가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그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를 예수의 피로 사함을 받은 후에는 그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한다고 하는 것은 죄의 자리를 멀리하는 것이고, 죄를 범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와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말씀을 보세요.“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에게 복종하지 말고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저지르다가 피를 흘리지 말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워서 죄를 이겨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기도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5장 13절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4장 2절과 3절 말씀을 보세요.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말씀합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나 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잖아요? 관계가 친밀할수록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나쁘면 아예 말도 안 섞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말이 잘 통하느냐 하는 것이 친밀도의 바로미터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겁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만 갑니다.
 
지난 주간에도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습니다. 14살 아들이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폭행해 죽인 일도 있었고, 20대 여동생이 죽은 강아지 악령에 씌었다고 친오빠와 엄마가 잔혹하게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져만 갑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는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빛이 비춰지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

고린도전서 14:20~40 /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20절부터 40절입니다. 이 본문은 은사, 특별히 방언과 예언에 대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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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많았음에도 교회 안에는 혼란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자기 자랑과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하면서 예배가 무질서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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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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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통해 세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앙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분별로 살아야 합니다 (20~25절)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신앙생활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에서는 성숙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은사를 체험하는 것 자체에만 집중했습니다. 특별한 체험이 많을수록 더 신앙이 좋은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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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은 "성숙한 신앙은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방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계속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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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께 경배하게 만든다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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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도 질문해야 합니다.

  •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을 세우고 있는가?
  • 나의 신앙은 체험 중심인가, 말씀 중심인가?
  • 나의 신앙은 성숙한 분별을 가지고 있는가?

​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린 신앙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을 원하십니다.


2.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26~33절)

26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명령합니다.

교회는 나를 드러내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

은사는 많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양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섬김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예배의 질서를 세밀하게 제시합니다.

  • 방언은 통역이 있을 때만 하라.
  • 예언은 차례대로 하라.
  • 다른 사람들도 분별하라.
  • 한 사람이 독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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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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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서는 성령의 역사를 막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서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입니다.

​

성령의 역사는 혼란이 아니라 화평을 가져옵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질서를 지킬 때 공동체는 더욱 건강해집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예배입니다 (34~40절)

본문 마지막 40절은 매우 중요한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예배는 단순한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예배는 감정만이 아니라 경외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만이 아니라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만이 아니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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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형식만 남은 예배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사라진 메마른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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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질서를 잃어버린 예배입니다. 개인의 감정과 경험이 말씀보다 앞서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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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말씀과 성령, 자유와 질서, 열정과 품위가 조화를 이루는 예배입니다.

​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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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1.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분별력을 가지라.
  2. 받은 모든 은사를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하라.
  3.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하라.

​

교회는 나를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예배는 내 만족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성도로, 그리고 질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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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은사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체보다 자신의 만족을 앞세웠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성숙한 믿음을 주시고, 받은 은사로 교회를 세우게 하시며, 모든 예배 가운데 품위와 질서를 지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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