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 있는 믿음의 열매  야고보서 3장 1-12절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합니까? 부정적인 말, 거룩하지 않은 말을 주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말은 인격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의 지체들 중에 신묘막축한 지체는 혀인 것 같습니다. 10cm 혀로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의사 소통을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증명하기 위해 첫 번째로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합니다. 총 네 가지의 법주로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 범주는 ‘말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에 대한 힘(1-2)

지도자는 다른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책임을 지기도 합니다. 지도자에게는 그에 따르는 많은 직책도 주어지지만 책임도 부여됩니다.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1-2)

 

 

야고보서 1-2장은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 행함이란 하나님의 긍휼(헤세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긍휼의 실천 중 첫 번째 행함인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혀의 부정적 이미지를 크게 네 파트로 나눠서 예를 들어 설명하고 강조합니다. 그것을 근거로 혀의 사용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1) 말이 많은 사람(1)

 

당시 야고보를 읽는 대상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선생’하면, 유대인의 율법 선생인 ‘랍비’이 가졌던 모종의 지위와 존경을 받고자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도적 혹은 예언자적 지위를 갖춘 정식 선생들에 대한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초대교회는 당시에는 낯선 사람들까지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관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생’ 대우를 받으면서 많은 것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게 되니, 강론 시간이 ‘아무 말 대찬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인기 강사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없고 ‘강연회’가 되어버리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생’들이 누리는 것만 생각하고 자신의 책임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점점 식상해져 버리고, 사회 사교장이 되어버려서 교회를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치는 일은 꼭 수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 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받을 정죄함이 더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졌다고 고백한 자에게는 그 의무를 수행할 더 많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2)

 

야고보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만 손가락질하는 마음으로 지적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발행한 문제들은 대부분 말의 실수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수단이 있지만, 보통은 말로 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오해도 많습니다. 어디를 막론하고 붙어 다니는 이 조그만 혀만큼 그리스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만일 성도가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온전한 사람(완벽한 사람)입니다. 혀는 능히 자기 온 몸도 굴레 씌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길들려진 혀를 필요로 합니다.

 

말에 대한 문제(3-8)

우리 몸에서 혀는 작은 편입니다. 하지만 제어하기 어렵고,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혀는 훈련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혀로 악의를 가지고 내뱉은 한마디 말은 인격을 파괴하고 영혼을 실족하게 합니다. 그래서 혀는 인생의 방향까지도 결정합니다. 혀는 훈련시킨 대로 움직임입니다.

 

3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사람들이 실수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말(言)입니다. 인간은 듣는 존재인 동시에 말하는 존재입니다. 언어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말을 통해 생각을 전달하고 다른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반면 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1) 혀의 위력(3-5)

 

말(馬)은 입에 물리는 작은 재갈로 통제하고, 큰 배도 조타실에서 작은 키로 운항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작은 불씨로 큰 불을 냅니다. 이처럼 혀는 작지만, 그 위력은 전체 방향을 좌우하는 큰 힘을 지닙니다.

말 한마디가 축복과 저주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혀는 잘 사용하면 엄청난 유익이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엄청난 손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말실수는 한 번에 그 동안 평생 쌓아온 높은 직위와 주변 관계 그리고 많은 재물까지도 허물어뜨리고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2) 혀를 통한 사단의 공격(6-8)

 

혀가 큰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험성 또한 큽니다. 더 위험한 것은 길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혀는 작으면서도 그 영향력은 대단하기 때문에, 사단이 이용하려고 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말을 사용할 때, 부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구사하도록 합니다.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단언합니다. 화가 난 혀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타오릅니다. 혀를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때로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 전부 불태우며 지옥 불을 경험하게 합니다. 말은 진실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이 중요한 만큼 통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혀는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혀가 무서운 것은 길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생물들은 훈련만 시키면 얼마든지 길 드려집니다. 개들도 훈련을 통해서 주인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새들도 훈련시키면 순종합니다. 하지만 혀는 길 드려지지 않습니다. 혀를 길 드릴 수 없는 이유는 ‘정함이 없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기’ 때문에, 제어하기 쉽지 않습니다.

혀로 나오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혀는 자연 상태로는 타락한 사람들의 혀에서 나오는 말은, 절대로 용기를 주고 살리는 말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이미 죄로 물들어 길들일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말에 대한 이중성(9-12)

누구나 말 실수를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의 선한 기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통해 우리는 말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9-12)

 

 

본문에서는 혀의 힘과 그 위험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악을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모순된 행동입니다. 또한, 같은 근원에서 단맛과 쓴맛이 나올 수 없듯이, 우리의 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 양면성을 가진 혀(9-10)

 

야고보는 이중적인 언어를 ‘독사의 둘로 갈라진 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로운 찬양을 할 때 보면, 찬양하는 모습이 천사가 내려와서 찬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들이 형제·자매들과 싸우며 욕하는 모습을 보면, 사탄 같아 보입니다.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2) 선한 혀를 가짐(11-12)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셨을 때 먼저 거룩한 제단의 숯불을 그의 입술에 닿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입술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의 내면세계가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언어(言語)의 변화는 인격(人格)의 변화입니다. 인격이 변하면 언어도 변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혀로 지은 모든 죄를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입술에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에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입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혀를 주신 이유는 진리를 말하라고 주셨습니다. 찬양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언어를 주셨습니다. 죄로 물든 입술을 날마다 성령의 불로 정결케 해주시기를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혀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맞게 진리를 나누고 찬양하는 거룩한 삶을 사시길 소망합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8~13

 

 

 

 
 
 

고린도전서 13 장

 

8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말씀 요약 >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이 13장의 서론이라고 한다면, 4-7절은 13장의 본론, 8-13절은 13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론(고전 13:1-2)에서 언급했던 은사들(사랑, 예언, 방언, 지식)을 결론을 시작하면서 다시 언급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절). 사도 바울이 지금 여러 은사들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들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놀라운 은사들을 받기를 사모하기는 했지만, 정작 은사를 주신 목적은 망각한 채, 바른 정신과 태도로 은사를 잘 사용하지 못하여 교회를 오히려 무질서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은사를 다른 지체들의 복과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고전 12:7).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사랑과 함께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바로 이 진리를 교훈하기 위해서 사랑의 은사에 대한 교훈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이고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은사들

사도 바울은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나, 그 외의 여러 다양한 은사들도 모두 끝날 때가 있고 폐지될 때가 있겠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8절). 예언의 은사는 좁은 의미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을 미리 알고 말하는 은사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마음으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설교의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설교)의 은사는 우리가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교회에 필요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예언과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도 그렇습니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말과 뜻이 모두 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은사도 폐할 것입니다. 이 말은 천국에서 지식 자체가 필요 없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은사로서의 지식”이 필요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식의 은사란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깊은 뜻)과 복음의 도리(진리)를 잘 깨닫게 하고, 그것을 또한 다른 지체들에게 잘 가르쳐서 다른 형제들을 깨우치고 유익하게 하는 은사를 말합니다(고전 13:2). 그런데 나중에는 이 지식의 은사라는 것도 결국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충만하고도 완전한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있다”(9절)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예언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온전하게 되고 온전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다 폐지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0절). 그것이 당연합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의 은사와 같은 많은 은사들은 매우 일시적(현재적)이고, 매우 제한적이고, 매우 부분적일 뿐입니다.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완벽하게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 다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부분적입니다. 어떤 특정 부분에 깊은 깨달음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 아무리 신령한 목사라고 하더라도 성경을 완벽하게 다 알고 다 깨닫을 수는 없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내가 온전히 알리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은사들은 매우 일시적입니다. 많은 은사들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러한 은사들은 크게 필요하지 않아서 폐지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11절)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과 같은 은사들이 그러합니다. 그러한 은사들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 금생에서, 잠시 잠깐 필요할 뿐입니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방언의 은사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나 설교의 은사나 지식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절)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온전한 것이 올 때”(10절)인데, 그 온전한 것이 올 때란 우리가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합니다. 고대의 거울은 청동이나 구리 같은 금속의 표면을 연마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로 보는 모습은 매우 흐리고 부분적으로는 희미하고 왜곡되게 보였습니다. 여기 희미하다는 말(헬, 아이니그마)은 본래 “수수께끼”를 의미합니다. 알쏭달쏭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리 예언의 은사가 있고 지식의 은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알고 알쏭달쏭하게 알 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우리가 모두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로서의 예언도 폐하고 은사로서의 지식도 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은사들이 부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러한 은사들은 교회 시대의 일정한 시기, 일정한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필요하고 사용될 뿐입니다.

 

탁월하고 본질적이며 영구적인 은사, 사랑

그러나 사랑의 은사는 그런 은사들과는 다릅니다. 그러한 은사들에 비해 사랑이라고 하는 은사는 매우 탁월하고 본질적이며 영구적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은사를 계속 필요로 합니다. 사랑의 은사는 지금도 우리가 계속 사용하고 누려야 하는 중요한 은사이지만, 우리가 완전히 영화롭게 되고 온전하게 되어도 우리가 계속 사용하고 누리게 될 본질적인 은사입니다. 사랑은 폐지되지 않습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가 완전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그때에 폐지되지 않고 중단되지 않을 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은사들은 천국에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천국에서도 우리가 누리는 이 생명, 이 영원한 생명이 계속 될 것을 믿으며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역할과 소망의 역할은 사랑의 역할에 비하면 그렇게 두드러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고 향기롭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들이 다양하고 저마다 특색이 있고 가치가 있지만, 사랑의 은사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신자의 신앙 정도 혹은 경건의 실력은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하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행으로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여러 좋은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을 “더욱 큰 은사”(고전 12:31)라고 부르면서, 사랑을 추구하면서(pursue) 다른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4: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 사랑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이라면 행함을 수반하게 되어있고 참된 믿음이라면 사랑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점검해 봅시다. 우리에게 주신 좋은 은사들을 사랑 없이 잘못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찾아서 회개합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증거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마태복음6:9-13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 강해 네 번째 시간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도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7가지 간구 중 세 번째 간구입니다. 사실 이 기도는 매우 드리기 어려운 기도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못지않게 우리 자신이 소원하고 비중을 두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항상 일치한다면 이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뜻을 반할 때가 많기에 이 기도는 매우 어려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기도는 ‘주님 내 모든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도를 친구의 번영과 행복을 비는 기원이나 덕담 정도로 생각합니다. 즉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란다’거나 ‘뜻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는 식의 말 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이러한 기원이나 덕담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며 내 모든 소원과 욕심조차도 철저히 주님의 뜻 앞에서 죽고 주님의 뜻만이 서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기도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난과 역경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지만 그 조차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던 이 기도야 말로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의 진수이며 절정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 부담없이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쉽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무책임한 신앙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과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목적과 계획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라고 말씀하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온 인류의 구원과 회복이야 말로 하나님의 첫째되는 뜻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인간 개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부적인 뜻이 있는데 성경은 인간을 향한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아놓은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을 매우 어렵고 힘들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혹 그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도 충분한 시간을 내어서 그 뜻을 발견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앤드류 머리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알고자 수고하며 노력하는 자세가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고 나를 향하신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수고를 보일 때 그 안에서 우리는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졌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하늘의 현실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을 말합니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실현되며 성취되는 나라이며 또한 오직 그분의 통치와 주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늘에서 그의 뜻이 이루어졌다 고 하는 말은 첫째 천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천사들은 그를 받들어 섬기며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고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성취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는 말씀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계획이 성취되어 그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조차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모습을 말하는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를 끊게 되고, 부정한 입술의 습관을 버리게 되며, 불만과 투정으로 가득찼던 그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게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온 인류의 구원이며 예수님께서도 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고자 오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지상 최대의 뜻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게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룰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강물에 비교한다면 기도란 수도관과 같아서 기도라는 수도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인 강물이 거세게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기도없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으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은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후레드릭 미코니우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루터에게 큰 힘이 되는 친구로서 루터는 그를 통해 많은 위로와 기쁨을 받고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이 한창인 무렵 후레드릭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두고 루터에게 최후의 유서를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루터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기도를 통해 그의 친구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후레드릭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살 것을 명령한다. 종교 개혁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아직 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결코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는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이 편지를 받은 후레드릭의 병은 급속히 회복되었고, 6년을 더 살면서 루터를 도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위해 우리의 온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내 필요와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기도와 그 뜻이 이루어 지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드러내며 그것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고,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3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말이나 사소한 행동조차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전적인 순종과 자기 부인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서 거룩한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했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인간이기에 그 안에 존재하는 선천적인 본능으로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예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극복하시고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의 수고와 몸부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고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안락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며 야심이나 포부를 접어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수고와 몸부림의 기도를 통해 이일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나 자신을 철저히 죽이는 삶을 살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인생 방향과 목표를 하나님의 중심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이 세상 구원에 있다면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표는 그것에 맞추어 져야 합니다. 이러한 인생 방향과 목표가 하나님 중심에 맞추어 지면 인생의 설계, 선택 모든 계획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한 삶, 선택 행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초점이 비뚤어져 있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주류를 유통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술을 많이 마실 뿐만 아니라 자주 주일 성수를 어기게 되었고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자 갖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제 직업이 집사로서 합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집사님, 집사님의 직업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까?” “ 아니요, 오히려 정반대인듯합니다.” “그렇다면 집사님 그 직업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잡고 그에 합당한 새로운 직업을 찾으십시오” 그 집사님은 목사님의 권면을 받아들여 즉시 사업을 정리하고 기도 중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회사를 다니고 얼마를 버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었다면 우리의 사업과 학업과 모든 선택에 대한 해답은 명료해 질 것이며 분명해 질 것입니다.

 

넷째 일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고 전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교회 일에 너무 지쳐서 아주 피곤한 상태에 처해서 휴가를 신청하였습니다. 드디어 열흘 후에는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부인과 함께 오랜만에 얻은 휴가이기에 매우 즐거워하며 마치 초등학생이 소풍 가는 날을 학수고대하듯 열 개의 매듭을 만들어 하루에 하나씩 잘라가며 그 날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틀을 남겨 놓고 목사님은 덜컥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휴가고 뭐고 다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 목사님은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여보, 다시는 인간 마음대로 휴식할 때를 정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쉬라 하시면 쉬고, 일하라 하시면 일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일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 안에서 아무 것도 작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뜻 밖에서는 아무 것도 큰 것이 없다.” 하나님의 뜻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이 놀라운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하며 나 자신을 철저히 그 뜻에 복종시키고 모든 인생의 초점에 그 뜻에 맞추고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감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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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모든 것을 완성하는 그 길 (고린도전서 13:1-7)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는 늘 질문 하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 나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 역시 이 질문 앞에서 씨름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고, 예언하고, 놀라운 지식을 갖추고, 심지어 병을 고치는 권능을 소유하는 것에서 자기 존재의 증거를 찾으려 했습니다.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눈에 띄는 은사들을 자랑하며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때로는 노골적인 경쟁과 분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마주한 성경의 거울은, 그들의 열심과 성취의 목록 앞에 멈춰 서서, 그 모든 화려함이 무색해지는 단 하나의 진실을 조용히 속삭입니다.

만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라고 선포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사의 말이라니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신비롭고 영적인 언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웅변술에 감탄하고, 달변가의 논리에 설득당하며, 깊은 영적 지혜가 담긴 설교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언어의 성전이, 그 속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이 사랑의 공명을 담지 못할 때, 그것은 그저 금속이 마찰하며 내는 듣기 싫은 소음—공허한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관통할 힘도, 생명을 북돋을 따스함도 없이, 시끄럽게 울리다 사라지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은사는 통로일 뿐, 그 통로를 흐르는 내용물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용물 없는 통로는 텅 빈 깡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경고로 다가옵니다. 성경에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최상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시대를 예언하고, 깊은 학문적 지식으로 진리를 파헤칠 수 있다 해도, 만약 그 예언의 목소리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섬김이 아닌,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지식의 빛이 누군가를 정죄하고 배제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모든 것은 영적인 제로(Zero), 무(無)의 상태로 귀결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아무리 거대하고 웅장해 보여도, 그 근원이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즉 아가페(Agape)가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장부에는 기록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는 능력의 크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작동시키는 영혼의 태도와 중심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헌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 심지어 순교를 감수하는 것은 겉으로 볼 때 가장 고결한 희생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순교조차도, 그 희생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애나 종교적 열심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개인에게 영적인 유익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희생의 양(量)이 아니라, 희생을 바치는 마음의 질(質)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선행과 헌신은, 영혼을 살찌우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 공로를 쌓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선행은 사랑의 충동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행위를 낳지만, 행위가 곧 사랑은 아닙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이 숭배하는 능력, 지식, 심지어 희생의 행위까지도, 사랑이라는 '가장 위대한 언어'가 빠지면 그 가치가 무너진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절대적인 사랑,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이 '아가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성경은 이제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사랑의 구체적인 초상화를 펼쳐 보입니다. 이 초상화는 헬라어 동사들의 생생한 움직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 아름다운 사랑의 목록은 단순한 미덕의 나열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빛을 내듯, 물이 흐르듯, 사랑이라는 생명력 자체가 자연스레 드러내는 15가지의 역동적인 행동 양식입니다.

**오래 참는 것(μακροθυμεῖ, 마크로튀메이)**은 폭발하지 않는 힘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짜증, 불의 앞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라, 다른 이의 부족함과 실수를 끌어안을 만큼 영혼의 그릇이 넓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어떻습니까? 배우자의 반복되는 실수, 자녀의 느린 성장 속도, 직장 동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폭발적인 구리로 변합니까? 사랑은 그 순간, 가슴 속에서 조용히 끓는 용암을 식히며, "괜찮다, 내가 먼저 품겠다"라고 말하는 영혼의 근육입니다.

**온유함(χρηστεύεται, 크레스튜에타이)**은 능동적인 친절입니다. 그저 화를 내지 않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선을 베풀고 유익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 곤경에 처한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길입니다. 온유한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상대를 세워주는 섬김의 자세에서 꽃을 피웁니다. 여러분의 일상 속 작은 친절은 무엇입니까?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 식당 종업원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것, 묵묵히 제 몫 이상의 짐을 지는 동료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온유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타인의 성공과 축복을 볼 때 나의 영혼이 느끼는 날카로운 고통입니다. 시기는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을 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타인의 기쁨에 진심으로 참여하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그를 축복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περπερεύεται, 페르페레우에타이)**은 공허한 허풍과 과시를 뜻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묵묵히 존재하며,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왜곡된 자아상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합니다. 교만이 남을 깎아내려 자신을 세우는 칼이라면, 사랑은 자신을 내려놓아 남을 세우는 받침대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οὐκ ἀσχημονεῖ, 우크 아스케모네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무례함은 타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언행을 포함합니다. 이는 험담, 비아냥거림, 냉소적인 태도, 그리고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는 오만함까지 포괄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고 존중합니다. 또한, 사랑은 자기 이익(τὸ ἑαυτῆς, 토 헤아우테스)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이기심은 모든 죄의 뿌리이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랑은 '나의 것'을 고집하기보다 '우리의 것'을 구하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깁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οὐ παροξύνεται, 우 파록쉬네타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성냄은 갑작스러운 분노의 폭발을 의미하며, 사랑은 이 분노의 뇌관을 미리 제거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타인의 실수나 죄를 마음에 기록해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복수를 위한 장부를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상처를 곱씹고, 복수의 시나리오를 짜고, 끊임없이 그 사람의 단점을 되새김질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용서의 펜으로 그 장부를 깨끗이 지웁니다. 용서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상처를 떠올릴 때마다 다시 지우는 매일의 결단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의 마지막 네 가지 속성은 마치 영혼의 네 기둥과 같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도덕적인 양심과 정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죄의 달콤함이나 악인의 몰락을 보며 쾌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대신, 정의가 실현되고 진실이 밝혀질 때 함께 기뻐합니다. 우리의 기쁨의 출처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타인의 실패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성공과 회복입니까?

그리고 사랑의 영원한 불멸성을 나타내는 네 가지 동사가 뒤따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πάντα στέγει, 판타 스테게이): 여기서 '참는다'는 덮어준다, 보호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사랑은 비바람으로부터 상대를 보호하는 지붕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폭로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그를 감싸 안아줍니다. 이것은 덮어놓고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회복을 위해 그 약함을 인내로 품어주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πάντα πιστεύει, 판타 피스튜에이): 이는 순진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상대방의 변화 가능성, 그의 내면에 있는 선함의 씨앗을 끝까지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지만, 사랑은 그 실수를 넘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것을 굳게 믿어줍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πάντα ἐλπίζει, 판타 엘피제이): 상황이 절망적일 때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올 것을 아는 새벽의 파수꾼과 같습니다. 관계가 깨어졌을 때, 용서와 화해가 불가능해 보일 때, 사랑은 영원한 미래의 약속을 붙잡고 '될 수 있다, 회복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πάντα ὑπομένει, 판타 휘포메네이): 이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굴하지 않고 굳건히 버텨내는 지구력을 의미합니다. 이 견딤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사랑의 굳건한 기초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시험대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하며, 그 속에서 우리의 가치를 입증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 안에 사랑이 있느냐?"

사랑은 우리가 갖는 기술이나 자랑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입어야 할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사랑은 화려한 보석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평범한 순간, 가장 작은 관계 속에서 빛나야 할 섬유질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꽹과리 소리 같은 허무한 삶의 울림을 멈추고, 사랑이라는 가장 위대한 언어를 다시 배우고 말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우리의 교회를 하나 되게 하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는 이 십자가의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이 사랑의 길을 걸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설교 요약 (Summary)

고린도전서 13장 1-7절은 소위 '사랑 장'의 핵심으로, 은사(선물)와 사랑의 가치를 대조하며 시작합니다. 바울은 아무리 탁월한 은사(방언, 예언, 지식, 산을 옮길 믿음)와 극심한 헌신(전 재산 구제, 순교)이라 할지라도, 그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영적인 가치가 없으며 공허한 소음(꽹과리)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1-3절). 이어서 사랑의 본질을 15가지 동사적 특성으로 구체화합니다(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와 교만과 무례함을 배제합니다. 또한 이기적이지 않으며, 분노를 쉽게 터뜨리지 않고, 타인의 허물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사랑은 불의를 거부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신뢰하며, 소망하며, 견디어내는 영원하고 불멸의 덕목임을 강조합니다.

2. 묵상 포인트 (Meditation Points)

  1. 나의 '꽹과리'는 무엇인가? (1-3절): 내가 자랑하거나 의지하는 은사, 지식, 헌신이 사랑 없이 행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나의 가장 '화려한 성취'가 혹시 하나님 앞에서 '공허한 소음'일 가능성은 없는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2. 사랑의 동사적 초상화 (4절): 사랑은 감정이 아닌 행동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은 오래 참는다'와 '사랑은 온유하다' 중 한 가지 특성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며 살기로 결단하고 그 경험을 기록해 봅시다.
  3. 악한 것의 기록을 지우는 용서 (5절):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는 상처의 기록을 지우는 용서를 의미합니다. 내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처나 원망의 '장부'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지워나가기로 결단하며 기도합시다.

3. 강해 및 주석 (Exegesis and Commentary)

  • 문맥적 이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 문제로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12장). 특히 방언(언어의 은사)을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는데, 바울은 13장을 통해 모든 은사를 다스리는 최상위 원리가 바로 '사랑'임을 선언합니다. 13장은 12장의 은사론과 14장의 은사 활용론 사이에서 일종의 '정신' 또는 '규범' 역할을 합니다.
  •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소리 나는 구리(chalkos ēchōn)'는 잔치나 제례 때 사용되던 청동 타악기, '울리는 꽹과리(kymbalon alalazon)'는 장례식 등에서 시끄럽게 울리던 악기로, 모두 의미 없는 소음, 감정적이지 않은 차가운 소리를 상징합니다. 사랑 없는 은사는 영혼을 움직이지 못하는 공허한 형식에 불과함을 강조합니다.
  •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이는 자기희생의 극한을 보여줍니다. 당시 스토아 철학자나 킨키코스(Kynikos) 학파 중 명예를 얻기 위해 순교를 자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울은 이러한 이교적 동기의 희생조차도 사랑 없이는 무익함을 지적하며, 동기의 순수성을 강조합니다.

4. 원어 주석 (Original Language Commentary)

  • ἀγάπη (Agapē, 아가페): 인간적인 애정(필리아, Philia)이나 육체적 사랑(에로스, Eros)을 넘어선,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그분을 닮은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사랑'은 주어로서, 이 모든 행동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주체로 묘사됩니다.
  • μακροθυμεῖ (Makrothymei, 오래 참는다): 직역하면 '긴 분노(long-tempered)'를 뜻합니다. 즉, 보복할 능력과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잘못과 부족함에 대해 쉽게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오래 견디는 '인내'를 나타냅니다.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 χρηστεύεται (Chrēsteuetai, 온유하며): 단순히 소극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풀고 선을 행하는' 능동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부드럽고 유용하며 도움이 되는 태도를 포괄합니다.
  • οὐκ ἀσχημονεῖ (Ouk aschēmonei,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다'는 뜻으로, 품위 없고 부적절한 행동, 또는 타인에게 수치심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은 타인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 πάντα στέγει (Panta Stegei, 모든 것을 참으며): '덮다(cover), 보호하다(protect), 방수하다(waterproof)'라는 뜻을 가진 동사 stegō에서 유래했습니다. 사랑이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약점을 폭로하지 않고, 마치 지붕처럼 덮어주고 보호하는 적극적인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5. 금언 (Aphorisms)

  •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이지만, 사랑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손길의 방향이다.
  •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그 지식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섬김의 도구로 만든다.
  • 사랑이 없는 헌신은, 스스로를 태워 냄새만 피우는 연기일 뿐,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 사랑은 상처를 기록하는 장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용서를 갱신하는 깨끗한 백지이다.
  •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커도,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크지 않다.

6. 신학적/주제별/목회적 정리

  • 신학적 정리 (Theological): 이 본문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반영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는 하나님의 마크로튀미아(Makrothymia), 즉 오래 참으시는 속성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15가지 사랑의 속성 전체를 구체적으로 성육신한 행위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완성이자(롬 13:10), 하나님의 본질(요일 4:8)이며, 구원의 핵심입니다.
  • 주제별 정리 (Thematic): 13장은 은사와 율법, 믿음과 행위, 현재와 영원의 모든 신앙 주제들을 포괄하는 궁극적인 '가장 큰 것(The Greatest)'을 제시합니다. 이는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든 목적과 행동의 최고 기준이 됩니다.
  • 목회적 정리 (Pastoral):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의 분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기심, 시기, 자랑, 무례함이 목회 현장의 갈등 주원인입니다. 이 본문은 성도들에게 화해와 용서, 그리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면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책이 됩니다.

7.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Congregational Resolution and Application)

  1. '자랑 금식' 실천: 오늘부터 일주일간, 대화 중 나의 성과, 소유, 능력에 대해 자랑하려는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잠시 멈추고, 대신 다른 사람의 장점이나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칭찬하고 감사하는 말로 대체하는 '자랑 금식'을 실천합니다.
  2. 용서의 장부 파기: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특정인의 실수나 허물을 종이에 적어보고,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을 묵상하며 그 종이를 찢거나 태우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마음속에서 용서의 장부를 파기합니다.
  3. 하루 3가지 '온유' 실천: 매일 아침, '온유하며(친절을 베풀며)'를 기억하며, 하루 동안 가족, 직장 동료, 또는 낯선 이에게 베풀 3가지의 작고 구체적인 친절(예: 칭찬 한마디, 작은 도움 제공, 인내심 있게 들어주기)을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6:9-13

 
 

◈ 주기도문 4   

나라이 임하옵시며

 

오늘은 주기도문의 두 번째 간구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흔히 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씀을 주기도문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첫 번째로 외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의 주제도 역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하나님 나라는 주기도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두 번째 간구로 전혀 손색이 없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역본 성경들이 주로 사용한 Kingdom이라는 말은 영토를 전제로 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한 때 하나님 나라를 영토의 의미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구실 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을 일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으로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영토를 소유한 세상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라라는 말은 사실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며 그리고 성령을 바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분명한 지적 언어적 한계가 있기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개념들을 이러한 상징이라는 도구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 행사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옛날에는 훌륭한 성군을 만나면 그것이 곧 행복이며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시민권이라는 이유로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인이나 중형 죄가 아니면 로마 시민을 구금하거나 취조할 수도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누구나 로마의 시민이 되기를 원했고 심지어 돈을 주고 사고파는 행위도 비일비재하게 성행하였습니다. 여러분, 로마 시민이 이스라엘 땅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의 군대가 그를 호위하는 것도 아니며 특별히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팔레스틴의 한 귀퉁이에도 로마 황제의 영향력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통치와 영향력이 미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시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인격,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공간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줄을 그어놓고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나라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나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이면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도란 내가 나를 다스리고 나의 영향력 속에 나를 가두어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 성도는 주님의 통치와 주권 가운데 나를 내려 놓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나를 통해 주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는 사람들의 오해를 책망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귀신은 쫓겨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자연히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떨어진 세계를 말하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습니다. 손을 펴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잡을 수 있습니다. 가령, 어머니가 먹을 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는데 아이들이 그것을 꺼내려고 이불과 베개를 포개놓고 올라서면 손이 닿는 것처럼 이렇게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는 심령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며 그의 주권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가 죄인임을 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런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조리하고 악한 삶을 살았던 내가 내 삶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의 주인으로 삼는 놀라운 고백을 할 때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회개는 정권교체’라고 고백했던 한 목사님의 설명은 너무도 정확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탄광촌에서 대규모 파업과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는데, 그곳에 부흥회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갔고 눈물로 새사람이 되겠다는 결심과 돌이킴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용주는 근로자를 불신했고, 근로자는 고용주를 착취하는 사람으로 미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참된 회개 운동이 일어나고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모든 자아의 권리를 하나님께 내려 놓고 이양했을 때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그들 가운데 임하였고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은 고용주 몰래 빼돌렸던 물건들을 가지고 고용주를 찾아가 뉘우쳤고, 고용주는 근로자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주지 않았던 것을 눈물로 뉘우쳤습니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 줄 아십니까? 술집이 장사가 안 되어서 곳곳에서 문을 닫았고, 더러는 술집의 주인이 새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가게를 부랑자들에게 전도하는 장소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와 주권 이양이 없습니까? 아직도 우리가 철저히 죄인이며, 하나님만이 내 삶을 고치실 분이며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전적인 회개와 자복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회개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안에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점점 확장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파되고 계속 확장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의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와 함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복음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로마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이르렀고 미국을 통해 한반도에까지 이르는 놀라운 확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국을 들을 21세기 복음 전도의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셨고 앞으로도 확장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하여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꺼질듯한 복음의 불씨를 들고 이 나라를 밟았던 선교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고 수많은 성도들을 통해 그 나라를 확장시키셨고 견고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이 놀라운 하나님의 부르심에 얼마나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으며 얼마나 땀흘려 헌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주역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4.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종말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다양한 종말론적 예언에서도 알 수 있으며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는 말씀 등을 통해서도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심판자로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악에 대하여 심판을 하실 것이며 그 때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는 말씀처럼 새로운 세상 즉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며 예수님께서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신 궁극적 목적이라고 볼 때, 우리는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며 고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그날을 사모하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감격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면서 날마다 마지막 날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간절히 외치며 고대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한 세 가지 시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고, 복음 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확장되고 내 안에 건설되고 있으며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지막 날 천국은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가지 시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기도의 고백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가운데 내 자신을 드리며 그의 통치가 행사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며, 이를 통해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 더러운 권세는 물러나고 오직 이 땅에서 주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겠다는 기도이며 또한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온전한 완성과 성취를 소망하며 고대하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사회에 나라에 세계에 임하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며 최선의 삶을 경주해야 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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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6:9-13

  여섯 가지 간구 가운데 첫째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건들에 의해 영화롭게 되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새번역에는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옮겼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과 뜻은 같습니다. 수동형으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면 뜻은 더 정확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것이 첫째 간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소원 중의 소원이 되고 우리의 간구 가운데 첫째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려지게 하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제 3계명에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가볍게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고 했으니까 하나님을 이름을 사용해서 맹세하지 않고 하늘로 맹세하고 혹은 땅을 두고 맹세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잘못된 맹세를 해도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잘못을 보시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며 예루살렘은 큰 임금 곧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성읍이니 그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것도 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품을 볼 때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과 바다와 산과 들판과 새와 짐승들과 나무와 풀과 꽃을 보면서 그것을 만드시고 입히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참으로 둔감한 자인 것입니다. 어린 자녀에 대한 애정과 수고와 기대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그의 자상한 돌보심과 우리를 향한 기대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이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의 복음이 모든 곳에 전파되며 복음을 듣는 자들이 믿어 구원 얻게 되고,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아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십니다. 그분의 성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다, 하나님은 구원자시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목자시다, 하나님은 심판자시다, 하나님은 소망이요 생명이요 피난처시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며 자비하시고 선하시며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심을 그의 말씀을 통하여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존중되고 흥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용하시고 또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사신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이어서 이런 응답이 있었습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7, 28).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십자가를 지실 각오를 하시면서 하신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그 일로 말미암아 세상에 하나님이 알려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셨으며 이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기를 소원하고 이것이 우리 기도의 첫째 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나 우리가 당면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합니다.
      다윗 왕은 청소년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무시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전쟁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골리앗을 맞아 기죽지 않고 그를 쳐서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용기를 낼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히스기야 왕도 앗수르 왕이 랍사게를 보내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위협하면서 항복하라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모욕하는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편지를 펴놓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사 37:16-20).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진중에서 십 팔만 오천 인을 쳐서 시체가 되게 했습니다. 산헤립은 떠나 돌아가 니느웨에서 자기 신에게 절할 때 그 아들이 그를 칼로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하고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유익이 되든지 손해가 되든지, 높아지든지 낮아지든지, 칭찬을 받든지 욕을 듣든지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야고보서 2:14-26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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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 대해서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들은 말들은 선입관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오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겪어보고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겪어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를 하지 못하면 오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해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도 '행함'의 의미를 오해하여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 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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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2장의 주제는 <믿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다루었던 2장의 전반부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자고 합니다. 오늘 다루는 후반부에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촉구합니다.

 

본문에 ' 믿음'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11번, '믿는다'는 동사가 3번 나옵니다.'행함'이라는 단어가 12번 나옵니다. 요약하면 '믿음'과 '행함'이 본문의 핵심단어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야고보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 다른 말로 하면 유익이 없는 믿음이요(16절), 죽은 믿음이요(17절), 귀신 수준의 믿음이요(19절), 헛된 믿음이라(20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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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내가 가진 믿음은 과연 참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일에 내가 가진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 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내가 가진 믿음이 과연 참 믿음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엇을 통해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행함이 있는 믿음, 행함을 통해 증거되는 믿음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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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받은 구원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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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뉘앙스가 다르다는 측면, 강조점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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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로마서 3:28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오늘 본문 2: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하면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함'를 강조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ex)모순(矛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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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과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이라는 용어를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믿음'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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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를 보면 거짓 선생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교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을 지키거나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그런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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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믿음'을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19절에 보면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입니다.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가르침은 강조하는 바가 다를 뿐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것이고 그의 대답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반면에, 야고보의 논지는 ‘참된 구원을 얻는 믿음을 소유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것이고 그 대답은 ‘그의 열매를 보아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아고보는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구원받은 믿음이 증거되는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주어지며 참 믿음은 행위로 확인됩니다. 분명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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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증거되느냐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내가 믿었다! 내가 믿는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믿음이 증거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말 구원의 믿음이 있다면 그는 믿음의 행위가 반드시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열매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믿음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은 기간도 오래되고 행동도 점잖고 신앙적인 지식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하여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보겠다는 열정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영혼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습니다. 마치 사랑이 식어버린 부부 사이와 같습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의 믿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의 행동을 동반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 은혜는 반드시 밖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고후 4:15, <은혜가 많은 사람이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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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쓰임 받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셔서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의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쪼이기 원하셨습니다. 바울의 고난과 수고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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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은 사람들에 넘쳐흘러 그들도 구원받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함입니다. 받은 은혜를 품고만 있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말만 앞세워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서로 보완관계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행위로만 구원받을 수 없지만 믿음을 가진 자는 행동으로 그 믿음을 증거합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고, 자신의 직분을 말한다고 그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의 삶을 통해 그 믿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원에 합당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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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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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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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요,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믿음이란 형식적인 믿음, 가식적인 믿음,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믿음, 이런 믿음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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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15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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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제가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곁에서 불쌍하다, 입을 것이 있어야겠네, 먹을 것이 있어야겠네 말만 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형제들을 돕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 사람을 도와야 하는 부담이 자기에게 돌아올까 봐 몸을 사립니다. 이런 믿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듣게 되는 말 <예수쟁이들을 말만 해! 말만 많아!>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 치명적인 말입니다. 행동이 없이 말만 번지르르하거나, 애쓰고 땀 흘리며 수고하는 헌신을 뒤로 하고,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은 헛것이다! 죽은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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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습니다. 26절<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안타깝지만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 숨만 붙어 있는 사람을 과연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죽은 믿음은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영혼 하나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다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할 수는 있습니다. 마음속에 선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되면 바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두 번 생각하면 인색한 마음이 생겨서 행동을 주저하게 되어 결국 은혜의 통로를 막습니다. 야고보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지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ex) 어느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되어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주일 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 명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 것이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분 후,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사람을 신장기증자로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에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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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도, 뜨거운 눈물로 기도하며, 아름다운 말들을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단 한 절의 말씀일지라도, 단 한번의 감동일지라도 순종하며 따르며 행동할 때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한 주간도 살아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말로만 불쌍하다, 안됐다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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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22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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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본절에서 '의롭다 함'의 근거가 오직 행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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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오직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리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올바른 행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의일 뿐입니다. 결국, 참 믿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이 따르게 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도 행함을 통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별로 없는데 희생적이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줍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있다고 하는데 너무 인색해서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여 나은 점이 별로 없을 때 사람들은 ‘과연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을 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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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교회도 오래 다니고 교회에서 직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삶에 선한 증거가 별로 없고, 섬길 줄도 모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해 어떤 사람이 말을 겁니다. “당신은 오래 믿어서 교회 안에서는 신앙이 좋은 것처럼 행세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나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이웃을 위하여 하는 것이 무어냐는 겁니다. 나는 믿음은 별로 없지만 이웃을 섬긴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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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하면서 다른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행함이 없이 지식만을 내세우는 신앙은 귀신이 가진 정도의 신앙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복음서를 보면 귀신들린 자들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야고보는 구체적인 실천이 없는 신앙은 거의 귀신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삶의 열매가 도무지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적용되어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고 감동을 줄 때 비로소 그 사람이 말씀을 들은 것이고 믿음이 생긴 것이지 그가 단순히 설교를 들었거나 설교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하여 그가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몇 마디라도 들은 말씀을 통하여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고 삶이 바뀌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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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꾸게 하고 삶의 양식과 습관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어도 좀처럼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렇게 설교하는 목사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 할거야. 장로님도 그렇게 살지 못 하는데 나 같은 평신도가 어떻게 말씀대로 살겠어?” 하며 자기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거나 타협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날카롭지만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 없는 자보다 더 양심이 굳어져서 나중에는 어떤 것으로도 그 마음을 회개시킬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참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한 사람은 남자요 다른 사람은 여자입니다. 한 사람은 존경 받는 족장이요 다른 사람은 손가락질 받는 기생입니다. 한 사람은 선택 받은 히브리인이요, 다른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 출신인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믿음생활 하면서 삶의 변화가 나타나고 행함의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믿음은 볼 수 없지만 그 열매로 그 믿음을 압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행위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계심만을 믿거나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려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며 예배하고 이 세상에서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족속과 요단 동쪽의 왕들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섬멸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들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라합의 믿음은 듣고 아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 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는 목숨을 건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과 그 가정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라합은 그의 신앙고백을 삶 속에 실천했으며,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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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은 직업이 기생이었기에 많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속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소극적인 믿음이 아니라 용기와 결단으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살린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결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후에 라합은 롯의 시아버지인 살몬의 아내가 되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 다윗 왕조를 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게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은 행위로서 믿음을 온전케 하였습니다. 이렇듯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될 때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믿으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4:26-27, 33).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포기는 구체적인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나의 것을 실제로 포기하거나 버릴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멸망과 구원을 함께 의논할 수 있는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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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다가 끝나버리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할 사명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는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 믿음은 행위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행위에서 우리의 믿음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표현되고 증거되고 나타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알고만 있고, 실천되어지지 않는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실천되어지는 믿음, 삶으로 증거되는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1)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는 그 삶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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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반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확신을 해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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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행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온전케 됩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성화되게 합니다.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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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퍼즐’을 맞춰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퍼즐은 수백 조각, 때로는 수천 조각의 작은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작업입니다.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각이 자기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됩니다.

한 조각이라도 빠지면 그림은 완성되지 않은 불량품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퍼즐 한 조각, 한 조각은 모양이 같은 게 없습니다. 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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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퍼즐 조각처럼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모여야 하나님의 아름다운 그림, 즉 교회가 완성됩니다.

그러나 한 조각, 한 사람이 빠지면 불량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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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임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비교, 무시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서로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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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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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12-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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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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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몸’(body)입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배경과 은사, 성격과 환경을 가졌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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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육체가 여러 지체로 구성된 한 몸이듯이 교회 역시 여러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하나입니다.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국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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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습니다(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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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영적 생명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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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는 자는 모두 세례로 한 성령 안에 들어와 하나의 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인… 출신과 신분을 뛰어넘는 복음의 연합
  • 교회는 인간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성하신 거룩한 유기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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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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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음악회에서 장애가 있는 두 형제가 무대를 올랐습니다.

형은 오른팔을 잃었고, 동생은 왼손 마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떻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자 모두가 놀랐습니다.

형은 오른손이 없었지만 왼손으로 연주했고, 동생은 왼손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오른손으로 연주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곡을 연주했습니다. 관중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지체가 부족해도 함께할 때 온전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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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소중한 존재입니다 (14-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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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은 말합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라 여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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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이 하나의 지체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습니다.
  • 이처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라 여럿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제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하게 보이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한 몸에 동참한 일원임을 인정하고 서로서로 소외시키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 당시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가진 성령의 은사로 남들을 재단하고 판단하여 그들을 실족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자신들에게 은사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기는커녕 마치 자신들의 미덕으로 인하여 은사가 주어진 것인 양 자랑했던 것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15절에서는 발을, 16절에서는 귀를, 17절에서는 보는 눈과 듣는 귀와 냄새 맡는 코를 예로 제시하여 이 점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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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5절)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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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비교하거나 소외감을 느끼는 성도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발이 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것은 지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발이 손이 아니라 해서 자신은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귀와 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

영분별의 은사를 갖고 있는 성도가 나는 '방언의 은사'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일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분별의 은사를 지닌 자 역시 방언을 말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입니다.

​

"나는 말도 잘 못하고, 특별한 재능도 없고, 앞에 나설 형편도 아니야"라는 분들, 당신은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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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다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18-20절)

​

한 손가락이 아프면 온몸이 아픈 것처럼,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도 결코 하찮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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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어 있지 않다?"
  • “나는 눈이 아니니 필요 없다?”
  • 비교하거나 열등감에 빠질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을 무시할 것도 없습니다.
  • 모든 지체는 하나님의 뜻대로 그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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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를 하나 더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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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우주 탐사선이 발사 도중 궤도를 이탈하며 실패했습니다.

조사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작은 나사 하나가 헐겁게 조여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나사는 크기도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부품이었지만, 전체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는 작다, 나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 섬김, 미소, 한마디의 격려가 공동체 전체를 지탱하는 숨은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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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는 서로를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21-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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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지 못하리라.”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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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손에게, 머리가 발에게 ‘네가 필요 없다’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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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자칫하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평가할 수 있습니다.

"쟤는 왜 항상 느려?", "왜 저렇게 생각이 많아?"라고 말하지만, 바로 그런 ‘다름’이 교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22-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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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아름다운 지체는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4-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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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덜 귀한 것 같고 연약한 지체가 더 귀하고, 더 은밀한 부분이 더 요긴합니다.
  • 한 지체가 고통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아픕니다(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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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체는 경쟁이 아니라 공감과 협력의 장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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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장로로 섬길 때의 나의 생각을 예로 들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한 죄를 지었음을 고백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왜 저런 일을 하지 않을까?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언행을 삼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지체는 더 아름답게 여김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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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하나 더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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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에서 중직을 맡던 집사님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두 자녀는 아직 어렸습니다.

그러자 교회 성도들이 돌아가며 밥을 해 주고, 병문안을 가고, 아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 팀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른바 ‘밥상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몇 달 후, 그 집사님 가정은 큰 감동을 받았고, 이후로 자신들도 어려운 이들을 섬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몸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당하면 나도 같이 아픈 것이 교회입니다. 공감과 사랑의 실천이 있는 교회는 세상이 본받고 싶어 하는 공동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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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입니다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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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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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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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이요, 발이며, 눈과 귀입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함께 움직일 때, 교회는 세상을 감동시키는 살아있는 몸이 됩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 속에서 복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

말씀을 맺겠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은 하나님의 몸 안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무시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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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머리와 연결될 때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지체입니다.

​

당신의 자리는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한 몸 된 교회를 이룰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서로를 존중하고, 한마음으로 움직일 때 → 세상이 감동하는 살아있는 교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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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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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지체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 혹시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빠진 적이 있다면, 왜 그랬는지 나눠보세요.
  2. 공동체 안에서 나와 다른 생각, 성격,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 그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눠보세요.
  3. 내가 최근에 도움이 필요한 지체를 돌아보거나 함께 울어준 경험이 있습니까?
    • 그렇다면 어떤 유익이 있었는지,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나눠보세요.
  4. 우리 소그룹(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은 지체, 외로운 지체, 숨은 일꾼들은 누구일까요?
    • 그들을 어떻게 존귀히 여기고 섬길 수 있을까요?
  5. 지금 우리 소그룹에서 서로의 필요와 아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개선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9-13

마태복음 6:9-13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 강해 세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기도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삶을 보여줍니다. 어떤 것을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지, 그 사람의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 기도는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기도가 그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보여줍니다. 이 기도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으로 가르쳐 주셨지만, 단순히 모범적인 기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늘 평소 하셨던 기도였고 그것을 간추리고 단순화 시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소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이러한 내용을 기도하였고 이 기도문을 기본으로 하여 더 깊고 확장된 기도로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가장 첫 번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기도의 자리에 나가셔서 가장 먼저 올려드렸던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기도는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이기에 가장 먼저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아마도 그것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고 우선되며 중요한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 기도의 내용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압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가장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 이 기도를 진심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사실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보다 나의 필요와 간구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첫 번째 기도제목이 우리의 마음을 압도하지 않고 이 기도를 심령 깊은 곳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하고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에 이 기도제목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여 이 기도제목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우리의 삶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냐 아니냐를 판가름 하는 아주 중요한 지표와 같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동안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이 기도가 그저 형식적으로 드려졌다면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금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기도를 맞추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기도를 간절히 드리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기도를 드리려면 먼저는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모든 것에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나의 삶의 유익과 필요와 소원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통해 그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서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의 바른 관계성속에서 기도가 바르게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종교인들의 기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나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기도의 한 부분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우선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임을 인식할 때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기도는 나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간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간구하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름을 통해 하셨습니다.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는 자, 지극히 높으신 자, 전능자등, 이름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과 동시에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함축적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십니다.
출34:5-7
5.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 때 “내 이름은 여호와다 여호와다 여호와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 속성, 인격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7: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편102:15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시편11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따라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 라는 기도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존재가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룩함
다음으로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거룩”이란 개념은 먼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출20:9-11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뿐만 아니라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위하여 특별히 구별하신 것들을 모두 거룩하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21장에서 제자장을 거룩하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레21:8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 다음의 의미가 규정되는데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기에 깨끗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기에 그의 걸맞는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라는 기도는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이미 거룩하신 분 아닙니까? 이미 거룩함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이 기도를 하고 있는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주기도문은 나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죄를 사하옵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기도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비록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있지만, 지금 무릎꿇고 기도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우리 중 한사람으로 우리의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것은 공동체를 말합니다. 작게는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 공동체 그리고 더 확장되어 한국교회 그리고 더 확장되어 세계곳곳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말합니다. 그 공동체의 일원의 한 사람으로 내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를 포함하여 우리 가족, 우리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냥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와 가족과 교회를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는 것입니까?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이란 바로 내 자신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자임을 알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만이 소유하신 그 거룩한 삶을 이 땅에서 부터 살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만이 거룩하신데 어떻게 하나님처럼 이 땅에서 살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산상수훈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룩한 삶의 예
마태복음 5:43-48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절입니다.
그러므로....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이 앞 구절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8-38절에 보면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면서 45절 무엇입니까?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우리가 주기도문은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기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의 가장 좋은 예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말씀하신 것이므로 앞으로 도래할 천국에서 이렇게 살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천국에 여러분의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천국에 원수가 과연 존재할까요?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이 땅에서 이러한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다면 과연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볼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거룩함이 저 천주교 성당에 가면 화려하게 그려놓은 성화와 웅장한 조각품에서 발견하겠습니까? 저 신부들의 화려한 복장이 과연 거룩함을 나타낼까요? 예배당 안에 금빛 나는 십자가와 기물들이 과연 거룩함을 드러낼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들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거룩한 삶, 하나님만이 소유한 그 거룩함의 성품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레위기 27:28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직 내 뜻과 자존심과 욕심이 있기에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온전히 나의 삶을 그 분의 뜻과 계획에 맞추어 살아갈 때 비로소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게 내려와 온전히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믿는 자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야고보서 2장 1~13절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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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코미디 프로에서 이런 유행어를 한 적이 있는데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비록 코미디 프로였지만 이 세상의 현실을 정확하게 비꼬는 유행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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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차별이 많은 나라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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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이란, 2위 벨라루스, 3위 바레인, 4위 미얀마, 그리고 5위가 한국입니다.

대한민국에 기독교 인구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도 세계 5위의 차별 국가라니..부끄러운 일이죠..

 

​

차별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더 차별할까요?

가장 큰 차별의 이유는 국가와 지역을 차별합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가장 차별받고

그 다음이 중동 국가입니다.

중국, 일본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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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야고보서 2장 1절부터 13절까지는 차별하지 말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어떻게 차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차별하지 않을 수 있다.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지금 야고보가 어떻게 예수님을 고백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야고보서의 저자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던 형님! 그 예수님을 야고보는 영광의 주!!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의 주 되심을,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당신의 주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의 주로 인정되고, 그리고 나의 주인뿐 아니라, 당신의 주, 우리 모두의 주인 되심을 인정할 때 차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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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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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속칭 거물급의 사람이 교회에 뜨면, 최고 최선으로 섬기다가도 노숙자나 영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이 방문을 하면 왠지 불편해하고 밥이나 축낼려고 왔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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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나 같은 자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용납해 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죄인 중에 괴수 같은 나, 속으로는 썩을 대로 썩은 나,

교회 안에서는 거룩하다가도 교회 밖을 나서는 순간 돌변하는 나 같은 자도 용납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품어주시는 그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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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수님을 기억한다면, 세상에 어떤 사람도 내가 차별할 권한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차별 없이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차별 없이 사랑하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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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은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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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첫 번째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합니다.

누가복음6:20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61장은 오실 메시야가 어떤 자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인가를 예언하셨습니다.

마음이 상한자, 포로된 자, 갇힌 자, 그리고 슬픈 자들을 위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가난한 자에게 가 있다면, 우리 역시 이 땅에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마음이 상한 자에게 있다면, 우리 역시 이 땅에 마음이 상하고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포로 된 자, 갇힌 자에게 있다면, 우리 역시 이 땅에 물질에 포로 된 자, 명예에 포로 된 자, 악한 사단에 포로 된 자, 여러 가지 올무에 묶여 갇힌 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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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5下)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여기 ‘자기’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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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11장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붙는듯한 사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붙는 듯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이 예수님을 불붙는 듯 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상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제보더 오늘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오늘보다 내일 더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8절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이 최고의 율법을 행하되,​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 말씀은 모든 율법에 대해서 차별 없이, 간과하지 말고 행하라는 것이다.

'자유의 율법'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새 계명 즉 복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은혜와 긍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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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행할 자유도 있고, 하지 않을 자유도 있지만, 그러나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부분과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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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심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누군가 나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그러나 자유의 복음, 자유의 율법으로 예수님을 기대함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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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에, 이 땅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얽매임으로 하지 않고 자유함으로 스스로 낮은 곳으로, 스스로 섬김의 자리에,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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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차별 없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나도 세상을 향해 차별하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이 보시는 눈으로 세상과 영혼들을 보게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로 세상을 사랑하셨듯이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시고, 마지막 날에 주실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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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번역 주기도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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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

1. 차별하지 않게 하소서.

2. 자유함으로 사랑하고 섬기게 하소서.

3. 계속해서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성도들, 선교사들,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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