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야고보서 4:11–12

 

율법의 판단자가 아닌, 율법의 행위자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날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의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말과 판단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깊은 영적 무게를 가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도덕적인 언어생활의 권면을 넘어서, 하나님의 통치와 권위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위치를 재정립하게 합니다.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단지 인간 간의 문제를 넘어서, 결국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 자신을 판단하려는 태도임을 밝힙니다. 이러한 언행은 곧 구속사 안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이 지녀야 할 경외심과 겸손함에서 벗어난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입술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반영인지, 그리고 진정한 복음의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어떤 자세로 공동체를 섬겨야 하는지를 함께 묵상해보겠습니다.

 

1.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4:11上)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4:11上)

야고보는 따뜻한 호칭인 ‘형제들아’로 이 권면을 시작합니다. 이는 단호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가족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권면입니다. 여기서 '비방하다'(καταλαλεῖτε, katalaleite)는 헬라어로 '비하하다', '험담하다'는 의미로, 단지 비판이나 건설적인 충고가 아니라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의 말입니다. 이는 곧 형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보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비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무서운 죄입니다. 비방은 상처를 남기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자녀를 향한 언어는 곧 그분을 향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형제를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피조물을 조롱하는 자이다”라고 말하며, 비방의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비방합니까?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상대를 낮춤으로써 자신이 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보이고 싶어하는 숨은 교만이 작용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마 12:34). 즉, 비방은 내면의 정죄와 교만이 외형화된 언어입니다. 성도는 입술을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형제를 축복하는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2. 형제를 판단함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다 (4:11下)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4:11下)

 

야고보는 단순히 형제를 향한 말이 아니라, 그 판단의 태도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무서운 영적 원리를 선포합니다. 율법은 인간이 평가할 대상이 아니라, 순종할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은 그의 뜻과 성품을 반영하며, 그 율법 안에서 모든 공동체는 공의와 자비의 질서를 유지하게 됩니다.

 

‘판단한다’는 말은 단지 도덕적 평가나 올바른 권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누가 율법을 어겼고 누가 자격이 없는지를 결정하는 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사람은 율법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율법 위에 서는 자는 곧 하나님 위에 서려는 자”라고 경고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욕망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교만이 바로 이 판단하는 마음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준행자, 곧 율법에 순종하는 자는 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며, 동일한 긍휼이 자신에게 필요함을 압니다. 그러므로 그 입에서는 판단이 아니라 자비와 인내가 흘러나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우리가 무자격자임을 먼저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본 자만이 타인을 향해 정죄하지 않고,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십니다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4:12)

 

이 구절은 야고보서 전체의 윤리적, 신학적 중심을 담고 있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일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시며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입법자와 재판관, 이 두 개념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위입니다. 사람은 판단받는 자이지, 판단하는 자가 아닙니다.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심판의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 가치를 정하는 자리에 서는지를 일깨우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판단은 공의롭고 완전한 기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야고보는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무지를 드러냅니다. 이 질문은 욥기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일련의 질문들과 유사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지닌 연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격려하며 함께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려던 군중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판단을 멈추라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자들이라는 본질적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정죄의 집단이 아니라, 은혜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결론: 비판이 아닌 은혜의 통로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은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무서운 영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단지 상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는 시도이며, 이는 구속사의 흐름 안에서 매우 심각한 배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제정자이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앞에 겸손히 서야 할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정죄의 도구가 아닌, 축복과 중보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은혜로 말합니다. 자비를 입은 자는 자비를 베풉니다. 그럴 때 우리는 율법의 판단자가 아닌, 진정한 율법의 행위자로, 복음의 통로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말과 판단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겸손히 살아가며, 공동체 안에서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복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출처: https://392766.exbible.net/entry/야고보서-411–12-강해-형제를-비방하지-말라 [Pensées:티스토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6:9-13

오늘은 주기도문에서 인간에 대한 마지막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을 위한 첫 번째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였습니다. 두 번째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셋째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시험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이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시험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험입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 단련하시기 위한 시험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사탄의 시험입니다.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리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같은 기도입니다. 여기서 악이란 악도 되고 악한 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악한 자는 사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악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기도는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이 전혀 없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이 기도는 사탄의 시험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사탄의 시험이 있어도 그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기도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끊임없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시험이 끝나고 난 다음에 눅4장 13절에 “눅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잠시동안/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얼마 동안”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잠시 동안”이라고 하고, 또 공동번역에서는 “다음 기회를 노리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았지만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은 “히4:15.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히 4:15)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있냐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또 왜 사탄이 이렇게 나를 시험하는가 라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또 사탄은 예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시험하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시험이 있어도 시험에 들지 않으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시험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늘은 저렇게 맑고 푸른데 하나님은 왜 내 삶을 저렇게 맑고 푸르게 하지 않습니까? 라고 원망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극심한 사탄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도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26장 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에게 시험을 해 와도 그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합니까?

 

1)먼저 우리는 사탄의 존재와 시험에 대해서 영적으로 항상 깨어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이구나라고 깨어 있으면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사탄의 시험에 대해서 깨어있지 않을 때 사탄의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사탄의 시험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 응답이 보이지 않고,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시험을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께 대하여 낙심하게 만들고, 기도에 대해서도 낙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또한 기도의 응답을 받고, 일이 잘될 때도 시험을 합니다. 기도응답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 이제 이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하고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만듭니다. 이것도 사탄의 시험입니다.

또한 일이 잘 되면 그 일이 마치 사람의 힘으로 된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도 사탄의 시험입니다.

또 이제 모든 일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사탄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절대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죽기까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에도 시험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면 무얼 하겠는가? 남들은 쉬는데 왜 나만 일하는가?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가 일을 중단하고 포기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은 우리가 일을 다 한 후에도 시험을 합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일을 하였으니 쉬어야겠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사탄은 우리가 일을 할 때만 아니라 일을 다 하고 쉬려고 할 때도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건강할 때도 시험을 합니다. 그래서 건강하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육신의 안락과 게으름과 편안 가운데 젖어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또한 사탄은 우리가 건강하지 않을 때도 시험을 합니다.

그들 육신이 약하여져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사탄은 시험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바쁘고 육신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해해주시지만 우리를 노리고 있는 사탄은 절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육신이 약하니 사탄이 이해해주겠지-기도하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 육신이 약할 때 더 강하게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 사탄은 평안 할 때도 시험을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평안이 아니라 “편안해 편안해 내 육신 내 육신 편안해” 할 때 영적 무지와 나태와 거짓 평안으로 빠지게 해서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또한 사탄은 극심한 환난가운데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환난을 당할 때는 몇 가지의 일들이 갑자기 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우리가 평안 할도 시험을 하고, 또 극심한 환난가운데서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 오늘 이 시대는 사탄이 우리 가정과 교회를 향해서 끊임없이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에 대해서 항상 깨어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둘째로 우리는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 현재적 약점에 대해서 항상 깨어있어합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현재적 약점을 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현재적 약점이 무엇인지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마26장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의 현재적 약점은 육신의 피곤함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기도해야할 때 잠을 자게 되고, 결국 사탄의 시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지금 나의 현재적 약점이 무엇인지를 깨어서 살펴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습니다. 돌도 떡덩이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때 사탄이 무엇을 시험합니까?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지금 경제적인 빈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탄은 항상 그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여러분을 시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여러분들의 현재적 약점이 감정의 우울함에 있습니까?

 

“빌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합니다.

왜 사도바울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언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합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없을 때입니다. 감정적으로 우울하고 여유가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안에서 항상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항상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여러분들의 현재적 약점이 감정의 흥분에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또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합니다.

왜 성을 내더라도 더디 내어야합니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흥분하다 보면 마귀가 틈을 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현재적인 약점이 감정의 흥분에 있을 때는 잠잠히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시37: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의 현재적인 약점이 제자들처럼 육신적으로 연약과 피곤함에 있습니까? 너무 바빠서 피곤해서 기도할 시간조차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사탄은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시험하고 있음을 명심하시 바랍니다. 바쁠수록 더 기도 해야합니다. 피곤할수록 더 하나님께 엎드리고 나와야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무엇보다 기도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마26장 41절에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가 중단될 때 시탄이 항상 우리를 시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기도는 스페어타이어가 아니라 핸들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페어타이어는 항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필요합니다. 그런데 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핸들은 항상 붙잡고 있어야합니다. 핸들을 놓치는 순간 사고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도를 위기의 순간에만 필요한 스페어타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한 순간도 놓을 수 없는 핸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항상 깨어서 기도함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4:1-10) 

 

사람은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가 생긴 것입니다. 사람은 가까이 하는 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까이 하고 있나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야고보서 4장 7절과 8절은 우리에게 마귀는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가까이 하지 말고, 대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피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귀는 멀리하고 대적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사람입니다. 시편 65편 4절은 “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시편 73편 28절에서는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야고보서 4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싸우지 말고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1-3절)
야고보서 4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보면,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정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심지어 살인까지 해도 원하는 것을 결국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고, 기도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툼을 그치지 않고 세상 정욕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와 다투고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다툼을 그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대부분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가려면 반드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6절)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을 보세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으려면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교만한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오히려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는 사울의 퇴장과 다윗의 등장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도 왕이 되기 전에는 아주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겁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는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기의 능력인양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제사장인양 제사를 집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을 버리셨고, 겸손하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소년 다윗을 택하셔서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로 죄를 떠나야 합니다.(8절)
야고보서 4장 8절 말씀을 보세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한 다음에 바로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품고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죄인을 가까이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를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욕심쟁이라 그런가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그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를 예수의 피로 사함을 받은 후에는 그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한다고 하는 것은 죄의 자리를 멀리하는 것이고, 죄를 범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와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말씀을 보세요.“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에게 복종하지 말고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저지르다가 피를 흘리지 말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워서 죄를 이겨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기도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5장 13절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4장 2절과 3절 말씀을 보세요.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말씀합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나 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잖아요? 관계가 친밀할수록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나쁘면 아예 말도 안 섞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말이 잘 통하느냐 하는 것이 친밀도의 바로미터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겁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만 갑니다.
 
지난 주간에도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습니다. 14살 아들이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폭행해 죽인 일도 있었고, 20대 여동생이 죽은 강아지 악령에 씌었다고 친오빠와 엄마가 잔혹하게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져만 갑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는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빛이 비춰지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

고린도전서 14:20~40 /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20절부터 40절입니다. 이 본문은 은사, 특별히 방언과 예언에 대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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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많았음에도 교회 안에는 혼란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자기 자랑과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하면서 예배가 무질서해졌습니다.

​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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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통해 세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앙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분별로 살아야 합니다 (20~25절)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신앙생활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에서는 성숙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은사를 체험하는 것 자체에만 집중했습니다. 특별한 체험이 많을수록 더 신앙이 좋은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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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은 "성숙한 신앙은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방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계속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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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께 경배하게 만든다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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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도 질문해야 합니다.

  •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을 세우고 있는가?
  • 나의 신앙은 체험 중심인가, 말씀 중심인가?
  • 나의 신앙은 성숙한 분별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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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린 신앙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을 원하십니다.


2.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26~33절)

26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명령합니다.

교회는 나를 드러내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

은사는 많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양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섬김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예배의 질서를 세밀하게 제시합니다.

  • 방언은 통역이 있을 때만 하라.
  • 예언은 차례대로 하라.
  • 다른 사람들도 분별하라.
  • 한 사람이 독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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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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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서는 성령의 역사를 막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서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입니다.

​

성령의 역사는 혼란이 아니라 화평을 가져옵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질서를 지킬 때 공동체는 더욱 건강해집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예배입니다 (34~40절)

본문 마지막 40절은 매우 중요한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예배는 단순한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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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배는 감정만이 아니라 경외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만이 아니라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만이 아니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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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형식만 남은 예배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사라진 메마른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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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질서를 잃어버린 예배입니다. 개인의 감정과 경험이 말씀보다 앞서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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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말씀과 성령, 자유와 질서, 열정과 품위가 조화를 이루는 예배입니다.

​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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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1.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분별력을 가지라.
  2. 받은 모든 은사를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하라.
  3.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하라.

​

교회는 나를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예배는 내 만족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성도로, 그리고 질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은사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체보다 자신의 만족을 앞세웠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성숙한 믿음을 주시고, 받은 은사로 교회를 세우게 하시며, 모든 예배 가운데 품위와 질서를 지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9-13

 

오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최고의 말씀을 꼽으라고 한다면 어떤 말씀을 꼽겠습니까? 아마도 성경에서 꼽을 수 있는 최고의 말씀은 “네 죄를 사했느니라”는 죄 사함의 축복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복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며 끊임없이 받아야 할 복은 죄사함일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내진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는 말씀이 아니라 “네 죄를 사했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양식이 우리의 육신을 살찌우고 강건케 하는 것이라면 죄사함의 축복이야 말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강건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목적도 사죄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리고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나 배우자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모두가 부수적인 것입니다. 보다 우선되어야 할 기도는 죄사함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서야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통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난 때문입니까? 질병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죄의 개념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말은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을 한글 성경은 모두 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하말티아’라는 말로서 과녁을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화살이나 총을 쏠 때 과녁의 주위에는 몇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제일 중심주를 맞출 수록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데 이 하말티아라는 말은 과녁을 완전히 벗어나 다른 곳에 떨어져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 생각, 행동의 반경을 완전히 벗어난 모든 행위는 다 죄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파라바시스’라는 말로 그어 놓은 줄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는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일단 차를 타고 도로에 올라가면 운전자는 그어진 선을 따라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별히 정 중앙에 그어진 노란 중앙선은 절대로 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파라바시스는 이런 모든 규정을 무시하고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고 차선을 지키지 않고 아무렇게나 달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와 진리의 원칙으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원칙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 길을 어기고 위반하는 모든 행위가 다 죄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파라푸토마’라는 말로 미끄러져서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서 있어야 될 사람이 조심하고 자제하지 못하여 미끄러져 넘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감정이나 욕정 등은 우리가 순응하여 따라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스리고 제한해야 할 대상입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고 자고 싶다고 다 잘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만약 그 자제력을 잃어버렸다면 술 취한 사람같이 중심이 흔들려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고, 쓰지 말아야 할 돈을 쓰게 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제해야 할 시간에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치 우치고 욕심에 치우치는 것을 미끄러져 넘어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노미야'로 불법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노미야'는 법이란 말인데 접두어가 붙어 법의 반대인 불법이란 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없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죄입니다.

다섯째는 '오훼일네마'로, 채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무는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죄가 바로 채무를 뜻하는 내용입니다. 빚이란 미리 받은 바가 있어서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갚지 않으면 그 빚은 결코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빚을 갚는 길만이 빚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빚을 갚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마지막 날에 하늘에 쓰여진 장부에 의해서 심판대 앞에서 계산할 날이 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결코 이 빚을 우리의 힘으로는 갚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일만 달란트는 지금의 가치로 수조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 이자만해도 하루에 수천만 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종이 일만달란트 빚졌다고 말씀하신 것은 도저히 그 돈을 갚을 수 없는 지불불능의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지불불능의 엄청난 죄의 빚을 하나님께 졌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대신 갚아 주는 길 뿐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죄의 기도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성도라 해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솔직히 말해 단 한 순간도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도의 차이일 뿐 수많은 죄를 범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일처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듯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의 피로 씻는 사죄의 기도를 날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나서면서 온 몸을 샤워하고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하루 종일 우리의 몸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손이나 발, 얼굴과 머리는 무수한 먼지와 매연 등으로 인해 심하게 오염됩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깨끗이 샤워를 했다 해도 틈틈이 손을 씻고 얼굴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막에도 물두멍을 두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은 매일같이 그 앞에서 자신의 몸을 씻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크게 두 종류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죄를 범하고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또 하나는 죄를 범한 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인데 전자를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 하며 후자를 희망이 있는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죄를 망각하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희망있는 죄인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죄인입니까?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하며 용서를 구하는 희망있는 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죄는 자백과 사죄의 간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회개 없이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용서하지 못하신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훈육하다보면 아이가 가끔 명백한 잘못을 하고도 좀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고백을 듣고자 기다립니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 그 말을 하지 않아 더 큰 훈계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다는 마음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우리의 죄를 소상히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 나와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기도문 전체 가운데 본문을 성도들이 가장 어렵고 힘들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이렇게 용서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남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증오와 미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혜만큼 베풀고 용서함 받은 만큼 용서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구원과 사죄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본문은 결코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대상은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다양한 문제들을 하나님께 가져오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와 거룩한 뜻을 이해하고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를 받은 구원받은 백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를 전제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 그의 백성이 되었기에 우리에게는 다른 형제를 용서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용서 받아야 할 죄가 있어 하나님께 나오면서도 고의적으로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그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행한 모든 잘못을 완전히 내어 버리고 다시는 기억지 않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용서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오랫동안 큰 상처를 받아 왔거나 큰 피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펄전은 “형제 여러분,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 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위로 기념탑처럼 남겨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완전한 용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게 어려운 일 또한 아닙니다.

에밀리 브란트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강한 증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증오감은 나이가 들수록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목사님의 권유를 따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증오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어머니를 용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는 내심 언젠간 어머니도 달라기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그를 향해 욕하고 악한 감정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이 한 번의 용서로 끝나는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어머니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선물도 보내고 카드도 써서 보냈지만 어머니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자로서 몇 번이고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눈을 뜰 때마다 인간의 용서가 부스러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용서를 자연스럽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동행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 이제 용서라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지만 또한 그리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할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죄와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용서는 한마디로 천국에 가는 절대 조건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고 또한 용서받은 자로서 형제의 잘못을 용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또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은 어쩔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죄인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고 정결함을 받으십시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당당히 “우리가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행으로 나타나는 지혜   야고보서 3:13-18

 

야고보서 3:13-18은 참된 지혜와 거짓 지혜의 차이를 구분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야고보는 지혜에 대해 단순한 지적 능력이나 지식의 축적을 넘어, 그것이 실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통해 참된 지혜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참 지혜는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 야고보서 3:13 - 선행으로 나타나는 지혜

“너희 중에 지혜 있고 총명한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는 “지혜 있고 총명한 자”(σοφὸς καὶ ἐπιστήμων, sophos kai epistēmōn)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여기서 “지혜 있는”이라는 단어 sophos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실천적인 지혜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비롯된 지혜를 가리킵니다(예: 잠언 9:10). Epistēmōn은 ‘이해력 있는, 지식을 가진’이라는 뜻으로, 구체적 상황을 분별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이 지혜와 총명이 단순히 머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καλὴν ἀναστροφήν, kalēn anastrophēn)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Anastrophē*는 ‘삶의 방식, 생활태도’를 뜻하며, 이는 지혜가 실제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야고보는 “온유함”(πραΰτης, *prautēs)이라는 단어를 통해 참된 지혜가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나타나야 함을 지적합니다.

 

참된 지혜가 다른 사람에게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자랑하는 모습이 아닌, 겸손과 선행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는 온유한 태도와 실천적인 선함으로 드러나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2. 야고보서 3:14 - 시기와 다툼에서 비롯된 거짓 지혜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야고보는 거짓 지혜의 특징을 “독한 시기”(ζῆλον πικρόν, zēlon pikron)와 “다툼”(ἐριθεία, eritheia)로 설명합니다. Zēlon은 열정이나 열심을 의미하지만, 여기에 “독한”(pikron)이라는 형용사가 더해져 시기와 질투의 열심으로 변질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가 겸손과 온유를 수반하는 반면, 거짓 지혜는 경쟁적이고 질투에 찬 태도를 드러냅니다.

 

“다툼”으로 번역된 eritheia*는 원래 정치적 야망이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경쟁을 뜻하는 단어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분열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다툼이 진리를 거슬러 “자랑하지 말라”(μὴ κατακαυχᾶσθε, *mē katakauchasthe)고 경고하며, 이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만하는 행동이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는 진리를 따르지만, 거짓 지혜는 진리를 왜곡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지혜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우리의 내적 태도와 열매를 통해 확인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3. 야고보서 3:15 - 땅의, 육신의, 마귀적인 지혜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이요 육신에 속한 것이요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야고보는 거짓 지혜의 근원을 “땅에 속한 것”(ἐπίγειος, epigeios), “육신에 속한 것”(ψυχική, psychikē), “마귀에게 속한 것”(δαιμονιώδης, daimoniōdēs)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epigeios는 ‘세상적’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진 지혜를 의미합니다. 참된 지혜가 하늘에서 오는 것이라면, 거짓 지혜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지혜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으로 번역된 psychikē는 인간의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본성을 가리킵니다. Psychikē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태도를 나타내며, 이는 참된 지혜와 상반됩니다. 또한,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는 표현은 거짓 지혜의 근본적인 출처가 사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거짓 지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어둠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참된 지혜가 하나님의 뜻과 연결된 반면, 거짓 지혜는 세상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세상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끊임없이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라 부르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악한 지혜도 있기 때문입니다.

 

4. 야고보서 3:16 -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악함이 있음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느니라.”

 

야고보는 “시기와 다툼”(ζῆλος καὶ ἐριθεία, zēlos kai eritheia)이 있는 곳에 “혼란”(ἀκαταστασία, akatastasia)과 “모든 악한 일”(πᾶν φαῦλον πρᾶγμα, pan phaulos pragma)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Akatastasia는 ‘무질서, 혼돈’을 의미하며, 이는 공동체 내에서 다툼과 시기가 퍼질 때 발생하는 혼란을 나타냅니다. 시기와 다툼은 하나님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화합을 방해합니다.

 

“악한 일”로 번역된 phaulos pragma는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넘어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며, 악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야고보는 거짓 지혜가 이처럼 공동체 내에 혼란과 악한 열매를 맺게 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거짓 지혜가 공동체의 분열과 혼란을 가져오며, 이기적인 동기는 공동체와 신앙을 파괴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는 질서와 화평을 이루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곳에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혜가 참 지혜입니다. 열매로 알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5. 야고보서 3:17 -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는 참된 지혜의 특성을 나열하며,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ἄνωθεν σοφία, anōthen sophia)임을 강조합니다. Anōthen은 ‘하늘에서, 위로부터’를 의미하여, 참된 지혜가 인간의 이기적인 동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 성결(ἁγνή, hagnē): 이는 ‘깨끗한, 거룩한’이라는 뜻으로, 참된 지혜의 첫 번째 특성은 순수하고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는 지혜입니다.
  • 화평(εἰρηνική, eirēnikē): 참된 지혜는 다툼이나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며, 오히려 화평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평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관용(ἐπιεικής, epieikēs): 이는 ‘온화한, 양보하는’이라는 의미로, 타인에 대한 부드러움과 포용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 양순(εὐπειθής, eupeithēs): 이는 ‘순종하는, 잘 따르는’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순응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참된 지혜는 완고함이 아닌, 열려 있는 마음으로 타인의 의견을 수용합니다.
  • 긍휼과 선한 열매(ἔλεος καὶ καρπὸς ἀγαθός, eleos kai karpos agathos): 참된 지혜는 자비로움과 선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긍휼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의미하며, 선한 열매는 실천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 편견과 거짓이 없음(ἀδιάκριτος καὶ ἀνυπόκριτος, adiakritos kai anupokritos): 참된 지혜는 편견이나 위선이 없습니다. 이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진실하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참된 지혜가 순수하고, 화평을 이루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단순히 지적인 이해에 그치지 않고, 신앙의 열매로 이어져야 함을 나타냅니다.

 

6. 야고보서 3:18 - 화평을 이루는 자의 의의 열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는 “화평하게 하는 자들”(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hoi eirēnopoioi)이 “의의 열매”(καρπὸν δικαιοσύνης, karpon dikaiosynēs)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Eirēnopoioi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 인해 화평을 이루는 자들을 뜻합니다.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로, 참된 지혜가 의와 평화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의의 열매는 화평을 심는 자들이 거두게 되는 결과로, 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동행할 때 이루어지는 삶의 축복입니다.

 

묵상과 적용: 참된 지혜의 열매를 맺는 삶

야고보서 3:13-18은 참된 지혜와 거짓 지혜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면서, 지혜의 열매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겸손과 온유, 화평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반면, 거짓 지혜는 이기적 동기와 시기심에서 비롯되어 혼란과 악을 초래합니다.

 

우리 삶의 지혜가 세상적 지혜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며, 그 열매가 화평과 의로움, 긍휼과 선함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은사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모든 은사는 선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목표를 따라, 성도들이 서로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사를 사모할 때 가급적이면 어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방법인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일한 후 예언과 방언에 대해 비교합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5절입니다. 사랑을 따라 신령한 것을 추구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하고 예언과 방언을 대조합니다. 둘째 부분은 6-12절입니다. 왜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방언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셋째 부분은 13-19절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설명하고 결국 예언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언과 방언(1-5)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첫째가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큰 은사의 기준은 신령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은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필수 요소며, 사랑을 추구하는 은사라야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모든 성도들이 봉사를 행할 때,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은사를 통한 봉사에 있어서 항상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5)

 

고린도 성도들은 다른 영적 은사들보다 방언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은사가 방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함으로 영적 은사를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하고 특별히 공적 모임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을 더 추구하라고 합니다.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해서 인격적 관계성을 증진하고 교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예언을 추구(1)

 

더 큰 은사들을 만드는 길(12:31)인 사람을 설명한 후(13장), 교회 상황에 대해 권면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면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언하기를 권합니다.

 

(2) 예언과 방언(2-5)

 

바울은 방언의 무익성과 예언의 유익성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면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방언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소개합니다.

예언을 더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소통 방식이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2).

성령으로 자신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방언은 성령으로 혀가 움직여 말하는 것이기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 방언하는 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사람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요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은 다릅니다(3).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표현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필요 없고 예언만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의 기능과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4). 방언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웁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에서 잘 서기 위해 방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예언과 방언은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단지 그 기능과 목적이 다르기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방언과 예언의 상황을 구분해 권면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독자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성령으로 인한 교제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통로이기에 개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독자들이 예언을 더 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교회를 세워가는 데는 예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이냐 교회냐 사이의 상황 인식과 어떤 것이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이고 성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6-12)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추구할 때,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세우지만, 사사로운 욕심으로 구한 은사는 시기와 경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떠나 은사는 언젠가는 변질됩니다. 은사에 대한 열정이 항상 교회를 건강하게 섬기는 열정과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6-9)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에자기 덕을 세우는 데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사람들에게 알아듣게 말하는 것입니다.

 

(1)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6-9)

 

예언이 왜 필요한지를 계속 설명합니다. 일련의 조건절로 ‘나(바울)’의 예를 ‘너희(독자들)’에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두 가지가 언급됩니다.

6-9절은 그중 하나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전하는 경우입니다. 먼저 ‘나’의 경우입니다(6-8). 만일 ‘나’가 너희에게 가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아닌 방언으로 말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6) 방언이 다른 은사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소통이 되지 않아서 독자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7-8절에서 악기의 예를 통해 설명을 이어갑니다. 만일 피리나 거문고 등의 생명 없는 악기들이 음의 구분을 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 악기들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쟁 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나팔이 구분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찌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예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런 설명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너희’ 경우로 적용합니다(9). 만일 너희가 방언을 통해 분명치 않은 말을 전한다면, 그 말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언으로는 의사소통 할 수 없기에 마치 허공을 향한 소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공적 모임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2)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10-12)

 

‘나의 상황을’ 너희에게 적용한 두 번째 내용입니다. 언어 소통 과정을 예로 듭니다. 먼저 언어를 표현하는 소리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합니다(10). 아마도 세상에 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소리 없는(뜻 없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나’가 그 소리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자에 대해 야만인이 되고, 말한 자 또한 ‘나’에게 야만인이 됩니다(11).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신령한 것을 추구하기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언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12). 교회 안 공적 모임에서 방언을 말하면 서로 소통이 안 되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없기에 소통할 수 있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 사용에 대해(13-19)

은사를 추구하는 열망보다 은사 추구의 동기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고 사랑을 구연하는 은사가 더 큰 은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3-19)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무익성에 대해 설명한 후, 교회 것을 세우기 위한 영적인 은사가 더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세우기 위해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1) 방언 사용자는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13)

 

앞부분 설명을 근거로 방언 사용자에게 권면합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통역하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모든 방언 말하는 자가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통역의 은사가 있으면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2) 바울 경험을 통한 설명(14-15)

 

바울은 1인칭 표현으로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는 13절 내용을 부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때, 방언 기도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통역의 은사는 공동체적으로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건 생활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이성적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14)

따라서 기도나 찬송할 때 영으로 하는 방언과 이성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15). 하지만 상황 분별이 필요합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나 찬송은 14절처럼 개인 상황이지만, 이성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은 교회 모임이란 공적 상황입니다. 방언을 공적 모임에서 사용하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3) 독자들 상황을 통한 설명(16-17)

 

이제 바울은 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나 찬양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4-15절이 ‘나’를 통해 바울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이번에는 ‘너희’를 통해 독자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한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축복하거나 감사의 말을 해도 그것에 공감해 함께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적 예배 유지가 불가능하고 메시아의 한 몸이자 하나님의 한 식구로서의 정체성과 유대감, 인격적 사랑 나눔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4) 바울의 권면(18-19)

 

바울은 다시 1인칭 ‘나’를 사용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많은 방언을 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방언 자체가 필요 없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은 분명 성령의 선물입니다. 애써 금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공적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통역이 없는 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교제하고 함께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사랑 차원에서의 권면입니다.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사모하도록 권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자신을 위한 은사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예언의 유익한 은사를 구하길 바랍니다. 당신에게도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주시되,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유익한 예언의 은사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본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11)

서론

주기도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은 기도 가운데서 우리의 일상적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이 우리의 공급자 되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단순히 육체적 필요를 채워달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이 매일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공급하심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 기도는 물질적 공급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의 삶이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함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시며, 그분을 의지하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함께 묵상해보겠습니다.

1. 일용할 양식의 의미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매일의 필요를 구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전능하신 공급자이심을 인정하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의탁하는 겸손한 자세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목표로 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며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물질적 필요와 정신적 필요, 더 나아가 영적인 양식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일용할 양식”은 삶을 지속하게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일용할”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며 필요한 것을 매일 공급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즉, 우리가 앞으로 모든 필요를 한 번에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양식을 그날그날 공급받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매일 아침 하나님께 받은 사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만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매일 필요한 양식을 주신 중요한 사건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공급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영적 양식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의 육체적 양식을 채웠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양식을 채우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만나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신뢰를 상징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적 만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루치의 만나를 주시며,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쌓아두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출애굽기 16장).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 하루에 집중하고, 매일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도 이 기도를 통해 하루의 양식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매일 새로운 은혜를 구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만나와 같이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도 새로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며, 그분을 통해 우리는 육체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까지도 채우게 됩니다.=

2. 오늘날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신앙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기도가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현재의 필요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는 현재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분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현재에 집중하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현재에 필요한 것을 간구함으로써,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오늘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는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오늘의 필요를 맡길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하나님께서 그날그날 인도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는 내일을 계획하지 않거나 준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그분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루하루의 필요를 채우는 삶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3.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기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긴다는 것은 기도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공급하심을 신뢰하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적인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급자이심을 확고히 하고, 그분의 신실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맡긴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실 것을 신뢰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힘과 계획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공급자 되심을 믿고 맡기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매일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또한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며, 그분의 뜻에 맞추어 우리의 필요를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4. 영적인 양식을 구함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물질적인 필요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구하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으며,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매일 영적 양식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 가운데서 강건해지도록 돕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유지하게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매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경험하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영적인 배부름을 누립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단순히 물질적 필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영적 양식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며, 세상의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시기를 간구하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영적 양식을 공급받을 때,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자라나고 영적으로 성숙해집니다. 주기도문의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매일 영적 양식을 구하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5. 공동체적 기도와 나눔의 정신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로, 개인의 필요만이 아닌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는 동시에, 형제자매들의 필요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나누는 방식입니다. 초대 교회처럼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공동체 안에 풍성히 흐르게 됩니다. 이러한 나눔과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단순히 나 개인의 필요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를 함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가 공동체적이며, 우리 모두의 필요를 아우르는 기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맡기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채우신 은혜를 함께 나누고, 우리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돌아보아 그들의 필요에도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함께 누리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를 함께 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며 서로를 위한 기도와 나눔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공동체를 통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6.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의 결단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힘이나 계획에 의존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며 매 순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단지 요청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삶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잠언 3장 5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나 계획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잠언 3장 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나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신뢰할 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신뢰하는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매일 우리를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는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결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를 통한 은혜의 삶

기도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며, 우리의 필요와 염려를 그분께 맡기는 신앙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단순한 육체적 양식을 넘어서서, 우리의 영혼과 삶 전반을 하나님께 맡기며 의지하는 신앙을 가르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감사와 신뢰를 매일 새롭게 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게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매일 경험하며, 그분이 우리의 참된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 은혜를 공동체와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이 기도가 우리의 삶에 충만한 은혜와 평강을 가져다줄 것을 믿으며, 주님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날마다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행위이며,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간구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더 깊은 신뢰와 감사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장 11절)

1. '오늘날'(날마다)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마태의 주기도에는 '오늘날'을 "세메론”(σημερον : 오늘, today)이란 부사를 사용했고, 누가의 주기도에는 (눅 11 : 3) "카세메란"(καθημεραν : 날마다, each day)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날마다"(each day 또는 every day)는, 사실상 "오늘"(today)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날마다"와 "오늘날"이란 오늘 하루의 삶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오늘이란 삶을 살아야 한다. "어제"(yesterday)는 이미 지난 오늘이고, "내일"(tomorrow)은 다가올 오늘 이다. 성경은 오늘의 중요함에 대한 교훈들이 있다. 구원의 시간은 오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 에 있으리라."(눅 23 : 43)라고 하셨고,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 : 9)라고 오늘이 구원에 이르는 귀한시간임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에 완성된 자세로 살아서 오늘 주님이 부르시더라도 떳떳이 설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눅 12 : 20)라고 하셨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살게 될 마지막 날이 될런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이상 더 오늘이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셨으며 그것을 하루하루 먹도록 하셨다(출 16 : 13-20). 매일의 만나는 당일에(오늘) 다 소비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누군가가 다음 날 아침에 조반은 어디서 먹을까 염려 하여 물었다면 "우리의 염려는 오늘 하루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만나를「오늘」내려 주셨다. 만일 우리가 오늘 먹을 빵이 있다면 장래를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 하지 말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내일의 염려는 불신이다. 그리스도인의 만나는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오늘에 허락해 주신다. 의식주와 삶의 여러 분제로 염려하는 자들 은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와 함께 접목시켜 주시는 말씀인 "내일 일 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 : 34)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우리에게' (US)란 의미는 무엇인가?

주기도문 서론에서 밝힌 바 있지만 주기도문에서는 복수대명사 즉 "우리"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단수 인칭대명사는 발견할 수 없다.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우리에게 지은 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이러한 기도는 우리들 자신이 필요한 것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에 관한 간구와 중보 기도로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이기적인 "나는", "나를", "나의"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지만 주기도의 기도는 비이기적인 기도를 드리게 한다. 주기도문에는 후반부의 청원에만 우리라는 단어가 8회 기록되어 있다. 왜 우리는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복수형으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함을 보여주신다.

다윗은 기도할 때 공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시 125 : 4)

그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라고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로 시편을 시작하지만 그래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 그 시편을 끝 맺는다. 사도행전 여러 곳에 나타나는 사도들의 기도 역시 공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복수형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행 4 : 29).

예수님은 공적 정신으로 모범적인 기도를 드리신 분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결핍과 불행에 대해서 그의 하나님이 그의 자비하심을 그들에게 베푸시도록 기도한다. 특히 성도들을 위한 공적 기도에 힘쓸 것에 대하여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 :18)라고 하였다.

예수님은「우리」를 위해 사셨고「우리」를 위해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주여 저들을 용서 하옵소서」(저들은 우리도 포함된다.)라고 기도 하셨다. 네번째 청원에 "우리를"이란 의미는, 이기적인 거미와 같은 사람의 기도를 비이기적인 기도의 사람으로 바꾸게 해 주며 다른 사람들 의 유익을 위해 수정 같은 시냇물로 생기나게 해주고 황금 같은 태양빛의 햇살로 밝게 비춰 준다. 비이기적인 기도는 그의 기도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둘러싼다.
 

3.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말 개역 성경에 "일용할"이란 말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에피우시스"(επιούσιος)라 기록한다. 이것은 주기도문에만 나타나고 신약 다른 곳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낱말이므로 단정적으로 해석하기가 아주 어렵다. 주기도문의 근본 정신과 뜻을 혼돈하게 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하고 싶다.

첫째 : "에피우시우스"(επιούσιος)는 전치사 에피(επι : 위)와 우시아(ούσια : 존재 또는 본질)의 합성어로서 "존재의 필수적 인 것"(necessary for existence)이란 뜻이다.

둘째 : 에피(επι)와 우산(ουσαν = ημεραν : 날)의 합성어로서 "오늘을 위한"(for the current day, today)의 뜻이다. "오늘을 위한 양식"과 존재 즉 "생존에 필요한 양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시간에 관해서는 내일이나 종말적인 미래가 아닌 "오늘"로 양식의 내용 및 분령에 관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 최소한도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역 성경에 "양식"이란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아르토스"(αρτοτ : 양식)로 기록한다. 본문의 "톤 아프톤 헤-몬"(τον αρτον ημωυ)은 문자적으로 우리의 빵(Our Daily Bread)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대하여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 육신에 필요한 육적 양식이란 것이다.

칼빈이나 루터는 육적 양시이라는 견해를 가진다. 루터는 이 일용할 양식을 광범위하게 해석했고 "일용할 양식이란 육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인데 즉, 음식과 의복과 가옥과 가정, 전답, 가축, 금전 기타 여러 물건들과 배우자, 자녀들, 일꾼들, 또는 경건하고 진실한 지도자, 훌륭한 정부, 적당한 기후, 평화, 질서, 건강, 명예, 선한 친구, 믿을 만한 이웃 등을 말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아르토스"를 우리말 성경 에서는 "빵"(bread)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넓은 뜻으로서 식물 전체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에 공급되는 물질을 뜻한다. 주기도문의 넷째 간구에서 예수님은 본인 자신이 인간 현실에서 체험하신 바대로 인간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도 육신에 소용되는 양식은 인간의 삶에 충분 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 조건임을 드러내 주셨다.

둘째 : 일용할 양식을 예수님의 성만찬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요 6 : 33-35)

이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피와 함께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 : 35) 언급되므로 성례(Sacrament)를 위한 기도라고 했고 초대교회에서는 매일 성찬식(Daily Communion)에서 쓰여 지기도 했다. 성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참된 생명이 됨을 포함하기도 한다.

셋째 : 하늘나라의 떡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눅 14 : 15)라고 기록했는데 메시야가 오시면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큰 잔치를 베푸시는데 이 간구는 메시야 잔치에 참여시켜 주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보았다.

넷째 :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으로 해석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요 6 : 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 6 : 35)라고 예수님은 자신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생명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해석했다.

이상과 같이 정리해보면 일용할 양식은 육적인 양식, 영적인 양식, 영육간의 양식으로 언급된다. 우리 육신의 양식은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것인데, 생명에는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시에 영의 생명이 있다. 영적양식, 육적양식 이 두 가지는 마땅히 간구할 것이다. 때문에 본문에서의 청원은 좁은 뜻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넓은 뜻으로는 영적 양식을 다같이 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4. "주옵소서"란 의미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 성경에는 "주옵소서"라고 같은 동사로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의미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도스"(δσς)이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디두"(διδου)이다. "도스"는 "디도미"(διδωμυ ,주다)의 단순 과거 명령형으로서 일회적인 동작을 말하는데 대해서 누가복음의 경우는 현재 명령형으로 반복적인 또는 세속적인 동작을 말한다.

이 마태의 과거형 동사와 누가의 현재형 동사는 각 복음서에 기록된 "주옵소서"의 동작을 수식하는 마태복음의 "세메론"(σημερον : 오늘)이란 부사와 누가복음의 "카데메란"(καθημεραν : 날마다)이란 부사와 잘 조화를 이룬다. 필요한 양식을 마태복음에서는 오늘 한 번 "주옵소서"라고 계속해서 청원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는 주기도문의 이 청원에서 하나님은 오늘날(TODAY), 주시는 손(GIVE HAND)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시켜준다.

1) 하나님은 오늘날(TODAY), 매일(DAILY), 주시기(GIVE)룰 기뻐하신다.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으나"(사 46 : 10).

2)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구원과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 : 1)

3)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을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 로다"(시 37 : 24)

4)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성도들을 도와주시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시 41 : 10)

5)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우리가 겸손할 때 높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 : 6)

6)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성도들에게 일용할 식물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시 104 : 27-28)

이와 같이 이 청원에서 우리는 "주옵시고"(give, 주다)라는 단어로부터 이 생의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gift, 은사)이라는 것으로도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는 창설자와 증여자이시고, 그리고 현세적인 물질들을 위해서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날마다의 필요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 : 8)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청원에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옵소서, 나에게만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며 주변에 어려운 환경에 처한 가난한 자,궁핍한 자와 우리 집안 식구들과 영적인 식구인 성도들을 위해 드리는 비이기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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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 있는 믿음의 열매  야고보서 3장 1-12절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합니까? 부정적인 말, 거룩하지 않은 말을 주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말은 인격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의 지체들 중에 신묘막축한 지체는 혀인 것 같습니다. 10cm 혀로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의사 소통을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증명하기 위해 첫 번째로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합니다. 총 네 가지의 법주로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 범주는 ‘말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에 대한 힘(1-2)

지도자는 다른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책임을 지기도 합니다. 지도자에게는 그에 따르는 많은 직책도 주어지지만 책임도 부여됩니다.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1-2)

 

 

야고보서 1-2장은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 행함이란 하나님의 긍휼(헤세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긍휼의 실천 중 첫 번째 행함인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혀의 부정적 이미지를 크게 네 파트로 나눠서 예를 들어 설명하고 강조합니다. 그것을 근거로 혀의 사용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1) 말이 많은 사람(1)

 

당시 야고보를 읽는 대상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선생’하면, 유대인의 율법 선생인 ‘랍비’이 가졌던 모종의 지위와 존경을 받고자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도적 혹은 예언자적 지위를 갖춘 정식 선생들에 대한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초대교회는 당시에는 낯선 사람들까지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관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생’ 대우를 받으면서 많은 것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게 되니, 강론 시간이 ‘아무 말 대찬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인기 강사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없고 ‘강연회’가 되어버리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생’들이 누리는 것만 생각하고 자신의 책임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점점 식상해져 버리고, 사회 사교장이 되어버려서 교회를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치는 일은 꼭 수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 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받을 정죄함이 더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졌다고 고백한 자에게는 그 의무를 수행할 더 많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2)

 

야고보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만 손가락질하는 마음으로 지적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발행한 문제들은 대부분 말의 실수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수단이 있지만, 보통은 말로 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오해도 많습니다. 어디를 막론하고 붙어 다니는 이 조그만 혀만큼 그리스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만일 성도가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온전한 사람(완벽한 사람)입니다. 혀는 능히 자기 온 몸도 굴레 씌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길들려진 혀를 필요로 합니다.

 

말에 대한 문제(3-8)

우리 몸에서 혀는 작은 편입니다. 하지만 제어하기 어렵고,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혀는 훈련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혀로 악의를 가지고 내뱉은 한마디 말은 인격을 파괴하고 영혼을 실족하게 합니다. 그래서 혀는 인생의 방향까지도 결정합니다. 혀는 훈련시킨 대로 움직임입니다.

 

3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사람들이 실수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말(言)입니다. 인간은 듣는 존재인 동시에 말하는 존재입니다. 언어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말을 통해 생각을 전달하고 다른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반면 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1) 혀의 위력(3-5)

 

말(馬)은 입에 물리는 작은 재갈로 통제하고, 큰 배도 조타실에서 작은 키로 운항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작은 불씨로 큰 불을 냅니다. 이처럼 혀는 작지만, 그 위력은 전체 방향을 좌우하는 큰 힘을 지닙니다.

말 한마디가 축복과 저주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혀는 잘 사용하면 엄청난 유익이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엄청난 손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말실수는 한 번에 그 동안 평생 쌓아온 높은 직위와 주변 관계 그리고 많은 재물까지도 허물어뜨리고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2) 혀를 통한 사단의 공격(6-8)

 

혀가 큰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험성 또한 큽니다. 더 위험한 것은 길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혀는 작으면서도 그 영향력은 대단하기 때문에, 사단이 이용하려고 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말을 사용할 때, 부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구사하도록 합니다.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단언합니다. 화가 난 혀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타오릅니다. 혀를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때로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 전부 불태우며 지옥 불을 경험하게 합니다. 말은 진실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이 중요한 만큼 통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혀는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혀가 무서운 것은 길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생물들은 훈련만 시키면 얼마든지 길 드려집니다. 개들도 훈련을 통해서 주인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새들도 훈련시키면 순종합니다. 하지만 혀는 길 드려지지 않습니다. 혀를 길 드릴 수 없는 이유는 ‘정함이 없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기’ 때문에, 제어하기 쉽지 않습니다.

혀로 나오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혀는 자연 상태로는 타락한 사람들의 혀에서 나오는 말은, 절대로 용기를 주고 살리는 말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이미 죄로 물들어 길들일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말에 대한 이중성(9-12)

누구나 말 실수를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의 선한 기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통해 우리는 말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9-12)

 

 

본문에서는 혀의 힘과 그 위험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악을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모순된 행동입니다. 또한, 같은 근원에서 단맛과 쓴맛이 나올 수 없듯이, 우리의 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 양면성을 가진 혀(9-10)

 

야고보는 이중적인 언어를 ‘독사의 둘로 갈라진 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로운 찬양을 할 때 보면, 찬양하는 모습이 천사가 내려와서 찬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들이 형제·자매들과 싸우며 욕하는 모습을 보면, 사탄 같아 보입니다.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2) 선한 혀를 가짐(11-12)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셨을 때 먼저 거룩한 제단의 숯불을 그의 입술에 닿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입술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의 내면세계가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언어(言語)의 변화는 인격(人格)의 변화입니다. 인격이 변하면 언어도 변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혀로 지은 모든 죄를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입술에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에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입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혀를 주신 이유는 진리를 말하라고 주셨습니다. 찬양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언어를 주셨습니다. 죄로 물든 입술을 날마다 성령의 불로 정결케 해주시기를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혀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맞게 진리를 나누고 찬양하는 거룩한 삶을 사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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