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 적 선 행      야고보서 4:13-17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나 새 천년을 산다는 것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특별히 새 천년 한 해를 보내면서 송년주일로 맞이했습니다. 첫 주일이 우리의 출발이라고 말한다면 끝주일은 종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직선적입니다. 불교는 윤회적이기 때문에 돌고 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시작이 있고 코스가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기독교의 시간관입니다. 우리의 생에 다시 없는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시절 또는 장년시절, 노년시절 어떤 세월을 살든지 우리의 생애는 한 번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연습할 시간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연습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어린시절이나 어른이나 한 번 살다 가기 때문에 되풀이 할 수 있는,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대로 한 번이고 그대로 종말일 뿐입니다. 이 역사의 방향을 따라 인생은 한 번 살다 갈 뿐입니다. 아무도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에 한 번이 지나가는 하루 하루가 우리에게는 마지막이고, 최후요, 전부입니다. 이런 엄숙한 한 해를 우리는 마감하면서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입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나 됨의 본질을 아는 것이 인간됨의 최고의 지혜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자기의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역사속에 이 시대에 태어나 존재하는가 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바로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할 일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하는 일로서 보람을 느끼며 인생을 창조하며 삽니다. 그것은 그 일에 대해 자기 자신이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가치감을 느낄 때 자기 삶의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인생의 과정에서 사춘기가 있고 사추기가 있습니다. 사춘기는 소년시절 봄을 생각하는 때요,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화사한 봄철에 꽃이 피듯이 우리 외모의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옷도 자주 갈아입고, 인물도 생기가 있고, 모든 삶이 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40이 넘으면 자기 외모에서 어떤 모양을 내는 것으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하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으로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산에 가보면 가을꽃은 초라합니다. 가을은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나무에도 열매요, 곡식에도 열매가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지 꽃이 피는 것으로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으면 자기 삶에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가치가 있어야 됩니다. 보람이 있어야 됩니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아무런 보람이 없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인생이 공허해지기 시작합니다. 50이 넘고 나이가 든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립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나’ 하면서 공허를 느낄 때 그 인생이 우울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적의 상실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인생의 무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해가 기울어가는 이 시간 자기 자신에게서 삶의 목적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셋째는 인생의 종말을 아는 것입니다. 종말은 인생이 끝나는 날입니다. 죽는 날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입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죽는 날이 있습니다. 자기 종말을 알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종말은 어떤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도 잘될 때 끝나는 날이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는 날도 있습니다. 직장에 들어갔으면 나올 날이 있습니다. 올라갔으면 떨어질 날이 있습니다. 종말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나이를 알고 인생의 허무를 압니다. 사는 날이 짧은 것을 압니다. 자기 사는 날을 헤아리는 것이죠.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야고보 사도는 인생의 짧음과, 허무성과, 연약함에 대하여 간략하고 명료하게 우리에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지금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한 해가 사라졌구나! 내 인생에 다시는 안올 세월이 흘러가고 있구나!’ 그런 허무감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날을 계수함을 가르치사 우리가 몇 날이나 사는지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옛날에 다윗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화려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종말을 생각했고, 세월을 생각했고, 인간이 연약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시 39:5)

사업이 든든하다, 건강이 든든하다 말하지만 이것이 언제 안개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잘 묘사했던 솔로몬 왕은 인생의 헛됨을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바람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잡으러 쫓아가는 것처럼 인생을 어리석고 헛되게 산다는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앞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말이 앞서 있습니다. 내일이 뭡니까? 내일은 네 날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주시면 있고 안주시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모든 날들이 다 주께서 주신 날이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 날이고 거두시면 내 날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전세 기한동안 이 지구라는 전세 집에 살다가 끝나라 하시면 끝나는 것을 안다는 것이죠.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전세 기한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지금 전세 기한 중에서 1년이 갔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계산해야 됩니다. 그래서 실로 인생의 사는 날에 대하여 덧없음이 지나갔던 허무한 인생에 대하여 지나간 우리 조상들은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내 청춘 누구 주고 뉘 백발 가져온고

백발이 오가는 길 알았더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막는 길이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60이 넘으니까 1년이 새롭고, 70이 넘으니까 한달이 새롭고, 80이 넘으니까 하루가 새롭다.”

우리의 세월이라는 것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허무를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짧은 인생동안 속지 말아야 됩니다. 젊어서 모은 재산, 퇴직해서 가진 돈 사기 당할 때 그 억울함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 억울함이 늘 있습니다. 세월 속에서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청춘을 고스란히 사기당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 헛된 일에 분요할 때, 짧은 인생을 속아서 헛되이 살고 나중에 사기 당한 것처럼 억울해 탄식하고 괴로워할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속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에 속고 있습니까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13절)

이것이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사는 목적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기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사기 당하고 있느냐? 어떤 이익을 추구하면서 사기 당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그의 년간 계획입니다. 치밀한 계획입니다. ‘이를 보리라’ 분명한 그의 목표가 있습니다. 당시에 새로운 도시가 서면 많은 장사꾼들이 거기에 가서 사업을 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현재나 그때나 시장을 개척해서 나가려는 사업의 계획은 똑같습니다. 이 사람이 돈 벌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한가지가 문제입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여기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돈을 번 이후에 계획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획이 없습니다. ‘이를 보리라’ 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목적이 없으며, 하나님을 위한 계획이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돈버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사업을 하면 사업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빌딩을 짓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이후의 목적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있어야 합니다.

얼마전에 평화시장에서 지게꾼이 장사를 해서 오천 만원짜리 적금을 들어서 은행으로부터 상패와 저축상을 받았습니다. 사회자가 수상자에게 물었습니다. “그 돈으로 무엇하겠습니까?” 수상자는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저금해야지요. 그리고 금년에도 5천만원 벌어 적금하렵니다. 그래서 일억을 만들랍니다.” 사회자가 또 묻습니다. “그 일억으로 뭘 하시렵니까” “계속 저축해서 일억 오천을 만들랍니다.”

이 사람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풀빵 장사해서 오천만원 적금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돈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이 돈 버는 재미도 있고, 돈 갖고 있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재미가 없습니다. 돈 쓰는 재미가 없습니다. 돈 쓰고, 칭찬듣고, 보람을 얻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슨 목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한 해를 결산할 때 무슨 목적으로 사셨습니까 ‘오늘이나 내일이나 돈 벌고 이를 보리라’ 하는 마음뿐입니까? 빌딩이나 짓고 사업이나 늘리다가 죽으시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 벌면 성공했다 말합니다. 그런데 돈 벌고 부도난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벌고 양심을 부도내고, 돈 벌고 인간의 의리를 부도 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패했어도 그가 진실하게 산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섰다면,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고 있다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에 대하여 속지말고 살아야 합니다.

미국 시카고에 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 목사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젊은시절 아버지의 도움으로 남미 브라질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리오데자네이로 한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혼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세계에서 돈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호텔에서 60대로 보이는 한 노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보, 우리가 그동안 고생한 가치가 있지 이제까지 60년이 넘게 먹지 않고, 쓰지도 않고, 고생만 하다가 이런 멋진 휴가를 보내며 오늘밤에는 이렇게 호화로운데서 호강을 하니 고생한 가치가 있지”

빌 하이벨스 목사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노부부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고 측은하게 보이더랍니다. ‘일생 안먹고, 안쓰고, 고생하다가 고급 식당에서 저녁 한끼 먹는 것이 뭐 그리 행복하단 말인가?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란 말인가 그는 그날 숙소에 돌아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제가 적어도 이보다는 더 가치있는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이것보다는 더 영광스런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는 그때 일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행로에 대해 귀중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목적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의 종말을 교훈으로 남겼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 12:16-19)

이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많아 큰 곳간을 짓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그리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리라”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부자는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죽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오늘 우리 사회에 산다면 그는 크게 성공한 사람일 것이요, 사회적 명성과 존경을 독차지 할 것이요, 그는 아마 경제계에서 극소수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예수님은 왜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사는 목적을 먹고 마시는 동물적 가치관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목적과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목적이 자기 안일과 행복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견딜 수 없으리 만큼 모든 것이 무의미하여 질 것이다. 그러나 반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보라 그 순간 영구한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사업에 성공했다고 떵떵거리면서 인생을 탕진하는 사람을 보면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시 17:14)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신을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설문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생명이 일년만 남았다면 어떻게 쓰겠습니까?” 이 설문에 대하여 대답은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을 도우면서 살겠다, 주면서 살겠다, 전적으로 사랑하면서 살겠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며 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높이 평가되어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착해진다고 합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가지 일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좀 더 참을 것을, 좀 더 베풀 것을, 좀 더 재미있게 살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좀 더 참지 못해서 마음 상하고, 천천히 판단해야 되는데 조급하게 판단해버리고, 평가해버리고 절망합니다. 지난 일년을 회개해 보세요. 참지 못한 언행으로 잃어버린 우정, 평안, 진실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참을 것을 후회하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좀 더 베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것이지요. 내가 좀 더 넉넉할 때 핑계를 대면서 베풀지 못했고, 줄 수 있었을 때 안주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우리는 선을 행하여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으로 선한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기적인 마음을 포기해야 됩니다. ‘이를 보리라 하는 자’는 남에게 선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선을 알지만 못합니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양심이 고발합니다. 다른 사람도 기만합니다.

오래전에 미국 보스턴시에 스토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졌으나 그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씨를 찾아가서 이천불을 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는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씨는 웬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2천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씨는 파산 위기에 있었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오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했습니다. “분명히 빚진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준 은덕은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못갚습니다. 그때 이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스트로사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마워했습니다.

여러분, 은덕과 사랑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갚아야 할 은덕이 생각 날 것입니다. 카드 한 장을 써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십시오. 그래야 선이 됩니다.

작자 미상의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만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때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생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가정(假定)들이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하지만 복음에 있어서 가장 끔찍한 가정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일 것입니다. 왜 그런 가정은 성립될 수 없습니까? 있어서는 안 됩니까?

 

  • 예배 상황에 대한 것을 끝내고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부활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2절로, 바울이 듣고 독자에게 전한 복음에 대해 소개합니다. 둘째는, 3-8절로, 부활과 관련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셋째는 9-11절로, 바울과 관련한 추가 정보를 제공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1-2)

 

이 부활신앙은 지금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입을 통해 고백되어지고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에 대한 구체적 문제를 상술하기 전에, 과거에 바울이 전하고 고린도 성도들이 들었던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바울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과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과 모든 사도들이 공유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말합니다.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1-2)

 

 

바울이 말한 ‘알게 하노니’는 표현과 복음이란 말로 이전 부분과 주제적 단절을 보입니다. 11-14장이 교회 모임에 대한 것이라면, 15장은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알게 하노니’라는 말로 운을 떼고 추가 설명으로 그 복음의 성격을 말합니다. 그 복음은 바울이 독자인 ‘너희’에게 전한 것입니다. ‘너희’가 받아들여 이미 그 안에 서 있고, 바울이 전한 것을 잘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복음의 진리와 연결된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바울의 증거는 복음이 아닙니다. 또한 성도 몸의 부활이 없으면 역시 복음이 아닙니다.

 

둘째, 부활의 복음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예수 메시아로 교회의 터를 잘 닦을 때(3:10) 가르쳤던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 진리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셋째, 부활과 관련해 고린도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비상식적인 것이고, 영에 비해 몸을 중시하지 않는 당시 생각 속에서 몸의 부활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넷째, 고린도 성도들은 진리에 계속 서야 합니다. 그는 복음의 내용을 상기시켜 굳게 붙잡으라고 하고, 그들이 가진 믿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계속 부활 내용을 뺀 채로 복음을 믿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결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진리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활 진리는 세상 사고를 따를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일하심의 진리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다섯째, 구원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계속 진리 안에 서 있음으로 완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완성을 향해 가는 ‘구원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활과 관련한 복음의 내용(3-8)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신비한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성경대로 사는 것을 열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3-8)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바울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1) 복음의 내용: 메시아의 죽음(3-4)

 

바울은 부활과 관련한 복음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바울이 받은 것을 독자들에게 전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접속사로 시작하는 네 가지 일련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사건은 메시아의 죽음입니다. 메시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었습니다. 구약 약속의 성취로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더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적은 십자가에 대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 이미 가르쳤기에 더 설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열쇠는 ‘성경대로’입니다. 메시아 고난에 대한 구약 본문들이 여럿 있지만, 특별히 죄 용서와 관련해 신명기 21:22-23과 이사야 53장이 대표적입니다. 신명기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사람들 죄를 대신 지고 고난당한 자의 이야기입니다. 신명기 내용과 연결시키면 메시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서 죽은 것은 사람들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둘째 사건은 메시아의 장례입니다. 성경 예언(이사야 53:9)의 성취이지만, 바울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건은 부활입니다. 성경대로 제 3일에 다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모든 과정은 구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의 성취이며 요소들 모두가 구원사건의 핵심입니다.

 

(2) 복음의 내용: 메시아의 부활과 증인들(5-8)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한 네 번째 사건은 예수 부활을 목격한 것입니다. 바울은 상대적으로 이 부분을 길게 언급합니다. 전하고 싶은 주된 초점이라는 말입니다. ‘그후에’를 통해 시간 순서로 목격자들을 소개합니다. 처음은 게바, 곧 베드로이고 그 후는 열두 사도입니다. 그 후는 오백 명 넘는 형제들이고 그 후는 야고보이며 그 후는 많은 사도들이고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입니다.

이런 설명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부활과 관련한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목격자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본 것이 아닙니다. ‘보다’동사의 수동형과 대상을 의미하는 여격(~에게)을 통해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이 보게 되었음을 묘사합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따라 목격자들을 네 그룹으로 구분합니다. 베드로와 열두 사도, 오백 명 넘는 형제들, 야고보와 많은 사도들, 그리고 바울입니다.

둘째,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여러 목격자를 열거한 것은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오백 명 넘는 형제 중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첨가한 것(6)도 그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 역시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한 자입니다. 비록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 같은 자이지만, 그에게도 주님이 나타나셔서 부활하심을 알게 했습니다.

 

바울 자신에 대한 추가 정보와 결론(9-11)

온전한 복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나타내고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은 결코 ‘더 많이 수고하면서’ 부활을 전하는 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9-11)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는 표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나’라는 1인칭 강조 지시어를 통해 사도 중 가장 작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설명은 바울의 구원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의 대조로 진행됩니다. 먼저 구원 이전 상태입니다(9). 그는 감히 사도라고 불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1-2 내용을 반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에서는 주의 제자들을 핍박했다고 표현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참조, 갈라디아서 1:13, 23; 빌립보서 3:6)라고 말합니다. 몇 가지 생각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교회관입니다. 그는 교회를 건물이 아닌 사람들, 곧 하나님 백성의 모임으로 이해합니다(1:2). 더 나아가 교회를 메시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반영한 듯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는데,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왜 자기를 핍박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을 예수님과 동일시한 표현입니다. 이 경험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서로 뗄 수 없는 한 몸으로 인식하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바울이 편지를 쓰는 의도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자였습니다. 지금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그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 교회를 핍박하던 자가 사도가 되어 교회를 세웠고, 지금 어지러운 교회를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10절은 ‘그러나’를 통해 구원 이후의 반전 상태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비교하거나 경쟁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것에 응답해 충성스럽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은혜입니다. 구원과 은사와 지식을 도구 삼아 비교와 경쟁으로 교회를 어지럽힌 고린도 성도들과 다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그간 언급한 복음의 내용과 부활에 대해 결론짓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의 복음 전파 내용이 다르지 않다는 것과 그 내용을 독자들이 믿어 구원을 경험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의 내용이 담긴 복음은 바울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만 전한 것도 아닙니다. 목격자가 있는 역사적 사실로, 초대 교회 모든 사도와 전도자들이 공유하고 있고 또 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 역시 경험으로 확증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난 모든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삶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그간 모든 역사를 설명할 수 없고, 우리가 선 가리를 알 수 없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생명도, 소망도, 삶의 의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 6:9-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인 송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이 부분을 괄호 안에 넣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불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 부분을 괄호 안에 넣어서 처리하거나 어떤 역본에는 생략을 한 것은 이 부분이 오래된 중요한 사본들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원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원본이 있다고 한다면 수천억 수조원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원본을 보고 쓴 사본들이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후대 사람이 기도를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고 끝내니까 좀 이상하고 또 다른 기도문에는 보통 송영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에는 빠져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채워 넣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시시한 부분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없었던 것을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본을 만든 사람들이 실수로 이 부분을 놓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놓쳤든 누군가가 삽입을 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이 꼭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기자를 통하여 기록하신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본문의 송영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대개”라는 말에 대한 것입니다.

예날 성경찬송가 앞에 나오는 주기도문에는 “대개”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없었지만 주기도문에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버릇이 돼서 대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찬송가를 편집하신 분에게 왜 대개라는 말을 뺐는지 질문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이유를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대개라는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 대개라고 쓰는 단어는 한자어가 다른 대개(大槪)라는 말로 이해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대강, 대부분”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서 대개라는 말은 한자어가 다른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쓰는 대개는 한자어는 개(槪)자를 대개 개자를 써서 대개(大槪)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서는 뚜껑 개(蓋)자를 써서 대개(大蓋)라고 합니다.

“일의 큰 원칙”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대개(大蓋)입니다.

 

 

헬라어 원어는 호티(ὅτι)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왜냐하면”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for로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기도를 마치고 왜 이렇게 기도하느냐 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죄 사함을 구하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느냐 하면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지 알지 못하고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권세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기도문처럼 기도하는 이유를 바르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이 송영의 부분이고 그래서 그것을 연결하는 대개라는 말이 참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생략하지 말고 그대로 사용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비단 주기도문만 그 이유를 알고 기도할 것이 아니리라 모든 부분에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참 중요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믿음 말고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고 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새로 정하신 의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우리의 삶이 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구원해 주셨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찬송을 불러야 합니까?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설교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까?

비록 목사라는 한 인간이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말씀을 하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왜 매주 이렇게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왜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기도를 마친 후 송영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왜 이렇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 참된 기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나라"라는 말은 "주권" 곧 “다스림”을 뜻하는 말입니다.

천국의 가장 첫째 되는 뜻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이나 화려한 환경이 아니라 왕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를 다스리시고 내가 그 다스림에 복종할 때 우리도 이미 하나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으면 그 가정이 천국이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관계가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면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사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다스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는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와 같을 수 없습니다.

누가 대통령을 한다고 해도 거기는 온갖 실수들이 있게 마련이고 공평과 정의가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공평과 정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실 수 있는 만왕의 왕이시오 참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권이라는 말을 하나님께 쓸 때 절대주권이라는 말로 씁니다.

하나님은 상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대주권이 있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다스리실 때 거기 공평과 정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절대 권력을 준다면 거기는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자들에게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싫어하고 순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교회에서 순종하라고 하면 사람들이 참 싫어합니다.

권력에 희생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순종은 사람에게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기도가 달라집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같은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먼저 기도합니다.

 

 

그들은 나 자신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게 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완전한 나라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이미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종이나 혹 회사의 사원이 그 주인이나 사주에게 결재를 올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그 결정의 권한을 절대적으로 그 주인이나 사주에게 있는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원이 사주에게 종이 주인에게 결정해줄 것을 강요할 수 없고 다만 그의 생각을 말하고 주인의 뜻과 일치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주인이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도 이러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온갖 것을 구할 수는 있지만 주시고 안 주시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구하는 자의 태도나 공로나 열정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혹시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거나 잘못 구한 것이나 불리하게 구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고집스럽게 하는 기도는 이 하나님의 주권에 반항하는 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도 끝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덧붙였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2.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권세"→"두나미스"→"다이내믹"→"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권세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강력한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마치면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실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기도가 잘 못 되었거나 응답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기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무한하십니다.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일은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를 위하여 안 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제단과 대결하던 바알의 제사장이 하던 것처럼 광적으로 상처를 내면서 자학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도할 때에 마치 하나님께서 주무시기나 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를 드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영원토록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권세라고 할 때 능력이라고 할 때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본 말씀은 복음의 능력일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라고 했습니다.

여기 능력이라는 말이 권세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이 바로 의인이 되고, 사탄의 종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히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신비한 몸으로 부활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도 믿지 못합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가셨다고 하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 위로 걸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돌을 밟고 지나가셨는데 제자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그 전능하심으로 못하실 것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3.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많이 씁니다.

개혁주의자들의 주장 중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주제가 있을 만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막상 영광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마땅히 대답할 말을 잘 모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말하고 비슷한 말로는 명예, 광영 등이 있고 반대말로는 치욕, 불명예, 굴욕 등의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이란 최고로 빛나는 것이고 최고로 아름다운 것이며 최고로 선한 것이며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이며 최상의 기쁨 최고의 명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최고의 칭찬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순간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영원토록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최고의 가치와 칭찬을 사람에게 돌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만 이런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마라톤 선수가 세계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습니다.

정말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순간입니다.

시상대에 올라서 금메달을 받고 인터뷰를 합니다.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예 저를 이렇게 훈련시켜주신 감독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 저를 낳아주시고 뒷바라지 해 주신 부모님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예 저와 함께 이 고난의 길을 걸어온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립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일을 하지도 못하고 또 했다고 해도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미화하고 자랑하기에 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세상에서나 선하시고 좋으신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뿐이십니다.

칭찬을 받으실만한 분은 인정을 받으실만한 분은 영광을 받으실만한 분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도와주실만한 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만한 분은 우리가 잘못기도했을지라도 더 좋은 것을 주실만한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주기도문 강해를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할 것은 그저 주기도문을 시간에 따라 순서에 따라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뜻을 깨닫고 그 뜻을 깊이 새기면서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로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기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뜻이 이루어 지이다. 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몇 십 년 먹을 것을 쌓아 놓고 싶으면서 이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받을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이나 마귀의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개, 즉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권세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올바른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야고보서 4:11–12

 

율법의 판단자가 아닌, 율법의 행위자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날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의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말과 판단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깊은 영적 무게를 가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도덕적인 언어생활의 권면을 넘어서, 하나님의 통치와 권위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위치를 재정립하게 합니다.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단지 인간 간의 문제를 넘어서, 결국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 자신을 판단하려는 태도임을 밝힙니다. 이러한 언행은 곧 구속사 안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이 지녀야 할 경외심과 겸손함에서 벗어난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입술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반영인지, 그리고 진정한 복음의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어떤 자세로 공동체를 섬겨야 하는지를 함께 묵상해보겠습니다.

 

1.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4:11上)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4:11上)

야고보는 따뜻한 호칭인 ‘형제들아’로 이 권면을 시작합니다. 이는 단호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가족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권면입니다. 여기서 '비방하다'(καταλαλεῖτε, katalaleite)는 헬라어로 '비하하다', '험담하다'는 의미로, 단지 비판이나 건설적인 충고가 아니라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의 말입니다. 이는 곧 형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보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비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무서운 죄입니다. 비방은 상처를 남기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자녀를 향한 언어는 곧 그분을 향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형제를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피조물을 조롱하는 자이다”라고 말하며, 비방의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비방합니까?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상대를 낮춤으로써 자신이 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보이고 싶어하는 숨은 교만이 작용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마 12:34). 즉, 비방은 내면의 정죄와 교만이 외형화된 언어입니다. 성도는 입술을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형제를 축복하는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2. 형제를 판단함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다 (4:11下)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4:11下)

 

야고보는 단순히 형제를 향한 말이 아니라, 그 판단의 태도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무서운 영적 원리를 선포합니다. 율법은 인간이 평가할 대상이 아니라, 순종할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은 그의 뜻과 성품을 반영하며, 그 율법 안에서 모든 공동체는 공의와 자비의 질서를 유지하게 됩니다.

 

‘판단한다’는 말은 단지 도덕적 평가나 올바른 권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누가 율법을 어겼고 누가 자격이 없는지를 결정하는 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사람은 율법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율법 위에 서는 자는 곧 하나님 위에 서려는 자”라고 경고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욕망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교만이 바로 이 판단하는 마음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준행자, 곧 율법에 순종하는 자는 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며, 동일한 긍휼이 자신에게 필요함을 압니다. 그러므로 그 입에서는 판단이 아니라 자비와 인내가 흘러나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우리가 무자격자임을 먼저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본 자만이 타인을 향해 정죄하지 않고,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십니다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4:12)

 

이 구절은 야고보서 전체의 윤리적, 신학적 중심을 담고 있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일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시며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입법자와 재판관, 이 두 개념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위입니다. 사람은 판단받는 자이지, 판단하는 자가 아닙니다.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심판의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 가치를 정하는 자리에 서는지를 일깨우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판단은 공의롭고 완전한 기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야고보는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무지를 드러냅니다. 이 질문은 욥기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일련의 질문들과 유사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지닌 연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격려하며 함께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려던 군중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판단을 멈추라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자들이라는 본질적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정죄의 집단이 아니라, 은혜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결론: 비판이 아닌 은혜의 통로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은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무서운 영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단지 상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는 시도이며, 이는 구속사의 흐름 안에서 매우 심각한 배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제정자이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앞에 겸손히 서야 할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정죄의 도구가 아닌, 축복과 중보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은혜로 말합니다. 자비를 입은 자는 자비를 베풉니다. 그럴 때 우리는 율법의 판단자가 아닌, 진정한 율법의 행위자로, 복음의 통로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말과 판단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겸손히 살아가며, 공동체 안에서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복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출처: https://392766.exbible.net/entry/야고보서-411–12-강해-형제를-비방하지-말라 [Pensées:티스토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6:9-13

오늘은 주기도문에서 인간에 대한 마지막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을 위한 첫 번째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였습니다. 두 번째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셋째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시험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이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시험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험입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 단련하시기 위한 시험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사탄의 시험입니다.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리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같은 기도입니다. 여기서 악이란 악도 되고 악한 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악한 자는 사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악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기도는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이 전혀 없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이 기도는 사탄의 시험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사탄의 시험이 있어도 그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기도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끊임없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시험이 끝나고 난 다음에 눅4장 13절에 “눅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잠시동안/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얼마 동안”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잠시 동안”이라고 하고, 또 공동번역에서는 “다음 기회를 노리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았지만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은 “히4:15.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히 4:15)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있냐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또 왜 사탄이 이렇게 나를 시험하는가 라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또 사탄은 예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시험하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시험이 있어도 시험에 들지 않으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시험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늘은 저렇게 맑고 푸른데 하나님은 왜 내 삶을 저렇게 맑고 푸르게 하지 않습니까? 라고 원망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극심한 사탄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도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26장 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에게 시험을 해 와도 그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합니까?

 

1)먼저 우리는 사탄의 존재와 시험에 대해서 영적으로 항상 깨어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이구나라고 깨어 있으면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사탄의 시험에 대해서 깨어있지 않을 때 사탄의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사탄의 시험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 응답이 보이지 않고,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시험을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께 대하여 낙심하게 만들고, 기도에 대해서도 낙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또한 기도의 응답을 받고, 일이 잘될 때도 시험을 합니다. 기도응답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 이제 이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하고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만듭니다. 이것도 사탄의 시험입니다.

또한 일이 잘 되면 그 일이 마치 사람의 힘으로 된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도 사탄의 시험입니다.

또 이제 모든 일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사탄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절대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죽기까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에도 시험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면 무얼 하겠는가? 남들은 쉬는데 왜 나만 일하는가?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가 일을 중단하고 포기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은 우리가 일을 다 한 후에도 시험을 합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일을 하였으니 쉬어야겠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사탄은 우리가 일을 할 때만 아니라 일을 다 하고 쉬려고 할 때도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건강할 때도 시험을 합니다. 그래서 건강하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육신의 안락과 게으름과 편안 가운데 젖어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또한 사탄은 우리가 건강하지 않을 때도 시험을 합니다.

그들 육신이 약하여져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사탄은 시험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바쁘고 육신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해해주시지만 우리를 노리고 있는 사탄은 절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육신이 약하니 사탄이 이해해주겠지-기도하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 육신이 약할 때 더 강하게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 사탄은 평안 할 때도 시험을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평안이 아니라 “편안해 편안해 내 육신 내 육신 편안해” 할 때 영적 무지와 나태와 거짓 평안으로 빠지게 해서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또한 사탄은 극심한 환난가운데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환난을 당할 때는 몇 가지의 일들이 갑자기 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우리가 평안 할도 시험을 하고, 또 극심한 환난가운데서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 오늘 이 시대는 사탄이 우리 가정과 교회를 향해서 끊임없이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에 대해서 항상 깨어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둘째로 우리는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 현재적 약점에 대해서 항상 깨어있어합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현재적 약점을 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현재적 약점이 무엇인지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마26장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의 현재적 약점은 육신의 피곤함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기도해야할 때 잠을 자게 되고, 결국 사탄의 시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지금 나의 현재적 약점이 무엇인지를 깨어서 살펴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습니다. 돌도 떡덩이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때 사탄이 무엇을 시험합니까?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지금 경제적인 빈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탄은 항상 그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여러분을 시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여러분들의 현재적 약점이 감정의 우울함에 있습니까?

 

“빌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합니다.

왜 사도바울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언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합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없을 때입니다. 감정적으로 우울하고 여유가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안에서 항상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항상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여러분들의 현재적 약점이 감정의 흥분에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또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합니다.

왜 성을 내더라도 더디 내어야합니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흥분하다 보면 마귀가 틈을 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현재적인 약점이 감정의 흥분에 있을 때는 잠잠히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시37: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의 현재적인 약점이 제자들처럼 육신적으로 연약과 피곤함에 있습니까? 너무 바빠서 피곤해서 기도할 시간조차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사탄은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시험하고 있음을 명심하시 바랍니다. 바쁠수록 더 기도 해야합니다. 피곤할수록 더 하나님께 엎드리고 나와야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무엇보다 기도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마26장 41절에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가 중단될 때 시탄이 항상 우리를 시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기도는 스페어타이어가 아니라 핸들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페어타이어는 항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필요합니다. 그런데 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핸들은 항상 붙잡고 있어야합니다. 핸들을 놓치는 순간 사고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도를 위기의 순간에만 필요한 스페어타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한 순간도 놓을 수 없는 핸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항상 깨어서 기도함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4:1-10) 

 

사람은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가 생긴 것입니다. 사람은 가까이 하는 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까이 하고 있나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야고보서 4장 7절과 8절은 우리에게 마귀는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가까이 하지 말고, 대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피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귀는 멀리하고 대적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사람입니다. 시편 65편 4절은 “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시편 73편 28절에서는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야고보서 4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싸우지 말고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1-3절)
야고보서 4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보면,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정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심지어 살인까지 해도 원하는 것을 결국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고, 기도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툼을 그치지 않고 세상 정욕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와 다투고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다툼을 그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대부분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가려면 반드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6절)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을 보세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으려면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교만한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오히려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는 사울의 퇴장과 다윗의 등장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도 왕이 되기 전에는 아주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겁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는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기의 능력인양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제사장인양 제사를 집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을 버리셨고, 겸손하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소년 다윗을 택하셔서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로 죄를 떠나야 합니다.(8절)
야고보서 4장 8절 말씀을 보세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한 다음에 바로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품고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죄인을 가까이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를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욕심쟁이라 그런가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그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를 예수의 피로 사함을 받은 후에는 그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한다고 하는 것은 죄의 자리를 멀리하는 것이고, 죄를 범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와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말씀을 보세요.“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에게 복종하지 말고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저지르다가 피를 흘리지 말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워서 죄를 이겨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기도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5장 13절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4장 2절과 3절 말씀을 보세요.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말씀합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나 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잖아요? 관계가 친밀할수록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나쁘면 아예 말도 안 섞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말이 잘 통하느냐 하는 것이 친밀도의 바로미터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겁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만 갑니다.
 
지난 주간에도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습니다. 14살 아들이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폭행해 죽인 일도 있었고, 20대 여동생이 죽은 강아지 악령에 씌었다고 친오빠와 엄마가 잔혹하게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져만 갑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는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빛이 비춰지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

고린도전서 14:20~40 /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20절부터 40절입니다. 이 본문은 은사, 특별히 방언과 예언에 대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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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많았음에도 교회 안에는 혼란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자기 자랑과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하면서 예배가 무질서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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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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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통해 세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앙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분별로 살아야 합니다 (20~25절)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신앙생활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에서는 성숙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은사를 체험하는 것 자체에만 집중했습니다. 특별한 체험이 많을수록 더 신앙이 좋은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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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은 "성숙한 신앙은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방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계속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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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께 경배하게 만든다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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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도 질문해야 합니다.

  •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을 세우고 있는가?
  • 나의 신앙은 체험 중심인가, 말씀 중심인가?
  • 나의 신앙은 성숙한 분별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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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린 신앙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을 원하십니다.


2.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26~33절)

26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명령합니다.

교회는 나를 드러내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

은사는 많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양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섬김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예배의 질서를 세밀하게 제시합니다.

  • 방언은 통역이 있을 때만 하라.
  • 예언은 차례대로 하라.
  • 다른 사람들도 분별하라.
  • 한 사람이 독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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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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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서는 성령의 역사를 막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서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입니다.

​

성령의 역사는 혼란이 아니라 화평을 가져옵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질서를 지킬 때 공동체는 더욱 건강해집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예배입니다 (34~40절)

본문 마지막 40절은 매우 중요한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예배는 단순한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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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배는 감정만이 아니라 경외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만이 아니라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만이 아니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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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형식만 남은 예배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사라진 메마른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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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질서를 잃어버린 예배입니다. 개인의 감정과 경험이 말씀보다 앞서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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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말씀과 성령, 자유와 질서, 열정과 품위가 조화를 이루는 예배입니다.

​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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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1.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분별력을 가지라.
  2. 받은 모든 은사를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하라.
  3.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하라.

​

교회는 나를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예배는 내 만족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성도로, 그리고 질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은사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체보다 자신의 만족을 앞세웠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성숙한 믿음을 주시고, 받은 은사로 교회를 세우게 하시며, 모든 예배 가운데 품위와 질서를 지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9-13

 

오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최고의 말씀을 꼽으라고 한다면 어떤 말씀을 꼽겠습니까? 아마도 성경에서 꼽을 수 있는 최고의 말씀은 “네 죄를 사했느니라”는 죄 사함의 축복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복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며 끊임없이 받아야 할 복은 죄사함일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내진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는 말씀이 아니라 “네 죄를 사했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양식이 우리의 육신을 살찌우고 강건케 하는 것이라면 죄사함의 축복이야 말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강건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목적도 사죄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리고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나 배우자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모두가 부수적인 것입니다. 보다 우선되어야 할 기도는 죄사함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서야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통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난 때문입니까? 질병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죄의 개념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말은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을 한글 성경은 모두 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하말티아’라는 말로서 과녁을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화살이나 총을 쏠 때 과녁의 주위에는 몇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제일 중심주를 맞출 수록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데 이 하말티아라는 말은 과녁을 완전히 벗어나 다른 곳에 떨어져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 생각, 행동의 반경을 완전히 벗어난 모든 행위는 다 죄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파라바시스’라는 말로 그어 놓은 줄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는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일단 차를 타고 도로에 올라가면 운전자는 그어진 선을 따라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별히 정 중앙에 그어진 노란 중앙선은 절대로 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파라바시스는 이런 모든 규정을 무시하고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고 차선을 지키지 않고 아무렇게나 달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와 진리의 원칙으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원칙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 길을 어기고 위반하는 모든 행위가 다 죄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파라푸토마’라는 말로 미끄러져서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서 있어야 될 사람이 조심하고 자제하지 못하여 미끄러져 넘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감정이나 욕정 등은 우리가 순응하여 따라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스리고 제한해야 할 대상입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고 자고 싶다고 다 잘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만약 그 자제력을 잃어버렸다면 술 취한 사람같이 중심이 흔들려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고, 쓰지 말아야 할 돈을 쓰게 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제해야 할 시간에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치 우치고 욕심에 치우치는 것을 미끄러져 넘어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노미야'로 불법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노미야'는 법이란 말인데 접두어가 붙어 법의 반대인 불법이란 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없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죄입니다.

다섯째는 '오훼일네마'로, 채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무는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죄가 바로 채무를 뜻하는 내용입니다. 빚이란 미리 받은 바가 있어서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갚지 않으면 그 빚은 결코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빚을 갚는 길만이 빚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빚을 갚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마지막 날에 하늘에 쓰여진 장부에 의해서 심판대 앞에서 계산할 날이 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결코 이 빚을 우리의 힘으로는 갚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일만 달란트는 지금의 가치로 수조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 이자만해도 하루에 수천만 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종이 일만달란트 빚졌다고 말씀하신 것은 도저히 그 돈을 갚을 수 없는 지불불능의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지불불능의 엄청난 죄의 빚을 하나님께 졌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대신 갚아 주는 길 뿐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죄의 기도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성도라 해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솔직히 말해 단 한 순간도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도의 차이일 뿐 수많은 죄를 범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일처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듯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의 피로 씻는 사죄의 기도를 날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나서면서 온 몸을 샤워하고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하루 종일 우리의 몸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손이나 발, 얼굴과 머리는 무수한 먼지와 매연 등으로 인해 심하게 오염됩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깨끗이 샤워를 했다 해도 틈틈이 손을 씻고 얼굴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막에도 물두멍을 두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은 매일같이 그 앞에서 자신의 몸을 씻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크게 두 종류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죄를 범하고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또 하나는 죄를 범한 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인데 전자를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 하며 후자를 희망이 있는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죄를 망각하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희망있는 죄인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죄인입니까?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하며 용서를 구하는 희망있는 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죄는 자백과 사죄의 간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회개 없이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용서하지 못하신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훈육하다보면 아이가 가끔 명백한 잘못을 하고도 좀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고백을 듣고자 기다립니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 그 말을 하지 않아 더 큰 훈계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다는 마음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우리의 죄를 소상히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 나와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기도문 전체 가운데 본문을 성도들이 가장 어렵고 힘들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이렇게 용서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남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증오와 미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혜만큼 베풀고 용서함 받은 만큼 용서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구원과 사죄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본문은 결코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대상은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다양한 문제들을 하나님께 가져오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와 거룩한 뜻을 이해하고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를 받은 구원받은 백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를 전제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 그의 백성이 되었기에 우리에게는 다른 형제를 용서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용서 받아야 할 죄가 있어 하나님께 나오면서도 고의적으로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그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행한 모든 잘못을 완전히 내어 버리고 다시는 기억지 않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용서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오랫동안 큰 상처를 받아 왔거나 큰 피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펄전은 “형제 여러분,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 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위로 기념탑처럼 남겨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완전한 용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게 어려운 일 또한 아닙니다.

에밀리 브란트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강한 증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증오감은 나이가 들수록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목사님의 권유를 따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증오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어머니를 용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는 내심 언젠간 어머니도 달라기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그를 향해 욕하고 악한 감정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이 한 번의 용서로 끝나는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어머니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선물도 보내고 카드도 써서 보냈지만 어머니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자로서 몇 번이고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눈을 뜰 때마다 인간의 용서가 부스러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용서를 자연스럽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동행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 이제 용서라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지만 또한 그리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할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죄와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용서는 한마디로 천국에 가는 절대 조건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고 또한 용서받은 자로서 형제의 잘못을 용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또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은 어쩔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죄인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고 정결함을 받으십시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당당히 “우리가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행으로 나타나는 지혜   야고보서 3:13-18

 

야고보서 3:13-18은 참된 지혜와 거짓 지혜의 차이를 구분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야고보는 지혜에 대해 단순한 지적 능력이나 지식의 축적을 넘어, 그것이 실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통해 참된 지혜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참 지혜는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 야고보서 3:13 - 선행으로 나타나는 지혜

“너희 중에 지혜 있고 총명한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는 “지혜 있고 총명한 자”(σοφὸς καὶ ἐπιστήμων, sophos kai epistēmōn)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여기서 “지혜 있는”이라는 단어 sophos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실천적인 지혜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비롯된 지혜를 가리킵니다(예: 잠언 9:10). Epistēmōn은 ‘이해력 있는, 지식을 가진’이라는 뜻으로, 구체적 상황을 분별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이 지혜와 총명이 단순히 머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καλὴν ἀναστροφήν, kalēn anastrophēn)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Anastrophē*는 ‘삶의 방식, 생활태도’를 뜻하며, 이는 지혜가 실제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야고보는 “온유함”(πραΰτης, *prautēs)이라는 단어를 통해 참된 지혜가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나타나야 함을 지적합니다.

 

참된 지혜가 다른 사람에게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자랑하는 모습이 아닌, 겸손과 선행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는 온유한 태도와 실천적인 선함으로 드러나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2. 야고보서 3:14 - 시기와 다툼에서 비롯된 거짓 지혜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야고보는 거짓 지혜의 특징을 “독한 시기”(ζῆλον πικρόν, zēlon pikron)와 “다툼”(ἐριθεία, eritheia)로 설명합니다. Zēlon은 열정이나 열심을 의미하지만, 여기에 “독한”(pikron)이라는 형용사가 더해져 시기와 질투의 열심으로 변질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가 겸손과 온유를 수반하는 반면, 거짓 지혜는 경쟁적이고 질투에 찬 태도를 드러냅니다.

 

“다툼”으로 번역된 eritheia*는 원래 정치적 야망이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경쟁을 뜻하는 단어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분열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다툼이 진리를 거슬러 “자랑하지 말라”(μὴ κατακαυχᾶσθε, *mē katakauchasthe)고 경고하며, 이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만하는 행동이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는 진리를 따르지만, 거짓 지혜는 진리를 왜곡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지혜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우리의 내적 태도와 열매를 통해 확인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3. 야고보서 3:15 - 땅의, 육신의, 마귀적인 지혜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이요 육신에 속한 것이요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야고보는 거짓 지혜의 근원을 “땅에 속한 것”(ἐπίγειος, epigeios), “육신에 속한 것”(ψυχική, psychikē), “마귀에게 속한 것”(δαιμονιώδης, daimoniōdēs)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epigeios는 ‘세상적’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진 지혜를 의미합니다. 참된 지혜가 하늘에서 오는 것이라면, 거짓 지혜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지혜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으로 번역된 psychikē는 인간의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본성을 가리킵니다. Psychikē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태도를 나타내며, 이는 참된 지혜와 상반됩니다. 또한,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는 표현은 거짓 지혜의 근본적인 출처가 사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거짓 지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어둠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참된 지혜가 하나님의 뜻과 연결된 반면, 거짓 지혜는 세상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세상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끊임없이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라 부르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악한 지혜도 있기 때문입니다.

 

4. 야고보서 3:16 -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악함이 있음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느니라.”

 

야고보는 “시기와 다툼”(ζῆλος καὶ ἐριθεία, zēlos kai eritheia)이 있는 곳에 “혼란”(ἀκαταστασία, akatastasia)과 “모든 악한 일”(πᾶν φαῦλον πρᾶγμα, pan phaulos pragma)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Akatastasia는 ‘무질서, 혼돈’을 의미하며, 이는 공동체 내에서 다툼과 시기가 퍼질 때 발생하는 혼란을 나타냅니다. 시기와 다툼은 하나님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화합을 방해합니다.

 

“악한 일”로 번역된 phaulos pragma는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넘어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며, 악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야고보는 거짓 지혜가 이처럼 공동체 내에 혼란과 악한 열매를 맺게 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거짓 지혜가 공동체의 분열과 혼란을 가져오며, 이기적인 동기는 공동체와 신앙을 파괴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는 질서와 화평을 이루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곳에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혜가 참 지혜입니다. 열매로 알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5. 야고보서 3:17 -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는 참된 지혜의 특성을 나열하며,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ἄνωθεν σοφία, anōthen sophia)임을 강조합니다. Anōthen은 ‘하늘에서, 위로부터’를 의미하여, 참된 지혜가 인간의 이기적인 동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 성결(ἁγνή, hagnē): 이는 ‘깨끗한, 거룩한’이라는 뜻으로, 참된 지혜의 첫 번째 특성은 순수하고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는 지혜입니다.
  • 화평(εἰρηνική, eirēnikē): 참된 지혜는 다툼이나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며, 오히려 화평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평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관용(ἐπιεικής, epieikēs): 이는 ‘온화한, 양보하는’이라는 의미로, 타인에 대한 부드러움과 포용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 양순(εὐπειθής, eupeithēs): 이는 ‘순종하는, 잘 따르는’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순응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참된 지혜는 완고함이 아닌, 열려 있는 마음으로 타인의 의견을 수용합니다.
  • 긍휼과 선한 열매(ἔλεος καὶ καρπὸς ἀγαθός, eleos kai karpos agathos): 참된 지혜는 자비로움과 선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긍휼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의미하며, 선한 열매는 실천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 편견과 거짓이 없음(ἀδιάκριτος καὶ ἀνυπόκριτος, adiakritos kai anupokritos): 참된 지혜는 편견이나 위선이 없습니다. 이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진실하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참된 지혜가 순수하고, 화평을 이루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단순히 지적인 이해에 그치지 않고, 신앙의 열매로 이어져야 함을 나타냅니다.

 

6. 야고보서 3:18 - 화평을 이루는 자의 의의 열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는 “화평하게 하는 자들”(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hoi eirēnopoioi)이 “의의 열매”(καρπὸν δικαιοσύνης, karpon dikaiosynēs)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Eirēnopoioi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 인해 화평을 이루는 자들을 뜻합니다.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로, 참된 지혜가 의와 평화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의의 열매는 화평을 심는 자들이 거두게 되는 결과로, 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동행할 때 이루어지는 삶의 축복입니다.

 

묵상과 적용: 참된 지혜의 열매를 맺는 삶

야고보서 3:13-18은 참된 지혜와 거짓 지혜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면서, 지혜의 열매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겸손과 온유, 화평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반면, 거짓 지혜는 이기적 동기와 시기심에서 비롯되어 혼란과 악을 초래합니다.

 

우리 삶의 지혜가 세상적 지혜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며, 그 열매가 화평과 의로움, 긍휼과 선함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은사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모든 은사는 선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목표를 따라, 성도들이 서로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사를 사모할 때 가급적이면 어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방법인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일한 후 예언과 방언에 대해 비교합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5절입니다. 사랑을 따라 신령한 것을 추구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하고 예언과 방언을 대조합니다. 둘째 부분은 6-12절입니다. 왜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방언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셋째 부분은 13-19절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설명하고 결국 예언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언과 방언(1-5)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첫째가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큰 은사의 기준은 신령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은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필수 요소며, 사랑을 추구하는 은사라야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모든 성도들이 봉사를 행할 때,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은사를 통한 봉사에 있어서 항상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5)

 

고린도 성도들은 다른 영적 은사들보다 방언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은사가 방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함으로 영적 은사를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하고 특별히 공적 모임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을 더 추구하라고 합니다.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해서 인격적 관계성을 증진하고 교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예언을 추구(1)

 

더 큰 은사들을 만드는 길(12:31)인 사람을 설명한 후(13장), 교회 상황에 대해 권면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면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언하기를 권합니다.

 

(2) 예언과 방언(2-5)

 

바울은 방언의 무익성과 예언의 유익성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면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방언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소개합니다.

예언을 더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소통 방식이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2).

성령으로 자신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방언은 성령으로 혀가 움직여 말하는 것이기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 방언하는 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사람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요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은 다릅니다(3).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표현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필요 없고 예언만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의 기능과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4). 방언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웁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에서 잘 서기 위해 방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예언과 방언은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단지 그 기능과 목적이 다르기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방언과 예언의 상황을 구분해 권면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독자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성령으로 인한 교제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통로이기에 개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독자들이 예언을 더 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교회를 세워가는 데는 예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이냐 교회냐 사이의 상황 인식과 어떤 것이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이고 성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6-12)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추구할 때,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세우지만, 사사로운 욕심으로 구한 은사는 시기와 경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떠나 은사는 언젠가는 변질됩니다. 은사에 대한 열정이 항상 교회를 건강하게 섬기는 열정과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6-9)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에자기 덕을 세우는 데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사람들에게 알아듣게 말하는 것입니다.

 

(1)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6-9)

 

예언이 왜 필요한지를 계속 설명합니다. 일련의 조건절로 ‘나(바울)’의 예를 ‘너희(독자들)’에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두 가지가 언급됩니다.

6-9절은 그중 하나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전하는 경우입니다. 먼저 ‘나’의 경우입니다(6-8). 만일 ‘나’가 너희에게 가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아닌 방언으로 말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6) 방언이 다른 은사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소통이 되지 않아서 독자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7-8절에서 악기의 예를 통해 설명을 이어갑니다. 만일 피리나 거문고 등의 생명 없는 악기들이 음의 구분을 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 악기들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쟁 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나팔이 구분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찌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예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런 설명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너희’ 경우로 적용합니다(9). 만일 너희가 방언을 통해 분명치 않은 말을 전한다면, 그 말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언으로는 의사소통 할 수 없기에 마치 허공을 향한 소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공적 모임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2)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10-12)

 

‘나의 상황을’ 너희에게 적용한 두 번째 내용입니다. 언어 소통 과정을 예로 듭니다. 먼저 언어를 표현하는 소리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합니다(10). 아마도 세상에 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소리 없는(뜻 없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나’가 그 소리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자에 대해 야만인이 되고, 말한 자 또한 ‘나’에게 야만인이 됩니다(11).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신령한 것을 추구하기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언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12). 교회 안 공적 모임에서 방언을 말하면 서로 소통이 안 되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없기에 소통할 수 있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 사용에 대해(13-19)

은사를 추구하는 열망보다 은사 추구의 동기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고 사랑을 구연하는 은사가 더 큰 은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3-19)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무익성에 대해 설명한 후, 교회 것을 세우기 위한 영적인 은사가 더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세우기 위해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1) 방언 사용자는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13)

 

앞부분 설명을 근거로 방언 사용자에게 권면합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통역하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모든 방언 말하는 자가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통역의 은사가 있으면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2) 바울 경험을 통한 설명(14-15)

 

바울은 1인칭 표현으로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는 13절 내용을 부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때, 방언 기도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통역의 은사는 공동체적으로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건 생활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이성적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14)

따라서 기도나 찬송할 때 영으로 하는 방언과 이성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15). 하지만 상황 분별이 필요합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나 찬송은 14절처럼 개인 상황이지만, 이성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은 교회 모임이란 공적 상황입니다. 방언을 공적 모임에서 사용하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3) 독자들 상황을 통한 설명(16-17)

 

이제 바울은 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나 찬양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4-15절이 ‘나’를 통해 바울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이번에는 ‘너희’를 통해 독자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한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축복하거나 감사의 말을 해도 그것에 공감해 함께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적 예배 유지가 불가능하고 메시아의 한 몸이자 하나님의 한 식구로서의 정체성과 유대감, 인격적 사랑 나눔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4) 바울의 권면(18-19)

 

바울은 다시 1인칭 ‘나’를 사용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많은 방언을 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방언 자체가 필요 없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은 분명 성령의 선물입니다. 애써 금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공적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통역이 없는 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교제하고 함께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사랑 차원에서의 권면입니다.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사모하도록 권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자신을 위한 은사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예언의 유익한 은사를 구하길 바랍니다. 당신에게도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주시되,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유익한 예언의 은사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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