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으로 나타나는 지혜   야고보서 3:13-18

 

야고보서 3:13-18은 참된 지혜와 거짓 지혜의 차이를 구분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야고보는 지혜에 대해 단순한 지적 능력이나 지식의 축적을 넘어, 그것이 실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통해 참된 지혜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참 지혜는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 야고보서 3:13 - 선행으로 나타나는 지혜

“너희 중에 지혜 있고 총명한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는 “지혜 있고 총명한 자”(σοφὸς καὶ ἐπιστήμων, sophos kai epistēmōn)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여기서 “지혜 있는”이라는 단어 sophos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실천적인 지혜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비롯된 지혜를 가리킵니다(예: 잠언 9:10). Epistēmōn은 ‘이해력 있는, 지식을 가진’이라는 뜻으로, 구체적 상황을 분별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이 지혜와 총명이 단순히 머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καλὴν ἀναστροφήν, kalēn anastrophēn)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Anastrophē*는 ‘삶의 방식, 생활태도’를 뜻하며, 이는 지혜가 실제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야고보는 “온유함”(πραΰτης, *prautēs)이라는 단어를 통해 참된 지혜가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나타나야 함을 지적합니다.

 

참된 지혜가 다른 사람에게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자랑하는 모습이 아닌, 겸손과 선행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는 온유한 태도와 실천적인 선함으로 드러나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2. 야고보서 3:14 - 시기와 다툼에서 비롯된 거짓 지혜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야고보는 거짓 지혜의 특징을 “독한 시기”(ζῆλον πικρόν, zēlon pikron)와 “다툼”(ἐριθεία, eritheia)로 설명합니다. Zēlon은 열정이나 열심을 의미하지만, 여기에 “독한”(pikron)이라는 형용사가 더해져 시기와 질투의 열심으로 변질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가 겸손과 온유를 수반하는 반면, 거짓 지혜는 경쟁적이고 질투에 찬 태도를 드러냅니다.

 

“다툼”으로 번역된 eritheia*는 원래 정치적 야망이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경쟁을 뜻하는 단어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분열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다툼이 진리를 거슬러 “자랑하지 말라”(μὴ κατακαυχᾶσθε, *mē katakauchasthe)고 경고하며, 이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만하는 행동이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는 진리를 따르지만, 거짓 지혜는 진리를 왜곡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지혜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우리의 내적 태도와 열매를 통해 확인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3. 야고보서 3:15 - 땅의, 육신의, 마귀적인 지혜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이요 육신에 속한 것이요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야고보는 거짓 지혜의 근원을 “땅에 속한 것”(ἐπίγειος, epigeios), “육신에 속한 것”(ψυχική, psychikē), “마귀에게 속한 것”(δαιμονιώδης, daimoniōdēs)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epigeios는 ‘세상적’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진 지혜를 의미합니다. 참된 지혜가 하늘에서 오는 것이라면, 거짓 지혜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지혜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으로 번역된 psychikē는 인간의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본성을 가리킵니다. Psychikē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태도를 나타내며, 이는 참된 지혜와 상반됩니다. 또한,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는 표현은 거짓 지혜의 근본적인 출처가 사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거짓 지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어둠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참된 지혜가 하나님의 뜻과 연결된 반면, 거짓 지혜는 세상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세상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끊임없이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라 부르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악한 지혜도 있기 때문입니다.

 

4. 야고보서 3:16 -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악함이 있음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느니라.”

 

야고보는 “시기와 다툼”(ζῆλος καὶ ἐριθεία, zēlos kai eritheia)이 있는 곳에 “혼란”(ἀκαταστασία, akatastasia)과 “모든 악한 일”(πᾶν φαῦλον πρᾶγμα, pan phaulos pragma)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Akatastasia는 ‘무질서, 혼돈’을 의미하며, 이는 공동체 내에서 다툼과 시기가 퍼질 때 발생하는 혼란을 나타냅니다. 시기와 다툼은 하나님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화합을 방해합니다.

 

“악한 일”로 번역된 phaulos pragma는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넘어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며, 악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야고보는 거짓 지혜가 이처럼 공동체 내에 혼란과 악한 열매를 맺게 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거짓 지혜가 공동체의 분열과 혼란을 가져오며, 이기적인 동기는 공동체와 신앙을 파괴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는 질서와 화평을 이루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곳에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혜가 참 지혜입니다. 열매로 알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5. 야고보서 3:17 -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는 참된 지혜의 특성을 나열하며,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ἄνωθεν σοφία, anōthen sophia)임을 강조합니다. Anōthen은 ‘하늘에서, 위로부터’를 의미하여, 참된 지혜가 인간의 이기적인 동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 성결(ἁγνή, hagnē): 이는 ‘깨끗한, 거룩한’이라는 뜻으로, 참된 지혜의 첫 번째 특성은 순수하고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는 지혜입니다.
  • 화평(εἰρηνική, eirēnikē): 참된 지혜는 다툼이나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며, 오히려 화평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평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관용(ἐπιεικής, epieikēs): 이는 ‘온화한, 양보하는’이라는 의미로, 타인에 대한 부드러움과 포용을 나타냅니다. 참된 지혜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 양순(εὐπειθής, eupeithēs): 이는 ‘순종하는, 잘 따르는’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순응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참된 지혜는 완고함이 아닌, 열려 있는 마음으로 타인의 의견을 수용합니다.
  • 긍휼과 선한 열매(ἔλεος καὶ καρπὸς ἀγαθός, eleos kai karpos agathos): 참된 지혜는 자비로움과 선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긍휼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의미하며, 선한 열매는 실천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 편견과 거짓이 없음(ἀδιάκριτος καὶ ἀνυπόκριτος, adiakritos kai anupokritos): 참된 지혜는 편견이나 위선이 없습니다. 이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진실하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참된 지혜가 순수하고, 화평을 이루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단순히 지적인 이해에 그치지 않고, 신앙의 열매로 이어져야 함을 나타냅니다.

 

6. 야고보서 3:18 - 화평을 이루는 자의 의의 열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는 “화평하게 하는 자들”(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hoi eirēnopoioi)이 “의의 열매”(καρπὸν δικαιοσύνης, karpon dikaiosynēs)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Eirēnopoioi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 인해 화평을 이루는 자들을 뜻합니다.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로, 참된 지혜가 의와 평화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의의 열매는 화평을 심는 자들이 거두게 되는 결과로, 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동행할 때 이루어지는 삶의 축복입니다.

 

묵상과 적용: 참된 지혜의 열매를 맺는 삶

야고보서 3:13-18은 참된 지혜와 거짓 지혜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면서, 지혜의 열매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겸손과 온유, 화평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반면, 거짓 지혜는 이기적 동기와 시기심에서 비롯되어 혼란과 악을 초래합니다.

 

우리 삶의 지혜가 세상적 지혜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며, 그 열매가 화평과 의로움, 긍휼과 선함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은사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모든 은사는 선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목표를 따라, 성도들이 서로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사를 사모할 때 가급적이면 어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방법인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일한 후 예언과 방언에 대해 비교합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5절입니다. 사랑을 따라 신령한 것을 추구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하고 예언과 방언을 대조합니다. 둘째 부분은 6-12절입니다. 왜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방언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셋째 부분은 13-19절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설명하고 결국 예언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언과 방언(1-5)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첫째가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큰 은사의 기준은 신령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은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필수 요소며, 사랑을 추구하는 은사라야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모든 성도들이 봉사를 행할 때,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은사를 통한 봉사에 있어서 항상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5)

 

고린도 성도들은 다른 영적 은사들보다 방언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은사가 방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함으로 영적 은사를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하고 특별히 공적 모임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을 더 추구하라고 합니다.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해서 인격적 관계성을 증진하고 교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예언을 추구(1)

 

더 큰 은사들을 만드는 길(12:31)인 사람을 설명한 후(13장), 교회 상황에 대해 권면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면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언하기를 권합니다.

 

(2) 예언과 방언(2-5)

 

바울은 방언의 무익성과 예언의 유익성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면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방언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소개합니다.

예언을 더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소통 방식이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2).

성령으로 자신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방언은 성령으로 혀가 움직여 말하는 것이기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 방언하는 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사람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요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은 다릅니다(3).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표현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필요 없고 예언만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의 기능과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4). 방언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웁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에서 잘 서기 위해 방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예언과 방언은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단지 그 기능과 목적이 다르기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방언과 예언의 상황을 구분해 권면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독자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성령으로 인한 교제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통로이기에 개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독자들이 예언을 더 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교회를 세워가는 데는 예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이냐 교회냐 사이의 상황 인식과 어떤 것이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이고 성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6-12)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추구할 때,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세우지만, 사사로운 욕심으로 구한 은사는 시기와 경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떠나 은사는 언젠가는 변질됩니다. 은사에 대한 열정이 항상 교회를 건강하게 섬기는 열정과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6-9)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에자기 덕을 세우는 데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사람들에게 알아듣게 말하는 것입니다.

 

(1)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6-9)

 

예언이 왜 필요한지를 계속 설명합니다. 일련의 조건절로 ‘나(바울)’의 예를 ‘너희(독자들)’에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두 가지가 언급됩니다.

6-9절은 그중 하나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전하는 경우입니다. 먼저 ‘나’의 경우입니다(6-8). 만일 ‘나’가 너희에게 가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아닌 방언으로 말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6) 방언이 다른 은사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소통이 되지 않아서 독자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7-8절에서 악기의 예를 통해 설명을 이어갑니다. 만일 피리나 거문고 등의 생명 없는 악기들이 음의 구분을 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 악기들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쟁 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나팔이 구분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찌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예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런 설명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너희’ 경우로 적용합니다(9). 만일 너희가 방언을 통해 분명치 않은 말을 전한다면, 그 말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언으로는 의사소통 할 수 없기에 마치 허공을 향한 소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공적 모임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2)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10-12)

 

‘나의 상황을’ 너희에게 적용한 두 번째 내용입니다. 언어 소통 과정을 예로 듭니다. 먼저 언어를 표현하는 소리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합니다(10). 아마도 세상에 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소리 없는(뜻 없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나’가 그 소리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자에 대해 야만인이 되고, 말한 자 또한 ‘나’에게 야만인이 됩니다(11).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신령한 것을 추구하기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언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12). 교회 안 공적 모임에서 방언을 말하면 서로 소통이 안 되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없기에 소통할 수 있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 사용에 대해(13-19)

은사를 추구하는 열망보다 은사 추구의 동기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고 사랑을 구연하는 은사가 더 큰 은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3-19)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무익성에 대해 설명한 후, 교회 것을 세우기 위한 영적인 은사가 더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세우기 위해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1) 방언 사용자는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13)

 

앞부분 설명을 근거로 방언 사용자에게 권면합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통역하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모든 방언 말하는 자가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통역의 은사가 있으면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2) 바울 경험을 통한 설명(14-15)

 

바울은 1인칭 표현으로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는 13절 내용을 부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때, 방언 기도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통역의 은사는 공동체적으로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건 생활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이성적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14)

따라서 기도나 찬송할 때 영으로 하는 방언과 이성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15). 하지만 상황 분별이 필요합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나 찬송은 14절처럼 개인 상황이지만, 이성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은 교회 모임이란 공적 상황입니다. 방언을 공적 모임에서 사용하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3) 독자들 상황을 통한 설명(16-17)

 

이제 바울은 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나 찬양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4-15절이 ‘나’를 통해 바울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이번에는 ‘너희’를 통해 독자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한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축복하거나 감사의 말을 해도 그것에 공감해 함께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적 예배 유지가 불가능하고 메시아의 한 몸이자 하나님의 한 식구로서의 정체성과 유대감, 인격적 사랑 나눔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4) 바울의 권면(18-19)

 

바울은 다시 1인칭 ‘나’를 사용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많은 방언을 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방언 자체가 필요 없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은 분명 성령의 선물입니다. 애써 금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공적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통역이 없는 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교제하고 함께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사랑 차원에서의 권면입니다.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사모하도록 권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자신을 위한 은사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예언의 유익한 은사를 구하길 바랍니다. 당신에게도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주시되,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유익한 예언의 은사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본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11)

서론

주기도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은 기도 가운데서 우리의 일상적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이 우리의 공급자 되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단순히 육체적 필요를 채워달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이 매일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공급하심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 기도는 물질적 공급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의 삶이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함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시며, 그분을 의지하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함께 묵상해보겠습니다.

1. 일용할 양식의 의미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매일의 필요를 구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전능하신 공급자이심을 인정하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의탁하는 겸손한 자세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목표로 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며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물질적 필요와 정신적 필요, 더 나아가 영적인 양식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일용할 양식”은 삶을 지속하게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일용할”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며 필요한 것을 매일 공급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즉, 우리가 앞으로 모든 필요를 한 번에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양식을 그날그날 공급받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매일 아침 하나님께 받은 사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만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매일 필요한 양식을 주신 중요한 사건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공급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영적 양식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의 육체적 양식을 채웠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양식을 채우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만나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신뢰를 상징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적 만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루치의 만나를 주시며,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쌓아두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출애굽기 16장).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 하루에 집중하고, 매일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도 이 기도를 통해 하루의 양식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매일 새로운 은혜를 구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만나와 같이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도 새로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며, 그분을 통해 우리는 육체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까지도 채우게 됩니다.=

2. 오늘날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신앙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기도가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현재의 필요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는 현재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분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현재에 집중하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현재에 필요한 것을 간구함으로써,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오늘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는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오늘의 필요를 맡길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하나님께서 그날그날 인도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는 내일을 계획하지 않거나 준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그분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루하루의 필요를 채우는 삶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3.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기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긴다는 것은 기도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공급하심을 신뢰하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적인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급자이심을 확고히 하고, 그분의 신실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맡긴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실 것을 신뢰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힘과 계획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공급자 되심을 믿고 맡기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매일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또한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며, 그분의 뜻에 맞추어 우리의 필요를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4. 영적인 양식을 구함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물질적인 필요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구하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으며,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매일 영적 양식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 가운데서 강건해지도록 돕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유지하게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매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경험하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영적인 배부름을 누립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단순히 물질적 필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영적 양식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며, 세상의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시기를 간구하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영적 양식을 공급받을 때,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자라나고 영적으로 성숙해집니다. 주기도문의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매일 영적 양식을 구하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5. 공동체적 기도와 나눔의 정신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로, 개인의 필요만이 아닌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는 동시에, 형제자매들의 필요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나누는 방식입니다. 초대 교회처럼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공동체 안에 풍성히 흐르게 됩니다. 이러한 나눔과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단순히 나 개인의 필요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를 함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가 공동체적이며, 우리 모두의 필요를 아우르는 기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맡기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채우신 은혜를 함께 나누고, 우리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돌아보아 그들의 필요에도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함께 누리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를 함께 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며 서로를 위한 기도와 나눔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공동체를 통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6.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의 결단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힘이나 계획에 의존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며 매 순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단지 요청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삶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잠언 3장 5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나 계획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잠언 3장 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나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신뢰할 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신뢰하는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매일 우리를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는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결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를 통한 은혜의 삶

기도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며, 우리의 필요와 염려를 그분께 맡기는 신앙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단순한 육체적 양식을 넘어서서, 우리의 영혼과 삶 전반을 하나님께 맡기며 의지하는 신앙을 가르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감사와 신뢰를 매일 새롭게 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게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매일 경험하며, 그분이 우리의 참된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 은혜를 공동체와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이 기도가 우리의 삶에 충만한 은혜와 평강을 가져다줄 것을 믿으며, 주님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날마다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행위이며,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간구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더 깊은 신뢰와 감사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장 11절)

1. '오늘날'(날마다)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마태의 주기도에는 '오늘날'을 "세메론”(σημερον : 오늘, today)이란 부사를 사용했고, 누가의 주기도에는 (눅 11 : 3) "카세메란"(καθημεραν : 날마다, each day)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날마다"(each day 또는 every day)는, 사실상 "오늘"(today)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날마다"와 "오늘날"이란 오늘 하루의 삶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오늘이란 삶을 살아야 한다. "어제"(yesterday)는 이미 지난 오늘이고, "내일"(tomorrow)은 다가올 오늘 이다. 성경은 오늘의 중요함에 대한 교훈들이 있다. 구원의 시간은 오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 에 있으리라."(눅 23 : 43)라고 하셨고,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 : 9)라고 오늘이 구원에 이르는 귀한시간임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에 완성된 자세로 살아서 오늘 주님이 부르시더라도 떳떳이 설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눅 12 : 20)라고 하셨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살게 될 마지막 날이 될런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이상 더 오늘이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셨으며 그것을 하루하루 먹도록 하셨다(출 16 : 13-20). 매일의 만나는 당일에(오늘) 다 소비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누군가가 다음 날 아침에 조반은 어디서 먹을까 염려 하여 물었다면 "우리의 염려는 오늘 하루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만나를「오늘」내려 주셨다. 만일 우리가 오늘 먹을 빵이 있다면 장래를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 하지 말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내일의 염려는 불신이다. 그리스도인의 만나는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오늘에 허락해 주신다. 의식주와 삶의 여러 분제로 염려하는 자들 은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와 함께 접목시켜 주시는 말씀인 "내일 일 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 : 34)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우리에게' (US)란 의미는 무엇인가?

주기도문 서론에서 밝힌 바 있지만 주기도문에서는 복수대명사 즉 "우리"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단수 인칭대명사는 발견할 수 없다.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우리에게 지은 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이러한 기도는 우리들 자신이 필요한 것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에 관한 간구와 중보 기도로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이기적인 "나는", "나를", "나의"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지만 주기도의 기도는 비이기적인 기도를 드리게 한다. 주기도문에는 후반부의 청원에만 우리라는 단어가 8회 기록되어 있다. 왜 우리는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복수형으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함을 보여주신다.

다윗은 기도할 때 공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시 125 : 4)

그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라고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로 시편을 시작하지만 그래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 그 시편을 끝 맺는다. 사도행전 여러 곳에 나타나는 사도들의 기도 역시 공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복수형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행 4 : 29).

예수님은 공적 정신으로 모범적인 기도를 드리신 분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결핍과 불행에 대해서 그의 하나님이 그의 자비하심을 그들에게 베푸시도록 기도한다. 특히 성도들을 위한 공적 기도에 힘쓸 것에 대하여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 :18)라고 하였다.

예수님은「우리」를 위해 사셨고「우리」를 위해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주여 저들을 용서 하옵소서」(저들은 우리도 포함된다.)라고 기도 하셨다. 네번째 청원에 "우리를"이란 의미는, 이기적인 거미와 같은 사람의 기도를 비이기적인 기도의 사람으로 바꾸게 해 주며 다른 사람들 의 유익을 위해 수정 같은 시냇물로 생기나게 해주고 황금 같은 태양빛의 햇살로 밝게 비춰 준다. 비이기적인 기도는 그의 기도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둘러싼다.
 

3.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말 개역 성경에 "일용할"이란 말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에피우시스"(επιούσιος)라 기록한다. 이것은 주기도문에만 나타나고 신약 다른 곳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낱말이므로 단정적으로 해석하기가 아주 어렵다. 주기도문의 근본 정신과 뜻을 혼돈하게 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하고 싶다.

첫째 : "에피우시우스"(επιούσιος)는 전치사 에피(επι : 위)와 우시아(ούσια : 존재 또는 본질)의 합성어로서 "존재의 필수적 인 것"(necessary for existence)이란 뜻이다.

둘째 : 에피(επι)와 우산(ουσαν = ημεραν : 날)의 합성어로서 "오늘을 위한"(for the current day, today)의 뜻이다. "오늘을 위한 양식"과 존재 즉 "생존에 필요한 양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시간에 관해서는 내일이나 종말적인 미래가 아닌 "오늘"로 양식의 내용 및 분령에 관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 최소한도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역 성경에 "양식"이란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아르토스"(αρτοτ : 양식)로 기록한다. 본문의 "톤 아프톤 헤-몬"(τον αρτον ημωυ)은 문자적으로 우리의 빵(Our Daily Bread)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대하여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 육신에 필요한 육적 양식이란 것이다.

칼빈이나 루터는 육적 양시이라는 견해를 가진다. 루터는 이 일용할 양식을 광범위하게 해석했고 "일용할 양식이란 육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인데 즉, 음식과 의복과 가옥과 가정, 전답, 가축, 금전 기타 여러 물건들과 배우자, 자녀들, 일꾼들, 또는 경건하고 진실한 지도자, 훌륭한 정부, 적당한 기후, 평화, 질서, 건강, 명예, 선한 친구, 믿을 만한 이웃 등을 말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아르토스"를 우리말 성경 에서는 "빵"(bread)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넓은 뜻으로서 식물 전체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에 공급되는 물질을 뜻한다. 주기도문의 넷째 간구에서 예수님은 본인 자신이 인간 현실에서 체험하신 바대로 인간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도 육신에 소용되는 양식은 인간의 삶에 충분 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 조건임을 드러내 주셨다.

둘째 : 일용할 양식을 예수님의 성만찬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요 6 : 33-35)

이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피와 함께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 : 35) 언급되므로 성례(Sacrament)를 위한 기도라고 했고 초대교회에서는 매일 성찬식(Daily Communion)에서 쓰여 지기도 했다. 성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참된 생명이 됨을 포함하기도 한다.

셋째 : 하늘나라의 떡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눅 14 : 15)라고 기록했는데 메시야가 오시면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큰 잔치를 베푸시는데 이 간구는 메시야 잔치에 참여시켜 주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보았다.

넷째 :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으로 해석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요 6 : 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 6 : 35)라고 예수님은 자신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생명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해석했다.

이상과 같이 정리해보면 일용할 양식은 육적인 양식, 영적인 양식, 영육간의 양식으로 언급된다. 우리 육신의 양식은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것인데, 생명에는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시에 영의 생명이 있다. 영적양식, 육적양식 이 두 가지는 마땅히 간구할 것이다. 때문에 본문에서의 청원은 좁은 뜻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넓은 뜻으로는 영적 양식을 다같이 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4. "주옵소서"란 의미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 성경에는 "주옵소서"라고 같은 동사로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의미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도스"(δσς)이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디두"(διδου)이다. "도스"는 "디도미"(διδωμυ ,주다)의 단순 과거 명령형으로서 일회적인 동작을 말하는데 대해서 누가복음의 경우는 현재 명령형으로 반복적인 또는 세속적인 동작을 말한다.

이 마태의 과거형 동사와 누가의 현재형 동사는 각 복음서에 기록된 "주옵소서"의 동작을 수식하는 마태복음의 "세메론"(σημερον : 오늘)이란 부사와 누가복음의 "카데메란"(καθημεραν : 날마다)이란 부사와 잘 조화를 이룬다. 필요한 양식을 마태복음에서는 오늘 한 번 "주옵소서"라고 계속해서 청원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는 주기도문의 이 청원에서 하나님은 오늘날(TODAY), 주시는 손(GIVE HAND)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시켜준다.

1) 하나님은 오늘날(TODAY), 매일(DAILY), 주시기(GIVE)룰 기뻐하신다.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으나"(사 46 : 10).

2)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구원과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 : 1)

3)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을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 로다"(시 37 : 24)

4)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성도들을 도와주시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시 41 : 10)

5)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우리가 겸손할 때 높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 : 6)

6)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성도들에게 일용할 식물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시 104 : 27-28)

이와 같이 이 청원에서 우리는 "주옵시고"(give, 주다)라는 단어로부터 이 생의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gift, 은사)이라는 것으로도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는 창설자와 증여자이시고, 그리고 현세적인 물질들을 위해서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날마다의 필요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 : 8)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청원에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옵소서, 나에게만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며 주변에 어려운 환경에 처한 가난한 자,궁핍한 자와 우리 집안 식구들과 영적인 식구인 성도들을 위해 드리는 비이기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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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 있는 믿음의 열매  야고보서 3장 1-12절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합니까? 부정적인 말, 거룩하지 않은 말을 주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말은 인격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의 지체들 중에 신묘막축한 지체는 혀인 것 같습니다. 10cm 혀로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의사 소통을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증명하기 위해 첫 번째로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합니다. 총 네 가지의 법주로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 범주는 ‘말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에 대한 힘(1-2)

지도자는 다른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책임을 지기도 합니다. 지도자에게는 그에 따르는 많은 직책도 주어지지만 책임도 부여됩니다.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1-2)

 

 

야고보서 1-2장은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 행함이란 하나님의 긍휼(헤세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긍휼의 실천 중 첫 번째 행함인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혀의 부정적 이미지를 크게 네 파트로 나눠서 예를 들어 설명하고 강조합니다. 그것을 근거로 혀의 사용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1) 말이 많은 사람(1)

 

당시 야고보를 읽는 대상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선생’하면, 유대인의 율법 선생인 ‘랍비’이 가졌던 모종의 지위와 존경을 받고자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도적 혹은 예언자적 지위를 갖춘 정식 선생들에 대한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초대교회는 당시에는 낯선 사람들까지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관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생’ 대우를 받으면서 많은 것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게 되니, 강론 시간이 ‘아무 말 대찬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인기 강사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없고 ‘강연회’가 되어버리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생’들이 누리는 것만 생각하고 자신의 책임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점점 식상해져 버리고, 사회 사교장이 되어버려서 교회를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치는 일은 꼭 수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 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받을 정죄함이 더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졌다고 고백한 자에게는 그 의무를 수행할 더 많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2)

 

야고보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만 손가락질하는 마음으로 지적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발행한 문제들은 대부분 말의 실수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수단이 있지만, 보통은 말로 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오해도 많습니다. 어디를 막론하고 붙어 다니는 이 조그만 혀만큼 그리스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만일 성도가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온전한 사람(완벽한 사람)입니다. 혀는 능히 자기 온 몸도 굴레 씌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길들려진 혀를 필요로 합니다.

 

말에 대한 문제(3-8)

우리 몸에서 혀는 작은 편입니다. 하지만 제어하기 어렵고,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혀는 훈련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혀로 악의를 가지고 내뱉은 한마디 말은 인격을 파괴하고 영혼을 실족하게 합니다. 그래서 혀는 인생의 방향까지도 결정합니다. 혀는 훈련시킨 대로 움직임입니다.

 

3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사람들이 실수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말(言)입니다. 인간은 듣는 존재인 동시에 말하는 존재입니다. 언어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말을 통해 생각을 전달하고 다른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반면 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1) 혀의 위력(3-5)

 

말(馬)은 입에 물리는 작은 재갈로 통제하고, 큰 배도 조타실에서 작은 키로 운항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작은 불씨로 큰 불을 냅니다. 이처럼 혀는 작지만, 그 위력은 전체 방향을 좌우하는 큰 힘을 지닙니다.

말 한마디가 축복과 저주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혀는 잘 사용하면 엄청난 유익이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엄청난 손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말실수는 한 번에 그 동안 평생 쌓아온 높은 직위와 주변 관계 그리고 많은 재물까지도 허물어뜨리고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2) 혀를 통한 사단의 공격(6-8)

 

혀가 큰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험성 또한 큽니다. 더 위험한 것은 길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혀는 작으면서도 그 영향력은 대단하기 때문에, 사단이 이용하려고 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말을 사용할 때, 부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구사하도록 합니다.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단언합니다. 화가 난 혀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타오릅니다. 혀를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때로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 전부 불태우며 지옥 불을 경험하게 합니다. 말은 진실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이 중요한 만큼 통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혀는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혀가 무서운 것은 길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생물들은 훈련만 시키면 얼마든지 길 드려집니다. 개들도 훈련을 통해서 주인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새들도 훈련시키면 순종합니다. 하지만 혀는 길 드려지지 않습니다. 혀를 길 드릴 수 없는 이유는 ‘정함이 없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기’ 때문에, 제어하기 쉽지 않습니다.

혀로 나오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혀는 자연 상태로는 타락한 사람들의 혀에서 나오는 말은, 절대로 용기를 주고 살리는 말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이미 죄로 물들어 길들일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말에 대한 이중성(9-12)

누구나 말 실수를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의 선한 기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통해 우리는 말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9-12)

 

 

본문에서는 혀의 힘과 그 위험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악을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모순된 행동입니다. 또한, 같은 근원에서 단맛과 쓴맛이 나올 수 없듯이, 우리의 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 양면성을 가진 혀(9-10)

 

야고보는 이중적인 언어를 ‘독사의 둘로 갈라진 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로운 찬양을 할 때 보면, 찬양하는 모습이 천사가 내려와서 찬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들이 형제·자매들과 싸우며 욕하는 모습을 보면, 사탄 같아 보입니다.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2) 선한 혀를 가짐(11-12)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셨을 때 먼저 거룩한 제단의 숯불을 그의 입술에 닿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입술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의 내면세계가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언어(言語)의 변화는 인격(人格)의 변화입니다. 인격이 변하면 언어도 변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혀로 지은 모든 죄를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입술에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에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입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혀를 주신 이유는 진리를 말하라고 주셨습니다. 찬양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언어를 주셨습니다. 죄로 물든 입술을 날마다 성령의 불로 정결케 해주시기를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혀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맞게 진리를 나누고 찬양하는 거룩한 삶을 사시길 소망합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8~13

 

 

 

 
 
 

고린도전서 13 장

 

8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말씀 요약 >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이 13장의 서론이라고 한다면, 4-7절은 13장의 본론, 8-13절은 13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론(고전 13:1-2)에서 언급했던 은사들(사랑, 예언, 방언, 지식)을 결론을 시작하면서 다시 언급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절). 사도 바울이 지금 여러 은사들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들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놀라운 은사들을 받기를 사모하기는 했지만, 정작 은사를 주신 목적은 망각한 채, 바른 정신과 태도로 은사를 잘 사용하지 못하여 교회를 오히려 무질서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은사를 다른 지체들의 복과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고전 12:7).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사랑과 함께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바로 이 진리를 교훈하기 위해서 사랑의 은사에 대한 교훈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이고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은사들

사도 바울은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나, 그 외의 여러 다양한 은사들도 모두 끝날 때가 있고 폐지될 때가 있겠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8절). 예언의 은사는 좁은 의미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을 미리 알고 말하는 은사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마음으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설교의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설교)의 은사는 우리가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교회에 필요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예언과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도 그렇습니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말과 뜻이 모두 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은사도 폐할 것입니다. 이 말은 천국에서 지식 자체가 필요 없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은사로서의 지식”이 필요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식의 은사란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깊은 뜻)과 복음의 도리(진리)를 잘 깨닫게 하고, 그것을 또한 다른 지체들에게 잘 가르쳐서 다른 형제들을 깨우치고 유익하게 하는 은사를 말합니다(고전 13:2). 그런데 나중에는 이 지식의 은사라는 것도 결국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충만하고도 완전한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있다”(9절)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예언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온전하게 되고 온전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다 폐지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0절). 그것이 당연합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의 은사와 같은 많은 은사들은 매우 일시적(현재적)이고, 매우 제한적이고, 매우 부분적일 뿐입니다.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완벽하게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 다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부분적입니다. 어떤 특정 부분에 깊은 깨달음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 아무리 신령한 목사라고 하더라도 성경을 완벽하게 다 알고 다 깨닫을 수는 없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내가 온전히 알리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은사들은 매우 일시적입니다. 많은 은사들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러한 은사들은 크게 필요하지 않아서 폐지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11절)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과 같은 은사들이 그러합니다. 그러한 은사들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 금생에서, 잠시 잠깐 필요할 뿐입니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방언의 은사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나 설교의 은사나 지식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절)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온전한 것이 올 때”(10절)인데, 그 온전한 것이 올 때란 우리가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합니다. 고대의 거울은 청동이나 구리 같은 금속의 표면을 연마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로 보는 모습은 매우 흐리고 부분적으로는 희미하고 왜곡되게 보였습니다. 여기 희미하다는 말(헬, 아이니그마)은 본래 “수수께끼”를 의미합니다. 알쏭달쏭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리 예언의 은사가 있고 지식의 은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알고 알쏭달쏭하게 알 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우리가 모두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로서의 예언도 폐하고 은사로서의 지식도 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은사들이 부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러한 은사들은 교회 시대의 일정한 시기, 일정한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필요하고 사용될 뿐입니다.

 

탁월하고 본질적이며 영구적인 은사, 사랑

그러나 사랑의 은사는 그런 은사들과는 다릅니다. 그러한 은사들에 비해 사랑이라고 하는 은사는 매우 탁월하고 본질적이며 영구적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은사를 계속 필요로 합니다. 사랑의 은사는 지금도 우리가 계속 사용하고 누려야 하는 중요한 은사이지만, 우리가 완전히 영화롭게 되고 온전하게 되어도 우리가 계속 사용하고 누리게 될 본질적인 은사입니다. 사랑은 폐지되지 않습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가 완전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그때에 폐지되지 않고 중단되지 않을 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은사들은 천국에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천국에서도 우리가 누리는 이 생명, 이 영원한 생명이 계속 될 것을 믿으며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역할과 소망의 역할은 사랑의 역할에 비하면 그렇게 두드러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고 향기롭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들이 다양하고 저마다 특색이 있고 가치가 있지만, 사랑의 은사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신자의 신앙 정도 혹은 경건의 실력은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하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행으로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여러 좋은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을 “더욱 큰 은사”(고전 12:31)라고 부르면서, 사랑을 추구하면서(pursue) 다른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4: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 사랑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이라면 행함을 수반하게 되어있고 참된 믿음이라면 사랑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점검해 봅시다. 우리에게 주신 좋은 은사들을 사랑 없이 잘못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찾아서 회개합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증거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마태복음6:9-13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 강해 네 번째 시간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도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7가지 간구 중 세 번째 간구입니다. 사실 이 기도는 매우 드리기 어려운 기도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못지않게 우리 자신이 소원하고 비중을 두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항상 일치한다면 이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뜻을 반할 때가 많기에 이 기도는 매우 어려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기도는 ‘주님 내 모든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도를 친구의 번영과 행복을 비는 기원이나 덕담 정도로 생각합니다. 즉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란다’거나 ‘뜻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는 식의 말 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이러한 기원이나 덕담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며 내 모든 소원과 욕심조차도 철저히 주님의 뜻 앞에서 죽고 주님의 뜻만이 서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기도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난과 역경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지만 그 조차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던 이 기도야 말로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의 진수이며 절정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 부담없이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쉽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무책임한 신앙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과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목적과 계획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라고 말씀하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온 인류의 구원과 회복이야 말로 하나님의 첫째되는 뜻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인간 개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부적인 뜻이 있는데 성경은 인간을 향한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아놓은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을 매우 어렵고 힘들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혹 그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도 충분한 시간을 내어서 그 뜻을 발견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앤드류 머리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알고자 수고하며 노력하는 자세가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고 나를 향하신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수고를 보일 때 그 안에서 우리는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졌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하늘의 현실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을 말합니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실현되며 성취되는 나라이며 또한 오직 그분의 통치와 주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늘에서 그의 뜻이 이루어졌다 고 하는 말은 첫째 천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천사들은 그를 받들어 섬기며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고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성취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는 말씀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계획이 성취되어 그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조차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모습을 말하는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를 끊게 되고, 부정한 입술의 습관을 버리게 되며, 불만과 투정으로 가득찼던 그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게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온 인류의 구원이며 예수님께서도 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고자 오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지상 최대의 뜻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게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룰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강물에 비교한다면 기도란 수도관과 같아서 기도라는 수도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인 강물이 거세게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기도없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으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은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후레드릭 미코니우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루터에게 큰 힘이 되는 친구로서 루터는 그를 통해 많은 위로와 기쁨을 받고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이 한창인 무렵 후레드릭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두고 루터에게 최후의 유서를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루터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기도를 통해 그의 친구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후레드릭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살 것을 명령한다. 종교 개혁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아직 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결코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는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이 편지를 받은 후레드릭의 병은 급속히 회복되었고, 6년을 더 살면서 루터를 도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위해 우리의 온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내 필요와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기도와 그 뜻이 이루어 지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드러내며 그것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고,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3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말이나 사소한 행동조차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전적인 순종과 자기 부인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서 거룩한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했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인간이기에 그 안에 존재하는 선천적인 본능으로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예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극복하시고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의 수고와 몸부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고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안락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며 야심이나 포부를 접어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수고와 몸부림의 기도를 통해 이일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나 자신을 철저히 죽이는 삶을 살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인생 방향과 목표를 하나님의 중심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이 세상 구원에 있다면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표는 그것에 맞추어 져야 합니다. 이러한 인생 방향과 목표가 하나님 중심에 맞추어 지면 인생의 설계, 선택 모든 계획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한 삶, 선택 행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초점이 비뚤어져 있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주류를 유통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술을 많이 마실 뿐만 아니라 자주 주일 성수를 어기게 되었고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자 갖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제 직업이 집사로서 합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집사님, 집사님의 직업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까?” “ 아니요, 오히려 정반대인듯합니다.” “그렇다면 집사님 그 직업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잡고 그에 합당한 새로운 직업을 찾으십시오” 그 집사님은 목사님의 권면을 받아들여 즉시 사업을 정리하고 기도 중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회사를 다니고 얼마를 버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었다면 우리의 사업과 학업과 모든 선택에 대한 해답은 명료해 질 것이며 분명해 질 것입니다.

 

넷째 일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고 전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교회 일에 너무 지쳐서 아주 피곤한 상태에 처해서 휴가를 신청하였습니다. 드디어 열흘 후에는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부인과 함께 오랜만에 얻은 휴가이기에 매우 즐거워하며 마치 초등학생이 소풍 가는 날을 학수고대하듯 열 개의 매듭을 만들어 하루에 하나씩 잘라가며 그 날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틀을 남겨 놓고 목사님은 덜컥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휴가고 뭐고 다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 목사님은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여보, 다시는 인간 마음대로 휴식할 때를 정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쉬라 하시면 쉬고, 일하라 하시면 일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일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 안에서 아무 것도 작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뜻 밖에서는 아무 것도 큰 것이 없다.” 하나님의 뜻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이 놀라운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하며 나 자신을 철저히 그 뜻에 복종시키고 모든 인생의 초점에 그 뜻에 맞추고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감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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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모든 것을 완성하는 그 길 (고린도전서 13:1-7)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는 늘 질문 하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 나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 역시 이 질문 앞에서 씨름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고, 예언하고, 놀라운 지식을 갖추고, 심지어 병을 고치는 권능을 소유하는 것에서 자기 존재의 증거를 찾으려 했습니다.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눈에 띄는 은사들을 자랑하며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때로는 노골적인 경쟁과 분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마주한 성경의 거울은, 그들의 열심과 성취의 목록 앞에 멈춰 서서, 그 모든 화려함이 무색해지는 단 하나의 진실을 조용히 속삭입니다.

만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라고 선포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사의 말이라니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신비롭고 영적인 언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웅변술에 감탄하고, 달변가의 논리에 설득당하며, 깊은 영적 지혜가 담긴 설교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언어의 성전이, 그 속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이 사랑의 공명을 담지 못할 때, 그것은 그저 금속이 마찰하며 내는 듣기 싫은 소음—공허한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관통할 힘도, 생명을 북돋을 따스함도 없이, 시끄럽게 울리다 사라지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은사는 통로일 뿐, 그 통로를 흐르는 내용물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용물 없는 통로는 텅 빈 깡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경고로 다가옵니다. 성경에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최상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시대를 예언하고, 깊은 학문적 지식으로 진리를 파헤칠 수 있다 해도, 만약 그 예언의 목소리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섬김이 아닌,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지식의 빛이 누군가를 정죄하고 배제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모든 것은 영적인 제로(Zero), 무(無)의 상태로 귀결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아무리 거대하고 웅장해 보여도, 그 근원이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즉 아가페(Agape)가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장부에는 기록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는 능력의 크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작동시키는 영혼의 태도와 중심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헌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 심지어 순교를 감수하는 것은 겉으로 볼 때 가장 고결한 희생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순교조차도, 그 희생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애나 종교적 열심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개인에게 영적인 유익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희생의 양(量)이 아니라, 희생을 바치는 마음의 질(質)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선행과 헌신은, 영혼을 살찌우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 공로를 쌓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선행은 사랑의 충동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행위를 낳지만, 행위가 곧 사랑은 아닙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이 숭배하는 능력, 지식, 심지어 희생의 행위까지도, 사랑이라는 '가장 위대한 언어'가 빠지면 그 가치가 무너진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절대적인 사랑,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이 '아가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성경은 이제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사랑의 구체적인 초상화를 펼쳐 보입니다. 이 초상화는 헬라어 동사들의 생생한 움직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 아름다운 사랑의 목록은 단순한 미덕의 나열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빛을 내듯, 물이 흐르듯, 사랑이라는 생명력 자체가 자연스레 드러내는 15가지의 역동적인 행동 양식입니다.

**오래 참는 것(μακροθυμεῖ, 마크로튀메이)**은 폭발하지 않는 힘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짜증, 불의 앞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라, 다른 이의 부족함과 실수를 끌어안을 만큼 영혼의 그릇이 넓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어떻습니까? 배우자의 반복되는 실수, 자녀의 느린 성장 속도, 직장 동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폭발적인 구리로 변합니까? 사랑은 그 순간, 가슴 속에서 조용히 끓는 용암을 식히며, "괜찮다, 내가 먼저 품겠다"라고 말하는 영혼의 근육입니다.

**온유함(χρηστεύεται, 크레스튜에타이)**은 능동적인 친절입니다. 그저 화를 내지 않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선을 베풀고 유익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 곤경에 처한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길입니다. 온유한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상대를 세워주는 섬김의 자세에서 꽃을 피웁니다. 여러분의 일상 속 작은 친절은 무엇입니까?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 식당 종업원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것, 묵묵히 제 몫 이상의 짐을 지는 동료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온유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타인의 성공과 축복을 볼 때 나의 영혼이 느끼는 날카로운 고통입니다. 시기는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을 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타인의 기쁨에 진심으로 참여하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그를 축복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περπερεύεται, 페르페레우에타이)**은 공허한 허풍과 과시를 뜻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묵묵히 존재하며,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왜곡된 자아상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합니다. 교만이 남을 깎아내려 자신을 세우는 칼이라면, 사랑은 자신을 내려놓아 남을 세우는 받침대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οὐκ ἀσχημονεῖ, 우크 아스케모네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무례함은 타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언행을 포함합니다. 이는 험담, 비아냥거림, 냉소적인 태도, 그리고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는 오만함까지 포괄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고 존중합니다. 또한, 사랑은 자기 이익(τὸ ἑαυτῆς, 토 헤아우테스)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이기심은 모든 죄의 뿌리이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랑은 '나의 것'을 고집하기보다 '우리의 것'을 구하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깁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οὐ παροξύνεται, 우 파록쉬네타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성냄은 갑작스러운 분노의 폭발을 의미하며, 사랑은 이 분노의 뇌관을 미리 제거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타인의 실수나 죄를 마음에 기록해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복수를 위한 장부를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상처를 곱씹고, 복수의 시나리오를 짜고, 끊임없이 그 사람의 단점을 되새김질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용서의 펜으로 그 장부를 깨끗이 지웁니다. 용서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상처를 떠올릴 때마다 다시 지우는 매일의 결단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의 마지막 네 가지 속성은 마치 영혼의 네 기둥과 같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도덕적인 양심과 정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죄의 달콤함이나 악인의 몰락을 보며 쾌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대신, 정의가 실현되고 진실이 밝혀질 때 함께 기뻐합니다. 우리의 기쁨의 출처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타인의 실패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성공과 회복입니까?

그리고 사랑의 영원한 불멸성을 나타내는 네 가지 동사가 뒤따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πάντα στέγει, 판타 스테게이): 여기서 '참는다'는 덮어준다, 보호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사랑은 비바람으로부터 상대를 보호하는 지붕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폭로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그를 감싸 안아줍니다. 이것은 덮어놓고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회복을 위해 그 약함을 인내로 품어주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πάντα πιστεύει, 판타 피스튜에이): 이는 순진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상대방의 변화 가능성, 그의 내면에 있는 선함의 씨앗을 끝까지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지만, 사랑은 그 실수를 넘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것을 굳게 믿어줍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πάντα ἐλπίζει, 판타 엘피제이): 상황이 절망적일 때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올 것을 아는 새벽의 파수꾼과 같습니다. 관계가 깨어졌을 때, 용서와 화해가 불가능해 보일 때, 사랑은 영원한 미래의 약속을 붙잡고 '될 수 있다, 회복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πάντα ὑπομένει, 판타 휘포메네이): 이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굴하지 않고 굳건히 버텨내는 지구력을 의미합니다. 이 견딤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사랑의 굳건한 기초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시험대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하며, 그 속에서 우리의 가치를 입증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 안에 사랑이 있느냐?"

사랑은 우리가 갖는 기술이나 자랑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입어야 할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사랑은 화려한 보석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평범한 순간, 가장 작은 관계 속에서 빛나야 할 섬유질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꽹과리 소리 같은 허무한 삶의 울림을 멈추고, 사랑이라는 가장 위대한 언어를 다시 배우고 말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우리의 교회를 하나 되게 하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는 이 십자가의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이 사랑의 길을 걸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설교 요약 (Summary)

고린도전서 13장 1-7절은 소위 '사랑 장'의 핵심으로, 은사(선물)와 사랑의 가치를 대조하며 시작합니다. 바울은 아무리 탁월한 은사(방언, 예언, 지식, 산을 옮길 믿음)와 극심한 헌신(전 재산 구제, 순교)이라 할지라도, 그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영적인 가치가 없으며 공허한 소음(꽹과리)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1-3절). 이어서 사랑의 본질을 15가지 동사적 특성으로 구체화합니다(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와 교만과 무례함을 배제합니다. 또한 이기적이지 않으며, 분노를 쉽게 터뜨리지 않고, 타인의 허물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사랑은 불의를 거부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신뢰하며, 소망하며, 견디어내는 영원하고 불멸의 덕목임을 강조합니다.

2. 묵상 포인트 (Meditation Points)

  1. 나의 '꽹과리'는 무엇인가? (1-3절): 내가 자랑하거나 의지하는 은사, 지식, 헌신이 사랑 없이 행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나의 가장 '화려한 성취'가 혹시 하나님 앞에서 '공허한 소음'일 가능성은 없는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2. 사랑의 동사적 초상화 (4절): 사랑은 감정이 아닌 행동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은 오래 참는다'와 '사랑은 온유하다' 중 한 가지 특성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며 살기로 결단하고 그 경험을 기록해 봅시다.
  3. 악한 것의 기록을 지우는 용서 (5절):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는 상처의 기록을 지우는 용서를 의미합니다. 내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처나 원망의 '장부'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지워나가기로 결단하며 기도합시다.

3. 강해 및 주석 (Exegesis and Commentary)

  • 문맥적 이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 문제로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12장). 특히 방언(언어의 은사)을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는데, 바울은 13장을 통해 모든 은사를 다스리는 최상위 원리가 바로 '사랑'임을 선언합니다. 13장은 12장의 은사론과 14장의 은사 활용론 사이에서 일종의 '정신' 또는 '규범' 역할을 합니다.
  •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소리 나는 구리(chalkos ēchōn)'는 잔치나 제례 때 사용되던 청동 타악기, '울리는 꽹과리(kymbalon alalazon)'는 장례식 등에서 시끄럽게 울리던 악기로, 모두 의미 없는 소음, 감정적이지 않은 차가운 소리를 상징합니다. 사랑 없는 은사는 영혼을 움직이지 못하는 공허한 형식에 불과함을 강조합니다.
  •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이는 자기희생의 극한을 보여줍니다. 당시 스토아 철학자나 킨키코스(Kynikos) 학파 중 명예를 얻기 위해 순교를 자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울은 이러한 이교적 동기의 희생조차도 사랑 없이는 무익함을 지적하며, 동기의 순수성을 강조합니다.

4. 원어 주석 (Original Language Commentary)

  • ἀγάπη (Agapē, 아가페): 인간적인 애정(필리아, Philia)이나 육체적 사랑(에로스, Eros)을 넘어선,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그분을 닮은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사랑'은 주어로서, 이 모든 행동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주체로 묘사됩니다.
  • μακροθυμεῖ (Makrothymei, 오래 참는다): 직역하면 '긴 분노(long-tempered)'를 뜻합니다. 즉, 보복할 능력과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잘못과 부족함에 대해 쉽게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오래 견디는 '인내'를 나타냅니다.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 χρηστεύεται (Chrēsteuetai, 온유하며): 단순히 소극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풀고 선을 행하는' 능동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부드럽고 유용하며 도움이 되는 태도를 포괄합니다.
  • οὐκ ἀσχημονεῖ (Ouk aschēmonei,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다'는 뜻으로, 품위 없고 부적절한 행동, 또는 타인에게 수치심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은 타인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 πάντα στέγει (Panta Stegei, 모든 것을 참으며): '덮다(cover), 보호하다(protect), 방수하다(waterproof)'라는 뜻을 가진 동사 stegō에서 유래했습니다. 사랑이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약점을 폭로하지 않고, 마치 지붕처럼 덮어주고 보호하는 적극적인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5. 금언 (Aphorisms)

  •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이지만, 사랑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손길의 방향이다.
  •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그 지식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섬김의 도구로 만든다.
  • 사랑이 없는 헌신은, 스스로를 태워 냄새만 피우는 연기일 뿐,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 사랑은 상처를 기록하는 장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용서를 갱신하는 깨끗한 백지이다.
  •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커도,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크지 않다.

6. 신학적/주제별/목회적 정리

  • 신학적 정리 (Theological): 이 본문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반영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는 하나님의 마크로튀미아(Makrothymia), 즉 오래 참으시는 속성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15가지 사랑의 속성 전체를 구체적으로 성육신한 행위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완성이자(롬 13:10), 하나님의 본질(요일 4:8)이며, 구원의 핵심입니다.
  • 주제별 정리 (Thematic): 13장은 은사와 율법, 믿음과 행위, 현재와 영원의 모든 신앙 주제들을 포괄하는 궁극적인 '가장 큰 것(The Greatest)'을 제시합니다. 이는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든 목적과 행동의 최고 기준이 됩니다.
  • 목회적 정리 (Pastoral):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의 분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기심, 시기, 자랑, 무례함이 목회 현장의 갈등 주원인입니다. 이 본문은 성도들에게 화해와 용서, 그리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면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책이 됩니다.

7.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Congregational Resolution and Application)

  1. '자랑 금식' 실천: 오늘부터 일주일간, 대화 중 나의 성과, 소유, 능력에 대해 자랑하려는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잠시 멈추고, 대신 다른 사람의 장점이나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칭찬하고 감사하는 말로 대체하는 '자랑 금식'을 실천합니다.
  2. 용서의 장부 파기: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특정인의 실수나 허물을 종이에 적어보고,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을 묵상하며 그 종이를 찢거나 태우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마음속에서 용서의 장부를 파기합니다.
  3. 하루 3가지 '온유' 실천: 매일 아침, '온유하며(친절을 베풀며)'를 기억하며, 하루 동안 가족, 직장 동료, 또는 낯선 이에게 베풀 3가지의 작고 구체적인 친절(예: 칭찬 한마디, 작은 도움 제공, 인내심 있게 들어주기)을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6:9-13

 
 

◈ 주기도문 4   

나라이 임하옵시며

 

오늘은 주기도문의 두 번째 간구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흔히 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씀을 주기도문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첫 번째로 외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의 주제도 역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하나님 나라는 주기도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두 번째 간구로 전혀 손색이 없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역본 성경들이 주로 사용한 Kingdom이라는 말은 영토를 전제로 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한 때 하나님 나라를 영토의 의미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구실 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을 일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으로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영토를 소유한 세상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라라는 말은 사실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며 그리고 성령을 바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분명한 지적 언어적 한계가 있기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개념들을 이러한 상징이라는 도구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 행사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옛날에는 훌륭한 성군을 만나면 그것이 곧 행복이며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시민권이라는 이유로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인이나 중형 죄가 아니면 로마 시민을 구금하거나 취조할 수도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누구나 로마의 시민이 되기를 원했고 심지어 돈을 주고 사고파는 행위도 비일비재하게 성행하였습니다. 여러분, 로마 시민이 이스라엘 땅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의 군대가 그를 호위하는 것도 아니며 특별히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팔레스틴의 한 귀퉁이에도 로마 황제의 영향력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통치와 영향력이 미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시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인격,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공간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줄을 그어놓고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나라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나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이면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도란 내가 나를 다스리고 나의 영향력 속에 나를 가두어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 성도는 주님의 통치와 주권 가운데 나를 내려 놓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나를 통해 주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는 사람들의 오해를 책망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귀신은 쫓겨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자연히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떨어진 세계를 말하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습니다. 손을 펴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잡을 수 있습니다. 가령, 어머니가 먹을 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는데 아이들이 그것을 꺼내려고 이불과 베개를 포개놓고 올라서면 손이 닿는 것처럼 이렇게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는 심령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며 그의 주권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가 죄인임을 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런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조리하고 악한 삶을 살았던 내가 내 삶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의 주인으로 삼는 놀라운 고백을 할 때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회개는 정권교체’라고 고백했던 한 목사님의 설명은 너무도 정확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탄광촌에서 대규모 파업과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는데, 그곳에 부흥회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갔고 눈물로 새사람이 되겠다는 결심과 돌이킴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용주는 근로자를 불신했고, 근로자는 고용주를 착취하는 사람으로 미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참된 회개 운동이 일어나고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모든 자아의 권리를 하나님께 내려 놓고 이양했을 때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그들 가운데 임하였고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은 고용주 몰래 빼돌렸던 물건들을 가지고 고용주를 찾아가 뉘우쳤고, 고용주는 근로자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주지 않았던 것을 눈물로 뉘우쳤습니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 줄 아십니까? 술집이 장사가 안 되어서 곳곳에서 문을 닫았고, 더러는 술집의 주인이 새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가게를 부랑자들에게 전도하는 장소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와 주권 이양이 없습니까? 아직도 우리가 철저히 죄인이며, 하나님만이 내 삶을 고치실 분이며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전적인 회개와 자복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회개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안에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점점 확장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파되고 계속 확장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의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와 함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복음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로마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이르렀고 미국을 통해 한반도에까지 이르는 놀라운 확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국을 들을 21세기 복음 전도의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셨고 앞으로도 확장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하여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꺼질듯한 복음의 불씨를 들고 이 나라를 밟았던 선교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고 수많은 성도들을 통해 그 나라를 확장시키셨고 견고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이 놀라운 하나님의 부르심에 얼마나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으며 얼마나 땀흘려 헌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주역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4.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종말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다양한 종말론적 예언에서도 알 수 있으며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는 말씀 등을 통해서도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심판자로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악에 대하여 심판을 하실 것이며 그 때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는 말씀처럼 새로운 세상 즉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며 예수님께서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신 궁극적 목적이라고 볼 때, 우리는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며 고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그날을 사모하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감격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면서 날마다 마지막 날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간절히 외치며 고대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한 세 가지 시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고, 복음 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확장되고 내 안에 건설되고 있으며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지막 날 천국은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가지 시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기도의 고백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가운데 내 자신을 드리며 그의 통치가 행사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며, 이를 통해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 더러운 권세는 물러나고 오직 이 땅에서 주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겠다는 기도이며 또한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온전한 완성과 성취를 소망하며 고대하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사회에 나라에 세계에 임하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며 최선의 삶을 경주해야 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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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6:9-13

  여섯 가지 간구 가운데 첫째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건들에 의해 영화롭게 되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새번역에는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옮겼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과 뜻은 같습니다. 수동형으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면 뜻은 더 정확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것이 첫째 간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소원 중의 소원이 되고 우리의 간구 가운데 첫째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려지게 하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제 3계명에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가볍게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고 했으니까 하나님을 이름을 사용해서 맹세하지 않고 하늘로 맹세하고 혹은 땅을 두고 맹세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잘못된 맹세를 해도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잘못을 보시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며 예루살렘은 큰 임금 곧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성읍이니 그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것도 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품을 볼 때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과 바다와 산과 들판과 새와 짐승들과 나무와 풀과 꽃을 보면서 그것을 만드시고 입히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참으로 둔감한 자인 것입니다. 어린 자녀에 대한 애정과 수고와 기대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그의 자상한 돌보심과 우리를 향한 기대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이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의 복음이 모든 곳에 전파되며 복음을 듣는 자들이 믿어 구원 얻게 되고,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아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십니다. 그분의 성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다, 하나님은 구원자시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목자시다, 하나님은 심판자시다, 하나님은 소망이요 생명이요 피난처시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며 자비하시고 선하시며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심을 그의 말씀을 통하여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존중되고 흥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용하시고 또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사신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이어서 이런 응답이 있었습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7, 28).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십자가를 지실 각오를 하시면서 하신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그 일로 말미암아 세상에 하나님이 알려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셨으며 이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기를 소원하고 이것이 우리 기도의 첫째 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나 우리가 당면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합니다.
      다윗 왕은 청소년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무시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전쟁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골리앗을 맞아 기죽지 않고 그를 쳐서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용기를 낼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히스기야 왕도 앗수르 왕이 랍사게를 보내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위협하면서 항복하라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모욕하는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편지를 펴놓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사 37:16-20).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진중에서 십 팔만 오천 인을 쳐서 시체가 되게 했습니다. 산헤립은 떠나 돌아가 니느웨에서 자기 신에게 절할 때 그 아들이 그를 칼로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하고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유익이 되든지 손해가 되든지, 높아지든지 낮아지든지, 칭찬을 받든지 욕을 듣든지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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