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의 믿음 일자   (창5:21-24)


   여느 죽음과 같지 않은 하영이를 하늘나라로 보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누구라도 갑니다. 늙었다고 빨리 가는 것이 아니고, 아이라고 늦게 가는 것도 아닙니다. 노인만이 아니라 아이도 죽습니다. 병든 사람만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갑니다.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있는 사람도 갑니다. 믿지 않는 사람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도 갑니다. 누구라도 우리는 어느 날 저녁에 날아오는 비수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알고, 준비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사람이 되어,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인생에 소중한 준비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감사하고,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도록 이끄시는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인생은 점점 천국으로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더 깊은 믿음, 더 좋은 신앙으로 하나님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믿음을 보면서 나의 믿음을 점검하고,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지난주에 아벨에 이어 오늘은 ‘에녹’입니다. 과연 에녹은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에녹의 믿음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에녹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그의 전 생애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기록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짧지만 아주 깊은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의 믿음을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이라고 강조합니다.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결국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여기 ‘동행’이란 말은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늘 함께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곁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끝없이 인간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인간과 함께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함께, 동행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소중한 믿음이 없습니다. 에녹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가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느끼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아파할 때에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평온할 때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어 큰 은혜와 축복을 주는 것 같은데, 삶에 폭풍이 몰아치면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시는가 하며 탄식과 원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평온할 때만이 아니라 내가 힘들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내가 아파할 때 멀리서 뒷짐지고 방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아파하면 더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때에는 더 나와 가까이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으로 용기와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모래 위에 두발자국’이란 시를 아시지요?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저편에 내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쳤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나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나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내가 걸어 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바로 나의 인생에서는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나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왜 저를 멀리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한 사람아/ 나는 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네 시련과 고난의 시절에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그때에는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 때문이란다...”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평온할 때는 물론이고 힘들 때에도 동행하십니다. 내가 물 가운데로 걸어갈 때에도,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런 고통의 순간에는 나를 업고 가십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시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에녹에 대하여 이렇게 그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것이 에녹의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만 가진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슬프게 하면 동행에 무슨 유익이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에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놀라운 믿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인데 그와 동행하면서 그분을 좀 기쁘시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기쁨입니까, 아니면 슬픔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랑입니까, 아니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여러 사람의 여러 경우를 통해 그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 믿음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믿음으로 살면,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는 기준은 바로 믿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굳건히 믿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그것은 바로 경건 생활입니다. 경건 생활이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 예배와 찬송, 감사와 순종이 바로 우리의 경건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신앙 고백에서, 시편의 여러 말씀 속에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왕상3:10, 시51:19, 시69:30-31) 신앙생활은 경건이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이것이 빠지면 다른 것 아무리 다 잘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그분과 깊은 교제와 대화와 사귐을 갖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이것을 추구하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경건을 우선 순위로 삼고 이것을 내 신앙과 삶에 중심에 두면서 추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무엇일까요? 바르고 참된 삶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만 특히 잠언에서 많이 강조합니다.(잠11:1, 20) 특히 잠언 21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하나님은 의와 공평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는 이것을 행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여러분, 믿음과 경건과 공의가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새해에 지속적으로 이것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아는 믿음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잘 가르쳐 줍니다. 본문에서 성경은 에녹이 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22절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라고 강조합니다. 에녹은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큰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때가 므두셀라를 낳은 때, 아들을 낳을 즈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가 아들을 낳을 시기에 깨달았던 진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가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은 것에서 찾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특히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 예언이 그대로 적중된 것을 알려줍니다. 에녹의 아들은, 므두셀라이고, 그의 아들은 라멕, 그리고 라멕의 아들이 노아입니다. 결국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심판이 임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신기하게도 므두셀라가 죽은 바로 그 해 홍수가 임하는 것을 봅니다.

   가인이후에 사람들의 죄가 깊어갈 때 하나님은 에녹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앞으로 얼마 있으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에녹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면서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었습니다. 아들을 낳은 후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자기와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날마다 나를 향하신, 그리고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보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말씀을 통해 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찾는 지혜로운 사람, 믿음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길입니다.

   로마서 2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율법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를 향하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에녹처럼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선명하고, 확실하고, 강한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자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지고 무너지고, 없어지고,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확고한 힘입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스런 순간이 다가올 때 겟세마네동산에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에녹처럼, 많은 믿음의 사람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나타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걱정과 염려로 엄습해 올 때, 때론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길 수 있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가질 자세입니다.

   에녹은 자기와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기쁘시게 할 수 있었고, 하나님과 평생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에녹의 이런 믿음을 본받아, 남은 생애동안 에녹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늙은 종 이야기   (창 24:1-9)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할 때는 모두가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지난 한해를 살아오는 동안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보람된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후회되는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발자취에는 의례히 그런 법입니다. 보람된 일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회되는 일들만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간이 되면 보람된 일 보다는 후회되고 아쉬운 일들만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나간 시간보다는 새롭게 다가오는 새 시간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이야기입니다. 이 종에게서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가장 충성스럽고 충직하고 진실하고 주인으로부터 신뢰받는 청지기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께, 교회 앞에, 내 인생에, 직장인으로서, 사업가로서, 교직자로서, 젊은이로서, 어른으로, 부모로, 자식으로, 신앙인으로 이렇게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한해를 다 살아간 다음 한해를 되돌아 볼 때에도 조금도 후회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늙은 종 이야기라고 붙였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존재는 참 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일을 시작하시고 섭리를 이루십니다. 그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내와 함께 할 일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곁에는 아들 이삭 한사람뿐입니다. 그 아들의 나이가 40입니다. 이제 결혼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살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하란으로 가서 며느리를 골라야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 중요한 일을 위해 자신의 늙은 종을 보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등장합니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아주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맡아 일하는 청지기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 늙은 종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구나. 이것이 진실한 청지기의 삶이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헌신자들의 정신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종에게서 몇 가지 모습이 발견됩니다.

주인으로부터 소명을

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종에게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즉 “너는 가서 며느릿감을 택하여 데리고 오라“그 말입니다. 이 종은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며느리를 간택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이 종은 주인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맡아서 관할하고 있는 청지기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볼 때 40세 된 아들 이삭보다 이 종이 더 미더웠을 것입니다. 얼마나 믿었으면 며느리 선택권까지 줘서 보냈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삶은 이렇게 인정받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이 복을 받는 인생이고 은혜 입은 삶입니다. 직장에서든지 사회에서든지 어디서든지 인정받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삶입니다. 이 인정받고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일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섭리들은 이루어지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데는 반드시 누군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냐 하면 이 종같은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살아가는 것이 귀한 일인데 주께로부터 인정받고 소중하게 쓰임 받는 일이라면 얼마나 소종한 일입니까.

주인 의중 정확히 이해

무슨 일을 할 때는 뜻을 정확히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 종은 늙은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경험이 풍부하고 생각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지침을 건성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임감 있게 물었습니다. 5절을 보면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내가 이삭을 데리고 가도 됩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절대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혹시 오고 가는 중에 이방여자들을 보고 현혹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눈에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할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혹시 눈이 돌아가 이방여자에게 빠져버리게 되면 큰일입니다. 우리는 때로 일을 많이 하면 되는 줄 압니다. 주인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면서 일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되 정확하게 알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나 교회의 일은 자기를 위한 일도 아니고 나타내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래서 정확한 뜻을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종의 모습에서 그런 신중한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

마침내 이 종이 주인의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 길은 가나안에서 메소포타미아 까지 가는 길로 거리가 800km 정도 되는 길입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에서 터키를 거쳐 이라크 땅까지 낙타를 타고 갔을 테니까 3,4개월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이 종이 그렇게 가서 마침내 목적지인 하란의 근방에 도착해서 마침내 우물가에 앉아 기도했습니다. 어디 가서 처녀를 골라서 데리고 가야 합니까. 그 멀리 그 넓은 땅에서 오늘처럼 도시가 아니고 몇 가족끼리 부족들이 사는 초라한 동네를 찾아 처녀를 구해야 합니다. 아마 그의 마음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우물가에 앉아서 기도를 합니다. 그때 이 종이 두 번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한번은 주인에게 복을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12절을 보면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며느릿감을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참 신실한 종입니다. 오늘은 주인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는 종들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인 없는 자리에서 다 주인을 욕합니다. 배반합니다. 노사관계를 보십시오. 자기가 다니는 직장이 망하건 말건 투쟁하고 불 지르고 파괴하고 그럽니다. 기업주가 아무리 악덕 기업주라고 해도 자기가 다니는 직장을 파괴하고 불 지르는 행위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행동입니다. 오늘은 부모가 아무리 유산을 안주었기로서니 부모를 버리고 모른 체하고 거리로 내몰아 얼어 죽게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니 그 자손들이 복을 받겠습니까. 그래서 여기 이 종의 모습이 참 신실하게 보입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것이 이 종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종이 두 번째 또 기도합니다. 이번에는 며느릿감을 아주 순조롭게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4절을 보면 “이제 여기 우물가로 처녀들이 올 것인데 내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한 소녀가 물을 길으러 오면 내가 물을 좀 달라 할 테니 나만 말고 당신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 하는 소녀가 있으면 그가 하나님이 짝 지으신 규수로 알겠습니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구체적인 기도입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까 한 처녀가 물을 길으려 왔습니다. 그래서 “물 좀 달라“고 했더니 그 처녀가 선뜻 물을 주면서 “당신의 낙타에게도 주겠다”하고 물을 길어 낙타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그때 그 늙은 종이 너무나 신기해서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서 사느냐, 뉘 집 자손이냐, 네 집에 빈방이 있느냐” 그래서 그 소녀를 따라 집에 가 보니까 그 집안이 자기가 찾고 있는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 리브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비하고 반갑고 하나님의 인도가 분명합니까. 이 종이 소녀의 집에 가서 지금까지 된 일을 다 이야기 하니까 모두 그를 환대하고 리브가의 오빠 라반과 그 부친 브두엘이 그 자리에서 데리고 가서 네 주인의 며느리를 삼으라고 말했습니다. 50절을 보면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 로서 말미암았으니 ..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너무나 선명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섭리였으니 누가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이 종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개념적인 기도를 합니다. 기도의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아주 구체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나에게 이런 사람을 주소서” 그렇게 자세한 꿈을 담아 드릴 때 그 기도가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할렐루야 축구단이 있습니다. 처음 이 축구단은 기도하는 젊은 선수들이 모여 결성했습니다. 그 젊은 선수들이 하루는 의논하기를 “이제부터 누구든지 골을 넣으면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신현호 선수가 골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이 선수가 골을 넣고 보니까 너무 좋아서 뛰어 다니다 보니까 기도한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기도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경기를 하는데 이번에는 이영무 선수가 공을 넣었습니다. 그때 이 선수가 곧 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모습은 대단한 용기이고 대단한 신앙의 간증입니다. 그때부터 축구장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도하지 못한 신현호 선수가 후일에 이런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날 기도할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그 후 선수생명이 끝나 버렸고 이영무 선수는 그날 기도한 것 때문에 오늘까지 선수생명이 지속되고 있다“. 기도는 무슨 기도든지 다 소중합니다. 그런데 더 소중한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도이고 자세한 기도입니다. 한 해 동안 이런 기도를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종은 자기의 주인에게 복을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진정 주인의 뜻에 맞는 처녀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이 종이 처녀를 따라 집으로 가서 지금까지 된 일을 다 말하자 그 종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딸을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어느 낮선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을 데려가겠다고 할 때 누가 선뜻 딸을 데리고 가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그 종의 신실함, 신실한 언행, 진솔한 자세, 그의 신실한 기도내용 등을 들었을 때 온가족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모습이 중요합니다. 이 신실함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실함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재산이고 믿음이고 자본입니다.

종의 책임감

이 종이 마침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순전하게 처녀를 만난 후에 처녀를 데리고 곧 바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의 집안에서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래서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애원했습니다. 55절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가라”고 간구합니다. 며칠 더 묶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융숭한 대접도 받고 그 종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의 마음에는 자신의 평안함이나 좋은 대접을 받는 것 보다 주인이 걱정되었습니다. 자기 주인이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56절을 보면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하고 길을 떠납니다. 얼마나 책임 있는 종입니까. 그러니까 한때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 종을 양자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이렇게 책임 있게 살면 우선 자기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또한 세상이 그런 사람들 때문에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결론


그렇게 종이 며느릿감을 데리고 왔을 때 아브라함도 이삭도 만족해서 기뻐했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기뻐한 그 배후에는 이름 없는 아주 충성스러운 종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종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 이름 없는 종의 모습을 장황하게 기록해 놓으신 이유가 바로 이점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청지기의 정신과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해서 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누구로부터 신뢰받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행복하고 보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보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이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기적인 부자 카네기가 늙어갈 때 사람들은 누구를 후계자로 선정할까 모두 궁금해 했습니다. 그때 카네기는 아주 과감하게 자신이 데리고 있던 비서를 후계자로 선택하였습니다. 이 비서는 처음에 경비원으로 그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비원이 너무나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카네기는 그를 자신의 수행 비서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를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기용하고 또 마침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신실함과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양치는 목동에서 백성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농사짓던 엘리사를 불러 예언자로 삼아서 그 어려운 시절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골 청년 요셉을 불러내서 애굽으로 보내 가장 어려울 때 그 나라의 총리로 삼으셨습니다. 들에서 양치 던 그 시대의 가장 뒤떨어진 목자들에게 꿈을 보여주셔서 예수의 나심을 알고 가장 먼저 찾아가 축하하게 하셨습니다. 군대백부장 고넬료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청하여 은혜 받으라고 계시를 주심으로 고넬료 가족 모두와 종들까지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님이 그 모습들을 보시고 기쁘게 여기셨던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복을 받는 길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 모습이 이 늙은 종의 모습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향기로운 인생은 하나님도 감동받으십니다. 새해는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한 해 동안 많은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될 것이고 이 종이 인도받은 그 인도를 우리도 받게 될 것입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슬기로운 성도의 모습 7:13-24, 25:1-13
옛날 어느 마을에 큰 부자 집이 있었는데, 하루는 주인이 미련하다고 생각되는 머슴을 불러 지팡이를 주면서 "여보게, 내가 보기에는 자네보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없을 것 같네. 그러니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가 자네보다 더 미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거든 주게나." 하고 놀렸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그 부자 집 주인이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머슴이 주인을 찾아갔을 때 주인은 "여보게, 나는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먼 길을 떠나게 되었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머슴이 "어디로 가시며, 갈 준비는 다 되었는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이 머슴이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미련을 떤다고 생각하면서 "아니, 이놈아, 죽음의 길에 무슨 준비가 필요하며,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머슴은 "주인어른, 하루 여행을 떠나도 목적지를 정하고 준비를 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아주 먼 길을 떠나는데 그런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생각하니 주인어른은 참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그러니 이 지팡이를 도로 받으시지요." 하면서 예전에 주인에게 받았던 지팡이를 다시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구약 본문의 말씀은 노아 시대 사람들의 타락으로 인한 홍수 심판과 그 심판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구원을 받은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방주 안에 들어 간 동물들이 살아남게 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세상 것에 취하여 살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심판에 대한 대비도 없이 세상 것만 바라보고 살다가 멸망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의 말씀은 열 처녀 비유를 통해 등은 준비 되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와 이미 문이 닫혀 신랑을 맞이할 기회를 잃게 된 것과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가 신랑을 맞게 된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를 통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할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슬기로운 성도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슬기로운 성도는,


1.주님 은혜를 받고 사는 성도입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이 너무 죄로 인해 타락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 하시고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6:5-7)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부패한 인생들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하시고 유예기간을 두셨습니다. 120년 후 무드셀라(그가 죽으면 올 것이다.)가 죽을 때 홍수 심판이 올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해라"고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번성해지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번성해졌으면 더욱 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어야 할 텐데, 오히려 죄악이 땅에 차고 넘치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실 때 사람들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인생 지으셨음을 한탄 하시고 홍수로 심판하시기로 작정 하신 것입니다.
노아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살았지만 은혜를 받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했고, 9절에서는 은혜 받은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노아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악한 모습으로 살아도 성결한 자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은혜 받은 자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대비하며 사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 가운데 타락한 자가 되면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자기만 구원받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방주를 타야할 사람들은 방주를 타지 않고 오히려 짐승들만이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타락하면 무지한 자가 되고 짐승이나 미물 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고, 분별력도 없게 됩니다. 오히려 미물들이 민감한 모습으로 위기를 알아차립니다. 어떤 배는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할 때에는 쥐를 같이 태워 쥐가 배안에 그대로 있으면 항해를 시작하고 쥐가 배에서 빠져 나오면 그 배는 항해를 하지 않는데, 이 배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쥐가 먼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미가 이사를 가고 동물들이 장소를 옮기면 무엇인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어리석게 나아가다가 화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경륜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면서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우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외면합니다.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를 어리석다고 비웃는 것처럼 복음 전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방주를 만드는 노아나 전도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비웃는 자들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사모하여 은혜를 받고 듣든지 듣지 않든지 한 사람 이라도 더 구원 얻기를 소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노아처럼 은혜 받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성도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가 사는 방식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곧 다가올 심판에 대비하여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 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모두 타락해서 육적이고 세속적인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어떻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는 3층으로 되어 있고 길이가 171.5m, 폭이 28.5m, 높이는 17.2m로 총 톤 수는 13,960톤이 되는 거대한 방주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왜 이처럼 거대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을까요? 노아와 그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거대한 방주를 예비하라 하신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 다섯 처녀는 슬기로워 등과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지만 다른 다섯 처녀는 미련하여서 등만 준비하고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슬기로운 성도는 신부의 들러리 열 명 중 다섯 명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등은 외형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다니고, 헌금도 드리고, 직분도 받아 누가 보아도 신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기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 기름은 성령 충만한 믿음을 지닌 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성령 충만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모양만 신앙인이지 말씀에 순종하여 살 수 없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아벨과 셋의 신앙 계보를 가진 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세상 풍조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 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절에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했습니다. 타락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지 못하면 말씀에 순종하여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기름이 떨어지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성령 충만한 믿음이 없으면 유익이 없기에 성경 곳곳에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강조하여 명령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7: 20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눅12:35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등불은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등불이 꺼지면 등이 쓸모가 없게 되어 맛 잃은 소금처럼 되어 버려지게 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닫친 문 앞에서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슬기로운 성도가 되어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3.주님께 소망을 두고 깨어 준비된 신앙으로 사는 성도입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게 된 것은 세상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오로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상일에 치심 하여 살면서 끝없는 타락과 방종과 죄악 된 세상에 빠져 살게 되었습니다. 모두 치우쳐 그러한 길로 나아가니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한탄의 대상이 되었고, 진노의 대상이 되어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히 여기시며 죄악에서 돌이키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노아를 통해 방주를 예비하라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호화롭고 멋있어 보여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없어지고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에는 처처에 전쟁과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대만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답던 도시, 어두움을 대낮처럼 밝히던 도시가 한번 지진에 맥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변함이 없고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주님께는 관심이 없고, 눈앞에 보기에 좋은 세상 것들에 소망을 두고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게 이 세상을 살까하는 것에만 골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노아는 당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방주를 만든 후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듯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죄 많은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 방주를 예비 하시고 누구든지 돌이켜 주께로 돌아와 구원 얻을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어라’(55:3)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55:7),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편히 쉼을 얻으리라’(11:28),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13) 수많은 전도지, 수많은 전도자들, 목회자들이 강단을 통해, 방송 매체를 통해,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주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으라고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으로 들어가 구원 얻을 기회가 지나면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7:1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하기까지 하나님은 심판을 알리면서 기다리셨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초청에 순종하여 배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하나님은 7일 동안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했습니다. 끝까지 먹고 마시고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방주 문이 닫혔습니다.
신악 본문에 나오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미리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기름이 떨어지자 구하러 나간 사이에 신랑이 와서 돌아와 보니 이미 문이 닫히고 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이 한번 닫힌 후에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슬퍼하며 울부짖어도 다시는 열리지 아니했습니다. 은혜 받을 때가 있고 구원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한번 지나면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노아처럼,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주님께 소망을 두고 기름등불 예비하고 기다리다 주님 맞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슬기로운 성도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슬기로운 성도는,
.주님 은혜를 받고 사는 성도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성도입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깨어 준비된 신앙으로 사는 성도입니다. 아멘.
<2024. 04. 19.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하늘 백성의 형통 39:1-6,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물질적 풍요를 누리도록 풍성히 예비해 놓으셨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바로 섬길 때 형통한 은혜를 받게 되고, 그때 만족과 풍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하늘 백성의 형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늘 백성의 형통은,

1.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창39:2-3에“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통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되어 아무런 어려움이나 근심, 문제없이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련중에 있는 요셉의 삶과 연관하여 사용 되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요셉의 처지는 남의 집 노예입니다. 그 당시 노예는 자신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이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자로, 생사권도 주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노예인 요셉을 가리켜 본문은‘형통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형통한 자’라는 말 앞의 수식어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는 말입니다. 즉 형통이란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 즉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명예를 얻고,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평안한 삶 등이 아니라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을 번하다 노예로 팔려 남의 집 종살이 하면서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시련을 극복하고 형통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잘되는 것만이 형통이 아니라, 요셉처럼 하나님과 잘 통(通)하는 것이 형통(亨通)이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을 뚫고 나가는 것, 끝이 좋고 선을 이루는 것,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살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은 형통이 아니지만,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41:10에“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매사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찬양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교제하는 기쁨을 나누고,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바로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맺히고 꼬인 것들이 풀려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을 계속 보면 여주인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없노라고 유혹을 피해 달아날 때 여주인은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동료 죄수들을 돌보며 지내는 모습을 보고 22절에 보면 간수장이 옥중 죄수들을 다 요셉의 손에 맡겼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옥중에서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서 후일 그의 말대로 바로의 생일 날 복직이 된 술 맡은 관원을 통해 바로 왕이 꿈으로 번민할 때 요셉의 일이 생각나 왕에게 요셉에 대한 말을 전하여 왕 앞에 서게 되었고, 왕의 꿈을 해몽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약 애급의 총리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시어 옥중에서도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셉에게 모진 일을 했습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요셉의 죽음의 소식이 아버지에게 큰 충격이 될 줄 알면서도 아버지를 속여 가며 노예상에게 팔아 넘기고, 여주인은 자신의 집에 큰 유익을 끼치는 요셉에게 보답은커녕 감옥으로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도 복직 후 왕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잘 신원해 달라는 요셉의 부탁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려서 주신 꿈을 하나씩 이루어 가시도록 섭리하셔서 요셉을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서6장에 보면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받는 총리가 되자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의 약점을 찾다가 아무 흠을 발견하지 못하자 기간을 정하여 그 기간에는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자는 사자 굴에 넣도록 온 나라에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리게 했는데, 다니엘이 그 기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열고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을 왕에게 고발하여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 굴에서 보호해 주시므로 오히려 그를 모함하는 자들이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는데, 이 일 후 단6:28에“이 다니엘이 다라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사자 굴에서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시련 중에 있을 때에도, 사람들의 모함과 배척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실 때에도 예수님은 형통하게 하시는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는 것마다 변화되었습니다. 죄인은 회개하고, 병 든 자는 치료되고, 포로 된 자는 자유케 되고, 가난한 자는 부요케 되었습니다. 귀신은 떠나가고, 관계는 회복되고, 저주의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 되게 하시어 죄와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자들이 복을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형통의 손, 치료의 손, 권능의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형통하게 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성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맺히고 꼬인 것들이 풀어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혼자서 형통한 것이 아니라 요셉 때문에 그 주인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쁘고, 보람 있고, 행복한 경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5절에“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급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신 때를 정확하게 선을 그어 구분해 놓으셨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라고 했습니다. 사실 가정이나 교회, 직장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온 다음부터 그 모임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위기가 달라지고, 여건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집니다. 이 모든 것을 형통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형통한 사람 요셉이 감옥에 가니 감옥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가 애급의 총리가 되니 후에 7년간의 기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통해 그의 부모와 형제들, 히브리 백성들이 도움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다 불러 모은 다음에 자식들 하나, 하나 이름을 부르며 예언적인 기도를 하는데, 그때 요셉을 위해 한 기도는 창49:22에 보면“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 이웃에 미치는 것처럼 그는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억울하게 옥에 갇혔지만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하더니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감옥에 진동이 생기고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의 결박이 풀렸습니다. 졸고 있던 간수가 깜짝 놀라 이 광경을 보고 틀림없이 죄수들이 다 도망갔으리라 생각한 간수는 그 책임을 느끼고 자결하려는 것을 보고 바울이 급히 소리쳤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도망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노라" 간수가 등불을 가지고 뛰어 들어가 보니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너무 감격하면서도 두려워서 하는 말이, "선생님,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고 물었습니다.이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이렇게 해서 그날 밤에 간수와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롬8:28의 말씀처럼‘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이 유럽과 아시아 등지로 전해져 구원 얻는 자들이 확장되어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셉이나 바울처럼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며 주님을 본받아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자들을 통하여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40-46)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하늘 백성의 형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늘 백성의 형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맺히고 꼬인 것들이 풀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아멘.

하늘 백성이 지닌 모습 23:1-11, 벧전2:9-12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올바르게 인식하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존재에 맞는 삶으로 살아가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주기 때문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에 보면 그의 두 아들 인과 신에게 보내는 글에 김구 선생은 우리는 안동 김씨로 신라의 경순왕의 혈통인데 조선시대의 문()을 존중하고 무()를 천히 여기는 풍습 때문에 완전히 상놈이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도진순 주해, 22-23). 김구 선생이 그의 두 아들에게 가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하는 의도는 그 존재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고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부터 이 땅에 살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자에 대한 특별한 기대감, 또는 기대심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특별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창기의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들은 주로 일찍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지식인들이었는데, 그 중에 조만식, 안창호, 이승만, 주요한, 남궁억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애국자들이었고 특별한 방식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대다수 신자들은 우리 국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친절하고 상냥하다’, ‘어떤 일을 맡겨도 믿을만하다’, ‘약속을 잘 지킨다.’, ‘자녀들을 잘 교육한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등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신자라는 존재에 합당한 삶의 양식입니다.

구약 본문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장례를 치르면서 헷 사람들에게 보여준 모습과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 본문에는 성도가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지와 그에 걸 맞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늘 백성이 지닌 모습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항상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기회를 붙잡고 살아갑니다.

짧은 인생을 하루 소풍에 비유한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을 하루 소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14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아침 안개는 햇빛이 비취면 곧 사라져버립니다. 인생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을 가리켜 초로인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풀잎에 맺혀있는 이슬같이 잠깐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홍안 내일의 백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의 예쁜 얼굴이 내일이면 흰 뼈로 변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결 같이 잠깐이라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근처에 기자라는 곳에 유명한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피라미드 옆에는 사자의 몸에 사람 얼굴을 가진 석상(石像), 스핑크스라 불리는 괴물이 앉아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길가에 자리 잡은 이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내었다고 합니다. 수수께끼에 옳게 대답을 하는 사람은 살려 보내고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석상 스핑크스가 후다닥 삼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수수께끼는 이렇습니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걷고, 낮에는 두 다리로 걷고,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존재가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의 답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려서는 엉금엉금 네 다리로 기어 다니고, 젊어서는 두 발로 우뚝 서 다니고,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세 다리로 다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인생은 하루 같이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은 아침과 같고, 젊은 시절은 낮과 같고, 늙은 시절은 저녁과 같이 잠깐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4절 말씀에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을 가리켜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했습니다. 남의 집에서 임시로 산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도 바로 왕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표현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 47:9)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도 자신의 영광스러웠던 삶을 가리켜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또 말하기를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시편103:15-16)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 벧전2:11에서 사도 베드로도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섬기며,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인생은 나그네라는 인식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이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헛된 일에 마음을 빼앗겨 살지 않게 됩니다. 구원의 기회, 은혜 받을 기회, 세월을 아껴 주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할 기회를 붙잡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항상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기회를 잘 붙잡는 자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돌아갈 하늘 본향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나그네의 삶이 끝난 후 돌아 갈 집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처럼 숙박업이 발달한 시대에는 나그네 생활도 편안합니다. 호텔의 생활환경은 가정집보다 훨씬 더 편합니다. 식사와 오락 운동시설 샤워 실까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호텔이나 여관의 손님으로 머무는 동안은 이 좋은 시설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편리합니다. 하지만 투숙객이 그 호텔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호텔의 소유일 뿐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에 비유된 인생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호텔이나 여관의 손님 같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우리들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로 갈 때에는 호텔의 투숙객처럼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라고 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빈손으로 가더라도 돌아갈 집이 예비 된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늘 백성들을 위해 예비한 처소는 세상의 아무리 좋은 고급 호텔보다도 더 좋은 모든 것이 예비 되어 부족함이 없는 곳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수난 당하실 것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하고 염려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 말라 내가 너희 있을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시며 위로 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은 나그네 인생길에 구세주요, 선한 목자요, 믿음직한 동행자요, 공급자요, 친구가 되어주시고, 영원한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구약 본문은 아브라함이 평생을 함께 지낸 사라의 죽음 앞에서 인간적인 정으로 슬퍼하며 애통하였으나 장지를 구하기 위해 헷 족속에게 가서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의 상속자로 인정받은 족장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나는 나그네라고 한 것은 그의 기업이 단지 이 세상에 것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1:13-16)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돌아갈 본향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하고 허무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세상 것들을 포기해야 될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고, 시간, 물질, 노력, 정성을 들여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늘 본향에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들은 이런 것들이 장래에 보화를 쌓는 것인 줄 알기에 기쁨으로 감내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돌아갈 하늘 본향에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성도의 존귀한 신분을 알고 신분에 걸맞게 구원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구약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아내의 묘실을 위해 헷 족속을 만났을 때 그들은 6절에 보면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 좋은 것을 택하여 죽은 자를 장사 하소서.”했습니다. 헷 족속이 얼마나 아브라함을 존경했으면 이렇게 말하면서 11절에 매장지 모두 그냥 다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겸손히 몸을 굽히며 댓 가를 지불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매장지로 구할 때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지만, (6,11) 정당한 값을 지불했고 당시에 매매절차가 많은 증인 앞에서 구두로 행하여 졌기에 공적 모임이 잦은 성문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확실하게 자기의 소유지로 구입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사람 보다 하나님만을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과 달리 사람의 인심은 좋다가도 후에 불리하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것을 알았기에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댓 가를 지불하고 확실한 소유지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라도 자기의 유익을 얻겠다고 아우성치는 이 땅에서 그냥 다 가질 수 있는 것도 정당한 값을 지불하는 깨끗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습니까?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앞세워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하다가 그것이 백일하에 들어나면서 질타를 받고 쫓겨나는 추한 모습을 보게 됩니까? 주님은 성도들을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셨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어떤 신분의 사람이며, 어떤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이러한 신분임을 바로 알고 행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로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신분의 사람이기에 11절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육체의 정욕은 죄악 된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쓴 요한1 2:16에 죄악 된 세상을 가리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죄악 된 정욕 혹은 본성은 때로는 물질의 욕구일 수도 있고, 성적인 욕구일 수도 있고, 권력의 욕구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여러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도만이 가져야 되는 삶이 있는데, 높아지기보다 겸손히 낮아지는 자가 되고, 섬김을 받기보다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되며,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며, 나의 유익 보다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고, 남을 비방하고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기고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선한 행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도의 존귀한 신분을 알고 그 신분에 걸맞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며 살다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늘 백성이 지닌 모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항상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기회를 붙잡고 살아갑니다.

.돌아갈 하늘 본향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성도의 존귀한 신분을 알고 신분에 걸맞게 구원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아멘.

<2023. 10. 06.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하늘 백성의 형통 39:1-6, 16:16-34

한 소년이 동산 위 무지개를 보면서 그것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말 등에 올라타고 동산 위로 올라갔으나 무지개는 저 멀리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년은 다시 산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다 위에 무지개가 떠 있었습니다. 소년은 피곤에 지쳐 울면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욕심 많은 소년의 이름은 나폴레옹으로, 그는 정말 꿈과 욕망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처절한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천하를 호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형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말년과 죽음은 한없이 외롭고 비참했습니다. 죽기 직전, 그가 남긴 말은 단 세 마디, "프랑스!, 군인!, 조세핀!"으로 인생의 허무가 담긴 아쉬운 절규였습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조국 프랑스, 그의 분신 군인, 마지막으로 그와 이혼한 처음 아내 조세핀. 천하를 호령하고 소유했던 최고의 부자 나폴레옹도 형통과는 거리가 먼, 이처럼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물질적 풍요를 누리도록 풍성히 예비해 놓으셨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바로 섬길 때 형통한 은혜를 받게 되고, 그 때 만족과 풍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늘 백성의 형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늘 백성의 형통은,

1.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창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통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되어 아무런 어려움이나 근심, 문제없이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련 중에 있는 요셉의 삶과 연관하여 사용되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요셉의 처지는 남의 집 노예입니다. 그 당시 노예는 자신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이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자로, 생사권도 주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노예인 요셉을 가리켜 본문은 형통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형통한 자라는 말 앞의 수식어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는 말입니다. 즉 형통이란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 즉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명예를 얻고,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평안한 삶 등이 아니라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을 번하다 노예로 팔려 남의 집 종살이 하면서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시련을 극복하고 형통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잘되는 것만이 형통이 아니라, 요셉처럼 하나님과 잘 통()하는 것이 형통(亨通)이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을 뚫고 나가는 것, 끝이 좋고 선을 이루는 것,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바울 일행도 복음을 전하고 귀신들린 자에게 역사하는 귀신을 좆아내 고쳐주는 일을 하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간수와 그의 가족이 복음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감옥 안에서도 형통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살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은 형통이 아니지만,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죤 길모어 목사는 어느 날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주방용품을 팔고 있는 어느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요즘 장사는 잘되시는지요?" ", 그럭저럭 잘됩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물론 믿지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지요" "그래요? 그게 뭔데요?" "그건 나를 구원해 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매사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찬양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교제하는 기쁨을 나누고,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바로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맺히고 꼬인 것들이 풀려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을 계속 보면 여주인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없노라고 유혹을 피해 달아날 때 여주인은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동료 죄수들을 돌보며 지내는 모습을 보고 22절에 보면 간수장이 옥중 죄수들을 다 요셉의 손에 맡겼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옥중에서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서 후일 그의 말대로 바로의 생일 날 복직이 된 술 맡은 관원을 통해 바로 왕이 꿈으로 번민할 때 요셉의 일이 생각나 왕에게 요셉에 대한 말을 전하여 왕 앞에 서게 되었고, 왕의 꿈을 해몽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약 애급의 총리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시어 옥중에서도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셉에게 모진 일을 했습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요셉의 죽음의 소식이 아버지에게 큰 충격이 될 줄 알면서도 아버지를 속여 가며 노예 상에게 팔아넘기고, 여주인은 자신의 집에 큰 유익을 끼치는 요셉에게 보답은커녕 감옥으로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도 복직 후 왕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잘 신원해 달라는 요셉의 부탁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려서 주신 꿈을 하나씩 이루어 가시도록 섭리 하셔서 요셉을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보면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받는 총리가 되자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의 약점을 찾다가 아무 흠을 발견하지 못하자 기간을 정하여 그 기간에는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자는 사자 굴에 넣도록 온 나라에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리게 했는데, 다니엘이 그 기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열고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을 왕에게 고발하여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 굴에서 보호해 주시므로 오히려 그를 모함하는 자들이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는데, 이 일 후 단6:28 이 다니엘이 다라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사자 굴에서도 살게 된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도 바울 일행은 어떡하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 받게 되기를 소원하면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좇아내고, 복음을 전하는데, 사람들은 그들에게 소란케 하는 자들이라고 누명을 씌워 고소하므로 당국자들에 의해 매 맞고 감옥에 갇혀 발에 차꼬로 채워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기도하고 찬미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모진 일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멘 것을 다 풀어 자유하게,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시련 중에 있을 때에도, 사람들의 모함과 배척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실 때에도 예수님은 형통하게 하시는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는 것마다 변화되었습니다. 죄인은 회개하고, 병 든 자는 치료되고, 포로 된 자는 자유케 되고, 가난한 자는 부요케 되었습니다. 귀신은 떠나가고, 관계는 회복되고, 저주의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 되게 하시어 죄와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자들이 복을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형통의 손, 치료의 손, 권능의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형통 하게 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성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맺히고 꼬인 것들이 풀어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3.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혼자서 형통한 것이 아니라 요셉 때문에 그 주인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쁘고, 보람 있고, 행복한 경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 5절에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급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신 때를 정확하게 선을 그어 구분해 놓으셨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라고 했습니다. 사실 가정이나 교회, 직장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온 다음부터 그 모임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위기가 달라지고, 여건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집니다. 이 모든 것을 형통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형통한 사람 요셉이 감옥에 가니 감옥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가 애급의 총리가 되니 후에 7년간의 기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통해 그의 부모와 형제들, 히브리 백성들이 도움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다 불러 모은 다음에 자식들 하나, 하나 이름을 부르며 예언적인 기도를 하는데, 그 때 요셉을 위해 한 기도는 창49:22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 이웃에 미치는 것처럼 그는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바울 일행은 억울하게 옥에 갇혔지만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하더니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감옥에 진동이 생기고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의 결박이 풀렸습니다. 졸고 있던 간수가 깜짝 놀라 이 광경을 보고 틀림없이 죄수들이 다 도망갔으리라 생각한 간수는 그 책임을 느끼고 자결하려는 것을 보고 바울이 급히 소리쳤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도망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노라" 간수가 등불을 가지고 뛰어 들어가 보니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너무 감격하면서도 두려워서 하는 말이,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고 물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해서 그날 밤에 간수와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8:28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이 유럽과 아시아 등지로 전해져 구원 얻는 자들이 확장되어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셉이나 바울처럼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며 주님을 본받아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자들을 통하여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사는 케리라고 하는 여성이 있었는데 간호사였습니다. 어느 날 이 케리 간호사가 근무하는 병원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아무도 이 할머니에게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케리 간호사가 이 할머니 옆에서 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옆에서 얘기도 듣고 밤에는 할머니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너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이 케리 간호사를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할머니가 케리 간호사에게 변호사를 좀 불러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할머니는 변호사를 통해 가진 돈을 기부했습니다. 캐리 간호사가 그 돈으로 케리 양로원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지금 65년 넘었는데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양로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40-46)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늘 백성의 형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늘 백성의 형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맺히고 꼬인 것들이 풀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2023. 08. 30. 호현낙선>

하나님과의 동행    창세기 5: 21-24

 

인류역사상 이 땅에서 한 평생을 살다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사람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사람은 에녹이요, 또 한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녹에 대한 말씀입니다. 에녹은 셋의 계열로써 아담의 7대 후손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계열에서 아담의 7대 후손은 라멕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생애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지만, 라멕은 정욕적인 생활을 위하여 두 아내를 두었고,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 그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가인 이후로 두 번째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417-24절에 보면 가인의 후손은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았고,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악기를 만드는 조상이 되었으며, 또 전쟁을 위하여 날카로운 각종 무기를 만드는 조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에녹과 함께하셨고, 그와 동행하셨으며, 에녹을 통하여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9백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허무한 비문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365년 동안 이 세상을 살았는데 그 중에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 나님께서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가게된 것입니다

 

에녹은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까?

 

1. 첫째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에녹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5-6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들 에게는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으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입니다

 

2. 둘째로, 하나님과의 동행은 일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역적인 동행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1445절에 보면 요나단이 불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을 때에 하나님과 동역하였다고 했습니다. 동역은 하나님이 함께 일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한사람이라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에녹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유다서 114-15절에 보면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마지막에 있을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3. 셋째로, 하나님과의 동행은 마음과 뜻과 생각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의사적인 동행입니다. 에녹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습니다. 그는 삼백년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녹을 좋아하셨고, 에녹이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더 이상 세상에 두시지 않고 그를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의 곁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며 자기 책임을 다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출처: 천국 네비게이션 원문보기 글쓴이: Gemi

 

하늘의 소망이 있는 가정   창6:13-22, 10:24-35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준비하며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주택을 갖기 위하여 열심히 돈을 모으고, 또 어떤 사람은 학자가 되기 위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훌륭한 기술자가 되기 위하여 기술을 연마하기도 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 검사가 되기 위해, 음악가가 되기 위해 주어진 분야에서 노력을 합니다. 노력의 결과로 자기가 바라는 소망을 이루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몇 십 년을 공부하다가 건강을 헤쳐서 죽는 경우도 있고, 사건 사고로 쓰러져 결과도 못 보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있고, 바라던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어떠한 일을 하든지 꼭 가져야 할 소망이 있고, 잘 준비하여 반드시 그 소망을 이루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구약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셨고, 노아는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여 홍수 심판을 이기고 그와 온 가족이 구원 받은 가정이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기도하는 고넬료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집으로 초청 하라는 말을 듣고 온 가족과 가까운 친지를 모아 은혜 받을 준비를 갖추고 베드로를 맞이하여 모인 무리들이 모두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달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늘 소망이 있는 가정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늘 소망이 있는 가정은,

 

1.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는 가정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고, 그의 가정은 믿음의 가정입니다. 방주를 만들 때 노아 혼자만의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까닭은 그 당시의 사람들의 죄악상을 보시고 한탄 하시며 물로 심판 하실 때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여 멸망시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완악하여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악을 행함으로 심판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아니한 노아와 그 가족들을 홍수 심판에서 구원 하시려고 방주를 예비하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도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실 때에도 롯의 가정을 끌어냈으며,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여 구원해 냈지만 애굽의 군사들은 수장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성민들이 죽게 될 때에도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영접한 기생 라합과 그 집에 피한 권속들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죄악의 풍조를 따라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성전을 세우시고 주의 백성들을 불러내시어 성령의 감동과 말씀의 은혜를 통해 구별된 믿음의 백성으로 살도록 이끄십니다.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녀노소,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며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신약 본문 행17:35각 나라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의미 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0:1-2에는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했습니다.

 

고넬료는 그 직업은 군인으로 계급은 백부장입니다. 군인은 신앙을 갖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시간적으로도 맞지 않을 경우가 많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상급기관의 명령이 우선순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기가 어려운 직업입니다.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 하였습니다.

 

경외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받들어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섬기는 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20:6에서는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노아의 가정처럼, 고넬료의 가정처럼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2.온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주는 작은 쪽배가 아닙니다. 노아에게 주신 설계도의 규모가 엄청납니다. 장이 300 규빗 (길이가 약 150m), 광이 50 규빗(넓이가 약25m), 고가 30 규빗 (높이가 약 15m)로 총 4300톤급의 큰 배입니다. 이 큰 배를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것이 아니라 노아에게 만들라고 지시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순종은 누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준비해야 합니다. 이 일에는 많은 경비와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노아의 가족은 방주 만드는 일에 같이 참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했지만 묵묵히 인내 하면서 함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를 짓는 것은 미래를 생각 하는 것 입니다. 홍수에서 구원의 장소는 유일하게 방주 뿐 입니다. 그래서 그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방주는 구원을 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방주를 짓는 것은 심판 때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것 입니다. 홍수가 나서 세상에서 기식이 있는 모든 것이 멸망당할 때 방주를 예비한 노아의 가정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 방주가 되시는 주님 안에 있을 때 심판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육적인 소욕을 따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가며 세상 연락을 위해 살고 있을 때, 노아와 가족들은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힘들게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알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와 그 가족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 고넬료는 정복군의 장교입니다. 그 직분을 이용해서 식민지 나라인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었고, 세상 연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자리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는 오히려 유대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는 자가 되었고, 바뿐 시간을 쪼개어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이런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10:3-5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이처럼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않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자들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과 그동안 정치 상황에 맞물려 한국 교회가 많은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때에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들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는 분이 밤늦게까지 깊은 슬픔 가운데 무거운 마음으로 한국의 안보와 타락해 가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큰 정원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정원에는 곳곳에 우람한 무화과나무들로 울창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가지들에는 큰 무화과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 무화과나무, 그리고 탐스러운 무화과 열매에 감탄하며 감상 중, 한 무화과 열매를 가까이 드려다 보고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겉은 아름다운데, 속은 아주 썪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열매들도 하나씩 보니 모두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열매들을 보며 당황하고 있는데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 섞어 문들어졌기 때문에 정원을 갈아엎고 다시 세워야한다!” 그리고는 그 꿈의 장면이 바뀌면서 그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큰 스크린을 통해 세세하고 실감나게 알려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꿈을 마음에 둘 가치가 없다고 무시해 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 하는 분을 통해 한국 교회의 현실의 모습을 알려 주시면서 저를 포함하여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에 새기고 그간 잘 못된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을 경종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따라 실천하며 사는 믿음의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3.온 가족이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가정입니다.

 

노아와 가족이 오랜 기간을 걸쳐 힘들여 만든 방주는 홍수를 피하고, 죽음을 피하고, 환난을 피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피난처가 되고,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방주의 진가가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성도의 신앙은 평소에는 그 진가를 모릅니다. 오히려 그 신앙 때문에 희생도 따르고, 비난도 따르고, 고난도 따르고, 박해도 따릅니다. 어리석어 보이고 바보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약속을 믿기에 하늘 소망을 가지고 인내 하며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갑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성도와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믿는 자들의 본이 되고 세상의 빛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살전 1:7) 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믿음을 가진 신자는 하늘의 구원과 상급과 면류관보다 이 땅에서의 영화와 권리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연락이나 영광을 더 좋아하고, 추구하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예비 하라고 하시는 방주에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주님이 예비하신 구원과 상관없이 사는 자들입니다.

 

신약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자기가 이곳에 오기까지의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넬료는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말할 때 베드로는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뿐 아니라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고넬료의 가정에 와서야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화평의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자신은 예수의 행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착한 일과 병든 자를 고치신 일과 그가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사도들을 명하사 백성들에게 전도하게 하신 것은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이가 바로 이 예수이심과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신 일에 대한 증인으로 전도하게 하셨음을 밝힌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증거할 때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자의 보내심까지 받았지만 복음을 듣지 못했음으로 성령이 임하시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을 때에 이 같은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하늘 구원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망 하며 삽니다. 온 가족이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가정의 달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늘 소망이 있는 가정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늘 소망이 있는 가정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는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가정입니다. 아멘.

♣ 가정의 에브라임(창세기 41:45-52)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양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 영어로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늘’(heaven)이라는 단어입니다.
둘째는 ‘어머니’(mother)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셋째는 ‘가정’(home)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세 단어는 그 많은 단어 가운데 너무나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단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자라납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또 가정에서 행복을 누리고 치유를 받습니다.
가정에서 새로운 가정이 태어나고, 우리는 가정에서 생명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동물과 달리 우리 인생은 오랫동안 가정에 머물면서 가정과 함께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에 누구든지 좋은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를 소원합니다.
훌륭한 자녀들을 키워서 교회와 나라와 사회에 공헌하는 그런 부모가 되고 가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에 칼빈이 “가정은 교회 안에 있는 또 하나의 가정이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가정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교회와 같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책임을 다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어떤 가정은 행복한 가정, 어떤 가정은 축복 받은 가정, 어떤 가정은 불행한 가정, 또 몹시 큰 어려움을 당하는 비극적인 가정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고 교훈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이삭과 야곱의 가정 이야기들입니다.
그 다음은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창세기는 노아의 홍수 이후 네 사람의 가정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에 오늘은 여러분에게 우리 남성의 모델이 되는 요셉과 그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구약성서 가운데 가장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을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17살 되었을 때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의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13년 후 서른 살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 동안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 성도들은 요셉과 같은 얘기를 하면 모두들 좋아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가정생활을 살펴보면 몹시 불행했습니다.
이에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가정의 아버지의 모델인 요셉은 “어떻게 가정을 축복 받게 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가정의 에브라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의 뜻은 “나로 나를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내가 수고하는 땅에서 창성한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불행하였던 그의 삶을 축복으로 바꾸었을까요?




1. 환경을 극복한 가정의 신앙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셉을 구약에 나오는 인생 중에 가장 성공하고 실수함이 없이 준수하게 가정을 꾸려나간 축복 받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요셉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거의 고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일찍이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라헬의 무덤이 이스라엘을 가던 도중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요셉은 그 꿈과 비전, 그리고 아버지의 편애로 인하여 형제들에게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요셉이 형제들 가운데 왕따를 당한 것입니다.



한편 요셉의 아버지 야곱을 가만히 보면 그는 훌륭하였지만 그의 가정생활은 몹시 문란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의 복잡한 가정생활을 잊어버리고 절대로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처음 라헬을 사랑했는데 레아라는 라헬의 언니가 먼저 잠자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아들이 여섯이 있고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7년 동안 고생한 후에 사랑하는 사람 라헬을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라헬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그 다음은 야곱이 또 실수를 하여 라헬의 몸종인 빌하와 관계를 맺어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다음은 레아의 몸종인 실바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습니다.
그래서 열두 아들이 되어서 나중에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에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받아 17세 때 애굽에 팔리우게 된 것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요셉의 옷에다가 수염소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에게 거짓말로 악한 짐승에게 당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아버지의 복잡한 가정관계, 그리고 형제들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 가운데 자라게 되면서 몹시 고독했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르우벤이라는 맏형이 빌하라는 라헬의 몸종과 간통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부끄러운 것도 다 기록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범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축복할 때에 르우벤에게는 축복을 하지 않습니다.
큰 잘못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셉의 가정은 얼마나 복잡하고 뒤숭숭하겠습니까?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이나 형제들간의 우애라든지 이것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17살 되었을 때 애굽의 몸종으로 팔려 가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애굽 땅에서도 불의 한 대접을 받고 거짓증거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환경, 즉 어떤 환경에서도 그가 가졌던 꿈과 비전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은 자기가 가진 꿈과 비전을 실현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핸디캡들이 요셉을 방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요셉의 결혼생활을 가만히 보면 요셉은 한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그의 아내는 잡신을 섬기는 제사장의 딸입니다. 애굽의 여자입니다.
독실한 이스라엘의 후손인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하는 것, 종교면이나 신령한 면에서 이 여인과 얼마나 많이 부딪쳤겠습니까?
요셉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겠습니까?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 번도 자신의 아내 아스낫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이방신의 영향을 받지 안 했습니다.
요셉은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킴으로 자녀들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히브리말의 이름을 붙여 주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고아와 같았습니다. 고독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17살에 애굽 땅에 팔려 가는 아주 불행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안 계시고 일찍 여의었지만 그의 하나님 이 어머니를 대신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있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하나님이 아버지를 대신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 5월을 맞을 때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를 갖춘 행복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교회 안에서 바르게 할 때에 어머니가 안 계신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대신해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통해서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아버지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대신해서 돌보아 주십니다.
바로 에브라임의 가정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로 나를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내가 수고하는 땅에서 창성한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인 것입니다.




2. 가정의 시련을 이겨낸 인내와 관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이 없는 가정은 한 가정도 없습니다. 고통이 없는 가정도 한 가정도 없습니다.
저 가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행복하겠지 하고 생각하겠지만 상담을 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들이 원수와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이러한 가족사를 담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애굽 땅에 와서는 그의 준수한 외모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에게 매일같이 동침하자고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가정 총무로 보디발 가정의 모든 것은 관여할 수 있지만 보디발의 아내만은 내가 다스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요셉은 “요셉이 나를 겁탈하려고 하다가 이 옷을 벗어놓고 도망을 갔다.”는 보디발 아내의 거짓 송사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요셉이 한 말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게 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그렇다면 이러한 요셉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1-23)


하나님만을 섬기고 모든 환경의 유혹과 시련을 다 극복하고 뿌리치고 정조를 지키고 지조를 지키고 그 꿈을 향해서 비전을 향해서 가는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 이후의 삶 또한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애굽의 여자 아스낫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 이름이 주는 의미가 우리에게 새롭습니다.
첫째의 이름이 ‘므낫세’입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 온 집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복잡한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오늘 본문의 제목인 ‘에브라임’이라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요셉이 지조가 있는 신앙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갔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죽은 후 근심하며 걱정하는 그 형제들을 향한 요셉의 간곡한 말속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이렇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고, 참고, 지조를 지키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는 악이 변하여 선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통의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에브라임의 축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우리의 가정에서 가족 사이의 억울한 일, 가족사이에 이해 못할 일들 때문에 정말 원수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요셉과 같이 다 잊어버려서 므낫세의 축복을 얻게 되시길 바랍니다.
참아야 됩니다. 관용을 가져야 됩니다.
고난이 여러분에게 현실적이고 사실인 것 같이 하나님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에 이 고난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악한 것이 변해서 선으로 므낫세의 축복이 임하게 되고, 에브라임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3. 축복의 가정을 만드는 자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가정에 축복의 자원은 무엇일까요?
가정생활이라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혼식을 보면 너무나 행복해서 신부가 신랑의 팔을 끼고 함께 걸어가지만 일생동안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고난과 시련이 우리에게 닥치는데 이것이 일생동안입니다.
죽을 때까지입니다.
마지막에 죽는 순간까지 가정의 멍에를 짊어지고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한마디로 문제없는 가정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어떤 사람은 자포자기해서 쉽게 낙심하고 아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결정입니다.
최근 미국에서 발간된 잡지 가운데 결혼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새로 결혼한 가정에서 이혼하는 비율 이 미국사회의 50%라고 합니다.
두 번째 결혼에서 이혼하는 비율이 64%이고, 세 번째 결혼에서 이혼 비율이 76%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구사회의 문화이지만 이것은 배워서는 안됩니다.
아내는 베드로 3장 7절의 말씀처럼 연약한 그릇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을 나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혹 약한 것도 있고, 부족한 것도 있으며, 성경에 맞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에게 하나님께서 선물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에 존중히 여기게 되고, 귀히 여길 수가 있으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에브라임의 축복을 누리게 하는 것을 믿게 될 때에 우리는 참고 견딜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자포자기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는 이 기초가 믿음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은 돈 많은 사람들끼리 결혼하지만 얼마 못가서 깨지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물질이 그 가정의 기초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권세 있는 사람들끼리 수 천명이 모여서 결혼해도 얼마 못 가서 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을 평안하게 살수가 없도록 무거운 멍에를 지게 하는 것이 가정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앙의 기초 있는 가정이 될 때에 그 가정은 에브라임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자원을 가지고서는 절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요셉이 에브라임의 축복을 받은 것은 신앙의 자원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결코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행복한 가정도 족보도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의 신앙에 근거가 되었을 때 불행한 요셉은 에브라임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나는 불행한 가정환경 가운데 살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셉도 둘째 부인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요셉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고난을 받은 수고의 땅에서 어렵게 지냈지만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므낫세의 축복과 그 모든 고난과 어려움이 변해서 창대케 하는 에브라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함께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39장 강해)

들어가는 말

창세기 39장은 유다 이야기에서 요셉 이야기로 다시 바뀝니다. 앞으로 몇 장에 걸쳐서 요셉이 중심인물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요셉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셉의 시련이 머리로는 인식되지만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도 요셉이 당한 어려움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당한 어려움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가 당한 어려움 보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시련 속에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시련으로 그의 꿈이 멈출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을 계속 진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요셉 자신의 개인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는 가운데 요셉의 신앙도 성장하게 됩니다. 요셉은 시련 속에서도 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이유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면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한 인간의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 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 시련 속에서 요셉의 신앙을 더욱 튼튼히 세워 가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39장에서 우리는 요셉과 함께 하신 여호와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과 함께하신 여호와(1-6a).

2.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 당하는 요셉(6b-19).

3. 감옥에서 요셉과 함께하신 여호와(20-23)

 

1.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과 함께하신 여호와(1-6a)

요셉은 형들이 그를 팔아 노예 신세가 되어 이집트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보디발이 이스마엘 사람에게서 요셉을 샀습니다. 보디발은 이집트 바로의 신하이며 경호대장이었습니다. 야곱에게서 맏아들처럼 사랑을 받았던 요셉이 비참한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왕자처럼 살다가 완전히 거지보다 못한 천한 신분으로 전락합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형들로부터 배신당한 깊은 상처를 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요셉은 깊은 수렁에 떨어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인생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내용을 자세히 말해 줍니다.

 

첫째,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어 보디발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간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함께 하신 증거입니다.

둘째,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신 것을 주인이 알 수 있도록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주인이 볼 정도로만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셋째, 주인은 요셉이 마음에 들었고 요셉을 총무로 삼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을 눈으로 본 주인은 요셉이 마음에 들었고 그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집안일과 재산 모두를 맡기고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인의 마음을 움직여 요셉을 총무로 삼은 것입니다.

넷째, 요셉이 총무가 된 이후로 여호와께서 주인의 집에 복을 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보디발의 집안 일이 잘되고 재산이 날로 늘어났습니다. 주인은 요셉에게 자기의 먹을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을 맡기고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집안의 안주인을 빼고 2인자가 된 셈입니다.

 

요셉이 절망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보여 주였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안에 총무가 되고 그 집안에 재산이 늘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이나 시련에 빠질 때 절망에 빠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삶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형들은 요셉을 버렸고 부모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을 바로의 측근 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곳에서 복을 주어 인정을 받게 하고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게 한 것이 아니라 집 안 일을 모두 도맡은 총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기 전에 미리 한 집안의 총무를 삼아 훈련시키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현재 우리의 일과 미래의 일이 서로 연속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미래에 자신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이 별 의미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훈련이고 앞으로 사용하실 도구가 될 것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성실히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갑시다.

 

2.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 당하는 요셉(6b-19)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습니다. 매우 멋지고 잘 생겼습니다. 일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집의 안주인이 요셉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유혹을 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주인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겼지만 마님만은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악한 일이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안주인은 날마다 요셉에게 잠자리를 요구했습니다. 요셉은 안주인의 계속된 요구에 시달려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할 일이 있어서 집안에 들어갔는데 마침 모두 나가고 요셉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 안주인은 요셉의 옷을 붙잡고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요셉은 붙잡힌 옷을 남겨둔 채 집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이것을 본 안주인은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잘못된 사랑이 분노로 바뀐 것입니다. 안주인은 사람들을 불러서 요셉이 자신을 희롱하고 잠자리를 같이하자고 하기에 자신이 소리를 크게 질렀더니 그의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소란을 피우면서 꾸며댔습니다. 자신의 욕정을 채울 수 없어서 일을 크게 만들어 요셉을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요셉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주인이 도착하자 여인은 흥분하여 주인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자신의 남편을 또 속인 것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안주인은 요셉을 성폭행범으로 몰았고 주인은 그것도 모르고 요셉에게 분노를 떠뜨렸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채색옷이 벗겨지는 아픔에서 겨우 벗어날 만한 때, 다시 옷이 벗겨지는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이제 처참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말과 행동 속에 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안주인의 유혹에도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알고 그 도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안주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그의 삶 속에서 더욱 충만하게 함께 하시도록 은혜를 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실 때 그는 유혹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도 원수의 유혹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요셉의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좋은 모범이 됩니다. 또한 누구 때문에 죄를 끊어야 하는지 말해 줍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진정한 복은 우리가 잘 살고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계속된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3. 감옥에서 요셉과 함께하신 여호와(20-23)

안주인의 모함으로 요셉은 주인에게 잡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요셉은 또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고 그는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감옥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요셉은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노예가 주인의 아내를 성폭행하려고 하다가 잡혔으니 당연히 죽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는 정도로 마무리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요셉이 평소에 신실했기 때문에 보디발은 아내의 말보다 요셉을 더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감옥에 보는 것으로 선처를 보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간 곳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으려다 감옥에 가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처럼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살고 아무런 문제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은 많은 고난이 뒤따라옵니다. 하지만 복이 있는 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0-12)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벧전 3:17).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맙시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자신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여호와께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요셉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요셉을 간수장의 마음에 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맡겼습니다. 요셉에게 감옥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혼자 처리하게 했습니다.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 처럼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그는 감옥에서 총무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일에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습니다.

 

나가는 말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으로 잡혀 간 것을 보고 무척 당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꿈을 꾼 자가 고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난으로 꿈이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이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갔을 때 그의 꿈이 끝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를 총무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안주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그의 꿈은 좌절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도 하나님께 함께 하셔서 그를 감옥의 충무로 세우셨습니다. 장소만 바뀌었지만 요셉이 하는 일은 같았습니다. ‘다스리는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꿈이 서서히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점점 이집트 바로를 만날 기회에 접근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교훈합니까? 첫째,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무능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요셉 형들의 잔인함과 보디발 아내의 모함이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죄악이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하심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무도 폐할 수 없고 그분의 지혜는 아무도 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있고 그분은 만유를 다스리십니다.

 

둘째,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름답게 빚으시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그의 백성이 정금같이 나올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붙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자기 백성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 더욱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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