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3~21)

 

오늘은 부활절 이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신앙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부활신앙을 간직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중의 핵심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지냈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믿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직접 목격한 후에야 비로서 믿는 자들이 되었고, 믿음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아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부활절 이후에도 확고한 부활 신앙을 드러내고 부활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회복의 능력, 이기게 하시는 능력, 담대하게 하시는 능력, 순종하게 하시는 능력, 이루 다 셀 수가 없는 능력이 부활을 믿는 자에게 날마다 공급 되어 집니다.

 

이런 능력을 공급받은 우리는 부활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늘 염두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라는 물음에 한 단어만 이야기한다면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는 내 앞에서 온전하여 거룩하게 행하라라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거룩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에 믿음이 준비됨 없이 몸만 나와서 의무적으로 희생 제사(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마당만 밝는 사람들(1:12)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당 공간에만 왔다 갔다 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보좌 앞)까지 반드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까지 나아가려면 반드시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 거룩함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고 믿음을 소유하려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라는 찬양도 지난주에 불렀습니다.

 

죽음에서 삼일만에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믿고 매일 같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 이것이 부활 신앙을 경험한 사람들이 행하여야 할 삶의 핵심 과제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습관이 거룩입니다.

 

오늘 본문 위에 제목이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되어 있고,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4월 한달 동안은 부활절 이후 우리의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 함께 거룩이라는 주제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읽어 드립니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아멘.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살리셔서 우리 모두에게 산소망이 있게 하셨고,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말을 한 후에, 13절에서 그러므로 (산 소망과 믿음이 있는)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재림) 때 주실 은혜(영생의 면류관)를 바라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주실 은혜를 바라며 기다리는 자세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허리를 동여매는 이 자세가 무엇을 할 때의 자세인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고 체험한 자들이 산 소망과 믿음의 선물(은혜)를 가볍게 여기거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거나 다시 세상의 즐거움과 유익을 쫒아가 버리는 어리석음을 선택하지 않도록 경계심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채우기는 어려운데 까먹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한 후에 베드로 사도는 15절 하반부에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권면을 하였습니다. 이 말이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진짜로 하고 싶은 권면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있어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는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한 권면의 제목이었을까? 그것은 거룩은 곧 하나님 과의 만남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거룩함으로 항상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모든 곳은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반드시 우리의 몸과 마음과 행실이 온전하게 거룩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는 절대 거룩하지 않으며, 거룩해 질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 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우리의 모든 말, 생각, 행동, 마음구석 구석의 삶의 전 영역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이 충만함을 항상 구하라는 뜻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 있으라는 뜻과고 동일합니다.

 

바지의 허리띠는 밖에 나갈 때는 동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풀어 버리지만, 마음의 띠는 한 번 동이면 계속해서 조임만 있을 뿐 절대로 풀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마음의 띠가 풀리는 순간 우리의 거룩함은 언제 든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 14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과거로부터 몸에 베어 있는 사욕(욕심, 욕망) 때문입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을 억제 시키지 못하면 거룩함이 있어야 할 자리가 욕심 덩어리로 가득찹니다. 마음에 욕심이 차고 넘치는데 긴장감 있는 신앙생활이 될 리가 없습니다. 사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또 하나의 관건입니다.

 

부활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긴장이 유지되어야 하는지 베드로 사도가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이것이 부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삶의 자세여야 합니다.

 

16~19절 말씀입니다.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아멘.

 

 

1.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유념해야 할것 동행, 항상 함께를 추구

 

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나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하나면 다른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거룩하신 아버지(부모)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 몸과 옷에서 악취가 난다면 누구라도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하겠죠. 하나님도 죄와 악에 빠져 영적으로 불결하고 정결하지 못한 자들과는 절대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녀들만이 하나님 보좌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과 항상 함께하고 싶다면 거룩, 또 거룩해야 합니다.

 

부활절 이후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항상 하나님 곁에서 함께 지내겠다는 다짐도 했고, 그러한 소망도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게 하시려면 거룩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라는 말씀이 마음 판에 지워지지 않도록 각인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모든 행실에 거룩한자로 살아기를 원하고 바라신다면 항상 몸과,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에 주의하고 또 주의하여야 합니다. 내 스스로 힘써서 거룩함을 지켜 갈수 없음을 빨리 인정하고 성령님에게 보호를 요청하여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죄와 악으로 더러워졌다면 즉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기대어 진심으로 참회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주의하고, 인정하고, 참회하고, 돌이키면,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방향을 잘 잡으신 겁니다. 이런 생활을 반복적으로 실천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이 부활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되어야 하고,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왜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갈급함이 없을까? 내가 거룩함보다 세상의 것을 선택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전혀 작동되 않을까? 내가 더 이상 거룩함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느끼지 못할까? 내가 지니고 있던 거룩함을 소모하고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 곁에 가까이 머물기를 원하십니까?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항상 함께 생활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분들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려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오직 거룩함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2.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유념해야 할것 나그네길, 행위대로 심판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마지막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종말의식, 심판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종말론적 긴장감이라고 표현합니다.

 

17절에서 처럼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심판의 때를 두려움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삶이 심판을 인식하는 삶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평가는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결정됩니다. 우리 모두는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온 모든 행위들을 직고(바른대로 알리다, inform truthfully)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다가 그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멸망뿐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각자가 행한 일들이 벌거벗은 것같이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고 심판 받는다는 사실을 그다지 두렵게 인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두려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7절 후반부에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우리의 한정된 인생의 시간을 의미하고,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은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두려워 하며, 의식하며, 인식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범죄 검거율이 유독 높고 빠른 것은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 되어 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4시간 켜져 있는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까지도 다 기억하시고 언제든지 그 장면들을 생방송 하듯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소름끼치도록 두렵습니다. 진짜로 두렵다고 실감이 되시나요?

 

내가 만약 겉으로는 모범적으로 살고있는 것처럽 보이지만 실제로는 음란과 거짓과 폭력을 저지르는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나의 숨겨진 일상들이 광화문 광장 홍보용 전광판에 라이브로 생중계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속용 카메라에 찍혀 한 건에 1000만원씩 과태료 고지서가 온다면 과속이나 신호 위반에 무감각 하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나쁜 짓 못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삶을 언제든지 생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실 때가 곧 심판대 앞에 서는 날입니다. 이제는 좀 무서우신가요? 정말 진지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심판을 생각한다면, 나그네 같은 짧은 우리 인생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될 것입니다.

 

정말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고 꽉 붙들고 살아가려고 치열하게 몸부림 칠 것이고,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나그네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룩하지 못한 더럽고 냄새나는 추악한 행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겸비한 자세를 취하려고 무단히도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부활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 이름을 붙잡는 치열함, 죄를 버리고 거룩함을 취하는 남다른 겸비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살아가라는 권면으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3.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유념해야 할것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대속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으면 거룩한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을 위해서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 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았다는 은혜, 이 은혜가 계속해서 은혜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입니다.

 

보배로은 피 흘리심을 일평생 감사로 영광 돌려도 부족한데, 점점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이미 확보된 내 물건처럼 여긴다거나, 더 이상 어떤 감동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로 방치한다면 참으로 본회퍼 목사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값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자가 되는 시작, 과정, 결말에는 보배로운 피 흘리심의 대속함이 중심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고백하며, 항상 감사하며, 항상 겸손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태도가 거룩함의 기본이자 출발점이 됩니다. 대속함의 은혜를 매일 고백 하시고 매일 감사하십시오. 그런 일상의 반복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권하는 마지막 말씀을 보겠습니다. 20-21절입니다.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아멘.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말미암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영광을 주시는 분임을 굳게 믿고, 그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 믿음과 소망이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 집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 하나씩 유념하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 잊어 버리고, 다 실천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워 언행에 겸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이름 붙들고 살아가는 것에 최선을 다한 다면 우리는 무조건 거룩함으로 덧입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과거에 지었던 죄 때문에 묶여있지 않아도 됩니다. 현재의 문제와 상황 때문에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그네 인생길에 대한 허무함과 미래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여졌다는 사실만 단단하게 붙잡고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 이름만이 능력임을 명심하시고 살아가시면 됩니다.

 

제발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마시고, 상황의 좋고 나쁨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거짓말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들을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예수 이름이면 죽음도 우리를 막아설 수 없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고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과 소망을 지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이후 우리 모두의 삶이 거룩, 거룩, 오직 거룩함만이 충만하여져서 친구 되시는 우리 예수님과 천국 길로 동행하는 기쁨의 날들로 채워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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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과 소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죄와 악에서 보전하여 주셔서,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산 소망이요 믿음의 주인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죄인이 어디에 서리요 (벧전 4 12~19)

 

 

부활절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이번 달 암송 말씀,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16;33)라는 말씀 속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합니다물론 승리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환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지만환난 그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8:17), “은혜를 주신 것은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 1:29),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는 말씀 들이 있습니다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단어는 인생 곳곳에 지뢰밭처럼 무수히 깔려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승리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환난과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다고 해서과연 현실 적인 고난을 즐기면서 이겨 낼 수 있을까요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으며특히 아시아에서 얼마나 심한 고난을 당했는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후 1:8)는 표현까지 했습니다믿음의 대 선배인 사도 바울 조차도 고난이라는 육체의 고통 앞에서는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난이라는 장벽을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우리 주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후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알기에우리는 고난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신약 성경 중에서 ‘고난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복음서 전체 속에 ‘고난이라는 단어가 13번 나오는데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고린도전후서 에서만 15번의 ‘고난의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제외하고 계산해 보면 베드로전후서에 나오는 ‘고난의 분량이 무려 30%나 차지 합니다그만큼 베드로전후서는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위로하고격려하고소망을 가지고 참아내며 승리하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절 전이든부활절 이후 이든 우리의 삶은 항상 크고 작은 고민과 고난과 고통과 고역이 반복되고 있습니다매일 같이 고난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가 위로가 되고 능력이 되어환난을 이기게 하시는 승리하신 우리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날마다 역사하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자세에 대해 세 가지 고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첫째 고난이 나오는 12,13절을 읽어 드립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아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고난이 우리 자신을 연단하려는 불 시험이라고 말합니다불 시험 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이곳과 요한계시록 두 곳 등 총 세 곳에서만 언급되었습니다요한 계시록에서는,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는 재앙들을 불 사른다고 하였고또한 바벨론이 불에 타는 연기를 보고 “저렇게 큰 도시가 또 어디 있겠는가!” 라고 소리칠 것이라고 했습니다이때 나오는불사른다불에 탄다라는 말이불 시험과 같은 단어입니다.

 

심판과 멸망을 상징하는 불 시험이라는 단어가 연단이라는 뜻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뜨거운 불 속에서 쇳덩이가 제련되어 강한 금속으로 변화 되는 것처럼우리의 신앙 또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안에서 달구어지고 제련되어서 고난을 이겨내는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불시험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불 시험이 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고난이 찾아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낙심과 절망의 마음 일 텐데이미 예견 되었다는 듯이 그 고난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당당히 맞서 싸우라고 하는 권면입니다아무리 그렇다고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고난에 대해서 이상히 여기지 않고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대해 취해야 할 진정한 자세와 태도임을 분명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의 뒤를 이은 교회 지도자들을 ‘속사도(續使徒, Apostolic Fathers)’라고 불렀습니다속사도는사도들에게 개인적인 가르침과 영향을 받은 직속 제자라는 의미입니다.

 

속사도 중에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던 ‘이그나티우스라는 분이 있습니다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은 베드로 사도로 알려져 있고베드로에 이어 두 번째 감독이 바로 이그나티우스입니다그는 베드로와 바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과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자기 스스로을 가리켜 “()오포로스라고 했는데이 뜻은 ‘하나님을 지고 가는 자(bearer of God)’ 라는 뜻인데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자기 애 적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나타내기 위한 호칭이었습니다그는 박해가 심했던 트라얀 황제 시대인 주후 108년쯤에 순교한 것으로 추정 됩니다.

 

당시 교회에 대한 핍박이 날로 심해졌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순교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순교 당하기를 기뻐했습니다그러자 압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을 보고교회 지도자들을 잡아다가 죽이지는 않고가둬 두거나조롱하거나창피를 주는 방식으로 교회를 탄압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도 박해자들에게 붙잡혀서 일시에 죽임 당하지 않고 안디옥에서부터 로마까지 압송하 되었는데직행으로 로마에 간 것이 아니라 압송 되는 동안 수 많은 항구와 도시를 걸쳐 순회 하면서 이송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을 돌아다닌 이유는이그나티우스가 제풀에 지쳐 순교하려는 열의가 식게 만들고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들을 공포와 절망감으로 몰아가서 교회들이 스스로 몰락해 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압송되는 동안 이그나티우수는 일곱 통의 편지를 써서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그 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모든 교회들에게 쓰노니반드시 명심하라나는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죽을 것이다너희는 방해하지 말라내가 너희에게 간곡히 청하노니나에게 적절하지 않는 호의를 베풀려고 하지 말라그냥 짐승들의 밥이 되도록 놓아두어라그 일을 통해 나는 하나님에게 이르게 될 것이다나는 하나님의 밀알이다그러니짐승들의 이빨이 나를 가루로 부수어그리스도의 순전한 빵이 되도록 하라!

     형제들이여부탁 하건데나를 살리려고 하지 마시오내가 죽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지 마시오나는 하나님께 속하기를 바라니나를 세상에 넘겨주지 마시오내가 순전한 빛을 받게 해주시오그러면내가 그곳에 도달했을 때나는 실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오내가 나의 하나님의 고통을 본받는 자가 되도록 허락해 주시오!

 

이런 결사각오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남긴 이그나티우스는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들에 의해서 몸이 찢겨진 채로 순교 당하셨습니다이렇게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한 역사를 살펴 볼 때과연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 이며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고난에 대해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숙연하게 만듭니다.

 

고난으로 다가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참으로 우리 마음을 심란 하게 하고부담 가게하고숨고 싶게 만드는 말씀입니다누구도 했으니 너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13절 후반부에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이것이 고난을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고난 다음에는 반드시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십자가 고난 부활 영광이 있었다는 것은십자가 없이는 부활도영광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내 스스로에게과연 나는 고난을 맞이하여 맞싸움을 벌일 영적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순교자들의 정신에는 고난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그들은 오직 하늘 영광 하나만을 바라보며 최고 난이도의 고난인 죽음의 길을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부활절 이후 우리의 삶은 예전 보다 달라져야 하고 나아져야 합니다특히 환난과 고난문제와 상황 앞에 섰을 때 마음가짐과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생각 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8:18) 사도 바울이 일평생 붙들고 살았던 이 말씀을 우리도 붙들고 고난의 지뢰밭인 인생길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더 이상 닥쳐올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고어떤 고난 앞에서도 걸려 넘어지지 마시고주실 영광받을 영광만을 바라보며 환난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앞세워 불 시험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고난이 나오는 14~16절을 읽어 드립니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앞에서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시더니여기에서는 치욕을 당하면 복있는 자라고 하였고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치욕과 고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다가 당하는 치욕과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14절에 후반부에, “하나님의 영곧 성령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위로와 격려와 능력을 한 없이 부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이든치욕이든 다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성령의 능력이 입혀지면 죽음(순교)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순교 역사에서 얼마든지 증명이 되었습니다.

 

1951년에 제작된 ‘쿠오바디스라는 오래된 기독교 고전 영화가 있습니다폴란드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장편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입니다영화에서는 당시 로마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며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에서 기독교인들을 짐승들에 의해 죽임 당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이때 경기장 안으로 끌려가던 무리들 중에 한 여인이 아이를 품고 이렇게 말합니다. “애야담대 하자고통은 그리 길지 않다금방 끝난다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금방 짐승에게 몸이 산 채로 찢겨질 상황에서도 금방 끝 난다라고 말하는 담대함이 소름끼치도록 놀랍습니다그들에게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셨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습니다이 영화에서 베드로도 등장하여 로마 황제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베드로 사도의 외침도 네로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외경인 ‘베드로 행전이라는 책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네로에게 죽임 당할 것을 염려한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피신할 것을 권고하자 베드로는 로마를 빠져 나갑니다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너무 당환한 베드로가 “주여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 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나의 양들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고 하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간다베니오 로맘 이떼룸 끄루치피지(Venio Romam iterum crucifigi)라고 말씀 하십니다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크게 참회하고 곧 바로 로마로 돌아가 성도들과 함께 지내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채로 순교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이후에부활 신앙으로 무장한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피 흘림의 순교가 너무나 많았습니다기독교 역사는 피의 역사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죽음과 맞서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그 이름을 지킨 순교자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영곧 성령이 그들 위에 함께 하셨습니다역속하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 중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죽음까지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순교자들의 기록이 있는 반면에, 15절을 보면살인도둑질악행남을 간섭하는 일로 고난당하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과 비난을 받는 패 악질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죽어도 영광 받을 고난이요악행 하는 자는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릴지라도 멸망당할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성령이 함께하여 고난을 참아내지는 못할망정악행을 저질러 화를 자초하는 고난을 일으키는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그런 자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계속해서 못 박는 자들입니다.

 

영광 받을 고난을 당하는 자들명망 당할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둘 중에 우리는 당연히 영광의 고난에 속한 자들입니다죄와 악으로 고난당하기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에서 속히 벗어나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 받는 영광의 고난에 즐거움으로 참여해야 합니다부활절 이후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합니다.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생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우리에게 고난이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한다면모든 것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심도 잊지 마십시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일평생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고난을 스스로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믿음을 지켜 가기 위해 닥쳐오는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 낼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고난이 나오는 17~19절을 읽어 드립니다.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아멘.

 

마지막 심판 때에 고난에 대해 반드시 평가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마지막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내가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모두 다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18절을 보십시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의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겨우 겨우 구원 받는 다면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들 이라고 하는 사람들즉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정말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믿음에 대해서의에 대해서 겨우 내 앞가림 정도만 한 다면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여지가 있겠느냐는 말씀이며또한 내가 먼저 믿은 자로서 겨우 기본 적인 것도 해내기 힘들게 신앙생활을 이어 나간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보고 예수 믿고 변화 받고 열매 맺으며 고난을 이겨가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비유하자면어린아이가 어른을 인도할 수 없고맹인이 어찌 다른 사람의 길 안내자가 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생각하면 할수록 참 현실적인 말씀이고연약한 내 신앙생활을 반성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18절이 오늘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려지는 우리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19절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9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기십시오.” 아멘.

 

이 말씀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특히 믿음을 지켜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은 의무이지 필수이다 라는 것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그 고난들이 내 삶을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선한 일즉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면서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맡기며 살아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어짜증나 못살아 내가 미치겠네얻다 대고 그 따위 말을 해죽어도 용서 못해에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남들 다 하는데 뭐저 웬수 덩어리 다리나 부러져 버려라돈도 없고 못 배운 것들이 어디 무식하게....” 이런 말들을 익숙하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이런 삶이 반복되는데도 겨우 구원 받는 다는 것도 참으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와 저 사람은 진짜 한결같아아이고 저 사람 하는 거 봐봐 딱 봐도 예수 믿는 사람이네아니 그 어려운 일 당하고도 어쩌면 저렇게 담대할 수 있지말 한마디 한 마디가 어쩜 저리 천사 표야이야 저 얼굴 좀 봐봐 빛이 나내 빛이 나 그냥 예수네 예수” 삶의 현장에서 이런 말들을 들을 수 있다면 고난 중에도 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아닐까요?

 

예수님이 십자가 길을 가지 않았다면 부활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모습을 삶에서 보여주지 못한 다면누가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겠습니까우리가 고난 가운데에서도 영광을 바라보며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매일 분노와 저주와 악행 속에 살아간다면 누가 예수님 믿기로 마음을 돌리겠습니까?

 

하나님은 물론 이거니와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많은 이웃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내게 고난이 있을 지라도 영광을 바라보며 성령님과 동행 하는 가운데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기셨듯이 우리도 이길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고 선포하셨기에 우리는 환난과 고난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우리 00교회 모든 성도에게는 승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영생의 권세가 있음에 항상 자부심을 느끼시고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이제 남은 인생의 기간 중에 어떤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예수 이름으로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고다 이겨 내셔서 반드시 승리의 길로 나아가십시오우리는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모두 다 완벽한 승리의 주인공이 되게 하실 줄로 굳게 믿습니다.

 

부활절 이후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믿음과 소망을 품고 더욱더 삶의 자리에서 내 믿음을 지켜 가는데 최선을 다하시고의인의 호칭을 주신 것에 합당하게 거뜬하고 넉넉하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구원 받은 자녀들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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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죄인이 어디에 서리요이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태도가 담대하여지도록 역사하여 주시고오직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붙잡고 천국을 향하여 인내하며 끝까지 이기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베드로전서1:18-21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관 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전도하는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복음입니다. 성경을 다른 책과 다르게 복음이라고 하며 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말씀이 각 장 마다, 각 구절마다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피가 없이는 살 수 없고, 핏기가 없다는 것 자체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 하느니라](7:1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가지 사람은 흙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으며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여 영과 육이 죽게 되자, 모든 육체는 타락한 피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담을 조상으로 한 혈통으로 지은 바 된 모든 인류는,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범죄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 담의 피를 받지 아니한 죄 없는 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피를 받지 아니하고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에게 마다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를 위해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죄를 덮어주는 피 입니다.

 

성경은 일찍이 구약으로부터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7장에는 성막 안의 단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예배 장소로써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시면서 성막의 모든 기구와 위치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 중 단은 성막 문으로 들어가서 제일 첫 번째로 대하게 되는 장소로써, 동물의 피를 흘려 제물로 드리는 곳입니다. 단은 동물을 학살하는 곳입니다. 동물을 죽여서 드리는 번제 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용서를 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드렸던 곳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께서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어린양으로써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것을 예표 합니다.

번제 단은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쓸모없는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제단을 만드니 하나님께 번제물을 드리는 거룩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조각목은 버림을 받은 인간을 뜻하고 놋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는 조각목 같이 쓸모없고 불에 타 없어 질 존재로 된 인간들의 죄를 가리워 주는 것입니다.

죄를 덮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러운 것들을 들추어 내지 않고 가리 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가리 울 뿐 아니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85:2)이라고 노래했으며, 야고보 선생은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5:20)이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지어 입은 아담과 하와에게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 우고 덮어주실 것을 말해 주는 사건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예수님의 보혈이 죄를 가리 움으로 사망에서 구원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버림받은 인간도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덮여질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죄를 용서하고 깨끗케 하는 피 입니다.

 

베드로 전서 12절을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피를 뿌려 깨끗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은 본래 거룩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피로 인하여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고 죄가 도말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용서받은 의인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 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 일1: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성막 안, 번제단에서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려는 의식이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기 위하여 죄 없는 양과 소가 피 흘려 죽어갔습니다. 죄는 이렇게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속전으로 양과 소는 최고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흘림의 사랑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마땅히 죄 버리고 죄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3.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는 피 입니다.

 

죄 지은 아담의 피를 이어 받은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가 없기 때문에 그 분은 죽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 없는 피며, 죄가 없기 때문에 썩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부패를 초래하지만 죄가 없는 곳에는 부패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이 지금 우리에게도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다윗은 그러므로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 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번제단에는 네 개의 뿔이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뿔을 의미합니다. 열왕기상을 읽다보면, 솔로몬을 반역 한 아도니야가 도망가 제단 뿔을 잡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당시 반역자는 사형이었으나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잡고 살려 주기를 구했을 때, 솔로몬은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여기서 제단 뿔은 생명의 뿔을 상징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뿔"이라고 찬양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대신 흘리신 피 이기 때문에 그 피를 믿고 그 피 앞에 나아간 사람은 모두 구원을 얻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죽음에서 생명을 주는 피인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임한 하나님의 진노 중 마지막 것은 애굽 각 가정의 장자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서운 심판으로 인하여 바로는 결국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이 재앙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 피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나 선행, 율법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는 생명과 영생을 주는 피 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수없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들의 선행이나 율법으로 구원받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찬양하고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는 찬양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을 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림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십자가 구원의 은혜도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또한 믿음의 삶은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욱 귀한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내 예수님과 칭찬과 영광을 돌리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성공한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2)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 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면 두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고, 병마를 이기고, 귀신을 쫒아 내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싸움의 무기는, 삶의 능력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3)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사랑의 본을 보이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의 삶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삶은 전도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평생을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사셨듯이, 제자들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생명을 버렸듯이, 우리도 복음 전파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곧 사랑의 삶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 -25)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고 썩고 부 패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쁜 소식, 즉 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와 그로인 하여 여러분에게 전하여진 기쁜 소식을 생각하고 기념하면서 한없는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벧전 5:6-9)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이 시간에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세상 사는 동안 얼마나 시험이 많고 위험하면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을까요?


강우석 감독이 만든 대한민국 범죄영화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부모도 이웃도 비정하게 살해해 버리는 살인범을 끈덕지게 추적해서 때려잡는 어느 끈질긴 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형사는 우리 사회에 기생하는 인신매매범, 악덕 사채업자, 조직폭력배 등을 일컬어 ‘공공의 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모두의 적이란 말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공공의 적을 보여줍니다. 우리 대적 마귀를 말씀한 다음에 9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9절) 우리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들, 그러니까 바로 사탄이 우리의 공공의 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 성도의 원수요, 온 인류의 원수입니다. 우리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이 마귀입니다. 우리 삶에서 원수 마귀만 몰아내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되고 형통하고 아름다울 것인지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모시고 마귀 떠난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마귀 시험에 들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만 하면 사탄이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교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3:5)는 말에 간교한 뱀에 말에 미혹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흙덩이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말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지음 받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한순간도 숨쉬지 않으면 살 수 없고, 하루라도 먹지 않고 배설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하루라도 씻지 않으면 부정하고, 하나님 없이는 행복할 수 없고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임을 안다면 교만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고난 당하셨는데 무엇이 잘난 것입니까? 그걸 깨닫고 진실로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서 넘어지지 않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시147:6에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면 누가 무슨 말해도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자기를 낮추면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가 나오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래도 시험이 된다면 더 낮추어보세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했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자기를 부정하세요. 인간이기를 아주 부정해 보세요.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런 자기부정이 바로 적극적인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은 “교만으로 천사는 마귀로 전락하고, 겸손으로 사람은 천사로 승격한다.”했습니다. 러스킨도 “위대한 이의 첫 번째 시험은 겸손의 시험이다.” 했습니다. 자존심 내려놓고 나를 부정하면 편합니다.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부정하고 나면 그 어떤 사탄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2. 염려를 주께 맡겨야 합니다.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여기 돌본다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권고(眷顧)하신다 라고 했는데 권고란 '관심을 가지고 보살핌'을 말합니다. 한문으로는 돌볼 권에 돌아볼 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돌보셔서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사탄이 언제 역사하느냐? 염려하고 근심하고 불안해 할 때 그 틈을 타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약속의 말씀에 서서 마음관리 잘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일생 마지막까지 책임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46:3-4에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6:30-32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안절부절 못하면 저기 내 백성이 있다고 법적으로 청구하여 시험으로 찾아옵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3:25에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동방의 의인 욥도 두려워 하자 소송 걸었는데 우리 못 걸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과 절망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능력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고 믿고 외칠 수 있는 것이 능력입니다.


주님도 자신을 아버지께 맡기셨잖아요? 그것이 능력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믿음이 없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다가는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깨어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여기 근신하고 깨라는 것은 곧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시간에도 마귀는 굶주린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서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사자가 노리는 것은 어리거나 약하거나 한 눈 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 하셨습니다. 주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이 시험이 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사랑이 부족했거나 다짐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다짐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기도가 부족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곤하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피곤해도 마귀 시험 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장사는 없습니다.


4. 마귀를 대적할 때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9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마귀를 취급하는 방법은 대적하는 것입니다.


맹수를 대할 때 우리가 가질 상식은 등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동물전문가 아담 M 로버츠는 동물 전문매체 '더 도도'(The Dodo)와 인터뷰에서 "사자는 야생 포식자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사람을 먹잇감으로 간주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절대 사탄을 두려워 말고 맞서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고 하였습니다. 귀신은 달래서는 안 됩니다. 귀신의 소품들은 불을 질러버리든 때려서 깨뜨리든지 박살을 내버려야 합니다.


마귀 앞에 나약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우리를 죽이려고 활동하는 영원한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배후에서 마귀의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늘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이것만 잘해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을 축사라고 합니다. 사탄을 내어 쫓는다는 뜻입니다. 축사의 사역을 매일 기도하면서 하세요. 그러면 건강이 찾아오고, 가정이 화평하고 삶의 형통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이단 동성애 이슬람 세속화 국가안보 등 사회와 나라와 민족의 산적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의 금식기도도 축사였습니다. 이 사역을 할 때 나라의 배후에 역사하는 악령의 세력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들도 이 나라의 배후의 악령들을 예수 이름으로 몰아내십시다. 마귀 시험은 대적할 때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온전히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참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고,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늘 깨어 기도하며, 믿음을 굳게 하여 우리 공공의 적인 마귀를 대적해서 한 사람도 마귀 시험에 들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복락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는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의 갑옷을 입으라 벧전4:1~3

 

2천년전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그 역사적인 사건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나의 구원과 삶에 직접적인 상관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하고 '내 인생의 사건'으로 삼아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나의 구원의 관계

이 관계에 대한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느냐가 우리 인생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비참한 인간의 운명의 물줄기를 바꾸어 주시고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인류는 양편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세계의 인종을 영적인 기준으로 분류하면? 예수족(Christian)과 비() 예수족(Non-Christian) 둘뿐입니다.

 

2천년전 갈보리 언덕에 서 있던 세 개의 십자가는 이런 사실에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강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천국 영생, 한 사람은 지옥 영벌(영원한 사망)에 처해집니다. 완전히 갈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 25:31 이하. 양과 염소의 비유 - 임금(예수님) 중심으로 좌우에 양과 염소가 분류되어 있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의 정면 부조 - 예수님 중심으로 양과 염소들이 늘어 서 있고, 예수님이 들고 계신 저울에 매달려 애걸복걸하는 한 사람의 모습 ...

 

여러분, 이번 고난 주간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중심으로 "나는 과연 어느 편인가?" 이런 질문에 꼭 응답하셔서 구원의 감사 감격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 십자가와 나의 삶의 관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 사람에 찾아오는 고난에 대한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더라도 천국 가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고난의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신자 중에서조차 고난의 면제 대상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고난은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고난은 마치 파도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파도타기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파도에 빠져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고난이 올 때 원망, 불평, 범죄 합니다. 실패하는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오히려 단련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발전됩니다. 어떻게 동일한 상황 속에서 이런 정반대의 결과가 생길 수 있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고난에 대응하는 우리의 태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고난의 파도타기를 할 수 있겠는가?

 

1().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심 -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예수 고난의 갑옷을 입으라!" 갑옷을 삼는다는 말은 '무장한다',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삶에 밀려오는 고난을 향해 예수님과 같은 태도로 영적인 무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입니까?

 

죄를 그치고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1().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

 

* 예수님의 고난 - 죄의 대속을 위한 고난입니다. 말하자면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남의 죄 때문에 ... 그런데도 그 고난은 극한적인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고난'이란? 예수님도 인성의 차원에서 온갖 고통을 다 당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고통이 덜했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 ...

 

* 이 모든 고통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에게 지워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 6: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아직도 남은 죄성이 있습니다.(죄의 관성) 그래서 또 다시 범죄하여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곤 합니다.(6:6 비교)

 

* 그러다가 고난을 당하면 잠시 멈추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때 다시금 돌이키고, 죄를 그치게 됩니다.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화'라고 하죠.

 

> 조각할 때 - 조각가의 마음속에는 이미 조각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그림에 따라 '필요 없는 부분'을 정으로 쪼아서 내버리면 나중에 아름다운 조각상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자녀 되었지만 천국 가기까지 최대한 거룩해진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악 된 부분을 깎아 버리는 데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난과 마주치고 있습니까? 이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고난과 나 자신의 고난을 비교해 보면서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무엇을 깎아 내시려는가? 인내하며 주님의 손에 나를 맡기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의 삶 가운데 방만하고 죄악 된 부분들이 있지는 않았는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신앙의 구조 조정'을 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모습들, 세상 풍조들이 우리에게 들어와 있지는 않았는가? 살피고 우리 속에 잔존하는 죄악된 습관을 잘라 버리고, 주님의 형상 이루기를 바랍니다.

 

2. 다시는 사람의 정욕(지나친 욕심)을 좇지 않고 ...

 

3. 이방인(불신자, 세속인)의 죄악을 본받지 말고 ...

 

그래서 우리의 모습이 정금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러면 반드시 우리를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될 날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요셉도, 모세도 하나님의 연단하심 가운데 아름답고 깨끗한 그릇이 되어 귀한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면 얼마든지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혹시 고난 중에 있다 할지라도, 이런 것들을 기대하면서 고난 중에 낙심말고 거룩한 그릇으로 조정되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헌신하는 것입니다.

 

3(). 죄를 지으면서 살던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 ...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과거에 예수 몰라서, 신앙이 미성숙해서 죄를 지으며, 세상 풍조를 따라 시간과 돈과 정열을 낭비하며 살았던 세월이 너무 아깝고 한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인생(어쩌면 지금까지보다 짧은 여생이 남아 있는데) 이제부터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데 남은여생을 바치겠다는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2. 고난의 때에 이제는 세상 정욕을 거부하고 남은여생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결단이 생깁니다.

 

여러분, 대개 사람이 풍족할 때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항상 그럴 줄 알고 ...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줄 알고 ... 그래서 생각없이 살다가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물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잃어버리고 나면 아쉽습니다. 후회가 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하나님의 일이나 제대로 하는 건데 ...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영원히 남고 세상에서 먹고 마신 것들은 다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일을 결단하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하면 후일 풍성해진 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지 못하면 풍성해지면 또 다시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다 인생이 끝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헌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3대 명령'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문화 명령(1:28), 둘째는 사랑 명령(22:37~40), 세째는 선교 명령(28:18~20)입니다. 이 명령을 위해 시간을 바치고, 정열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 이게 헌신의 삶입니다. 십자가 은혜를 아는 사람의 마땅한 삶의 모습입니다. 후일에 후회하지 않도록 ... 날마다 거룩한 열심을 가지고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아가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 생애 기간 중 줄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대로 촌음을 아끼며 헌신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몸 속에 물 한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으시고 ... 우리도 이러한 십자가 고난과 헌신을 늘 묵상하며 내 몫에 태인 십자가 지고서 주님의 뜻과 명령을 위해 헌신하기를 소원합니다. 이게 바로 고난의 갑옷을 입은 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좋은 날을 보게 하옵소서 (벧전 3:10)

 

기독교가 탄생한 지 35년 만에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수난의 기간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억울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날 때 주변에 있던 신자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빨리 로마를 떠나도록 권유하여 베드로는 멀리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 도성의 외곽에 나와 잠간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시는 순간 베드로는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운지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물으니 주님은 "나는 로마로 다시 들어가 십자가를 지려 하노라"하고 대답하십니다. 그 유명한 쿼바디스라는 영화에 바로 그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다시 로마를 향해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로 지셨으나 그는 십자가를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아내가 염려할 때 "사랑하는 아내여, 두려워말고 주님을 잊지 마시오"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 아내도 능력이 생겨서 주님을 위해 함께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장 어려웠을 때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전했습니다. 특히 핵심적인 말씀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너희 형제간에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고 누구를 고발하거나 해롭게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악독한 말을 금하고 형제간에 화목하고 사랑하고 좋은 날을 기다리라는 권면의 말씀을 베드로전서와 후서에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 3장은 부부간에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의 인격 전체를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또 남편은 아내가 연약한 그릇인 줄 알아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대인관계는 겸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외에도 베드로전서 3장은 형제간의 우애하고 악한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고 악독을 품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등 많은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현실 생활에서도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이고 주님 앞에 설 때 잘했다는 칭찬과 상급을 주시고 수고와 슬픔, 가난과 질고가 없는 광명의 세계, 좋은 날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좋은 날을 보게 하실까요?

 

첫째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3: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은 폐할 수 없습니다. 쌍방의 약속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득이 할 때는 사정을 말하고 변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일화 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끝내 그 거짓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20개의 거짓말을 또 만들어야 되고 이어서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어 마침내 자신의 인격이 파탄에 이르고 나아가서는 남의 인격에 피해를 입힌다"고 말했습니다. 약속이라는 말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믿음직한 사람은 약속을 잘 이행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미혼 남성들의 경우 결혼상대의 첫째 조건이 용모라고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인물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혼 여성들의 경우에도 결혼상대의 첫째 조건이 용모였다고 합니다. 잘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틀림없는 사람입니다. 약속 지키는 것이 체질화되고 습관이 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쌍방의 약속을 변개하지 않을 것이며 장차 결혼생활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은 용모가 아무리 좋아도 함께 살면 평생을 두고 가슴 치고 눈물 흘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갈라디아서 3:15에서 약속, 언약 이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사람들끼리의 약속도 지키거늘 하물며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의 따르면 유언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유언은 자녀들에게 미리 물어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미리 작정하고 일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성사되지 않고 죽어야 성사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언약은 "너희를 위해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날 보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언약하신 모든 말씀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는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나 마침내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언약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돌아가셨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돌아가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장차 좋은 날을 보게 할 것을 언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기를 "장차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고 창대하게 할 것이다. 너를 돕는 자는 도와줄 것이고 너를 해하는 자를 해할 것이다. 네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될 것이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세월이 흘러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어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기근이 들어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가지 말라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죽을 고비를 당합니다. 또 무자한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인의 몸종을 통해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자식 때문에 결국 집안에 불화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더디고 삶은 힘이 들자 아브라함의 믿음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창세기 17장에서 "전능하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하시면서 다시 한 번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후손들에게서 왕손이 나오고 대적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차지하고 살 것이다. 내가 언약을 지킬 것이다"라는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오래 참는 훈련을 잘 마쳤습니다.(6:14-15).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고 최선을 다하지만 위태하고 불안하고 염려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오래 동안 훈련시키시던 계획처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의 계획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내의 훈련을 시키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바라보고 나가면 마침내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고 좋은 날을 보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좋은 날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좋은 날을 주시고 삶의 꽃이 피고 희락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14:9)라는 말씀처럼 덕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자신에게 선하고 이웃에 대하여 선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한테는 좋은데 상대편에게 해가 되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에게는 좋은데 나에게는 해가 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좋아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좋아야 그것이 선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면 잘못입니다. 신앙은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덕입니다.

얼마 전 조찬기도회가 있어서 이른 새벽에 나가는데 제 맞은편에 오던 차에서 말쑥한 신사가 비닐봉지를 들고 내리더니 앞뒤를 살피면서 화단의 가장자리 울타리 속에 그것을 집어넣고 얼른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버린 것은 쓰레기봉지였습니다. 아마도 아내가 쓰레기봉지를 버리고 가라고 성화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신사는 아무도 못 봤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아무데나 버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자기는 기쁘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절

대로 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덕을 끼칠 때 좋은 날을 보게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 하는데 마지막 단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루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루게 되면 현실생활에서 좋은 날을 보게 되고, 또 주님 앞에 설 때 천국가게 되므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는 말씀처럼 신앙의 단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느끼면서 한 단계 한 단계씩 올라가야 합니다. 나 한 사람 기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잘 되어야 되고 좋아야 되는데 남은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절대 덕이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날 보기 원하시면 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2:15)는 말씀처럼 덕을 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나는 없는데, 나는 못 배웠는데"하며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고개 들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간순간 덕을 세우고 살아가면 어깨 펼 날을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과 백인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옥살이도 하고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자그마치 27년 동안 옥에 갇혀 수난을 겪었습니다. 마침내 옥에서 나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모든 정적들을 사면하고 모든 원수들을 다 용서하고 모든 저주하고 싶은 사람들을 다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대통령 직무를 잘 수행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그는 특유의 웃음을 남기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충만으로 심령의 평강이 충만하여 마음에 여유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덕을 끼치는 인격적인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4:30)는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령이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환경 중에도 예배하는 여러분의 삶은 곧 성령이 함께 하는 삶인 줄 믿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예수 믿었고,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 성령은 누구십니까? 성령은 곧 예수님의 신입니다. 예수님은 몸으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영으로는 올라가셔서 거룩한 신으로 내려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신 분이십니다. 그 성령이 순간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은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아멘으로 순종하면 남이 모르는 가슴속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때로는 잘 했다고 칭찬을 하시고, 때로는 힘들 때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끊을 것을 끊고 돌아설 곳에서 돌아서면 육신의 정욕으로는 끊을 수 없고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끊고 돌아설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때부터는 어떠한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체험하고 앞길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되어 승리 롭게 살아갈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는 말씀처럼 성령을 거역하고 무시하면 성령은 매우 섭섭해 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마치 자녀가 시험을 잘못 쳐서 성적을 잘못 받아 왔어도 자녀는 자녀인 것과 같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저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할 텐데"하며 더 염려하고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래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저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황에 따라서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훈련의 시련을 겪으면 "하나님이 날 버리셨나?"하고 염려합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51:6)고 말씀하시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하고 우상숭배를 했다가 하나님을 믿었다가 하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은 하늘의 구름이 사라질지라도 땅이 해어질지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령께서 뭐라고 하시든지 아멘 하고 순종하며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시고 내 영혼에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템플대학에서 사회 저명인사 4,043명을 초청하여 학술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그 사람들의 교육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고졸 이상인 사람이 4,043명 중 69명밖에 안되었습니다. 나머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졸이거나 아니면 그 이하의 무식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교육수준이 낮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가 되고 재벌도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를 했는지를 조사를 했더니 그들은 한 번 목표를 정한 것이 있으면 그 목표대로 나가고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영향을 준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는 가난한 집의 자손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하고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삶의 지혜를 주시고 결단력과 인내력과 절제력을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좋은 인격자가 되고 이 땅에서도 좋은 날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은 광야와도 같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도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 물이 없고 뜨겁고 배고프지만 먹을 것이 없고 한 발작 발을 디딜 때마다 뱀과 전갈, 들짐승들이 위협하는 매우 불안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날을 바라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좋은 날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이 지나는 광야와도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힘들고 어렵고 위험하고 막막하고 답답한 때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하신 말씀은 절대로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덕을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깨달음을 주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좋은 날을 바라보며 그 날에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선한 일에 따른 고난        벧전 2:18-25

 

찰스 고우만의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1년 동안 애 벌레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기어 나오는 구멍은 매우 작습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 큰 몸집이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와줄 양으로 가위를 가지고 그 구멍을 넓혀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방은 고맙다는 듯이 쉽게 그 구명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나방이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순간을 기다리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큰 구멍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날개를 질질 끌고 방구석을 기어 다니는 팔삭둥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는 긴 시간의 몸부림, 이것은 나방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절대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대중 기도를 하는 분들의 기도 내용 가운데에는, "제발 어려움이나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가 많습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나 모면을 구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서 적극적인 자세보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역설적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고난 받게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고난 받는 것이 지극히 정상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기왕 당하는 고난이라면 피해 가다가 당하느니 차라리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이 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고난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과 자기 죄에 따른 고난과 그리고 선한 일에 따른 고난입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 번째의 고난입니다. 오직 선한 일을 행함으로 고난 받으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과도 관련이 있으며, 그 결과가 아름답고, 그리고 주님이 친히 당하신 고난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1. 소명의 목적입니다(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한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을 가리킵니다. 즉 오늘도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적은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도록 하게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신약에서 그러하듯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부르심의 윤리적인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인 부르심에 대하여는 데살로니가전서 4:7, 갈라디아서 5:13, 고린도전서 7:15, 골로새서 3:15에도 설명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7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라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의 단계를 넘어 하나님의 뜻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안일하게 특권과 축복만을 누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하고, 고난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3, 3:12, 마가복음 6:34, 요한복음 16:33, 사도행전 14:22 등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고난에 대한 생각과 자세를 달리할 것입니다.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인 자세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능동적인 자세요, 부정적인 시각이 아닌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셨더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게 결심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9:51). 특히 요한복음 10:18에서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원적 고난은 의미가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일찍이 가브라엘 힛터는 자식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 바 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세우사 약할 때에 약할 줄 아는 힘을 주시며 두려울 때에 꿋꿋이 서는 용기를 주소서. 패할 적에 고개를 들며, 이겼을 때에 겸손하고 온순하게 하소서.

주여, 내 아들을 기르사 안일하고 향락하는 길로 들지 말게 하시고, 고난과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고 광풍 속에 혼자 설 수 있고, 넘어지는 자를 헤아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내 아들을 가르치사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모든 참된 지식의 기초가 됨을 알게 하소서. 주여, 내 아들을 크게 하사 원대한 이상을 갖게 하시며, 높은 목적과 맑은 마음을 갖게 하소서. 다른 사람을 손에 넣기보다 먼저 제 자신을 손에 넣게 하소서.

주여, 내 딸에게 겸손함을 주셔서 단순한 것이 참으로 위대한 것임을 알게 하시고, 마음을 여는 참된 지식임과, 온화함이 참된 힘인 것을 알게 하소서. 그러면 나의 마음은 은밀한 곳에서 쉴 때 감히 속으로 말하겠나이다.

'나는 헛되게 살지 아니했노라'...."(부모의 기도 중에서)

 

2. 결과가 아름다운 것입니다(19,20).

 

어떻게 많은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이기며 나갈 수가 있는가? 그것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그리고 그 결과를 알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나의 죄 때문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일환으로 주시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결과가 해피엔딩이라면, 보장된 약속이 있다면 무엇인들 마다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인내한 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도 그의 서신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리가.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온전한 인격을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미리 알기에 기쁨으로 고난을 감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인내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참으면 아름다운 일이라"했고 20절에서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름답다'는 말은 "은혜"라는 말입니다. 인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느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돌아올 결과도 소중하지만 더 나아가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제 아내가 시집와서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동기는 시어머니가 기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벽 기도만 갔다 오면 얼마나 기뻐하시며 칭찬을 하시는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한두 번 나가던 것이 그만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머니를 위한 것이 아닌, 바로 그 자신을 위한 결과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합동하여 유익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인내하기만 하면 약속이 보장된 것이 고난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본이십니다(21-25).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속적인 고난과 모범적인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 두 가지의 의미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21절에 보면 "(벧전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은 ''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범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기독교인들로 그 자취를 그대로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너희를 위한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리스도 자신의 죄 때문이거나, 자신의 궤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22).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벧전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14:61, 15:5, 26:63, 27:14, 23:9, 19:9).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23절 하).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수고한 대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성격은 어떤 것입니까?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나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은 신명기에 나온 저주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 그렇다면 죄도, 궤사도 없으신 분이 무엇 때문에 저주를 받으셨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가 저주를 받으므로 우리에게는 어떠한 결과가 주어지게 되었습니까? 그가 저주를 받으므로, 즉 각각 고난을 받으므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첫째는,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무거운 죄의 짐을 대신 지고 가셨다(1:29)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에서 '죄를 담당한다'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5:1,17). 이는 고대 이스라엘의 속죄 의식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의식 중에는 염소 한 마리를 광야의 무인지경에 보내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사셀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멀리 가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의인되신 예수님이 죄를 지고, 죄인이 됨으로써 죄인 된 우리를 의인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24).

 

둘째는, 나음을 주셨습니다. "(벧전2:24)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고난받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곧 치유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까? 죄로 인한 상한 심령과, 죄로 인한 죽은 영혼입니다.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치유입니다. 우리의 영과 육을 함께 고쳐주었다는 것입니다. 병든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셋째는, 돌아오게 되었습니다(25). 누가 누구에게로 돌아왔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때가 언제입니까? "너희가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로"입니다. 여기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일찍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그리고 감독으로 표현한 것은 그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때가 언제냐? "이제는"입니다. 여기서 '전에''이제'가 서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때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을 때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본래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3: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김으로써 진정한 안식과 평강을 누리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13년이란 긴 방황의 세월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는 진정한 평안이 없었나이다."

 

우리나라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을 남양에 가지고 가, 첫해에 많은 양의 꿀을 거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곳엔 꽃이 많겠다, 꿀이 많겠다, 벌이 부지런하겠다, 얼마나 좋은가, 이제 나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 벌은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전혀 일하지 않고 다 벌통을 떠나 버렸습니다.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자세히 원인을 알아보니 그곳에는 겨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겨울이 없으니까 벌은 꿀을 저장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아예 일을 안 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인은 겨울이라는 고난이 있어야 신앙의 생동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겨울이라는 고난이 있어야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베드로의 권면    벧전 2:11-17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을 베드로는 로마의 식민지인 소아시아 여러 나라에 흩으져있는 성도들에게 권면 하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대로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기 위하여 총독을 향하여 항거하고 저항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자신의 심성의 정욕부터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

 

1.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밤에 정욕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칼을 도루 칼집에 넣어라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리라 권면을 예수님으로 부터 직접들은 바가 있습니다. 검을 통제치 못하는 사람은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자기 정욕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부끄러웁을 당케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욕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화를 제어하지 못해서 이 땅의 성도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그런 무책임한 성도입니까?

우선 본문 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그러면 왜 정욕을 제어 해야합니까? 다른 번역 본에는 세상 쾌락에 말려들지 말며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성도가 왜 세상쾌락을 멀리해야할 이유를 두 가지 되고 있습니다.

1>우리는 나그네와 행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와 행인의 전제가 무엇입니까?

 

지금 현재 거주하고 있는 그곳이 본향이 아니라 고향이 아니라 돌아갈 고향이 따로 있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살고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재미에 마치 고향이 이세상뿐인 사람인 양 그렇게 쉽게 말려 들 수가 없습니다.여러분 나의 고향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가 본향에 오라고 부르시면 하던 것모두 두고 본향을 찾아 갈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절 말씀에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별명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것이 바른 믿음이고 허물 많은 이 세상에서 저 천국 본향을 소유한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2>육신의 정욕은 그냥 내버려두면 영혼을 거슬려 싸웁니다.

육신은 본래 영혼을 잘 따르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육신 마음속에 정욕이 찾아오면 영혼의 생각을 말을 듣지 않고 육신이 영혼의 지시를 듣지 않고 세상쾌락에 빠져 허덕이게 됩니다. 육신에 욕심이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변하여 육신의 일만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각 속에 육신 적인 정이 돋아 났습니다.

베드로는 육정의 충정으로 이런 일이 났습니다. 주님 내가 있는 어떻게 스승이 잡히신다 말입니까?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네 뒤로 물러 섰거라 하시면 "네가 어찌하여 육신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좀처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일치되기란 힘듭니다. 로마서 8:6-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할 수도 없음이라[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내속에서 활동하고 있는생각이 육신의 소욕인지 영의 소욕인지 가려 보시기를 원합니다.

 

2.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께 영원 토록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도의 이 땅에서 사명이라는 것을 잘압니다. 그러나 쉽게 잘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삶을 삽니까?

12절은 우리에게 그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비방하는 이방인에 대하여 맞서서 비방하거나 무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악행을 한다고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두 가지 원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비방하는 사람에게 선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선대 하는 사람에게 선행으로 되갑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나를 비방하는 사람에게 선대 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스데반,바울,다윗과같은 사람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습니까?자기를 비방하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비방하는 사람을 향하여 피어나는 꽃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싸워보면 본성이 들어 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비방을 당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수의 사랑이 들어 날수 있는 기회가 온줄로알고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되갚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가득한 사람만이 가능한일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 자기를 비방하다 못해 두 아들 동신,동인 이를 죽인 살해범을 양자를 삼으신 그 사랑 - 예수의 그 사랑이 아니고는 껴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예수의 사랑으로 껴안을 수는 없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합니까?

2>권고하시는 날까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권고하시는 날이 언제입니까? 이 세상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려오시는 날입니다.우리 성도들의 가장 큰 위로가 무엇입니까? 우리 구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눈에 눈물을 어제나 자제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시원하게 원통함이 다 풀리 지지 않더래도 우리 주님 권고 하시고자 오시는날이 성도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요한 일서 2: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름은 그리스도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결과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많이 생겨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이 심판 주로 오시는 그날까지 비방하는 사람에게 선행을 보입시다.나는 무엇으로 선행을 보일까 지금 나를 비방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를 위하여 사랑의 기도로 선행을 나타보이겠습니까?

 

3.세 번째의 권면은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이고 절실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라 는 것이 아닙니다.세상의 제도는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살아갈 수도 없고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인생의 지혜가 필요하고 좌절과 낙망 속에서도 소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는 궁극적 목적과 현실 속에서 그 한계는 어디까지며 결국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제도 마땅하고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제도에 순복하라는 것입니다.권력을 무서워하는 마음으로 순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목적하고 권력에 순복하라는 것입니까?

주를 위하여 세상권력에 순복하라는 본문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세상권력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형편은 소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네로황제가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의 압박을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당시 수신자의 대부분이 노예신분이 였을 것이 다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자유를 위해 투쟁을 해야하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못마땅한 네로의 압정과 탄압을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를 위하여 집권하는 네로를 본다면 당장 일어서야 하겠지요 그러나 베드로 그를 찌라도 순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입니다.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2>어디까지 순복 해야합니까? 그의 방백에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앞절에서 왕이라고 하는 것은 네로 황제를 지칭하고 그의 보내신 방백이라는 말은 총독을 가리킵니다. 압제하는 총독에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회 참여도 포기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행동이 주의 뜻이 라면 능히 혁명에 가담할 수도 있습니다. 몇 가지 전제를 해야 합니다.

첫째 혁명을 일으킨다고 전보다 나아진다는 절대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단지 지금 잘못된 법율아래 있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혁명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윌리암 펜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던가,혹은 독재자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저주를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의 통치속에서 생활하든지 아니면 독재자의 압박을 주를 위하여 감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이렇게 하므로 어떤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까?

무식한자의 말을 막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거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나라가 우선 이냐 교회가 우선 이냐 하는 질문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미술이 더 예술적이냐 아니면 음악이 더 예술적인 것이냐 묻는 것 같은가 꼭 같습니다. 쟝르가 다릅니다.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우수광 서럽습니다. 그 쟝르에서 맡은 바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의 세력과 국가의 세력을 재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사라도 국가의 실정법을 위반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권력자라고 해서 죄사함을 베풀고 영생을 선물로 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분야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바가 다릅니다. 국가는 복지 국가가 목표입니다. 교회는 유토피아가 목표가 아닙니다.이 땅에서는 고난과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영원한 천국에서의 시민행사를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두개가 서로 연관은 있지만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견주고 비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 입니다. 이 땅에서 군주와 통독에게 주를 위하여 순복하면 할말을 막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8:7-9를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8]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9]그런즉 너희자 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리는 양 세계를 다 이해합니다. 저들은 예수믿는 세계를 이해 하지 못합니다. 입을 막는 길은 우리는 주를 위하여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자유를 십분 발휘합시다

 

4.말은 하기 쉬워도 이 땅에서 살면서 성도의 삶을 살기란 그렇게 쉽지않습니다.

이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된 삶을 살아갈 때에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찾아봅시다

1>악을 감추는 자유를 사용하지 맙시다.

본문 16절을 읽어봅시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

우리는 법으로부터 자유 합니다. 죄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러나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교회에 숨지 마십시오. 여러분 세상에서 지탄받을 일을 저지르고 교회를 은신처로 삼지 마십시오.

5: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우리는 모든 것에 자유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 데 이 자유를 삼지 마십시오.

2>여러분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라면 형제를 사랑하고 뭇사람은 공경하는 사람 일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뭇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라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여러분은 어떻습니까?

3>하나님을 두려워할줄아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 될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배를 드립니까? 사람이 두려워...사람의 종입니다. 율법이 두려워서입니까? 어쩔 수 없이 율법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이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 됩시다.

 

신령한 집     벧전 2:1-10

 

인생은 하나의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짓되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하고 견실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하나의 집을 지으려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건강이 필요합니다. 건강은 모든 것의 가능성입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꿈도, 이상도, 미래도, 일터도 그 모두를 잃게 됩니다. 건강은 인생의 집을 짓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초석입니다.

여기에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또 여기에는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씩 쌓여져 나가다 보면 결국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집이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하나의 집을 짓는 생활입니다. 신앙의 집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집이 다르게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신앙의 집을 짓는 데는 꼭 들어가야 할 것이 있고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버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을 왜 버려야 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의 마음 밭을 오염시킵니다.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들, 이것은 사람의 순전한 마음 밭을 오염시키고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근심을 가지고 있거나 불화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 마음이 모든 생활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삶이 삭막해지고 불화해서 다투게 되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식물들이 자라는데 그 위에 가시 넝쿨들이 짓누르고 있어서 성장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탈선하는 청소년들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반드시 탈선할 수밖에 없는 문제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 주위에는 좋지 않은 친구들이 모여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울려 다니다 보니 탈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좋지 않은 환경들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영향을 받아서 생활에 질서를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좋은 환경으로 여러 번 이사를 했다는 말입니다. 환경은 어린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사실은 어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신령한 집

 

어른도 주위에 좋지 않은 친구가 있어서 어울리다 보면 생활의 질서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또 주위에 술친구가 있으면 술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작심을 했다가도 또 무너져 버립니다. 그것은 친구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노름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유혹으로부터도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노름을 하면 돈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잃으면 억울하니까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마음에서 빚을 내서 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그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친구도 바꾸어야 합니다. 환경도 바꾸어야 합니다. 때로는 직업도 가감이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관심도 바꾸고 취미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 같은 단절이 없으면 그곳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때로 이 단절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삶을 살게 하고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왜냐하면 이것들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잡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제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버리라고 했습니다.

 

2. 취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2: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갓난아이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깨끗하고 순전합니까? 거기에 거짓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 아이들이 먹는 것이 깨끗하고 순전해서 그렇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특히 모유는 갓난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음식입니다. 모유 속에는 영양이 고루 함유되어 있고 그 속에 지혜의 요소와 온건한 성품을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 다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유만 먹고 자라면 잘 조화된 성품이 조성된 온건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모두 모유를 먹이지 않고 소의 젖을 먹여 키운다는 데 있습니다. 송아지가 먹는 소의 젖을 아이가 먹고 자랍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모두 망아지처럼 사나워지고 난폭해지고 소란스럽고 들이받기를 좋아합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이 먹을 음식이 따로 있습니다. 그 음식은 순수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은 정신을 맑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음식이어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과 생각을 혼란케 하는 독주나 아편이나 마약이나 알코올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를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갖고 자꾸만 그것에 유혹되는 것을 보면 유감입니다. 이것들이 오늘 현대인들을 잡고 인질 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음식도 순수한 음식을 먹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마음과 생각과 영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또 음악도 순수하고 조용한 음악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산란한 마음도 가라앉게 되고 어지럽던 정신도 정돈되고 갈등이 많던 마음도 안정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노래들은 너무나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정신이 모두 어지러워집니다. 무슨 내용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이렇게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입니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 이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만큼 말씀에 깊이 심취를 했으면 이 같은 신앙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겠습니까? 신앙의 집은 이렇게 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건실한 신앙의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3. 연결하라고 했습니다.

 

"(벧전2:5)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산돌이라고 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는 모퉁잇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돌을 초석이라고도 하고 옛날에는 주춧돌이라고도 했습니다. 모든 집의 구조물은 이 초석과 연관하여 짓습니다. 그러니까 이 돌이 모퉁잇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의 집을 지을 때나 인생의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 산돌 되시는 예수와 연결하여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필수입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양분을 공급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은 모두 산돌이신 예수께 연결되어야 비로소 신앙인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는 인생은 성공한 것 같으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실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궁극적으로 예수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면 그 삶은 성공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은 한순간만을 보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도 보아야 하지만 미래도 보아야 하고 심지어는 내세까지도 보아야 그 삶이 진정 성공적인 인생인가를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70생애를 술회한 대목이 나옵니다. 공자는 73세를 살았습니다. 73세의 삶의 내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자는 15세 때에 학문을 하기로 입지를 세웁니다. 30세 때에 성격을 형성합니다. 40세 때에 불혹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50세 때에 천명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천명이라는 것은 "사생유명"이고 "부귀재천"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부귀가 모두 하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50세에 가서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60세에 가서 귀에 들리는 말을 모두 순순히 이해하고 관용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합니다.

70세에 가서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73세에 죽습니다. 이것이 일생을 살아간 공자의 삶의 면모입니다. 거기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알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 인생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평가할 때 성공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완전한 일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죽은 후 중일전쟁 때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쫓겨서 중경까지 후퇴할 때 누군가 말하기를 중국의 조상인 공자의 무덤을 잘못 써서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공자의 무덤을 파 보니까 그 큰 무덤 속에 쪽박만한 두개골 하나밖에 없더랍니다. 그런데도 그 무덤은 엄청나게 크고 장엄했습니다. 그 속에는 온갖 허무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끝나고 말 것이라면 군자면 무엇하고 성현이면 무엇 할 것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 산 돌이신 예수와 연결하여 인생의 집을 건설하고 신앙의 집을 지으라고 합니다. 예수와 연합하여 지어진 집이라야 그 집이 신령한 집이고 영원한 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이대로 살다가 죽는다 해도 예수를 알고 살다 죽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죽어서 그까짓 두개골이 땅 속에 있건 없건 그것이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신앙의 집을 짓되 산돌이신 예수와 연결하여 집을 지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삶을 구체적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벧전2:5)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삶을 살되 구체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집을 짓는 이유는 지어 놓고 구경하려고 짓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살려고 짓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 짓는 이유도 구경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예배냐 하면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고 구체적인 삶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다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제사가 바로 신앙인의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없으면 형식만 남게 됩니다.

오늘날은 꾸밈과 위장과 형식이 많은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삶의 모습들이 구체적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포장된 것이 많이 보이는 때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포장되어 있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모습들을 보면 다 꾸며진 모습입니다. 탤런트들도 모두 얼굴을 꾸미고 TV에 나옵니다. 그래서 모두 미인같이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꾸며 놓으면 그들보다 훨씬 예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촛불 아래서는 여자하고 색실은 고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촛불 아래서는 모든 사람이 예뻐 보이고 모든 아름답게 꾸며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위기에 위장되어서 그렇습니다. 집도, 인생도, 얼굴도, 아름다움도, 교회도 사실 그대로가 아니고 일단 꾸며지면 그 속에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 없어지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구체적인 삶이 없고 꾸며진 모습과 만들어진 모습만 보이면 그 삶에는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껍데기만 남고 형식만 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체적인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그 삶이 세상으로 전파되고 전해져서 이 세상이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그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선전하라고 했습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선하신 덕을 세상에 선전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전원들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해방시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순전히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9: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10: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

해방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해방이라는 말은 곧 예배라는 뜻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곧 하나님 예배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과 똑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살아갈 집도 잘 지어야 합니다. 대충 지으면 무너지기 쉽습니다. 집이 금이 가고 무너지는 것은 잘못 지어서 그렇습니다.

또 우리의 인생의 집도 잘 지어야 합니다. 불성실하게 지으면 도중에 실패하고 낙오되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아주 불성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집을 잘못 지어서 그렇습니다. 인생의 집을 잘못 지으면 사람이 불성실해집니다. 어느 날 그 인생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중에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앙의 집도 잘 지어야 합니다. 신앙의 집을 잘 지으려면 무엇보다도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해야 합니다.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함께 지니고 있으면 좋은 신앙의 집이 잘 지어질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집을 짓되 구체적인 삶으로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성령께서 내주해 계시는 축복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 신앙의 집을 지으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거룩한 자가 돼라   벧전 1:13-21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조용히 바라볼 때, 세상에서 거룩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 죄악만이 관영하여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지가지의 부정과 부조리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거짓과 음란과 강포가 가득 차 있습니다.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의 때가 무색하리 만큼 죄악은 곳곳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죄스러운 물결이 교회안에 침투하여서 교회가 세속화되고, 범죄에 빠짐으로써 성속의 구별이 없어지고 그야말로 혼동과 혼탁의 세대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신자들인 우리에게 성경말씀은"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전 1:15). 그러므로 죄악이 관영한 땅 위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신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신자는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거룩함이 속되고 죄악이 관영할지라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진실한 신자들만은 세상과 같이 속되거나 죄스러울 수가 없고, 거룩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들은 먼저 성경말씀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인 우리들이 왜 거룩한 자가 되어야만 하는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와 권속이 된 신자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벧전 2:9). 어두움은 무지와 죄악과 상망을 의미하며, 빛은 지식과 성결과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벧전 5:10).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벧전1:15). 이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벧전 1:16, 레 11:44).

 

그러므로 우리들이 진정으로 우리를 불러 내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뵈오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빛에 들어가게 하시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어두운 데서 불러 내신 것을 알아 뵈오며, 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고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면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생각하여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와 권속이 된 것이나, 어두운데서 빛으로 불러 내심을 입고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심을 입은 것은 값없이 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값을 치르시므로 비로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전 1:18, 19).

 

피는 생명입니다 (렙 17:11). 피는 속죄하는 것입니다 (히 9:22). 그러므로 피는 고귀합니다. 흠 없고 점 없는 곧 무죄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어린양 이신 그리스도의 피는 더욱더 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속죄하기 위하여 흘려졌으며,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흘려졌기에 우리와 같은 죄인들도 하나님의 자녀와 권속이 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빛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분별하는 진실한 신자는 거룩한 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재림의 때에 우리에게 베풀어질 은혜를 기대하여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전 1:13).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하늘 구름을 타시고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행 1:11, 마 26:64, 살후 1:10). 그날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을 심판하여 형벌하실 것입니다 (살후 1:8). 그러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면서 거룩한 자가 되기를 힘쓰는 신자들에게는 큰 은혜와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날을 바라보면서, 그날에 베풀어질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중에 거룩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룩함을 좇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주님을 뵈울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히 12:14).

 

(4) 우리들은 성도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신자들을 성도 곧 거룩한 무리라고 말씀하시며(롬 1:7, 고전 1:2).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3:16).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성도가 된 사실과 성령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는 사실과 따라서 자기 몸은 하나님의 성전인 사실을 깨닫는 신자마다 거룩한 자가 되고자 진지하게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신자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돼라"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벧전 1:15). 하나님은 신자요. 성도인 우리들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의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1)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거룩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의 소중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잠 4:23). 우리의 마음의 생각은 우리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며, 다 아시는 것입니다 (삼상 16:7, 계 2:23).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 살인하려는 마음, 간음하려는 마음, 음란한 마음, 도적질 하려는 마음, 거짓 증거 하려는 마음, 훼방하려는 마음 등 거룩하지 못한 마음이 깃들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5:19).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거룩하지를 못하는데, 거룩한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의 거룩하지 못한 생각은 기회를 따라서 거룩하지 못한 언행으로 나타내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비록 밖으로 거룩하지 못한 언행으로 나타나지 아니한다고 하여도, 거룩하지 못한 생각이 마음의 생각에 머무는 것만도 얼마도 죄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뜻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마음의 생각의 거룩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라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시 51:6).

 

우리들은 겉으로 보는 대로 분명히 성도 들이며, 우리들의 직분을 따라 목사요, 장로요, 집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마음, 가지가지의 죄스러운 생각들로 가득할 수 있는데, 이 부끄럽기도 한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고 신령하고, 경건한 생각으로 충만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골 3:2).

 

(2) 우리의 말이 거룩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자가 되고 싶은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이 어떻게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작은 혀를 놀려서 내밸는 우리의 말의 중요성을 무어라고 다 강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악 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우리의 말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약 3:5-6).

 

성경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라고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엡5:4). 또 "무릇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엡 4:29).

 

거룩한 자가 되려는 우리에게 누추한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거짓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말들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하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시 141:3).

 

거룩한 자는 진실을 말하여야 합니다. 감사하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신령한 말씀, 진리의 말씀을 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입의 말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열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 19:14).

 

(3) 우리의 행실이 거룩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몸을 움직여서 부단히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거룩함이 없고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 안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거룩하지 못하고 죄스러운 행동을 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요 하나님의 성전인 된 우리들은 힘써서 거룩한 행실을 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는 방탕한 생활. 세상의 일락을 좋아하는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엡 4:19, 딤전 5:6). 거룩한 자는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엡 5:3). 거룩한 자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엡5:3). 이러한 것들이 오늘의 세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 거룩하지 못한 죄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자가 되려는 신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 철저하게 멀리하여야 합니다. 오늘의 세태를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방탕과 일락과 음란과 탐욕을 추구하는 일에서 남녀노소의 구별도, 그 신분의 높고 낮음의 구별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도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이러한 방탕과 일락과 음란과 탐욕으로 더럽힐 수가 없어서 이러한 것들을 멀리 물리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사랑과 진실과 근면과 검소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겨 영광스럽게 하여 드리고, 이웃을 섬겨서 기쁘게 하여 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말세의 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을 대망하면서 우리의 영혼과 몸을 흠 없이 보전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살전 5:23, 고후 11:2). 호색과 탐심을 멀리하십시다. 이것은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벧후 2:1-3). 근면하고 소박한 생활을 힘쓰는 중에 사랑의 봉사를 힘쓰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시며,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의 중요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도 우리의 말도, 우리의 행실도 항상 거룩하기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에게는 우리가 거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입어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기를 명하시며, 요구하시는 것을 진지하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대하여서도 진지하게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분명한 사실과 그때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성도들이며,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임을 명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상고하는 중에 이러한 것들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으면서, 말씀과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거룩함이 없고 죄악 이관 영한 이 땅 위에서 거룩한 무리로써 하나님께 몸 드릴 수 있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고 보람찬 삶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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