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   잠언 8:22-36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강림주일 다음에 삼위일체 주일을 지켜 왔는데 이것은 순서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알려지셨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알려지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성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거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천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내가 떠나면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이 강림하셨고 그 성령 강림을 통하여 세 번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게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은 완전하게 우리에게 나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 주일 다음에 삼위일체 주일로 지키게 된 것이고 이것은 참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분이 계시는데 그 세 분 하나님은 능력과 존귀와 영광에 있어서 동일하신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다른 세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세 하나님이 동시에 한 분이시다는 말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말입니다.

세분이면 세 분이고, 한 분이면 한 분이지 어떻게 세 분이 하나이냐? 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어려워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런 예를 들기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어느 때는 남편으로, 어느 때는 아버지로, 어느 때는 직장인으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면 이 교리는 어려울 것도 없고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의 한 남자는 나타나는 모습은 달라도 한 남자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동시에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왜 이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에게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도 없는데 왜 이런 어려운 말을 만들어서 복잡하게 하느냐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교리는 인간의 하나님 경험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경험하고 성령 하나님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이 진리를 알기 전에도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이셨습니다.

구약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이 계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창조에 참여하셨습니다.

창세기 1 26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을 삼위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려진 것은 제일 먼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더 설명할 필요 없이 구약에서 창조의 하나님으로 구원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하나님을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고민과 혼란을 안겨주신 분이 나타나셨으니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30살 때까지는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아주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고 나타나신 후 그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시작합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고 악한 마귀와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권세 있는 말씀들을 전하십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는 일을 통하여 이분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메시야 구세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후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시면서 승천하시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분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고 이구동성으로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열흘 만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 분의 강림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외국에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제자들의 입에서 유창한 외국어가 쏟아졌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을 무서워하여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설교가 한꺼번에 3천명의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이 집을 팔고 밭을 팔아 제자들의 발 앞에 두고 그것을 제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이 서로 나누어 쓰는 상부상조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한 기적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성경에 원래부터 있었던 내용이기는 하지만 성부 하나님에 대한 경험, 그리고 성자 예수님에 대한 경험, 성령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세 분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은 동시에 한 분이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라는 표현은 성자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창세전에 이미 계셨으며 성부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함께 동역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0절에 보면,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했습니다.

예수님도 창조자로서 함께 창조사역에 동참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의 말씀은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의 중요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존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신도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입니다.

요즘 많은 기독교 이단들이 자신들의 교주를 재림주 보혜사 성령님 등으로 선전하며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데 여러분, 어떤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사위일체나 오위일체 육의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안상홍 장길자 이만희 문선명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가 될 수 없고 보혜사 성령님이 될 수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누구도 절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영광과 예배와 존귀를 받으실 분은 오직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만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 삼위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죄악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속죄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대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신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인줄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은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그 하나님을 섬겨야 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이라고 하나님이 그것도 삼위의 하나님이 이토록 역사하시고 희생하시고 연합하시어 은혜를 베풀어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은혜를 생각할 때 너무나 죄송하기도 하고 너무나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제가 첫 목회자에서 그 다음 목회지로 옮길 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독목회 5년차인 저에게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면 몰라도 지금 단독목회를 5년씩이나 하고 있는데 부목사로 간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받아들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누워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열어보니 부목사로 오라는 교회의 나이 드신 장로님들이 오신 것입니다.

그때 제 생각에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 하면은,

제가 무엇인데 이 새벽에 이 먼 곳까지 그것도 나이가 지긋하신 장로님들이 오셨을까?’

내가 무엇인데 이렇게까지 하실까?’ 그런 생각이 들어갔을 때 저는 두말없이 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저는 또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부 사랑의 동산에서 하는 뜨레스디아스 집회에 갔을 때 저는 정말 엄청난 사랑과 호의를 받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부 이런 호의를 받은 것입니다.

그때 제 생각이 내가 무엇인데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하고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는가?’ 너무나 고맙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친절과 생각외의 호의에 대해서도 이런 고마운 감정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하신 일을 볼 때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럽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무엇이라고, 뭐가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우리를 위해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까?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신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은혜를 깊이 느낄 수 있고 이 감격을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정말 깊이 느끼고 감격스러워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노예상인으로 많은 흑인들을 잡아다가 팔았던 존 뉴톤이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구원받은 감격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는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시기 위해 성 삼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우리도 이런 감격적인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입니다.

누구와 같은 죄인이 아니라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온갖 고통을 당하시고 피 흘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입니다.

이 시간 삼위 하나님이 저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며 뉴톤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찬송가 305장입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는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고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성 삼위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복음에 헌신하도록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 역사하시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셨다고 하면 우리도 이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은 사랑의 사역이었습니다.

희생의 사역이었고 겸손의 사역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 삼위 하나님의 협력 사역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감당하는 우리도 이와 똑 같은 모습으로 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모범대로 이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 되는 협력을 통하여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실 때 지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7:11)

우리와 같이, 나와 하나님이 일체가 되신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이 되는 줄 믿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함으로서 하나 됨의 힘과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복음을 증거 하는 선한 일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앙이 주는 교훈은 협력하고 돕고 하나 되어서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삼위일체 교리는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만 삼위일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서였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오셨고 성자 예수님이 오셨고 성령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에게서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있을까요?

사랑의 모습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겸손의 모습, 희생의 모습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감동과 감격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겠습니까?

성 삼위 하나님을 경험한 흔적이 우리 가운데서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barnabak

인생의 보물과 보배 잠21:20, 4:46-54

 

'뉴질랜드'라는 나라는 참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높은 국민소득과 잘 가꾸어진 자연환경, 그리고 국민들은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가려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뉴질랜드에 입국할 때 세관신고서를 보면 "뉴질랜드에는 절대로 음란 비디오, 음란 서적과, 마약 등 등 가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독버섯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지하고 계신 분은 신고하여야 하며 돌아갈 때 반드시 다시 찾아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당신이 감옥에 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것을 가지고 들어가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들도 한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신령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 음욕에 빠지게 하는 것들, 욕심과 탐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 집착하게 하는 것들, 구습과 안일함과 나태함, 세상 연락, , 담배, 도박, 마약 등, 이런 것들은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들입니다.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내려놓지 못하고 있거나 숨기고 있는 이런 것들이 정말 하나님과 멀어지고 지옥에 가는 것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혜로운 자들이 꼭 지녀야 할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인생의 보물과 보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생의 보물과 보배는,

 

 

 

1.진리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자로 이끌어 줍니다. 33:6"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33:6)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며, 더욱 바로 알게 되고, 가까이 하게 되며,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자에게 참 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9:10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했습니다. 111:10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참 지혜의 사람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구약 본문 잠21:20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했습니다. 지혜를 가진 자는 무엇이 보배이고, 무엇이 가치 없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는 자가 됩니다. 말씀은 내게 참된 지식과 지혜를 더하여 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씀을 소중히 여기게 되어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가 됩니다. 주의 말씀은 나를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독실한 신자였는데 그는 작은 범죄도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한 번은 암스트롱이라는 좀도둑이 양을 훔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때 암스트롱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낸 후 간수를 불렀습니다. “나는 어차피 죽을 몸,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고 싶소. 임금님께 내 뜻을 전해주시오제임스 1세는 그 소식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참 기특한 죄인이로군.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 그리고 성경을 모두 읽은 후에 사형을 집행하라암스트롱은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루에 딱 한 절씩만 성경을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임스 1세는 그를 풀어주며 말했습니다. “집에 가서 성경을 읽어라

 

암스트롱은 그 후 새사람이 되어 봉사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항상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는 자는 지혜로워져서 인생을 바로 사는 자가 됩니다. 소유가 많아져도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말씀은 늘 검소하게 살면서 물질을 가치 있는 일에 사용 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의 해부학자 히르를(Hyrtl Joseph, 1810-1894)은 대단히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라하나 빈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퇴직한 그는 페르히릇돌프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찌나 옷차림을 초라하게 하고 다녔는지, 모르는 사람은 그를 말할 수 없는 가난뱅이로 볼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불쌍한 할아버지"라고 하며 빵 한 개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이튿날 히르를은 그 소녀에게 크고 아름다운 인형을 선물했습니다. 이렇듯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봉사하는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말씀 안에서 바르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모두가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검소한 사람이 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말 것'(31: 27) , 절제할 것(딤전3:2), 사치하지 말 것(벧전3:3-5), 그리고 '성도는 마땅히 규모 있게 행해야 한다.'(2:5, 살후3:7) 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의 말씀을 나의 보배와 보물로 삼고 사는 성도가 됩시다.

 

 

 

2.진리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귀해도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따르지 않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따를 때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을 통한 약속들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말씀 그대로 믿어 복을 받은 예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벨은 믿고 나아갔더니 그 예물에 증거를 받았고, (11:4) *에녹은 믿고 나아갔더니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승천했으며, (11:5)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 믿고 방주를 짓더니 마침내 멸망의 날에 구원을 받았고, (11:7).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고 갔더니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며, *다윗은 믿고 갔더니 적장 골리앗을 물리쳤고, (11:32) *다니엘과 사드락 아벳느고는 믿고 갔더니 사자의 위험과 풀무불의 위험을 피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11:38)

 

이처럼 말씀을 믿는 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약속하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신약 본문의 말씀을 보면 왕의 한 신하가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그는 왕의 신하의 신분이기 때문에 모든 면으로 부족함 없는 자로 이름 있는 의원을 찾을 수 있었지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와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부탁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본문 5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는 소식을 듣고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에 가득 찬 약속을 내 것으로 삼는 비결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 하면서 소망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기적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잊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약속의 말씀을 하신 주님을 신뢰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때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60년대 말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올랐던 여배우 가운데 패트리샤니일이라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 패트리샤가 뉴욕에서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길을 건너가고 있었을 때 지나가던 자동차가 그들을 치었습니다.

 

어린애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고, 2년 뒤에 딸아이 하나는 홍역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1965년 패트리샤 자신도 유출혈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참고 또 참아 마침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우로서의 최고 영예인 오스카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신문 기자가 그녀에게 용기의 열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패트리샤는 방안에 있는 액자를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문을 두드릴 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대답을 했다. 그러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즉 시험이 올 때 신앙으로 대답하면 시험은 도망가고 만다는 말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생애에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이 시험을 통하여 우리는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게 되고, 섬기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됩니다. 이 시험을 통해 온전히 성장하게 되고, 모든 것에 구비하게 되고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우리 모두 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을 보배와 보물로 삼고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3.말씀의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의 믿음을 보면 그의 믿음이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의 소문을 듣고 주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본문 48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면서도 믿지 않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처음에 주님이 행하신 표적의 소문을 나아 온 믿음이었고, 좀 더 나아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집으로 향했고, 가는 도중 아들이 낳았다는 말을 듣고 낳은 시간이 주께서 말씀하신 시간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후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는 자가 되어 온 가족이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에서 오는 표적 보다, 믿음으로 받는 복 보다,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가장 소중한 보배로 삼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중심이요, 핵심입니다. 믿음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요5:39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하셨고, 5:46에서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 사함을 받게 되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질그릇에 담긴 보화로 비유했고, 2:3에서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했습니다. 무디 목사가 시카고에 있는 교회에 시무할 때 큰불이 나서 예배당과 성경 학교와 주택이 모두 타서 없어지고 '무디'는 겨우 몸만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친구가 찾아와 '화재로 인해 모든 것이 타버렸다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나의 모든 것이 타버렸지만 그래도 제일 귀한 보배는 잘 간직되어 있다네'하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는 기뻐하며 '그것 참 불행 중 다행이네. 그런데 그 보배는 무엇인가?'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무디는 평안한 모습으로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이시라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가리켜 보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썩어 없어질 것들입니다. 반면에 성도에게는 참 보배가 있습니다. 이 보배는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영원하고 썩지 않는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도들은 비록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지만 영원한 능력과 구원이 되시는 주님을 믿어 마음에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비록 어떤 환난과 시련과 핍박과 유혹이 몰려와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님님을 최고의 보배요, 보물로 여기며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인생의 보물과 보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인생의 보물과 보배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말씀의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멘.

 

<2023. 07. 14.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마음의 생각을 지키라 잠4:20-24, 4:8-9

 

어떤 스승이 바구니 안에 꽃을 담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인가?" 제자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꽃바구니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꽃을 들어내고 생선을 바구니에 담고 똑같이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생선 바구니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맞다. 똑같은 바구니이지만 꽃을 담으면 꽃바구니요, 생선을 담으면 생선바구니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안에 쓰레기가 담겨 있으면 쓰레기 같은 사람이지만, 그 안에 향기 나는 꽃이 담겨 있으면 향기 나는 사람이 된다." 내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이 달라지고, 나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내 마음에 악한 것으로 차 있으면 생각, , 행동이 악하게 되고, 내 마음에 예수님으로 충만하고 선한 것으로 차 있으면 생각, , 행동이 선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원천은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마음의 생각을 지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음의 생각을 지켜야할 이유는,

 

1.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4: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했습니다.

잠언을 기록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더욱 다른 지켜야 할 모든 것 보다도 우선적으로 마음을 지키라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도 지켜야 하고, 받은 은사도 지켜야 하고, 명예도 지켜야 하고, 건강도 지켜야 하고, 가정도 지켜야 하고, 사랑도 지켜야 하고, 우정도 지켜야 하고, 약속도 지켜야 하고, 재산도 지켜야 합니다.

 

본문에서 무릇 지켜야 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생명의 근원인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고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추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실 계획을 가지셨는데, 그 까닭은 창세기 6:5에 보면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계획이 나오고 계획에서 행동이 나오는데, 노아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악했습니다. 마음이 병들면 생각 자체도 병들어 버리고 계획 자체도 병들어 버리고 행동 자체도 병들어 버립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이 악해지면 거기에서 나오는 생각도 악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계획도 악하고 마지막에는 행동이 악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지킬 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즉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마음만 있으면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 사람도 하루에도 여러 번을 생각하고 그리워 하지만 마음이 없으면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릅니다. 마음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지도자 중에 백범 김구 선생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서민출신으로 어릴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리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돈으로 과거 시험의 당락을 결정하는 부정이 판을 치던 때라 백범은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예야, 너는 과거에 급제하기는 틀렸으니 풍수쟁이나 관상쟁이로 살아라."

 

백범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관상 책을 열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관상을 공부해보니 자신의 얼굴이 가난할 상이요, 살인자의 상이요, 온갖 풍파를 겪을 상이요, 비명횡사할 상이요, 감옥에 갇힐 상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온갖 불행을 내 얼굴에 다 지니고 어찌 남의 관상을 봐주랴.' 라고 탄식하면서 관상 책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다 펼쳐진 마지막 장을 보았더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관상이 신상만 못하고, 신상이 심상만 못하다(觀相不如身上 身上不如心相." 얼굴이 아무리 잘생기고 관상이 좋아도 몸의 건강에 못 미치고, 아무리 몸이 튼튼하다 해도 마음씨 바른 것에 비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문구를 보고 관상 책을 버리고 마음을 바르게 가꾸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김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에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는 마음이 의롭고 고결해서 후세 사람들이 존경하는 민족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백범 선생의 이야기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외모에 나타나는 관상이 아니라, 마음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에 따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자가 될 수도 있고, 심판 때 왼편에 있는 자들처럼 나는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고 주님께 외면을 당할 수도 있고, 선한 자가 될 수도 있고, 악한 자가 될 수도 있으며, 행복한 자가 될 수도 있고, 불행한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운명을 낳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근원인 마음을 잘 지키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마음에 주님을 품고 선한 생각으로 채워야하기 때문입니다.

 

4:8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건하다' 는 원어로 '셈나' 인데,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방탕하며 죄악 된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나 경건한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결하다' 는 말은 '하그나'라는 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쓸 수 있는 깨끗한 제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흠이 있는 짐승을 제물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깨끗하고 흠 없는 짐승만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럽고 추한 생각을 버리고 깨끗하고 정결한 생각만 해야 합니다.

 

4세기 교회의 지도자였던 어거스틴(Augustine)이 하루는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죽어 천국 문에 이르게 되어, 천국 문지기가 어거스틴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진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단호히 말합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머리와 생각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과 생각으로 누구인지를 판단합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 어거스틴은 생각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런고로 나는 크리스천답게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며 앞으로 정결한 삶을 살리라." 이 후 어거스틴은 깊은 영성의 사람이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영적 거인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고,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선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 놀라운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은 생각만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일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 중에 최규한 박사 팀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냈습니다. 온 몸이 마비가 되어서 손을 움직일 수 없는 분들을 위해서 기술을 개발했는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생각만으로 휠체어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외국에서는 사람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로봇을 개발 중이라고 합니다. 내가 할 일을 로봇이 내 대신 해 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의 성공과 실패도 생각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23:7에 보니 사람의 생각이 그러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다각도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학벌의 차이일까? 성격의 차이일까? 지능지수의 차이일까?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은 내용의 차이일까? 건강의 차이일까? 조사 결과 그런 것들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였다고 합니다. 어떤 생각을 갔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성공이라는 자리에 올려놓기도 하고, 실패라는 나락에 떨어지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에 주님을 품고 선한 생각으로 채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사단이 내 마음에 악한 생각을 심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어두움의 세력이 크게 역사 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데, 예수를 주로 믿기만 하면 저절로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상처가 다 치료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과거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또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시험에 빠지거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도 두 구멍이 있습니다. 하나는 더러운 구정물을 내는 정욕의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맑은 물을 내는 성령의 샘물을 내는 구멍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적극적으로 더러운 물은 퍼내고 차단해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고, 성령의 샘물은 열어서 마음을 언제나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본문은 '마음을 지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41:3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파숫군을 세워 지켜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불행한 일들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삽니다. 자라날 때,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박대를 당하고 혹은 부모 없이 고아로 어렵게 산 과거가 있을 때 이런 아픈 기억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 상처로 남아 있어 불쑥 불쑥 튀어 나와 아픈 과거를 생각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반영이 되어 또 다시 나의 현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운전하면서 앞을 보지 않고 계속 백미러로 뒤를 보다가 사고가 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후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기에 불행하고, 슬프고, 고통스럽던 과거의 생각을 회개와 기도를 통하여 다 씻어버리고 잊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43: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13-14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했습니다. 또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고 말씀합니다. 과거의 죄가 아니라도 과거의 불행했던 것도 죄와 똑같이 회개하고 청산해 버리면 주님이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가라지와 같은 과거의 나쁜 기억들, 두려운 마음, 미운 마음, 염려와 근심의 마음, 악하고 음란한 생각들을 가지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사단이 주는 생각들을 쫓아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해서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결국은 파멸로 몰아갑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에 말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5만에서 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하는데 그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25%만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관리하지 않고 그냥 놓아두면, 누구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나뿐 생각이 들어오면 핸드폰에 스팸 전화나 문자를 차단하듯 차단해야 합니다. 선한 생각에서 선한 행동이 나오고, 악한 생각에서 악한 행동이 나옵니다. 사단이 마음에 악한 생각을 심지 못하도록 마음을 잘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마음의 생각을 지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마음의 생각을 지켜야할 이유는,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주님을 품고 선한 생각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내 마음에 악한 생각을 심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맥추감사주일설교. 그리하면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 (잠언 35-10)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일 년에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상, 하반기 나누어서 감사를 드릴 수 있어서 더욱 감사 합니다. 지난 상반기 동안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은혜를 기억 하시며, 감사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께 최선의 감사, 최대의 감사, 최고의 감사를 올려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반기에도 범사에 감사가 넘치는 평안의 삶, 건강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잠언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받았습니다.“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셨다”(왕상 4:29)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동쪽 모든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의 지혜보다 뛰어났다(왕상 4:30)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은 이 지혜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왕상 4:32)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 말만 나오면 그대로 문학 작품이 되었습니다. 오늘 잠언의 말씀도 지혜의 솔로몬이 지은 수천 가지의 잠언 중의 한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의 제목으로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내 아들아라고 부르면서 나의 명령을 지키라라는 본문을 보듯이,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훈계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붙여졌나 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곧 우리들에게, 내게, 그리고 00교회에 주시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맥추감사절에 주시는 이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충만하게 채워져서, 더위 속에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지치고 짜증나는 삶이 아니라, 시원하고 여유로운 삶이되시기를 바라며, 더 감사하고, 더 사랑하고, 더 순종하는 복된 은혜의 말씀으로 역사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두절씩을 한 쌍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한 쌍마다 공통적으로, 무엇을 하면 어떻게 해주겠다는 식의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마치 신명기에서 순종하면 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다는 조건과 유사 합니다. 1~2절에, 평안하게 오래 살려면(장수) 법을 잊지 말고 마음으로 명령을 지켜야 하며, 3~4절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하게 여김 받으려면 인자와 진리(말씀=성령=예수그리스도)를 마음 판에 새겨야 한다고 조건을 달아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5,6, 7,8, 9,10, 두절씩 한 쌍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일컬어 신앙의 3대 근본이다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서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중요 하다는 뜻이겠죠. 저자인 솔로몬의 경우에도 이 세 가지 말씀에 붙어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아주 잘 지켰을 때는 지혜롭고 총명한 왕이었지만, 조건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자 여인들과 우상에 빠져 지내는 타락에 빠졌습니다.

 

신앙의 3대 근본으로까지 불리는 이 중요한 말씀을 감사절에 우리에게 내려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이 말씀이 지혜가 되고, 은혜가 되고,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한 쌍식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뢰하고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 하시리라 (5,6)

 

5, 6절을 읽어 드립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말씀에서의 조건은 신뢰인정입니다. 5절에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 하라는 말씀과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 서로 대립 됩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신뢰 했을 때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지혜보다 뛰어났는데, 그 지혜를 버리고 자신의 명철(지혜wisdom, 총명sagacity)을 과신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불법의 사람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으면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지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면 만사형통의 삶을 살게 됩니다. 모두 다 하나님이 전제 조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리에 가 그 자리에 들어가면 은혜도 사라지고, 지혜도 소멸 되고, 형통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뢰하라는 말씀은 매사에, 범사에, 순간순간 마다 나보다 훨씬 뛰어나신 하나님을 앞세우라는 뜻입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앞세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앞세우는 것과, 나의 지혜(지식, 능력)을 앞세우는 것이 항상 대립합니다. 하나님이냐, 나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가 신뢰의 정도, 수준을 측정하는 잣대가 됩니다.

 

또 하나의 조건은 인정입니다. 인정하라는 말씀 앞에 범사에라는 말을 덧 붙여 놓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기는 하지만, 범사에 인정하며 사는 것은 잘 하지 못합니다. 좋을 때, 풀릴 때, 부요 할 때, 기쁠 때, 평안 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인정하고 높여 드리는 것은 잘 합니다. 그러나 나쁠 때, 막힐 때, 가난할 때, 슬플 때, 화날 때에는 인정과 감사를 하기 쉽지 않습니다. 거의 되지 않으며, 할 의욕도 사라집니다.

 

이런 마음들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이 이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인정 되고 안 되는 분이 아닙니다. 문제에 따라 길을 열어 주실 수 있고 그렇지 못하실 분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과 문제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내 상황, 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 주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범사에(매사에, 순간 순간)인정하는 자세, 이것이 성숙한 믿음의 잣대입니다.

 

우리의 인생 길, 소망 길, 천국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 길을 열어 주시는 조건이 신뢰와 인정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Way Maker(길을 만드시는 분)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 “주의 일하심 볼 수 없어도주의 일하심 알 수 없어도주는 결코 멈추지 않네 / 주는 새 길을 만드시는 분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주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 주 우리 마음 만지시네주 우리 마음 치유하시네주 우리 마음 새롭게 하시네주 우리 마음 회복하시네너무 은혜로운 가사입니다.

 

이 찬양 가사가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고 인정할 때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는지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앞세우고), 범사에(매사에, 순간 순간) 인정하면 반드시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천국 길을 걸어거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연약합니다. 신뢰와 인정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뢰와 인정은 우리 인생길의 꺼지지 않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더욱 신뢰하여 하나님만을 앞세우시고, 범사에 하나님만 인정하며 높여 드릴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성장을 이루셔서, 감사와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천국길을 당당하게 걸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 그리하면 강건(윤택)해 지리라 (7,8)

 

7, 8절을 읽어 드립니다.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이 구절에서의 조건은 경외하는 것과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7절에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은, 앞서 5절에서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경외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스스로 지혜롭다(잘났다, 똑똑하다, 자신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은 곧 교만한 마음입니다. 경외함이 없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대부분 거만하고, 남을 낮게 여기고, 왕처럼 군림하며 살기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경외라는 말은 여러 번 말씀 드렸기 때문에 이제는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 앞에 존경을 표하며 엎드리는 것이 경외입니다. 경외는 자기가 죄인임을 절실하게 깨닫고, 하나님이 공의를 행사하는 분임을 알았을 때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언행을 다 보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시고,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경외함의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외함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잣대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참회와 돌이킴을 말합니다. 성령이 없이는 악을 분별할 수도 없고, 물리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이 없이는 진실한 참회를 할 수가 없고, 악에서 떠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와 어둠에 묶여 있는 원인은 성령이 나를 주장(이끄시도록) 맡겨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외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악의 영역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기 때문이고, 악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은 바로 성령을 근심시키고 성령을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유지 하느냐 못하느냐가 믿음의 잣대가 됩니다.

 

내 교만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고악에서 떠난 삶을 살게 되면 8절과 같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8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 드리면, “그리하면 네 몸이 튼튼해지고 뼈마디가 시원해지리라.” 라고 했고우리말성경에서는 이것이 네 몸을 건강하게 하며 네 뼈에 영양분이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경외함과 악에서 떠남으로 인한 유익이 육신이 건강하게 되는 복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영적인 유익이 곧 육적인 유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8절이 몸의 건강함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육 간에 강건함을 얻는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몸이 강건해지는 일체의 비결이 악이 떠나도록 회개생활 열심히 하고, 경외함이 넘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힘쓰는데서 비롯됩니다.

 

비싼 보약을 드시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시면 건강해 집니다. 이런 저런 건강 음식 드시는 것보다 참회의 기도시간을 가지면 몸이 건강해 집니다. 교만함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성령 충만함을 구하면 건강해 집니다. 악을 대적하며 물리치면 뼈 속까지 건강해 집니다. 의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이렇게 건강해 진다고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복중의 복은 건강이라고 했습니다. 건강 잃으면 다 잃는 것이고, 목숨이 다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육신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해 집니다. 정신이 건강해야 육신도 건강해 집니다. 주님은 우리가 육체로 사는 동안 영 육간에 강건하게 살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경외 하는 것,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성령 충만하심으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외의 시간을 보내시고, 날마다 전심으로 회개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계속하셔서, 몸이 건강하게 유지 되고 뼈 속까지 하늘의 능력으로 회복되시는, 그야 말로 영육간의 강건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께 예물 드림으로 공경하라, 그리하면 차고 넘치리라 (9,10)

 

9, 10절을 읽어 드립니다.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구절에서의 조건은 공경하는 것입니다. 공경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재물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를 사용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서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한다(52:7)고 했으며, 재물()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서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만든다(딤전 6:10)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물의 풍성함을 막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겠다”(5:19고 하셨고,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빌리지아니하겠다”(15:6)고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채우시기도 하시고 빼앗아 가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재물은 마치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솔로몬은 일천 마리나 되는 엄청난 희생제물을 드려본 경험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재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강조 합니다. 특히 믿음이 막 자라나고 있는 청년들에게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것이 여호와를 공경하는 방법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 주는 재물관입니다. 재물이 주는 불의한 영향력에서 벗어나, 내게 주신 재물이 내 삶과 인생에 올무가 되지 않게 하려면, 재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재물관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며 모든 재물 중에 구별(성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즐겨내는 자가 복 되도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풍성함의 재물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드리고, 다시 받고 다시 드리고, 이런 반복적인 순환 구조가 바로 올바른 재물 사용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0, 21)고 하셨습니다. 또한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에게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가자 이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9:24)고 말씀 하셨습니다.

 

재물, 돈이라는 것이 움켜쥐기는 쉬우나, 누구에게 베풀고, 나누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재물이 주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마음 보다, 불의한 마음을 품는 것이 훨씬 더 강하게 작동 합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인간 본성을 이겨 내지 못하면 재물이 곧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나를 조종하고, 통제하여, 결국은 자신의 인생이 재물에 함몰되는 불행한 결과을 낳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한 것은, 금은보화, 보석 재물이 다 무슨 소용이냐, 인생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억만금의 재물도 나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없다는 교훈을 말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기 자신이 재물의 부요를 누릴 대로 누려 봤지만 우상에게 지배당하는 처참한 실패의 상황을 직접 경험해 봤기 때문에, 헛되고 헛된 인생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을 겁니다.

 

그런 그가 재물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하는 권면은 두 번 세 번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특히 청년 세대, 젊은 세대들은 더욱 더 재물에 대한 열망과 간절함이 많은 시기이기 때문에, 이 때일수록 처음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비법을 몸에 베이게 한다면 동료들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풍성하고 여유로운 재물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우리 자녀 세대들에게 이런 재물관을 잘 가르치셔야 합니다.

 

재물과 소산물의 의미를 구약 시대의 십일조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어떤 항목을 정해서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도 곡식을 염두에 둔 말씀이기는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솔로몬은 재물이 자신의 수중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며, 그 주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신앙의 근본 요건 중이 하나임을 힘주어 강조 했습니다.

 

재물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조건이 완료 되었을 때 누리는 유익이 10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아멘.

 

오늘 설교 제목, “그리하면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라는 말씀이 이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그리하면이라는 조건이 9절의 조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설명 드린, 5절의 조건, 그리고 7절을 조건을 모두 포함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는 말씀이 너무나 받고 싶고 누리고 싶은 소망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든 가정이 가득히 차고 넘치는 복을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기도하고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가득히 차고 넘치는 하늘의 지혜를 받아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소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시고,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하면이라는 조건들을 순종으로 이루어 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10100배에 해당하는 가득히 차고 넘치는 복의 복으로 역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미 차고 넘치는 복이 흘러오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은혜가 밀려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들이 행하여야 할 조건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신뢰와 인정’, ‘경외와 악에서 떠나는 것’,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건이 믿음의 사람들이 지켜가야 할 신앙의 3대 근본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조건들이 완성되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 하시시라”, “그리하면 영 육간에 강건해 지리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 복중의 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복을 다 받아야 갰다는 욕심을 크게 내십시오. 3가지 복중의 복을 하나라도 마귀에게 빼앗기지 마시고 다~ 누리시고 다~ 베푸시고, ~ 감사하시면서 살아가셔야 합니다.

 

맥추 감사절에 우리는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실 때, 즐겨내는 기쁜 마음으로 더 드리고, 더 받으시고, 더 드리시고, 더 받으시고, 계속해서 순종하시면서 그리하면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는 풍성함과 부요함이 모든 분들의 가정과 일상과 자녀의 미래 위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복의 복을 누를 수 있도록, 먼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인정하고, 경외하고, 공경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차고 넘치는 복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말씀과 변화 (4:20-27)

 

이 시간에 말씀과 변화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장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성경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1:1-2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1절과 2절이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그 비밀이 바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온전하게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통한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4장에도 이와 같은 구도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충만하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1. 생명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22절에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는 생명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지키면 생명을 얻지만 지키지 않으면 생명을 잃습니다. 환자에게 적절한 지침이 생명을 좌우하는 것과 같습니다. 치유사역하면서 느끼는 것은 의학적 교리가 생사를 가른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를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요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27살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낙담과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그의 병은 오히려 더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병으로 죽을 것을 생각하자 겁이 났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을 도와 줄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호흡을 하듯 약을 먹듯 말씀을 소리 내어 읽으며 외우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고하기를 내가 성경말씀을 외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정신병에 대한 고통을 책으로 써서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솔로몬의 부자학 31이라는 책을 펴낸 스티브 스코브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9번이나 직장을 잃고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다가 어느 날 대성한 백만장자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까? 저는 직장을 아홉 번이나 잃었습니다.” 그러자 백만장자가 말했습니다. “잠언서를 매일 한 장씩 읽으시오. 그러면 2년 안에 사장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 거요. 그리고 잠언 읽기를 계속하면 5년 뒤에 큰 성공자가 될 것이요.” 그래서 그는 날마다 잠언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10개의 회사를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잠언을 봤더니 성령의 감동이 제 가슴 속에 박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3장은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여쭈면 하나님이 네 길을 인도하신다는 말씀 감동스럽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동역하면 여러분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어린 시절 손자병법이라든지 중국의 고전을 많이 읽어 시진핑의 전술을 거울을 들어다 보듯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즉각 받아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책도 이런데 잠언 한 권이라도 열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잠언 속의 하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 영혼과 육체와 삶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2. 말씀 충만하면 입술에 변화가 옵니다.

 

24절에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했습니다. 말씀으로 충만하면 구부러진 말 비뚤어진 말 부정적인 말 절망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6:45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하신 것처럼 마음을 말씀으로 가득 채우면 자동으로 말씀이 튀어나옵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먹은 그것이 곧 내 몸이고 내 마음입니다. 음식이 우리 육체와 정신에 영향을 미칩니다. 몸은 속일 수 없습니다. 먹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왜 찬송이 없습니까? 왜 기도가 없습니까? 왜 전도하지 못합니까? 기뻐하지 못합니까? 말씀을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일 같이 성경 보면서 일용할 말씀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따분하고 의욕도 없고 기도도 나오지 않고 무료한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무조건 성경 보세요. 성경을 보라는 사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말씀 묵상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바른 자세가 갖추어지기 때문에 그 자체가 경건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도 말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대뇌학자는 우리의 뇌세포는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 했습니다. 말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묵상하면 우리의 인생이 바꾸어집니다.

 

3. 말씀 충만하면 눈에도 변화가 옵니다.

 

25절에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신령한 눈이 열립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관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다 보는 것 같지만 실재로는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입니다. 미용사의 눈에는 헤어스타일이 먼저 보입니다. 옷 장사는 다른 것보다 패션이 보입니다. 의사도 환자가 시계를 찼는지 반지를 끼었는지 관심 없고 건강상태만 봅니다. 관점이 다릅니다. 이처럼 사람은 외모를 보고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진리가 안 보이고 천국이 안 보인다면 문제입니다. 롯은 죄악의 소돔성이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였기에 패가망신했습니다. 세상이 좋게 보이고 매력적이게 보이면 안 됩니다. 성도의 눈에는 신앙이 가장 귀하게 보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여야 합니다.

 

성도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으로 보이고,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이 보이고, 충성의 너머에 축복이 보이고, 성도가 내 형제로 보이고, 고난이 변장된 축복으로 보이고, 죽음의 너머에 천국이 보여야 합니다. 상상할 수 없이 아름답고 좋은 천국이 보여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 바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장 신령한 사람은 말씀 충만한 사람입니다.

 

4. 말씀 충만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26-27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가게 합니다. 그래서 시119:9"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이 성경을 가까이할 때는 항상 바른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성경 멀리하면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바로 적용하면 우리들입니다.

 

두려운 것은 말씀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단이 왜 생깁니까? 살후2:10-12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성경을 멀리한 자에 대한 일종의 심판입니다. 개인에 대한 심판이요, 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

 

죤 훌리(John Fully)박사가 노벨상 수상자 400명을 15년간 연구하여 낸 책이 [유대인과 기독교인](Jews and Christian)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종교 분포도가 기독교인이 64%, 유대인이 22%, 천주교가 11%, 불교인이 0.9%, 회교가 0.1%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이 97%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노벨상을 받은 이들의 나라는 모두 23개국이었는데 1등부터 7등까지 보면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네델란드, 영국, 미국, 독일 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움직여지는 나라들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우리가 믿는 신앙이 확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80세 된 스위스의 한 노인이 인생을 돌아보며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계산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잠을 잔 시간 26, 직장에서 일한 시간 21, 식사 시간 6, 화내는데 6, 사람을 기다리는데 5년을 썼다고 합니다. 28일간 이발하고 수염을 깎는 데 보내고 26일은 아이들에게 화내고 잔소리하는 시간으로 보냈고, 넥타이를 매는데 18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기뻐했던 시간은 모두 합쳐도 46시간 밖에 되지 않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일생 성경은 얼마나 읽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듯 모든 신앙은 말씀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기에 말씀 충만이 예수 충만이고 믿음 충만입니다. 말씀으로 충만할 때 마음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시각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습니다. 우리 모두 성경을 읽고 교회 출석 잘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가장 복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잠언22;6, 마태복음28:19-20

찬 양 : 225, 563, 564, 565, 566, 570.

 

할렐루야!!

오늘 저녁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이 시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이 어린이주일이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어린이들이 성장을 하여서 성인이 된 다음에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교육을 받지 못하면 미개인이 될 수밖에 없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흑인들이 왜 백인들에게 노예생활을 했습니까?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구상의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항상 지배를 당하는 민족은 지배를 하는 나라보다 못 배우고 또 그래서 가난할 때 지배를 당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일본제국주의에게 왜 36년간이란 긴 세월을 억압을 당했습니까?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그 사람의 인격을 높여 줄뿐만 아니라 바른 인간이 되게 해 줍니다. 또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많이 배운 사람이 더욱 출세를 하게 됩니다. 앞으로는 더욱 치열해 질 것입니다. 과거 50년대 60년대까지만 해도 똑똑하기만 하면 출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안 됩니다. 간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대학을 가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대학원을 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또 박사 학위를 받고 합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나와서 직장에 취직을 하였다가 그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많이 배운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 증거입니다.

 

그런데 교육이란 지식만을 배우게 하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삼위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가정이라는 소집단을 통하여 인간교육을 하여야 하고, 학교에서는 지식을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영적 교육을 통하여 그 사람의 영성을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만약에 이 삼위일체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고 어느 한 부분이 결여된다고 하면 완전한 교육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대개 탈선하는 청소년들을 보면 결손가정의 자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보아서도 가정을 통한 인성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지식만을 위주로 한 교육만을 받게 되면 그 배운 지식을 바로 활용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방법에 사용하게 되어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교회의 교육은 영적 지혜를 가르치는 교육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력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올바로 사용하는 것인가를 알게 되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므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교육은 에너지와도 같습니다. 공장의 기계가 움직이는 데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기계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원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원동력이 바로 전기입니다. 전기는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육중한 기계라도 움직이고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공장에 최신식 첨단 기계를 설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장에 동력이 연결되지 않아서 기계를 돌리지 못한다면 그 기계는 머지않아서 녹이 쓸어서 고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최고의 지식을 배우고 공부를 하였다고 하여도 그 지식을 활용하고 배운 것을 잘 운영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 배운 지식을 잘못 사용하여 마치 고철과 같은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교회에서의 교회학교 교육이야 말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사야말로 그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 가르침의 중요성

 

(28:19-20)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교회의 사명은 선교와 교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은 주님의 최후 명령이며 또한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6:6-9)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2.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1)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6:6-7)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28: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2) 주님의 교훈과 훈계를 가르쳐야 합니다.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자녀 교육의 2대원칙이 바로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시대는 자꾸 변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생각과 부모들의 생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부모의 생각대로만 해 줄 것을 요구해서도 안 되고 자녀들의 생각이 부모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노엽게 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잘 양육한 모범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2:1-10절에는 모세의 출생과 유년기의 과정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서 석 달 만에 나일강에 버려져야 할 운명에 처했지만 기적적으로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이 되어서 구출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생모가 되는 요게벳은 유모가 되어서 모세를 키웠는데 애굽의 왕자로 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인의 지도자로 양육을 하였습니다.

 

삼상1:11-20절에는 사무엘의 출생과 유년기의 성장과정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아들 사무엘을 낳았고 그를 젓 뗄 때에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로부터 사무엘은 하나님의 집 지금의 교회에서 성장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전무후무한 선지자가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딤후3:15절에는 디모데를 신앙의 사람으로 잘 양육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딤후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3:14-15)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에게서 성경을 배웠겠습니까?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배웠습니다. 무엇을 배우든지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 뼈마디가 굳어지기 전에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모차르트는 세 살 때부터 작곡흉내를 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성경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가르치기 어려우면 교회로 보내면 됩니다. 교회 가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치면 그 아이가 자라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진실 된 믿음의 본을 보여주지 못할 때에 자녀의 믿음은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 서울에 있는 중앙 침례교회의 원로목사님이신 오관석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어렸을 때에 집안도 넉넉지 못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목사님이 오시게 되면 온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고 또 옷을 갈아입히고 하얀 쌀밥을 짓고 온갖 정성으로 반찬을 장만하여 대접을 하는 것을 보면서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높은 사람인줄 알고 자기도 커서 목사가 되겠노라고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부모가 어떤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자녀들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1장과 3장에는 솔로몬이 그의 부친으로부터 받은 교훈을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3:1-4)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3. 누가 가르칠 것인가?

 

이와 같이 교육 즉 가르침의 사명은 참으로 위대하고도 중요한 것인데 누가 이 사명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교회에서도 교육이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교사들이 열심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쳐야 합니다.

누구에게 미룰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다 주님으로부터 이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은 생명 걸고 목숨 바쳐서 행하여야 합니다. 2:10절 말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년에 한 번 어린이주일이나 되어야 어린이들의 교육과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는 척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교육은 1365일 전천후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날 교회에 보냈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자녀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권면하고 열심히 가르칠 때 비로소 올바른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세계적인 암 전문의로 유명한 원종수 박사님이 한때 병들고 가난하여 소망이 없어서 자살을 하려고 서울대 옥상을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어머니가 종수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자살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박순애 전도사도 자살을 하려고 할 때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서 자살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위기 속에 놓이게 될 때에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어머니는 그 자식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철저히 시켜서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이 시대에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지혜로 세운 집 잠24:3-4 (이사심밤)

3.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4.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시인 호프 켐벨언제나 밖으루 내다보아 주께서 그대에게 보내시는 햇빛을 맞아라.”고 했다. 주를 의뢰하고 주께 갈 길을 맡기는 신앙인의 자에는 아름답다. 성도들이 세워야 하는 영적 건물이요, 성전인 자신을 바람직하게 세우는 비결은 무엇인가?

 

1. 주의 터 위에 세워야 한다.

건물을 잘 짓자면 좋은 터 위에 훌륭한 기초공사를 필요로 한다. 바울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이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온전한 터가 되신 예수께 영적 기초를 두고 자신의 삶을 건설한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1) (고전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2. 영적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히 요구되는 것은 영혼의 지식과 주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이다. 아무리 학문이 많고 세상적인 지혜가 뛰어난 사람도 영혼의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는 성경의 연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3. 주의 교훈을 들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생들을 향해 베푸신 교훈은 참으로 은혜로운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음료로서 영혼을 살지우게 하는 복된 말씀이다. 양무리 된 성도는 양의 문이신 예수께 꼴을 얻자.

1)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3)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가정을 행복하게 15:13-24                                                         

 

'여러분은 가정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소유와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소유가 행복과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유를 통하여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행복을 주는 요소는 아닙니다. 어떤 이는 무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 버리고 산으로 들어갑니다. 수행과 득도함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전 공학 자들은 또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는 행복을 느끼는 뇌가 있어 그것을 조작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약물로 행복해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마약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정의 참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정이 행복해 지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16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소유나, 외적인 그 무엇에 있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행복의 첩경입니다. 잠언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는데 지혜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어디서 옵니까? 9: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이십니다. 또 건강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건강이 누구로부터 옵니까? 10: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고 했으니 건강하여 장수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하나님이 행복의 첩경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자녀가 잘 되는 것이 부모의 행복이요,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누가 줍니까? 14:26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고 하셨으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이들은 물질과 은사와 풍성함이 가정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어디로 옵니까? 1:17절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하셨으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추구합니다. 사실 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편리합니다. 그러나 꼭 행복과 정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설사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라고 할지라도 그 물질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9:2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으니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 재물을 얻는 비결입니다. 22:4절에서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최대의 불행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은 세 가지로 인하여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교통사고나 병, 재난,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므로 이로 인해서 불행해지고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인생의 허무감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놓으면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명예나 권력, 혹은 어떠한 목표를 이루어 놓으면 사람들은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살기가 어려운 나라에서 자살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이 풍요를 누리는 나라에서 자살율이 높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목표가 없으니 의욕이 있을 수 없고, 의욕이 없으니 권태와 허무와 허탈감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낙엽 떨어져 뒹구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무상함을 느끼고, 그래서 허무하고 허전하여 옷을 입어도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이 엄습하는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낙엽은 떨어지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곧 꽃피고 새우는 새봄이 되면 다시 예쁜 싹이 돋아 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인생의 허무감이 행복을 빼앗아 가고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죄책감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와 회개하고 자백하기만 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워 주시고, 또 인정도 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다윗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롬4:6-8절에 말씀하였습니다.

때문에 폴 틸리히가 걱정하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불행은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행복은 만들어진 완제품도 아니고, 유산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며, 더구나 운명도 아닙니다. 행복한 가정은 세워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함이 충만하기만 하면 행복한 사람이 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불행한 환경을 운명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D, 큐랜(Curran)은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서 500여명의 전문가들(학교장, 교도교사, 일반교사, 교회목사, 교육담당 전도사, 소아과의사, 가정의사, 정신과의사, 사회사업가, 간호사, 가족상담 및 가족치료사, 자원봉사단체 지도자)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응답한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요약하면 10가지입니다.

 

1)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공통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는 가정,

2)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자발적이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가정,

3)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가정,

4)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 줄 아는 가정,

5)가족 구성원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6)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고 개성을 인정해 주는 가정,

7)가족 구성원들이 동일한 전통과 풍습을 공유하고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하는 가정,

8)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웃과 인류에 대한 봉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9)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공동책임을 자각하고 감당하는 가정,

10)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문제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할 만큼 열린 가정이 건강한 가정의 특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행복한 가정의 첫 번째 순서는 바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의 요소와 상관없는 삶을 살기에 남다른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2. 마음에 즐거움이 있는 가정

 

13, 15절입니다.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즐거우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생각과 근거에 차이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락을 함으로 즐거움을 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미 우리는 기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근심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었습니다. 인간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무엇을 소유해서 기쁨을 얻는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이 계시고, 그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16:22)

 

다윗의 고백이 하나님을 자기 옆에 모시고 살 때 참으로 기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6:8-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니 마음도 기쁘고 영혼도 기쁘고 육체도 편안하다고 했으니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모실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관계로 인해서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고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받고 기쁨을 빼앗긴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하고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해야 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고 사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돈을 잃는다고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잃고 신앙을 회복하고! 잃었던 하나님을 더욱 붙잡게 되었다면 그 잃은 돈은 나의 은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빼앗기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우리 믿음의 가정 식구들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물질의 풍요도, 자녀들의 출세도, 가문의 명예도 아닙니다. 성경을 몇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는 합3:17-18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둘째는 기도 응답으로 기뻐하여야 합니다.

16: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하여 응답받은 한나는 노래하기를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9:22절에 에스더는 기도가 응답될 때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기뻐하여야 합니다.

19: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좀 특별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16:22) 전에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13:52) 5:41절에는 사도들이 예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자유 하는 자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곤욕스러운 채찍이 우리 속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였습니다.(고후8:1-2) 이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하시고 유지하시고 빼앗기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3. 가장 가까운 식구들끼리 더욱 사랑하는 가정(:17)

 

17절입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공동체는 남남이 모여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있는 대로! 생긴 대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내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잖습니까?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생긴 대로 할 수 있는 것만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연장자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동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어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 무엇이 최대의 이단이냐? 최대의 이단은 교의상의 이단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이단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른 집을 부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무식하여도 내 아버지 내 어머니요,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내 아들 내 딸입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내 사위이고, 내 며느리입니다. 아무리 형편없이 가난하여도 내 남편이고 아무리 못생겼어도 내 아내입니다. 내가 어려움 당하고 내가 고난에 처하면 이웃집 그 누가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내 식구요, 내 가족입니다. 가족끼리 먼저 사랑하여야 합니다. 성경도 말씀하기를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식구들에게 이 선을 행하되 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 했으니 성도들이 먼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1)마땅히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16:15, 삼상18:1)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라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생명같이 사랑했는데 이때 그들의 마음과 마음이 연락되었다고 했습니다.

2)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여야 합니다.(29:20, 34:19 살전1:3)

야곱이 라헬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라헬을 위하여 수고하는 칠 년을 수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29:20)

3)목숨까지 주어야 합니다.(살전2:8, 15:13, 2:20)

사랑하면 목숨까지 줄 수 있게 됩니다.(살전 2:8) 주님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15:13)

 

9일 동안 천국 만들기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나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 하자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청소 좀 할래?”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나님이 다시 와서 말했습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그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9일 동안 천국 만들기의 기적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희생의 길은 행복으로 가는 밝은 길입니다.

희생의 짐을 지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걸 때, 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

더 나아가 죽이고자 하면 죽고, 살리고자 하면 삽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잘 소화하는 소화력이 있을 때

행복의 키가 부쩍 자라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충심으로 경외하고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지 마시고 오직 무조건 사랑하셔서 가정을 행복하게 이루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족하는 자의 여유 잠30:15-16, 4:10-20

 

어느 마을에 아주 돈이 많은 백만장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일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저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주식투자를 잘못해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은행에 잔고를 조회해 보았더니 십만 달러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꽤 많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은 시골에서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조카가 한 사람 있을 뿐이었습니다. 남은 십만 달러는 자동적으로 그 조카에게 유산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가난하게 살던 그의 조카가 뜻밖에 십만 달러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되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십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십만 달러인데 한 사람은 너무 적다고 죽고, 한 사람은 너무 많다고 죽고 말았습니다. 백만장자 였던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을 몰랐고, 어렵게 농사를 짓고 살았던 조카는 풍부에 처할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평소에 주님 안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더라면 그와 같이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자족하는 자의 여유라는 제목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자족의 은혜를 배우기를 소망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는 자에게는 자족도 여유도 없습니다.

 

구약 본문 잠30:15-16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끊임없는 욕망의 망령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먼저 거머리로 비유했습니다. 이 거머리는 피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번 붙으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처음에는 작은 모양의 거머리이지만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기 시작하면 어떤 것은 손가락 굵기 만한 정도로 크지만 "이젠 됐다"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에 음부로 비유했습니다. 창세 이래로 음부는 죽은 자를 받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생명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또 아이 배지 못한 태로 비유했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태는 계속해서 잉태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계속 물을 부어도 한없이 스며드는 땅으로 비유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흔적 없이 태워버리는 불로 비유했습니다.

 

이는 모두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빗대어 말한 비유입니다. 세상의 영화를 마음껏 누려본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가 쓴 전도서 2장에 보면 술로 마음을 즐겁게 해 보려고 술도 마셔 보았습니다. 향락 사업을 크게 하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과수원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공원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금은보화를 욕심껏 가져 보기도 하였습니다. 기생들을 두고 노래를 시키고 흥을 돋구기도 하였습니다. 처첩을 천 여 명을 두어 보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향락과 방탕의 극치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눈에 원하는 것은 다 해 보았습니다. 그 마음에 즐거워하는 것은 모두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 나는 만족하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해 아래 모든 수고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된 것이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사람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탐심과 욕심의 문제가 우리 마음속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탐심의 문제가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만족할 수 없게끔 만들기 때문입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고, 여유도 없고,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채우고자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 욕심은 집착으로 이어지고, 집착은 다시 무리수를 두도록 만들기에 죄를 짓게 되는 겁니다. 시험 드는 것도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는 약1:14-15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했습니다. 우리 모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욕심에 이끌려 살다가 심판에 이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2.자족하는 마음과 여유는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옵니다.

 

신약 본문 빌4:11-12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주님 안에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무한한 공급자가 되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안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필요한 것을 주께서 채워 주심을 믿었기에 어려움 중에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4: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돌섬은 보기에는 미미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작은 돌섬은 아무리 큰 풍랑이 휘몰아친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수 만 톤의 군함이 와서 밀어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함이 밀려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돌섬이지만 그것이 지구 땅 덩어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는데 어떤 풍랑이 감히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서 보호함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떤 근심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무신론자로서 변호사였던 클래렌스 대로우가 미국의 경기가 아주 나빴을 때 시카고 남부 지역에 있는 흑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궁핍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간신히 연명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환한 얼굴로 찬송을 부르는 모습에 대로우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로우는 묻기를,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도 당신들은 행복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흑인여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대답에 많은 사람들이 "아멘!" 하면서 외칠 때 그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비록 비참한 환경 속에 빠져 있었지만 자기들이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안에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시다면 어떠한 환난 가운데도 기뻐하며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늘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천에 처할 때도 자기의 비천함을 바라보지 않았고, 풍부에 처할 때도 풍부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비천할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처한 여건과 환경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선을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우리 안에 자족의 마음과 여유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3.주님 안에서 자족하는 자에게 환경에 메이지 않는 여유가 있습니다. 신약 본문 빌4: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은 어려웠습니다. 가정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나 자식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모함을 받아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항상 따라다니는 삶이었습니다. 감옥에도 여러 번 갇혔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했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했고,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배웠다는 단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련에 시련을 겪고, 시험에 시험을 이기고, 어려운 극한 상황에 맞닥뜨리며 깨닫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족의 비결을 배운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지 않고 환경을 변화 시키는 사람으로 삽니다.

 

어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에 누가 거기 있느냐 여하에 따라서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누가 그 집에 사느냐에 따라서 지저분한 집이 될 수도 있고 깨끗한 집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누가 모이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가 될 수도 있고, 싸우고 분쟁하며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강남에 가면 개포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왜 그 동네가 개포동인가 하니 사람이 하도 살기가 더럽고 지저분한 동네라서 개도 살기를 포기했다고 해서 개포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이 거기 가서 살기 시작하면서 아름답고 좋은 환경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개포동 신문에 우리는 아직도 이 동네를 개포동이라 부르고 삽니다. 왜냐하면 개도 포기한 동네가 이제는 개도 포텐샤를 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는온도계와 같은 사람이 있고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갑니다. 날씨가 더우면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고, 사업이 잘 되고, 수입이 많아지면 기분이 업 되고, 그 반대가 되면 우울하고, 화가 나고, 저기압이 됩니다. 신앙생활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기쁨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는 날씨가 추우면 온도를 올리고, 날씨가 더우면 온도를 내려서 온도를 조절합니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입니다. 온도조절기와 같은 삶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살면서 언제나 바울처럼 삶을 조절하면서 자족한 삶을 삽니다.

 

일체의 비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승리하는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풍요로운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인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 영원한 삶의 비밀을 알고 살아가는 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는 자에게는 자족도 여유도 없습니다.

 

.자족하는 마음과 여유는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옵니다.

 

.주님 안에서 자족하는 자에게 환경에 메이지 않는 여유가 있습니다.

 



성도가 가질 근면과 지혜 잠6:6-19, 12:1-13

 

큰 빚을 지고서도 게으름만 피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돈을 꾸어 준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돈을 갚을 생각이 있긴 한 거요?” “있고말고요. 당신의 돈을 갚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가 다 쉽지 않아서 답답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채권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대체 그 세 가지가 뭐요?” 그는 망설이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는 당신이 갑자기 죽어서 돈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좋겠고, 둘째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차용증서가 분실되든가 불에 타든가 했으면 하는 것이고, 셋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많은 돈을 주웠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이 없는지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군요.” 게으른 자의 머릿속은 악마가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게으름이 낳는 모든 결과와 생각은 허망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가 가질 근면과 지혜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성도는 개미의 근면과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구약 본문 잠6: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했습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개미의 근면과 개미의 지혜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미를 통해서 주시는 근면과 지혜의 교훈이 무엇일까요? 먼저 겨울이 옴을 아는 지혜입니다. 개미는 겨울이 옴을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압니다. 개미는 사는 동안 이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않고 삽니다. 겨울에는 물론이고, 겨울이 오기 훨씬 전인 봄, 여름에도 겨울이 온다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상에 사는 동안 멸종 되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능 안에도 마치 개미처럼 겨울 인식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계절적인 겨울뿐만 아니라 죽음이요 종말의 겨울을 알고 내가 그 죽음에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게다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자라면서 공부하며, 말씀을 통해 듣고, 또한 앞서 간 사람들을 지켜보며 경험으로 보다 확실히 종말의 내용과 의미를 확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기에게는 종말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자기에게는 노년기도, 죽음도, 종말도 해당 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모습이 미물인 개미 보다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는 모습니다. 다음에 겨울을 준비하며 사는 지혜입니다. 개미는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개미처럼 일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개미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개미는 실제 활동 시간의 1/3 밖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3-4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2/3 시간은 빈둥거리고, 쉬고, 주위 환경을 익히기 위해서 산책한답니다. 즉 개미가 부지런하다는 것은 일의 양이나 흘리는 땀의 양 때문에 붙여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개미는 일할 때를 알고, 일할 때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개미의 부지런함은 일할 때, 일할 필요가 있을 때, 일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본문 10절을 보면 게으른 자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일 할 때인데, 잠을 잡니다. 공부할 때인데 졸고 있습니다. 활동할 때인데 누워있습니다. 성도가 때로 쉬기도 하고, 다른 일 하기도 하지만 겨울 즉 죽음과 인생의 종말을 대비하는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 부지런히 준비하는 자가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그 모습이 겨울을 위해 대비하는 미물인 개미에게서 배울 지혜입니다. 그리고 함께 협동하는 지혜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개미는 누가 기획하고, 지시하고, 감독하지 않아도 모두가 스스로 알아서 자기 맡은 직무를 성실히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개미들은 서로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정말 효과적으로 함께 날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놀랄 정도로 일사분란 한 협력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선 개미들은 자기 역할과 직무를 잘 알고 그것에 충실합니다. 잘 아는 대로 개미 사회는 대단히 발달한 분업사회입니다. 여왕개미가 있고, 수개미가 있고, 일개미가 있고, 그리고 병정개미가 있습니다. 일개미도 저마다 역할이 다 다릅니다. 이렇게 개미들은 저마다 역할이 다르고 또한 직무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개미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직무에만 충실합니다. 자기 맡은 본문에만 충성을 다합니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겨울을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각 지체가 한 몸을 이룬 유기적인 협력 공동체입니다. 서로 하나를 이루어 다가올 종말을 함께 준비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저마다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은사에 맞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각자는 서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직분에 충성을 다할 때 성공적으로 종말을 함께 맞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서로의 직분을 존중해 주고, 서로의 은사를 귀하게 여겨줄 때 성공적으로 종말을 함께 맞게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우리가 개미에게서 배울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 개미의 근면과 지혜를 배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약 본문 롬12:1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했고, 2절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했으며, 3절에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는 성도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열심을 내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심이 있고, 자기 열심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믿음 없이도 열심히 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러한 열심은 쉽게 변질되고 결코 오래 못 갑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자기 열심 가지고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려고 하다 살인자로 몰리고 미디안으로 피신하는 자가 되었으나 소명을 받은 후 하나님께 붙들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 바로의 손에서 해방 시키는 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 열심 가지고 한 일은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고 잡아 가두는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였으나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성령에 붙들려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이방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의 '열심을 품고' 의 원어는 '토 푸뉴마티 제온테스'인데, 이 말의 뜻은 성령과 함께 하는 열심을 품고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열심, 성령께서 함께 하는 열심히 귀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우리 심령 가운데 불타게 함으로써 그 열심 으로 섬겨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생각을 주님 중심에 두고 헌신하며 봉사할 때 주님을 위한 열심 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후 350년 경 로마 교황을 지냈던 율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고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성자로 칭호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어떤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율리우스는 그 사람에게 자기의 열심이 많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열심을 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리우스는 가슴에서 열심 덩어리를 꺼내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저울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열심 덩어리의 무게가 100근 이라고 했습니다. 율리우스는 자기의 열심이 그렇게 많은 무게가 나가는 것을 보고 매우 흐뭇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그 열심 덩어리를 뜨거운 물속에 넣고 녹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의 구성 성분을 밝혀주었습니다. 성분을 분석한 결과는 야심이 30, 자기자랑이 25, 명예심이 40, 하나님 사랑이 5, 합계 100근 이였습니다. 열심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을 사랑해서 내었던 순수한 열심은 고작 5근 밖에 안 되는 것을 본 율리우스는 너무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내는 열심을 분석해 본다면 주님을 사랑해서 나는 열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심의 분량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위한 열심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다 다시 오실 주님 맞기를 기원합니다.

 

3.성도가 가질 몇 가지 중요한 열심에 대해 상고해 봅니다.

 

성도들이 내야 할 열심이 무엇일까요?

먼저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본문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근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생활의 나태를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보통 성도들은 처음 믿을 때에는 매우 열심이다가도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게 되면 주를 향한 처음 사랑을 잃고 영적인 타성에 빠져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2:4;3:15).

좋은 성도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성도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예배드리는 일을 잘 해야 합니다. 본문 롬12:1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런 자를 기뻐하십니다. 성도는 예배드리는 동안에 은혜가 임하고 그 때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됩니다. 성령의 역사로 내가 세상을 본받지 않고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워싱턴 DC 어느 교회, 목사님에게 주일날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전화를 받아보니까 "목사님, 오늘 아침에 대통령께서 우리 교회 출석하신다고 하는데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예배드릴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출석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교회 오시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예배드릴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는 사람을 보고 드리는 것이 아니고, 환경을 보고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 중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다음에 주신 은사를 따라 열심히 교회의 일을 해야 합니다. 본문 롬12:6-8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주었습니다. 권위의 은사를 주었습니다. 구제의 은사를 주었습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주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은사를 주었습니다. 신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또 믿음의 분량대로, 우리가 받은 은사를 활용해야 됩니다. 그 때 교회는 살아 역사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중심이고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고 주님의 삶을 본받아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옛사람이 죽고 주님의 새 마음을 품지 않고는 이웃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를 받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이웃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여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요 봉사입니다. 죽어가는 한 영혼을 전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구제하는 일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헐벗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난치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에 대해 외면하지 아니하고 이웃과 나누고 베푸는 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고 주님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섬기는 일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는 일에,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1.성도는 개미의 근면과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먼저 겨울이 옴을 아는 지혜, 다음에 겨울을 준비하며 사는 지혜, 그리고 함께 협동하는 지혜입니다.

 

2.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성도가 가질 몇 가지 중요한 열심에 대해 상고해 봅니다.

 

먼저 주님을 섬기는 일이요, 다음에 주신 은사를 따라 열심히 교회의 일이요,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개미의 근면과 지혜를 배워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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