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모하는 자 (841-12)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즘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아직 원인을 찾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연어의 회귀본능입니다. 연어는 강에서 산란하여 1년 동안 살다가 바다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3년을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나서 살던 곳을 찾아 돌아오는 회귀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회귀본능이 얼마나 치열하든지 그 거센 물줄기를 헤치고 필사적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면 장관이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을 기억했다가 다시 찾아오는가? 그리고 대체 무엇이 연어들로 하여금 그토록 강력한 회귀본능을 일으키게 하는가?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은 창조주 하나님만 아시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본능은 연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들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시편 84편의 고라자손들이 그렇습니다. 고라자손은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들로서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고 아울러 성전의 문지기와 각종 수종 드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입니다.

레위지파는 여러 반열로 조직이 되며 평소에는 전국에 흩어져서 목회하며 백성들의 신앙을 돕다가 차례가 오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와 찬양하며 제사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는지 본 시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걸 알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여기 여호와의 궁정은 바로 성전을 말합니다.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나가 봉사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기에 신약의 예배당 개념과는 다르지만 성전이 예배의 처소라는 점에서는 신약의 예배당 개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도 예배당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해서 따로 구별한 처소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하는 사람은 성도들도 사랑하고 주의 일군들도 사랑하고 예배당도 사랑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그토록 사랑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천지만물도 사랑합니다. 모두다 하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를 보세요.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인데 대적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물을 해코자 합니다. 창조물에 대한 도전은 곧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꾸어놓고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이걸 모르고 사람들이 교회를 함부로 생각하고 우습게 보는데 그건 사탄적사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택한 이 공동체를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인정하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징이나 정당한 결정은 하늘에까지 통합니다.

어떤 사람이 상습적으로 교회를 핍박하는데 그 날 아침 심하게 교회를 욕하고 길을 가다가 자동차가 전복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핍박하다가 이런 일을 만났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를 핍박하지 않으련다." 불신자도 깨닫는 건 빠르더군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했던 것처럼 예수를 핍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출석 잘하시고 교회를 향한 의무도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사랑을 예배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3-4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고라자손이 왜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했을까요? 자신들은 잠시 머물다가 갈 수밖에 없는 가령 여행 비자를 가진 사명자지만 이 짐승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둥지를 틀며 사는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진 짐승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항상 주를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벧전2:9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신령한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또 각인의 초소에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생명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반면 예배가 회복되면 모두 다 살아납니다. 예배 한 번만 잘 드려도 그 예배에 어떤 누가 변화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히10: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둘지라도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하자 한 밤중에 옥문이 열렸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만나주시고 예배를 통해서 복을 주시고 예배를 통해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교회 정규예배 뿐 아니라 가정예배 개인기도시간을 정해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 사랑을 주일성수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5-7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루살렘에 도달하려면 지형상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인데 이 골짜기는 바가의 골짜기라 하여 시 23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도 부르는데 유대광야의 험준한 골짜기를 말합니다.

 

이곳은 물이 없어 메마르고 골짜기는 험준하고 동서로 깊게 파여 한 낮에도 빛이 들지 않아 흑암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이 골짜기의 좌우 길목에는 동굴들이 많은데 그 안에는 한낮의 햇빛을 피하려는 맹수들이 득실거려 양들이 길을 잃으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고라자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갈망했습니다. 메마른 골짜기에 비를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맹수에게서 지켜 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힘을 간구했습니다. 용기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습관화가 되어 예배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지만 일반인이 교회 출석하기란 마음 단단히 먹어야 가능합니다. 교회 한 번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한 번만 나오면 두 번째는 쉽습니다.

오늘 길에 맹수가 무엇입니까? 26:13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을 이겨야 합니다. 형편도 이겨야 합니다. 상황도 이겨야 합니다. 불편함도 이겨야 합니다.

군에서 갖은 핍박 가운데서도 주일 지킨 이야기 들으셨을 것입니다. 너 이래도 교회 갈꺼냐? 하고 무릎 위에 무거운 다듬돌을 올려놓았는데 몇 시간 후에 마비가 되어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교회 가야겠다고 해서 대체 네가 믿는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 나도 믿어보자 해서 그 핍박자가 나중에 장로가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신앙의 발걸음을 보시고 하늘의 상으로 갚아주십니다. 기적은 고난 속에 있습니다. 핍박과 고난과 눈물의 골짜기 통과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고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성령의 이른 비로 늦은 비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4.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8-9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여기서 고라 자손들은 왕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여기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당시로서는 다윗 왕을 가리킵니다. 다윗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 끝까지 퍼져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은 다각도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라자손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성도에게 11절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주일성수 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와 정상을 다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6장 행복의 비결(6112)

< 개 요 >

1. 6:12 인생의 첫번째 폐단

2. 6:36 인생의 두번째 폐단

3. 6:79 인생의 세번째 폐단

4. 6:1012 인생살이에 폐단이 생기는 이유와 그 해결책

 

오늘은 전도서 6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함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6장에서 해 아래 인생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겪어야 하는 세 가지의 대표적인 폐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들이 당하는 불행, 고통스러운 일을 말합니다.

첫번째 폐단이 12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요와 재물과 존귀를 받기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고생해서 먹고살 만하게 되니까 그만 병들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폐단이지요.

두번째 폐단이 36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일백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또 장수했습니다. 그런데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산들 죽지 못해 억지로, 마지못해 살아간다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불행한 일입니다. 또 아무리 자녀가 많아도 자기가 죽었을 때 장사지내 줄 자식이 없다면 일백 자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역시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나온 줄 압니다.

세번째 폐단이 79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뛰다 보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 한이 없는 욕구를 무슨 수로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해 아래 인생들이 이와 같은 폐단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솔로몬은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인 1012절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무지와 무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지하기 때문에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지 알지 못합니다. 또 우리는 무능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목표로 삼고 아무리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써도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6장의 줄거리입니다.

이제 한 절씩 본문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구체적으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인생의 첫번째 폐단

첫번째 폐단이 12절에 나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솔로몬이 본 첫번째 폐단은 해 아래 인생들에게 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폐단을 겪으면서, 이 불행을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폐단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넉넉하게 받았습니다. 마음에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폐단입니까? 문제가 그 다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불행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많이 받았다 해도 그것을 누리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병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수해야 합니다.

오래 살아야 합니다. 일찍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사람을 더욱더 불행하게 만든 요인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 알지 못하는 제삼자가 그것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헛고생한 것입니다. 또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병폐입니까?

솔로몬의 부친이었던 다윗 왕 때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임금에게 쫓겨다닐 때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광야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때마침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나발이라는 부자의 집에서 양털을 깎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털을 깎을 때는 으레 주인이 일꾼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열기 마련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수하의 부하 열 사람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먹을 것과 쓸 것을 나누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부하들 앞에서 이런 말로, 저런 말로 다윗을 심하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윗이 전해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부하 400명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기 위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대단히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떡과 포도주와 고기를 충분히 준비해서 다윗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그것을 주면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 대신 다윗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제야 다윗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나발은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윗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400명을 이끌고 왔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겁에 질려서 나발이 부들부들 사시나무 떨 듯이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했습니다(삼상 25:28). 하나님이 그를 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에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었지만 너는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어. 이리와."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불러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발이 가지고 있던 그 많은 재물과 부요와 존귀가 다 다윗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이 대신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여러분이 능히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발처럼 움켜쥐고만 있으면 안됩니다. 필요할 때는 손을 펼 줄 알아야 합니다.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여러분이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물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것을 능히 누릴 수 있는 복도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생이 두번째 폐단

그 다음에 두번째 폐단이 36절에 나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이 사람은 2절에 언급된 사람이 받지 못한 복을 다 받았습니다. 일백 자녀를 두었습니다. 자녀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건강했을 것입니다. 또 장수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아무리 오래 산들 마음속에 평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공경을 받고 효도를 받아야지요. 죽었는데 그 몸 하나 제대로 거두어서 장사지내 줄 자녀가 없다면 일백 자녀를 두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솔로몬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3절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오히려 낙태된 자보다 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낙태된 자가 얼마나 불행합니까? 솔로몬은 45절에서 낙태된 자의 불행을 다섯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4절 말씀을 보니까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라고 했습니다. 낙태된 자가 이 세상에 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소유해보았겠습니까? 무엇을 누려보았겠습니까? 헛되이 왔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어두운 중에 가매"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그대로 어두운 땅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즉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네번째 5절 말씀에 보니까 "햇빛을 보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어야 햇빛을 볼 수 있지요. 하루라도 살았어야 햇빛을 보지요.

다섯번째,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되어 가는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된 자가 더 나은 이유가 있습니다. 5절 하반부입니다.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왜냐하면 해 아래서 인생들이 겪어야 하는 폐단, 당해야 하는 불행을 낙태된 자는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태된 자가 더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솔로몬은 6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천 년의 갑절은 얼마입니까? 2천 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였습니다. 그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2천 년은 므두셀라가 산 것의 두 배가 넘는 기간입니다. 그처럼 오래 산다고 한들 낙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2천 년이 아니라 3천 년을 살아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 오래 산다는 것이 고생만 실컷 더 하다가 가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죄만 더 많이 짓다가 가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받을 형벌만 더 쌓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건강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장수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에 더해서 평강의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녀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효도하고 여러분을 공경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주님 안에서 더욱더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3. 인생의 세번째 폐단

마지막 세번째 폐단이 79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먹어야 삽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먹어야 합니다. 지혜자도 먹어야 하고, 우매자도 먹어야 합니다. 부자도 먹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먹어야 하고, 누구나 다 먹어야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식욕은 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잔뜩 먹었다고 내일부터 안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내일이면 또 먹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구는 식욕뿐이 아닙니다. 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그 욕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지혜자도 먹어야 살고, 우매자도 먹어야 삽니다.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아무리 수고해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지혜자라고 해서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8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이 사람은 비록 가난하지만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자가 아무리 자기의 지혜를 다 짜내고 아무리 고생하고 수고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쥔들 그것이 무엇이 그리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또다시 다른 욕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좀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소유해서 손에 쥐고 눈으로 보는 것이 없어서 심령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낫기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또 다른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봅니다. 사글세방에 사는 사람은 마음에 소원이 있습니다. "전세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전세방을 가지기 전에는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손에 쥐지 못했기 때문에 늘 마음에 전세방을 그리면서 공상을 합니다. 수고하고, 고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세방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행복합니까? 만족도 잠시입니다. 또 다시 마음에 새로운 공상이 생깁니다. "열세 평 짜리 아파트라도 좋다, 내 것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또 고생합니다. 또 수고합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행복이 없습니다. 드디어 열세 평 짜리 아파트가 손에 쥐어졌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좀더 큰 평수, 화장실 두 개 짜리 아파트!" 그렇지 않습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낫지만 이것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바람은 아무리 쥐려고 해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도 아무리 애쓰고 충족하려고 해도 차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떡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세요. 행복 그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예수님이 요 4:34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속에 비로소 참된 만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길이 바로 내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것입니다.

 

4. 인생살이에 폐단이 생기는 이유와 그 해결책

이제 우리는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왜 해 아래 인생들이 이와 같은 폐단을 겪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해 아래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이것을 솔로몬이 결론 부분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칭한 바 된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오래 전부터, 천지가 창조된 때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째 날에 무엇을 창조하셨습니까?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무엇이라고 칭하셨습니까? 낮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빛은 낮입니다. 어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둠은 밤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이기 때문에 이것은 누가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이름을 칭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드시고 난 뒤에 사람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칭하셨습니까? 아담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흙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이 흙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10절 중반부에 보면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어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감히 다툴 수 있겠습니까?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데 감히 우리가 어찌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해 아래 인생들 가운데는 어리석게도 하나님과 다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세요.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무엇이 그리 유익하겠습니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 헛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서 생명나무 실과를 비롯해서 각종 나무의 실과를 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행복해졌습니까? 오히려 불행해졌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은 길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그 길로 가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왼쪽으로 가면 행복해질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가 잘되어 창고를 새로 짓고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일시적으로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이 그에게는 가장 불행한 날이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일순간 행복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생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마지막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솔로몬은 인간의 생명은 헛되다고 표현했습니다. 일평생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덧없는, 잠시 잠깐 있다가 지나가 버리는 생명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무지하고 무능한 우리 인생이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줄지 우리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라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장래에 대해서 누가 능히 고할 수 있겠습니까? 점쟁이가 알려주겠습니까? 역술가가 알려주겠습니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한치 눈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따르는 것이, 그 뜻을 따라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승동의 교우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님 안에서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18세기 초의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The grand essentials to happiness in this life are something to do, someone to love, and something to hope for." 무슨 말입니까? 인생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something to do,"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두번째로, "someone to love," 누군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고, 세번째로, "something to hope for," 뭔가 바라는, 기대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해 아래 이 세계에 집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해 위의 세계, 영원한 세계를 소망 가운데서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바로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을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그러면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해집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귀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장수한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복을 잡겠다고 내가 애를 써도 행복은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자동적으로 행복이 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따라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잡으려고 하면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셔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님 안에서 복되고 아름답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의 평강,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로부터 효도 받고, 공경 받는 화목한 가정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16:1-17): 레위기 23장의 절기 부분을 참고할 것.

 

1. 유월절(16:1-8)

'아빕''녹색' 또는 '푸른 이삭'이란 뜻으로 '신록(新綠)의 계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로 이때는 양력 3, 4월에 해당하는데, 히브리 민간력으로는 7월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때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여, 이후로는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았는데, '종교력 제 1'이다(12:2). 그런데 이 달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후부터 바벨론식 이름인 '니산 월'로 바뀌어 불려졌다(2:1; 3:7). 유월절 예식은 아빕월 10일부터 준비해 둔 어린 양이나 염소를 14일 저녁에 잡아 무교병 및 쓴 나물과 함께 먹는 의식(12:3-11), 그 달 21일 저녁까지 지키는 무교절 행사(12:15-20)를 모두 포함하여 일컫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내린 결정적 재앙(열번째 장자 재앙)이 유월절 밤에 있었으므로, 그 날 밤에 황급히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수 있게 되었던 사실을 가리킨다(12:29-42). 따라서 그 밤을 '여호와의 밤'이라 불렀다(12:42).

 

하나님께서는 예배 장소의 난립(亂立)을 막고,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며, 민족 공동체의 결속(結束)을 다지기 위해,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업 가운데 특별히 한 곳을 예배의 장소로 지정해 주셨는데,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예루살렘의 중앙 성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민족 공동체로서 출애굽 하였듯이, 그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예식 역시, 전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다함께 한 곳에서 거행하도록 지시하셨다. 유월절 밤에 잡는 짐승은 양이나 염소 가운데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 한 마리였지만(12:3-5), 계속해서 이어지는 무교 절기 동안에는 수송아지, 수양, 수 염소와 같은 짐승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28:19-24).유월절의 양을 잡는 시각은 초저녁 해질 때였는데, 여기서 '시각'에 해당하는 '모에드''', '계절', '절기'를 가리키는 말로서, 정확한 어느 '시점'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절기의 해가 지는 저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죄의 상징인 누룩(고전5:8; 5:9; 16:6,12)이 든 '유교병'은 곧 부패한 옛 생활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것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옛 애굽의 음식을 상징하므로, 결코 유월절 예식에 사용할 수 없었다. '무교병'()이란 누룩(효소)을 넣어 발효시키지 않은 밀가루로 만든 빵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고난의 떡'이라 칭한 까닭은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체험한 고통스럽고 쓰라린 노예 생활을 생생히 상기하며, 급히 애굽을 떠나느라고 미처 발효되지도 않은 밀가루 반죽을 옷에 싸 가지고 나왔던 곤고한 사건(12:34)을 상기하기 위함이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요리 방법은 불에 굽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출애굽의 급박한 상황하에서 유월절 희생 고기를 요리하고 먹기 간편하도록 하기 위해 채택된 방법인 듯하다. 그들은 이와 같이 행사를 마치고 나서 유월절 다음날 아침에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날은 아빕 월 15일 아침이 아니라, 한 주간의 무교절 행사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즉 아빕 월 22일 아침을 가리키는 것이며,(12:17,18). 장막은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거처로 사용했던 텐트(tent)에서 비롯된 말로, 여기서는 ''이나 '가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제 칠 일'이란 무교절의 마지막 날인 아빕월 21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회'(聖會)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이 집회로 모이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 기간 중에는 모든 경제 활동이나 직업상의 일을 폐한 채 안식하며, 온전히 하나님께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일만을 하였다.

 

 

2. 칠칠절(9-12)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은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을 제단에 요제로 바치는 날인 초실절(初實節)을 가리키는데(23:10.11), 이 날은 유월절 후 첫 안식일(성회) 다음 날로서 곧 아빕 월 16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초실절 이후 7번째 안식일을 계수하여 만 49(7*7)이 지난 날, 즉 제 50일째가 되는 날에 칠칠절을 지키도록 지시 받았는데, 이 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대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렸는데, '칠칠절'에 바치는 예물은 첫 수확한 밀로 만든 유교병 둘,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 젊은 수소 하나, 수양 둘이었다(23:17,18).그리고 그들은 이런 기쁜 절기에 특별히 가남하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도록 권고를 받았는데, 객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기반이 없는 이스라엘의 3대 약자들이었으며, 백성들은 모든 축제 때 결코 이들을 잊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로서 이스라엘 자신들도 이전에는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겪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기억하여, 은혜를 입은 자답게 역시 같은 심정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돌아보아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3. 초막절(13-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 동안의 모든 추수, 즉 곡식과 과실의 수확을 끝마치고 이를 창고에 저장한 때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키도록 지시하셨다. 이 절기는 출애굽 후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며, 한 해 동안의 모든 토지 소산의 추수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한 절기였다. 이때는 모든 곡식이 창고에 수장(收藏)되어 있으므로 일명 '수장절' 이라고도 하며, "초막절"이란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을 치고 생활하였던 시절을 되새기기 위해 '초막'을 지어 놓고 거기서 7일 동안 거처하면서 절기를 지켰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히브리 민간력으로 1월인 이때는 오늘날 태양력으로는 9-10월에 해당되는 데, 유대인들은 이를 '에다님월'(왕상8:2),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는 '디스리월'로 불렀다(23:16; 34:22; 23:33-43).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에도 역시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이러한 기쁨을 나누도록 지시를 받았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올바로 지키는 자세와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일러준다. 여기에서 사용된 '온전히'라는 말은 원어 '아크'인데, 이 말은 '반드시'(9:5), '참으로'(29:14), '정녕'(31:13)이란 뜻의 불변사로, 여기서는 '마음껏 즐거워하라'는 의미이다.

 

 

4. 절기의 결론(16-17)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때에는 반드시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남자들은(23:17)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 절기를 지켜야 하였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23:14; 34:23), 특별히 '여호와의 택하신 곳'이란 말이 본 장에서만 6(2,6,7,11,15,16)이나 나타나는데, 이것은 위의 절기들을 지킬 장소를 명백히 강조하여 지시코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 절기에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복을 따라서 자신의 정도에 맞는 예물을 드리도록 지시 받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섬기되 형식적으로만 섬기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이다. 고대 팔레스틴의 풍습에 의하면, 백성들이 왕 앞에 나아갈 때 예물 없이는 절대 나아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의 왕 되실 뿐 아니라(44:6) 만왕의 왕이시니(딤전6:15), 그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권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하겠다. 한편 오늘날 진정 하나님께서 성도들로부터 받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예물은 악에 물들지 않은 온전한 믿음과 선한 행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13-18). 그리고 이러한 예물을 드리는 원리(분수에 맞는 자원하는 예물), 훗날 사도 바울이 동일하게 교훈 하였던 헌금과 구제를 드리는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다(고후 8:11,12).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와 이웃에 대한 긍휼이 있는 자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바치지도 않겠지만(고후9:7), 반대로 자신의 힘에 겹게 바치므로 도리어 자신이 시험에 빠지는 것과 같은 허세도 결코 부리지 않을 것이다.

 

< 교 훈 >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일년에 몇 차례씩 중앙 성소에 모여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할 수 있게 하셨다. 이러한 절기와 축제들은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며, 그들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러한 원리는 지금 우리들이 지키는 절기(강림절, 부활절, 추수 감사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2. 하나님은 특히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을 특히 강조하셨다.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에 대하여도 돌보지 않을 것이다.

3. 이러한 모든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모든 과정들이 반영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16:1-17): 레위기 23장의 절기 부분을 참고할 것.

 

1. 유월절(16:1-8)

'아빕''녹색' 또는 '푸른 이삭'이란 뜻으로 '신록(新綠)의 계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여, 이후로는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았는데, '종교력 제 1'이다(12:2).

하나님께서는 예배 장소는,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며, 민족 공동체의 결속(結束)을 다지기 위해,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업 가운데 특별히 한 곳을 예배의 장소로 지정해 주셨는데,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예루살렘의 중앙 성소'를 가리킨다.

 

죄의 상징인 누룩(고전5:8; 5:9; 16:6,12)이 든 '유교병'은 곧 부패한 옛 생활을 상징한다. '무교병'()이란 누룩(효소)을 넣어 발효시키지 않은 밀가루로 만든 빵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고난의 떡'이라 칭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요리 방법은 불에 굽는 것이었다.

 

2. 칠칠절(9-12)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은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을 제단에 요제로 바치는 날인 초실절(初實節)을 가리킨다(23:10.11),

 

3. 초막절(13-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 동안의 수확을 끝마치고 이를 창고에 저장한 때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키도록 지시하셨다.

 

4. 절기의 결론(16-17)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섬기되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이다.

 

 

 

5장 소유에 집착 말라. (전도서5장120)

< 개 요 >

1. 5:17 왜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우매자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

2. 5:89 왜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가? 사회구조의 부조리 때문

3. 5:1017 왜 소유에 집착하는가? 부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

4. 5:1820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해 아래 인생들은 소유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유가 많아지면 그만큼 삶이 만족스럽고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긁어모으기 위해서, 소유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5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대지는 17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으면 인생은 그 수고의 열매를 제대로 누릴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인생이 아무리 수고한들 그 수고의 열매를 어찌 누릴 수 있겠습니까? 소용이 없을 뿐입니다.

두번째 대지는 89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착취가 있습니다.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인생이 수고해도 그 열매를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대지는 10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인생들이 그토록 소유에 집착해서 살아갑니까? 잘못된 믿음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가 있으면 만족을 누릴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마음에 평안도 누릴 수 있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결론적으로 1820절에서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서 그것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선한 일이요, 아름다운 일이요,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서 5장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매자는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함

 

첫번째 대지입니다. 17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매자에게는 복을 안 주십니다. 그래서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열매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매자가 어떠한 자인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는 자는 발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호렙 산의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므로 그 발을 삼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에서 발을 삼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입니까? 솔로몬은 세 가지 면에서 이것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제사와 기도와 서원입니다. 먼저 제사 드리는 것을 보세요. 1절 하반부입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물론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앞세워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고집대로 왼쪽으로 자꾸 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매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열심에 따라서 자기 방식대로 아무리 믿어본들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니 우매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마르다의 봉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 봉사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언제나 그것보다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매자입니다.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전에 올라올 때 언제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에 최우선을 두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는 기도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기도할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했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한 마디 한 마디 하나님 앞에 아뢸 때 아주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지극히 낮은, 땅에 있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사려 깊게 아뢰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조심 없이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그 앞에서 조심하겠습니까? 대통령 앞에서 말 한 마디라도 얼마나 신중하게 골라서 하겠습니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가 말하기보다는 대통령이 하는 말에 공손하게 귀를 기울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전에 올라와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말을 적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일이 많으면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꿈이 생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조심이 없으니까 헛된 소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길이가, 말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하고, 깊이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대표로 기도하시는 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기도가 길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나옵니다. 대표기도할 때는 준비를 많이 해서 짧게, 꼭 필요한 것만 한 마디 한 마디 잘 골라서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기도가 길어지면 듣는 사람도 지루하게 되고, 예배 분위기를 해치기 쉽습니다. 대표기도는 길게 하면 안됩니다. 짧게 해야 합니다.

세번째가 서원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 보답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사람은 사람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사기꾼입니다. 벌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약속하고 지키지 않고서도 무사하겠거니, 일 없겠거니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우매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지키지 못할 서원을 하는 것보다는 애당초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서원은 의무가 아닙니다. 자발적인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서원을 하느니 서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지요.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변명한다고 통합니까?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런 서원을 했다고 합시다. "하나님, 제게 아들을 꼭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게 아들만 주시면 제가 이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사람에게 아들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자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서원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보내실 수도 있고, 또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 사람을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팔려고 하니까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변명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는 너무나 아들이 필요해서 급한 마음에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없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용납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변명에 진노하십니다. 그에게 주었던 복을 도로 앗아가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했으면 지켜야 하고, 지키지 못할 서원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사 시대 입다의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입다가 사사로 있을 때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입다가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제 손에 붙여 주신다면 돌아올 때 저의 집 문 앞에서 제일 먼저 저를 영접하는 자를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무서운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입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집에서 누가 그를 제일 먼저 영접했습니까? 입다의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소고 치며 춤추며 나와 그를 영접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한 서원이기 때문에 입다는 그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원하면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함부로 합니까?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하나님 앞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말을 아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잘못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7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성전에서는 말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자기 열심에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함부로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말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안 그러면 우매자가 됩니다. 우매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수고에 따라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고 그 열매를 여러분이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복된 모습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회구조의 부조리

 

두번째 대지는 89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불의가 있고, 부정이 있고, 착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여기서의 도는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경상도라든지 경기도와 같은 도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는 관리가 있습니다. 관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빈민을 잘 보살펴주고, 공의를 세워서 백성들이 마음 편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빈민을 학대하고, 공의를 박멸한다고 했습니다. 정반대의 일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그것을 볼지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8절 하반부에 나옵니다.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밑의 사람은 위의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밑의 사람을 착취해서라도 윗사람에게 상납을 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상납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또 자기 위의 사람에게 상납을 해야 합니다. 먹이사슬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꼭대기에 왕까지 올라갑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내가 수고해서 얻은 이익이라고 해서 나 혼자 독차지할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관리들도 내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먹고살아야 합니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많이 빼앗기느냐 적게 빼앗기느냐 정도의 차이지,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살아갈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땅은 좀과 동록이 해하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도적이 구멍을 뚫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이 땅에서 소유에 집착해서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두려고 하지 말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안전한 곳 저 하늘 나라 창고에 너희 보물을 쌓아두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착취가 있기 마련입니다. 소유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소유에 집착하는 이유

 

세번째 대지는 1017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소유에 왜 그렇게 집착합니까? 그것은 부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네 가지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brings satisfaction." 부가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예컨대 제가 목이 말라서 바닷물을 떠다가 마셨습니다. 갈증이 해소가 됩니까?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더 목이 탑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욕심도 한이 없기 때문에 재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부를 가지고 만족을 누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애당초 잘못된 것입니다.

두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solves every problem." 세상 사람들은 물질이 있으면 그것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착각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물이 더해 가면 먹는 자도 더해 간다고 했습니다. 재물이 많아질수록 이전에 없던 문제가 자꾸 생겨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물질이 없으면 세금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적이 와서 구멍을 뚫을까봐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자식들에게 유산을 어떻게 배분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아지면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겨납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한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서 손을 내밉니다. 있는 대로 다 나가 버리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유주는 잠시 자기 눈으로 재물을 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순식간에 다 나가 버리니까 실속이 없습니다.

세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brings peace of mind." 재물이 마음에 평안을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노동자는 가난해서 먹는 것이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이 많아서 잘 먹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잠을 더 잘 자겠습니까? 부자가 잠을 더 깊이 잡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노동자가 오히려 잠을 더 깊이 잡니다.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이 걱정 저 걱정을 하느라고 마음에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절대로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provides security." 부는 안전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사람이 재물 때문에 안전해지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누가 훔쳐가지는 않을까? 늘 걱정해야 되지요. 거기다가 강도를 만나서 물질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이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이 왜 자꾸 재물을 지키려고 합니까? 자기 자식들에게 더 많은 것을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됩니까? 14절 말씀을 보세요.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한번 재난이 임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재물입니다. 화재를 당한다든지, 부도를 만난다든지 하면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도 물려줄 것이 없습니다.

또 설사 재난을 당하지 않아서 재물을 잘 지켰다고 해도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세상에 올 때 여러분이 세상에 더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빈손으로 왔습니다.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갈 때도 그냥 가야지 세상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수고했다고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공평한 삶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것은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기 위해서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헛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1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소유에 집착하면 절대로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행해집니다. 그것이 17절 말씀입니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부가 만족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마음에 평안을 주고,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지만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면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병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병도 생기고, 육신의 병도 생깁니다.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므로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 록펠러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지요? 당대 세계 제일 가는 갑부였습니다. 53세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돈을 벌었냐 하면 매주 그 당시 돈으로 1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의 모든 돈을 자기가 다 가져야겠다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인데 돈을 얼마나 벌면 만족하겠습니까?" 그때마다 록펠러는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Just a little more." 무슨 말입니까? "조금만 더!" 이미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는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조금 더 벌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렇게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불면증에 걸렸습니다. 몸이 바짝 말라들어갑니다.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루에 겨우 우유 한 잔, 비스킷 몇 조각밖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록펠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기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다 버렸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떨쳐버렸습니다. "지금까지는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번 것을 값있게 쓰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만든 것이 그 유명한 록펠러 재단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페니실린 주사도 록펠러 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니까, 그때부터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입맛이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렸던 잠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3세에 불면증에 걸려 죽을 때만 기다리던 사람이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소유에 집착하게 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손을 놓으세요. 그래야 우리 마음속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4.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

 

솔로몬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8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가진 것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낙을 누리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려야 할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 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수고하면 그 열매를 자기가 다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세요.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에게 재물과 부요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누리게 하시며, 즐거워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께서 다 빼앗아가 버리시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마지막 20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부유하든지, 또 부유하지 못하든지 상관없습니다. 관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런 것에는 관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아울러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만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유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물질의 노예가 되면 안됩니다.

물질을 따라가보세요. 물질이 잡힙니까?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물질을 뒤따라가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 비결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생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질이 자동적으로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을 따라가면 절대로 못 잡습니다.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이 수고한 열매를 여러분이 다 누리면서, 주님으로 인해서 하루하루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보답하는 성도의 복 시116:5-14, 살전3:7-10

전북 부안군 동민면 하장리라라는 마을은 호남평야 넓은 들녘 한 가운데 있는 큰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사는 한 부자 집에 여러 명의 머슴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머슴들 가운데 예수 잘 믿는 김기홍이라는 머슴이 있었는데 그는 신실하여 주인의 인정을 받아 특별한 허락을 받고 주일에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는 드리지만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되면서 원하는 대로 교회 일을 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머슴살이 첫 해 맥추 감사절이었습니다. 그날따라 갑자기 홍수 때문에 모든 일꾼들이 논에 나가 수로를 고르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날 밤 한잠도 못 자고 머슴방에서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주일도, 절기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인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가 되어 여름 보리 추수 후에 교회에서 지키는 맥추 감사절에 참여하고 싶다고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인에게 거절당했으나 계속해서 부탁한 후에 결국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되겠는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다시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계속된 설득 끝에 주인이 그에게 보리 한 가마를 주어서 그것을 가져다가 감사 예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머슴이면서도 보리 한 가마니를 예물로 드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인이 궁금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생해서 번 곡식을 쉽게 교회에 바치는 것일까?” 호기심으로 교회에 가 보았습니다. 그 날 목사의 설교가 주인의 가슴을 찌르는 날선 검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그 주인은 예수를 영접하고 주일마다 머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 김기흥씨의 감화로 주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 그 주인이 교회를 다니면서 은혜를 받고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니 다른 머슴들까지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맥추 감사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은혜를 보답하는 성도의 복”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받은 은혜를 깨달아 알아야 보답할 수 있습니다.

구약 본문 시116:12절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 살전3:9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았어도 은혜인줄도 모르게 되면 감사의 마음도, 보답의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이 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로 보답하는 성도가 되려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부터 알아야 합니다.

감사(thank)의 어원은 생각(think)입니다. 감사하려면 생각해야 합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생각하면 감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감사는 얕은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화입니다. 신학자 몬테 피오레는 “생각하고 감사하라(Think and Thank)”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묻지도 따지지 말고 무조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덜함 감독(Bishop Durham)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이 말씀을 평생 외우면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힘쓰며 살았다고 합니다. 은혜는 히브리어로 '타그물' 인데 '친절, 보상' 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측량할 수 없는 친절과 넘치도록 채워주시고 부어주신 보상을 받은 후, 그 은혜를 깨닫고 갚을 길 없어 어찌할 바 모르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은혜란 막연하게 생각하는 객관적인 은혜가 아니라 '내게' 주신 주관적 은혜입니다. '너에게'가 아닌 바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는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거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과 어떻게 바른 관계가 맺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은혜를 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 성도와의 바른 교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세상적인 고민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길 없어 고민해 본 적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만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요, 행복하고 깊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증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의료선교를 한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흑인 중에도 다소 문화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병을 고쳐주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바나나, 달걀, 야자 등을 가지고 온답니다. 그러나 문화 접촉이 거의 없는 미개종족은 병을 고쳐주어도 고맙다는 인사와 보답은 커녕 멀리서 왔는데 그냥 갈 수 없다고 오히려 손을 내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 인격을 갖춘 사람일수록 감사할 줄 알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도 미개인입니다. 예수 안에서 감사를 알고 마음껏 감사함으로 사는 신앙의 신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2.받은 은혜를 잊지 않아야 보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좋지 않은 기억, 남에게서 들은 상처의 말, 과거의 실패, 내게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한 사람과 행동, 내가 행한 선한 일 등은 빨리 잊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이 상처 받지 않게 되며, 뒤 엣 것에 메이지 않고 힘차게 앞으로 전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을 자랑하거나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때를 따라 도움을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내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 내게 믿음의 길로 가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 본문에 보면 바울은 환란 중에서도 믿음에 굳게 서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큰 위로를 받고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급할 때 서원의 기도를 하고 받은 은혜 등은 잊지 않아야 그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구약 본문 14절에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다고 말합니다. 여기 구원의 잔은 감사의 잔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의 잔을 여호와께 높이 들고 나아가 은혜를 갚는다는 것입니다. 웨슬리(J.Wesley)목사에게 많은 신앙의 감화를 끼친 진젤돌프(Von Zinzendorf)백작은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여 백작지위를 국가에 반납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은여생을 기도와 전도에 바치며 일생을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급할 때 서원하는 기도를 하여 은혜를 받은 후 서원을 잊고 살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대장암' 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수술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수술 전날 목사님은 스웨터를 걸치고 병원복도를 거닐며 고백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불충했음을 회개하며 낫게 해주시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종이 되겠노라" 고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수술 후 목사님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신앙이 의학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도 인간인지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술 받을 때 서원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불만, 갈등, 괴로움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은 오백만원짜리 스웨터를 입고 그때를 생각하고 감사하면 다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웬 스웨터가 오백만원이나 가느냐고요? 당시 수술비가 오백만원이었답니다.

우리 모두 받은 은혜 잊지 말고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로 삽시다.

 

3.믿음과 순종으로 인색함을 버려야 보답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날들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셨던 과거의 은혜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역사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깊이 생각 하면 할수록 감사가 떠오를 것입니다. 부디 과거의 은혜를 생각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우울해 하고 불평과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하여 감사한 마음이생기지 않는 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3:2에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말세에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는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좋은 성도, 은혜 받은 믿음의 성도는 순종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 여자 집사님 한 분이 교회에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니까 너무나 건축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었습니다. 자신도 성전건축에 동참하고 싶고, 또 그렇게 해야 떳떳하게 교회 들어가서 예배드리지, 다른 사람이 다 헌금해서 건축 하고, 의자 만들고, 다 한 다음에 그냥 들어가면 부끄럽기도 하고 남한테 신세를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성전건축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저에게 물질을 주시면 저도 하나님 앞에 건축헌금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않게 여기저기서 좋은 일이 생겨서 물질이 생기고 풍족하게 되었으나 집사님은 그만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갑자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갑상선이 부어올라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나님, 왜 이렇게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고 갑상선이 생겼습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깨닫게 하옵소서.’ 병원에 입원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너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너는 약속을 안 지키니까 징계를 받는 것이다.’ 그때서야 몇 년 전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약속한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은 것이군요.’

그녀는 교통사고로 받은 위로금을 뒤늦게 건축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감사가 넘쳐 났습니다. 잃어버린 건강도 되찾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에 대한 죄를 짓지 않게 하옵시고,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딸이 되게 하옵소서.’

순종할 때 질병도 떠나고, 순종할 때 가난도 떠나고, 순종할 때 환난과 풍파도 떠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축복 받을 사람이 축복 받지 못하고, 은혜 받아야 될 사람이 은혜 받지 못하고, 능력 받아야 할 사람이 능력 받지 못하고, 기적을 체험해야 할 사람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인색한 마음 때문에, 약속한 것을 갚지 않은 죄, 불순종의 죄, 하나님 보다 세상이나 물질을 더 사랑하는 죄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감사 하는 자에게 더 큰 감사의 여건을 허락해 주신다는 믿음, 말씀에 순종하여 인색한 마음 버리고 풍성한 감사, 범사에 감사하는 자들에게 넘치는 은혜와 복을 허락해 주심을 믿고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은혜를 보답하는 성도가 되려면

 

1.받은 은혜를 깨달아 알아야 보답할 수 있습니다.

2.받은 은혜를 잊지 않아야 보답할 수 있습니다.

3.믿음과 순종으로 인색함을 버려야 보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깨닫고, 항상 받은 은혜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더욱 풍성한 은혜 받아 주님 영광 위해 살다가 영광스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복 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바로 분별하여 따르는 믿음 레10:8-11, 요일4:1-6

우리가 살면서 잘 분별하여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래 전에 친척 중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곳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과수원을 맡아 관리하는 분이 커피를 타서 주시는데 맛이 이상했습니다. 알고 보니 미원을 설탕으로 잘 못 알고 커피에 넣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보이스 피싱 사기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족 중 급한 사고를 가장하여 송금을 하게 하기도 하고, 은행, 우체국, 검찰청 등을 빙자하여 교묘히 통장 번호와 비밀 번호를 말하게 하여 사기를 칩니다. 그러한 전화가 올 때 잘 분별하여 대처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기 위해서 암호를 대라고 합니다. ‘부엉이’ 해야 하는데, ‘갈매기’하면 총 맞아 죽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분별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거짓 사단의 영에 잘 못 속게 되면 금전적인 피해 정도가 아닌 영원히 음부의 파멸에 떨어지는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무엇을’, ‘어떻게’ 분별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진짜와 가짜, 진리와 거짓,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 성령과 거짓 영을 분별하지 못하면 내 인생 전체가 속고 사기를 당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영혼도 팔수 있습니다. 거짓 영에 속게 되면 자신은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면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분별력을 가진 바른 믿음이라야 열심과 충성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 분별력이 없게 되면 열심을 내면 낼수록, 충성하면 할수록 죄만 더하여 가고, 자기만 망하면 그래도 덜한데, 남을 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만 쌓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분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론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왜 이들은 성소에서 죽었을까요? 1절을 보면 이들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불이 여호와 앞에 나와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 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이 술이 취해 분별력을 잃고 다른 불을 가져다가 분향하다가 징벌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 본문에도 영을 다 믿지 말고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말합니다. 미혹의 영은 사단 마귀의 거짓 영입니다. 이 영을 유혹의 영, 혹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영의 활동하는 목적은 에덴에서 하와를 미혹한 동기와 동일하며 그 방법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여 믿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말을 따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미혹이란 말은 그럴듯하게 속여서 가짜를 진짜처럼 속여 그것을 믿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진리의 영 인양 자기 존재를 거짓으로 위장합니다. 혹은 천사 인양 외모로 가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미혹의 영을 대처하지 않으면 그 미끼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그런 미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바른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바로 분별하여 따르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좋은 신앙인은 바른 분별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1.성도는 선과 악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선하신 아버지의 선한 성품을 가지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은 본질적으로 아담의 타락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악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마음이 항상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면서 마음에 큰 갈등을 가졌습니다. 롬7:19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하면서 탄식했습니다. 우리도 선과 악 사이에서 그런 갈등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소매치기 남편을 돌아오게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소매치기 남편이 아내의 간곡한 당부로 그 일에 손을 씻었는데 부인이 입원하게 되어 입원비를 마련하려고 또 다시 소매치기를 했습니다. 남편을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이 부인은 가슴으로 울면서 검찰에 고발을 했고, 또 나중에 소매치기를 당한 당사자에게 간절한 편지를 써서 당사자와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게 했습니다.

히 5:14에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했습니다. 요즘은 선과 악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가 경계선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혼합주의가 되어 선과 악의 경계도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도덕 윤리의 경계선, 의와 불의의 경계선, 진리와 비 진리의 경계선, 성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심지어 동성연애도 합법화 되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2.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롬 12:2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했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에 나답과 아비후는 남의 물건을 훔치다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고, 간음을 했다거나, 남을 괴롭히는 악을 행하다 죽임을 당한 것도 안입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선한 일을 하다 죽임을 당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법도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웃사라는 제사장도 법궤를 운반하는데, 법궤는 제사장이 어께에 메어 옮기도록 규례로 정해져 있는데, 규례를 무시하고 수레로 이동하다가 흔들리는 법궤의 안전을 위해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해야지 내 방법,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 내 지혜로 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성도는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삽니다.

3.성령과 악령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신약 본문 요일4:1에 “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영을 부여하셨습니다. 영의 세계는 성령과 악령의 세계로 구분됩니다. 따라서 사람의 심령도 성령의 전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마귀의 집(소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과 악령은 근본적으로 몇 가지 다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마귀는 거짓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영으로 참된 것을 말씀하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데 반면에 마귀는 거짓의 영이기에 거짓말을 밥 먹듯 합니다. 요8:44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했습니다. 둘째로 성령은 믿게 하는 영이지만, 마귀는 의심케 하는 영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는 우리 마음 가운데 불같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주를 시인하게 됩니다. 신약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 했습니다. 시인을 해도 교묘히 빙자해 다른 구주를 찾게 합니다. 셋째로 성령은 살리는 영이지만, 마귀는 죽이는 영입니다. 성령은 죄를 깨달아 회개 하게 하고,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하지만 마귀는 죄를 짓게 하고, 육체의 열매, 죄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요일3:8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마귀는 도둑이요, 강도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 사랑, 소망을 다 빼앗아가는 도둑으로 결국 사망과 심판을 받아 멸망케 하는 영입니다.

우리 모두 선과 악을 잘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성령과 악령을 잘 분별하는 바른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잘 분별하는 지혜와 방법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1.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별 할 수 있습니다.

구약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들이 술에 취하여 분별력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술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에서는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으로 분별력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일을 가르쳐 분별력을 가지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할 이유 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을 얻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위폐를 감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장님은 그에게 진 폐만 주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진 폐만 세게 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위폐를 감별하는 일을 시키려면 위폐를 주고 위폐를 살피게 해야지 계속 진 폐만 세게 하면 어떻게 위폐를 감별하나’ 그런데 며칠 후 그는 진 폐를 세다가 이상한 돈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리 만져 봐도 다른 진 폐와는 달랐습니다. 그가 사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자 사장님이 말했습니다. “위폐를 감별하기 위해서는 위폐만 살펴서는 모른다네 진 폐를 만질 때의 느낌을 정확하게 알면 아주 쉽게 위폐를 찾아낼 수 있지” 그렇습니다. 여러분! 진리의 분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익숙해지면 진리가 아닌 것은 아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만 접하다보면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비 진리인지 분별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혼합주의 시대입니다. 이것저것이 섞여버리는 시대입니다. 많은 교회들도 혼합주의에 빠져서 천지분간을 못하는 시대입니다. 사단에 속한 자는 성경 공부 잘 가르치는 데가 있다고 미혹하여 바른 믿음을 허물어 버리고, 거짓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진리의 기준을 무너뜨려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철저히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케논 즉 모든 것을 제는 잣대입니다.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선과 악은 선명하게 분별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위에 서면 하나님의 뜻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 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도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이정표를 삼고, 성경 말씀에 기초하는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2.기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분별 할 수 있습니다.

고전 12:10에 보면 성령의 은사 중에 영들 분별함이 있습니다. 또 고전 2:13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입니다. 또 우리를 돕는 보혜사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분별이 필요할 때마다 함께 계시는 성령님께 묻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물으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항상 친절하게 우리를 도우시길 원하시고 성령님의 판단은 언제나 옳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을 잘 받으려면 성결해야 합니다. 늘 철저히 회개하시고 겸손히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언제나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지는 성도가 어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저와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3.지각을 사용하여 영을 시험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다.

히 5:14에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했습니다. 여기 보면 믿음이 장성한 사람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지각’은 ‘아이스데테리온’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감각기관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의 감각입니다. 영혼의 감각을 직관이라고도 합니다.

성도가 지각을 통해 성령과 악령을 몇 가지 시험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음성은 평안을 주지만 악령은 두려움을 줍니다. 성령님은 평강의 영이므로 늘 평안한 가운데 말씀을 하십니다. 로마서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이루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주신다고 했는데, 성령님의 음성은 늘 평안한 가운데 임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에 평안이 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라고 그들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안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눅 24:36) 성령 받은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평안한 것도 성령은 평강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령의 음성을 들으면 뭔지 모르게 마음이 평안하지 않고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사단의 시험을 받은 욥이 욥기 21:6에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라고 불안해합니다. 기도하다가 평안함이 없고 이상한 두려움이 올 때는 즉시로 그 두려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어 쫓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의 음성은 믿음을 주지만 악령의 음성은 의심이 듭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가 사는 집에 사람들을 보내었을 때 베드로가 처음에는 의심을 하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는 안심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행 10:20) 의심 버리고 믿고 순종했을 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처음에는 두려워했지만 성령님이 마리아를 덮으시니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믿음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자신과 이웃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악령은 창세기에 하와를 시험한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게 하여 자기를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악령의 음성을 들으면 기분 좋은 응답을 받아도 뭔가 미심쩍고 의심이 생기고, 불안합니다. 아합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을 하러 올라갈 때 선지자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나라 안에 활동하는 400명의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면 승리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아합은 이상하게 기쁘지가 않고 뭔가 찝찝하고 의심이 들어서 평소에 자신이 미워하는 미가야 선지자를 불러 물었을 때 이 전쟁으로 아합 왕이 전사 할 것을 예언했는데,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기도 중에 환상과 음성이 들리면 적어도 세 번 이상 물리쳐야합니다. 만일 그 음성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세 번 이상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 음성이 마귀가 준 음성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성령의 검으로 치면 즉시 사라집니다. 마귀는 천사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 환상과 음성을 들려주어 속이기 때문에 일단 시험하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음성은 온유하지만 악령은 명령조로 말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영이므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고요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성령의 음성은 사랑이 가득 담겨있고 부드럽고 온유하고 따뜻합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종들은 정말로 모습과 말과 행동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러나 악령의 음성은 들어도 명령조이며 반말을 하며 말투가 대부분 거칩니다. 악령의 힘을 빌려 점을 치는 무당을 보면 자신보다 나이 많은 분이 와도 항상 반말을 합니다. 악령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내며 어디를 가라 누구를 만나라는 등 명령조로 지시를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성령의 음성은 일관성이 있으나 악령은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라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며, 어제나 오늘이나 그 응답이 일관성이 있고 동일합니다. 히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했습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일관성이 있고 진실함이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악령의 음성은 오늘은 이래라 내일은 저래라 하고 일관성이 없이 헷갈리는 말을 자주 합니다. 마귀는 일구이언을 잘하고 거짓말을 잘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이 나면 즉시로 꾸미어 둘러댑니다. 불순종하는 사울 왕에게 성령이 떠나자 악령이 역사함으로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 하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금 새 마음이 변덕스럽게 변한 것은 그 안에서 마귀의 거짓 영이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성령은 위로와 힘을 주지만 악령은 낙심하게 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의 친절한 상담자인 동시에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주님 앞에 나아가서 진실로 회개하고 기도하면 우리의 낙심한 마음을 위로하고 상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고후 1:3-5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했습니다.

성도가 성령이 충만하면 상한 영혼들의 마음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자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악령은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약점을 잡아 정죄하고 책망하고 자신이 하나님 대신하여 죄지은 영혼들을 판단하려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는 죄인들인데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대신 하려는 마귀의 속성인 교만이 그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만한 성향이 많은 이들은 철저하게 회개 하지 아니하면 영혼들을 실족시키는 사탄이 쓰는 불의한 도구로 쓰임을 받기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독사 같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히니 늘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트집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예수님은 마 12:34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유심히 들어 보면 그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는 그 하는 말에 독이 있어 상처를 주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는 잘 분별 하는 지혜를 가져야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선과 악을 잘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성령과 악령을 잘 분별하는 바른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잘 분별하는 지혜와 방법은 성경 말씀을 통해, 기도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각을 가지고 영을 시험하여 잘 분별하여 바른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면제 년의 규례(15:1-23)

 

1. 면제년의 규례(1-18)

* 면제년의 규례(1-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 칠 년에는 빚은 진 형제들에게 강제로 빚을 독촉할 수 없었다. 이 해는 '안식년'(安息年,the Sabbatical year)이라고 불렀으며, 땅을 경작하지 않고 묵혀 두었다(25:4,5). 채무면제(債務免除)의 규례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부채의 완전 탕감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Lange, Matthew Henry). 둘째, 안식년에만 국한된 빚 독촉의 면제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Philo, Calvin, Keil, Pulpit Commentary). 전체적인 내용들을 고려해 볼 때에 두 번째 견해가 훨씬 받아들이기가 쉬운데, 그 이유는 매 안식년마다 모든 채무가 완전 탕감되어 버린다면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게 때문에 금전을 빌려주는 일이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어근 '솨마트''쉬게 한다', '묵여 두다'(23:11)는 뜻으로 어떤 일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시적인 중단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며, '그것을 면제하고...독촉하지 말지니'(2)라는 말도 빚 탕감보다는 오히려 그 해당 연도에 빚 독촉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지지해 주고 있다. '독촉하다'에 해당하는 '나가스''거세게 몰아치다', '강제로 징수하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면제년'은 직역하면 '여호와를 위한 면제'이다. 이는 곧 안식년(安息年)동안 백성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빚 독촉을 면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것으로서,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안식년의 채무 면제 기능에서부터 '면제년(免除年, Year of Release)이란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는 안식년에도 빚 독촉하는 것을 허용하셨다(3). 여기에서 '이방인'에 해당하는 '노크리''게르'(12:49)와는 달리 이스라엘과는 종교적으로 전혀 무관한 순수 외국인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율법과는 무관하게 안식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여 계속 소득을 거두어들이는 자들이었으므로(Keil), 안식년 채무 면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예외 규정이 내려진 이유는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이, 안식년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 특권을 자기 선민에게만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면제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규례를 지키면 가난한 자가 없게 하며, 꾸어줄 것이 있고, 다른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명대로 지켜 행한 사람들에게 크게 축복하실 것이다(4-6). 칼빈은 문장을 더 간단하게 하는 뜻에서 (에페스 키)라는 두 단어를 하나로 묶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희 가운데 거지가 생기는 것을 허용치 말아라"고 해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이 규례를 지키지 않게 될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셨다. 첫째로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손을 움켜쥐는 일이 금지되었다. '강팍히 하다'('아마츠')는 말은 '요새화 하다', '완강하게 하다', '딱딱하게 하다'는 뜻으로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동정심을 고의적으로 억제하여 마음을 굳게 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손을 움켜쥔다'는 말은 이웃에게 동정의 손길을 베풀기를 거절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마음을 강퍅히 한 결과이다. 모든 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채 자신의 재물을 움켜쥐는 완악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악한 마음을 품고 면제 년이 되었다고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된다(9()).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안식년 제도를 기뻐하지 않는 불 신앙이다. 채권자가 빚을 받지 못하고 마침내 안식년이 되어 탕감해 준다고 해서 그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가난한 자가 여호와께 호소할 것을 기억해야 했다(9()). (21:13)"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다. 셋째로 그들은 인색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10).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형제들이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꾸어주라고 하셨는데, 넉넉히 꾸어 주라는 말은 부족함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라는 뜻이다. '아끼다'에 해당하는 '라아''상하게 하다', '괴롭히다', '상처 입히다'등의 뜻이다. 이는 구제하면서도 자신이 큰 손해를 본다는 식으로 언짢아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일 뿐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됨을 시사해 준다. 진정한 구제의 자세는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9)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에서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다(고후 9:7). (11:24)에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고 하였다. 도한 그들은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11). (22;2)에는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다.

 

*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12-18)

면제년에는 종 되었던 자들이 해방되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된 민족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종이 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했다(22:21; 23:9; 19:34). 그러나 히브리 종들 중에 주인의 호의를 입어 결혼함으로 처자(妻子)를 거느리게 된 사람들은 면제년에 자유의 몸이 되기를 거절하는 경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해방되면 사랑하는 처자는 주인의 소유이므로 두고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21:4-5). 이 경우에 주인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종을 재판장에게 데리고 가서 그 사실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그 종의 귀를 주인집의 대문이나 기둥에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었다. 이는 귀를 예속과 복종의 기관으로 간주했던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 의식은 이제 그 종이 주인과 주인의 집에 영원히 예속(隷屬)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러한 의식(儀式)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잔인한 의식으로 보일 지 몰라도 당시의 관점에서는 결코 잔인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다른 이방 족속들은 노예를 자신의 소유로 삼을 때, 이마나 어깨에 화인(火印)을 새기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종들은 대개 귀걸이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귀에 구멍을 뚫는 것은 그토록 고통스런 행위는 아니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이 의식을 치른 후 그때 사용한 송곳을 주인집의 문이나 문설주에 꽃아 놓음으로써, 그 종이 죽을 때까지 그 집의 종임을 가시적(可視的)으로 입증하였다.

 

여종이 아내나 첩으로가 아니라 단순하게 일만 하다가 제 7년을 맞이한 경우에 남종과 마찬가지로 해방될 수 있었다. 집주인이 남종이나 여종을 놓아주는 것은 수리적(數理的)으로 따져 보아도 마땅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정해진 낮 시간에만 일하는 품꾼에 비해 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고하기 때문에, 품삯으로 계산하면 동일한 임금을 받고도 품꾼의 두 배 이상의 일을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약 주인들이 그들의 노예를 마지못해 해방시킬 경우, 그들의 인색하고 천박한 교만을 꾸중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교 훈 >

1. 하나님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답게 형제의 빚에 대해서도 관대함을 보일 것을 요구하셨다.

2. 자원하는 종은 그 집에서 평생 거할 수 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던 것이 이러한 종의 원리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면제년에 형제에게 악한생각이나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하나님은 금지하셨다.

 

 

2. 초태생 가축의 구별(19-23)

초태생은 난지 8일 이후부터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초태생을 중앙 성소에서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린 후에, 제사장의 몫(7:30-34)을 제외하고 경배자가 가족과 더불어 성소 뜰에서 먹으라고 지시하셨다(20).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법을 제정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스라엘의 장자들과 처음 난 짐승들을 살려 주셨기 때문이다(11:4-7, 12;29-30). 그 때에는 제물의 고기를 회막 뜰에서 먹었는데, 그 먹는 것도 역시 제사 의식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속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에 대한 상징이었다(6:16, 7;15-18). 비록 초태생이라도 흠이 있는 경우에는 제물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었고, 식용으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는 속죄(贖罪)의 상징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최고의 종교적 성물(聖物)인 피의 식용(食用)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기는 자는 극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9:4,5; 7:27;17:10). 짐승의 피를 마치 물을 쏟아 붓듯 땅에 쏟아야 할 이유는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인 만큼, 본래 그 생명이 비롯되었던 흙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며(3:19; 3:20),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교 훈>

1.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2.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하며,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

 

 

 

 

 

 

 

 

   

 

 

면제 년의 규례(15:1-23)

1. 면제년의 규례(1-18)

* 면제년의 규례(1-11)

'안식년'(安息年,the Sabbatical year)(25:4,5).

채무의 면제(債務免除)

 

첫째로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손을 움켜쥐는 일이 금지되었다.

둘째로 그들은 악한 마음을 품고 면제 년이 되었다고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된다(9()).

셋째로 그들은 인색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10).

넷째로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11).

 

*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12-18)

면제년에는 종 되었던 자들이 해방되었다.

 

2. 초태생 가축의 구별(19-23)

초태생은 난지 8일 이후부터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

 

 

 

 

순종과 축복과 불순종과 저주(신11:1-32)

 

7-1.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법도를 지켜야 할 이유(1-7)

 

하나님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1). 여기에서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아하브'는 남녀간의 뜨거운 '애정'을 가리킨다. 사랑이 없는 율법 준수는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라고 하셨다(22:37-4). 모세는 사랑의 정신으로 모든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하였는데, 직임('미쉬메레트')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의무'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2-7). 이스라엘은 애굽에서부터 광야를 통행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이적과 기사를 친히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 요단 동편 땅에 이르기까지 보호하고 인도해 주셨다(2:24-3:17).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기억하는 이스라엘은 남은 여정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9:1-5).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16:11-20),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17:1-7 ; 20:1-13), 의복과 신발을 공급해 주셨다(8:4). 모세가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감사와 순종은 이처럼 과거에 받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생히 기억하는 데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두 번째 동기는 하나님의 공의를 아는 것이다. 서옫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알 때에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게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라의 반역 사건을 실례로 들고 있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은 고라(Korah)를 중심한 다단, 아비람, 온이 250인의 족장과 결탁하여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가데스바네아 사건 이후, 하나님의 징계로 방랑하게 된 광야 38년 세월 동안 숱하게 일어났을 거역과 불순종의 사건 중 유일하게 전해진 사건이다.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은 고라 일당의 모든 생축(生畜)이 아니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16:32), 즉 고라의 반역을 추종했던 일당들을 가리킨다(16:32참조).

 

< 교 훈 >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말씀 순종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일들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둘째로는 공의로서의 심판이다. 이러한 적절한 사랑과 징계가 어울려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게 하는 교육과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7-2. 율법준수(8-17)

 

* 율법 준수를 해야 할 이유(8-12)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것을 몇 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강해진다(8())

본문에 "강성할 것"이라는 말은 강해질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죄악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심령이 강해질 것은 당연하다(28:1). 여기에서 사용된 '강성하다'('하자크')의 본래 뜻은 '조력하다', '돕다'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번성과 강대함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2) 그들이 가나안 땅을 얻게 된다(8)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니 만큼, 그 땅의 정복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3) 그들이 그 땅에서 사는 날이 장구할 것이다(9)

하나님의 축복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다. 모세는 이 땅을 가리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가나안 땅의 기름짐과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은 소나 양과 같은 가축에게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우유나 버터를 가리키며, ''은 가나안의 토산품이 될 정도로 야산에서 많이 채취되었다(14:8 ; 삼상 14:25 ; 대하 31:5). 그러나 이 말은 가나안 땅의 풍부한 자연조건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땅은 일부 비옥한 지대를 제외하고는 물이 넉넉하지 못하고 기온 차가 심하며 곳곳에 불모지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땅'이라는 언약적 의미(17:8)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축복의 땅으로 변하기 마련이다(28:15 ; 9:13-15).

 

(4) 이스라엘이 차지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돌보시는 곳이다(10-14).

지리적 조건이 좋다는 것은, 곧바로 하나님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종살이하던 애굽 땅은 발로 물을 대던 곳이었다(10 ). 애굽의 농업은 주로 나일 강의 물을 이용하는 관개시설(灌漑施設)에 의존하였다. 그리고 여기 '발로 물대기'란 것도 그 같은 관개 시설의 일환인 수차(水車)를 발로 돌려서 농경지에 연결된 수로(水路)에 물을 끌어들이는 것을 가리키는데, 상당한 수고와 노력이 요구되었다(Rovinson, Niebuhr). 그러나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었다(11). 가나안은 대부분이 평지인 애굽과는 달리 수많은 산과 언덕 그리고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자연적인 저수지와 수로(水路)를 형성해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이른 비''늦은 비'(14)를 적절히 내려 주심으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와 같은 관개(灌漑)의 수고와 노력 없이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될 것이다. 또한 모세는 이 땅을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며,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 항상 그 곳에 있는 땅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권고한다'('다라쉬')는 말의 본래 뜻은 '밟다'는 의미로서, 여기에서 '추적하다', '조사하다', '찾다', '돌보다'란 뜻이 파생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일일이 돌봐 주시는 세심한 보살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다는 말은 의역(意譯)하면 '한 해의 첫날부터 끝 날까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지켜 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란 의미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의 눈'이란 가나안 땅과 또한 그 땅위에 살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고정되어 있는 그분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보살핌 따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왕상 9:3 ; 34:15).

 

* 순종에 대한 격려(13-1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 하고 성품을 다 하여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축복하실 것이라고 하셨다(13-15). 여기에서는 축복이 이른 비와 늦은 비, 곡식과 포도주와, 들의 초장 등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들은 그 당시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환경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른 비는 우기가 시작되는 10-11월에 내리는 비로써 '가을비' 혹은 '첫 비'라고도 한다. 이 때에 팔레스틴 농사는 파종기에 접어들기 때문에 이른 비는 건기 동안에 메마르고 딱딱해졌던 땅을 경작하기에 좋도록 흙을 부드럽게 적셔준다. 그리고 '늦은 비'는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될 즈음인 3-4월경에 내리는 비로서, '봄비'라고도 한다. 이때에 팔레스틴 농사는 추수기에 접어들기 때문에 늦은 비는 농산물의 결실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내리는 것은 농작물의 수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때를 따라 모든 환경에서 성도를 돕는 '하나님의 필요 적절한 은혜'를 상징한다. 모세는 비를 보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참고> 1-4(늦은 비가 내리는 기간: 겨울 무화과, 보리 추수)

5-9(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 :밀 추수, 첫 포도 수확, 밭갈이)

10-12(이른 비가 내리는 시기: 곡물 파종, 발아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가나안 땅의 대표적인 3대 소산물이며, 들에 풀이 나게 하신다는 말은 ''은 목축업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초장(草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농업과 목축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좋은 땅임을 말한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못할 때에 그들에게 닥치게 될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에 미혹되어" 우상을 섬기게 되면, (14-15)에 약속한 물질적 축복도 받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도 멸망하게 될 것이다(16-17). 미혹되었다는 말은 원어로 '파타'인데 이 말은 '열다'라는 말로서 곧 죄나 유혹에 대해 마음 문을 열어 놓는 것을 가리킨다.

 

< 교 훈 >

1.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강성해 질 것이며, 약속된 기업을 받게 될 것이고, 그 날이 장구하게 될 것이다(8-9).

2.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기업은 모든 것이 준비된 기업이며, 그 곳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관심이 계속하여 지속되는 곳이다(10-12).

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전심을 다한 섬김을 원하신다. 그리고 이같이 전심을 다하여 섬기는 성도들에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 때에 내리시듯이 모든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때에 채워주실 것이다(13-15).

4.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저주가 따를 것이다(16-17).

 

 

7-3. 축복과 저주의 길(18-32)

 

* 말씀의 생활화를 위한 지침(18-21)

이 부분의 근본 의미는 각자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그 말씀을 모든 행동과 생활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부패한 인간들의 속성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떠나기 쉽기 때문에, 항상 그 말씀을 기억하고 모든 환경에서 말씀대로 살 수 있게 하셨다. 즉 손목에 말씀을 매고서 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고, 두 눈썹 사이에 말씀을 붙이고 늘 눈으로 말씀을 기억나게 하며, 말씀을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고서 출입할 때에도 항상 그 말씀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종교의식으로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는 보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과 열심을 돕기 위해 취해진 예식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랑 없이 종교적인 열심만으로 말씀을 기록하여 옷에 달고 다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책망하셨다(23:5). (2:13)에서도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고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같이 말씀을 생활화하여 살 때에, 그들과 그들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직역하면 '그들과 그 자녀들의 날이 땅 위에 있는 하늘의 날들만큼이나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KJV). 이 말은 의역하면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날이 하늘이 땅 위에 펼쳐져 있는 한 영원토록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RSV).

 

* 말씀 순종할 때의 형통함(22-25)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순종하는 이스라엘이 받게될 축복에 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하였다. 여기서 '부종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다바크''달라붙다', '굳게 매달리다', '바싹 뒤따르다'는 뜻인데, (10:20)에서는 '친근히 하다'로 번역되었다. 이는 하나님과의 전 인격적인 연합이나 친밀한 교제를 가리키는데, 모든 성도가 마땅히 취하여야 할 기본 자세이다(요일 1:3).

 

(1) 자기보다 더 강한 민족들을 내쫓고 가나안을 차지함(23).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에 주어지는 구체적인 축복인데, 여기서 우리는 좋은 환경, 능한 처세술, 적절한 기회, 그리고 자신의 능력 등과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다만 하나님을 청종하면 진정한 승리의 삶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9:13-20 ; 5:5, 6).

 

(2) 가나안에서 강한 나라를 이루고, 레바논과 유브라데까지 영토를 차지할 것(24 ).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의 사방 최대 경계를 가리키는데,(15:18) 그 영토는 남쪽으로 아라비아 사막 광야 지대에서부터 북쪽으로 레바논에 이르기까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1:7). 여기서 '서해'(西海)는 일명 '대해'(大海)로도 불리는 지중해(34:6, 7 ; 1:4 ; 15:12 ; 47:15, 19)를 가리키는데, 원어로는 '얌 아하론', '맨 끝의 바다'또는 '뒤쪽의 바다'란 뜻이다.

 

(3)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당할 민족이 없을 것(25).

두려워하게 하신다('파하드')는 말과 무서워하게 하신다('모라')는 말은 둘 다 큰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 표현은 두려움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기 위한 이중적 표현이다(2:25).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자 곧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것으로 자신을 무장한 자는 세상 권세가 결코 감당치 못한다(14:9 ; 왕하 6:16 ; 118:6 ;8:31 ; 요일 4:4).

 

* 복과 저주의 선포(26-32)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를 그들의 눈앞에 세워 놓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행동에 따라서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 모세는 그들에게 말씀을 순종하여 축복의 삶을 살라고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순종을 원하시되 그 마음과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의 선택권을 전적으로 인간들에게 맡기셨다. 모세는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신들을 좆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26-28).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지시했다(29).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서 레위인들이 선창하는 것을 복창함으로써 엄숙한 비준으로서의 동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다. 그들이 직접 땅을 밟고서 이 언약을 확인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기 위해서 법정에 들어섰다는 것을 말한다. 이 두 산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사람을 두 편으로 나누어 축복과 저주를 주고받을 경우에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를 응답 송으로 찬송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러한 모세의 지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때 따르는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보다 생생히 교훈하기 위함이었는데, 훗날 여호수아의 주도하에 실제로 거행되었다(8:30-35).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그 사이의 골짜기 동쪽 입구에는 세겜(12:6)이라는 성읍이 있다. 이 중 축복의 산으로 선정된 그리심 산(27:12)은 해발 854.7m에 달하며, 저주의 산으로 선정된 에발 산(27:13)은 해발 919.5m이다. 그런데 이 두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나뉘어 선택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

 

(1) 위치상 그리심 산은 항상 햇빛이 들지만, 에발 산은 그늘이 진다(Schultz, Keil).

(2) 그리심 산은 숲이 울창하나, 에발 산은 바위산이다(Strauss, Raumer, Voelter).

(3) 그리심 산은 오른편에, 에발산은 왼편에 있다(25:33, 34, 41).

 

이 두 산은 가나안 땅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비슷한 높이의 두 산이 마주 보고 있고, 700년 전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와서 하나님께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지점으로서(12:6, 7), 위치나 의미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해 지는 편으로 가는 길은 팔레스틴의 동서를 관통하는 길, 즉 세겜을 경유하여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를 통과, 지중해 연안으로 나아가는 교통로를 가리키며(Robinson, Ritter), 길갈은 여리고 평야의 길갈(4:19 ; 5:2-9)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서, 이곳은' 세겜 동남방 4km, 그리심 산 동쪽 1.6km 지점에 있는 현재의 '일일리아'(Jiljilia)인 것으로 추정된다(Keil, Baumgarten, Lange). 그리고 모레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이른 후 장막을 친 곳으로 세겜 부근이다. 모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가나안 정복의 확신을 심어주고, 정복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라는 권하고 있다.

 

< 교 훈 >

1.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에서나 생활화되어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좆아 살 때에, 우리의 날이 장구해지며, 강한 사람들을 물리치고 약속된 기업을 얻게되고, 주변 사람들도 그들을 보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3. 성도들은 자기 입으로 말씀의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하여 축복과 저주를 선포해보는 일이 필요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 말씀에 대한 다짐을 더 굳게 할 수 있고, 하나님께 말씀대로 살게 될 것을 더욱 다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종과 축복과 불순종과 저주(11:1-32)

1.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법도를 지켜야 할 이유(1-7)

(1). 하나님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

(2)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두 번째 동기는 하나님의 공의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알 때에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게된다.

 

2. 율법준수(8-17)

* 율법 준수를 해야 할 이유(8-12)

(1)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강해진다(8())

 

(2) 그들이 가나안 땅을 얻게 된다(8)

 

(3) 그들이 그 땅에서 사는 날이 장구할 것이다(9)

 

(4) 이스라엘이 차지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돌보시는 곳이다(10-14).

 

* 순종에 대한 격려(13-17)

말씀을 순종하지 못할 때에 그들에게 닥치게 될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3. 축복과 저주의 길(18-32)

* 말씀의 생활화를 위한 지침(18-21)

 

* 말씀 순종할 때의 형통함(22-25)

(1) 자기보다 더 강한 민족들을 내쫓고 가나안을 차지함(23).

 

(2) 가나안에서 강한 나라를 이루고, 레바논과 유브라데까지 영토를 차지할 것(24 ).

 

(3)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당할 민족이 없을 것(25).

 

* 복과 저주의 선포(26-32)

 

 

 

 

 

 

 

 

 

 

 

(50:23) 감사 예배의 기적

불평만 일삼는 불평나라의 한 젊은이가 감사나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친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떠나는 젊은이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이번에 감사나라에 가서 감사를 잘 배워서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쳐 주세요.”

이 젊은이는 감사나라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드디어 감사 박사학위를 따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사 박사학위증을 가지고 자기나라인 불평나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잘 배워 왔을까 궁금해 하며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단상에 오른 그 젊은이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지겨웠습니다. 그 나라는 어떻게 된 나라인지 눈을 떠도 감사, 잘 때도 감사, 입만 열었다 하면 감사, 도대체 감사 밖에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전 정말 지겨울 정도로 징그럽게 감사만 배우고 왔을 뿐입니다.”

반대로 감사나라의 한 젊은이가 불평나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 젊은이는 열심히 공부하여 드디어 불평 박사학위를 따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떤 것을 배워 왔는지 궁금해 하며 모여들었습니다. 단상에 오른 그 젊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할 줄 알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해준 그 나라 사람들에게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이 있지만 감사보다는 불평할 때가 더 많습니다. 불평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모든 관계가 좋아지고 환경도 점점 더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감사를 잘 하십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성도라는 말의 뜻부터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예배드리는 자입니다. 본문이 속해 있는 시편 50편 가운데 5절을 보면 성도는 예배자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여기서 성도라고 번역한 원어는 하시드인데 경건한 자를 말합니다. 성도를 의미합니다. NIV 영어성경은 ‘consecrated ones’, KJV 영어성경은 ‘saints’라고 하여 성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말이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성도라는 말을 쉽게 부르고 있습니다만 성도가 된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누구나 손쉽게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도가 될 수 있습니까? 5절을 보면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made a covenant with me by sacrific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희생제물(sacrifice)로써 하나님과 언약(covenant)을 맺은(made) 사람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희생제물로 만들어진 사이입니다.

여기서 희생제물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희생제물은 곧 제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라는 말의 출처를 잘 알아야 성도의 의미를 제대로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사, 즉 희생제물(제바흐)이란 의미를 어떻게 잘 알 수 있겠습니까?

제사의 뜻을 알려면 창세기 321절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화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사는 아담과 하와였지만 불쌍히 여겨주셔서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죽옷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죽옷은 짐승의 피를 흘리고 만든 옷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 양 예수께서 피를 흘리시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지만 속죄의 피로 용서받고 영생을 누리도록 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 아벨이 양 치는 자로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4:4). 노아가 제물을 드립니다. 창세기 820절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희생제사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드렸습니다. 창세기 12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제단이라는 말 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희생제물을 드렸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일어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삭도 드렸습니다. 창세기 2625절입니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야곱도 드렸습니다. 창세기 46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야곱이 가족을 데리고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이주할 때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46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약 400여 년이 흐른 뒤 애굽에서 나올 때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도록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8절입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이후 애굽에 내린 재앙의 과정을 보면 계속해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내 보내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기념하는 제사도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다시 흘러 신약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상징이었던 어린 양 예수의 피를 실제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도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희생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성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굉장한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으로부터 출 애굽한 성도는 하나님과 제사로 맺은 사이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데 그 표징 가운데 하나가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주일 성수가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날인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31: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주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아니면 영원히 멸망합니다.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되어버립니까?

그러나 반대로 주일을 지키는 성도에게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58: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를 잘 드릴 때 성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희생제물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아울러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거기에다가 주일을 통해 주시는 놀라운 기쁨과 은혜와 축복까지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다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좋을 때만 감사가 아니라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본문이 속한 시편 50편 가운데 14절을 보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살펴보면 감사의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NASB 영어성경에서 “Offer to God a sacrifice of thanksgiving”이라고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데 감사의 제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7절부터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풀이해 볼 수 있습니다. “,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아, 내 말을 잘 들어보아라. 나는 너희들이 드리는 제물 때문에 책망하지는 않겠다. 항상 잘 드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들의 희생제물을 가져가지는 않겠다. 천하에 있는 모든 희생제물이 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배가 고프다고 가정할지라도 너희들에게서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희생제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 예배는 잘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를 원하시고 계십니까? 그것을 14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무수한 예배보다는 감사로 드리는 예배를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로 예배를 드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본문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을 보면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해주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니,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내가 나의 구원을 보여 주겠다.”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원은 원어로 예샤라고 하는데 구원, 구출, 구조, 안전, 복리, 번영, 승리를 의미합니다. 건져주어 평안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시편 50편을 보면 1절에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 것을 강조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4절과 15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최종적으로 23절에 다시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감사로 예배드릴 때 구원해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요나가 그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외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편 서쪽에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러다가 풍랑을 만나서 그만 바닷물에 던져져서 커다란 물고기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요나는 불평하지 않고 물고기 뱃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요나서 21절에서 9절까지 기도드리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7절부터 9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감사로 제사를 드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자 요나를 육지에 뱉어냈습니다. 요나는 그리하여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감사하는 자를 눈여겨보시고 구원해주십니다. 감사로 예배드리는 자를 구원해주십니다. 우리도 물고기 뱃속에 갇힌 요나처럼 삶과 사역 가운데 여러 가지 일로 괴로워하고 답답해하고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앞뒤 꽉꽉막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절망적인 신세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드릴 때 건짐을 받습니다. 요나처럼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감사로 드리는 예배는 기적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네 종류의 사람(전4:116)

 

< 개 요 >

1. 4:13 학대받는 인생

2. 4:46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

3. 4:712 남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

4. 4:1316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인생

 

지금까지 우리는 매주 전도서의 말씀을 한 장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생각해왔습니다.

오늘은 4장의 말씀을 살펴볼 텐데 먼저 그 동안의 말씀을 복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 1장에서 말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해 아래에서는 인생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그 수고가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 아래의 수고, 다시 말해서 육신을 위한 수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수고는 해보았자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주 안에서의 수고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전도서 2장에서 말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인생의 행복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쾌락의 나라에도 가보았고, 지혜의 나라에도 가보았고, 재물의 나라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뒤에 솔로몬은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에 낙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솔로몬은 2장에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었습니까? 천하에 범사가, 모든 일에는 다 정한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때를 정해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를 어떻게 정하셨습니까? 사람들을 골탕먹이기 위해서, 괴롭히기 위해서 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장래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때를 정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맡겨주셨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장 적합한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을 누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일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분복입니다. 타고난 복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고 즐겨야 할 복입니다.

오늘은 4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전도서 4장에서 솔로몬은 네 종류의 사람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 네 종류의 인생들은 다 불행합니다.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말씀을 읽어가면서 혹시 나는 그 가운데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지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래서 그 동안 마음에 평안이 없었구나! 내가 이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지 못했구나!" 이것을 깨닫고 잘못된 것은 즉시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이제 남은 생애는 주님 안에서 심령에 낙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말씀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학대받는 인생

솔로몬이 13절에서 논하고 있는 인생은 학대받는 인생입니다. 학대를 받으며 사니까 무슨 심령에 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첫번째 종류의 인생입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모든 학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학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합니다.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합니다. 힘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억누릅니다. 이처럼 어디에나 다 학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솔로몬이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는데, 문제는 학대받는 사람에게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시 한번 그것을 반복하면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하는 사람의 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대받는 사람을 마음껏 학대합니다. 그러나 학대받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두 눈에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한 현실입니까? 솔로몬은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 학대받는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무슨 말씀입니까? 위로 받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솔로몬은 3절에서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악은 아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그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악이 있고, 학대가 있고, 그에 따른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힘든 일을 당할 때, 어렵고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 어디에서 위로를 찾으십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욥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습니다.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위로해주기 위해서 온갖 말을 다 해주었지만 욥이 세 친구에게서 과연 위로를 받았습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믿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게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디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까?

121편에서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러분도 힘들고 어려울 때 해 아래 인생들에게서 위로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위에 계신 분,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사악한 여인 이세벨의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멀리 하나님의 산 호렙 산으로 피신을 가야만 했습니다. 광야 길이기 때문에 길이 험했습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워서 엘리야는 어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갈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엘리야를 죽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마실 것도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모든 어려운 곤경을 극복해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에게 어려운 곤경이 임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욥기 3장에 보면 욥이 자기의 생일까지 저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차라리 어머니 뱃속에서 죽었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탄식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욥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으로 그의 무지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위로해주셨습니다. 모든 곤경을 다 돌이키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욥이 자기 친구들로부터는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어떠한 환난을 당하든지 간에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능히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

 

두번째 종류의 인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46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종류의 인생은 그의 마음속에 시기심, 다른 사람에 대한 경쟁심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심령에 무슨 낙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첫째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또 두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재주가 좋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항상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열심히 수고해서 성공한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조금 잘못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결과로 이웃 사람들의 시기를 받는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문맥에 적합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는데 다른 사람이 시기한다면 그것은 시기하는 사람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지요?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성공을 했는데, 그 동기가 이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동기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두번째 인생은 옳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웃 사람에 대한 시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되는 꼴이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짓밟기 위해서 무리하게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기가 옳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성공한들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것도 헛되어."

하나님이 그런 성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인정해주시겠습니까? 그러니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러분,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아보십시오. 잡힙니까? 잡아도 잡아도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경쟁해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나보다도 나은 사람이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일이 끝이 없습니다.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경쟁이라는 것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떤 삶입니까?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남과 다투기 싫다고,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매자"라고 했습니다. 바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살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도 않는데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자기 살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다 잘못입니다. 언제나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사람은 그래도 한 손에는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매자처럼 손을 거두고 굶어죽는 사람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한 손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과도한 경쟁을 하지도 않습니다. 뼈빠지게 일하고, 스트레스 받고, 긴장이 쌓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평온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두 손에 가득하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고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죽도록 고생만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수고하고, 사업을 하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 잘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또는 내가 이웃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이것이 늘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돼.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을 이겨야 해." 그런 마음에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늘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 우리 하나님만이 주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평온함이 비로소 우리 마음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관계, 즉 나와 너와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될 수 있도록 늘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남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

 

세번째 종류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712절에 나오는 인생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을 모릅니다. 너무 독립심이 강합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뭐든지 자기 혼자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 그 마음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릴 줄도 알고,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수고해도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지 8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가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가족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문을 넓게 열면 이웃 사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가족처럼 여기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아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업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저 혼자서만 수고를 계속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러서 같이 협력해서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 이유가 나옵니다.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벌어놓은 부를 자기 혼자 다 독차지해도 양이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동업해서 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벌어놓은 부를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나누기 싫어서, 자기 혼자 다 독차지하려고, 모든 영광을 다 혼자 차지하려고 그렇게 독립심이 강해서 혼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양이 차겠습니까? 결국은 허전한 마음이 되어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뼈빠지게 고생해봤자 누구를 위한 수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를 위해서 수고한 것입니까? nobody입니다. 아무도 유익을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어서 자기가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나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죽은 후 재산을 관리해 줄 친구라든지 동업자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수고를 통해서 유익을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결과가 8절 끝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아무도 유익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9절 이하에서 협력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같이 일하면 더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협력할 때 얻게 되는 좋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솔로몬은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광야 길을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광야 길은 아스팔트처럼 좋은 길이 아닙니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파져 있습니다. 그런 험한 길을 더군다나 밤중에 여행하게 되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밤중에 여행을 하다가 한 사람이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잘못해서 발을 삐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를 붙들어 일으켜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아주 결정적으로 화를 초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밤이 되었습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심합니다. 낮에는 아주 덥고, 밤에는 아주 춥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혼자이면 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그 추위를 혼자서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서 등을 대고, 또는 끌어안고 잔다면 체온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따뜻합니다.

또 광야에는 강도가 나타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유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처럼 광야 길을 혼자 여행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것이 12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안전합니다. 뭉치면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위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 무슨 말입니까?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저 물질이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물질 제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물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이웃의 소중함을 알고 함께 협력하면서 더불어서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창고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 창고에 곡식을 가득가득 쌓아놓았습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잔뜩 쌓아놓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날 밤에 그 영혼을 불러가 버리셨습니다.

물질에 목적을 두지 마세요. 물질에 목적을 두었을 때, 돈을 많이 벌기는 벌어도 쓰지 않고 채워놓기만 하면 인생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지 않습니까? "됐어? 너 이리와."

하나님이 불러가십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다 산 것입니다.

우리가 안심하고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형편이 되시는 대로 인삼도 드시고, 녹용도 드시고, 보약도 드세요. 그러나 그것보다 확실한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이웃을 위해서 많이 쓰는 것입니다. 그 일은 끝이 없습니다. 해도해도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꾸 주십니다. 주시는 대로 값있게 쓰면 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오래 삽니다. 이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모든 교우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

 

마지막 네번째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네번째 종류의 인생은 1316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3절을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봅니다. 우선 왼편에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왕입니다. 신분이 서로 다릅니다. 아울러 왼편에 있는 사람은 소년입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립니다. 오른편에 있는 왕은 늙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만 살펴보면 누가 더 낫습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월등히 낫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 제 3의 요소가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둔하다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그 예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함을 받을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신 줄 압니다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집만 세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고정되어 있어서, 분명히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그 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두 사람의 위치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지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저는"은 왼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옥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감옥에까지 갔었습니다. 어려운 역경에 있었지만 그 모든 역경을 지혜로 극복하고 나중에 왕이 되었습니다.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년이고, 가난하지만 지혜로워서 좋았는데 왕이 되니까 지혜로웠던 소년도 또 둔해집니다.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년도 그 이전의 왕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마음도 제3의 또 다른 새롭게 일어난 소년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권력이라는 것도 일시적이고 덧없지만, 인기와 명성도 다 그렇습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됩니까? 3의 소년이 왕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뻔하지 않습니까?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백성들의 마음은 제4, 5의 소년에게로 자꾸 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의 권력, 인기, 명성 등은 다 헛된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우리가 어찌 우리의 인생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소망으로 삼고, 그 한 분만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고 의미 있는 삶, 가치 있고 보람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전도서 4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왜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 있게 됩니다.

세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물질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물질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네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덧없는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그분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의 여생이 주님 안에서 더욱더 행복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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