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아들의 열매   잠언 10 : 1 - 10
  잠언을 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왕인 솔로몬입니다. 열상4:32절 말씀을 보면 솔로몬은 삼천 잠언을 썼다고 했습니다. 잠언 서에는 지극히 적은 한 부분만 기록한 것이지만 그 전체적인 내용을 관찰하면 이 모든 잠언이 이 땅에서 의인이 받을 상급과 악인이 받을 악의 형벌에 관한 교훈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중요한 요지는 미련한 아들과 지혜로운 아들의 두 경우를 보여 주시면서 이들이 그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의 즐거움과 슬픔은 그 자식들의 지혜로움과 미련함을 따라 좌우된다고 말씀해 줍니다. 부모는 그 자식의 지혜로움을 따라 기뻐하고 그 자식의 미련함을 따라 슬퍼한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출발하고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에게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크게 효도하는 방법은 지혜로운 아들이 되는 길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이란 말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모님께 대한 효도는 그 부모에게 지혜로운 아들이 되는데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중국에서 건너온 유교 사상 때문에 부모를 섬기며 효하는 일을 유교적으로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면 그 유교 사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부모님께 대한 제사와 외식적인 허례허식에 뿌리를 둔 사상이 바로 유교사상입니다. 유교사상에서 나온 부모님께 대한 공경은 우리가 따라야 할 교훈적인 예절이 많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윤리나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참으로 인간들이 지켜야할 참 도리는 십계명의 도덕율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십계명에 나타난 도덕율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부터 선현들로부터 교훈으로 전해져 온 인간도덕은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짓는 도덕은 스스로 다 없애버리고 인간적인 전통과 생각에 의해 가르쳐온 것입니다. 

  기독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비윤리적인 종교라고 매도하고 교회에 나가면 가정 윤리가 당장에 무너져 버리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이 우리 인간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그리고 사람과 사람간의 진실한 윤리적인 도덕률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 전래한 한국인의 윤리관이 ‘삼강오륜’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이 삼강오륜은 대단히 봉건적이고 비민주적 윤리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삼강오륜이 무너진 것은 기독교의 문화 때문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시대가 봉건주의 시대 아래에서의 낡은 비민주적 도덕의 틀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이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삼강오륜’이 무엇이냐는 설문을 쓰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대답이 너무 희극적이라 신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삼강은 한국의 가장 큰 강 셋을 말하는데 한강, 압록강, 낙동강이라고 썼고 오륜은 올림픽의 약자라고 답안을 썼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도덕 생활의 규범으로 주신 십계명에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계명을 빼면 그 첫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고 한 것으로 부모님께 대한 공경입니다. 엡6:1절에서는 ‘자녀들아 너의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자녀들에게 부모님께 순종 뿐 아니라, 공경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공경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부모님을 인간과의 관계에서 최대의 자리에 계신 분으로 여기고 그 분께 순종과 공경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으며 또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부모를 이처럼 순종하고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상급을 주시는데 복된 삶과 장수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는 세계의 다른 어떤 종교나 도덕을 중시하는 어떤 단체보다도 훨씬 우월한 부모님께 대한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툭하면 제사를 내세우면서 제사를 부모님께 대한 효도로 생각하는 잘못을 깨우쳐 줘야 하는 것입니다. 

  1. 지혜로운 아들에게 주시는 재물의 축복

  오늘 본문 2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구분하면 2-6절까지는 지혜로운 아들이 받을 재물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고 7-10절까지는 지혜로운 아들에게 돌아올 명예와 미련한 아들에게 돌아갈 부끄러움이 쓰여 있습니다. 

  (1)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물을 물리치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아들은 불의로 얻는 재물을 탐내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런 재물은 무익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일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면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속이는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도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가로채면서 주자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히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주일날 장사해서 돈을 버는 일도 불의한 재물을 쌓는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마땅히 드린다는 일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마땅히 드린다는 말은 온전히 드린다는 뜻입니다.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친척이나 이웃이나 형제들로부터 입원비 명목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뗀다는 일은 어렵습니다. 갑자기 난데없이 떼돈이 수중에 들어 왔습니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대에 해당되는 거금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것을 온전히 구분하여 드리는 일도 어지간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자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그럭저럭 먹고 입을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는 해주시지만 하늘 문을 여시고 창고에 차고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축복은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들의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셨는데 이 재물을 하나님  은 그 사람으로 누리지 못하게 하시고 자기에게 차례 갈 몫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그 손에서 빼앗아 그 돈을 갖기에 합당한 사람에게 옮겨지는 것입니다. 시127편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아등바등 애써도 헛된 수고로 끝나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말1:4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고 하셨습니다. 돈에 눈독을 드려 돈을 모으기에만 급급한 사람은 불의한 재물과 의로운 재물을 구별하지 못하며 자기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자꾸 쌓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헐리고 마는 것입니다. 

  재물은 내 손에만 들어오고 내 품에만 안기면 내 것이 되는 줄로 생각했다간 큰 코 다칩니다. 잠23:5절 말씀을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습니다. 그 돈이 머물러 있을 집이 못되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이 빼앗아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들은 주리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히 변치 않는 법칙입니다. 시34:9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법칙에 대하여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이런 법칙에 예외인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 스스로 가난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그 보상으로 받을 것입니다. 다른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귀한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 연단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싫건 좋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짊어지게 하신 십자가를 벗어버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연단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기까지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2. 의인의 명예와 악인의 수욕

  본문 6절에서 9절까지에는 의인이 얻을 명예와 악인이 얻을 수욕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고 그의 걸음이 평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 시1:6절에 나오는 말씀에는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인의 머리에 복이 임하는 이유와 악인에게 패망과 썩음이 오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에서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명령을 받는 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모든 축복의 근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순종이 없이는 복 받는 생애를 살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30:15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으로 받으며 그 말씀을 따라 바른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길은 평안하고 그에게는 항상 칭찬이 오게 되고 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아들은 그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미련한 아들이 패망하고 그 이름이 썩는 이유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악독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서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 한다’고 했습니다. 입에 악독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진실이 없는 입술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값진 입술은 진실입니다. 진실이 없는 입은 모두 가증한 입입니다. 

  입이 악독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모해하는 혀를 가리킵니다. 남을 모함하려고 그 사람을 중상하거나 참소하면 그 보응이 자신에게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을 해 주는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해 준 축복이 그 사람에게 머무를 수 없을 경우에는 그 축복이 내게로 되돌아와 자기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라고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109:17절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는 명심하고 우리의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다’고 했습니다. 입과 생명과는 밀접한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21:23절에서는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141편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지혜로운 아들은 육신의 부모에게 대한 효도의 극치요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혜로운 아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을 걸어 이 땅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의 축복과 의인의 머리에 내리시는 영광의 복과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약 > 잠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된 혀의 해독 잠언 12 : 15 - 22  (0) 2015.01.16
지혜로운 삶 잠11장 1- 23   (0) 2015.01.10
음녀의 초대 잠언9장13-18   (0) 2014.12.30
지혜가 부른다 8장1-11  (0) 2014.12.24
사망의 길 7장24-27  (0) 2014.12.13

세례 받는 심령으로 사는 한 해 누가 315-22

 

오늘은 새해 두 번째 주일입니다. 새해가 이미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제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하면 성도 여러분들로 하여금 복된 한 해를 사시게 할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오늘 본문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내용인데,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처음에 세례를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한 해를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원주님들에게 설교하다가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죄에 대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원주민은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머리를 갸우뚱하며 몸이 살아있는데 마음이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생각다 못해서 구덩이를 파고 그를 그 곳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교사의 말대로 구덩이에 들어갔습니다. 선교사는 흙을 조금 구덩이에 넣고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아니요. 죽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선교사는 다시 흙을 그 사람들의 허리에까지 채우고 "아직도 안 죽었습니까?" “천만에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했습니다. 이번에는 흙을 그의 목까지 올라오게 채웠습니다.

 

그는 온 몸이 흙에 묻혀버리자 선교사가 묻기도 전에, “선생님, 이젠 죽었습니다.” “천만에요, 당신은 아직도 살아 있지 않소?” “아닙니다, 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선교사는 그 사람을 구덩이에서 꺼내어주며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살아있으나 악한 일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세례를 받은 사람의 각오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오신지 얼마 안 되는 성도님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들에게 뜬금없이 세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약간은 쑥스럽습니다만 성도는 항상 세례 받을 때의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일을 앞에 두거나 새해를 시작하면서 그러한 마음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새해에 성도님 자신의 욕망과 자존심, 죄와 악, 정욕과 혈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각오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세례는 이미 받았지만 뜨거운 성령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 세례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8:19)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아야 할 의무입니다. 세례는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닙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은 제자의 사명입니다.

 

첫째, 세례는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세례는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물에 잠그는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시행될 수 있습니다. 물론 물에 잠그는 침례가 좋다고 생각되지만 교회의 윤리적 여건상 물을 머리에 뿌리거나 붓는 세례를 베풉니다. 어떻든 간에 세례는 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세례를 받는 성도가 죽어 물속에 장사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3-4). 그러므로 세례 받은 사람은 세례를 통하여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세례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할 권세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6:6-7).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는 바로 주님의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옛사람이 죽음으로써 죄의 종이 아니라 의롭다하심을 입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의식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겠다는 약속과 결단의 표시입니다. 침례를 받을 때에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은 죽음에서 나와 생명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 우리는 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자기 몸에 체험하였으며 주님과 신령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성도는 교회의 머리인 주님의 지체들입니다.

 

성도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어야 합니다. 새해에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주님과 함께 죽으려는 각오로 살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복스러운 성도의 삶을 살 줄 믿습니다. 세례는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면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생명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 절묘한 세례의 신비를 깨닫고 112365일 항상 세례를 받는 마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주님께서 받으신 세례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더욱이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16)고 고백했건만, 예수님은 굳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시에 종은 주인이 외출했다 돌아오면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예수님께 그런 종보다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 베풀기를 극구 거부했습니다(3:14). 하지만 예수님은 부득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와 어둠에서 해방되어 창조질서의 아름다움에서 공동선을 이루며 더불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느님의 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택하신 길이 스스로 낮아져 세례를 받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새해에 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스스로 낮아져 겸손해 지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이고, 셋째는 전통의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교회의 정통을 지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으로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드립니다.

 

3. 새해에 가져야 할 성도의 자세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성경말씀을 읽던 중 빌립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기사가 나옵니다(8:26-39). 이 일로 에디오피아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가 복음화 되었고 초기에 몇 백년간 아프리카가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신조와 예식 등은 북아프리카 지역 출신의 많은 교부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교회역사가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세례를 받음으로 온 나라와 거대한 대륙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 살면서 벽에 물고기 그림을 많이 그려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물고기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초대교회의 벽화에 물속에 큰 고기가 있고 그 뒤로 작은 물고기가 뒤따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큰 물고기는 주님을 상징하고 작은 물고기는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거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겠다는 결단입니다.

 

새해에는 세례를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여, 그이 가정을 복음화하고 가족을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주님을 따르는 성도로 매사에 말씀에 순종하고 거듭난 삶을 살고자 결단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해드립니다.

 

디도서 3:5-7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케 하는 세례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았고, 그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물세례를 말하고 성령은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보증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리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새해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세 가지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새해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새해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로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새해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는 하나의 의식이나 교회의 규정에 따른 제도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을 교회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절차도 아닙니다.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기 위해서 몸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나타나셔서 삼위일체의 협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세례의 본을 보여주심으로 거듭남의 사례를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나 뒤돌아보면 후회할 것 밖에 없다. 422~24

<송구영신예배 설교>

교통사고로 숨진 비운의 영국의 황태자비인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아실 겁니다.

그의 아들 중에 앤드류라는 왕자가 있습니다.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지만 그가 한번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과거에 얽매여 울고 있기에는 너무나 인생이 짧다"

짧은 말이지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 아닌가?.........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마라톤과 같이 긴 인생인줄 알지만 사실, 단거리 인생입니다.

너무나 짧디 짧은 인생입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가끔 뒤돌아 볼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얽매이는 삶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사람과 미래의 사람입니다.

과거의 사람은 늘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를 품고,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간혹, 과거를 돌아봐서 교훈을 삼는 점에서는 때론 좋은 점도 있지만 사실, 과거를 볼아 봐서 좋은 점 보다는 나쁜 점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돌아보면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한 일, 후회스러운 일, 아쉬운 일이 더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왜 안들겠습니까?

 

뒤를 돌아보면 내가 잘못 내렸던 결정들, 다른 사람에게 심하게 한 말들, 상처준 말들과 행동.내가 저질렀던 실수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들...........누구나가 다 있더라는 겁니다.

다시 되돌리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런다고 과거가 다시 돌아 올 수 있습니까?........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게 문젭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돌려놓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말하기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 조차도 미래를 향해 나가고자 할 때, 잊고 싶은 과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향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를 다 잊어버렸다.......그렇게 고백합니다.

왜요?.....

돌아다보면, 아쉬운 일, 기억하고 싶지 않는 일들이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한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 오는 이맘때쯤이면, 많은 사람들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다 공통적인 말이 뭔지 아십니까?

지난해는 너무너무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그런 사람 봤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렇게 인터뷰하는 사람 한사람도 못본 것 같습니다.

한결 같이 아쉬웠다. 그리고 힘 들었다 그러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행복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올해도 이런 행복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는 사람. 여태껏 한 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아마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2014년도 한해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보다 다들 아쉬움이 더 많았던 한해였을 것입니다.

과거를 뒤돌아보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다 잊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앤드류 왕자의 말처럼 과거에 얽매여 후회하면서 울고 있기에는 너무나 삶의 시간들이 짧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과거의 실수와 아픔이 있다고 할찌라도 과거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더 나은 내일과 미래를 향해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43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미래를 향해 나가고, 새 일을 행하는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과거에 얽매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해 아쉬운 일이 있습니까?

과거 불행했던 일들이 있습니까?

거기에 발목 붙잡혀 살면 안 됩니다.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 사는 사람은 절대로 앞으로 미래를 향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과거를 반복하며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 먹은 만큼 잘 안 된다.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늘 그렇게 핑계를 대고 과거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맞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너무나 쉽고 간단한 문제지만, 뒤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뒤돌아보는 사람이 누굽니까?

어떤 사람이 뒤돌아보는 사람입니까?

과거를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안고 사는 사람이 뒤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과거에 메달려 과거를 반복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전철 되밟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늘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며 그것에 발목 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미래로 나갈 수 없습니다.

발전할 가능성이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잊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반복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과감하게 과거를 떨쳐버리고 과거의 잘못된 삶을 끊어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사람 두 번째 특징은 과거에 미련을 두는 사람입니다.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에 미련 두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아시는 집사님 한분이 계십니다.

참 머리가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하셔서 늘 장래가 촉망되었던 분이었는데 그만 잘못되어 날마나 술만 마시고 사셨습니다.

알콜 중독으로 폐인이 되다 싶이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늘 과거 자신의 화려했던 그 생활만 생각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삽니다.

멀쩡한 정신으로 살려니까, 이게 잘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술에 의지해서 삽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생활이 나아집니까?......

미련을 둔다고 미래가 장래가 보장됩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좋았던 과거에 미련을 두고 삽니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는 그렇게 똑똑하다는 소릴 듣고 장래에 대한 촉망을 받던 사람인데.....이 생각을 하니까

과거의 미련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아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까?

,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뒤를 돌아본 룻의 아내를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까?

이 교훈의 말씀은 과거에 미련을 두고 사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나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고 살기로 작정했으면 우리는 예수 믿지 않았던 과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옛 행실을 과감하게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뭐라고 권면합니까?

[4:22-24]절에 말씀하기를

그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새술은 새 부대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해를 앞두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불행했던, 그리고 아쉬움들을 접어두고 새로운 올 한해를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과거의 잘못된 후회스러운 전철을 되풀이하는 미련한 과거의 사람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버려야 할 과거의 아쉬운 것, 후회되는 것들이 있습니까?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다시 기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아쉬운 것, 후회되는 일들이 바뀌지 않습니다.

과거의 것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 담을 수 없습니다.

 

어떤 졸업식장에 축하객으로 오신 내빈이 그런 축사를 했습니다.

톱으로 나무는 켤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켜진 톱밥은 아무리 좋은 톱으로도 켤 수 없다고.............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새해를 맞는 이 시간 켜진 톱밥을 켜는 그런 어리석은 한해가 아니라, 튼튼한 나무를 켜서 멋지고 아름다운 한해를 만들어 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음녀의 초대 잠언913-18

 

지난 주 삼일 밤 잠언 강해시에는 지혜의 초대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와 정반대의 잔치가 음녀에 의해 초대됩니다. 이 잔치는 음녀의 잔치로 이 잔치는 초대하는 자와 초대받는 자가 모두 음부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사망의 객들이라는 점에 있어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의 잔치에 비해 비극적인 잔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교회 안에 지어지는 두 집

 

우리는 교회 안에는 하나의 집만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집도 동시에 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는 지혜가 지혜로 짓는 집이요 하나는 음녀가 음행으로 짓는 집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을 씨로 비유해서 말씀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13:24-3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보면 좋은 씨가 있고 또 가라지 씨가 있습니다. 좋은 씨도 열매를 맺지만 가라지 씨도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씨는 알곡의 결실을 맺지만 가라지 씨는 가라지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곡 씨앗과 가라지 씨앗이 자라는 교회에서 주님은 자라지 씨앗을 뽑으려는 사람들에게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추수 때까지 한 밭에서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함께 자랍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좋은 씨앗의 열매는 하나님의 창고에 드리고 가라지 씨앗의 열매는 불사르기 위해 그 때 비로소 단으로 묶어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씨는 지혜의 잔치에 초대된 거듭난 성도들로 천국의 유업을 받을 자들이요 가라지 씨는 음녀의 잔치에 초대된 사망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음녀에 대해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계집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를 뿌리는 음녀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음녀에 모습은 하나님의 지혜로 바라본 판단입니다. 진리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음녀에 속한 무리들은 성령이 없으므로 십자가의 도리나 부활의 도리나 구원의 진리나 천국의 소망에 대해서 깨달을 수도 없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해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미련한 자들이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음녀는 누구를 유혹하며 어떻게 유혹하는 것입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른다고 했습니다. 자기 길을 바로 간다는 말은 바른 신앙의 길에 서서 제대로 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로 이 행객은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지나가는 길목에서 문을 열어 놓고 짙은 화장으로 단장한 여자들이 교태를 부리면서 자기 길을 가고 있는 행인들을 손짓으로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아양을 떠는 모습이나 교태나 유혹에 넘어가면 그 여인이 안내하는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음녀의 초대를 받아 들어가는 잔치 집으로 자기 생명으로 해치는 곳입니다.

 

사탄은 누구를 유혹하는 것입니까? 이단자들이나 거짓 선생들은 누구에게 미혹의 손을 뻗치는 것입니까?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들에게 손을 뻗친다고 했습니다. 이단자들이 즐겨 찾아가는 집은 어떤 집입니까? 교회 교패가 붙어 있는 믿는 사람의 집을 노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들의 초청에 응하게 되는 것입니까?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 없는 자에게 접근하여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란 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바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런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육신적인 일에만 마음을 쏟으며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교회에 오가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유혹의 미끼를 던지는 자가 음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혜가 되어 우리로 지혜롭게 인생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지혜가 없으므로 음녀의 초대에 응하여 음녀가 마시우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며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이 같은 음녀의 무리들을 보내심으로 교인 가운데서 미련하고 지혜 없는 자들을 추려 내는 것입니다.

 

2. 음녀가 먹이는 음식

 

음녀는 이처럼 어리석고 지혜 없는 자들을 초대하여 그들에게 무엇을 먹이는 것입니까?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도적질 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음녀에게 초대를 받아 도둑질한 물을 마시며 몰래 먹는 떡을 먹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적질한 물은 무엇을 말합니까? 물은 예수님이 목마른 인생들에게 마시우는 생수를 말합니다. 4장을 보면 남편 다섯 명을 가라 치운 한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른 모습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어느 날 우물가에서 피곤에 지친 몸으로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이 대화에서 목마른 인생에게 생명의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갈증을 해갈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 박태선 전도관에서 생수를 팔아먹더니 이번에 포천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생수 통에 생수를 담아 팔아먹고 있어요. 이런 생수가 아님).

 

예수님은 이 생수에 대해서 요7:38절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수에 대해서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왜 생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령은 우리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해갈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들 마음속에 임하시면 우리 영혼이 터져서 호렙산 반석에서 터져나온 생수가 우리 영혼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의 생명을 윤택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윤택하게 하신다는 것은 첫째로 우리 마음에 평강을 심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평안은 돈으로 오는 것도 아니며 명예나 권세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5:10절 말씀을 보면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도 자기 마음의 만족을 얻을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엊그제 잠깐 낮에 유선방송을 보는 가운데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어느 한 남자가 도박의 유혹을 받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신혼 여행으로 라베스가스로 떠났는데 이 남자가 그만 한 투전판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꼭 이길 듯하여 돈을 걸면 지게 되고 또 한꺼번에 많은 돈이 손에 들어오는 횡재를 만나는 듯하여 더 큰 목돈을 걸고 결판을 내다가 틀림없이 이길 수 있는 수인데 그만 지게 되어 신혼 여행에 데리고 온 자기 아내를 그 사람에게 며칠간 빌려주어야 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투전판에서 돈 벌어 부자 되었다는 사람 보았어요? 본전 생각이 나서 화투장 붙들어 본전 찾은 사람 보았어요? 투전에 미쳐 버리면 아내는 남편이라도 팔아먹고 남편은 아내라도 팔아먹고 부모는 자식이라도 팔아먹고 자식은 부모라도 팔아먹는 비정한 일이 생겨 결국은 한 가정이 파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이런 꼬임에 넘어가는 것입니까? 진리로 든든히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이길 만한 믿음으로 생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는 생수 대신 욕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수를 주님으로부터 받아 마신 자는 돈이나 세상의 유혹의 손길에 한눈을 팔지 않고 구원과 천국의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 생애를 복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 모든 인생의 난관과 괴로움이 나의 마음속에 심어 주신 주님의 사랑과 평안과 기쁨을 빼앗지 못하며 넘어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적질한 물은 무슨 물입니까? 17:4절에 나오는 음녀의 금잔에는 음행의 포도주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 불에 떨어져 멸망합니다. 이 물을 마신 자는 불과 유황으로 세세토록 고난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시지 않기 위해 요즘 주일 찬양예배시에 요한계시록의 진리의 말씀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있습니다. 51:7절 말씀을 보면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미친다고 했습니다. 25:27절에서는 이 물을 마시면 토하고 엎드려지되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물입니까? 그래도 이 물이 달콤하다고 마시기를 원하십니까?

 

다음에 음녀는 불러 모은 행객들에게 몰래 먹는 떡을 먹인다고 했습니다. 몰래 먹는 떡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이는 떡은 이 떡이 아닙니다. 몰래 먹이는 떡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을 죽이는 거짓된 그리스도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외에 우리에게는 생명의 떡이 없습니다. 이 떡은 성경에서 증거 되었고 우리는 이 떡을 말씀을 통해서 늘 먹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신앙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몰래 먹는 떡은 공개적으로 먹이는 떡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해 주는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 이단자들이 이런 떡을 먹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재림 시에는 적그리스도가 이런 떡으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이런 도적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먹이시는 것입니까? 이런 물과 떡은 초대받아 먹을 대상자가 이미 작정되어 있습니다. 살후2:11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시려고 이 같은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 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생활을 할 때에, 이런 자들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손님이 이 음녀이며 이 음녀를 따라갈 때에 반드시 도적질한 물을 마시게 되고 몰래 먹는 떡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도적질한 물이나 몰래 먹는 떡을, 잘못된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이단자 뿐 아니라 거짓 선생들이나 신앙적으로 잘못된 생애를 살아가는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해서도 먹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오래 하고 교회에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은 그의 신앙적인 생활이나 행동 면에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 유혹을 받아 잘못된 길을 걸어가도록 잘못된 본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말세에 이를수록 미혹의 영의 역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딤전4장에서 말씀하기를 미혹의 영으로 귀신의 가르침을 통하여 먹이신다고 했습니다. 13장에서 들려주신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린 자는 사람들이 잘 때에 마귀가 그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잠자는 심련 속에 마귀가 가라지를 덧뿌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기도가 없으면 가라지가 뿌려집니다. 하편 쪽에는 알곡의 씨앗이, 한편 쪽에는 가라지의 씨앗이 한 곳에서 함께 자라나게 됩니다. 영적으로 잠들면 이 도적질한 물을 마시게 되고 몰래 먹는 떡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떡을 먹는 날이면 신앙적으로 넘어집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그 말씀이 마음에 닿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거역하는 완악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미 그 마음속에 가라지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진리에 미련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혜자의 잔치에 초대되어 그 잔칫집에서 시간 시간마다 생명의 생수를 마시며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면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면 더욱 학식이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신생교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 드리는 이 자리는 지혜자의 잔치임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생수만을 마시울 것입니다. 생명의 떡만을 먹일 것입니다. 한눈을 팔지 마시고 진리에 굳게 서서 우리 주님의 재림에 소망을 두시고 믿음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구약 > 잠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된 혀의 해독 잠언 12 : 15 - 22  (0) 2015.01.16
지혜로운 삶 잠11장 1- 23   (0) 2015.01.10
지혜로운 아들의 열매 잠언 10 : 1 - 10  (0) 2015.01.07
지혜가 부른다 8장1-11  (0) 2014.12.24
사망의 길 7장24-27  (0) 2014.12.13

감사로 맺는 매듭 (송구영신)시편 11612~19

벌써 < >년이 오늘로 끝입니다. 상투적인 말 같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야말로 < >년 신년주일 지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배웅해 보내야 하니 말입니다.

현대 지성들이 참여해서 [시간의 박물관]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장을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분이 썼는데 제목이 시간의 창조입니다.

이 분은 이 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시간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다.” 실제로 인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습니다. 바로 시계입니다. 나아가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달력입니다. 하루, 한 주, 한 달, 1년 등. 그러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 주년, 한 시대, 세기, 밀레니엄, 회갑, 희년 등. 이 시간 흐름의 매듭의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어려서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새끼 꼬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볏짚으로 새끼를 꼽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새끼를 꼽니다. 배고프면 감자 고구마를 삶거나 구어 먹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볏 집을 부드럽게 하려고 계속 손에 침을 뱉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다 꼰 새끼는 깔고 앉기도 하고 등 뒤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새끼를 꼽니다. 새끼를 다 꼬고 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만일 매듭을 짓지 않으면 밤새 꼰 새끼가 다 풀어지게 되고 긴 밤 헛수고를 하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듭을 잘 짓고 마무리를 잘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간 매듭의 의미가 우리의 소중한 역사로 아름답게 간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 삶의 더욱 풍성해 지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 >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매듭을 잘 지어야 하겠습니다. < >년 한 해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 >년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감사라는 관점에서 < >년이라는 역사를 매듭지어 우리 인생의 역사 한 페이지로 장식해 보자는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가족들, 이웃들, 교우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의, , 주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또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 서로 도와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의 종들과 교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고객과 이웃과 동료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두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인정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다 당신 탓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마누라 탓이고, 남편 탓이고, 부모 탓이고, 자식 탓이고, 네 탓이고 당신들 탓이요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며 한 해를 마감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아무리 둘러 봐도 감사할 조건이 찾아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던 것이 하나도 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생각지 않았던 큰 불행이 닥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 한숨과 절망뿐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37장에서 50장까지는 요셉이라는 사람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도표로 그려본다면 영어 알파벳 V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생의 전반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여러 충격적인 사건으로 졸지에 바닥까지 떨어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후반기는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졸지에 저 하늘 가까이 올라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전반기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만 꼽아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요셉은 야곱이라는 당대 부잣집 아들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부잣집 아들에서 예고 없이 또 준비 없이 타국에 팔려온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가정 총무로 있던 중에 모함에 걸려서 죄인이 되어 감옥에 수감되게 됩니다. 이제 졸지에 죄수가 되어 언제 어떻게 처벌 받게 될지 모를 처지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이런 설상가상의 불행이 겹쳐 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 던져진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노예로 끌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죄수로 옥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의 앞길을 선하게 여실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토록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감사를 지켜줍니다. 믿음이 차원 높은 감사를 이끌어냅니다. 믿음이 선취적 감사를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과 여건이 좋지 않으십니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까? 너무 힘이 드십니까? 상황과 여건을 보지 마십시오. 지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앞길을 복되게 펼쳐주실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열고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앞 당겨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그 누군가와 맺힌 감정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큰 상처 때문에 감사가 자리 잡을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감사가 그 마음에 깃들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한 공동묘지는 특별한 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함께 묻혀 있는 묘지입니다. 독불 전쟁 때 피차간에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전쟁은 계속됐습니다. 할 수 없이 시체들을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묻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워 두었고 그 십자가 위에 전사자들의 군번을 걸어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프랑스군의 어머니가 군번을 보고 자기 아들의 묘를 찾았습니다. 가져간 꽃을 꼽고 한 없이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묘를 보는 순간 독일군 묘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분명히 자기 아들이 이 독일 군 병사와 싸우다 여기 이렇게 무덤에 누어있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욕을 퍼 붓고 침을 뱉고 무덤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순간 자기 아들 무덤에 세워진 같은 십자가가 이 독일 군 무덤에도 세워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단 사람들을 용서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그 십자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독일군 병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다시 무덤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무덤에 꼽았던 꽃을 반 나누어 이 병사의 무덤에 꼽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강물처럼 평안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가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며 용서의 능력을 덧입을 때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가 이 한 해를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내년 < >년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시 65:4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다윗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무엇보다 더 큰 복인 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7-18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시인은 감사하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새롭게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을 주님 곁에 가 있게 해 줍니다. 감사는 우리를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해 줍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감사 고백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 앞 가까이에 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작지만 깊은 마음의 감사는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어줍니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줍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히 실패했던 과거는 우리를 덫처럼 옥조이게 만들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과거의 덫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성 도덕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여자는 지탄의 대상이 될 텐데 2000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물을 뜨러 나올 때도 아무도 없는 정오 즈음에 나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 때문에 죄사함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대한 감사가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를 딛고 일어설 힘을 줍니다. 감사가 과거의 덫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고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 >년을 보내야 할 시점입니다. 감사로 잘 매듭을 지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인정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미움과 분노의 대상일지라도 용서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해에 더욱 복된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 욥4210-17, 8:54-60

 

어느덧 2014년 마지막 송년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연말을 맞는 것처럼 우리는 종말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위에 오시리란 초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 회수는 456회인데, 주님의 재림 예언 회수는 신구약에 도합 1518(신약에만 318)입니다. 인간처럼 식언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이 약속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셨습니다. 주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 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24:38)하는 현세적이고,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따라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비웃고 조롱합니다(벧후3:3). 사단은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적이라고, 반문명적이라고, 반지성적이라고 비아냥거리도록 여론을 만듭니다. 피안주의니 현실도피주의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반성서적, 반 내세적, 반 종말적인 정신 풍토 조성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훼방합니다.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한 영특한 성주(城主)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도 많고 해서 별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다만 그 성 안에서 소문난 바보 하나를 곁에 두고 바보스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하루는 지팡이 하나를 그 바보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보다 더한 바보를 만나면 주어라.” 그 유명한 바보는 자기보다 더 못난 바보를 찾아 두어 달 동안 성내를 돌아다녔으나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성주가 병이 들어 거의 죽어가게 되었을 때 바보를 불러 작별을 고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와 헤어져야 되겠다.” “어디로 가십니까요?” “황천이란 곳으로 가야 한단다.” “영감께서 황천으로 가시면 언제쯤 돌아오시게 됩니까요?” “황천이란 곳은 매우 먼 나라이니 한 번 거기 간 사람은 옛적부터 다시 돌아오지 못한단다.” “그러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되겠습니다요.” “이 바보야, 준비는 무슨 준비. 눈을 감고 다리를 쭉 펴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된단다.” 이 말을 들은 바보는 지팡이를 성주에게 도로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십 리나 백 리를 가더라도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다시 오지 못할 먼 길을 가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떠난다니, 주인님보다 더한 바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요?” 연말에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끝이 좋은 사람이 참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참 승리자는 처음 보다 끝이 좋은 사람입니다. 처음에 아무리 잘 했어도 끝이 좋지 못한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에스겔33:12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했습니다. 처음에 의인으로 살았어도 끝까지 의인으로 살지 못하고 도중에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게 되면 구원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고, 처음에 죄인으로 살다 회개 하고 돌이켜 의인으로 살면 처음 죄가 용서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처음에 아무리 믿음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잘 경외 하고, 봉사도 잘하고, 충성스럽게 믿음 생활 잘했어도 후에 미혹을 받아 바른 믿음에서 떠나거나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면 처음 행한 믿음 안에서 의로운 삶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처음에 죄 가운데 살다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으로 바르게 살게 되면 과거의 죄를 사하시고, 기억도 아니 하시고,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조카 롯이 삼촌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의 생업이 번창해지고, 기르는 짐승들이 늘어나자 종들 간에 목초지로 인한 다툼이 생기게 되어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 때 롯은 먼저 좋은 곳을 택하여 갑니다. 13: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갈라 설 때 처음에는 롯이 선택한 곳이 훨씬 살기 좋고 윤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점점 더 좋아지고, 풍성해지고, 존귀해 집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어 점점 더 창대해 지고, 존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중심으로 선택하고 살았던 롯은 처음에는 좋아 보였으나 세월이 갈수록 나빠집니다. 재물을 약탈당하고,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주변의 악한 이웃과 환경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소돔 고모라가 불 심판을 받을 때 재물도 불타고, 천사의 경고를 어긴 아내마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모압, 암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다윗과 세상 중심으로 살았던 사울 왕의 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31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세상 중심, 물질 중심으로 욕심을 따라 교만하게 살았던 사울은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그와 그 가문이 점점 기울게 되었지만, 믿음으로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며 살았던 다윗은 점점 더 흥왕하고, 존귀해 지고, 그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출생하는 영광스런 가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처음보다 끝이 점점 더 좋아지는 복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2.끝이 좋으려면 끝까지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의 유형을 보면 처음에 잘 시작하고 점점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처음에 잘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타락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에 대해 성경에는 믿음이 파선 된 자” “성령으로 시작 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자” “미혹 된 길로 가는 자” “세상으로 다시 돌아 간 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모습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유형은 처음에 죄악 된 길을 가다가 돌이켜 회개 하고 바울처럼 새롭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욥은 가장 바람직한 유형인 처음에 잘 시작하고 점점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간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1:1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했습니다. 1:8에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면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욥을 시기하여 사단은 시험합니다. 보통 큰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들의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두 잃는 시험으로, 질병의 시험으로, 외로움과 멸시와 조롱의 불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사단의 기대와 의도와는 달리 믿음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욥기서에 나타난 욥이 보여준 더 좋은 믿음의 모습을 보면 먼저 자기 의가 깨어진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를 자랑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에게도 고난 받기 전에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하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은근히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은총 주시기 위해 때로는 바울처럼 가시와 같은 질병을 주시더라도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다음에 욥은 회개를 통해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42: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했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좋은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됩니다.

 

미국에 젠킨스 박사님에게 어느 날 죠지아 주에 있는 큰 술집 주인이며 도박장 주인이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그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부자인 데 생활은 불행하였습니다. 박사님은 불행한 삶을 청산하기 위하 여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여 주었습니다. 성경도 읽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아침 박사님이 지시하신 대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빛이 제 영혼에 가득 비쳐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제 마음을 바치고 그 분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비싼 고급 가구를 모두 실어 내가는 것이었습니다. “왜 고급 가구를 실어 내가십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술을 팔아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번 돈이 생각날 때마다 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을 팔아서 산 물건을 모두 처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물건을 사용하면 집안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안 식구들이나 자녀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깨끗하게 번 돈만 사용하겠습니다.” 회개는 형식적인 믿음이 참 믿음이 되게 하고, 죽은 믿음이 산 믿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욥은 끝까지 인내 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 하다 보면 수많은 시험과 유혹과 박해가 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믿음이 파선됩니다. 욥은 불시험을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하며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그랬을 때 욥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그러한 그에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42:10)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나중이 더 좋아졌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좋은 믿음가지고 갈수록 좋아지기를 기원합니다.

 

3.끝이 좋으려면 반드시 하늘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온 스데반 역시 좋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좋은 믿음으로 인정받아 뽑힌 일곱 집사 중 하나입니다. 6: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로 복음 전도에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복음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도저히 그를 당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돌을 들어 쳤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그는 불쌍하고, 불행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거룩하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7:55-56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했고, 59-60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하늘로 이어지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그가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그는 인생 실패자요, 불행한 자일뿐입니다. 13세기 스페인의 귀족이며 명문 대학의 교수였던 라몬 럴은 자신의 유망한 장래를 포기하고 모슬렘교도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그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1년 반을 감옥에 감금당했습니다. 노인이 되어 성벽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어 갈 때에 그의 마지막 말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죽기 직전에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목사 안수식 때에 ", 주 하나님 당신께 나 자신, 나의 아내, 나의 자녀, 그리고 나의 모든 소유를 드립니다." 라고 말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만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도, 박해를 받아도 오직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두 본문을 중심으로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이 좋은 사람이 참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끝이 좋으려면 끝까지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끝이 좋으려면 반드시 하늘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과연 나는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모두 욥처럼, 스데반 집사처럼 끝이 더 은혜롭고, 잘되는 좋은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28-14

오늘은 예수님의 생일날 성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 나셨을 때 목자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이런 음성을 들려 주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4)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 너희를 위하여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 나를 위하여오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오신 것이 믿어지면 오늘 예수님은 오늘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베스트 셀러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

이 책 내용이 은혜롭습니다. 다하라 요네코(田原米子)18세 때에 찾아온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견디다 못 해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달려오는 전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죽으려고 하였는 데 죽지 않고 큰 사고만 당하였습니다. 그 녀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대신 두 발과 왼팔,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른쪽 팔과 손가락 세 개뿐이었습니다. 전보다 더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전보다 더 비참하여졌습니다. 전보다 더 환난과 낙심이 찾아 왔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 하였습니다. 그 녀는 자살을 계속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세 손가락으로 죽을 방법도 없었습니다. 두 발이 없엇 움직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다하라 요네코는 선교사 지망생인 아키도시를 만났습니다. 그를 통하여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닏니다. 정상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그가 불구자중에 불구자인 요네코에게 청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였습니다.

 

둘은 꿈에서조차 상상 못할 새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요네코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작은 자, 그늘진 자, 아픔을 가진 자를

섬기는 일을 평생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부요하지만 예수를 모르는 자들, 힘은 있지만 진리에 눈먼 자들, 건강하나 참 생명을 지니지 못한 자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네코의 섬김과 헌신에 감동을 받고 예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녀는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제게는 손가락이 세 개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한 팔과 두 발, 일곱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을 잃었기에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세 개의 손가락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세 손가락으로 죽어가는 영혼, 환난과 근심 속에 빠진 이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후에 요네코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자서 전기를 썼습니다. 그 책이 바로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에게 구주로 오셨습니다.

 

2. 구주가 나셨으니

예수님은 구주 즉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 첫 사람을 에덴동산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마귀는 자꾸만 사람들에게 다가 와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일년 중에 마귀가 제일 좋아 하는 달이 12월이라고 합니다. 술과 음란으로 가득차 있는 12월입니다. 술 판매량이 제일 많은 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달이 예수님 생일이 들어 있는 12월입니다.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옥가야 할 사람을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성탄절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을 구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미국 선교사 리처드슨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가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식인종이 아직 존재할 때였습니다. 그 곳 관습이 있습니다. 싸우던 이들이 화해할 때에는 갓난 아이 하나를 선물로 내놓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갓난아이를 잡아 먹으면서 화해하는 관습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그들은 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님이 그 곳에서 선교하던 어느 해에 두 부족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두 부족이 날카롭게 대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선교사는 자기의 사랑하는 갓난아이를 안고 가운데 섰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아기로 내놓았습니다. 말없이 이 모습을 바라보던 양 부족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서로 싸우지 말자고 외치는 평화의 소리였습니다. 싸움이 그쳐졌습니다.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구원은 부요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72;13)

 

예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강대국을 보면 다 예수님을 잘 믿는 나라들입니다.

 

덴막은 해적의 나라였습니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무역선을 침범하여 물건을 노략질하는 해적의 나라, 바이킹의 나라입니다. 놀이터에 가면 바이킹 배가 있습니다. 덴막 배입니다. 그런 나라가 고드족으로부터 예수님을 받아 드려 믿고는 그런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온 세계를 영국이 지배하여 영국 땅에는 해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카나다 일부, 뉴질란드, 호주 미국 이런 나라들은 모두 영국을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을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는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였습니다. 대단한 여왕입니다. () 왕 윌리암 4세가 죽자 그 날로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왕이 된 첫 날 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성경을 펼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영국 왕이 되었습니다. 내일부터 성경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이 나라를 통치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후 빅토리아 여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웬스트 민스트 교회에 가서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후에 인도에서 정치가들이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나라를 편안하게 만든 비결이 무엇입니까? 영국을 그렇게 큰 나라 경제 대국으로 만든 비결이 무엇입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펼쳐 들고 말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이 책입니다.”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등 모든 강대국 선진국이 다 기독교 국가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에서 부요로 우리를 구원시키러 오신 구세주입니다.

 

(2) 병든 자에게 구원은 건강입니다.

예수님은 못 고칠 병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의사가 포기하기한 병이지만 믿음으로 고침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12년을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 앞에 와서 고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5;34)

 

아픈 사람에게 구원은 물질이 아닙니다. 건강입니다. 예수 믿는 이들이 오래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마을에 명의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그 의사에게 찾아가서 몸을 고치곤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병은 그가 다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의사도 늙어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모여서 물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몸이 아프면 누가 고쳐 줍니까?”

그 때 그 명의는 간신히 힘을 내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훨씬 훌륭한 명의 세 분을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그 의사의 이름은 음식과 수면과 운동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좋은 의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병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3) 환란을 당한 자에게 구원은 평안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환란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 하느니라”(11;8)

환란 때에 우리를 구원하소서”(33;2)

 

예수님은 구세주입니다. 가난으로부터 구세주, 병으로부터 구세주, 그리고 환란으로부터의 구세주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빅톨 유고(Victor Hugo,1802-1885)는 문학계의 거성입니다. 그는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곱추등 유명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 여자, 방탕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자연히 따라오는 것은 가난이었습니다. 가정은 엉망이었습니다. 가정에서 환란이 잦을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가정에 비극이 찾아 왔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딸이 세느강에 빠져 자살하였습니다. 유서 내용은 꼭 하나였습니다.

 

아버지 회개하고 예수님에게로 돌아 오세요.”

이 유서를 보고 유고는 새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께 돌아 왔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부에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후생 사회국에 취직하였습니다. 월급 받기 위하여 일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난과 환란속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그 곳에 취직한 것입니다. 후에 그의 진심이 인정되었습니다. 훌륭한 인격도 인정되었습니다. 프랑스 교육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후에 빅톨 유고가 고백하였습니다.

 

내 딸은 천사였으며 딸을 통하여 예수님이 나를 지옥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4) 죄로부터의 구원은 자유함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잠간 사는 것입니다. 안개같다고도 하고 손바닥 넓이만큼 산다고 합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도 합니다. 들에 풀같다고도 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물질적으로 축복을 못 받아도 됩니다. 건강적으로 축복을 못 받아도 됩니다. 건강 관리 잘 하고 100살 살고 지옥가는 것보다 건강관리 좀 잘못 하더라도 예수 믿고 99살 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그 주님이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예수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가난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병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1981년 흑인 가운데 가장 장수한 찰리 스미스가 130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주 바토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130년의 세월은 고통의 전시장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갓난아이 때부터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종이었습니다. 130년 한번도 떳떳하게 살아보지 못 하였습니다. 미국의 남부와 서부로 끌려 다니며 살았습니다.

 

매 맞고 모욕을 당하며, 굶주리고 병들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을 고비를 스무 번도 넘게 경험했습니다.

 

한때는 서부 최고의 총잡이 제시 제임스의 마구간에서 일한 적도 있었습니다. 130년 간 고생만 하다가 죽은 스미스씨는 임종하기 며칠 전 그를 방문한 스티븐스 목사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흑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노동 생활도 감사합니다. 130년 간 언제나 내 곁에 계셔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스티븐스 목사는 이 기도를 듣고 나서 말했습니다.

"이런 신앙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것이 성탄 신앙입니다.

지혜가 부른다 81-11

 

[1-1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 . . .

 

솔로몬은 말한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가로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너희는 들을지어다.”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표현한다. 그는 지혜가 길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사람들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표현한다. 지혜는 많은 사람이 있는 곳,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곳에서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에게 외친다. ‘어리석다는 원어(페사임)단순하다는 뜻이다. 단순한 사람은 때때로 어리석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은 지혜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솔로몬은 또 말한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이는 다 총명 있는 자의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의 정직히 여기는 바니라.” ‘가장 선한 것이라는 원어(네기딤)고상한 것들, 귀한 것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내용은 고상하고 선한 것이며 정직하고 의롭고 진실한 것이다.

 

솔로몬은 또 말한다.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진주’(페니님)라는 원어는 산호들’(BDB, KB)이라는 뜻이며 영어성경들은 홍보석’(KJV, NIV) 또는 보석’(NASB)이라고 번역했다. 지혜의 훈계와 지식은 은이나 정금보다, 진주보다 낫고 사람이 원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낫다.

 

[12-13]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 . . .

 

솔로몬은 또,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는다고 말한다. ‘명철이라는 원어(오르마)사려깊음, 신중함’(KJV, NASB, NIV)이라는 뜻이다. 근신이라는 원어(메짐마)분별력’(NASB, NIV)이라는 뜻이다. 지혜는 사려깊음 속에 있다. 또 지혜와 지식과 분별력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지혜는 사려깊게,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불의와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 의와 선과 진실을 택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한다. 악은 바로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 등을 가리킨다.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이 둘은 다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교만과 거만은 대표적인 악이다. 잠언 6:16-17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여섯 일곱 가지 중 첫째가 교만한 눈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의 내용은 선과 사랑이며, 죄와 악은 그것을 거슬러 행하는 것이다. 또 패역한 입도 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거역하고 의와 선을 거절하며 자기 고집대로 행하는 것이다.

 

[14-17]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 . .

 

솔로몬은 또 말한다.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도략이라는 원어(에차)계획이라는 뜻이며, ‘참 지식이라는 원어(투쉬야)완전한 지혜라고도 번역된 말로서(2:7; 3:21) ‘건전하고 유능한 지혜라는 뜻이다. 그것은 어떤 일의 배경과 건전한 진로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리킨다. 명철이라는 말(비나)이해력이라는 뜻이다.

 

지혜 안에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고, 또 명철이 있다. 지혜에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 힘이 있다. 왕들은 지혜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며 방백들은 공의를 세우며 재상(宰相)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도 지혜로 모든 일을 처리한다. 특히 지혜는 의와 선을 분별하게 하고 그것을 택할 힘과 용기를 준다.

 

솔로몬은 또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지혜를 얻는 길은 무엇인가? 지혜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할 것이지만, 그것을 무시하거나 미워하는 자들은 지혜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 지혜는 그것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난 바 될 것이지만, 그것을 간절히 찾지 않는 자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의()와 영생을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만나며 의()와 영생을 얻듯이, 우리가 지혜를 간절히 찾으면, 지혜를 만나며 지혜를 얻을 것이다.

 

[18-21]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 . .

 

솔로몬은 또 말한다.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게 하려 함이니 내가 그들의 곳간을 채우리라].”

 

지혜의 유익과 가치는 크다. 첫째로, 지혜는 부요를 준다. 지혜는 물질적 부요를 가져오고, ‘장구한 재물’(KJV, NASB, NIV) 혹은 물려줄 재물’(KB)을 가져온다. 둘째로, 지혜는 영예를 가져온다. ‘부귀는 부()와 영광 혹은 영예라는 말이다. 다니엘은 지혜로웠고(1:17, 20) 존귀와 영예를 얻었다(2:48; 5:29). 셋째로, 지혜는 의()를 가져온다. 지혜는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며(딤후 3:15), 또 의로운 인격으로 자라게 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천은[순은]과 정금[순금]보다 낫다. 잠언 3:14-15,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22-31]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 . . .

 

솔로몬은 또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묘사하며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혜를 가지셨고, 창세 전에 지혜가 세움을 입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7:35). 창세 전, 즉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산이 세움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땅도, 들도, 세상의 흙의 근원도 아직 지어지지 않았을 때, 지혜가 이미 났었고 또 하나님께서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 지혜가 거기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었다(17:5).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말하였다(1:15).

 

솔로몬은 또 하나님께서 구름 하늘을 견고케 하시고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고 바다의 한계와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 지혜가 하나님 곁에 있어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고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다고 말한다. ‘창조자라는 원어(아몬 ןוֹמאָ)기술자, 장인이라는 뜻이다.4) 요한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다(1:3).

 

[32-36]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 . . .

 

솔로몬은 또 말한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나를 잃는 자라는 원어(코트이)나를 잃는 자’(NIV) 혹은 내게 범죄하는 자’(KJV, NASB)라고 번역할 수 있다.

 

솔로몬은 자녀들에게 날마다 지혜를 듣고 지키고 기다리라고 교훈한다. 또 지혜를 얻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지혜를 버린 자는 화가 있다고 말한다. 36,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 믿기를 거절하면,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범죄하는 자요 지혜를 잃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얻지 못한 죄인 그대로이며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장은 지혜가 무엇인지 말한다. 지혜는 가장 선한 것이며 정직한 것이며 의이며 진실 혹은 진리이다. 또 지혜는 곧 명철이며 지식이고 근신 곧 분별력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며 가장 중요한 내용인데, 그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악 중에 첫 번째 악은 교만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악을 미워하는 것이며 교만과 패역을 버리는 것이다.

 

둘째로, 본장은 지혜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지혜는 은이나 정금보다 더 가치 있고 진주나 산호보다 더 가치 있다. 지혜는 왕들과 재상들이 그것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처리할 많은 일들을 처리한다. 또 지혜는 물질적 부요와 존귀와 영광을 가져오고, 우리에게 의를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고 또 구원받은 자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통해 거룩해지고 의로운 인격자가 되게 한다. 실상,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가지고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신가?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셨다. 또 이 지혜는 우리 모두에게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셋째로, 본장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혜를 얻으라고 교훈한다. 물질적 부요를 구하지 말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한다. 가장 선한 것을 분별하고 정직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것을 소유하라고 말한다. 교만과 악을 버리라고 말한다. 또 본장은 우리가 지혜를 얻으려면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를 간절히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좋은 것 중에 좋은 것은 바로 지혜이다.

 

'구약 > 잠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된 혀의 해독 잠언 12 : 15 - 22  (0) 2015.01.16
지혜로운 삶 잠11장 1- 23   (0) 2015.01.10
지혜로운 아들의 열매 잠언 10 : 1 - 10  (0) 2015.01.07
음녀의 초대 잠언9장13-18   (0) 2014.12.30
사망의 길 7장24-27  (0) 2014.12.13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 누가복음 221 - 39

찬 송 : 109, 111, 112, 115, 116, 211, 331.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2월이 되고 보니 다른 달보다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12월도 어느새 3분의 2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금년이 꼭 열흘 남았습니다. 이와 같이 세월은 무상하게 지나가는데 우리들의 신앙과 믿음은 진정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오늘 설교제목입니다.

이번 주 목요일이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탄절을 앞두고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게 성탄절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성탄절은 너무나 상업주의로 전락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맞이하면 그리스도인들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욱 기를 쓰고 한몫을 보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유흥가에서, 술집에서 이 성탄절을 맞아서 한 대목을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두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8일이 지나서 결례 예식을 하러 성전에 가셨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결례예식이란 하나님의 율법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출생 후 8일 만에 할례의식을 하였습니다. 이때에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는 할례의 의식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아이의 부모는 1년 된 어린양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렸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반구 두 마리를 번제와 속죄제로 드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비둘기로 제물을 마련한 것은 당시에 요셉의 가정이 매우 가난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결례예식을 하러 갔을 때에 그곳에서 시므온과 안나라는 선지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위로와 만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1. 시므온과 안나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1)먼저 시므온 선지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시므온은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출생당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산헤드린 의회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신앙보다는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영광을 탐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은 모든 세상 유혹과 연락을 물리치고 오직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대망 하는 신실 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목격하고 그분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요 장차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감당할 그리스도이심을 최초로 선포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제 선지자 시므온이 어떻게 신실 된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시므온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곧 시므온이 하나님의 율법을 쫓아 모든 사람들에게 공의를 베풀며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던 시므온은 재판관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백분 선용하여 재판을 베풀되 하나님의 법을 쫓아 공의로 판결을 하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하고 구제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둘째, 시므온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곧 신앙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경건하며 무흠하여 세상의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야를 통해서 주어질 위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을 외세로부터의 고통과 질고에서 해방시키고 위로와 평강을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생의 기도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메시야를 대망은 하되 "정치적인 해방자 예수" 가 아니라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는 참 메시아 "위로의 예수" 를 기다린 것입니다.

진실로 시므온은 진정한 구원자요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분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 날마다 메시야를 대망하며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넷째, 시므온은 평생을 성령과 신령한 교제를 하며 살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25-“성령이 그 위에 게시더라는 말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라고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진실로 시므온은 사람에 대하여는 의롭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경건하며 성령의 인도하신 가운데 메시야를 대망 하는 자였습니다.

 

(2)선지자 안나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시므온 외에 또 한사람의 선지자가 있었으니 바로 여선지 안나입니다. 안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안나 선지자는 일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평생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 안에서 기거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 말은 안나 선지자가 일평생 공식적인 성전 예배와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성전 봉사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침으로 마치 성전에서 사는 자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84년 동안 과부로 지낸 안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은 곧 안나 자신의 일이요 성전을 섬기는 일은 곧 안나의 평생 직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안나는 주야로 금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는 곧 안나가 평생을 경건생활에 힘쓰며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종교가 타락하고 윤리와 도덕이 부패하여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비록 20대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었지만 안나는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일평생을 금식과 기도로써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마치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도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로운 삶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올리어 간 에녹과도 같았습니다. (5:21-24)

 

셋째, 안나도 성령의 지시와 인도를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 38절 말씀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감사하고' 란 어떤 대상 즉 하나님에게 메시야를 만남에 대하여 감사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안나가 하나님께 감사를 하였다는 말은 안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안나 선지자는 평생 동안 정절을 지키며 기도를 통하여 경건된 생활을 하여 왔기 때문에 신령한 눈을 열어 성령의 지시를 깨달을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렇게도 소망하던 메시야를 만나는 영광의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로 그 당시에도 유명하고 이름 높은 종교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유독 보잘 것 없는 늙은 할머니인 안나가 메시야를 만나는 영광을 누린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2. 시므온은 메시아의 탄생을 어떻게 기다렸습니까?

 

시므온 선지자는 본문 26절 말씀에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이 말씀을 들은 후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날마다 날마다 행여나 오늘일까 아니면 내일은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메시야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기를 이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시기로 언약하신 메시야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시므온 선지자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늙은 선지자 시므온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그 말씀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 말씀은 주여!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종이 메시야를 보았사오니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잇사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므온 선지자가 메시아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처럼 고대하고 고대한 것처럼 오늘의 우리 성도들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고대하고 고대해야 하겠습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낮에나 밤에나(59)

1낮에나 밤에나 눈물머금고 내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고적하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먼하늘 이상한 구름만떠도 행여나 내주님

오시는가해 머리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내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부르면 주님께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5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입고 기름준비 다해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6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영혼 당하는것

볼수없어서 이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주님

오주여 이시간에 오시옵소서

 

3. 안나는 메시아의 탄생을 어떻게 기다렸습니까?

 

본문 38절 말씀에는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안나는 매일 매일 10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며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84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말이 84년이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나긴 84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쉬지 않고 날마다 성전에 와서 기도하기를 주여 언제입니까? 이 백성들의 진정한 메시야를 보내 주실 날이 언제입니까?” 부르짖어 간구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84년은커녕 10년도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10년은커녕 1년도 못하고 포기를 하고 맙니다.

 

안나 선지자는 아기 예수를 만난 후 너무나도 감격하여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이제는 안나 선지자도 두 눈을 감고 하늘나라로 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나 선지자는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에 대하여 증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여 여기 이 아기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입니다. 이분이 장차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모든 사람을 죄악에서 구원하실 구주십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시므온과 안나 두 선지자를 통하여 이 성탄절을 앞두고 몇 가지 꼭 깨닫고 지켜 행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진실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의로운 사람이 되며 하나님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저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고 고대한 결과 메시아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오늘의 우리들도 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만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아 예수를 고대하고 고대한 것처럼 오늘의 우리 성도들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를 고대하고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넷째. 시므온과 안나는 두 사람 다 나이가 많고 늙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죽는 날까지 메시야를 대망 하면서 기도로써 경건생활에 힘쓰고,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씀선포를 통해 뭇 심령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이와 같은 신실 된 삶은 오늘의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왜냐 하면 믿음의 연륜이나 나이에 구애 없이 우리들은 언제 주님께 부름을 받을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말세를 당한 이 때에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더욱 종말적인 신앙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언제 어느 시간에 주님의 부름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주님 앞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은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그 동안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성탄절이 다가와도 별다른 감회가 없습니다. 가슴 울렁거리며 설레임 속에 기다리는 기다림이 없습니다. 이제 그 성탄절을 다시 기다려야 합니다. 시므온 선지자와 안나 선지자처럼 목숨 걸고 기다려야 합니다.

모쪼록 끝까지 힘쓰고 애쓰며 깨어서 근신하며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주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 듣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성탄절을 맞이하여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와 은총을 대망 하여 이번 성탄은 진실로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새 한컴오피스 한글 2010 문서.hwp
0.01MB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1235-40, 벧전4:7-11

 

알프스 산 남쪽 기슭에 있는 어느 마을 숲속에 한 노인이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산 계곡의 물에 여러 가지 더러운 잡동사니가 흘러 들어와서 마을로 흘러오는 샘물을 더럽힌다고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관리하도록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고용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 노인은 말없이 충실하게 그 동네를 순찰하면서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줍고 샘물을 더럽히는 찌꺼기들을 제거했습니다. 마을은 날이 갈수록 깨끗해져 어느 덧 아름다운 휴양지로 소문이 났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마을 사람들의 정기총회가 열렸습니다. 마을의 예산안을 심의하던 도중 누군가가 샘물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지불되는 돈을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그 노인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무엇 때문에 별 쓸모없는 사람을 해마다 고용하는 것입니까? 더 이상 더럽지도 않으니 이제는 그 사람을 고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 날의 총회에서 그 노인은 해고되었습니다. 그 후 샘물에는 엷은 적갈색 이끼가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그러더니 점점 물은 더러워졌고 또 좀 지나자 끈끈한 기름 층이 샘물을 뒤덮고 물에서는 악취가 풍겨 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이상한 질병이 마을을 휩쓸었습니다. 당황한 마을 지도자들이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난 번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옛날 샘물을 지키던 그 노인을 다시 고용하였습니다. 몇 주도 채 지나지 않아서 샘물은 다시 맑은 생수로 변하기 시작했고 알프스 산기슭의 그 마을은 다시 전과같이 깨끗하여지고 아름다운 휴양지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잘 관리 하지 않으면 오염된 식수처럼 나도 병들고, 다른 사람도 병들게 만듭니다. 성도 개개인이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을 잘 감당하게 되면 주님과 사람들과 관계를 아름답게 하고,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성도가 됩니다. 오늘 대강절 셋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슬기로운 성도에게는 때를 잘 분별하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복음서의 누가복음 본문에 주님이 오시는 종말의 때에 깨어 있는 성도가 될 것을 당부하는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서신서 본문 벧전 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이상 징후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고, 사단이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넘어지게 하려고 거짓 선지자와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각종 재난과 재해, 자연의 징조들, 기근과 난리와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의 전쟁 위기, 악이 가득한 세상과 세상 문화 등을 보면 정말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24장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24:32-35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종말의 사건을 직접경험하고 지켜보게 될 마지막 세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나라를 잃고 오랜 기간 동안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1948514일에 나라를 다시 재건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죽었던 것처럼 보였던 무화과나무에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이 돋는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 가운데 종말의 때를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세대는 몇 년을 의미할 까요? 이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는 기간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기간을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기간으로 본다면 한 세대는 70- 80년 이라는 유연한 계산이 나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 하면 48년생인 67세의 세대가 다 죽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성경의 예언이 모두 성취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여러 징조들 가운데 일월성신이 마지막 때의 징조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엘2: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했습니다. 해가 어두워지는 일식,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월식의 징조를 말하는데, 개기 월식이 일어날 때 붉은 빛으로 변하는 달을 Red Moon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놀랄만한 사건의 징조가 이미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소식입니다. Four blood moons 혹은 테트라드라고 하는데, 2014년과 2015년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초막절 절기에 맞춰서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개기월식이 연이어 4번이나 발생 한다는 것입니다. 2015320일 이스라엘의 종교력으로 11일에 태양 전체가 가려지는 개기일식이 발생하고, 나팔절에 해당 되는 2015913일에는 태양의 일부가 가려지는 이 사건은 이미 NASA에서도 확인해 주고 있는 사건으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렀다는 하늘의 징조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종말의 때가 가까운 것을 알고 깨어 있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이 시대의 파숫꾼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슬기로운 성도에게는 깨어 있는 산 믿음이 있습니다.

 

성도가 형식적인 종교인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없고, 구원 받는 산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산 신앙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확실한 신앙고백을 하는 믿음,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매일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를 소망하면서 주님과 교제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 나의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힘쓰는 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벧전4: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했습니다.

 

이태리의 작은 마을에서 말안장과 말 재갈 등 말의 장신구를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베네딕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직업에 대한 애착심이 없이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일을 마지못해 호구지책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이 갑자기 소란해서 보니 말이 무엇에 놀랐는지 갑자기 뛰고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말에 탄 손님은 어쩔 줄 모르고 고삐를 잡고 안장에 달린 발 바이에 힘을 주면서 사력을 다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말이 안정을 찾고 위태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이것을 본 베네딕트는 자기의 직업에 대한 중요성을 발견하고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안전과 행복에 직결된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간과 정성을 기울여 더 좋고 더 튼튼한 말 장신구를 만드는 봉사의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내가 하는 일이 주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고, 이 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으로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이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산 믿음의 성도는 늘 깨어 있는 자로 삽니다. 본문 눅12:37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했고, 벧전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했습니다. 산 믿음의 사람은 늘 깨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며 삽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믿음 지키기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 된다고 성경은 예고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사단은 육신의 쾌락으로, 물질의 탐욕으로, 교묘한 이단 사설로 사람들을 멸망의 구렁으로 끌고 가려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시험의 때입니다. 신앙인의 비리가 발견되면 신문으로, 방송으로, 인터넷으로 막 비난을 하여 기독교 전체를 매도하고, 기독교에 대한 안티 세력들이 무섭게 공격하여 교회는 다 썩었다. 목사는 다 썩었다.”고 말하면서 교회를 비난하여 교회를 떠나게 하고, 신앙을 갖지 못하게 훼방합니다. 그런데 세상 언론이 하도 떠들어 대니까 교인들마저 그런 줄 압니다. 어느 종교보다 많은 봉사를 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무소유니, 사회봉사니 하면서 크게 미화 시켜 큰 인물이라고 방송 매체를 통해 부각시켜 사람들을 바른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우리가 이런 가운데서도 믿음 잃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 서려면 깨어 기도 하면서 성경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도적처럼 갑자기 주님을 맞게 되고, 노아의 때처럼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대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17:26-30)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산 믿음으로 살다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슬기로운 성도에게는 준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본문 눅12:36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하셨고, 40절에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하셨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25장에 열 처녀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 등불 준비하고 있다가 신랑을 맞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성도는 성령 충만으로 기름 등불을 예비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악한 시대에 성령 충만을 받지 않으면 믿음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어 미혹에 넘어지는 자가 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등만 있지 기름이 없는 형식적인 신자가 됩니다. 이 신앙으로는 악을 이기고 성결한 자로 살지 못합니다. 종말에는 악이 난무하는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갈수록 악이 증가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면 무서운 전쟁과 테러가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간통과 살인과 동성애와 낙태와 마약과 폭력 등의 도덕적 붕괴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9-14)

 

성도가 성령 충만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되면 마치 노아가 그 세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성결하게 살았던 것처럼 주님을 본받아 성결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방주,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여 구원을 받고,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런 성도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치우쳐 악의 물결에 휩쓸려 갈 때에도 주님을 경외하며 성실하게 선한 청지기로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본문35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 기다리는 사람, 베드로전서 본문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 모두 주신 사명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자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랑 없어 피차 물고 먹다가 멸망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문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이 식어지면 봉사하면서도 원망이 생깁니다. 시험에 빠져 서로 반목하고 싸우게 됩니다. 비판하고, 이간질 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면 상처를 받고, 상처는 상처를 낳고, 그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재생산시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으라고 강조합니다. 사랑이 세상을 사는 지혜입니다. 어떤 일에도 누구와도 서운한 관계를 만들지 마세요. 미워하는 원수를 만들지 마세요.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최고의 영적전략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성결한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인내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을 사모하면서 믿음으로 잘 준비하는 삶을 살다가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슬기로운 성도는 잘 준비 하며 삽니다.

.슬기로운 성도에게는 때를 잘 분별하는 통찰력이 있고, 깨어 있는 산 믿음이 있고, .준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 하여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깨어 있는 산 믿음으로 잘 준비 하며 살다가 다시 오실 주님 맞는 성도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