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집 (잠 24:3-4)


3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4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이 시간에 “믿음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은 어떤 집일까요? 벧후 1장에 보면 베드로는 7층짜리의 멋진 믿음의 집을 말씀합니다. 벧후1:5-7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 위에 지어진 신의 성품의 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고 예수님을 닮은 위대하고 멋진 믿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아름다운 집은 어떻게 지어지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집니다.


3절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여기 집은 일반 건축물을 의미하지 않고 잘 세워나가야 할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가령 각 사람이 이루고 있는 가정, 각인의 인생, 혹은 교회 정권 국가 등 사람이 경영하고 있는 어떤 단체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삼하3:1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했는데 이 말씀은 다윗의 가정을 넘어 그의 정권까지 말한 것입니다.


한문으로 수신재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죠?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가정도 나라도 천하도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집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신령한 집입니다. 우리 믿음의 집입니다. 우리 믿음의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본문에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려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롬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무럭무럭 자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3년 반이나 말씀과 이적으로 수없이 증거하자 어느 날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벧전2:1-3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했습니다.


어떤 부인은 글을 읽을 수 없어서 하루 품삯을 주며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고용했는데 읽어 주던 그 사람이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 부인보다 더 신실한 믿음을 갖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했기 때문입니다.


2. 진리를 알고 행하므로 견고하게 지어집니다.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우리가 말씀으로 믿음의 집을 짓되 더 견고히 짓기 위해서는 진리를 더 확실히 알아 바른 진리에 서야 하고 알고 설 뿐 아니라 행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심판 날에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통과되는 건 아닙니다. 진정 주여라 불렀다면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 그 관계가 분명해야 하고 예수님이 주인이시므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마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했는데 왜 주의 이름이 통하지 않을까요? 말로만 주의 이름이었지 주의 뜻대로 하지 않는, 내가 주인이지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심부름꾼이 되어야지 예수님만 이용해 먹는다면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절).


그러시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24-27절). 우리가 말씀을 행하는데 그냥 행하는 것과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냥 행하는 것은 자기 의로움이나 율법적일 수 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에는 신앙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알되 예수를 마음에서 확실히 만나야 미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를 못 만나서 미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를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잠시 미혹되었더라도 뭔가 아니다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옵니다. 예수 터전이 아니라면 크게 불탈 날이 옵니다.


그것을 바울은 고전3:11-15에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여기 불이 무엇입니까? 멀리는 지옥불이지만 가깝게는 시험입니다. 예수 말고 가짜 예수 가짜 성령 가짜 하나님으로 시험을 이겨나갈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가짜 예수로 지옥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가짜 구원론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천주교와 직제와 교리를 일치시키려는 예수 말고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다원주의 구원론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배울 때 잘 배워야 합니다.


교리는 진짜일지라도 믿음생활에 문제가 있어도 역시 시험에 넘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테스트 시험은 우리 믿음을 점검하는 일종의 은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있어서도 바르고 그 진리를 순종함에도 바르시기 바랍니다.


전12:11에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쉽게 풀이하면 부흥사도 하나님이 내셨고 목회자도 하나님이 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부흥회인지 목회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고 부흥회도 목회처럼 하는 것이 신실한 것인 양 자랑하는데 자랑할 것 없습니다. 이건 부흥사 같은 부흥사가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부흥사도 있어야 하고 신실한 목회자도 있어야 하고 신실한 학자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성도들을 견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3.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보배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4절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집만 잘 지으면 되나요? 방에 좋은 물건이 많아야지요. 방에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들로 채워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보물이 많았습니다. 성전도 금으로 지었으니 성전부터 시작하여 성전이 모든 물건이 다 보물입니다. 그리고 지성소 법궤 위에도 값진 금은보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좌우 3층의 제사장 방에도 금나팔 은나팔 온갖 보물들이 가득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보배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 보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보물이십니다. 욥22:24-28에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사33:6에도“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학개도 말했습니다. 학2:7에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여기 모든 나라의 보배는 성전에 임재하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하는 지식은 무엇일까요? 잠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그러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행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면 우리 마음에 보물이 가득 찹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이 보물이요, 그 보물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진짜 보물이신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그런데 호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을 잊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니 하나님께서도 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보배 삼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배 삼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외쳤습니다. 호6:3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경외할 때 보배로운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집을 아름답게 지으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초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축하고 진리를 앎으로 더욱 견고하게 건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그 안에 가득히 채우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보배 되신 하나님이 기뻐 거하시며 영광 받으시고 우리들을 보배와 같이 여겨주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 십계명 선포(5:1-33)

 

신명기의 본론을 이루고 있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는 모든 율법의 기본이 되는 십계명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본문은 그 십계명을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1-1. 서론(1-5)

 

* 들으라, 배우라, 지켜 행하라.(1)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의 회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율법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 되는 남자가 60만 명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26:51), 모세가 백성들의 대표인 장로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들이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대언 하는 형식을 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떠한 과정을 거쳤든 간에 이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들을 위한 것이었다. 모세는 이 말씀에 대하여 4가지 명령을 했다. 첫째는 이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둘째는 '배우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자세히 배우고 상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깊이 생각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설명하고 가르칠 사람들도 준비해 주신다. 셋째는 그 말씀을 '지키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조심하여 그 말씀을 잊을까 삼가 마음을 지켜야 한다. 넷째는 그 말씀을 '행하라'는 것이었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은 것을 알고서 닦지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 이 언약은 오늘의 너희에게 하신 언약이다(2-3).

모세는 시내산 언약이 그들의 조상들 뿐 아니라, 현재에 살아 있는 이스라엘 자손과도 맺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믿음의 세대들에게 세우신 것이지만, 동시에 지금의 인류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그러므로 각 시대의 성도들은 그 언약을 자기 세대에게 적용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에, 그 기도가 그 당시의 제자들 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주님을 믿는 자들을 위해서도 하신 것이라고 언급하셨다(17:20). 하나님께서는 약 39년 전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여호와의 백성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19:5, 6). 이 약속은 이스라엘 모든 세대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 이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4-5).

이 말씀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대면하여 말씀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인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가 중보 자가 되어 이 말씀을 전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 말이 자신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이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새 언약은 모세보다 완전한 그리스도를 중보자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또한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다. 주님의 신적인 영광은 모세의 얼굴에 있던 영광과 같이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옛 언약의 중보자였던 모세는 자신의 죄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선고를 받았으나,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험과 죄를 이기셨고 완전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모세를 통해 전달된 율법은 완전한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그 길로 행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이것은 마치 나침반을 가진 항해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알면서도 폭풍우 앞에서 그 길을 이탈하여 파선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님 복음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어떠한 것이 옳은지를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모든 말씀들을 자세히 읽고,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해야만 한다.

 

 

1-2. 십계명(6-21)-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요약-

 

* 참고-1: "십계명의 해석 원리"

 

. 동기적 원리

이 계명들은 외적인 행동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시키는 내적인 동기까지도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마음으로 하는 내적인 음란한 생각까지도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 적극성의 원리

십계명에서 '하지 말라'는 명령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금지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도적질하지 말라고 한 말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뿐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가난한 자들을 돕고 구제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 포괄성의 원리

십계명은 한 계명이 그것과 비슷한 다른 명령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비단 자신의 부모뿐 아니라, 스승이나 다른 어른 같은 모든 권위에까지 순복하라는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

 

. 연결성의 원리

십계명의 각 계명은 각 계명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계명을 어기는 일은 다른 모든 계명들을 어기게되는 현상을 초래한다.

 

. 선후의 원리

십계명의 앞에 있는 계명은 뒤에 나오는 계명의 기초가 된다. 즉 제 1계명은 모든 십계명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앞에 나오는 대신 관계의 4계명은 뒤에 나오는 대인 관계의 6계명의 기초가 된다.

 

 

참고-2: "십계명의 목적"

 

. 만인을 위한 목적:

십계명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뜻을 알게 해주며, 인간의 무능과 죄악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오게 하는 구원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 불신자를 위한 목적:

십계명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더 이상 핑계할 말이 없도록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심판의 척도로서의 역할을 한다.

 

. 성도를 위한 목적:

십계명은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이룰 수 없는 의를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성도들에게 더욱 더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십계명은 완전수인 10과 증거의 수인 2로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과 뜻을 나타내주며, 백성들에게 주시는 마땅한 삶의 지침서이다.

 

 

. 서 론 (6)

"나는...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다."-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언약을 맺거나 율법을 선포하실 때 당신의 호칭을 먼저 언급하셨다(17:1,2; 3:6;20:1,2). 이것은 당시 고대 근동의 종주권 맹약(宗主權盟約)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입법자의 권위를 먼저 내세움으로써 뒤에 이어지는 언약이나 율법에 확고한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십계명(十誡命)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이름 위에 근거하고 있었다.

 

"너를 애굽 땅에서...인도하여 낸"-여기서 십계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은 심판주가 아니라, 구속주로 선포하고 있다. 이는 십계명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언약'임을 말해준다 (20:2).

 

. 1계명(7)

"나 외에는...있게 말지니라."-직역하면 '나와 대립하여...두지 말라', 또는 '나와 병립하여 두지 말라'란 뜻이다. 이 첫 계명은 하나님만이 인간의 유일한 신이며, 그 분만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의무(22:37, 38)라는 것을 밝혀 주는 계명으로 참 종교의 기초가 되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 2계명(7-10)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지며..."-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왜냐하면 그 같은 행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만족과 위안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부패한 종교적 심성에서 비롯된 이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4)고 교훈하고 있다.(20:4참조)

 

"절하지 말며...섬기지 말라"-'절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솨하''복종하다'란 뜻을 지니며, '섬기다'에 해당하는 '아바드''예속시키다', '노예가 되다'란 뜻을 지닌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외적(外的)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內的) 정신상태로 우상을 섬기는 것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질투하는 하나님"-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죄에 대하여 불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동시에 적절히 표현된 구절이다<4:24>.

 

"3, 4대까지 이르게..."-이 말은 부모의 죄악이 그 후손들에게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말은 후손들이 조상의 죄 때문에 멸망당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20:5)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하나님의 진노에 비하여 그 은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강조한 수사학적 표현이다.(20:6)

 

. 3계명(11)

" 망령되이"-이 말의 기본 원어 '솨웨''무익하게', '거짓되이', '헛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인간의 거짓 맹세나, 저주 등에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며 그분을 모독하는 행위이므로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18:21; 29:2; 6:9).

 

"일컫지 말라."-이름은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인격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이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대상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갖고 있는가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면서 그 성호(聖號)를 가볍게 취급하거나 외람 되게 사용하는 것 같은 죄를 결단코 범해서는 안된다(20:7 참조).

 

. 4계명(12-15)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안식일 계명은 천지창조 후에 제정되었으며(2:1-3) 호렙 산에서 입법화되었다(20:8).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동등 되게 지음 받은 대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고전 11:11, 12). 아울러 이는 주인이 지키는 안식일이 단순한 육체적 유혹만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에 관계된 묵상과 예배를 위한 것이었듯이, 안식일만큼은 종들에게도 영혼의 일에 힘쓸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20:10).

 

"인도하여 내었나니...안식일을 지키라"-(20:11)에서는 안식일 성수(聖守) 계명이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에서 비롯된 제 7일의 안식(安息) 사건(2:1-3)에 근거하여 주어졌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계명이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역사적 구속(救贖)사건에 근거하여 주어지고 있다. 전자가 안식일의 창조적 의미를 말하고 있다면, 본문은 안식일의 구속사적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안식일 개념에 대한 계시(啓示)의 심화 및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안식일(安息日)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원을 기념하는 주일(主日)로 승화된 것과 같은 원리이다.

 

. 5계명(16)

"공경하라"-이 말의 원어 '카베드'의 기본 뜻은 '무겁다', 곧 상대방을 무게 있게(존중히) 대우하라는 뜻이다(20:12).

 

"복을 누리리라"-(20:12)에서 약속된 장수(長壽)의 축복에다, 유복(有福)한 삶의 축복까지 덧붙여 약속되고 있다. 사실 인간이 장수할지라도 그 삶이 복된 것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장수 자체가 저주스런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 자에게 주어진 이 약속은 매우 적절하고 중요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도의 가장 본질적인 축복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 6계명(17)

"살인하지 말지니라"-사람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행위를 통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증거 해주고 있는 계명이다. 신약 시대의 예수께서는 직접적 살인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증오나 내면적 분노 등과 같은 간접 살인도 금하셨는데(5:21, 22), 이로 보아 본 계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진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7계명(18)

"간음하지도 말지니라"-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은 다산(多産) 종교에 물들어 성적(性的) 방종이 널리 횡행하였으며, 심지어 제사 의식을 통해 이를 장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고 있는데(22:22-24), 그 까닭은 간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창조 질서인 일부 일처제를 깨뜨리는 행위로서, 곧 입법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2:24, 25).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이 계명의 근본 정신을 더욱더 고양시켜 심지어 마음에 품는 음욕조차도 간음이라고 해석하였다(5:28).

 

. 8계명(19)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도적질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가나브''속이다'란 뜻도 있다. 따라서 본 계명은 이웃의 재물을 빼앗거나 몰래 훔치는 것 뿐 아니라, 이웃의 권익을 사기 혹은 협박 따위로 침해하는 것까지 금하는 것이다.

 

. 9계명(20)

"거짓 증거하지도 말지니라"-법정에서 위증(僞證)하는 것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경우의 거짓말은 일절 용납될 수 없다. 이는 제 8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데, 거짓은 사람을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10계명(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탐내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와''사모하다','바라다'(desire)는 뜻이다. 이는 남의 아내에 대하여 욕정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러므로 이는 간음죄와 동일시될 수 있다.

 

"그의 밭이나...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지니라"-이 말은 (20:17)에는 없던 내용으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이 차이는 처음으로 십계명을 받은 때인 출애굽 제 13(19:1)과는 달리, 현재는(출애굽 제4011) 아모리 족속의 왕들로부터 요단 동편 땅을 탈취하여 밭이 생긴 때이므로 생겼을 것이다. 여기서 '탐내다'에 해당하는 원어 '하마드''몹시 열망하다','심히 사랑하다'는 뜻이다. 이는 타인의 소유에 대하여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적으로 욕심을 품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탐심은 정당한 노력이 없이 자신에게 하락되지 않은 것을 불법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마침내 그 대상을 소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범죄 행위를 낳기 마련이다(1:15). 아뭏든 이러한 탐심(貪心)은 이웃 사랑에 반대되는 사악한 욕망이니, 성도들은 이를 마땅히 제어할 뿐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3. 모세의 중재로 선포된 율법(22-33)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산 위의 불과, 구름, 그리고 흑암 중에서 큰 음성으로 이스라엘의 총회에 말하셨다(22). 이 세 가지 현상들은 하나님의 호렙 산 현현(顯現)시 수반된 세 가지 현상이었다(4:11). 그리고 십계명을 말씀하신 후에 그것을 두 돌 판에 써서 모세에게 주셨다(22). 그리고 그 외 다른 율법들은 당시 하나님과 백성간의 중보자였던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셨다. 이 일은 각 지파의 '두령''장로'들의 건의로 이루어졌다(23). 여기에서 각 지파의 '두령'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각 1명씩 있던 지파의 지도자들이었으며, '장로'는 나이가 많고 덕이 높아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던 유력한 인사들로서(24:9;11:16), 이들은 그 당시 백성들의 실질적인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에게 나와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광대하심, 위대하심)을 자신들에게 보이셨으며,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직접 듣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하였다(24).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리를 듣게 되면, 이번에는 자신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25-26).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에게 자기들 대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전해달라고 간청하였으며, 그러면 자신들이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준행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27). 이 말은 모세의 중보(仲保) 사역이 백성들의 합의(合意)와 요청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준다.

 

<중보자로서의 모세와 그리스도>

 

성경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예비 되어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 길은 바로 성도들의 영원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나아가는 길이다(14:6; 3:12; 10: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소멸시키셨다. 여기에 나오는 중보자 모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딤전 2:5)를 상징하는 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 말을 듣고 그들의 말이 다 옳다고 하셨다(28).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간구를 다 듣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이번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복 받기를 원한다고 하셨다(29).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청을 수락하셨다. 그 결과 모세에게는 신적 권위가 부여되었고, 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중보자가 되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후 모세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모든 말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임을 인정하고 그에 전적으로 순종하여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각자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3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내 곁에 서 있으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듣고,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31). 모세가 새 세대들에게 자신의 중보자의 직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게 하여 그 율법에 순종하여 축복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명령('미츠와')'계명'(10; 20:6; 대상 28:8), '금령'(4:2;5:17) 등으로도 번역되는데, 이 말은 직접적 명령에 의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 그리고 '삼가 행하라'('솨마르')는 말의 본래 의미는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치다'이다. 여기서부터 '신중하게 행동하다', '조심스럽게 처신하다'는 뜻으로 발전되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인간 삶의 유일한 정도라는 것을 말한다.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들을 행하면 그들이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아, 그들이 얻은 땅에서 그들의 날이 장구할 것이라고 하였다(32-33). 하나님의 계명은 그것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만 삶을 윤택케 해주는 축복의 원리가 된다.

 

< 적용과 교훈 >

1.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직접 전해 주셨으나, 나머지 세부 율법들은 백성들의 합의와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모세를 중재로 하여 전달되었다. 우리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각 교회의 상황에 따른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각 사도들이 주님의 마음과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 해주셨다.

 

2. 우리는 모세가 전해준 말씀과 사도들이 하나님께 받아 전한 말씀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전해주신 말씀과 같이 받아야 한다.

 

3.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 삼가 조심하며, 그 말씀에 기록된 대로 행할 때에만 그 안에서 있는 모든 약속된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것만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축복의 길이 된다.

 

 

 

 

 

 

 

 

 

 

5장 십계명 선포(5:1-5)

1). 서론(1-5)

* 들으라, 배우라, 지켜 행하라.(1)

* 이 언약은 오늘의 너희에게 하신 언약이다(2-3).

* 이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4-5).

 

2). 십계명(6-21)-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요약-

. 서 론 (6)

. 1계명(7)

. 2계명(7-10)

. 3계명(11)

. 4계명(12-15)

. 5계명(16)

. 6계명(17)

. 7계명(18)

. 8계명(19)

. 9계명(20)

. 10계명(21)

3). 모세의 중재로 선포된 율법(22-33)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  고전15:20-28

한 사냥꾼이 있었는데,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면서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뱀을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뱀을 쳐다보았더니 뱀도 어딘가를 노려보았는데,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개구리를 노려보았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로 꿈쩍 않고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개구리는 무당벌레를 잡으려고 노려보았습니다. 무당벌레도 꼼짝 않고 있었는데, 진딧물을 잡아먹으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냥꾼은 그 먹이사슬을 보다가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이 경이로운 현장을 목격한 후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혹시 누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 것은 아닐까?” 사냥꾼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언제인가는 죽음에 의해 잡아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피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통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분이 있습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본문 고전15:20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했습니다. 첫 열매가 열리고 나면, 그 뒤를 이어 계속해서 열매들이 열리게 되는 것처럼 성도들이 그 뒤를 이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와 죽음과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입니다. 한 사람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범할 때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죽음의 형벌도 모든 인간이 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의 길이 열려지고, 이 예수님 안에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의 사슬로 하나로 묶여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는 ‘의로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담 안에서 하나로 묶여있던 사슬을 끊어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함께 죄에 묶여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베다니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지만 말씀 한마디로 다시 살게 하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침체된 신앙이 살아나게 되고, 사명이 살아나게 되고, 삶의 의욕이 살아나게 되고, 인간관계가 새로워지고, 예배생활에 활력이 생기게 되고, 봉사와 헌신이 살아나게 됩니다. 기쁨, 감사, 영생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많은 순교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고난을 당해도 그 고통은 잠깐이고, 장차 받을 영광은 영원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모든 제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다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2.말씀을 신뢰하여 믿을 때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고전15:3-4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한동안 부활을 믿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던 것도 주님이 이미 여러 차례 십자가의 일과 부활에 대한 예고의 말씀을 믿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주류라고 항상 티격태격하는 적대적인 사이였는데,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협력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종파 모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주류라고 한 것은 다 거짓되고, 헛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리새파는 자기들이 가장 경건한 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 구약성경 외에 추가로 조상들의 유전을 신앙과 생활의 한 표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지 않았고, 주님이 책망하신 것처럼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자들이었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계급의 사람들로 헤롯 왕가와 로마인들에게 호의적이며, 일반 서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바리새인들과 교리적으로 부딪히는 적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거부하면서 구약성경의 권위를 일부만 인정하고 대부분 부정하였습니다.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도는 성경대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성경이 약속한 복을 받게 되고 생명의 부활과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요, YMCA의 운동을 일으켰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일제의 무수한 협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가 작전을 바꿔서 그를 돈으로 매수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루는 총독부가 보낸 한 청년이 돈 뭉치를 들고 이상재 선생을 찾아와서 선생 앞에 돈 뭉치를 건네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 정도의 돈이면 남은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 시골에나 가서 조용하게 사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 사람아, 나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생각은 버리게' 그러자 청년은 선생을 겁내 줄 생각으로 넌지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인도의 간디나 영국의 처칠은 100세를 산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으름장입니다. 그러자 선생은 대뜸 말하기를 '이 사람아!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죽지를 말아야지, 죽기는 왜 죽어?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거야' 이 청년이 그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선생님, 불로초까지 먹었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겠다고 장담합니까? 무슨 불사약이라도 드셨습니까?'   선생이 대답을 합니다. '그럼, 먹었지! 나는 너희 천황도 먹지 못했던 불사약을 먹었지. 그래서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걸세. 나는 살아서 너희 나라 일본이 망하고 군국주의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 것 거야' 청년은 웃긴다는 듯이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이상재 선생은 옆에 놓여 있는 성경을 손에 쥐고서는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그 약일세. 이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일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었네. 그러니 그까짓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게' 그러면서 그 청년을 쫓아내 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믿는 자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신뢰 하고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성도는 장차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서 신명기 25:5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좀 과장해서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어었다가 죽어 후사에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는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이 질문은 예수를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서 억지로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유치한 질문이었습니다. 창세기 38:8에 보면 유대 민족의 풍속 중에는 가문의 대를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맡아 후사를 얻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풍속은 아랍민족, 힌두교도, 일본인 등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30절의 말씀에서 "부활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5:42-49절에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썩지 않는 몸,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영생하는 몸입니다. 전혀 새로워진 몸입니다. 연못 바닥에 잠자리 애벌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 줄기를 타고 물 위로 올라 간 수많은 친구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는 누구든지 일단 물 위로 올라 간 후에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 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 와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물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도저히 불가능 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도의 부활도 애벌레와 같이 탈바꿈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두 번째 답변은 31-32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 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말은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데, 과거에는 조상의 하나님, 또는 역사적인 하나님이란 뜻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산 자의 하나님으로 더 의미를 새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과거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은 육은 비록 죽었지만 지금도 하나님나라에 가서 살아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찌 그 분들 뿐이겠습니까? 앞서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다 영원한 천국에 가서 살아계십니다. 이 분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는 산자의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의 하나님으로 살아 계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현재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다고 믿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 아버지이심을 믿게 될 때 인생길이 괴로워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고, 험한 시험과 환난이 와도 두렵지 않게 살 수 있고, 좌절과 절망이란 있을 수 없고, 마음을 바로 가지고 의롭게 살게 되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현재로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고 믿고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2.말씀을 신뢰하여 믿을 때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3.성도는 장차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시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멘.

신앙생활의 4대 요소 (잠 23:22-25)


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이 시간에 “신앙생활의 4대 요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을 말씀 드리기 앞서 본문의 부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모공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혹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인륜의 기본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성경도 십계명 중 인간에 관한 계명 중에서 첫 번째로 부모공경을 말씀했습니다.


즉 인간의 삶에서 그 어떤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보다 앞설 뿐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계명입니다. 즉 인간이라면 최소한 꼭 지켜야 할 법이란 말입니다. 다른 죄도 사람 구실 못하는 것이지만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야 말로 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므로 성도의 구실을 하려면 잘해야 하려면 닦아야 할 신앙생활의 기초들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 공경을 잘하는 것입니다.


22절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부모공경이 자녀의 마땅한 의무라는 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강조되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삶의 오랜 경험을 통해 자녀가 의지할만한 지혜를 갖춘 자일 뿐 아니라 부모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고 사랑을 베푼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조건이 없습니다. 부모가 가졌든 못 가졌든,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건강하든 약하시든, 존경 받을 만하든 그렇지 못하든, 나에게 잘했든 못했든 부모공경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려면 이 기초가 잘 닦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공경하는데 다른 이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6:4-5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마22:37-40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다하여 라는 말씀을 첨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섬기는 훈련이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예배생활이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정기예배는 물론 매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잘못되어 있으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든지 영적으로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받들기 때문에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기초가 잘되어 있지 않으면 겉만 교인인 일명 나이롱 신자가 되고 맙니다.


2. 신앙생활의 기초는 말씀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23절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믿음 없는 사람들은 진리 즉 믿음을 잠시 저버리더라도 우선 육신적인 무엇을 성취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범하고 양심을 범하는데 그렇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하시는 일을 보세요. 우리 믿음을 훈련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값진 수업료를 내게 하십니까? 때로는 우리 재물을 치기도 하시고, 건강을 치기도 하시고, 우리 명예나 권세나 더 귀중한 것도 치시잖아요? 상상할 수 없는 수업료를 지불하게 하시면서 믿음의 기초를 닦게 하십니다. 이것이 진리를 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닦아야 할 신앙생활의 기초는 말씀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를 잘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2:2에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어린이가 어머니 젖을 먹지 않으면 자랄 수 없음같이 우리가 말씀을 먹지 않으면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23:12에 욥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음식은 거를지라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거르지 않았습니다.


이 삶의 기초만 잘 닦이면 삶은 탄탄대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119:165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로다” 했기 때문입니다. 시1:3에도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말씀대로 사는데 왜 막히겠습니까?


믿음의 삶도 형통합니다. 우리가 어둠에서 방황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천국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험하다 했는데 이 천국 길이 왜 험합니까? 천국길이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방황과 핍박과 어려움을 말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알 때 예수를 구주로 모실 수 있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고, 성경을 알 때 구원의 문제 승리의 문제 풍성의 문제 내세의 문제 등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해 주니까 하나님도 구원도 천국도 확신하고 신앙개념이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성경 보는 일을 우리의 중요한 신앙의 기초초 삼아야 합니다.


3. 신앙생활의 기초는 날마다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24절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부모는 의롭고 지혜로운 자녀를 기뻐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의인은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죄와 싸우되 자신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박해를 받고 죽기까지 의를 외쳤습니다.


의인이 되자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철저히 출애굽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한 발 세상에 한 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라도 용납하실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배울 때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엡4:19-20에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죄 지어도 좋다는 식으로 배우지 말란 말입니다.


의인이란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불의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나 어떤 핍박 속에서도 내가 피흘리고 죽기까지라도 믿음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엎드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죄와 상관이 새로워 져야 합니다(히9:28).


어느 정도해야 합니까? 죄 씻음은 물론이고 나아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함과 같이 우리들도 형제를 온전하게 사랑할 만큼 성장해야 합니다. 벧전1:22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 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그러므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IS가 이집트의 기독교인 125명을 납치했는데 언제 어떻게 처형할지 모릅니다. 이 기사를 보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뽑아 흡입해 가시는 것처럼 간절하게 감동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풀려날지 순교를 당할지 모르지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악에서 떠나 내가 변화되는 일에 열중해야 합니다. 성결함을 날마다 구하시기 바랍니다. 형제는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뒤를 따라갈 수 있는 믿음에 도달하기까지 새로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의로운 변화 없이는 영적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 신앙생활의 기초는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25절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자식의 기본적인 의무는 부모를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즐겁게 하되 특별히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강조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머니가 사랑으로 대해주니까 어머니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벧전5:13에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에서 교회를 개역성경 난하주에 여자라고 했지만, 혹 다른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영의 양식을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위로합니다. 교회는 양우리와 같습니다. 우리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미를 기쁘게 하듯 교회생활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로 알고 존중하고 그 법도를 지키며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일군으로 알고 따르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감정으로 교회를 대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 교회를 핍박할 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 주여 누구시니이까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4-5)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후에 딤전1: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정말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개인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못 되도 교회가 잘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하나님께서 버리시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몸담고 충성할 교회가 없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정을 주시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충실한 교회생활이 잘 안되면 모든 것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하신 반석이십니다. 이 예수의 기초 위에 견고히 서십시다. 기초가 흔들리면 어떤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경 읽기와 성결 추구와 교회생활의 기초를 튼튼히 하십시다. 그래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성도의 구실을 다 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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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권능 요20:1-10, 고전15:50-58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 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 권위를 만방에 널리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성도로서 개신교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길을 뻗쳐 칙령 거역 죄로 기독교 대표인 세오졸프를 체포하여 파리 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 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하였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신 성령 증거 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이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가던 루이 14세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 왕"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세우고 감옥으로 들어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그를 석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중요한 두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탄절이요, 또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절기요, 부활절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인간의 구속을 완성시킨 절기입니다. 즉, 성탄이 인류 구속의 시작이라면 부활절은 인류구속을 완성한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바로 깨닫고 믿는다면 이 두 절기의 축복과 은혜는 한없이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부활의 권능”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대적 자들과 사단의 권세를 이긴 권능입니다.

1)대적 자들과 사단의 세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무리들은 불법으로 재판하여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언도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로마 군병들에 의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될 때 저들은 승리자 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 한 후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을 것입니다. 백성을 미혹케 하던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자부하고 안심했을는지도 모릅니다.

2)예수님을 처형한 후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 후 부활하실 것을 여러 말씀으로 암시하고 예고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2:13-21).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찾아와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자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마 12:39-40). 그 외에도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마 16:31), 변화산 사건 후 갈릴리에서(마 17:22-23),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직전(마 20:17-19)에도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들이 마음에 걸려 그들은 가이사 황제의 인을 쳐 예수님의 무덤을 인봉하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로마 병정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3)그러나 생명 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절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올라갔다가 무덤 문이 열려 있고 시신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녀는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줄 알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절) 묻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 몇 차래 말씀하셨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무덤을 찾아 왔을 때 무덤이 비어 있고, 주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24:4 이하에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아 두려워하고 있을 때 두 천사가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2.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권능입니다.

1)주님의 부활은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그 사망 권세는 오늘까지도 죽음의 위력을 앞세워 거짓과 불의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거짓됨으로 오염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없도록 모두 거짓으로 물들여 졌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세력 앞에,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죄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기억도 하시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의롭다 인정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모든 죄와 죄책에서 해방을 받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작품 [부활]은 카츄사라는 한 여성의 기구한 일생을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카츄사는 귀족 네흘류도프의 집에 하녀로 있으면서, 네흘류도프의 의하여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유형 수가되어 시베리아로 갔습니다.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 들판에서 부활절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찾아온 네흘류도프와 함께 "주는 실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죄에 얽매였던 카츄사의 영혼이 자유함을 얻게 되고, 부활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부터의 해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에서 찾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죄의 세력을 부수고 살아나신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2)주님의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입니다.

사망 권세를 잡은 마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것은 그가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종노릇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오신 것과 관련하여 요일3:8절에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 한분의 희생으로 인류를 위한 속죄의 길,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생하는 길을 다 닥아 놓으신 것입니다.

프랑스 북쪽에 칼레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1347년 백년전쟁이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칼레는 영국군에 포위되었습니다. 다른 도시는 다 점령되었는데 칼레만 점령되지 못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프랑스군은 영국군에서 생명을 걸고 저항 해서 영국군에게 가장 골치 아픈 곳이었습니다. 영국군을 가장 괴롭힌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에 의하여 완전 포위되었습니다. 포위 된지 1년 정도 지나게 되니 이제 음식이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공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칼레는 이제 굶어 죽든지 항복하든지 둘 중에 하나 길을 선택하여야 하는 기로에 섰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며칠 버티기 힘든 최악 상황이어서 결국 백기를 걸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겠다!"고 해서 칼레 시는 영국 왕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다 할 테니 생명만은 헤치지 말아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영국왕은 "좋다. 그러면 시민들의 목숨은 보장하마. 그러나 그 동안 우리를 괴롭힌 대가는 받아라. 칼레 시민 대표 6명을 보내라. 그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벌은 끝낸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6명이 시민들을 대신해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였던 위스타슈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죽겠다고 나섰습니다. "칼레의 시민들이여, 5명만 더 나오라. 용기를 가지고." 이 때 시장도 나섰고, 칼레의 핵심 인물, 귀족들이 한 명 한 명 앞으로 모두 7명이 나왔습니다. 한 명을 빼야 하는데 서로 안 빠지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비를 뽑아서 한 명을 빼기로 하여 한 명이 뽑혔습니다. 그 사람은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으로 가서 “나를 제일 먼저 죽이십시오.” 에드워드 3세 영국왕은 이런 모습을 보고 모두를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나대신 죽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소리 없이 가장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너 대신 죽었으니 너는 생명을 얻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할렐루야!

3)부활은 시기와 미움과 증오를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무리들은 시기와 미움과 증오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온갖 모욕으로 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의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운명하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시기와 증오와 미움을 이긴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못난 제자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한 번도 책망하지 아니했습니다. 도리어 사랑을 확인하는 말씀만 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자기를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책임 추궁의 말 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만 반복해 물었습니다. 이 사랑 앞에 그는 녹아졌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녹아져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 앞에 예수 믿는 자들을 칼과 맹수와 권력으로 박해했던 로마도 녹아버렸습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젊은 집사 스데반이 돌로 몰매를 맞으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고, 그 포악한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 보좌 위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놀라운 사랑의 근원이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들어간 슈바이처나, 문등이 촌으로 들어간 다미엔이나, 그리고 미개한 지구촌의 곳곳마다 들어가 지금도 자신을 불태우는 많은 주의 종들을 보게 됩니다.

3.성도는 부활의 권능을 가진 자들입니다.

1)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만나주시고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과 동행해 주십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도움을 의뢰할 수 있고 필요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승리하는 삶을 위한 가장 완벽한 조건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승리가 바로 주님과의 동행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영적인 승리에 있어서 학벌이나 문벌, 재력 그리고 세속적인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내 삶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시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선결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2)부활의 권능을 가진 성도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 됩니다.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으므로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독이 제거된 독사와도 같아서 겉모양은 여전할지라도 전혀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 중에는 그를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약4:7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 할 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가르칩니다. 두려워 피할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적하면 그가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이 성취됨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는 우리를 해할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주의 약속을 불신하여 용기를 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마귀의 정체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빨과 발톱이 제거된 사자는 아무도 해롭게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가진 자답게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주님과 함께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것을 소망하며 삽니다.

살전 4: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고전15:53에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했습니다.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16-20) 부활하신 주님은 지상 명령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내 가족,부모,형제를 구원 해야합니다.북한 동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활의 권능은

☆.대적 자들과 사단의 권세를 이긴 권능입니다. *대적 자들과 사단의 세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후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그러나 생명 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권능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시기와 미움과 증오를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성도는 부활의 권능을 가진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만나주시고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가진 성도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 됩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것을 소망하며 삽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율법 준수에 대한 권면(4:1-40)

신명기 4장은 모세의 첫 번째 설교 중 결론 부분이다. 모세는 이 곳에서 과거의 일들을 돌아보면서 율법 준수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모세는 4장의 첫 부분에서 이제('웨 앗타')라는 말을 함으로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회고하기를 마치고,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는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준행할 때에만 그들의 안전과 미래가 보장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율법 준수에 관한 조항은 모세의 설교 중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4-1. 율법 준수를 촉구함(1-8)

모세는 역사적인 회고와 묵상을 마치고, 이제부터 자신이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 자손들이 준행하도록 권한다.

 

* '규례'(規例)('후카')

성문율과 같이 도덕이나 관습이 법적으로 확정되고 규정된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만 나오는데 '끼어들다, 새겨넣다, 제정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語根)에서 유래되었으며, 단독으로 등장하기보다는 "계명과 율례와 법도"(26:5), "규례와 법도"(5:1), "계명과 법도와 율례"(대상29:19) 등과 같이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 '규례는 도덕법, 의식법(儀式法), 시민법, 사회법과 같이 세부적으로 규정된 법규를 가리킨다.

 

* '법도'(法度)('미쉬파트')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행하도록 되어있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의무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지켜야 할 모든 의무들을 포함한다(Keil).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모든 규례와 성문법, 그리고 그들이 마땅히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지키도록 되어있는 모든 의무들을 말한다. 성경에서 이 두 단어는 자주 혼용되거나, 둘 다 율법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두 단어의 의미를 엄밀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교훈'을 강조하는 중언법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는 것은 율법을 듣고 배우는 일에 그치지 않고 온전히 실천되어야 함을 말한다.

 

. 생명을 얻는 길(1)

이스라엘 자손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1). 모세는 이 말을 결코 추상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결과로, 지난 40년간 광야에서 그들의 죄를 지고 죽어간 이스라엘 구세대의 뼈저린 비극적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경험을 통해서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은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으며, 모세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깊이 상기시켜 주려고 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받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5:24).

 

. 말씀에 가감하지 말고 순종할 것(2)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가감하는 일을 금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말씀에 기록된 대로 순종만 하면 된다(2). 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온전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내용을 덧붙이거나 삭제하는 것을 엄히 금하고 있다(12:32; 30:6; 3:14; 5:18; 22:18, 19). 여기서 '지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는 '가시로서 울타리를 치다'란 기본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와의 명령, 곧 하나님의 법도와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고 그 말씀 안에 온전히 거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그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려는 유혹은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오는 전형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 바알브올 사건에 대한 교훈(3-4)

모세는 한 실례를 들어서 이 일을 강조하였다. 이 사건은 최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행음(行淫)하며 바알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일을 말한다(25:1-9). '바알브올''브올 지방의 바알'이란 뜻인데, 이는 당시에 모압 족속이 섬기던 다산(多産)의 신을 말한다. '좇다'('아하르')는 말은 '적극적으로 뒤따르다'(follow), '의지적으로 추구하다'(pursue)란 뜻으로, 우상숭배 제의(祭儀)에 능동적으로 깊이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때에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은 생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붙다'('다바크')는 말은 '굳게 결합하다', '바싹 뒤따르다'는 뜻으로,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교제를 나누는 상태를 말한다(71:5; 51:5; 3:3). 많은 군중들이 바알브올 사건에 참여할 때에도 그 사건에 참여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들은 모두 생존하여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3-4).

 

. 순종하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이 되는 율법(5-6)

이스라엘 자손들이 율법을 지켜 행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지혜와 지식이 될 것이다. 주변에 있는 다른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혜가 있는 백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창조주의 지혜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참 지혜요 지식이라고 말한다. 성도의 지혜는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 살아계셔서 친히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7)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다른 민족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이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친히 관여하셨으며,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그리고 날마다 그들과 친히 함께 동행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7). 인간의 손에 의해 공교하게 다듬어진 이방의 온갖 신들은 그 백성이 위경에 처해도 돕지 못하나, 여호와는 살아서 역사 하시는 참 하나님이시다.

 

. 가장 공의로운 율법(8)

율법은 참으로 공의롭기 때문에 준수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이 규례와 법도는 세상의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공의롭고 공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공의를 시행할 수 있었다. 율법의 공의성(公義性)은 이방 법규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다(8).

 

4-2 스스로 삼가며 마음을 지키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9-14).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율법을 받던 때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새 세대들에게 들려줌으로서, 그 당시에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이나 어려서 그 언약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신적 권위를 설명해 주고 있다.

 

. 율법을 잊지 않도록 스스로 삼가며 마음을 힘써 지키라(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율법을 잊지 않도록 힘쓰라고 지시하였다. 이 말은 직역하면 '네 생명(영혼)을 힘써 지키라'는 의미이다.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갖고 유지하게 하는 곳이며, 의지적, 도덕적 삶의 중심으로 인격의 중심을 말한다(10:10). 인간은 항상 악에 이끌려 미혹 당하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전 9:27). 성경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4:23)고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모세는 새 세대들을 시내 산에 서있던 세대들과 같이 취급하여 ''(you)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구세대와 신세대가 한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으며, 40년전에 주어진 율법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 자녀와 후손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9)

모세는 먼저 부모들이 율법을 기억한 후에, 자녀들과 후손들에게도 부지런히 가르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율법은 자손 대대로 이어지면서 준수되어야 한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부르셨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하나님 경외함을 알게 함(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호렙 산에 강림하셔서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10)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친히 자신의 음성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전달하고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말은 '쉐마 본문'(6:4-9)을 상기시켜 주는 말인데, 실상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거듭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다(11:19; 22:6; 6:4). 이러한 일은 자녀들이 땅에서 축복 받고 잘되게 하는 길이며, 또한 그 자녀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모든 믿음의 부모들이 힘써야 할 일이었다.

 

모세는 그때의 광경을 지금 눈에 보는 듯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섰고, 그 산에는 불이 붙어서 화염이 충천하였다(19:18). 아울러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하는(5;24) 화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구원의 표증이 되지만(13:21,22), 대적자들에게는 심판의 표증이 된다(20:9). 그리고 산은 유암과 구름과 흑암으로 덮였는데, 유암'('호쉐크')'어두움'을 가리킨다. 이는 짙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어 생긴 어두움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분(104:2; 딤전 6:16)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들에게 현시(顯示)하시기 위해서는 그 눈부신 영광의 광채를 반드시 구름과 어두움으로 가리어야만 하셨다(19:16-19). 이때에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그들에게 말씀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말소리만 들었다(12). 하나님께서 모습을 가리우신 이유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그 형상을 만들어 우상 숭배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명 하시고, 그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두 돌 판에 써주셨다. 히브리인들은 10'완전성'(完全性)을 나타내고, 2'증인의 숫자로 이해했다. 따라서 '십계명''두 돌판'에 기록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명의 완전성과 아울러 그것이 뭇 사람들에게 널리 증거 되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쓰셨는데, 그 내용이 두 돌비에 각각 어떻게 쓰여졌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 5-5 구분법 ; 부모 공경을 종교적인 의무로 포함시켜서 1-5계명까지를 하나로 하고, 그 이하를 사회적인 의무와 구분시키는 구분법인데, 이 구분법은 요세푸스(Josephus)이후 초기 4세기까지 주로 교부들의 구분법이었다.

 

(2) 3-7 구분법 ; 37을 각각 삼위일체와 안식을 상징하는 완전 성수(聖數)로 보고, 십계명을 구분한 구분법이다. 어거스틴, 로마교, 루터교 등의 견해이다.

 

(3) 10-10 구분법 ; 당시 고대 근동의 종주권(宗主權) 계약 체결 양식이 같은 계약서를 중복하여 만들었으므로 똑같은 십계명을 두개 만들었다는 것이다(M.G. Kline).

 

(4) 4-6 구분법 ; 계명을 대신법(對神法)(1-4계명)과 대인법(對人法)(5-10계명)으로 요약한 예수님의 증거 (22:37-40)를 근거로 구분한 구분법이다. 오리겐과 칼빈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가 주로 지지하는 구분법이다.

4-3.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15-40)

 

. 우상 제작과 숭배에 대한 경고(15-24)

 

* 우상 제작과 숭배를 금지함(15-18)

모세는 율법 강론을 하기에 앞서서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되는 제 1, 2계명, 즉 유일신 하나님 경배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어떠한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15).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기를 바라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영적 존재인 하나님조차 형상으로 대치시켜 만들어 섬길 우려가 충분히 있었다. 또한 모세는 자기를 위해 아무 형상이든지(사람, 짐승, , 곤충, 어류등의 형상)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는 일을 금지시키고 있다(16). 여기에서 우상(페셀)'파살'(새기다, 자르다)에서 온 단어로, 우상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조각하거나 새겨서 만든 가공물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애굽인들의 각종 동물 숭배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광야 여행시 금송아지 사건(32:2-8)도 결국 이런 영향을 받아 일어났는데, 동물 숭배의 무가치성과 헛됨은 이미 하나님의 10대재앙(7:8-12:30)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절대 유일성은 그 속성상 스스로 자신과 비견(比肩)된 그 어떠한 피조물의 형상도 단호히 배격하신다. 특히 이스라엘이 곧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는 온갖 우상들과 거짓 신들이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더욱 형상 제작과 우상숭배를 금하였다(16-18).

 

* 일월성신 숭배금지(19)

또한 모세는 당시에 성행하던 천체 숭배에 대하여도 경고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월성신을 보고 그것의 장엄함에 미혹되어 그것을 섬기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19). 본문에서 말하는 '하늘 위의 군중'에서 '군중'에 해당하는 원어 '체바''군대', '큰 무리', '큰 집단'을 의미하는데, 이 말은 '모든 별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분정해 주신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분정하다'('할라크')는 말은 '분배하다', '분리하다', '주다'란 뜻이다. 고대 애굽인들이나 가나안족, 그리고 셈족 등은 해와 달과 별들을 우주에 거하는 여러 신들의 분신(分身)으로 보고 이를 숭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은 이러한 일들을 본받아서는 안되었다(1:14-19).

 

*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라(20-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쇠 용광로와 같은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자기의 기업으로 삼으셨다(20). 그러므로 새 세대들은 하나님의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소멸하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20-24). 여기에서 '쇠풀무'('쿠르 바르젤')는 곧 '철 용광로'(iron furnace, KJV), '쇠를 녹이는 용광로'(iron-smelting furnace)를 뜻한다. 따라서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쇠 풀무와 같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 당한 학대와 고통이 얼마나 혹독했던가를 표현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열국 중 제사장 나라가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19:4-6).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모세가 마치 유언과도 같은 그의 메시지에서 거듭 역설하고 있는 핵심은, 부디 호렙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지 말고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 소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24)

하나님은 근본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죄와 불의에 대하여서는 불처럼 심판하시는 분이시다(11).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다(13:40; 벧후 3:1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에게 헌신과 애정을 돌리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으신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고 계신 것처럼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실감을 더해 주어 이해를 도우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6:15).

. 우상 숭배에 대한 징벌과 회복(25-31)

 

* 언약을 잊고 우상숭배 할 때(25-28)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우상 숭배를 하게 되었을 때의 일을 미리 경고하고 있다. 그들이 무슨 형상이든지 조각하게 되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2계명)을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언약을 깨뜨린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20:4-6참조). 모세는 이 일에 대해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고있다. 모세는 자신의 말에 대해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만일 이스라엘이 언약을 위반할 때에는 천지가 증인이 되어 심판이 시행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를 하게 되면 그들이 오래되지 못해서 전멸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는 징계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상의 헛됨을 더욱 철저히 교육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인 동시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려는 사랑의 채찍이었다. 모세는 우상 숭배자들이 이방에 끌려가서 섬기게 될 우상들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는 것들'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는 달리 우상들은 아무 생명도 없는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 회복시켜 주시는 자비의 하나님(29-31)

그러나 모세는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원과 회복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길을 베풀어주실 것이다(2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열조들과 하신 언약을 잊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버리다'(라파)란 말은 '풀다','놓치다', '손을 떼다'란 의미인데,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놓치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이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버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열조와 맺은 언약(15:12-21) 때문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죄를 지어도 버림받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으신 '새 언약' 때문이다(9:15). 우리는 연약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 번 맺은 언약을 끝까지 시행하신다.

 

*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32-34)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과 같이 큰 일을 보고들은 적이 있느냐? 고 물었다(32).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림하셔서 말씀하신 일은 전 우주 역사 가운데 단 한번밖에 없었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세상에 어느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생존하였으며(33),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모세는 이러한 역사를 행한 민족과 신이 역사 이래로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이러한 기사를 행하셨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33-34). 성도들이 때때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돌이켜보는 것은 참된 신앙 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환난 때에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돌이켜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할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해서 앞으로도 함께 해 주실 것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37:39).

 

모세는 계속해서 열방이 섬기는 무능한 잡신(雜神)들과는 달리, 역동적으로 역사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관계에 있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을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 강림하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 생생한 음성으로 당신의 뜻을 명백히 계시하신 율법 수여 사건을 생생하게 연상하면서 하는 말이다(19:16-19). '시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 바로에게 행한 모든 사건들을 말하고 있으며(7:14-12:30), '이적과 기사'는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별히 인간 역사 가운데서 행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크신 팔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승리케 하셨다(14). 또한 "강한 손과 편 팔"은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구원 행동을 가리키는 의인법(擬人法)적 표현이고(6:6;14:8), "크게 두려운 일"은 애굽인들에게 내린 10대 재앙을 말한다(12:29-36). 그리고 "한 민족을 다른 민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을 말한다. 1) 400여 년이나 종살이를 했던 노예민족이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일순간에 애굽으로부터 영광의 탈출(Exodus)을 감행했으며, 2)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을 약 200만이나 되는 많은 인구가 광야에서 무사히 생활했다는 것, 그리고 3) 군사 시설이나 변변한 전투 경험도 없던 노예 민족 이스라엘이 강력한 토착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요새화 된 가나안 땅을 단시간 내에 정복, 정착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는 열조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기 백성을 도우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특별 섭리와 보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13, 14).

 

* 이러한 일은 유일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35-36)

하나님께서 이러한 큰일을 나타내신 것은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며,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35). 모세는 이 말을 통해서 당시 전세계적으로 범람해 있던 다신론(多神論)과 범신론(凡神論), 그리고 지역신관(地域神觀)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이 이후로 날마다 고백하여야 할 신앙의 본질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부터 음성을 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게 하셨으며, 땅에서는 큰불을 그들에게 보이시고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그들이 들을 수 있게 하셨다(36). 여기에서 교훈하다는 말의 원어 '야사르'의 기본 뜻은 '징계하다' 인데, 이 말에서 '교훈하다', '바로잡다', '개심시키다'란 뜻이 파생되었다. 즉 이것은 인간을 징계하시면서까지라도 의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였다(37-3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사랑하심으로 그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크신 권능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들보다 강대한 열국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을 그 땅으로 인도하여 기업으로 주려 하셨다(37-38).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이런 일을 행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때문이었음을 강조하였다(7:7,8;10:15).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라고 권하였다.

 

* 유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라(39-40)

모세는 하늘과 땅에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며, 다른 신은 없는 줄을 알고 명심하라고 거듭하여 경고하였다. 명심하라는 말은 '되돌아가다'(슈브)'마음'(레바브)이 합쳐진 말인데, 항상 마음을 돌이켜 두고두고 되새겨 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도 이 사실을 '명심케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규례와 법도와 명령과 말씀을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39).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말을 지킬 때에 그들과 그 후손들은 복을 받고 그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이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킴으로서만 그들의 앞날이 보장됨을 의미한다. 만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반대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들을 어길 때에는, 그들이 쫓아냈던 다른 민족들과 같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40).

 

2-5. 요단 동편에 세운 세개의 도피성(41-43)

"때에 모세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이는 과거에 원혐이 없이 부지중에 오살한 자로 그곳으로 도피케 하기 위함이며, 그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로 그 생명을 보존케 하기 위함이라.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41-43)

    


 

율법 준수에 대한 권면(4:1-40)

1. 율법 준수를 촉구함(1-8)

* '규례'(規例)('후카')

* '법도'(法度)('미쉬파트')

. 생명을 얻는 길(1)

. 말씀에 가감하지 말고 순종할 것(2)

. 바알브올 사건에 대한 교훈(3-4)

. 순종하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이 되는 율법(5-6)

. 살아계셔서 친히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7)

. 가장 공의로운 율법(8)

2 스스로 삼가며 마음을 지키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9-14).

. 율법을 잊지 않도록 스스로 삼가며 마음을 힘써 지키라(9)

. 자녀와 후손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9)

. 하나님 경외함을 알게 함(10)

.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10)

3.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15-40)

. 우상 제작과 숭배에 대한 경고(15-24)

. 우상 숭배에 대한 징벌과 회복(25-31)

4. 요단 동편에 세운 세개의 도피성(41-43)

육신에 속한 사람 (2213-16)

 

이 시간에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신자를 크게 분류한다면 어떻게 분류될까요? 성경을 우리 성도를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합니다. 그것은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기엔 불신자를 제외하고 신자만 말씀한 것입니다.

 

고전3: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여기 보면 분명히 성도를 두 종류로 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구체적으로 육신에 속한 사람이란 어떤 자일까요?

 

1. 육신을 따라 거짓된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13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게으른 자의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게으른 자가 항상 이 핑계 저 핑계로 자기 게으름을 합리화시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의 말에는 논리적 모순이 보입니다. 즉 게으른 자의 변명은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사자가 있었지만 숲속에서 살았지 마을로 내려와 거리에 돌아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게으른 자는 일을 무서워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을 따라 거짓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물이나 만사를 성경을 통해 보지 못하고 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만 봅니다. 가장 현명한 듯하나 가장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서 만사를 지배하고 주관하는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앞에 홍해가 앞에 놓였을 때 육신의 눈으로는 막막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추격하지 옆에는 언덕이지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4:10을 보면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원망하면서 장관을 세우고 다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 복음과 말씀의 약속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육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생각은 게으른 자가 사자가 밖에 있다고 하는 소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육신은 거짓을 진리로 믿는 어리석음의 달인입니다.

그래서 고전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그러므로 더 이상 거짓을 믿으면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불행합니까? 현실만 보고 거짓을 믿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안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갈 날을 생각할 때 캄캄하고 어둡습니까? 이 또한 육신으로만 판단한 완전한 거짓입니다. 그 날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우며 기쁨과 환희에 넘치는 날입니다. 복권 당첨하는 것과 비할 수 없어요. 너무 벅차서 견딜 수 없는 날이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14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여기서 음녀의 입은 거짓되고 달콤한 유혹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비도덕적이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도록 유도하여 영혼들로 하여금 죄의 깊은 함정에 빠지도록 인도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빠집니까?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빠질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하나님 잘못인가요?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멀리하면 거기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그래서 요3:18-19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했습니다.

 

여기 음녀의 입이라 했는데 얼마나 달콤한 소리로 사람을 꾀든지 보통 사람이라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대표적인 육신의 모습이에요.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갑니다. 반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한 번 멀리하면 더 멀리하게 되고 그러다가 세상으로 타락하고 맙니다.

 

낙타와 천막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랍의 한 상인이 무역을 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며 잠을 청하게 되었는데 밖이 몹시 춥습니다. 이 때 낙타가 슬그머니 코를 들이 밀었습니다. 밖이 너무 추우니 제발 코끝만이라도 천막 안에 넣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상인이 안쓰러운 마음에서 허락하자 잠시 후에는 낙타의 머리가 안으로 들어오고, 상인이 마지못해 안쪽으로 비켜주니 이번에는 긴 목이 들어오고 이어 앞발 몸통 뒷발까지 들어와 낙타가 천막을 독차지하게 되어 작은 빌미를 제공한 주인은 오히려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허용하고 가까이하면 세상이 우리 믿음을 몰아내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73:27-28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육을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육신에 속한 사람은 말씀에 순복하지 않고 완고합니다.

 

15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에는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하려는 고집이 있고 미련함이 있는데 아이를 교육시킬 때 칭찬과 격려도 필요하지만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보인다면 가차 없이 그것을 바로 지적하고 따끔하게 훈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징계는 그 아이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벗어나 의의 길로 들어서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구원함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어리석은 아이의 모습이 육신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완고합니다. 고집이 셉니다. 제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존심도 강하고 자기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훈련 받지 않은 야생마처럼 굴레를 벗어버리려고 날뛰는 모습입니다.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들의 경기인 로데오(rodeo) 경기를 보면 카우보이들이 거친 야생마를 타는데 야생마다 어찌나 펄펄 뛰는지 등에 태운 사람을 5초 이상 등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야생마 등에서 한 사람도 떨어지지 않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과 그 말씀에 순복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4.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적으로 더욱 빈곤합니다.

 

16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이 말씀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리어 억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아부하려는 타락한 자들의 잘못된 경제윤리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힘없고 약한 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여 부자에게 갖은 아첨을 다하고 뇌물을 제공함으로서 불법으로 재산을 모으려고 하는데 그 결과는 도리어 곤고함이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것은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기 심령과 복에 위배된 일을 하면서 육신의 만족을 따라 삽니다. 자기 살을 베어서 먹는 동물과 같이 죽는 길입니다. 세상을 취하면 행복할 줄 알아도 큰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위해서 살면 영도 죽고 육신도 죽기 때문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을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육신도 위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고전6:13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했습니다. 주를 위해 우리 몸을 바치세요.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살면 주께서 우리 몸도 책임을 지신답니다. 우리 연약한 인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도 몸도 책임져 주셔야 해요. 그러기 위해 몸으로 죄짓지 말고 몸 드려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입니다. 그것만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몸 가지고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치시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금 치실 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건강관리만이 몸 관리 아닙니다. 범죄하지 않는 것이 몸 관리입니다. 바쁘고 힘들어도 몸과 마음 들여 하나님 섬기는 것이 몸 관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3) 그러므로 우리 모두 육신을 가졌으나 육신대로 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신 우리 구주 예수님처럼 우리의 육신을 내려놓고 영을 따라 살아가는 가장 복되고 거룩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세 개의 십자가 요1917-27

 

성경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중심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인간의 죄악을 알며,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곧 새 생명을 얻는 것이며, 십자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도 잊을 수 없고 항상 묵상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이고 구원의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가 죽어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저주스런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고 칭합니다. 고난주간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고 친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종려주일) 그곳에서 보내신 일주일의 삶을 묵상하며 지내는 시간입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바르게 깨달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해골이라 이름 붙여진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세워졌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십자가이지만 세 개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 다릅니다.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 멸망의 십자가

 

예수님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 하는 죄인은 반란자나 노예들을 극형에 처할 때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들에게는 아무리 무거운 죄를 범했다 해도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아 죽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그야말로 반인륜적이고 극악무도한 죄인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형인 십자가 형틀에 달린 것입니다. 첫 번째 십자가는 죄의 결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십자가였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범한 모든 죄악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종류가 어떠하든 결국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누구도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가 첫 번째 십자가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회개할 기회마저도 놓쳐버린 십자가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예수님을 조롱하고 불신했던 멸망의 표상(表象)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멸망 그 자체를 보여주는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전형을 보게 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은 후에 영원한 지옥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의 완악함을 첫 번째 십자가를 통해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막가는 인생종착을 보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1996(10)에 우리 사회에서도 소위 <막가파>란 범죄 조직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어 간 자들입니다. 첫 번째 십자가를 보면서 깨닫는 것은 구원은 누구에게나 다 열려있지만 그렇다고 구원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화)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밀양>을 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빈정거림이 나옵니다. 전도연씨가 열연한 주인공 신애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슬픔과 번민에 휩싸인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어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대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신애가 유괴범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러 왔다.” 고 하자 유괴범은 너무나 평안한 얼굴을 한 채 나는 용서받았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충격을 받고 교도소를 나와 쓰러지고 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 후 영화는 내내 신애의 방황을 묘사합니다.

 

이 영화는 죄 사함 받았다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의 믿음을 이렇게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 믿으면 다 용서 받았다.’ 면서 자기 죄에 대한 애통함도 없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는 고백 한 마디 없는 살인자, 그가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자기 죄를 눈물로 회개해본 적이 없이, 죄를 반복해 짓고 살면서 단순히 예수가 내 죄를 위해 죽었으니, 나는 용서 받았다.”는 교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뛰게 될 줄 아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곡해한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죄를 범하면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회개하지 않고 그냥 막가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가 그런 류의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339절에 보면 이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조롱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을 마치 꾸짖듯 모독하고 조롱합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힐 장면입니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가 메시야가 아니냐? 네가 구세주가 아니냐? 그런데 왜 죽느냐? 정말 메시야라면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자신처럼 십자가에 달렸으니 자신과 비슷하게 무슨 흉악한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함께 십자가를 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행악자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죗값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행악자를 보면서 죄의 결말, 죄의 보편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행악자가 달린 첫 번째 십자가를 천천히 바라봅시다. 그리고 좀 더 앞으로 나가봅시다. 그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면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났으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을 마감했습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죄인으로 죽었으니 하나님께 정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는 영원한 죽음, 즉 영벌에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행악자가 달린 십자가는 영원한 죽음의 십자가였습니다. 영원한 멸망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이 귀동냥으로 들은 것은 천만분의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마치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자신이 하나님 위에 있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을 믿을 바에 내 주먹을 믿겠다고 외쳐댑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을 기회가 생기는데도 일부러 피합니다. 지옥으로 치닫는 열차를 타고 있지만 천국의 기차로 갈아탈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짐에도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그냥 타고 지옥을 향해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고마운 나의 지인이, 지금 첫 번째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십시오. 추수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십자가 회개의 십자가

 

이 사람은 비록 흉악한 죄를 범했으나 회개한 자의 십자가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란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즉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참으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을 이 사람을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이 선물이 너무나 비싸서 도무지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란 것입니다. 값이 너무 비싸면 가격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화랑에서 고가로 값을 매겨 놓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1500년경에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그림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에는 '프라이스레스'(Priceless)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니까 값으로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쓸모없는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준 것이 바로 두 번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것도 죽는 순간에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사람을 죽이며 흉악범으로 잡힌 이 사람,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이 죄인도 구원해 주신 예수님, 그렇다면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을 보여준 십자가가 바로 두 번째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수 있는 죄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가 큽니다. 아무 공로 없는데 나를 사랑하신 주님, 보잘 것 없는데 어느 순간엔가 나를 부르신 주님, 자격이 없는데 자녀로 삼아주시고 기업을 이을 자로 세워주신 주님, 그 주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습니다.

 

(찬송가 3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아멘.

 

 

세 번째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구원의 십자가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 죽은 속죄(贖罪)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 십자가는 이제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의()를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존경과 영광과 찬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희생, 봉사, 사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드린 희생 제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감격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름을 확인시켜 준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일까요? 죄의 세력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의의 세력을 사랑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완성이며, 사명의 완성이며, 죄인을 위한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말과 이론이 아닙니다. 뜨거운 마음과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말과 이론이 아닌 우리를 향한 뜨거운 마음과 실천으로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은혜가 무엇인지도, 구원과 영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게 합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음지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많은 봉사자들, 그들이 이토록 희생하며 봉사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작 왓츠(Isaac Watts;1674-1748)는 찬송가 143장에서 4절과 5절에서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고 눈물의 찬송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이제 아무리 포악한 죄인이라도 저 십자가를 볼 때 마음이 녹아집니다. 아무리 패륜아들도 저 주님의 십자가를 대할 때 눈물로 되돌아서게 됩니다. 술주정뱅이도, 그리고 탕자도 저 십자가 앞에서 결단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살리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감격의 목이 메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세 십자가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주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나 같은 죄인이 어디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오늘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한 주간 동안 묵상하면서 새로운 주님과의 사랑을 이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예화 1) 렘브란트(Rembrandt, 1606-69)의 그림 중에 세 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es)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정중앙에는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우편에 두 강도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모여서 야유를 퍼붓는 군중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모퉁이 한구석에다가 그림자에 가려 간신히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 그려 넣었습니다. 미술가들은 이 사람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렘브란트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그날 폭도들과 함께 동참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때 그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달린 강도들처럼 천국이냐 지옥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입장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영에 속한 사람 (211-3)

 

이 시간에 다시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굴까요? 회개한 사람입니다. 15: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하셨습니다.

 

진실로 회개하면 육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8: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영에 속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온전히 영에 속하셔서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삶의 기본이 있습니다.

 

1.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1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여기 봇물이란 농사를 위한 관계시설을 말합니다. 어느 나라도 그렇지만 특별히 강우량이 적은 팔레스틴에서 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보의 물은 관리자에 의해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왕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4:17처럼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막강한 권세를 가진 왕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은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즉 정권을 세우시고 폐하심에서 시작하여 위가 견고하거나 약하거나 기타 어떤 무엇을 하는데 있어서까지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정치란 인간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지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바벨론 왕과 같이 막강한 왕도 그랬는데 일반 왕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에스더와 같이 기도 많이 하고 나갔더니 왕의 마음이 달라져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소원이 뭐냐고 호의를 베풀죠?, 일종의 허세이지만 호의에서 나온 허세니까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은 자신이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도구임을 인식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때마다 돕는 손길이 하늘에서 나타나 돕습니다.

 

이처럼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다스리시는 성령의 생명이 흐릅니다. 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어떻게 성령 따라 삽니까?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이 잘되어야 합니다. 술 취하면 그만큼 술에 사로잡히듯 성령 충만하면 자동으로 성령 따라 살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봇물이 흘러가려면 보에 물이 없이 어떻게 흘러갑니까? 일단은 보에 물을 충분히 채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게으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의 보에 성령이 충만하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봇물처럼 흘러갈 수 있습니다.

 

2. 육신적인 것을 분별해 내야 합니다.

 

2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이 말씀은 잠16:2에도 나오는 교훈으로 여호와의 판단은 정확하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행동이나 혹은 일의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인간과는 달리 내적동기와 목적 등 인간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내면적인 요인을 보시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좋아도 하나님 보실 때는 아니다 일 수 있습니다. 착한 일 많이 하고 봉사 잘하면 사람들은 참 잘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성령을 따라 신앙으로 하는지 아니면 육을 따라 내 기분 내 열심 자기 이름으로 하는지 다 아십니다.

 

성도는 지상에 있는 동안 늘 영과 육이라는 두 마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베드로 보세요. 하나님께 속해서 신령한 말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육에 속한 말을 해서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책망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행위가 어디에 속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기본입니다. 분별해 내서 처리하지 않으면 영적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선이 악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감정으로 성급하거나 욱하는 마음은 육에 속한 것입니다. 칭찬을 받았을 때 들뜨거나 우쭐하는 것도 육에서 나온 마음입니다. 무슨 일이 있다고 낙심하고 우울하고 그것도 육신의 감정입니다. 그럼 어떻게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을 분별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4:12-13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이처럼 말씀으로 영의 것과 육의 것을 분별합니다.

 

요일2: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딤후1: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육에서 난 마음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든지 염려 근심 미움 상처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건 두 말할 것이 없이 육에서 난 것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3. 겸손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3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공의와 정의란 바르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공의와 정의는 성경 전반에 걸쳐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절대가치입니다. 그리고 이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서 나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잖아요? 그 말씀이 3절 말씀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조금 어렵게 쓰였을 뿐 그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이 말씀이고, 행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즉 하나님과 그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겸손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2:3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했습니다. 이 자세가 영에 속한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겸손과 순종이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지게 하는 귀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생활의 기분은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공중에 든 자동차와 같이 아무리 핸들을 조작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마치 에서가 받는 것과 같이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27:39) 노력해도 은혜와 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 이 말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예레미야도 자신을 아이라고 낮추었고(1:6),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같다고 했고(18:27), 바울 역시 자신을 만삭되지 못해 태어난 자, 죄인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일 때마다 옛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 때를 회고하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나그네 되었을 때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과거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뿌리입니다. 이 뿌리가 견고해야 믿음이 견고히 섭니다. 이 뿌리가 없으면 감사도 감격도 찬양도 겸손도 없어요. 이 겸손의 기초를 잃지 마세요. 이 기초에 설 때만이 진정한 찬양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겸손의 기초에 설 때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베풀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에 설 뿐 아니라 겸손히 엎드릴 때 죄악은 안개가 사라지듯이 사라지고 진정한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 받아 우리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고 또 사모하는 자에게 더 충만히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 기본에 서십시다. 우리 모두 우리는 본래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았다는 감격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고 육신에 속한 죄악을 떨어버려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기쁘실 영에 속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어둠을 빛으로 밝힌 예수님 요한복음 181-11

 

인디언들의 구전동화 중에 빛과 어두움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해와 별, 그리고 어두움이 살았다고 합니다. 별은 해와도 만날 수 있고, 어두움과도 만날 수 있었지만, 해와 어두움은 서로를 알지 못했습니다. 별은 해에게 어두움을 알려주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해는 결코 어두움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빛이 전혀 없는 밤, 깜깜한 동굴에서도 해가 들어가만 어둠은 곧 환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별은 해에게 어두움을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별은 어두움은 곧, 빛이 없는 상태일 뿐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빛보다 어두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을 때 나타나는 상태일 뿐이었습니다. 어두움은 진리의 빛을 모를 때 생깁니다. 빛이 생길 때 어두움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에 어두움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 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 실망하기보다 그 속에서 빛을 비추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로 그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워낙 어두워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빛이신 예수님을 몰라보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는 음모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은 잡히실 각오를 하신 듯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가끔 제자들과 기도 모임을 갖는 곳이기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는 곳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곧 되어질 일(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계실 곳을 노출시키신 것입니다.

 

1. 십자가을 향하는 기도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까지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말은 기름을 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자신을 고통의 기름틀에 집어넣고 마치 기름을 짜듯 자신을 쥐어짜는 고난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예수님은 이런 간절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하게 기도했던지 이마에서 흘린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22:44). 왜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까? 그 목적은 단 한 가지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어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며칠 전부터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 밑에다 실내화 한 짝을 던져놓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엄마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는 거니?” 그때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교회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으면 아침에 일어나 그 실내화를 찾으려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게 되는데, 바로 그때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무릎 꿇고 기도하기 위해 그런 거예요.” 한 번 시도해 볼만한 좋은 가르침입니다.

 

기도에는 치유와 회복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누구라도 다 할 수가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누가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그 역사하는 힘에 강도가 다를 뿐입니다. C.S.루이스가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쁨 속에서 속삭이시고 우리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우리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확성기다.” 그리고 또 한 마디 그 분이 여러분을 기다리신다.”라고 했습니다. Tomas Tenney는 그의 기도서에서 주님,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제 영혼이 아려옵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대한 그런 깊은 영혼의 울림이 있습니까?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 했는데 실상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흡이 끊겼다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시고 습관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예수님의 기도 습관을 막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리려 십자가의 고난은 더욱 강렬하게 기도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끈질긴 기도는 빛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어두움의 사람들

 

그런 반면에 빛을 가로막고 어둠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주님을 팔리라는 지적을 받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습니다. 유다는 그 길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왔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는 곳이라 유다가 알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야 유다를 어두움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유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자기의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의 혁명을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출세시키고 세상의 권력을 나누어주고 부귀영화의 야망을 채워주기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자기의 기대를 접었습니다. 이참에 차라리 돈 몇 푼이라도 챙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여튼 유다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주님을 배신하고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왔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입장입니까? 빛의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어둠의 편에 있습니까? 가족과 가정의 행복을 위한 편입니까? 육신의 건강과 안일을 위한 편입니까?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한 편입니까? 좋습니다. 가족과 가정, 건강, 행복, 부귀영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런 것은 세상 나라에 속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나라든지 돈이나 사람의 힘으로, 권력으로, 칼이나 창 같은 병기로는 절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돈이나 권력과 사람 그리고 창칼 같은 무기가 무슨 힘이 있는 줄 아십니까? 사실 엄격히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런 것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잡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나사렛 예수라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예수님께서 내로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유다를 비롯한 그 모든 사람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비록 권력의 힘을 뒤에 업고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으나, 이 한마디에 겁을 먹고 땅바닥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권력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어떤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돈이나 병기를 가지고는 절대로 행복해지거나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 합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것으로 무엇을 이루고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직도 어둠에 빠져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보고 제자들은 하나같이 긴장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것저것 생각도 안 해보고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가까이에 있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에 모두 싸우려는 자세를 취하며 주위가 살벌하게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자칫 잘 못하면 서로 피를 보는 살상의 사건이 발생하게 될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빛을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혈기를 부린다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혈기는 감정의 발로입니다. 감정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그 아픔이 오래 갑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혈기로는 절대로 빛의 세계를 이루지 못합니다. 때로 교회를 위한다는 핑계로, 복음을 전한다는 구실로 혈기를 앞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2:13).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흥분하여 검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칼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52에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세계는 칼로 이루지 못합니다. 빛의 세계는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혈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를 위하여 칼과 무기, 돈과 혈기 그리고 감정을 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드립니다.

 

3. 빛의 세계를 위하여

 

그러면 빛의 세계는 무엇으로 됩니까? 본문 1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빛의 세계는 고난을 잔을 마심으로 만들어집니다. 고난의 잔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손해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양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힘든 일을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감정을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남을 이해하고 내가 양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서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가 있는 곳에 빛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은 캄캄하게 어두웠습니다. 그 어둠을 틈타 예수를 파는 자 유다와 로마의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는 아랫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유다는 돈에 눈이 어두워졌고, 군대들은 상관의 명령에 어두워졌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는 아랫사람들은 교권에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감정에 혈기를 부려 잠시나마 어두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핏방울이 떨어지도록 기도하여 어둠을 빛으로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어둠을 버리고 빛 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력이나 사람의 힘이나 돈에 의존하지 맙시다. 감정에 치우치거나 혈기를 부리지 맙시다. 기도하며 고난의 잔을 마십시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시다. 희생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빛의 나라가 성도의 심령에, 성도의 가정에, 우리 교회에 세워질 줄 믿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성도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에 빛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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