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붙잡힌 사람 43:1-7, 3:11-16

신약 본문 12절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님께 잡힌바 되어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붙잡힌 사람은 이사야 본문 1절의 말씀처럼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는 몇 가지 근거는, 먼저,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니라.’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은 다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존재라 해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지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도 아시고 우리의 아픔도 다 아시고 도우십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1절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했습니다. 세계 많은 나라 중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해 세계 열방을 구원하시고자 하셨고, 세상에 허다한 사람들 중에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 주의 백성 삼으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했는데, 여기 구속 의 히브리어 가알 은 대가를 지불하고 무엇을 살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출애굽 할 때 애굽의 모든 장자를 희생시키면서 노예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3절에는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다하셨고, 4절에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를 통해 죄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셨고 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벧전1:19, 고전6:19-20). 이러한 근거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께 붙잡힌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 붙잡힌 사람은,

 

1.주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구약 본문 4절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이라고 했습니다. 선민인 유대 백성들은 죄와 무지로 악을 행하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고 있는 상황 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처럼, 비천한 사람들처럼, 의지할 것 없는 소망 없는 불쌍한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보배롭고 존귀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잡힌 자이면서도 때로 고난 중에 있거나, 실패하여 어려움 중에 있거나, 질병으로 고통 중에 처할 때가 있지만 그런 중에도 여전히 주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며 사랑받는 자 중에 하나로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낡고 보잘 것 없는 바이올린 하나가 경매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이 1실링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방안에 폭소가 일어나더니 그 값으로 그에게 주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경매인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말했습니다. "누가 이 바이올린으로 한번 연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방안에 침묵이 흐른 뒤 한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노인은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몇 번 활을 시험해 음을 맞추고 나서 그 낡은 악기로 연주를 시작할 때 절묘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끝났을 때 방안은 감동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다시 경매인은 바이올린을 들고 값을 물었습니다. "5파운드" "10파운드" 결국 "100파운드"로 낙찰되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그것은 전과 다름없는 바이올린이었는데---. 그 낡은 바이올린은 대가의 연주에 의해 명품으로 바꾸어졌던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낡은 바이올린처럼 우리들이 쓸모없고 무능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명품 인생으로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걸레는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걸레이고, 보석은 아무리 진흙탕에 묻혀 있어도 보석입니다. 주님께 붙잡혀 보배로운 자가 되면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주님이 보실 때는 여전히 보배롭고 존귀한 자가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는 배우지도 못했고, 출신, 신분, 직업 어느 하나 사람들 앞에 변변히 내 놓을 만한 것이 없었고, 거기다 허물도 많았던 자였습니다. 그는 다혈질의 사람으로 혈기라는 허물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무리들이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는 검을 빼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향해 내려치므로 귀가 잘라졌는데, 주님은 귀를 고쳐주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얼마 후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고 하시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16;23)라고 말했다가 예수님께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16;24)라고 책망을 들은 자였고, 주님께서 잡혀가실 때 멀찍이 따라가다가 예수님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 했어도 주님은 그를 보배롭게 여겨 그를 통해 일시에 3천명이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오기도 하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그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병이 낫는 귀한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김 받고 사랑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 위해 바른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을 모르고 목표를 바르게 가지지 못하면 인생을 그르치게 되어 후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따르게 됩니다. 모든 물건에는 그것을 만든 목적이 있습니다. 비행기, 자동차, 시계, 과도 등 모두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그런데 과도로 과일을 깍지 않고 사람을 살상하게 되면 살인 무기가 되는 것처럼 사람도 목적이 잘 못되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타락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생들을 통해 기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구약 본문 7절에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는 목적을 잘 못 알고 살다가 주님을 만난 후 인생의 목적을 바로 알고 먹든 마시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고, 살든지 죽든지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하면서 본문 12-14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뒤에 있는 것을 잊고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이기 때문에 목적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목적지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소년 시절, 그의 가정교사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고 합니다. 선생은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왕자께서는 임금이 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희랍을 통일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소아시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뒤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점령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손에 넣겠습니다." "인도 점령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 때쯤이면 저도 죽겠죠." 스승은 왕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멀리 돌아다니다 죽으나, 지금 죽어버리나 별로 큰 차이가 없겠습니다."이 이야기는 가치 없는 것에 목표를 두는 인생은 가치 없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의 자기의 목표대로 왕이 되어 세상을 정복했으나 33세에 요절했는데, 그의 유언대로 자기의 빈 두 손을 관 밖으로 내어놓아 백성들에게 인생의 허무를 알게 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목표가 헛되면 인생도 헛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아버지 집에 가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뚜렷해야 하는 합니다. 바울은 경주자와 같이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갔기에 죽음을 앞두고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바른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살다가 바울처럼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늘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하고 담대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두려움은 성도의 큰 장애물이고, 암초와도 같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에서는 기도와 명상도 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교육)이 들려오지도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정탐 후 두려움 때문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이사야 42장에 이스라엘이 죄와 무지로 인하여 덫에 걸리고, 노략질을 당하며 고난과 어려움들로 두려움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사야 43장 초두에 하나님은 그러나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강력하게 권면하셨습니다. 주님은 큰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서신서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 박해를 받고 큰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주께서 밤에 환상가운데 말씀 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8:9)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담대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두려운 일이 많은 현실에서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택해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고 사랑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디언 최초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육학 박사가 된 바르텟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언청이로 태어나 부모의 학대와 형제의 멸시를 받으며, 친구들과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동네의 개와 쥐들과 함께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을 잘 믿는 백인 여자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여자는 소년을 데려다가 돌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외로움은 서서히 물러가고 새로운 사랑이 이 아이를 감싸게 되었습니다. 무관심과 멸시천대를 받던 이 아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장 큰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과 감격을 느낄 수 있었던 때는 학위를 받았을 때가 아니었고, 좋은 옷을 입게 되었을 때도 아니었고, 내가 쓰레기 더미에 있을 때 백인 아줌마가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 주었을 때라고 고백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이 그를 담대하게 했고, 새로운 인생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어떤 역경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 중에서 귀환해야 할 과제 앞에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과 불 가운데 지날 때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신앙 때문에 풀무 불에 던져졌어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어 건지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 위기를 만날 때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그를 담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7절에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께 붙잡힌 성도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하신 자들입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의 명예를 드러내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어느 초등학생이 종업식을 마치고 어머니에게 와서 "엄마는 음악가가 좋아, 아니면 미술가가 좋아?"라고 묻자 엄마는 음악가도 좋고, 미술가도 다 좋단다.”라고 대답하자 책가방 속에서 통지표를 내어놓습니다. 음악: 가 미술: . 하하^^공부 못해도 주님께 붙잡히면 영광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소유 된 백성임을 믿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하고 담대한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께 붙잡힌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께 붙잡힌 사람은,

.주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 위해 바른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늘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하고 담대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아멘.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사순절}신자의 삶에 원리/빌1:12-26

여러분, 하루 하루를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십니까? 하루를 살고 잠자리에 들 때 하루를 돌 아보면 후회 없는 삶을 사셨습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부족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늘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써보낸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 은 주안에서 기쁨을 가지고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4장으로 된 짧은 성경 입니다. 그런데 기쁨이라는 말이 16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는 가목에 있 을 때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쁨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 신자의 삶은 항상 기뻐하며 살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 야 합니다. 미국 프린스톤 대학교 총장을 지낸 죠나단 에드워드는 평생토록 다음과 같은 생활원리를 따 라 살았다고 합니다. "①교만치 말자. ②복수하지 말자. ③범사에 감사하고 살자. ④임종에도 결코 후회치 않을 일을 하자."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철학이 있고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신자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삶의 원칙이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살펴보고 우리도 삶 의 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2-18).

사도 바울이 빌리보서를 쓸 당시는 옥중에 갇힌 몸이지만 자신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 보가 된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빌 1 : 12).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다가 옥중에 갇 혔을 때 원망이나 시비에 빠지지 않고 좌절과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고난 받음으로 도 리어 예수님을 전하는 효과가 있었음을 생각하고 기뻐했다는 것은 바울이 얼마나 예수님 중 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난이 많은 믿음의 형제에게 용기가 되어서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 씀을 전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빌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 다. 어떤 사람은 순전한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나 어찌되 었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진 것을 기쁘게 여기고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순전치 못한 생각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 이 있었으나 바울은 주의 복음이 전해짐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을 보면 자신이 비난을 당 하고 시기와 질투를 당하여도 복음이 전해짐을 기뻐함을 그가 얼마나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 : 16절에 말한 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으로 생각한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 검상교회 성도의 삶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으며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자신에 게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0여년 전 미국의 무디 선생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던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무 디는 하루종일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버스를 기다리던 그 사람에게도 "예수 믿으시 오." 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하고 서 있던 사람 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퉁명스럽게 무디는 "당신이 나에게 화내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은 믿 어야 합니다." 하고 자꾸 강조했습니다. "당신,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요." 하고 그가 묻 자. 무디는 "그것이 내 직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서 있던 그 사람이 "아. 당신 이 바로 무디 선생이시군요." 하더랍니다. 이렇게. 무디를 알아볼 정도로 그는 어디에서나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사람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무 식하니 그만두고. 저 사람은 유식해서 곤란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전도할 상대가 없습니다. 반대하는 자나 무식한 자나 지식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가릴 것이 없습 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형상. 즉 속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므로 외형적인 것에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다 빚진 자라는 태도를 가 져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복음을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누구에게나 빚 을 졌기에 이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보상 없이 당연한 일로써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 니다. 전도는 직접전도와 간접전도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전도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 해서 노방전도가 있습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 집집마다 다니며 하는 전도,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는 것등 직접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간접전도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빛 과 소금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때 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삶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9-21).

바울 사도는 사나 죽으나 즐거우나 고난이 오거나 예수님을 존귀히 되게 하려고 산 사람입 니다. 빌 1 : 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 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 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고전 6 :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했 습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가로 산 것이니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라. 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소요리 문답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사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는 길이 무엇인가? ①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②하나님을 제일로 경건히 섬겨야 합니다. ③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④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봉사와 섬김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삶 이란 주님 영광을 들어내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도는 말하기를 "현대인의 정신적인 최대의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에 성실할 때 주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계에 서 가장 빠른 여자" 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 라는 선수입니다. "그리피스 조이너" 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 운데 미국의 NBC방송의 한 기자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녀 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 으로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인생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인생의 살맛 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복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립니까? 학생들은 공부해서 다 일등하고 서울대에 수석 으로 합격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니까? 여러분의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번창해서 돈을 많이 하나님께 바쳐야 영광이 됩니까? 도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세상에서는 무엇이든지 잘되면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잘못되면 조상을 탓합니다. 심지어 조상의 묘까지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 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검상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은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24-26).

사도 바울은 현재의 삶보다는 천국의 삶을 더 소원하였습니다(빌 1:23). 그는 사는 것도 그 리스도요 죽음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의 사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다고 여겨진 까 닭에 삶을 바랐고 또한 살게 될 줄로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개인의 유익이나 이해관계로 처신하지 아니하고 오직 교회를 위하여 도움이 되고 유 익을 위해서 살았고 그와 같이 살았습니다(행 20 : 20-21).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도 있고 거침돌이 되는 자도 있습니 다. 우리는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들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하고 남을 위 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학자 본 훼퍼는 신자는 남을 위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님처럼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합니 다. 그렇게 살 때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교회가 은혜롭고 자기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주변에 술집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시끄럽고 풍기가 문란해서 교인들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 술집이 불이라도 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오는데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그 술집에 벼락이 느닷없이 때려서 그만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난 후 술집 사람이 교회에서 불이 나라고 기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법원에 고소를 했습니다. 교인들과 술집사람이 법정에 서는데 재판관이 교인들에게 묻 기를 "정말 술집이 불타기를 기도했습니까?" 했더니 "천만에요. 우리는 기도를 전혀 안했습 니다." 재판관이 술집 사람에게 물으니 "저 사람들이 기도해서 불탔습니다. 정말입니다." 라 고 답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재판관이 빙그레 웃으며 판결을 내렸습니다. "교인은 믿음이 없고 술집 주인은 믿음이 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통해서 살고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고 믿음이 커가고 교회를 통해서 하 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의 양식의 창고입니다. 축복의 보고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부흥하도록 기도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 교회를 여러분의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 께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 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 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 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 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 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 창조' 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 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 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자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 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셨 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라고 했습니 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말 중에 "사람이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 다." 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일정한 나이에 다다르면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 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이야말로 우리의 작품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신자의 삶의 원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고 주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살며 교회 유익을 위해 봉사하고 섬 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책임지시고 도와 주시고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삼하22:20-36, 4:11-13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책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화시킨 젠 브리커(Jen Bricker)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다리 없이 세상에 태어난 그녀를 보고 부모는 큰 충격을 받고 입양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입양된 가정에 한 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 규칙은 작고 귀여운 소녀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이 당연함을 믿음으로 입증해 보였습니다. 인생에서 우연 할 수 없다라는 단어를 지워버릴 때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젠 브리커는 강인한 두 팔로 공중에 매달려 공연을 펼치는 공중곡예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워 텀블링 주 챔피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동기를 부여하였습니다. 서커스 순회공연을 하였고, TV 프로그램과 쇼에 출연하였습니다. 전 세계를 다니며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간증하며 장애의 한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믿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누리는 한계가 없는 삶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장애나 어려움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구약 본문 30절에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여기의 주를 의뢰하고는 원어로 베카인데 하나님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었기에 적군을 향해 돌진할 수 있었다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는 적을 용감하게 물리치는 모습입니다. 믿음은 능력이기에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대적 앞에 담대하게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운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곰과 사자를 찢고, 골리앗을 이기고, 적의 많은 군대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벽을 뛰어넘어 승리했습니다.
신약 본문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울은 자기 직무를 수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옥에 갇혀 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빌1:12,13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므로 복음전파가 중단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었으나 로마 황제의 시위대가 관리하는 감옥에 갇혀서 늘 그를 감시하기 위해 두 사람이 붙어 있었다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고, 드디어 시위대원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감옥에 갇혀버려서 아무 것도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그곳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을 훌륭하게 감당해 냈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면 감옥도 얼마든지 선교지가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앞에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지만 그 장애물 때문에 아무 것도 못 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Yes’는 말씀을 삶으로 증명한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의 저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제나 Yes로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책에서 강조합니다.
스탠리 존스 선교사에게 1971 12 8일 새벽은 인생 대반전의 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평생 전했던 말씀을 삶에서, 선교 현장에서 증명해야 할 사명이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50년이 넘게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6만 번의 설교를 했지만 뇌졸중으로 인해 눈의 초점이 달라져 책을 읽을 수 없으며, 오른손은 마비되어 글을 쓸 수 없고 혼자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하나님, 저를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묻지 않았고, 도리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사한 것은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승리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미국 최고의 의사들은 당신은 이제 걸을 수 없다고 말했고, 인도 최고의 안과 전문의들도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걱정이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삶의 어떠한 순간에도 해답이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믿음으로 매시 정각마다 기도했고, 일주일 금식 후에 걷기 훈련을 시작했고, 가족들은 옆에서 그때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외쳤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스스로 걷기 시작하여 1를 혼자 걸었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설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인도 선교지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14개월 동안 50여 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스탠리 존스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당신의 삶이 조각조각 부서졌다면, 그 조각들을 모아 하나님께 드려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해질녘을 새벽녘으로 바꾸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는 자는 인생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임을 믿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낙심치 않습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벽을 뛰어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행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높고 넓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십니다.
구약 본문 34절에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보입니다. 남산 타워, 63빌딩이나 롯데 타워 전망대에 올라가 보면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강과 숲과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보면 커 보이던 건물도 작게 보입니다. 성도가 신앙의 높은 경지에 오르면 똑 같은 문제도 달리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삼층 천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박해 받는 것과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가 안았고, 주와 복음위해 살다가 순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면류관과 영광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을 알고 박해 중에도 담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이 높은 은혜의 세계를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겨 시험에 들게 되고, 작은 것에도 상처를 받게 되며, 작은 이익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아웅다웅 다투며 살아갑니다.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게 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 악에 받친 사람들로부터 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의 눈이 열려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을 보면서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 났습니다.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는 무리들을 위해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신 것처럼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답게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신앙의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성도가 들어가야 할 문은 좁은 문이요, 가는 길은 협착한 길이라고 하셨지만, 그 길의 결국은 구원이요, 넓은 곳입니다. 23편의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구절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넓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있고, 목자의 인도를 받아 배불리 먹고 쉴 수 있는 곳, 부족함이 없는 곳, 안전한 곳, 참 평화가 있고, 자유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을 인도하여 결국 이렇게 너무 좋고 은혜로운 곳으로 인도하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복음송가 가운데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 마다 예수인도 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하는 찬양이 있는데, 우리 주님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주님께서 예비하신 곳에 이르러 마침내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답고 놀라운 광활한 하늘 영광의 세계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환란을 통과 한 후 높고 넓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3.일체의 비결을 가진 자로 살게 하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거하는 자는 험난한 세상에 살면서도 일체의 비결을 가진 자로 살게 됩니다.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신약 본문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했습니다. 논어에 보면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기란 그래도 쉬운 편이지만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기란 어렵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가난하면 불평하고 원망하기 쉽고, 또 부자가 되고 권력을 얻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굴은 잠언30:7-9에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좋은 일만 생기서 평생을 여유롭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살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성공 할 때가 있으면 실패 할 때가 있으며, 일어 설 때가 있는가 하면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삶은 믿는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믿는 사람은 성공만 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실패만 하여야 할 터인데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잘 믿는 자도 실패 할 수 있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데도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과 실패만 가지고는 그의 믿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사는 믿음의 사람은 환경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나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능히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며, 모든 것을 이겨내며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시련의 환경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언젠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서울대학교 화공과를 졸업하고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던 26살의 촉망받던 학생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양복점을 경영하는 아버지가 사업에 어려움으로 빚에 시달리자 아들에게 학교 휴학을 하고 집안일을 돕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뒤 아들은 자기의 레이저 프린트기라도 팔아서 아버지의 빚 갚는데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부모가 갑자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것이 자식으로서는 마음이 매우 아팠을 것이고 공부를 중단한다는 것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1,20십만 원도 제대로 받지 못할 프린트기를 남기고 자기 목숨을 끊는 것이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겠습니까? 그에게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사는 자는 아무리 큰 재물이 생겨도, 아무리 높은 권세나 명예가 생겨도 그것 때문에 교만하거나 세상으로 빠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을 알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에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게 됩니다. 이 모습이 일체의 비결을 가지고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가진 자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사는 믿음의 사람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높고 넓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십니다.
.일체의 비결을 가진 자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빌립보서 317-21

 

18절에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와는 반대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리와는 반대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19).

 

나를 본받아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에게 자신을 살아 있는 모본으로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생활에서 드러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는 자신을 본받고, 그리고 자신을 본받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본보기를 바르게 삼고 본을 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본받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제시해준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 살펴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인지 말씀하신 대로 사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바른 본보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자신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고 지금도 완성을 향해서 가고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얘기하시고, 또 자신을 본받아 행하는 사람, 즉 사도 바울이 보여준 삶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219-30절에 나오는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일 것임)을 눈여겨보고 본받아 살라고 하십니다. ‘눈여겨보라는 말은 관찰하다, 자세히 살피다는 의미입니다. 자세히 살펴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들이 행하는 것처럼 함께 행하라, 그들을 본받아 살라는 뜻입니다.

 

참 어려운 얘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나를 본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여기서는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살아 있는 본보기로 자신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산 본보기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개혁 교회를 바르게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개혁 교회의 본보기를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은 이것이다, 이런 본보기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보기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이단의 교주를 많이 보게 됩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신처럼 군림합니다. 통일교의 문선명 같은 사람.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따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교주로 받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의미는 첫째로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따르라는 뜻이요, 둘째는 이들이 달려가고 있는 삶의 목표, 그 방향을 본받으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111절을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도 바울이 썼습니다. 지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본받아 달려가고 있는데, 그것을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첫째로 고린도전서 1031절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삶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둘째로 고린도전서 1032-33절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셨습니다.(525)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본받아 이런 삶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고 있는데, 이런 삶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어떤 삶을 본받으라는 뜻일까요? 빌립보서 전체 문맥을 보면 25절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38절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312-14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위해서 달려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이런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는 이런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온전히 이루었다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 중심, 삶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

 

그 다음 바울은 교회에서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따르지 말아야 할 본보기의 사람들입니다.

 

18절을 봅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여러 번 말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경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행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할뿐만 아니라 할례도 행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 이론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의 정신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빌립보서 25-11절에 십자가의 정신이 무엇인지 나오지요. ‘오직 겸손이 무엇인지 말씀하셨는데, 이런 길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삶의 원리를 거슬러서 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께서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가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에 속합니까? 어떤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갑니까? 19절에 말씀해주십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의 마침, 종착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멸망입니다. 그러니까 그 길이 멸망으로 가는 길인지 생명으로 가는 길인지 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점점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멸망으로 가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 한 때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멸망으로 갑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인 악한 행위의 열매인 멸망을 거둘 것입니다.

 

 

 

사람이 배나 비행기를 탈 때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타면 죽는지 사는지 생각하고 타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가는지 모르겠어요. 당장 눈에 보이는 손에 주어지는 어떤 이익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그들의 신()은 배(stomach. 사람의 배, )”라고 합니다. 신처럼 숭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근본으로 가면 욕심입니다. 이 사람들은 욕심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욕심이 근본에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그 당시에 로마 사회에 탐식의 문화가 발달했는데 여기에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얻을 이득 때문에 그 길을 갑니다. 이것도 자신이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 곧 방종입니다.

 

세 번째 내용은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삽니다. ‘부끄러운 것’(수치스러운 것)은 구약에서 우상과 관계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1113. 나훔 35). 하나님이 없이 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부도덕한 행동에도 쓰입니다(126-27). 이런 부끄러운 것은 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선전하고 과시하고 다닙니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해야 하는데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하고 아닌 것은 옳다고 하면 이것은 부끄러운 짓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자랑삼아 합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이 없이 사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처럼 자랑삼아서 얘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은 이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땅의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을 집중해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쏟고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서 삽니다.

 

욕심과 헛된 영광과 이 세상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실 만큼 주님께서 사랑하신 교회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진정으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날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사도 바울은 자신의 욕심대로 살고 땅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본받지 말라고 지적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그들을 따라서는 안 되는지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빌립보라는 지역에는 로마의 퇴역 장교들이 살고 있었고, 빌립보의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영광스러운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시민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어떤 사람들입니까? 20절에 계속 이어서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거기하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계시는 곳이 하늘입니다(321). 이 하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즉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 땅의 일에 집착해서 살지 말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의 시민답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영광스러움을 보아야 합니다. 21절을 봅시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늘과 온 땅의 통치권을 가진 분이십니다. 이런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베푸실 은혜의 역사를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의미합니다.

 

낮은 몸은 죄로 인해서 낮아진 상태에 처한 몸입니다.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몸으로 연약함이 있고(10314-16) 질병과 죽음을 경험해야 할 몸입니다. 이 몸을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부활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할 것입니다. 다시는 죽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하고 다시는 늙음이나 병드는 것이 없는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부활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이 미래는 현재의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부활이라는 미래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부활하신 주님과 거룩한 교제를 누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3절을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주님의 계신 그대로 볼 것에 대한 소망, 2)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땅의 일에 생각을 집중하지 말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주님을 만날 준비를 잘 하는 것입니다. 쉽게, 내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따라서 삽니다. 주님께서 맡겨 놓으신 그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면서 저 앞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 하라 ( 1 27-30)

 

새해 신년 예배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에게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 충만함의 은혜와모는 유혹과 시험을 거뜬하게 물리쳐 주시는 우리 주님의 승리의 권세가 한 해 동안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사소한 일에도 감사하시며가족 간에 화목을 이루시고하늘에서 주시는 평안으로 늘 여유로운 삶이되시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2023년도에 새해에 어떤 목표어떤 소망을 지니고 있으십니까이제는 뭐 그다지 특별한 소망은 없고그저 온 가족이 건강하고화목하고무탈 했으면 하는 바람이 제일 크실 겁니다.

 

소소한 다른 바람 들이 있다면일과 직장에 관해서는 스트레스 덜 받고 지낼 수 있기를재정과 물질에 관해서는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아지기를사람과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다툼이 없는 원만한 교제가 일어나기를자녀들의 교육이 적정하게 성과를 거두기를 바라실 겁니다대개 이 정도 소원들이 우리들의 마음에 집중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모든 소망과 소원들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고 해도 작년 보다 나은 올해가 되기를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마음이실 겁니다.

 

그러면 믿음 생활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제가 여러분에게 한 해의 신앙생활을 권면해 드린다면늘 강조해 드린 것처럼 신앙의 기본을 지켜 가자라는 말씀을 또 한 번 드립니다기본이 잘 지켜지면 곧 그 것이 실력이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구호가 라틴어로 ‘아드 폰테스(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back towards an origin’, 기독교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며구체적으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는 구호였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성경(말씀), 기본 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당연히 예수님이죠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인나의 왕나의 구원자라고 수 백 수 천 번 고백하시지 않았습니까주인의 말을 안 듣고 왕의 말을 안 듣고 살아간다는 것은 집을 나가 따로 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고아와 같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고아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어찌 종(일꾼)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왕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어찌 백성으로 살아가겠습니까구원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살아가겠습니까기본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실상은 기본이 곧 전부입니다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예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만이 우리 모두의 새해 소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도 신앙의 기본을 많이 강조합니다지금 까지 수십 번은 말씀 드렸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겁니다제가 강조하는 신앙의 기본은 예배기도말씀감사찬양 이렇게 다섯 가지입니다이 외에 봉사헌신전도 등 여러 가지 추가 사항들이 있지만이런 것들은 신앙의 기본이 잘 되면성령님이 감동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연쇄적으로 일어 납니다.

 

신년 첫째 주의 설교 제목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 하라입니다제목 자체만으로 이미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충분히 담겨 있습니다오직 그리스도오직 복음오직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것이 신앙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신년 첫 주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나누실 때한 해 동안 내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고무엇을 절제해야 하고무엇을 감사하고무엇을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성령이 주시는 감동대로 결단하시고실천으로 나아가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로에베소서골로새서빌레몬서와 더불어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빌립보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기쁨입니다그래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가장 첫 번째 되는 기쁨의 제목은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히 잘 참여하여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적대자들은 바울이 감옥에 있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려고 그리스도에 대해 겉치레(거짓)로 나쁜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역효과를 나았습니다바울을 공격하려는 자들이 알아서 노이즈 마케팅을 해 준 셈입니다.

 

바울은 감옥 밖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전해 듣고서, “참이나 거짓이나 무엇으로 말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참으로 기쁘고 또 기쁘다”(1:18) 라고 말했습니다이것에 더해서 바울은 자신을 싫어하는 자들의 모함과 공격으로 인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도 이런 말씀을 남겨주었습니다. 1 20, 21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20.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살든지 죽든지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21. 나에게는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아멘.

 

21절을 우리가 가진 성경으로는 읽으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내 기쁨~” 이라는 찬양이 이 구절에서 나온 가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면 된다내가 죽는다고 하여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니 오히려 죽음이 유익이다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선언입니다이런 존귀한 말씀을 듣는 우리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바울처럼 되라는 부담감이 아니라 바울이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그 마음믿음그리고 정신을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를 지닌 똑 같은 사람입니다그런데 그는 우리와 달리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자신의 죽음 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어 살아 역사 하고 있는 것을 기뻐했습니다그것도 감옥에 갇힌 몸으로 기뻐했습니다죽음 앞에서 낙심은커녕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그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오늘 본문 첫 구절인 27절 앞부분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아멘.

 

뜬금없이무작정 이렇게 실천 하라고 엄포를 놓는 권면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이 먼저 실천함을 바탕으로 내 놓은 권면입니다마치 예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미리 몸으로 모범을 다 보여 주신 후에,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시는 것과 너무나 닮은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오직” 이라는 말을 덧 붙여 한 번 더 굳세게 강조를 했습니다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하는 것일까요한 가지만 생각하십시오.

 

1. “내 안에 사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바울이 고백한 그대로 우리도 고백하며 살아가시면 됩니다.

 

이 고백 안에는 내가 2023년 한 해, 1 365일 그리스도를 인식하며의식하며 살 수 있도록 동행을 요청하는 호소이기도 합니다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는 인식의식은 곧 신앙의 기본을 지켜가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고 계시는 인식과 의식을 순간순간 놓치지 않는 다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도록 인도해 주실 겁니다.

 

      가장 먼저죄의 문제가 철저하게 노출이 됩니다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전부 드러나게 하셔서 회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하십니다죄가 얼마나 더럽고 내 영혼을 망가트리는지 분별하게 하십니다죄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시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물리치게 하십니다.

 

      마음의 생각과 입을 지켜 주십니다음란한 마음이 들게 하는 생각들을 물리쳐 주시고음란한 것들을 보고듣고행하게 하는 것을 멈추고 끊어내게 하십니다자랑하고 자존심 내세우는 마음은 지워 버리고 남을 대접하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거짓말을 싫어하고입 밖으로 하지 않게 하십니다상처주는 말험악한 말저주하는 말판단하는 말짜증 나는 말들을 절제하게 하시고부드럽게 격려하며 응원하는 말들을 하도록 입을 다스려 주십니다.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풍성하게 주십니다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복을 누리기를 사모하게 하십니다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감사로 살게 하십니다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의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고단한 삶을 평안하게 하시고 소망이 넘치는 하루하루를 살게 하십니다.

 

더 많지만이 세 가지만 말씀 드려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그냥 좋은 말만 다 갖다 놓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반드시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됩니다하나나만 기억하시면 됩니다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고백 위에항상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마시고 순간순간 인식하고의식 할 때죄를 이기고마음과 생각이 지켜지고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풍성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023년에 여러분 모두가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하셔서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시면서항상 감사하고항상 기쁘고항상 평안이 넘치는 행복한 한 해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 각자가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을 권면한 뒤에 이제는 시선을 교회 공동체로 돌리도록 권면을 합니다. 27절 중간부터 28절 까지 읽어 드립니다.

 

“ ~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아멘.

 

2. 공동체를 향한 바울의 권면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 이라고 요약 할 수 있습니다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구원의 증거라고 부연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여러분들이 지난 한 해동안 잘 협력해 주셔서 한 마음 한 뜻으로 교회를 잘 섬겨 오셨습니다각자의 자리에서 일인다역으로 최선을 다해 헌신하신 여러분들을 칭찬하고 응원합니다그리고 함께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는 바울이 언급 한 것처럼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라는 한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올 해 우리 교회는 특별히 새로운 예배 처소를 준비하는 시간입니다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한 해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장 최적의 예배 처소를 예비해 주셨습니다우리 공동체가 주님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의 마음으로 부흥과 성장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기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중심을 보시고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 목표로 순종하고 헌신할 때에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기쁨의 순간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서로가 서로를 칭찬하고 경려하고 응원하고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실 역사를 기대하며 2023년도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조차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 되는 것을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우리는 바울과 같이 매인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편안하게 주무시는 잠자리꿈자리에서 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뜨겁게 전파 되는 교회 공동체가 될 것을 기대하시며기도 하시면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날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바울은 마지막으로 고난에 대한 언급하며 권면을 마칩니다. 29, 30절을 읽어 드립니다.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아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복음을 위하여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위하여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눈에도 걸리고 마음에도 걸립니다이 말씀에 나타나는 반응들을 보면,

     첫째무감각(그러든지 말든지 내 한 몸도 바쁜 몸이야),

     둘째짐짓 외면(듣기는 하는데 나는 관심 없어),

     셋째부담감 내지 짜증(맨날 이거 해라 저거 해라)이 납니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명령이나 강요로 들리는 것이 당연 합니다그러나 성령이 말씀 하시는 것은 강권 한다고 합니다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권위와 능력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하게 됩니다.

 

저는 여러 분들이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여러분의 삶이 웃을 일만 가득 했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다만복음을 위하여 라면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위하여 받아야 되는 고난이라면기꺼이 그 고난이 여러분들에게 통과의례가 되어서일생의 유익함으로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의 길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사도 바울도 고난 앞에서 담대했습니다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은혜를 주시면 은혜를 누리고고난을 주시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사도 바울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죽이시면서 까지 무엇을 요구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살든지 죽든지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기꺼이 헌신과 충성을 다하겠다는 순종의 마음을 준비하셔야 합니다우리의 마음 중심이 굳건하다면우리가 어떤 고난의 일을 맡게 되더라도 능히 감당 할 수 있는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 앞길을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그러면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참된 진리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인식하고 의식하라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합당하게 생활 하라고난 받음이 내게 유익이라신년 첫 주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 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깊이 새겨지셔서 한 해 동안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오늘 주신 말씀들을 생각하며내 자신이 새해에는 신앙의 기본인 이것만은 꼭 해보자 라고 함께 결단하고 실천해 보기를 권합니다이 세 가지는 신앙의 기본이 내 몸과 생활 방식에 습관이 되게 하기 위해서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최소한의 대화 창구를 개방시켜 놓기 위해서 꼭 실천하시기를 권면해 드립니다.

 

      1 365일 기도의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십시오이 기도 시간만큼은 절대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결단 하시고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기도가 습관이 되는 사람은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새워 집니다제가 권면하는 기도의 시간은 20~30분 정도 기도하시고, 10분 정도는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며 듣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1 365일 말씀을 가까이 하는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십시오전 성도가 말씀 읽기에 참여해서 성경 일독에 동참 하십시오말씀은 내 삶이 어둠에 있지 않도록 비춰주는 빛이고내 삶의 방향을 인도해 주는 등불이고내 삶의 문제들의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말씀을 가까이 함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곧 복이라고 했습니다.

 

      1 365일 찬양 들으며 성령 충만으로 사십시오찬양은 거룩한 성령이 내 마음에 충만하게 암하시게 초청해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수시로 찬양 들으시고수시로 찬양 부르십시오그러시면 세상이 줄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얻으실 것이고성령이 알려 주시는 크고 은밀한 하늘의 비밀들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지금껏 계속해서 해오고 있는 것들이고 지금도 다 잘 하고 계신 분들도 많습니다새해에는 전 교인이 동참하시며 결단하고 함께 시작하시기를 소망합니다오늘이 마침 1 1일입니다오늘 부터 하시면 됩니다. 1 365일 기도의 습관, 1 365일 말씀을 매일 같이 읽는 것, 1 365일 찬양 중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동행 하는 것참 쉽겠죠다 하실 수 있으시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할 평균 휴대폰 사용시간이 5시간이고 TV 시청 시간이 3시간 정도 된다고 합니다미디어에 투자하는 8시간 중에 일부만 떼어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께내 인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성령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일까요?

 

여러분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시간과 정성을 구별하여 신앙의 기본에 드려 보십시오그 시간은 버려지고 소모되는 헛된 시간이 아니라 영생의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귀중하게 쓰여 지는 존귀한 시간입니다하나님이 기억하시고예수님이 평가 하시고성령님이 증언 해 주시는 참 된 진리의 시간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이 기도와 말씀과 찬양으로 1 365일을 지내시면서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친구와 같이 동행 하시면서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 하시면서매일 매일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고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오직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한 해를 살아 낼 수 있도록성령 하나님 동행 하시고위로 하시고능력으로 함께하여 주옵소서고난과 함께 영광을 받도록 인도하여 주시는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낮아져야 하리 빌2:5-11

우리 주변을 보면 성도들 중에 많은 이들이 큰 성공을 거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중에도, 대기업의 총수나 중역들 가운데도, 재벌들 중에도, 또 연예계나 문화계, 교육계, 예술계 등에도 높은 인지도가 있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은 그리스도를 찾기는커녕 도리어 멀리하고 교회를 비난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높아질 줄은 알았지만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겸손히 낮아질 줄 몰랐기 때문이요, 채우는 것은 좋아했지만 욕심을 버리고 비우는 미덕을 몰랐기 때문이요, 자기주장은 잘 할 줄 알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섬김 받기는 좋아했지만 섬길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 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참된 신앙인은 높아진 자, 성공한 자가 아니요,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 겸손한 자, 사랑으로 섬기는 자, 욕심을 버리고 나누고 베푸는 자라고 가르쳐야 하고, 그 모습이 생활화 되도록 힘써야 하는데, 그 보다는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데 더 관심을 두고,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낮아져야 하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낮아져야 하는 까닭은,

 

1.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데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따르면서 은혜를 받는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은 하나 같이 겸손히 순종할 줄 알고,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비우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네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다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믿음의 순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 그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과 삶의 터전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가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마태는 즉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5:28) 당시 비록 동족들로부터는 욕을 먹고 미움을 받았지만 세리가 누리고 있던 것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직업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물질의 걱정이 없이 안정되게 가정을 꾸려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는 말은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 모두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누구나 겸손과 자기 부인 없이는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 하시고 은혜 주십니다. 149:4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했고, 18:12에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했으며, 4:6에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비워야 할 것 중에 가장 먼저인 것은 자기 의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이유는 그들이 신앙생활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십일조 철저히 했으며,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제도 많이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옷자락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했습니다. 정말 거룩하다는 말을 듣기에 충분할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런 그들은 자기 의로 충만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며, 교만하여 자기들처럼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칭찬과 은혜는커녕 예수님께로부터 외식하는 자들이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요, 천국 문을 막는 자들이요, ‘화 있으리라는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겸손한 믿음으로 은혜 충만한 성도들이 됩시다.

 

2.믿음의 사표인 예수님께서 친히 낮아지심의 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본문 빌2:55-7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본체란 말을 요1:1-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절의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절에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절에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증거 합니다.

본체라는 말은 '본질적인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한다는 의미로, 다른 말로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하나님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말 합니다. 성육하시기 전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신 영광을 버리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복음서 본문에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보면 예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이란 시골 가난한 어촌이 고향입니다. 부친 요셉은 가난한 목수입니다. 태어나시기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5:2)한 말씀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미가선지자의 예언이 응한 것은 바로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호적 명령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인두세를 거두고 전쟁터에 끌고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인구 조사는 매 14년마다 실시되었는데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첫 번 실시한 것이었습니다(2). 황제의 인구 조사 령으로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이미 잉태한 마리아와 함께 갔는데,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라 여관도 만치가 않은데다 여관마다 이미 온 소님들로 방이 차 요셉은 아마 어느 사관 주이에게 만삭이 된 아내 때문에도 간곡히 부탁하여 그 집 마구간 한편 구석을 잠자리로 마련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곳에서 해산하여 말구유에 뉘이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누운 자리는 짐승의 먹이 통인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철두철미하셨습니다. 인생의 맨 밑바닥의 자리에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삶 역시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죄인과 강도 취급을 당하시며 온갖 모욕과 멸시와 수난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처형 되셨습니다.

서신서 본문 5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가지셨던 생각을 품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태도와 행실을 가져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지식, 세상의 유행,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지만,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진 생각과 삶의 자세와 행동이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처럼 겸손히 낮아진 마음을 갖아야 아버지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본문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겸손히 낮아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자취를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하나님께서는 겸손히 낮아진 자를 아들과 함께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본문 빌2:9-11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은 낮아지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부활의 영광, 승천의 영광, 하늘의 높은 보좌의 영광을 주시고, 만민을 심판하실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대상이 되시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고 박해하던 로마가 그 후 400년도 되기 전에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가는 유일한 길이 되시고,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당당히 구할 수 있는 존귀한 이름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본받아 사는 자들을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 기업을 받게 하시고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붙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제목의 보잘 것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모든 소장품을 가질 것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사랑 하셔서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참 빛으로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세상 것을 더 귀히 여기면서 예수께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을 세상의 누구 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분이라고 고백하며 사랑하는 그들을 하늘 기업의 상속자들로 삼으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히 순종함으로 주님 발자취 따르다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대림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낮아져야 하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낮아져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데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표인 예수님께서 친히 낮아지심의 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낮아진 자를 아들과 함께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20022. 02. 07. 호현낙선>

 

출처:성산 사랑원문보기글쓴이:호현낙선

성도에게 필요한 두려움 렘 14:7~9, 2:12-16

 

일본의 학자 다카바다(高機)씨는 기독교로 귀의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런 중에 결핵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그는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떠날 시간이 임박해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환해졌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하나님께로 가네. 과거의 불신앙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부끄러움 없이 간다네.”성도가 신앙생활 하다가 때로 낙심하기도 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불신앙, 불순종으로 신앙의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 때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심판에 두려움을 알고 주님 앞에 죄를 감추거나 변명하지 않고 회개하면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며 합리화하며 고집을 피우고 완악한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에게 필요한 두려움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하나님께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는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365번이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세상을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단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시편 기자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날 때에도 해 받음을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천만인이 나를 치려하여도 두려워하지 아니 하리로다.’ 라고 고백하며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정죄 하겠느냐, 누가 우리를 대적 하겠느냐,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로다.’라고 사도 바울처럼 당당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가져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만유를 섭리하시고, 심판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14:9“^^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범죄 한 선민이 회개할 것을 외치는 예레미야의 경고도 듣지 않자 결국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망각한 백성들이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다가 끝내 돌이키지 않을 때 심판 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게는 나름대로의 길이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고기의 길, 날짐승에게는 날짐승의 길, 육축에게는 육축의 길,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 성도에게는 성도의 길이 있습니다. 성도의 길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항상 아는 기본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떠난 삶은 유익이 없고, 그 길의 결국은 파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경고 하실 때 두려움으로 회개하고 돌이켜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될 때, 용서가 따르고, 회복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받고도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회개하고 돌이킬 줄 모르고 계속 불신앙,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결국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간, 사울 왕, 발람 선지자, 여로보암, 가롯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릇된 길로 가다가 경고를 받고 회개하고 돌이킨 자들에게는 회복의 은혜가 임하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고, 주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됩니다. 다윗, 히스기야 왕, 요나, 베드로, 바울 같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성도가 징계로 오는 고난이 올 때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허물과 죄를 바로 깨닫고 회개하여 회복의 은혜를 받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 낭비, 시간 낭비, 마음과 영혼에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죽어도 주님 앞에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차량을 안내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간암으로 배가 9개월 된 임신부와 같았습니다. 움직이기도 힘들고, 배가 너무 나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차량안내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그 봉사를 계속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수록 정말 애통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더불어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단도, 박해자도, 권세자도, 가난도, 질병도, 죽음도 아닙니다. 육과 영을 함께 멸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 외면을 당하고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지만,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자라면 인생의 성공자요, 실상은 부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주님을 만난 이후 주와 복음을 위해 충성 하다가 숫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충성했던 그가 가진 두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하여 남은 구원 얻게 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이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 더 말할 것이 없이 그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버림이 될까 두려워 경성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2.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신약 본문에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본문 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에 대한 말씀을 보면

*하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2:8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얻었나니 란 말씀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뜻으로 구원 문제가 과거형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기에, 여기서 얻었다는 말은 약속에 의한 확실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구원하시리니란 말씀입니다. 딤후 4: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구원이란 낱말은 우리의 완성된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책임지시고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 구원을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말씀은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아직도 소망 중에 있는 미래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현재와 미래와의 사이에는 도달 과정을 거쳐야 하고, 시간이 흘러가야 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서울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탔습니다. 차표도 끊고, 열차 안에 자기 좌석에 앉아 가고 있습니다. 그가 부산역에 도착하기 전에 갑작스런 사건으로, 변심이 생겨 도중에 하차 할 수도 있고, 미혹하는 자의 말에 홀려 도중에 내려 다른 열차로 갈아 탈 가능성도 있고, 가다가 표를 분실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 열차에 탑승을 하고 천국 역에 이르는 동안 그 과정에서 시험 역도 있고, 환난 역도 있으며, 유혹 역도 있습니다. 이 같은 역은 아직 우리가 지나가 보지 못한 역들입니다. 이 역들을 무사히 잘 통과하기 위해서 정신 차려야 할 모습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운동장에서 다름 질 하는 일로 비유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구원의 과정을 잘 지나가기 위해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가 되어야 모든 역경과 유혹을 이기고 마침내 무사히 하늘 본향 역에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신앙생활 하면서 수시로 내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여 바른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내가 은혜 받고 구원 받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 영광 위해 살고 있는지, 나도 모르게 내 신앙이 변질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건강 진단을 하듯이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그 당시 독일 교회를 바라보면서 독일 교회가 왜 그렇게 무기력해 졌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따르는 대가를 치르기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는 데는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이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신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했다.

 

그러나 이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을 강조할 때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아무 대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까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는 값비싼 대가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우리 주님처럼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심장이 고동이 멈추고, 내 몸의 더운 피가 식는 바로 그 순간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습니다.”{17:4절 참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그 모든 대가를 기쁨으로 지불할 결의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천성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이러한 두려움은 주님 앞에서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이 될까하는 두려움,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두려움은 주님 앞에서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바울서신에 보면 사도 바울이 구원과 관련하여 같이 사용하는 세 가지 용어가 있습니다. ‘중생성화영화라는 용어입니다.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죽었던 영이 거듭나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성화는 살아가는 동안 거듭난 영이 점점 거룩해져 가는 것을 말하며, 영화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 완성적으로 온전히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본 절에서 말하는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화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구원을 이루라'에서 '이루라'에 해당하는 카텔가조마이(κατεργαζομαι; work out)'행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는 뜻에서 온 명령형의 용어로, 다르게 표현 하면 성화 사역을 수행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성장 하여 20, 30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2-3 개월 된 갓난아이처럼 기저귀를 차고 우유병을 들고 다닌다면 부모나 가족의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주 예수를 믿어 영적으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아직도 처음 예수를 믿던 그 수준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성도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고, 지도자에게, 주님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15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흠이 없고 순전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빛들로 나타나며등입니다. ‘흠이 없고 순전하다는 것은 순도가 높은 금이나, 은처럼 나무랄 것이 없고, 얼룩이나 오점 티가 없는 순수하고 신실한 것을 말합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이러한 장성한 믿음을 위하여 달려가는 삶을 살라는 요구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빌립보 교인들이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행하므로 하나 되지 못하여 교회 공동체를 온전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화합하여 교회 공동체를 온전히 세워 나가기 위해 한 마음, 곧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그 모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종의 형체로 오신 겸손하신 예수님의 비하를 제시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그 문제 해결 방안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두가 낮아져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개개인이 성화의 사역을 온전히 수행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성화 사역 곧 죄를 회개하고 죄 성을 복종시키고 주님을 본받아 닮아 가고 말씀을 인격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약 본문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 해 계셔서 무엇인가를 행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행하다’(operating) 는 헬라어로 에네르곤입니다.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이 힘을 공급하셔서 어떤 일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본래 우리 몸은 쉬고 싶고, 먹고 싶고, 놀고 싶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을 위해 몸을 쓰게 하고, 시간과 재능을 쓰게 하고, 물질을 쓰게 하는 것이 에네르곤입니다. 게다가 나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그러한 일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에네르곤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공급됨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밝히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며, 약한 지체들을 보살피고,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며, 물질로 구제 하게 하며, 세상에 나가 싸워 승리하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성도가 내게 주신 주님 은혜를 깨닫고 더욱 사모하여 주님 영광 위해 살기를 힘쓰면 힘쓸수록 더욱 장성한 믿음으로 자라 주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적 부호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출석하는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록펠러를 보기 위해 교회에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록펠러는 항상 예배 시작 40분 전에 와서 맨 앞에 앉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뒷모습만 보았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물었습니다. “회장님, 왜 그렇게 일찍 교회에 오십니까?” “그것은 예배의 앞자리를 놓칠까 봐서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9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예배의 앞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주일을 지키며 예배하는 행위나, 남을 위해, 민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는 행위나, 봉사와 헌신을 통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행위는 자신의 신앙 성장은 물론 하나님을 높이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우리가 결단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일하시며 약속하신 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므로 존귀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에게 필요한 두려움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는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주님 앞에서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아멘.

 

제목 : 감사의 일상화 (곽선희목사)

성경 : 빌립보서 1:3-11

 

공산주의 국가나 혹은 수십 년 공산주의 지배 하에 있었던 사회를 방문하게 되면 누구나 느끼는 뚜렷한 특징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같이 못한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아주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둘째는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감사'나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개념조차 그만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공산주의 사회의 기본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반합의 원리에서 나옵니다. 그런고로 변증법적 관계라고 하는 것은 그방법론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투쟁'이요 '혁명'입니다. 그래서 농사도 투쟁이라고,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투쟁이라고, 결혼도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이러한 투쟁적 관계, 변증법적 관계에서 소화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뿌리는, 그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난한 것도 부자 때문이고 내가 못사는 것은 잘사는 사람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 이러한 철학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고로 계속적으로 '혁명''쟁취'를 외칩니다. 혁명과 쟁취를 통해서 얻어진 일에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불평, 불만, 원망으로 가득한 사회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가 만든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중으로 불행합니다. 가난해서 불행하고, 감사할 줄 몰라서 불행합니다. 모든 것에 원망과 불평으로, 감사할 줄 몰라서 불행합니다. 모든 것에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불행합니다. 철저하게 불행합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감사를 듣는 마음입니다. 부자라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감사가 없어서 불행합니다. 부자일수록 더 감사가 없어요. 끝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감사 없는 이유로 가장 큰 것은 '무지'입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 61세된 어느 사업가가 종업원 176명을 데리고 조그마한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업가는 1년에 한 번, 감사절 때마다 각 종업원 가정에 한 마리씩 칠면조르르 선물했습니다. 칠면조를 구워 먹으면서 감사절을 같이 보내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0년 동안 해마다 이렇게 선물해왔는데도 고맙다는 인사하는 사람은 딱 네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카드를 보내서 고맙다 했고 두 사람은 길에서 만나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업가는 칠면조 선물 하는 것을 이제는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마음이 없어졌다고 해요. 사장이 종업원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적 관계에도 감사가 없습니다. 내 수고 내 공로의 결과로 주어진 것인데, 내가 수고해서 얻은 것인데 무슨 감사가 있습니까? 교만한 자도 감사가 없습니다. 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가 없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도 감사가 없습니다.

 

<> 멕시코의 어느 지방에 이야기입니다. 들판에 나갔더니 한쪽에는 찬물이 나오고 한쪽에는 온천물이 나오더랍니다. 우리네 백두산에 가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지요. 어쨋든 그곳에서 목욕을 하면 이렇게 서면 물이 뜨겁고 또 저렇게 서면 물이 차갑습니다. 여인들은 여기서 빨래를 합니다. 더운 물에서 빨래하고 찬 물에서 헹구고, 그래 이 사람들은 자연의 혜택을 기가 막히게 누리고 있구나 싶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당신들은 참 좋겠군요. 이런 자연의 혜택을 누리고 얼마나 행복하겠소?" 그런데 그들은 뜻밖에도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 자연은 비누를 안주는 걸요" 보세요.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욕심많은 사람은 감사가 없어요. 이상하게도 돈이 많을수록 욕심은 점점 더 커집니다. 그러니까 더 감사가 없지요. 또한 은혜로운 마음이 없는 사람은 감사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강한 자는 자신을 제어하는 자요, 가장 참된 자는 모든 것에서 배우는 자요, 가장 행복한 자는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함이 없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만사를 부정적으로 보면 끝도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장미를 보고도 마음이 좋은 사람은 '가시나무에 장미꽃이 피었구나'하고 아름답게 봅니다. 그러나 마음이 부정적인 사람은 '왜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합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장미를 멀리서 보기만 하고 즐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장미를 겪으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가시가 있으니까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로운 사람만이 항상 마음깊은 곳에서부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차원이란, 먼저는 물질적인 것이 많습니다. 주고 받으면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비인간적입니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의 감사는 철학적인 것입니다.

 

<> 헬라의 어느 철학자가 비가 많이 쏟아지는데 일부러 우산을 스지 않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서 "! 신이여, 감사하나이다"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사람이 "대체 무엇이 감사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생각해 보세요. 콧구멍이 밑으로 뚫렸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위로 뚫렸다면 이렇듯 비오는 날에 내가 어떻게 밖에 나오겠습니까?"--이것이 철학적 감사입니다.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하나 부러진 것이 둘 부러진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가? 무릇 환경이 달라짐으로써가 아니라 생각 속에서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감사는 은총적 감사입니다. 그리스도인됨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존재에 대한 감사입니다. 나의 나됨에 대한 감사입니다. 여러분, 여자로 태어났습니까? 여자로 태어 났으면 여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남의 아내가 되었으면 아내됨을 감사하고, 자식이 되었으면 자식된 존재 그것을 감사하는 것, 또 이것을 은총으로 받고 오직 은혜로 받고, 은혜 안에 있는 나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절대적 감사입니다.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바 그것을 철저하게 감사하고 보면 모든 것에, 주변의 모든 관계에, 모든 환경에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 오늘의 본문인 이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만도 기쁨이라는 말을 16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음미해보세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3,4)"--이 말씀을 거꾸로 한번 뒤집어보세요. '생각할 때마다 원망이고 기도할 때마다 불평이고...'--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합니까? 무엇을 생각하든지 생각만 하면 감사합시다. 하나님을 생각해도, 가정을 생각해도, 교회를 생각해도, 자녀들을 생각해도, 모든 일에서 생각 할 때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의 괴로움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오로지 저 멀리 빌립보교회를 생각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빌립보 교인들의 봉사오, 빌립보 교인들의 아름다운 지성과 헌신을 생각합니다. 저들은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자 얼마간의 성금을 모아서 자기 교회 교역자를 통해서 로마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받고 지금 감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감옥에서 이대로 죽는다 할지라도 빌립보 교인들이 성장하는 믿음을 보면서,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생각할 때 마다'라는 말은 '항상 그러하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이면서 성도의 교제를 통한 현실적 감사를 말합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며"--이것을 생각해도 저것을 생각해도, 모든 일이 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아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감사는 기쁨의 간구로 이어집니다. 감사하며 또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가운데 '감사함으로 기도하라'하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눈물로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감사, 기쁨, 축복, 은혜--사실 이 단어들의 어원은 다 같습니다. 기쁨이 있어야 감사하고, 감사해야 하나님 앞에 바른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에서, 은혜는 다시 감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기쁠 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감사함으로 나는 행복하고, 마침내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연구를 했습니다 열 살난 아이가 얼마나 많은 단어를 구사할 수 있느냐, 보았더니 6천 단어랍니다 그러나 그 6천 단어 중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한 단어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인은 25천 단어를 구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한 마디, 감사하다는 말뿐입니다. 여러분, 어떤 때에는 사랑한다는 말도 이기적일 때가 있습니다. 남을 기쁘게 하기 보다 귀찮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남을 얽매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부담을 줄 수도 있습니다. 오직 내 마음을 기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감사하다는 말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습니까?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고맙다고 하십시오. 감사하다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 속에 기쁨이 올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 마음 속에 기쁨이 올 것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주고받는 바로 그 시간이 행복의 극치 입니다. 이것이 없는 한, 어떤 여건에 있어도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그곳에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나중에는 세 사람의 총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탁됩니다. 이스라엘사람으로서 바벨론나라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바벨론사람들이 이를 질투 시기하여 어떻게든지 다니엘을 죽이려고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래 '왕 이외 다른 어떤 것에 기도하든가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사자굴에 처 넣어서 죽일 것이다.

 

우리는 왕만 섬기고 왕만 찬양한다'--충성을 빙자해서 이런 조서를 만들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이 조서의 숨은 뜻도 모르고 어인을 찍었습니다. , 일이 이렇게 되면 다니엘은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사형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끓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였더라(6:10)"--보세요. 어인이 찍혔습니다. 내가 오늘 기도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더라 함입니다.

 

여러분, 감사가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고 인격이 되야 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까지 늘 감사하는 사람은 죽음이 앞에 와도 감사합니다. 병원에 들어가서 수술을 받을 때에도 나를 좀 아프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의사선생님을 보고도 '감사합니다' 간호원을 보고도 '감사합니다', 잠깐 방문해주는 사람을 보고도 '감사합니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가 일상화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일에 조금 감사하는 듯하다가도 저런 일이 생기면 또 원망합니다. 이것 원망, 저것 원망, 하늘 원망, 땅을 원망, 자기 자신도 원망합니다. 이것이 절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원망과 불평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할 때에 찬송하고,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 마다 기쁨으로 기도할 때에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곧 자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모든 원망과 불평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감사함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순간에 나는 내가 원망하는 자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은 내가 그에게 붙들리는 시간입니다. 내 영혼이 감옥으로 떨어지는 시간입니다. 오직 감사함으로만 그 영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모든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게 될 때에 그는 온전한 자유인으로 모든 일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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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려면 310-16

이민아 목사는 땅에서 하늘처럼이란 책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이어령 전 장관의 딸이기도 한 이민아 목사가 위암 말기 환자로서 투병하면서 자신의 영성고백을 적은 내용입니다. 그녀는 들어가는 글에서 부활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그동안 저의 질병을 여러 번 고쳐주셨기 때문에 또 고쳐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땅에서 그 치유를 온전히 다 받아 누리지 못하고 내 몸이 죽는다 해도 저는 예수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죽음은 이미 권세를 잃었고 저는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제게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주신 승리가 관념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입니다. 아직 몸이 불편한 가운데 이 책을 펴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암 같은 질병의 선고를 받고 삶이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절망에서 신음하는 사람, 영과 육의 부서짐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분들, 소망을 잃은 분들에게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비록 떠났지만 삶과 죽음을 넘어서 부활 생명에 이른 삶을 여실히 드러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가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고 장차 부활에 참예할 것을 믿을 때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일에 더 힘쓰게 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려면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믿음의 승리자 입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서 본문 빌3:11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했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계신 삼층 천의 하늘나라를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 곳은 속히 그 곳에 이르기를 소망할 만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고자 힘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고난과 희생을 당한다 할지라도 참고 견디겠노라고 고백합니다.

부활은 헬라어로 아나시스타스’(anasistas)로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으로부터 일어나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부활은 신앙의 근거가 됩니다. 부활이 사라지면 신앙도 사라지고 부활이 확실해지면 신앙은 점점 강해지게 됩니다. 천국의 소망도 확실해 집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확고해서 간증이 되고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서 마11:12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실 때에 청중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침노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비아조"란 말로서, 이 말의 의미는 힘을 사용해서 어떤 것을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이 사용된 대표적인 경우가 마 11:12과 눅 16:16인데, 이 경우 하나님 나라를 "성을 정복하는 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전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소수의 이방인만이 그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기생 라합, 룻 등). 세례 요한 때까지 이 나라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점령하기 어려운 견고한 성처럼 들어가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세례 요한 때부터 점령하기가 쉬운 성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는 자기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그 죄가 용서 받았음을 확인해 주는 세례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때부터 자기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점령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자기의 죄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강한 자는 차지할 수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누가는 이 구절에 대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16)라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침입한다.’는 말이 본문 마 11;12에서 사용된 비아조란 말입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 이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했고, 주님은 요한이 말한 대로 세상 죄를 지고 십자를 지시므로 죄 사함을 얻을 길,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강렬하게 구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을 "강제적인 행동으로 묘사하셨을까요?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은 문이라고 하셨고, 그 길은 협착하다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쉽고 편안한 넓은 문, 넓은 길을 원합니다. 이 본성을 극복하려면 믿음의 선한 싸움에 힘써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 강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며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내용의 기사가 있습니다. (32:24-32) 그 때에 야곱에게 준 이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축복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결국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사건은 오늘날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강렬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빌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했습니다. 그는 1, 2, 3차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로마옥중에 갇혔습니다. 그는 일생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해 살았던 자로 그 만큼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많이 일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을 아직도 자기는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며 오직 예수님께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신앙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는 하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완성 된 게 아닙니다. 천성을 향하여 그 길을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미 구원 얻었다.’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의 발걸음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과거는 잊어버리라고 말합니다. 본문 빌3:13-14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했습니다. 과거 세상에서 이룬 성공이나 영광도, 실패나 상처도 다 잊고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달려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앤드류 왕자는 교통사고로 숨진 비운의 다이애나 왕비의 아들입니다.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된 그는 언론의 한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어머니와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에 얽매여 울고 있기에는 너무나 인생이 짧습니다.’라는 짧은 응답으로 인터뷰의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본문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했습니다. 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의 자기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나서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습니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 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고랑은 구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쟁기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 수가 있단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은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프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더니 비로소 똑바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물질, 명예, 권세 세상 연락 등, 일시적인 것, 유동하는 것,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세상적인 것들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고,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천국과 상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나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려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성도의 싸움은 세상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영에 속한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싸움에는 잠깐의 기쁨과 영광이 따르지만 금세 허무하게 되고, 시든 꽃처럼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소년 시절에 그의 가정교사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고 합니다. 선생은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왕자께서는 임금이 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희랍을 통일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소아시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뒤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점령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손에 넣겠습니다." "인도 점령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 때쯤이면 저도 죽겠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멀리 돌아다니다 죽으나, 지금 죽어버리나 별로 큰 차이가 없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치 없는 것에 목표를 두는 인생은 가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의 자기의 목표대로 왕이 되어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헛된 인생의 목표였는지... 알렉산더대왕은 그가 죽을 때 유언을 하기를 자신의 장례식 때 자기의 빈 두 손을 관 밖으로 내어놓아 백성들에게 인생의 허무를 알게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대왕은 나이 33세에 요절을 하였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원숭이에게 물려 감염이 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성도의 싸움은 하늘에 속한 영원한 영광,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얻기 위한 신령한 싸움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하신 말씀 중에는 싸워 승리하는 자가 차지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은 죄와 세속과 유전과 마귀와 자신과 유혹과 위협과 싸워서 이기는 자들의 소유가 되며, 역동적인 믿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이기는 자들의 것이 됩니다. 주께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주시는 한결 같은 약속은 모두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천국도, 상급도, 칭찬도, 면류관도, 영광도 모두 이기는 자들이 받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면에서 자주 신앙을 경주자로 비교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5)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딤후 4:7-8)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 사도의 삶은 실재로 경주자와 같은 삶의 자세로 선한 싸움을 싸웠고, 숫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성도가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부활 신앙으로 성령 충만하여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비겁함과 두려움에 벌벌 떨던 베드로였지만 부활 신앙을 가지고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담대해 져서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2:32),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13)하며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 했습니다. 그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도들과 앞서 간 성도들을 본받아 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도록 주님의 권능을 덧입고 이기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려면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믿음의 승리자 입니다.

.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천국의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려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아멘.

 



생각할 때마다 간구할 때마다 (빌립보서 13-6)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의 형식을 보면 편지의 맨 앞에 공통적으로 두드러진 특징 세 가지가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인사와 축복(축도)’로 시작합니다. 12절에서처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식으로,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는 빠짐없이 들어갔고, 디모데 후서에서는 긍휼이라는 말이 추가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 평강, 긍휼, 이런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본인이 개척한 교회들과 모든 성도들의 평안과 안녕을 진심으로 기원해 주었습니다.

 

둘째는 수신 교회에 대한 감사의 조건으로 칭찬을 합니다. 로마 교회에는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으로 감사한다”(1:8)고 했고, 골로새 교회에는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으로 감사 한다”(1:4)고 했으며,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하며 감사한다”(살전 1:3)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5절에서처럼,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 이것이 감사의 조건이었습니다. 칭찬할 일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하고, 비판할 일이 있으면 일대일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공개적인 칭찬을 통해 교회 전체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는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셋째는 수신교회에 대한 중보적인 기도로 각 교회들을 축복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고 축복했고, 에베소 교회에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소서”(1:17-19)라고 축복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9~11절에서처럼 축복했는데, 제가 이 구절을 이용해서 우리 00교회 성도들을 축복하겠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이 나에게 특별히 내려 주시는 복된 말씀으로 믿고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사랑과 지식과 모든 총명(통찰력)이 날이 갈수록 풍~성게 되어서, 선한 것을 분별하여 악한 것을 다~ 물리치게 하시고, 거짓 없는 진실한 입술로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날에 이를 때에 허물이 나타나지 않도록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순결한 신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 영혼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찬송이 되며, 믿음 경주의 완주자가 되어 하늘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아멘.

 

5월의 말씀 잘 암송하고 계시죠?(살전 5:16-18)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 이 세 가지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혼자서 이일 저일 힘들게 하려 하지 마시고, 나의 위로자요, 상담자요, 능력주시는 자요, 해결자요, 인도자 되어 주시는 성령님을 무조건 의지 하십시오. 그 길만이 항상 기뻐함으로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이 세 가지가 동일하게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4절에는 감사가 있고, 5절에는 기쁨으로 항상 간구(기도)’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4절과 5절에는 때마다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다, “간구할 때마다 항상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때마다라는 단어 속에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 얼마나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 항상, 시시 때때로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열심히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들을 품고 성령 안에서 항상 기쁨으로 간구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곧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없이는 교회도 없습니다. 또한 성령 충만한 사람이 없이는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지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때마다교회를 먼저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때마다교회 성도 한사람 한 사람의 삶을 살피고 그 영혼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단 한 사람의 눈물의 기도와 간구가 지구상의 모든 교회들을 유지시켜 나가고, 성장 시켜 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정말 사랑해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에게 밥 잘 사주고 커피 사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때마다눈물 흘리며 성령 안에서 기도해주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군가 나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해주실 분이 있으십니까? 내 주변에 기도의 사람을 많이 확보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들과 자주 대화의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기도의 제목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 주심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교통 교제하며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 간에 나눌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교제입니다.

 

세상 사람들끼리는 만남을 가지면 때마다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세상의 관심꺼리, 사건사고, 정치, 연예, 드라마, 이런 것들이 관심의 우선이겠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모습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머릿속에서는 교회의 모습과 성도들이 얼굴이 수시로 떠올라야 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항상 기쁨으로 간구(기도)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00교회 모슨 성도가 성령 안에서 때마다감사하고, “때마다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며,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그렇게 되어가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마음을 깊이 두고 때마다감사하고 간구할 수 있었던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아멘.

 

여기서 첫날부터에서 첫날은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시점을 말합니다. 이 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던(주후 50-52년경) 때 이었고, 지금 편지를 쓰는 시점(주후 61년 경)과 비교하면 대략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을 넘는 긴 시간동안 수많은 탄압과 박해를 받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관되게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동참, 협력)하는데 열심을 냈습니다. 기도로 동참해 주었고, 연보로 동참해 주었고, 전도자들을 잘 대접하며 동참해 주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식 사랑하기를 첫째나 둘째나 상관없이 공평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징그럽게도 말 듣지 않는 자식과, 하라는 일은 무조건 순종할 뿐 아니라 알아서 예쁜 짓을 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래도 공평하게 대할 수 있습니까? 머리로는 공평하게 대해줄 생각이 들어도 마음은 당연히 순종하는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통의 마음이나 감정)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자녀들을 보시기에 동일한 잣대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지만, 청종하는 자세에 따라 대하시는 태도는 달라지십니다. 신명기 28장에서는 청종 하면 복을 주시고, 불 청종 하면 저주를 내리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들은 말씀 그대로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자녀들을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 주시고 좋은 것으로 보상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바로 복음을 위하여최선을 다하는 교회였습니다. 칭찬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제가 오후 예배에 로마서 강해하면서 여러 번 강조해서 말씀 드렸었는데 기독교인들(크리스천)복음을 위하여 택정함(특별하게 선택, 구별하여 따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 했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 최고 가치의 목표라고 강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을 향하여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증인의 삶이다, 제자의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00교회가 소망하며 꿈꾸는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숫자로도 부흥하고, 내면으로도 건강하고,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첫 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하여 참여했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보여준 한결같은 뚝심, 믿음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복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하고, 복음이신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는데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교회, 복음을 붙잡고 최선의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주목하여 보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들, 그런 교회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이신 예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표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예수님만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복음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교회와 우리 각자의 미래를 크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복음의 결과물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조급하면 안 됩니다. 당장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복음을 위하여살아가는 선한 일을 절대로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루어 주심을 굳게 믿고 확신하며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시작하게 하신 것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까지 복음의 완성을 이루어 가신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한 열심만 있다면, 시작도, 끝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미래가 좋게 되어 갈 것이고,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리리라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00교회가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는 교회중의 교회로 온전하게 세워질 것을 확신 하십니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내가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때마다감사하고, “때마다간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일에 관심을 두고 시간을 쏟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아~무것도 보장 받지 못합니다.

 

우리 00교회는 지금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복음에 집중해서 먼저 내 자신의 내면을 완전하게 복음화 시키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머리와 마음속에 복음을 가득 가득 채워가야 합니다. 복음과 내가 하나로 움직일 때 우리 교회는 양적으로, 영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누가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곧 성장의 발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잘하면, 나만 잘하면, 우리 교회도, 가정도 성장하고 화목을 이루는 큰 성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저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빌립보 교회와 같이 앞으로 10년 동안, 더 나아가 20, 30, 우리 자녀들의 시대를 지나,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복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00교회가 되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감사하고,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이루기 위해 늘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로 기도 할 수 있는 기도의 사람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때마다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고,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과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쁨으로 항상 간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복음을 위하여 전심을 다할 수 있는 결단의 은혜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 하나님!, 우리 모두가, 교회와 성도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복음 중심,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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