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어둠을 빛으로 밝힌 예수님 요한복음 18장 1-11절

nam씨 2015. 3. 21. 15:25

어둠을 빛으로 밝힌 예수님 요한복음 181-11

 

인디언들의 구전동화 중에 빛과 어두움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해와 별, 그리고 어두움이 살았다고 합니다. 별은 해와도 만날 수 있고, 어두움과도 만날 수 있었지만, 해와 어두움은 서로를 알지 못했습니다. 별은 해에게 어두움을 알려주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해는 결코 어두움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빛이 전혀 없는 밤, 깜깜한 동굴에서도 해가 들어가만 어둠은 곧 환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별은 해에게 어두움을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별은 어두움은 곧, 빛이 없는 상태일 뿐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빛보다 어두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을 때 나타나는 상태일 뿐이었습니다. 어두움은 진리의 빛을 모를 때 생깁니다. 빛이 생길 때 어두움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에 어두움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 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 실망하기보다 그 속에서 빛을 비추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로 그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워낙 어두워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빛이신 예수님을 몰라보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는 음모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은 잡히실 각오를 하신 듯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가끔 제자들과 기도 모임을 갖는 곳이기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는 곳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곧 되어질 일(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계실 곳을 노출시키신 것입니다.

 

1. 십자가을 향하는 기도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까지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말은 기름을 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자신을 고통의 기름틀에 집어넣고 마치 기름을 짜듯 자신을 쥐어짜는 고난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예수님은 이런 간절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하게 기도했던지 이마에서 흘린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22:44). 왜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까? 그 목적은 단 한 가지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어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며칠 전부터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 밑에다 실내화 한 짝을 던져놓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엄마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는 거니?” 그때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교회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으면 아침에 일어나 그 실내화를 찾으려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게 되는데, 바로 그때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무릎 꿇고 기도하기 위해 그런 거예요.” 한 번 시도해 볼만한 좋은 가르침입니다.

 

기도에는 치유와 회복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누구라도 다 할 수가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누가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그 역사하는 힘에 강도가 다를 뿐입니다. C.S.루이스가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쁨 속에서 속삭이시고 우리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우리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확성기다.” 그리고 또 한 마디 그 분이 여러분을 기다리신다.”라고 했습니다. Tomas Tenney는 그의 기도서에서 주님,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제 영혼이 아려옵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대한 그런 깊은 영혼의 울림이 있습니까?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 했는데 실상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흡이 끊겼다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시고 습관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예수님의 기도 습관을 막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리려 십자가의 고난은 더욱 강렬하게 기도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끈질긴 기도는 빛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어두움의 사람들

 

그런 반면에 빛을 가로막고 어둠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주님을 팔리라는 지적을 받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습니다. 유다는 그 길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왔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는 곳이라 유다가 알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야 유다를 어두움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유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자기의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의 혁명을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출세시키고 세상의 권력을 나누어주고 부귀영화의 야망을 채워주기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자기의 기대를 접었습니다. 이참에 차라리 돈 몇 푼이라도 챙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여튼 유다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주님을 배신하고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왔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입장입니까? 빛의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어둠의 편에 있습니까? 가족과 가정의 행복을 위한 편입니까? 육신의 건강과 안일을 위한 편입니까?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한 편입니까? 좋습니다. 가족과 가정, 건강, 행복, 부귀영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런 것은 세상 나라에 속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나라든지 돈이나 사람의 힘으로, 권력으로, 칼이나 창 같은 병기로는 절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돈이나 권력과 사람 그리고 창칼 같은 무기가 무슨 힘이 있는 줄 아십니까? 사실 엄격히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런 것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잡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나사렛 예수라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예수님께서 내로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유다를 비롯한 그 모든 사람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비록 권력의 힘을 뒤에 업고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으나, 이 한마디에 겁을 먹고 땅바닥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권력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어떤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돈이나 병기를 가지고는 절대로 행복해지거나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 합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것으로 무엇을 이루고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직도 어둠에 빠져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보고 제자들은 하나같이 긴장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것저것 생각도 안 해보고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가까이에 있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에 모두 싸우려는 자세를 취하며 주위가 살벌하게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자칫 잘 못하면 서로 피를 보는 살상의 사건이 발생하게 될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빛을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혈기를 부린다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혈기는 감정의 발로입니다. 감정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그 아픔이 오래 갑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혈기로는 절대로 빛의 세계를 이루지 못합니다. 때로 교회를 위한다는 핑계로, 복음을 전한다는 구실로 혈기를 앞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2:13).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흥분하여 검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칼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52에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세계는 칼로 이루지 못합니다. 빛의 세계는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혈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를 위하여 칼과 무기, 돈과 혈기 그리고 감정을 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드립니다.

 

3. 빛의 세계를 위하여

 

그러면 빛의 세계는 무엇으로 됩니까? 본문 1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빛의 세계는 고난을 잔을 마심으로 만들어집니다. 고난의 잔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손해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양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힘든 일을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감정을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남을 이해하고 내가 양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서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가 있는 곳에 빛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은 캄캄하게 어두웠습니다. 그 어둠을 틈타 예수를 파는 자 유다와 로마의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는 아랫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유다는 돈에 눈이 어두워졌고, 군대들은 상관의 명령에 어두워졌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는 아랫사람들은 교권에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감정에 혈기를 부려 잠시나마 어두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핏방울이 떨어지도록 기도하여 어둠을 빛으로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어둠을 버리고 빛 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력이나 사람의 힘이나 돈에 의존하지 맙시다. 감정에 치우치거나 혈기를 부리지 맙시다. 기도하며 고난의 잔을 마십시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시다. 희생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빛의 나라가 성도의 심령에, 성도의 가정에, 우리 교회에 세워질 줄 믿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성도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에 빛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