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말 4장 1~6)

 

 

이번주 14일 수요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수요일입니다사순절 기간은 신앙에 대한 자기 성찰의 시간입니다예수님의 성육신공생애 사역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재림과 심판 등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깊이 묵상 하시고예수님에 대한 나의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사순절 기간 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짓고 잇는 죄의 내용들이 얼마나 내 삶을 더럽고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 심각성을 깨우쳐서쌓여져 가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두렵게 임박했는지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에 자주 인용 되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는 말씀을 앞세워서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셔서전심으로 기도하고진심으로 참회 하는 가운데 인내와 절제와 감사와 소망의 시간으로 충만하게 채워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순절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의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말라기 선지자는 학개스가랴 선지자와 함께 바벨론 포로기 이후 활동하였습니다말라기에 성전이나 제사장이 많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서 포로 귀환자들이 성전을 재건한 이후에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등장하는 선지자가 신약의 세례요한입니다이 두 사람의 시대적 간격은 약 400여년이나 되며 이 시기를 신구약 중간기라 부릅니다중간기 시대에는 예언자나 선지자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침묵기’, 말씀이 없는 시기인 암흑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다시 예배를 드리며 살고는 있었지만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상황은 침묵과 암흑만이 있던 영적 공허의 시기였습니다고향에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신세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바야흐로 메시아 대망을 바라며 애타게 기도하던 기간이 중간기 시대였습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준비하는 시기도 내 신앙의 영적 침묵기암흑기라는 사실을 절감하고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나를 영생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나의 주인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중심에 초청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하게 찾고구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심의 은혜로 역사하여 주실 겁니다말라기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 잠을 깨우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감동과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이름 뜻은 나의 사자입니다하나님이 암흑기에 접어들기 전에 말라기 선지자를 특별한 사자로 보내셔서 하신 일은 경고 였습니다말라기 1장 1절에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라고 했습니다.

 

무슨 경고를 했을까요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 당하고 포로에서 돌아와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하고 공경(순종)하고 찬양(예배드리는 일을 매우 소홀히 했습니다소홀히 했다기 보다 하나님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예물 드리고 희생제사 드리는 것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어느 정도 였느냐하면더러운(거룩하지 못한 죄악된 마음 상태에서 드리는()을 드리면서도 우리가 언제 제단을 더럽혔습니까?”라고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온전하고 흠이 없는 희생제물을 드려야 함에도눈먼 것저는 것을 드리는 악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극도로 진노 하셔서, “그런 흠이 있는 제물을 너희가 추종하는 총독에게 바쳐 봐라그가 너희를 좋다고 보겠느냐너희들은 나를 모독하는 제물을 드리고도 우리는 제물을 다 드렸으니 이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부르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기쁘게 여기겠느냐나는 너희들이 다시는 제단에 헛된 불을 피지 않았으면 좋겠다내 이름을 모독하는 제물은 결코 받지 아니하겠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지금 이런 말을 듣고 있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더러운 떡을 드리고 흠이 있는 희생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었고하나님은 지금 제사장들을 향하여 진노를 하고 계신 겁니다.

 

백성들이 아무 생각 없이또는 정성을 다하지 않고 흠이 있는 제물을 가져 왔다고 하더라도제사장이 그 예물을 돌려보내고 정결한 것으로 가져오라고 가르쳐야 하는데전혀 걸림돌 없이 마구 잡이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진노를 하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잘아는 십일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당시 나라 상황을 들으셨으니 충분히 아시겠지만이 말씀은 십일조 하면 복을 주시겠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십일조와 봉헌물을 온전하게 드리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습니까라고 뻔뻔하게 거짓말하고급기야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까지 너무나 쉽게 도둑질하는 죄악이 가득했음을 고발하시는 말씀입니다이로 인해 저주를 받게 될 악행의 시대를 향해 강력하게 경고하시는 말씀속에서 나온 겁니다.

 

십일조 하게되면 쌓을 곳이 없도록 하늘에서 부어주는 복을 받는다가 아니라온전한 십일조로 대표되는 신앙의 기본이자 뿌리가 통채로 뽑혀 나가도록 악행과 죄악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최후의 경고를 하신 말씀입니다십일조 하면 만사형통이요십일조 안하면 만사불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몸서리쳐지도록 두려워해야 하는 말씀입니다당장 멸망을 실행시켜도 이상 할 것 없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래도 참고 또 참고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의 마음을 강하게 느낄수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곧바로 엎드리고 가슴을 찢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참회하고 돌이켜야 합니다그렇게 하라고 십일조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말라기 시대 이후에 왜 암흑기침묵기가 그토록 오랫동안 자속되었는지 당시 세태를 보시면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겁니다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 하시기를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되야 하거늘)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말 2:7b,8a)” 라고 한탄을 하셨습니다.

 

말라기에서 제일 많이 반복되는 말씀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입니다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왜 이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하셨을까요하나님을 하나님을 여기지 않음에 대한 진노의 표현이십니다하나님을 만군(온 우주 만물의 유일한 창조주요, 섭리주요, 심판자)의 여호와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타는 질투를 나타내신 겁니다한계에 다다라서 오래 참으심이 곧 끝나간다는 싸인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그토록 많은 은혜를 받았던 것을 원수로 갚아버리는 짐승같은 짓을 서슴없이 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영적 암흑의 시대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런 암울한 시대에 한 줄기 빛 같은 예언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아멘.

 

내 사자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세례요한의 등장을 예고 하신 겁니다또 주가언약의 사자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실 것이라” 이건 누구입니까예수님이시죠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와 함께 주의 길을 에비하는 선지자 세례 요한과 약속을 이루시는 메시아인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예고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시는 그 날을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라고 명명 했습니다하나님이 정하신 그 날이 오면 일어나게 될 모습이 구약의 마지막 장인 말라기 4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4장 1절을 읽어 드립니다.

 

 

1. 사순절을 준비하는 첫 번째 마음 : “전심으로 기도진심으로 참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아멘.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를 것이다교만한 자악을 행하는 자들은 뿌리와 가지 모두 용광로 같은 불에 살라서 남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날은 바로 이런 날입니다뿌리와 가지 모두가 불에 살라 질 것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어 보신 것 같지 않습니까?

 

바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소리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2,10,12b)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이 암흑기를 지나 신약의 첫 선지자인 세례요한에게 정확하게 이어졌습니다. 400여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성경이 이토록 정교하고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에 던져질 교만한 자와 악행을 일삼는 자는 말라기 시대나 세례 요한의 시대나 동일하게 넘쳐났습니다용광로 같은 불은 하나님의 권능주권을 상징하는 꺼지지 않는 심판의 불을 상징합니다용광로 같은 무서운 심판이 작동될 때에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말씀 하셨습니다용광로 불에 던져지기 일보 직전 까지도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열어 주십니다이런 지경에서도 회개하지 않는자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멸망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해지는지 요한계시록을 보면최후의 심판이 진행되어 땅과 바다와 하늘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도 끝까지 회개를 안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인간들이 넘쳐 납니다.

 

저는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인간의 악독한 면을 보기보다는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오래 참으심으로 하나님을 그토록 모욕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조차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참 사랑의 하나님 이신 것을 발견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전까지도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에게 구원의 기회를 열어 주신 일입니다하나님은 우리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이 정하신 그날용광로 같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그 날이 곧 오리라고 공개적으로 예언된 시기입니다우리가 살 길은 오직 하나나의 교만함과 악함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길 뿐입니다회개하면 천국이요회개하지 않으면 용광로 불에 던져집니다우리의 영적 어둠이 걷히고 용광로 불이 보여야 합니다볼 수 있어야 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는 사순절을 준비하면서용광로 불길 앞에 서 있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전심으로 기도하고진심으로 참회하며 부활의 그 날까지 인내와 절제의 시간을 보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악인은 용광로 불에 살라 버리겠다고 말씀 하신 하나님은참회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능력의 말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2. 사순절을 준비하는 두 번째 마음 : “믿음 굳게하나님 나라 소망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믿음을 굳게 지켜가고진심으로 참회하여 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악인을 밟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밟는다는 의미는 악인들이 멸망을 받을 것과 비교하여 의인은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공의로운 해치료하는 광선 이라는 표현들은 빛 되신 예수님이 베푸실 구원의 은혜를 상징합니다다 나아가서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부활의 영광을 입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송아지 같이 뛰논다고 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하고 완전한 자유함을 뜻합니다.

3절 마지막에도 역시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용광로에 살라지는 것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셨기에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치료되고 뛰노는 것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 하셨기에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끝까지 교만하며 회개하지 않는 악인은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고기회를 얻어 참회하고 돌이킨 의인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두가지는 만군의 여호와가 반드시 이루실 일입니다속히 이루어질 일입니다나에게우리에게 이 두가지 중 하나가 적용 된다는 사실이두렵기도 하고감사하기도 합니다.

 

사순절에는 믿음의 주인 예수님치료하는 광선을 비춰 주시는 예수님 한 분에게만 내 모든 신경과 관심을 집중하셔서 믿음의 주인으로부터 가장 담대하고굳센 믿음을 공급 받으셔서 여러분 모두가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외양간에서 밖으로 나와 마음껏 들판을 뛰노는 송아지와 같이내 육신의 곤고함과 고단함을 이겨 나가시고 부활 영생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뛰노는 그 날을 소망하며 기쁨과 감사와 평안의 시간으로 채워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 사순절을 준비하는 세 번째 마음 : “말씀 순종돌이키는데 집중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아멘.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서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케 할 것인데만약 돌이키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러 이 땅을 칠까 하노라” 이 말씀이 구약성경의 마지막 말씀입니다돌이킬 마음의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을 끝으로 오랜 침묵과 암흑의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5절 말씀은예수님이 변화산 사건을 겪으신 후에 이 엘리야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이렇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이 말씀을 하시자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엘리야)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시대가 오기전까지 무엇을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을 까요“ 호렙산(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말라기 당시에는 모세 율법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그 시대 그 상황에 내려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이제는 신약시대입니다그러면 우리는 사순절을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모세의 계명을 이어 받은 신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 이십니다예수님에게만 집중하면 모든 것이 완성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어떤 행동을 하셨는지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는지어떤 태도로 이웃에게 겸손함을 보여 주셨는지를 보고 배우는데 집중하면 됩니다한 마디로 죽기까지 순종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따라가 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말씀에 순종하는 시간으로 채우겠다는 마음으로복음서를 중심으로 읽고 묵상하시고 기도 하십시오성령께서 도와 주셔서 진리를 알게 하시고 빛으로 인도하시는 생명의 길로 안내 받으며 예수님처럼 순종할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실 겁니다.

 

우리에게는 모세 율법이 아닌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임마누엘의 이름이 주어졌습니다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라고 말라기 선지자가 강조했던 것처럼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진심으로 나의 왕나의 주인예수 그리스도 에게로 돌이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사순절은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고된 연단의 시간임을 잊지 마시고 인내와 절제와 기도의 시간에 충실하십시오.

 

말라기 선지자가 우리에게 사순절을 이렇게 준비하라고 가르쳐 주는 여러가지 마음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엄중하게 말씀 하시는 하늘의 음성 앞에 서 보십시오.

 

   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는 용광로 앞에 서라고 말씀 하십니다어느 누구 할 것이 없이 우리 모두가 활활 불타는 용광로를 영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두려움이 없으면 돌이키지 않습니다간절함도 없게 됩니다용광로 앞에 서셔서 전심으로 기도하고진심으로 참회하는 사순절을 준비 하시기 바랍니다.

 

   ②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네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라고 말씀 하십니다더럽고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이 이제는 보혈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씻어 주십니다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셔서 값없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을 충만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③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전에 너는 속히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왜 주저 하십니까왜 망설이십니까왜 거기서 방황하고 계십니까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찾아가십시오거기가 내 고향이요 내 안식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정하신 그 날이 두려운 날이 아니라 소망의 날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날이 되도록, 00교회 모든 성도는 이번 사순절을 지나면서 영적인 암흑기와 침묵기를 반드시 벗어나셔서 공의로훈 해가 떠오르는 예수님의 부활영생의 영광 안에 거하시는 하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축복합니다.

기억하라   4:1-6

 

내일이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일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까, 시간은 우리의 감정여하에 상관없이 반드시 오고 있습니다. 월급날이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월급날이 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종업원이고, 월급날이 겁나는 사람은 월급을 지급해야 하는 사장님일 것입니다. 저축하는 사람은 월급날이 기다려지고,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은 월급날이 두렵습니다. 같은 날일지라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는가에 따라 감정은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날이 있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날이 저주스럽고, 무서운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날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4: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I. 여호와의 날을 기억하라(v1).

A. 본문

⑴반드시 다가올 하나님의 날이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될 사람이 있습니다.

1절 말씀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며,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뜻은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날에 완전히 멸망하여, 결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망시키기로 한 그 날

의인 롯은 구원받았으나 소돔 고모라의 죄인들은 다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불순종하는 바로와 그 백성의 장자를 멸망시키기로 한 그 날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집에는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와 애굽 백성의 가정에는 모든 장자와 첫 짐승들이 죽어서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하신 대로 멸망의 재앙을 받았습니다.

㈐노아 시대 홍수로 코로 호흡을 하는 모든 것들을 멸망시키기로 하신 그 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노아, 믿음으로 말씀대로 다 준행한 노아의 가정에는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던 그 시대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가축과 짐승까지도 다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진노의 날(6:17)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6: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마지막 진노의 날에는 정말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의의 태양이신 우리 주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 영광의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B. 적용

오늘 비록 험한 일을 당하여도, 내일에는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비록 오늘 넘어진다고 해도, 내일 다시 일어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험한 세월과 극심한 실패 속에서 다시 일어설 꿈을 가지고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큰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도 승리자가 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즐거움의 날을 기억하라!

 

 

⑴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위해서 의로운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2)

여호와의 날에는 의로운 해, 공의로운 태양이 역사 속에 떠오르게 됩니다. 2절 말씀을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⑵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낫게 하십니다.(2)

이 태양은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 이 광선에 쬐임을 받는 사람마다, 이 빛을 체험하는 사람마다, 이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건강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어 놀 것이라고 하십니다.

 

⑶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기쁘게 뛰노는 날이 오게 하십니다(2)

여기에 송아지는 죽기를 기다리는 늙은 소, 도살을 기다리는 다 큰 소가 아니라 새 생명의 감격을 뜻하는 송아지를 말합니다. 이 날은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나와 새로운 생명을 체험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너무 좋아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펄펄 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감격과 구원의 기쁨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⑷원수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날이 오게 하십니다.(3)

3절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인들을 밟는 날이 오리라 하시고 5절에는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5)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설명하시지만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왕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왕은 왜 심판을 받습니까? 그는 이적을 보고 뉘우쳤다가 다시 마음이 강퍅해져 마음이 닫혀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열 번씩이나 회개할 수 있는 기회, 믿을 수 있는 이적을 보여주셨음에도 회개하지 못하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B. 적용

⑴암에 걸린 환자는 방사선 치료를 하게 됩니다.

강력한 광선이 세균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치료는 엄청난 고통을 동반합니다. 정상 세포도 많이 죽여 버림으로 수명을 단축시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발하시는 이 광선은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 우리의 육신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의 영혼에 영생의 소망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음의 질병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의로운 태양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면 새로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주님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삶에 문제가 있다면 모시어 들이시기 바랍니다.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모신 자에게는 새로운 삶으로 충만하게 되는 은총이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 회복의 은총을 기억하라(vv56).

 

A. 본문

이 날을 위하여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절망과 어둠에 있던 백성들에게 찾아와 여호와의 날을 선포합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엘리야란 바로 성탄절에 오시게 될 예수님을 앞서 와서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을 뜻합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외치는 모습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6절입니다.

(4:6)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사실 이 말씀은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굉장한 복이 됩니다만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저주의 말씀이 됩니다.

 

 

⑴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보다 나은 것이 뭡니까?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3: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이 복된 말씀을 먼저 받고 먼저 맡아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하신 말씀대로 충성되이 증거 해야 할 의무를 맡은 자들이 유태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성경을 마음대로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일 때 어떻게 말했습니까?

(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7: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죄수 바라바는 살려주라고 외치고 죄 없으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책임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그 말대로 그들은 2천년 동안이나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독일 히틀러에 의해서 수백만이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⑵그러나 비록 이방인이라도 복음을 받아들인 민족은 어떻습니까?

복음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나라와 민족들이 언제나 복을 받았습니다. 복음 증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로마가 세계적으로 가장 발달된 문명을 누렸습니다. 복음 증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던 영국을 비롯한 유럽 나라들이 한 때 세계 문명의 중심 국가 노릇을 하였고 복을 받았습니다. 영국에서 핍박을 받은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미국이 복음 증거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할 때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살고 복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케네디 이후 학교에서 성경 공부를 못하게 한 후부터 Made in USA가 가장 판치던 한 때를 접어두고 온 세계는 양키 Go home 미국사람 떠나라! 고 하는 미국을 싫어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복음 증거의 중추적 국가가 아시아로 바뀌어졌습니다. 한국이 세계 복음화의 중요한 일을 감당함으로 한국이 얼마나 복을 받고 있습니까? 세계에서 한국이 성경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IMF의 위기를 만났으나 우리 한국은 가장 모범적으로 극복하는 나라로 위기 극복의 교과서적 나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왜 그러습니까?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고 회복하라는 명령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심정으로 우리는 가족과 민족을 향하여 돌아오라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을 외면한 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은 망하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외침, 세례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은 비록 세리요, 간음한 여인이요, 강도라도 구원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적용>

⑴여러분은 각자가 오늘날의 세례요한, 엘리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⑵그런데 문제는 세례요한의 사명을 다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성경 한 구절을 읽습니다.

(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간단한 설명

⑴말라기 당시의 백성들은 희생물을 드리는 자세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⑵말라기 당시의 백성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십일조 3:8-10)

오늘 말씀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이 시대의 엘리야, 세례요한의 외침으로 들려지게 되시기 바랍니다. 불순종하고 믿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은혜와 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라!>는 오늘 말씀을 진실되이 받아

 

⑴기억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⑵말씀을 순종할 때 주시는 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⑶오늘 말씀의 내용을 가감 없이 다 받아들이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⑷믿고 순종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라 (3:13-18)

 

 

이 시간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라라는 제목입니다. 13절에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내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까?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도 대적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 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여 불신의 소리나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14-15절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하면서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이 더 복 받고 살지 않느냐 말했습니다. 얼마나 믿음 없는 말입니까? 이런 말은 하나님 듣기에도 그렇지만 우리 듣기에도 귀를 막고 싶을만큼 어리석은 소립니다. 이런 사람은 없겠지요? 소리를 들어보면 압니다. 신앙인에게는 믿음의 소리가 납니다. 아직도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런 소리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렇게 대적하게 되었을까요?

 

 

1. 신앙의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14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그들은 계명도 지키고 금식도 했지만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혼이 잘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육신이 잘되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예수 믿어 건강하고 돈 잘 벌고 평안하며 만사형통하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대단히 신앙의 목적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은 복 때문에 특히 현세적인 복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방종교는 거의 다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배격해야 합니다. 대신 축복신앙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축복신앙을 함부로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는데 기복신앙과 축복신앙은 다릅니다. 축복신앙은 복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복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부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복 때문에 특히 현세적인 복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좋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복도 주시지만 육신이 잘되기 위해서 신앙생활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 신앙은 반드시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제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그저 제자의 모습이 좋게만 보이니까 감정으로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실망도 목적을 현세에다 두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십자가 지고 천국 가는 길입니다. 그저 고상한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 지고 영의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육신의 형통은 덤입니다. 육신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으세요. 그러나 이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는 것으로 신앙의 목적을 가져야 영혼도 잘되고 육신도 책임져 주십니다.

 

 

2. 육신의 눈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15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악인이 더 잘된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말입니다.

 

 

세상사를 보면 상선벌악의 하나님의 공의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습니다. 악인들이 속히 멸망당해야 하는데 더 잘되는 것 같을 때 신앙에 의문이 생깁니다.

 

 

이단의 괴수들이 많은 영혼을 멸망 길로 인도하고 엄청난 사업으로 돈을 벌고 호화로운 궁전을 짓고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는데도 당장 진멸 당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러합니다.

 

 

이번 북한이 임진강에 무단방류사건을 저질렀습니다. 국토해양부 조사에 의하면 자동경보시스템이 무단방류 3시간 전에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고장 낸 다음 엄청난 무단방류가 있었는데 그게 누구 짓이라고 생각합니까? 댐이 붕괴된 것도 아니고 계속 방류했으니 실수도 아니지 않습니까? 육신의 눈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그대로 두시는지 이해가 잘 안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방의 평안과 악인의 창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징계요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바로 서고 기도하면 다 처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연단하십니다. 귀히 쓰시면 쓰실 만큼 더 연단하십니다. 7:17-19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믿음 주시고 크고 강하게 쓰시기 위해서 온갖 연단도 주시는데 육신의 형통 한 가지로 하나님을 평가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영적으로 봐야 하고 멀리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진리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여기 피차에 말했다는 것은 불신앙적 풍조 속에서 죄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서로를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을 뜻합니다.

 

 

3:12-13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영의 말씀을 전해도 육으로만 받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진리를 말씀하셨지만 듣는 사람들의 관심은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강단을 통하여 서로를 통하여 피차에 말씀하게 하십니다. 그 때 그것을 받아 내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성장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 한 마디 생각 하나까지도 천국 컴퓨터 기록 장치에 기록하고 계십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말과 행동은 상을 주시기 위해서 나쁜 말과 행동은 심판 날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4. 좀 더 멀리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없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심판을 미루시기 때문입니다. 17-18절에 의인이 상을 받고 악인이 멸망 받는 모습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특별한 소유로 삼고 아끼셔서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14:10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했습니다. 9: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고후5:10에도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했습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 얼마나 교회를 받해했습니까? 그러나 긍휼을 받은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알면서 교회를 해코자 하면 그것이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그 날에는 그 운명이 아주 다를 것입니다. 한 영혼은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고 한 영혼은 영원한 불 못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천국의 알곡 삼기 우해서 오늘의 수고와 연단도 허락하심을 이해하십시다. 육신 바라보고 실망하지 말고 우리의 이웃 한 사람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기도하고 전도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의 말 막한 말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 없도록 합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 바른 신앙의 목적과 영의 눈으로 보고 진리의 권면을 받고 더 멀리 보는 눈을 가져 항상 믿음의 말과 행동만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말 3:7-12)


이 시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자기 영적인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큰 보배입니다. 이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고 삶의 문제까지도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육신적인 것은 물론 영적인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심히 하나님 앞과 먼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십일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질의 문제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복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문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서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문서답은 계속됩니다. 7절에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이렇게 대답합니다. 참으로 답답할 일입니다. 물질의 문제가 여러분의 믿음을 막고 있다면 이 시간 해결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십일조가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일까요?


1.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눅18:24-25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습니다. 물질 사랑이 믿음생활에 얼마나 해가 되는지 잘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바리새인들 그러기에 참 신앙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는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있을 것을 드리라 하시지 없는 것을 드리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만이 십일조와 첫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와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릴 첫열매를 챙기는 그 정성 하나님 제일주의가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물질을 관리할 청지기로서 합당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물질을 맡겨주었더니 자기 주머니로만 간다면 하나님께서 도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가 있기에 십일조의 의미가 큽니다.


물질이 우리 신앙을 막으려고 합니다. 물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물질 드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네 힘을 따라 네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물질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을 넘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십일조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십일조가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일까요?


2. 하나님의 집에 물질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종들이 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랬습니다. 나의 집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에 양식이 있어야 할 이유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지파 제사장이 먹을 양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위지파는 기업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의 십일조로 기업을 얻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육신의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므로 제단의 불이 꺼질듯 말듯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생활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역의 원리도 구약과 동일합니다. 십일조가 넉넉하여 교회에 목회자가 있음은 물론 자꾸 강단교류를 통해 여러 방향에서 쓰시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서게 될 때 교회는 더욱 활발해지고 성도들은 더욱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잘될수록 여러분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기 위해 세상 명칭으로 인건비를 충분히 준비해야 합니다.


신약의 일군들도 교회에서 나는 것을 먹으라 했습니다. 고전9:13-14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신구약이 동일하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이와 같이란 신약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그 앞 절에 더 자세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9:9-11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십일조의 원리는 평균의 원리입니다. 십일조를 통하여 일반 백성도 제사장도 대제사장도 평균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제사장이 가졌다 해서 오늘날 십일조도 다 목회자가 가진다?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틀린 말입니다. 이것은 십일조의 평균의 개념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도 십일조를 부정하는 설교를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시대는 십일조에 얽매인 시대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따라 하는 시대라고 말해 보세요. 헌금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십분의 이 십분의 삼은 고사하고 십분의 일도 제대로 헌금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소한 십일조는 하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집에 풍족함이 없습니까? 십일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선교국가가 된 것은 십일조의 전통 때문입니다. 십일조의 성경 근거적 유무를 논하기 전에 정말 잘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 외에도 타인과의 평균을 위해서 사랑 안에서 노력해야 합니다. 십일조로 하나님의 집에 물질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일군들이 더욱 활발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봅시다. 그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며 은혜 받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만 잘하면 교회의 물질문제는 걱정이 없고 세계복음화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단은 십일조를 교회에서 없애려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십일조가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일까요?


3.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이기 때문입니다.


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였습니다. 규례란 율법이란 말입니다. 율법에서 성문화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십분의 일이라 해서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드렸고 야곱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을 본문에 도적이라 했습니다.


율법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이란 최소한의 규정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율법 그 이상 충성해야 옳지만 최소한 율법 만큼은 되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도 최소한의 규정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지만 최소한 살인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최소한의 규정만큼도 지키지 못한다면 이것은 살인자요 간음자요 이방인이요 도적인 것입니다. 최소한의 십일조도 하지 못하면서 초대교회처럼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신약시대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그 이상도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기 소유권을 부정하고 나누어줄 수 있겠습니까?


십일조를 규례로 볼 때 십일조를 범하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도적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 원리는 거짓이 없습니다. 율법에 안식일을 범하면 죽으리라. 범해 보면 정말 죽어요. 육은 말짱할지 모르지만 심령이 죽어요. 그러므로 염려 걱정 등으로 마음의 안식을 범치 마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도적으로 보신다면 도적입니다.

 

본문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셨습니다. 멀리보고 길게 보세요. 지상에서만 아니라 천상까지 길게 보세요. 여러 핑계와 논리로 핑계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도적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 십일조가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일까요?


4.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복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11-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뭐든지 하나님이 하시면 쉽습니다. 질병도 사람은 많은 도구로 고통을 주면서 치료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신유의 역사도 그렇고 방법을 내셔도 간단합니다. 장사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면 쉽습니다. 인생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면 안전하고 평탄합니다.


농사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면 쉽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하려니 허리가 휘고 가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떠나 살려고 하니 힘들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하려고 하니 황충이 먹어 토지소산을 멸하고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고 땅은 박토가 되어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여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십일조와 그 정신을 말씀하면서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십분의 일보다 더 풍성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은 최소한의 것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만큼은 지켜져야 합니다. 십일조의 의미는 다양합니니다. 그 속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교회 사랑, 내 영혼 사랑, 세계 선교, 육체의 평안과 물질의 온갖 복이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계명입니다. 우리 모두 온전한 십일조를 통해 우리 마음이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사랑 받고 복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말 2:10-16)


이 시간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불변합니다. 이 우주가 변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부부가 많지만 그 사이는 각각 다른 것과 같습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우리의 잘못입니다.

본문을 보면 말라기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책망합니다. 그 잘못은 문란한 결혼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도 율법을 버리고 육체의 본성을 따라 행함으로 언약 백성으로서 순결을 상실했습니다. 영적으로 성도는 예수님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면 안 됩니다. 바울이 엡 5장에서 가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씀하듯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혼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문제가 없으려면?


1. 존귀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10절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남편과 아내가 한 아버지의 자녀이고 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말씀은 남편과 아내가 모두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문화에 따라서 남존여비 혹은 여존남비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잘 정립해야 합니다. 성경은 남존여비나 여존남비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종도 아닙니다. 누구의 기계도 아닙니다. 다른 한 편의 부속품이거나 더 낫거나 못한 존재도 아닙니다. 상호 역할과 질서가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귀히 여겨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예수 안에서 동일하게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벧전3:7에도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했습니다. 고전9:5에는 “자매 된 아내”라고 한 말씀도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형제된 남편입니다. 부부이기 전에 성도요 형제요 자매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려면 하나님을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58:13 말씀처럼 주일도 이 날을 존귀한 날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면서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삼상2:30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셨어요.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좋은 관계가 됩니까?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 가질 때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2. 마음과 뜻을 맞추어야 합니다.


11-12절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율법(신7:3)에는 우상숭배자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결혼 잘못하면 저주입니다. 조상의 저주가 삼사 대까지 갑니다. 신앙의 교육도 끊어집니다. 이세벨 왕후가 그랬듯 우상숭배자의 딸은 온 나라에 우상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복 받으려면 경건한 가문에서 골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이방신의 딸과 결혼합니다. 데리고 오면 신앙생활하겠지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도 아니고 이방신의 딸이니 두고 보면 신이 들려 십중팔구 무당이 됩니다. 그러니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갈등 가운데 가장 큰 갈등이 종교적 갈등입니다. 종교가 다르고 뜻이 맞지 않으니 가정은 날마다 쑥대밭입니다. 혹은 남편도 동화되어 따라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무엇을 하면 같이 하세요. 공부를 해도 같이 하세요. 은혜를 받아도 같이 받으세요. 꿈을 가져도 같이 가지세요. 율법에 보면 “소와 나귀를 겨리 하여 갈지 말라”(신22:10)고 했어요. 서로 다르니 얼마나 고통이겠습니까? 서로 이해가 필요하고 뜻이 맞아야 합니다. 뜻이 맞지 못하면 날마다 눈물입니다. 나는 동으로 가자는데 서로만 가려고 하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예 포기하고 사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하나님 앞에서 내 고집 꺾지 못하면 자신이 불행할 뿐입니다. 그 끝나지도 않는 광야의 연단 내 고집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묵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죽어지고 내가 꺾어져야 합니다. 자기주장이 센 사람에게는 좋은 것 알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철저히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서 내가 순복되어야 합니다.


3. 사랑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13-14절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이 말씀처럼 백성들 중에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조금은 양심이 찔렸는지 하나님께 봐달라고 헌물을 열심히 바치지만 그것은 뇌물이지 제물이 아닙니다. 신10:17에 “하나님 여호와는 - 뇌물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원하실 뿐입니다. 성경은 음행한 연고 없이는 이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 화목하지 않다면 심적 이혼이란 점입니다. 몸은 함께 살지만 마음은 따로 살기 때문입니다. 부부일체란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입니다. 떨어져 사는 것이 더 편한 부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통계에도 다시 태어나도 이 남편을 만나야겠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성경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부부입니다. 부부일심동체이지만 가까운 이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녀에게는 천사이면서 부부 끼리는 원수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혼과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용납의 문제요, 대화의 문제입니다. 참지 말고 용납하세요. 참으면 문제가 터집니다. 그냥 단점과 잘못된 점을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좋아야 합니다. 만나기만 하면 가르치려 말고 심각한 문제로 대화하지 마세요. 말을 하면 같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시시한 대화를 하세요. 서로 용납하고 좋은 대화로서 화목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은 용납과 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보혈로 용납하셨음을 믿고 양심의 평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늘 기도로서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듣기 좋은 기도를 더 많이 하세요. 할렐루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믿습니다. 간구보다 찬양의 기도가 더 많아야 합니다. 감사하면 환경이 바뀝니다. 기도가 끊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시고 기도시간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4. 다른 마음 품지 않아야 합니다.


15-16절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하나님의 의도는 일부일처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실 때 한 사람씩 만드신 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완악하여 중첩을 허용했습니다. 허용했다고 그 결과를 받지 않은 것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여러 아내 때문에 얼마나 고통이 많았습니까? 본래 하나님의 의도는 일부일처였습니다. 15절에 암시되듯 가정들의 문제는 한 사람과만 결혼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결혼의 성결성이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기본 틀입니다. 히13:4에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다른 대상을 향할 때 부부의 관계가 아름답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려면 하나님만 사랑해야합니다. 다른신이나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요일2:15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우상숭배하거나 우상숭배자와 결혼하면 백성 중에서 끊어졌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됩니다.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과 결혼한 아브라함 보세요. 그 후 13년이나 침묵하셨습니다.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세상 사랑, 마음의 상처 다 씻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 됩니다. 그러나 회복되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징계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다 아십니다. 마음으로도 범죄하지 말고 깨끗한 마음을 가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기독교 가정을 이루십시다. 그러기 위해 신앙생활 잘하고 늘 가정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가집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내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보혈과 기도로 화목하고 하나님만 사랑하여서 성령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예배 잘 드리려면 (2:1-9)

 

이 시간 예배 잘 드리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합니다. 예배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십니까?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여호와께 제사하는데 여호와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았지만 가인은 크게 시험 들어 동생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그것만큼 큰 복이 없지만 반대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불행은 없습니다. 드리지 않는 예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이 불행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잘 드리면 마음의 변화는 물론 온갖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누리는 복된 사람이 됩니다. 모든 것은 예배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무너진 제단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생활을 점검하자는 말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잘못된 제사를 드리다가 복은 고사하고 저주와 여호와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사명을 잊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자신의 탐욕을 채웠던 것입니다. 예배생활이 잘못되면 이렇게 됩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배가 명령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순종할 수 없는 것이 예배란 말씀입니다. 1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히브리어 원문에는 명령이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의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시는 강력한 명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2-3절의 내용으로 보아 명령이라기보다 경고에 가까운 명령입니다.

 

왜 예배를 명령할까요? 예배는 생사의 문제입니다. 내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 예배에 달렸습니다. 대대로 신앙이 흘러가느냐가 예배에 달렸습니다. 교회 부흥이 예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이어야 합니다. ‘예배하지 않으면 죽는다. 예배하라는 경고 섞인 명령입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배의 명령을 받고 있음 알아야 합니다. 보통 명령이 아니라 예배하지 않으면 죽는다.’ 는 명령입니다. 예배가 명령인 줄 깨닫고 절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2. 예배에 대한 경고를 알아야 합니다.

 

2-3절 함께 읽으십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제사장의 사명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망각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여기 저주하였나니의 히브리어 원문은 하나하나의 복을 남김없이 저주하였다.’는 뜻입니다. 예배가 삶의 전반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등한시하면 예수 안의 어떤 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만 못들을까요? 평안도 없어요. 교육도 안 되요. 시험도 있어요. 승리도 못해요. 넘어지게 되요. 화평도 없어요. 불신을 향해 달려가요. 예수 안에 주신 어떤 복도 누릴 수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살려거든 예배하고 죽으려거든 예배하지 마라', '복 받으려거든 예배하고 저주 받으려거든 예배하지 말라'고 담대히 경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요 흐름입니다.

 

너희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이 말씀은 종들의 도움이 끊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배가 사라지면 천사의 도움은 사라지고 우리 삶은 막막해집니다. 예배할 때 천사들이 나타나 돕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천사들이 더 많이 나타나 우리를 돕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복을 주고 기쁨을 뿌리고 빛을 뿌립니다. 물론 천사는 전달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등한시하면 복 받지 못한다고 경고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짐승을 잡을 때 나오는 내장의 똥은 의식법상으로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똥은 죄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물의 똥은 성전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우리의 죄도 성령의 불로 살라야 합니다. 이런 똥으로 얼굴에 바른다는 것은 수치와 조롱을 의미합니다. 이런 수치와 조롱에는 하나님께서 역성해 주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배 생활이 잘못되면 범죄하고 쓰러지고 수치를 당합니다. 예배가 우리를 의롭게 해주어요. 예배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 변화받고 능력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시험이 오면 예배에 문제가 있어 그런 줄 아세요. 기도와 찬송과 말씀생활이 부족해서 사명감당하지 않아서 그런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배 안 드리고 무슨 일이냐고 경고해 주어야 합니다. 예배를 등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경고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3. 예배의 축복을 알아야 합니다.

 

4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레위와 세운 언약은 제사장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이 제사장 사명을 통해서 온갖 아름다운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우리 잘 생기지 못했어도 예배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우리 배경 없고 재주 없어도 예배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예배의 축복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5절에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이처럼 예배하면 생명이 임하고 마음과 육체에 평강이 임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영혼이 건강해지고 하나님의 손길이 치료해 주실 뿐 아니라 뇌에서 온갖 좋은 물질들이 분비되어 치료한다고 합니다. 영육 간의 건강과 삶의 형통은 예배 잘 드리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천국은 예배하는 곳입니다. 반면 예배가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우리 삶이 천국이 되고 싶으면 예배하고 지옥이 되고 싶으면 예배 안 드리면 됩니다. 아주 틀림없습니다. 천국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찬란하고 평강이 넘치는 것도 그만큼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예배하다가 복을 받읍시다. 예배의 축복을 아셔야 합니다.

 

4. 예배의 은사를 알아야 합니다.

 

5-6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여기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벌게이트역이나 70인역 성경에는 내가 그에게 경외심을 주었노라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잘 된 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레위 지파에게 보다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보다 많이 경외심과 말씀과 의로움과 화평과 바르게 행함과 많은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 주신 목적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영광 돌리라고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며 친근감과 경외감을 가지고 예배하게 됩니다. 이 예배의 은사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어린 주일학생이 뭘 안다고 며칠씩 금식하며 기도하고 이제 중학생이 뭘 안다고 교회를 위해 물질 달라고 한 겨울을 마룻바닥에서 자며 기도하고 이것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고도 가능한 일일까요? 강제로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특별한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이들 보세요. 대부분 목회자가 됩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려고 누구보다 더 뛰어난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11:1-3"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도 그런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기에 일생을 십자가 지며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분야에 힘써 보세요. 그러면 예배를 더 잘 드릴 은사가 열립니다. 예배할수록 더 예배하고 싶어집니다. 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습니다. 예배에서 최고의 희열과 행복을 느낍니다. 더 교회 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다윗이 어느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뵈올꼬 했던 것도 그런 은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힘쓸 때 가장 잘할 수 있습니다.

 

5. 예배의 범위를 알아야 합니다.

 

7-9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제사장의 임무는 백성들을 지도하고 재판하는 일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잘못하여 백성으로 더 범죄하게 했습니다. 바로 가르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나요? 잘못 판결하니 악인이 득세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무법천지의 세상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좁게는 먼저 나부터 말씀으로 잘 교육 받고 내 생각을 잘 재판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편을 택해야 합니다. 예배는 삶까지 연결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영적예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으로 무장하고 매사의 판단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될 때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레위 제사장은 오늘날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예배는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생명이 흐르고 복이 흐릅니다. 우리 모두 예배생활 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주신 온갖 아름다운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점검하라 (말 1:6-14)

 

이 시간 “예배를 점검하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행위는 예배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예배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부흥 세계복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우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이 살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또 많은 영혼들이 그 축복을 사모하게 됩니다.

 

바른 예배를 위해 점검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예배의 대상을 점검해야 합니다.

 

6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의 제사가 여호와 하나님께 열납 되지 못한 것은 그 첫째가 예배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하지만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경외심이 없다란 예배의 대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레위인들은 제사를 신앙이 아닌 의무로만 이해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크시고 영원하시고 나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사랑 많으시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경외심이 예배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에 경외심이 존재해야 합니다.

 

2. 예배의 목적을 점검해야 합니다.

 

7절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여기 더러운 떡이란 8절에 나오는 병든 제물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율법에서는 흠 있는 제물을 금했습니다. 레22:20에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도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이 눈멀고 절고 병든 짐승을 제물로 드린 이유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경제사정이 어려워 온전치 못한 제물을 금지시킨다면 제물이 줄어들어 제사장들의 생계의 수단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상에 무엇이 올라가든 어떻든 우선 우리가 살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이처럼 예배가 누구를 위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있는지 나를 위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은혜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은혜 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은혜 받으러 오기 때문에 은혜가 없어요. 축복 받으려고 오기 때문에 복이 없어요.

 

예배의 목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드리는 제물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모든 것이 사람들 좋을 대로 나갑니다. 이것이 예배의 인본주의입니다. 예배의 목적이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려는 마음으로 가득해 보세요. 그 마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예배드리기 전부터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예배의 목적이 잘못되면 예배가 아닙니다. 나를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3. 내용을 점검해야 합니다.

 

8-9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지금은 신약시대로서 이런 희생은 드리지 않습니다. 여기 예표하는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친히 제물이 되시므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렇다고 드릴 것이 없는 것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에서 예배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찬미의 제사라는 말도 나오고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도 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내용도 중요합니다. 전하는 말씀이 어떤 것입니까? 부르는 찬송이 어떤 것입니까? 드리는 기도가 어떤 것입니까? 세상 윤리나 도덕을 전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닙니다. 감사와 간구를 구별하지 못하며 중언부언하는 기도라면 기도가 아닙니다. 혹은 드리는 물질에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4.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역겨우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런 예배는 열납되지 못합니다.

 

예배자가 다른데 예배가 같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같겠습니까?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열납되게 드려야 합니다. 응답이 있어야 예배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고 하신 것처럼 바로 된 예배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합니다. 위로가 임합니다. 확신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희망을 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성령의 불이 임합니다. 그러나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영적 감각으로도 그낄 수 있어요(요일5:15).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불경스런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십니다.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촛대를 옮기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중심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옮겨질 것을 예언합니다. 교회 부흥의 원리는 같습니다. 영광 돌리는 예배를 드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5.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12-13절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을 번폐스럽게 여겼습니다. 여기 “번폐”는 ‘피로, 고통’이라는 뜻으로 어렵고 괴로운 일 또는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일이 많아서 지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섬기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날마다 반복하는 희생의 제사에 지쳤습니다. 절기가 되면 수만 마리의 양을 잡아야 합니다.

 

오늘 날로 치면 누가 새벽기도회를 만들어놓고 이 고생시키느냐는 식입니다.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설교 횟수가 많습니다. 똑 같은 말씀을 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예배가 많아도 기쁜 마음이어야 합니다. 예배가 없다면 무슨 세상 낙이 있을까? 사모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를 마지못해서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고 또 다음 예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한 시간이 짧아 예배가 끝나고도 예배당을 떠나기가 싫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예배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예배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6. 결과를 점검해야 합니다.

 

14절에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당시 백성들은 흠 없는 수컷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좋은 것보다는 못한 것에 손이 갔습니다. 그래서 마치 흠 없는 짐승이 없는 것처럼 속여 나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흠 없는 수컷 즉 속죄물이 확실하지 않으면 제사가 아닙니다. 속죄물이 확실하지 못하면 저주가 임합니다. 제사 잘못 드리면 저주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배가 다 같지 않습니다. 드리는 자의 상태가 다른데 어찌 같겠습니까?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드린 후 심령이 소생할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도리어 답답하고 시험이 옵니다. 속죄물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속죄의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믿음으로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보혈의 확신 가지고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교회와 한국교회의 미래도 예배에 달렸습니다.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보혈의 확신과 말씀과 성령으로 씻은 깨끗한 심령으로 예배하세요. 가정예배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가정예배 자체가 기독교 교육입니다. 가정예배가 살 때 신앙이 대대로 흘러갑니다. 나아가 교회가 살고 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미래의 희망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한 예배자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예배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드높을 때 천국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예배를 위해 기도 준비를 많이 하십시다. 우리 모두 우리의 예배를 점검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고 이 땅에 천국이 임하는 예배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라. (1;1-5)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으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느끼는 생각이 다르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성경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하셨는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울하며 부정적이고 자기를 불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2절에 보면 완전한 동문서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그렇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모르니 감사는 고사하고 불만불평의 배은망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배은망덕하지 않으려면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그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은 코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느낌에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멀리 그리고 넓게 생각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비참한 바벨론의 포로생활 속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들을 일으켜 주셔서 나라를 재건하게 하시고 그 숙원이던 성전까지 짓게 하신 것을 생각했다면 어찌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우선 당하는 현실만 생각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그동안 크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그들은 우선 풍족하지 못하고 우선 힘들고 우선 고통스런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의식주가 풍성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면 그 때만 사랑일까요?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에 매사가 답답합니다. 좀 깊이 생각하면 좋으련만 너무 쉽게 속단하고 오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통하면 하나님이 사랑하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단세포적인 생각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 사랑을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인들이 자기 소원만 아뢰는데 익숙하지 묵상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세요. 마음의 상처 묵상하다가 시험들듯 이제는 그런 일 그만 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종일 묵상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을 경외함이 달라지고 우리의 행복감이 상승하고 우리의 인생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2. 구속의 은총을 생각해야 합니다.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 형제 중에 에서는 버리시고 야곱을 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예정론이 나오는데 이스라엘은 이 선택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무 조건 없는 절대적인 사랑으로 택해주신 그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즉 구속의 은총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칼빈이 예정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우리 구원은 미리 예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가 부당하다고 부정하는데 어찌 됐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이고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백에 하나 천에 하나 선택해 주셔서 예수 믿게 해주신 은혜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신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택하시고 불러 주심은 우리가 영원토록 감사하고 찬양할 제목입니다. 영원 전부터 나를 계획하시고 세상에 나게 하시고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구원해 주시고 성령으로 불러주시고 천국까지 예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롬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놀랍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도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인생 가운데 우리를 불러서 예수 믿게 하시고 하나님 자녀 삼으신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에서를 버리시기까지 야곱을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3. 특별하신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왜 하나님은 에서를 말씀할까요? 에서의 자손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에서의 에돔 족속도 함께 바벨론에 잡혀갔는데 야곱의 자손들은 해방되어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지만 에서의 후손은 나라를 찾지도 못하고 파멸에서 처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에서와 같이 마땅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에서의 후손과는 전혀 다른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에서의 나라는 여우들이 집을 짓고 여전히 황무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로 포로에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의 바벨론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얼마나 특별은총을 베풀고 계신 줄 아십니까? 그런데 그냥 벗어납니까? 특별한 연단을 통해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다 은혜 받아 회개하고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옷 입은 무리가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이런 특별은총 속에서 다시는 바벨론의 상품을 사지 않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히12:6-8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온전케 하셔서 귀히 쓰시고 하늘의 온갖 복된 것으로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선 고통스런 현실만 생각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지혜롭고 봐야 합니다. 미련은 그 무엇으로 구제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세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징계를 많이 받는 자일수록 더욱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욥이 그랬지요? 7:17-18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욥은 분초마다 징계를 받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크게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만 잘못해도 치십니다. 하루 후에가 뭐에요. 욥의 말이 과장이 아니에요. 분초마다 치셔요. 눈 앞의 고난만 바라보지 마시고 나를 온전한 사람 만들어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사람 만드시려는 그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4. 장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4-5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이 말씀대로 에서의 후손은 희망이 없어요. 에서의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의 거듭된 자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기할 수 없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를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죄악의 결과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그런데 너희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의 앞날은 그들과는 달리 희망으로 가득한데 무슨 하나님 사랑 타령이냐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미래를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낀다는 말입니까? 에서의 자손 즉 오늘로 말하면 불신자들은 모두 영원한 절망의 지옥에 떨어지는데 하나님 백성들은 그런 심판이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4:1-3에 주님은 다정한 음성으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지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5.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5: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셔서 체험하고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 그 사랑에 기뻐 뛰게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유대인들이 아기 예수를 영접치 못했습니다. 이처럼 조금만 더 신앙생활 잘하면 그 사랑을 체험할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2절의 하나님의 사랑은 아하브인데 그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큰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우선 현실만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감사하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하고 불만 불평한다면 스스로 불행할 일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그 사랑을 믿도록 우리의 신앙을 훈련하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사는 한 어머니에게 1950년대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있던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 제가 제대를 한 달 후에 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그래, 고생 많았다. 빨리 오너라.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단다그러자 아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집에 갈 때 한 친구를 데려 가야해요. 그 친구는 부상 당하여 한 눈이 실명되고 팔과 다리 하나씩이 없는 불구자예요. 오갈 때가 없어 제가 데리고 살까 합니다.” “그래, 걱정말고 데려와. 고생들 했으니 집에 데려와서 한 일주일쯤 푹 쉬게 해 주어라.” “어머니 일주일은 안 됩니다.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합니다. “애야, 네가 그 친구를 평생 데리고 산다는 것은 정말 기특하다마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러자 아들은 알았습니다. 어머니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후 일주일, 경찰에서 당신의 아들이 어젯밤에 센디에고 호텔 12층에서 투신자살을 했으니 사체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놀란 어머니가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바로 한 눈이 없고 한 팔과 한 다리가 잘려 나간 그 친구라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그렇게도 모른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신 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마음은 더욱 밝아지고 우리 삶은 변화되고 아버지의 사랑의 기적은 더욱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에서만 찾지 말고 좀 더 멀리 좀 더 깊이 좀 더 자세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복 말3:7-12, 고후9:6-15

 

세계적인 치약 콜 게이트는 창설자인 콜 게이트의 이름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중풍병자요 어머니는 폐병 환자였습니다. 콜 게이트는 거지와 같이 방황하다가 미국으로 가는 선편의 짐짝 사이에 숨어 밀입국하다 들켜서 끌려가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는 중풍병자요, 어머니는 폐병으로 고생하여 먹을 것이 없어 방황하다가 미국으로 가고 싶어서 몰래 탔다고 고백했습니다. 선장이 콜 게이트의 사정을 듣고 딱해서 그러면 너는 내 아들이 될 수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 허락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콜 게이트는 선장의 양아들로 입적 되었습니다.

 

그 후 선장이 늙어 배를 팔아서 치약 공장을 하였는데 공장이 잘 되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콜 게이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아들이 어려서부터 십일조 생활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콜 게이트는 오른쪽 포켓에 십일조, 왼쪽 포켓에 수입금을 넣었습니다. 그는 수입이 적으나 많으나 반드시 구별해 놓았다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곤 하였습니다. 현재는 콜 게이트의 하루 수입이 금으로 4사람이 질 수 없을 만큼의 수입을 한다고 합니다. 그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반드시 구별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여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셨는데, 십일조만큼은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응분의 축복을 내려주시는 신앙의 법칙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시험해보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십일조는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식입니다.

 

구약 본문 말3:8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했습니다.

 

성도란 구별된 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하늘백성들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자신의 소유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것 중 일부를 돌려 드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처음부터 아예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라서 이것을 가지고 선교를 하거나 구제나 봉사를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내가 생색을 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래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십일조와 봉헌물이라고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십일조 하는 분은 십일조를 하고 남은 9/10를 많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드린다고 생각하니 1/10이 많아 보입니다.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인데 나에게 9/10나 쓰라고 하시는 것이니 하나님 너무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야 구별 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십일조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집사가 되고 시작해야지 하다가는 결국 못하고 맙니다. 아예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십일조를 생활화하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정해진 월급은 십일조를 하면서 보너스나 생각지 않은 수입은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작은 복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큰 복은 받을 그릇이 못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신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크든 작든 반드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반드시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목사 한분이 교회 문을 나서려 할 때 문밖에 서 있던 한 분이 물었습니다. “제가 이 교회 목사님을 잠깐 만나러 왔습니다만..” 말하는 그 사람에게는 코가 문드러지고 손이 꼬부라진 문둥이였고, 가마니 한 장을 끼고 깡통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목사는 , 제가 이 교회 담임목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 저는 상주에서 사는데 저도 예수를 믿습니다. 보시다시피 몸이 온전하지 못해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병은 다 나았지만, 모양이 이래서 어울려 살기가 힘이 들지요. 다름 아니라 동냥을 해서 번 돈이지만, 그래도 십일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리고는 깡통에서 꺼내 주는데 오천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3장과 동전을 합하여 7천원을 목사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는 십일조라면 나가시는 본 교회에 드릴 것이지 어찌 제게 주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아주먼 곳에 있답니다. 그저 번 것 중 십일조는 항상 이렇게 따로 모았다가 매월 첫 날이 되면 가까운 교회에 드린답니다.” 그 돈을 받아 쥔 박 목사님은 전기에 감전이 된 것처럼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목사에게 십일조를 건네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무척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다음 주일 설교를 하시면서 이 이야기를 들은 성도들 중 그 동안 십일조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아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부담이 되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늘 복을 받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도의 신앙고백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행동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한 선물을 받아 누리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연보는 선한 씨앗을 심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신약 본문 고후9: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했습니다. 고후9:11-12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7절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인색함이나 억지하지 말라했고,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한다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을 씨앗을 심는 것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씨앗을 심듯이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가진 것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거나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씨앗을 심는 것과 같아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사짓는데 적용되는 추수의 원리가 영적인 삶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권면하기를 하나님께 많이 드리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릴 때는 추수의 원리를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심을 때는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씨앗으로 사용하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선순위를 제일 먼저로,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1: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L. 픽켓 목사님이 했던 설교 가운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전도회장님이 한 번은 목사님을 찾아오더니, “목사님 다음 주일날 광고를 해주세요. 교인들보고 빈 병, 폐품을 전부 모아 가져와 달라고 해주시면 그걸 팔아서 교회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하면서 광고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이 설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먼저 잘라서 바치는 것이지 폐품 팔아서 하나님일 하는 것 아닙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일 하려는데 돈이 모자라서 그래요.”하고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기에 목사님이 알았습니다.” 대답하시고 주일날 여러분 집에 있는 빈 병이나 폐품이나 휴지 조각 있으면 전부 가져오십시오. 그것을 모아 팔아서 우리 여전도회장님 살림살이 좀 보태주려고합니다. 회장님 용돈 좀 마련해 드리려 합니다.” 그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여전도회장이 길길이 뛰면서 담임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를 어떻게 보고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어떻게 그런 모욕을 줄 수 있습니까? 나를 거지로 아셨나요? 자존심 상해서 교회 못나오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정중하게 웃으면서 회장님 그 빈 병 팔아서 모은 돈으로 회장님이 쓰면 자존심 상하고, 하나님이 쓰시면 하나님은 그럼 자존심도 없는 분이신 줄 알았습니까?” 그래도 여전도회장이 화가 안 풀렸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하고 씩씩거리다가 밤늦게 잠이 들었는데 꿈에 천국에 갔더랍니다. 그 곳에는 많은 교인들의 천국집이 보이는데 황금으로 지은 집사님의 집, 진주 보석으로 지은 권사님, 집사님 집들이 가득하게 있는데 자기 집이 없더랍니다. 동네가 끝나는 한쪽 개울창 아랫동네에 기둥은 병 조각 부셔서 세우고, 벽은 휴지조각 뜯어서 갖다 붙인 집이 있기에 이게 누구 집인가 하고 가서 봤더니 자기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깼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 아니구나! 회개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하나님을 가장 중심자리에 높여서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연보나 구제는 좋은 것으로 선한 씨앗을 심는 것과 같고, 때가 되면 반드시 선한 결실을 가두게 됨을 알고 많이 심고 풍성히 거두는 복 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이 일은 하늘에 보화를 쌓고, 하늘 문을 여는 복 된 일입니다.

 

구약 본문 말3: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 중의 비결입니다. 본문에서 십일조생활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받습니다(10). 예수 믿는 사람의 복 중의 복은 하늘 문이 열리는 복입니다. 신앙고백을 올바르게 한 베드로에게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주셨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제단을 쌓을 때 하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황충을 금하여 주시는 복입니다(11). 땅에서 잘 되는 복 즉 농사나 과수에 해충(황충)을 금하여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아무리 수고하여 농사를 잘 지어도 황충이 와서 갉아 먹으면 모든 수고가 허사입니다. 농사나 과수뿐만 아니라 사업도 황충이 임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매를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11). 땀 흘려 수고하였는데 추수의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포도나무 밭이나 다른 농사만 아니라 사업과 자식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끝까지 잘 되어야 합니다.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들이 복되다 합니다(12). 기름진 땅에서 최상의 열매가 맺어지듯 온 땅이 복을 받아 아름다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삼천리금수강산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남한은 푸르고 아름다운 땅인데 하나님을 외면한 북한은 완전히 민둥산에 버림받은 땅 같습니다. 백성들이 복을 받으면 땅도 잘 되는 복을 받습니다. 또 십일조 하는 사람은 매사에 구별 된 모습으로 처신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도 물질에 대하여 신용을 인정받게 되고, 이웃을 복 되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존귀한 자로 인정받고 쓰임을 받게 됩니다. 미국의 우수한 대학 가운데 시카고 대학이 있습니다. 이 대학은 설립 이래 100년 동안 5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냈으며, 현직 교수 중 노벨상 수상자가 29명이나 됩니다. 미국 사회에서 시카고 대학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 설립자는 대 부호 록펠러입니다. 그는 생전에 12개의 종합대학과 4,928개나 되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미국을 움직이는 힘은 어떤 의미에서 록펠러에게 나오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록펠러는 86세가 되던 해에 하늘나라로 먼저 간 아내를 기념하여 시카고 대학 안에 기념교회를 건축하여 헌당하였습니다. 헌당 예배에서 시카고 트리뷰의 한 기자가 연세 많은 록펠러에게 물었습니다.

 

록펠러씨, 당신이 26년 동안이나 세계제일의 부를 누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록펠러씨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우리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유산이었는데요?” “나는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먹고 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록펠러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신앙의 유산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이제는 네 발로 걸어서 교회에 다니거라.’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20센트의 용돈도 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나는 너무 기뻐서 냉큼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록펠러야, 돈을 도로 내어놓아라. 20센트는 너에게 준 것이다. 그렇지만 네가 써서는 안 될 돈이 그 안에 있다. 십일조다. 너에게 생기는 수입에서 먼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를 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2센트를 따로 헌금 봉투에 담아 주셨지요.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내 일생에 약속의 말씀이요, 가장 큰 유산이 되었습니다. ‘항상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한다. 그러면 땅 위에서 사는 동안 복을 받을 것이야록펠러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반드시 지켜야 할 유언으로 받아 그것을 지킴으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세운 그 많은 대학과 교회에는 설립자의 이름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으로 한 일이니 나를 내세울 것이 없다는 그의 유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물질을 유산으로 받지 않고 온전한 신앙을 유산으로 받아 그가 드린 십일조로 온 세상이 복을 받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록펠러가 있기까지는 어머니의 위대한 신앙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 대대로 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정리^^

 

.십일조는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식입니다.

 

.연보는 선한 씨앗을 심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일은 하늘에 보화를 쌓고, 하늘 문을 여는 복 된 일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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