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 고전15:20-28
한 사냥꾼이 있었는데,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면서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뱀을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뱀을 쳐다보았더니 뱀도 어딘가를 노려보았는데,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개구리를 노려보았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로 꿈쩍 않고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개구리는 무당벌레를 잡으려고 노려보았습니다. 무당벌레도 꼼짝 않고 있었는데, 진딧물을 잡아먹으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냥꾼은 그 먹이사슬을 보다가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이 경이로운 현장을 목격한 후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혹시 누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 것은 아닐까?” 사냥꾼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언제인가는 죽음에 의해 잡아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피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통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분이 있습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본문 고전15:20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했습니다. 첫 열매가 열리고 나면, 그 뒤를 이어 계속해서 열매들이 열리게 되는 것처럼 성도들이 그 뒤를 이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와 죽음과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입니다. 한 사람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범할 때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죽음의 형벌도 모든 인간이 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의 길이 열려지고, 이 예수님 안에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의 사슬로 하나로 묶여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는 ‘의로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담 안에서 하나로 묶여있던 사슬을 끊어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함께 죄에 묶여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베다니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지만 말씀 한마디로 다시 살게 하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침체된 신앙이 살아나게 되고, 사명이 살아나게 되고, 삶의 의욕이 살아나게 되고, 인간관계가 새로워지고, 예배생활에 활력이 생기게 되고, 봉사와 헌신이 살아나게 됩니다. 기쁨, 감사, 영생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많은 순교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고난을 당해도 그 고통은 잠깐이고, 장차 받을 영광은 영원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모든 제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다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2.말씀을 신뢰하여 믿을 때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고전15:3-4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한동안 부활을 믿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던 것도 주님이 이미 여러 차례 십자가의 일과 부활에 대한 예고의 말씀을 믿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주류라고 항상 티격태격하는 적대적인 사이였는데,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협력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종파 모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주류라고 한 것은 다 거짓되고, 헛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리새파는 자기들이 가장 경건한 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 구약성경 외에 추가로 조상들의 유전을 신앙과 생활의 한 표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지 않았고, 주님이 책망하신 것처럼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자들이었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계급의 사람들로 헤롯 왕가와 로마인들에게 호의적이며, 일반 서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바리새인들과 교리적으로 부딪히는 적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거부하면서 구약성경의 권위를 일부만 인정하고 대부분 부정하였습니다.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도는 성경대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성경이 약속한 복을 받게 되고 생명의 부활과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요, YMCA의 운동을 일으켰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일제의 무수한 협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가 작전을 바꿔서 그를 돈으로 매수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루는 총독부가 보낸 한 청년이 돈 뭉치를 들고 이상재 선생을 찾아와서 선생 앞에 돈 뭉치를 건네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 정도의 돈이면 남은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 시골에나 가서 조용하게 사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 사람아, 나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생각은 버리게' 그러자 청년은 선생을 겁내 줄 생각으로 넌지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인도의 간디나 영국의 처칠은 100세를 산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으름장입니다. 그러자 선생은 대뜸 말하기를 '이 사람아!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죽지를 말아야지, 죽기는 왜 죽어?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거야' 이 청년이 그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선생님, 불로초까지 먹었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겠다고 장담합니까? 무슨 불사약이라도 드셨습니까?' 선생이 대답을 합니다. '그럼, 먹었지! 나는 너희 천황도 먹지 못했던 불사약을 먹었지. 그래서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걸세. 나는 살아서 너희 나라 일본이 망하고 군국주의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 것 거야' 청년은 웃긴다는 듯이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이상재 선생은 옆에 놓여 있는 성경을 손에 쥐고서는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그 약일세. 이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일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었네. 그러니 그까짓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게' 그러면서 그 청년을 쫓아내 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믿는 자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신뢰 하고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성도는 장차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서 신명기 25:5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좀 과장해서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어었다가 죽어 후사에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는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이 질문은 예수를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서 억지로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유치한 질문이었습니다. 창세기 38:8에 보면 유대 민족의 풍속 중에는 가문의 대를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맡아 후사를 얻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풍속은 아랍민족, 힌두교도, 일본인 등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30절의 말씀에서 "부활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5:42-49절에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썩지 않는 몸,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영생하는 몸입니다. 전혀 새로워진 몸입니다. 연못 바닥에 잠자리 애벌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 줄기를 타고 물 위로 올라 간 수많은 친구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는 누구든지 일단 물 위로 올라 간 후에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 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 와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물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도저히 불가능 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도의 부활도 애벌레와 같이 탈바꿈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두 번째 답변은 31-32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 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말은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데, 과거에는 조상의 하나님, 또는 역사적인 하나님이란 뜻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산 자의 하나님으로 더 의미를 새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과거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은 육은 비록 죽었지만 지금도 하나님나라에 가서 살아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찌 그 분들 뿐이겠습니까? 앞서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다 영원한 천국에 가서 살아계십니다. 이 분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는 산자의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의 하나님으로 살아 계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현재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다고 믿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 아버지이심을 믿게 될 때 인생길이 괴로워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고, 험한 시험과 환난이 와도 두렵지 않게 살 수 있고, 좌절과 절망이란 있을 수 없고, 마음을 바로 가지고 의롭게 살게 되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현재로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고 믿고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2.말씀을 신뢰하여 믿을 때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3.성도는 장차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시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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