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흰 보좌의 심판 ( 20:11-15)

<성경 본문>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크다는 건 그 권세의 웅장함을, 희다는 것은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의미하며 심판자는 성자이시다. 백색은 성결을 상징하듯 심판은 성결을 배경으로 하고 심판자는 성부이시다. 최종심판권은 성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백보좌 심판대를 우주 어느 곳엔가 만들어 놓으실 것이다. 보좌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심판자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흰색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충만한 빛을 묘사한 것이다. 크고 흰 보좌는 계시록에 30번 이상 나오는 보좌와 구별되며 하늘이나 땅이 아니라 공중에 있다. 모두 파괴된 후 태양계를 가릴 만큼 큰 보좌를 목도하게 될 것이고 보좌 위에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이 앉아 계신다. 현세는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심판자와 그 앞에 심판받을 인류만 남을 것이다. 심판의 대상은 불신자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 대상에서 철저히 제외된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제외한 동서고금의 전 인류가 심판받을 것이다. 크다는 건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피조물에 미치고 희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울 것을 말하는데 심판자는 성자이시다.’ 등이 있습니다. ☞ 복음으로 보면 ‘이 심판대가 우리 마음에도 필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크고 흰 보좌의 심판>
“크고 흰 보좌의 심판대”(계20:11) = “하나님의 심판대”(고후5:10)
= “그리스도의 심판대”(롬14:10)
'대 심판’이나 ‘최후의 심판’으로도 칭한다.
악인의 부활 후 역사의 종말에 있을 마지막 심판

<마음의 심판대의 필요성>
계20:4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양심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함
온전케 하시는 은혜의 심판도 있음 = 마12:20에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1. 믿음의 심판대 - 11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2. 성결의 심판대 - “흰 보좌와”
3. 공의로운 심판대 - 12절 “큰 자나 작은 자나"
4. 진리의 심판대 -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5. 생명의 심판대 - “곧 생명책이라"
6. 행실의 심판대 - 12-13절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7. 구원의 심판대 - 14절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8. 영원한 심판대 - 14-15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의로운 불길 만들기>
1. 성경을 가까이(렘23:29). 2. 하나님을 경외(행2:3-4).
3. 사랑으로 장성(아8:6-7).

<크고 흰 보좌의 심판>

성경에서 크고 흰 보좌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대”(고후5:10)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심판대”(14:10)라고 하는데, 흔히 대 심판이나 최후의 심판으로도 칭합니다. 이 심판은 악인의 부활 후 역사의 종말에 있을 마지막 심판으로, 라고도 하는데, 천사들이 심판의 수종자가 되고, 심판의 대상은 사탄을 비롯한 악한 천사들과 아담 이래 온 인류로서, 심판의 근거는 행위록과 생명록으로 그 행위에 따라 상선벌악이 달라지지만, 영벌과 영생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유무로 구분될 것이고, 따라서 불신자와 악인에게는 영벌을 그리스도를 믿는 의인에게는 영생과 상급을 확정하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필요성이 절실하다.>

이런 심판대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한 말씀에서 보듯, 악을 용납하지 않고 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크고 흰 보좌와 같은 역할을 하려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옛 창조에 속한 것이나 진리적이지 않거나 생명적이지 않는 것은 모두 심판하여 처리되어야 합니다.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그 온전케 하시는 은혜의 심판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크고 흰 보좌의 심판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남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심판대는 어떤 심판대입니까?

 

1. 믿음의 심판대입니다.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위엄이 있고 엄정한 심판대라는 의미입니다. 그 앞에 불신과 죄악을 비롯한 옛 창조에 속한 것은 두려워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물의 큰 틀인 땅과 하늘마저 피하여 온데간데도 없을 정도입니다(20:11). 그런데 크다가 구속사와 관련이 있듯, 이 심판대는 믿음이 판결의 기초가 됩니다. 16: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던 것처럼, 마음의 심판대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 없는 것은 용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결의 심판대입니다.

 

흰 보좌와 성경에서 희다는 것은 의로운 색입니다. 딤전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하였듯, 선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양심의 기준입니다. 19:2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신 것처럼 불의를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음에 만족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지 못함에 대해 한탄하며 십자가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의로운 마음이어야 합니다. 구약에 재판장의 타락은 사회적 전반적인 타락으로 이어졌듯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3. 공의로운 심판대입니다.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여기 죽은 자들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신 불신 모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14:10, 고후5:10). 그리고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 보좌 앞에 서 있다는 것은 심판이 공의로움을 시사합니다. 우리 마음의 심판대의 기준도 마5:45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셨듯 공의로워야 합니다.

 

4. 진리의 심판대입니다.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여기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 그 보좌 앞에 서 있음에 대한 다른 관점입니다. 5:19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처럼 말씀을 가감하거나 취향대로 믿음 생활하지 않도록 마음의 심판대가 작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큰 계명은 물론 작은 계명이라도 버리지 않고 충실하다면 하나님 앞에 큰 자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5. 생명의 심판대입니다.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이때 심판은 두 종류의 펴진 책에 의해 이루어집니다(23:15). 먼저 심판의 기준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는지의 여부입니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려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주로 믿어야 합니다. 3:5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의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신 사데교회처럼 그 믿음의 행위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죽은 자라면 생명책에 기록되기 어렵습니다.

 

10:20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듯, 귀신 추방이 구원의 기준은 아니나 최소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심판대에서도 생명적이지 않는 것은 배격해야 합니다.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셨듯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생명적인 것입니다. 죄의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성령의 흐름과 다른 방향이라면 그것도 생명적이지 않습니다. 느낌으로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지만 아닐 때는 행할수록 힘들고 허탈한 나날이 될 것입니다.

 

6. 행실의 심판대입니다.

 

12절에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 책들이라 했듯 행위록이 복수인 것은 지면이 비좁아서가 아니라 행위의 다양성을 시사한 것입니다(요일1:9). 영생과 영벌은 믿음의 유무에 따라 판결되지만, 이처럼 구체적인 상급과 고통의 수준은 행위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심판대에서도 우리의 잘못된 행실이 심판받아 온전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13절에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이 말씀은 심판을 위한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11절에 심판대 앞에서 하늘과 땅이 피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바다도 사망도 음부도 나타나서 죽은 자들을 내어줍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심판대에서도 살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셨듯 은혜의 심판으로 살려야 할 것은 바로 죽은 행실”(6:1)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를 들면 믿음 거룩 사랑 소망 열심 기도 찬송 예배 전도 기쁨 겸손 충성 등을 살려내시기 바랍니다. 율법적 양심으로 인해 평안과 기쁨이 죽었다면 피의 복음으로 살려내고(9:14), 말씀에 모르거나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았거나 몸과 마음을 드려 열심히 하지 못한 죽은 행실도(21:25) 회개함으로 살려내시기를 바랍니다.

 

7. 구원의 심판대입니다.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탄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만이(20:10) 아니라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5:14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는데 사망도 음부도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했듯이 이는 상대적으로 예수로 말미암아 누리는 우리의 구원과 영생 복락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5:17-18).

 

8. 영원한 심판대입니다.

 

14-15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10:20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듯,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됨이 이처럼 귀중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지옥은 존재하며 영원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심판대에서도 사탄과 불신앙과 거짓과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불길이 세세무궁토록 타올라야 합니다.

 

어떻게 의로운 불길 가능할까요?

 

1. 성경을 가까이하십시오.

 

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성경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흥회와 같은 모임도 뜨거운 믿음을 줍니다. 이처럼 말씀의 감화가 커질 때 은혜를 받아 새사람이 되고 일생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시기를 바랍니다.

 

2:3-4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배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머리 위에도 성령께서 임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성령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임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갈망하는 자에게 더욱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그런데 죄를 미워하는 불길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불길입니다. 죄를 미워한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시기를 바랍니다.

 

3. 사랑으로 장성하시기를 바랍니다.

 

8:6-7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불과 같은 심정은 왕자를 출산한 왕후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완전한 사랑을 요구할 때의 심정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곧 왕자의 생명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의로운 불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영혼을 사랑함에서 비롯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말씀대로 역사의 종말에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좌정하셔서 우리 신앙 양심을 통해서 심판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과 성령으로 더욱 충만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로운 불길이 우리의 가슴에서 영원토록 타오르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영광과 성령(롬 8:16-30)


모세는 시편90편 10절에서 고백하기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고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고백입니까? 인생은 그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찬 고난이 인생 가운데 가득합니까?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속아서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저주가 생겼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죽음의 저주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종류도 세 가지입니다. 돈 때문에 생기는 고난입니다. 질병 때문에 생기는 고난입니다. 죽음 때문에 생기는 고난입니다.

고난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특별히 믿는 자에게 고난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은 믿는 자가 죄를 지어서 받는 징계의 의미로서의 고난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아무 칭찬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는 자가 받는 고난은 오직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 마귀가 믿는 자들을 괴롭히고 있고, 또한 마귀의 조종을 받는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며, 조상제사와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삶을 살 때 고난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도 가난과 질병과 죽음의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1. 영광과 함께 고난도 있습니다.

1) 우리에게는 영광이 있습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믿는 자에게 고난이 있다고 했는데 고난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왕자와 공주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후사는 하나님의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상속자인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서 천국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을 때 받은 영광입니다.


2) 우리에게는 고난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영광에 이르는 은혜는 이미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가 받았던 핍박과 고난을 우리도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영광을 얻기 위한 조건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앞서 걸어가신 예수님을 본받아 고난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끝까지 감당하시고 부활의 승리를 경험하신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부활의 승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고 해도 두려워말 것은 우리 안에는 고난을 능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릅니다. 이 피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능히 감당하고 마침내 영광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받게 될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고난에 비해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고난 뒤에 주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을 사모하고 바라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고난을 이기도록 힘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난을 이기게 됩니까?


2. 성령은 능히 고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1) 성령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고난을 이기도록 직접적으로 도우시는 분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성령께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성령은 내 안에서 고난을 이길 힘과 소망을 주십니다. 성령은 소리 없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받게 몸의 구속입니다. 그 날이 되면 우리의 부패한 육체는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편안하게 지낼 때는 모르겠는데 고난을 겪을 때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서 고단한 육체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 때 우리 안에서 갖게 되는 거룩한 소망이 바로 주님 재림에 대한 소망이요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만약 고난이 전혀 없이 산다면 우리는 육체와 세상의 일에 파 묻혀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닥쳐올 때 성령은 내게 궁극적인 소망을 품게 하시고 그 소망으로 고난을 이기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좀 더 재물을 모으고 좀 더 늙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좀 더 즐기면서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서 주님이 오셨으면 하는 참된 소망, 하늘의 소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롬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육체의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보이는 소망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영원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면 어떤 고난이 와도 참음으로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으십니까? 성령의 참된 위로와 하늘의 소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이 없이 평안하십니까?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의 소망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십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은 우리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 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고 탄식할 때 성령은 내 안에 함께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내 친구가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그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어떤 말이 아닙니다. 그 친구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친구의 아픔과 슬픔이 나의 것인 양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울 때 그 친구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은 바로 진실 된 친구와 같습니다. 나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대신해서 기도해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단지 나를 위해서 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확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아시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드려주십니다.

(롬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때때로 이해하기 힘든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정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 막연하나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을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하나님은 한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상황에서도 성령은 나를 위해서 정확한 기도를 드려주십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자신도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난과 시련과 불행의 사건이 내게 찾아왔지만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나를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서로 협력해서 좋은 결과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요셉은 고난을 통과하고 난 후에 바로 이런 고백을 드린 대표적인 성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현실에 적용해서 이전보다 더 좋게 하신다. 이전보다 더 나은 환경이나 상황으로 바꾸어주신다. 이렇게 이해합니다. 틀린 이해는 아니지만 영적으로 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해답은 다음 구절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3. 우리는 마침내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1) 고난의 목적은 예수의 형상을 본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8절에서 고난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그 선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고난의 목적을 잘 모를 때에는 현실적인 고난의 해결에 관심을 가집니다. 재정적인 고통을 해소하고, 질병의 고통을 해소하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의 고통을 해소하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 고통의 해결보다는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만약 고통의 해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용케 고통이 해소되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재정이 회복되고 질병에서 나음 받고 죽음의 위기를 극복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서 또 다시 인생의 풍랑을 만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성도는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게 되고, 예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를 더욱 생각하게 되니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재정이 회복되거나 질병이 낫거나 죽음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았어도 그것 때문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보다도 장차 나타날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도구로 하여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점점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종착역은 바로 여기입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육체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과 같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거룩하게 되는 그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그 날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골인지점을 향해서 달려가듯이 우리도 마지막 그 날을 달려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1. 성도에게는 영광과 고난이 함께 있습니다.
2. 성령은 능히 고난을 이기도록 도우십니다.
3.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모하십시오. 또한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성령은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나와 함께 탄식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정확한 기도를 드려주십니다. 또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고난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와 선교와 구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한 단계 믿음이 성숙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이전보다도 예수님처럼 전도와 선교와 구제의 삶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현재 특별한 고난 없이 평안하게 지내고 계실 것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를 고난을 미리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평안하고 고요한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기억하십시오. 평안하고 고요할 때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힘쓰십시오. 스스로 고난을 자처해서 새벽을 깨어서 기도하고, 시간을 투자해서 성경공부를 하고, 전도의 삶을 사십시오. 그렇게 준비된다면 어떤 고난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고난의 기간도 짧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맥추절을 지키는 자의 축복 (34:22-24)

 

오늘은 맥추절을 맞이하여 감사절기예배를 드립니다. 그 기원은 본문 출애굽기 34장에 나

와 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과 율법 중에서 절기에 대한

(의식법)'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종교적인 의

무로써, 일년에 3,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을 절기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1417절에도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

기를 지키라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

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

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

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절기를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

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신명기 161011절 말씀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만큼 하나님께 드리되, 억지로 드리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봄에 봄 농사 지은 것, 지난 몇 달 동안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을 가지

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껏 드려야 합니다. 또한 주변에 고아나 과부나 객과 같이 불행한

사람, 억울한 일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절기를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해 주십

니까?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약속도 받지 못합니

.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절기를 지키면 세 가지 축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생존경쟁에서 이기

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둘째, ‘네 지경을 넓히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든 것을 확장시키시고 번창케 만들어 주십니다. 셋째,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적군으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여러분도 모세

를 통해서 주신 맥추절을 믿음으로 지켜서 이러한 축복을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

 

B. 맥추절을 지키는 자의 축복

 

1.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 승리

내가 열방(列邦)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34:24)

여기서 열방'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에 이미 그 땅에 정착하고 있던 원주민을 말합니다. 그곳에는 모두 7족속, 헷 족속, 기르가

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

.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땅을 허락하셨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들어가서 전쟁에 이기고 또

이겨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땅은 황무지 같은 땅, 아무것도 없는 땅, 임자 없는 땅이 아

니었습니다.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는 쳐들어가서 싸워 승리하고 땅을 정복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이었습니다. 그 땅의 본래 주인은 원주민이 아니라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네 앞에서 쫓아내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의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여,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족속은 보통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으로, 전부

신장이 장대한 거인이고 장사였습니다(13:2829). 그래서 10명의 정탐꾼들 중 8명은,

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같이 작으니 어떻게 싸우겠냐며 부정

적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하고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그 땅을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수있습니다. 소년 다윗으로 하여금 장수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총을 주시기만 하면 승리하고, 점령하고,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

나님과 함께 해 승리하는 삶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268절에는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숫자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편에 서 계시느

냐에 따라 승패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다섯 명과 함께 하시면 백 명을 쫓아내고, 하나님

께서 백 명과 함께 하시면 만 명이라도 쫓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반드시 이

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일서 54절에도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

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

고 그 믿음을 통해서 이기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고 승리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하고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감사하는 자만이 승

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감사는 범사에 승리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감사의 조건을 더 넘쳐

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감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날 한 직공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만 공장에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공장은 순식

간에 전쟁터처럼 변하고, 사장은 잿더미 위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의 아내가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울고 있는 남편을 발견하고는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길로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강대상 앞에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버리셨습니까? 지난 6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열심히 일을 했는데, 남은 것은 다 타버린 공장뿐입니다.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망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남편은 잿더미 위에서 울고, 아내는 성전에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울면서 기도하는

아내에게 문득 그래도 감사하지. 남편이 살아 있는 것도 감사하고, 우리가 건강한 것도 감

사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절망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공장이 불 탄 것도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기도

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집에 남아 있는 돈을 모두 챙겨다

가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공장이 불탔다는 소문이 퍼지자 교회 성도들, 친지, 주위의 동료 등 여기저기서 모

금을 해 주어서, 다시 공장을 크게 짓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집사가

되었습니다. 새 공장에서의 사업도 잘되고 점점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공장이 다시 서고는

직원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업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차를 하나

사서 그 차로 봉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9인승 승합차를 사서 매 예배 시간마다

교인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축복에 축복을 주셔서, 좋은 집도 장만하게

되고 공장도 날로 번창하여 삼양가구사라는 이름이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넘치게 받게 된 것입니다.

위기에 빠졌을 때 감사하지 못하고 슬퍼하고 절망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날지

도 모릅니다.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사하며 믿음을 가지고 도

움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크게 역사하시고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2. 네 지경을 넓히리니 - 번영, 번성

네 지경(地境)을 넓히리니"(34:24b)

여기서 지경'은 어디를 말합니까? 출애굽기 2331절에 보면, “내가 너의 지경'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하수까지 정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홍해에서 지중해까지, 남쪽과 북쪽의 경계를 아라비아

광야에서 유브라데 강까지로 정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광활한 땅을 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여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넓히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업이나 일도 점점 더 확장되어야

, 축소되다가 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넓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하나

님께서는 우리의 기업을 번성케 하십니다. 영토를 넓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 때는 비로소 그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어서 이스라엘의 국토가 나일 강

에서 유브라데 강까지로 넓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수많은 나라들이 속국이 되어 조

공을 바치는 왕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절기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번성의 축복을 주셔서 기업의 지경

을 넓혀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도 번창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러나 교만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떠납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떠납니다. 가난과 저주와 질병과 죄악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사야 5423절에는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

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로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두 개, 세 개로 번창케 하는 역사를 허락하셔서 확

장하여 체인을 형성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는

, 몸과 마음과 물질과 정성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산 제사를 드리는 자를 번창케 하시겠

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감사는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첫째, 기도의 문이 열리게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잘하

는 사람은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

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저 원망, 불평만 쌓입니다. 둘째, 기도의 문만 열리는 것

이 아니라, 마음 문도 활짝 열립니다. 셋째,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넷째, 만사형통하게 하십니다. 다섯째, 감사하는 사람은 대인관계도 좋습니다. 원망, 불평하

는 사람은 대인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세하지 못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섯째,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성을 다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갑절의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감사를 통해서 여러분의 활동 범위,

영역이 더 넓어지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패자이고, 감사하는 사람은 승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의 시작은 축복

의 시작이고, 불평의 시작은 저주의 시작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인생을 원망, 불평하며

살겠습니까? 아니면 감사하며 살겠습니까? 감사의 씨앗을 심으면 30, 60, 100배로 감사

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보답할 줄 아는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

는 것입니다.

 

3.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 보호, 안전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

내어 엿보지 못하리라"(34:24c)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은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1년에 3번 돌아오는 절기 때에는 집을 비우고 예루

살렘 성전으로 예배를 드리러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 도적이 들거나, 적군

이 쳐들어 와서 재산을 다 빼앗아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예배를

위해 집을 비운 동안에는 그런 위험을 막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 하나

님도 감사할 조건을 더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

. 어린 자녀가 월급 봉투를 타 가지고 와서 부모님께 드리면 부모가 자녀에게 손해 보게

합니까? 육신의 부모도 그렇거든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몸과 마음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서 충성, 봉사,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하시고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

입니다.

또한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

적인 위험과 군사적인 위험에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가정과 재산상의 위험에서 보호하

셨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위험에서도 보호하셨습니다. 오고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지 않도

, 병들지 않도록, 사고 나지 않도록 지켜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로 잘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예배 드릴 때 예배

드리고, 충성할 때 충성하고, 헌신할 때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키고 보

호하여 주십니다. 축복 가운데서 재산을 지켜 주시고, 건강을 지켜 주시고, 가정을 지켜 주

시는 것입니다.

시편 373233절에는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자들

은 의인에게 해를 끼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침범해 오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

시지 않으면 결코 악인이 의인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241516절에도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

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

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악인과 의인 가운데, 의인은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 축복하시고 악

인은 멸망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해가

우리에게 덮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는 사람은 결코 두려워하며 살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떠난 한 여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악성 위궤양을 앓고 있었

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때가 되어 떠났습니다.

그런데 선교지로 떠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본부에서 선교 지원금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동안 선교사님은 아무 활동도 못하고 매일 보리죽만 먹으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며 지내고 나니 이상하게도 위장병이 없어져 버렸습

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선교 지원금이 도착하여 육 개월 동안 활발히 선교활동을 할 수 있

었습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면서, 한 달 동안 선교비가 오지 않아 보리죽만 먹었

던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 보고가 끝나자 한 의사가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그때 보리죽만 드셨기 때문에 살아나신 겁니다."

왜요?"

악성 위궤양은 먹으면 안되거든요. 굶어야 낫습니다. 만약 그때 이것저것 먹었더라면 선

교지에서 돌아가셨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 선교사님의 생명

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서 건강을 되찾기도 하고,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기도 합니

.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서 깨어지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더 큰 축

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맥추절을 지켜서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여러분, 절기를 무시하거나 귀찮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겸손히 성경 말씀에 있는 그대로

순종하여 절기를 지키고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여 주시는 것입

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서, 지난 봄 동안 역사하신, 지난 몇 달 동안 역사하

신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에 감사함으로 맥추절을 지키는 믿음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 주변의 적국과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게 됩니

. 여러분의 위치에서, 직장과 사업장에서 번성하며 번창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어려움과

위험과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보호하여 주십니다. 암으로부터 지켜 보호

하시고, 각종 질병과 사고에서 지켜 보호하시고,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지켜 보호하여 주

시는 것입니다.

미국에 5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 중에 바바라 존슨이라는 주부가 쓴 모자에 제

라늄 꽃을 꽂고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바라 존슨은 원래 남편과 네 명의 아들이 있는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문제가 불어 닥쳤습니다. 집에 돌아오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그만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음주 트럭 운전자에 의해 치어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호모

섹스에 빠져 집을 떠나 버렸습니다. 셋째 아들은 베트남전에 파견되어 18세의 어린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연속되는 불행으로 하나님, 어찌해서 내게는 불행만 다가옵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과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부정적으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해!' 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하나님, 내 남은 생애를 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

습니다. 시간만 나면 교회에 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식물인간이었던 남편이 기적적으로 생기를 되찾고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나도 뭔가 좋

은 일을 해야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야지.' 하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난을 당해 실의에 빠진 부모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

으로 전사한 젊은이들이 5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전사했을 때 그 부모들의 심정

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국가를 위해서 큰 일을 한 겁니다.'

또한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해서 위로했습니다. 그들을

모아 함께 기도도 하고 그들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이들을 도와주

는 그룹을 만들고 선교회도 조직했습니다.

그는 남을 돕는 일로 아주 바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시고, 희망과 능력

을 주셔서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출판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강사로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성계의 지도자가 되어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주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원망하며 사시겠습니까? 불평하며 사시겠습니까?

남의 약점만 끄집어내고 욕하며 사시겠습니까?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하며 사시겠습니까?

작은 일부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감사하고, 가정에서도 감사하고, 직장

에서도 감사하고, 국가와 민족, 사회에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씨를 뿌릴 때 감사의

열매, 축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감사로부터 출발합니

. 감사는 여러분의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라도 감사로 충만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기오놋의 감사 (합 3:1-2)


1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출23:16을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했습니다. 지금 지키는 맥추절은 구약의 율법은 아니지만 감사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도 감사의 절기로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시기오놋의 감사”입니다. 1절에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했습니다. 시기오놋이란 무엇일까요? 시기오놋이란 ‘경이로운 곡조, 훌륭한 악보’라는 뜻을 가진 음악용어로, 빠른 리듬과 열정적인 감정의 변화를 유도하는 음악의 한 장르(유형)으로 즐겁고 기쁨이 넘칠 때 부르는 곡조입니다.


19절에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라 한 것을 보면 이 기도는 개인의 기도를 넘어 모두가 함께 부를 찬양곡이기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내용으로 한 찬양입니다. 하박국이 얼마나 기뻤으면 시기오놋에 맞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그러나 선지자 하박국이 활동하던 시대는 바벨론의 위협 가운데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정국이었습니다.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605년 애굽마저 격퇴한 당시 최대의 강대국입니다. 이 바벨론이 이제는 애굽 편에 선 유다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전체도 작은데 그 중에서 두 지파밖에 안 되는 조그만 유다가 대항할 힘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유다의 계승되는 왕들은 계속하여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기인데 교회까지 기도하지 않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자꾸만 유다가 당할 비극을 가르쳐 주시는데 아무리 가슴이 터져라 외쳐도 헛소리한다고 구박만 하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모두가 안보불감증에 걸려 애굽이 우리를 돕겠지 뭐 잘되겠지 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쁨에 넘친 찬송을 드릴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합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이런 풍전등화와 같은 유다의 운명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홀로 성루에 올라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루는 파수군이 나라를 지키는 장소입니다. 엘리사와 같이 나라의 방패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때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그의 절망과 애통은 감사와 찬송으로 변합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고 감사가 아닙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뜨겁고 힘찬 감사와 찬송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 힘이 나고 찬송이 나옵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 선한 왕 요시아가 죽고 여호아하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다 애굽 왕 바로느고에게 폐위 당하고 동생 엘리야김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김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을 들어서 징계하고 하나님의 전을 헐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교만만 잔뜩 가지고 우상숭배와 형식적 예배 등을 통해 하나님을 패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그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부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 나오듯 좀 이상한 부흥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는 그런 부흥입니다. 그것은 원수 바벨론을 통해서라도 어떤 방법으로라도 부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잡혀가서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영적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지 못한 결과라고 뉘우친 그들은 성경을 베끼고 연구하여 주석을 만들고 매 주마다 강가에 모여 예배하며 기도했습니다. 곳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고국에 돌아갈 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바벨론처럼 고단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주시는 연단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감사와 찬송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1:2-3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3-16절까지 내용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의 구속사인 출애굽의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과거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지금 현실이 어떻든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이미 죄악에서 구원 받고 세상과 마귀를 이겼으며 하늘에 속한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신령하고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우리를 예수와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혀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본 성도의 자화상입니다.


사람을 보더라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마세요.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해 주신 그 모습을 상상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으로 대하세요. 형편없는 사람도 귀한 일군 될 사람으로 격려하세요. 자신도 타인도 예수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대대적인 시각변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후5:16-17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했습니다.


환경이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천국 한 중앙에 있다고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형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롬5:1-2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현실은 즐겁지 않아도 천국에 있다고 믿고 그 믿음으로 천국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2:4에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합니다. 아담 안의 자기, 사탄 안의 세상을 바라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 안의 자기를 바라보며 시기오놋의 찬송을 드시시기 바랍니다.


3. 육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육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침략할 것을 생각할 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7-19절에 믿음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롬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와 육신적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안에서 이루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능력이요, 형통이요, 천국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을 떨쳐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정 찬양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도 찬송하시며 감람산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성령을 따라서 산다면 우리들도 하박국과 같은 기쁨의 시기오놋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삶을 역전시키는 전화위복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박국과 같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전천후의 믿음으로 감사하며 더욱 힘찬 찬양으로 살아가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新婦

맥추절을 지키라 16:9-12, 살전5:16-18
이스라엘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모아 놓고 여호와의 율법을 강론하면서 그들이 지켜야 될 중요한 절기를 공포하였습니다. 곧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혹은 무교절]과 농산물을 수확하여 첫 열매를 드리는 칠칠절(혹은 맥추절)과 밭에서 거둔 곡식을 저장하는 초막절(혹은 수장절)입니다( 23:15-16). 이를 가리켜 유대인의 삼대 절기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반드시 일 년에 세 차례 이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절기를 정하여 지키라 하신 까닭이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맥추절을 지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기를 통해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지키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키는 절기는 그 민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며 하나님께 보답하는 헌신의 행위가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키는 모든 절기와 의식은 자기들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 까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에 따라야 되는 것이며, 모두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삽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데, 그 이유는, 먼저, 만사를 우연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존재도, 역사 가운데 나타난 사건들도, 인간사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섭리로 보지 못하고 우연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그 마음속에 주님의 은혜라는 의식이나 감사가 없습니다. 현재 있는 모든 것이 우연이요,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10:29~30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라는 말씀에는 우연이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음에, 모든 것을 자기능력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자기의 지혜나, 지식이나 노력과 힘으로만 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의 마음에는 은혜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른 봄 농부가 들판에 나가 씨앗을 뿌리고, 열심히 김을 매고, 걸음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가꿨습니다. 풍년이 되었습니다. 농부의 노력으로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농부가 수고했어도 비가 내리지 않고, 햇볕이 쪼이지 않고, 적절한 기후와 공기와 환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라나는 것, 열매 맺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시65:10~13 말씀에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열매 맺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생활필수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생활필수품, 이를테면 곡식이나, 과일, 생선, 육류 등을 사면서 물건 값이라고 말하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값없이 무료로 다 주신 것을 거두어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수고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닫는 자들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의식 때문에 은혜를 망각하게 됩니다. 나의 몫이 다른 사람보다 적다고 생각할 때 은혜인줄 알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남과 비교하면서 나보다 잘되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열등감을 갖게 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볼 때 그를 멸시하는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할 줄 알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맥추절에 지난 상반기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헤아리면서 주께 감사 찬송,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감사하며 지키라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예물을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수확에 감사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후9:10-11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율법대로 제사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일하여 수입을 얻게 하시고 우리의 영육 간의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신약 본문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는데 이 구절 역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의 은혜를 알면 하나님의 은혜를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소출에서 온 것 이상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임을 알게 되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구원하셨으며, 그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허락하시지 않으신 것이 없고, 주시지 않으신 것이 없으며, 이 순간도 진실로 사랑하시고, 최고의 영광으로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 하시어 지금 하늘 보좌의 영광 가운데 계시는데, 바로 그 영광 가운데로 우리에게도 이르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했고,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신앙의 척도가 되고, 감사할수록 감사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며, 감사하는 자가 기적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6:10에 다니엘이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같이 감사했던 다니엘을 사랑 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고 역경이나 순경이나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으며, 사자 굴에서도 그를 지켜 주셨습니다.
직원들에게 대우가 좋기로 소문난 한국에 있는 한 외국계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채용공고를 냈습니다. 지원자 중 1, 2차 필기시험과 면접을 거친 후 다섯 명의 최종 예비합격자가 선정되었습니다. 인사 부장이 이들 다섯 명에게 3일 이내에 최종 결과를 알려 줄 것이라고 통보했습니다. 다섯 지원자들은 초조한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명 중, 유일한 여성 지원자는 며칠 후, 회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E-Mail을 받았습니다. ''귀하께서 저희 회사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귀하는 이번에 저희 회사에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회사가 채용할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서 귀하처럼 재능 있고 뛰어난 인재를 모시지 못하게 된 점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E-Mail에 담긴 진심 어린 위로의 내용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짧은 감사의 응답 메일을 회사로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최종 5인 예비합격자 명단에 포함시켜 주신 걸로 만족합니다. ''앞으로 하시는 모든 일들이 잘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귀사의 일취월장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감사의 마음 간직하겠습니다.'' 그런데 3일째 되던 날! 그녀는 뜻밖에도 회사로부터 최종 합격을 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받았던 불합격 통지 E-Mail 내용은 마지막 시험 문제였던 것입니다. , 다섯 명의 지원자가 남았을 때! 지원자 다섯 모두가 그녀와 똑같은 불합격 통지 메일을 받았지만, 회사에 감사 메일을 보낸 사람은 오직 그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성도로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3.즐거움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11절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맥추절에 함께 기뻐해야 할 대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맨 먼저 너와라고 말합니다. 함께 기뻐해야 할 공동체의 주체는 다름 사람이 아닌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고, 함께 기뻐하고, 좋은 관계를 맺도록 힘을 써야 할 사람은 바로 타인이 아닌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성도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봉사하는 가운데, 헌금 드리는 가운데 즐거움이 있습니다. 고후9:7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한 부자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가 목사님, 우리 교회 여 집사님 한 분이 혼자 무척 어렵게 살면서 어린아이 다섯을 키우느라 남의 집 빨래를 하는 등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이 주일날이 되면 꼭꼭 5센트의 헌금을 합니다. 큰 액수는 아니겠지만 그 여 집사님한테는 적지 않은 액수인데, 그 집사님의 몫까지 자기가 대신할 테니 그 집사님을 불러서 헌금하지 말라고 애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불러 "장로님이 집사님 사는 것이 너무 어려운 줄 알고 매주 헌금하는 것을 대신 내주겠다고 하니 다음 주일부터는 헌금 안하셔도 괜찮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 집사님은 앉은 자리에서 목을 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십니까?"하고 묻자 여 집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비록 남의 집 빨래를 해가며 고생스럽게 살지만 하나님께 5센트씩 바칠 때에는 더할 수 없이 기쁘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왜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여 집사님의 말을 들은 장로님도, 목사님도 회개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 즐거움을 함께 나눌 때 주님도 기뻐하시고 서로 행복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신약 본문 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는데, 마음에 즐거움은 건강에도 좋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의 표현이 웃음인데 실제로 웃음에 관해 연구한 글들을 읽어보면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스탠포드 의과대학에서는 건강한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웃음의 효과를 실험했습니다. 1시간 동안 웃음이 터지는 비디오를 보여 준 후에 몸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조사했는데, 암을 억제해주는 호르몬이 평소보다 200배가량 증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탠포드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는 사람이 한바탕 크게 웃을 때 몸속의 650개 근육 중 231개 근육이 움직여 위장, 가슴, 근육, 심장까지 움직이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1분을 웃으면 이틀을 더 살고, 5분간 웃으면 5백만 원 상당의 엔돌핀이 우리 몸에서 생산된다고 합니다. 웃을 때 나오는 엔돌핀이 몸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성령 충만한 성도에게는 늘 기쁨이 깃들게 됩니다. 14:17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의와 평강과 희락인데, 성령께서 이런 마음을 주십니다. 주님 은혜로 우리 마음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맥추감사절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맥추절을 지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절기를 통해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지키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지키라는 것입니다.
.즐거움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멘.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왕국의 대적들 ( 20:7-10)

<성경 본문>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마귀는 권세를 빼앗겼으나 여전히 땅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세력을 휘두를 것이 허락되었다. 천년왕국 기간에 태어난 아이들이 진실로 구세주를 믿지 않고 사탄이 놓여나면 미혹될 것이다. 모든 세상 나라들이 오는 전쟁으로 천년기의 끝에 관한 것이다. 사탄이 감금되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셔도 사람은 여전히 본성이 회복되지 못한다. 사탄의 의도나 인간의 완악함은 시간이 지난다 해도 변화되지 않는다. 천년왕국 기간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계속하여 자녀를 낳을 것이다. 곡과 마곡은 수리아의 왕을 암시하지만 여기서는 러시아를 말한다. 곡과 마곡은 적그리스도의 국가로 기독교 국가를 정복하려 할 것이다. 곡과 마곡은 러시아가 분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 교회에 대한 전 세계의 핍박과 압박을 상징한다. 러시아와 그 위성국들이 최후의 전쟁을 위해 그들의 백성들을 모을 것이다. 곡과 마곡은 성민에게 궁극적인 환난을 가져오는 민족이다. 곡과 마곡은 인류 역사 최후로 나타날 적그리스도 나라의 대표다. 곡과 마곡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사단과 그의 세력이다. 곡과 마곡은 신약시대에 교회를 공격하고 핍박하는 적그리스도 세력의 최종적 공격의 상징이다. 곡과 마곡은 천년왕국 백성의 상징적 표현으로 불택자로서 미혹을 받을 백성들을 말한다.’ 등이 있습니다. ☞ 복음으로 보면 ‘인생의 경륜의 마지막에 있을 시험’을 말합니다.

<해석의 힌트>
1 - 경륜이 끝나는 지점 - 3절 “천 년이 차도록”
2 - 성경적으로 접근 - 7절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3 - 인생의 날을 시사 - 3절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 문맥을 볼 때 - 앞에는 천년왕국, 뒤에는 흰 보좌의 심판
5 - 사탄의 공격 목표는 마음 - 8-9절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인생 경륜의 마지막에 있을 최후의 전쟁>
1. 마지막 날에 - "천년이 차매"
2. 사탄이 활개 치는 - 7절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3. 사방이 포위되는 - 7-8절 “땅의 사방 백성"
4. 사면이 지켜지고 있음 - 9절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
5. 육신의 문제가 많음 -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최후 승리를 위하여>
1. 견고한 믿음 - 9절 “성도들의 진과”
2. 거룩한 믿음 - "사랑하시는 성”
3. 성령의 능력 - 9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4. 끝까지 인내 - 10절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해석의 힌트>

힌트 1 - 경륜이 끝나는 지점에 시험이 있다.

3 천 년이 차도록 시간적 개념으로 보면 풀리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찬다는 표현은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에서 보듯 경륜의 때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1:15, 4:4). 마귀가 예수님께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가(4:13),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13:1) 되자, 마귀가 악인들을 움직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하여 돌아왔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요9:4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하셨듯, 이 경륜은 개인의 종말에도 적용됩니다. 주 안에 살아가는 성도도 아버지께로 갈 경륜의 때(14:1-3)가 있는데, 12:1-3에 나타나듯 이때의 육신적 형편은 노약한 상태이므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때입니다.

 

힌트 2 - 성경적으로 접근하라.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여기 그 옥 3절의 무저갱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1:6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기에, 성경 어디에도 큰 날의 심판 전에 사탄이 놓이는 근거가 없습니다. 무천년설에서 사탄의 결박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속박된 상태라고 보는 것과 같이, 이것은 다름이 아닌 성도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거나, 시험 들기 좋은 상황과 같은 개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임종이 가까운 노년기에 육신의 고난과 아울러 몸을 드려 주님을 섬기기 어렵다는 점에서 영적 시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힌트 3 - “반드시 잠깐은 인생의 날을 시사한다.

3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성경에서 반드시 될 일이 여럿이지만, 그중에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했듯이 임종과도 깊은 낱말입니다. 그리고 잠시’ ‘잠깐’ ‘얼마 동안’ ‘하루 등의 표현이 인생의 날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수차 사용되었다는 점에서(20:3, 4:13, 고후4:17-18, 21:13, 4:14, 벧전1:24), 혹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씀처럼 하룻길은 인생의 날을 시사한다는 점 등 인생의 경륜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힌트 4  순서적으로 앞뒤의 사건과 어울려야 한다.

앞의 계20:1-6에는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이고, 뒤의 계20:11-15은 흰 보좌의 심판입니다. 이처럼 히9:21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듯 본문은 인생의 경륜과 순서적으로도 어울리고, 해석적인 문맥의 흐름이나 내용과도 어울립니다.

 

힌트 5 - 사탄의 공격 목표는 마음이다.

8-9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이처럼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의 감성을 곧잘 이용하듯, 사탄이 노년기의 절실한 약점을 부각하며 육신의 생각으로 도전합니다. 그 목표는 성도들의 진 즉 성도의 믿음과(고후10:4-5, 6:10-11, 4:7, 벧전5:9), “사랑하시는 성 즉 새 예루살렘과 같은 흠 없는 마음인데(10:25, 6:4-5), 그 믿음이 인생의 경륜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도전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이상의 힌트를 종합할 때 인생의 경륜이 끝나는 지점에 있을 시험을 말합니다.

 

인생의 경륜의 마지막에 있을 최후의 전쟁은 어떤 것입니까?

 

1. 마지막 날에 있을 일입니다.

 

"천년이 차매"는 천년왕국의 끝으로 아직 왕국 안에 살고 있을 때입니다. 인생에 적용하면 예수 믿어 은혜 가운데 살다가 중병이나 임종이 가까운 노년기를 가리킵니다(9:4, 11:8). “차매는 경륜을 시사하는 말로 영원한 곳으로 옮기기 전입니다. 3절에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이라 했듯 시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9:27). 그러므로 앞날을 위해서 기도하고 늘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2. 사탄이 활개 치는 때입니다.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그 옥이란 3절의 무저갱입니다. 여기서 그 옥이란 감금의 개념입니다. 지옥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지옥은 출입이 가능한 곳이 아닙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여기 무저갱은 사탄이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속박된 상태를 말하는데, 옥에서 놓였으니 사탄이 활개 치는 때입니다. 이처럼 노년기에 육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면 망각과 두려움까지 겹쳐 믿음도 쇠약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 출석도 기도 생활도 어려워지는데 사탄이 좋은 때가 왔다고 쾌재를 부르는 때입니다. 이때는 몸의 느낌으로 살지 말고 말씀의 지식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임종 전에 힘을 다해 요셉을 축복한 것처럼(48:2), 예수님이 운명 직전에 큰 소리로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신 것처럼(23:46), 그리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크게 부르짖어 기도했듯(7:59-60) 힘을 다하여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사방이 포위되는 때입니다.

 

7-8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38장과 39장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국의 왕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곡은 곡이 다스리는 땅이나 백성입니다. 땅은 육신의 상징이요, 바다의 모래와 같이 모인 마곡 땅의 백성들은, 나약한 육신적인 생각들입니다(12:17). 즉 땅과 바다의 모래와 같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있듯이 육신을 따라 육신이 편한 대로 나가면 사탄에게 먹힙니다. 임종을 맞이한 야곱이 힘을 다해 축복한 것 같이 믿음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27장을 보면 바울을 태운 죄수선이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지 않고 편해 보려고(27:12) 그레데의 뵈닉스로 가다가 유라굴라를 만나 무려 14일이나 어둠 속에서 고통당했습니까? 이처럼 인생의 겨울을 맞아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하면 그 노년기는 방황 두려움 고통 시험 등으로 한순간도 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듯한 육신의 생각들에게 포위되지 않도록 굳세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믿음의 분위기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매일 눕혀놓거나 불신자가 운영하는 양로시설은 피하시기를 바랍니다.

 

4. 사면이 지켜지고 있는 때입니다.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여기서 성도들의 진은 주님을 향한 견고한 마음을(고후10:4), “사랑하시는 성은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한 말씀을, “두르매는 시125: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그러므로 사면이 포위된 것만 보지 말고 튼튼하게 지켜지고 있음도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진 즉 믿음의 견고함은 성령의 인침이요, “사랑하시는 성 역시 함께하심과 성령으로 사랑의 부으심이 있습니다(5:5).

 

이처럼 성도의 견고한 진이 되려면 말씀 묵상에 힘쓰고, 사랑의 부음을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드려 기도하고 이웃을 섬김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했던 그 믿음으로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육체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함께하신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8:37-39).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 많이 말씀과 기도로 살아 하나님의 붙드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10:25, 37:24).

 

 23장에 바울을 죽이려던 40인의 유대인 결사대가 그의 생명을 노렸을 때 행23: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해서 호위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로마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약 100km, 그 중간 지점인 안디바드리에서 보병과 창병은 돌아가고, 기병 70명이 가이사랴까지 안전하게 호송합니다. 비유적으로 안디바르리는 임종하는 순간까지를 뜻하는데, 거기까지 호송한 보병과 창병은 일생 말씀과 기도로 돕는 교회를 가리키고, 가이샤랴까지 호송한 70명의 기병은 천국시민의 특권을 가진 우리를 처음부터 천국에 이르도록 호위하는 천군천사들입니다.

 

교의신학자 박형룡 박사는 그의 종말론에서 죽음은 형벌이 아니며 훈련과 징계의 정점으로 영적진보와 천국의 최선한 이익에 도움을 준다. 이는 각 사람의 생의 완성이며, 다른 영역에로의 이전이며, 진정하고 완전한 생의 시작이며, 영원한 처소로의 고정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성도의 죽음 자체도 복되거니와, 죽음을 앞에 둔 시점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영적으로 변화될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5. 육신의 문제가 많을 때입니다.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바다의 모래는 나약한 육신적인 마음입니다. 용이 바다 모래 위에서 성도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듯이(12:17) 사탄이 육체와 정신의 약점을 부각시키며 성도의 믿음을 공격합니다. 성경에 바다의 모래로 비유된 대적이 아말렉과 미디안인데(7:12), 이 둘도 우리의 믿음이 약할 때 다가오는 온갖 시험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에서 폭풍을 만나 모래톱에 걸리지 않게 배를 가볍게 하는 등 최선을 다했듯이 육신의 문제가 신앙에 지장이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노년기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노년기는 최고의 영적인 절정기입니다. 사도들이 성경을 젊었을 때가 아닌 최고의 영적 절정기인 노년에 썼습니다.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노하우들이 있어 질병이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들이 있으므로 스스로 퇴물화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찾거나 발전시키시기 바랍니다. 경제적인 의무에서도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울 때이므로 경건한 노인들을 모아 기도의 사람으로 동력화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1. 견고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성도들의 진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군사적인 진을 쳤던 것처럼 불신앙과 악을 대항하는 믿음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고후10:4-5, 6:10-11, 4:7, 벧전5:9). 2:14-16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 -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했듯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믿음의 자손을 의미하며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면 아직 믿음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어 죄의 직업까지 가지는 등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았던 키가 작은 삭개오가 예수를 발견하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영접하고 섬김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온전히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19:9, 4:19-22, 살전5:16-18).

 

고후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했듯이 영의 생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벧전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그랬듯 우리가 노년기에 당하는 일반적인 고통까지도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하늘의 큰 상이 됩니다.

 

2. 거룩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성은 신부인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세상이 침투하지 않도록 오직 주님만을 위해 벽을 쌓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이처럼 신랑이신 주님만 생각하며 세상을 가까이하려는 육의 생각은 절대 거절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하늘 군대가 백마를 타고 흰 세마포를 입었던 것처럼(19:14) 영적 전쟁의 기초는 거룩입니다.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의 비밀입니다.

 

3.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9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예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19:24-25, 왕상18:38, 왕하1:10,12). 그런데 위로부터 임하는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불이 임하자 두려움과 악과 나약과 불신앙과 슬픔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과 야곱과 스데반 등 마지막 순간에도 힘을 내었던 것처럼 그리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혔으나 기도하고 찬송했던 바울과 실라처럼, 그저 편안하기를 갈망하는 몸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고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다 데려가시기도 하십니다(14:3). 천국 가기를 준비하며 기도 많이 하시고 신앙적인 유언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4. 끝까지 인내로서 믿음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좁은 의미에서 짐승과 거짓선지자는 우리 안의 짐승 닮은 육신적 마음과 거짓된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까지도 유황불에 던져졌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재림과 대 심판의 결과를 의미하지만(18:8-9, 9:48-49), 좁게는 이젠 유혹할 수도 없게 하시는 죽음이 가져다준 성화의 은총을 시사합니다.

 

우리의 임종으로 천국으로 옮기는 순간 사탄과 세상과 육체의 연약과 부족함 등과 영원히 결별합니다. 이때 완전한 성화가 주어지는데 성도가 육체를 벗는 순간 죄와 슬픔은 사라지고 따스한 아버지의 사랑과 평안과 거룩함, 그리고 놀라운 것은 주님을 영원히 사랑하는 마음이 타오르고, 사탄과 악을 향하여는 용납할 수 없는 마음으로 불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세대를 암시하는 세세토록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한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계시록의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 은혜의 잔치에 참여시키려는 지상 성도를 위한 교훈입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셨듯, 이처럼 철저히 주의 은혜로 씻어 거룩해지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46:3-4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인생의 경륜이 다하는 날까지 예수 잘 믿고 천년왕국 하나님 나라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 맡기신 사명 잘 감당하면서 이기고 또 이겨서 기쁨으로 주님을 뵈옵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5-11)


로마서8장은 구원 받은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부어주신 성령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또는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성령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1.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각기 다른 두 가지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을 좇아서 살고 어떤 이들은 영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마침내 사망입니다. 반대로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영의 일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육신을 좇는 자들이 어떤 불행을 겪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 순종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배후에 마귀가 역사하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에 있다는 것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사람 즉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영혼 자체가 여전히 죽어 있고 타락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육신을 좇아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번 나는 과연 육신을 좇는 사람인가 영을 좇는 사람인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기준을 주고 있습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 기준이란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하신다면 우리는 육신에 있는 사람 즉 육신을 좇는 사람이 아니고, 영에 있는 사람 즉 영을 좇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단어 2개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다른 단어로 하면 성령입니다. 성령을 표현할 때 이렇게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번갈아 가며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 인격을 갖고 계시지만 그 본성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똑 같이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누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까? 자기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으로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내 영혼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성령을 좇아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육체는 여전히 죄의 법을 즐거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패한 내 육체를 제어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만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전히 때때로 육신대로 살 때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내 영혼은 성령을 좇아 살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확신에 거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우리의 현재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우리의 육체는 아담의 죄로 인해서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영혼은 의를 인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받았고 변화를 받아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패한 내 육체를 영영 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 즉 성령이 우리의 육체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 육체가 여전히 죄의 욕심을 갖고 있지만 부활의 때가 되면 죄의 욕심이 전혀 없는 예수님의 몸과 같은 거룩한 육체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육체로 변화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부활의 역사는 성령을 통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십니까?


2. 영은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롬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께 사랑의 빛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만일 우리가 믿기 전처럼 육신에게 계속 끌려 다니면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반드시 죽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영으로써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 의지로 육체의 정욕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노력은 얼마가지 않아서 실패하고 맙니다.

구원 받은 성도일지라도 어떤 이는 육으로 살고 어떤 이는 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2장에서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이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구분합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육신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혼은 분명히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그는 실생활에서 자주자주 육신에 지고 맙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회개하고 용서받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살아도 물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구원, 불 가운데 받는 것과 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더 이상 매번 육신에게 지지 말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가 있을까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길을 14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범사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기 원하십니까? 영의 생각을 따라 생명과 평안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한 가지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15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게 종노릇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종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양자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녀답게 성장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때 성령은 내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내 몸의 행실을 제어하십니다.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자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 성령은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당신 마음대로 우리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입니다.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아바 아버지라고 반복해서 표현한 것은 감격스러운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오 나의 아버지시여”입니다.

예수님도 하마터면 육신에게 질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내 마음이 심히 죽을 지경이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였습니까? 막14:36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외치면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예수님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몸의 행실을 죽이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그러므로 우리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아바 아버지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은 내 몸의 행실을 죽이고 나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좇아 생명과 평안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여”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에서 고아 2천명을 오직 기도로 응답받아 먹이고 돌보았던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기도할 때 화려한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시간이면 기도실 바깥으로 “아버지여”라는 간절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새벽에 나오시는 성도님 가운데 기도할 때 유독 애절한 목소리로 “아버지여”라고 반복해서 부르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기도 소리는 오직 “아버지여”입니다. 기도가 너무 특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분은 롬8:15의 말씀을 체험하는 성도입니다. 이 분이 지나치게 아버지를 부르고 있다면 반대로 다른 성도님들은 너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이제 이후로 어떤 사람보다 많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어 이 땅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여 부르짖을 때 성령은 내게 더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어 범사에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근심케 말라  에베소서 4:30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범죄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주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범죄의 심각성에 관계없이 ‘죄의식’이 정상인들에 비해 매우 약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지적으로 자신이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은 하지만, 그것 자체도 ‘자신이 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니까!’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재수가 없어서…’ 등등의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죄 (=잘못)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우리 인간은 만약 내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매우 본질적인 변화와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기를 통해서든지 나 자신의 실상에 대해 눈뜨게 될 때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하며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영적 늪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 크리스챤에게도 조금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비록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속의 죄성을 밝히 깨닫게 되는 은혜를 거부함으로 여전히 속사람이 강건해 나가지 못할 때 여러분과 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가 우리 성도를 향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말라” (v.30a)고 도전한 것도 그러한 이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이해합니까? 여러분 안에 누가 거하시는 지 이해합니까? 만약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거하심을 인격적으로 깨닫아 나간다면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성도가 행할 본분이 결코 아닙니다!!” 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4장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본문말씀은 마치 갑자기 돌출된 발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 2주를 통해 우리가 살펴 본대로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22~24절>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촉구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이해해 나갔던 것입니다. 4장의 흐름에서 볼 때,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선언하고 나서, <25~29절> 곧 오늘 본문 바로 앞절까지 구체적으로 옛사람을 벗는 것이 무엇이고, 옛사람을 입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음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를 행하고,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로 서로 은혜를 끼치게 하라” (v.25~29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도가 ‘성령을 근심치 말라’고 선언하는 것은 이 말이 앞의 본문의 결론임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앞으로 <에베소서 6장>까지 이어지는 남은 모든 말씀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후로 이어지는 모든 말씀에서 성도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도는 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성령님이 인격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과 같이 <지.정.의>를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성령은 인격적 존재일 뿐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성삼위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제3위격에 해당합니다. 일부 크리스챤들이 생각하는데로, 성령은 단순히 ‘힘’ 혹은 ‘에너지’와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성령이 그런 비인격적 존재라면 사도는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적 존재이시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과 성도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무슨 관계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님의 다양한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사역과 성도를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 그리고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며 보혜사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님이 우리 성도를 도우시는 특별한 한가지 사역에 대해서 매우 감동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 자신도 어떻게 기도할지를 알지 못하고 심히 연약함과 영적 방황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깊은 탄식 가운데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고. 이것은 한마디로 성령의 어떠한 모습을 밝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향한 성령님의 사랑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기서 ‘탄식하다’ (with groan)는 표현은 아무 대상에나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관계나 알더라도 별로 가깝지 않은 관계에 쓰는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이 탄식함은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안타까운 일로 인해 그 상대방이 건강이나 그가 처한 상황이 심각한 어려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해 우리가 그를 아끼고 사랑함으로 깊은 절망감 가운데 함께 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런 탄식은 결코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생길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성령께서 ‘우리 각자를 깊이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니, 이제 된 것입니까? 나는 문제를 만들고, 성령이 기도로 해결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15)고 거듭 거듭 선언합니다. 이것이 오늘 사도가 우리 성도를 향해 강하게 도전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사도가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표현을 통해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이실 뿐 아니라 우리 성도와 깊은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했는데, 사도는 한걸음 더 깊이 우리가 그분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를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v.30b)고 사도는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가 에베소서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아들과 딸로 확증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성령의 사역임을 놀랍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의 인치심 (being sealed with the Holy Spirit)입니까? 우리는 지난번 1장 말씀에서 ‘성령의 인치심’이란 성령께서 도장을 찍듯이, 그리고 편지의 풀을 붙여서 단단히 봉투를 닫듯이 우리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확실하게 책임져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보증’ (guarantee)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결코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약속의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도장 찍어 주시고, 두루마리에 싸서 마지막 구원의 날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이라고 사도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이 성령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라고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문제제기를 했듯이, 우리 거듭난 크리스챤들 조차도 스스로 착각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실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매우 염려스럽고 위태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정확히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사도는 이것을 <25-29절>에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성령을 근심시키고자 원한다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 보십시요!’ (v.26-27). 누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했거나 잘못을 했는데,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도록 마음에 담아 둬 보세요.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은 이제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어떻게 여러분을 장악하고 죄악된 마음을 품게 하고, 미움과 원망과 쓴 뿌리를 그 마음에 심어 놓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보세요! 하루가 지나도록 그 분함을 풀지 말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고, 죄가 우리의 심령을 장악하는 상태요, 이것이 성령을 근심케하는 성도의 안타까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How do we avoid grieving the Holy Spirit?) 이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령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being conscious the Spirit): 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첫 시작은 성령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기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솔직히 우리는 성령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성령님은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고 누누히 강조 드렸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솔직히 우리 각자가 성령에 대한 생각과 관계는 어떠냐는 것입니다. 좀 쉽게 말해서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성령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성령을 실제적으로 나와는 무관한 존재처럼 여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죄악된 행위를 했을 때 이런 나로 인해 내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얼마나 아파하시고 깊이 탄식하실 지를 전혀 고민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성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사도가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도전하는 그 근본적 이유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지금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함으로 그분을 실망시키거나 근심시키지 않고자 힘쓰고 있습니까?’라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탄식함으로 간구하는 성령님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마치 투명인간 취급하듯이 성령님을 모독하고 그분을 근심케 하는 태도가 또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가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내주하심을 망각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늘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을 좇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walking in the Spirit):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에게 분명히 밝혔듯이 성령과 우리 육신의 소욕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원수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7)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사도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그분을 근심케 하지 않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입니다 (갈. 5:22,23). 성령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여 좇아갈 수 있을까요?’

 

셋째,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meditating & obeying the law of Lord):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성령을 믿고 성령의 충만으로 살고자 하는 크리스챤들 가운데는 상당히 우려스러운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 중에는 어떤 ‘성령집회’라는 모임에 참석해서 누군가에게 성령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위 ‘안수 받는다’는 식으로 성령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 받는 것을 마음이 뜨거워지고, 뭔가 감정적인 강력한 변화를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성령체험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시작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행한 것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 10:44)라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어떤 용하다는 사람 찾아가서 받고자 할 때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음을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반면에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고자 할 때, 성령님은 비둘기 같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더 충만하게 임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시편 1편 기자가 ‘왜 여호와의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가 축복된 자인지?’ (시. 1:2)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영혼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를 지키시고 육체와 세상과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생명과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말씀에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성령님은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 말씀하시고, 기도 가운데 우리를 강력하게 인도하시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숙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추구하는 만큼 성령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감옥에 쇠사슬에 갇힌 죄수가 되었기에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 각자를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합당한 부르심의 삶은 성령으로 하나 됨이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언제나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아니면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어리석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거두며 죄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천년왕국 ( 20:1-6)

<성경 본문>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문자적인 천년왕국이다. 여자적(如字的) 천년왕국은 아닐지라도 문자적 천년이다. 상당히 긴 기간을 말한다. 하늘에 있을 상징적 천년 기간이다. 천상에서 상징적 신약시대의 전체 기간을 말한다. 상징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한다. 교회의 지복보다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 당할 각종 환난을 시사한다. 천년이라는 기간이라기보다 때의 특색을 강조한 것으로 사탄의 파멸을 설명한 것이다. 천년은 완전수 10의 세제곱으로 사탄이 완전한 기간 결박당함을 말한다. 현 복음시대에 마귀의 영향력이 약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하실 때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만국을 다스릴 것이다.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과 성도들이 죽은 후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하늘나라에서 주와 함께 왕노릇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 복음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천년설>
전천년설 - 천년기 전 재림론
후천년설 - 천년기 후 재림론
무천년설 - 초림과 재림 사이 예수 믿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림

<하나님 나라의 임함>
1. 예수의 복음으로 - 1절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2. 성령으로 - “큰 쇠사슬을"
3. 즉 예수 믿고 성령 받는 일이 그 핵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1. 사단의 활동이 제압됨 - 2절 “용을 잡으니”
2. 죄악된 일이 사라짐 -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3. 평안 - 3절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4. 참 신앙 안에서 삶 -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5. 끝까지 승리하라 - 3절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자>
1.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 - 4절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2.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 - 4-5절 “이는 첫째 부활이라”
3.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자 -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4. 회개하면서 씻는 사람 -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5.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 - 5절 “그 천 년이 차기까지”
6. 경배와 거룩의 삶 - 6절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설 요약>

천년왕국은 계20:1-5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과 함께 성도들이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다스린다는 내용인데, 천년왕국에는 크게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 있습니다. 즉 전천년설(천년기 전 재림론)은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에서 천년 간 왕 노릇한다는 설이요, 후천년설(천년기 후 재림론)은 천년왕국이 먼저 있어 세계가 영육 간에 발전하다 마지막 완성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설입니다.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 예수 믿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성도들의 복되고 승리적인 삶을 가리킨다고 보는 영적으로 이해하는 설입니다.

 

<천년설에 대한 입장>

정통교회에서 많이 지지하는 설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인데 복음으로 본 강해의 특성상 무천년설에 가깝지만, 큰 틀에서 두 가지의 설을 함께 존중합니다. 큰 틀이란 역사적인 면과 영적인 면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육체(고전15:51-54)와 우주까지도(벧후3:10) 새롭게 되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점에서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음과 동시에, 현재 성령 안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충돌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임하고 있고, 이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기도 합니다.

 

<왕 노릇의 조건>

예수를 주(, 머리)로 삼고  4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육신과 세상을 따라 살지 않으며  4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내가 온전히 죽어져야 한다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본문의 위치>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천년왕국 기사의 중간에 첫째 부활의 복됨을 말씀한 것은 예수 믿어 중생함으로 천년왕국에 들어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말세지말 즉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믿음 지키며 살아남은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왕국이 아닙니다. 감사한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셨듯 이 땅에 살아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할까요?

 

1. 예수의 복음으로 임합니다.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천년왕국에 관한 말씀이 나오자마자 마귀 잡는 일부터 나타납니다(11:20). 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탄을 잡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예수님이신데(1:18) 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를 가졌을까요? 그것은 천사가 복음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천국의 문을 열거나 사탄을 지옥에 가둘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심과 아울러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양면성을(11:20, 12:28, 5:32, 요일3:8) 참고할 때 예수 복음이 결과적으로 마귀를 잡는 무저갱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2.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임합니다.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무저갱의 열쇠가 예수의 복음이라면 큰 쇠사슬은 무엇일까요? “큰 쇠사슬이니 사탄이 세력이 크다는 의미와 아울러, 그 큰 세력을 제압할 만큼 쇠사슬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쇠사슬이 용을 결박하는 실재적인 도구라는 점에서 복음의 실재이신 성령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9: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고 하셨고, 16:8 그가 와서 -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하셨는데,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즉 성령이 임하시면 심판이 집행되어 사탄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3. 즉 예수 믿고 성령 받는 일이 그 핵심입니다.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는데, 예수님의 제자 교육의 3년 반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시키고 경건의 본을 보이시며 닮게 하는 기간이었고, 나머지는 성령의 권능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시록의 목적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충만과 능력으로 온전함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어떤 일이 있나요?

 

1. 사단의 활동이 제압됩니다.

 

2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은 위에 있는 존재이니 승리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사탄을 이기는 비밀은 승리적 확신입니다. 성도는 승리의 보좌에 계신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승리자입니다. 반면 사탄은 예수 십자가 공로로 패배를 당한 자요, 하늘의 전쟁에서 쫓겨난 존재입니다(12:7-9). 이 승리의 복음에 서시기를 바랍니다(12:10-12).

 

한편 마16:19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신 것처럼 천사의 활동은 지상 성도의 믿음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탄이 패배자여도 우리가 자만하거나 방심하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강한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과 만국을 위한 기도를 빼지 않아야 합니다(딤전2:1-2).

 

2. 온갖 흉악한 일이 사라집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이 다양한 명칭에는 모양을 달리하고 범위를 넓혀 가며 배후에서 온갖 술수를 부린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용의 이름 중 옛 뱀은 에덴동산에서 그랬듯이 내 마음인 양 슬그머니 다가와 미혹함을, “마귀”(디아볼로스) 고소자, 비방자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과 우리 양심 앞에서 참소하고 정죄함을, “사탄 대적자란 뜻으로 하나님께 반항하고 온갖 방법으로 성도를 대적함을, 그리고 ”(드라콘) 이라는 뜻이지만 다 자란 뱀으로 에덴동산의 수준을 넘어 천하를 꾀는 자”(12:9)임을 보여줍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려는 훈련용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충분히 이길 만큼 믿음과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로서 온전함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3. 평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여기 무저갱을 무천년설에서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속박된 상태라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천년 후에 다시 풀려 대적한다는 점에서 무저갱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 불(20:7-10)과는 별개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이름을 가진 악의 근원인 용을 가둔다는 것은 그만큼 적극적인 믿음을 시사합니다. 기도 제목의 하나인 주기도문의 나라 임하옵시고는 사탄의 멸망도 포함된 기도입니다.

 

4. 참 신앙 안에서 삽니다.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여기 만국 '타 에드네'로서 그 의미는 나라들, 거민,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하지만, 좁게는 각인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각인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그만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5. 끝까지 승리하게 됩니다.

 

3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이 말씀에는 먼저 그동안 천년왕국 안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고,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6. 마지막까지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3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이 말씀이 근심스럽게 하는데 성경에서 찬다는 표현은 시간적 개념보다 경륜의 때를 가리킵니다(1:15, 4:4). 이 경륜은 개인의 종말(임종)에도 적용됩니다(9:4). 잠깐 놓이는 놈이 사탄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험의 때입니다. 그러나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하셨기에,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은혜 안에 산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내란 믿음의 기초인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흔들림 없는 삶입니다.

 

역사의 종말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임종의 날도 언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경륜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도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는데(4:13)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다기왔고, 세례요한도 그랬고,  11장의 두 증인도 사명을 마치자 죽임을 당합니다. 이처럼 사명을 마칠 때가 임종의 날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잠깐 놓"인다고 했는데, “반드시는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했듯 이리저리 피하지만 결국은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잠시’ ‘잠깐’ ‘얼마 동안’ ‘하루 등은 인생의 날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수차 사용되었습니다(20:3, 4:13, 고후4:17-18, 21:13, 4:14, 벧전1:24).

 

그런데 벧후3:8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인생길이 평탄하거나 험악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기는 시험의 때이기도 합니다. 9절에 나오듯 사탄이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여 성도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둘러 공격하듯, 사탄이 노년기에 쇠약과 고통과 늙음과 빈곤 등의 절실한 육신의 상태를 가지고 의심과 고독과 절망과 두려움 등으로 믿음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육신의 질병은 우울증까지 일으킨다는 점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 목표인 성도의 진 사랑하시는 성이라는 낱말에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보입니다. “성도의 진이란 고후10:4-5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탄과 악을 대적하는 강한 믿음을 주십니다.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하셨듯 담대함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담대하면 산처럼 크던 문제도 한 줌도 되지 않게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기쁨과 찬송으로 변할 것입니다(10:35-36).

 

그리고 사랑하시는 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존재라는 점에서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한 말씀처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5:5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 했듯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주심을 각각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가까울수록 찬송과 기도를 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한 것은 천년왕국은 임종의 순간까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토록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한 것처럼 우리가 육체를 벗는 것만큼 자유롭고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고후4:17). 그러므로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지막까지도 스데반처럼 밝고 아름다우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분은 20:7-10에서 노년기의 특별한 은총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자는 누구입니까?

 

1.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4절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이 심판은 뒤의 11절에 나오는 크고 흰 보좌 심판도 아니고, 거기에 앉은 자들이 누구인지, 19:28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하신 말씀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복수형태의 보좌는 교회를 가리키는 24장로의 보좌 외에는 없고,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이 주와 함께 불신과 악을 심판하며 다스리는 은혜로 봐야 합니다.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한 말씀을 볼 때, 어떤 능력을 주셨다 해도 현실에서 누굴 심판할 권세는 없습니다. 다만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 성경의 판결대로, 인간은 구세주가 필요한 죄인이며, 예수 믿지 않고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전도하며 심판을 알게 하는 일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2.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입니다.

 

4-5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했습니다.

 

첫째 부활이 어떤 것이기에 목 베인 순교자와 짐승의 표 받지 않는 자만 천년왕국에 들어간다는 걸까요? 여기에 대해 무천년설에서는 첫째 부활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루어지는 중생을, 둘째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육체까지도 온전하게 되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12:2, 20:12-14). 반면 전천년설에서는 첫째 부활은 재림 시 성도의 부활이고, 둘째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악인들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첫째 부활이란 둘째 부활이 있음을 시사함과 동시에 어떤 부활보다 앞선 어떤 부활을 시사합니다(1:20, 2:1).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듯, 다름이 아닌 예수 믿을 때 살아나는 영적 부활입니다(5:25, 11:25-2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천년왕국의 백성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함으로 죄에 대해 죽고 영으로 다시 산 자들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어 영적으로 살아난 첫째 부활한 성도라면 천년왕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4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천년왕국 백성의 대상으로 예수를 증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소개됩니다. 이들은 믿음 지키기 위해 순교까지 했으니 당연히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형 태형 교수형 등 다양한데 왜 참수형으로 목 베임 당한 순교자만 언급했을까요?

 

우리에게도 목 베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머리부터 교체해야 합니다(1:18, 2:6-7,19). 내가 머리가 되면 하나님의 왕국이 아닙니다. 사람이 왕 노릇하면 그곳은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도 아니고, 인간 나라요 사람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위에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계신 표로 머리에 수건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삼고 높이고 순복하고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을 문자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복음전도자로서 순교한 자들인데, 그중에서도 목 베임을 당한 참수형으로 순교한 자들만 천년왕국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 대부분은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신령한 의미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4. 진실로 회개하면서 씻는 사람입니다.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 666 6수가 의미하듯 인격과 행위가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마귀적인 육에 속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천년왕국의 주인공이 되려면 예수 믿고 더러움을 씻고 육신대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2:3).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했듯, 이마에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평강을 모르고 산다면 물과 피와 성령으로 씻으시기를 바랍니다(요일5:6-8).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양심의 정죄감을 씻고,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과 지식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성령으로 부패한 마음과 행실을 깨끗하게 씻으시기 바랍니다(15:3). 그리고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고(6:13-23), 진리를 순종함과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 형상의 온전함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벧전1:22).

 

5.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천년이 차기까지 그러니까 천년왕국이 계속되는 한 이들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도 존재하는데 말씀과 성령의 세력이 강할 때 우리 옛사람이 죽어 기승을 부리지 못합니다. 만약 옛사람이 기승을 부린다면 그 마음은 짐승의 나라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천년왕국의 1,000은 충만수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그리스도 안의 충만한 은혜와 완전한 다스림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 충만함이 지속이 되는 한 영원히 평안하고 안전하고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6. 경배와 거룩의 제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6절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여기 도리어란 둘째 사망을 넉넉히 이기고 다스리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제사장이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칭했던 멜기세덱을 연상시킵니다(14:18). 아브람을 축복하고 십 분의 일을 받은 사람입니다이처럼 제사장의 주요 임무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축복하는 사역입니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사장이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를 드리시고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합니다즉 하나님의 제사장이 경배에 그 초점이 있다면(6:22-27), 그리스도의 제사장은 영혼 구원과 죄 사함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1:20-23). 이 같은 경배와 거룩의 제사장적인 삶이 천년왕국 안에서 사는 삶의 비밀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의 복은 무엇입니까?

 

1. 복 있는 부활입니다.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첫째 부활은 앞에서 설명했듯 예수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이란 둘째 부활이 있음을 시사함과 동시에 전에 죽었음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아담 안에서 인류가 당한 사망이 바로 첫째 사망입니다(5:14, 고전15:22). 이처럼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만큼 복된 일은 없습니다.

 

2. 거룩한 부활입니다.

 

6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예수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복되고 거룩한 자녀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의로우시고, 함께 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30, 요일5:4,18). 예수 믿고 은혜 생활하면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심긴 중생의 새 생명이 온전히 자라서 복되고 거룩한 자가 됩니다(6:22, 요일3:10, 고후5:17).

 

3. 사망이 지배하지 않습니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둘째 사망이란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21:8). 둘째 사망이란 첫째 사망이 있었다는 건데 첫째 사망에 대해서 앞에서 설명했듯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것을 가리킵니다(2:1). 그런데 예수 믿고 첫째 부활로 거듭났으니 지옥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이 지배하지 않습니다(8:2).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을 떠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4. 죄와 사망을 넉넉히 이깁니다.

 

6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도리어란 둘째 죄와 사망을 넉넉히 이기고 다스리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했듯 두 직분은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성도의 제사장직은 경배와 거룩함이 주 임무요, 왕직은 믿음과 경배의 그 결과로서 성령으로 죄와 사망을 다스림을 가리킵니다. 즉 신령한 제사장직을 잘 감당함으로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요, 벧전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한 것처럼 이 두 직분은 재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사람들의 마음과 환경까지도 다스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늘 충만한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왕국 안에서 우리를 넘어뜨리거나 대적할 어떤 악의 세력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4-25) 하셨습니다.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거나 깊은 믿음이 없다면 예수 믿고 거듭나서 가장 복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하여 예수 믿고 더욱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4)


오늘 말씀은 1절과 2절에서 각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약속합니다. 1) 정죄함이 없습니다. 2)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3)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1.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런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영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은 내 육체 안에서 나의 영혼과 하나가 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 본질이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과 하나가 된 것은 곧 예수님과도 하나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과 소원을 가지고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에 성령과 하나가 된 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과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란 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나의 죄로 인하여 내가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이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없는 것이요 완전하게 없는 것입니다.

왜 내게 더 이상 죄로 인한 심판과 형벌이 없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받아야 할 정죄를 이미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롬8:3)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정죄 즉 죄의 심판과 형벌을 다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정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으려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 낱낱이 다 회개를 해야 돼.”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회개를 하고 나서도 용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부끄러운 죄를 짓기라도 한다면 나를 정죄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 봐라. 참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지 않느냐?” 내 안에 있는 율법의 소리요 마귀의 정죄였습니다.

저는 과거에 이런 악순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회개에 대해서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고, 죄악에서 떠나고자 하는 마음의 결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정의의 인격적인 회개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였습니다.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하거나, 뼈를 깎는 듯한 고통스러운 회개를 하지 않아도 내가 인격적으로 죄를 회개했다면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가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눅5장 1절로 11절을 보면 베드로는 동업자들과 함께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으나 허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띄우라고 말씀하시곤 배 위에서 뭍에 앉아 있는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배를 저어 가서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명령이 못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호수는 날이 환하게 밝으면 고기가 잘 안 잡히고, 게다가 깊은 곳은 물고기가 없기 때문에 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고백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직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을 때 두 배가 가득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짧은 고백 속에 베드로는 온전한 회개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비록 그 배 위에서 눈물 콧물 흘리고 지난 날 갓난아기 때 지은 죄까지 회개하지 않았어도 모든 죄를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줄 때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10)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베드로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훗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는 큰 죄를 지었지만 그 자리에서 회개함으로 더 이상 정죄함에 빠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에도 예수님께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그 문제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완벽한 회개를 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인격적으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쳤다면 하나님은 그 순간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정죄함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마귀의 정죄하는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단지 내가 아직 고백하지 못했던 최근의 죄가 있다면 미루지 말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마귀의 정죄함을 뿌리치십시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서재에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종이 한 장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에는 루터가 여태까지 범한 모든 죄의 목록이 낱낱이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죄의 목록을 들여다보는 순간 루터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앞이 캄캄해지면서 맥이 탁 풀렸습니다. 너무나 옛날 일이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과거의 부끄러운 죄까지도 몽땅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이렇게 죄 많은 네가 무슨 종교개혁을 한다고? 너나 바르게 살아라!” 빈정대며 “너는 너의 죄를 어떻게 할래?” 하고 협박했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루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난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마귀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부부지간에 또는 형제지간에, 친구지간에, 그 사람의 아픈 과거를 자꾸 들먹이며 비판하고 꼬집고 괴롭히는 사람은 마귀를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알고 보면 비판을 가장 많이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미국 격언 중에, 심장병에 치명적인 두 가지 사실은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과 남을 깍아 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꼬집는 것은 그 사람과 동시에 자신을 죽게 만들므로 백해무익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 나에게도 이런 허물이 있는지 먼저 자신부터 살펴보고 나도 그 처지가 되면 결코 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는, 몇 배 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겸손히 회개하며 다시는 그런 허물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마귀의 공격을 받고 무척 괴로워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루터야! 너의 모든 죄는 나의 피로 모두 다 깨끗이 씻었다. 그러므로 너를 정죄할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루터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로마서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 순간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든지 마귀가 나타났던 그 벽을 향하여 잉크병을 힘껏 집어던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루터가 외치는 순간 마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지난 죄를 들추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낙심시키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것은 마귀가 하는 못된 짓입니다. 특히 마귀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합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궤계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곧 바로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죄의 심판과 형벌이 없습니다.”


3. 나는 해방되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죄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른 표현으로 반복합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서로 대조가 됩니다. 그런데 죄와 사망의 법은 죄로 인해서 우리가 죽는 법이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명과 성령으로 우리가 살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적용되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입니까?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세 가지 해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2) 죄의 유혹으로부터 해방 3) 죄의 존재으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저주를 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죄의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그 저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저주대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오시어 예수로 인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다스리는 새로운 법, 새로운 원리인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고백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습니다.


4. 나는 성령을 좇아 거룩한 삶을 삽니다.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을 때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 없이는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십니다. 율법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내 힘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좇아서 기도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매우 방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한 때 이방종교인 마니교에 빠졌고, 술집에서 일하고 몸을 파는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함께 살던 여자를 고향으로 보내고 그녀도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참회록]을 썼습니다. 그가 한번은 지난날에 방탕하게 살았던 때에 자주 다니던 골목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술집 여자가 어거스틴을 반기며 “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왜 그 동안 안 보이셨어요? 잠깐 쉬다 가세요.”라며 유혹했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았소! 당신이 전에 부르던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고 지금의 어거스틴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어거스틴이요.”라고 답하고 그 길을 늠름하게 지나갔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 때문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 거룩한 삶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가 단번에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중에 순간순간 옛생활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방된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령을 좇아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이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과 정죄함이 없다는 것과 주님 주신 해방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입니다.

고백합니다. “나는 성령을 좇아 살아갑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이미 회개한 과거의 죄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과거에 부끄러웠던 모습 때문에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 자녀 삼아주시고 귀한 사명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근의 죄 가운데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마귀에게 정죄 당하지 말고 즉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주님 주신 자유와 해방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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