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 2장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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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기다리라는 주제로 4번의 설교를 들었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하박국 2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나훔서가 앗수르의 멸망을 다루었다면, ‘하박국은 바벨론의 멸망을 말하고 있습니다하박국의 내용은 질문과 응답으로 되어 있습니다하박국 선지자의 이름은 껴 안는 자,” “매어 달리는 자라는 뜻입니다이름 뜻대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응답을 껴안고그 말씀을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앗수르가 멸당당하고 바벨론 제국에 느부갓네살왕이 등장하여 남유다의 요시야 왕이 전사하고 나라가 급격하게 붕괴되어가는 비참한 시대였습니다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잠깐 남유다 왕국의 말년의 역사와 정세를 설명 드립니다요시야 왕은 히스기야 왕과 더불어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훌륭하였다고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그런 그가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정세 판단을 잘못하고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므깃도라는 곳에서 애굽의 바로 느고 군대와 씨우다가 그만 전사하고 맙니다.

 

요시야 왕의 전사 후 4명이 번갈아가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이 때는 왕국이라고 볼 수도 없는 비참한 지경이었습니다애굽의 통치력이 강했을 때는 바로왕이 유다왕을 마음대로 폐위 시키고(17대 여호아하스 폐위-> 18대 여호야김 즉위), 바벨론이 강해지면 바벨론왕이 유다왕을 마음 대로 폐위(19대 여호야긴 폐위->시드기야 즉위)시켰습니다왕의 이름도 애굽과 바벨론 왕의 취향대로 바꿔버렸습니다.(17대 살룸-여호아하스, 18대 엘리야김->여호야김, 19대 여고냐->여호야긴, 20대 맛다디야->시드기야)

 

마치 조선시대 말년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강제 합병 하고궁궐에 난입하여 왕비를 죽이고일개 사신들이 조선의 왕을 마음껏 협박하고남성은 징용으로여성은 성노예 착취로 끌고가던 그 시기와 너무나 흡사합니다어떤 나라든 그 나라가 멸망당하는 과정에서의 치욕과 모멸감은 왕과 백성과 나라 전체가 겪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하박국은 18대 여호야김 왕때까지 활동했으니 나라가 급격하게 망해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이 상황을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장을 한번 보십시오단락별로 위에 제목이 있습니다.

 

하박국의 호소여호와의 응답하박국이 다시 호소하다 라고 되어 있죠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하박국이 다시 호소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의 내용입니다.

 

1장에서 하박국이 첫 번째로 질문한 것은 사실 질문이라기 보다 따지는 듯한 한탄과 호소가 뒤섞여 있습니다. 1장 2~4절을 공동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2. 야훼여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언제 들어주시렵니까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언제 풀어주시렵니까? 3.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4.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멘.

 

부르짖어도 침묵만 돌아오고목이 터져라 외쳐도 전혀 공의를 행하여 주시지 않고악하고 거짓된 자들이 갈수록 득세하는 상황을 본 하박국은 무척 화가 났습니다하나님을 향하여 올려드리는 이 질문에는 처절하고 절박함을 뛰어넘어 비통함과 절망감이 가득합니다.

 

하박국은 이러한 심정임에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번아웃(Burnout Syndrome. 燒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극심한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직무에서 오는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정신적 탈진이번아웃입니다몸과 마음이 다 무너져 내려서 먹지도자지도쉬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말합니다.

 

목회자들도 이런 번 아웃이 찾아오면 설교 준비도기도도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집니다하기 싫다기 보다는 절망과 낙심이 너무 커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성도들도 다 마찬 가지일 겁니다.

 

하박국은 지금 이런 최악의 무너져 버린 심정이었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부르짖고 있습니다진짜 하나님의 사람들은 낙심되고상처받고무너지고깜깜하고억울하고비통할 때 일수록 더 부르짖고 외쳐 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상황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만이 상황을 반전 시킬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참담한 심정을 위로 하시고 다시 희망을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하박국은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 한 분만에게만 매달렸습니다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의 부르짖는 질문에 응답 하셨습니다하나님은 표범보다 날래고 굶주린 늑대 같고 독수리 같이 먹이를 채가는 포악한 갈대아(바벨론)을 일으켜 악인들과 죄인을 다 삼켜버리게 하겠다고 말씀 합니다.

 

갈대아 군대는 이스라엘과 뭇 나다들을 침공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행할 것이고 왕들을 멸시하고 백성들을 조롱하고 통치자들을 비웃으며 견고하다고 여기는 성들을 모조리 점령 할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여기며 자신들의 군대의 힘이 곧 신의 힘과 같다고 여길 것이기에 그들도 몰락할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박국은 말문이 막혔습니다이스라엘 민족의 타락과 부패를 바로잡고 정의와 공의를 행사해 달라고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은이스라엘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성전과 성읍들은 불타 없어질 것이며 백성들은 멸절에 가깝도록 죽임 당할 것이며 짐승같이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감을 당할 것이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하박국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하나님의 진노의 예언을 듣고서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두 번째 질문에서도 하박국은 호소와 항의를 동시에 합니다우리의 하나님 여호와 거룩하신이여어찌하여 악인들이 선민들을 짓밟고 더럽히도도록 방치하시려고 하십니까그런 악한 자들이 우리 같이 선민(의인)들을 유린하고 조롱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한 일입니까하나님을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군대를 신처럼 여기는 자들에게 어찌 그런 살육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하박국 1:12~17, 의역)

 

항의하고 따지는 듯한 하박국의 질문은 어찌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선을 넘는 것처럼 보일정도로 당돌하고 무모한듯한 질문으로 보입니다하지만 하나님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백성이 죽임당하는 끔찍한 재앙을 듣고서 긍휼과 자비를 여겨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의로운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하박국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두 번째 응답을 기다렸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오늘 본문 2장 1절을 읽어 드립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아멘.

 

파수는 적군이 쳐들어오는지 감시하는 것을 말하고성루는 파수꾼이 올라가 있는 성의 가장 높은 곳을 말합니다하박국은 가장 높은 성 꼭대기에 서서 하나님이 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실지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높은 하늘 어딘가에 계시는 것으로 상상하기 때문에 하박국은 가장 잘 보이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하나님에게 최대한 가까이 나아가서 은밀하게 말씀하시는 세밀한 음성을 들으려는 마음을 성루에 올라가서 듣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반드시 대답을 듣고자 하는 하박국의 간절함절실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우리가 한 번 암송했던 말씀입니다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르짖음과 호소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입니니다간절함으로절실함으로진실함으로 부르짖고 응답 듣기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빠르고 신속하게 응답하십니다.

 

하박국은 지금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강대국이 쳐들어와서 성을 불태우고 가족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가고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데 잠이 오겠습니까먹는 것이 입으로 들어가겠습니까?

 

하박국은 단 1mm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단 한 마디의 음성이라도 들으려고 몸부림치며 기도하였습니다그 심정이 성루 꼭대기에 올라간 파수꾼의 심정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박국이 간절하게 부르짖는 태도를 보시고 두 번째 질문에 응답하셨습니다그런데 응답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은 후에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먼저 말씀해 주십니다이것은 실천의 문제여셔 듣는 것보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읽어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아멘.

 

묵시는 하나님이 신적인 계시를 보여주거나 알려준 내용을 뜻합니다하나님은 묵시를 기록하고 판에 새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왜 기록하고 새기라고 하셨냐면,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되는 자는 누구라도 그 말씀을 들고 다른사람에게 전할 수 있도록 달려가야 한다는 뜻입니다하박국을 포함한 모든 자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말씀을 눈으로 읽고가슴에 새기고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듣게 되도록 이리저리로 전달해 주도록 달려가는(전파하는)사람들이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내려 주신 귀중한 묵시를 너도 알고나도 알고우리 모두 알고나라 전체가 알게 하고 가슴판에 새겨진 대로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사명이자 임무입니다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말씀을 들려주는 것보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모두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너는 일생동안 어떻게 하며 살아왔는냐 라고 물어보시고 판단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그 때를 기디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고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무게감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만을 들어야 하고말씀 하신 것만을 따라야 하고말씀하신 것만을 순종해야 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안좋은 일이 발생하고 고통과 곤고함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듣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기에 침묵만 있기 때문입니다말씀을 들으려고 성루에 올라가는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참다 못한 하나님이 우리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데도 귀를 막아놓고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분명히 들려 주셨는데도 그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 버리고 도무지 실행하지 않으려는 불순종과 완악함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에는 둔감 하면서도 옆에서 친한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말들에는 너무나 쉽게 넘어가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내 귀에 좋게 들리는 소리에는 눈이 동그라 집니다당장 좋아 보이고 괜찮아 보이고 계산으로 따져보니 내게 이익이 생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멸망 당시에 진짜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이갸기를 힘들게 듣고서 그 말씀을 가슴에게 새긴채로 피를 토하듯 호소하는 하박국 같은 선지자들의 말은 귓등으로는 안 들으면서 바벨론에 의지하면 좋지 않을까애굽에 의지하면 좋지 않을까주변에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하는 소리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다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무언가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을 너는 잘 듣고 기록하고판에 새기고있는 그대로만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라그 백성들 또한 내가 말한 것에서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만 전달하고 공유하도록 하라고 가장 먼저 말씀 하신 이유를 충분히 아셨을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사람의 말을 너무 많이 듣고그래서 사람의 말을 가슴에 꽉 채우고사람의 말이 마치 진짜 묵시인것처럼그거 정답이고 처세술인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사람들은 모두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거짓된 자들입니다.

 

아마 하박국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 했을 때도하박국 저 사람의 거짓이야내 말이 진짜야 라고 엉뚱한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을 겁니다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의 길로 가는 비참한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만을 묵시(계시)로 여기고 그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요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요성령님과 동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예비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야 합니다말씀만을 듣고말씀에만 순종하고말씀과만 동행하는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성과들을 먼저 평가하지 아니하시고 묵시가 우리의 심령에 기록되어 있는지그 묵시대로 제대로 따랐는지를 판단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진짜로 두 번째 질문에 응답하신 내용을 보겠습니다. 3, 4절을 읽어 드립니다.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멘.

 

하나님이 하박국의 질문에 대답을 시작하신 3절에 기다리라는 6월의 주제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종말은 속히 이루어 질 것이다는 말씀은 그 날과 그 때가 언급 될 때마다 동일하게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언제 인지 모를 그 때이지만 속히 올 것이고반드시 응할 것이고결코 거짓 되지 아니하니 너희는 기다리라그 때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하박국은 아마도 이 말씀이 답답하게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당장 포악한 군인들이 쳐 들어와 다 불태우고 빼앗아 가고 죽임당하게 생겼는데 그 때를 기다리라다 정한 때가 있으니 더디더라도 기다라라는 말씀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묵시의 말씀을 들려 주시고기룩하라판에 새겨라읽는 자들이 전파하도록 들고 달려 다녀라 라고 엄하게 명령 하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말씀을 듣고 불순종 할 것을 뻔히 다 아시면서도 이렇게 굳이 강조하신 이유가 4절 때문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멘.”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악인과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대조 되어 나옵니다이 비교되는 두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리리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말씀에 비추어서 좀 더 세부적으로 구분해 보겠습니다.

 

① 묵시(계시를들으려고 성루에 올라가기까지 간절함으로 기다리는 사람 vs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약삭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

② 묵시의 때와 정한 시간이 있음을 알고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 vs

    급한 마음에 나쁜 것을 붙잡고도 그것을 좋아라하는 어리석은 사람

③ 그 때가 속히 이른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 vs

    준비는 하나도 아니하면서 없는 것안되는 것에 불평 불만을 말하는 사람

④ 속히 오실 약속이 거짓되지아니함을 믿고 헌신과 충성을 다하며 사는 사람 vs

    맡겨진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열매(성과맺으려 하지 않는 사람

⑤ 비록 더디더라도 주님 맞이할 그 날을 기약하며 등불을 들고 서 있는 사람 vs

    게으르고 나태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람

⑥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참회로 사는 사람 vs

    간사함과 술수로 거짓을 말하며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⑦ 겸손과 사랑으로 원수를 미워하며 악인을 위해 기도하며 용서로 살아가는 사람 vs

    자기 자신의 구원도 이루지 못하면서 교만과 자랑만 내세우는 사람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악인은 기다리는 준비를 전혀 않은채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고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려고 고집부리는 사람이고다른 사람의 말에 분별없이 휘둘리는 사람이고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지 새어나가는지 모른체 교만함의 높이만 키워가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이 말씀을 하면서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속히 엎드려 참회하고 돌이키며 기다리는 자리로 올 것이지만그렇지 않고 여전히 듣기를 싫어하고거부하려는 자들은 예상 했던 대로 말씀을 땅 바닥에 다 버려 버릴 것라는 것을 훤히 알고 계셨을 겁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의인들을 살리시고의인들에게 용기를 주시고의인들에게 참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깨어 있음의 능력을 주시고자 하려고 이 말씀을 선포하여 주신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우리에게는 성령이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했다면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의인들입니다의인이라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럼 의인이라면 듣는데 집중하며 사는 것이 맞습니다들리면 들리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아 합니다들리지 않으면 성루에 올라가는 하박국처럼 간절함으로 듣고자 해야 합니다그래야만 말씀이 들릴 것이고 들은 말씀을 기록하고 새기고 그 말씀을 들교 달려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말씀이 없었는데도 마치 말씀을 들은 것처럼 거짓을 말하면 하나님은 진실로 그런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서 일생동안 침묵하실 겁니다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는데도 참회하고돌이키고기다리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심판대 앞에서 대면할 때까지 기다리실 겁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은 하박국에게그리고 의인으로 살게 되는 믿음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능력의 말씀을 내려 주셨습니다우리는 말씀 없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게으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더구나 하늘의 존귀한 말씀을 들려주셨는데도 못 들은 척 하고 내 갈길만 가는 교만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불평과 불만의 감정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용서하심의 깊은 은혜를 깨달았을 겁니다.

 

이스라엘을 치시겠다고 하는 것은 아프고 고통 스럽지만그것은 하나님이 공의로 일하시며 자비하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시고 고치시겠다는 큰 뜻이 있음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6월 한달 동안 기다리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왔습니다기다린다는 것을 정리해 보면참회하며준비하며깨어서 기다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와 항상 동행하여 주시고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오도록 하나님 역시도 기다리고 계시다는 겁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오늘의 말씀을 기록했고 우리가 다시 읽어 볼수 있도록 판에 새겨 놓았습니다우리는 이 말씀을 설교 말씀으로 들었습니다우리는 한 달 내내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참회하라준비하라깨어 있으라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어본적이 없다고 더 이상 핑계 댈수도 없습니다.

 

참회하고돌이키고깨어서 그 날과 그 때를 준비하는 것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영원한 진리이신 말씀 앞에 믿음으로 서시고말씀에만 순종하고말씀하고만 동행하며 하루 하루가 기쁨이 충만하게 기다리는 날들로 채워줘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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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사오니그 말씀을 붙잡는 강건한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 무사히 들어가는 그날 그 때까지 길이 참고 기다리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주일설교(위드 코로나).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 지라도 (하박국 316-19)

2년 가까이 모든 사람들을 통제와 고통 속에 갇히게 했던 코로나 상황이 11월부터는 위드코로나로 접어들었습니다. 점점 일상으로 회복하려는 노력들이 진행이 될 터인데, 기본적인 방역수칙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모두가 함께 협력해서 더 안전하고 쾌적한 일상을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박국 3장의 일부 이지만, 설교 내용은 하박국 1~3장의 전체 시대 상황과,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 속에서 우리가 포스트 코로나, 위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앙의 회복을 어떻게 이루어 갈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일생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하박국 선지자 역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위기의 시대를 겪고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유다 왕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였고, 동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 중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나라 없는 설움,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타민족에게 치욕을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겪었습니다. 위로는 왕부터, 아래로는 서민 대중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겪어야 했던 치욕과, 수모는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바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국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활동 시대 전의 국제 정세를 잠깐 설명 드리겠습니다.

 

유다 왕국의 제 16대 왕은 요시아왕 이었는데, 그는 이스라엘 땅의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고, 신앙의 개혁운동을 펼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아 왕 당시 북쪽에서는 바벨론이라는 신흥 강국이 등장하여 기세를 떨치던 때였으며, 바벨론 군대는 과거에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 제국의 수도를 함락시켰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이집트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당시 이집트의 왕인 느고(바로 느고)’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이 때 요시아 왕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이집트 군대의 앞길을 막아섭니다. 느고가 요시아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 35:21)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요시왕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듣고도, 이를 무시하고, 변장까지 하고 므깃도라는 곳에가서 이집트 군대와 싸웁니다. 이 전투에서 요시아왕은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데, 그의 나이 39세였습니다. 단 한 번의 중대한 실수로 인해 그토록 칭찬 받던 왕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요시아 왕의 죽음 이후 유다 왕국은 급격하게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집니다. 요시아 왕의 사후 네 명의 왕이 있었는데, 먼저 그의 두 번째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유다의 17번째 왕위에 앉았지만, 3달 만에 이집트 느고 왕은 여호아하스를 자기 나라에 포로로 끌고 가고, 대신에 요시아의 첫째 아들인 여호야김(본명은 엘리야김)’ 18번째 왕위에 앉힙니다.

 

그러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유다를 침공하여 자기 나라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여호야김왕을 자기 나라로 포로로 끌고 가고, 8살 밖에 안 된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 19번째 왕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불과 석달 열흘이 지나서 느부갓네살 왕이 다시 유다를 침공해서 여호야긴 왕을 포로로 끌고가고, 요시아왕의 셋째 아들인 시드기야를 왕위에 앉힙니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20)으로 11년 통치 끝에, 느부갓네살왕의 3번째 침공을 받아, 자기 아들들은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네 명의 왕들을 보면, 비극 그 자체 입니다. 힘이 없는 나라의 최후는 항상 아프고 쓰린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됩니다. 하박국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버린 유다 왕국이 처참하게 붕괴되어가는 시점에 활동을 했습니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부짖으며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도무지 응답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3장 이전에, 1, 2장에서 하박국은 두 번에 걸쳐 하나님 앞에서 대놓고 불만을 드러냅니다. “2. (하나님!)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13.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언제까지)조용히만 계십니까?”(표준새번역, 1:2;13)

 

하박국은 분노하면서 하나님께 따지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주 유명한 두 구절입니다. 첫째 구절은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2:13)라는 말씀입니다. 찬양의 가사로도 불려져서 잘 아실 겁니다.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진짜 하나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악을 행하고, 거짓을 행하고, 우상을 섬기고,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온갖 불의와 거짓을 행한 것을 인정 하느냐? 나 여호와는 그런 민족 그런 나라에 대해 무수히 많은 경고를 보내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보내어 돌이키도록 기회를 주었는데도, 너희들은 듣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그들이 애써 한 일이 다 헛수고가 되고, 그들이 세운 것이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나 만군의 주가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나 여호와가 물이 바다를 덮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안정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권세가 있듯이, 모든 것을 빼앗을 권세가 있음을 인정하고, 유다를 망하게 하는 것을 받아 들여라, 그것이 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하박국아, 그만 원망해라, 징계(심판)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인정하는 자세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둘째 구절은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2:20)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배와 관련해서, 또는 기도와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본 뜻은, 너희들은 평소에 어디에 있었는냐, 나는 성전에 있는데 너희들은 밖으로만 돌아다니니 않았느냐, 나에게 무엇을 물어 본 적이 있느냐, 나에게 무엇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너희들은 말 못하는 돌과 나무에다 대고 이것 달라 저것 달라, 복을 달라고 그렇게 정성을 드리면서도, 도무지 나에게는 나아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성전에 머물러 있지만, 나는 여전히 잠잠히 너희들의 말을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너희들에게 지혜를 말해주려고 준비하고 있지만, 너희들은 여전히 밖에서만 떠들고, 마시고, 춤추고 있구나, 성전에 들어오지 아니하고, 내 앞에서 듣지 않는 자들을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박국아, 더 이상 성전에 나아오지 않는 네 백성, 더 이상 내 앞에서 잠잠하지 않는 네 백성을 내가 징계의 채찍으로 내려치리라. 너는 받아들여라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이 두 구절을 기억 하실 때, 이 말씀이 하박국이 따지듯이 묻자, 하나님이 징계의 정당성, 공의의 집행을 강하게 추진하시고자 드러내시는 대답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1, 2장을 자세히 읽어 보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신지, 얼마나 징계에 철저 하신 분인지 아실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애절한 기도를 드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언제나 옳습니다. 반드시 실행이 됩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은혜이든, 멸망이든, 심판이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교훈을 보면, 대대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정 하면서도, 멸망과 심판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조차도 자신의 나라가 그토록 교만하고 부패하고 불의와 불순종에 찌들어 있었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 않음에 대해 쉽게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냉정한 말씀인지는 몰라도, 세워질 사람은 세워지고, 망해야 될 사람은 망해야 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 된 교회는 점점 부흥하고, 사람이 주인 된 교회는 쇠락해야 합니다. 의인이 복을 받고 불의한 자가 멸망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에 충성하는 자가 영생의 면류관을 받고, 욕심을 따라 살고 거짓 믿음으로 가장하며 사는 자가 버려짐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공의이며, 진리입니다.

 

나라를 잃어 봤던 우리는 큰 아픔을 지닌 민족입니다. 가족이나 개인의 일로 큰 실패와 좌절을 겼어 봤던 분들은, 다시는 그러한 일들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회복과 성장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마냥 어린아이처럼 봐주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들이 당장의 징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항상 저울질 해 보이시고, 불법과 불의로 인해 무게추가 내려가고 있음도 수시로 재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이 개인의 회심, 신앙개혁운동 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우리 가족이 불화를 겪지 않으려면, 우리 자녀들이 다른 길로 빠지지 않게 하려면, 내 자신이 믿음의 실패자로 살지 않으려면, 공의와 심판과 징계를 내리시는 엄하신 하나님 앞에 날마다 서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잠잠히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나아가, 말씀을 듣고, 들리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회복이 일어나고, 용서가 주어지고, 새로운 능력의 지혜를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하박국의 간절한 심정으로 따지듯이 하나님께 묻고, 간청하는 자세를 취하시되, 먼저 회개하는 마음, 먼저 인정하는 마음, 먼저 순종하는 마음을 구하시며, 코로나 이후에 모든 면에서 회복의 길로 나아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자신이 너무 급하고, 답답하고, 분노한 나머지 따지듯이 하나님을 상대했던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하박국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눈군가 내 뺨을 때렸다면, “저는 맞을 만한 인간인데 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한 대 더 때려 주세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뭐요? 이 사람이 미쳤나, 너도 한 번 맞아 봐라서로간에 싸움이 날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과 오래참음을 내세우는 분이십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과 민족을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징계가 있다면, 그것을 먼저 인정할 때 용서와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 드리지만, 제일 불쌍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다가는 종말의 시간에 심판자 앞에 섰을 때,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부인 당할 수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잘못과 죄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대다수는, 자신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시인 받을 만하다고 착각하고 교만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이제 완전히 하나님을 인정하며 기도를 올려 드리는데, 그 기도의 장면이 3장 전체에 담겨 있습니다. 31절에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라고 했습니다. ‘시기오놋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비틀거리다 회개하는 상황, 또는 울부짖으며 통곡하며 애통하는 상황의 뜻이 있습니다. 하박국이 어떤 심정으로 기도했는지 시가오놋에 잘 담겨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은 하박국이 처음 기도를 드린 내용은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 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아멘.

 

수년 내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말씀도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부흥회 하면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말입니다. 이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뒤에 나오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진노 중에라도는 것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100%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진노하신다고 해서 분노하거나, 짜증내거나, 따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100% 수용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인정과 수용의 자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역사하시게 되게, 수년 내 부흥하게 되는, 수년 내 나타나게 되는 강력한 회복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부흥을 소망 하되, 먼저 자세를 낮추고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하박국은 15절 까지 계속 기도하면서 일절 마음에 요동함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창조하심, 운행하심, 섭리하심, 일하심, 기회주심, 용서하심, 경고하심, 징계하심, 심판하심, 구원하심 등,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를 무한하게 인정하고 신뢰하는 기도를 풍성하게 올려 드렸습니다.

 

하박국은 선지자 다운 모습으로 돌아와서, 물이 바다 덮은 같으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잠잠히 엎드리는 올바른 태도로 나아갔습니다. 설령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와 짜증과 따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기도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꼭 배우고 실천해야 할 교훈의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빼앗아 가시든지 / 칭찬하시든지, 질책 하시든지 / 상급을 주시든지, 징계하시든지 / 번성케 하시든지, 멸망케 하시든지/ 무조건 인정하고 무조건 신뢰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태도이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취할 태도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는 더욱더 이러한 모습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드디어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16절에서 하박국은 심판당하는 자로서의 두려움과 극한의 공포를 드러냅니다. 창자가 뒤틀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어 들어가고,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강력한 군대의 침공으로 인해 초토화가 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이러한 심판의 두려움을 뛰어넘어 백성에게 미칠 재난의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고 고백합니다. 이를 악물고 다짐한 후에 올려드린 기도가 바로 16~1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16~17절의 내용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주신 것이 없어도 감사하자, 하나님만 바라보자, 이러한 단편적인 이해와 설명을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앞에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유명한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왜 제가 이제껏 하박국 전체 상황을 이렇게 길게 설명을 드렸는지 말씀 드립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 지라도입니다. 문자대로 생각하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괜찮다는 의미 일 수 있습니다. 자족하고 만족하라는 그런 의미일까요? 이 말씀을 때할 때는 먼저 네 가지의 신앙고백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들어 보시고, 이 고백들이 나의 고백,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의 고백, 나아가서 우리 민족과 나라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 자신이 완악하고 목이 굳은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잘못된 언행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고 짜증내고 따져 대기만 했습니다. 이제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되, 어떤 질책과 매 맞음과 징계와 심판과 멸망까지도 100%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내 자신이 성선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싫어하고, 거부하면서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 사람의 소리만을 듣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리는 줏대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성전으로만 나아가 잠잠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진리의 말씀을 듣는 일을 최우선으로,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겠습니다.

내 자신이 물질적인 풍요와 여러 가지 삶의 필요들을 계속 요구하면서,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더 부흥하는 것만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정작 쌓여가는 죄악들로 인해 참을 수 없이 진노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였으니, 이제는 부흥과 풍요에 앞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구하며, 회개하는 자로, 돌이키는 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나도 참혹한 죄악들을 저질러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오니, 창자가 뒤틀리고, 뼈가 썩어가고, 입술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무서운 징계가 내려온다고 하여도, 용서와 회복을 구하며 그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겠으니, 제발 내 자신이 구원의 기회를 잃지 않게 하시고, 다시 복음 앞에,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사랑 받는 자녀로 살아갈 기회를 주옵소서.

 

하박국은 진노를 인정하고, 징계를 받아들이며 다시 하나님을 찾고 신뢰하는 마음을 담아, 징계와 심판으로 인해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하박국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았으니,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와 의도를 이제는 제대로 아실 겁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진정한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고, 포스트 코로나, 위드 코로나 이후에 이 땅의 모든 성도,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의 참 된 신앙 고백이 되기를 진정으로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고, 돌이키는 자를 다시 품에 안아 주십니다.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 지라도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그냥 주신 것에 만족하고 자족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의 심판까지도 100% 인정하면서, 청종의 삶으로 나아가고,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자는 절절한 신앙고백의 기도입니다. 이 시대에 정말 우리가 외쳐야 하는 간절한 기도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위드 코로나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위드 갓(GOD)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히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히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 한 분이면 충분히 인내 하며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 지라도”, 우리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참 믿음 하나만으로, 모든 면에서 용서 받고, 모든 면에서 회복하고, 참된 구원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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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 지라도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구원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함을 얻게 하시고,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와 회복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시기오놋의 감사 (3:1-2)

 

1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23:16을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했습니다. 지금 지키는 맥추절은 구약의 율법은 아니지만 감사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도 드려지고 있는 절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시기오놋의 감사입니다. 1절에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했습니다. 시기오놋이란 무엇일까요? 시기오놋이란 경이로운 곡조, 훌륭한 악보라는 뜻을 가진 음악용어로, 빠른 리듬과 열정적인 감정의 변화를 유도하는 음악의 한 장르(유형)으로 즐겁고 기쁨이 넘칠 때 부르는 곡조입니다.

 

19절에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라 한 것을 보면 이 기도는 개인의 기도를 넘어 모두가 함께 부를 찬양곡이기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내용으로 한 찬양입니다. 하박국이 얼마나 기뻤으면 시기오놋에 맞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그러나 선지자 하박국이 활동하던 시대는 바벨론의 위협 가운데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정국이었습니다.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605년 애굽마저 격퇴한 당시 최대의 강대국입니다. 이 바벨론이 이제는 애굽 편에 선 유다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전체도 작은데 그 중에서 두 지파밖에 안 되는 조그만 유다가 대항할 힘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유다의 계승되는 왕들은 계속하여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기인데 교회까지 기도하지 않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자꾸만 유다가 당할 비극을 가르쳐 주시는데 아무리 가슴이 터져라 외쳐도 헛소리한다고 구박만 하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모두가 안보불감증에 걸려 애굽이 우리를 돕겠지 뭐 잘되겠지 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쁨에 넘친 찬송을 드릴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이런 풍전등화와 같은 유다의 운명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홀로 성루에 올라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루는 파수군이 나라를 지키는 장소입니다. 엘리사와 같이 나라의 방패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때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그의 절망과 애통은 감사와 찬송으로 변합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고 감사가 아닙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뜨겁고 힘찬 감사와 찬송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 힘이 나고 찬송이 나옵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 선한 왕 요시아가 죽고 여호아하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다 애굽 왕 바로느고에게 폐위 당하고 동생 엘리야김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김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을 들어서 징계하고 하나님의 전을 헐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교만만 잔뜩 가지고 우상숭배와 형식적 예배 등을 통해 하나님을 패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그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부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 나오듯 좀 이상한 부흥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는 그런 부흥입니다. 그것은 원수 바벨론을 통해서라도 어떤 방법으로라도 부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잡혀가서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영적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지 못한 결과라고 뉘우친 그들은 성경을 베끼고 연구하여 주석을 만들고 매 주마다 강가에 모여 예배하며 기도했습니다. 곳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고국에 돌아갈 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이처럼 우리의 삶이 바벨론처럼 고단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주시는 연단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감사와 찬송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1:2-3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3:3-15절까지 내용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의 구속사인 출애굽의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과거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얼마나 생생하고 현실감이 있든지 그것을 마치 경험한 것처럼 찬양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지금 현실이 어떻든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이미 죄악에서 구원 받고 세상과 마귀를 이겼으며 하늘에 속한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신령하고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우리를 예수와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혀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본 성도의 자화상입니다.

 

사람을 보더라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마세요.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해 주신 그 모습을 상상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으로 대하세요. 형편없는 사람도 귀한 일군 될 사람으로 격려하세요. 자신도 타인도 예수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대대적인 시각변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후5: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했습니다5:1-2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했습니다. 그 진리에 서서 살면 그 은혜를 누립니다.

 

우리의 영적 주소는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영적상태나 현실이 어떠하든 하나님 앞에 있다고 믿고 늘 감사하고 예배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중심에 살고 있다고 믿고 천국과 똑같이 생각하며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그 은혜를 누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처럼 천국이 경험되지 않더라도 늘 천국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그래서 합2:4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즉 성도는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합니다아담 안의 자기, 사탄 안의 세상을 바라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 안의 자기를 바라보며 시기오놋의 찬송을 드시시기 바랍니다.

 

3. 육을 물리치고 영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육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침략할 것을 생각할 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 편으로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7-19절에 믿음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것이 구원을 누리는 비밀입니다. 마음에 성령의 열매, 구원의 열매, 기쁨의 열매가 아직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풍성히 받았다고 믿고 그 믿음에 견고히 서시기 바랍니다10: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에 서서 육신적인 생각을 떨쳐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정 찬양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도 찬송하시며 감람산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성령을 따라서 산다면 우리들도 하박국과 같은 기쁨의 시기오놋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삶을 역전시키는 전화위복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박국과 같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전천후의 믿음으로 감사하며 더욱 힘찬 찬양으로 살아가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를 인하여 (3:16-19)

 

 

요즘 여러분들은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우리는 지난 6월 한 달 동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월드컵의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개국이래 그처럼 온 나라가 흥분하고 하나가 되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이 끝나갈 무렵 한 쪽에서는 걱정을 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제 월드컵이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은 축구 보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온갖 세상의 시름을 다 잊고 살았는데, 이제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얼마 전에 부산 아시안 게임이 열려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그것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야말로 월드컵도 끝나고, 아시안 게임도 끝났습니다. 요즘 여러분은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야인시대' 보는 재미로 사십니까? 어떤 분들은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물으면,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재미는 무슨 재미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재미 찾아가면서 살아갈 여유가 없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정신 없이 살다보면,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년이 지나갑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훌쩍 자라고 우리는 인생을 서서히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체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낙이 없다면 참 서글픈 일입니다. 단지 이 땅에 던져졌기 때문에 마지못해 사는 인생이라면, 그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재미로 살고 있습니까? 자식 키우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까? 돈 버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까? 일하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까? 자신이 계획하고 목표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말로 어떤 재미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름대로의 재미를 찾아 헤매입니다. 자꾸만 재미있는 일들을 만들어 낼려고 합니다. 그래서 스포츠가 발달하고 별의 별 축제와 이벤트들이 생겨납니다. 가끔 해외풍물에 대해서 소개하는 프로를 보면, 정말 별의별 축제가 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미들로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도박과 마약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어찌하든지간에 어디엔가 흥미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어떤 일에서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임시적인 것들에 불과합니다. 목마른 영혼에게 더 큰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자극적인 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박국은 전혀 다른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식상하지 않고 변치않는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그 기쁨과 즐거움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기쁨의 원천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탄식하며 절규하던 하박국이 이제는 기뻐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즐거워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을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몰아 넣으시고 그 고통과 그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 기쁨을 찾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케 하신 것은, 이 땅의 어느 누구라도, 그 어떤 비참한 상황이나 고통 가운데서라도, 하박국과 동일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하박국이 가지고 있는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하박국 선지의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기쁨이요, 즐거움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당할 환난들을 생각하면서 극심한 공포감에 떨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온 몸에 전율이 흐르고 있습니다. 뼈 속 깊숙이 그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16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었도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그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악인이 횡행하고, 하나님의 율법은 헤이해져 있으며, 공의는 굽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심판은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하박국이 탄식하던 때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이내 곧 그 땅의 모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의 열매들이 없어질 것입니다. 밭의 소출들이 없어지고,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양들이 없어지고, 외양간의 소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이 그 땅에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대아인들에게 약탈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참혹한 전쟁의 비극을 내다보며 하박국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박국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하박국은 그 현실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19절의 고백처럼 더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또 한편으로 즐거워하고 있으며, 기뻐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기쁨과 즐거움의 비결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 하박국 선지자가 발견한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에게 있는 한 가지 흔들지 않는 기쁨의 원천을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한 그는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를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었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관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잘 압니다. 전쟁의 비참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당할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압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기쁘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즐겁게 합니까? 여러분이 언제 가장 기쁘고 즐거운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할 때 기쁘지 않습니까?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소출이 풍성할 때 즐겁지 않습니까? 밭에 식물이 풍성할 때 즐겁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는 양떼가 가득하고 외양간에는 소들이 가득할 때, 기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는 사업마다 잘 되고, 사는 주식마다 올라가고, 직장에서는 인정받고 승진하고, 자녀들은 아무 탈 없이 잘 자라주고, 통장에는 재산이 차곡차곡 늘어만 갈때 기쁘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던 그것들이 없어진 뒤에도 여전히 기쁨과 즐거움이 남아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가득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풍성하고, 밭에 소출이 풍성하고 우리 안에 양떼가 가득하고 외양간에 소들이 가득할 때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일부러 가장 곤혹스러운 상황 속에 있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 기쁨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그 기쁨을 우리에게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기쁨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소망하는 자들의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진정으로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의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관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할지라도의 기쁨', '......함에도 불구하고'의 즐거움이 있습니까?

 

하박국에게 그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은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이후에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기쁨과 즐거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 나무의 무성케 되어지고, 포도열매가 많아지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많아졌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관에 소가 없을지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오직 그 한 분만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인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은 바로 그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땅의 것들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박국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면서 확인하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하박국의 노래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면, 하박국은 과거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그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탄식 가운데 다시금 새롭게 바라보게 된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그 백성들을 해방시키실 때에, 애굽에 행하셨던 그 놀라운 이적들을 베푸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열가지의 재앙들을 내리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 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홍해라도 가르셔서 건너가게 하셨고, 애굽의 성난 군사들은 이스라엘이 마른땅처럼 지나갔던 그 홍해 한 가운데에 침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다면, 해와 달을 멈추게도 하셨습니다. 하박국이 다시 바라보게 된 하나님은 그처럼 역사하셨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가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절망하며 탄식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상황이 너무 나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금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의 탄식을 찬양으로 바꾼 것은 그의 상황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케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빨리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그만 부모 잃은 아이처럼 세상 속에서 헤매입니다. 방황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합니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여전히 그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도 내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면, 여전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 우리들은 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하박국이 모든 것을 다 잃고서도 여전히 자기가 즐거워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로 들었던 그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하박국이 찬양했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무화과가 무성치 못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밭에는 식물이 없어지고, 우리 안에 있는 양떼들을 약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외양간의 송아지들이 다 죽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근거들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여전히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오, 온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권자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천지가 개벽을 해도 이것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그 일에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박국의 믿음이었고 우리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세상은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변치 않으십니다. 의인은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내 모든 것들이 다 흔들리고 변해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의인은 바로 그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코자 하실 때에 그 일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실 때에 그 일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 자리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 믿음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2:4-20)

 

 

사람들은 ''라는 말이나, '저주'라는 말보다는 ''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화보다는 복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다섯 가지의 화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6, 9, 12, 15, 19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섯 개의 저주의 말씀은 도리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다섯 가지 화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인들을 향해서 선포되는 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박국은 처음에 유대땅 안에 있는 불의함을 보고 탄식하였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인들이 악인에 의해서 겁탈과 강포를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시대였습니다. - 하박국은 이러한 시대를 이해 못하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는 식으로 따졌습니다.

그러한 하박국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은 응답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그들을 통해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하박국은 또 한번 탄식합니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자기 힘을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갈대아인들에 의해서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한다면, 그게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의인들이 악인들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에 의해서 짓밟히고 있습니다. 강포와 겁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 의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힘이 되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형통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지금 그들에 의해서 고통받는 의인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끝날'이라고 하면, 왠지 공포스럽고절망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런 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을려고 합니다. 멋있는 말로, 내일의 희망만을 이야기하며 살아도 짧은 생을 구태여 그런 절망적인 것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결코 세상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들은 우리를 공갈 협박하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들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말씀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들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로하고 힘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들을 격려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이 여러 곳에 투자하지 않고 어느 한 회사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투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어떤 소식이 가장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회사가 크게 성공하고 일어난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그 회사가 어려워도, 주가가 좀 내려가 있어도, 장차 그 회사가 번창케 된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그 확신만 있다면, 현재의 상황이 좀 어려워도 그는 얼마든지 견디며,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회사가 절대로 망하지 않고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그 믿음 때문에 아무리 그 주식이 바닥을 치고 있어도, 절대로 그 주식을 팔아서 다른 주식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가 누굽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 그 말씀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멸시를 당한다 할지라도 장차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한 그는 결코 주저앉지 않습니다. 힘들다가도 그 나라에 대한 소식만 들으면 힘이 나는 것입니다.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어떤 소식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악인이 득세하며, 자신의 욕망을 따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 소망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러한 세상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이 소망이 되겠습니까?

 

나 자신의 중심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나라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 땅에 어떤 미련을 두고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상의 마지막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이 두렵고, 왠지 듣기가 싫으냐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 오직 모든 소망을 그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 끝날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은 힘과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하나님이 공의가 어디 있습니까?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십니까? 어째서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겁탈과 강포를 일삼고 있는데 보고만 계십니까? 어찌하여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잠잠하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같게 하십니까? 왜 세상이 마치 하나님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내버려두십니까?' 라고 탄식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그러한 악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는 말씀,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진다는 말씀은 여름날의 얼음 냉수처럼 그 심령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듣고 또 듣고 싶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좋고 세상에 무언가를 투자해 놓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소리가 듣기 싫은 것입니다. 주님이 늦게 오실수록 좋은 것입니다. 이 좋은 세상,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 나라는 이 세상만 못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 땅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나와 앉아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부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절반 정도 투자해 놓고, 세상에도 절반 정도 투자해 놓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 나라도 영원토록 계속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두 나라는 결코 함께 서지 못합니다. 한 나라는 흥하고 한 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 사실을 그 백성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든, 세상의 재물이든,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 다 택할 수는 없습니다. 교묘하게 둘을 택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참 지혜롭구나, 어쩜 그렇게 실력이 좋니?'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양다리를 걸칠 생각은 아예 하지를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아니면 세상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4절을 보십시오. 누가 의인입니까? 그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의입니다. 지금 당장 그들이 죽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더딘 것처럼 보이고, 저들이 의지하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화를 선포하고 있는 대상이 누굽니까? 직접적으로는 당시의 갈대아 사람들입니다. 자기 힘을 신으로 삼고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고 권세자가 되어서 세상의 열국들을 살육하는 자입니다. 한마디로 안하무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아예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단지 역사적인 갈대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와 장소를 떠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들의 모습은 물질적 탐욕이 있는 자들이며(6-8), 사리 사욕을 채우는 자 들입니다(9-11), 또한 잔인하며 살인하는 자들이며(12-14), 술 취하여 방탕한 자들이며(15-17), 우상숭배자들입니다(18-20).

 

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가 바벨론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 세상나라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 나라와 대치되는 나라입니다. 멸망하고 말 세상 나라를 비유하여 큰 성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4 :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2:15)

16 :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18 :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18 :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들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이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나라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세워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미 그 심령에 그 나라를 두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들려 주시오'하면서 또 듣기를 원하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5: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못하여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마치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는 자들,]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고,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들.] 12: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들, 불탈 것으로 수고하고 헛된 일로 곤비케 되는 자들.]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고 그들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들, 사람들에게 강포를 행하는 자들,.] 19: [새겨 만든 우상에게 복을 비는 자들, ]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 그것이 오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들을 향해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뿐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믿어 그 믿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마음을 여전히 강퍅하게 하여 불신앙으로 살 것인가?

 

노아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노아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가 관영함을 보시고,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오. 내가 내 모든 재산과 내 모든 시간을 바쳐서 이처럼 산 위에서 방주를 짓고 있는 것을 보시오.'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그 말을 믿는 것이요, 하나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말을 믿었다면, 그는 믿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떻게요? 함께 방주를 짓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였을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지 않는 자들은 그의 말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웃기는 이야기를 한다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앙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망했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 멸망한 모든 이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노아 홍수의 예를 드셨습니다.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우리는 분명한 역사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 종말이 속히 이를 것입니다. 이 묵시는 결코 거짓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우리 편에서는 더디에게 느껴질지라도) 더딘 것이 아닙니다.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습니까?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믿습니까?

그 날에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는다면서,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 안주하며,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많이 읽힐려고 합니다. 위인들의 전기에는 아이들이 본받아야 할 교훈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의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동경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위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한 세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줄로 믿으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평생에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그 믿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녕 응하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약속)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았습니다.

 

믿음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움지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본토 고향 친척집을 떠나 갈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났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들의 주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가이사를 주로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투기장을 보내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게 하였지만, 그 믿음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발의 등이 되어야 하고 내 길에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삶의 방향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원칙 하에서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며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하박국-1] '어찌하여?' (1:1-17)

 

여러분은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공의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아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어찌하여 세상이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현실의 모습]

 

그것은 오늘날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12:] "(1) 여호와여 도우 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 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 (8)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 도다"

[현대어성경]

"(1) 건져 주소서, 여호와여! 착한 사람 하나 구경할 수 없고 정직한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습니다. (2) 사람마다 서로 거짓말을 둘러대고 입발린 말로 속이기를 밥먹듯 합니다. (7) 여호와여, 흉악하게 못된 짓 일삼는 것들이 삼지사방에 두루 돌아다니고 더러운 짓 하는 것들은 그런 것 보고 잘하였다 박수 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립니다. 더러운 자들이 판을 칩니다."

 

또한 아삽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개역성경] [73:] "(1)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 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 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은 뭐라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2-4절까지의 말씀을 [현대어 성경]으로 살펴보면 더 실감납니다. 오늘 본문2-4절이 현대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오 여호와여, `사람 살려!' 하고 아무리 외쳐도 주님은 들어 주지를 않으시고, `사람 패 죽인다!' 하고 소리를 질러도 주님은 구출해 주지를 않으시니, 이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3) 왜 나에게 악하고 거짓된 일들을 보게 하십니까?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들을 그저 보고만 계십니까? 이 나라에는 어디에나 탄압과 폭력이 가득 차 있고, 싸움과 불화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4) 그렇기 때문에 주의 율법은 힘을 못 쓰고, 국가의 법은 효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저 악인들이 이 땅의 의인들을 붙잡아 자기들의 폭력 밑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굳이 구체적인 어떤 예를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윗이 살았던 시대 아삽이 살았던 시대,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크게 다를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저들과 동일한 믿음 가운데 있는 성도라면 저들과 동일한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세상이 이 모양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잠자코 계십니까? 저처럼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큰 소리를 뻥뻥 치고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냥 내버려두고 계십니까?' 우리도 옛날의 믿음의 선진들과 동일한 질문을 하나님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러한 현실의 부조리한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와 관계없으면 그냥 모른채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골치 아픈 문제니까 그냥 덮어버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답을 얻어야만 합니다. 바로 하박국의 말씀이 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의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박국서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박국의 말씀을 묵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을 보면서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러한 탄식 속에 깔려 있는 하박국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다윗이나, 아삽이나, 하박국과 같은 탄식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심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세상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시대에 편승해서, 나도 함께 그들 속에 섞여서, 대충 모나지 않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도 할 수 있는대로 내 유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단 한번 살다 가는 인생,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성도는, 그 하나님의 다스림을 아는 성도는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 공의가 파뭍혀 버린 현실을 바라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이처럼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이렇습니까?'

 

하박국은 그러한 세상의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더욱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 모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박국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박국의 탄식 속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박국이 오랜 시간 동안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그렇게 부르짖었는데, 언제까지 침묵하시고 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했을까요? 5절이하의 말씀을 보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답을 주십니다.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실 도무지 믿지 못할 그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6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오.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8)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11)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갈대아 사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죄악이 판을 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일으키시는 갈대아 인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저들은 사납고, 성급한 백성들입니다.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면서 자기의 소유 아닌 곳들을 점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두렵고 무서워며, 심판과 위령을 자기로 삼는 자들입니다. 자신을 심판자로 권세자로 삼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주이시오,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자신의 힘으로 신을 삼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더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하박국의 또 다른 질문(항변)을 들어보십시오. 12-17절입니다. "(12)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어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려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악하다고 하기로 저 갈대아 인들보다 악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고,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분이심을 아는데,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잠잠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째서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주권자가 없는 바다의 고기나, 들의 곤충과 같게 하시냐'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힘으로 열국들을 살육하고는 자기의 힘(군사력)에게 분향하고 그것을 섬기는 그들이 이렇게 하도록 내 버려 두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박국의 질문들은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질문들입니다. 꼭 우리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하박국 말씀 속에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과 하박국의 태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답을 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오늘 하박국의 이러한 탄식이 내 안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어찌하여?' 라는 탄식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러한 문제들을 놓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가 256장의 가사처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가 들려오고 빛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하여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는 많으나 생명수는 말라버린 이 시대를 바라보며', 어찌하여 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가 없다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시대에 편승해서 편안하게 살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서 안일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시대 속에서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악인들이 우글거리고 더러운 자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를 바라보며 통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탄식과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여러분!! 먼저 이것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 탄식이 없이 우리는 하박국이 얻은 그 놀라운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박국은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됩니까? 하면서 끈질기게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기도로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박국의 그 탄식과 부르짖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세워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자신이 그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은 그가 바라보며 탄식하던 바로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먼저 하박국 안에 있던 탄식과 부르짖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시대를 바라보면, 우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문제의식이 없이는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뭐 다 그런거지,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뭐,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탄식해야할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 세상과 하나가 되지 마십시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세상을 떠나서 살아갈 수는 없으나, 우리는 깨어서 이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어긋난 길로 가고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같이 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탄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자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공의가 무너졌다고 공의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정직한 자가 망하고 악인이 득의한다고 여러분의 정직과 선함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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