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요18:1-11

nam씨 2015. 3. 21. 15:20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요18:1-11

이집트 콥트교회 인도자 자카리아 보트로스(Zakaria Botros)는 이슬람권에서 가장 복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위성 방송을 운영하면서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 들고 둘을 비교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모슬렘들이 이 방송을 보고 개종하고 있습니다. 매일 접속자만 6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모슬렘들이 진정한 복음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과격 이슬람 단체에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현상금 1억 달러를 걸었습니다. 그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데 두렵지 않습니까?” 하고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실 뿐입니다. 저는 매 순간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매를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찔림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 것을 믿을 때, 주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심을 믿을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미리 알고 준비하는 자가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십자가의 수난을 받을 것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에게 몇 차례 예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하실 것과 승천, 그리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을 것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평소 자주 가셨던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간절한 기도로 수난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복음서 본문 1-2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감람산 사이에는 “암흑”이란 뜻을 가진 기드론 시내가 있습니다. 지금은 산림도 없고 집들이 많이 지어지고 해서 별로 험하게 보이지도 않지만 그 당시에는 골짜기가 깊어서 많이 험했다고 합니다. 옛날 다윗 왕이 피난 갈 때 이 기드론 골짜기를 건넜고 아사왕은 여기서 모친의 우상을 불살랐고(왕상 15:13), 요시아 왕 때에는 이곳이 공동묘지가 되었었고(왕상 23:6), 지금도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는 공동묘지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을 찾아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동산이 바로 감람산 한 옆에 붙어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겟세마네"란 기름을 짠다는 뜻입니다. 그 곳에 가보니까 지금도 상당히 큰 감람나무 들이 많은데 그 감람나무들이 예수님 계실 때 있었던 나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마치 기름을 짜듯 간절한 기도를 드리실 때 땀이 피방울이 되어 나올 정도로 십자가를 예비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서신서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도 믿음과 기도로 준비하고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예수님께 십자가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듯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사도 바울에게는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신 것은 십자가의 길이 메시야의 길이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길이고,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쓰디쓴 고난의 길이기에 피하고 싶은 길이고, 돌아가고 싶은 길이고, 멈춰 서고 싶은 길이지만 기꺼이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도 바울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피하여 가라. 돌아가라. 멈춰 서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결박이 기다리고 있지만 사명의 길을 걸어라. 환난이 닥칠 것이니 담대 하라. 결박과 환난을 만나게 될지라도 되돌아서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에 편안한 날을 별로 못 가졌다. 알라바마 감옥에 다섯 번 투옥되었다. 내 집이 두 번 폭파되었다. 나와 내 가족을 죽이겠다는 위협을 거의 며칠에 한 번씩 받아왔다. 나는 칼에 찔려 거의 죽을 뻔하였다. 더 이상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을지 정직하게 말해서 나 자신 의심스럽다. 정말 조용하고 쉽게 살고 싶은 유혹을 시간마다 받는다. 그러나 이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내가 힘을 얻고 굴하지 않는 원인은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나의 멍에를 메면 너희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말씀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흑암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가를 배웠다. 주님을 믿을 때 고통은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하였다. 나의 개인적인 불행은 나를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랑스럽게 나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다고 한 말을 실감 있게 이해한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 성도들 역시 주님을 따라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그 길 이후에 부활과 영생의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들은 비록 십자가의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항상 기도로 준비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영생을 준비하는 자들이 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도와 충성스런 믿음으로 살다가 주님이 예비하신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준비 된 자는 장예 물과 고난을 피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갑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인간의 생각을 앞세워 그리 하실 수 없다고 했다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베드로를 나무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자 결단하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마치신 후 가롯 유다의 인도를 받고 온 무리들 앞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온 줄 다 아시고 5절에 “내가 그니라”하시며 당당히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8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묵묵히 당당하게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서신서 본문에 보면 바울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두로의 제자들, 빌립의 네 딸들과 아가보가 사람의 인정을 앞세워 가지 못하도록 만류했지만 바울은 사람의 생각 보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명자로서 믿음과 기도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만류할 때 13절에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만류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준비된 자의 모습입니다. 영적으로 무장하여 준비 된 자들은 앞에 있는 장애물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가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나 준비 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3절에"유다가 군대 및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슬픈 사실은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며 배우고 고락을 같이 하던 제자 가룟 유다가 선생을 배신하고 자기의 선생을 체포하려고 무리를 이끌고 그 앞장을 서서 올라온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안내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이끌고 온 무리를 보면, 로마의 군대,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종들,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진 무기는 등과 횃불, 검, 몽치, 병기 등등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 하는 세력은 어느 시대나 예수를 배신한 배신자들과 세상권력과 또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부패된 교권주의자들입니다.

예수께서 특별히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함께 깨어 기도할 것을 당부했으나 그들은 육신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졸고 자다가 엉겁결에 유다가 이끌고 온 무리들과 마주 대하게 되었을 때 10절에 보면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러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시몬 베드로가 왜 검을 차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때 분위기를 봐서 아마도 호신용으로 검을 차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의 종의 처지에 있는 하잘 것 없는 말고라는 자가 신이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선봉에서 깝죽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의분이 왈칵 솟아올라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칼을 빼서 말고를 쳤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칼이 빗나가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 떨어뜨렸습니다. 주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된다고 나무라시며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주님이 잡혀가실 때 다 도망을 치고, 베드로는 주님이 예고하신대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이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부족한 자들의 모습이요, 기도로 무장하여 준비하지 못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물론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 하다 성령 충만을 받고 담대한 믿음으로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하다 위대한 순교자들이 되었지만 준비하지 못했을 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항상 깨어 준비된 믿음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사명 감당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복음서 본문 11절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과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명상하기도 하며 찬송을 부르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고 확인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확신한 후에는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기도생활이며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한 기사(記事)는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고통의 길, 형극(荊棘)의 길을 선택하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편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시밭길을 택할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택해야 할 것인가? 타협해서 무사하게 여생을 보낼 것인가? 오욕과 수치가 기다리는 그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이러한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고난의 잔"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한>에서 예수님의 이러한 선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습니다. "명령에 따라 고통을 받는 것은 자의로 고통 받는 것보다 쉽다. 여럿이 함께 고통 받는 것은 혼자 고통 받는 것보다 쉽다.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것보다 쉽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의(自意)로, 혼자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고통을 모두 선택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고통의 선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서신 서에 나오는 바울 역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14절에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하며 더 이상 만류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카고에 폴라드 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러한 갈등 속에 지내던 폴라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뿐더러 육체도 시들해져서 당뇨와 신경계통의 병으로 침대 속에 누워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 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기도 모임에서 참석하였고 옆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한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이여,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은 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명을 저버리고 자기의 고집대로 살려고 했던 자아와 욕심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자아가 죽는 것을 느낄 때에 그의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왔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찬송 시로 적었는데 그것이 찬송가 425(217)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 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일은 우리에게 최고, 최선의 은총의 길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로 삽시다.

1.미리 알고 준비하는 자가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2.준비 된 자는 장예 물과 고난을 피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갑니다.

3.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우리 모두 멀리 인생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미리 믿음과 기도로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명의 길을 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