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들    행 18: 1-11                          

 

 

   사도행전 18장을 펼쳐 들고서 저는 설교 제목을 무엇이라고 붙일까 하고

한참동안 생각하였다. 설교제목은 설교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단어보다는 좀 신선한 감각의 단어들은 위험성이 있기는 하

여도 오래도록 성도들의 머리에 남는다. 그러나 잘 알려진 제목들은 구태의

연하기 때문에 쉽게 잊어버리는 특성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하는 제목도 역시 구태의연한 제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목은 쉽게 잊어 버릴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 제목은

중요하다. 때문에 이 제목이 가지고 있는 내용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오래

도록 기억에 남게 되기를 바란다.

 

   본문은 바울이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 들어와 전도활동을 한 내용을 말

하고 있다. 바울이 전도하며 지내오는 동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먼 발치

서 바라보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

람도 있었다. 바울 주변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 가운데 바나바나 아나니아

같은 사람은 바울을 훌륭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다. 반대로 실라, 디모데 같

은 사람은 바울로 말미암아 훌륭하게 된 사람이다. 이와같은 이유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듣거나 말할 때 가벼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섯명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

   먼저 등장하는 이름은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 이다. (2)

   아굴라: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 고향이 소아시아 북부의 본도이다.

   아굴라는 그의 부인 브리스길라와 함께  신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로

알려졌다. 브리스길라는 교양이 있는 로마 명문의 출신이다. 아굴라가 로마

에 가서 생활하다가 결혼을 한 것으로 본다.  이들 부부가 이달리아에서 고

린도에 들어왔을 때에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바울은 아굴라의 집에서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더러는 교회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4:16)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많이

조심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11:9) 바울은 친히 손으로 수고하며 일

을 하였다.( 20:34, 고전 4:12, 9:6, 고후 7:2, 살전 2:9, 살후 3:8)

   바울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율법을 많이 공부한 바울에게 장막만드는 일은 어울리지 않

 

는다. 그러나 유대인의 랍비들은 대부분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생업을 가

지고 있었다. 랍비들은 말하기를 자기 아들에게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 사람

은 사실 도둑질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하였다.  누가 일하는 것을 마다

하는가 ?   요즘 우리들은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결과 생산에 차질이 생겨서 많은 공장들이 노동력이 싼 나라로 떠나가고

있어서 걱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새삼스럽지만 일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만일 미리부터 자녀들에게 땀을 흘리고 일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

으면 그들의 시대에 자녀들은 눈물을 쏟게 될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관한 기록은 로마서 16장에서도 발견된다.  바울

은 이들 부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궐링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한 것을 보면 바울의 전도사역에 상당한 생

명의 위험을 안고서 그를 도운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이라도 희생할 각오

를 가진 사람이다.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생명을 버리면 얻

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교훈이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오셨다. 그의 생명 버리심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

 

   두번째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라와 디모데이다.(5)

   이들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 후로 바울은 하나님

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였다.  

번역성경은 이 말씀을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온 후로는 ... 

라고 번역하였다. 공동번역도 마찬가지로 번역해 놓았다.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그들이 온 이후에 말씀 전하는 일에 전

념하였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 여기에는 필시 무슨 뜻이 있다.

 

   1)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와 빌립보에서 선물을 가져왔다.

      고후 11:9,  4:15 에 의하면 그 선물은 바울이 부족하게 된 부분을

      쓸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바울이 필요한 물질을 보충해 준 것이다.

      전도자가 마음의 부담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

 

   2)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 대신 일을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준비하고 전해야 할 사람이  일에 매달려 있어서 복음을 전하

      지 못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그 일에서 자유할 수 있다

      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

 

   3) 외로움을 덜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디모데와 실라가 없는 동안  바울은 아덴에서나 고린도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의 가시 때문이거나 그를 대적하는 사

 

      람들 때문에 심한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만

      둘 수는 없지만 바울은 너무도 기력이 약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이 어찌 돛단 배가 순풍을 만난 것 아니겠

      으며 용이 날개를 단 것이 아니겠는가 ?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이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복음 전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바울은 전 보다 더 부지런하

고 더욱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경건을 강조하며 열심을 다하여 복음을 전한

것이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을 구하고자 하는 특별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

. 로마서 9 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고린도 사람들은 그의 전하는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고 훼방하였

. 바울은 안타까워 자기 옷을 떨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 갈 것

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말하였다.

   이날 이후로 바울은 회당 출입을 삼가하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들에게 믿음을 권고하지도 않았다.

 

   세번째 그룹의 이름은 유스도와 그리스보이다.

   유스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요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 온 집이

다 주를 믿는 가정이다. 한쪽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이 열리는 법 ! 대적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유스도는 헬라사람이다.

그는 개종자이다. 그의 집이 회당 옆이다 보니 날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는 성경말씀과 강론이 그의 귀에 들어 왔을 것이다.  이 또한  얼마나 큰

복인가 ?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스뎬 바울을 영접하면서 또한 그의 복음을

받아 들였다.  뿐만 아니라 회당장 그리스보는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

며 허다한 고린도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앞에서 말씀드린 브리스길라나 아굴라  그리고 디모데와 실라에  비하면

유스도와 그리스보는 믿음에 관한 한 한참이나 떨어진 사람들이다. 뒤 늦게

변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 바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환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이 본 환상은 낮에 보인 것과 밤에 보인 것이 다르다.

   1) 다메섹에서 본 환상 (9:12)

   2)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환상(22:18)은 낮에 본 것이고

   3) 드로아에서의 환상(16:9)과 함께 고린도에서의 환상은 밤에 보였다.

 

   환상의 주체는 예수님이시다.

   예루살렘에서의 환상은 '저희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않으니

예루살렘에서 속히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두려워 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이다. 바울에게 나타난 환상처럼  우리가

무엇인가 행할 때 그것을 계속 행할 것인지 아니면 그 일을 중도에서  포기

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우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분명한 환상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기를 바란다.

 

   한 청년이 선교사가 될것을 결심하고 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선교사 시험에도합격하여 3 개월동안의 선교훈련을 다 마치고 얼마 남지

않은 동안 선교지에서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느라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지나

다가 그만 실수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선교사는 다리를 자르지 않으

면 안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였다.  '선교사로 나갈 몸

인데 왜 내 다리를 자르는 것입니까 ? 왜 이런 시련이 있단 말입니까 ?'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별다 응답을 주시지 않았다.

 

   얼마 후 아프리카 선교사를 모집한다기에 풀죽은 모습으로 나 같은 몸도

받아 주겠는가 하며 응시했는데 뜻밖에 합격을 하였다. 그가 아프리카로 간

지 얼마 안되어 식인종들을 만나게 되었다. 선교사를 둘러서서 춤을 추는데

선교사는 의족인 자기 다리를 뚝 떼어서 그들에게 던졌다. 고무다리를 받아

든 그들은 그것을 먹어 보더니 질겁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것은 신

이다.'고 외치면서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 후에 선교사는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교사는 그종 비로소 하나님이 왜 자기의 다리를 잘라 버리셨는가 하

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원

망을 하는지 모른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어리석은 분이 아니시다.

 

   약하고 두려워 하며 심히 떨며 지내던 바울에게 고린도에서의 이 환상은

얼마나 고무적인 환상인지 모른다. 주님은 바울에게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계시마 약속하신 우리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

과 함께 계심을 믿으라.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으로 임할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받아 들이기를 거부한 사람

들을 떠난 전도자들을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 들이

는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전도자들을 도우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롭지 않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 전력하도록 도우시는 분이

시다.

 

천국 알곡론 5 (계 14:19-20)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영적추수와 연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에미 카미켈(Amy Carmichael)의 저서 가운데 나오는 말입니다. 에미 카미켈이 인도의 대장장이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금을 연단할 때 이것이 순금이 되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대장장이는 “예 그건 금 속에서 제 얼굴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연단합니다.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이 얼마나 정확하게 잘 보이느냐를 가지고 결정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간의 옛사람은 사라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람의 형상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완악해서 고난을 통한 연단 없이는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참된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는 연단이 헛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19절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여기 하나님의 진노가 나옵니다. 이 진노는 죄에 대한 진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는 하시지만 용납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강한 채찍으로 치시며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롬1:18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그랬고, 골3:5~6에도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시7:11-13에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진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도 붙잡고 있는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용납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고 어서 속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2.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9절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여기 큰 포도주 틀은 무엇일까요? 포도주틀은 포도를 넣고 발로 짓밟아서 포도즙을 내는 틀인데 작은 틀이 아니고 큰 틀입니다.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연관이 되어 있는 낱말입니다. 즉 예수 믿고 변화되라고 밟는 것이지 달리 밟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연단 받을 때 큰 틀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코앞에 나타난 현실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신다는 큰 틀에서 봐야 진리가 보입니다. 그래서 욥19:21에서 욥은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알곡 만드시려고 큰 틀에 넣으셔서 짓밟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욥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했고, 슥13:9에도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현실만 보고 어리석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참 복을 주시려고 나는 낮추시고 연단하심을 깨닫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합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손길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여기 포도주 틀, 틀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틀이란 한 번 그 틀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농부의 거친 발에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오로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했습니다. 교만해 봐야 혼난다는 말입니다. 요나가 사명을 회피하기 위해서 도망하지만 뜻대로 되었나요? 처음에는 요나가 탄 배가 순풍으로 항해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요나는 꼼짝할 수 없이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서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손길을 피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시139:7-12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려고 말고 단단히 마음먹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4. 내 십자가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20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여기 성 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골고다 언덕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골고다 언덕은 우리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 대속의 주께서 고난 받으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혔다는 것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목적이 우리 죄를 회개케 하시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죄에는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성 밖 골고다 언덕은 죽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으라고 짓밟으시지 살라고 밟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 죽는다는 말은 나를 꺾고 순복한다는 말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복하고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5. 우리가 죽되 내 생각 내 주장대로 사는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20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문자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포도주 틀에서 피가 났다는 말도 그렇거니와, 얼마나 났으면 그 피가 말굴레까지 닿습니까? 말굴레라고 하면 사람의 얼굴 높이 정도 됩니다.


그것도 1,600 스타디온 즉 300km나 퍼져나갔습니다.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비약도 보통 비약이 아닙니다. 온 세상의 피를 다 모아도 이 정도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포도주틀 밟듯이 짓밟으시는 목적이 나타납니다. 즉 피를 흘렀으니 죽음을 상징하고, 말굴레와 같이 연단이란 바로 우리의 자아를 제어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32:9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했고, 약3:3에도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바로 않고 내 고집대로 하면 가만 두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6. 하나님은 우리가 철저히 훈련받기를 원하십니다.


20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번에는 1,600 스타디온의 의미입니다. 1,600은 히브리적 사고로 보면 그냥 생겨진 수가 아닙니다. 1,600은 연단의 수 40을 제곱한 (40×40) 수로서 연단되고 연단되는 철저한 연단을 말합니다.


신앙훈련 어설프게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 믿고 주일성수는 물론 새벽기도회 참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전도하고 낮아지고 봉사하며 제대로 예수 믿고 오순절 성령충만까지도 관심 갖는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런 믿음 가운데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40년 동안 애굽의 1세 국민은 모두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빼고는 모두 2세국민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잠깐, 갈렙의 이름의 뜻이 뭡니까? "개"입니다. 개는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을 반기고 주인을 믿으며 훈련 시키면 절대 복종하고 충성하고 배신하지 않고 변함이 없습니다.

 
개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배울 점이 많아요. 연단의 결정판이 바로 개라는 의미를 가진 갈렙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40도 가혹한데 40×40이니 얼마나 가혹합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8:2-6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진리의 말씀으로 순순히, 섭리적인 연단으로 강력히 우리가 회개하고 바른 믿음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는 한 결코 우리를 향한 자기 목적을 중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연단의 섭리 앞에서 철저히 순복하여 회개함으로 참 믿음 가진 알곡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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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알곡론 4 (계 14:18)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영적추수와 열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천국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 열심 있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딤전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알곡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여기 불이 나오는데 여기 불은 어떤 불일까요? 성령의 불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 6장을 보면 제단 불을 다스리는 스랍 천사가 나옵니다. 사6:6-7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처럼 성령의 불을 받을 때 변화도 받고 알곡도 되고 헌신적인 일군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4:3-4에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느헤미야서에도 나오지만 예루살렘은 대대로 적의 공격목표였기 때문에 시온에 거주자는 목숨 걸고 싸울 자세가 없이는 거주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목숨 건 예루살렘 거주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 건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목숨 걸고 신앙생활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예루살렘에 모여 목숨 걸고 기도했던 120문도들이 알곡이 되었고, 지금도 하나님을 힘차게 경외하는 자들이 성령의 불을 받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2. 헌신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번에는 천사의 출처입니다. 이 불을 주관하는 천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제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성전에 불이 있는 제단은 두 곳입니다. 먼저 성전뜰에 있는 번제단입니다. 이곳은 제물을 태워 제사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성소 안의 분향단입니다.


그럼 본문에 나오는 제단은 어느 제단일까요? 그러나 두 곳을 다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향단의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옮겨오기 때문에(레16:11-12)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번제단과 분향단을 오가는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번제단은 헌신을 상징하고,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즉 참된 알곡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3.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 이번에는 불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불은 성령의 불이요, 제단은 헌신과 기도라면, 그럼 불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얼 말할까요? 불이 활활 타오르게 도와주는 걸 말합니다. 번제만 보더라도 불이 잘 탈 수 있도록 놋그물 위에서 번제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헌신할 수밖에 없고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말씀으로 감화 감동 혹은 연단을 통해서 신앙의 불이 타오르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완악할 때는 강제로라도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32:8-9에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과도 어울리는 해석입니다. 즉 가을에 포도를 짓밟아 추수하듯 우리를 은혜와 연단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엎드리지 않을 수 없도록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의 감동을 받으면 받을수록 좋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경건이 깊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히12:11-12에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했습니다. 여기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적극적인 기도의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을 원망하지 마시고 왜 이런 환경을 주시는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규칙적인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도 목숨 걸고 하루 세 번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주일성수와 정한 예배와 개인기도 역시 큰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규칙을 정해 놓고 힘써 할 때 하나님 나라의 참 알곡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말씀 안에서 열심해야 합니다.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불 다스리는 천사가 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에게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외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불 더하기 낫입니다.


그런데 작은 음성이 아니라 큰 음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열심이 말씀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의미와 아울러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전4:20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지 못하고 성령의 은혜를 간구한다면서 말씀을 떠나 신비주의로 나가는 자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사탄의 잔치밖에는 더 되지 않습니다. 그런 열심히는 알곡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5. 그리고 말씀 안에서 열심할 때 참된 알곡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18절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여기 포도송이를 땅의 포도라고 한 점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본래 땅은 죄악으로 저주를 받았으며 노아의 때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한 것처럼 이제 이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셨습니다(벧후3:7).


그러므로 땅은 죄와 심판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포도송이는 그 땅의 소산이므로 죄의 열매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땅의 포도송이는 우리 마음속의 갖가지의 죄성을 가리킵니다. 죄란 원문으로 보더라도 죄다발입니다.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스’ (άμαρτίας)인데 복수형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마치 포도송이와 같이 가장 큰 줄기인 불신 죄에서 비롯되어 하나님에 대한 죄 사람에게 대한 죄로 구분되고 이것 역시 다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어찌할 수 없는 큰 죄 다발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의 포도송이가 푸르지 않고 익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고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열망이 충분히 극에 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옛날에도 죄인이고, 지금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다만 변한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인식도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창15:16에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 않았지만 점점 타락하여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거기 사는 일곱 족속들이 완전하게 타락하여 심판을 받음과 같이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구제불능의 죄인임을 그렇게 점점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는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범죄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자라갈 때 그 때가 바로 우리 속에 죄가 심판 받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경외함의 부족해서는 죄가 처리되지 않습니다.


잠16:6에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로서 가까이 하면 우리 속의 죄다발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율법을 통하여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혹은 삶의 환경과 각종 연단의 파트너를 통하여 우리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악한 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죄악의 포도송이가 처리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로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우리가 온전한 천국의 알곡 되기를 갈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강단에서 선포되는 주의 말씀과 또 우리의 삶에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나셔서 하나님의 참 믿음의 알곡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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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값진 흔적 11:25-30, 6:11-17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름답기를 바라고 멋있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 공통된 심리일 것입니다. 스스로 미워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자기 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흔적들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를 과시하려하거나 나름대로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문신을 하거나, 장신구로 자기 몸을 치장합니다. 또한 젊은 남성들은 근육질 체형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고,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고, S라인 몸매를 만들기 위해 휘트니스를 찾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겠지만, 성도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육체적인 외모의 모습 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도 육체의 흔적인 할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할례란 요즘 말로 포경수술인데 이 할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표식이었기 때문에 할례는 그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례를 받아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흔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진정 자랑스러운 흔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두 본문에는 성도가 갖추어야할 귀한 흔적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값진 흔적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의 값진 흔적은,


1.예수님을 본받은 온유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 본문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을 향해서는 가차 없이 책망하셨지만, 택한 백성들에게는 온유한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무지하여 주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있다 해도 오래 참으시며 온유한 사랑으로 대하시며 깨닫게 하십니다. 사울이 주님을 만나 변화되기 전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혈기가 등등하여 믿는 자들을 박해 할 때도 오래 참으시다가 다메섹에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말씀 하시고 사울이 이방인을 위해 주께서 택한 그릇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는 수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온 여인을 만나서 말씀하실 때에도 온유하신 마음으로 그녀와 대화를 하시면서 여인은 자기와 말씀 하시는 분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인 것을 알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가서 자기가 만난 메시야를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예수님의 온유하신 사랑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 배우고자 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라는 것은 짐승들에게 밭을 갈거나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짐승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풍습에는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함께 메었습니다.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들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멍에를 메어주마 하십니다. 전에는 나 혼자 멍에를 메었지만 지금은 주님과 같이 멥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못된 성품들을 하나씩 고쳐나갑니다. 나와 함께 멍에를 멘 주님은 화내지 말라, 기다려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하시며, ‘염려하지 말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 네 앞에 있는 장애물 앞에 낙심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나와 함께 가자.’고 격려하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주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참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굴복하고 순종할 때만 비로소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에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순종할 때만 우리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어버리거나 주인 되신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 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가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온유한 사랑으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보통 95퍼센트의 좋은 점과 5퍼센트의 좋지 않은 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100퍼센트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95퍼센트의 좋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5퍼센트의 좋지 않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95퍼센트를 보고 사는 사람은 힘 있게, 자신감 있게 삽니다. 다른 사람의 95퍼센트를 보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만 5퍼센트에 주목하면 관계가 틀어집니다.  5퍼센트를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5퍼센트는 그가 평생 지니는 것이고 우리가 받아줘야 할 부분이지, 바로잡으려고 애쓸 부분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들 수도 없습니다. 상대방의 결점 5퍼센트쯤은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채워주면서 살아야 온유한 사랑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 주님의 온유한 사랑의 흔적을 가지는 성도가 됩시다.


2.예수님을 본받아 겸손으로 섬기는 흔적입니다.
주님은 내게 와서 나의 겸손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빌2:5-7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겸손한 자가 되면 몇 가지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겸손히 인정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의뢰하는 자가 됩니다. 옛날에 어떤 왕자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옥에 간 왕자는 죄수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이렇게 옥에 와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모든 죄수들은 한 결 같이 왕자 앞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인데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죄수 한 사람은 왕자 앞에 공손히 엎드려서 하는 말이 저는 백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는데, 이날 까지 내 생명이 살아서 있다는 것은 임금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왕자는 이 죄인에게 말하기를 옳은 사람만 사는 옥중에서 죄인 혼자 있으려하니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냐고 하면서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 자유롭게 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주셨지만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주님께 나오지도 아니합니다.
*남의 장점을 보고 격려할 줄 압니다. 교만한 바리새인은 자기를 자랑하며 남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특히 세리와 창기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겸손히 회개하는 세리와 창기들의 죄를 사하시고 음식을 같이 잡수시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죄로 괴로워하는 자들의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1950년대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모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 모임에서는 남학생들로 구성되어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가 쓴 소설이며 시의 결점들을 가차 없이 서로 비평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창작에 도움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한편 여학생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는 서로 혹평은 일절 피하고 좋은 부분만 칭찬했습니다. 10년 후 그 여학생들 중 대부분이 훌륭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유망하던 남학생들 중에서는 단 한 명의 뛰어난 작가도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랑으로 남을 섬기며 살면서 기쁨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도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 ‘하늘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명예와 권세를 얻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섬김 받는 것을 좋아 하지만, 주님을 본받아 배운 겸손한 자들은 기쁨으로 남을 섬기며 사는 자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 보다 큰 자가 되려고 했으나 후에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고 주님처럼 겸손히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살았지만 주님 만난 후 은혜를 받고 주님만을 높이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고, 주와 복음을 위해 겸손히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겸손히 섬기는 자의 흔적을 지니고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십자가 고난의 흔적입니다.
서신서 본문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στιγμα)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에게 낙인을 찍었는데 그 낙인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이 흔적은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흔적입니다. 그런데 이 스티그마란 단어는 스티조란 단어에서 파생했는데 그 뜻은 찌르다는 뜻입니다. 즉 찔림을 받아서 생긴 흉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흔적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주님의 흔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흔적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았던 사도 바울이 보여준 십자가 고난의 흔적 중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기도 무릎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22:39-41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감람산에 가셨는데, 그 중요한 목적 중에는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 이었습니다. 주님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도 주셨지만, 친히 기도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밤에, 때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했고,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할 때도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지시를 따르기도 했습니다. 20:36에 바울도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지도자들은 낙타 무릎의 소유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기도 무릎으로 살았고, 주의 동생 야고보의 무릎은 늘 기도를 쉬지 않아 낙타무릎 같았다고 하며, 의인 야고보로 불렸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기도 무릎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지녀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에는 머리에 가시관에 찔린 흔적, 몸에는 체직에 맞은 흔적, 양 손과 발에는 대못에 찔린 흔적, 옆구리에는 창으로 찔린 흔적 등 많은 고난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 바울에게도 이 고난의 흔적을 가졌는데, 그는 그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서른아홉 번씩 맞는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으니, 그의 온 몸은 흉터로 뒤덮여 있었을 것입니다. 손목과 발목에는 쇠로 만든 차꼬에 채인 흉터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린 적도 있었으니 돌에 맞은 흔적도 있었을 것입니다.(14:19) 그 흔적들은 모두 주와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 생긴 흔적들입니다. 이게 다 바울 사도가 가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 흔적들이었습니다. 그의 흔적들은 자신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지니고 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값진 흔적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도의 값진 흔적은,
.예수님을 본받은 온유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으로 섬기는 흔적입니다.
.십자가 고난의 흔적입니다. 아멘.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천국 알곡론 3 (계 14:17-20)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역시 ‘영적추수와 연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곡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3:11-12에 하신 말씀대로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천국의 열매 맺지 못한 인생 쭉정이 갈 곳은 꺼지지 않는 불 외엔 없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여름에 하는 모맥 즉 보리와 밀의 추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포도를 추수하는 가을 추수가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두 종류의 추수를 그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알곡 만드시기 위해서 두 방향에서 추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두 방향에서의 성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한 편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다른 한 편은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 연단을 통한 성화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1. 연단 역시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4절과 흡사한 구절입니다. 공통점은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예리한 낫을 가진 자가 여기서는 인자 예수가 아니라 천사라는 점, 그리고 낫을 가진 장소는 흰구름 위가 아니라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포도 추수에 낫이 별로 필요 없는데 예리한 낫을 가졌다는 것은 이 역시 천국의 알곡과 한 맥락이라는 것이고, 연단 역시 구원을 향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연단이란 알고보면 행동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단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의도를 충분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이 아무리 자상하고 분명해도 이것을 왜 이런 연단을 주셨는지 말씀 안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이것은 열매 없는 고통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아이를 채벌하면서도 왜 매를 맞아야 하는지 알게 하지 않는다면 채벌이 아니라 아무 교육적인 효과가 없는 폭행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학에서 체벌의 10대 원칙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체벌 받는지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험에 대해서 말한 후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1:5-6)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진실로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도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삿 4장을 보면 하솔왕 야빈이 쳐들어왔을 때 바락 장군이 여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여기 바락은 ‘벼락’이란 뜻으로 징계의 상징이요,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뜻의 말씀의 상징입니다. 아무리 벼락 쳐도 깨닫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가서 야빈을 대적한 결과 대승을 이루었습니다.

이 사사기 말씀은 연단과 말씀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폭의 좋은 그림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받을 때 지혜를 구해서 그 연단의 의미를 진실로 깨달아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더욱 회개하고 순종하여 바른 믿음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2. 연단은 거룩한 제사장을 목표로 이루어집니다.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이 구절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모맥 추수와는 달리 천사가 하늘 성전에서 나와 추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은 제단에서 나오는데 여기서는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나오는지에도 그 의미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미 말씀한 대로 성전에서 나왔다는 것은 성전의 신령한 의미와 성전생활에 대해서 강조한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연단을 허용하신 것은 연단을 통해 회개하여 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더 거룩하며 더 진리에 말씀에 서고 성전에서 생활과 같이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12:9-13에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연단을 통해서 제사장과 같이 더 겸손해지고 순종하고 깨드려지고 온유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벧전2:5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말하면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교훈하고 있습니다.


3. 연단은 하나님께 순복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여기 천사가 나오는데 천사에 담긴 의미가 그렇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라. 그래서 히1:7에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천사가 나타나면 하나님이 나타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낫을 가졌습니다. 이 낫을 가진 천사 앞에 끝까지 남아 있을 포도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콤바인이 지나가면 모든 곡식들이 베어지듯이 누구도 천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해서 천사를 이겼다지만 실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천사를 붙잡고 축복하기 전에는 놓지 않겠다고 놔주지만 않았던 것이 그 전부였습니다.


도리어 야곱은 온 밤을 천사와 씨름하다 기진맥진하여 도망할 힘조차 없었고 천사에게 맞아 환도뼈가 위골되어 걸을 수조차 없었기에 하나님이 돕지 않으면 난 살 수 없다고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이길 수 없고 그의 사자인 천사를 이길 수 없어요. 하나님을 이긴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큰 연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져야 합니다. 순복해야 합니다. 나를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 앞에 더욱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약4:10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했고, 벧전5:6에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포도 추수는 철저히 나를 짓밟으셔서 깨어지고 부스러지는 나의 옛사람의 자아를 처리하시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순종하고 부스러져야 합니다.

그 동안 나를 위한 예수였다면 이제는 주를 위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죽어야 예수 내 안에서 사시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나를 잊을수록 좋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입니다. 어린이는 내가 없어요. 나를 망각하고 살아요. 그래서 어릴 때는 무시해도 우리 어른들 감정과 같지 않습니다. 내가 없기 때문에 걱정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삽니다. 즉 나를 죽인다는 것은 자기를 목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관적으로 살았던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과 믿음과 순종과 충성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무능하고 또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10:27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하셨고, 잠21:15에도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여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왕이 되어 자행자지하려 한다 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연단에 반드시 은혜 속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앞드리는 것이 연단 받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연단을 물리쳐달라고 하는 기도보다 이 연단 속에서 내가 더 깨닫고 참 신앙을 각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우리를 참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연단의 손길을 거두지 않고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함을 배우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연단을 통해서 깊이 깊이 체득시키며 교육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의 삶을 믿음을 위한 훈련 상황으로 이해하시고 더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 나아가고 더 회개하여 더욱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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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알곡론 2 (계 14:15-16)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영적추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3:11-12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신 이 말씀은 종말에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14절을 했습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여기 흰 구름 위에 예수 한 분만 계신 것은 변화산에서 그랬듯 다른 모든 것은 흰 구름에 덮이고 오직 예수 한 분만 나의 구주로 믿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리한 확실한 말씀에 서야 만이 진정한 알곡으로 익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리한 말씀 외에도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부터 나와 예수님께 땅의 곡식을 거둬달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알곡 추수의 또 다른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즉 앞에서 말한 예리한 말씀 말고 또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즉 아무리 오직 예수 신앙의 좋은 말씀이 준비되어 있어도 바로 성령의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는데 이 나온다는 표현에 담긴 그 의미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뭔가 추수와 관련된 귀한 것이 나와야 합니다. 즉 이것은 성전은 하나님이 계셔서 성령의 생수가 성전에서부터 흘러넘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겔47:1-2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에 보니 성령의 생수가 성전에서 흘러오고 있었습니다. 이 물은 신기하게 흐르면 흐를수록 많아지고 깊어지는데 동쪽으로 천척을 나아간 후에 재보니 물이 발목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나아간 후에 재보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나아가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나아가니 건너지 못할 큰 강이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강가에는 온갖 아름다운 나무가 많아 각종 먹을 새 열매가 달마다 열리고 그 잎사귀는 귀한 약재료가 되는데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죽음의 바다가 소생함을 받고 수많은 번성하는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오더라. 성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다, 그리고 성전의 역할처럼 우리가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흐르는 강 좌우에 열매가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온갖 아름다운 12가지 새 열매가 달마다 날마다 주렁주렁 열립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참 알곡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 이 두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보면 약 두 종류의 유형이 있습니다. 한 유형은 제자들과 같이 말씀이 먼저 무장되고 성령이 다음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행 10장의 백부장 고넬료처럼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지만 복음을 몰라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가 꿈에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여 예수 복음을 전해 듣고 완전한 천국의 알곡이 되는 그런 유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리한 오직 예수 말씀과 아울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전자가 잘 준비되어 있다면 이제 늘 경외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셔서 천국의 알곡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듯 성전에서 은혜가 나오는 아름다운 성전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아울러 성전생활이 잘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성전생활을 해야 할까요?


1.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합2:20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늘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와 예배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얼마나 갈망했는지 시42:1-3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84편을 보면 고라자손들도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합니까? 시84:1-4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렇게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갈망하시란 말입니다. 늘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 용어로 표현하면 성전생활입니다. 그래서 행1:13-14에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했고, 눅24:54에는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슬람을 진리적으로는 이미 이겼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는 그들에게 지고 있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죽어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무슬림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메카를 향하여 엎드려서 하루 다섯 번을 기도합니다. 이러한 때에 입다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삿 11장을 보면 암몬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을 때 입다가 전쟁에 출전하면서 여호와께 서원했습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30-31절)


그랬는데 암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불행하게도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딸이 그를 맞으러 나옵니다. 그럼 입다가 왜 그런 서원을 여호와께 드렸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입다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은 신과 신의 전쟁이었고, 암몬 사람들이 자기 신에게 자식을 태워서 드릴 만큼 신에 대한 충성이 강했는데 그들을 이기려면 참 신이신 여호와께 그보다 더 강한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입다처럼 무모해서는 안 되지만 그런 열심은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거짓 신보다 더 섬기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그런 선한 질투가 필요합니다. 불교에서는 새벽 4시나 5시에 새벽예불을 하는데 어찌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참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새벽기도 없이 하루를 살아야 하겠나 하는 질투가 있어야 합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다섯 번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습관처럼 하루 3번씩만 기도해도 몇 년 가지 않아 전 세계는 복음화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늘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알곡 신앙은 교회생활을 철저히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마저 제대로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참 알곡이 되겠습니까? 늘 교회 있든지 집에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2. 성전을 통한 복음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는데 성전에서 나온 천사가 어찌 성전에 대한 영적 진리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구약의 성전은 곧 예수님에 대한 예표이요, 십자가 복음진리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죄인이 예수 복음의 진리로 참 구원의 사람이 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귀한 진리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구원의 진리로 가득합니다. 먼저 성전의 담도 성전인데 여기 들어오려면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제사장 뜰의 번제단이 있는데 이것은 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용서 받았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을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성전 앞 놋바다에서 내 생각과 마음의 죄를 말씀으로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즉 성경을 보아 우리 잘못된 생각을 다 교정하고 씻어낼 수 있어요. 그런 다음 성소 안에 들어가면 떡상과 일곱 등불의 등대와 분향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사장처럼 말씀과 성령과 기도와 찬송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갈라지듯 온전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보좌 앞에서 흐르는 한없는 생명강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참 알곡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피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 공로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추수의 일군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5-16절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여기 천사가 추수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추수의 일군이란 복음을 가진 신약의 일군입니다. 이 일군은 성령의 일군이기도 합니다. 그런 일군이 없으면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기도의 일군은 있지만 말씀이 없으면 말씀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은 있으나 능력이 부족하면 은혜를 위해서 기도하고 부족한 것을 기도로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마9:36-38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셨습니다.


이런 기도 없이 미국 하버드대 나온 사람만 구하려고 하니 되나요? 그랬다가 모두 실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땅의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 복음의 진리로서 구원의 백성들을 많이 하나님 앞으로 이끌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기도로 도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이 오직 예수의 예리한 말씀에 설 뿐 아니라 성전에서 흘러넘치는 은혜의 생수와 성전에 담긴 귀한 복음의 진리 그리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성전의 제사장들처럼 늘 하나님을 경외하여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알곡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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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장 18절 ~ 25)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상반기 동안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기억하며 겸손하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고항상 주신 것에 자족하며 이웃에게 하나라도 베풀며 살아가는 여유롭고 화평한 삶을 이루어 가시는 모든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6월에는 기다리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고, 7월에는 약함’ 혹은 연약함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한 달동안 말씀 들으시면서 나의 약함이 무엇인지 생각하시며 그 약함(상처, 아픔, 질병, 궁핍, 인간관계, 질병, 폭력, 우울...)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 앞에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더불어서 내가 강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무엇인지도 함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사도 바울은 약할 때 강함이라고 했습니다내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장애물이 되지는 않는지도 한 달동안 함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약함에 대한 첫 번째 말씀으로 고린도 전서 1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먼저 18절을 읽어 드립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애용되는 구절입니다십자가의 도라고 번역된 것에서 는 원어에서 말씀(로고스)으로 되어 있습니다표준새번역이나 우리말성경영어성경등은 전부 말씀으로 번역되어 있으니 한번 찾아보셔도 됩니다.

 

요한 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였으며이 구절에서 세 번의 말씀이 나오는데이 말씀이 바로 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가 곧 말씀이고말씀은 곧 예수님을 뜻하는 것이라면십자가의 도는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 이라는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이 세상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죽음이 무가치하고 헛된 죽음이라고 여기는 미련한 자들이 나타나는 현상이고또 하나는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속죄의 은혜가 주어진자고 믿는 자들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미련한 죽음이자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죽음이다극단적인 현상으로 나뉘었습니다.

 

숫자적으로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미련하게 여기는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하지만 진리는 영원하며 복음의 능력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전파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우리가 대다수 사람들처럼 미련한자가 아니라 능력을 믿는 자들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왜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일까요그리고 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 멸망하는 자다미련한 자들이라고 했을까요그 원인이 나오는 19~21절을 읽어드립니다.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아멘.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라는 말씀속에 문제의 원인이 담겨 있습니다지혜와 총명(지성이성), 이것이 문제입니다왜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냐면 바로 사람들 스스로가 지혜 있는 자다지식 있는 자다이성 있는 자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혜라는 단어를 지식잘남학식배움이성분석이라고 바꾸어 보면 무엇이 문제이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너무 똑똑하고너무 잘났고너무 교양이 넘치고너무 고결하고너무 너무 자존감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최고의 지혜자라 여기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고분석하고판단하고논증하고연구하려는 대상으로 여겨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토론하기 좋아하고 지식 논쟁을 즐겨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믿음이라는 관념은 무시하기 일쑤였고반면에 입으로 말하고귀에 들리고눈으로 보이는 지성적인 사고들은 철썩 같이 신뢰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소위 가방끈이 긴 사람들은 믿음을 갖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자기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판단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오만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성과 이성을 대표하는 분이 고(), 이어령 박사 였습니다이 분도 종교를 학문으로 보려는 경향이나 주관이 너무나 뚜렷하여 도무지 믿음이 생성될 여지가 없는 분이었지만자기 자녀의 죽음과 신앙을 보면서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오래 버티긴 했지만 결국 십자가의 능력이 이어령 박사의 지식을 압도했기 때문에 결국 그도 복음 앞에 굴복한 겁니다.

 

20절에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선비(학자)도 없고변론가도 없다고 말합니다이 시대의 학문이나 과학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하나님의 능력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려는 학문과 지성과 이성들은 결코 지혜롭다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자꾸 생각을 하며 추론하여 분석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꾸 이득이 나는지 손해를 보는지 머리로 계산을 합니다믿음을 가졌지만 아직 연약한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보여주지 못하는 어린아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똑똑한 사람이나믿지 않는 사람이나믿음이 있으나 아직 연약한 사람이나 모두 다 공통점이 있는데그것은 지혜의 근원이며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그 분이 들려주시는 말씀의 권위와 진리의 위력에 압도당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그 분을 따라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21절처럼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이 세상 사람들에 전도라는 미련한 것을 전파하여서 과연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여기는 십자가의 도가 진짜 미련한 것인지지혜 있다고 여기는 선비나 변론가가 미련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그러한 작정에 따라 바울 사도와 같은 일꾼들을 부르셔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바울은 아마도 여기 저기서 사람들과 논쟁도 하고 설득도 하면서 전도가 미련하냐너희가 가진 그 잘난 지식이 미련하냐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경험해 봐라 라고 전도를 시도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을 전했는지는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전부 이어령 박사급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바울이 전하는 예수 복음을 듣고 얼마나 조롱하고 무시했겠습니까?

 

그들은 바울의 말을듣고 네가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정말로 미련한 말이야 라고 말하면서 그들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기를 너무나 쉽게 판단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그만큼 그들은 잘나고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나무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유대인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매달려 죽으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여깁니다유대인의 전통과 율법의 시각에서 저주 받아도 마땅한 예수라는 인물을 오히려 하나님이라고 전도 하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을 뛰어넘어 가장 중대한 신성모독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이 도저히 전파 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그러나 이런 극악의 환경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위대했습니다성령 받은 사도들의 입술은 하늘의 권세를 담아서 강력한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였습니다수천 명의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 앞에 굴복하며 참회하고 세례를 받았고믿는 무리들이 셀 수 없이 생겨나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면 천국잔치가 열린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하실 겁니다대다수의 사람들은 전도를 미련하다고 여기고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믿기를 원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21절 마지막에 하나님은 믿는(믿기를 원하고바라는)자들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통하여 전파되는 예수 복음이 진짜 미련한 것인지아니면 죽은 자를 살려주는 능력이 되는지누가 멸망 당할 것인지 그 날과 그때가 되면 곧 알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전도의 미련한 것을 듣고도 그것이 미련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우쳐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저주 받을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극악의 상황에서도 온 인류의 구원자요심판자인 믿음의 주인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건 기적입니다십자가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우리가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 하신 것과 같이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나에게하늘의 복이 되어 은혜(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돈 주고 산 것이 아니라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다영생할 수 있는 복을 주셨으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이것이 능력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우리 각자는 기적의 주인공들입니다능력의 주인공들입니다멸망하는 미련한자들이 아니라 영생하는 십자가 능력아래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하심과 능력아래 보호 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항상 인식하며(깨우치며), 항상 고백하며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한 달동안 우리는 약함연약함을 가지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기로 했습니다우리는 진짜 약합니다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할정도로 내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왜냐하면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면 나보다 강하고 능력있는 대상을 구하려는 기대 심리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나는 약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하나님은 이미 나의 연약함을 전부 다 아시기 때문에 능력 중의 능력이 되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는 그 분을 가슴에 모시고 살게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님은 내가 혹시라도 멸망의 길로 잘못 가게 하지 않으시고 죽음의 권세까지도 이기게 하시는 부활 영생의 능력으로 내 몸과 영혼을 굳게 붙잡고 계심을 아셔야 합니다이것을 아는 것알고 기뻐하는 것이것이 곧 믿음이요 강함이요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강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약한자입니다!” “여러분은 강하십니까저는 아주 강한자입니다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과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영원토록 역사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이 단순한 진리의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어 주식 위함이 7월달 설교 말씀의 목표입니다여러분의 가슴에 무엇이 있습니까약함이 있습니다그 약함이 내 자신의 모습입니다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안에 약함그것 뿐이 없습니까아니요내 안에는 세상 그 무엇도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저와 여러분은 약하지이나 강한자이며강한자이나 약한자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월 한달 동안 말씀 들으시면서 이것을 계속 확인해 나가셔야 합니다.

 

지혜의 근본이시며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그 분이 나의 강함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아멘.

 

진짜 보잘 것 없음에도 내 알량한 배움을 자랑하며 살았던 나의 작은 지식이성자아교만을 십자가의 도 앞에 벗어 던지시고나의 연약한을 호소하며치유와 회복과 변화와 성장으로 나아가는 능력 받은 주인공들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십자가의 도만이 우리의 연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습니다우리는 약한자요 강한자이며강한자이며 약한자로 살아가야 하는데세상에 나가면 이것이 적용이 잘 안 됩니다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22~ 25절을 읽어 드립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멘.

 

만약에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원을 다 들어주고 기적을 무한대로 베푸시는 일을 즐겨 하신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70억 전 인류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온 세상이 교회로 가득한 세상이 될까요전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유의 은사를 받으신 분이 계셨습니다신유는 치유하는 은사이고 이 은사는 물론 성령이 주신 은사중의 하나이기에 사람이 행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병을 고쳐준다는 소문이 나서 이 교회에 수 많은 병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그 중에 치유 받은 사람들이 여럿 생기니 소문에 소문이 일어나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기본적인 목회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개별적인 안수 기도나 치유 사역은 한계가 있으니 공예배 시간에 참여하셔서 함께 예배드리면서 자신들의 연약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치유 역시 믿음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공고하고 오시는 분들이 먼저 예배를 열심히 드리도록 했습니다.

 

예배에 참여하여 치유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고침 받는 것이 더디 일어나자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사람들은 불평하기를 왜 나는 안 고쳐 주는 거야사람 봐가면서 골라서 치유 해 주는 거야이 정도 병은 치유롤 못하나 보지능력도 없으면서 뭔 고침을 해준다고 사기를 쳐사람들이 다 돌아가는데도 하나님이 고쳐 주시지 않는 것 보니 하나님은 없는 건가봐... 고침 받으려고 왔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모욕하고존재를 부정하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목회 감당할 인원만 남게 되어서 행복하고 감사한 목회 활동을 잘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그 은혜가 목적이 되면 하나님은 그저 이용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내 건강내 자식 문제내 돈 문제내 인생 문제이런 것 해결 해주면 내 하나님이 되고아무런 응답도 고침도 없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길 바닥에 버려 버립니다만약 온 인류가 말하는 조건을 들어주시는 역할이 하나님의 일이시라면 하나님을 해결사 역할에 묶어드는 것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이런식으로 대우하는 것이 인간의 완악함이자 간교함입니다선택 받았다던 이스라엘 백성조차도 급기야 하나님이 아무일도 안하시는 것에 불평 불만을 품고 배신을 일삼다가 멸망당했습니다홍해의 기적을 보고도만나의 기적을 보고도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민족도 망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선지자나 구원자)을 구하고헬라인 들은 지혜(지식,이성)를 구하고이방인들은 미련한 일(십자가에 죽은 것말고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문제 해결을 원했습니다이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 존재를 하나님처럼 여기겠다는 겁니다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요행이나 망상이죠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분이지 뭘 내주고 뭘 받아야 하는 협상과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장 내 문제 해결을 원하는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으니 이것이 잘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거절당하고쫓겨나고매맞고소란 피운다고 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요즘 세상도 유대인헬라인이방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이들이 요구하는 최소 조건이 공통적으로 하나 딱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 이라고그럼 보여 줘봐내 앞에 나타나면 내가 믿을께라고 말합니다.

 

만약 이들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5백만원씩 돈다발이 떨여져 주어졌다면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당장 그 자리에서 믿습니다감사합니다” 시끌벅적 할 겁니다이것이 진짜 믿음일까요?

 

이들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돈 다발이 하늘에서 떨어져야 그 믿음이 유지될 겁니다돈 안주면(기적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금방 다 떠나 버릴 겁니다.

 

세상이 이렇습니다그런데 세상 사람들 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점점 믿는 다는 것이 조건처럼 되어 있습니다하지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어떻게 평가하고 대우하는지에 따라 요동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리끼는 것으로 미련한 것으로 여길지라도 24절에서 처럼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외쳐야 합습니다.

 

적어도 우리들은 예수님을 능력으로지혜로 굳건하게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나의 약함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할 지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상황에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 있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7월의 암송 말씀인 25절과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항상 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 고백을 한 달동안 매일 같이 올려 드리겠다는 특별한 다짐의 마음으로 리 한 번 함께 25절을 크게 읽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아멘.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믿는자고 하면서도 불순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다거나약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자신은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잘났으며모든 걸 이겨낼 만큼 강하다고 생각합니다자만과 오만이기도 하고 무모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이 연약함을 가장 먼저 인정합니다그리고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언행을 삼가고 겸손하게 행동합니다왜냐하면 내가 연약하다고 인정해야 강하신 하나님이 필요하고내가 지혜롭지 못함을 인정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자리가 생기는 것을 경험으로은혜로 체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와 삶의 자세가 25절 한 구절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안타깝께도 고린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과 반대되게 행동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자신들이 여전이 잘났고잘 해결해 갈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참 어리석고 미련하고 불쌍한 인간들이라고 여기고 계실 겁니다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또한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행동을 너무 쉽게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나는 약한 자입니다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라는 고백은 나는 여전히 죄인입니다나는 여전히 교만한 자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고나는 어리석지만 하나님은 지혜롭다는 이 구절을 앞세울 수 있다면진정으로 강한자로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로 살아갈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확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약한자이신가요 강한자인신가요? / 지혜로운 자이신가요 어리석은 자이신가요오늘 집에 돌아가셔서이번 한 달동안 나만의 골방에서 내 양심에 이 질문을 던져 보시고 하나님과 일대일 상황에서 믿음의 고백을 올려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 주심으로 내가 약한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강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내가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셔서 지혜이신 예수님을 부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나만의 골방에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실 때에나의 약함연약함상처아픔슬픔외로움질병궁핍 등 모든 약함의 문제들이 형통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손길로 인해 하나도 남김 없이 전부 해결 되는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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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 거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저희들의 언행을 삼가 지켜 주셔서 진실한 믿음과 순종의 자녀로 살아가는 7월의 삶이 되도록 동행하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천국 알곡론 1 (계 14:14)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부터는 우리 영혼을 추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3:11-12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셨는데 여러분은 알곡입니까? 쭉정이입니까?



알곡과 쭉정이의 차이는 바람만 불면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이 왔을 때 끝까지 믿음으로 살면 알곡이고 시험에 들거나 세상 풍조에 따라 갈대처럼 하늘거린다면 그는 쭉정이입니다. 천국은 쭉정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두 알곡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계14:14-20절까지는 두 방향의 추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14-16절이 신자의 추수라면 17-20절까지는 불신자의 추수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이 두 가지가 다 우리 신자의 추수입니다.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의 추수란 추수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가라지나 쭉정이로서 꺼지지 않는 불 속에 태워질 뿐 추수할 이유도 없어요.

이스라엘의 추수를 배경으로 살펴봐도 14-16절이 모맥 즉 여름의 보리나 밀의 추수를 말한다면, 17-20절은 가을의 포도추수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추수는 모두 하나님 백성을 추수함을 예표하며, 이 두 가지 추수를 마친 후 그것을 저장한 후 천국생활을 예표하는 수장절을 지킨다는 점에서 두 추수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알곡 되어 천국 창고에 들여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알곡 만드시려는 두 방향의 추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화의 두 방향을 말한 것이라.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볼 때 여러분에게 많은 은혜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요4:35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셨습니다. 아직 추수기도 아닌데 주님께서 추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우리 신자들의 알곡 신앙을 가리키는 인생 추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천국의 참 알곡이 될 수 있을까요?


1. 오직 예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4절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 여기 인자 같으신 이가 누굴까요? 인자는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 아니라,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인 직분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곳에는 언제나 그의 우리의 왕이시고 구주 되시는 메시야적 직분이 늘 강조됩니다.


그럼 흰 구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 모습에서 구름 타고 오신다는 재림하시는 메시야를 연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는 천군천사와 앞서간 성도들과 함게 오시지 이렇게 혼자 오시지 않습니다. 구름 위에 오직 예수 한 분만 보이는데 이것이 성경 어디에 있을까요?



마태 17장을 보면 흰 구름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그 얼굴과 옷이 해와 같이 빛날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할 때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자고 말할 때에 희고 빛난 구름이 나타납니다. 왜 나타납니까? 덮기 위해서 나타납니다.

마17:5-8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했습니다.


눅9:36에도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했습니다. 흰 구름이 나타나 다 덮어버리고 예수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변화산의 사건은 구름이 엘리야도 모세도 다 덮어버리고, 제자들의 말도 덮어버리고, 제자들의 생각 속의 초막 세 체까지 다 덮어 버리고 오직 예수님과 그 말씀만 나타나는 오직 예수의 사건입니다.


그럼 변화상에서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눅9:31에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그러니까 구원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이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두 사람 개인이라기 보다 그 두 사람이 성경을 암시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즉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로서, 성경의 별명을 모세와 선지자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은 성경을 상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과 함께 구속사역을 말했다는 것은 성경이 바로 예수 구원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즉 성경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했고, 선지서를 통해서 또 그리스도를 여러 면에서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지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를 전한 일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우리 마음에 엘리야를 배우지만 엘리야도 잊어져야 하고, 모세도 배우지만 모세도 잊어야 하고 오직 예수만 남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은 오직 예수님과 그 구원을 말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와 그 복음만 나타나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산상의 사건처럼 오늘 말씀에 흰 구름 위에 예수 한 분만 앉아 계신 것입니다. 즉 다 덮여지고 성경의 결론은 오직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의 알곡이 되려면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여야 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직 알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런 갈급한 마음으로 살아야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수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식적으로는 너도 나도 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렇다고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그러므로 오직 예수라면 오직 예수 한 분만이 나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갈급한 신앙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도할 때도 흰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의 모습처럼 모든 것은 다 가려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엘리야와 모세를 자랑하고 율법서와 선지서를 외운다 해도 예수님을 바로 전하지 않으면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지만 성경에서 예수를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몰랐습니다(고후3:13-1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신앙에 분명히 서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 없이는 참 알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시 14절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여기 금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말합니다. 계4:4에서 금 면류관은 24장로들이 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장로가 아니라 인자 예수가 쓰신 면류관이기 때문에 이는 그리스도의 주되신 왕권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믿어야 합니다. 예수만이 아닙니다. 예수 구원, 오직 예수도 좋지만 예수는 그리스도까지 믿어야 합니다. 즉 예수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 해서 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란 말입니다. 이 고백과 신앙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요, 우리의 주요 왕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믿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정말 왕 앞에 엎드려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눅6:46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진짜 예수를 주요 왕이라고 믿는다면 왕 되신 예수 앞에서 엎드리고 순종하고 다스림을 받아야 비로소 주로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꼼짝도 하지 못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도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바울도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했습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이 많이 가르쳐지고 있지만 그 메시지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봅니다. 마16:15-17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 신앙이 확립되어야 참 알곡이 될 수 있습니다.

3. 분명한 진리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14절 하반 절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두 추수의 공통점은 모두 예리한 낫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려면 일단은 접촉에 성공해야 합니다. 이 접촉은 신뢰와 사랑을 통해서 서로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심으로 대중과 접촉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이 되고 교회까지 출석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진정 구원 받아야 할 죄인임과 아울러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예수가 구주시고 우리 왕이시라는 복음을 정확히 전하고 그 신앙에 적용하게 이글어주지 못한다면 구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알곡 추수를 위해서는 잘든 낫과 같이 예수의 복음을 잘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벧전1:23-25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오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했고, 벧전1:22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한 것을 보아 말씀 안에서 중생과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의 참된 알곡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만이 우리의 구주이시고 우리 왕이시라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져  온전한 천국의 알곡 백성으로 자라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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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천사의 경고 7 (계 14:13)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시간은 “세 천사의 경고” 마지막 7번째 시간으로 ‘주 안에서 죽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스트리아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1893년 발표한 유명한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책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소설입니다. 이 책의 저자를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가 극찬했다지만 그 책이 유명해진 것은 그 책의 내용보다 그 책의 제목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이름이 정작 유명해진 것은 다름아닌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의해서입니다. 헤밍웨이는 전쟁과 인간에 대한 작품들을 엮어 모아 만들면서 ‘전장의 인간’시리즈 제1권의 제목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이 책을 만든 것은 역사적 진실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에서 승리자는 패배자의 기록을 지워 버리거나 왜곡하면서 본말을 호도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은 한 편으로 자신을 대변하여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면 안타깝고 슬프고 어떤 때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꼭 억울하기만 할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죽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예수 믿고 죽은 자가 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진정 복된 죽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그럼 복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뜻대로 죽은 것입니다.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우리는 여기서 복된 죽음을 누가 말씀하셨는가를 봅니다. 하늘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하라.” 하셨는데 기록은 역시 성경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는데 그것은 성경을 암시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복된 죽음을 하늘의 음성이요,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요,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왜 복된 죽음을 말할까요? 그 상징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되게 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대로만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죽어야 복이 됩니까? 성경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성경대로 죽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에 죽어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은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15:3-4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셨습니다. 즉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함으로 우리 완고함을 버리고 또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순종함으로 우리 생각도 이론도 사상도 고쳐지고 우리의 자세도 정리됩니다.


마치 포도나무의 쓸모없는 가지들을 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잘 쳐서 정리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며 받아들일 때 우리가 새롭게 변화됩니다. 반면에 말씀을 믿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래서는 하나님 앞에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바로 죽는 것이요, 복 있게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환영을 받고 영광을 받고 귀히 여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로서 실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잘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지금 죽어야 복 있는 죽음입니다.


지금 이후로” 이 말씀은 상당히 오묘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금 이후라면 그럼 그 이전에 죽은 자는 복이 없다는 말일까요? 요한계시록이 주어지기 전에 죽은 초대교회 성도나 사도들은 복이 없을까요? 그래서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될 말씀입니다.


여기 “지금”이란 성경에서 은혜 받을 때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후6:1-2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때는 언제나 오늘입니다. 지금 받아야 합니다.


히3:13에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그러니까 바로 지금 회개하고 바로 지금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죽음이란 이별 즉 죄와 상관 없이 되라는 뜻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회개하며 죄에 대해서 죽어지기를 원하시지 나중에 잘 믿겠다고 거부하는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안 믿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나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이 시간 하나님 말씀 앞에 순복하는 복된 죽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주 안에서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여기 주 안이란 이미 이루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사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가 아니라 죽는 자라 했습니다. 죽는 자는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 형태의 용어를 썼습니다. 죽음이란 그 성격상 과거형일 수밖에 없는 데 현재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능동태 남성 복수, 그러므로 이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고 나를 못 박으신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날마다 나를 죽음에 내어주며 죽는 현재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나를 꺾고 순복할 뿐 아니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이 죽음의 실재를 성령의 은혜로 경험하는 그 죽음입니다.
 
주 안에서 죽음이란 아무렇게나 죽는 죽음이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불교에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자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아 자체를 부정합니다. 자아란 허구적이고 그릇된 신념일 뿐 그에 일치하는 실제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나, 나의 것, 이기적 욕심, 갈구, 집착, 증오, 악의, 사기, 자만, 이기주의, 그리고 번뇌를 일으킬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문제점은 자아를 부정하다 보니 자신을 목석화시키는 문제점을 야기할 뿐 아니라

그 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령의 은혜로 그냥 죽는데 그들은 수년 수십 년을 그 이론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려고 애쓰다가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거나 이루었다고 해도 자기를 나무나 돌로 만들어버리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는 다른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죽음이란 순종을 말합니다. 야생마가 명마로 탄생하듯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다듬어진 마음이 잘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자는 진실로 복된 자입니다. 그래서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하셨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았던 사람이 죽어지고 이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기록하라 하신 것은 성도의 죽음은 영원히 천국에 기록되는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말3:16). 지금 이 세상에는 예수 몰라도 자기 말도 못하고 자기주장도 못하고 쉬쉬 하면서 죽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죽음이 아니라 복음에 입각하여 내 마음이 순복하여 성령의 은혜로 내 악의 기질이 죽는 바로 그 죽음이 되어 합니다.

4. 완전하게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왜 우리가 참지 못하고 방황하고 슬프고 고통스럽습니까?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환경이 어떻든지 내가 죽으면 편합니다. 아직도 방황하고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아직 덜 죽은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만 없는 것이 아니라 느낌도 없습니다.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 것처럼 잘 죽은 사람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니 문제입니다.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멀리 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내 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일지라도 내 의라면 버려야 할 의입니다. 완전히 죽어야 복이 됩니다.
 
5. 하나님의 방법대로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즉 이는 그들의 행한 어떤 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한다는 말일까요?


즉 성화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드시 사람의 협력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계22:12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신 말씀도 성화 방편의 고집적인 적용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성례와 순종과 겸손 등에 힘써야 합니다.


벧전4:17에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심판은 전후문맥을 볼 때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성령 강림을 대 심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의 악을 심판하셔서 온전케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2:18에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 심판은 종말론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은혜와 성령으로 진실로 변화되는 그런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죽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에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면 겸손해집니다. 내가 사라집니다. 성령이 임할 때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나에게 실재로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 천사의 경고를 듣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죄악 세상에 묻혀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죄악 되며 불행함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성화를 향한 부르심은 참으로 강합니다. 이건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하늘의 음성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화의 외침으로 들려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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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누가복음 12장 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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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달은 기다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오늘은 누가 복음에 나오는 말씀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위에 붙여진 제목을 보면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라고 되어 있으실 겁니다성경에서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 말씀이 베드로 전서 5장 8, 9절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a) 아멘.

 

사탄이 우리의 주적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가장 극적으로 나오는 장면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입니다예수님은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처절하게 기도 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26:38;40;41)는 말씀을 연속적으로 세 번 하셨습니다.

 

죽음이라는 가장 큰 시험과 유혹이 몰려올 때 깨어 있지 않으면 사탄에게 굴복당하게 됩니다예수님은 가장 큰 시험을 물리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깨어 있지 않으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의 목숨과 영혼을 탈취하려는 사탄의 공격을 도무지 물리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대부분 종말에 관해서 연결 되어 있습니다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깨어 있으라는 구절을 한 구절씩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7),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아멘.

 

굳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되는 말씀들입니다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 복음에서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다만심판영생 이런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2;24;25;27) 아멘.

 

이렇듯 신약성경은 복음서와 서신서 요한 계시록까지 주님이 다시 오실 것과 심판과 영생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합니다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히 구원을 확신하는 일입니다그리고 그 구원의 확신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소망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깨어서 그 날이 올 때를 준비하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 하신 내용입니다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먼저 35절을 읽어 드립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아멘.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모습이 깨어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허리에 띠를 띤다는 성경 말씀 많이 들어보셨죠언제 이런 행동을 보이나요?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죽임당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창 37:34) 하였습니다허리를 묶는 것은 애통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열왕기상 20장에는 아람왕 벤하닷이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에게 무려 12만 팔천명이 죽임 당하도록 대패하여 아벡 성읍의 골방에 숨었다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왕상 20:32)라고 항복과 목숨을 구걸합니다허리를 동이는 것은 목숨만을 빌려달라고 빌 때 하는 행동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욘 3:6), 금식하며 기도 할 때(느 9:1),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을 대답하여야 할 때(욥 38:3),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바랄 때(벧전 1:13) 등입니다특히 진심으로 참회하려는 사람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허리를 단단히 동여 매고 재 위에 앉은 채로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는 첫 번째 마음이 왜 허리에 띠를 띠라고 했는지 아셨을 겁니다. 6월 달 내내 말씀 드리고 있는 것처럼 참회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참회하는 사람만이 진리되신 예수님을 붙잡고 허리에 단단히 묶어서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하지만 참회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허리띠를 단단히 동이고 묶어 매는 것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중요하고 첫 번째 되는 자세여야 합니다여러분의 진리의 허리띠는 단단히 묶여 있습니까묶을 채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도 주님은 그것과는 상관 없이 도둑 같이 오실 겁니다.

 

두번째 그 때를 기다리는 자세는 등불을 켜고 서 있는 것입니다등불은 마태복음 25장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미련한 자다섯 처녀 비유에 나오듯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예수님은 열처녀 비유를 하신 후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들고 서 있다는 것은 항상 빛 가운데 자신을 드러낸 상태즉 영적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는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신랑되신 예수님이 금방이라도 문을 두드리면 달려나가 열어줄 수 있도록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거룩과 정결함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일들이 회개하게 하고거룩하게 살게하고깨어 기도하게 하시기 때문에등불을 들고 서 있다는 것을 성령 충만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해도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자 그럼 두 가지를 묶어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언제 올지 모를 그 날그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세는 참회하며진리 되신 빛 가운데 항상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회개 없는 기다림은 있을 수 없으며어둠(거짓위선음란음행불의불순종교만정죄판단포악간교분열분노...)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문을 열라는 신랑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서 있으라는 마지막 말씀은 명령형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허리 띠를 계속 매고 있어라등불을 계속 켜 놓아라그 자세로 계속 준비하며 기다리라는 뜻입니다하루 이틀이 아닌 일평생 이 자세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회개하는 삶진리와 거룩으로 사는 삶은 권면하고 강조할 사항을 훨씬 뛰어넘어서 강요하고 강제적으로 압박해도 괜찮을 정도로 절대적인 문제입니다왜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사역 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그리고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 고대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오직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회하라거룩하게 살아라진리와 동행하라깨어 있으라준비하라기다리라이런 말씀은 듣기도 싫어하고들어도 그 때 뿐인 것처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그 중에 우리도 포함 됩니다예수님은 만나고 싶고하나님 나라는 가고 싶은 것과 참회하며 빛과 진리 안에 사는 것은 별개인가요미뤄 놓았다가 나중에 해도 되는 건가요?

 

예수님은 오늘 우리 귀에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그리고 저는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주님이 말씀 하시고 우리는 귀로 이 말씀을 들었으니 경각심을 느끼고 긴장감 있게 매일 매일의 삶이 진짜 그 날과 그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로준비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 각자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 하시렵니까노력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오늘 말씀을 들은 여러분이 이제 몸과 마음을 제대로 움직이여서매일 매일 참회 하고매일 매일 빛과 진리 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기쁜 마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때를 준비하는 자세를 말씀 하신 예수님은 준비된 자들이 맞이하게 될 상황에 대해서 계속해서 비유로 말씀 하십니다. 36~ 39절을 읽어 드립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아멘.

 

이 비유에서 혼인 집이 나오는 이유는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밤 늦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언제 올지 모를 그 때를 묘사하는 적절한 배경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6~37절은 주인이 예상하던 시간에(:늦은 밤이 아닌 저녁 즈음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말합니다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 왔을 때 기다리는 사람(종들)이 있었습니다예상한 시기에 왔다고 해서 다 기다린 것은 아니고 물론 이 때도 기다리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이고기다리는 사람은 36절에서 말하는 허리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서서 기다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람을 말합니다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주인이 일찍 오시든더디 오시든한 밤 중에 오시든새벽에 오시든어느 시간이든이 상관 없이 주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깨어 있던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의 자세와 태도를 보고 매우 기뻐 합니다주인이 말하기를 “(깨어 기다리던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라고 했습니다.

 

수종 든다는 것은 섬겨 준다는 말입니다주인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고 즐기도록 손수 시중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진실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복이 있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섬겨주는 것도 감동이지만 복이 있다고 말한 것이 진짜 선물입니다.

 

지난 주에 복이 뭐라고 했습니까하나님 자체가 복이고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복중의 복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하나님을 보았거나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생명 길이 보이거나더럽고 불결한 죄와 악을 끊어내고 사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이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하나님 나라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주인이 기다리던 종들에게 너희는 복이 있으리라고 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고너희는 나를 보고 살 것이며너희는 영생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너희는 영원히 죄와 악이 침범하지 못하는 거룩함으로 살게 될 것이다너희에게는 이러한 복이 있으리라 라고 말씀 한 겁니다.

 

엄청 나지 않습니까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를 그 날 그 때를 위해서 항상 허리 띠를 매고 항상 등불을 켜고 서서 기다리기를 계속 했더니이런 엄청난 대접과 선물을 받았습니다그동안 길이 참고 기다리던 그 모진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넘치도록 보상을 다 받았습니다.

 

함께하는 복을 영원히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복 중의 복입니다이것을 받으려고 우리는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참으로 이 비유에 나오는 기다리고 있던 종들이 부럽고 또 부럽습니다우리가 만약 진실로 기다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왜 기다려야 하는지 이 장면 하나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38~39절은 주인이 완전히 늦게 오는 경우를 말합니다이경삼경이라는 시간이 나옵니다유대인들은 저녁 해가 질 때로부터 다음날 새벽 해 뜰 때까지를 3등분해서해질 때부터 밤 10시경을 초저녁으로밤 10~새벽 2시경을 이경으로새벽 2~해 뜰 때까지를 삼경으로 구분했습니다.

 

이경삼경은 진짜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자는 시간입니다그래서 도둑들이 새벽2~3시에 활동한다고 합니다. 39절에도 도둑이 나옵니다도둑이 드는 시간이 언제 인지 뻔히 알고 있다면 그 시간에 종들은 교대로라도 야간 경계를 해야 맞습니다아마 주인도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을 겁니다.

 

저녁 이른 시간이 아닌 이경삼경 늦은 새벽까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린 종들 역시 복이 있으리라 말씀 하셨습니다당연한 겁니다그런데 여기서 새벽까지 기다렸다고 해서 더 큰 상급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예수님)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함께 할 수 있는 복을 받았다면 어느 누구라도 불평을 가질 수 없이 최고의 복최대의 복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녁 시간에 기다린 종들그리고 새벽 까지 기다린 종들을 나누어서 이야기 한 것은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며언제까지 준비하고 깨어 있음을 흐트러트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날그 때그 시간은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상하며 맞춤형으로 그 시간에만 한정해서 기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우리 인생 전체의 시간은 단 1초도 허비하지 않고 재림의 그 날그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주시는 비유입니다.

 

보이지도 않고언제인지도 모를 그 날을 매일매 시간매 초마다 집중하고 긴장감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성령님이 오신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을 굳게 붇잡아 주셔서 기다리는 마음을 놓치지 않게기다리는 마음 변하지 않게기다리는 인내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성령님을 의지하는 길만이 새벽까지 기다리는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을 항상 간구 하시고기다리는 자에게 영원한 복이 있으리라 말씀 하시는 그 날의 음성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성령이 주는 위로와 평안과 능력 가운데 살아가시는 충성된 기다림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말씀 40절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아멘.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 날이 도적같이 이르리라그 날과 그 때는 알지 못하리라때와 시기는 아버지만 아시느니라이런 말씀들과 느낌이 비슷한 말씀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은 앞서 35절의 서 있으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명령형으로문법적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준비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지 이런 말씀들만 보면 굉장한 부담감이 듭니다.

 

그런데 부담감이 들수록 사실은 굉장히 좋은 겁니다이런 것을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합니다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예수)가 오실 것은 분명하지만그렇다고 우리가 생각도 안하고 살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우리는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자녀(백성)들이기에 우리의 평생 임무는 그 날과 그 때를 한 시도 잊지 말고 생각하며 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달리 주님은 오시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뜻하신 대로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시면 됩니다반드시 그렇게 하신다고 약속 하셨고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세상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는 이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온 인류에게 소망으로 역사할 겁니다.

 

기다리는 것에 충실한 우리들오시는 것에 신실하신 우리 주님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이 준비하고깨어 있고기다리는 것을 모두 함축하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상황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렇기 때문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여기서 너희는 당시의 제자들이고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나 들으라고나에게 대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준비하고기다리고깨어 있는 것이 앞으로는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익숙한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부담가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응원과 격려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매번 듣던 싫증나는 말씀이 아니라 함께 있는 복을 주시려는 가장 큰 은혜의 말씀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여러분들의 삶이 깨어서 기다리는 삶그 때를 준비하는 삶영원히 함께함을 간절히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며하루 하루가 우리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하는 복중의 복을 누리는 기쁨의 시간들로 채워져 가기를 간절히 축원하고축복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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