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세 천사의 경고 5 (계 14:10-11)

nam씨 2024. 6. 6. 21:42

세 천사의 경고 5 (계 14:10-11)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 시간은 “세 천사의 경고”라는 제목으로 ‘양심의 고통’에 대해서 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거룩입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것도 바로 거룩입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온전히 함께 하시고 가장 귀히 쓰임을 받습니다. 반면 가장 어리석은 것은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시록의 본문을 통해서 세속에 도취해 살아가는 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과 같은 고통이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 즉 육체 따라 사는 자에게, 또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듯 세상 탐욕을 위해 사는 자(골3:5-6)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모른 자에게 해당 되지만, 신자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거나, 육신을 따라 사는 자의 양심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이런 고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양심이 어떤 때 더 예민해질까요?


1. 거룩을 접했을 때입니다.


10절 중반 절 “거룩한 천사들 앞과” 여기 천사가 나오는데 그냥 천사라 하지 않고 거룩한 천사라고 거룩을 강조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정의를 집행하는 천사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왜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불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우리 영적 체험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의 복음을 잘 알지 못했을 때 우리 심령이 가장 두려웠던 것이 거룩이었습니다. 범죄한 아담이 두려워 떨었던 것처럼 범죄한 심령은 가령 교회가 두렵습니다. 세상에서는 범죄했어도 자유롭던 그 심령이 교회에 나오면 죄의식이 생겨나면서 두렵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예배의 순서를 맡았다든지 특히 설교와 같은 중요한 순서 담당자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사랑하는 양떼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말인가? 가령 오늘 화를 내고 양심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데 강단에 올라가야 한다든지 환자 심방을 해야 한다든지 그럴 때 가장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막히고 말슴이 막혀서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 거룩은 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게 생각한 그 대상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혹은 신령한 주의 종들을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이 때 자신이 더 돌아보아지기 때문에 내 양심이 더 예민해질 수 있습니다. 이 때 양심이 답답해지다가 더 심하면 마음에서 뜨거운 유황불과 같은 것이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더 심해지면 거의 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복음을 알지 못하고 천국 길을 나섰다가 큰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미한 거룩의 대상 앞에서도 그런데 예수님의 피 공로 없이 어떻게 죄인들이 천국의 빛을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인도의 성자라고 불려지는 썬다씽의 간증집을 보면 한 악인이 죽어 영의 세계에 들어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사와 성도들이 저를 도와주려 하지만 그는 심성이 비뚤어져 있어서 하나님을 욕하고 불공평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한 천사가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시다. 인간이 완악하여 얼굴을 하나님에게서 돌리고 지옥을 내 집으로 삼은 것이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영원히 행복된 교제 가운데서 살게 하려고 창조하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그 악인은 원기를 되찾고 두 천사를 따라갔지만 저가 천국의 입구에 도달하여 거룩하고 빛으로 충만한 장소와 거기 살고 있는 영광스런 축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의의 태양이신 주의 광채가 그의 모습을 밝게 비추자 그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급히 도망하여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다가 거꾸로 무저갱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선다씽에게 주의 음성이 들리기를 “보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아, 아무도 여기 오는 것을 금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이 사람을 막은 사람이 없고 아무도 여기서 나가라고 명령한 사람도 없다. 이 거룩한 곳에서 도망하게 만든 것은 그 사람의 불결한 생애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까닭이다”(요3:3) 하셨다는 간증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지상에서 해야 합니다. 죽어서는 늦다는 말입니다. 가책을 받아도 지상에서 받고 방황해도 지상에서 방황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대책을 찾고 참되고 바른 예수 복음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죄인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받으셨고, 또 주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셨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뻔뻔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양심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접하더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더욱 담대한 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높은 도덕적 표준을 가졌을 때입니다.


10절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자들이 대속주 되신 어린 양 예수 앞에서도 그런 고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불신자에게 적용했을 때 어린 양 예수의 피 공로를 믿지 않아서 그런 고통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적용했을 때 어떻게 나를 대속하신 어린 양 예수 앞에서 그런 양심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도덕적인 표준으로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이 표준은 각인의 생각에 따라서는 구약의 율법보다, 산상보훈의 천국민의 율법보다 더한 표준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 앞에 그만큼 믿음의 반응을 하지 못했거나 그 주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볼 때 율법이 주는 정죄보다 더 큰 정죄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정죄감은 중세기 성도들이 많이 겪은 영적 시험인데 예수님의 고난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 심정을 품고 따라가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여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 극심한 정죄감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앞서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또 다른 율법 삼으신 적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롬8:33-35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했습니다.


3. 피의 복음을 알면서도 담대히 적용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 피 공로 말고는 믿을 것이 없음을 깨달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뻔뻔하리 만큼 담대하게 주의 공로를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고, 롬5:1-2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왜 그렇게 믿습니까?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수 믿는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 받기에는 무엇인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는 하지만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잘하고, 헌금도 많이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확실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 그위에 나의 공로와 선한 행위가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엡2:8-9을 보여주며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신 말씀을 제시하며 설명해 주었어도 그 목수는 어쩐지 믿음으로만 구원받기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 출입문짝을 그 목수에게 맞추었습니다. 목수는 하나님의 집에서 쓸 성물이라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문이 다 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목수를 찾아갔습니다. 완성된 문짝을 한참 바라본 목사님은 목수의 솜씨를 칭찬하더니 문득 생각이 난 듯 문짝 위에다 사과 궤짝을 덧붙여 못을 잘 박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수는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잘 만들어 드렸는데 문짝에다 왜 사과 궤짝을 붙인단 말입니까?" 이때 목사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완전한 걸작품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더하거나 감하여도 안 됩니다. 다만 십자가를 믿으면 인간의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거기에 내 의가 있는가?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갈 의가 있는가? 그런 자신이 있는지 돌이켜 보지 말고 나를 의롭다 하신 예수 피 공로로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피 공로는 피 공로이고 회개는 회개입니다. 피 공로는 언제고 믿어도 좋을 전천후입니다. 그러므로 피 공로를 믿으면서 회개도 하는 것입니다.


4. 자신의 죄를 씻지 않을 때입니다.


11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여기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표에 대해서는 앞에서 많이 언급했으므로 설명을 생략합니다. 이처럼 죄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보혈의 공로로 큰 정죄는 막지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완전한 평안은 죄를 씻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5. 율법의식이 존재할 때입니다.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 밤낮은 고통이 심하다는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일반적인 징계는 밤낮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시30:5에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했습니다. 혹 양심의 고통일지라도 잊어버리면 잠잠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환경일 때 이 양심의 고통은 밤이고 낮이고 멈추지 않습니다. 그 특정한 환경이란 언제일까요? 그것은 말씀의 환경입니다. 시19:2-4에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여기 날은 낮을 말하고, 밤은 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운동력은 주야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말씀 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양심의 고통이 심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양심의 고통이란 초신자가 느끼는 고통이 아닙니다. 율법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는 자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시험입니다. 우리가 예수 복음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율법만 안다면 마치 예수님 시대의 율법주의자들처럼 양심에 걸려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큰 시험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짐승의 표 666을 받은 고통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불신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신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양심의 고통입니다. 여기서 피할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 공로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과 온전한 회개로서 진정한 양심의 평안과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한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