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대접재앙 서론 1 (계 15:1)

nam씨 2024. 8. 3. 19:31

대접재앙 서론 1 (계 15:1)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가지 이적’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한국 초대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김익두 목사를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이 유명한 것은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가 뛰어나서도 아니요, 누구보다 큰 죄인이었으나 예수 믿고 은혜를 누구보다 깊이 받아 회개한 다음 또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고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김목사님의 일화 중에 한 가지는 그가 회개한 다음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사람들은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고는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은 시장 한복판에 그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된 그의 손에는 시커먼 성경책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그가 정말 변화되었는지 시험해 보려고 지나가는 김익두에게 물 한 통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고는 물 끼 얻은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뻐해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은 오늘부터는 더 온전히 죽는 신령한 죽음을 말씀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계 15장 본장은 마지막 재앙인 7대접 재앙의 서론입니다. 계11:14-19에 마지막 나팔의 서론이 있었듯, 여기 마지막 7대접 재앙도 서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마지막 나팔에서  7대접재앙이 터진다는 점에서 서론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일곱 대접이 중요했으면 서론이 또 다시 반복될까요? 과연 일곱 대접 재앙이란 무엇일까요? 답부터 알려드리면 7재앙은 우리 속에 마지막 남은 악이 하나님의 은혜의 심판을 받아 사라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말합니다. 마지막 남은 죄처리라는 점에서 대단히 특별합니다.


그동안 계시록에서 전개된 것 일곱 인재앙, 일곱 나팔재앙 등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온갖 은혜로서 새로워졌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여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직도 남아있는 내 중심과 자기 사랑과 자기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최후의 원수는 바로 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일지라도 아직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제 멋에 사는 사람이지 성숙한 여자라고 말할 수 없듯이,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온갖 것을 체험했다 해도 아직 내 생명까지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용넙할 수 없다면 그 믿음은 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대접에서 이 부분이 뿌리 채 뽑혀지게 됩니다. 그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계 15장에서 이긴 자들의 노래를 통해 일곱 대접 재앙의 성격과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에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했는데, 이 말씀에서 우리는 대접재앙이 무엇인지 5가지의 이적 묘사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럼 일곱 대접재앙은 어떤 것일까요?


1. 신령한 이적입니다.


1절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에서 맨 먼저 하늘의 이적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땅의 이적이 아닙니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땅에 속한 이적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이 건강해지고 부자 되고 형통한 그런 이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적도 주십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이적은 그와는 다른 이적입니다.


즉 우리 믿음이 더 성숙해지는 하늘의 이적입니다. 왜 이적이라고 할까요? 우리 믿음의 변화가 너무 놀랍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우리 육신만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보다 더 중요한 영혼이 잘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은 최소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하늘의 수준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빌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고, 살전5:10에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롬8:17에도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했고, 벧전4:1에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은혜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일 뿐 아니라 그래야 온전한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대접재앙은 바로 우리가 온전히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은혜입니다.


2. 큰 이적이라 했습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 두 번째로 가르쳐 주는 이적은 큰 이적이란 것입니다. 큰 이적이란 어떤 이적일까요? 해와 달이 멈췄던 아모리와의 전쟁 이적일까요? 아니면 홍해가 갈라지던 모세의 이적일까요? 그보다 더 큰 이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큰 이적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적입니다. 즉 구약의 가장 큰 이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요, 신약의 가장 큰 기적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즉 구약의 수많은 이적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위한 것이었고, 신약의 모든 이적도 결국 이러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적 말고 또 다른 큰 이적이 여기 나타납니다. 어떤 이적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그 이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하나님의 기쁨은 하늘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경사가 되고 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을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큰 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마20:20-23에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누가 가장 클지는 아버지께서 결정하시겠지만 가장 크게 되는 원리만큼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대접재앙은 바로 우리를 이런 예수 닮은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큰 은혜를 말씀한 것입니다.


3. 이상한 이적입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 왜 이상한 이적일까요? 이상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한 것을 말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문제가 죽음 가운데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다 책망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에도 죽였지만 더 죽고 더 온전히 죽어 잘되는 은혜이기 때문에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마20:22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신 다음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6-28절) 하셨습니다.

더 낮아질수록 죽을수록 더 크게 되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이셨지만 죽기까지 낮아지실 때(빌2:5-8)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주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신비한 이적이라는 말입니다.


4. 다른 이적입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 다른 이적이라 함은 그 동안의 이적과는 차원이 다름을 암시한 것입니다.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동안의 이적과는 차원이 다른 이적을 행하실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셨습니다.


마12:38-40에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바로 이런 이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죽는 이적입니다. 요즘 깡패가 회개했다. 도둑이 회개했다. 하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이 회개했을 때 분명 가짜가 아니었을 텐데 왜 옛날로 돌아갑니까? 그들 마음 속의 악이 일곱 대접재앙과 같은 강력한 심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접재앙은 요나의 이적과 같이 온전히 죽는 은혜입니다.


5. 마지막 이적입니다.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마지막 재앙이니까 마지막 이적입니다. 이 마지막 재앙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마쳐지는데 여기 “마치리로다”의 헬라어 ‘에텔레스데’ (έτλέσθη)는 ‘완성하다, 성취하다’를 의미하는 ‘텔레오’ (τέλέω)의 예언적 부정 과거 수동태로 마지막 심판을 종결짓는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즉 마지막이란 시작이 있었다는 것이고, 시작이 있었으니 과정이 있었고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빌1:6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러면서 9-11절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그러니까 대접재앙이란 우리 신앙이 온전케 되는 성숙한 단계를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나 깨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사랑을 묵상함으로 우리 믿음이 온전히 자라 나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시는 성숙하고 온전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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