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천사의 경고 7 (계 14:13)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시간은 “세 천사의 경고” 마지막 7번째 시간으로 ‘주 안에서 죽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스트리아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1893년 발표한 유명한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책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소설입니다. 이 책의 저자를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가 극찬했다지만 그 책이 유명해진 것은 그 책의 내용보다 그 책의 제목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이름이 정작 유명해진 것은 다름아닌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의해서입니다. 헤밍웨이는 전쟁과 인간에 대한 작품들을 엮어 모아 만들면서 ‘전장의 인간’시리즈 제1권의 제목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이 책을 만든 것은 역사적 진실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에서 승리자는 패배자의 기록을 지워 버리거나 왜곡하면서 본말을 호도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은 한 편으로 자신을 대변하여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면 안타깝고 슬프고 어떤 때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꼭 억울하기만 할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죽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예수 믿고 죽은 자가 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진정 복된 죽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그럼 복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뜻대로 죽은 것입니다.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우리는 여기서 복된 죽음을 누가 말씀하셨는가를 봅니다. 하늘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하라.” 하셨는데 기록은 역시 성경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는데 그것은 성경을 암시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복된 죽음을 하늘의 음성이요,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요,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왜 복된 죽음을 말할까요? 그 상징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되게 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대로만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죽어야 복이 됩니까? 성경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성경대로 죽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에 죽어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은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15:3-4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셨습니다. 즉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함으로 우리 완고함을 버리고 또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순종함으로 우리 생각도 이론도 사상도 고쳐지고 우리의 자세도 정리됩니다.
마치 포도나무의 쓸모없는 가지들을 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잘 쳐서 정리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며 받아들일 때 우리가 새롭게 변화됩니다. 반면에 말씀을 믿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래서는 하나님 앞에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바로 죽는 것이요, 복 있게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환영을 받고 영광을 받고 귀히 여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로서 실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잘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지금 죽어야 복 있는 죽음입니다.
“지금 이후로” 이 말씀은 상당히 오묘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금 이후라면 그럼 그 이전에 죽은 자는 복이 없다는 말일까요? 요한계시록이 주어지기 전에 죽은 초대교회 성도나 사도들은 복이 없을까요? 그래서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될 말씀입니다.
여기 “지금”이란 성경에서 은혜 받을 때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후6:1-2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때는 언제나 오늘입니다. 지금 받아야 합니다.
히3:13에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그러니까 바로 지금 회개하고 바로 지금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죽음이란 이별 즉 죄와 상관 없이 되라는 뜻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회개하며 죄에 대해서 죽어지기를 원하시지 나중에 잘 믿겠다고 거부하는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안 믿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나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이 시간 하나님 말씀 앞에 순복하는 복된 죽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주 안에서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여기 주 안이란 이미 이루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사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가 아니라 죽는 자라 했습니다. 죽는 자는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 형태의 용어를 썼습니다. 죽음이란 그 성격상 과거형일 수밖에 없는 데 현재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능동태 남성 복수, 그러므로 이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고 나를 못 박으신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날마다 나를 죽음에 내어주며 죽는 현재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나를 꺾고 순복할 뿐 아니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이 죽음의 실재를 성령의 은혜로 경험하는 그 죽음입니다.
주 안에서 죽음이란 아무렇게나 죽는 죽음이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불교에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자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아 자체를 부정합니다. 자아란 허구적이고 그릇된 신념일 뿐 그에 일치하는 실제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나, 나의 것, 이기적 욕심, 갈구, 집착, 증오, 악의, 사기, 자만, 이기주의, 그리고 번뇌를 일으킬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문제점은 자아를 부정하다 보니 자신을 목석화시키는 문제점을 야기할 뿐 아니라
그 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령의 은혜로 그냥 죽는데 그들은 수년 수십 년을 그 이론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려고 애쓰다가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거나 이루었다고 해도 자기를 나무나 돌로 만들어버리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는 다른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죽음이란 순종을 말합니다. 야생마가 명마로 탄생하듯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다듬어진 마음이 잘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자는 진실로 복된 자입니다. 그래서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하셨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았던 사람이 죽어지고 이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기록하라 하신 것은 성도의 죽음은 영원히 천국에 기록되는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말3:16). 지금 이 세상에는 예수 몰라도 자기 말도 못하고 자기주장도 못하고 쉬쉬 하면서 죽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죽음이 아니라 복음에 입각하여 내 마음이 순복하여 성령의 은혜로 내 악의 기질이 죽는 바로 그 죽음이 되어 합니다.
4. 완전하게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왜 우리가 참지 못하고 방황하고 슬프고 고통스럽습니까?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환경이 어떻든지 내가 죽으면 편합니다. 아직도 방황하고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아직 덜 죽은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만 없는 것이 아니라 느낌도 없습니다.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 것처럼 잘 죽은 사람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니 문제입니다.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멀리 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내 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일지라도 내 의라면 버려야 할 의입니다. 완전히 죽어야 복이 됩니다.
5. 하나님의 방법대로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즉 이는 그들의 행한 어떤 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한다는 말일까요?
즉 성화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드시 사람의 협력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계22:12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신 말씀도 성화 방편의 고집적인 적용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성례와 순종과 겸손 등에 힘써야 합니다.
벧전4:17에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심판은 전후문맥을 볼 때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성령 강림을 대 심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의 악을 심판하셔서 온전케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2:18에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 심판은 종말론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은혜와 성령으로 진실로 변화되는 그런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죽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에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면 겸손해집니다. 내가 사라집니다. 성령이 임할 때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나에게 실재로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 천사의 경고를 듣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죄악 세상에 묻혀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죄악 되며 불행함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성화를 향한 부르심은 참으로 강합니다. 이건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하늘의 음성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화의 외침으로 들려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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