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1:1-13, 2:6-15
연세대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송자(宋梓) 총장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은 예수를 믿은 일이다라는 책에서 자신을 포함한 16인의 사회 저명인사들이 기독교 신앙을 접하면서 체험한 간증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지금까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강원대 총장을 지낸 문선재 박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그 순간 나는 너무 가슴이 벅차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영화감독 이장호 씨는 갑자기 기도 응답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느낌이 즉각적으로 왔고, 너무 감사했다. 그 이후 하나님과 손잡고 다니는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서울시장을 지냈던 김상철 장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굴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목 놓아 통곡했다. 오랜 울부짖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죄를 통회 자복했다.” 시각장애자 안요한 목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쓸모없이 버림받은 사람이었다. 먼지만도 못한 인생이지만 예수 안에서 새로운 보람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배우 한인수 장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과연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었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이 비수처럼 마음에 파고들어 선물로 주신 탤런트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었다.” 알로에의 김정문 회장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끝내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송자 총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왕 믿을 바에야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어보자. 나는 학생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라 그리고 큰 기대를 가지라고 말하였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자들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를 주로 받은 자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런 고백을 하는 이면에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본문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태초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르케인데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동시에 존재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도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계셨다는 말은 단순히 시공간의 의미를 넘어 인격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아버지 하나님에게 속한 성자요, 독생자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절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사역을 하신 분입니다. 본문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하였습니다.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성자 예수님을 형체가 없는 말씀이라고 표현 했고, 이 말씀이 이 땅에 오실 때 비로소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과 같이 육체의 형체를 가지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과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내어 쫒고,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위대한 선생, 예레미야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 중 하나로 보았지만,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알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따르는 자는 바른 신앙이라 말할 수 없고,, 그런 신앙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놀라운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하였습니다. 주님 자신도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여기 생명은 영적인 생명으로 영생에 이르는 참 생명을 말합니다. 요일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 참 생명이 주어져 영생에 이르기에 이보다 더 귀하고 값진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주님은 빛이십니다.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고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에 모든 생물은 빛을 필요로 하고 빛을 받아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을 믿고 내 안에 모시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의 사람으로 살게 되고, 그 빛을 받아 영적생명이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은 사람은 주님 닮기를 소망하면서 주님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신서 본문 6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여기의 그 안에서 행하되의 원어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자답게 살다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유익이 없습니다.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 살아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명하신 대로, 자신이 아는 대로, 그리고 믿는 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어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2.예수를 주로 받은 자의 특권
본문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했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주님을 바로 알고 믿고 영접한 자들이 만치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로 타락하고 어두움 가운데서 영적인 무지로 인해 생명이요,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했는데, 여기 자기 땅’, ‘자기 백성은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민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을 보면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며 구원의 주님이심을 열방 모든 나라에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렸던 은혜와 특권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넘치도록 경험한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그 모든 특권을 상실한 채 나라를 잃고 2000여 년 동안 유리방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타락하고 악해도 그 중에는 영접하는 소수의 사람이 꼭 있습니다. 기독교를 금지하고 탄압하는 아랍권이나, 공산권인 중국이나, 북한에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욕과 멸시를 당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믿고 영접합니다. 이처럼 믿고 영접하는 사람에 대해 본문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혈통이라는 것은 족보, 혈연관계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끔 착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모세가 우리 조상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했습니다. 그것을 큰 특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순종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존귀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살기를 힘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거역함으로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신분의 변화가 생깁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신분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벧전 2:9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운 가운데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계 열방에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신분의 변화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삶의 자세가 변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긍지를 가지고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3.예수를 주로 받은 자가 받는 은총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실 때 그 삶은 현격하게 바뀝니다. 어둠 속을 방황하던 사람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인생의 허무감과 운명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고아와 같은 소외감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원인모를 불안과 답답함과 초조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더 이상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욕심 부리며 이기적으로 살았던 사람이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는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승리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본문 골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했습니다. 여기의 이기셨느니라.’는 원어의 뜻은 악한 세력에 승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승리한 로마 장군들의 개선 행진을 연상시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예수를 주로 받은 성도의 승리이며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 율법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요, 세상을 이기신 분이기에 그 분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고난 풍파로 고달파도, 박해와 핍박으로 위협해도 넉넉히 이기는 자로 살게 됩니다.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과 평안과 감사함으로 사는 자가 됩니다. 박상곤의 상상력 발전소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광고회사가 큰 상금을 걸고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영국의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행기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새벽에 지름길로 승용차를 운전하고 오면 가장 빠르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고 실제 시간을 재어보면서 서로 자기 아이디어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참가자의 답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라는 답이 채택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무척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입니다. 누구와 함께 인생길을 가십니까? 예수를 주로 받은 자들은 우리를 사랑하여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과 함께 가기에 멀고 험한 길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 하시는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의 길로, 사랑의 길로, 생명과 소망의 길로, 영원한 하늘 영광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총을 받고 살다가 영원한 하늘 기업의 후사가 되는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받은 자의 모습
.예수를 주로 받은 자의 특권
.예수를 주로 받은 자가 받는 은총 아멘.
<2024. 04. 12.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 5 (계 13:16-18)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이 시간에는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마지막 시간으로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 계속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요15:18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하셨는데 왜 세상이 미워할까요? 세상의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그런 괴력을 가지고 세상을 미끼로 삼아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자 그럼 세상의 권세는 어느 정도일까요?

14.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만드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16-17절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여기 보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는데, 여기서 과연 그 표는 무엇이고 매매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계시록 기자 요한은 힌트를 주는데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기지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갈수록 알록달록 궁금증을 더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짐승의 그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수효도 역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적  사고가 아니면 성경을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 낸 것과 같아요. 삿14:14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 답이 과연 뭘까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수수께끼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어려운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히브리 문법에서는 평행법 문장입니다. 평행법 문장이란 같은 의미의 문구를 서로 다른 보완적인 말로 나란히 두 번 이상 반복하여 의미를 보완하고 강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먹는 자와 강한 자는 같은 말입니다. 잡아 먹으면서 강한 자가 뭘까요? 가장 강한 포식자는 당시 사자 말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먹는 것이면서 달콤한 것이 뭘까요? 그렇다면 꿀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자의 몸에서 꿀이 나왔다.’가 정답입니다. 이건 블레셋 사고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수수께기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짐승의 이름이나 수란 성경적인 사고로 보면 바로 짐승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것도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흉내 낸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라.” 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예수나 예수 이름이나 같아요. 그러니까 짐승의 이름이란 곧 짐승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사고입니다. 짐승의 수 역시 설명하겠지만 넌 완벽한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이 짐승의 이름을 오른손과 이마에 찍어주었다는 것은 “넌 짐승이다.” 하고 인친 것입니다. 여러분, 짐승 되고 싶습니까? 짐승 인증 받으면 됩니다. 타락하면 본능을 따라 살기 때문에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타락시켜 “넌 짐승이다. 꽝” 하고 인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넌 육에 속한 사람이다.”라고 인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나를 닮았다.” 하시면서 인치시듯이 세상도 자기 추종자들에게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나를 닮은 짐승이라. 너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 너는 세상 사람이라.” 이렇게 인증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타락한 사람을 가리켜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벧후2:10-14에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이렇게 세상에 속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어서 속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이렇게 사람들을 타락시켜 짐승으로 만듭니다.


15. 세상은 사람들을 완전히 자기 사람, 자기의 도구로 만듭니다.


다시 16-17절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그럼 여기 “그 이름의 수” 즉 짐승의 수는 무엇일까요? 자들이 잘 모를까 봐서 18절에 힌트에 힌트를 또 주고 있습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그렇다면 육백육십육이라 했으니 그 짐승의 수가 666마리일까요? 그런데 이 수는 사람의 수이기도 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사람 666명?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록달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바로 성경해석이 불가한 블레셋 사고이고 인간의 사고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100년 가도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수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1은 시작이나 연합이나 유일성, 3은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돌리는 완전수입니다. 2나 3은 증인의 수요, 4는 땅이나 우주, 5는 10진법의 중간으로서 고통이나 고난,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손과 발 옆구리 다섯 군데가 못이나 창에 찔렸습니다.

그런데 6은 세상이나 육신 짐승 등을 가리키는 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 만에 창조하시고, 창1:24부터 보면 짐승도 사람도 모두 6일째에 만드셨기 때문에 그래서 6은 짐승이나 사람 혹은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666을 짐승의 수나 사람의 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과 사람의 공통점은 육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66은 6이 3번 거듭된 수으로서 거기에는 또 새로운 의미가 부가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완전수를 모방하는 행위입니다. 6은 원래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일곱째 날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셨기 때문에 7이 완전수인데 6은 1이 부족해서 완전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을 3번 써서 하나님의 완전을 모방하려고 한 수가 바로 666입니다. 모방은 모방인데 이런 모방입니다. 그냥 6이 육체라면 666은 육적인 을 말합니다. 즉 “넌 완전한 세상 사람, 넌 완전한 육신적인 사람, 그리고 넌 완전히 짐승의 사람, 사탄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의 이름이나 짐승의 수는 같으면서도 서로 보완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말로서 결국 같은 말입니다.

 
짐승의 수나 사람의 수도 그렇습니다. 이 역시 평행법 문장으로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누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가? 이것이 세상 권세입니다. 인간을 완전히 타락시키는 악의 권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먹음직 지혜롭게 할 만큼 보암직하게 미혹하던 사탄이 지금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으로 사람들을 타락시켜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나 닮은 완전꼴이야. 내가 그걸 인증해 줄께” 하면서 그 증표로 오른손과 이마에 인을 치면서 타락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666이 뭔지 조금 감이 잡히십니까? 사람들이 666을 바코드 베리칩이라 해서 이걸 받지 않으면 상품조차 살 수 없어 살아갈 수 없다며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코드(barcode)가 뭡니까? 바코드는 컴퓨터가 판독할 수 있도록 고안된 굵기가 다른 흑백 막대나 점으로 상품의 포장지에 인쇄되어 빛을 비취면 뛰 소리가 나면서 컴퓨터가 가격을 읽고 계산하기 쉽게 된 코드입니다. 우리가 마트에 가면 돈 계산할 때마다 사용하는 것이 바코드입니다.


만약 666이 바코드라면 2,000년 전에도 계시록은 열린 복음이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지금의 바코드를 몰랐기에 계시록은 그동안 열린 복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록이 열린 복음이지 2,000년 후에 바코드시대가 와야 해석될 수 있는 인봉된 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지 오늘의 문화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혹시 미래의 정부가 바코드를 악용하여 인간을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이것이 비록 멸망에 떨어뜨리는 영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거부이지 바코드가 666이어서 거부한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왜 666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못하게 합니까? 그런데 무엇을 매매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매매란 저 뒤에 나오는 바벨론 상품을 말합니다. 바벨론 상품이란 죄인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쾌락과 거짓된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성도라면 이런 것들을 사거나 만들어 팔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 같은 인간들을 죄에 담대하기 때문에 그 매매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유명한 스타 가운데 두 사람이 함께 동업하다 한 사람은 하나님도 모르고 무당 아들이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사탄적인 록음악으로 세상을 타락시켜 한류스타가 되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목사의 아들로서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고상한 노래만 부르다 세계적인 가수는 되지 못했지만 기부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한 가수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세상을 사고 팔러 다니는 사람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짐승의 표가 없기 때문에 세상 팔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더 좋은 것입니까? 짐승의 표, 짐승 아닌 사람이 더 좋은 거지요. 그러므로 짐승의 표 받지 않는다란 바코드 거절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세속을 피한 것을 가리킵니다.

16. 세상은 우리 인격과 행위까지 전인적으로 타락시킵니다.


다시 16절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여기 “모든 자” 그래놓고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한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가 유대를 비롯해 수많은 나라를 지배했는데 그 안에는 로마인이라는 자유인이 있었고, 잡혀온 노예들도 많았고, 작은 자, 큰 자, 부자, 가난한 사람 등 여러 종류의 계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잡혀온 노예들에게만 인두에 불을 달아서 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그들만이 아니라 자유인을 비롯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기 위한 메시지인데요. 그러니까 그것은 바로 전인적인 타락을 말해줍니다. 온 나라가 다 표 받은 것처럼 우리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육체도, 생각도 행위도, 이론도 말도 행위도 다 함께 타락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부분적 타락이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또 다시 입증하는 문구가 바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라는 말입니다. 오른손은 행위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이마는 인격의 대표입니다. 즉 그 인격과 행위가 타락했다면 다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성도라도 온갖 탐욕과 이론과 환경과 강압적인 방법 등으로 미혹시켜 우리를 세상사람 만들고, 육신적인 사람 만들고, 사탄의 완전한 사람 만들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려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한 번 주일 빠져 되겠지, 주일날만 교회 나오면 되겠지, 명목상 신자 정도로 편하게 예수 믿자.’ 그렇게 살다가는 사탄이 먼저 알고 세상과 함께 찾아와서 잡아갑니다. 어떤 사건을 발단시키거나 무슨 건덕지를 만들어서라도 하나님과 교회에 등지게 만들어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세상 사람 만들어놓는다는 진리가 바로 짐승의 표 666의 비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이런 흉악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분별하여 확실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그 영혼은 죽은 영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넓은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등지고 십자가 지고 좁은 길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치던 베드로의 그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회개하여 명칭만 신자가 아니라 참 마음으로 세상에서 출애굽한 의와 진리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3~21)

 

오늘은 부활절 이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신앙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부활신앙을 간직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중의 핵심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지냈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믿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직접 목격한 후에야 비로서 믿는 자들이 되었고, 믿음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아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부활절 이후에도 확고한 부활 신앙을 드러내고 부활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회복의 능력, 이기게 하시는 능력, 담대하게 하시는 능력, 순종하게 하시는 능력, 이루 다 셀 수가 없는 능력이 부활을 믿는 자에게 날마다 공급 되어 집니다.

 

이런 능력을 공급받은 우리는 부활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늘 염두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라는 물음에 한 단어만 이야기한다면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는 내 앞에서 온전하여 거룩하게 행하라라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거룩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에 믿음이 준비됨 없이 몸만 나와서 의무적으로 희생 제사(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마당만 밝는 사람들(1:12)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당 공간에만 왔다 갔다 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보좌 앞)까지 반드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까지 나아가려면 반드시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 거룩함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고 믿음을 소유하려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라는 찬양도 지난주에 불렀습니다.

 

죽음에서 삼일만에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믿고 매일 같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 이것이 부활 신앙을 경험한 사람들이 행하여야 할 삶의 핵심 과제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습관이 거룩입니다.

 

오늘 본문 위에 제목이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되어 있고,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4월 한달 동안은 부활절 이후 우리의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 함께 거룩이라는 주제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읽어 드립니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아멘.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살리셔서 우리 모두에게 산소망이 있게 하셨고,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말을 한 후에, 13절에서 그러므로 (산 소망과 믿음이 있는)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재림) 때 주실 은혜(영생의 면류관)를 바라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주실 은혜를 바라며 기다리는 자세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허리를 동여매는 이 자세가 무엇을 할 때의 자세인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고 체험한 자들이 산 소망과 믿음의 선물(은혜)를 가볍게 여기거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거나 다시 세상의 즐거움과 유익을 쫒아가 버리는 어리석음을 선택하지 않도록 경계심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채우기는 어려운데 까먹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한 후에 베드로 사도는 15절 하반부에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권면을 하였습니다. 이 말이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진짜로 하고 싶은 권면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있어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는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한 권면의 제목이었을까? 그것은 거룩은 곧 하나님 과의 만남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거룩함으로 항상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모든 곳은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반드시 우리의 몸과 마음과 행실이 온전하게 거룩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는 절대 거룩하지 않으며, 거룩해 질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 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우리의 모든 말, 생각, 행동, 마음구석 구석의 삶의 전 영역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이 충만함을 항상 구하라는 뜻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 있으라는 뜻과고 동일합니다.

 

바지의 허리띠는 밖에 나갈 때는 동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풀어 버리지만, 마음의 띠는 한 번 동이면 계속해서 조임만 있을 뿐 절대로 풀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마음의 띠가 풀리는 순간 우리의 거룩함은 언제 든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 14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과거로부터 몸에 베어 있는 사욕(욕심, 욕망) 때문입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을 억제 시키지 못하면 거룩함이 있어야 할 자리가 욕심 덩어리로 가득찹니다. 마음에 욕심이 차고 넘치는데 긴장감 있는 신앙생활이 될 리가 없습니다. 사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또 하나의 관건입니다.

 

부활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긴장이 유지되어야 하는지 베드로 사도가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이것이 부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삶의 자세여야 합니다.

 

16~19절 말씀입니다.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아멘.

 

 

1.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유념해야 할것 동행, 항상 함께를 추구

 

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나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하나면 다른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거룩하신 아버지(부모)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 몸과 옷에서 악취가 난다면 누구라도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하겠죠. 하나님도 죄와 악에 빠져 영적으로 불결하고 정결하지 못한 자들과는 절대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녀들만이 하나님 보좌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과 항상 함께하고 싶다면 거룩, 또 거룩해야 합니다.

 

부활절 이후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항상 하나님 곁에서 함께 지내겠다는 다짐도 했고, 그러한 소망도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게 하시려면 거룩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라는 말씀이 마음 판에 지워지지 않도록 각인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모든 행실에 거룩한자로 살아기를 원하고 바라신다면 항상 몸과,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에 주의하고 또 주의하여야 합니다. 내 스스로 힘써서 거룩함을 지켜 갈수 없음을 빨리 인정하고 성령님에게 보호를 요청하여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죄와 악으로 더러워졌다면 즉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기대어 진심으로 참회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주의하고, 인정하고, 참회하고, 돌이키면,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방향을 잘 잡으신 겁니다. 이런 생활을 반복적으로 실천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이 부활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되어야 하고,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왜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갈급함이 없을까? 내가 거룩함보다 세상의 것을 선택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전혀 작동되 않을까? 내가 더 이상 거룩함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느끼지 못할까? 내가 지니고 있던 거룩함을 소모하고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 곁에 가까이 머물기를 원하십니까?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항상 함께 생활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분들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려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오직 거룩함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2.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유념해야 할것 나그네길, 행위대로 심판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마지막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종말의식, 심판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종말론적 긴장감이라고 표현합니다.

 

17절에서 처럼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심판의 때를 두려움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삶이 심판을 인식하는 삶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평가는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결정됩니다. 우리 모두는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온 모든 행위들을 직고(바른대로 알리다, inform truthfully)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다가 그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멸망뿐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각자가 행한 일들이 벌거벗은 것같이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고 심판 받는다는 사실을 그다지 두렵게 인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두려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7절 후반부에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우리의 한정된 인생의 시간을 의미하고,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은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두려워 하며, 의식하며, 인식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범죄 검거율이 유독 높고 빠른 것은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 되어 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4시간 켜져 있는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까지도 다 기억하시고 언제든지 그 장면들을 생방송 하듯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소름끼치도록 두렵습니다. 진짜로 두렵다고 실감이 되시나요?

 

내가 만약 겉으로는 모범적으로 살고있는 것처럽 보이지만 실제로는 음란과 거짓과 폭력을 저지르는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나의 숨겨진 일상들이 광화문 광장 홍보용 전광판에 라이브로 생중계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속용 카메라에 찍혀 한 건에 1000만원씩 과태료 고지서가 온다면 과속이나 신호 위반에 무감각 하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나쁜 짓 못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삶을 언제든지 생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실 때가 곧 심판대 앞에 서는 날입니다. 이제는 좀 무서우신가요? 정말 진지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심판을 생각한다면, 나그네 같은 짧은 우리 인생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될 것입니다.

 

정말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고 꽉 붙들고 살아가려고 치열하게 몸부림 칠 것이고,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나그네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룩하지 못한 더럽고 냄새나는 추악한 행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겸비한 자세를 취하려고 무단히도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부활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 이름을 붙잡는 치열함, 죄를 버리고 거룩함을 취하는 남다른 겸비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살아가라는 권면으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3.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유념해야 할것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대속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으면 거룩한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을 위해서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 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았다는 은혜, 이 은혜가 계속해서 은혜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입니다.

 

보배로은 피 흘리심을 일평생 감사로 영광 돌려도 부족한데, 점점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이미 확보된 내 물건처럼 여긴다거나, 더 이상 어떤 감동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로 방치한다면 참으로 본회퍼 목사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값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자가 되는 시작, 과정, 결말에는 보배로운 피 흘리심의 대속함이 중심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고백하며, 항상 감사하며, 항상 겸손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태도가 거룩함의 기본이자 출발점이 됩니다. 대속함의 은혜를 매일 고백 하시고 매일 감사하십시오. 그런 일상의 반복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권하는 마지막 말씀을 보겠습니다. 20-21절입니다.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아멘.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말미암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영광을 주시는 분임을 굳게 믿고, 그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 믿음과 소망이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 집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 하나씩 유념하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 잊어 버리고, 다 실천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워 언행에 겸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이름 붙들고 살아가는 것에 최선을 다한 다면 우리는 무조건 거룩함으로 덧입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과거에 지었던 죄 때문에 묶여있지 않아도 됩니다. 현재의 문제와 상황 때문에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그네 인생길에 대한 허무함과 미래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여졌다는 사실만 단단하게 붙잡고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 이름만이 능력임을 명심하시고 살아가시면 됩니다.

 

제발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마시고, 상황의 좋고 나쁨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거짓말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들을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예수 이름이면 죽음도 우리를 막아설 수 없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고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과 소망을 지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이후 우리 모두의 삶이 거룩, 거룩, 오직 거룩함만이 충만하여져서 친구 되시는 우리 예수님과 천국 길로 동행하는 기쁨의 날들로 채워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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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과 소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죄와 악에서 보전하여 주셔서,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산 소망이요 믿음의 주인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 4 (계 13:15)

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4번째 시간으로 ‘세상의 미혹’에 대해서 계속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맹위를 떨치는 것은 그 배후에 사탄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엡6:12-13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했습니다.


그럼 세상의 미혹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요?


11. 세상은 악의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15절 상 반절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여기 권세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강력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잡히면 세상 사람이 안 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내노라 하는 사람들도 세상에 걸려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 대남공작부에서도 그런 수법을 쓴다고 합니다. 북한을 방문하는 남측 인사들을 돈이나 미인계로 미혹해서 그걸 약점 삼아 코에 고리를 꿰어 남한을 적화시키는 일군으로 죽을 때까지 써먹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도 세상 앞에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방력을 보세요. 세상의 모방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세상도 창조주 하나님을 모방합니다. 창2:7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한 것처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진리의 사람이 아니라 악과 비진리의 자기 사람을 만듭니다. 이 모방력 만큼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짝퉁천국 중국인들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은 것처럼 마음에 악을 불어 넣어 죄의 생명과 사상을 불어넣어 죄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할 정도입니다.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했다는 것은 말은 인격의 표현이요, 또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세상적인 것으로 충만한 인격을 암시합니다. 완전히 세속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마12:34에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하셨고, 눅6:45에도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건 사탄의 작품이요, 세상의 작품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세상을 불어넣어 인간을 죄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12. 세상은 선한 생각이 깃들지 못하게 철저히 배격합니다.


15절 하 반절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여기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 하는 자”는 말은 저항세력을 암시하는 말인데 예를 들면 다니엘이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세 친구가 절하지 않다가  풀무불에까지 던져졌습니다.

 
우리 속에도 세상을 저항하는 저항세력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 꺼리는 체면과 도덕적인 생각도 저항세력입니다. 그러나 그건 그리 강한 것이 되지 못하고, 더 강한 세력 세상의 사법입니다. 법의 처벌이 두려워서 범죄하지 못합니다. 살인해도 몇 년 살고 나오면 끝이라면 사회가 얼마나 혼란하겠습니까? 지금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법도 기준이 타락하거나 마음의 죄까지는 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보다 더 강한 것은 신앙양심입니다. 신앙양심이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법에 용감하고 신앙양심에는 둔감한 사람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멀리하면 자동으로 이 저항세력들이 점점 약화됩니다. 영적인 면역결핍증에 걸립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은 듯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세상을 더 즐기게 되고, 더 나중에는 뿌리 깊은 쓴뿌리가 나서 신앙과 선한 것에 대해 악감을 가지고 이를 갈면서 완전히 악마로 변해버립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마음의 파수꾼이 든든해야 합니다. 무드셀라(창 던지는 자 = 파수꾼)에 담긴 의미처럼 파수꾼이 죽으면 심판이 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지킬 것은 자기의 마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12:15에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쿠르트 교수가 ‘유대인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그의 논문에서 히틀러가 유대인을 600만 명 학살하게 된 는 유대인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예를 들면 과부된 자기 어머니와 유대인의 애정관계라든지, 또 자기 꿈인 미술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불합격시킨 유대인 면접관에 대한 원한, 그리고 그가 비엔나에서 공부할 때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여자가 변심한 후에 보니 그 여자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등 그는 불행하게도 유대인과 얽힌 원한관계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유대인을 멸하기 위해서 장차 총통이 될 히틀러라는 한 사람에게 철저한 악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 그가 쓴 ‘나의 투쟁’에 나오는 말인데 유대인에 대한 시기 또한 컸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에 대해 고조되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얄미울 만큼 뛰어나서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유대인들을 박해하게 된 표면적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보다 깊은 내면적인 동기는 히틀러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기도가 없으니 사탄의 시험에 의해 끊임없이 그의 마음에 악감이 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탄이 인간을 완전한 세속주의자나 역사 속에 쓰일 악독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고도로 전문화된 수법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여러 동기를 규합시켜 선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증오하게 만들어갑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거나 배후의 기도자가 없으면 인간은 사탄과 세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 인격이 굳어져서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쓴 뿌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괴롭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13. 세상은 선을 몰아낼 뿐 아니라 깃들지 못하게 죽입니다.


15절 하 반절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여기 “몇이든지”라는 말은 저항세력이 많다는 것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 저항세력을 철저히 배격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꼭 이슬람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가 문제인 것은 포교의 수단으로 폭력이 교리적으로 허용되거나 장려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꾸란9:111에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을 죽이면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상으로 받는다." 했고, 꾸란2:217, 꾸란4:89에는 "이슬람교를 떠나는 사람은 죽여라." 꾸란8:12, 47:4에서는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은 목을 베어 죽여라." 꾸란9:5에서는 "알라신을 위해서 죽이고 순교하라." 꾸란8:12, 꾸란8:60에서는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을 위협하라." 그리고 꾸란 제 8장에서는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의 것을 훔쳐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슬람 집단에서 폭력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죠. 자신들은 평화의 종교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두 번째 나타난 지하드 사상에 묻혀 무효가 되었고,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집단폭력의 대다수는 이슬람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그렇듯 같은 이슬람이어도 종파만 달라도 전쟁을 불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슬람인구가 많이 들어와 있지만 소수일 때는 아주 순한 양처럼 숨어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 이슬람 교인들이 저지르는 테러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 그들은 숨을 죽이며 몸조심하고 있지만 세력이 커지면 국가까지도 전복시켜 이슬람 국가로 만들고 맙니다.


세상에는 온건 이슬람이란 없습니다. 즉 그들이 온건하다면 그들의 교리에 미온적이거나 타의 저항을 두려워서 미적거리는 것이지, 이슬람에 열심하게 되면 반드시 그들 교리에 따라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름 즉 지하드로 나오게 됩니다. 지금 다문화 소수인권 등을 들고 나오면서 침투해 오고 있고, 오일달러나 무역에 탐내고 함부로 열어줬다가는 프랑스나 벨기에 꼴을 당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보면 세상이 그러합니다. 세상은 선한 생각이 깃들지 못하게 철저히 마음을 미혹시킵니다. 그래서 세상에 심취하게 되면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돈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죽이고, 외도가 무엇이기에 조강지처를 죽이고, 탐욕이 무엇이기에 은혜를 저버리고 신앙까지 팔아먹는지 이것이 바로 탐욕의 무자비성입니다. 인간을 완전히 짐승보다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유1:10에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방하여 수많은 죄인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천하의 악한 폭군을 모방하여 마음에 선이 깃들지 못하게 몰아내고 죽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고 사모하는 자에게 거룩한 성령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고 더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 악한 세상에서 온전히 구원함을 받아 우리 마음이 하늘 사람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부활의 약속을 받은 성도의 삶    고린도전서 15:57-58

출처/피종진목사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경배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경배하는 여러분과 저는 이 지구상에 있는 60억의 인류 중에 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은 그저 먹을 것이 쌓이면 복인 줄 압니다. 또 지위 명예가 높아지면 그것을 인생의 최대의 삶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 위와 명예도 언젠가는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이팔청춘도 어느 덧 백발이 될 때가 있습니다. 환경 여건 조건은 때를 따라 변하여지고, 세월 따라 모든 유행도 바꿔질 수 있습니 다. 지위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매일 처럼 그 은혜 가운데서 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시고, 감사한 마음으로 늘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우리는 현실에 얽매 여서 현실에 만족하여 뜻대로 되어 진 일이 있을 때 그것을 기뻐하고, 또 좀 일이 뜻대로 안될 때는 좌절하는 그런 우리의 연약함이 금같이 변함이 없는 믿음으로 바꾸어져야 될 줄 믿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부활의 약속을 받 은 성도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 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악의 권세를 이기게 해주셨고, 우 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이기게 해주 셨으며, 또 사탄의 권세에서도 이기게 해주셨는데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우리는 거기에 따른 삶이 이방 사람과 달라 져야 되고, 또 주님께 합당한 삶이 이루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귀한 축복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첫째, 부활의 능력을 매일처럼 체험하고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진장한 은혜를 공급해주시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시고, 구하는 것을 응답 받게 해주시며, 또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꿈과 소망이 믿음으로 이루게 하여주시는 줄 믿으 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그것 을 내가 체험하고, 내 생활 속에서 나타내면서 그것을 늘 누리려는 그런 생활이 이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 다.
우리는 죽은 데서 다시 사는 체험이 늘 있어져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도 죽은 믿음이 있고, 산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덤에서 묻혀 있으면 안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송장이 썩어 나중에 없어지듯이 죽은 믿음은 생산도 없고 활동도 없으며 소리도 없습니다. 우리가 산 믿음이 있을 때에 찬송소리가 있게 되고, 기도소리, 전도소리가 있게 됩 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 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되리라고 했습 니다. 믿음이 크면 큰 역사가 일어 납니다. 믿음이 또 견고하면 항상 변함이 없이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 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는 영적 심령이 에스겔 골 짜기의 해골 떼처럼 그렇게 죽어 있는 상태에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영이 살아야 됩니다. 영이 살려면 생기가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늘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 역사하도록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사모하고, 그 성령이 우리를 주도하도록 우리는 성령에 순종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 뜻을 따라 살도록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이 일을 내 생각으로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지 않게 성령이 나를 감동해주시옵소서.' 우리 설교하는 분들은 제일 중요한 것은 어느 책을 뒤적뒤적하다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이 번에는 어떤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까 기도하면서 묵상하면 주님이 주신 영감이 옵니다. 그 감동을 받 았을 때에 그 때는 입을 벌리면 말씀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한 번만 역사하시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여러분과 저에게 이 성령님이 늘 동행해주시고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늘 우리는 무엇이든지 성령 안에서 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새생명, 성령 안에서 새생명, 그리고 늘 우리 주님 께서 우리에게 항상 내주하시도록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사람, 주님이 내 안에 거하여 있는 사람은 늘 생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안에 거하 시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 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항상 무엇이 든지
"I can"(나는 할 수 있다)이라 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지
"in Jesus Christ"(예수 안에서)
"in God"(하나님 안에서)
"in Holy Spirit"(성령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내 힘으로 안될 때 좌절하고 하나님께 원 망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주님, 지금 내가 주 인이 되어있는 모양입니다. 주님이 내 주인이 되어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업장에도 주님이 그 사업장에 사장이 되어준다면 주님이 실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성공 한 사업가들을 여기 저기서 만나보 면 '당신은 어떻게 해서 크게 성공 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항상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매일 제단을 쌓으면서 성공했다는 간증도 있고, 어떤 분은 항상 자기가 사업장의 사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답니다. 주님이 사장이고 자기는 전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사장님에게 보고하듯이 주님께 아뢰이고, 주님께 어떻게 사용할까요? 하고 묻고, 기도하면서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자기는 수입을 늘 얼마 달라고 하지 않고, 십일조 많이 바치게 해달라고 항상 '주여, 오늘도 십일조 많아지게 해주시옵소 서.'라고 했답니다. 이 간증은 제일 많은 간증입니다. 또 어떤 분은 '주여, 이 사업장에 선교비 좀 많이 주 십시오.' 그래서 기도하다가 하나님 앞에 감당할 수 없도록 부어주시는 흔들어서 주시고, 눌러서 주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그런 실 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한 분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여러분들이 어느 곳 에 있든지 그곳에서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주님이 주인이 되 어지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실패했어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안돼도 주님은 되게 하십니다. 나는 못해도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 다. 이렇게 믿음이 살고, 내 영이 살면 우리 생활의 모든 것에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성장은 경제성장이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내 믿음이 성장하면 경제가 성장합니다. 내 믿음이 살면 경제도 살아납니다. 어느 책이든지 다 보세요. 믿음을 저버린 나라, 하 나님을 저버린 나라, 하나님의 말씀 을 거역하는 나라, 한 나라도 잘되는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을 붙잡고 사는 나라는 하나님이 도 와주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곳이 바로 선교 지이고, 여러분은 그 곳의 선교사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명칭을 가진 것도 귀하지만 일하는 그 자체 속에서 하나님 앞에 실질적으로 여러분 이 선교사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터전에 마을이든, 주택 거주지 이든, 아니면 학교든, 관공서이든 여러분이 있는 곳이 '내가 하나님께 받은 선교지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역사할 줄로 믿습 니다. 그런 마음을 비중을 크게 가질 때 하나님이 부수적인 것, 물질도, 건강도 또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실 때도 가장 어려울 때, 가장 마음이 괴로웠을 때 하나님께서 큰 일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종 아브라 함이 제일 괴로웠을 때가 언제입니 까? 조카 롯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라고 생각합니다. 조카 롯이 삼촌의 도움으로 호강을 입고,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는데, 나중에 삼촌을 배 신하고 좋은 땅은 자기가 갖고, 삼 촌인 자기는 황무지와 같은 땅을 선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을 때에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가 제일 괴로움과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늘에 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창세기 13:14,15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 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다 더 큰 것을, 제일 좋은 것을 주실 때에 제일 어려운 고통 속에서 주십니다. 그래서 대개 보면 인내하는 사람들이 큰 일을 합 니다.

 

둘째,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잡 고 살아야 됩니다.
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나는 부활이요 생 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현실적으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 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약속대로 '나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주셨구나, 나에게도 부활을 하나님 이 약속해주셨구나'하고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눈을 멀리 떠서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되고, 현실에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야 되며, 항상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현재 의 관한 일이나 육신의 관한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에 관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언제나 영의 찬송을 부르며 살아야 됩니다. 에베소서 5:19에 보면
"신령 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생각도 육신 의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습니 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육의 생각에 잠겨 있 으면 절대로 평안함이 없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이란 썩어질 육체 밖에서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취미를 가질 때에도 신령한 취미 즉 예배 드리기를 좋아하는 취미, 서로 성경을 읽는 취미, 기도하는 취미, 서로 찬송과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은혜를 나누는 취미 등 이런 좋은 취미를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 면서 영적인 세계에서 항상 만족이 있게 되면 육에 관한 모든 것은 자동으로 좋은 일로 하나님께서 이끌 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1에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대 표 기도할 때 혹 원고를 써서 기도를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실수는 안하는데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사로잡혀서 기도를 하게 되면 언제든지 입만 벌리면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하는 것 같아도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기도를 이끌 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 8:26).

 

셋째, 부활의 위대한 사건을 전파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부활의 약속을 받은 성도의 생활 중에 가장 큰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부활하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꾸 전파해야 됩니다. '전도'란 바로 전파입니다. 예수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선교'도 바로 전파입니다. 예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 예수를 알려야 됩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것은 예수 전파하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예수의 사람인 것을 정당하게 알려야 합니다. '나는 예수 만나서 이렇게 구원받았습니 다. 당신도 예수를 만나세요. 내가 만난 예수를 당신도 만나 보세요. 그 예수님께 당신의 모든 것을 맡겨 보세요. 당신이 그 예수님께 한 번 기도해보세요.' 이렇게 담대하게 말 해야 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나를 위하 여 십자가에 피흘려 구속해주신 주님, 당신의 죄와 허물을 담당해주신 그 주님을 당신이 믿기만 하면 당신도 구원을 받습니다. 믿기만 하면 당신의 구주가 됩니다. 믿기만 하면 당신의 일평생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당신의 영원한 피난처가 됩니다. 영원한 안식처가 됩 니다. 그 예수를 만나 보세요.' 이렇게 증거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사람은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 다.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진력을 다해보세요. 직접 전하 든지 간접으로 전하든지, 또 한 영 혼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기도한 다든지, 그 영혼을 위해서 복음 들고 찾아간다든지, 그 영혼 구원받을 때까지 그를 위해 봉사해주고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서 노력한다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여건 환경을 조성한다든지, 성 전을 짓는다든지 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날마다 믿음 안에서 정 말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며, 또 이 귀한 부활의 소식을 만 백성 앞에 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 다할 때까지 그 주님을 증거해야 됩니다.


넷째,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 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8절) 우리는 삼천리 금수강산부터 오대양 육대주까지 세계를 향하여 열심히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달리는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듯이 우리가 열심히 주의 일에 힘쓰면 우리의 신앙이 넘어 지지 않습니다. 세상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전심전력을 다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사 6:8), 열심을 품 고(롬 12:11)주님의 일에 더욱 힘 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손길 발길에 동행해주시고, 한없는 은혜를 폭포수처럼 여러분에게 쏟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약속을 받은 성도답게 부활의 능력을 매일처럼 체험하며,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부활의 위대한 사건을 전파하면서 주의 일에 더욱 힘 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 3 (계 13:13-14)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오늘도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세 번째 시간으로 ‘세상의 미혹력’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은 타락한 인간의 심성이나 그 문화입니다. 세상을 비유하자면 향기의 독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향기를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향기에는 독이 있고 아름답고 진할수록 독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향내 나는 꽃을 침실에 들여놓거나 병문안할 때 진한 향내 나는 꽃은 피해야 합니다.


한국의 약초연구가 최진규씨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는 살모사 향기라고 합니다. 살모사의 향기를 맡으면 정신이 황홀해져 그 향기를 따라가면 살무사 소굴에 빠져서 살모사의 밥이 되고 만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모사 굴에서 어머니 뼈를 찾아왔다고 해서 살모사(殺母蛇)라고 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뱀을 잡는 땅꾼들이 행방불명되는 사례가 많은데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이와 같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미혹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7. 세상은 불꽃과 같이 열정적입니다.


13절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성경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이야기는 여러 번 있습니다. 역대하 7:1에 여호와의 성전 낙성식에서 솔로몬의 기도 후에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살랐고, 왕하 1장을 보면 아합왕이 엘리야의 목숨을 찾을 때 보낸 군사들이 50명씩 세 번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랐습니다.


그리고 왕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여호와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 여호와의 제단의 제물을 살랐는가 하면, 눅 9장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 나서 불을 명하여 하늘로 부터 저들을 멸하기를 간청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도 하나님을 흉내냅니다. 성령이 임하면 상상할 수 없는 열심과 헌신이 생기듯, 세상의 불꽃도 정열적이며 세상에 자기를 바치게 만듭니다. 성경에 아말렉 자손이 나오는데 아말렉이 이스라엘이 약한 때마다 나타나서 치는 자로 세상정욕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아말렉의 왕을 아각이라고 부르는데 아각이란 불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세상정욕은 열정적이고 지배적이어서 한 번 사로잡히면 자신을 불태우고 재산을 불태우고 신앙까지도 불태워 버리고 맙니다. 자기만 태울까요? 다른 사람까지 그 불에 휩싸이게 합니다. 남의 가슴에 불을 지르지 못하면 스타가 되지 못합니다. 한 동안 세계는 아무개의 말춤의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렇게 세상 공연장의 열기란 대단합니다. 모두가 광란에 휩싸여 전신을 흔들며 목이 터져라 부르는 그 모습을 보면 영만 다르지 성령부흥운동을 완벽하게 흉내낸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교회에 이런 불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사람이 나답과 아비후입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었듯이 이 불이 붙으면 교인들의 심령은 다 죽고 맙니다.


교회에서 세상 가수 초청하면 안 됩니다. 지난날 가수였으나 복음가수가 되어 돌아왔다면 좋지만 세상노래와 찬송을 함께 부르는 가수들은 영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아무개도 예수 믿더라.' 그 정도 효과 말고는 바랄 것이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성경은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 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3:10-11)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불이 붙는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미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큰 이적"이라고 했습니다. 이적도 아니고 큰 이적은 뭘까요? 성경에서 큰 이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 믿고 변화되는 것을 큰 이적이라 합니다. 세상에 이적이 있다 해도 이 두 이적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도 모방하여 똑 같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 큰 이적은 변화는 변화인데 반대적 변화 즉 타락으로 속화시키는 이적입니다. 세상 미혹의 마력을 멀리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사울이 아각을 살려두다 어떤 변을 당합니까? 그 귀한 왕권을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영의 복 잃지 않으려면 세상 것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8. 세상은 인간의 정보를 기초로 만들어진 미혹합체물입니다.


손자병법에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 백승이라' 했는데 육신의 모든 정보를 다 알고 미혹하니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4절에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더라” 했습니다.


여기 “짐승 앞에서 받은바”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정보 즉 소욕의 정보를 다 알아서라는 말입니다. 앞의 12절에서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더란 말에게 이미 말한바 있습니다. 타락한 영상매체처럼 대리 만족 비슷하게 연출시키기도 합니다.

 
외국 기업들이 국내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 모든 조사를 완벽하게 한 다음에 쳐들어오듯이 세상이 인간의 모든 욕구를 알고 같은 톤으로 공략하기 때문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톤이 달라 불협화음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걸 영어로 어필(appeal)이라고 합니다. 어필하다는 말은 ‘(무엇이 사람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거나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을 어필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우리 인간의 정보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문화이기 때문에 인간의 소욕에 어필하는 힘이 강력합니다.

그래서 이적을 행하며 미혹하는데 이적이란 본래 어떤 것을 선전하거나 보증하는 보조적인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을 때도 이적이 그 증거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 복음 증거도 이적이 수반되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도 예수님을 그대로 본을 받아서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단 말입니다.

 
그럼 그 이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갖 탐욕의 보랏빛 상상력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세상에 대한 천하만국과 그 영광 등 온갖 환상을 불어넣어 줍니다. 성령의 환상을 모방합니다. 환상만 줍니까? 하룻밤에도 수십 번 성공의 바벨탑을 하늘 높이 쌓았다가 쓸었다가를 반복하거나, 심리적 자극을 통해 찌릿찌릿한 체험을 주면서, 마음속에서 희망의 소리가 들려오는 등 온갖 요술을 다 부립니다.
 
눅 12장을 보면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16-19절) 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 주는 보랏빛 상상력이지 마음으로라도 그 탐욕에 빠지는 날이면 그것은 행복도 아니고 우리 영의 독약과도 같은 고통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그 비극을 666에서 다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하려면 살모사의 독과 같은 마음의 세속을 철저히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9. 이 땅에 거하는 자는 누구든 그 미혹을 피하지 못합니다.


14절 중 반절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세상 사람이라면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엡2:2-3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꼼짝할 수 없이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복음의 힌트도 줍니다. 즉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자는 미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요15:19에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성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 죄와는 원수입니다. 이 하늘에 속한 자는 세상이 미혹할 수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미혹이 시험이 되거든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았는지 자기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거룩해지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고전2:14). 그러나 육에 속한 자는 세상의 미혹을 피할 수 없습니다.

10. 우리 양심이 말씀에 무뎌지면 그 심령은 세상의 밥입니다.


14절 하반 절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언제 탐욕이라는 우상에 빠지게 됩니까? 칼에 상하여 아주 죽어야 하는데 살아날 때입니다. 여기서 칼은 말씀인데 말씀의 칼이 무디어질 때 그 심령에 탐욕이 다가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119:11에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했습니다. 사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올라올 때 이미 물 즉 말씀을 떠난 자입니다. 말씀충만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이 세속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어느 집사님은 자기 담임목사에게 "목사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사람의 인간성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지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하였더니 자신이 사업을 하면서 몇 번이나 사기를 당했는데 그 때마다 교인에게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더 사기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인일지라도 그 마음에 말씀이 없다면 부덕을 저지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시1:1-2) 사람입니다. 이 말씀 묵상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면 자동으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게 됩니다. 죄악 세상에서 성도가 살 수 있는 길은 기도와 말씀, 말씀과 기도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딤전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정열의 불길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모든 정보를 다 알고 만들어진 미혹의 문화이기 때문에 한 번 빠지면 하나님이 건져주시기 전에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늘에 속하고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자는 세상이 손을 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승리자임을 믿고 늘 말씀과 기도로 충만하여 세상이 주는 어떤 미혹도 다 이기고 승리자로서 하나님 앞에 우뚝 설 수 있는 장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제 목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본 문 로마서 321~26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위인들 그리고 영웅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삶으로 역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삶으로 후세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다른 위인들과 영웅들처럼 위대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셨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보다 죽음으로 역사에 더 큰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삶보다 죽음으로 후세의 사람들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계십니다.

 

지난 42일 개봉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는 미국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326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텍사스 주 남부에 숨어 살던 한 살인범이 이 영화를 보고 경찰에 자수했다는 것입니다.

21살 난 댄 리치라는 남자는 임신 중인 여자친구 애슐리 윌슨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지난 17일 노끈으로 목을 감아 질식사시켰다는 것입니다. 목매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뒤에 숨어 지내고 있을 때 이 영화를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면서 죽으시는 그 장면을 보고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스스로 경찰서에 나와 자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사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놓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 역사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까요? 그 죽음은 특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해 오신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그 죽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고난주간을 맞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무엇을 하시고자 하셨나?” 잘못하면 진부한 질문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답은 이미 주일학교 때부터 익히 듣고 잘 안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지고 그 답을 머리로 가슴으로 손과 발로 다시금 깊이 찾게 될 때 고난주간을 경건하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읍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길을 여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놀라운 상황 변화를 나타내줍니다. 지금 이전의 상황과 지금 이후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바뀐 상태를 말해줍니다. 오랜 가뭄 끝에 단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제는입니다. 캄캄한 어둠 끝에 여명이 밝았기 때문에 이제는입니다. 고속철이 개통되어 교통 흐름의 대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이제는입니다.

 

그러면 본문에는 도대체 어떤 상황 변화가 생겼기에 이제는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먼저 변화 이전을 살펴보겠습니다. 1:18-3:20은 긴 논증을 통해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명처럼 받들던 율법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상황 가운데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길이 없었지만 이제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지금의 마포대교가 없었습니다. 마포가 버스나 그 옛날 전차의 종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포종점이라는 노래도 생길 정도였습니다. 저 강 건너 여의도에는 공군에서 운용하던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큰 형님이 거기서 군복무를 하셨는데 늘 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초등학교 때 마포대교가 놓였습니다. 강이 가로막아 마포에서 여의도로 영등포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마포에서 여의도로 영등포로 건너갈 수 있게 됐습니다. 여의도에 비행장이 사라지고 대대적인 개발이 시작되어 국회의사당도 생기고 서울의 맨하탄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마포 대교가 개통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가 잔치를 벌이고 좋아했습니다. 길이 열리며 놀라운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가로막아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정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길을 여신 것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요 14: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 리치라는 도망자는 길이 없었습니다. 애인을 살해하고 일단 법의 처벌은 피해 도망은 쳤으나 그 다음 길이 없었습니다. 특히 무거운 죄책감을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무거운 양심의 고발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준엄하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여신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이제는이라는 말로 열린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기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왜 길을 여신 것이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20절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대체로 인정합니다. 일반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달려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같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덕을 쌓으면 그것이 지은 죄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은 죄보다 선행을 더 많이 하면 지은 죄를 덮고 천국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도, 심지어 정통파 유대교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영국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해스팅스 전투에서 정복자 윌리엄이 당시 영국와 해롤드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무고한 수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정복자 윌리엄은 양심의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죄를 씻는 의미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특히 전투 현장에 교회를 세우면서 해롤드 왕이 죽은 그 자리에 가장 높은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 자신의 죄를 보상하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게 가르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느냐 입니다. 한 마디로 "No!"입니다. “Never!"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행해도, 아무리 공을 세우고 덕을 쌓아도 우리가 지은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100가지 교통법규를 다 잘 지켜도 철저하게 준수해도 한 가지 어기면 스티커를 발부받습니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안 보는 데서도 다 잘 지켜왔다고 주장하고 증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칭찬받을 지라도 죄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죄는 죄대로 따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유대교가 율법을 가르치고 그 율법을 잘 지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다만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할 특별한 선물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의 의로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저지른 죄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의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나타내기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수영을 그렇게 잘하지는 못합니다. 한강을 건너갈 정도가 못됩니다. 그런데 수영선수들은 한강을 쉽게 왕복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맥주병처럼 들어가자마자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 해도 인천 앞바다에서 중국으로 수영해서 건널 수는 없습니다. 중국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합니다.

 

사람의 의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어도, 남달리 많은 선행을 하고 덕을 쌓아도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 가고자 할 때 배를 타는 것처럼 우리의 의가 아닌 다른 의 곧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선물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셋째,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면 우리 사람의 의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의롭게 될 수 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의 의가 내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의로 하나님 앞에 죄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셨던 것처럼 오늘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21장을 보면 주목할만한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죽을 고생을 마치고 이제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돔 족속이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멀리 동쪽으로 우회해서 가야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는 모압과 암몬 그리고 아모리 족속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도 속이 상했습니다. 21:4를 보면 저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셔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밖의 해결책을 제시하셨습니다.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자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방법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을 때 저들이 가진 것 다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그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족속들에게 가서 착한 일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솔로몬처럼 일천 번제를 드린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해결책은 단 하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보자 정말 그들이 나았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것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이 예수의 피로 너희들의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면 그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게 되고 그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놋뱀을 본다고 뱀의 독이 치료가 되겠느냐고 따지면 그 독으로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내 죄를 해결할 수 있느냐가 따지면 죄로 심판받고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믿고 놋뱀을 쳐다볼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가 저들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을 의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재작년에 미국 뉴욕에 갔을 때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WTC)에 갔었습니다. 그곳에 철골로 십자가가 우뚝 세워져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건물이 무니지면서 철 구조물 일부분이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이것이 땅에 떨어졌는데 꼿꼿하게 땅에 그대로 박혔다는 것입니다. 시신을 수습하던 구조대원들이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남은 자들에게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작은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저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현대 문명의 한 복판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준엄한 음성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오직 길은 십자가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가?” 그 의미를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주간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 만 아니라 이제 십자가를 지고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봉수 목사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 2 (계 13:12)

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오늘은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두 번째 시간으로 ‘세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약에서 세상을 '코스모스'(kosmos)라고 하는데 인공위성 중에 코스모스 위성도 역시 그런 의미로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코스모스의 성경적 의미는 약 세 가지로 보이는 물질세계, 혹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 혹은 세속적인 타락한 문화 등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에서 많이 말하는 세상이란 주로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란 사탄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인간들의 악한 마음이나 타락한 이 세상 문화 등을 가리킵니다. 여기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바로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한 짝을 이루는데 오늘도 그 관계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계속하여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4. 세상은 잠자던 인간의 죄악성을 깨우고 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12절 상 반절“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여기 먼저 나온 짐승은 무얼까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나온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이 추구하는 것들을 이 세상이 다 펼쳐 보여줍니다. 그런데 권세라고 한 것은 그 미혹성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전시효과가 대단합니다. 이걸 일반인에게 보주면 동심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와 같이 거기에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이 불야성을 이루며 모두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추구하는 것들이 다 있습니다. 돈만 가지고 오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 눈을 파버린 사람도 있고 손을 잘라버린 사람도 있고, 산 속으로 멀리 들어가기도 합니다. 꼭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 만큼은 하나님게서 알아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사탄이 건설한 타락한 문화로 가득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미혹하려고 했듯 세상에는 의식주는 물론 천하만국과 그 영광과 권세 명예와 부귀영화 인간의 쾌락과 방탕 등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다 적나라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영상매체의 발달로 세상이 안방에까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이 잠자던 인간의 죄악성을 깨워 타락의 길로 이끌어낸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뭔지도 모르던 사람에게 세상에 눈을 뜨게 합니다. 돈에 눈을 뜹니다. 돈 때문에 그 좋던 인심은 사라져 삭막해지고,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 이상한 짓까지 합니다. 타락에 눈을 뜹니다. 모방범죄도 생겨납니다. 세뇌되기도 하고 의식화되기도 합니다. TV에서 매일 보여주는 세속적인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 드라마는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한 사탄의 도구들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반항하고 불순종하고 욕설과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동성애가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동성애를 배워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감사한 마음도 없이 반사회적 반국가적인 인물로 자라게 되기도 합니다. 혹은 매체에서 자꾸만 선전해 주니까 잘못된 이방종교와 이단도 친근해지고 귀신의 영을 따라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여 잠재한 죄성이 깨어 따라가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땅에서 나온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5. 세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오로지 육신을 위해서 살게 합니다.


12절 중반 절“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여기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은 누굴까요? 넓게는 세상 사람, 좁게는 육신에 속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처음 짐승이란 역시 우리 육신이나 육신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크게 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우리 마음에 호소하므로 자기 육신적 쾌락을 위해서 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타락한 세상에 산다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물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라 했습니다. 맹자 어머니가 맹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이사를 세 번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신사임당과 같이 중국에서는 맹자의 어머니가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습니다.

 
먼저 살던 곳은 묘지였는데 맹자가 매일 묘지에서 장례하는 것만 보고 공부는 하지 않고 아이고 아이고 장례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이래서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시장으로 이사하자. 그랬더니 이번에도 공부는 하지 않고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해서 학교 글방 근처로 이사했더니 거기서 맹자가 아이들을 공부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이 미혹력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장 좋은 피난처는 교회이고, 다음은 가정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풍조를 막아주는 방파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 잘해야 합니다. 교회에 세속이 틈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은 서로 기도해 주며 돕기도 하고 감독의 기능도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로 인해 함부로 못하고, 부모는 자녀로 인해 조심하며, 부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깥세상 역시 우리가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소돔으로 이사했던 롯을 보세요. 의인 롯이 한 번 잘못 판단했다가 얼마나 손해를 보았습니까? 벧후2:6-8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세상에 만연한 죄 때문에 마음 상했습니다. 의인 롯이라 한 것을 보면 롯이 타락하진 않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세상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우리를 부추겨 육신을 위해서 살라고 미혹합니다. 그래서 빌3:19에 “저의 신은 배요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것이 바로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더라는 의미입니다.


6. 세상은 우리가 말씀 떠나 무디어진 양심을 환영합니다.


12절 후 반절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여기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란 누구를 말한 것일까요? 14절을 참고하면 후자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짐승이 죽게 될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가 나았습니다. 14절에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칼이 무엇일까요? 칼은 말씀이나 신앙양심입니다. 히4:12-13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칼에 상했을 때는 세상이 미혹하지 못했는데 이제 나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미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늘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 죄도 죽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을 때는 세상은 미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교회를 점점 멀리하고 죄를 한 번 두 번 짓게 되고 그러다가 점점 양심이 무디어져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될 때 본격적인 타락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119:9-11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87세 때, 알렉산더 메즈어라고 하는 분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가 아니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는, 하나님이 아니면 원하는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전도자를 내게 백 명만 주십시오. 그 사람이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관계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지옥의 문을 부술 수 있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먹이면 그런 사람이 됩니다. 얼마나 잘 먹이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딤후3:15-17에 “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고 했습니다. 말씀 떠나고 교회 떠나면 하나님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서 잠자던 죄악성은 살아나고 더욱 타락하게 된다는 사실 꼭 기억하시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더 가까이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십자가의 길, 영광의 길

요한복음 12:20-33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아 예배에 참석하신 교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아주 특별한 내용입니다.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신 주님은 특별한 면담요청을 받습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전해주는 내용은 특이하게도 헬라인들이 주님을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은 다짜고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헬라인들의 면담요청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헬라인들은 그리스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월절과 같은 명절에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꼭 유대인들만 온 것은 아니고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유대인들을 흠모했던 이방인들이 함께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보면, 헬라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온 것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방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셨지만 그들의 관심사항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고 다른 일정도 다 잡혀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왜 만나자고 했을까요? 만나서 무슨 말씀을 나누었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헬라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하고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요?

훗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2:9-11)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영광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에서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라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본체를 회복하시는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이 세상의 영광을 쟁취하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종려주일에 많은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환영을 하고 자기 옷을 길에 펴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것이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왕이 되는 세상의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으셨지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영광을 뒤로 하고 로마군인들에 잡혀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군중들의 환호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바뀌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다음의 부활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실 영광을 생각하심으로 끝까지 고통과 수치를 참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영광을 기대하며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생각하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도들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영광 속에 동참하고 주님이 받으신 영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헬라인들의 면담요청을 받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모든 사람들, 그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들을 보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달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면담요청을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하나의 사인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기를 다시 한 번 다짐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길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27절을 보면, 주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이 참으로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번역합니다.

이 시간을 면하게 해 달라는 간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렬해지고 할 수 만 있다면 이 잔을 면하게 해 달라는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간구대신에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 구원의 방법을 완성하라는 뜻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가고 그 십자가를 담당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주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기로 다짐합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속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속에 부족한 모습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내 뜻, 내 목적, 내가 바라는 일을 위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간구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을 내 이익을 위한 도구로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이루어주시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으면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옵니다.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을 주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말씀과 내용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나의 신앙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보다는 하나님,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 내 생각보다는 주님의 생각을 먼저 앞세우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면 필요한 것은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시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24)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야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

이러한 말씀은 영광을 얻는 것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광을 얻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이기거나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독교의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은 놀랍게도 십자가와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빌립보서의 내용을 통하여 앞부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영광을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본래적인 신분을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 곧 하나님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2:7-8)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시인하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복종하시고 희생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비결이셨고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인줄 믿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이미 주님이 지심으로 끝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잘 감당하고 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그 길이 어렵고 힘들지만 끝까지 붙잡고 나아갈 때 영광이 주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6절에서 주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는 말은 주님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나도 걸어간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고 주님을 본받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면 그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고 험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길은 따라가는데 내가 원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길은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가운데 주의 길을 가리가 있습니다.

1.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2.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1절에서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이라고 노래하면서

그러나 2절에 가서는 이 길을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라 가는 길은 처음에는 고난의 길같이 험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길은 끝내 승리의 길이 되고 영광의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고 주님 걸어가신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미 에콰도르의 아오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목숨을 잃은 짐 엘리엇이 학창 시절 큐티를 하며 묵상한 내용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세상엔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오히려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한다.

젊음도 지나가고, 명성과 쾌락도 지나가고, 아무리 많은 물질도 결국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저를 불태워 주옵소서.”

하나님을 위한 고난과 십자가의 삶은 괴롭고 힘들어도 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는 영광의 길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기쁨으로 감당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03.17.)

죽고자하면 살리라 요12:20-32, 행7:54-60
요즈음 방영되는 고려 거란 전쟁을 보면서 흥미를 위해 과장한 내용도 있겠지만 현종이 훌륭한 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되고, 현종을 곁에서 잘 보필한 강감찬 모습을 보면 죽기를 각오하고 거란 군과 대항하여 대 승리를 가져 온 내용이 큰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도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자들은 추한 모습으로 결국 죽음을 자초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왜적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배를 가지고 막강한 수군을 자랑하는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必死則生(필사즉생),必生則死(필생즉사), 즉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전선 12척으로 왜선 133척과 맞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장수들을 소집한 충무공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투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그러한 말로 군사들을 독려했습니다. 현종이나 감감찬의 자세, 충무공의 말은 영적 싸움터에 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성도들의 영적 싸움은 총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세상이라는 영적 싸움터에서 세상의 전투처럼 눈에 보이는 적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영들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싸움입니다.
세상의 전투는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살아남지만 영적 전투는 먼저 내가 죽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고,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 같이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야 좋은 군사가 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은 먼저 고된 훈련을 통과하고서야 군인다운 군인으로 준비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 받은 사람은 먼저 죽음을 통과해야 강한 군사로 싸우게 됩니다. 예수께서 ‘죽어야 산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옛 사람이 죽은 사람은 내 욕심, 자존심, 자만, 자랑, 이기적인 마음, 공명심, 내 마음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틈만 나면 뒤집혀 올라오는 수많은 상처들, 그리고 더럽고 부끄러운 죄성까지...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노라.’ 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죽고자 하면 살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복음서 본문의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며칠 동안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말씀 중 일부입니다. 마침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겠다고 왔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의 죽음을 여러 번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죽으실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그가 "영광을 받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제자들은 이 가르침에 대해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는 것이 어떻게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피치 못할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것도, 죽음의 처절한 현실을 감추려는 것도, 죽음을 부인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큰 고통이 따르는 죽음을 싫어 하셨고, 번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인류에게 죄 사함을 받는 길도, 구원 받아 영생에 이르는 길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은 죄인 된 우리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효과를 밀알에 비유하셨습니다. 밀 알 하나가 땅속에 들어가서 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속에 떨어져 죽고 썩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때 새로이 싹을 내고 자라서 수많은 밀알을 맺습니다. 그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의미와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고구려 시대에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북극 추운 지방에서 얼음과 눈 속에 사는 에스키모인 들에게도 고려장과 비슷한 풍습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고민합니다. 그들의 풍속에 따라 연로한 어머니를 추운 얼음집 바깥 얼음 위에 업어다 놓을 때가 되었는데, 또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성화인데 이 아들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 미루고 미루다 어머니의 거역할 수 없는 엄한 분부에 따라 어머니를 업어다가 눈밭에 앉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그러지 말고 집으로 가시자고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호소합니다. 이 때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곰의 밥이 되지 않으면 곰이 굶어죽고 곰이 굶어 죽고 없어지면 너희들 나의 자손들은 먹고 살 식량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오래 전부터 이렇게 얼음 위에서 곰의 밥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곰은 이 추운 겨울에 사람 고기 외에는 다른 먹을 것이 없고 사람은 곰 고기 외에 먹을 음식이라고는 없는 곳에서 생긴 풍속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이 많은 늙은 부모가 자식들의 음식이 되기 위해 곰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주께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역설적인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런 의미를 넘어 성경의 예언대로, 주께서 이미 말씀 하신 대로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입니다. 이어서 승천의 영광,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고난 없는 영광은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옛 사람이 죽음으로 다시 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믿음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2.예수님은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참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서 본문 25절에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자기 생명’은 ‘프쉬케’란 단어로서 현재 우리 몸의 생명을 뜻하고, ‘영생’은 ‘조에’로서 ‘영원한 생명’곧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육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은 고행이나, 자기 자신을 학대하거나, 자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를 처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고 했는데,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부자 관원이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목적도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서 인 것을 주님은 아시고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제자들도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너희는 너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모른다고 하시며,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되 물으셨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마치 장작불과 같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욕구가 만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욕구가 만족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이 행복과 불행은 모두 육체의 욕구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먹고 싶은 욕구, 입고 싶은 욕구, 가지고 싶은 욕구, 이기고 싶은 욕구, 높아지고 싶은 욕구, 명예를 얻고 싶은 욕구 등 욕구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욕구는 마치 장작불과 같은 것입니다. 장작불은 타면서 더 많은 장작을 필요로 합니다. 장작을 집어넣으면 불이 더 커지고, 불이 커지면 장작을 더 필요로 합니다. 우리 욕구도 만족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점점 커지는 것인데, 그것이 욕구의 성질입니다. 그래서 욕구를 채워서 얻은 행복은 금세 더 큰 욕구가 생겨서 사라지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으로 가득찼던 사울이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면서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므로 주님을 따르는 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미워한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최고의 학문을 배운 지성인이었고, 사회적으로는 공회의원이라는 막강한 권세를 가졌고, 당시 특권중의 특권인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편안하게 권세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유력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그동안 자신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믿는 자들을 박해한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이고 죄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특권과 세상적인 영화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지금까지 누렸던 세상의 것들을 잃은 것에 대하여 하나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 받는 영원한 하늘의 상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 역시 장차 받을 하늘의 상급을 소망하며 죄악의 낙을 누리는 애굽 왕자의 지위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핍박과 고난이 오는데 성도가 육신의 생명을 사랑하여 죄악과 타협하지 말고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주의 진리를 좇아 살면 진정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육의 소욕을 버리고 참 생명과 하늘 상급에 소망을 두고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스데반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찬란하게 별처럼 빛나는 신앙인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자신을 돌을 들어 치는 무리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는 천국의 문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스데반을 응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던 성도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피하면서 주님의 분부대로 흩어져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말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고, 주님 닮은 삶으로 주님을 증거 했으며, 죽음으로 생명의 주님을 증거 함으로 죽기까지 충성한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사울을 비롯한 수많은 죄인들이 옳은 데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본받은 순교자들이 거룩한 피를 흘린 터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일제가 식민정치를 하던 시절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기독교계가 이에 항의하고 거부하자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말로 회유하며 선동하였고, 이에 많은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끝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사람 중에 하나가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던 주기철 목사님으로, 그는 신사 참배를 정면으로 항거하다가 일본 순사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탄압을 받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수를 버리고 내가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하며 ‘일사각오’ 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결국 1938년 평양 감옥에 투옥되어 5년간 옥살이 하던 중 1944년 감옥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 직전에 쓴 고난의 명상록이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내가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영광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대답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으리이까?” 하는 명상록입니다.
기독교 백년이 좀 넘는 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세계의 제일가는 기독교 국가가 된 우리나라의 신앙의 축복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된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자의 흔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교의 피의 흔적을 기억하시고 은혜와 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한국교회 성도를 부러워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려면 한국인 목사님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믿음위에 세워진 신앙의 흔적입니다.
순교의 흔적은 지워 지지 않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순교자 스데반의 흔적은 세계의 복음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순교자 스데반 이라고 호칭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세를 맞이하여 점점 믿음의 열정이 식어가고, 믿음이 떨어 져가는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살기를 힘쓰는 것 박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스데반의 믿음을 본받아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죽고자 하면 살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참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스데반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아멘.
<2024. 03. 08.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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