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어지는 일곱 대접 9 (계 16:21)

21.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이제 마지막 일곱째 천사의 대접 중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영국의 한 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는데 길목에 2개의 꽃병이 놓여있었습니다. 하나는 도자기에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있고 예술품으로서 그 자태가 출중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도자기는 우선 외모가 볼품이 없어 빛깔조차도 흐릿하고 가치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안내자에게 “이 도자기는 왜 이렇게 윤기가 나는데 저 도자기는 왜 저렇게 볼품이 없는가?” 그러자 안내자는 “이 윤기 나는 도자기는 불에 구워졌기 때문이고 저 도자기는 아직 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윤기가 나질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도자기가 불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직 흙덩이일 뿐이듯 우리에게 하나님의 고난의 연단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대접재앙의 진리가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출 9장에 나타나는 7번째 재앙인 우박재앙과, 또 하나는 수 10장의 태양이 머무르고 달이 머물렀던 아모리와의 전쟁이 그 배경입니다. 바로 왕은 모세를 통해 베풀어지는 열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모리와의 전쟁 역시 수10:11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고 했듯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우박 재앙 역시 이스라엘이 승리했던 큰 이유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내부에 있는 바로 왕과 같은 세상과, 또 아모리의 다섯 족속과 같은 육신적인 마음이 있을지라도 고난의 대접을 받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꺼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하여 고난의 은혜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6. 나를 감추며 피하게 됩니다.


21절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리매” 여기 한 달란트란 34kg에 해당하는 무게입니다. 이렇게 큰 우박이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손톱만한 우박이 쏟아져도 파농 할 정도로 피해를 주는데 이 큰 우박이 엄청난 운동 에너지를 갖고 쏟아진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아모리의 다섯 왕이 굴에 숨은 것처럼 굴밖에는 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이처럼 진짜 고난의 징계를 받으면 두려워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서 내가 나타납니까? 어디서 함부로 내 목소리를 냅니까? 어디서 내 감정 냅니까? 내 자랑 그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 두려워서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만 따릅니다.


계 6장의 여섯 째 인 재앙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계6:12-17에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인재앙은 성령의 인침인데 우리 체험으로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깊어질수록 경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고난의 대접재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나타나지 않도록 철저히 나를 감추게 됩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니까 날뛰지 하나님을 바로 알면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느냐?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12:6-8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미국의 빌리그래함 목사의 가정교육은 엄격한 것으로 소문나 있는데 그에게 안네 로츠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의 어렸을 때 잘못을 저질러서 어머니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 안네는 “엄마.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놈이 잘못하게 했어.”하고 둘러댔습니다.


그러자 루스 여사도 지지 않으려는 듯 “오. 알아. 그래서 나는 그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하면서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두 시간 뒤에 딸이 또 잘못을 저질러서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 딸은 얼른 “엄마. 마귀란 놈이 벌써 내 속에서 밖으로 도망갔어.” 딸은 이렇게 애교로 매를 피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잠13:24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했습니다. 이 자녀교육의 교훈은 지금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속담에 “오늘 바르게 교훈 받고 단련 받지 못한 어린이는 내일의 죄수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훈계와 징계가 그렇게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7. 아직도 미완성인 자신을 인정하게 됩니다.


또 21절 하반 절에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참으로 기이하죠? 일곱 인재앙도 끝나고, 일곱 나팔재앙도 끝나고, 일곱 대접재앙의 마지막 부분인데 아직도 악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완성되어야 할 시점인데 왜 남아 있을까요?



그러나 이 지상에서 인간의 완성이란 없습니다. 자신을 완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을 가진 그 자체가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완전이란 하나님처럼 완전해야 완전이 아니라 자신이 또 얼마든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악한 존재임을 깨닫고 늘 근신하는 그런 의지하는 신앙자세를 갖춘 그 모습 그것을 바로 완전으로 보신다는 말입니다.
 
사람 인(人)자에 대한 한자풀이도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대는 그 모습이 바로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온전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늘 겸손하고 근신하는 그런 역설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어도 조금만 하나님을 멀리하고 방심하면 곧 넘어지고 시험 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기 약점을 알고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근신하는 삶 그 삶이 바로 완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잠시 방심하여 믿음에 게으르면 우리 죄가 먼저 소리 지르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민32:23에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체해도 하나님을 멀리하면 넘어지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고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쌓였다가 폭발하기 때문에 문제가 터지면 메가톤급입니다.



그래서 말 못하는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누구에게든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어떤 분도 노년에 치매가 왔을 때 교인들을 마구 욕하더라고 하지 않습니까? 해명도 못하고 속으로 참았던 것이 쌓이고 쌓이다 신앙이 충만할 때는 사라졌다가 잠시 방심할 때 깊은 병이 되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약5:4-6에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대항하면 농토나 일자리를 빼앗길까봐 때로는 부인까지도 빼앗기는 수모를 참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 농민의 봉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이 들고 일어나면 거의 폭동 수준입니다. 이 약점을 교묘히 이용해서 정권을 잡은 자들이 공산주의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근신하지 않으면 우리 속의 죄악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옛날 어둠의 세계에서 한 가락씩 한 사람들은 더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이 떨어질 때 그 잔재가 들고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안전장치를 달아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의 징계입니다. 우리는 그런 고난 속에서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119:67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신학적 지식으로 풍부해도 하나님을 멀리 하면 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어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나를 감추고 근신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 안에서 의로운 것이지 예수 떠나면 죄투성이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더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대접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최후의 은혜입니다. 이런 고통을 당하고도 끝내 깨닫지 못하면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은혜 가운데 나를 더욱 낮추고 숨기며,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더 회개하고 더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온전하고 참된 믿음 가운데 들어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벨릭스 앞에서의 바울의 재판   사도행전 24:1-27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샤랴로 호송이 됩니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벨릭스 총독에게로 호송이 된 바울은 거기서 3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먼저는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벨릭스의 후임인 베스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일이고, 세 번째는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는 일입니다. 오늘 읽은 24장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던 기록이고, 25장은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는 재판기록이고, 26장은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는 기록이 되겠습니다.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재판 과정에서 2년동안 감옥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다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핍박과 고난과 역경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돌에 맞고, 쫑겨다니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정말 수없는 많은 일들을 배웁니다. 그러나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이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휴식과 기다림과 인내를 배워야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1절부터 재판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옮겨 가는 중에 40명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만 대제사장과 장로 무리들은 가이사랴까지 와서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면서 재판을 합니다. 이때 더둘로라고 하는 말을 대신하는 변론사까지 대동합니다. 요즘의 변호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더둘로가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3가지로 고소를 하면서 아첨을 합니다.

 

2-4,

3가지 죄목으로 고소를 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을 소요케했다는 죄목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바로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고소를 합니다. 세 번째는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5-9까지 나와 있습니다.

 

아마 이 세가지 중에서 로마 사람들을 거스렸던 말은 소요를 일으켰다는 말일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소요가 일어나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죄목은 성전을 모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변론사 더둘로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염병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전염병을 가진 사람처럼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전염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영향력을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을 가든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더둘로의 변론에 대하여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줍니다. 당신도 당신 자신을 변호해 보십시오. 10-13절이 바울이 변론하는 내용입니다.

세가지를 이 부분에서 배울 수가 있는데 더둘로의 말과 사도 바울의 말이 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벨릭스에게 하는 말이 틀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재판장에게 존경하는 말을 씁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런데 3절에 보니까 더둘로의 말을 보십시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그냥 존경하는 재판장님 대신에 굉장히 아첨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이 재판장을 부를 때 재판장으로서의 예의와 존경을 표시하지만 더둘로와는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시편 12:3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사람은 언제나 말에 과장이 있고 거짓된 아첨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한 언어를 씁니다.

 

다음으로 더둘로의 고소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바울이 아주 논리적으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10-13에 보면 '당신이 아시듯이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온지가 열흘밖에  안됐다는 것입니다. 또 성전에서 내가 변론한 것을 누구도 본 일이 없다는 거에요. 누구와도 변론을 안했기 때문에. 회당에서도 내가 당신들이 고소하는 것처럼 소요를 일으키고 변론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증거가 실제로 그 사람들이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 없으니까. 이렇게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딱잘라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또 좋은 점은 자기가 한 것은 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세가지를 그가 인정을 합니다. 나는 내 조상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 말은 했다는 거에요. 나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 다시 말하면 구약의 성경을 믿는다. 세번째 나는 의인과 악인이 부활할 것을 믿는다. 라고 선언을 합니다. (14-15)

사도 바울의 고백은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이렇게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믿고 부활을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죄가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천부장도 그 유대인들의 소요 속에서 바울을 뽑아 내었을 때 아무리 바울을 조사해 봐야 바울에게서 체포할 만한, 그리고 감금할 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470명의 군인으로 가이사랴로 호송을 시켰던 것이 바로 바울의 죄목이 뚜렷하게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법정에서 '예스' ''를 아주 분명하게 했습니다.

 

세 번째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6절입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낀 것이 없다'

자기가 재판 앞에 섰는데 거짓말을 하거나 상황을 좀 바꾸거나 이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꿉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말하고, 그런 것을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하면 그 순간은 피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은 피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순간을 피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하여 순간의 거짓말과 아첨과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자기가 던진 그물에 자기가 걸립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장한 최후의 보루를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양심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양심에 있어서 시꺼먼 양심. 어떤 사람은 양심을 부인한테 맡기고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다시 양심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양심을 가지고는 살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사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 없기를...'

 

사실은 우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다는 말처럼 부러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우리 모두가 부끄럽게 살고 있기 때문에. 큰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작은 거짓말은 하고 살고, 큰 강도는 아니지만 작은 것들은 사기를 하며 살고 있어요.

죄라고 하는 것은 들킨 죄가 있고, 안들킨 죄가 있지요.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들킨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안들킨 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아니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교도소 안갈 사람이 있어요? 다 우리는 뭔가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자기의 재판에, 자기의 말에 최후의 보루는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비슷한 말을 로마서 9:1-2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정말 내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지 이건 성령님이 아시고 내 양심이 안다.'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한다고는 하지만 그는 언제나 떳떳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왜 위대한지 아세요? 그가 남달리 열심히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는 정말 열심히 복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그는 떳떳했어요. 왜 우리는 힘이 없는가? 떳떳한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세상 앞에서 좀 떳떳했다면. 우리는 적당하게 많은 것들과 타협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힘없게 만듭니다. '세상 살면 다 그렇고 그런거다' 하면서 타협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자기가 더 많은 형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떳떳하게, 공명정대하게 내가 양심에 부끄럼 없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언제나 공명정대 했습니다. 숨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국에서 한 일을 낱낱이 말합니다. 해외에서 성도들의 구제금을 가지고 돌아온 것과 자기가 결례를 드린 것과 이런 것을 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다면 부활을 믿는다고 말한 것뿐이다.

 

21,

얼마나 그가 공명정대하게 살았는지 보여줍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은 잠을 잘 못잡니다. 괴롭기 때문에. 떳떳한 사람이 힘이 있습니다.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겼을 때 세상은 변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그런 재판을 맡은 총도이었지만 바울의 그 진실에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천부장이 쓴 편지의 내용과 벨릭스가 직접 재판을 해 보니까 바울이 한 말과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정직이 이긴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거짓은 순간을 이깁니다. 그러나 정직은 끝을 이깁니다. 오늘 이 벨릭스가 마지막 판결을 내립니다.

 

22-23,

 

바울에 관한 재판은 3심입니다. 3번 재판을 하는데 1심에 결론은 유예입니다. 결정을 안내리고 천부장이 예루살렘에서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재판이 끝났는데 바울에게는 2가지의 축복이 안겨졌습니다. 먼저는 바울에게 '무죄요' 결정이 났다면 바울에게는 살해의 위험이 있습니다. 40명이라는 사람이 먹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에 감옥 밖으로 나오면 언제 살해를 당할지 모릅니다. 형을 결정받지 않고 감옥에 있는 것은 바울 자신이 살해위험으로부터 보장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벨릭스가 '바울은 보류다' 이렇게 명령하면서 '너희는 바울을 잘 지켜라' 하면서 무엇을 주라고 했어요. '자유'를 주라고 했고, 친구를 마음대로 사귀게 해라. 그러니까 바울은 보호를 받으면서도 그 보호 아래서 자유도 누리고 복음도 전하는 그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고생을 하던 바울이 감옥에 들어간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2년동안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복음도 전하고.

 

24-25절을 보세요.

재판을 맡았던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죄수는 떳떳해요. 교만한 게 아니라, 굉장히 자신감이 있어요. 이 모습에 벨릭스 총독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불러내요. 자기 부인과 함께. 그리고 '네가 믿는 것을 얘기좀 해봐라.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드느냐.'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정직과 담대함.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3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의에 대해서, 절제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을 듣고 벨릭스가 겁을 먹었습니다. 두려워해요. 왜그래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사람이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누구냐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26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총독이 바울의 인격에 감화를 받았지만 어떻게 하면 돈을 받을까, 혹시 자기에게 돈좀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해서 바울을 자주 불렀습니다. 현대의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때의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이 총독에게는 두가지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신앙적 관심이 있었고, 돈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 아닙니까? 돈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여러분, 둘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넘어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겠다는 거 아니에요. 교회 안다닌다는거 아니에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돈을 벌고 교회를 가겠다는 거지요. 다하고 시간 남으면 교회 다닌다는거지요. 그리고는 암에 걸렸을 때에야 '그때 잘할걸' 그러나 소용없습니다. 좋은 시간은 나를 위해 다 쓰고, 마지막 헌 시간은 주앞에 드립니다. 이런 소리죠.

 

27,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소요가 무서워서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계속 보류를 하는 것입니다. 2년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이 재판을 못하고 후임인 베스도가 이 재판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떠나지만 하나님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지나갑니다. 재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30년전의 재벌이 어디있습니까?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만이 영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남은 시간, 떳떳하게 사십시오.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사십시오. 부인 앞에 떳떳하십시오. 남편 앞에서도 떳떳하십시오. 교회에서도 떳떳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영원히 그사람에게 함께 있을 것입니다.

 

짧은 세상을 사는데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이 없게 살게 하옵소서

 

부어지는 일곱 대접 8 (계 16:19-20)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이제 마지막 일곱째 천사의 대접 2번째 시간입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온 세계 사람들이 사랑한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가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사생활은 매우 문란하여 작품을 쓰는 시간 외에는 ‘타락’과 ‘방종’과 ‘술’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1841년 여름, 이 작가의 가장 사랑했던 딸이 세느강에서 익사를 당하게 됩니다.



이 작가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 딸의 얼굴을 하얀 천으로 덮으며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작가는 그 날부터 그 어수선한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경건훈련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돌아보며 불후의 명작을 집필했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입니다.


이렇듯 완악한 우리 인간에게는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고난이 그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랑, 혹은 고난의 은혜로 악이 심판을 받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먼저는 마음의 천둥번개로 가득하듯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마음에 큰 지진이 일어나 더 이상 가만 있을 수 없어 가슴 치며 회개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감동이 파문으로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계속하여 고난의 은혜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3. 마음에서 세상이 사라지고 무너집니다.


19절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여기 큰 성은 바벨론을 말합니다. 바벨론성은 느부갓네살 왕이 건설한 것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성이 크고 높고 두꺼운데다 깊은 강물이 성을 두르고 있어서 이론상으로는 무너질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다가 바벨론은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사라진 바벨론인데 왜 바벨론 성이 갈라지고 무너진다고 말씀할까요? 그래서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계시록은 미래의 전개될 세속의 역사를 말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 바탕을 둔 어떤 신령한 진리를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의 세상이 무너질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빌3:7-9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큰 성”이라 한 이유는 뭘까요? 그만큼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말이고, 또한 성을 정복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잠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일평생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할 대상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런데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건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했으며 온갖 시험거리로 성도를 괴롭혀 왔는지 하나님의 철천지원수였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세상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천국을 방해하고 우리를 복 받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7:13-14에 예수님께서 경고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셨습니다. 수억 수십억 수백억의 오고가는 많은 인생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던 이 세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갈라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몇 갈레로 갈라졌나요? “세 갈레로 갈라지고” 3이라는 숫자는 합해져 있을 때는 대단한 결속력과 능률을 자랑하지만 한 번 분열하게 되면 좀체 하나 되기 어려운 수입니다. 사업을 해도 3사람이 하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여행을 해도 세 가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4:9-12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하셨습니다. 두 겹도 튼튼한데 삼겹이면 얼마나 튼튼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벨론은 삼 겹이 아니라 세 갈레로 갈라졌습니다. 이제는 아무 능력이 없게 되었고, 도리어 다투다가 자멸하고 말 위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미혹할 힘이 없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미혹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 세상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다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하나님 앞에 완악했던 마음도 열리게 됩니다.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바벨론만이 아니라 만국의 성이 무너지는데 여기 만국의 성은 무엇일까요? 당시 만국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침략하기 위한 성이 아니라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성이엇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막혀 있어야 좋은 성입니다. 이 성벽은 크고 높을수록 좋고 견고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성이란 매우 배타적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성이 아닙니다. 만국의 성입니다.


이 말씀은 넓게는 은혜 받은 성도로 인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빗장을 풀고 변화 받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좁게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열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완고한 마음들 고정관념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토록 배워도 자기 고정관념 내려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막16:14에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돈 문제도 그렇습니다. 돈이란 쓰면 없어지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더 생긴다는 건가 하면서 의심합니다. 그러나 잠11:24-26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시기도 했다 가져가시기도 했다 고난의 연단 속에서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고난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20-21절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맹렬한 진노란 하나님의 우리의 악에 대한 노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잔이 아니라 진노의 잔, 나아가 진노의 포도주 잔입니다.



진노의 잔이라고만 해도 되는 걸 진노의 포도주 잔이라 한 이유는  포도주는 포도를 포도주 틀에서 짓밟아 뭉개어 짜서 단단한 새 부대에 담아놓으면 나오지도 못하고 꼼짝 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서 잘 발효되어 좋은 포도주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고난의 사랑이고 징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66:10-12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짓밟으신 결과 “각 섬도 없어지고” 섬은 육지에서 멀고 외로운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육지로 귀양 보내는 것보다 요한처럼 섬으로 귀양 보내는 것은 더 가혹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은혜를 받고서 더 이상 하나님을 멀리 하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부르짖게 됩니다.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아야 하는데 평안해지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인내를 이루끼까지 연단을 계속하십니다(약1:4).


그 다음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산악은 그 특징이 높고 험함입니다. 그래서 쉽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산악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더 이상 힘들지 않고 기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최고의 장애는 바로 우리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으로 섬기면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를 쉽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5:8-10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도 고난의 길을 가셨으니 우리들도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십시다. 고난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에서 세상이 사라지고 무너지며, 완악했던 마음으로 열리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더욱 기쁨으로 섬기는 아름다운 믿음의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추수감사주일설교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 (에베소서 5장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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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지난 주에 제가 이번 추수 감사절에 개인적인 감사는 각자의 몫이지만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세 가지 감사를 드려 보자고 했습니다우리 한 번 추수감사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고백해 보겠습니다.


   첫째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째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나의 주인나의 친구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셋째성령님이 나의 위로자나의 동행자나의 능력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의 박수를 올려 드립니다할렐루야!


우리가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지금 내가 살아 숨쉬고 있고지금 내가 예배의 자리에 있고지금 내 마음에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지금 내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살아있어서 감사살려주셔서 감사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모든 것이 감사감사함 뿐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에베소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마음에 감사의 마음이 충만하게 임하여서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로 영광돌리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네가지의 감사이야기를 선포하려고 합니다먼저 본문 5장 15~16절을 읽어 드립니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아멘.




1. 첫째 감사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세월(시간)을 아껴쓰고 싶지만 그런 생각을 해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금방 1년이 지나갑니다하다보면 1년이 획 지나는데이제는 어하다보니 금세 10, 2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시간이 빨라도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면 천국에 빨리 가는 것이니 좋은 것이 아닌가요라고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어떠세요시간이 빨리가면 하나님나라로 빨리 가는 것이니 기분이 좋으신가요우리에게는 이 땅의 인생도 중요하기에 육체적으로 사는 인생의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은 늘 아쉽고 미련이 많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월(시간)을 아끼라고 말하면서,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는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고 당부 합니다바울의 말에 의하면우리가 세월을 아끼는 방법은 지혜와 함께 행하는(살아가는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지혜가 무엇일까요지혜라는 문자 그대로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이런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을 발휘하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1:24)라고 했습니다바울이 말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십자가의 도가 되시는 예수님은 능력과 지혜가 되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혔습니다신자에게 지혜가 무엇이냐고 말할 때 우리는 지혜는 곧 예수그리스도이시며그리스도는 곧 능력이 되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15, 16절 말씀에서 지혜라는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지혜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아멘.”


이 악한 때에 세월을 아끼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그리스와 동행하며 매사(범사)에 어떻게 행할지를 주의하며 사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 없이 독단적으로 살아가면 세월은 허무하게도 너무나 빠르게 느껴지지만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라면 아무리 시간이 빨리간다고 느껴져도아무리 악한 세상의 모습이 보일지라도 전혀 후회도 없고미련도 없고허무함도 없이 만족함과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도 바울은 참으로 고난을 받으며 사역을 하는 중이었습니다너무나도 악한 세상에 다니면서악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습니다그럼에도 그는 세월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그에게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매일 같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능력과 지혜로 악한 세상에서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제공해 주시는 분입니다추수감사절에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의 첫째 제목은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난 한 해동안 나와 동행하여 주신 것을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감사하기 전에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제가 11월 첫째 주 설교에서 강조한 것이 회개입니다하나님은 회개 없는 감사는 결코 받으시지 않는다거짓으로 회개하는 척만하면서 감사하는 것에는 분노하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네 가지 감사의 제목들을 차례로 말씀 드릴텐데이러한 모든 감사가 있기 전에 반드시 회개를 먼저 하시고 감사로 나아가셔야 합니다첫째 감사 제목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시기 전에 내가 한 해동안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독단적으로 살아왔음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합니다감사에 앞서 지혜와 동행하기를 먼저 구하오니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동행의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이런 참회의 기도를 진심으로 드리신 후에 감사로 나아가십시오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참회도 받으시고감사도 받으실줄로 믿습니다참회 하셨으니이제는 감사의 고백으로 겸손하게 나아가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나와 동행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지금 현재도 나와 항상 함께 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앞으로 살아갈 내 미래에도 동일하게 함께하여 주실 능력과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높은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나의 감사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이런 마음을 담아오늘 추수감사절에 지혜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감사의 입술을 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를 축복합니다.
둘째 감사의 말씀은 17~18절 말씀입니다읽어 드립니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아멘.




2. 둘째 감사주의 뜻을 이해하게 하시고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리석다멍청하다바보 같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17절에서 보면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청종듣고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아무리 학력이 좋고 박학다식 하여도 주(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오직 성령만이 주의 뜻을 이해하게 도와 주십니다성령이 이해하도록 진리를 들려 주시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닙니다성령 충만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함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대표적인 것 두 가지가 술취함과 방탕함이라고 했습니다술 먹어도 구원과는 상관 없죠술 먹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없잖아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아직도 의외로 많습니다여러 곳의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지만이 구절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합니다.


술취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탕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성령 충만을 방해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주의 뜻을 이해(듣지 못하게따르지 못하게)하지 못하도록 성령이 거하시는 자신의 육체를 방탕함에 맡겨버린다는 것이 됩니다거룩한 성령의 전을 만들어도 부족한데 방탕한 자리를 만들어 놓으면 거기에 성령이 거하실 일은 결코 없습니다.


결국 술취하여 방탕함에 이르는 사람은 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그저 그렇게 쾌락의 삶에 만족하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끝내게 됩니다일평생 성령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주범이 술취함 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술 먹지 말라는 것이 성경에도 없고 구원과도 관계 없다고 하면서 계속 술을 마시려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고 바보같고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입니다술먹는 것이 성령의 일을 방해하는 것임을 듣고깨닫게 되면 알아서 술을 넉지 않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에 우리가 두 번째로 감사할 제목은, “한 해동안 술취함과 방탕함을 멀리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게 하시고그로 인하여 주의 뜻을 이해하는 은혜를 내려 주시고 순종의 삶으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이 감사에 앞서서도 먼저 참회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 한 해동안 술취함(불순종)과 방탕함(거룩하지 못함속에 살아왔음을 인정하고 참회합니다성령 충만을 구하지 아니하고 교만함으로 살았음도 인정하고 참회 합니다제가 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진심으로 참회하시면 하나님이 감사의 마음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추수감사에 둘째 감사제목을 올려 드리시면서내년 한해는 술취하고 방탕한 어리석음을 다 버리고온전히 주의 뜻을 이해(청종)하여 말씀을 듣고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성령충만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간절히 소망하시는 고백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감사 제목은 19, 10절입니다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멘.




3. 셋째 감사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하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우리가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삶을 매일 같이 살아간다면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여 주심을 생각하며 항상 찬송하며 살아간다면그 기도와 찬송의 모든 고백은 곧바로 감사함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감사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사랑과 은혜에 대해 신자들이 보이는 적극적인 반응입니다사랑을 많이 느낄수록은혜를 많이 기억 할수록 기도와 찬송은 자주습관적으로 흘러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우리가 기분이 좋으면 얼굴색이 밝아지고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 이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삶의 모습입니다매일 같이 이렇게 살 수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하지만 삶의 무게와 고민과 유혹과 시험등은 우리를 기도에서찬송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기도와 찬송이 사라질수록 우리의 삶의 피폐해지는 것을 알고도 회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그만큼 우리의 삶은 고단하고 우리의 믿음은 연약합니다.


추수 감사절은 감사할 제목이 있어서 감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절기 이지만내가 범사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이버지께 기도와 찬양으로 살지 못한 것을 아뢰고그 메마른 마음이 회복되도록 간구를 드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셋째 감사의 기도에 앞서 참회를 드리시면서 “ 하나님제가 한 해동안 기도와 찬양의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아예 잊고 살았던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그로 인해 하늘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낙심과 절망과 고통속에서 헤메이며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제가 범사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참회를 드립니다저를 불쌍히 여시고 제 입술에서 찬양의 열기가 솟아나도록기도의 기쁨이 회복되도록 충만한 은혜로 임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반드시 들으시고 기도와 찬양이 다시 들려지게 하시고그리고 감사의 마음이 항상 열리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범사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찬양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회복되고 인도함 받는 추수감사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넷째 감사의 제목은 21절입니다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멘표준새벅역으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4. 넷째 감사하나님만을 경외하며 복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드려야 할 감사의 제목은 그리스도를 경외(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살아오게 하시고서로가 그리스도에게 복종(충성헌신제자의 길)하며 살아가게 하신 것을 감사드리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감사를 드리기에 앞서 참회를 먼저 하시면서, “하나님 지난 한 해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했으면서도 정작 주인을 주인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주인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고 따르지 않았으면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말씀에 복종하기는커녕말씀을 거부하고멀리하고피해 다니기에 바빴습니다저의 공경심 없음과 두려워함 없음과 충성되고 헌신함이 없음을 인정하고 고백하오니 저의 불순종과 교만의 행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진심으로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은 불순종을 고백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서 복종하기를 다짐하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평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그리고 참회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감사의 자리로 나아오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복종하는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참된 그리스도인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충본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 일겁니다예수님만을 따라가며 헌신하고 충성하고 순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 경외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외라는 말은 공경한다와 두려워 한다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먼저 공경한다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드림으로 완성이 됩니다공경심이 넘치는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 자세를 지니고 흐트러지지 않는 품위와 거룩함의 언행을 실천해 나갑니다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진실로 공경심이 풍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두려워 한다는 것은 한 눈팔지 않고 예수님(진리)만을 따라가는 것으로 나타나납니다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보다 앞서지 아니하고 언제나 낮은 자세로 겸손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11월 첫주에 예수님에게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는 말씀을 들으면서온유의 반대말은 완악함(목이 곧음)이고겸손의 반대는 교만이라고 했습니다두려워하는 사람은 완악한과 교만이 줄어들고 온유와 겸손이 몸에 베여 가는 성숙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경한다는 말 한 마디면 예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 누구인지를 평가하고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우리 모두가 추구해야할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공경임을 잊지 마십시오.


추수 감사절에 넷째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면서, “하나님 내년 한 해는 올해 보다 더욱 공경하는 마음이 커지고 많아지고 강건해지도록 저의 연약함 믿음을 붙들어 주옵소서경외함이 내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리게 하셔서 삶의 예배자로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간절한 소망으로 아뢰시기를 바랍니다그렇게 하시면 우리 주님이에게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기회를 주셔서 경외함이 풍성함으로 더욱 큰 감사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내가지 감사 제목을 함께 들었습니다.
   ① 지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② 주의 뜻을 이해(청종)하도록 성령충만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③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④ 하나님을 경외하며 복종함으로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 합니다.


이 네가지 기도를 참회와 함께 드리실 때에추수감사절 뿐만 아니라대림절을 지나 내년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감사함으로 인도함 받는 복된 은헤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이 예수그리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려는 마음을 꼭 붙잡고 지나간 한 해를 뒤로하고 소망의 한해로 힘차게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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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우리 모두의 입술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도록 고백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주신 마음이 변하지 아니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부어지는 일곱 대접 7 (계 16:17-18)

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이제 마지막 일곱째 천사의 대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해를 돕는 이야기를 하나 드리면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요 조각가로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을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에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속의 악이 철저히 심판을 받아 제거되어야 합니다. 하나라도 남겨두면 하나님의 걸작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에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재앙입니다.


즉 입곱 인은 기도를 통한 성숙과정을 말한 것이고, 일곱 나팔은 말씀을 통한 성숙과정, 그리고 일곱 대접은 예수님의 고난의 사랑 혹은 징계의 연단을 통한 성숙과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앙이라고 말한 이유는 우리 속의 악이 말씀과 기도 속에서 심판을 받아 척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하는 좋은 심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대접재앙은 그 심판 중의 맨 마지막 재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완성을 위한 최후의 척결을 말합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는 본문에서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운명하시던 그 때의 광경을 연상합니다.


요19:30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하셨고, 마27:51-52에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하신 말씀과 얼마나 흡사합니까?


그런데 이 일은 일곱째 천사가 어디에 대접을 쏟을 때 일어난 일입니까? 17절에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공중에 쏟았습니다. 마지막 대접재앙을 마감하는 완성의 의미로서 과연 공중이 무엇이기에 이런 십자가의 최후의 순간이 여기에 오버랩 될까요?

 
그동안 대접을 쏟은 장소를 열거해 보면 첫 번째는 땅에 쏟았고, 두 번째는 바다, 셋째는 강과 물 근원, 넷째는 해, 다섯째는 짐승의 왕좌, 여섯째는 유브라데강 그런데 마지막 일곱째는 공중에 쏟았습니다.

성경에서 공중은 바로 사탄의 권세가 활개 치던 그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 공중이 보이는 하늘이냐? 아니면 세상 영계냐? 아니면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리 인간의 변화 성숙관점에서 본다면 물리적 하늘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공중이란 사탄의 활동영역이라는 곳이고, 또 사탄은 사람들 생각 속에서 역사한다는 점, 그리고 사탄의 지배 즉 왕국 역시 천국처럼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인간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 혹은 생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생각을 떠나서 무얼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의 타락이란 결국 생각의 타락이고, 세상의 말세란 곧 사람들 생각이 악해졌다는 것이고, 믿음의 성장 역시 내면적인 것이지 외면이 아닙니다. 즉 우리 내면에서 땅이 우리 육이라면 하늘은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생각은 사탄에게 무방비로 내어주었던 활동영역이었습니다. 이제 이 부분까지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골3:9-10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했습니다. "지식에 까지"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조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생각을 악으로 조정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생각을 주관하시지만 사탄도 우리 생각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대접재앙은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하므로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갈망하는 마지막 성화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후10:3-5에서는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도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엡4:13-14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럼 악의 생각이 심판을 받은 그 영적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18절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하늘의 천둥번개가 내리칩니다. 이처럼 은혜 받은 마음의 하늘에도 천둥번개가 칩니다. 천둥번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경외하고 두려운 줄 아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죄가 이렇게 두려운 줄 알게 됩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천둥 번개가 요란하고 나팔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 떨었는데 천둥번개는 바로 하나님 두려운 줄 알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을 경건이라, 경외라고 말합니다. 우리 문란한 생각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바른 믿음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면 어떻게 함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5:7에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하면서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8절)고 말씀합니다. 악행을 볼 때 하나님은 뭐하시는가 그러지 말고 우리 위에 더 높은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촛불”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러시아에 농노제도가 성행하고 있을 때, 악마 같은 감독관이 있어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무고한 사람에게 쇠고랑을 채우기도 하고, 또 농노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 집의 하녀로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누군가 참다못해 반항을 하면 그 반항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이러다보니 마침내 농노들 사이에 이런 공론이 났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 감독을 죽여 버리자, 몰래 죽여 버리자,”고 막 합의가 되려던 참이었는데 딱 한 사람, 표트르 미하일로프라고 하는 사람이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참고 당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실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악질 감독을 죽이는 것을 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쉬고 즐기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을 하는 날인데도 이 악한 관리인은 부활절에도 농노들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평과 불만 속에서 마지못해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하일로프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쟁기질을 하였습니다.


그는 움직이는 쟁기 위에다 촛불을 켜놓은 채 일을 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촛불이 꺼지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 감독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꺼지지 않는 촛불을 보면서 그 못된 감독은 “내가 졌다. 네가 이겼다!”하더니 혼이 빠져 나가버린 듯 맥없이 말위에서 떨어져 그만 배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는 후로 농토의 주인은 농노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악의 생각이 심판을 받아 하나님 두려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사랑이 강력한 파문으로 다가옵니다.


18절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천둥번개만 요란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 이래 이 만큼 큰 지진이 일어난 적이 없는 대지진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나를 위한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그 사랑이 마음의 잔잔한 감동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파문으로 다가온 것을 말합니다. 눈물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신앙의 수준입니다.


눅7:37-38에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랬습니다.


이 일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눈물과 향유로 부어드린 사건입니다. 여기에 대해 눅7:47에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큰 사랑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눅8:2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했듯이 귀신 떠나고 나니 그렇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생각 속에서 악의 생각이 떠나고 성령의 생각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의 사랑 혹은 징계를 통해서 미련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공중 즉 우리의 생각 속에 쏟는 대접재앙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보내주신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사랑이 성숙해져야 생각이 변화됩니다. 우리 모두 그동안 마음 바쳐 하나님 섬기지 못했던 것을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더욱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하나님 사랑 크신 줄 알아, 불신앙의 악한 생각 다 떠나고 마음과 뜻과 생명까지라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온전하고 성숙한 믿음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사도행전 23:12-35  바울을 해하려는 사람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서원한 사람이 약 40여명이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께서 아시고 사도 바울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기위하여 그 전날밤에 환상을 보여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자기를 죽이려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결사대가 40명이 있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우리는 직장에서 자기 싫어하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힘들어요. 가정에서 서로 마음맞지 않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가시방석인 것 같애. 그런데 40여명이나 되는 사람이 바울을 죽이겠다고 이렇게 결심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지금 이런 일이 북한이나 공산권에서 전도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일어나고 있어요. 생명의 위협이 일어나고 있어요. 실제로 공산권에서는 생명을 내걸고 예수를 믿습니다. 옛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 그대로 있습니다.

 

12,

사도 바울을 도와주려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은 40명입니다. 그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서원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는 결코 죽지 않고 로마로 입성하게 될 것이다.'  40여명의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천부장에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 바울을 우리 공회로 보내달라고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천부장의 손에서부터 이 대제사장의 손에 들어가려는 그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숨었다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14-15절이 그 내용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살인음모에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협조를 하기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40명만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더 죽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10-11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의인들은 계속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이 의인들이 받는 핍박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의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지 아니하면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쾌락을 누리면서 살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위기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16절에 보면 바울의 생질이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에게 가르쳐 줍니다.

16,

바울의 생질이 누구인지는 여기에 한 번 나오기 때문에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위기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그 위기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배 주변에 여러 가지 위기가 벌어지고 있는 데 내가 모를 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리미리 그것들을 막아주셨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도 모를 위기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다 막아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교통사고 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데, 죽을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마다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여러분과 내가 여기까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천사람이 넘어지고, 만사람이 넘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하고 낙담한 일이 있을지라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17-19,

사도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백부장을 통하여 천부장에게 다고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제밤에 나타나신 주님 때문에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기 떠문에 체포당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당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늘 가까이 하면 어떤 위기가 여러분을 덥친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천부장에 가서 바울의 생질이 이야기를 합니다.

 

20-21,

천부장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천부장은 이말을 듣고 이상하게 그가 바울을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그는 신앙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이상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신자까지도 사용하시고 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시에 군대를 풀어가지고 바울을 보호해 줍니다.

 

22-25,

모든 일과가 끝난 밤 3시 야간을 틈타서 바울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도록,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바울 하나를 이동하기 위해서 보병이 몇 명이에요? 200, 마병이 몇 명? 70, 창군이 몇 명? 200명 총 470명을 동원합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멋쟁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건 돈도 안줬는데 약 500여명 사람이 바울을 태울 말까지 제일 안전한 지역으로 바울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면 돈이 안듭니다. 내가 하면 돈들어요. 하나님이 하면 모든 일이 쉬워요. 놀라운 일입니다. 또 시키지도 않았는데 천부장이 총독에게 편지까지 씁니다. 변호해 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간단합니다. '너는 로마를 보아야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죽지 않아요.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그 종을 통하여 시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을 결정을 하고, 헌신을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을 위해서 사십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돈을 벌고 직장 생활을 하는 겁니까?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런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편지내용을 보겠습니다. 26-30절까지입니다.

천부장은 자기가 본 사실을 그대로 총독에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유대인은 바울을 죽이려고 했고, 또 죽이려고 40명이나 있었지만 자기가 보니까 죽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체포할 이유도, 감금할 이유도 자기가 보기에는 죽일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에요.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던 장면하고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잡아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여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빌라도가 재판을 해 봅니다. 예수에게 십자가에 처형할 이유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빌라도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이고 율법에 대한 문제이지 이 사람이 법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그러나 모든 국민들은 아우성을 칩니다. '예수를 죽이시오, 예수를 죽이시오' 사실은 국민들이 아우성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뒤에 배후세력이 있어요. 바로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너무나 고민스러워서 예수를 채찍에 맡깁니다. 굉장히 때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좀 누그럽게 할수 없을까 해서 예수님을 채찍에 때리지만 사람들은 그것가지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빌라도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가이사의 편인가, 아닌가' 정치적인 문제로 끌고 들어가니다. 빌라도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정치 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알기 떠문에 할수없이 예수님대신에 바라바를 놓아주고 죄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똑같은 얘기가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똑같은 얘기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기 사건에 휘말려가지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우리가 흠을 잡혀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의 대형사고에 그리스도인들이 관계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목사가 예수를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기 사건 때문에 감옥에 들어갑니다. 어떤 때는 너무도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보고 바울을 보십시오. 그들에게서 죽을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체포할 일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일어나서는 안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적인 일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31-35,

결국 사도 바울은 최악의 위기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보호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데 죄수의 몸으로 갑니다. 끌려갑니다. 그러나 결국은 로마를 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내노력으로 됐든, 다른 사람의 노력으로 됐든 간에 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된 것입니다. 교회에 매를 맞고 오든, 그냥 내 발로 찾아오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내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의 가정과 나의 건강과 나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한다는 그런 일들은 우리가 종종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도와 주셨다'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보게됩니다.

우리를 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 일 때 불려갑니다. 그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왜 이런 일이'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때는 그아이는 그때 데려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되어지기에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때 그 사람을 데려가나?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절대절명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피하게 하시고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실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꾸어서 구원하실 때도 있고, 천사를 보내어서 구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바울과 실라를 구원하실 때는 지진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보면 천사를 보내거나 지진을 일으키시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바울을 빼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꼐서 바울의 생질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고, 부장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고, 총독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살해 위기로부터 빼내 주셨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간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여러분을 괴롭히고, 파괴하려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런 말씀을 붙잡기를 바랍니다. 또한 "내가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생각에 집중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안지켜주시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우리 개인개인이 바울이 가진 비젼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냥 그냥 살지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도우심이 함께 하십니다.

 

부어지는 일곱 대접 6 (계 16:15-16)

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여섯째 천사의 대접의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마겟돈이란 히브리어로 '므깃도의 언덕'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일반적으로 아마겟돈은 세계 역사 끝 날에 사탄이 지휘하는  동방나라 군대와 하나님의 백성들과 전쟁을 벌일 최후의 장소를 말합니다.

최후의 전쟁터라고 하니까 대단한 곳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므깃도는 나사렛에서 남서쪽 18km 되는 지점에 있으며, 므깃도는 샤론평야를 굽어볼 수는 있지만 불과 20~50미터 높이로 낮은 작은 언덕에 불과할 뿐 산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고대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남북무역로요, 지중해의 페니키아에서 예루살렘, 요르단 강 유역까지를 연결시키는 동서교통로가 교차하기 때문에 군사 무역 면에서 중요하게 여겨져 이곳을 차지하려고 역사상 20여회 이상의 큰 전쟁이 일어난 곳입니다. 마치 백마고지와 같이 중요한 군사요충지였습니다.



이 므깃도의 언덕인 아마겟돈이 왜 유명합니까?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인류 최후의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날 장소로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계16:16), 그러나 학자들 간에는 아마겟돈은 현대전에 있어서 전략적 가치가 없고 그 낮고 좁은 언덕이나 샤론평야에 수억의 군대가 집결할 자리나, 집결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과연 이곳에서 인류 최후의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데는 많은 의문들이 있습니다. 옛날과 같이 창칼 들고 한 곳에 모여서 싸우는 그런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핸드릭슨은 “적그리스도의 정권과 교회가 대결하는 최후의 전쟁을 말한다.” 했고, 뉴인터네셔널 주석에서는 “그곳이 어디든 간에 모든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의해 마지막으로 전복됨을 상징한다.” 박윤선 박사는 “세상 끝 날에 하나님의 백성이 적그리스도를 이긴 상징적인 장소”라 했고,

한경직 목사는 “제 3차세계대전은 아마겟돈 전쟁이 될는지 모른다.” 조용기 목사는 “동양군대 2억과 서양 군대 1억 이상이 초현대식 무기를 들고 모여들어 마주치는 곳이 바로 아마겟돈 결전장이다.” 권성수 박사는 “전쟁은 분명하되 실제 군대를 통한 싸움을 말하는가에 대하여 나는 부정적이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문자 그대로, 어떤 이는 상징적으로 해석한 것을 볼 수 있지만 명확한 해석은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복음으로 풀어야 해석이 됩니다. 즉 아마겟돈 전쟁은 이미 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성화의 과정에서 충돌하는 영과 육의 대전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지금부터 최후까지 옛 사람을 목 박으며 악과 싸워야 할 전쟁터가 어디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므깃도의 남과 북, 동과 서로 교차하는 교통로에서 십자가를 봅니다. 그리고 므깃도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가나안 열왕과 싸워 승리한 별들의 전쟁을 보며, 이곳을 정복하려고 했던 애굽 왕이라든지 수없이 충돌했던 악의 역사적 사실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예수님과 마귀가 최후의 대전을 했던 골고다 십자가를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아마겟돈이란 우리가 십자가 붙들고 나아가는 성화의 과정에서 머리를 들고 나타나는 우리의 악을 철저히 매장시키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동안 십자가에 나를 내려놓는 일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대접 재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랑을 체험하고는 십자가 붙들고 우리 옛 사람을 처리하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십자가는 바로 우리 모든 악의 무덤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은 1차적으로는 모든 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십자가의 예표요, 나아가 아마겟돈은 우리 성도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악을 매장시킬 악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그 십자가 아래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 십자가에서 우리 악을 넘겨주며 모든 악을 처리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할 우리 모두의 최후의 전쟁터입니다. 우리 성도가 최후까지 모두 참여하며 싸워야 할 싸움은 그 싸움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는 어간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5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마겟돈 전쟁이 다름 아닌 영적 전쟁임을 보여주는 말씀임과 동시에 우리가 영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영적 자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방심하지 말고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시종일관 근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방에서 적을 지키는 군인들처럼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오늘 오실 것처럼 긴박감을 가지고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24:40-44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늘 기도와 찬송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만 드리고 있을 수는 없지만 늘 힘써야 합니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고 더욱 힘써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피곤하다고 방심하면 넘어집니다. 위로부터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마겟돈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2. 복음에 굳게 서서 우리 행실을 지켜야 합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옷은 행실이요, 우리 영적상태입니다. 그리고 벌거벗는다는 것은 바로 살지 못한 죄악의 수치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옷을 지키라고 한 것은 이미 주신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롬8:30). 즉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그 은혜를 굳게 붙들 뿐 아니라 말씀 안에서 더욱 회개하고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요일3:2-3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3. 늘 악의 성향을 십자가 아래 넘겨야 합니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 “자기”라고 했는데 내가 나타나면 안 됩니다. 나는 부패했고 부끄러운 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춰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될수록 우리 육은 더욱 으쓱거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바로 할려고 하는데 부패한 친인척들이 끼어들어 비리를 저지르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우리가 큰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큰 능력을 받고, 큰 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 육신도 덩달아서 춤추기 때문에 어떤 가운데 나아갔을지라도 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술사 시몬처럼 육신이 더 흥분하여 쓰임 받는 자세가 아니라 기적의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혹은 은혜 체험이 너무도 좋아 신비만 추구하다가 신비주의가 되어 말씀의 경계를 넘어서거나 악한 영에 사로잡히는 일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그랬듯 능력과 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 속에 자만과 교만과 욕심과 게으름과 자기자랑이 슬그머니 그 뒤를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친 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옛 사람이 나타나는 대로 모두 악의 무덤인 아마겟돈 전쟁터와 같은 십자가 아래 매장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4. 끝까지 신앙으로 이기는 자가 승리합니다.


16절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여기 세 영은 앞의 13~14절에 나온 것처럼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을 말합니다.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더러운 귀신의 영이라는 것은 우리를 더럽게 하려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마겟돈이란 영육 간의 싸움인 것을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를 최후까지 넘어뜨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현장과도 같은 아마겟돈으로 왕들을 모읍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마귀 편에서 보면 최고 최악 최후의 시험의 장소요, 예수님 편에서 보면 마귀를 심판하고 죄인을 구원하신 구원의 장소입니다. 이 십자가의 깊은 경험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때 우리 속의 동방 왕들과 같은 육신의 성향은 더 이상 숨겨지지 않을 것이고 처리 받기 위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마지막 7번째 대접재앙을 앞에 두고 있는데도 왕을 모으고 이제 시작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7번째 대접을 쏟았어도 21절을 보면 하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가 육신을 벗고 완전히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빌3:15-16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들어갈 때까지 근신하며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의 영이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계속 모읍니다. 마치 40일 금식하실 때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예수님을 떠났지만 죽으심을 앞두고 온갖 악의 무리들을 동원하여 십자가 아래 모였듯, 우리를 천하만국과 그 영광 뿐 아니라 온갖 악으로 넘어뜨리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기회로 나의 옛 사람을 처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재림하실 때 그 때 비로소 사탄에게 영향 받던 우리 육체까지도 죄도 없고 흠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광의 형체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신 이 말씀으로 무장하여 우리가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모든 악을 그 아래 매장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악의 시험들을 다 이기고 온전히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승리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주께서 말씀하시다  사도행전 23:1-11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만은 담대했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고 핍박을 받을 때에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당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듯이 대제사장의 법정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두렵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가 두려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1,

그는 어떤 일을 말하든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대단한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살아오셨습니까? 어떤 때는 예수님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간단한 성경책 하나 들고 다니는 것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말이었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죄수가 함부로 입을 열다니"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을 시켜서 사도 바울의 입을 치라고 말했습니다.

 

2-3,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도 바울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네 입을 칠 것이다." 하고 대들었습니다. 이걸 보면 사도 바울은 성깔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단합니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재판하고 있지만 네 자신이 율법을 범하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항의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법정도 두렵지 않고 재판도 두렵지 않고, 사람과 권력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가지는 잘못된 명령과 권위에 대해서 항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주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제제합니다. "네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비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4,

사람들의 관심은 대제사장이 한 말이 오르냐 그르냐에 관심이 없습니다. 문제는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대제사장의 권위에 도전하느냐, 대제사장을 욕할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그런 얘기에 말려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 자체보다도 그 잘못된 명령을 내리는 그 권위에 대해서 항거하려는 그런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돌을 던지고, 데모를 하고, 심지어는 분신 자살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잘못된 권위의 사람들에 의해서 희생을 당했습니다. 불법 재판을 당했고, 불법 재판에 의해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을 받으셨지만, 그 재판 자체를 거부하거나 재판장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싫으면 그 권위 자체도 부인하려고 합니다.

 

5-6,

사도 바울은 순식간에 자기의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잘못된 권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무시하거나 허물어 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부모의 권위를 주셨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아버지라 할지라도 진리와 신앙에 반대되는 것을 빼고는 모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권위를 바라보면서 지금 주시는 말씀에 아멘하는 것입니다.

또한 권위를 가진 사람은 권위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권위를 잘못 사용하는 것을 가리켜 권위주의라고 합니다. 권위를 잘못 사용할 때 그 권위 밑에 있는 사람들은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 때문에 술을 먹어도 되고, 방탕해도 되고, 아내를 때려도 된다고 한다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다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학생들에게 교수라는 귄위를 주셨습니다. 그 권위는 지켜져야 합니다. 정부에 권위를 주셨습니다. 정부가 싫어도 그 권위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권위가 타락이 되었거나 그 권위가 잘못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고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6-8,

사도 바울은 방법을 바꿉니다. 대제사장에게 격렬하게 항의를 하던 모습을 순식간에 바꾸어 버립니다. 그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록 불법이지만 그가 잘못하고 있지만 율법으로 재판한다고 하는 사람이 율법을 범하고 있지만 그는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다른 말을 합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재판을 하는 두 그룹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사두개인으로서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는 그룹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들은 부활도 영도 천사도 믿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또한 그룹이 있습니다. 부활도 믿고, 천사도 믿고, 영도 믿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정치적이었다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은 극히 종교적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인본주의적이라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은 신본주의적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현실주의라고 한다면 바리새인은 이상주의였습니다. 두 사람들이 모두 의견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7절에 보면 이 둘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다툼이 일어났습니까? 항의를 했다면, 체제에 도전을 했다면, 권위에 도전을 했다면 이 많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과, 바울이 싸움이 붙었을거에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진리를 선포합니다. "나는 바리새인으로서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악한 구조와 악한 체제 속에 있을지라도 그 체제에 도전하면 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혁명은 해결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다른 혁명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물리적 폭력은 또 물리적 폭력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인의 손으로 악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악인의 손으로 죽게 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너희는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입이 더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입에는 축복과 사랑만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체제 속에서 우리는 진리를 이야기하며 빛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이 드러납니다. 악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붕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싸움은 싸움만을 낳습니다. 폭력으로 이겼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분노와 미움과 한을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리면 쉬워집니다.

그러면 내가 악한 구조속에서 빛을 이야기할 때 굉장히 비겁하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돌도 던져보고, 소리를 지르면 다른 사람에게도 좋고 자기에게도 좋을지 몰라요.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안변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악한 체제, 나쁜 체제 밑에서 그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그 안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빛을 이야기하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핍박이 옵니다. 그 악한 체제가 말을 못하도록 입을 막을 것입니다. 결국 핍박을 당하게 되고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우리는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순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순교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다음 세대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성장을 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순교했고 순교의 피를 이 땅에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이런 축복이 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순교를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한테 환영을 받지를 못합니다. 박수도 없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소리없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구조, 악한 체계가 무너지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9,

 

바울은 진리 편에 서서 '부활을 믿는다'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랬더니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악인은 악인의 손에 죽습니다. 하나님이 선인의 손에 피를 흘리게 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를 하십시오. 진리와 빛을 타협하지 말고 선포하십시오. 아무리 어둡고 악한 구조라 할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계속 기도하시고, 사랑을 베풀고, 용서를 하고, 도와주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한 개인이 기도하는 것이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 열사람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 한 사람이 출애굽을 시켰습니다. 경건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빛의 사람, 진리의 사람 한 사람이 조용히 기도하고 핍박을 받고 죽으면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로마 정부를 향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혁명세력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졌을 뿐입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빛을 선포하고, 사람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빛을 선포 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10,

큰 분쟁이 생겼습니다. 처음 분쟁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바울과의 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분쟁은 자기들끼리의 분쟁이었습니다.

나는 교회가 기도하면 세상이 변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빛대로 살기만 하면 세상이 변할 줄 믿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왜 안변합니까? 한국 교회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변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빛이 되면,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면 세상은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기껏해야 교회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에요. 더 이상 일이 없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그것으로 신앙생활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천부장은 그 소요 속에서 바울이 찢겨질까봐 그 무리 속에서 바울을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갔습니다. 10절로서 사건은 끝났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11절에해답이 있습니다.

 

소요가 있던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했습니다. 신앙인란 바로 이런 영적실제입니다. 관념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이 믿었기 때문에 내려온 생각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지성이나 지식은 예수님에게 이끌어가지 않습니다. 많이 배웠다고 예수를 만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지성은 예수님을 만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지식이 예수를 만나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만나집니까? 예수님이 나를 찾아와야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찾은 거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찾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만났을 때, 너무 감격해서 "하나님 어떻게 나같은 것을 구원하여 주셨습니까? 왠 사랑입니까?" 하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냥 지식으로, 그냥 머리로만 '예수가 있겠지' 이런 사람에겐 어떤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고, 성령에 충만을 입은 사람과는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실제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죽은 분이 아니라면 만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의 삶에 들오오셔서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11,

"바울 곁에 서서"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내 곁에 서신 주님. 여러분, 병들고 어려울 때 내 옆에 누가 있다면 참 좋습니다. 내가 약할 때 강한 사람이 와 있으면 참 좋아요. 어머니가 내 옆에 있으면 참 좋습니다. 주님이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바울 곁에 주님이 왔습니다. 두가지를 말했습니다. 첫번째 담대하라. 이 말은 두려워 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하고 있는 이 일, 고난 받고 있는 이 일에 대해서 두려워 하지 말라. 네가 환난을 당하고 매를 맞고 재판을 받는 그런 상황에 있을지라도 두려워 하지 말라. 두 번째입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중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항상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겠다"는 강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꿈이 무엇입니까? 그저 결혼해서 애기 낳고 잘 사는 것입니까? 내 인생이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 안에 어떤 분이 있습니까? 내가 로마까지 가야겠다. 여러분은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어디까지 가서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키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이 열정과 이 소망을 준 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 아닙니다. 여러분 무슨 생각이든지 하나님이 그 생각을 주지 않으면 그 꿈은 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 기도를 하는 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데 어떻게 그런 일이?'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우리 나라의 통일도 하나님이 주시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여러분이 변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남편이 변할 줄 믿습니다. 못된 습관들, 잘라 버리지 못하는 일들이 잘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하시고 염려를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저가 권고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환상중에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로마도 가야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음성을 들을 때 고난 때문에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고난이 있습니다. 크고 작을 뿐 다 고난이 있습니다. 나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겪습니다. '내게 왜 이런 고난이 있느냐'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고난에 의미가 있어집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내가 로마로 가기 위한 길이다"하는 것을 알았을 때 바울은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께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바울을 연단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연단시키시고 인도하시고 그리고 축복하십니다.

 

12절을 보니까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존재들이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들은 바울을 죽일 수 없습니다. 주께서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로마를 갈 것이다' 이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결코 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부어지는 일곱 대접 5 (계 16:12-14)

12.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여섯째 천사의 대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초기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를 아실 것입니다. 이성봉 목사는 6.25동란 무렵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심한 고문과 조롱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공산당원이 잔인한 고문 끝에 조롱하며 발길로 걷어차며 말했습니다. "어이 영감 천국 좀 보여주지?" "예 보여 드리지요." "죽어서 말고, 지금 보여 달란 말이야." "예 지금 보여 드릴께요." 그러자 공산당원은 잘 걸려들었다 싶어 지금 눈앞에 당장 보여 달라고 독촉했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 뭐라고 말했을까요?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드릴 수 없고 천국지점은 내가 보여 드릴 수 있는데 내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성경적인 말이고 성령께서 주신 지혜가 아니고는 대답할 수 없는 답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항상 천국이 있고 또 천국을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도 천국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삶일까요? 문자대로 보면 여기 여섯째 대접 재앙은 대접을 큰 유브라데 강에 쏟는 모습입니다. 이 때 강이 말라 전쟁로가 예비되고 개구리 같은 더러운 귀신의 세 영이 온 천하 임금들을 모아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대한 견해에는 동서양의 군대가 충돌, 아스완댐 건설로 인한 분쟁, 적그리스도의 세력의 교회 공격, 어린양의 군대를 대적할 적그리스도의 군대, 종말에 나타날 최후의 전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치러오는 원방의 모든 세력 등의 설이 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는 아직도 불확실한 이해가 많으므로 참고만 하고 계시록의 본질대로 복음의 신령한 관점에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당시 중동 지역에서는 겨울 우기가 끝나면 강물도 줄고 땅도 마르고 전쟁하기 좋은 때가 오는데 본문은 이러한 계절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방의 왕들이 콩가루처럼 무력했지만 이제는 마음을 돌리고 준비하고 준비하며 벼르고 벼르다가 연합군을 만들어 유브라데를 건너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브라함이 메소포다미아에 살다가 유브라데를 건너 가나안에 오게 된 그 배경도 깔려 있습니다. 유브라데가 세상이라면 유브라데 건너 가나안은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만큼 은혜를 크게 받을 때 있을 좋은 면과 시험이 되는 두 면을 말씀합니다. 즉 주님을 목말라 사모하는 좋은 면과 아울러 한 편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려는 그 심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럼 천국의 소망을 주실 때 어떤 일이 있습니까?


1. 죽음에 대한 육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12절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유브라데를 큰 강이라 했는데 큰 강은 건널 수 없는 강을 말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 이 강을 건너서 타향으로 간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향해 가는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믿음 없이는 넘어가지 못하는 강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습니다. 죽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 어떻게 가나요. 교사는 예수 믿음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죽어야 가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도 맞는 대답입니다. 믿음으로 마음의 천국이 임하고 성도의 육체가 사망함으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본문에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큰 강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음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2:14-15)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죽음의 공포가 사라집니다. 우리 육신으로는 횡재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크게 체험하면 천국의 소망이 활짝 열리기 때문에 두려움과 미지의 강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은혜를 크게 받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세상에 대한 미련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사망의 두려움은 육신의 감정이지 영의 감정이 아닙니다. 그런데 강렬한 천국소망이 비쳐오므로 육의 감정까지 바꾸어졌습니다. 강물이 다 말라서 강 좌우편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여기 동방이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서의 동방은 이방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사46:11에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이라 한 것처럼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원방에서 오는 모든 세력을 통칭하는 하는 말인데 좁게는 우리 육신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셨는데 왜 세례요한부터입니까?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부터 침노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 침노를 당한다는 말은 ‘비아제타이’(biavzetai)는 폭력을 쓰다, 강제로 들어가다는 의미를 가진 ‘비아조’(biavzw)의 중간태 혹은 수동태로서, 중간태로 보면 강제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폭력을 사용함을 의미하고, 수동태로 보면 '난폭하게 다루어지다, 압박을 당하다, 폭력을 허용하다'등을 의미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부르심과 견인은총의 강력함과 아울러 성도에게 부어지는 사모하는 열정을 말함입니다.

눅16:16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면과 아울러 천국소망이 임하면 육도 지나치게 설쳐 세상에 손을 놓거나 건전하지 못한 사이비종말론이라든지 신비주의에 심취되거나 사탄이 더 깊이 침투하면 집단자살 등 일을 그르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그런 소동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비는 믿지만 신비주의는 배척합니다. 사탄이 틈 타서 결말이 좋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믿지만 상식 없이 성령대망운동하다가는 큰 일납니다. 은혜를 크게 체험해도 이렇게 육신이 덩달아서 날뛰기 때문에 체험이 깊어질수록 더욱 진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진리로 세우신 후에 오순절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아직 우리는 육을 입었기에 날마다 진리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2. 그러니까 천국소망이 생기면 육신의 생각들도 덩달아 나서려고 합니다.

13-14절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여기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방한 악의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가령 용이 사탄이라면, 짐승은 본능의 존재 육신이요, 거짓선지자는 미혹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 세 영은 완전수 3이요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으니 아무도 거칠 것이 없는 군대입니다. 또 개구리 모양으로 나타났으니 그 입에 쉬지 않는 반복성을 뜻합니다. 거기다 마치 모세처럼 이적까지 행하여 증거를 보이니 넘어가지 않을 왕이 어디 있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천국에 대한 육신의 반응이 이와 같습니다. 은혜 받지 못했을 때는 천국에 무관심하고나 죽음이 두려워 거부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한 후에는 달라집니다. 육신이 더 좋아 흥분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은 은혜 받지 못해도 방해물이요, 은혜를 받아도 시험을 주는 방해물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미혹에 뛰어난 개구리 같은 세 영이 등장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즉 개구리 같은 세 영이 이렇게 그들을 미혹해야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만큼 동방의 왕들이 동맹을 맺길 주저하고 그 강을 넘어 침략함을 주저함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약하고 늘 분산되어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너머를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은 항상 약하고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어도 육신적인 마음은 죽음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이 천국의 소망으로 넘치게 되면 이미 말씀한 대로 육신은 달라집니다.



마치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함께 살자던 베드로와 같아집니다. 그래서 세상에 충실하지 못하고 은혜에 심취하거나 세상을 떠나려고만 하는 비현실적인 사탄의 미혹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 좋은 것 같지만 대단히 비정상적인 삶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드디어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집니다. 즉 주권자인 나의 온 마음을 포섭하여 죽음의 강을 건너 주님과 따로 거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바울도 경험했지만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빌1:23-24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그러나 사명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소망과 아울러 사명의 현실에 충성하는 균형이 잘 잡힌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좋다고 모든 일을 제쳐놓은 체 날마다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시험입니다.



그래서 은사집회 잘못하면 악한 영이 침투하여 사탄의 소굴이 되버립니다. 회개와 예배와 순종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바로 서면 은혜와 은사는 넘치지만 더 큰 능력과 황홀한 엑스타시를 따르다가는 더러운 귀신이 틈 타는 등 곁길로 나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체험할수록 더욱 육신적인 감정을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3. 그러니까 은혜 받으면 우리가 근신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14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여기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이란 넓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요, 좁게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모으더라." 한대로 우리 육신도 천국의 갈망이 더욱 커져 갑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크게 체험할 수록 진리에 서서 정신 차려 신앙생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고 맙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15절의 교훈은 앞의 사건이 다가올 역사의 사건이라기보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어디에 이르렀든지 무엇을 체험했든지 진리에 서서 근신하며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드시도록 항상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최후까지 최선을 다할 것은 맡기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마24:42-27)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같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따로 있고 싶을 만큼 은혜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진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 아무리 좋더라도 변화산의 은혜에 도취되어 우리 할 일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탄의 시험입니다. 인류 최후의 전쟁터는 아마겟돈이지만 개인적인 최후의 전쟁터는 하나님 나라를 두고 벌어지는 성도의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를 깊이 받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굳게 서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가장 아름답고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사도행전 22:17-30  사도 바울의 회심 2

 

사도 바울은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했거나, 찾아 갔거나, 공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었지만 그 율법이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유대인의 전통과 헬라의 철학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지 못하는 요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헌신과 열심이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갑자기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하는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여러분,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내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내 노력과 내 헌신과 내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말이 뭐냐하면 "은혜다"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내 노력으로 내 의로 내 지식으로 예수님을 안 것 같았지만, 사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할때에도 그분이 나를 알고 계셨고,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을 때에도 주님은 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믿는 원칙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곳에 여러분이 온 것 같지만 여러분이 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은혜로 이곳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태에 있을때부터 아십니다. 그분은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5 8절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주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럼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기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그는 빛 속에서 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는 갑자기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 생애에 찾아왔을 때 그는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갔는데 예수를 만난 후에는 증인으로 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갑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면 조국이라는 의미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고난 다음의 직장과 예수를 믿기 전의 직장은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것은 똑같지만 예수 믿기 전의 다메섹과 예수를 믿고 나서 후에 다메섹은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하나님께서 준비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런 사실을 배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위하여 아나니아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서 그에게 안수하고 그의 시력을 회복케하는 그런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 줍니다.

14-16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났습니다. 아나니아를 만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이었기 떠문에 함께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과거 떠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울을 의심했습니다. 정말 이사람이 예수를 믿은 것일까? 구원받은 것이 사실일까? 본인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데 위장해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이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한 사람이 나타나서 바울을 도와 줍니다. 그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예수믿는 사람이다' 하면서 사울의 입장을 변호해 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의 변명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척을 받고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사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17-18절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봅니다. 그내용은 "예루살렘을 빨리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형제들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자기를 배척할만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을 할 때에 오해가 있고, 배척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럴때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그럴만하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바울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보면 사람들이 나를 의심할만하다는 거에요.

 

19-20,

 

예루살렘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람들을 가두었습니다. 지난 간증에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말했습니다. 회당에서 때리고 그리고 예수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공문서까지 가지고 간 사람입니다. 그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그 곁에 서서 찬성을 하였고, 그리고 스데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서 보관하는 일까지 있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서 이러한 모든 사실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바울은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21절입니다. 주님의 생각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과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동기였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하고 예수님도 떠나라고 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과거 때문이라고 바울은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네가 예루살렘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 떠나는 이유는 "과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하여 계획한 놀라운 섭리가 있다. 너를 부른 놀라운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내가 너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너는 예루살렘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주님과의 생각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를 보게 되면 이사야 55:8-9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온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을 보고 삽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만 성경을 보지 못하고 언제나 내 상황과 내 형편과 내 선입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기를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대표적이 예의 사람이 아나니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제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에게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드디어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뜻을 때에야 안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기도를 안했습니까? 아나니아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까?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말을 듣고 아나니아는 자신의 산입감을 포기하고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는 곳에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고 안수해 주고 세례까지 베풀어 주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에게도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듯이 기도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잔을 마셔야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을 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침묵을 합니다. 내가 울부짖고 기도해도 침묵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를 바꾸십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기도를 하는 순간에 예수님은 벌떡 일어납니다. 이제 더 이상 기도안합니다. .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그가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어나서 십자가로 가면 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 기도의 응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응답을 안믿는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이 되었으면 일어나서 가면 됩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큰 뜻을 깨닫고 사울에게 갔습니다.

 

21,

하나님의 관심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들어서 도구로 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멀리 이방인에게" 하나님은 이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달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이 늘 문제입니다. 그는 자기 의가 많습니다. 자기 선입감이 많습니다. 10, 20년 지나면 자기 경험이 많고, 자기의 선입감이 많아서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선입감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선입감을 제거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를 여십시오. 마음을 여십시오. 눈을 여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들을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듣다가 이방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면서 흥분을 합니다.

 

22-23,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면서 "이런 놈은 죽여야 한다" 하면서 또한번 소동을 일으킵니다.

유대인들은 다 참을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이 이방이의 하나님도 된다는 사실에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들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위험은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만, 우리 교파만, 우리끼리만, 이것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의 것입니다.

 

로마의 천부장은 이러한 소동을 이해할 숙다 없어서 바울을 체포해서 그에게 신문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자 했습니다.

 

24,

영문안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채찍질 해서 무슨 일인가를 알고자 합니다. 군인들을 시켜서 바울을 가죽줄로 채찍질을 하게 합니다.

 

25-26,

사도 바울은 가죽줄로 자신을 묶으니까 한마디합니다. "나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군인들이 굉장히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을 신문하는 로나의 천부장도 로마 시민권을 돈주고 산사람인데 사도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 놀라지 않을 수 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시민은 재판없이 처벌할 수가 없기 때무에 지금 재판없이 가죽줄로 묶고 때리기 때문에 이것은 법에 위촉되기 때문에 당황한 것입니다.

 

27-29,

천부장은 솔직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자기는 돈 주고 로마 시민권을 샀다고 말하는 것 보니까.

사도 바울의 전체의 삶에는 그를 붙들고 있는 하나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오직예수. 이는 예수 한분 때문에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많은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전혀 문제삼지 않고 한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21:1-2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러분,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직예수에요.

그는 자신의 어떤 지시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심리학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는 모든 인간적인 유혹에 제동을 겁니다. 말과 지혜이 아름다운 것을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나는 십자가의 복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전한다.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도 바울에게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고나심이 없어요. 부자냐, 간하냐, 학벌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다 그들은 나에게는 복음의 빚진자다. 이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얽매일 수 있었던 것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니다.

 

 

30,

이튿날 천부장이 재판을 하기 위하여 대제사장과 공회에 위탁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경우도 똑같죠. 지금까지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소요속에 있었다면 이제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재판의 과정으로 옮겨갑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소요소에서도 담대했던 것처럼, 대제사장과 공회의 재판앞에서도 그가 굉장히 담대한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23:1,

재판장에 와서도 기가 등등한 바울을 보고 대제사장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는 입을 치라고 말합니다.

 

2,

사도 바울이 즉시 반박을 합니다.

 

3,

바울은 성깔이 있는 남자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과 차이가 있어요. 예수님은 침묵을 합니다. 치고 떠리고 조롱을 해도 가만히 있어요. 스데반도 조용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하냐면,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네입을 치리로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가면 빨리 회개를 합니다.

이런 성깔있는 남자, 그사람을 하나님이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예수만을 위해 살도록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여기 성깔있으신 분들, 불의를 못보시는 분들, 억울한 일을 보면은 막 대드는 분들, 오늘 예수님에 붙잡힘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예수, 예수만을 사랑했고, 예수만을 자랑했고, 예수만을 위해 죽기만을 각오한 바울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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