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알곡론 4 (계 14:18)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영적추수와 열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천국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 열심 있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딤전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알곡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여기 불이 나오는데 여기 불은 어떤 불일까요? 성령의 불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 6장을 보면 제단 불을 다스리는 스랍 천사가 나옵니다. 사6:6-7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처럼 성령의 불을 받을 때 변화도 받고 알곡도 되고 헌신적인 일군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4:3-4에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느헤미야서에도 나오지만 예루살렘은 대대로 적의 공격목표였기 때문에 시온에 거주자는 목숨 걸고 싸울 자세가 없이는 거주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목숨 건 예루살렘 거주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 건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목숨 걸고 신앙생활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예루살렘에 모여 목숨 걸고 기도했던 120문도들이 알곡이 되었고, 지금도 하나님을 힘차게 경외하는 자들이 성령의 불을 받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2. 헌신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번에는 천사의 출처입니다. 이 불을 주관하는 천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제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성전에 불이 있는 제단은 두 곳입니다. 먼저 성전뜰에 있는 번제단입니다. 이곳은 제물을 태워 제사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성소 안의 분향단입니다.


그럼 본문에 나오는 제단은 어느 제단일까요? 그러나 두 곳을 다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향단의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옮겨오기 때문에(레16:11-12)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번제단과 분향단을 오가는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번제단은 헌신을 상징하고,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즉 참된 알곡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3.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 이번에는 불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불은 성령의 불이요, 제단은 헌신과 기도라면, 그럼 불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얼 말할까요? 불이 활활 타오르게 도와주는 걸 말합니다. 번제만 보더라도 불이 잘 탈 수 있도록 놋그물 위에서 번제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헌신할 수밖에 없고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말씀으로 감화 감동 혹은 연단을 통해서 신앙의 불이 타오르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완악할 때는 강제로라도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32:8-9에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과도 어울리는 해석입니다. 즉 가을에 포도를 짓밟아 추수하듯 우리를 은혜와 연단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엎드리지 않을 수 없도록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의 감동을 받으면 받을수록 좋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경건이 깊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히12:11-12에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했습니다. 여기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적극적인 기도의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을 원망하지 마시고 왜 이런 환경을 주시는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규칙적인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도 목숨 걸고 하루 세 번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주일성수와 정한 예배와 개인기도 역시 큰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규칙을 정해 놓고 힘써 할 때 하나님 나라의 참 알곡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말씀 안에서 열심해야 합니다.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불 다스리는 천사가 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에게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외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불 더하기 낫입니다.


그런데 작은 음성이 아니라 큰 음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열심이 말씀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의미와 아울러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전4:20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지 못하고 성령의 은혜를 간구한다면서 말씀을 떠나 신비주의로 나가는 자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사탄의 잔치밖에는 더 되지 않습니다. 그런 열심히는 알곡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5. 그리고 말씀 안에서 열심할 때 참된 알곡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18절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여기 포도송이를 땅의 포도라고 한 점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본래 땅은 죄악으로 저주를 받았으며 노아의 때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한 것처럼 이제 이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셨습니다(벧후3:7).


그러므로 땅은 죄와 심판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포도송이는 그 땅의 소산이므로 죄의 열매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땅의 포도송이는 우리 마음속의 갖가지의 죄성을 가리킵니다. 죄란 원문으로 보더라도 죄다발입니다.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스’ (άμαρτίας)인데 복수형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마치 포도송이와 같이 가장 큰 줄기인 불신 죄에서 비롯되어 하나님에 대한 죄 사람에게 대한 죄로 구분되고 이것 역시 다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어찌할 수 없는 큰 죄 다발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의 포도송이가 푸르지 않고 익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고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열망이 충분히 극에 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옛날에도 죄인이고, 지금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다만 변한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인식도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창15:16에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 않았지만 점점 타락하여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거기 사는 일곱 족속들이 완전하게 타락하여 심판을 받음과 같이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구제불능의 죄인임을 그렇게 점점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는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범죄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자라갈 때 그 때가 바로 우리 속에 죄가 심판 받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경외함의 부족해서는 죄가 처리되지 않습니다.


잠16:6에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로서 가까이 하면 우리 속의 죄다발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율법을 통하여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혹은 삶의 환경과 각종 연단의 파트너를 통하여 우리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악한 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죄악의 포도송이가 처리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로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우리가 온전한 천국의 알곡 되기를 갈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강단에서 선포되는 주의 말씀과 또 우리의 삶에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나셔서 하나님의 참 믿음의 알곡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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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역시 ‘영적추수와 연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곡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3:11-12에 하신 말씀대로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천국의 열매 맺지 못한 인생 쭉정이 갈 곳은 꺼지지 않는 불 외엔 없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여름에 하는 모맥 즉 보리와 밀의 추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포도를 추수하는 가을 추수가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두 종류의 추수를 그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알곡 만드시기 위해서 두 방향에서 추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두 방향에서의 성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한 편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다른 한 편은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 연단을 통한 성화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1. 연단 역시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4절과 흡사한 구절입니다. 공통점은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예리한 낫을 가진 자가 여기서는 인자 예수가 아니라 천사라는 점, 그리고 낫을 가진 장소는 흰구름 위가 아니라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포도 추수에 낫이 별로 필요 없는데 예리한 낫을 가졌다는 것은 이 역시 천국의 알곡과 한 맥락이라는 것이고, 연단 역시 구원을 향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연단이란 알고보면 행동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단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의도를 충분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이 아무리 자상하고 분명해도 이것을 왜 이런 연단을 주셨는지 말씀 안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이것은 열매 없는 고통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아이를 채벌하면서도 왜 매를 맞아야 하는지 알게 하지 않는다면 채벌이 아니라 아무 교육적인 효과가 없는 폭행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학에서 체벌의 10대 원칙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체벌 받는지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험에 대해서 말한 후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1:5-6)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진실로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도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삿 4장을 보면 하솔왕 야빈이 쳐들어왔을 때 바락 장군이 여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여기 바락은 ‘벼락’이란 뜻으로 징계의 상징이요,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뜻의 말씀의 상징입니다. 아무리 벼락 쳐도 깨닫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가서 야빈을 대적한 결과 대승을 이루었습니다.

이 사사기 말씀은 연단과 말씀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폭의 좋은 그림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받을 때 지혜를 구해서 그 연단의 의미를 진실로 깨달아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더욱 회개하고 순종하여 바른 믿음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2. 연단은 거룩한 제사장을 목표로 이루어집니다.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이 구절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모맥 추수와는 달리 천사가 하늘 성전에서 나와 추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은 제단에서 나오는데 여기서는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나오는지에도 그 의미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미 말씀한 대로 성전에서 나왔다는 것은 성전의 신령한 의미와 성전생활에 대해서 강조한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연단을 허용하신 것은 연단을 통해 회개하여 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더 거룩하며 더 진리에 말씀에 서고 성전에서 생활과 같이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12:9-13에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연단을 통해서 제사장과 같이 더 겸손해지고 순종하고 깨드려지고 온유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벧전2:5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말하면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교훈하고 있습니다.


3. 연단은 하나님께 순복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여기 천사가 나오는데 천사에 담긴 의미가 그렇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라. 그래서 히1:7에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천사가 나타나면 하나님이 나타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낫을 가졌습니다. 이 낫을 가진 천사 앞에 끝까지 남아 있을 포도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콤바인이 지나가면 모든 곡식들이 베어지듯이 누구도 천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해서 천사를 이겼다지만 실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천사를 붙잡고 축복하기 전에는 놓지 않겠다고 놔주지만 않았던 것이 그 전부였습니다.


도리어 야곱은 온 밤을 천사와 씨름하다 기진맥진하여 도망할 힘조차 없었고 천사에게 맞아 환도뼈가 위골되어 걸을 수조차 없었기에 하나님이 돕지 않으면 난 살 수 없다고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이길 수 없고 그의 사자인 천사를 이길 수 없어요. 하나님을 이긴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큰 연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져야 합니다. 순복해야 합니다. 나를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 앞에 더욱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약4:10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했고, 벧전5:6에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포도 추수는 철저히 나를 짓밟으셔서 깨어지고 부스러지는 나의 옛사람의 자아를 처리하시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순종하고 부스러져야 합니다.

그 동안 나를 위한 예수였다면 이제는 주를 위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죽어야 예수 내 안에서 사시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나를 잊을수록 좋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입니다. 어린이는 내가 없어요. 나를 망각하고 살아요. 그래서 어릴 때는 무시해도 우리 어른들 감정과 같지 않습니다. 내가 없기 때문에 걱정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삽니다. 즉 나를 죽인다는 것은 자기를 목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관적으로 살았던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과 믿음과 순종과 충성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무능하고 또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10:27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하셨고, 잠21:15에도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여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왕이 되어 자행자지하려 한다 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연단에 반드시 은혜 속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앞드리는 것이 연단 받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연단을 물리쳐달라고 하는 기도보다 이 연단 속에서 내가 더 깨닫고 참 신앙을 각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우리를 참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연단의 손길을 거두지 않고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함을 배우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연단을 통해서 깊이 깊이 체득시키며 교육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의 삶을 믿음을 위한 훈련 상황으로 이해하시고 더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 나아가고 더 회개하여 더욱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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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영적추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3:11-12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신 이 말씀은 종말에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14절을 했습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여기 흰 구름 위에 예수 한 분만 계신 것은 변화산에서 그랬듯 다른 모든 것은 흰 구름에 덮이고 오직 예수 한 분만 나의 구주로 믿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리한 확실한 말씀에 서야 만이 진정한 알곡으로 익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리한 말씀 외에도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부터 나와 예수님께 땅의 곡식을 거둬달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알곡 추수의 또 다른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즉 앞에서 말한 예리한 말씀 말고 또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즉 아무리 오직 예수 신앙의 좋은 말씀이 준비되어 있어도 바로 성령의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는데 이 나온다는 표현에 담긴 그 의미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뭔가 추수와 관련된 귀한 것이 나와야 합니다. 즉 이것은 성전은 하나님이 계셔서 성령의 생수가 성전에서부터 흘러넘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겔47:1-2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에 보니 성령의 생수가 성전에서 흘러오고 있었습니다. 이 물은 신기하게 흐르면 흐를수록 많아지고 깊어지는데 동쪽으로 천척을 나아간 후에 재보니 물이 발목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나아간 후에 재보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나아가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나아가니 건너지 못할 큰 강이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강가에는 온갖 아름다운 나무가 많아 각종 먹을 새 열매가 달마다 열리고 그 잎사귀는 귀한 약재료가 되는데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죽음의 바다가 소생함을 받고 수많은 번성하는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오더라. 성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다, 그리고 성전의 역할처럼 우리가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흐르는 강 좌우에 열매가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온갖 아름다운 12가지 새 열매가 달마다 날마다 주렁주렁 열립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참 알곡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 이 두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보면 약 두 종류의 유형이 있습니다. 한 유형은 제자들과 같이 말씀이 먼저 무장되고 성령이 다음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행 10장의 백부장 고넬료처럼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지만 복음을 몰라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가 꿈에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여 예수 복음을 전해 듣고 완전한 천국의 알곡이 되는 그런 유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리한 오직 예수 말씀과 아울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전자가 잘 준비되어 있다면 이제 늘 경외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셔서 천국의 알곡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듯 성전에서 은혜가 나오는 아름다운 성전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아울러 성전생활이 잘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성전생활을 해야 할까요?


1.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합2:20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늘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와 예배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얼마나 갈망했는지 시42:1-3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84편을 보면 고라자손들도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합니까? 시84:1-4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렇게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갈망하시란 말입니다. 늘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 용어로 표현하면 성전생활입니다. 그래서 행1:13-14에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했고, 눅24:54에는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슬람을 진리적으로는 이미 이겼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는 그들에게 지고 있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죽어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무슬림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메카를 향하여 엎드려서 하루 다섯 번을 기도합니다. 이러한 때에 입다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삿 11장을 보면 암몬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을 때 입다가 전쟁에 출전하면서 여호와께 서원했습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30-31절)


그랬는데 암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불행하게도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딸이 그를 맞으러 나옵니다. 그럼 입다가 왜 그런 서원을 여호와께 드렸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입다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은 신과 신의 전쟁이었고, 암몬 사람들이 자기 신에게 자식을 태워서 드릴 만큼 신에 대한 충성이 강했는데 그들을 이기려면 참 신이신 여호와께 그보다 더 강한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입다처럼 무모해서는 안 되지만 그런 열심은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거짓 신보다 더 섬기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그런 선한 질투가 필요합니다. 불교에서는 새벽 4시나 5시에 새벽예불을 하는데 어찌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참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새벽기도 없이 하루를 살아야 하겠나 하는 질투가 있어야 합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다섯 번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습관처럼 하루 3번씩만 기도해도 몇 년 가지 않아 전 세계는 복음화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늘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알곡 신앙은 교회생활을 철저히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마저 제대로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참 알곡이 되겠습니까? 늘 교회 있든지 집에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2. 성전을 통한 복음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는데 성전에서 나온 천사가 어찌 성전에 대한 영적 진리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구약의 성전은 곧 예수님에 대한 예표이요, 십자가 복음진리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죄인이 예수 복음의 진리로 참 구원의 사람이 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귀한 진리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구원의 진리로 가득합니다. 먼저 성전의 담도 성전인데 여기 들어오려면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제사장 뜰의 번제단이 있는데 이것은 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용서 받았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을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성전 앞 놋바다에서 내 생각과 마음의 죄를 말씀으로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즉 성경을 보아 우리 잘못된 생각을 다 교정하고 씻어낼 수 있어요. 그런 다음 성소 안에 들어가면 떡상과 일곱 등불의 등대와 분향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사장처럼 말씀과 성령과 기도와 찬송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갈라지듯 온전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보좌 앞에서 흐르는 한없는 생명강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참 알곡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피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 공로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추수의 일군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5-16절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여기 천사가 추수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추수의 일군이란 복음을 가진 신약의 일군입니다. 이 일군은 성령의 일군이기도 합니다. 그런 일군이 없으면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기도의 일군은 있지만 말씀이 없으면 말씀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은 있으나 능력이 부족하면 은혜를 위해서 기도하고 부족한 것을 기도로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마9:36-38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셨습니다.


이런 기도 없이 미국 하버드대 나온 사람만 구하려고 하니 되나요? 그랬다가 모두 실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땅의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 복음의 진리로서 구원의 백성들을 많이 하나님 앞으로 이끌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기도로 도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이 오직 예수의 예리한 말씀에 설 뿐 아니라 성전에서 흘러넘치는 은혜의 생수와 성전에 담긴 귀한 복음의 진리 그리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성전의 제사장들처럼 늘 하나님을 경외하여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알곡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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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알곡론 1 (계 14:14)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부터는 우리 영혼을 추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3:11-12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셨는데 여러분은 알곡입니까? 쭉정이입니까?



알곡과 쭉정이의 차이는 바람만 불면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이 왔을 때 끝까지 믿음으로 살면 알곡이고 시험에 들거나 세상 풍조에 따라 갈대처럼 하늘거린다면 그는 쭉정이입니다. 천국은 쭉정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두 알곡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계14:14-20절까지는 두 방향의 추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14-16절이 신자의 추수라면 17-20절까지는 불신자의 추수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이 두 가지가 다 우리 신자의 추수입니다.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의 추수란 추수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가라지나 쭉정이로서 꺼지지 않는 불 속에 태워질 뿐 추수할 이유도 없어요.

이스라엘의 추수를 배경으로 살펴봐도 14-16절이 모맥 즉 여름의 보리나 밀의 추수를 말한다면, 17-20절은 가을의 포도추수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추수는 모두 하나님 백성을 추수함을 예표하며, 이 두 가지 추수를 마친 후 그것을 저장한 후 천국생활을 예표하는 수장절을 지킨다는 점에서 두 추수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알곡 되어 천국 창고에 들여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알곡 만드시려는 두 방향의 추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화의 두 방향을 말한 것이라.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볼 때 여러분에게 많은 은혜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요4:35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셨습니다. 아직 추수기도 아닌데 주님께서 추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우리 신자들의 알곡 신앙을 가리키는 인생 추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천국의 참 알곡이 될 수 있을까요?


1. 오직 예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4절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 여기 인자 같으신 이가 누굴까요? 인자는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 아니라,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인 직분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곳에는 언제나 그의 우리의 왕이시고 구주 되시는 메시야적 직분이 늘 강조됩니다.


그럼 흰 구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 모습에서 구름 타고 오신다는 재림하시는 메시야를 연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는 천군천사와 앞서간 성도들과 함게 오시지 이렇게 혼자 오시지 않습니다. 구름 위에 오직 예수 한 분만 보이는데 이것이 성경 어디에 있을까요?



마태 17장을 보면 흰 구름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그 얼굴과 옷이 해와 같이 빛날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할 때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자고 말할 때에 희고 빛난 구름이 나타납니다. 왜 나타납니까? 덮기 위해서 나타납니다.

마17:5-8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했습니다.


눅9:36에도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했습니다. 흰 구름이 나타나 다 덮어버리고 예수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변화산의 사건은 구름이 엘리야도 모세도 다 덮어버리고, 제자들의 말도 덮어버리고, 제자들의 생각 속의 초막 세 체까지 다 덮어 버리고 오직 예수님과 그 말씀만 나타나는 오직 예수의 사건입니다.


그럼 변화상에서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눅9:31에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그러니까 구원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이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두 사람 개인이라기 보다 그 두 사람이 성경을 암시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즉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로서, 성경의 별명을 모세와 선지자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은 성경을 상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과 함께 구속사역을 말했다는 것은 성경이 바로 예수 구원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즉 성경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했고, 선지서를 통해서 또 그리스도를 여러 면에서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지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를 전한 일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우리 마음에 엘리야를 배우지만 엘리야도 잊어져야 하고, 모세도 배우지만 모세도 잊어야 하고 오직 예수만 남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은 오직 예수님과 그 구원을 말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와 그 복음만 나타나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산상의 사건처럼 오늘 말씀에 흰 구름 위에 예수 한 분만 앉아 계신 것입니다. 즉 다 덮여지고 성경의 결론은 오직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의 알곡이 되려면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여야 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직 알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런 갈급한 마음으로 살아야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수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식적으로는 너도 나도 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렇다고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그러므로 오직 예수라면 오직 예수 한 분만이 나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갈급한 신앙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도할 때도 흰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의 모습처럼 모든 것은 다 가려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엘리야와 모세를 자랑하고 율법서와 선지서를 외운다 해도 예수님을 바로 전하지 않으면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지만 성경에서 예수를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몰랐습니다(고후3:13-1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신앙에 분명히 서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 없이는 참 알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시 14절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여기 금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말합니다. 계4:4에서 금 면류관은 24장로들이 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장로가 아니라 인자 예수가 쓰신 면류관이기 때문에 이는 그리스도의 주되신 왕권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믿어야 합니다. 예수만이 아닙니다. 예수 구원, 오직 예수도 좋지만 예수는 그리스도까지 믿어야 합니다. 즉 예수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 해서 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란 말입니다. 이 고백과 신앙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요, 우리의 주요 왕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믿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정말 왕 앞에 엎드려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눅6:46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진짜 예수를 주요 왕이라고 믿는다면 왕 되신 예수 앞에서 엎드리고 순종하고 다스림을 받아야 비로소 주로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꼼짝도 하지 못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도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바울도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했습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이 많이 가르쳐지고 있지만 그 메시지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봅니다. 마16:15-17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 신앙이 확립되어야 참 알곡이 될 수 있습니다.

3. 분명한 진리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14절 하반 절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두 추수의 공통점은 모두 예리한 낫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려면 일단은 접촉에 성공해야 합니다. 이 접촉은 신뢰와 사랑을 통해서 서로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심으로 대중과 접촉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이 되고 교회까지 출석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진정 구원 받아야 할 죄인임과 아울러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예수가 구주시고 우리 왕이시라는 복음을 정확히 전하고 그 신앙에 적용하게 이글어주지 못한다면 구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알곡 추수를 위해서는 잘든 낫과 같이 예수의 복음을 잘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벧전1:23-25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오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했고, 벧전1:22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한 것을 보아 말씀 안에서 중생과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의 참된 알곡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만이 우리의 구주이시고 우리 왕이시라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져  온전한 천국의 알곡 백성으로 자라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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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천사의 경고 7 (계 14:13)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시간은 “세 천사의 경고” 마지막 7번째 시간으로 ‘주 안에서 죽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스트리아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1893년 발표한 유명한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책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소설입니다. 이 책의 저자를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가 극찬했다지만 그 책이 유명해진 것은 그 책의 내용보다 그 책의 제목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이름이 정작 유명해진 것은 다름아닌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의해서입니다. 헤밍웨이는 전쟁과 인간에 대한 작품들을 엮어 모아 만들면서 ‘전장의 인간’시리즈 제1권의 제목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이 책을 만든 것은 역사적 진실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에서 승리자는 패배자의 기록을 지워 버리거나 왜곡하면서 본말을 호도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은 한 편으로 자신을 대변하여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면 안타깝고 슬프고 어떤 때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꼭 억울하기만 할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죽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예수 믿고 죽은 자가 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진정 복된 죽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그럼 복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뜻대로 죽은 것입니다.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우리는 여기서 복된 죽음을 누가 말씀하셨는가를 봅니다. 하늘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하라.” 하셨는데 기록은 역시 성경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는데 그것은 성경을 암시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복된 죽음을 하늘의 음성이요,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요,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왜 복된 죽음을 말할까요? 그 상징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되게 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대로만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죽어야 복이 됩니까? 성경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성경대로 죽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에 죽어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은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15:3-4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셨습니다. 즉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함으로 우리 완고함을 버리고 또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순종함으로 우리 생각도 이론도 사상도 고쳐지고 우리의 자세도 정리됩니다.


마치 포도나무의 쓸모없는 가지들을 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잘 쳐서 정리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며 받아들일 때 우리가 새롭게 변화됩니다. 반면에 말씀을 믿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래서는 하나님 앞에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바로 죽는 것이요, 복 있게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환영을 받고 영광을 받고 귀히 여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로서 실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잘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지금 죽어야 복 있는 죽음입니다.


지금 이후로” 이 말씀은 상당히 오묘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금 이후라면 그럼 그 이전에 죽은 자는 복이 없다는 말일까요? 요한계시록이 주어지기 전에 죽은 초대교회 성도나 사도들은 복이 없을까요? 그래서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될 말씀입니다.


여기 “지금”이란 성경에서 은혜 받을 때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후6:1-2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때는 언제나 오늘입니다. 지금 받아야 합니다.


히3:13에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그러니까 바로 지금 회개하고 바로 지금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죽음이란 이별 즉 죄와 상관 없이 되라는 뜻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회개하며 죄에 대해서 죽어지기를 원하시지 나중에 잘 믿겠다고 거부하는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안 믿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나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이 시간 하나님 말씀 앞에 순복하는 복된 죽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주 안에서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여기 주 안이란 이미 이루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사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가 아니라 죽는 자라 했습니다. 죽는 자는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 형태의 용어를 썼습니다. 죽음이란 그 성격상 과거형일 수밖에 없는 데 현재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능동태 남성 복수, 그러므로 이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고 나를 못 박으신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날마다 나를 죽음에 내어주며 죽는 현재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나를 꺾고 순복할 뿐 아니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이 죽음의 실재를 성령의 은혜로 경험하는 그 죽음입니다.
 
주 안에서 죽음이란 아무렇게나 죽는 죽음이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불교에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자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아 자체를 부정합니다. 자아란 허구적이고 그릇된 신념일 뿐 그에 일치하는 실제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나, 나의 것, 이기적 욕심, 갈구, 집착, 증오, 악의, 사기, 자만, 이기주의, 그리고 번뇌를 일으킬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문제점은 자아를 부정하다 보니 자신을 목석화시키는 문제점을 야기할 뿐 아니라

그 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령의 은혜로 그냥 죽는데 그들은 수년 수십 년을 그 이론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려고 애쓰다가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거나 이루었다고 해도 자기를 나무나 돌로 만들어버리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는 다른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죽음이란 순종을 말합니다. 야생마가 명마로 탄생하듯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다듬어진 마음이 잘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자는 진실로 복된 자입니다. 그래서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하셨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았던 사람이 죽어지고 이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기록하라 하신 것은 성도의 죽음은 영원히 천국에 기록되는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말3:16). 지금 이 세상에는 예수 몰라도 자기 말도 못하고 자기주장도 못하고 쉬쉬 하면서 죽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죽음이 아니라 복음에 입각하여 내 마음이 순복하여 성령의 은혜로 내 악의 기질이 죽는 바로 그 죽음이 되어 합니다.

4. 완전하게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왜 우리가 참지 못하고 방황하고 슬프고 고통스럽습니까?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환경이 어떻든지 내가 죽으면 편합니다. 아직도 방황하고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아직 덜 죽은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만 없는 것이 아니라 느낌도 없습니다.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 것처럼 잘 죽은 사람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니 문제입니다.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멀리 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내 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일지라도 내 의라면 버려야 할 의입니다. 완전히 죽어야 복이 됩니다.
 
5. 하나님의 방법대로 죽어야 복이 있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즉 이는 그들의 행한 어떤 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한다는 말일까요?


즉 성화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드시 사람의 협력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계22:12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신 말씀도 성화 방편의 고집적인 적용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성례와 순종과 겸손 등에 힘써야 합니다.


벧전4:17에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심판은 전후문맥을 볼 때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성령 강림을 대 심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의 악을 심판하셔서 온전케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2:18에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 심판은 종말론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은혜와 성령으로 진실로 변화되는 그런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죽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에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면 겸손해집니다. 내가 사라집니다. 성령이 임할 때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나에게 실재로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 천사의 경고를 듣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죄악 세상에 묻혀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죄악 되며 불행함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성화를 향한 부르심은 참으로 강합니다. 이건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하늘의 음성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화의 외침으로 들려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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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천사의 경고 6 (계 14:12)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 시간은 “세 천사의 경고” 6번째 시간으로 ‘정죄에서 승리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동안 세 천사의 경고를 통해서 육신과 세상에 속한 자의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함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옥과 같은 고통이 살았을 때도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우리의 양심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천국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눅17:20-21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천국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옥과 같은 정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마음의 지옥 같은 정죄에서 승리할까요?


죄에서의 탈출이 정죄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하신 이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1. 고난 속에서 깨닫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으니” 여기 인내는 그냥 참는 그런 인내가 아닙니다. 여기 인내는 믿음의 시련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열심히 믿음의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약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바로 그 인내입니다. 여기 인내는 믿음을 계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참 내 믿음으로 정착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연단하시고 배우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히5:8-10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대제사장이 되려면 인간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봐야 하기 때문에 다 고난 속에서 배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우리를 인내 속에서 가르치십니다. 예를 들면 시련과 고통 속에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이 얼마나 고통인지도 체험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뼛속 깊이 깊이까지 들어가는 진짜 지식입니다. 그래서 불같은 연단이 있습니다.


항상 형통하고 평안하다면 누가 회개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을 통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구로 믿으며,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내이고 연단입니다.

그래서 벧전1:6-7에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신앙생활 정신 차려서 해야 합니다. 속히 순종할수록 복입니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2. 믿음과 사랑과 거룩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불 같은 시험을 이깁니다. 여기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계명은 곧 아버지의 계명입니다. 요15:10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셨는데 여기 아버지의 계명이란 무엇일까요?


요일3:23에 “그(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하나님)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예수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첫째 믿음, 둘째 사랑, 그런데 하나가 더 있습니다. 거룩입니다.


민 1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옷소매에 청색끈으로 꽃모양처럼 술을 만들라 했는데 술을 달게 하신 의미가 있어요. 민15:39-40에 “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주신 목적은 예수 믿고 하나님만 경외하고 서로 사랑할 뿐 아니라 죄에서 떠난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 같은 고난 속에서 연단하시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빨리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벧전1:14-16에도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자식처럼 우리에게도 거룩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과도 같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죄에서 떠난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련 가운데 성도는 더욱 하나님을 투철하게 섬기고 사랑하며 죄에서 떠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을 향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가 전부가 아닙니다.


3. 그리스도의 복음에 서야 합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켜야 정죄의 고통에서 승리한다. 예수는 구원이요, 그 믿음의 내용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복음입니다. 예수의 복음의 첫째는 늘 강조한 대로 죄를 사신 속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죄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피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속죄의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롬4:23-24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어요. 아버지께서 탕자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그래서 롬 5:17-19에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했습니다.


이 속죄는 십자가에서 단 번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히9:12에서는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이미 우리 죄를 다 갚으셨단 말입니다. 이 피를 우리 양심에 뿌려야 합니다. 피를 믿는 것이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안함과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9:13-14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절) 한 것입니다. 12절 말씀이 정죄로 말미암는 양심의 고통에 대한 정답입니다. 그동안도 강조했지만 12절 말씀이 깔끔하게 정리해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 사랑하시기에 영육 간에 이런 연단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사랑하며 죄에서 떠날 뿐 아니라 온전히 십자가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인내의 믿음으로 환난에서 승리하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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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천사의 경고 5 (계 14:10-11)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 시간은 “세 천사의 경고”라는 제목으로 ‘양심의 고통’에 대해서 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거룩입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것도 바로 거룩입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온전히 함께 하시고 가장 귀히 쓰임을 받습니다. 반면 가장 어리석은 것은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시록의 본문을 통해서 세속에 도취해 살아가는 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과 같은 고통이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 즉 육체 따라 사는 자에게, 또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듯 세상 탐욕을 위해 사는 자(골3:5-6)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모른 자에게 해당 되지만, 신자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거나, 육신을 따라 사는 자의 양심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이런 고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양심이 어떤 때 더 예민해질까요?


1. 거룩을 접했을 때입니다.


10절 중반 절 “거룩한 천사들 앞과” 여기 천사가 나오는데 그냥 천사라 하지 않고 거룩한 천사라고 거룩을 강조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정의를 집행하는 천사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왜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불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우리 영적 체험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의 복음을 잘 알지 못했을 때 우리 심령이 가장 두려웠던 것이 거룩이었습니다. 범죄한 아담이 두려워 떨었던 것처럼 범죄한 심령은 가령 교회가 두렵습니다. 세상에서는 범죄했어도 자유롭던 그 심령이 교회에 나오면 죄의식이 생겨나면서 두렵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예배의 순서를 맡았다든지 특히 설교와 같은 중요한 순서 담당자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사랑하는 양떼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말인가? 가령 오늘 화를 내고 양심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데 강단에 올라가야 한다든지 환자 심방을 해야 한다든지 그럴 때 가장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막히고 말슴이 막혀서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 거룩은 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게 생각한 그 대상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혹은 신령한 주의 종들을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이 때 자신이 더 돌아보아지기 때문에 내 양심이 더 예민해질 수 있습니다. 이 때 양심이 답답해지다가 더 심하면 마음에서 뜨거운 유황불과 같은 것이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더 심해지면 거의 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복음을 알지 못하고 천국 길을 나섰다가 큰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미한 거룩의 대상 앞에서도 그런데 예수님의 피 공로 없이 어떻게 죄인들이 천국의 빛을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인도의 성자라고 불려지는 썬다씽의 간증집을 보면 한 악인이 죽어 영의 세계에 들어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사와 성도들이 저를 도와주려 하지만 그는 심성이 비뚤어져 있어서 하나님을 욕하고 불공평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한 천사가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시다. 인간이 완악하여 얼굴을 하나님에게서 돌리고 지옥을 내 집으로 삼은 것이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영원히 행복된 교제 가운데서 살게 하려고 창조하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그 악인은 원기를 되찾고 두 천사를 따라갔지만 저가 천국의 입구에 도달하여 거룩하고 빛으로 충만한 장소와 거기 살고 있는 영광스런 축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의의 태양이신 주의 광채가 그의 모습을 밝게 비추자 그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급히 도망하여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다가 거꾸로 무저갱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선다씽에게 주의 음성이 들리기를 “보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아, 아무도 여기 오는 것을 금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이 사람을 막은 사람이 없고 아무도 여기서 나가라고 명령한 사람도 없다. 이 거룩한 곳에서 도망하게 만든 것은 그 사람의 불결한 생애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까닭이다”(요3:3) 하셨다는 간증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지상에서 해야 합니다. 죽어서는 늦다는 말입니다. 가책을 받아도 지상에서 받고 방황해도 지상에서 방황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대책을 찾고 참되고 바른 예수 복음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죄인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받으셨고, 또 주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셨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뻔뻔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양심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접하더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더욱 담대한 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높은 도덕적 표준을 가졌을 때입니다.


10절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자들이 대속주 되신 어린 양 예수 앞에서도 그런 고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불신자에게 적용했을 때 어린 양 예수의 피 공로를 믿지 않아서 그런 고통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적용했을 때 어떻게 나를 대속하신 어린 양 예수 앞에서 그런 양심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도덕적인 표준으로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이 표준은 각인의 생각에 따라서는 구약의 율법보다, 산상보훈의 천국민의 율법보다 더한 표준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 앞에 그만큼 믿음의 반응을 하지 못했거나 그 주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볼 때 율법이 주는 정죄보다 더 큰 정죄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정죄감은 중세기 성도들이 많이 겪은 영적 시험인데 예수님의 고난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 심정을 품고 따라가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여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 극심한 정죄감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앞서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또 다른 율법 삼으신 적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롬8:33-35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했습니다.


3. 피의 복음을 알면서도 담대히 적용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 피 공로 말고는 믿을 것이 없음을 깨달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뻔뻔하리 만큼 담대하게 주의 공로를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고, 롬5:1-2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왜 그렇게 믿습니까?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수 믿는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 받기에는 무엇인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는 하지만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잘하고, 헌금도 많이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확실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 그위에 나의 공로와 선한 행위가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엡2:8-9을 보여주며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신 말씀을 제시하며 설명해 주었어도 그 목수는 어쩐지 믿음으로만 구원받기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 출입문짝을 그 목수에게 맞추었습니다. 목수는 하나님의 집에서 쓸 성물이라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문이 다 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목수를 찾아갔습니다. 완성된 문짝을 한참 바라본 목사님은 목수의 솜씨를 칭찬하더니 문득 생각이 난 듯 문짝 위에다 사과 궤짝을 덧붙여 못을 잘 박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수는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잘 만들어 드렸는데 문짝에다 왜 사과 궤짝을 붙인단 말입니까?" 이때 목사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완전한 걸작품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더하거나 감하여도 안 됩니다. 다만 십자가를 믿으면 인간의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거기에 내 의가 있는가?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갈 의가 있는가? 그런 자신이 있는지 돌이켜 보지 말고 나를 의롭다 하신 예수 피 공로로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피 공로는 피 공로이고 회개는 회개입니다. 피 공로는 언제고 믿어도 좋을 전천후입니다. 그러므로 피 공로를 믿으면서 회개도 하는 것입니다.


4. 자신의 죄를 씻지 않을 때입니다.


11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여기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표에 대해서는 앞에서 많이 언급했으므로 설명을 생략합니다. 이처럼 죄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보혈의 공로로 큰 정죄는 막지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완전한 평안은 죄를 씻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5. 율법의식이 존재할 때입니다.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 밤낮은 고통이 심하다는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일반적인 징계는 밤낮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시30:5에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했습니다. 혹 양심의 고통일지라도 잊어버리면 잠잠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환경일 때 이 양심의 고통은 밤이고 낮이고 멈추지 않습니다. 그 특정한 환경이란 언제일까요? 그것은 말씀의 환경입니다. 시19:2-4에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여기 날은 낮을 말하고, 밤은 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운동력은 주야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말씀 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양심의 고통이 심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양심의 고통이란 초신자가 느끼는 고통이 아닙니다. 율법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는 자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시험입니다. 우리가 예수 복음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율법만 안다면 마치 예수님 시대의 율법주의자들처럼 양심에 걸려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큰 시험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짐승의 표 666을 받은 고통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불신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신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양심의 고통입니다. 여기서 피할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 공로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과 온전한 회개로서 진정한 양심의 평안과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한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세 천사의 경고 4 (계 14:9-10)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이 시간은 “세 천사의 경고”라는 제목으로 ‘양심의 고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119:71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은 양심의 고통입니다. 다른 고통은 다칠 때만 아프지 시간이 가면 뇌에서 모르핀을 보내 아픔을 경감시키지만 양심의 고통은 그 아픔이 줄어드는 법이 없고 더욱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지옥 불과 같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도 넓은 차원에서 보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즉 짐승의 표를 받은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아직 육신을 따라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이고 고통인지 우리에게 깊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 양심의 고통은 누가 당하나요?

1. 이 고통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당하는 고통입니다.


9절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누구든지”라고 했어요. 이 '누구든지' 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라는 뜻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일지라도 그런 의미도 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죄에 대한 양심이 무뎌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한 즐거움의 대상이죠. 세상 사람들도 양심의 고통이 있긴 합니다.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할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상당히 드물고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의 복음으로 그 양심을 평안하게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죄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 양심은 아벨처럼 하나님을 향해 그 피 값을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계18:4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여기 보세요. 다른 백성이 아닙니다.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벧전5:8-8에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주 안의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알고도 세상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비극 속으로 던져 넣는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히6:4-6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 빛은 진리 혹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그러면 아직 미숙한 믿는 자들은 희망이 없나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다음 9절에서 이렇게 위로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이것이 원리이지만 아직 거기까지의 타락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타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의 중간에서 방황할 수 있고 거기서 당하는 양심과 삶의 고통은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거듭 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아직도 하나님과 세상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고통을 신자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아주 위험한 과정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면 지나친 정죄에 빠져 사탄에게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진리를 찾아 방황하다가 이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의 문제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당하는 고통이라.

2. 이 고통은 마음과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가 받는 고통입니다.


다시 9절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여기 짐승은 육신을, 그의 우상은 육신이 동경하는 세상적인 죄악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마는 인격, 손은 행위, 그러니까 아직도 죄를 벗어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가리킵니다. 표는 인증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넌 육신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자에게 고통이 임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경고했습니다. 벧후2:10-14에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 저주의 자식이라

그러나 택한 백성들도 이런 양심의 고통과 삶의 징계를 받지만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체험하고 또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딤후3:1-5에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전6:10에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룩함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심히 좁은 문의 과정입니다. 마치 진주가 고난 속에 만들어지듯 우리 성도들도 고난 속에서 참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666표를 받는 자의 고통은 바로 세상을 따르는 자가 받는 고통임을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이 고난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경감되지 않는 그런 고난입니다.


10절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여기 "그도"라는 낱말 속에 이 고난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란 극심한 고난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고난을 잔으로 표현했습니다.


마 26:27에 “또 잔을 가지사 - 그들에게 주시며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고, 마26:39에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포도를 짓밟아 포도주를 만들 듯 짓밟으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시66:10-12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 원수에게 머리를 밟힌다는 것은 패배를 말합니다. 포로의 고통이란 인간도 아닌 취급을 당합니다.

다음에 포도주를 만들려면 밟기만 합니까? 누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시32:4-5에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이것이 심령의 고통입니다.


그 다음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포도주는 물에 희석해서 음료로 마시는데 그렇지 않으면 매우 독합니다. 그래서 많이 마시면 속이 매스껍고 취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시는 발효액 효소음료도 보통 10배 이상의 물에 타서 마셔야 합니다.

 
이처럼 징계 속의 우리 심령은 순수한 고통 그대로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양심과 율법이 대행하고 있는데 이들의 칼날은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만나기 전에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느냐며 호소했습니다. 이 죄의 고통을 아는 자만이 죄를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두려운 줄 아십시다. 죄 두려운 줄 아십시다. 천국 가는 길 소풍이 아닙니다. 세상 등지고 내 십자가 지고 주를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어정쩡하다가는 큰 시험 당합니다. 그러니가 양심의 고통이란 주님께서 이 멸망할 세상에 마음 두지 말라고 제촉하시는 채찍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보혈이 공로에 안심할 뿐 아니라 속히 세상을 벗어나 장망성을 떠나는 기독도처럼 참된 하늘 백성 되도록 진실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세 천사의 경고 3 (계 14:8)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이 시간은 선교헌신예배지만 지난 번에 신선교사님이 강단을 맡아주셨으므로 따로 본문을 잡지 않고 계속해서 말씀을 강해해 나가면서 본문을 선교적 관점에서 터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세 천사의 경고”라는 제목인데 부제로는 ‘세상에 대한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은 이 세상 나라가 멸망 당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선교적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세상 나라는 철저히 멸망 당해야 하고 그들 마음 속에 예수 복음을 심어 알곡에 이르게 양육해야 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목표요, 선교의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둘째 천사가 첫째 천사의 그 뒤를 따라 날아가면서 외친 말인데 여기서 세상에 대한 정체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즉 계시록에 나타난 바벨론은 세상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악이란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거역한 거대한 악입니다. 마치 역사 속의 바벨론이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욕보이고 하나님의 도성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고 잡아갔듯 지금도 세상 바벨론은 쉬지 않는 악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세상의 진정한 정체란 무엇일까요?


1. 예수 안에서 보면 이미 무너진 성입니다.


이게 놀라운 것입니다. 8절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이 말씀처럼 바벨론은 무너진 성입니다. 이 무너졌다는 말씀만 들어도 어떤 느낌이 오지요. 사람들이 무너진 줄 모르고 있는데 무너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느낌, 또 무너질 수 없는 거대한 도성인데 무너졌다는 것 등의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무너졌다는 말의 원문은 문법적으로 부정과거형입니다. 부정과거형이란 과거에 한번 딱 일어나고 끝나버린 것, 즉 행동이 연속되지 않는 단회적 사건, 단순과거형을 부정과거형이라고 합니다.

이 부정과거형을 두 번에 걸쳐서 반복하고 있다는 것, 즉 2는 증거의 수로서 이것이 어떤 진리임을 나타내줍니다. 그런데 2는 보통 복음과 증인이나 증거를 나타내는 수이므로 바벨론 즉 세상이 무너진 것은 이미 성취된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 반복함은 곧 "이건 진리다. 믿으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천사가 첫째 천사의 뒤를 따라 연속적으로 말한 것은, 드라마틱한 표현의 기교가 아니라 이 역시 앞의 나타났던 우리를 구원한 복음과 같이 이것도 복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무너졌습니다. 그토록 사람들을 미혹하고 통치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멸망으로 인도하던 세상은 예수 안에서 무너졌습니다. 구약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이미 우리에게 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으로 치면 다 무너지고 말 도성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멸망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사조와 타락의 풍조, 세상의 비기독적인 요소, 이방 종교, 2슬람, 공산주의 등 다 하나님이 우리엑 붙이셨다는 확신 가지세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가 바벨론이 멸망함으로 해방되어 돌아온 것처럼 예수 안에서 우리 성도들은 해방을 누릴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갈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즉 예수 안에서 보면 우리만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세상도 우리를 대하여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이걸 진리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건 나도 세상에 대하여 상관이 없고, 세상도 나에 대하여 볼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팎으로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놀라운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나도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세상도 나를 유혹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유혹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으면 세상도 나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틈을 보이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100% 이깁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세상이 무너졌다는 이 진리에 먼저 서시기 바랍니다.
 
2. 세상은 어마어마한 권세와 영광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큰 성 바벨론”이라 했습니다. 역사 속의 바벨론을 보면 바벨론은 BC 3000년 이전에 정착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유명한 왕은 함무라비(BC1792-1750)로서 엄격한 법전을 편찬했고, 느브갓네살 1세 (BC 1124-1103)는 바벨론을 수도로 삼았고, 신바벨론은 제국은 BC 625년 시작 느브갓네살 2세 (BC 605-562) 때 최고 전성기를 누려 앗수르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이때가 주전 580년이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이 거대한 제국과 아울러 거대한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바벨론성입니다. 성경에 바벨론성을 큰 성이라고 한 것처럼 성의 규모는 아주 컸습니다. 대개 성은 4각형 모양이었는데 성의 한 변의 길이가 120스타디온, 둘레가 480스타디온, 그러니까 미터법으로 고치면 둘레의 길이가 약 90km가 되는 성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둘레가 90km면 적지 않는 도시인데 수천 년 전에 인력이나 동물을 이용하여 그 성을 만들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바벨론성을 향해 유브레데스강이 흐르는데 강물은 바벨론 성에 도착하면서 3갈래로 나뉘어져 한 강은 성안으로 흐르고, 다른 두 갈레는 성벽주위를 돌아서 흐르게 하여 누구도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거기다 물가에 우뚝 선 성벽의 두께가 50페키스인데 1페키스가 약 60cm이므로 성벽의 두께가 30m입니다. 그리고 성벽의 높이는 200페키스, 즉 약 120m입니다. 이런 성벽이 또 다시 이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 둘레로 유브라데스강이 흘러 아무도 그 성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성벽 아래를 판 웅덩이를 해자라고 하는데 그 깊이가 깊어 적이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성벽의 벽돌은 몰타르 대신에 콜타르를 사용하여 방수성이 강했고, 성벽 위 역시 넓어 가옥을 연이어 마주보게 지었으며, 성벽을 돌아가면서 성문이 100개가 있었습니다. 이 문들은 녹슬지 않고 견고한 청동으로 제작되었고, 문의 바깥쪽에는 다리를 놓아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도개교였습니다.

 
성 안의 집들은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었지만 3-4층의 튼튼한 건물로 밀집되어 있었고, 성안의 길은 도시계획이 잘 되어 바벨론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느브갓네살이 그의 왕비를 위해 궁전 위에 만든 공중정원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에 속할 만큼 호화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멸망합니까? 바벨론 왕이 하나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으로 술을 마시면서 하나님을 능멸할 때 하나님께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보내서 그 성을 함락시킵니다. 그 때 가장 큰 문제가 성을 둘러싼 해자 즉 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군사들을 시켜서 유브라데스강 상류를 막고 물줄기를 360갈래로 돌려 물이 줄어들자 술에 취한 바벨론성을 일거에 정복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큰 성 바벨론과 같습니다. 계시록에서 큰 성이란 물리적으만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만큼 미혹력이 강력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에 빠뜨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마귀가 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가지고 예수님을 미혹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세상의 지배 하에서 죄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이 예수 안에서 무너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는 세상도 더 이상 힘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어나 복음과 성령으로 빛을 발하면 세상도 바벨론성이 무너지듯이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경외하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물줄기를 끊고 대신 말씀과 성령의 물줄기를 보내야 합니다. 예수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기도해서 이 땅에 뜨거운 성령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강성한 세상도 힘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대하7:14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우리 마음도 사회도 세상도 다 고쳐주십니다. 지금 죄악이 발달해 가는 것도 우리들이 할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은 사람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합니다.


그리고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이 구절만 읽어도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아시겠죠? 마치 역사 속의 바벨론이 모든 나라를 진노로서 짓밟은 것처럼 세상 역시 많은 사람들을 죄악으로 미혹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나라”는 넓게는 국가, 좁게는 우리 각인에게도 해당 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나라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세상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음행"이란 말이 나오는데 음행이란 육신적인 음행을 포함하여 세상을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의 정절을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약4:4에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했고


엡5:5-7에서는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바로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란 말이 나오는데 포도주가 생산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가 수확이 되면 그 포도를 포도주 틀에 붓고 사람이 올라가서 짓밟습니다. 여기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잘 짓밟을수록 좋고 많은 포도주가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 받게 만들더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패역한 세상에서 구원 받아라. 나와라. 그리고 변화시켜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진리 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세상의 정체를 분명히 깨닫고 썩어질 세상에 마음 두지 말고 항상 승리의 복음에 굳게 서서 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와 세상은 십자가 아래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나를 비롯 땅 끝까지 이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선교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장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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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달은 열매’, 특히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요한계시록 2장에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나오는 열매에 대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겠습니다.

 

에베소는 B.C 130년 경에 로마제국에 편입되었으며 소아시이의 수도였습니다에베소는 상업의 요충지였으며 중요한 고대 유물인 대극장과 아데미(아르테미스신전 등이 있습니다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2차 전도 여행 중에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사람들과 대립하며 일대 소동이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3년간 에베소 지역에 머물며 눈물로(행 20:31,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교회를 세웠으며에베소 교회는 디모데가 목회한 장소 였으며사도 요한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사면되어 밧모섬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에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기록한 것으로 추정)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칭찬과 책망그리고 권면이 다 포함 되어 있는데먼저 칭찬이 말씀이 나오는 오늘 본문 1절을 읽어 드립니다.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아멘.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라고 했는데편지하라고 명령은 누가 한 것이고명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기본적으로 요한 계시록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라고 시작하기 때문에 편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명령을 받는 사람은 사도 요한일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좀 더 정확한 내용이 1장 9~20절에서 나오는데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유배되어서 섬에 갇혀 지냄주의 날(부활하신 날, 안식일)에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습니다그 음성은 (요한)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이었습니다사도 요한은 이 음성의 주인공을 보았고그 분은 인자 같은 이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러면 편지를 보내라고 하신 분이 누구인지 명확해졌습니다본문 1절 첫 부분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이 말씀에서 사자라는 단어는 원문에서는 천사(앙겔로스, angel)’이고, ‘편지하라는 단어는 기록하라(그라폰, write)’로 되어 있습니다.

 

원문 그대로 번역한 것이 훨씬 더 좋았을 겁니다신천지는 이만희가 사자라고 주장합니다이만희가 천사가 되었다는 것일까요원문을 보여주며 사자가 천사라고 말해주면 신천지는 자기들은 원문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믿지 않고 오직 개역한글성경만 진짜라고 믿는다고 우깁니다요한계시록 읽다보면 신천지가 장난쳐 놓은 일들 때문에 여기저기서 화가 납니다.

 

1절에서 원문대로라면 교회마다 고정 배치된 천사가 있는 것인가천사가 왜 교회에 머물고 있나?라는 의문이 생깁니다히브리서 1장 4절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는 우리를 돕기 위해 보냄을 받고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교회에 천사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그러면 인간인 요한이 어떻게 천사에게 편지를 써서 전달 할 수 있나천사가 인간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수행하는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라는 의문도 생깁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천사가 교회의 지도자나 목회자 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저는 이런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천사에게 보내기 위해 기록하라는 것이 원문의 내용이기 때문에 말씀 그대로 생각해야지 성경 내용을 임의대로 변형시키면 안 됩니다.

 

요한은 자기가 본 그대로의 사실만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기 때문에 편지하라가 아닌 기록하라는 말씀에 충실하면 됩니다일곱 교회에서 그 기록된 내용이 전달되는 방법은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겠지만그 내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실체인지 아닌지는 영적인 전달이 되어야 말씀의 권위가 온전해집니다.

 

요한이 기록한 내용을 에베소 교회에서 지도자이든성도든누군가가 읽을 때에 그 말씀이 진리임이 깨달아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활이시고천사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편지를 읽는 에베소 교회의 사람들에게 그 내용의 진위를 올바르게그리고 온전하게 깨달아지는 영적 분별이 되도록 충실한 메신저 역활을 할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생각하면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보내도록 기록하라는 말씀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저는 성서신학인 신약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면밀하게 잘 살펴보고 전달하려는 편입니다여러분은 사자편지하라는 번역이 본문과 다르다는 사실정도만 상식적으로 알고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1절 후반부에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앞서 1장 29절에서 일곱별은 일곱 천사요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씀 하셨는데인자 같은이곧 예수님은 자신의 권능을 상징하는 오른손으로 일곱 천사들을 붙잡고 계시고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고(항상 함께하심계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천사들을 통해 교회를 굳게 붙잡아 주시고 계시며교회와 동행하여 주시기를 멈추지 않는 분이심을 명확히 밝혀 주시는 이유는이 편지를 읽는 교회들이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켜가고 계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소망을 잃지 말라는 강력한 응원과 격려를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런 응원과 격려를 담은 칭찬이 말씀이 2~3절에 있습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아멘.

 

너희들 에베소 교인들아정말 잘 수고 많았다잘 참아내 주었다잘 견디고 게으름 피우지 않은 것을 내가 잘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 하신 이런 칭찬의 글을 읽은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한량 없는 보살핌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바다가 되었을 겁니다사람은 자신의 진심과 노력이 인정 받을 때 가장 큰 보람과 감격을 느낍니다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런 기분이었을 겁니다.

 

에베소 교회가 참고수고하고게으름 피우지 아니한 것만 잘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자칭 사도라고 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거짓을 밝히 드러낸 것도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믿음헌신열심 등에서 뛰어난 본보기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우상의 도시이며 향락이 넘쳐나는 도시에서 이런 교회가 세워진 것은 교회 설립자인 바울의 남다른 수고와 교인들의 눈물어린 기도가 어우러진 아름 다운 열매였습니다.

 

아무리 오랜 고난의 시간이 오랫동안 흐른다고 하여도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며아무리 거짓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여도 진심은 반드시 통하게 되어 있으며아무리 핍박과 환란이 몰려와도 믿음의 수고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로 수확하는 기쁨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에베소 교회가 이런 사실을 증명해 보여 주었습니다.

 

3절 후반부에 (에베소 교회)가 내 이름을 위하여 견녀낸 것을 내가 아노라라고 했습니다이 대목을 읽는 동안 성도들은 함께 부여잡고 감격하여서 울다가 웃다가 찬앙하며 기도하며 큰 영광을 돌렸을 겁니다.

 

이렇듯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이루어질 계시의 책이지만 오직 예수” 이름 하나를 굳게 붙잡고 묵묵히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 주는 강력한 소망의 책입니다상황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의 책입니다예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시는 책입니다.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말씀 하신 수고와 인내와 열심의 칭찬이 우리 교회의 미래에도 반드시 내려지기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교회의 주인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 끝날 까지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으십니다절대로 교회와 성도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그리고 항상 주권과 권능을 행사하셔서 거룩과 영광으로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일곱 별을 오른손에 붙잡고 계시며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인자 같은 이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교회와 항상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지금 당장은 힘들고 답답하지만 묵묵히 맡은 자리에서수고하고인내하고열심을 내고악을 물리치고거짓을 멀리하는 일관된 신앙을 유지하셔서 하늘로부터 칭찬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최고의 상급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축복합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전하는 편지에는 칭찬에 이어서 책망의 말씀도 있습니다. 4~6절을 읽어 드립니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아멘.

 

에베소 교회에 첫 번째 책망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처음 사랑이 무엇일까요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처음 에베소 교회가 세워졌을 때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 온 마음으로 함께 예배하던 그 감격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던 그 열기교회의 구석 구석을 자발적으로 닦고 가꾸어 가던 그 헌신고통스러운 핍박과 환란속에서도 과감히 죽기까지 순종하던 그 충성부활 영생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소망으로 언제나 기쁨이 넘치던 그 행복이 모든 것들이 처음 행위들이었습니다.

 

이 처음 행위들을 가능하게 했던 토대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증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에베소 교회가 수고와 인내로 칭찬 받았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처음 행위가 열정적이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어느시점부터떨어졌는지도 모르게 이런 처음 행위들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이런 처음 행위를 되찾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권면 하면서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처음 행위,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며옮긴다는 것은 더 이상 예수님이 거기에 함께 있지 아니할 것이며천사들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주인되시는 예수님이 떠나버리면 더 이상 교회는 교회가 아니게 됩니다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교회는 더 이상 살아있는 교회가 아닌 것이 됩니다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은 마치 이스라엘 성전이 멸망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가신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함께하지 않겠다떠나겠다내버려 두겠다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이런 의미를 지니가 촛대를 옮긴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이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징계와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으로부터 버려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정말 두렵고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전처럼 주인되시며 친구 되시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면 오직 회개하는 것 뿐입니다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에 다른 것은 다 필요하지 않습니다처음 사랑처음 행위의 회복은 오직 회개뿐이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어디서(언제)부터 처음사랑과 처음 행위가 떨어졌는지 점검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합니다.

 

6절에 또 다른 책망이 나오는데에베소 교인들이 니골라 당의 행위를 따랐다는 것입니다니골라당의 행위가 무엇인지는 여러 해석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우상숭배를 하거나 이교도의 풍습을 따라 음란을 저지르는 행위이단사상에 빠져서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려 하는 행위거짓에 속아 넘어가서 배교하는 행위 등을 말합니다니골라당의 행위는 나쁜 생각다른 복음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들이 혼합된 것을 말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를 따르는 것은 오직 예수 구원의 진리를 저버리고 믿음에서 이탈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당연히 책망 받을 만한 잘못된 행동입니다기회 조차 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책망할 것도 없기 때문에 이 책망은 이미 은혜를 받았던 자들에게 용서와 돌이킴의 기회를 주기 위한 책망입니다.

 

칭찬을 받고 눈물바다를 이뤘던 에베소 교인들은 책망을 받고서는 심히 부끄럽고 가슴이 뜨끔했을 겁니다이러다가 교회가 사라지고버려진 고아처럼 진노의 대상이 될까봐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모든 교인들은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 엎드려 통회하고 자복하며 참된 회개의 시간을 가졌을 겁니다.

 

신앙생활은 처음과 지금과 나중이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라 사는 길 뿐입니다성령을 무시하거나 소멸(거부불순종)되어 버리면 자꾸 딴 생각딴 길딴 마음이 가득하여 좋아보이고 즐길거리가 많은 세상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에베소 교회의 칭찬과 책망이 우리 교회내 믿음우리 가정의 화목일 이루는데 잘 적용되어야 합니다우리 각자는 칭찬 받을 만한 것도 분명 있지만 처음 사랑처음 행위를 잃어버려서 책망 받을 만한 일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처음 행위로 돌이키는 방법은 오직 회개 뿐이라는 성경 말씀을 모른체 해서는 안 됩니다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며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소망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에서야 5월의 주제인 열매가 나옵니다우리 함께 7절을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아멘.

 

7절에는 권면과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먼저 권면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이 권면은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한 후 맨 마지막에 마치 후렴구처럼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직접 내려주신 말씀의 권위가 가득 담긴 말씀입니다이 편지가 사람의 생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겸손한 자세로 읽고받아 들이고잊지말고 지켜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귀 없는 자들이 되어서 칭찬과 책망과 권면 약속의 말씀 듣기를 거부 하거나가볍게 여기거나읽고도 아무 생각없이 이전과 동일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이중적인 암시가 담긴 말씀입니다어느 시대나 성령의 음성을 들을자는 들을 것이고 듣지 않으려는 자는 듣지 않을 것입니다.

 

인자같은 이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으로 약속하셨고기록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이기는 그가 되어야만 낙원에도 갈 수 있고거기서 생명나무 열매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습니다그러면 반드시 이기는 그가 바로 내가 되고우리 가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무엇을 이겨내야만 낙원에 갈 수 있다는 말일까요누가 이기는 그가 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이겨야 되는 것을 말하기 전에 누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아무나 이기는 그가 되지 못합니다누가 이기는 그가 될 가능성이 있는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듣지 않으면들리지 않으면듣고도 무반응 이면 이기는 그가 되기는커녕어떠한 이기려는 시도 조차도 진행되지 않습니다성령은 우리에게 이기는 것에 대해 끊임 없이 말씀하고 계시지만내 스스로 듣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이기는 길로 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부를 하는 것이며이기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불순종의 행동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하지만 귀를 열고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자에게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내용을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이겨야 하나요무엇을 이겨내야 하는지는 각자개인의 사정상 다를 수 있습니다일반적으로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더러운 죄와 악거짓불순종교만시기질투모함게으름불순종나쁜 생각과 품이 없는 말과 행동모든 것에서 이겨내야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이 편지의 내용을 기초로 이겨내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일곱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① 우리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끝까지 유지되도록 이겨 내야 합니다.

     ② 악한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③ 예수 이름으로 참고 견디고 게으름을 이겨내야 합니다.

     ④ 처음 사랑처음 행위를 버리지 말도록 오직 회개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⑤ 촛대를 옮기시는 분을 두려워 하며 죽도록 충성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⑥ 니골라당의 행위(우상숭배음란가증한 행위배교...)와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⑦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를 열고 들으며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2천년 전에 에베소 교인이었다면 이렇게 이겨내면 됐을 겁니다이렇게 이겨내야만 낙원에 들어가고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자가 될 수 있습니다우리는구원이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고그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성령으로 사는 자들이기게 당연히 성령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성령은 우리의 귀에 끊임 없이 열매 맺는 방법이기는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를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고진심으로 회개하며무엇이든지 말씀 하시는데로 고치고 바꾸고 돌이키겠다는 결단으로 나아가면 그 길이 곧 이기는 길이 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낙원에 들어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영원한 영광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그렇게 되려면 인자 같은이가 말씀하시고 성령이 귀 있는 자들에게 말씀 하시는 칭찬과 책망과 권면과 약속의 말씀을 머리로 듣고가슴에 새기고말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으로 여러분을 축복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일평생 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성령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자 갈망하시기를 축복합니다성령의 음성을 민감하게 듣고 반응하는 귀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성령 안에서 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돌이키고 변화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악과 죽기까지 싸워 끝내 이겨내시는 승리자가 되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드시는 면류관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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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우리 모두를 믿음 안에서사랑 안에서소망 안에서굳게 붙들어 주옵소서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 있는 자로끝까지 싸워 이기는 자로 살아가도록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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