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어지는 일곱 대접 1 (계 16:1-3)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2.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이라는 제목으로 대접재앙의 본론, 즉 오늘은 첫째 대접과 둘째 대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계시록의 성격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모두 우리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관심 가지고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즉 대환난의 후삼년 반에 일어나는 극한 환난이라, 혹은 대환난 전 신자는 올라가고 유대인과 불신자들이 당하는 재앙이라, 혹은 알곡 성도를 다 거두어 가신 후의 찌꺼기와 같은 사람들이 받는 재앙이라, 혹은 대환난 시대가 끝날 무렵에 일어날 대 재앙으로 보는 등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세대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주장으로 본 재앙에 전제되어 있는 복음의 힌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본 대접 재앙은 출애굽 사건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어 단순한 재앙이 아닌 구속사적인 바탕에서 전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앙의 집행이 시종일관 거룩하게 하는 성전의 음성에 의존되고, 성도와 선지자들의 피를 취한 자에 대한 심판 즉 세속에 대한 심판이 암시되어 있고, 구속의 상징인 제단이 확증하고, 여러 곳에서 회개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지 않은 자의 복, 즉 거룩의 복을 강조함이라든지, 세속의 상징인 큰 바벨론이 무너짐이 그 좋은 예입니다.


마치 애굽의 열 재앙이 애굽에게는 심판이요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된 것처럼 우리 마음의 악이 심판을 받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대접재앙은 예수님께서 요18:11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신 이 말씀이 그 힌트입니다. 그러니까 대접은 고난을 가리킨다는 이 진리가 대접재앙 해석의 키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를 온전케 하시는 징계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히12:8-10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베드로도 벧전1:6-7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징계의 사랑이 이토록 귀합니다.


이처럼 대접재앙이란 고난의 연단을 받을 때 변화되어져 가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자기 잘못을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며 인생의 목적이 바뀌고 자기를 잊고 주를 사랑하며 주를 다 위하지 못한 마음에 몸부림치며 심지어 죽음을 넘어 주와 따로 거하기를 사모하고 그 무엇도 주님 사랑에 방해되지 않는 상태로 발전해 가기를 원하는 것이 대접재앙의 흐름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징계의 고난이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에 견딜 수 없어 합니다.


2절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첫째 대접을 땅에 쏟자 짐승의 표 받은 자와 우상숭배자에게 악하고 독한 헌데가 나는 장면입니다.


여기 대접은 징계의 고난입니다. 땅은 아직 세속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죄인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여기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666에서 배웠듯 아직도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죄인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의 우상은 육신이 동경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666은 불신자들 뿐 아니라 믿는다면서도 아직까지 세상적으로 살아온 육신의 속한 우리들 속에도 있는 죄의 인격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룩과 세속이라는 두 요소가 아직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납니다. 그러니까 아주 괴로워하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의 사랑을 받으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징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즉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길 앞에 이제까지 육신이 원하는 대로 죄의 인격대로 살았음을 슬퍼하고 세상을 사랑했던 것을 뉘우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도 나타나는 초기 현상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를 받는 그런 양심현상과는 다릅니다. 사탄의 참소도 고통스럽지만 참소는 자신을 정죄하는 절망적인 것이지만 이 대접은 자신의 죄를 인정함은 같지만 용서의 하나님 앞에 진실로 가슴 치며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정죄와 회개는 다르단 말입니다. 마치 탕자가 온갖 고난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듯 징계의 고난 앞에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가슴을 치며 회개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고후7:10-11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했습니다.


2. 세상에 속한 마음을 죽이고 성결케 합니다.


3절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둘째 대접재앙은 대접을 바다에 쏟을 때 바다가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는 징계입니다. 문자대로라면 바다에 핵폭탄이 터져서 모든 생물이 죽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 인류도 남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신령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본 재앙은 물이 피가 되었던 모세의 이적을 연상시킵니다. “피는 생명”인데 바다가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그 안의 생물도 그 피로 인해 모두 죽었습니다. 그 안에 창1:21의 “큰 물고기” 원문에 ‘탄닌’ 즉 용과 뱀 공룡이 있다면 그것도 죽을 것이고, 다른 종류의 물고기도 죽을 것입니다.


바다는 세상입니다. 이처럼 피바다가 되었으니 세상도 죽고, 그 안의 생물도 죽었으니 세상을 품고 살던 우리 마음의 악도 죽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마음에 탄닌과 같은 죄악의 괴물이 있다 해도 그 죄가 어떤 죄든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을 통한 회개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완악하고 마음에 악이 크면 클수록 더 강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앞의 첫째 대접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크게 마음 아파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둘째 대접에서는 이 마음 아파함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죽는 세상에 속한 마음을 회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갈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도 우리에 대해 죽고 우리도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를 진실로 받아들여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롬8:5-8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죄악에서 떠날 수 있을까요? 성도는 예수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자입니다. 이 거룩의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이 복음에 서서 세상적인 죄의 생명에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고 예수 안에서 주신 내 자화상만 확신해도 죄는 도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굳게 붙잡아두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무디의 젊은 동역자 무어하우스가 미국 시카고 무디의 주일학교에서 요3:16절만 가지고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할 때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며 한없이 은혜에 감동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강하셔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깨닫고 순종만이 현명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평안해지면 또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마는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은 그 완악한 자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복종하게 하시고 말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징계의 대접 앞에서 진실로 깨닫고 세상에 속한 우리의 마음 다 걷어 들여 회개하고 죄와 그 습관에서 온전히 돌아와 하나님의 놀라운 화평 속에서 사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대접재앙 서론 8 (계 15:8)

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 마지막 시간으로 ‘십자가 사랑의 결과’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불후의 명작이라고 불리는 벤허(Ben Hur)라는 작품을 아실 것입니다. 벤허를 남긴 작가 Lew Wallace(루 윌리스)의 회심 이야기가 있습니다. 윌리스는 본래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신자였고 기독교가 필요 없음을 강조하고 공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허구성을 철저하게 밝혀서 기독교를 반박하는 책을 펴내기 위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잘못되고 거짓된 부분을 발견하려고 눈을 번득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험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에 이르러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감격한 윌리스는 영원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된 후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했던 붓을 던져 버리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 입각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리며. 많은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한 불후의 명작 ‘벤허’라는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이처럼 오늘도 계시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닫고 루 윌리스와 같은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성전에 가득 찼는데, 대체 일곱 금대접에 담긴 내용이 어떤 것이기에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가득 차서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자 없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을 때 그 신앙이 가져다 줄 그 은혜와 복이 얼마나 큰지 발견합니다.


십자가 사랑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임재로서 충만하게 되는 은총입니다.


8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성경에서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름으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던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출16:10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자기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또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출24:17-18에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또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언약궤를 성전에 봉헌할 때 역시 그랬습니다. 왕상8:10-11에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얼마나 영광으로 충만했으면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을까요?


이처럼 십자가 사랑 안에서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희생적인 사랑을 소유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우리 안에서 나타내십니다. 그 전에도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은 주님의 임재체험에 굴곡이 많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을 모셨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안 계신 것처럼 허전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임재의 경험은 그의 신부들을 떠나지 않고 온전히 함께 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요14:18-21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특히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나타내주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 임재의 체험만큼 영광스럽고 행복한 경험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평안과 기쁨은 물론 몸도 구름 위에 붕붕 떠서 다니는 것처럼 컨디션이 좋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고 위로해주시고 은혜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에 강물과 같이 흐릅니다.


그래서 요4:14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고, 사35:10에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했습니다.


습3:16-17에서는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래서 이 사랑을 체험하면 영원토록 그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두 이런 체험을 한 번이라도 해야 합니다. 부흥의 현장에서 그런 체험을 잠시라도 했던 사람들이 그 체험을 잊지 못하고 평생을 찾아다니는데 그 영적 회복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만큼 완전한 것이라 한 것입니다.

 
바울도 엡3:18-19에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했습니다. 이것이 대접재앙을 통해서 가져다 줄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 당하는 삶이 됩니다.


다시 8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 현상은 앞에서 말했듯이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봉헌할 때 현상으로 이 그름 같은 연기현상은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성을 나타냅니다(왕상8:10-11).


이처럼 십자가 사랑은 우리 마음의 죄악에게는 최악의 재앙입니다. 마음의 죄악으로서는 더 이상 큰 재앙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죄악이 받는 재앙이니까 좋은 재앙입니다. 우리 속의 병이 녹아서 사라진다면 축복이듯 우리 속의 악이 사라지는 재앙이 임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의 최고의 복은 바로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악이 처벌 받는 이 재앙은 강력한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재앙은 다른 재앙과는 달리 신속히 일곱 대접이 부어집니다.


그런데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아무도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아주 압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디가 이 성령을 받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 기쁨의 폭포를 멈춰달라고 기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나타나는 이 영광처럼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이렇게 일곱 대접재앙이 시행되기 전에 미리 그 결과를 알려주어 우리 모두가 그 은혜 안에 거하기를 갈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곱 대접 재앙의 서론이 보여준 대로 이 아름다운 은혜를 갈망하십시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좁고 험해도 이 길이 생명길입니다. 나를 위해 살고자 하면 죽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면 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온전히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십자가 사랑 안에서 성장하여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숙원이 다 이루어지고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대접재앙 서론 7 (계 15:7)


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 7번째 시간으로 ‘십자가 사랑의 바탕’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전주예수병원에서 활동한 선교사 중에 리니 데이비스(1862-1903, 41세)라는 여선교사가 있습니다.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한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군산과 전주를 무대로 전도하다가 미선교부의 지원으로 예수병원을 지은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목숨 바쳐 전도했든지 한 해에 1,885명을 전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하였는데 1903년에 열병에 들려 예수병원에 입원한 어린이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어 4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기념비에는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 데이비스 선교사가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십자가 사랑 때문이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의 상이 클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십자가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그 서론으로서 대접재앙의 배경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십자가 사랑이 무엇을 바탕으로 전개되는지 보여줍니다.


1. 성경 4복음서가 그 바탕입니다.


7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네 생물 중 하나가 일곱 재앙을 집행할 일곱 천사에게 주는 장면입니다.


네 생물 중 하나는 네 생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네 생물이란 무엇일까요? 계4:6-8을 보면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했습니다.


이 네 생물은 사6:2과 겔1:5에도 나오는 구룹 천사(겔9:3)와 같은 모습이지만 그 모습 속에서 4복음서가 발견됩니다. 왜냐하면 고대에서 부터 학자들이 복음서를 분석해 본 결과 그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왕 되신 면을 강조했고, 마가복음은 종 되신 면을, 누가복음은 사람이신 면을,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인 면이 강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 마가복음을 소복음이라, 누가복음을 사람복음이라,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다른 책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성장과 사역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내용이 복음서에 적나라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알려면 복음서를 읽어야 합니다.


4복음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네 생물 중 하나가 일곱 재앙을 집행할 일곱 천사에게 금 대접을 주듯 우리는 십자가 사랑을 사복음서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강패 김익두가 그렇게 변화된 것도 소안련 선교사 집회에서 은혜를 받아서도 그렇지만 그 때부터 10개월 동안 세례 받기까지 신약성경을 100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사랑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은 성경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2.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 바탕입니다.


7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여기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기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어떤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악에 대한 진노가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1:18에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하신 말씀도 비슷한 용법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은 용서하셔도 그 악은 영원토록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불이 영원한 것도 바로 그런 속성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얼마나 미워하시면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대신 주셨을까요?


이 공의로운 속성이 시7:11-13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작업은 우리가 온전케 되기까지 그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12:10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죄를 몰래 감추고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찾고 찾아내어 기어코 회개케 하십니다. 그래서 민32:23에도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율법 다 지켰다고 죄 없는 줄 알면 오해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손길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가 바로 십자가 사랑을 성취하는 바탕입니다.


3. 도우시는 성령이 십자가 사랑의 바탕이십니다.


7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네 생물 중 하나가 일곱 천사에게 준 대접은 다름 아닌 금 대접이었습니다. 금이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쓰일 때는 돈을 가리키지만 영적으로 쓰일 때는  믿음 신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역사가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으시고 성령의 도우심 속에 전개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회개의 영입니다. 롬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했는데 이것이 우리 마음의 간절한 기도의 소원이 바로 성령께서 불어넣어 주신 소원입니다.


그런데 회개의 주체는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회개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해야 회개하겠다고 우매한 소리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1:16-17에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8-20절)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깨닫고 더욱 온전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는 한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성화의 역사가 사복음서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바탕으로, 그리고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를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온전한 믿음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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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재앙 서론 6 (계 15:5-6)


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 6번째 시간으로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바로 우리가 회개하여 새 사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15:7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일도 좋지만 회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즉 내가 죽고 그리스도만 나타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는 저주와 슬픔 밖엔 없지만 예수 안에는 무궁한 생명과 은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랑에서 더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17. 장벽이 사라지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5절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 “이 일 후에”란 앞의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즉 우리가 십자가 사랑을 말했던 그 본문을 가리킵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온전히 마음 드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는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나의 변화였는데 여기서는 내가 변하자 하나님께서 주실 하늘의 은혜를 예시한 것입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은혜입니다.  여기 증거의 장막이란 성막에 대한 다른 호칭입니다(출25:16, 38:21, 민1:50, 행7:44).


그런데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막 안에는 증거궤 즉 법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증거궤라 한 이유는 법궤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잠재워 줄 증거물인 만나와 싹난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의 돌판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상징이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증거의 장막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나는 사라지고 예수가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증거의 장막이 열렸다는 것은 지성소가 열렸다. 휘장이 갈라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막15:37-38에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했고, 히10:20에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미 열린 문인데 왜 본문에서는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는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답을 말하자면 이건 개인적인 체험을 설명한 것입니다.

 

즉 주님이 죽으심으로 휘장이 갈라져 하나 되었지만,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우리 마음의 휘장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마음의 휘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자아라는 교만과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여러 가지의 죄들입니다. 이 휘장은 내가 죽음으로만 사라질 수 있는 휘장입니다.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데도 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십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나”라고 하는 마음의 휘장이 너무나 두껍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라지고 예수만 나타나면 하나님과의 장벽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열리는 증거의 장막이 열리는 비밀입니다.

 

18.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더 큰 은사가 임합니다.


6절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여기 성전은 지성소를 가리킵니다. 그 동안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거나 제단에서 나왔지 지성소에서 나온 적이 없는데 이제는 지성소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지성소와 관련된 영적 수준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그냥 나오지 않고 일곱 재앙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일곱 재앙은 일곱 대접재앙을 말합니다. 대접이란 고난의 쓴잔을 말하며 일곱은 완전수로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 십자가 사랑을 재앙이라고 한 것은 우리 안의 악의 세력이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우리 속의 도적질하는 아간과 우리 안의 부패한 가나안 칠족과 다윗에 도전했던 이방세력 같은 자아와 세상들을 처리하시는 강력한 은혜가 임합니다. 진정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만 그럴까요?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나타났듯 우리를 통하여 회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3.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행실에서 거룩해집니다.


다시 6절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성전에서 나온 일곱 천사의 복장이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습니다. 즉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이었습니다.


본래 천사는 제사장도 아니고 왕도 아니어서 세마포를 입는 신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사장처럼 세마포를 입고 예수님처럼 가슴의 금띠를 띠었음은(계1:13) 이것은 대접 재앙으로 성도에게 입혀질 은혜가 무엇인가를 예시한 것입니다.

 

먼저 세마포는 계19:8을 보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사랑으로 온전한 행실의 성도로 만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4.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영적권세가 나타납니다.


다시 6절 하반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가슴의 금띠는 왕의 모습입니다. 왕은 능력과 권세의 상징입니다. 가슴의 금띠이므로 먼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고, 나를 다스릴 뿐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환경과 마귀를 다스립니다.

 

세마포와 가슴의 금띠를 합해서 생각하면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 왕 같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왕 같은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기도 했고, 벧전2:9을 보면 신약의 우리 성도의 신분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앞에 원수의 세력들이 물러갔듯이 성령의 영적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가 가장 큰 능력입니다. 그 이전에는 모두 어린 아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사랑 자체도 능력이거니와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답은 내가 사라지고 예수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나타나서는 죄과 저주와 슬픔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라지고 예수가 나타날 때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의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1:13에서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더욱 십자가 사랑 안에서 더욱 새로워져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더욱 온전한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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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 5번째 시간으로 ‘십자가 사랑’에 대해서 계속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30년간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서 생애를 바친 데이벳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을 아실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독신을 꿈꾸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에 의해 생기는 걱정거리가 없다면, 선교사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메리 모페트를 만나게 되자, 그는 그녀에게 구혼을 하게 되었고 둘은 결혼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은 메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애정을 나에게보다 주 예수님께 더욱 깊이 쏟으십시오. 우리들 서로가 아무리 깊은 사랑을 느끼더라도 항상 예수님을 모두의 친구와 안내자로 생각합시다."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님을 제일로 삼고 그들 일생을 아프리카 불모지에서 섬기는 삶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깊이 체험하느냐에 따라 그 삶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아직도 세상 애굽적인 것이 있다면 온전히 은혜의 바다에 수장시키고 씻음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또 어떤 일이 있나요?


13. 하나님이 두려워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4절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죄 함부로 지었지만 그러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방인으로 살 때 무엇이 가장 두려웠습니까? 창20:11을 보면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라고 한 것처럼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기에 죄를 함부로 짓고 때로는 인명을 살해하기도 합니다.

이번에 남쪽 섬마을에서 집단강간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신앙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치안이 문란한 데다가 신앙까지 없으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두렵게 경외함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코람데오의 삶인데, 코람데오란 라틴어로서 ‘코람’은 ‘~의 앞에서’, ‘데오’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존전의식 속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범죄하는 것은 이 존전의식이 없어서입니다.


칼빈의 삶의 원리가 바로 하나님 존전의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솔직합니다. 진실합니다. 단순합니다. 말을 많이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도 솔직하고 단순합니다.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에 무슨 수식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니까 수식어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14.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서 살게 됩니다.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 과거에는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신앙생활도 내가 은혜 받고 행복하고 형통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나는 맨 꼬래비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누가 생각이 납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날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가 먹겠지만, 가족을 사랑하면 가족 생각에 먹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내 인생의 1순위가 됩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유명한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John Bunyun)이 신앙 때문에 베드포드 감옥에 사형수로 갇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죤 번연은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더 두려웠던 것은 여러 사람이 자기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복음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까봐 그것이 더욱 걱정스웠습니다.


그래서 죤 번연은 천국 같은 날이 오든지 지옥 같은 날이 오든지 주 예수께서 자기를 굳게 붙잡아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고, 마침내 죽음 앞에서도 위로를 받고 담대한 신앙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번연은 자기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고 예수의 복음을 더 먼저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홍해바다에 수장시켜야 할 것은 세상 죄만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도 거기 수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했습니다. 아주 제대로 매장까지 하시기를 바랍니다.


15.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게 됩니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님만 거룩하시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요.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전에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구별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내가 우선이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세상일이 제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먼저 구별해 놓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 몫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큰 애들은 어른들 몫을 먼저 구별해놓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제일로 삼고 살아갑니다. 마22:37-3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습니다.

16. 세상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게 됩니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주의 의로우신 일이란 앞으로 전개될 일곱 대접재앙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자대로만 본다면 대접재앙으로 다 죽고 무슨 만국이 와서 경배합니까? 그러므로 복음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했듯 만국은 문자적으로는 모든 나라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우리 각인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점에서 우리가 나라이고 그래서 우리 마음의 경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만국이므로 우리 마음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다른 관심에 쏟았지만 이제는 온전히 마음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닷가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함과 같이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의 은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온전히 수장시키시기 바랍니다. 즉 세례는 한 번 받지만 그 세례의 의미는 온전히 적용될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전에는 하나님 두려운 줄 몰랐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두려워 죄지을 수 없고, 전에는 내 영광만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 영광만 위해서 살고, 전에는 내가 먼저였지만 이제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고, 그리고 전에는 세상에 마음 두고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 몸과 마음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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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재앙 서론 4 (계 15:3)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 네 번째 시간으로 ‘십자가 사랑’에 대해서 계속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영국의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의 선교책임자로 있을 때 그는 가끔 선교사 후보생들을 면접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때 대부분의 선교후보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혹은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에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구하기 위하여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합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그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그 동기만 가지고는 시험과 시련 그리고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가 당신을 견디게 해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교사 역시 십자가 사랑 아니고는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존경스러워 보이고 좋아보이는 그 취향으로는 며칠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도 그 십자가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자들의 노래입니다.



계속하여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또 어떤 일이 있나요?

8.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만 제일로 섬기게 됩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주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주 하나님”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르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깊습니다. 여기서 “주”는 헬라어로 “큐리오스”라고 하며 “주인”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주권 즉 나를 향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유일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섬길 오직 한 분이신 자를 말합니다. 이 사실이 시내산 언약인 십계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출20:2-4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 정말 은혜를 받으면 세상의 부귀와 사치와 명예와 일락 등은 우리의 관심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관심에서 떠나야 진정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며, 여호와는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녀라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고후6:14-18).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은혜가 십자가 사랑에 있습니다.


9. 십자가 사랑에서 말씀대로 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다음에 “곧 전능하신 이시여.”라고 찬양합니다. 여기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샤다이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자녀를 갖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왜 구원과 정결의 유리 바닷가에서 하나님을 노래하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었을까요?


계1:8에도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했는데,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자가 되었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칼빈의 5개 조항에도 나타나 있듯이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죄에 문제에 있어서 무수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감화설이 아닙니다. 진정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말씀대로 살아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14:21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즉 사랑하는 자에게 우리의 의되신 예수님이 우리 인격에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10.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여기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이 말씀의 배경은 출 15장입니다.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홍해 건너편에서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15:11) 찬양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구원이었습니다.


이처럼 히2:3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 성령 재림 모두다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위대하고 크고 놀라운 일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예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에게 미쳐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영광 중에서 승리와 복락을 누립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영광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랑을 향해 더욱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으로 온전히 자라갈 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비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다 누리게 될 것입니다(벧후1:4-7).


11.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전적으로 순복합니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국의 왕”이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만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우리 성도의 마음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국이 와서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말도 있는데 이는 우리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과 힘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반대 용례로 바벨론에 의해 만국이 무너졌다는 말씀도 있는데(계18:3) 거기서는 세상에 지배를 받는 마음 즉 인격 전체를 가리킵니다. 당시 바벨론의 지배를 받는 모든 나라를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바벨론의 속국이 되지 않기 위해 저항하다 무너져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성도 각인이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점에서 마음의 경영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만국의 왕이란 이제는 내가 나의 왕 되지 않고 세상이 나의 왕 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의 지배자가 되시고 나의 주장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이토록 예수님의 고난의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우리를 온전히 마음 바쳐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게 됩니다.

12.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주의 뒤를 따라갑니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여기 주의 길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메시아로서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이 이 길을 가시도록 예비하는 자였습니다(사40:3). 그런데 바로 이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다고 찬양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주님이 가신 그 길이 그렇다는 것과 아울러 그 길을 따라갔더니 정말 그렇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은 험한 것 같아도 의의 길이요, 영생 길이요, 영광의 길입니다. 주를 위해서 핍박을 당하고 죽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의롭고 참된 길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길만이 영생의 길, 생명의 길이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즉 의로운 길이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또 참되기에 그 길을 따라갈 때 성령이 온전히 함께 하셔서 더불어 역사하시는(요3:33) 것입니다.


그래서 마5:11-12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리고 딤후2:11-12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 은혜는 그 길을 가보지 못한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체험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의 사랑에서 은혜를 받게 되면 주를 위해서 핍박 당함을 기쁨으로 알고 죽는 것도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가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우리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마음에 서원으로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남은 여생을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온전히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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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재앙 서론 3 (계 15:2-3)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이라는 제목으로 ‘십자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 중 하나였던 무디 선생에 관한 일화 중에 무디가 그의 동역자 무어하우스를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어하우스는 불과 17세의 청년이었는데 이 청년이 미국 시카고 무디의 주일학교에서 요3:16절만 가지고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쳤는지 그 때로부터 무디는 그 어린 청년을 자기 동역자로 삼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제까지 무디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설교를 많이 했지만 무어하우스는 무디와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그의 독생자 예수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시켰다며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매일 같은 주제였는데도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다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깊이 감동을 주어 성숙한 신자로 길러줄 수 있는 귀한 진리의 자양분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주시는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깨닫고 은혜를 받을 때 죄악도 세상도 육신도 자신도, 숨어 있는 멸망할 죄악도 다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계속하여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4. 거룩함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유리 바다 가에 서서” 유리 바다는 그만큼 맑게 씻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바다는 성전 앞에 있는 놋바다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의 구원 받은 무리들을 종합한 그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수장 되는 애굽 군대를 보면서 구원의 찬양을 불렀는데 이것은 하나님 백성들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견고히 섰었습니다. 즉 거룩함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티도 점도 흠도 없이 거룩하게 씻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눅 7장의 주님을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던 죄 많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눅7:47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서 사랑함으로 씻어지는 죄가 있음을 봅니다. 믿음으로만 죄가 씻어지는 줄 알지만 사랑으로도 씻어집니다.

성화적인 은혜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장성하게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고전3:3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했지만,



고전13:11에 장성하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렇게 됩니다. 미련하고 누추한 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함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5.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감동으로 늘 성령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여기 거문고는 내 거문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문고입니다. 계 14장에서 거문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지만 거문고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 예로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성령이 임하셔서 악신이 물러갔습니다. 또 왕하 3장에서는 사막에서 남북 이스라엘 연합군이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갈 때 엘리사를 청해서 거문고를 타며 찬양하자 해질녘에 에돔 쪽에서부터 물이 흘러와서 웅덩이를 채워 그 물을 마시고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문고는 바로 성령의 감동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이런 노래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압도적으로 부여주시는 성령의 감동입니다. 전에는 인간의 감정에 따라 굴곡이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 충만이 항구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 가운데 온전히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6.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온전히 순복합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그들은 또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기 15장에 나타나 있듯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후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던 구원의 노래입니다. 바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모세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언제 하나님의 종이 됩니까? 그것은 호렙산에서였습니다. 출 3장을 보면 모세가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칠 때 호렙산 가시덤불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4-5)

당시 종들은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여기 신을 벗는 습관은 룻 4장에서도 보듯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의미로 쓰였듯, 종과 같이 철저한 자기 권리 포기를 말합니다. 그동안 모세는 자칭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했고, 또 애국심과 하나님 사랑 하나님 백성의 사랑이라는 숭고한 사랑으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그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 뜻 다 정해놓고 하나님께 역사해 달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부리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종이 된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리시는 대로 충성했습니다. 이것은 40년의 연단의 결실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3~4절 이 짧은 노래 가운데 무려 7회나 주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혹은 주를 암시하는 하나님 왕 오직 등의 용어까지 합하면 10회 가량 나옵니다. 그러니까 온전하게 된 하나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 모세와 같은 이런 자세가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의 종은 제 7년 안식년이 다가오면 해방이 되는데 그 중에 주인의 은혜를 잊지 못해 일생 종이 되기를 서약하는 종은 귀를 문설주에다 대고 구멍을 뚫었는데 그 의미는 이제부터는 주인의 말만 듣고 주인의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서약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안 자는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고후5:15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하셨고, 살전5:10에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7.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구원의 실재를 누리며 삽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이 말씀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평행법 문장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에서 불렀던 모세의 노래는 곧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고전5:7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양은 희생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체험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면 그들은 십자가 공로로 자기 죄에 대한 용서와 나아가 마음의 죄악을 예수 십자가 아래 다 매장한 보혈과 십자가의 은혜를 진정 누리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혈과 십자가의 공로를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즉 성화가 무르익은 시점에서 이러한 구원의 노래가 나타나는 것은 홍해 사건은 좁은 의미의 중생의 사건에 머물지 않고 세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성화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중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의 확신과 실재를 가지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벧전1:7-9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은혜를 바라보십시다.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 고난의 사랑에서 은혜를 깊이 받으십시다. 그 때 우리는 거룩함에서 흔들리지 않고 늘 감동으로 충만하고 온전히 주를 위해 살며 어린 양 예수의 구원의 실재를 누리며 사는 온전한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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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이라는 제목으로 ‘십자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히12:1-5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간략히 요먁하면 진정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도저히 벗을 수 없는 죄를 벗게 되고, 어떤 어려움도 참고 나아갈 수 있으며,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도 싸우고,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히브리서의 말씀은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중요한 키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대접재앙의 주제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성부와 성자의 희생적 사랑을 깊이 깨닫는 자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어떤 은혜가 있을까요?


1.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강력한 정화작용이 있습니다.


2절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이 말씀은 유리 바닷가에서 구원 받은 자들이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홍해를 건너 홍해 바닷가에서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던 모세와 그 백성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이 바다는 계4:6의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아니라 불이 섞인 유리 바다입니다. 왜 불이 섞인 바다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선 먼저 바다라는 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기 바다는 씻음을 상징하는 바다입니다. 고전10:2을 보면 홍해 바다 역시 세례의 상징이었고, 성전 앞에도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 바다는 놋바다로 제사장들이 몸을 씻기 위해 많은 물을 저장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씻음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런데 불이 섞인 유리바다였습니다. 유리바다는 앞에서 언급 되었듯 깨끗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여기서 씻으면 씻어지지 않을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리바다만이 아니라 불이 섞여 있었습니다. 물속에 불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습을 통해서 무언가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런 환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 바다는 씻는 곳으로 물로만 씻는 것이 아니라 불로서도 씻으신다는 것입니다. 단7:9-10을 보면  “9.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계시록 본문이 말한 것은 바로 그 불바다를 말합니다. 그 물과 불이 섞인 그 불바다에서 씻어지지 않을 죄가 없고, 소멸되지 않을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홍해 바다에서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듯 우리의 죄악의 잔재마저도 남아 있지 않도록 온전히 씻어주시고 또 태워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묵상하다가 그 안에서 은혜를 받으면 그 어떤 떨어버리기 어려운 죄도 숨은 죄도 다 처리됩니다. 그러므로 불 섞인 유리바다란 십자가 사랑의 강력한 정화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우리의 육신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이들은 참으로 대단한 자들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까지 다 이긴 자였습니다. 먼저 짐승을 이겼습니다. 이 짐승은 계 13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가리킵니다. 짐승이 무엇입니까? 육신을 말합니다.


우리 육신은 짐승과 같이 본능적인 존재요 또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짐승과 같아요. 성군 다윗도 육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범죄했습니다. 우리가 육신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데 자기 육신을 이기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신 하자는 대로 다하면 지옥 갑니다.


그래서 골3:5-8에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이것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통이 오고 수치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 다 참을 수 있습니다. 즐거워합니다. 감사합니다. 희생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깊이 받지 못하기 때문에 좀 나쁜 소리 들으면 마음 상하지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그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마5:11-12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눅 2장을 보면 안나 선지자가 나옵니다. 눅2:36-37절에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과부가 수십 년을 수절하며 하나님 한 분만 신랑 삼고 산다는 것 쉬운 일입니까?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하니까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이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짐승을 이긴다는 것은 육신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사 그러면 고대 중세 근세로 나누는데 중세 기독교를 오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사라고 하면 (A.D. 600-1500)의 기독교 역사를 말하는데 이 때 교황권의 타락 등 어두운 면이 많았지만 한 편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길 갈망하는 영적운동도 강한 때였습니다. 나쁜 면은 걸러야 하고 좋은 면은 살려야 하는데 이런 면은 지금도 강조되어야 합니다.


3.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세상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여기 “그의 우상”이 나옵니다. 그의 우상이 무엇일까요? 짐승의 우상입니다. 계 13장을 보면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고, 짐승의 우상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계13:11-18)을 말합니다.



짐승의 우상은 다름 아닌 세상과 그 정욕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짐승 같은 육신이 동경하는 것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래서 “그의 우상”은 바로 세상입니다. 우리 육신이 소유하고 싶은 많은 것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 명예 물질 쾌락,, 이것에서 자유로울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예수님께 왔던 돈 받은 부자 청년, 계명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자부했지만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니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은 물질에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명예에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인격에 모욕을 참지 못합니다. 쾌락에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권세에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서나 무슨 짓을 해서든지 대장만 되려고 합니다. 요삼1:9-10에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교회에서 대장 노릇만 하려고 전도자를 대적하고 자기보다 훌륭하거나 방해되는 사람들은 모두 쫓아냈습니다.


바울 서신 보면 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딤후4:14-15에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딤전1:19-20에도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죽어도 고치지 못하는 평생 달고 사는 죄가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고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고멜이 호세아의 사랑을 깨달을 때 호세아의 품안에 온전히 올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4.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의 근본이 바뀌어집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여기 “그의 이름의 수”란 666을 말합니다. 계 13장에서 666에 대해서 배운 것처럼 히브리적 관념에서 6은 세상이나 사람 짐승 등을 가리키는 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그것을 6일 째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의 수를 이겼다는 것은 세상도 육신도 자기도 다 이겼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666의 의미와 같이 아주 육신에 속한 자가 되어 본능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666도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제불능이라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사랑의 포로가 되면 본질적으로 바뀝니다. 말세의 첫째로 지목 되는 자기사랑죄도 이깁니다.



그것이 바로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다 멸망하도록 다른 죄는 개혁해도 이 죄는 개혁하지 못했는데 요시아가 율법책을 보다가 이 죄를 깨닫고 개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발견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금송아지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강력한 정화작용이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우리의 육신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죄악 세상도, 자기 사랑도, 숨어 있는 멸망할 죄악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생자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묵상하여 참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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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재앙 서론 1 (계 15:1)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가지 이적’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한국 초대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김익두 목사를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이 유명한 것은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가 뛰어나서도 아니요, 누구보다 큰 죄인이었으나 예수 믿고 은혜를 누구보다 깊이 받아 회개한 다음 또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고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김목사님의 일화 중에 한 가지는 그가 회개한 다음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사람들은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고는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은 시장 한복판에 그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된 그의 손에는 시커먼 성경책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그가 정말 변화되었는지 시험해 보려고 지나가는 김익두에게 물 한 통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고는 물 끼 얻은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뻐해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은 오늘부터는 더 온전히 죽는 신령한 죽음을 말씀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계 15장 본장은 마지막 재앙인 7대접 재앙의 서론입니다. 계11:14-19에 마지막 나팔의 서론이 있었듯, 여기 마지막 7대접 재앙도 서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마지막 나팔에서  7대접재앙이 터진다는 점에서 서론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일곱 대접이 중요했으면 서론이 또 다시 반복될까요? 과연 일곱 대접 재앙이란 무엇일까요? 답부터 알려드리면 7재앙은 우리 속에 마지막 남은 악이 하나님의 은혜의 심판을 받아 사라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말합니다. 마지막 남은 죄처리라는 점에서 대단히 특별합니다.


그동안 계시록에서 전개된 것 일곱 인재앙, 일곱 나팔재앙 등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온갖 은혜로서 새로워졌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여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직도 남아있는 내 중심과 자기 사랑과 자기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최후의 원수는 바로 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일지라도 아직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제 멋에 사는 사람이지 성숙한 여자라고 말할 수 없듯이,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온갖 것을 체험했다 해도 아직 내 생명까지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용넙할 수 없다면 그 믿음은 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대접에서 이 부분이 뿌리 채 뽑혀지게 됩니다. 그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계 15장에서 이긴 자들의 노래를 통해 일곱 대접 재앙의 성격과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에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했는데, 이 말씀에서 우리는 대접재앙이 무엇인지 5가지의 이적 묘사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럼 일곱 대접재앙은 어떤 것일까요?


1. 신령한 이적입니다.


1절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에서 맨 먼저 하늘의 이적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땅의 이적이 아닙니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땅에 속한 이적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이 건강해지고 부자 되고 형통한 그런 이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적도 주십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이적은 그와는 다른 이적입니다.


즉 우리 믿음이 더 성숙해지는 하늘의 이적입니다. 왜 이적이라고 할까요? 우리 믿음의 변화가 너무 놀랍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우리 육신만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보다 더 중요한 영혼이 잘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은 최소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하늘의 수준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빌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고, 살전5:10에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롬8:17에도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했고, 벧전4:1에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은혜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일 뿐 아니라 그래야 온전한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대접재앙은 바로 우리가 온전히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은혜입니다.


2. 큰 이적이라 했습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 두 번째로 가르쳐 주는 이적은 큰 이적이란 것입니다. 큰 이적이란 어떤 이적일까요? 해와 달이 멈췄던 아모리와의 전쟁 이적일까요? 아니면 홍해가 갈라지던 모세의 이적일까요? 그보다 더 큰 이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큰 이적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적입니다. 즉 구약의 가장 큰 이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요, 신약의 가장 큰 기적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즉 구약의 수많은 이적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위한 것이었고, 신약의 모든 이적도 결국 이러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적 말고 또 다른 큰 이적이 여기 나타납니다. 어떤 이적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그 이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하나님의 기쁨은 하늘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경사가 되고 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을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큰 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마20:20-23에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누가 가장 클지는 아버지께서 결정하시겠지만 가장 크게 되는 원리만큼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대접재앙은 바로 우리를 이런 예수 닮은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큰 은혜를 말씀한 것입니다.


3. 이상한 이적입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 왜 이상한 이적일까요? 이상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한 것을 말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문제가 죽음 가운데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다 책망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에도 죽였지만 더 죽고 더 온전히 죽어 잘되는 은혜이기 때문에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마20:22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신 다음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6-28절) 하셨습니다.

더 낮아질수록 죽을수록 더 크게 되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이셨지만 죽기까지 낮아지실 때(빌2:5-8)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주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신비한 이적이라는 말입니다.


4. 다른 이적입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 다른 이적이라 함은 그 동안의 이적과는 차원이 다름을 암시한 것입니다.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동안의 이적과는 차원이 다른 이적을 행하실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셨습니다.


마12:38-40에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바로 이런 이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죽는 이적입니다. 요즘 깡패가 회개했다. 도둑이 회개했다. 하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이 회개했을 때 분명 가짜가 아니었을 텐데 왜 옛날로 돌아갑니까? 그들 마음 속의 악이 일곱 대접재앙과 같은 강력한 심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접재앙은 요나의 이적과 같이 온전히 죽는 은혜입니다.


5. 마지막 이적입니다.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마지막 재앙이니까 마지막 이적입니다. 이 마지막 재앙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마쳐지는데 여기 “마치리로다”의 헬라어 ‘에텔레스데’ (έτλέσθη)는 ‘완성하다, 성취하다’를 의미하는 ‘텔레오’ (τέλέω)의 예언적 부정 과거 수동태로 마지막 심판을 종결짓는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즉 마지막이란 시작이 있었다는 것이고, 시작이 있었으니 과정이 있었고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빌1:6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러면서 9-11절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그러니까 대접재앙이란 우리 신앙이 온전케 되는 성숙한 단계를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나 깨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사랑을 묵상함으로 우리 믿음이 온전히 자라 나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시는 성숙하고 온전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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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 시간은 “천국 알곡론”이라는 제목으로 ‘영적추수와 연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에미 카미켈(Amy Carmichael)의 저서 가운데 나오는 말입니다. 에미 카미켈이 인도의 대장장이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금을 연단할 때 이것이 순금이 되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대장장이는 “예 그건 금 속에서 제 얼굴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연단합니다.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이 얼마나 정확하게 잘 보이느냐를 가지고 결정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간의 옛사람은 사라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람의 형상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완악해서 고난을 통한 연단 없이는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참된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는 연단이 헛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19절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여기 하나님의 진노가 나옵니다. 이 진노는 죄에 대한 진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는 하시지만 용납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강한 채찍으로 치시며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롬1:18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그랬고, 골3:5~6에도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시7:11-13에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진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도 붙잡고 있는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용납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고 어서 속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2.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9절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여기 큰 포도주 틀은 무엇일까요? 포도주틀은 포도를 넣고 발로 짓밟아서 포도즙을 내는 틀인데 작은 틀이 아니고 큰 틀입니다.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연관이 되어 있는 낱말입니다. 즉 예수 믿고 변화되라고 밟는 것이지 달리 밟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연단 받을 때 큰 틀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코앞에 나타난 현실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신다는 큰 틀에서 봐야 진리가 보입니다. 그래서 욥19:21에서 욥은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알곡 만드시려고 큰 틀에 넣으셔서 짓밟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욥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했고, 슥13:9에도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현실만 보고 어리석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참 복을 주시려고 나는 낮추시고 연단하심을 깨닫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합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손길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여기 포도주 틀, 틀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틀이란 한 번 그 틀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농부의 거친 발에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오로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했습니다. 교만해 봐야 혼난다는 말입니다. 요나가 사명을 회피하기 위해서 도망하지만 뜻대로 되었나요? 처음에는 요나가 탄 배가 순풍으로 항해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요나는 꼼짝할 수 없이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서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손길을 피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시139:7-12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려고 말고 단단히 마음먹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4. 내 십자가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20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여기 성 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골고다 언덕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골고다 언덕은 우리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 대속의 주께서 고난 받으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혔다는 것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목적이 우리 죄를 회개케 하시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죄에는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성 밖 골고다 언덕은 죽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으라고 짓밟으시지 살라고 밟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 죽는다는 말은 나를 꺾고 순복한다는 말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복하고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5. 우리가 죽되 내 생각 내 주장대로 사는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20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문자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포도주 틀에서 피가 났다는 말도 그렇거니와, 얼마나 났으면 그 피가 말굴레까지 닿습니까? 말굴레라고 하면 사람의 얼굴 높이 정도 됩니다.


그것도 1,600 스타디온 즉 300km나 퍼져나갔습니다.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비약도 보통 비약이 아닙니다. 온 세상의 피를 다 모아도 이 정도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포도주틀 밟듯이 짓밟으시는 목적이 나타납니다. 즉 피를 흘렀으니 죽음을 상징하고, 말굴레와 같이 연단이란 바로 우리의 자아를 제어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32:9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했고, 약3:3에도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바로 않고 내 고집대로 하면 가만 두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6. 하나님은 우리가 철저히 훈련받기를 원하십니다.


20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번에는 1,600 스타디온의 의미입니다. 1,600은 히브리적 사고로 보면 그냥 생겨진 수가 아닙니다. 1,600은 연단의 수 40을 제곱한 (40×40) 수로서 연단되고 연단되는 철저한 연단을 말합니다.


신앙훈련 어설프게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 믿고 주일성수는 물론 새벽기도회 참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전도하고 낮아지고 봉사하며 제대로 예수 믿고 오순절 성령충만까지도 관심 갖는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런 믿음 가운데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40년 동안 애굽의 1세 국민은 모두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빼고는 모두 2세국민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잠깐, 갈렙의 이름의 뜻이 뭡니까? "개"입니다. 개는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을 반기고 주인을 믿으며 훈련 시키면 절대 복종하고 충성하고 배신하지 않고 변함이 없습니다.

 
개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배울 점이 많아요. 연단의 결정판이 바로 개라는 의미를 가진 갈렙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40도 가혹한데 40×40이니 얼마나 가혹합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8:2-6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진리의 말씀으로 순순히, 섭리적인 연단으로 강력히 우리가 회개하고 바른 믿음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는 한 결코 우리를 향한 자기 목적을 중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연단의 섭리 앞에서 철저히 순복하여 회개함으로 참 믿음 가진 알곡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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