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623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길 (히 10:19-39 )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길 (히 10:19-39 )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신약/히브리서 2021.05.15

땅으로 내려온 하늘, 하늘에 앉은 우리 히 8:5; 엡 1:10

땅으로 내려온 하늘, 하늘에 앉은 우리 히 8:5; 엡 1:10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5)”(히 8:5)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신약성경 중 특히 히브리서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서로 완전히 반대이거나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을 향해 나아갑니다. 옛 언약이 시작이라면 새 언약은 목표입니다. 옛 언약이 근거와 배경이라면 새 언약은 그 위에 건축된 집입니다. 옛 언약이 예언(p..

신약/히브리서 2021.05.08

하늘가는 유일한 길 (히 9:1-28)

하늘가는 유일한 길 (히 9:1-28)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본향)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을 떠나온 후 한 번도 본향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떠나온 세상의 고향 를 생각하고 지내었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살았습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11:15,16)" 이렇게 아브라함은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 가나안을 향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마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했고,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고향에 묻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

신약/히브리서 2021.05.08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히 8:1-13)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히 8:1-13)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있습니다.('성경'이란 해방 전부터 쓰여진 말이고 '성서'는 해방 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그 차이점은 없습니다.) 이 성서는 두 가지 책, 즉 구약서와 신약서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성서를 계약서(언약서, covenant)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신구약성서(The Old Covenant and The New Covenant) 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서를 다른 종교에서처럼 경전이라 하지 않고 언약서(계약서)라고 합니다. 영어 성서를 "The Old Testament and The New Testament..

신약/히브리서 2021.05.01

더 좋은 소망 (히 7:1-19)

더 좋은 소망 (히 7:1-19)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

신약/히브리서 2021.04.24

복 받은 사람 히브리서 6장 13-20절

복 받은 사람 히브리서 6장 13-20절 찬 송 : 88장. 188장. 362장. 429장. 기독교는 입만 열면 복달라고 조르는 기복종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 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종교는 복을 이야기 합니다. 고등종교는 물론이거니와 샤머니즘이나 미신도 복을 말합니다. 복이란 편하고 행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혼도, 육신도, 환경도 평안하고 안정된 상태를 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주를 받아야 하겠습니까?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저주를 구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복은 어느 한가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도 복을 받고, 육신도 복을 받고, 환경도 복을 받는 통전적 복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 3..

신약/히브리서 2021.04.21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장 36-53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장 36-53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미리 예고 하셨고, 다시 살아나실 것도 분명하게 예고 하셨지만, 부활 이후의 기록들을 보면,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누군가의 마음속에 부활의 믿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경의 기록상으로는 부활을 믿고 기다렸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새벽 시간은 제 4경의 시간, 곧 새벽 3~6시 사이였습니다. 성경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인가요? 대부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장면을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양한 ..

신약/누가복음 2021.04.17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는것 히 6:9-12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는것 히 6:9-12 지난 시간에는 타락하고 배교한 자들을 꾸중하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맛보고서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람은 다시는 구속함을 받을 수 없기에 그들에 대한 꾸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꾸지람만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꾸짖기는 하였지만 이제 그들이 구원에 더 가까이 이르렀음을 확신하면서 위로의 말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배교자의 처참한 멸망을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위로의 말씀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초보인 그들을 계속해서 꾸짖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9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부드러운 말로 본..

신약/히브리서 2021.04.10

부활의 증거 고전 15;12-19

부활의 증거 고전 15;12-1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신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시고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분은 실제로 육신의 사망과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죽으셔서 삼일 동안 무덤에 갇혀 계셨습니다. 그러나 삼일 만에 사망의 족쇄를 풀고 다시 살아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나셔서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3일 이상 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초보를 버립시다. 히 6;1-8

초보를 버립시다. 히 6;1-8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인들의 영적 나태함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성숙하지 못한 부분을 초보적 단계라 하였습니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아적 단계와 더욱 성숙한 단계로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대교적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분명 초보적 단계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히브리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그냥 간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더욱 더 완전한 곳으로 나가야 할 신앙생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초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1. 교..

신약/히브리서 2021.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