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가는 유일한 길 (히 9:1-28)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본향)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을 떠나온 후 한 번도 본향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떠나온 세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생각하고 지내었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11:15,16)"
이렇게 아브라함은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 가나안을 향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마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했고,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고향에 묻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장사되었습니다.(창 23,24,25,30,31장).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상징적으로 지상의 본향보다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뜻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세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인간에게 <더 나은 본향>인 하늘을 사모하며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은 나그네 길 가는 것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하여 하늘 본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늘가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고 묻는 제자 도마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1-6) 이 말씀은 하늘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에게 하늘가는 길을 열어놓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임재(臨在)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장막과 장막에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장막(帳幕,tent)이란 "거주하는 장소"(dwelling place)를 뜻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를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장막과 제사제도야말로 구약시대에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장막은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장막에서 제사드리는 모든 기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장막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번제단(燔祭壇)인데 이는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쓴 동물을 태우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豫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소에 들어가면 일곱촛대로 되어진 등대와 12개의 떡이 놓인 떡상과 지성소(至聖所) 바로 앞에 놓인 금향로를 볼 수 있습니다. 등대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떡상 역시 세상 모든 인류가 먹고 생명을 얻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48-51)
금향로는 예수 이름으로 드려지는 성도들의 예배와 기도, 감사와 찬양 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이 성소를 지나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는 이름 그대로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이 땅의 유일한 처소입니다. 이 지성소에 언약궤(또는 법궤)가 있는데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비석 즉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만나는 하늘 양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아론의 대제사장직이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죽은 지팡이에서 싹 즉 생명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되심으로 인류가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그리고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궤를 덮는 뚜껑이 있는데 이를 속죄소라고 합니다. 이 속죄소 위에 대제사장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된 동물의 피를 뿌리게 되면 그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소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하늘가는 길로 인도하는 예수 십자가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장막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희생하시고 가나안 땅, 하늘가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약의 장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입니다. 예수 십자가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장막이며 구약의 장막은 그의 모형입니다. 예수야말로 완전한 장막이며 그의 십자가야말로 완전한 속죄의 제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참 장막과 참 제물이 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구약시대의 장막 제사에 따른 제물은 율법에 죄를 정해진 것만을 정결케 하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십자가 제물은 인간의 몸은 물론 마음과 영혼까지도 정결케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장막에서는 도둑질, 살인, 간음 등 외형적으로 드러난 죄를 정결케 하는 제사를 드릴 뿐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형제에게 미움을 품거나 욕을 퍼붓는다 해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 해도 그것은 율법에서 죄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미움과 음욕을 품고서도 거룩한 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실제 살인죄만 죄가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여 욕을 퍼붓는 것도 살인죄와 동일한 죄이며, 실제 간음한 것만 죄가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마5:21-28) 더 나아가 로마서 성경은 남을 비방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무정한 자까지도 사형에 해당하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28-32) 이렇게 구약 장막 제사는 사람이 속에 품고 있는 죄까지는 정결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장막에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육체의 예법만 되어 온전한 제물과 온전한 장막이 되시는 예수께 개혁할 때까지"(10절)만 그 효력이 발휘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에 드러난 죄만 정결케 하는 속죄 제사를 드리고 속 사람은 여전히 탐욕과 음욕, 그리고 미움과 교만, 자랑 등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옛 언약(구약)에 따른 동물의 희생 제물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죄를 근본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성경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제물이 되심으로 지성소의 휘장을 단번에 영원히 열어 놓으시고 언제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올 수 있도록 참 장막이 있는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제물로 <하늘가는 길>이 모든 인류에게 언제든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처리해야 할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영원히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에 영접하면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완전히 해방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제물은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죄의 근본부터 씻어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마음에 죄의 포로가 되어 살지 않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기신 십자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 계심으로 날마다 죄를 극복하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 제물은 인간의 "죽은 양심을 일깨워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까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장막이 되시며 참 제물이 되시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만든 지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 앞으로 바로 들어가신 것처럼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교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어느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운 벗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칭찬받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는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여러분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이제 두 번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제물로 자신을 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참 장막이 되시며 참 제물이 되시는 두 번째 이유는 구약시대에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선택된 동물은 죽음을 강요당했지만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생명을 빼앗겼지만 예수께서는 생명을 스스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인류를 위해 바치신 것입니다. 참 제물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약시대에는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은 율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간의 대속 제물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배후에 있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하고 그 정한 바에 따라 형벌을 내리는데 그치지만, 참된 사랑은 그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므로 용서를 베풀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야말로 참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구약시대 동물은 사고력이나 이성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왜, 누구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에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비록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들고 쓰디쓴 잔이지만 그것이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얼마나 풍성한 생명을 주는가를 아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죽는 것은 참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도 희생 제물이 되었을 때 참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구약시대 동물은 율법에 정한 방법인 거의 기계적으로 미리 정한 방법으로 살해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본문 14절 말씀대로 "영원하신 성령으로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정한 제사법을 자동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 복종하셔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참 제물은 하나님의 뜻을 성령을 통해 확실하게 깨닫고 스스로 복종할 때 참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장막과 참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마음에 영접하시므로 여러분에게 <하늘가는 길>이 항상 열려 있으며 결코 닫을 사람이 없는 하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앞에 <하늘가는 길>과 멸망으로 가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이 죽으면 그 생명의 불꽃은 하나님에게 환원하고, 남는 것은 "먼지와 재와 뼈와 악취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에게 주신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기독교의 소망은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좋은 온전한 참 장막이 있는 참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세상은 그림자같은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본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본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참 장막이십니다. 참 장막이신 예수를 영접하므로 여러분의 본향에 돌아갈 수 있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참 제물이 되시는 예수를 영접하시므로 "죄와 상관없이" 즉 심판에 상관없이 다시 오시는 예수를 기쁨과 영광 가운데 맞이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의 제물로 정결함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에게 심판은 없습니다. 오직 그들에게는 <하늘가는 길>과 그 누구도 닫을 사람이 없는 하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인,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참 장막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항상 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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