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히브리서

더 좋은 소망 (히 7:1-19)

nam씨 2021. 4. 24. 16:04

더 좋은 소망 (히 7:1-19)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브리서 7:1-19)

인류의 소망은 평화입니다. 구약 이사야 선지자는 인류가 꿈꾸는 평화의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6-10)

이러한 인류의 소망은 "이새의 줄기"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이새의 줄기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더 좋은 소망>이 되시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멜기세덱'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멜기'는 왕, '세덱'은 의(義)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의의 왕'을 뜻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살렘' 왕이라 했는데 여기 '살렘'은 평화(평강, 화평)를 의미하는 예루살렘을 가리키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며,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란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사하시므로 의롭게 하시는 제사장이시며 의의 왕이고, 또한 인류에게 죄 사함을 통해 참된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고전 1:30, 이사야9:6)이시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아브람(아브라함의 전 이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브람 당시 소돔 땅에 살던 아브람의 조카 롯이 대적에게 사로잡히고 재물까지 약탈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을 데리고 대적들을 추격하여 대적을 쳐서 파하고 조카 롯과 재물을 다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브람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살렘 왕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당시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는데 그가 아브람에게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이방인이었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축복했다는데서 멜기세덱은 의에 있어서 아브람보다 뛰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 역시 유대 민족의 시조로써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고, 또한 축복이란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그가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창세기14장)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율법의 정한 바에 따라 백성들로부터 십분 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유대인의 족장으로서 이방인 멜기세덱과는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 일을 드린 것은 율법 이전의 일로 율법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아브람으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았다는 것은 율법의 정한 바에 따라 십분의 일을 받는 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날 뿐만 아니라 율법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멜기세덱은 레위 제사장 자손들이나 율법을 능가하는 뛰어난 인격과 권위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은 반드시 아론의 혈통에 따른 자손이어야 할뿐만 아니라 외형적 신체적 결함 사항 중 어느 한 가지에라도 해당되면 제사장으로 자격이 상실되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가 레위기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18)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20)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22) 그는 하나님의 식물의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 (23) 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라 이와 같이 그가 나의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레위기 21:16-23)

이렇게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에 따른 제사장의 자격은 단순히 혈통과 신체적인 자격 요소만을 따졌지 인격이나 성품, 능력 같은 것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율법 아래에서 제사장이 되는 사람은 반드시 아론의 족보에 들어야만 했고 제아무리 인품이 뛰어나고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아론의 족보에 들지 않으면 결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된 것은 혈통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인품과 의로움으로 된 것이었기에 레위 제사장 자손들이나 율법보다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원래 율법과 제사장 제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에 순종하여 잘 지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관계를 이루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제사장 제도와 제물을 바치는 제사의식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제사장을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데 이는 '다리를 놓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 그 방법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의식인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 그것이 죄가 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다리가 끊어지게 되는데 이 다리를 이어주는 의식이 바로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제도입니다. 그런데 유대 백성이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제사장 가계를 입증할 족보를 제출할 수 없게 되어 그 후로 지금까지 유대 종교는 남아있어도 제사장이 없는 무의미한 유대교가 되고만 것입니다.(느7:63-65) 이러한 사실은 제사장 제도가 이제 그 기능을 잃어버린 과거의 낡은 제도에 불과한 것이며 아울러 율법 역시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아론의 족보에 따른 제사장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제사 제도마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리를 놓아야 할 사람과 그 다리를 놓는 방법이 모두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들 가운데 세워진 제사장 제도와 제사 의식, 율법은 참으로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율법과 제사장으로서는 더 이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과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으며 좋은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그 다리(pontifex)는 끊어졌지만 그로 인해 <더 좋은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3절) 멜기세덱,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불리우는 멜기세덱이 암시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과거 율법과 낡은 제사 제도, 제사장들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성취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다리를 놓으신 것입니다.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도록 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다리를 끊어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율법 앞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율법은 그 인간의 죄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율법이 정한 어떠한 제사제도도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씻기시기 위해 흘리신 어린양과 같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의 피밖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하는 소망은 율법과 제사장 제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불완전한 율법과 제사장 제도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더 좋은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인간의 죄를 영원히 씻어 다시는 하나님께 나가는 다리를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다리를 단절시키는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없애기 위해 자신이 친히 제사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희생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제물을 드려 지성소 휘장을 영원히 열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론의 제사장 혈통에 속하지 않으면서 아브람을 축복함으로 그가 율법과 아론의 혈통에 따른 제사장들보다 훨씬 뛰어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신 것처럼, 예수께서 율법이나 인간의 혈통에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대속(代贖) 제물이 되시므로 죄로 말미암아 끊어진 다리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연결시키신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제 누구든지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으며 참된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 구원을 위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시며 의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멜기세덱이 율법과 제사장들보다 월등한 인격과 권위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완전하신 인간되심과 완전하신 하나님의 권위로 불완전한 율법과 제사장들을 능가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시며 의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규정한 율법과 제사 제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일각에 공자 신드롬이 일고 있는데 공자의 사상은 과거 조선 500년 동안 숭상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일부 공자 사상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 이 공자 사상에 따른 유교적 전통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조선 500년 동안 유교적 전통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기는커녕 더욱 부패하게 만들었으며 가진 자들을 변호하는데 이용되어 결국 나라를 패망케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도 유대인들의 특권 계층에 의해 이용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는커녕 오히려 부정부패하고 타락하여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나라 자체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사상이나 율법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과 성품, 그리고 능력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본질이 십자가에 나타나심으로 인간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성품과 인격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죄를 씻어 의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함으로서 인간이 저지른 과거의 오점은 이미 영구히 지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거를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음을 십자가를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된 과거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속죄양으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찬송가 184장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가사가 무려 열다섯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이 찬송가의 작사자인 로버트 로우리 목사는 필라델피아에서 자라나 주로 뉴욕에서 목회했습니다. 1876년 그가 부르클린 침례교회에서 목회할 때 남북전쟁이 몰아친 뒤에 전염병이 뉴욕에 만연되어 극악의 참상이 벌어졌었습니다. 그의 교인 중에서도 여럿이 병상에 누워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환자를 방문하고 돌아와 지쳐서 잠깐 눈을 감았을 때 그는 하늘이 열리고 광채 속에 예수께서 피묻은 손바닥을 펴시며 나타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이 깨어 감격에 차서 이 찬송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와 세상의 평화는 예수의 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찬송 속에 담겨 있습니다.

과거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인류의 소망이었던 율법과 제사장 제도로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였지만, 오직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시는 피는 능히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예수 믿는 자의 죄를 영원히 없게 하시었습니다. 인류의 소망은 평화(평강)입니다. 이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겨져 의롭게 되어졌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십니다. 인류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의 피밖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밖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된 다리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져야 할 참되고 <더 좋은 소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돈, 명예, 지식, 사상 등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 피를 <더 좋은 소망>으로 삼는 이 나라 백성과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