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성 바벨론 5 (계 18:9-11)

9.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1. 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이 시간에도 “큰 성 바벨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서기 4~5세기 고대교회사 나오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사상가인 어거스틴 이야기입니다.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방탕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기도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이야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길을 가다가 전에 사랑하며 지내던 여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길을 가니까 그 여자가 어거스틴 앞에 나타나 소리쳤습니다. "어거스틴! 나야, 나, 나라니까." 그래도 어거스틴은 모른 체 묵묵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더욱 소리를 높여 어거스틴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왔습니다. 그 때 어거스틴은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요. 지금의 나는 과거 당신을 알아주던 그 어거스틴이 아니란 말이요." 라고 돌아섰다는 간증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만 받는 은혜가 아니고, 우리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은혜를 받으면 그와 같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특별하신 은혜를 갈망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심령은 어떻게 변할까요?


1. 세상에 빠졌던 것을 후회하며 가슴 치게 됩니다.


9절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여기 땅의 왕들은 문자적으로는 바벨론의 비호 속에 권세를 누리던 왕들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는 죄악을 따라 살았던 전의 육신에 속했던 삶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불타는 연기를 보고 울며 가슴을 쳤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죄인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합니다.


성령이 강림하시던 오순절에도 그랬습니다. 행2:37-38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회개를 '메타노니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180도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후회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은 죄가 영화의 필름처럼 스쳐지나가면서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는 간증들을 들어봤지만 이런 은사적인 체험 아닐지라도 우리 중심에서 죄에 대한 강한 슬픔과 아픔을 가져야 그것이 회개의 한 모습입니다.


여기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친 것처럼 정말 무가치하고 세상에 불 탈 수밖에 없던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것을 위해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가슴 쳐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약4:8-10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했습니다.


2. 죄를 심히 두려워하며 멀리하게 됩니다.


10절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여기 바벨론의 심판을 바라보는 주변 나라의 왕들의 두려운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예언한 대로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을 본 그들은 큰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다 끝나갈 무렵 1945년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3일 후인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두 도시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던 6일 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이 엄청난 위력을 가진 원자탄 앞에 두 손 들지 않을 군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지 체험한 후에 깨닫는다면 그 고통은 너무나 큽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하는 것은 죄를 심판하실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좋은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 깨닫든지, 남이 당한 것을 거울삼아 나에게 주시는 교훈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0:6-11에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했습니다.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처럼 죄와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화를 불러오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23:13-3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책망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죄가 이렇게 두려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3. 성령이 임하시면 안 되던 회개도 되게 됩니다.


10절 하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여기 한 시간이란 개역성경에서는 “일 시간”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즉 바벨론이 견고한 난공불락의 도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니 한 순간에 무너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 이라고 한 말씀에는 바벨론의 대적들이 그 크고 견고함에 낙심할 수밖에 없었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죄는 그렇게 강합니다. 이 성을 무너뜨릴 사람은 태고이래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 풍조를 법으로 다스리면 음성으로 기어들어가 또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나 회개가 되지 않던 사람도 성령이 임하면 회개가 됩니다. 회개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회개하기 위해 늘 힘쓰십시오. 그러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서 10개 짓는 것보다 교회 하나 짓는 것이 더 낫다고 했는데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면 100개 짓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발휘할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 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예수 안에서 이미 이겼고, 성령 안에서 그 승리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4.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 것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습니다.


11절 “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여기 땅의 상인은 세상에서 세속의 상품을 거래하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 거래자는 배후에 사탄입니다. 그런데 변화되고 나니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 인기 있던 명예 권력 사치 탐욕 자랑 교만 등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근세기에 중남미 과테말라에 인구 2만의 작은 도시 알모롱가에 일어난 부흥운동은 유명합니다. 알로롱가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고 마약과 불량배들의 소굴이었는데 이곳에 모여서 기도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나 깡패들이 모두가 변화되어 지역 목사들이 되었고 마을사람 90%가 복음화되었으며, 36개의 술집 중 33개가 사라졌고, 감옥 5개 중에서 4개의 감옥은 폐쇄될 만큼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시 곳곳마다 예배하는 물결이 넘쳐 과테말라 사람들은 알모롱가를 ‘교회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이 지역 출신 마리아노 목사의 목숨을 건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더 이상 위험하고 어두운 도시로 남겨둘 수 없어 일주일에 3~4일씩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기도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주변의 토지까지도 변화되어서 매마른 땅에 기적같이 샘물이 터져 나오고 모든 수확물들은 갑자기 2~3배 커지고 영양분도 높아지고 수확량도 수십 배 늘어나 미국과 남미의 몇 나라에서 농업전문가들이 방문하여 조사했지만 원인을 발견할 수가 없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전에 추구하던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은 잘 팔려도 죄는 팔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실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아직도 세상을 추구한다면 그는 아직 은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정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면 423장 찬송처럼 세상부귀 영화와 즐겨하던 모든 것 주를 믿는 내게는 분토만도 못하다.”라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하셨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성령의 불이 임할 때 우리는 주님을 믿게 될 뿐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십시다. 은혜를 받으십시다. 더욱 새로워지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구원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가장 기쁨이 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신약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벨론의 상품 3 (계 18:12-13)  (0) 2025.04.17
바벨론의 상품 1 (계 18:12-13)  (0) 2025.04.05
큰 성 바벨론 4 (계 18:7-8)  (0) 2025.03.22
큰 성 바벨론 3 (계 18:5-6)  (1) 2025.03.15
큰 성 바벨론 2 (계 18:3-4)  (1) 2025.03.08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의문점  로마서 3장 1-8절

 

사람들은 살아가면 많은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대해서 많은 질문과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동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친절하게 하나하나 대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풍성하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전달되길 축복합니다.

 

그 동안에 유대인들은 스스로 우월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민족들은 멸망해도 자기 민족만은 구원을 받는다는 어처구니없는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인 이방인은 물론이고 유대인들까지도 죄인임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의 지위를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몇 가지 반론들이 제시될 것입니다. 그 반론들을 대략적으로 논합니다.

 

유대인이 존재할 이유(1-2)

 

로마서는 ‘복음’에 대해 소개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먼저 소개합니다.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겉으로 하나님의 자녀라지만, 속에는 이방인들보다 더 탐욕스럽고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1-2)

 

앞에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죄와 심판 아래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주장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성들이나 이방인 성도들 모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주장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까지도 심판하신다는 주장을 듣고, 제기될 세 가지 질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 비교했을 때,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다음으로 ‘우리가 불의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들어난다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해도 되는가?’ 등입니다.

 

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1)

첫 번째 질문인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입니다. 이 첫 번째 질문은 2장 17-24절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 아니다’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반문이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은 할례나 혈통을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의 특권의식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외형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들만이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진리라고 여겨왔던 내용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질문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 일뿐, 몸에다 할례를 행하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⑵ 그에 대한 대답(2)

이제 이런 질문이 대두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는 자문에, 즉각적으로 ‘유대인의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깐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 언약의 후손으로 할례 받은 것이 하나도 유익이 없느냐?’는 이런 질문입니다. 바울의 즉각적으로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대답합니다. 절대로 유대인 됨이나 할례 받음이 무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할례가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책임을 맡겨준 것입니다. 율법과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는 유대인들이 소중한 존재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특권’은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소개합니다. 유대인들의 유익한 하나님의 일은 많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펼쳐 나가는 말씀의 통로이자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구약성경을 의미한 것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소유했다고 해서 저절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유리한 점입니다.

언약을 맺을 때, 언약 당사자들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서약합니다. 출애굽 19:5-8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2:1-29에서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언약의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언약(계약) 관계에서는, 한편이 약속을 어기면 다른 편은 자동적으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신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심을 유지하십니다(참조 15:8). 사람은 다 거짓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참되십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하나님의 신성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성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유지하고 전달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존재할 이유(3-4)

빛이 어두움 가운데서 더 밝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인간의 불신실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불순종에 대한 심판은 변명의 의지가 없고, 하나님의 지혜는 그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결국 불순종하였음을 지적합니다.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

 

유대인들의 유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인데,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을 일으킵니다. 그 질문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3)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을 통해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의 나라인 아브라함을 통해 온 민족이 복을 얻는 계획은 사라지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그 말씀을 받은 사명을 잘 감당치 못하여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지만 그 말씀을 따라지 않고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계획이 사라지는 것이냐 라는 지적합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4a)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불신실함 때문에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며, 인간이 아무리 약속을 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신다고 바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실치 못한 행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구절은 시편 51:4의 후반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칠십인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4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시편 51:4)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회개하며 지은 시이며, 51:4은 다윗의 신실치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더 쉬운 성경으로 살펴보면,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의 눈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유죄 선고가 마땅할 뿐입니다. 주님의 유죄 선고는 옳습니다.’(새번역성경)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판단과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사실은 인간의 신실치 못함(다윗의 범죄)에 의해 뒤집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지만, 그 말씀에 대해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실로만,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이 실수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은 신실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심을 확증시켜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변질시킨 궤변(5-8)

인간의 하나님의 모든 길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불순종하면 이방인들을 통해서 사역해 나갈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상상도 못할 불경건한 생각이라고 할 것입니다.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5-8)

 

하나님께서 선택한 유대인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실패한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결코 폐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불의할수록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더욱 극명하게 대조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⑴ 불의하지 않는 하나님(5-6)

바울은 몇 가지 부가적인 질문으로 자기의 주장을 이끌어 나갑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시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즉시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대답합니다.

만일 우리의 신실치 못함과 범죄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까? 더 나아가 사람들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더 악한 일을 해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불의하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거짓말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그분이 범죄한 유대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절대로 불의하지 않습니다.

 

⑵ 예상 가능한 두 가지 반론(7-8)

바울은 질문과 대화식을 통한 교육 방법을 사용하여 유대인들로부터 제기될 만한 추가적인 질문들을 먼저 던집니다. 5절에서 ‘언약의 파트너인 유대인들의 신실하지 못함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들어났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 합당합니까?’, ‘유대인의 불신앙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를 질문에 파생되는 또 다른 질문들을 던집니다. 바울은 ‘나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더 풍성히 드러내어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나를 죄인처럼 심판하겠느냐?’(7)입니다. 심지어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8)라는 보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직접 받았던 비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바울이 그런 복음을 전하고 다닌다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설명한 복음은 악을 더 조장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6:1,15). 이 단락에서 바울은 일단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의할 수 없다’(5,6)는 강한 부정만을 남기고 추가적인 논의는 뒤 단락으로 넘깁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8)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신 분임을 다시 상기시킵니다(참고 6). 세상을 심판하실 분에게 불의가 있다면 그가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주제는 다음 3:29-30절에서 다룹니다.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29-30)

 

사람의 신실함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사람에게는 구원과 결실을 맺게 됩니다. 반대로 사람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진노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죄과대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고 의로움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반박하기보다는 강한 부정을 하고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5:20-6:4에서 다시 이 문제를 자세히 거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손상시키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냈으니, 하나님의 선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더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방인처럼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궤변이요 억지입니다. 그리고 책임 회피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2장에서 바울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하여 유대인의 율법 소유와 할례의 특권을 박탈한 다음, 3:1-8에서는 유대인의 항의에 대하여 답변합니다. 3:1-4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 안에 있는 유대인의 유익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3:5-8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방종주의의 위험을 취급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성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숨겨진 은총 53:4-6, 고전1:18-25
십자가에 대한 감동적인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우주 최대의 사랑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 성경은 사랑의 편지, 성령은 사랑의 영, 우리는 그 사랑의 부르심에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다. 우리의 기도는 사랑의 속삭임, 전도는 사랑의 중매, 찬송은 사랑의 노래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사랑의 드라마의 절정, 사랑의 고백, 사랑의 심장파열 사건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죽은 곳이다. 예수님이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터진 곳, 바로 그 곳이 십자가다." 신약 본문 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거리끼며, 미련하게 여기는 십자가를 묵상하며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에 숨겨진 은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십자가에 숨겨진 은총은,


1.죄 사함을 받는 은총입니다.
구약 본문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라는 말이 아홉 번이나 반복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것은 나를 포함한 우리를 대신해서 죄로 인한 저주와 형벌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믿어 고백해야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 때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본래 죄가 우리 위에 왕 노릇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진노와 형벌, 죽음과 지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이미 사형 선고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입고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고와 고난을 통해 죄 사함 입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노예 제도가 성행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백인의 집에 아주 거칠고 반항적인 청년 노예가 있었습니다. 이 노예는 길들이기 위하여 때리면 때릴수록 더 거칠게 반항하였습니다. 백인 주인은 할 수 없이 이 청년 노예를 시장에 내다 팔기로 하였습니다.
노예 시장에 도착한 청년 노예는 전보다 더 거칠게 주인에게 반항을 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주인은 옆에 차고 있는 칼을 빼어 반항하는 노예의 가슴을 향해 찔렀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선교사 한 분이 노예를 살리기 위하여 손바닥을 벌려 칼을 막았습니다. 칼은 여지없이 선교사의 손바닥에 꽂혔고 그로 인하여 노예는 조금도 상함을 입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은 선교사의 손바닥에 칼이 꽂히게 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고 죄송한지 즉시 병원으로 옮기게 하여 수술을 받고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선교사가 미소 띤 얼굴로 노예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청년을 칼로 찔러 죽이려고 하였소?" "전들 많은 돈을 받고 팔 수 있는 노예를 손해를 보고 죽일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이놈이 너무나 거칠게 반항을 하여 참을 수가 없어서 죽이려 했습니다."
선교사는 시세보다는 싼 가격으로 노예 청년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때가 되어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청년 노예는 늘 하던 대로 부엌 한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저녁을 먹으려고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그를 불러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나는 너를 노예로 산 것이 아니라 노예의 억압으로부터 너를 자유케 하기 위하여 노예의 값을 지불했을 뿐이야 이제부터는 너는 자유의 몸이고 너는 나와 한 형제이니 한 상에 둘러앉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자신 때문에 손바닥에 칼이 찍혀 큰 부상을 당한 선교사에게 고맙고 미안하여 몸 둘 바를 몰랐던 흑인 청년은 통곡을 하며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선교사님을 위하여 몸이 가루가 되도록 섬기는 일을 하겠습니다."하고 그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내가 찔림 받고 상함을 입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나 대신 죄 값을 지불하시려고 찔림을 받고 상함을 입으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했고,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주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죄 사함의 은총을 받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치유 받는 은총입니다.
본문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했습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마음, , 영적인 아픔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료 받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나음을 받아야 합니다. 아프고 나음을 입는 반복적인 과정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싸매 주시고 고쳐 주십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심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고 기도할 때 나음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영혼의 질병이 치유됩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되고, 영적 무지가 물러나 성 삼위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혜가 생기게 되고, 혼돈 대신 마땅히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이 물러가고, 대신 온유와 겸손의 마음, 옥토 같은 마음이 깃들게 됩니다.
*정신적, 육신적 질병으로 고통 받았던 자들이 치료함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하신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가 질병을 치유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귀신이 들렸던 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귀머거리, 소경, 혈루병자, 손 마른 자, 문둥병, 열병, 벙어리 등 각색 병으로 고통을 받았던 자들이 주님께 나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죄 사함을 통해 죄로 인해 잃은 것이 회복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 진노 대신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주님 앞에 당당함이 회복되어 은혜의 보좌로 힘써 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죄책으로 인한 불안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 대신 담대함과 평안이 회복이 됩니다. 슬픔과 탄식 대신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됩니다. 전에는 보이는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았는데, 하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치유는 온전한 치유로 병들고 망가진 심령이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합니다. 

 

영국 황실 아카데미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피터 구르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소원인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명장이 만든 바이올린을 연주해보기를 그도 소원했습니다. 마침내 그에게 258년 전에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만든 바이올린을 가지고 핀란드에 가서 연주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흥분한 가운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바이올린을 안고서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 바이올린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실망 가운데 있는 그에게 런던의 악기를 손질하는 유능한 수리공이 "내가 그 악기를 고쳐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수리공이 다시 악기를 잘 만져서 감쪽같이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고친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주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전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나서 큰 찬사를 받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진 우리는 죄로 인해 다 깨어지고 망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아니면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길이 붙잡아 주셔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온전케 하시고 과거보다 더 좋고, 더 귀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붙들고 모든 상처를 고침 받고 주님을 향해서 달려가고, 또 달려가야 될 주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들에게 "이 치유의 복음"을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치유 받고 온전한 모습으로 주님 영광 드러내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구원 받는 은총입니다.
신약 본문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주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도, 더욱이 나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도, 한 사람의 죄도 아니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생각과 지혜로는 믿어지지 않는 도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셔야 믿어지고 감격하게 됩니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로는 깨닫지도,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19절에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2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지혜의 으뜸 자들인 학자들의 지혜와 똑똑한 변론가들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찾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이 미련하게 보이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 영화는 좋은 것으로 보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천국, 구원, 영생 등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밟아버리는 것처럼 복음의 가치를 모르고 밟아버립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내 죄를 사함 받게 하는 십자가요, 나를 억만 죄에서 구원하는 보배로운 십자가이기에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 고백이 담겨 있기에,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기에, 너무 자랑스럽기에 내 몫의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고 고달픈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쁨이요, 감사요, 은총이요, 영광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사무엘 러더퍼드는 "새에게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바다를 달린다. 신자는 그 십자가가 짐이 되나 그것이 그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여 전진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보증 상품 중에 종신보증 보험이라는 것이 인기라고 합니다. 퇴직, 은퇴, 사고, 질병 등으로부터 종신토록 모든 문제를 책임 져 주는 보증이라 해서 인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백년 미만의 제한된 미래만을 보장할 뿐입니다. 죽음 이전까지만 유효 할뿐, 죽음 이후에는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와 죽으신지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은 죽음 이후 영원까지 보장을 약속하는 보증이 됩니다. 세상에 유한한 종신보증 보험의 경우에는 많은 보험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영원한 미래가 약속된 영생의 보험료는 단지 믿음을 지불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생명을 희생해서 피로 그 값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에 숨겨진 은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십자가에 숨겨진 은총은,
.죄 사함을 받는 은총입니다.
.치유 받는 은총입니다.
.구원 받는 은총입니다. 아멘.
<2025. 03. 26.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큰 성 바벨론 4 (계 18:7-8)

7.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이 시간에 “큰 성 바벨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미국에서는 미식축구 결승을 1억 2천만 명이 동시에 시청할 만큼 미식축구에 대한 열기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총장들의 속을 제일 썩이는 것 중 하나가 대학 축구팀을 강화하라는 동창회의 압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압력 속에서도 시카고대학은 30세에 총장이 된 로버트 허친스의 방침에 따라 축구장 문을 굳게 폐문하고 대학의 본연인 학문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참 대단한 총장입니다.


이런 지조가 우리 신앙인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롬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악이 발달하고 모두가 그 풍조에 휩쓸려 가면서 우리를 바보로 여긴다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히 변치 아니할 소중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할 뿐 아니라, 이 패역한 세상에 밝은 빛이 되어 세상을 개혁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원하시고 계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4.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의 가치를 배설물로 만드십니다.


7절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이 말씀 속에서 바벨론의 영화와 사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식민지의 모든 부요와 영광이 바벨론으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사 14장에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는데 거기 보면 바벨론은 압제하던 자, 강포한 성, 악인의 몽둥이, 통치자의 규(珪, 손에 쥐던 패)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스홀(지옥)이 소동하여 너를 영접한다고 말하면서 14:11에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라고 예언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얼마나 세속을 숭배하고 잘해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 경건한 신자 만들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지만 한 영혼 세속화시키기는 너무나도 쉽습니다. 세상을 제일로 삼는 그들일지라도 예수 믿어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더 이상 세상을 호화롭거나 영화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즉 은혜 받은 성도의 눈에 세상은 참으로 천박스럽고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을 받게 됩니다. 구더기보다 못한 존재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빌3:7-8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배설물은 바로 똥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저희 신은 배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고 살았던 과거는 사라지고 이제는 세상 죄가 부끄러움과 수치와 멸망의 어리석음으로 인식되고 고난과 애통되는 일로 인식되고 이제는 죄악을 버릴 정도가 아니라 원수처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을 사랑함이 심령의 큰 교통입니다. 사람들이 재미 있다 느끼는 모든 것들이 조금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1-3) 말했습니다. 더 이상 그 치욕스런 과거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5.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을 추종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여기 착각에 빠진 바벨론의 오만한 말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왕이고 과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여왕이라. 왜 세상이 자기를 여왕이라 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떠받들고 추종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바벨론 왕은 그의 지배하던 나라의 왕들로 하여금 자기를 숭배토록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금 탐심의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골3:5). 욕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아니라. 왜 과부가 아닐까요? 누구와 결혼한 것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과 결혼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세속에 대해 그렇게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 아래 인생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죄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조강지처처럼 죄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14:2-3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했습니다. 롬3:10-12에도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열렬한 추종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여황이 아니며 어찌 내가 과부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앞날에는 결단코 비극은 없을 것이라는 장담입니다. 그렇게 장담할 만 합니다. 그것은 역사 이래 한 번도 인간 스스로 죄악을 성공적으로 배척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죄인들에게 선호도가 높았지만 그 호황도 비극을 맞이할 때가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날 즉 성령이 임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더 이상 세상을 추앙하거나 추종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배척하고 몰아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심과 같이 우리 마음에서부터 세상을 몰아냅니다.


자세히 보면 몰아내야 할 세속적인 것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말이나 메시지로부터 시작하여 방향이나 정책이나 의식구조나 삶 등 세속의 물결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모릅니다. 초대교회에도 세속이 침투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기 때문에 야고보가 얼마나 책망했는지 야고보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젠 말씀과 성령으로 더 변화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6.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 경악케 하십니다.


8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여기 하루는 ‘홀연히, 일 시간에, 창졸 지간에’로 번역되는 말로 성경에서는 은혜의 역사를 시사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 역사의 시간적 특징은 홀연 함입니다. 그래서 하루 지금 오늘 홀연이라는 말이 은혜와 관련이 깊습니다.


행2:2에도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라 했고, 행9:3에도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했고, 예수 탄생 시 천사들의 나타남이나(눅2:13) 변화 산의 사건도(마17:5) 홀연히 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도 홀연히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고전15:51).


그리고 성경에서 ‘하루’라는 낱말도 대부분 시간적인 개념보다 은혜의 날의 개념에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고, 히3:13에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했습니다.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여기 재앙이 죄에게 임한다는 건 구속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의 날은 일반적으로는 죄인을 심판하는 날이지만, 그 예언이 담고 있는 궁극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강림과 그리고 장차 재림하사 죄를 소멸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신령한 의미입니다(말4:1-6, 욜2:29-31). 이걸 알면 선지서가 풀립니다.


그 때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 있는데 이건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모두 탕진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애통하듯이 세상을 그렇게 느끼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그 무가치하고 냄새나고 쓸모 없고 고통스런 그런 죄 가운데서 왜 애지중지하며 살았나 후회가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더 이상 세상은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0년대 정치폭력의 대명사로 사람들에게 각인됐던 용팔이로 알려진 김용남 씨가 20년이 지난 지금 조폭시절 입에 달고 살던 술, 담배, 주먹과 이별하고 하나님과 열애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기사에서 기자가 그를 만나러 그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들어서기 전부터 우렁찬 찬양소리가 들렸는데 얼마나 찬양에 열중하는지 기자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 모습이지 조폭에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미소는 순수했고, 해맑은 눈동자에 수줍음이 가득한 미소, 작은 체구, 정돈된 콧수염, 만화 속 뽀빠이 아저씨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요즘 하루 2시간씩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시험과 유혹이 강해 신앙생활 힘들어 열심히 기도생활한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난 후 가장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말투요. 30년을 조폭세계에 있어서 입만 열면 욕만 나왔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성령 받으면 이렇게 됩니다.

7. 세상은 성령의 불로 잔재조차 남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여기 불로 사르신다는 건 죄악의 잔재조차 남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크게 받으면 가슴 치며 애통하며 죄는 불살라지고 은혜를 주리고 목말라 사모하며 죄악은 잔재조차 허용치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살전5:22-23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사9:5-6에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전쟁 이야기 같지만 메시아의 초림 이야기입니다. 이 은혜는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왜 세상 죄를 심판함에 있어서 강하신 하나님을 언급할까요? 그만큼 세상을 떼어내버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세상 죄악이 그렇게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 주 하나님의 은혜는 강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다 이기실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민33:3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다 한 것처럼 죄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걱정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죄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복음을 믿고 늘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받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 대한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성령의 은혜로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에서부터 세상이 심판 받고 나아가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세상의 죄악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나 깨나 주님의 임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오셨고 오시고 계시고 또 온전히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은 물론 이 세상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날마다 심판의 영으로 임하시는 주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귀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신약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벨론의 상품 1 (계 18:12-13)  (0) 2025.04.05
큰 성 바벨론 5 (계 18:9-11)  (0) 2025.03.28
큰 성 바벨론 3 (계 18:5-6)  (1) 2025.03.15
큰 성 바벨론 2 (계 18:3-4)  (1) 2025.03.08
큰 성 바벨론 1 (계 18:1-2)  (0) 2025.03.01

유대인의 불신앙  (로마서 2장 17-29절)

 

‘전문가적 변형’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이기에 더 타락하기 쉬운 경향을 말합니다. 가령 의사이기에 환자의 고통에 더 둔감하고, 법조인이기에 위법이나 탈법, 편법에 능숙하고, 목사이기에 말씀을 더 소홀히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율법을 맡은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할례를 언약 백성의 표지로 삼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보장해준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통념을 비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새로운 언약 백성이 출현하였음을 암시합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율법(17-24)

신앙생활은 하다 보면 다양한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성경 지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데 삶은 세속적인 상태로, 많은 영적 지식으로도 말씀대로 살지 않을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죽은 지식은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율법의 소유가 그들을 저절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17-24)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논증의 초점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도 전혀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로마서에서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가장 잘 묘사한 소단락입니다.

 

⑴ 유대인의 자부심(17-20)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라고 지칭한 사람들 가운데는 도덕적인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포함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17)라고 하면서, 이제 이야기 주제를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전환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하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곳에 등장한 세 가지 다른 표현들은 유대인들에게 사실상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부르는 것’, ‘율법에 의지하는 삶’,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특권’은 옛 언약 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삶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묘사한 것들입니다.

본 단락의 핵심 단어는 ‘율법’입니다. 2:12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 ‘노모스’를 통해, 바울이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와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어떻게 재해석하게 되었는지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노모스’가 유대인들의 토라, 즉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구체적인 규례들을 말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문서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언약과 마찬가지로 율법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갈라디아서 2:21을 보라.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오히려 하나님 은혜를 폐하려 한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됨과 율법에 대한 의지는 하나님에 대한 자랑과 같은 말입니다.

18절에서 말하는 대로,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분간케 합니다. 바울은 17-20절 단락에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세와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다가 의도적으로 두 개의 분사구문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17)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지고서’(20)인데, 두 구절 모두 유대인들을 위한 절대적 삶의 기준으로서의 율법을 말합니다. 구속사 전체 속에서 볼 때,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되, 그 뜻을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대적, 문화적, 지리적, 인종적인 옷에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토라는 자연히 구속사 속에서 시대적인, 문화적인, 인종적인 한계를 지닌 계시의 도구였습니다. 그것이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윤리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유대적인 외피(外皮)를 벗겨내는 해석의 작업이 요청되었습니다.

19-20절은 이러한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비유, ‘맹인의 인도자와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설명하기 위해 흔하게 사용하던 표현들입니다. 20절에서는 이를 더 직접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교사’와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풀어놓았습니다.

 

⑵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모독 받으심(21-24)

21-24절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 달라진 바울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말합니다. 21-22절은 율법으로 이방인을 가르치고 선도해야 할 유대인이 이방인과 동일한 도둑질, 간음, 이방 신전에 대한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인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고 평가합니다(23-24).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과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분명 다메섹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졌습니다.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율법을 범한다면 할례도 무익하며(25),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할 것(28,29)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사실상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율법과 할례를 분리합니다.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유대인들의 소명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삶의 체계에 대한 확신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럴수록 율법에 대한 열심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유대인은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합니다(레위기 18:5). 다메섹 이전의 바울도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 3:6)라고 생각하고 동족들이 모두 자신과 같다면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2:21 이하에서 바울이 율법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실 가능성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과 의로움을 이미 나타내 보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이야기 전체 속에서 이스라엘과 율법이 가지는 구속사적 기능을 비로소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할례와 상관없이, 심지어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유대인 중 예수라는 한 사람만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다메섹 경험 이후, 구속사의 놀라운 성취를 깨닫게 된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에 대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문제(죄, 사망)를 해결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적 계획을 이루기에는 율법이 턱없이 ‘연약한’ 도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율법의 연약함’(8:3)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주신 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율법과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할례(25-29)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 율법의 정신을 따르면 참할례 받은 자처럼 됩니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손으로 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할 때 영적인 유대인,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5-29)

 

어떤 이유에서건 유대인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까 봐 바울은 유대인의 종교적 유산 중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친숙한 면인 할례를 거론합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시조 때부터 유대인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⑴ 진정한 할례(25-27)

25-26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은 율법을 범하지만, 정작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지키는 상황을 설정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은 이후의 단락들에서 주어지는 바울의 설명 때문에 하나씩 풀려나갑니다. 로마서 5:12-21에서 바울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음을 밝히는데, 로마서 7장이 말하는 대로 그 노예 됨의 딜레마는 역설적이게도 율법을 소유하는 유대인에게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고,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이 없음을 밝혀나갑니다.

 

⑵ 내면적 유대인(28-29)

25-29절 단락도 다메섹 이후 바울의 선이해가 반영된 진술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룹니다(8:4).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러한 자들이야말로 이면적 유대인이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28-29). 29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프뉴마’, 곧 성령의 사역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8장에서 다룰 성령의 사역을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할례를 받았는지의 여부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실제로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이루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그리스도와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유대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에 의해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27). ‘판단’(27)과 함께 ‘칭찬’(29)은 종말적 심판대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결정적으로 판가름할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성령의 인 지심에 있습니다.

2장 전체를 통해 바울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는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장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그러하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이, 교회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심지어는 ‘복음’마저도, 우리가 마음을 바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 8:34-38, 벧전2:19-25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은 현세의 삶만 생각하고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영달과 연락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후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일 일을 너희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없어지는 안개니라.”(4:14)고 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 반드시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것과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고,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비극적인 사람은 가난하거나, 질병으로 고난을 당하거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죽음 후에 예비 된 영광스런 처소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갈 곳은 영원한 형벌이 있는 곳이니 이 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을 포함해서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하여 나를 따르라.’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1.자기를 부인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본문 3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인한다.’는 말의 기본 개념은 아니오.’라는 뜻입니다. 자기 부인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기 부인 없이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고,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그는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하실 때,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마치실 무렵 십자가 지는 일을 앞두고 깊이 고민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서 특히 사랑하는 세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할 것을 당부하시고 홀로 떨어져 기도하시면서 십자가 고난의 쓴잔을 피하고 싶었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기도 후에 예수님이 관원들에게 잡혀가셨을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 동태를 살피다 어떤 계집종이 "당신도 예수라는 사람을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할 때 그는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육의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서였습니다. 본문35-36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같이 목숨이라 번역 되었는데, 뒤의 목숨은 헬라어 푸쉬케라는 영적 생명으로, 주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하신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육의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 주님의 말씀이 생각 나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낙심이 되어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와 만나신 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양 때를 먹이라고 당부하십니다. 그 후 그는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고,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은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관원들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위협과 박해를 받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영적 참 생명을 얻기 위해 육의 생명을 기꺼이 버린 것입니다.
이 일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삶의 권리를 주님께 넘겨드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우리 행동의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위임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고집대로 자기 부인하지 못하면 사는 길 같으나 결국 죽는 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국경을 지키던 1,200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탔습니다. 군인들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군인들은 기쁨에 들든 나머지 빨리 가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기관사는 얼마 못가서 급경사와 급커브가 있는데 이렇게 많이 태운 채 가면 대형사고가 날 겁니다.”라며 기차를 출발시키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을 인솔하던 장교 하나가 기관사에게 총을 빼들고 당장 이 기차를 움직이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장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고한 자기들을 기관사가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관사는 할 수 없이 기차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급경사에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내려갔고 결국 급커브를 돌다가 탈선해 전장에서도 목숨을 지켰던 수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식과 질서를 무시한 한 장교의 고집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신나게 달리다가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우리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의 마음을 품고 따르는 자입니다.
본문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주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 면에서 본을 끼치셨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온유하고 겸손한 본이 되셨습니다. 완고하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죽기까지 순종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마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21:5에 보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당시 왕은 군대의 호위를 받고 즐비한 신하를 거느리고 백마를 탔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는 그보다 100 1000배도 더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마땅한 분인데, 겸손하여 나귀 그것도 어린나귀를 타셨습니다. 본문에도 그런 겸손의 모습에 대하여 22-23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희생하시며 섬기는 본이 되셨습니다. 서신서 본문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이 죄인인 우리가 받을 저주와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주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시고 너희도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임을 아시고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말씀은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따라오며 우는 여인들에게 향하여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예루살렘을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아 사형을 집행하면서 매로 때리고 가시관을 씌우고, 희롱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23:34)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께서 묵묵히 십자를 지신 것은 억지로 지신 것도, 무리를 대항할 힘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습니다. 주님은 잡히지 않기 위해서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칠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렇게 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배워 주님의 마음을 품고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입니다.
마가복음 본문 34절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는데 로마에 대하여 중한 죄, 특히 로마정부에 대한 반역죄에 대하여 로마정부는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감옥에서부터 형장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였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유명한 성경학자 스웨트(H. B. Swete)가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유죄선고를 받아 그 형벌을 받으러 가는 사람의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당시 사회에서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신자들은 순교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자기는 원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의 형장에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이러한 일이 초대교회에서 있었고, 우리 나라에서 조선후기와 일제시대, 그리고 6.25사변 때는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다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공산 치하나 이슬람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지역들이 있습니다. 또한 일상생활에 많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에 죽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사명을 감당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을 일이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세상에 대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고 했습니다. 희생이 따르기에 남이 지지 않으려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며, 영생과 함께 핍박과 기업을 겸하여 백배로 받는 길입니다.(10:30) 주를 위해 사명의 십자가 지는 사람들을 주님은 그저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상급과 면류관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교회와 나라와 인류를 위해 기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여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독일전란 때 자유를 애호하는 자였다. 나는 이것을 보수하기 위하여 대학교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독재자의 탄압 아래서 모든 대학교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다시 신문 편집자들을 보았으나 그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독일의 자유를 위하여 글을 쓰던 유명한 저술가들을 바라보았으나, 그들도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은 히틀러의 탄압 아래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전에 교회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 나는 교회에 대하여 애정과 탄복을 느끼는 바이다." 이처럼 세상을 위한 사명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따르는 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입니다. 아멘. <‘25. 03. 19.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큰 성 바벨론 3 (계 18:5-6)

5.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이 시간에 “큰 성 바벨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모에게 함부로 하는 망나니 아들이 있었습니다. 오냐 오냐해서 키웠더니 이 아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는데도 여전히 망나니였습니다. 손자가 보는 앞에서도 손짜검하는 짓은 여전했습니다. 화가 잔뜩 난 할아버지는 그래도 그 손자만은 극진히 아끼며 사랑하며 키웁니다.


이것을 본 옆집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는 자식 놈이 그렇게 학대하는데도 손주 녀석이 밉지도 않는가?” “왜 안 밉겠나?”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는가?” “참 자네도 생각해 보게, 내가 이렇게 나이 많은데 어떻게 내 자식을 이길 수 있겠나? 그래서 이 손주 녀석을 힘센 녀석으로 키우고 있다네. 할 수 있으면 쿵후 태권도 합기도 유도 레슬링까지 다 가르치려고 한다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누군가 교훈을 위해 만들어낸 픽션(fiction) 즉 사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쓰인 이야기지만 아무리 미워도 사람에게 이렇게 보복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 보복하고 심판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상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의 심판은 이미 이사야 47장에서 예언한 바가 있는데 여기 계시록에서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은 세상 죄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5절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여기 바벨론의 죄악이 쌓이고 쌓여서 하늘에 닿았다는 것은 그 죄악이 절정에 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소돔 고모라시대의 죄악상을 표현할 때 썼던 용어입니다.


창18:20-21에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 죄악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창4:10에 동생을 살인한 가인에게도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상달했다는 건 하나님의 노가 극도에 도달함과 가만 계실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참으실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죄악이 하나님의 마음에 사무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죄가 무수한 인생을 지옥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한 바벨론으로 인해 죽거나 고통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한 나라가 잘못되면 백성들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독재자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일으켜 죽인 수효가 약 7,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으로 인해 죽은 수효는 약 3,100만 명, 독일의 히틀러는 독소전에서만 해도 3,00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고 유태인과 자국 국민들까지 다 합하면 수 천만에 이르는 인명을 살상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모든 시대에 영혼들을 지옥으로 쳐 넣은 숫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손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죄는 이미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사무쳤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죄가 사무치도록 밉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감동으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체험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먼저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진정한 심판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도 아니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43:25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사38:17에는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불의는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기억하신다는 것은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용서해도 죄는 용서하지 않아요. 그리고 죄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죄가 있으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어디까지든지 쫓아가서라도 그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1:15-16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했고, 히12:14에서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하리라.” 했으며, 레20:26에서는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이 하나님의 마음이 생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적과 내통하는 것이고, 알면서도 적을 숨겨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적이 기생할 수 있는 숙주가 되는 것입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중심에서 죄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적을 숨겨주는 자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더 이상 죄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전에는 숨겨주었거나 봐주기도 하고 혹독하게 못했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죄를 용서하지 말고 철저히 척결할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서 심판 받는 세상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의 작은 죄의 모습이라도 변화 받기 위해 부르짖게 됩니다. 이 현상이 일어나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반드시 벌하십니다.


6절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율법에는 동해보상법 혹은 동해보복법이 있었습니다. 해를 준 것만큼 보상 혹은 보복하라는 법입니다.


출21:23-27에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 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지니라.”한 말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5:38-44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이 신약인데 반대로 말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은 용서하지만 죄는 이렇게 끝까지 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용서해도 죄는 그 속의 용서하지 않아요. 예를 들면 환자는 사랑해도 환자 속의 암세포는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암이 있다면 끝까지 추적해서 씻어내거나 불태워서 없애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어느 정도? 정상인보다 몇 배로 건강하기까지,,, 


그래서 욥7:17-19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거룩해질 때까지 거룩한 손길을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빌3:8-14). 일반인보다 더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칭의는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하시는 하늘 법정의 선포로 단회적이지만, 성화는 성령과 말씀 안에서 순종하면서 이루는 점진적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동해보상법, 동해보복법처럼 이젠 더 의로움으로 입혀주신단 말씀입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돌아서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즉 전에 죄인이었던 것만큼 이젠 의로움으로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섞은 잔이란 여러 가지 술을 섞어서 미각을 높이면서 취하게 하는 독주로서 세속의 미혹성을 말합니다. 세상이 이런 미혹의 독주를 마시게 하였는데 그걸 갑절로 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 갑절이라는 용어도 율법적인 용어입니다. 즉 갑절이란 꼭 2배라는 것보다 피해에 대하여 물리적 정신적으로 시간적 등등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도록 보상하라는 의미입니다.



출 22장 율법을 보면 재산을 도둑을 맞았을 때 도둑이 잡히면 5배나 4배를 갚게 했는데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4절)하게 했습니다. 즉 5배나 4배나 2배나 배수는 다르지만 넓은 의미에서 갑절이라는 용어 안에 포함할 수 있는 말인데 이렇게 조금도 손색이 없도록 배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가 아니라 죄에게 그렇게 배상하라. 배상이란 옛날로 돌이켜 주는 의미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죄에 사로잡힌 만큼 혹은 그보다 몇 갑절 돌아서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원본 되신 예수님 만큼 돌이키시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란 생각하기도 싫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죄를 떠나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진정한 갑절의 응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슥9:12에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즉 메시아가 주실 성령의 은혜로 온전한 해방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받아 온전케 되는 것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죽도록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은 죄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요 심판입니다. 이 심판하시는 은혜가 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죄를 용서하지 아니 않게 되고, 죄를 미워하고 분노하며, 회개하여 죄를 벌하고, 죄를 보복하여 벌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버지 하나님과 구주 되신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여 회개하여 죄를 뉘우치고 온전히 돌아서서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신약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큰 성 바벨론 5 (계 18:9-11)  (0) 2025.03.28
큰 성 바벨론 4 (계 18:7-8)  (0) 2025.03.22
큰 성 바벨론 2 (계 18:3-4)  (1) 2025.03.08
큰 성 바벨론 1 (계 18:1-2)  (0) 2025.03.01
일곱머리 열뿔짐승 5 (계 17:15-18)  (0) 2025.02.21

 

유대인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바울     로마서 2장 9-16절

오래전 제주 모 지검장이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발각이 되어 사회적인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성숙해보인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범죄로 인해 충격을 주는 경우를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존경 받을만한 분들이 신뢰와 존경을 잃은 행동을 봅니다. 일반인들은 사회지도층들의 이탈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9-18)고 단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졌다고 자랑하며 선생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스스로 율법을 범하는 것은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받는 보응(9-11)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지, 배타적 지위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납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주님 앞에서 거룩한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불신자들과 다른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9-11)

 

9-10절은 7-8절의 내용을 다른 언어로 되풀이하면서, 특별히 이러한 원리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9절과 10절 모두에 등장하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 언약의 약속을 먼저 받은 자들이었음과,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동시에 말해줍니다. 7절과 10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는 삶’이 ‘영광과 존귀, 썩지 않음과 평화’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영광과 존귀’라는 표현은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종말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시편 8편의 약속이 ‘선을 행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실현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11). 문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선한 행위'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삶의 열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행위’는 로마서 1:5의 ‘믿음의 순종’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보편성(12-16)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을 보면, 거룩하고 위대해 보입니다. 자칫 사람들에게 현혹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말씀의 유무가 아닙니다. 그 훌륭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이 죽은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2-16)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될 것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대화는 계속됩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은 그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 주는 배지 역할을 할 뿐,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율법을 행하는 자(12-13)

바울은 로마서에서 2:12에 이르러서야 ‘노모스’(율법)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닌 선민, 유대인’과 ‘율법이 없는 죄인, 이방인’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분을 벗어납니다. 2:1-11 단락, 나아가 1:18-32 단락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된 ‘범죄하다’와 ‘심판받다’라는 단어는 12절에서도 사용되면서 12-16절 단락을 앞 단락들과 연결시켜줍니다. 율법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한 자들은 모두 ‘망하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2절에서 사용된 동사 ‘하마르타노’(범죄하다)는 단순히 도덕적 기준을 어기는 행위를 넘어서서, 신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그와의 관계를 깨뜨린다는 의미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로마인들 모두에게 널리 사용된 단어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의인, 곧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단순히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8-30장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할 책임마저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율법이 중심이 되는 언약 체계 속에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어야 할 책임이 유대인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동사는 미래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그 의로움은 16절의 ‘최후의 심판’에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양심의 법(14-15)

14-15절에서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 이방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가? 만약 전자라면, 10절과 함께, 율법 없는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신학적으로 그 설명이 쉽지는 않습니다. 10절뿐만 아니라 14-15절을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14절의 '본성으로'를 선행 구절과 연결해서 읽으면, ‘날 때부터 (본성으로)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행할 때에는’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2:27에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는 구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또한 로마서 전체에서 볼 때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율법 없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되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데’(14), 이를 15절에서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의 헬라어 원문은 이방인들이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는 예레미야 31장의 새언약 백성에게 임할 성령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이것은 14-15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이 새언약 백성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3) 다가온 심판의 날(16)

15절의 내용은 16절의 최후 심판의 문맥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를 재판관으로 세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을 증거 합니다. 이 모든 논의를 통해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율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전달하려 합니다. 16절은 바울의 복음이 심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모든 사람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죄인들이 라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순절}신자의 삶에 원리/빌1:12-26

여러분, 하루 하루를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십니까? 하루를 살고 잠자리에 들 때 하루를 돌 아보면 후회 없는 삶을 사셨습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부족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늘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써보낸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 은 주안에서 기쁨을 가지고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4장으로 된 짧은 성경 입니다. 그런데 기쁨이라는 말이 16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는 가목에 있 을 때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쁨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 신자의 삶은 항상 기뻐하며 살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 야 합니다. 미국 프린스톤 대학교 총장을 지낸 죠나단 에드워드는 평생토록 다음과 같은 생활원리를 따 라 살았다고 합니다. "①교만치 말자. ②복수하지 말자. ③범사에 감사하고 살자. ④임종에도 결코 후회치 않을 일을 하자."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철학이 있고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신자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삶의 원칙이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살펴보고 우리도 삶 의 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2-18).

사도 바울이 빌리보서를 쓸 당시는 옥중에 갇힌 몸이지만 자신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 보가 된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빌 1 : 12).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다가 옥중에 갇 혔을 때 원망이나 시비에 빠지지 않고 좌절과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고난 받음으로 도 리어 예수님을 전하는 효과가 있었음을 생각하고 기뻐했다는 것은 바울이 얼마나 예수님 중 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난이 많은 믿음의 형제에게 용기가 되어서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 씀을 전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빌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 다. 어떤 사람은 순전한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나 어찌되 었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진 것을 기쁘게 여기고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순전치 못한 생각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 이 있었으나 바울은 주의 복음이 전해짐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을 보면 자신이 비난을 당 하고 시기와 질투를 당하여도 복음이 전해짐을 기뻐함을 그가 얼마나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 : 16절에 말한 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으로 생각한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 검상교회 성도의 삶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으며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자신에 게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0여년 전 미국의 무디 선생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던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무 디는 하루종일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버스를 기다리던 그 사람에게도 "예수 믿으시 오." 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하고 서 있던 사람 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퉁명스럽게 무디는 "당신이 나에게 화내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은 믿 어야 합니다." 하고 자꾸 강조했습니다. "당신,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요." 하고 그가 묻 자. 무디는 "그것이 내 직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서 있던 그 사람이 "아. 당신 이 바로 무디 선생이시군요." 하더랍니다. 이렇게. 무디를 알아볼 정도로 그는 어디에서나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사람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무 식하니 그만두고. 저 사람은 유식해서 곤란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전도할 상대가 없습니다. 반대하는 자나 무식한 자나 지식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가릴 것이 없습 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형상. 즉 속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므로 외형적인 것에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다 빚진 자라는 태도를 가 져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복음을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누구에게나 빚 을 졌기에 이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보상 없이 당연한 일로써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 니다. 전도는 직접전도와 간접전도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전도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 해서 노방전도가 있습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 집집마다 다니며 하는 전도,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는 것등 직접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간접전도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빛 과 소금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때 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삶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9-21).

바울 사도는 사나 죽으나 즐거우나 고난이 오거나 예수님을 존귀히 되게 하려고 산 사람입 니다. 빌 1 : 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 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 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고전 6 :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했 습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가로 산 것이니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라. 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소요리 문답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사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는 길이 무엇인가? ①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②하나님을 제일로 경건히 섬겨야 합니다. ③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④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봉사와 섬김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삶 이란 주님 영광을 들어내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도는 말하기를 "현대인의 정신적인 최대의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에 성실할 때 주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계에 서 가장 빠른 여자" 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 라는 선수입니다. "그리피스 조이너" 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 운데 미국의 NBC방송의 한 기자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녀 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 으로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인생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인생의 살맛 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복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립니까? 학생들은 공부해서 다 일등하고 서울대에 수석 으로 합격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니까? 여러분의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번창해서 돈을 많이 하나님께 바쳐야 영광이 됩니까? 도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세상에서는 무엇이든지 잘되면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잘못되면 조상을 탓합니다. 심지어 조상의 묘까지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 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검상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은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24-26).

사도 바울은 현재의 삶보다는 천국의 삶을 더 소원하였습니다(빌 1:23). 그는 사는 것도 그 리스도요 죽음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의 사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다고 여겨진 까 닭에 삶을 바랐고 또한 살게 될 줄로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개인의 유익이나 이해관계로 처신하지 아니하고 오직 교회를 위하여 도움이 되고 유 익을 위해서 살았고 그와 같이 살았습니다(행 20 : 20-21).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도 있고 거침돌이 되는 자도 있습니 다. 우리는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들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하고 남을 위 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학자 본 훼퍼는 신자는 남을 위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님처럼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합니 다. 그렇게 살 때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교회가 은혜롭고 자기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주변에 술집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시끄럽고 풍기가 문란해서 교인들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 술집이 불이라도 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오는데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그 술집에 벼락이 느닷없이 때려서 그만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난 후 술집 사람이 교회에서 불이 나라고 기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법원에 고소를 했습니다. 교인들과 술집사람이 법정에 서는데 재판관이 교인들에게 묻 기를 "정말 술집이 불타기를 기도했습니까?" 했더니 "천만에요. 우리는 기도를 전혀 안했습 니다." 재판관이 술집 사람에게 물으니 "저 사람들이 기도해서 불탔습니다. 정말입니다." 라 고 답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재판관이 빙그레 웃으며 판결을 내렸습니다. "교인은 믿음이 없고 술집 주인은 믿음이 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통해서 살고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고 믿음이 커가고 교회를 통해서 하 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의 양식의 창고입니다. 축복의 보고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부흥하도록 기도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 교회를 여러분의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 께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 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 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 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 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 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 창조' 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 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 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자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 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셨 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라고 했습니 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말 중에 "사람이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 다." 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일정한 나이에 다다르면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 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이야말로 우리의 작품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신자의 삶의 원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고 주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살며 교회 유익을 위해 봉사하고 섬 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책임지시고 도와 주시고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쓴물 인생의 소망 15:22-27, 7:11-17
구약 본문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 길을 가다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다 마라에 이르러 물을 만났지만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으므로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한 나무를 물에 던지니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변했습니다.
신약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때 한 상여 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한 과부가 독자를 잃고 슬피 울며 상여의 행렬을 따를 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상여의 행렬을 멈추고 청년아 일어나라.’말씀 하시매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됩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다시 어머니께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포함해서 두 본문에서 나타나는 쓴물과 같은 고통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더 나아가 마음속의 미움, 원한, 절망, 좌절, 열등의식 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 쓴물 같은 고통을 받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치료해 주시고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쓴물 인생의 소망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인생길에는 많은 쓴물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쓴물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지만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여러 모양의 쓴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죄악의 쓴물이 있습니다. 죄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징계가 따르게 됩니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도 죄로 인해 에덴에서 추방 되고 고통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죄에는 사망의 독이 있습니다. 18:20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했고,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했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했습니다. 고전15:56에는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분노와 시기, 미움과 증오의 쓴물이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드린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고 아우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자 동생을 시기하여 살인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마5:22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미움은 남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미음을 품은 나도 죽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 존 헌튼은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박사가 어느 해부학회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그를 비평하고 비난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고 말았습니다.
*질병, 죽음, 이별, 실패와 같은 쓴물이 있습니다. 건강관리를 잘하는 사람도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기고 병원 갈 일만 많이 생깁니다. 스트레스로, 또 우리가 늘상 대하는 공기, , 식재료와 음식물 등이 오염이 많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맞게 되기도 합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처럼 젊은이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해야하는 쓴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근심과 염려, 불안과 두려움의 쓴물이 있습니다.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고, 17:22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일4:18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인류의 적이요 무서운 질병입니다. 어려운 환경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인간의 정서를 파괴하고 삶의 평안과 힘을 앗아가는 사탄의 도구인 두려움을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서 내쫓을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낙심이나 좌절과 절망의 쓴물이 있습니다. 32: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했습니다. 낙심에 빠지면 신앙의 실패자가 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한사람씩 뽑아 가나안을 정탐한 후 열 두 명 중 두 명을 제외하고 열 명이 불신앙으로 우리는 절대 그 땅에 들어 갈 수 없다고 절망적으로 말할 때 많은 백성들을 절망에 빠져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고 천성을 향해 갈 때 시험으로 인해, 박해로 인해, 거짓으로 미혹하는 자들로 인해 넘어지거나 낙심하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갈6:9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했습니다. 이 같은 등, 등의 쓴물들을 만날 때 나만 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2.예수님은 쓴물 인생의 소망이 되십니다.
구약 본문에 쓴물로 인해 모세가 부르짖으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그 나무는 문제를 해결하는 나무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나무를 꺾어서 쓴 물에 던졌습니다.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게 되었더라 ... ” 마실 수 없는 쓴물이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바뀌었습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준비해 놓으신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예표 하는 나무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3:13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21:23의 말씀을 인용해 설명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2:24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고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의인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두려움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구원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고난의 쓴잔을 마시므로 주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은 죄인이 의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진노의 대상이 사랑의 대상으로, 영벌에서 영생으로, 쓴물 인생이 단물 인생으로, 원망의 사람이 감사의 사람으로,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 사랑과 용서의 사람으로, 분쟁만 일으키던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으로, 남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세워주는 사람으로, 목마른 인생이 목마르지 않는 인생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나인 성 과부는 남편도 없이 외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는데 그 아들마저 죽었으니 쓰디쓴 쓴물을 만나 얼마나 절망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소망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여인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 소망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만물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 하시면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에스겔 골짜기 마른 뼈들이 일어나 군대가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영적으로 잠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유혹을 받아 넘어진 자리에서, 슬픔과 절망가운데서, 탄식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쓴물로 고통 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단물을 주시기 위해,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참 기쁨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 참 소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하셨습니다. 12:2-3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쓴물 인생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3.주님은 쓴물을 단물로, 마라를 엘림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서 단물로 바뀐 물을 마시고 더 나아가다 엘림에 당도합니다. 구약 본문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12지파를 위한 넉넉한 물샘입니다. 그리고 70인 장로를 위한 장막입니다. 백성 전체를 위한 충분한 물과 나무들이 있는 광야에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집을 분양할 때 모델 하우스를 미리 지어 보여주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이 누리는 은총의 자리요, 주님을 믿는 자들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와 장차 들어 갈 천국을 예표 하는 곳입니다. 주님 만나 다시 살아난 아들을 보고 변화를 통해 감격하고 기뻐하는 어머니가 맛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실패의 삶에서 승리의 삶으로 변화된 인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의 내용과 걸 맞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입니다. 그녀는 본래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그런데 흉년을 피해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해 갑니다. 그런데 흉년을 모면하기 위해 그 곳으로 갔지만, 모압 땅에서 만난 것은 쓰디쓴 쓴물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남편 잃고, 두 아들마저 잃고 자기와 두 자부, 이렇게 세 과부들만 남았습니다. 시모인 나오미는 내게 소망이 없으니 친정으로 돌아가 새 삶을 살라고 강권할 때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자부 룻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고향 사람들이 반갑게 나와 맞이하며 아니, 나오미 아냐?”라고 말할 때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1:20) ‘나오미는 히브리어로 희락’ ‘기쁨이란 뜻입니다. 자기 신세가 나오미라는 이름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에 심히 괴로워하며 마라라고 부르라 했습니다. 마라는 쓰다’, ‘괴로움’, ‘슬픔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고향에 돌아온 이후 그의 삶 가운데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치 아무런 소망이 없던 탕자가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모든 것이 회복되었던 것처럼 자부 룻이 그 마을의 유지인 보아스를 만나 재혼합니다. 아들을 낳습니다. 나오미는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동네 사람들과 함께 그 아들을 안고 기쁨으로 노래합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으나 시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고 베들레헴에 와서 정성껏 시모를 봉양할 때 보아스와 같은 훌륭한 남편을 만났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었고, 마라가 엘림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은총 안에 거하는 사람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즐거워합니다. 어거스틴은 신국’(City of God)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비방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찬양한다. 모든 사람이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당하느냐가 문제다. 똑같은 미풍이 불지만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거룩한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긴다.” 믿음의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고통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쓴물이 단물이 되고, 마라가 엘림이 되는 은총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쓴물 인생의 소망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인생길에는 많은 쓴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쓴물 인생의 소망이 되십니다.
.주님은 쓴물을 단물로, 마라를 엘림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아멘.
<2025. 01. 06.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