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히브리서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길 (히 10:19-39 )

nam씨 2021. 5. 15. 12:40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길 (히 10:19-39 )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19-39)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법으로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신지라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인간이 사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시대에 동물희생제사제도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정해놓은 예법에 따라 동물을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은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는 방법으로 제정하신 동물희생제사제도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제물을 통해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얻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제물이라는 대가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얻으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은 죄를 대신하여 동물이 제물로 희생되는 것을 보고 죄가 얼마만큼 무겁고 중한 가를 깨달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원래 죄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동물의 피나 고기가 아니라 인간의 순종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누누이 밝혀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왕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22)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15:22)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즉 회개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


이사야 선지자는 지은 죄를 회개할 줄 모르고 제물을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너희 악행을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10-20)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천천 만만의 제물이 아니라 지은 죄를 회개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동물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천천 만만의 동물을 제물로 드린다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에 가는 길은 닫혀지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닫혀진 문과 길은 어떠한 동물을 제물로 드린다해도 열려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 솔로몬처럼 일천번의 예배를 드린다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그 예배는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설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해도 하나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린 것이 완전한 제물이라는 것은 그가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제물로 죽으신 것은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철저하고 완전한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고 참다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이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음과 순종하는 생활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본 뜻은 "무릎을 꿇는다"(kneel down)는 것으로 무릎을 꿇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는 마음과 생활을 보여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순종, 이것을 행하시고 인간으로서는 드릴 수 없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완전한 순종을 보여주시고 그 순종의 제물이 되심으로 온 인류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영원히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그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항상 열려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순종하심으로 인류에게 보여주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희생할 만큼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제물은 완전한 순종이며, 완전한 순종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구약의 동물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형제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사랑을 십자가의 제물이 되셔서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완전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희생 제물이 된 동물의 피를 가지고 휘장을 열고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그것도 완전한 제물이 되심으로 단번에 영원히 성전 휘장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언제든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찰스 웨슬레는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육체로 가리운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육체가 찢기운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적나라하게 보이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보이신 것은 십자가입니다. 성전 휘장이 찢길 때에 하나님께로 향한 길이 완전히 열리고 예수의 육체가 찢기울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심은 인간의 어떠한 죄라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는 완전한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다는데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동물 희생으로는 사람의 몸과 마음, 영혼까지 정결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제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생각과 소원까지도 정결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죄를 정죄하거나 죄인을 멀리하고 버릴지언정 정결케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정결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생명의 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자신을 사랑의 제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사랑의 제물을 발로 짓밟는 죄악으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었을 때는 참고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을 짓밟힐 때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공포 정치 시대에 어떤 사람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급기야는 집단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홀연히 모든 고통을 용기로써 참고 견디어 냈다고 합니다. 그의 몸은 쇠약해지고 상했지만 굴복하지 아니하고 결국에는 그 고통을 벗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누가 밀고해서 그가 체포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밀고자는 다름 아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는 살아갈 기력을 잃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는 적의 공격에는 참고 견딜 수가 있었던 것이지만 사랑하는 자의 배신에는 참고 견딜 수가 없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참하게 짓밟혀 상처입고 죽은 것입니다. 로마의 시이저는 암살을 계획하던 자들에게서는 굽힘이 없이 용기를 가지고 맞섰었지만 암살자 가운데 그를 찌르려고 손을 들고 있는 그의 친구인 부르터스를 보았을 때 시이저는 그의 상의로 얼굴을 덮고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이후에 가장 극악한 죄는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거역하거나 배신하는 죄가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무서운 죄악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길만이 인간이 사는 길입니다.

홍수가 나서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집 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물은 자기 발목까지 차 올랐습니다. 얼마 있으니까 보트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 보트에 타시오. 고 지대로 옮겨 드리겠소."

"고맙지만 거절하겠소 난 그리스도인이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소"라고 대꾸했습니다. 잠시 후 물이 허리까지 차 올랐습니다. 이때 자그마한 통통배가 지나가다 구명 튜브를 던져 주었습니다.

"이보시오. 그 튜브를 타고 이 배로 오시오. 지금 구출 작전을 펴고 있소"라고 외쳤습니다.

"고맙긴 하지만 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소."

이 사람은 또 구조를 거부했습니다. 이젠 물이 목까지 차 올랐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헬리콥터 한 대가 그 위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밧줄을 잡으세요. 저희가 끌어올리겠습니다."라고 조종사가 외쳤습니다.

"고맙소. 하지만 난 하나님을 믿으니 그분이 날 구해주실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몇 시간 더 버티다가 마침내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 앞에 선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된 점에 대해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 전 하나님을 그렇게 고대했건만 끝내 절 구해주시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두셨지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대체 무엇을 기다렸다는 거냐. 난 너에게 두 대의 배와 한 대의 헬리콥터를 보냈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끊임없이 구원의 손길을 베풀고 계십니다. 다만 인생이 어리석어 생활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는 그 사랑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제물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의 문이 열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의 예수를 영접하여 생명과 사랑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22절) 권면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을 소흘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Worship=worth +ascribe)란 자신의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부터 받으시기 원하시는 최상의 것은 바로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죽도록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을 소흘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생활로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상처받은 이웃을 돌아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가운데 상처입은 채로 사셨습니다. 이웃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신 것을 잊지 말고 이웃을 돌아보는 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선행으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건은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지 경건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항상 열려 있지만 그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을 정금같이 단련하기 위해 때로 고난이 주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신앙생활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인간이란 역경에 처해 있을 때보다 순조로운 환경에 있을 때 넘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안락함이 고난보다는 많은 사람을 타락시켜왔습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하니발(Hannival)의 군대입니다. 카르타고의 하니발은 로마 군대를 쳐부신 단 한 사람의 장군이었습니다. 세계의 정복자인 로마 군대를 처부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한 전투는 뻬앗긴다 해도 전체적인 싸움에 지는 일이라고는 드물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와서 군사 행동을 정지해야 했을 때 하니발은 그가 점령한 카푸아에 군대를 주둔 시켰습니다. 카푸아는 매우 사치스러운 도시였습니다. 로마군에도 굴하지 아니했던 하니발의 군대는 카푸아에서 보낸 겨울 동안에 결정적인 영향의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의 호사스러운 생활이 카르타고 군대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어 봄이 돼서 재차 전투가 시작됐을 때는 로마 병정들에게 대할 수 없게끔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단련이 되고 안락으로 인해서 망하는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때에 굳건히 싸워 이길 수는 있어도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는 힘을 잃게되고 신앙이 타락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히브리서를 받아 읽은 사람들은 전에 박해받을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핍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몰수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에서 의심받고 배척당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굳건히 잘 지키며 견디어 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야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2절 이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배신의 위험을 경고하며 하박국2:3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3,4)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랑의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만이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