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혀의 해독  잠언 12 : 15 - 22

 

 오늘 장언강해는 18절 말씀을 중심으로 ‘거짓된 혀의 해독’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잠언 말씀을 잘 살펴보면 사람이 지혜로우면 그 지혜로움이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비롯되고 사람이 미련하면 그 미련함이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말미암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지혜의 기준이 되는 사람의 입

  입술의 말이 미련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없고 입술의 말이 지혜로우면서 미련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입의 말과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마15: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가눔 하는 인격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출구가 바로 사람의 입입니다. 그러므로 입에서 나오는 그 사람의 말은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는 엉뚱한 곳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 그대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수사 기관에서 범인을 잡을 때,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말이면 마음에 없는 것을 머리로 꾸미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이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상태가 사람의 맥박이나 다른 신체적 반응을 일으켜 거짓말 탐지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것은 그 말씀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증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탄도 그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그의 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하와에게 자신을 나타낼 때도 말로 나타냈습니다. 뱀의 몸을 빌려 그 뱀의 입으로 자신의 말을 하와에게 속삭이는 것으로 하와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에게 나타날 때 우리의 마음에 간사하게 속삭이는 방법으로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의 말이 자신의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특징이 거짓말이며 속이는 말이요 진리를 대적하는 말이며 훼방하는 말이요 중상하고 모함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사탄이 이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가까이하는 이유는 사람으로 진리를 떠나게 하고 생명에서 떨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0장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진실을 가장하고 하나님의 종을 가장하고 진리를 가장하고 우리에게 가까이와도 절대로 그 자신을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거짓은 진리 앞에 그 정체가 드러나며 어두움은 빛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미련한 자의 입술 

  그러면 본문으로 돌아가서 미련한 자의 입술이 어떠한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미련한 자는 그 입에서 분노를 쉬 낸다고 했습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그 입에서 분노가 쉬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분노하는 사람을 보시면 먼저 무섭다고 떨지 말고 미련한 사람이라고 여겨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좀 화가 나면 참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을 때 참아낼 인내심이 없습니다. 당장에 분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련한 사람은 자기에게 오는 수욕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 한신이라고 하는 중국 한나라의 유명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언제인가 시장 건달패들에게 수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건달패들의 가랑이 아래로 머리를 숙이고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한신은 그런 일을 참고 견뎌 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장차 한나라의 위대한 재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수욕을 어떻게 참으신 것입니까? 대제사장의 뜰에서 노비들이 눈을 가리우고 손바닥으로 주님의 얼굴을 치면서 누가 때렸는가 알아맞히면 선지자로 인정해 주겠노라고 놀려댔습니다. 온몸을 벗기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욕을 끝까지 참으시면서 그들의 용서를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시더니 어떻게 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히1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빌2:9절에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쉬 분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잠15:18절에서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과 잘 다투는 사람들처럼 미련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참고 분노하는 말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에 분을 잘 내면 죄를 짓게 되고 마귀가 틈을 탄다고 했습니다. 엡4:26절 말씀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  해 주고 있습니다. 

  (2) 다음에 미련한 자는 거짓 증인이 되어 궤휼을 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17절에서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의 말이 자기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는 줄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거짓 증언입니다. 거짓 증인은 거짓말로 증거 하기 때문에 죽일 사람을 살리고 마땅히 살림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제 9계명은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든 이세벨은 나봇을 모함하여 죽일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나봇을 죽이고 그의 소유물인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거짓 증거는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증거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자는 그 보응을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받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할 때, 그들은 참 증거를 찾지 못하자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 하는 무리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3) 다음에 미련한 자의 혀는 마치 사람을 죽이는 칼과 같다고 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의 말과 지혜로운 자의 말의 차이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생각나는 대로 그 입에서 말이 함부로 나옵니다. 앞뒤를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자기의 말이 듣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전혀 생각에 두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시59:7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악인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의 입술에는 칼이 있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과 궤휼과 간사함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게 됨으로 그 입의 혀가 곧 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왜 양약이 되는 것입니까? 진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 사람으로 옳은 길을 가게 합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온 가정의 불행을 가져온 일화가 있습니다.
  루마니아에는 ‘쿠르디아디알게쥬라’는 인구 만 여명밖에 안되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는 지금부터 약 460 여 년 전 건축한 훌륭한 교회 건물이 있습니다. 이 교회 건물을 짓는 데 그 건축 설계에 하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워 놓으면 또 붕괴되고 다시 세우면 또 넘어지곤 했습니다. 이 교회의 사제가 이런 일은 분명 신의 노여움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자인 밧사라부공에게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칠 것을 권유해서 허락을 받아 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던 교회의 건축사인 마노오레는 그것이 자신의 설계 실수에서 온 것임을 해명하고 용서를 빌었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크게 책망 듣고 쫓겨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누구를 제물로 들여야 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교회 언덕을 올라가는 여자를 잡아 제물로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건축사인 마노오레의 아내는 아침 일찍 남편의 식사를 위해 교회 건축 현장으로 식사를 가지고 올라갔다가 그만 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교회 건물을 다 짓고 준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교회 준공식 때 이 건축사는 큰 표창을 받게 되었는데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소식이 전해져 왔는데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면 그 피해가 이처럼 엄청나게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입의 말은 다른 사람을 선하게 경책 하므로 그의 말이 그 듣는 사람에게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전7:5절에서 ‘사람이 지혜자의 말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와 교제하는 일은 금을 얻는 것보다 좋은 것입니다. 잠16:16절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귀면 손해 볼 사람이 있습니다. 잠20: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크게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누구와 사귀지 말라고 했어요? 

  (4) 그런데 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거짓은 진실이 없을 때만 주인 구실을 하다가 진실이 나타나면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따르는 사람은 그 거짓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다. 모든 거짓은 그 근원이 바로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죄악 중에서도 이 거짓된 죄악을 제일 미워하십니다. 

  잠30장을 기록한 야게의 아들 아굴은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일을 구했는데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같은 기도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기 쉬운 악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으며 마귀는 그 마음을 발동시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22절 말씀에서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야지 왜 미움을 받는 것입니까? 거짓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일도 기분 나쁜 일인데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미움을 받으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합니다. 사람의 복록이 사람의 혀의 움직임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혀는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기 평생 자신의 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가 나쁘면 다 뽑아 버리고 의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혀를 바꾸는 기술은 없습니다. 혀를 바꾼다 해도 마음까지 바꿔야 복 받는 혀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혀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의 혀를 길들이는 일은 먼저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잠4: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그 마음속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마음에 채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다음에 입술에 재갈을 먹이는 일입니다. 웬만한 일에는 입을 열지 말자는 것입니다. 듣기는 속히 해도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거짓된 혀를 가진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의 올무에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생애, 이 방법이 가장 축복 받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임을 아시고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말로 여러분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삶 잠111- 23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어느 곳에 돈 많은 유대인의 부자(父子)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많으므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멀리 유학을 보냈습니다.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불러올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아버지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유언장에는 "내 모든 재산은 종에게 물려준다. 단 내 아들은 그가 원하는 한가지만을 가질 수 있다."

 

종은 기쁜 마음으로 이 유언장을 들고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유언장을 본 아들은 크게 실망했지만 종과 함께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는 아들은 고명한 랍비를 찾아가서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현명한 랍비는 "그대의 아버지의 처사는 참으로 현명하였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은 더욱 놀라면서 어째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만일 그대의 아버지가 그와 같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면 종은 아버지의 유산을 당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재산을 팔아서 도망갔을 것이오. 그러나 유언을 그런 식으로 썼으므로 종은 기쁜 마음으로 그대에게 찾아갔던 것이오. 당신은 한가지만 가질 수 있다고 했으니 종을 가지시오. 그러면 종의 재산은 자동적으로 당신의 것이 되는 것이요"

 

그 당시는 종의 소유는 그 종의 주인에게 귀속했습니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깊으신 배려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짧은 생각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던 것을 뉘우쳤습니다.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

 

아들이 아버지의 뜻도 다 이해하지 못하거늘 어찌 하나님의 그 깊고 오묘한 뜻을 다 이해할 수 있으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하셨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지혜롭게 기다리다가 하나님께서 더 좋게 해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셔도, 정확한 저울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수치가 따르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지혜가 따른다. 정직한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 바른길로 가지만, 사기꾼은 속임수를 쓰다가 제 꾀에 빠져 멸망한다. 재물은 진노의 날에 쓸모가 없지만, 의리는 죽을 사람도 건져낸다. 흠 없는 사람은 그의 옳은 행실로 그가 사는 길을 곧게 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신의 악 때문에 쓰러진다.

정직한 사람의 옳은 행실은 그를 구원하지만, 반역하는 사람은 제 욕심에 걸려 넘어진다.

 

악인은 죽을 때에 그들의 희망도 함께 끊어지고, 불의에 걸었던 기대도 물거품이 된다. 의인은 재난에 빠져도 구원을 받지만, 악인은 오히려 재난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입으로 이웃을 망하게 하지만, 의인은 지식으로 구원을 얻는다.

의인이 잘 되면 마을이 기뻐하고, 악인이 망하면 마을이 환호한다. 정직한 사람이 축복하면 마을이 흥하고,

악한 사람이 입을 열면 마을이 망한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이웃을 비웃지만, 명철한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지만, 마음이 믿음직한 사람은 비밀을 지킨다.

지도자가 없으면 백성이 망하지만, 참모가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 모르는 사람의 보증을 서면 고통을 당하지만, 보증 서기를 거절하면 안전하다. 덕이 있는 여자는 존경을 받고, 부지런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

 

인자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사람은 자기의 몸을 해친다. 악인에게 돌아오는 삯은 헛것이지만, 정의를 심는 사람은 참 보상을 받는다. 정의에 굳게 서는 사람은 생명에 이르지만, 악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주님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미워하시지만,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기뻐하신다.

 

악인은 틀림없이 벌을 받지만, 의인의 자손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돼지코에 금고리 격이다. 의인이 바라는 것은 좋은 일뿐이지만,

악인이 기대할 것은 진노뿐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동하는데서와 말하는데서와 마음가짐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간절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어떻게 되어도 하나님을 먼저 기억하여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 본문에서 알아 봅시다

 

어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

첫 번째로 행동이 신뢰가 가도록 생활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1-8)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저울은 미워하시나, 정확한 저울추는 기뻐하신다.

교만한 자는 수치를 당하나, 겸손한 자는 지혜롭다.

정직한 사람은 성실하여 형통하나, 사기꾼은 자기 꾀로 말미암아 스스로 망한다.

 

재물이 많아도 하나님이 노하시면 아무 쓸모가 없지만, 의로운 삶은 죽을 자리에서도 목숨을 건진다.

흠 없는 사람의 의로운 삶은 그의 앞길을 환하게 만들지만, 악인은 자기 악행으로 망하고 만다.

정직한 사람의 의로운 행실은 그를 구원하지만, 사기꾼은 자기의 악한 생각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다.

악인은 죽을 때에 그의 소망도 함께 사라지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가 거는 모든 기대는 허무하다.

의인은 재난에서 구원 받고, 오히려 그 재난은 악인에게 돌아간다 즉 속이는 것이나 거짓되거나 교만하게 행동하지 말 것을 간절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삶에서 행동이 신뢰가 가도록 생활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20;10-12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지 않고 거짓된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며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품행의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며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어디서 무엇을 해도 어떻게 되어도 보이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가 가도록 생활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디도는 바울과 같이 복음전하는 일에 동참하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 일을 시켜도 행동이 믿음직스럽게 일해서 나의 동무요 나의 동역자라고 칭찬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행동이 신뢰가 가도록 생활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

 

두 번째로 언어가 믿음직스럽게 들려지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9-15)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저버린 자는 그 입으로 자기 이웃을 해치지만,

의인은 지혜롭게 피한다. 의인이 잘 되면 마을이 기뻐하고, 악인이 망하면 사람들이 즐거워 소리친다. 정직한 자의 축복을 통해 마을 전체가 자랑스럽게 되지만, 악인의 입은 그 마을을 망하게 한다.

지혜 없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비웃지만, 슬기로운 자는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린다.

할 일 없이 남을 헐뜯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드러내지만, 진실한 사람은 비밀을 지킨다.

지혜로운 지도자가 없으면 나라가 망하여도, 조언자들이 많으면 그 나라가 평화롭다.

남을 위해 보증서는 사람은 손해를 보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안전하다.

즉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남을 헐뜻거나 비웃거나 하지 말고 말하는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 앞에 믿음직스럽게 되어야 지혜로운 삶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삶에서 언어가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믿음직스럽게 들려지도록 생활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선한 말은 꿀송이같이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같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마음이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께 믿음직스럽게 되도록 생활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께서 세상에 성육신해서 오시는 것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서 기뻐해서 다른 사람들을 감동스럽게 만듭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말하는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켜 믿음직스럽게 들려지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

세 번째로 마음이 아름답게 인정받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16-31)

 

하나님께서는 덕이 있는 여인은 존경을 받고, 근면한 남자들은 재물을 얻는다.

남에게 인자하게 대하면 자기도 잘 되지만, 잔인한 사람은 재앙을 불러들인다.

악인이 얻는 소득은 허무하나, 의를 행하는 사람은 확실한 보상을 받는다.

늘 의롭게 살면 생명을 얻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은 죽고 만다.

 

여호와께서는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을 미워하시나, 바른 길을 행하는 사람을 보면 기뻐하신다. 악인은 반드시 처벌을 받지만, 의로운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돼지코의 금고리와 같다.

의인의 소원은 성취되지만, 악인의 소망은 하나님의 진노만 가져온다.

즉 살아가면서 마음이 남에게 아름답게 인정받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인정받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26;23-25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입으로 듣기 좋게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못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질그릇에 은을 입힌 것이 모양만 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입술로 좋게 꾸미고 속에는 나쁜 마음을 품으면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나 하나님께 아름답게 인정받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뵈뵈는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것을 도와 주었던 겐그레아 교회 집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칭찬합니다

바울에게 마음이 아름답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삶속에서 마음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아름답게 인정받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삶속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정말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후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

첫 번째로 행동이 신뢰가 가도록 생활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고

두 번째로 언어가 믿음직스럽게 들려지는 지혜로운 삶을 살고

세 번째로 마음이 아름답게 인정받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듣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 사람의 생활 엡421-24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1365일 중 첫 주일에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며 새롭게 출발하게 됨을 감사합시다.

53주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로 늘 새롭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고 믿음의 성장이 있기를 원합니다.

 

23 - “새롭게 되어” 24 - “새 사람” = 새롭게 되는 새 사람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새 해 - 세상 사람들도 새 옷을 입고 새 마음가짐과 새 결심을 합니다.

성 도 - 새 사람의 모습으로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성 도 -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입니다.

새사람 - 새로운 삶을 살아야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는 어떻게 하여야 새 사람이 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과 속사람, *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 흙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 4:22,23,24 = 간접 명령과 현제 시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벗어 버리고” “새 사람 되어입으라.

새롭게 되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 것이며, 새 사람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하는 것은 옛 사람은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옛 사람의 모습과 새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 아브라=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는 옛 사람이지만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을 때는 새 사람인 것입니다. 옛 사람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고 새 사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야곱 = 고향에 있을 때는 욕심이 많던 옛사람, 그러나 고향을 떠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서원했던 그 때부터 야곱은 새 사람이었습니다. 옛 사람 야곱은 12지파의 조상이 될 수 없고 새 사람 이스라엘로 바꿔지고 나서 12지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사울 =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의 모습은 옛 사람이지만 예수를 만난 후 부터는 새사람입니다. 옛 사람 사울은 주님의 종이 될 수 없었지만 새 사람 바울로 변화된 후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새 사람이란?

유혹의 욕심을 따라 구습을 좇는 예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본문의 욕심이란? - “갈망한다.”는 뜻으로 썩어져 없어질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갈망하는 상태, 혹은 아주 열망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지난해의 어둡고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 옛 사람의 모습.

새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살면 안 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는 곧 욕심을 갖게 함, 썩을 것 허무한 것들, 나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들에 대해 욕심을 갖게 함.

누구에게나 이런 모습이 있는데 그 모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모든 것들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약해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 아름답고 모든 시선을 받지만 곧 시들어버린다.

새사람 - 썩을 것에 욕심을 버려야한다.

기독교 -버리는 종교이고 철저히 죽으라는 것입니다. 버릴 때 얻게 되며, 낮아질 때 높아짐.줄 때 받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6:38)

 

새 출발하는 지금 지난해의 썩어질 것들을 소망 삼았다면 그것들을 예수 안에서 철저히 버리고 바꾸어지는 첫 걸음이 되 시길 원합니다.

 

2. 모든 것이 새롭게 됩시다.

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롭게 되라 =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영에 이르기까지 전인격적인 변화가 있어야함을 말씀한다. 그 결과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에서 말하는 심령은 마음의 영 즉 우리 마음의 영적 인 문제를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심령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라” = 일시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새로워져야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적으로 새로워지는 성도가 됩시다.

날마다 새로워지도록 몸부림치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새 사람의 삶 = 심령으로, 영적으로 깨끗해지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말씀은 곧 올바른 생활을 의미한다. 그 말씀이 생활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물들지 아니한 깨끗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올 한해도 예수님처럼” “초대 교인들처럼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이러한 자세로 나아 갈 때에 올 한해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해로 남을 것입니다.

내 믿음을 반석 위에 세워 놓느냐? 지식적인 믿음으로 끝나느냐? 우리의 생활과 연결 되느냐?의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입니다.

 

2장에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읍시다.

** 초대 교인들의 7대 신앙의 모습 **

어찌 할꼬 = 회계관 말씀을 주야로 묵상 = 말씀관 날마다 모여 기도 = 기도관 재산을 팔아 나눠줌 = 물질관 날마다 모임 = 교회관 집에서 떡을 뗌 = 가정관 마라나다 인사 = 재림관

이러한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핍박 속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열심히 모였는지 모른다. 예수가 없는 그들의 행위는 물론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 하지만 그러한 행위가 예수 안에서라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예수를 받았고, 예수의 사랑을 소유한 우리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철저하게 주일 성수하며 철저히 믿음 생활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은 자는 예수의 능력까지 받은 자녀인데 그러나 우리가 무너지는 것은 사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는 살아야 한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이렇게 살고자 노력할 때 언젠가는 믿음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초대교인의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고 우리의 심령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을 수 있는가?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새롭게 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와 충만함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작심삼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이 마음껏 역사하도록 한다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유대인들보다,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열심을 , 더 많은 힘과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금년 더욱 뜨거운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더욱 뜨거운 찬송이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 성경을 읽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 한해도 우리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3 . 새 사람의 삶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옛 사람 사울이 새 사람 바울로 변화된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의 사도가 되었고,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였고 전 유럽을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됨.

새 사람 바울 예수 만난후의 삶을 오직 예수만을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새 사람의 삶 = 곧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

새 사람 = 사람을 벗어버리고, 구습을 벗어버리고, 썩어질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옛 사람 사울 = 사회적으로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짐, 종교적으로는 베냐민 지파, 학문적으로는 가말리엘 문하생, 유대인 중의 유대인, 히브리인, 그 옛 사람을 벗을 때 새 사람 바울이 됨.

새 사람 바울 = 삶이 바꾸어져서 예수를 위해 살았음.

바울 = 오직 예수를 위해 감옥에도 가고 못 먹고 굶주리고 고난을 당하고 온갖 고통을 당함.

자신이 그 토록 핍박했던 예수를, 바로 그 분을 위해 순교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늘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즉 예수만을 위해 살겠다는 것이고 자신은 예수의 소유요, 자신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자는 자기 것이 하나도 없는 자이며 이러한 성도가 바로 새 사람입니다. **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우리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한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만 단단히 붙잡고, 예수 안에만 거하면 그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안에는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과 동시에 그 안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역사가 있으며 그 안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으며, 오직 예수만 위해 살아갈 때 그 안에 구원의 완성이 있고 그 안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금년 1년 동안도 모든 삶이 주님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하고,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직장에서도, 사업 터에서도, 가정에서도,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됩시다. 늘 감사 찬송이 넘치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길 축원합니다.

 

결 론

우리의 삶은 잠깐입니다.

50-60이 되신 분들 = 예수를 위해 얼마나 살았는가요?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 번 자기 인생을 돌이켜 보며 점검해 봅시다. 너무나 허무하게 세월만 보냈다고 느끼실 겁니다.

이제부터 예수만 부르짖고 예수란 이름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증거 되는데 남은여생을 다 바쳐야 되겠다고 다짐하는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말세 지 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2014년도에는 새 사람이 되는데 최선을 다 합시다.

새 사람의 삶을 살아서 주님이 오실 때 그 영원한 나라와 상급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라톤의 승리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것처럼 그 영광의 반열에 동참하여 면류관을 다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다시 오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혜로운 아들의 열매   잠언 10 : 1 - 10
  잠언을 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왕인 솔로몬입니다. 열상4:32절 말씀을 보면 솔로몬은 삼천 잠언을 썼다고 했습니다. 잠언 서에는 지극히 적은 한 부분만 기록한 것이지만 그 전체적인 내용을 관찰하면 이 모든 잠언이 이 땅에서 의인이 받을 상급과 악인이 받을 악의 형벌에 관한 교훈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중요한 요지는 미련한 아들과 지혜로운 아들의 두 경우를 보여 주시면서 이들이 그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의 즐거움과 슬픔은 그 자식들의 지혜로움과 미련함을 따라 좌우된다고 말씀해 줍니다. 부모는 그 자식의 지혜로움을 따라 기뻐하고 그 자식의 미련함을 따라 슬퍼한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출발하고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에게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크게 효도하는 방법은 지혜로운 아들이 되는 길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이란 말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모님께 대한 효도는 그 부모에게 지혜로운 아들이 되는데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중국에서 건너온 유교 사상 때문에 부모를 섬기며 효하는 일을 유교적으로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면 그 유교 사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부모님께 대한 제사와 외식적인 허례허식에 뿌리를 둔 사상이 바로 유교사상입니다. 유교사상에서 나온 부모님께 대한 공경은 우리가 따라야 할 교훈적인 예절이 많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윤리나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참으로 인간들이 지켜야할 참 도리는 십계명의 도덕율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십계명에 나타난 도덕율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부터 선현들로부터 교훈으로 전해져 온 인간도덕은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짓는 도덕은 스스로 다 없애버리고 인간적인 전통과 생각에 의해 가르쳐온 것입니다. 

  기독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비윤리적인 종교라고 매도하고 교회에 나가면 가정 윤리가 당장에 무너져 버리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이 우리 인간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그리고 사람과 사람간의 진실한 윤리적인 도덕률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 전래한 한국인의 윤리관이 ‘삼강오륜’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이 삼강오륜은 대단히 봉건적이고 비민주적 윤리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삼강오륜이 무너진 것은 기독교의 문화 때문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시대가 봉건주의 시대 아래에서의 낡은 비민주적 도덕의 틀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이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삼강오륜’이 무엇이냐는 설문을 쓰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대답이 너무 희극적이라 신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삼강은 한국의 가장 큰 강 셋을 말하는데 한강, 압록강, 낙동강이라고 썼고 오륜은 올림픽의 약자라고 답안을 썼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도덕 생활의 규범으로 주신 십계명에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계명을 빼면 그 첫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고 한 것으로 부모님께 대한 공경입니다. 엡6:1절에서는 ‘자녀들아 너의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자녀들에게 부모님께 순종 뿐 아니라, 공경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공경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부모님을 인간과의 관계에서 최대의 자리에 계신 분으로 여기고 그 분께 순종과 공경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으며 또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부모를 이처럼 순종하고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상급을 주시는데 복된 삶과 장수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는 세계의 다른 어떤 종교나 도덕을 중시하는 어떤 단체보다도 훨씬 우월한 부모님께 대한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툭하면 제사를 내세우면서 제사를 부모님께 대한 효도로 생각하는 잘못을 깨우쳐 줘야 하는 것입니다. 

  1. 지혜로운 아들에게 주시는 재물의 축복

  오늘 본문 2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구분하면 2-6절까지는 지혜로운 아들이 받을 재물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고 7-10절까지는 지혜로운 아들에게 돌아올 명예와 미련한 아들에게 돌아갈 부끄러움이 쓰여 있습니다. 

  (1)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물을 물리치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아들은 불의로 얻는 재물을 탐내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런 재물은 무익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일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면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속이는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도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가로채면서 주자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히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주일날 장사해서 돈을 버는 일도 불의한 재물을 쌓는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마땅히 드린다는 일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마땅히 드린다는 말은 온전히 드린다는 뜻입니다.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친척이나 이웃이나 형제들로부터 입원비 명목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뗀다는 일은 어렵습니다. 갑자기 난데없이 떼돈이 수중에 들어 왔습니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대에 해당되는 거금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것을 온전히 구분하여 드리는 일도 어지간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자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그럭저럭 먹고 입을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는 해주시지만 하늘 문을 여시고 창고에 차고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축복은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들의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셨는데 이 재물을 하나님  은 그 사람으로 누리지 못하게 하시고 자기에게 차례 갈 몫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그 손에서 빼앗아 그 돈을 갖기에 합당한 사람에게 옮겨지는 것입니다. 시127편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아등바등 애써도 헛된 수고로 끝나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말1:4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고 하셨습니다. 돈에 눈독을 드려 돈을 모으기에만 급급한 사람은 불의한 재물과 의로운 재물을 구별하지 못하며 자기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자꾸 쌓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헐리고 마는 것입니다. 

  재물은 내 손에만 들어오고 내 품에만 안기면 내 것이 되는 줄로 생각했다간 큰 코 다칩니다. 잠23:5절 말씀을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습니다. 그 돈이 머물러 있을 집이 못되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이 빼앗아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들은 주리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히 변치 않는 법칙입니다. 시34:9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법칙에 대하여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이런 법칙에 예외인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 스스로 가난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그 보상으로 받을 것입니다. 다른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귀한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 연단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싫건 좋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짊어지게 하신 십자가를 벗어버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연단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기까지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2. 의인의 명예와 악인의 수욕

  본문 6절에서 9절까지에는 의인이 얻을 명예와 악인이 얻을 수욕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고 그의 걸음이 평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 시1:6절에 나오는 말씀에는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인의 머리에 복이 임하는 이유와 악인에게 패망과 썩음이 오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에서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명령을 받는 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모든 축복의 근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순종이 없이는 복 받는 생애를 살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30:15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으로 받으며 그 말씀을 따라 바른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길은 평안하고 그에게는 항상 칭찬이 오게 되고 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아들은 그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미련한 아들이 패망하고 그 이름이 썩는 이유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악독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서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 한다’고 했습니다. 입에 악독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진실이 없는 입술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값진 입술은 진실입니다. 진실이 없는 입은 모두 가증한 입입니다. 

  입이 악독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모해하는 혀를 가리킵니다. 남을 모함하려고 그 사람을 중상하거나 참소하면 그 보응이 자신에게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을 해 주는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해 준 축복이 그 사람에게 머무를 수 없을 경우에는 그 축복이 내게로 되돌아와 자기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라고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109:17절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는 명심하고 우리의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다’고 했습니다. 입과 생명과는 밀접한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21:23절에서는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141편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지혜로운 아들은 육신의 부모에게 대한 효도의 극치요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혜로운 아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을 걸어 이 땅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의 축복과 의인의 머리에 내리시는 영광의 복과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약 > 잠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된 혀의 해독 잠언 12 : 15 - 22  (0) 2015.01.16
지혜로운 삶 잠11장 1- 23   (0) 2015.01.10
음녀의 초대 잠언9장13-18   (0) 2014.12.30
지혜가 부른다 8장1-11  (0) 2014.12.24
사망의 길 7장24-27  (0) 2014.12.13

세례 받는 심령으로 사는 한 해 누가 315-22

 

오늘은 새해 두 번째 주일입니다. 새해가 이미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제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하면 성도 여러분들로 하여금 복된 한 해를 사시게 할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오늘 본문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내용인데,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처음에 세례를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한 해를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원주님들에게 설교하다가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죄에 대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원주민은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머리를 갸우뚱하며 몸이 살아있는데 마음이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생각다 못해서 구덩이를 파고 그를 그 곳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교사의 말대로 구덩이에 들어갔습니다. 선교사는 흙을 조금 구덩이에 넣고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아니요. 죽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선교사는 다시 흙을 그 사람들의 허리에까지 채우고 "아직도 안 죽었습니까?" “천만에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했습니다. 이번에는 흙을 그의 목까지 올라오게 채웠습니다.

 

그는 온 몸이 흙에 묻혀버리자 선교사가 묻기도 전에, “선생님, 이젠 죽었습니다.” “천만에요, 당신은 아직도 살아 있지 않소?” “아닙니다, 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선교사는 그 사람을 구덩이에서 꺼내어주며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살아있으나 악한 일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세례를 받은 사람의 각오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오신지 얼마 안 되는 성도님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들에게 뜬금없이 세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약간은 쑥스럽습니다만 성도는 항상 세례 받을 때의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일을 앞에 두거나 새해를 시작하면서 그러한 마음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새해에 성도님 자신의 욕망과 자존심, 죄와 악, 정욕과 혈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각오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세례는 이미 받았지만 뜨거운 성령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 세례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8:19)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아야 할 의무입니다. 세례는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닙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은 제자의 사명입니다.

 

첫째, 세례는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세례는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물에 잠그는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시행될 수 있습니다. 물론 물에 잠그는 침례가 좋다고 생각되지만 교회의 윤리적 여건상 물을 머리에 뿌리거나 붓는 세례를 베풉니다. 어떻든 간에 세례는 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세례를 받는 성도가 죽어 물속에 장사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3-4). 그러므로 세례 받은 사람은 세례를 통하여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세례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할 권세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6:6-7).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는 바로 주님의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옛사람이 죽음으로써 죄의 종이 아니라 의롭다하심을 입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의식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겠다는 약속과 결단의 표시입니다. 침례를 받을 때에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은 죽음에서 나와 생명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 우리는 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자기 몸에 체험하였으며 주님과 신령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성도는 교회의 머리인 주님의 지체들입니다.

 

성도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어야 합니다. 새해에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주님과 함께 죽으려는 각오로 살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복스러운 성도의 삶을 살 줄 믿습니다. 세례는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면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생명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 절묘한 세례의 신비를 깨닫고 112365일 항상 세례를 받는 마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주님께서 받으신 세례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더욱이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16)고 고백했건만, 예수님은 굳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시에 종은 주인이 외출했다 돌아오면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예수님께 그런 종보다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 베풀기를 극구 거부했습니다(3:14). 하지만 예수님은 부득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와 어둠에서 해방되어 창조질서의 아름다움에서 공동선을 이루며 더불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느님의 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택하신 길이 스스로 낮아져 세례를 받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새해에 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스스로 낮아져 겸손해 지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이고, 셋째는 전통의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교회의 정통을 지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으로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드립니다.

 

3. 새해에 가져야 할 성도의 자세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성경말씀을 읽던 중 빌립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기사가 나옵니다(8:26-39). 이 일로 에디오피아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가 복음화 되었고 초기에 몇 백년간 아프리카가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신조와 예식 등은 북아프리카 지역 출신의 많은 교부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교회역사가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세례를 받음으로 온 나라와 거대한 대륙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 살면서 벽에 물고기 그림을 많이 그려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물고기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초대교회의 벽화에 물속에 큰 고기가 있고 그 뒤로 작은 물고기가 뒤따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큰 물고기는 주님을 상징하고 작은 물고기는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거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겠다는 결단입니다.

 

새해에는 세례를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여, 그이 가정을 복음화하고 가족을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주님을 따르는 성도로 매사에 말씀에 순종하고 거듭난 삶을 살고자 결단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해드립니다.

 

디도서 3:5-7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케 하는 세례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았고, 그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물세례를 말하고 성령은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보증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리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새해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세 가지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새해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새해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로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새해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는 하나의 의식이나 교회의 규정에 따른 제도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을 교회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절차도 아닙니다.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기 위해서 몸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나타나셔서 삼위일체의 협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세례의 본을 보여주심으로 거듭남의 사례를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나 뒤돌아보면 후회할 것 밖에 없다. 422~24

<송구영신예배 설교>

교통사고로 숨진 비운의 영국의 황태자비인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아실 겁니다.

그의 아들 중에 앤드류라는 왕자가 있습니다.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지만 그가 한번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과거에 얽매여 울고 있기에는 너무나 인생이 짧다"

짧은 말이지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 아닌가?.........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마라톤과 같이 긴 인생인줄 알지만 사실, 단거리 인생입니다.

너무나 짧디 짧은 인생입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가끔 뒤돌아 볼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얽매이는 삶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사람과 미래의 사람입니다.

과거의 사람은 늘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를 품고,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간혹, 과거를 돌아봐서 교훈을 삼는 점에서는 때론 좋은 점도 있지만 사실, 과거를 볼아 봐서 좋은 점 보다는 나쁜 점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돌아보면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한 일, 후회스러운 일, 아쉬운 일이 더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왜 안들겠습니까?

 

뒤를 돌아보면 내가 잘못 내렸던 결정들, 다른 사람에게 심하게 한 말들, 상처준 말들과 행동.내가 저질렀던 실수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들...........누구나가 다 있더라는 겁니다.

다시 되돌리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런다고 과거가 다시 돌아 올 수 있습니까?........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게 문젭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돌려놓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말하기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 조차도 미래를 향해 나가고자 할 때, 잊고 싶은 과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향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를 다 잊어버렸다.......그렇게 고백합니다.

왜요?.....

돌아다보면, 아쉬운 일, 기억하고 싶지 않는 일들이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한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 오는 이맘때쯤이면, 많은 사람들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다 공통적인 말이 뭔지 아십니까?

지난해는 너무너무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그런 사람 봤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렇게 인터뷰하는 사람 한사람도 못본 것 같습니다.

한결 같이 아쉬웠다. 그리고 힘 들었다 그러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행복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올해도 이런 행복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는 사람. 여태껏 한 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아마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2014년도 한해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보다 다들 아쉬움이 더 많았던 한해였을 것입니다.

과거를 뒤돌아보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다 잊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앤드류 왕자의 말처럼 과거에 얽매여 후회하면서 울고 있기에는 너무나 삶의 시간들이 짧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과거의 실수와 아픔이 있다고 할찌라도 과거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더 나은 내일과 미래를 향해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43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미래를 향해 나가고, 새 일을 행하는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과거에 얽매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해 아쉬운 일이 있습니까?

과거 불행했던 일들이 있습니까?

거기에 발목 붙잡혀 살면 안 됩니다.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 사는 사람은 절대로 앞으로 미래를 향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과거를 반복하며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 먹은 만큼 잘 안 된다.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늘 그렇게 핑계를 대고 과거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맞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너무나 쉽고 간단한 문제지만, 뒤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뒤돌아보는 사람이 누굽니까?

어떤 사람이 뒤돌아보는 사람입니까?

과거를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안고 사는 사람이 뒤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과거에 메달려 과거를 반복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전철 되밟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늘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며 그것에 발목 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미래로 나갈 수 없습니다.

발전할 가능성이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잊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반복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과감하게 과거를 떨쳐버리고 과거의 잘못된 삶을 끊어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사람 두 번째 특징은 과거에 미련을 두는 사람입니다.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에 미련 두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아시는 집사님 한분이 계십니다.

참 머리가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하셔서 늘 장래가 촉망되었던 분이었는데 그만 잘못되어 날마나 술만 마시고 사셨습니다.

알콜 중독으로 폐인이 되다 싶이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늘 과거 자신의 화려했던 그 생활만 생각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삽니다.

멀쩡한 정신으로 살려니까, 이게 잘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술에 의지해서 삽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생활이 나아집니까?......

미련을 둔다고 미래가 장래가 보장됩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좋았던 과거에 미련을 두고 삽니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는 그렇게 똑똑하다는 소릴 듣고 장래에 대한 촉망을 받던 사람인데.....이 생각을 하니까

과거의 미련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아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까?

,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뒤를 돌아본 룻의 아내를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까?

이 교훈의 말씀은 과거에 미련을 두고 사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나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고 살기로 작정했으면 우리는 예수 믿지 않았던 과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옛 행실을 과감하게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뭐라고 권면합니까?

[4:22-24]절에 말씀하기를

그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새술은 새 부대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해를 앞두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불행했던, 그리고 아쉬움들을 접어두고 새로운 올 한해를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과거의 잘못된 후회스러운 전철을 되풀이하는 미련한 과거의 사람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버려야 할 과거의 아쉬운 것, 후회되는 것들이 있습니까?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다시 기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아쉬운 것, 후회되는 일들이 바뀌지 않습니다.

과거의 것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 담을 수 없습니다.

 

어떤 졸업식장에 축하객으로 오신 내빈이 그런 축사를 했습니다.

톱으로 나무는 켤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켜진 톱밥은 아무리 좋은 톱으로도 켤 수 없다고.............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새해를 맞는 이 시간 켜진 톱밥을 켜는 그런 어리석은 한해가 아니라, 튼튼한 나무를 켜서 멋지고 아름다운 한해를 만들어 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음녀의 초대 잠언913-18

 

지난 주 삼일 밤 잠언 강해시에는 지혜의 초대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와 정반대의 잔치가 음녀에 의해 초대됩니다. 이 잔치는 음녀의 잔치로 이 잔치는 초대하는 자와 초대받는 자가 모두 음부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사망의 객들이라는 점에 있어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의 잔치에 비해 비극적인 잔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교회 안에 지어지는 두 집

 

우리는 교회 안에는 하나의 집만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집도 동시에 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는 지혜가 지혜로 짓는 집이요 하나는 음녀가 음행으로 짓는 집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을 씨로 비유해서 말씀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13:24-3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보면 좋은 씨가 있고 또 가라지 씨가 있습니다. 좋은 씨도 열매를 맺지만 가라지 씨도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씨는 알곡의 결실을 맺지만 가라지 씨는 가라지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곡 씨앗과 가라지 씨앗이 자라는 교회에서 주님은 자라지 씨앗을 뽑으려는 사람들에게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추수 때까지 한 밭에서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함께 자랍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좋은 씨앗의 열매는 하나님의 창고에 드리고 가라지 씨앗의 열매는 불사르기 위해 그 때 비로소 단으로 묶어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씨는 지혜의 잔치에 초대된 거듭난 성도들로 천국의 유업을 받을 자들이요 가라지 씨는 음녀의 잔치에 초대된 사망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음녀에 대해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계집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를 뿌리는 음녀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음녀에 모습은 하나님의 지혜로 바라본 판단입니다. 진리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음녀에 속한 무리들은 성령이 없으므로 십자가의 도리나 부활의 도리나 구원의 진리나 천국의 소망에 대해서 깨달을 수도 없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해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미련한 자들이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음녀는 누구를 유혹하며 어떻게 유혹하는 것입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른다고 했습니다. 자기 길을 바로 간다는 말은 바른 신앙의 길에 서서 제대로 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로 이 행객은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지나가는 길목에서 문을 열어 놓고 짙은 화장으로 단장한 여자들이 교태를 부리면서 자기 길을 가고 있는 행인들을 손짓으로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아양을 떠는 모습이나 교태나 유혹에 넘어가면 그 여인이 안내하는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음녀의 초대를 받아 들어가는 잔치 집으로 자기 생명으로 해치는 곳입니다.

 

사탄은 누구를 유혹하는 것입니까? 이단자들이나 거짓 선생들은 누구에게 미혹의 손을 뻗치는 것입니까?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들에게 손을 뻗친다고 했습니다. 이단자들이 즐겨 찾아가는 집은 어떤 집입니까? 교회 교패가 붙어 있는 믿는 사람의 집을 노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들의 초청에 응하게 되는 것입니까?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 없는 자에게 접근하여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란 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바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런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육신적인 일에만 마음을 쏟으며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교회에 오가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유혹의 미끼를 던지는 자가 음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혜가 되어 우리로 지혜롭게 인생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지혜가 없으므로 음녀의 초대에 응하여 음녀가 마시우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며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이 같은 음녀의 무리들을 보내심으로 교인 가운데서 미련하고 지혜 없는 자들을 추려 내는 것입니다.

 

2. 음녀가 먹이는 음식

 

음녀는 이처럼 어리석고 지혜 없는 자들을 초대하여 그들에게 무엇을 먹이는 것입니까?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도적질 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음녀에게 초대를 받아 도둑질한 물을 마시며 몰래 먹는 떡을 먹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적질한 물은 무엇을 말합니까? 물은 예수님이 목마른 인생들에게 마시우는 생수를 말합니다. 4장을 보면 남편 다섯 명을 가라 치운 한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른 모습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어느 날 우물가에서 피곤에 지친 몸으로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이 대화에서 목마른 인생에게 생명의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갈증을 해갈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 박태선 전도관에서 생수를 팔아먹더니 이번에 포천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생수 통에 생수를 담아 팔아먹고 있어요. 이런 생수가 아님).

 

예수님은 이 생수에 대해서 요7:38절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수에 대해서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왜 생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령은 우리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해갈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들 마음속에 임하시면 우리 영혼이 터져서 호렙산 반석에서 터져나온 생수가 우리 영혼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의 생명을 윤택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윤택하게 하신다는 것은 첫째로 우리 마음에 평강을 심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평안은 돈으로 오는 것도 아니며 명예나 권세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5:10절 말씀을 보면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도 자기 마음의 만족을 얻을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엊그제 잠깐 낮에 유선방송을 보는 가운데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어느 한 남자가 도박의 유혹을 받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신혼 여행으로 라베스가스로 떠났는데 이 남자가 그만 한 투전판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꼭 이길 듯하여 돈을 걸면 지게 되고 또 한꺼번에 많은 돈이 손에 들어오는 횡재를 만나는 듯하여 더 큰 목돈을 걸고 결판을 내다가 틀림없이 이길 수 있는 수인데 그만 지게 되어 신혼 여행에 데리고 온 자기 아내를 그 사람에게 며칠간 빌려주어야 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투전판에서 돈 벌어 부자 되었다는 사람 보았어요? 본전 생각이 나서 화투장 붙들어 본전 찾은 사람 보았어요? 투전에 미쳐 버리면 아내는 남편이라도 팔아먹고 남편은 아내라도 팔아먹고 부모는 자식이라도 팔아먹고 자식은 부모라도 팔아먹는 비정한 일이 생겨 결국은 한 가정이 파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이런 꼬임에 넘어가는 것입니까? 진리로 든든히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이길 만한 믿음으로 생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는 생수 대신 욕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수를 주님으로부터 받아 마신 자는 돈이나 세상의 유혹의 손길에 한눈을 팔지 않고 구원과 천국의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 생애를 복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 모든 인생의 난관과 괴로움이 나의 마음속에 심어 주신 주님의 사랑과 평안과 기쁨을 빼앗지 못하며 넘어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적질한 물은 무슨 물입니까? 17:4절에 나오는 음녀의 금잔에는 음행의 포도주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 불에 떨어져 멸망합니다. 이 물을 마신 자는 불과 유황으로 세세토록 고난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시지 않기 위해 요즘 주일 찬양예배시에 요한계시록의 진리의 말씀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있습니다. 51:7절 말씀을 보면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미친다고 했습니다. 25:27절에서는 이 물을 마시면 토하고 엎드려지되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물입니까? 그래도 이 물이 달콤하다고 마시기를 원하십니까?

 

다음에 음녀는 불러 모은 행객들에게 몰래 먹는 떡을 먹인다고 했습니다. 몰래 먹는 떡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이는 떡은 이 떡이 아닙니다. 몰래 먹이는 떡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을 죽이는 거짓된 그리스도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외에 우리에게는 생명의 떡이 없습니다. 이 떡은 성경에서 증거 되었고 우리는 이 떡을 말씀을 통해서 늘 먹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신앙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몰래 먹는 떡은 공개적으로 먹이는 떡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해 주는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 이단자들이 이런 떡을 먹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재림 시에는 적그리스도가 이런 떡으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이런 도적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먹이시는 것입니까? 이런 물과 떡은 초대받아 먹을 대상자가 이미 작정되어 있습니다. 살후2:11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시려고 이 같은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 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생활을 할 때에, 이런 자들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손님이 이 음녀이며 이 음녀를 따라갈 때에 반드시 도적질한 물을 마시게 되고 몰래 먹는 떡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도적질한 물이나 몰래 먹는 떡을, 잘못된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이단자 뿐 아니라 거짓 선생들이나 신앙적으로 잘못된 생애를 살아가는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해서도 먹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오래 하고 교회에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은 그의 신앙적인 생활이나 행동 면에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 유혹을 받아 잘못된 길을 걸어가도록 잘못된 본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말세에 이를수록 미혹의 영의 역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딤전4장에서 말씀하기를 미혹의 영으로 귀신의 가르침을 통하여 먹이신다고 했습니다. 13장에서 들려주신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린 자는 사람들이 잘 때에 마귀가 그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잠자는 심련 속에 마귀가 가라지를 덧뿌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기도가 없으면 가라지가 뿌려집니다. 하편 쪽에는 알곡의 씨앗이, 한편 쪽에는 가라지의 씨앗이 한 곳에서 함께 자라나게 됩니다. 영적으로 잠들면 이 도적질한 물을 마시게 되고 몰래 먹는 떡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떡을 먹는 날이면 신앙적으로 넘어집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그 말씀이 마음에 닿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거역하는 완악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미 그 마음속에 가라지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진리에 미련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혜자의 잔치에 초대되어 그 잔칫집에서 시간 시간마다 생명의 생수를 마시며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면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면 더욱 학식이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신생교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 드리는 이 자리는 지혜자의 잔치임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생수만을 마시울 것입니다. 생명의 떡만을 먹일 것입니다. 한눈을 팔지 마시고 진리에 굳게 서서 우리 주님의 재림에 소망을 두시고 믿음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구약 > 잠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된 혀의 해독 잠언 12 : 15 - 22  (0) 2015.01.16
지혜로운 삶 잠11장 1- 23   (0) 2015.01.10
지혜로운 아들의 열매 잠언 10 : 1 - 10  (0) 2015.01.07
지혜가 부른다 8장1-11  (0) 2014.12.24
사망의 길 7장24-27  (0) 2014.12.13

감사로 맺는 매듭 (송구영신)시편 11612~19

벌써 < >년이 오늘로 끝입니다. 상투적인 말 같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야말로 < >년 신년주일 지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배웅해 보내야 하니 말입니다.

현대 지성들이 참여해서 [시간의 박물관]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장을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분이 썼는데 제목이 시간의 창조입니다.

이 분은 이 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시간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다.” 실제로 인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습니다. 바로 시계입니다. 나아가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달력입니다. 하루, 한 주, 한 달, 1년 등. 그러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 주년, 한 시대, 세기, 밀레니엄, 회갑, 희년 등. 이 시간 흐름의 매듭의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어려서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새끼 꼬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볏짚으로 새끼를 꼽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새끼를 꼽니다. 배고프면 감자 고구마를 삶거나 구어 먹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볏 집을 부드럽게 하려고 계속 손에 침을 뱉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다 꼰 새끼는 깔고 앉기도 하고 등 뒤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새끼를 꼽니다. 새끼를 다 꼬고 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만일 매듭을 짓지 않으면 밤새 꼰 새끼가 다 풀어지게 되고 긴 밤 헛수고를 하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듭을 잘 짓고 마무리를 잘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간 매듭의 의미가 우리의 소중한 역사로 아름답게 간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 삶의 더욱 풍성해 지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 >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매듭을 잘 지어야 하겠습니다. < >년 한 해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 >년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감사라는 관점에서 < >년이라는 역사를 매듭지어 우리 인생의 역사 한 페이지로 장식해 보자는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가족들, 이웃들, 교우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의, , 주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또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 서로 도와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의 종들과 교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고객과 이웃과 동료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두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인정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다 당신 탓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마누라 탓이고, 남편 탓이고, 부모 탓이고, 자식 탓이고, 네 탓이고 당신들 탓이요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며 한 해를 마감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아무리 둘러 봐도 감사할 조건이 찾아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던 것이 하나도 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생각지 않았던 큰 불행이 닥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 한숨과 절망뿐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37장에서 50장까지는 요셉이라는 사람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도표로 그려본다면 영어 알파벳 V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생의 전반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여러 충격적인 사건으로 졸지에 바닥까지 떨어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후반기는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졸지에 저 하늘 가까이 올라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전반기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만 꼽아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요셉은 야곱이라는 당대 부잣집 아들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부잣집 아들에서 예고 없이 또 준비 없이 타국에 팔려온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가정 총무로 있던 중에 모함에 걸려서 죄인이 되어 감옥에 수감되게 됩니다. 이제 졸지에 죄수가 되어 언제 어떻게 처벌 받게 될지 모를 처지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이런 설상가상의 불행이 겹쳐 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 던져진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노예로 끌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죄수로 옥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의 앞길을 선하게 여실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토록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감사를 지켜줍니다. 믿음이 차원 높은 감사를 이끌어냅니다. 믿음이 선취적 감사를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과 여건이 좋지 않으십니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까? 너무 힘이 드십니까? 상황과 여건을 보지 마십시오. 지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앞길을 복되게 펼쳐주실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열고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앞 당겨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그 누군가와 맺힌 감정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큰 상처 때문에 감사가 자리 잡을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감사가 그 마음에 깃들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한 공동묘지는 특별한 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함께 묻혀 있는 묘지입니다. 독불 전쟁 때 피차간에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전쟁은 계속됐습니다. 할 수 없이 시체들을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묻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워 두었고 그 십자가 위에 전사자들의 군번을 걸어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프랑스군의 어머니가 군번을 보고 자기 아들의 묘를 찾았습니다. 가져간 꽃을 꼽고 한 없이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묘를 보는 순간 독일군 묘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분명히 자기 아들이 이 독일 군 병사와 싸우다 여기 이렇게 무덤에 누어있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욕을 퍼 붓고 침을 뱉고 무덤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순간 자기 아들 무덤에 세워진 같은 십자가가 이 독일 군 무덤에도 세워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단 사람들을 용서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그 십자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독일군 병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다시 무덤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무덤에 꼽았던 꽃을 반 나누어 이 병사의 무덤에 꼽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강물처럼 평안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가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며 용서의 능력을 덧입을 때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가 이 한 해를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내년 < >년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시 65:4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다윗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무엇보다 더 큰 복인 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7-18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시인은 감사하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새롭게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을 주님 곁에 가 있게 해 줍니다. 감사는 우리를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해 줍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감사 고백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 앞 가까이에 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작지만 깊은 마음의 감사는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어줍니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줍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히 실패했던 과거는 우리를 덫처럼 옥조이게 만들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과거의 덫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성 도덕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여자는 지탄의 대상이 될 텐데 2000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물을 뜨러 나올 때도 아무도 없는 정오 즈음에 나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 때문에 죄사함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대한 감사가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를 딛고 일어설 힘을 줍니다. 감사가 과거의 덫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고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 >년을 보내야 할 시점입니다. 감사로 잘 매듭을 지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인정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미움과 분노의 대상일지라도 용서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해에 더욱 복된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 욥4210-17, 8:54-60

 

어느덧 2014년 마지막 송년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연말을 맞는 것처럼 우리는 종말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위에 오시리란 초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 회수는 456회인데, 주님의 재림 예언 회수는 신구약에 도합 1518(신약에만 318)입니다. 인간처럼 식언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이 약속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셨습니다. 주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 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24:38)하는 현세적이고,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따라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비웃고 조롱합니다(벧후3:3). 사단은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적이라고, 반문명적이라고, 반지성적이라고 비아냥거리도록 여론을 만듭니다. 피안주의니 현실도피주의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반성서적, 반 내세적, 반 종말적인 정신 풍토 조성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훼방합니다.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한 영특한 성주(城主)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도 많고 해서 별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다만 그 성 안에서 소문난 바보 하나를 곁에 두고 바보스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하루는 지팡이 하나를 그 바보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보다 더한 바보를 만나면 주어라.” 그 유명한 바보는 자기보다 더 못난 바보를 찾아 두어 달 동안 성내를 돌아다녔으나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성주가 병이 들어 거의 죽어가게 되었을 때 바보를 불러 작별을 고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와 헤어져야 되겠다.” “어디로 가십니까요?” “황천이란 곳으로 가야 한단다.” “영감께서 황천으로 가시면 언제쯤 돌아오시게 됩니까요?” “황천이란 곳은 매우 먼 나라이니 한 번 거기 간 사람은 옛적부터 다시 돌아오지 못한단다.” “그러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되겠습니다요.” “이 바보야, 준비는 무슨 준비. 눈을 감고 다리를 쭉 펴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된단다.” 이 말을 들은 바보는 지팡이를 성주에게 도로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십 리나 백 리를 가더라도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다시 오지 못할 먼 길을 가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떠난다니, 주인님보다 더한 바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요?” 연말에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끝이 좋은 사람이 참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참 승리자는 처음 보다 끝이 좋은 사람입니다. 처음에 아무리 잘 했어도 끝이 좋지 못한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에스겔33:12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했습니다. 처음에 의인으로 살았어도 끝까지 의인으로 살지 못하고 도중에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게 되면 구원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고, 처음에 죄인으로 살다 회개 하고 돌이켜 의인으로 살면 처음 죄가 용서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처음에 아무리 믿음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잘 경외 하고, 봉사도 잘하고, 충성스럽게 믿음 생활 잘했어도 후에 미혹을 받아 바른 믿음에서 떠나거나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면 처음 행한 믿음 안에서 의로운 삶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처음에 죄 가운데 살다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으로 바르게 살게 되면 과거의 죄를 사하시고, 기억도 아니 하시고,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조카 롯이 삼촌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의 생업이 번창해지고, 기르는 짐승들이 늘어나자 종들 간에 목초지로 인한 다툼이 생기게 되어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 때 롯은 먼저 좋은 곳을 택하여 갑니다. 13: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갈라 설 때 처음에는 롯이 선택한 곳이 훨씬 살기 좋고 윤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점점 더 좋아지고, 풍성해지고, 존귀해 집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어 점점 더 창대해 지고, 존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중심으로 선택하고 살았던 롯은 처음에는 좋아 보였으나 세월이 갈수록 나빠집니다. 재물을 약탈당하고,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주변의 악한 이웃과 환경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소돔 고모라가 불 심판을 받을 때 재물도 불타고, 천사의 경고를 어긴 아내마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모압, 암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다윗과 세상 중심으로 살았던 사울 왕의 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31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세상 중심, 물질 중심으로 욕심을 따라 교만하게 살았던 사울은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그와 그 가문이 점점 기울게 되었지만, 믿음으로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며 살았던 다윗은 점점 더 흥왕하고, 존귀해 지고, 그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출생하는 영광스런 가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처음보다 끝이 점점 더 좋아지는 복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2.끝이 좋으려면 끝까지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의 유형을 보면 처음에 잘 시작하고 점점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처음에 잘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타락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에 대해 성경에는 믿음이 파선 된 자” “성령으로 시작 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자” “미혹 된 길로 가는 자” “세상으로 다시 돌아 간 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모습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유형은 처음에 죄악 된 길을 가다가 돌이켜 회개 하고 바울처럼 새롭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욥은 가장 바람직한 유형인 처음에 잘 시작하고 점점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간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1:1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했습니다. 1:8에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면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욥을 시기하여 사단은 시험합니다. 보통 큰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들의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두 잃는 시험으로, 질병의 시험으로, 외로움과 멸시와 조롱의 불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사단의 기대와 의도와는 달리 믿음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욥기서에 나타난 욥이 보여준 더 좋은 믿음의 모습을 보면 먼저 자기 의가 깨어진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를 자랑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에게도 고난 받기 전에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하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은근히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은총 주시기 위해 때로는 바울처럼 가시와 같은 질병을 주시더라도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다음에 욥은 회개를 통해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42: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했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좋은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됩니다.

 

미국에 젠킨스 박사님에게 어느 날 죠지아 주에 있는 큰 술집 주인이며 도박장 주인이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그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부자인 데 생활은 불행하였습니다. 박사님은 불행한 삶을 청산하기 위하 여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여 주었습니다. 성경도 읽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아침 박사님이 지시하신 대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빛이 제 영혼에 가득 비쳐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제 마음을 바치고 그 분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비싼 고급 가구를 모두 실어 내가는 것이었습니다. “왜 고급 가구를 실어 내가십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술을 팔아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번 돈이 생각날 때마다 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을 팔아서 산 물건을 모두 처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물건을 사용하면 집안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안 식구들이나 자녀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깨끗하게 번 돈만 사용하겠습니다.” 회개는 형식적인 믿음이 참 믿음이 되게 하고, 죽은 믿음이 산 믿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욥은 끝까지 인내 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 하다 보면 수많은 시험과 유혹과 박해가 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믿음이 파선됩니다. 욥은 불시험을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하며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그랬을 때 욥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그러한 그에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42:10)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나중이 더 좋아졌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좋은 믿음가지고 갈수록 좋아지기를 기원합니다.

 

3.끝이 좋으려면 반드시 하늘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온 스데반 역시 좋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좋은 믿음으로 인정받아 뽑힌 일곱 집사 중 하나입니다. 6: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로 복음 전도에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복음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도저히 그를 당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돌을 들어 쳤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그는 불쌍하고, 불행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거룩하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7:55-56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했고, 59-60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하늘로 이어지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그가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그는 인생 실패자요, 불행한 자일뿐입니다. 13세기 스페인의 귀족이며 명문 대학의 교수였던 라몬 럴은 자신의 유망한 장래를 포기하고 모슬렘교도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그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1년 반을 감옥에 감금당했습니다. 노인이 되어 성벽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어 갈 때에 그의 마지막 말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죽기 직전에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목사 안수식 때에 ", 주 하나님 당신께 나 자신, 나의 아내, 나의 자녀, 그리고 나의 모든 소유를 드립니다." 라고 말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만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도, 박해를 받아도 오직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두 본문을 중심으로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이 좋은 사람이 참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끝이 좋으려면 끝까지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끝이 좋으려면 반드시 하늘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과연 나는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모두 욥처럼, 스데반 집사처럼 끝이 더 은혜롭고, 잘되는 좋은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28-14

오늘은 예수님의 생일날 성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 나셨을 때 목자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이런 음성을 들려 주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4)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 너희를 위하여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 나를 위하여오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오신 것이 믿어지면 오늘 예수님은 오늘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베스트 셀러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

이 책 내용이 은혜롭습니다. 다하라 요네코(田原米子)18세 때에 찾아온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견디다 못 해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달려오는 전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죽으려고 하였는 데 죽지 않고 큰 사고만 당하였습니다. 그 녀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대신 두 발과 왼팔,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른쪽 팔과 손가락 세 개뿐이었습니다. 전보다 더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전보다 더 비참하여졌습니다. 전보다 더 환난과 낙심이 찾아 왔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 하였습니다. 그 녀는 자살을 계속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세 손가락으로 죽을 방법도 없었습니다. 두 발이 없엇 움직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다하라 요네코는 선교사 지망생인 아키도시를 만났습니다. 그를 통하여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닏니다. 정상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그가 불구자중에 불구자인 요네코에게 청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였습니다.

 

둘은 꿈에서조차 상상 못할 새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요네코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작은 자, 그늘진 자, 아픔을 가진 자를

섬기는 일을 평생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부요하지만 예수를 모르는 자들, 힘은 있지만 진리에 눈먼 자들, 건강하나 참 생명을 지니지 못한 자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네코의 섬김과 헌신에 감동을 받고 예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녀는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제게는 손가락이 세 개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한 팔과 두 발, 일곱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을 잃었기에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세 개의 손가락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세 손가락으로 죽어가는 영혼, 환난과 근심 속에 빠진 이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후에 요네코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자서 전기를 썼습니다. 그 책이 바로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에게 구주로 오셨습니다.

 

2. 구주가 나셨으니

예수님은 구주 즉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 첫 사람을 에덴동산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마귀는 자꾸만 사람들에게 다가 와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일년 중에 마귀가 제일 좋아 하는 달이 12월이라고 합니다. 술과 음란으로 가득차 있는 12월입니다. 술 판매량이 제일 많은 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달이 예수님 생일이 들어 있는 12월입니다.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옥가야 할 사람을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성탄절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을 구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미국 선교사 리처드슨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가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식인종이 아직 존재할 때였습니다. 그 곳 관습이 있습니다. 싸우던 이들이 화해할 때에는 갓난 아이 하나를 선물로 내놓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갓난아이를 잡아 먹으면서 화해하는 관습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그들은 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님이 그 곳에서 선교하던 어느 해에 두 부족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두 부족이 날카롭게 대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선교사는 자기의 사랑하는 갓난아이를 안고 가운데 섰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아기로 내놓았습니다. 말없이 이 모습을 바라보던 양 부족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서로 싸우지 말자고 외치는 평화의 소리였습니다. 싸움이 그쳐졌습니다.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구원은 부요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72;13)

 

예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강대국을 보면 다 예수님을 잘 믿는 나라들입니다.

 

덴막은 해적의 나라였습니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무역선을 침범하여 물건을 노략질하는 해적의 나라, 바이킹의 나라입니다. 놀이터에 가면 바이킹 배가 있습니다. 덴막 배입니다. 그런 나라가 고드족으로부터 예수님을 받아 드려 믿고는 그런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온 세계를 영국이 지배하여 영국 땅에는 해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카나다 일부, 뉴질란드, 호주 미국 이런 나라들은 모두 영국을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을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는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였습니다. 대단한 여왕입니다. () 왕 윌리암 4세가 죽자 그 날로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왕이 된 첫 날 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성경을 펼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영국 왕이 되었습니다. 내일부터 성경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이 나라를 통치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후 빅토리아 여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웬스트 민스트 교회에 가서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후에 인도에서 정치가들이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나라를 편안하게 만든 비결이 무엇입니까? 영국을 그렇게 큰 나라 경제 대국으로 만든 비결이 무엇입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펼쳐 들고 말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이 책입니다.”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등 모든 강대국 선진국이 다 기독교 국가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에서 부요로 우리를 구원시키러 오신 구세주입니다.

 

(2) 병든 자에게 구원은 건강입니다.

예수님은 못 고칠 병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의사가 포기하기한 병이지만 믿음으로 고침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12년을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 앞에 와서 고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5;34)

 

아픈 사람에게 구원은 물질이 아닙니다. 건강입니다. 예수 믿는 이들이 오래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마을에 명의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그 의사에게 찾아가서 몸을 고치곤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병은 그가 다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의사도 늙어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모여서 물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몸이 아프면 누가 고쳐 줍니까?”

그 때 그 명의는 간신히 힘을 내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훨씬 훌륭한 명의 세 분을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그 의사의 이름은 음식과 수면과 운동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좋은 의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병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3) 환란을 당한 자에게 구원은 평안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환란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 하느니라”(11;8)

환란 때에 우리를 구원하소서”(33;2)

 

예수님은 구세주입니다. 가난으로부터 구세주, 병으로부터 구세주, 그리고 환란으로부터의 구세주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빅톨 유고(Victor Hugo,1802-1885)는 문학계의 거성입니다. 그는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곱추등 유명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 여자, 방탕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자연히 따라오는 것은 가난이었습니다. 가정은 엉망이었습니다. 가정에서 환란이 잦을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가정에 비극이 찾아 왔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딸이 세느강에 빠져 자살하였습니다. 유서 내용은 꼭 하나였습니다.

 

아버지 회개하고 예수님에게로 돌아 오세요.”

이 유서를 보고 유고는 새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께 돌아 왔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부에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후생 사회국에 취직하였습니다. 월급 받기 위하여 일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난과 환란속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그 곳에 취직한 것입니다. 후에 그의 진심이 인정되었습니다. 훌륭한 인격도 인정되었습니다. 프랑스 교육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후에 빅톨 유고가 고백하였습니다.

 

내 딸은 천사였으며 딸을 통하여 예수님이 나를 지옥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4) 죄로부터의 구원은 자유함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잠간 사는 것입니다. 안개같다고도 하고 손바닥 넓이만큼 산다고 합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도 합니다. 들에 풀같다고도 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물질적으로 축복을 못 받아도 됩니다. 건강적으로 축복을 못 받아도 됩니다. 건강 관리 잘 하고 100살 살고 지옥가는 것보다 건강관리 좀 잘못 하더라도 예수 믿고 99살 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그 주님이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예수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가난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병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1981년 흑인 가운데 가장 장수한 찰리 스미스가 130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주 바토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130년의 세월은 고통의 전시장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갓난아이 때부터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종이었습니다. 130년 한번도 떳떳하게 살아보지 못 하였습니다. 미국의 남부와 서부로 끌려 다니며 살았습니다.

 

매 맞고 모욕을 당하며, 굶주리고 병들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을 고비를 스무 번도 넘게 경험했습니다.

 

한때는 서부 최고의 총잡이 제시 제임스의 마구간에서 일한 적도 있었습니다. 130년 간 고생만 하다가 죽은 스미스씨는 임종하기 며칠 전 그를 방문한 스티븐스 목사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흑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노동 생활도 감사합니다. 130년 간 언제나 내 곁에 계셔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스티븐스 목사는 이 기도를 듣고 나서 말했습니다.

"이런 신앙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것이 성탄 신앙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