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장 1-6절)
욥기에는 세 가지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첫째는, 욥의 친구인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말하기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라고 말한 구절입니다. 둘째는, 욥의 또 다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욥이 말한 답변으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고 말한 구절입니다. 셋째는, 욥이 하나님에게 고백하는 오늘본문 말씀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구절입니다. 5절은 잘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욥기는 고난과 고통,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생사회복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한계에 부딪칠 때 “백날 지지고 볶아 봐야 아무 쓸모없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욥기에서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라는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 욥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난이 왜 일어났는지 계속해서 논쟁을 벌입니다. 나중에는 ‘엘리후’라는 젊은 사람이 나타나 논쟁에 가세합니다. 치열한 논쟁에도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지지고 볶기만 했을 뿐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등장하시면서 논쟁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결론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 고난, 시험, 그리고 회복의 모든 과정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단편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자유로운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짧은 소견, 즉 지지고 볶는 무지한 생각으로는 시험과 고난을 결코 이해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완전하게 인정하고 사랑 안에서 회복 되게 하심을 바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일시적이나 회복과 평안은 오래 가고, 죄의 징계는 아프고 참기 어려우나, 용서와 사랑은 영원토록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아이고 죽겠네”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나 아무것도 안할 거야, 하나님도, 교회도 다 싫어”라고 조석변개의 마음으로는 믿음을 지켜가기 어렵습니다. 조금만 잘 풀리고 여유로워지면 지난날의 간절함은 사라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시간을 다 써버립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욥기가 보여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평안할 때 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이와는 반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내 위주로 살아가기 바쁘고, 힘들고 고통이 올 때는 분노하고 좌절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포기하려고 합니다.
왜 우리 신앙인들은 조금의 고난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하고 갈대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갈까요? 오늘 본문이 그 해답의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욥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직접 평가해 주시기를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2:3)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서 하나님이 이 만큼 칭찬한 인물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 몇몇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평가만으로 봤을 때 욥은 성경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믿음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평가를 받은 ‘욥’조차도 극한의 고난이 찾아 왔을 때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억울해 했습니다. 물론 보통의 사람으로는 감내하기 힘든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대놓고 원망하지 않고 참아내는 모습은 대단히 칭찬받을 만합니다. 만약 제가 욥이라면 저는 도저히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욥 수준의 고난이 왔을 때 다 무너지고 말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일까요? 2절과 3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2절입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절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아멘.
욥은, 하나님은 못하는 일이 없으시고, 계획 하신 것은 다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에 의문이 듭니다. 욥의 믿음에 대해서는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나님이 그토록 칭찬하셨는데, 그러한 믿음을 가진 욥이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이 없고, 계획 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럼 그 전에는 몰랐다는 말인가요? 그런 것도 깨닫지 못했던 욥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토록 칭찬을 하셨다는 말인가요?
“깨달았다(알았다, 히-야다으티)”는 말은,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뛰어넘어서, 능력을 베푸시는 존재가, 나의 주인이시오, 나의 주권자 되심을 명확하게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욥이 이러한 고백을 하기 전에 가진 신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왜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가?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욥은 특별히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엄청난 고난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양심도 올바르고, 모든 언행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정말 억울하다는 주장이죠.
우리가 욥이라면, 내가 욥이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제가 저를 평가해 보겠습니다. 1차적으로 저의 신앙상태는 욥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턱도 없는 함량 미달의 상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다가 욥과 같은 고난이 저에게 닥쳐온다면, 아마 저는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미친 상태가 될 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물론, 세상을 저주하고, 내 자신을 저주하고, 극도의 분노와 자아붕괴 속에서, 하루하루를 죽음의 문턱에서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저는 솔직하게 욥의 고난을 이겨낼 자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준비도 안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제 가족에게 어려운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진짜 제대로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평안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전능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때 뿐 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주관적인 생각(의식)을 180도 바꾸어 버리고, 나의 모든 삶의 방향들을 180도 틀어버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게 하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가난하고 병들어 허약하게 살지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결코 떠나지 않고 내 곁을 지키며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늘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르는 믿음을 계속 요구하고 계십니다. 욥은 이러한 믿음의 마지막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적정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강력한 믿음의 시험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욥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조그마한 시험만을 겨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여러 가지 사소한 시험들을 이겨내고, 연약한 나의 믿음을 굳센 믿음으로 성장시켜 나가며, 급기야는 최고 수준의 시험을 이겨낼 준비를 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이러한 준비를 잘 하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까지도 이겨내시고 부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을 거의 막연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나약한 믿음의 조건에 따라서만 하나님을 상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욥과 같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 그 무한한 주권을 제대로 인정하는 사람은, 내게 무엇을 주시든지 주시지 않든지에 관계없이, “언제나 감사, 언제나 찬양, 언제나 예배, 언제나 기도, 언제나 영광, 언제나 할렐루야를 외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온전하고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벽하게 준비되도록 은혜로 함께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면 우리도 언젠가는 욥과 같은 칭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의 존재를 제대로 깨달은 자는 어떤 고백을 드리는지 3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립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아멘.
속이 드러나는 얕은 믿음, 가벼운 믿음, 무지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큰 믿음의 소유자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분을 자랑하고, 교회를 자랑하고, 신앙 연수를 자랑하고, 무슨 교육을 받은 것을 자랑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알고, 깨달은 사람은 입을 닫고 삽니다. 그들이 입을 열 때는 오직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복음 전할 때뿐입니다. 말이 많은 사람, 말 만 많이 하는 사람, 말로 다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할 때만 입을 열기를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욥이 이러한 믿음의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듣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 같이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아멘.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속담으로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죠. 말씀을 듣고, 읽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귀로 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욥처럼 눈으로 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현현 하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빛으로 임하시더라, 옷자락을 보았다, 손을 보여 주셨다, 또렷하게 말씀 해 주셨다, 등등 각자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이 보았다는 것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모습, 혹은 음성을 들은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듣고, 자신의 무지, 무모, 자만함을 완전하게 굴복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만 많이 하고, 고집 부리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오해했던 것들이, 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눈으로 보았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욥은 귀로 듣기만 한 자신의 무지한 신앙이 다 드러나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눈으로 보도록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크나큰 영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6절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아멘.
욥이 회개를 한 것은 어떤 하나하나의 잘못을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왜 이 세상의 악인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의인들은 고난을 받아야 하나? 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벌주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죄 없고 믿음이 좋은 나를 이렇게 고통 받고 비참하게 만드시는가? 이러한 반응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이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믿음이 여기에서 막히면,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영광과 사랑과 공의를 마음껏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욥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한계의 장벽을 무너트려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보았다”라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믿음을 지닌 사람은 강력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예수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증인이다”(눅24:48), “너희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2:32) 말씀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고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자 이 일의 증인이라”(행 2:32),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행 5:30-32)고 강력하게 선포 했습니다. 이 말씀들 속에서 “증인(헬, 마르튀스)”이라는 단어가 목격자, 즉 실체를 본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사건 사고에서도 목격자의 증언은 사실을 입증하는 ‘스모킹 건(확실한 증거) 이 됩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완전하게 인정하게 된 욥은, 이전보다도 훨씬 굳센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이웃과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사실을 강력하게 전파하는 증거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듣는 믿음에서, 보는 믿음으로, 보는 믿음에서 강력한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으로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보실 수 있는 은혜의 경험을 꼭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믿음을 가진 증거자로 우뚝 서십시오. 그로 인하여 내 이웃과, 내 가정에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복음의 전파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듣는 귀와 보는 눈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 아래 살아가면서, 믿음을 증거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믿음이 자라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구약 > 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이 참고 기다리라. 욥23:8-14, 약5:7-11 (0) | 2023.08.25 |
---|---|
보배로운 믿음 욥23:6-14, 갈5:1-10 (2) | 2022.11.12 |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 욥1:6-12, (0) | 2020.07.18 |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 욥42장10-17 (0) | 2014.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