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누가복음

오직 예수님만 보이더라누가복음 9장 28-36절

nam씨 2015. 2. 14. 12:13

오직 예수님만 보이더라누가복음 928-36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입니다. 젊은 병사와 결혼해서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살게 된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사막의 황량함과 함께 혼자 지내야 하는 지루함을 참다못한 여인은 마침내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어머니, 저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이 메마른 사막이 너무 싫어요. 이곳은 살기에 너무 끔찍한 지역입니다.”여인의 어머니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아주 짧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철창 안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 한 사람은 현실을 바라보며 절망했고 한 사람은 별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었습니다. 어머니가 보낸 글의 의미를 간파한 새댁은 별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여인은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 전통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남편의 복무기간이 끝날 즈음에 여인은 사막에 대해 전문가가 되었고 좋은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이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바라봄이 축복이 될 수도 있고 파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두 종류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는 현실의 세계를 보고 살고, 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래와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삽니다. 그런데 바라봄에는 신기한 능력이 따라옵니다. 육신의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것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행과 불행이 좌우됩니다. 또한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도 희망일 수 있고 절망일 수 있습니다. 천국일 수 있고 지옥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14-1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이 말씀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혼자 가나안에 남아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묵상해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눈에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지 눈에 보이지 않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바라봄의 법칙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동서남북을 그저 막연하게 바라본 것이 아니라 지도에 그려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어떤 것을 계속 바라보고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 어느 순간 그것을 영의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두 종류의 눈으로 계속해서 어떤 것을 바라본다면 결국 그것을 누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명하게 바라보면서 영의 눈으로 그와 그의 자손이 그 땅에 사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와 그 자손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꿈을 가지고 내일을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잡초만이 무성한 지금 현실을 삶을 바라보십니까? 말씀을 근거로 꿈을 가지고 내일을 바라보면 내일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여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에 따라 나의 현재와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라봄의 법칙이 소개됩니다.

 

(본문설명)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첫 번째 예고를 하신 예수님은 8일쯤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이 깊이 잠든 것을 보면 시간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광채가 났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예수님이 별세하실 것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죽음과 그로 인해 받으실 영광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예언자(선지자)들을 대표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들의 핵심 주제가 메시야에 의한 인류 구원인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별세(죽으심)’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곤히 자다가 깨어나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함께, 곁에 서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나려고 할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에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에는 엘리야를 위하여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다가 일어나 잠이 덜 깬 상태이면서 동시에 예상치 못한 신비로운 광경을 목격했으니 그럴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이 일어나서 세 사람을 둘러쌓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 소리가 끝났을 때에, 예수님만이 거기에 계셨습니다. 평생 처음 보는 신비하고 놀라운 장면에 제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 시간, 변화산 사건이 주는 영적인 교훈을 선포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31절입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이 말씀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나눈 대화입니다. 대화의 핵심은 별세에 관한 것입니다. 별세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왜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해 말씀을 나누었을까요? 예수님에 관한 대화의 주제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왜 하필 죽으심에 관한 내용이 주제였을까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31절에 별세라는 단어의 원어의 뜻은 엑소도스(Exodus)’입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출애굽기가 영어로 Exodus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의 모든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포로가 되어 430여년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 기간의 삶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정체성이 완전히 죽어있는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 아래 모세를 지도자로 애굽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출애굽하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입성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출애굽의 전 과정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전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서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높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아니었다면 애굽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며 살아야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입고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할 수 있고,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고 세상에 살면서도 이렇게 천국의 행복을 영위하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생을 사역하시다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극한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겠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우리의 죽음 뒤에 부활이 있을 것임을 예표하는 부활의 첫 열매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셨고 그분은 구원받은 백성을 데리러 다시 한 번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 영생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간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구약의 제사(예배)에는 항상 인간들의 죄를 대신할 짐승을 잡아 드렸습니다. 인간들의 죄의 대가로 짐승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죗값을 대신하셨습니다. 자신을 대속물로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그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뀝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속된 백성에서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해 말씀한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외치고, 구약성경 전체에서 줄곧 선포하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이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고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과 동일한지, 아니면 성경은 제쳐두고 나만의 예수를 형상으로 만들어 제멋대로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믿고 섬기고 헌신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35절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도 하신 말씀이고(마태복음 3:17), 예수님의 고난주간 중에도 들려진 말씀입니다(요한복음 12:28).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나를 보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나와 하나님은 동등하며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장차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철저하게 선포하며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아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분명히 알고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그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려면 그분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뢰는 확실한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누군가를 변함없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하여 신뢰할만한 분명하고 확실한 이해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고 바르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잘 듣고 배우고 성경을 가까이 대함으로 주님을 명확하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이해는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데 에너지의 근거가 됩니다. 사탄과 싸우고 유혹과 싸우고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을 알고 신뢰하는 길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유대 경건주의자들, 즉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율법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해선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면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장본인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평가한다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요, 학벌도 없고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것들을 전혀 갖지 못한 아주 평범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특별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셋째. 변화산 사건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너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동시에 신비롭고 기적 같은 장면에 두려워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너무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하면 말문이 막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베드로가 이 순간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이었습니다. 33절입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을 하면서도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절 하반절은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한 말이 이해가 갑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광스러운 천국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초막이 어울리겠습니까? 초막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얽어서 만든 작은 집인데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은 신비한 영적인 경험을 하면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성경적으로 구름이 덮음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 소리가 그친 후에 고개를 들었더니 임재의 구름도, 모세도 엘리야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36).

 

이러한 모습 속에서 주시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한 후에는 거기에 머물러 있거나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면 또 죄지을 것이 뻔 하니까 그냥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이것은 나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다양한 영적인 체험은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힘을 얻어 나가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0:27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축복 받았으면 그 축복을 나누십시오. 은사 받았으면 그 은사를 교회의 덕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영적인 능력을 받았으면 교만하지 말고 주님의 영광과 영혼구원을 위해 나가 선포하십시오. 능력, 은사, 체험은 머물러 있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변화산 위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목격한 신비로운 광경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성경의 증거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장차 영광 가운데 이 땅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탄의 노리개인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미혹 당하는 말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