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큰 성 바벨론 3 (계 18:5-6)

nam씨 2025. 3. 15. 14:54

큰 성 바벨론 3 (계 18:5-6)

5.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이 시간에 “큰 성 바벨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모에게 함부로 하는 망나니 아들이 있었습니다. 오냐 오냐해서 키웠더니 이 아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는데도 여전히 망나니였습니다. 손자가 보는 앞에서도 손짜검하는 짓은 여전했습니다. 화가 잔뜩 난 할아버지는 그래도 그 손자만은 극진히 아끼며 사랑하며 키웁니다.


이것을 본 옆집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는 자식 놈이 그렇게 학대하는데도 손주 녀석이 밉지도 않는가?” “왜 안 밉겠나?”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는가?” “참 자네도 생각해 보게, 내가 이렇게 나이 많은데 어떻게 내 자식을 이길 수 있겠나? 그래서 이 손주 녀석을 힘센 녀석으로 키우고 있다네. 할 수 있으면 쿵후 태권도 합기도 유도 레슬링까지 다 가르치려고 한다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누군가 교훈을 위해 만들어낸 픽션(fiction) 즉 사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쓰인 이야기지만 아무리 미워도 사람에게 이렇게 보복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 보복하고 심판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상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의 심판은 이미 이사야 47장에서 예언한 바가 있는데 여기 계시록에서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은 세상 죄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5절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여기 바벨론의 죄악이 쌓이고 쌓여서 하늘에 닿았다는 것은 그 죄악이 절정에 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소돔 고모라시대의 죄악상을 표현할 때 썼던 용어입니다.


창18:20-21에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 죄악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창4:10에 동생을 살인한 가인에게도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상달했다는 건 하나님의 노가 극도에 도달함과 가만 계실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참으실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죄악이 하나님의 마음에 사무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죄가 무수한 인생을 지옥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한 바벨론으로 인해 죽거나 고통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한 나라가 잘못되면 백성들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독재자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일으켜 죽인 수효가 약 7,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으로 인해 죽은 수효는 약 3,100만 명, 독일의 히틀러는 독소전에서만 해도 3,00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고 유태인과 자국 국민들까지 다 합하면 수 천만에 이르는 인명을 살상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모든 시대에 영혼들을 지옥으로 쳐 넣은 숫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손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죄는 이미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사무쳤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죄가 사무치도록 밉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감동으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체험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먼저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진정한 심판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도 아니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43:25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사38:17에는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불의는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기억하신다는 것은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용서해도 죄는 용서하지 않아요. 그리고 죄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죄가 있으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어디까지든지 쫓아가서라도 그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1:15-16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했고, 히12:14에서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하리라.” 했으며, 레20:26에서는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이 하나님의 마음이 생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적과 내통하는 것이고, 알면서도 적을 숨겨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적이 기생할 수 있는 숙주가 되는 것입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중심에서 죄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적을 숨겨주는 자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더 이상 죄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전에는 숨겨주었거나 봐주기도 하고 혹독하게 못했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죄를 용서하지 말고 철저히 척결할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서 심판 받는 세상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의 작은 죄의 모습이라도 변화 받기 위해 부르짖게 됩니다. 이 현상이 일어나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반드시 벌하십니다.


6절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율법에는 동해보상법 혹은 동해보복법이 있었습니다. 해를 준 것만큼 보상 혹은 보복하라는 법입니다.


출21:23-27에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 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지니라.”한 말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5:38-44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이 신약인데 반대로 말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은 용서하지만 죄는 이렇게 끝까지 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용서해도 죄는 그 속의 용서하지 않아요. 예를 들면 환자는 사랑해도 환자 속의 암세포는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암이 있다면 끝까지 추적해서 씻어내거나 불태워서 없애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어느 정도? 정상인보다 몇 배로 건강하기까지,,, 


그래서 욥7:17-19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거룩해질 때까지 거룩한 손길을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빌3:8-14). 일반인보다 더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칭의는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하시는 하늘 법정의 선포로 단회적이지만, 성화는 성령과 말씀 안에서 순종하면서 이루는 점진적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동해보상법, 동해보복법처럼 이젠 더 의로움으로 입혀주신단 말씀입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돌아서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즉 전에 죄인이었던 것만큼 이젠 의로움으로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섞은 잔이란 여러 가지 술을 섞어서 미각을 높이면서 취하게 하는 독주로서 세속의 미혹성을 말합니다. 세상이 이런 미혹의 독주를 마시게 하였는데 그걸 갑절로 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 갑절이라는 용어도 율법적인 용어입니다. 즉 갑절이란 꼭 2배라는 것보다 피해에 대하여 물리적 정신적으로 시간적 등등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도록 보상하라는 의미입니다.



출 22장 율법을 보면 재산을 도둑을 맞았을 때 도둑이 잡히면 5배나 4배를 갚게 했는데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4절)하게 했습니다. 즉 5배나 4배나 2배나 배수는 다르지만 넓은 의미에서 갑절이라는 용어 안에 포함할 수 있는 말인데 이렇게 조금도 손색이 없도록 배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가 아니라 죄에게 그렇게 배상하라. 배상이란 옛날로 돌이켜 주는 의미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죄에 사로잡힌 만큼 혹은 그보다 몇 갑절 돌아서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원본 되신 예수님 만큼 돌이키시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란 생각하기도 싫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죄를 떠나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진정한 갑절의 응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슥9:12에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즉 메시아가 주실 성령의 은혜로 온전한 해방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받아 온전케 되는 것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죽도록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은 죄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요 심판입니다. 이 심판하시는 은혜가 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죄를 용서하지 아니 않게 되고, 죄를 미워하고 분노하며, 회개하여 죄를 벌하고, 죄를 보복하여 벌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버지 하나님과 구주 되신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여 회개하여 죄를 뉘우치고 온전히 돌아서서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