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 8:14-21
깨닫는 것은 아는 것과 다릅니다.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하나는 깊이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워서 알게 될 때 대체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앎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지식(知識 )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서 깨닫게 될 때 대체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사실 속의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지혜(智慧 )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과가 무르익어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 보여 지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그러나 뉴턴은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 그 이유를 발견해냈습니다. 지구의 중력 작용 때문에 사과가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사실 속의 사실을 발견해 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삶과의 연관성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아직 나의 삶과는 직접 연관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한 앎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앎을 체험을 통해 터득하게 되면 달라집니다. 그 앎은 나의 삶과 직접 연관되면서 깨달음이 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주전자가 뜨거우니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줍니다. 아이는 엄마 말을 듣고 주전자가 뜨겁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놀다가 그만 잘못해서 그 주전자를 손으로 잡게 됐습니다. 너무 뜨거워 손을 데었습니다. 아이는 뜨거운 주전에 손을 데고 나서 주전자가 얼마나 뜨거운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깨닫는 것은 아는 것과 다릅니다. 우선 깊이가 다릅니다. 깨닫는 것은 사실 속의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것은 체험을 통해 그 사실이 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또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깨닫도록 보여주셨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깨닫도록 설명해주셨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깨닫고서도 잊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잘 깨닫고 있을까요?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깨달았던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상징적인 물건을 통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누룩이고, 다른 하나는 떡입니다.
누룩의 위험성
본문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한 마디로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누룩은 일반적으로 밀이나 찐 콩 같은 것을 굵게 갈아서 반죽하여 덩이를 만들어 띄워서 만듭니다. 빵을 만들 때 이 누룩을 반죽 안에 조금 넣습니다. 그러면 이 누룩이 눈에 보이지 않게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발효를 시킵니다. 그래서 맛있는 빵이 만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누룩을 비유로 영적인 교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조금 넣으면 보이지 않게 반죽 전체를 발효시키는 것처럼, 바리새인과 헤롯의 생각이 보이지 않게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변질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바리새인과 헤롯과 더불어 살게 됩니다. 이 때 바리새인과 헤롯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변질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 속의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히 두 가지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요?
바리새인의 누룩
우선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눅 12: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한 마디로 바리새인의 누룩은 외식(外飾 )을 말합니다.
그러면 외식이란 무엇일까요? 이 외식이라는 말은 성경원어 ‘휘포크리테스’(ύποκριτής)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연극배우’를 뜻하는 말입니다. 배우가 자기의 실제 모습과 다른, 맡은 역을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이 자기의 본 모습과 달리 신앙이 좋은 사람인양 연기하듯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위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한두 번 이렇게 위선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생활 전체가 위선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누룩이 덩어리 전체를 발효시키는 것처럼 위선이 한 사람의 심령 전체를 변질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공동체 전체에 이 위선이 퍼졌다는 것입니다. 한두 바리새인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 것처럼 바리새인 공동체 전체가 변질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도 선교사로 유명한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 목사님은 오랫동안 간디(Mahatma Gandhi)와의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후에 [순례자의 노래](A Song of Ascents)라는 책을 펴냈는데, 여기에 간디와 나누었던 대화를 적어놓았습니다.
한 번은 이분이 간디에게 인도를 복음화 시키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답니다. 간디가 우선 그리스도인들이 조금 더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스스로 무너뜨리지 말고 이를 실천함으로 세워가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뼈아픈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더라면 자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간디 눈에 비친 당시 인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변질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는 말과 삶이 다른데도 문제없다는 듯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을 말할 때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데, 사업을 말하고 일에 대해 말할 때는 전혀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 바리새인의 누룩이 우리 안에서 우리 삶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말할 때와 삶이 다른데도 문제인지 모를 때 이미 바리새인의 누룩이 나를 변질시켜버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실 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그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헤롯의 누룩
헤롯의 누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헤롯은 로마의 후원으로 팔레스틴 땅의 분봉왕이 되어 다스린 통치자입니다. 기질이 드센 유대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저들의 환심을 얻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 유대 왕가의 여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는 대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왕권을 강화하여 통치 기반이 확고해 지자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대제사장을 죽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로마의 눈치를 보면서 사마리아 지역에 거대한 로마 신전을 지었습니다. 결국 그가 유대교로 개종한 것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정치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을 세속적 야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헤롯의 누룩입니다. 다시 말하면 헤롯의 누룩이란 세속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헤롯의 누룩의 영향으로 신앙이 변질되어가는 사람들이 참 많아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헤롯의 누룩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사실 저 깊은 곳에 숨겨진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헤롯의 누룩이 들어와 변질되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 주의적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 나라의 것보다 더 사랑한다.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세상적인 성공, 돈, 건강, 가정, 명예와 같은 것에만 집중되어있다.
2.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하나님 앞에 뜨거운 회개가 없다. 그리고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는다. 도대체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3.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상식과 도덕을 따른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상식과 인본주의적 도덕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기보다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찾으려 한다.
오늘 우리가 이런 헤롯의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변질시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헤롯의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떡의 상징성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머무시면서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가 남은 이적이 있었습니다. 마치 유대지역 벳새다 들판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과 같은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유대지방으로 오시는 중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음식 준비를 하지 못해 먹거리가 없었습니다. 시장하여 살펴보니 떡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배가 고픈데 떡이 없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19-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저들과 이렇게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앞전에 있었던 두 차례 이적을 상기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사건, 떡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셨던 사건을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떡을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하나의 상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 때 주님께서 손에 드셨던 그 떡, 칠병이어의 이적 때 주님께서 손에 드셨던 그 떡, 그리고 지금 제자들이 손에 쥐고 있는 그 떡 같은 떡이지만 다른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두 떡은 믿음의 떡이지만, 지금 제자들이 들고 있는 떡은 염려의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달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이적 때 떡을 보고서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칠병이어의 이적 때 떡을 보고서 그 믿음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 손에 든 떡을 보고서는 그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케네스 헤이긴(Kenneth E. Hagin)이 쓴 [당신도 산을 옮길 수 있다]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몇 해 전 어느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첫날 집회가 끝난 후 한 여인이 달려왔습니다. "헤이긴 형제님,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제가 믿음을 갖도록 기도해 주세요. 제 몸은 치유 받아야 해요." 자신에게 치유 받을 만한 믿음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즉시 말했습니다.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그러자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도 나처럼 말한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렇게 말했는데, 대성공이었던 셈입니다! "정말 저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그녀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기도해 드릴 수 없겠는데요." "정말인가요?" 그녀는 다시 물었고, 나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자매님을 위해 한마디도 기도할 수 없습니다. 자매님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치유가 필요해요." "자매님, 자매님은 신자시죠?" 내 질문에 그녀는 그렇다고 했고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신자가 있을 수 있나요? 어떻게 믿음이 없이 신자가 될 수 있죠? 저는 자매님이 믿음을 갖도록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매님은 이미 믿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자매님이 갖고 계신 믿음을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그 떡으로 펼쳐질 이적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미 두 차례 이적을 보고 예수님께서 능히 이 떡으로 자기들을 배부르게 먹이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 안에 있는 믿음을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제자들과 같지는 않습니까? 오래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고 그래서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셔서 마시게 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눈물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셔서,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주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을 내쫓으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왜 그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십니까? 왜 기도하지 못하십니까? 왜 그 믿음으로 앞을 향해 나가지 못하십니까? 바로 그 믿음이 아직 나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 객관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기도하고 그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 우리를 이렇게 책망하시지 않으실까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사탄이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뿌려두었다는 사실, 그 누룩이 벌써 우리 믿음을 변질시키고 있다든 사실을 깨닫고 계십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주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십니까?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믿음이 있어도 그 믿음이 아직 나의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귀한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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