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르는 자 막8:34-38, 벧전2:19-25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은 현세의 삶만 생각하고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영달과 연락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후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일 일을 너희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고 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 반드시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것과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고,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비극적인 사람은 가난하거나, 질병으로 고난을 당하거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죽음 후에 예비 된 영광스런 처소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갈 곳은 영원한 형벌이 있는 곳이니 이 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을 포함해서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하여 ‘나를 따르라.’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1.자기를 부인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본문 3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인한다.’는 말의 기본 개념은 ‘아니오.’라는 뜻입니다. 자기 부인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기 부인 없이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고,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그는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하실 때,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마치실 무렵 십자가 지는 일을 앞두고 깊이 고민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서 특히 사랑하는 세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할 것을 당부하시고 홀로 떨어져 기도하시면서 십자가 고난의 쓴잔을 피하고 싶었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기도 후에 예수님이 관원들에게 잡혀가셨을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 동태를 살피다 어떤 계집종이 "당신도 예수라는 사람을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할 때 그는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육의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서였습니다. 본문35-36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같이 ‘목숨’이라 번역 되었는데, 뒤의 목숨은 헬라어 ‘푸쉬케’라는 영적 생명으로, 주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하신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육의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 주님의 말씀이 생각 나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낙심이 되어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와 만나신 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양 때를 먹이라고 당부하십니다. 그 후 그는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고,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은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관원들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위협과 박해를 받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영적 참 생명을 얻기 위해 육의 생명을 기꺼이 버린 것입니다.
이 일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삶의 권리를 주님께 넘겨드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우리 행동의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위임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고집대로 자기 부인하지 못하면 사는 길 같으나 결국 죽는 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국경을 지키던 1,200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탔습니다. 군인들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군인들은 기쁨에 들든 나머지 빨리 가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기관사는 “얼마 못가서 급경사와 급커브가 있는데 이렇게 많이 태운 채 가면 대형사고가 날 겁니다.”라며 기차를 출발시키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을 인솔하던 장교 하나가 기관사에게 총을 빼들고 “당장 이 기차를 움직이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장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고한 자기들을 기관사가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관사는 할 수 없이 기차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급경사에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내려갔고 결국 급커브를 돌다가 탈선해 전장에서도 목숨을 지켰던 수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식과 질서를 무시한 한 장교의 고집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신나게 달리다가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우리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의 마음을 품고 따르는 자입니다.
본문 벧전2:21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주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 면에서 본을 끼치셨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온유하고 겸손한 본이 되셨습니다. 완고하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죽기까지 순종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마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마21:5에 보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당시 왕은 군대의 호위를 받고 즐비한 신하를 거느리고 백마를 탔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는 그보다 100배 1000배도 더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마땅한 분인데, 겸손하여 나귀 그것도 어린나귀를 타셨습니다. 본문에도 그런 겸손의 모습에 대하여 22-23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희생하시며 섬기는 본이 되셨습니다. 서신서 본문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이 죄인인 우리가 받을 저주와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주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시고 ‘너희도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임을 아시고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눅23:28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말씀은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따라오며 우는 여인들에게 향하여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예루살렘을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아 사형을 집행하면서 매로 때리고 가시관을 씌우고, 희롱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께서 묵묵히 십자를 지신 것은 억지로 지신 것도, 무리를 대항할 힘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마26:53-54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습니다. 주님은 잡히지 않기 위해서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칠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렇게 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배워 주님의 마음을 품고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입니다.
마가복음 본문 34절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는데 로마에 대하여 중한 죄, 특히 로마정부에 대한 반역죄에 대하여 로마정부는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감옥에서부터 형장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였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유명한 성경학자 스웨트(H. B. Swete)가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유죄선고를 받아 그 형벌을 받으러 가는 사람의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당시 사회에서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신자들은 순교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자기는 원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의 형장에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이러한 일이 초대교회에서 있었고, 우리 나라에서 조선후기와 일제시대, 그리고 6.25사변 때는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다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공산 치하나 이슬람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지역들이 있습니다. 또한 일상생활에 많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에 죽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사명을 감당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을 일이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세상에 대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했습니다. 희생이 따르기에 남이 지지 않으려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며, 영생과 함께 핍박과 기업을 겸하여 백배로 받는 길입니다.(막10:30) 주를 위해 사명의 십자가 지는 사람들을 주님은 그저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상급과 면류관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교회와 나라와 인류를 위해 기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여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독일전란 때 자유를 애호하는 자였다. 나는 이것을 보수하기 위하여 대학교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독재자의 탄압 아래서 모든 대학교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다시 신문 편집자들을 보았으나 그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독일의 자유를 위하여 글을 쓰던 유명한 저술가들을 바라보았으나, 그들도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은 히틀러의 탄압 아래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전에 교회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 나는 교회에 대하여 애정과 탄복을 느끼는 바이다." 이처럼 세상을 위한 사명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따르는 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입니다. 아멘. <‘25. 03. 19.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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