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하박국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합 2:4-20)

nam씨 2020. 2. 26. 16:24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2:4-20)

 

 

사람들은 ''라는 말이나, '저주'라는 말보다는 ''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화보다는 복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다섯 가지의 화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6, 9, 12, 15, 19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섯 개의 저주의 말씀은 도리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다섯 가지 화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인들을 향해서 선포되는 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박국은 처음에 유대땅 안에 있는 불의함을 보고 탄식하였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인들이 악인에 의해서 겁탈과 강포를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시대였습니다. - 하박국은 이러한 시대를 이해 못하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는 식으로 따졌습니다.

그러한 하박국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은 응답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그들을 통해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하박국은 또 한번 탄식합니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자기 힘을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갈대아인들에 의해서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한다면, 그게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의인들이 악인들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에 의해서 짓밟히고 있습니다. 강포와 겁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 의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힘이 되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형통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지금 그들에 의해서 고통받는 의인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끝날'이라고 하면, 왠지 공포스럽고절망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런 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을려고 합니다. 멋있는 말로, 내일의 희망만을 이야기하며 살아도 짧은 생을 구태여 그런 절망적인 것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결코 세상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들은 우리를 공갈 협박하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들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말씀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들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로하고 힘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들을 격려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이 여러 곳에 투자하지 않고 어느 한 회사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투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어떤 소식이 가장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회사가 크게 성공하고 일어난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그 회사가 어려워도, 주가가 좀 내려가 있어도, 장차 그 회사가 번창케 된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그 확신만 있다면, 현재의 상황이 좀 어려워도 그는 얼마든지 견디며,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회사가 절대로 망하지 않고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그 믿음 때문에 아무리 그 주식이 바닥을 치고 있어도, 절대로 그 주식을 팔아서 다른 주식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가 누굽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 그 말씀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멸시를 당한다 할지라도 장차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한 그는 결코 주저앉지 않습니다. 힘들다가도 그 나라에 대한 소식만 들으면 힘이 나는 것입니다.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어떤 소식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악인이 득세하며, 자신의 욕망을 따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 소망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러한 세상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이 소망이 되겠습니까?

 

나 자신의 중심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나라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 땅에 어떤 미련을 두고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상의 마지막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이 두렵고, 왠지 듣기가 싫으냐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 오직 모든 소망을 그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 끝날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은 힘과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하나님이 공의가 어디 있습니까?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십니까? 어째서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겁탈과 강포를 일삼고 있는데 보고만 계십니까? 어찌하여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잠잠하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같게 하십니까? 왜 세상이 마치 하나님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내버려두십니까?' 라고 탄식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그러한 악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는 말씀,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진다는 말씀은 여름날의 얼음 냉수처럼 그 심령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듣고 또 듣고 싶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좋고 세상에 무언가를 투자해 놓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소리가 듣기 싫은 것입니다. 주님이 늦게 오실수록 좋은 것입니다. 이 좋은 세상,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 나라는 이 세상만 못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 땅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나와 앉아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부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절반 정도 투자해 놓고, 세상에도 절반 정도 투자해 놓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 나라도 영원토록 계속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두 나라는 결코 함께 서지 못합니다. 한 나라는 흥하고 한 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 사실을 그 백성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든, 세상의 재물이든,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 다 택할 수는 없습니다. 교묘하게 둘을 택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참 지혜롭구나, 어쩜 그렇게 실력이 좋니?'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양다리를 걸칠 생각은 아예 하지를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아니면 세상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4절을 보십시오. 누가 의인입니까? 그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의입니다. 지금 당장 그들이 죽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더딘 것처럼 보이고, 저들이 의지하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화를 선포하고 있는 대상이 누굽니까? 직접적으로는 당시의 갈대아 사람들입니다. 자기 힘을 신으로 삼고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고 권세자가 되어서 세상의 열국들을 살육하는 자입니다. 한마디로 안하무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아예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단지 역사적인 갈대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와 장소를 떠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들의 모습은 물질적 탐욕이 있는 자들이며(6-8), 사리 사욕을 채우는 자 들입니다(9-11), 또한 잔인하며 살인하는 자들이며(12-14), 술 취하여 방탕한 자들이며(15-17), 우상숭배자들입니다(18-20).

 

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가 바벨론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 세상나라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 나라와 대치되는 나라입니다. 멸망하고 말 세상 나라를 비유하여 큰 성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4 :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2:15)

16 :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18 :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18 :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들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이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나라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세워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미 그 심령에 그 나라를 두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들려 주시오'하면서 또 듣기를 원하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5: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못하여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마치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는 자들,]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고,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들.] 12: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들, 불탈 것으로 수고하고 헛된 일로 곤비케 되는 자들.]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고 그들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들, 사람들에게 강포를 행하는 자들,.] 19: [새겨 만든 우상에게 복을 비는 자들, ]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 그것이 오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들을 향해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뿐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믿어 그 믿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마음을 여전히 강퍅하게 하여 불신앙으로 살 것인가?

 

노아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노아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가 관영함을 보시고,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오. 내가 내 모든 재산과 내 모든 시간을 바쳐서 이처럼 산 위에서 방주를 짓고 있는 것을 보시오.'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그 말을 믿는 것이요, 하나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말을 믿었다면, 그는 믿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떻게요? 함께 방주를 짓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였을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지 않는 자들은 그의 말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웃기는 이야기를 한다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앙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망했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 멸망한 모든 이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노아 홍수의 예를 드셨습니다.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우리는 분명한 역사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 종말이 속히 이를 것입니다. 이 묵시는 결코 거짓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우리 편에서는 더디에게 느껴질지라도) 더딘 것이 아닙니다.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습니까?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믿습니까?

그 날에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는다면서,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 안주하며,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많이 읽힐려고 합니다. 위인들의 전기에는 아이들이 본받아야 할 교훈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의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동경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위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한 세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줄로 믿으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평생에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그 믿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녕 응하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약속)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았습니다.

 

믿음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움지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본토 고향 친척집을 떠나 갈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났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들의 주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가이사를 주로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투기장을 보내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게 하였지만, 그 믿음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발의 등이 되어야 하고 내 길에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삶의 방향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원칙 하에서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며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