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4)
오늘 말씀은 1절과 2절에서 각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약속합니다. 1) 정죄함이 없습니다. 2)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3)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1.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런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영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은 내 육체 안에서 나의 영혼과 하나가 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 본질이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과 하나가 된 것은 곧 예수님과도 하나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과 소원을 가지고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에 성령과 하나가 된 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과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란 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나의 죄로 인하여 내가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이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없는 것이요 완전하게 없는 것입니다.
왜 내게 더 이상 죄로 인한 심판과 형벌이 없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받아야 할 정죄를 이미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롬8:3)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정죄 즉 죄의 심판과 형벌을 다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정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으려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 낱낱이 다 회개를 해야 돼.”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회개를 하고 나서도 용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부끄러운 죄를 짓기라도 한다면 나를 정죄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 봐라. 참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지 않느냐?” 내 안에 있는 율법의 소리요 마귀의 정죄였습니다.
저는 과거에 이런 악순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회개에 대해서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고, 죄악에서 떠나고자 하는 마음의 결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정의의 인격적인 회개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였습니다.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하거나, 뼈를 깎는 듯한 고통스러운 회개를 하지 않아도 내가 인격적으로 죄를 회개했다면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가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눅5장 1절로 11절을 보면 베드로는 동업자들과 함께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으나 허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띄우라고 말씀하시곤 배 위에서 뭍에 앉아 있는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배를 저어 가서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명령이 못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호수는 날이 환하게 밝으면 고기가 잘 안 잡히고, 게다가 깊은 곳은 물고기가 없기 때문에 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고백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직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을 때 두 배가 가득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짧은 고백 속에 베드로는 온전한 회개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비록 그 배 위에서 눈물 콧물 흘리고 지난 날 갓난아기 때 지은 죄까지 회개하지 않았어도 모든 죄를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줄 때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10)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베드로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훗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는 큰 죄를 지었지만 그 자리에서 회개함으로 더 이상 정죄함에 빠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에도 예수님께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그 문제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완벽한 회개를 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인격적으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쳤다면 하나님은 그 순간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정죄함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마귀의 정죄하는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단지 내가 아직 고백하지 못했던 최근의 죄가 있다면 미루지 말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마귀의 정죄함을 뿌리치십시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서재에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종이 한 장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에는 루터가 여태까지 범한 모든 죄의 목록이 낱낱이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죄의 목록을 들여다보는 순간 루터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앞이 캄캄해지면서 맥이 탁 풀렸습니다. 너무나 옛날 일이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과거의 부끄러운 죄까지도 몽땅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이렇게 죄 많은 네가 무슨 종교개혁을 한다고? 너나 바르게 살아라!” 빈정대며 “너는 너의 죄를 어떻게 할래?” 하고 협박했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루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난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마귀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부부지간에 또는 형제지간에, 친구지간에, 그 사람의 아픈 과거를 자꾸 들먹이며 비판하고 꼬집고 괴롭히는 사람은 마귀를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알고 보면 비판을 가장 많이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미국 격언 중에, 심장병에 치명적인 두 가지 사실은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과 남을 깍아 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꼬집는 것은 그 사람과 동시에 자신을 죽게 만들므로 백해무익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 나에게도 이런 허물이 있는지 먼저 자신부터 살펴보고 나도 그 처지가 되면 결코 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는, 몇 배 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겸손히 회개하며 다시는 그런 허물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마귀의 공격을 받고 무척 괴로워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루터야! 너의 모든 죄는 나의 피로 모두 다 깨끗이 씻었다. 그러므로 너를 정죄할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루터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로마서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 순간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든지 마귀가 나타났던 그 벽을 향하여 잉크병을 힘껏 집어던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루터가 외치는 순간 마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지난 죄를 들추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낙심시키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것은 마귀가 하는 못된 짓입니다. 특히 마귀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합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궤계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곧 바로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죄의 심판과 형벌이 없습니다.”
3. 나는 해방되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죄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른 표현으로 반복합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서로 대조가 됩니다. 그런데 죄와 사망의 법은 죄로 인해서 우리가 죽는 법이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명과 성령으로 우리가 살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적용되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입니까?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세 가지 해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2) 죄의 유혹으로부터 해방 3) 죄의 존재으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저주를 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죄의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그 저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저주대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오시어 예수로 인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다스리는 새로운 법, 새로운 원리인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고백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습니다.
4. 나는 성령을 좇아 거룩한 삶을 삽니다.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을 때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 없이는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십니다. 율법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내 힘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좇아서 기도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매우 방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한 때 이방종교인 마니교에 빠졌고, 술집에서 일하고 몸을 파는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함께 살던 여자를 고향으로 보내고 그녀도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참회록]을 썼습니다. 그가 한번은 지난날에 방탕하게 살았던 때에 자주 다니던 골목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술집 여자가 어거스틴을 반기며 “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왜 그 동안 안 보이셨어요? 잠깐 쉬다 가세요.”라며 유혹했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았소! 당신이 전에 부르던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고 지금의 어거스틴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어거스틴이요.”라고 답하고 그 길을 늠름하게 지나갔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 때문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 거룩한 삶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가 단번에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중에 순간순간 옛생활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방된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령을 좇아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이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과 정죄함이 없다는 것과 주님 주신 해방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입니다.
고백합니다. “나는 성령을 좇아 살아갑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이미 회개한 과거의 죄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과거에 부끄러웠던 모습 때문에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 자녀 삼아주시고 귀한 사명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근의 죄 가운데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마귀에게 정죄 당하지 말고 즉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주님 주신 자유와 해방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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