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어지는 일곱 대접 9 (계 16:21)
21.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이제 마지막 일곱째 천사의 대접 중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영국의 한 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는데 길목에 2개의 꽃병이 놓여있었습니다. 하나는 도자기에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있고 예술품으로서 그 자태가 출중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도자기는 우선 외모가 볼품이 없어 빛깔조차도 흐릿하고 가치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안내자에게 “이 도자기는 왜 이렇게 윤기가 나는데 저 도자기는 왜 저렇게 볼품이 없는가?” 그러자 안내자는 “이 윤기 나는 도자기는 불에 구워졌기 때문이고 저 도자기는 아직 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윤기가 나질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도자기가 불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직 흙덩이일 뿐이듯 우리에게 하나님의 고난의 연단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대접재앙의 진리가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출 9장에 나타나는 7번째 재앙인 우박재앙과, 또 하나는 수 10장의 태양이 머무르고 달이 머물렀던 아모리와의 전쟁이 그 배경입니다. 바로 왕은 모세를 통해 베풀어지는 열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모리와의 전쟁 역시 수10:11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고 했듯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우박 재앙 역시 이스라엘이 승리했던 큰 이유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내부에 있는 바로 왕과 같은 세상과, 또 아모리의 다섯 족속과 같은 육신적인 마음이 있을지라도 고난의 대접을 받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꺼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하여 고난의 은혜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6. 나를 감추며 피하게 됩니다.
21절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여기 한 달란트란 34kg에 해당하는 무게입니다. 이렇게 큰 우박이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손톱만한 우박이 쏟아져도 파농 할 정도로 피해를 주는데 이 큰 우박이 엄청난 운동 에너지를 갖고 쏟아진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아모리의 다섯 왕이 굴에 숨은 것처럼 굴밖에는 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이처럼 진짜 고난의 징계를 받으면 두려워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서 내가 나타납니까? 어디서 함부로 내 목소리를 냅니까? 어디서 내 감정 냅니까? 내 자랑 그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 두려워서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만 따릅니다.
계 6장의 여섯 째 인 재앙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계6:12-17에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인재앙은 성령의 인침인데 우리 체험으로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깊어질수록 경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고난의 대접재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나타나지 않도록 철저히 나를 감추게 됩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니까 날뛰지 하나님을 바로 알면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느냐?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12:6-8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미국의 빌리그래함 목사의 가정교육은 엄격한 것으로 소문나 있는데 그에게 안네 로츠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의 어렸을 때 잘못을 저질러서 어머니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 안네는 “엄마.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놈이 잘못하게 했어.”하고 둘러댔습니다.
그러자 루스 여사도 지지 않으려는 듯 “오. 알아. 그래서 나는 그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하면서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두 시간 뒤에 딸이 또 잘못을 저질러서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 딸은 얼른 “엄마. 마귀란 놈이 벌써 내 속에서 밖으로 도망갔어.” 딸은 이렇게 애교로 매를 피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잠13:24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했습니다. 이 자녀교육의 교훈은 지금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속담에 “오늘 바르게 교훈 받고 단련 받지 못한 어린이는 내일의 죄수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훈계와 징계가 그렇게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7. 아직도 미완성인 자신을 인정하게 됩니다.
또 21절 하반 절에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참으로 기이하죠? 일곱 인재앙도 끝나고, 일곱 나팔재앙도 끝나고, 일곱 대접재앙의 마지막 부분인데 아직도 악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완성되어야 할 시점인데 왜 남아 있을까요?
그러나 이 지상에서 인간의 완성이란 없습니다. 자신을 완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을 가진 그 자체가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완전이란 하나님처럼 완전해야 완전이 아니라 자신이 또 얼마든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악한 존재임을 깨닫고 늘 근신하는 그런 의지하는 신앙자세를 갖춘 그 모습 그것을 바로 완전으로 보신다는 말입니다.
사람 인(人)자에 대한 한자풀이도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대는 그 모습이 바로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온전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늘 겸손하고 근신하는 그런 역설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어도 조금만 하나님을 멀리하고 방심하면 곧 넘어지고 시험 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기 약점을 알고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근신하는 삶 그 삶이 바로 완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잠시 방심하여 믿음에 게으르면 우리 죄가 먼저 소리 지르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민32:23에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체해도 하나님을 멀리하면 넘어지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고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쌓였다가 폭발하기 때문에 문제가 터지면 메가톤급입니다.
그래서 말 못하는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누구에게든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어떤 분도 노년에 치매가 왔을 때 교인들을 마구 욕하더라고 하지 않습니까? 해명도 못하고 속으로 참았던 것이 쌓이고 쌓이다 신앙이 충만할 때는 사라졌다가 잠시 방심할 때 깊은 병이 되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약5:4-6에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대항하면 농토나 일자리를 빼앗길까봐 때로는 부인까지도 빼앗기는 수모를 참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 농민의 봉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이 들고 일어나면 거의 폭동 수준입니다. 이 약점을 교묘히 이용해서 정권을 잡은 자들이 공산주의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근신하지 않으면 우리 속의 죄악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옛날 어둠의 세계에서 한 가락씩 한 사람들은 더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이 떨어질 때 그 잔재가 들고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안전장치를 달아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의 징계입니다. 우리는 그런 고난 속에서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119:67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신학적 지식으로 풍부해도 하나님을 멀리 하면 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어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나를 감추고 근신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 안에서 의로운 것이지 예수 떠나면 죄투성이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더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대접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최후의 은혜입니다. 이런 고통을 당하고도 끝내 깨닫지 못하면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은혜 가운데 나를 더욱 낮추고 숨기며,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더 회개하고 더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온전하고 참된 믿음 가운데 들어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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