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부어지는 일곱 대접 6 (계 16:15-16)

nam씨 2024. 11. 1. 19:58

부어지는 일곱 대접 6 (계 16:15-16)

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여섯째 천사의 대접의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마겟돈이란 히브리어로 '므깃도의 언덕'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일반적으로 아마겟돈은 세계 역사 끝 날에 사탄이 지휘하는  동방나라 군대와 하나님의 백성들과 전쟁을 벌일 최후의 장소를 말합니다.

최후의 전쟁터라고 하니까 대단한 곳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므깃도는 나사렛에서 남서쪽 18km 되는 지점에 있으며, 므깃도는 샤론평야를 굽어볼 수는 있지만 불과 20~50미터 높이로 낮은 작은 언덕에 불과할 뿐 산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고대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남북무역로요, 지중해의 페니키아에서 예루살렘, 요르단 강 유역까지를 연결시키는 동서교통로가 교차하기 때문에 군사 무역 면에서 중요하게 여겨져 이곳을 차지하려고 역사상 20여회 이상의 큰 전쟁이 일어난 곳입니다. 마치 백마고지와 같이 중요한 군사요충지였습니다.



이 므깃도의 언덕인 아마겟돈이 왜 유명합니까?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인류 최후의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날 장소로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계16:16), 그러나 학자들 간에는 아마겟돈은 현대전에 있어서 전략적 가치가 없고 그 낮고 좁은 언덕이나 샤론평야에 수억의 군대가 집결할 자리나, 집결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과연 이곳에서 인류 최후의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데는 많은 의문들이 있습니다. 옛날과 같이 창칼 들고 한 곳에 모여서 싸우는 그런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핸드릭슨은 “적그리스도의 정권과 교회가 대결하는 최후의 전쟁을 말한다.” 했고, 뉴인터네셔널 주석에서는 “그곳이 어디든 간에 모든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의해 마지막으로 전복됨을 상징한다.” 박윤선 박사는 “세상 끝 날에 하나님의 백성이 적그리스도를 이긴 상징적인 장소”라 했고,

한경직 목사는 “제 3차세계대전은 아마겟돈 전쟁이 될는지 모른다.” 조용기 목사는 “동양군대 2억과 서양 군대 1억 이상이 초현대식 무기를 들고 모여들어 마주치는 곳이 바로 아마겟돈 결전장이다.” 권성수 박사는 “전쟁은 분명하되 실제 군대를 통한 싸움을 말하는가에 대하여 나는 부정적이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문자 그대로, 어떤 이는 상징적으로 해석한 것을 볼 수 있지만 명확한 해석은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복음으로 풀어야 해석이 됩니다. 즉 아마겟돈 전쟁은 이미 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성화의 과정에서 충돌하는 영과 육의 대전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지금부터 최후까지 옛 사람을 목 박으며 악과 싸워야 할 전쟁터가 어디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므깃도의 남과 북, 동과 서로 교차하는 교통로에서 십자가를 봅니다. 그리고 므깃도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가나안 열왕과 싸워 승리한 별들의 전쟁을 보며, 이곳을 정복하려고 했던 애굽 왕이라든지 수없이 충돌했던 악의 역사적 사실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예수님과 마귀가 최후의 대전을 했던 골고다 십자가를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아마겟돈이란 우리가 십자가 붙들고 나아가는 성화의 과정에서 머리를 들고 나타나는 우리의 악을 철저히 매장시키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동안 십자가에 나를 내려놓는 일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대접 재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랑을 체험하고는 십자가 붙들고 우리 옛 사람을 처리하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십자가는 바로 우리 모든 악의 무덤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은 1차적으로는 모든 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십자가의 예표요, 나아가 아마겟돈은 우리 성도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악을 매장시킬 악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그 십자가 아래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 십자가에서 우리 악을 넘겨주며 모든 악을 처리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할 우리 모두의 최후의 전쟁터입니다. 우리 성도가 최후까지 모두 참여하며 싸워야 할 싸움은 그 싸움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는 어간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5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마겟돈 전쟁이 다름 아닌 영적 전쟁임을 보여주는 말씀임과 동시에 우리가 영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영적 자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방심하지 말고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시종일관 근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방에서 적을 지키는 군인들처럼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오늘 오실 것처럼 긴박감을 가지고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24:40-44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늘 기도와 찬송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만 드리고 있을 수는 없지만 늘 힘써야 합니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고 더욱 힘써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피곤하다고 방심하면 넘어집니다. 위로부터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마겟돈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2. 복음에 굳게 서서 우리 행실을 지켜야 합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옷은 행실이요, 우리 영적상태입니다. 그리고 벌거벗는다는 것은 바로 살지 못한 죄악의 수치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옷을 지키라고 한 것은 이미 주신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롬8:30). 즉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그 은혜를 굳게 붙들 뿐 아니라 말씀 안에서 더욱 회개하고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요일3:2-3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3. 늘 악의 성향을 십자가 아래 넘겨야 합니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 “자기”라고 했는데 내가 나타나면 안 됩니다. 나는 부패했고 부끄러운 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춰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될수록 우리 육은 더욱 으쓱거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바로 할려고 하는데 부패한 친인척들이 끼어들어 비리를 저지르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우리가 큰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큰 능력을 받고, 큰 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 육신도 덩달아서 춤추기 때문에 어떤 가운데 나아갔을지라도 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술사 시몬처럼 육신이 더 흥분하여 쓰임 받는 자세가 아니라 기적의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혹은 은혜 체험이 너무도 좋아 신비만 추구하다가 신비주의가 되어 말씀의 경계를 넘어서거나 악한 영에 사로잡히는 일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그랬듯 능력과 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 속에 자만과 교만과 욕심과 게으름과 자기자랑이 슬그머니 그 뒤를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친 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옛 사람이 나타나는 대로 모두 악의 무덤인 아마겟돈 전쟁터와 같은 십자가 아래 매장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4. 끝까지 신앙으로 이기는 자가 승리합니다.


16절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여기 세 영은 앞의 13~14절에 나온 것처럼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을 말합니다.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더러운 귀신의 영이라는 것은 우리를 더럽게 하려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마겟돈이란 영육 간의 싸움인 것을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를 최후까지 넘어뜨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현장과도 같은 아마겟돈으로 왕들을 모읍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마귀 편에서 보면 최고 최악 최후의 시험의 장소요, 예수님 편에서 보면 마귀를 심판하고 죄인을 구원하신 구원의 장소입니다. 이 십자가의 깊은 경험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때 우리 속의 동방 왕들과 같은 육신의 성향은 더 이상 숨겨지지 않을 것이고 처리 받기 위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마지막 7번째 대접재앙을 앞에 두고 있는데도 왕을 모으고 이제 시작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7번째 대접을 쏟았어도 21절을 보면 하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가 육신을 벗고 완전히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빌3:15-16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들어갈 때까지 근신하며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의 영이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계속 모읍니다. 마치 40일 금식하실 때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예수님을 떠났지만 죽으심을 앞두고 온갖 악의 무리들을 동원하여 십자가 아래 모였듯, 우리를 천하만국과 그 영광 뿐 아니라 온갖 악으로 넘어뜨리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기회로 나의 옛 사람을 처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재림하실 때 그 때 비로소 사탄에게 영향 받던 우리 육체까지도 죄도 없고 흠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광의 형체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신 이 말씀으로 무장하여 우리가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모든 악을 그 아래 매장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악의 시험들을 다 이기고 온전히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승리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