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부어지는 일곱 대접 7 (계 16:17-18)

nam씨 2024. 11. 8. 14:54

 

부어지는 일곱 대접 7 (계 16:17-18)

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이제 마지막 일곱째 천사의 대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해를 돕는 이야기를 하나 드리면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요 조각가로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을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에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속의 악이 철저히 심판을 받아 제거되어야 합니다. 하나라도 남겨두면 하나님의 걸작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에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재앙입니다.


즉 입곱 인은 기도를 통한 성숙과정을 말한 것이고, 일곱 나팔은 말씀을 통한 성숙과정, 그리고 일곱 대접은 예수님의 고난의 사랑 혹은 징계의 연단을 통한 성숙과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앙이라고 말한 이유는 우리 속의 악이 말씀과 기도 속에서 심판을 받아 척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하는 좋은 심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대접재앙은 그 심판 중의 맨 마지막 재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완성을 위한 최후의 척결을 말합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는 본문에서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운명하시던 그 때의 광경을 연상합니다.


요19:30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하셨고, 마27:51-52에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하신 말씀과 얼마나 흡사합니까?


그런데 이 일은 일곱째 천사가 어디에 대접을 쏟을 때 일어난 일입니까? 17절에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공중에 쏟았습니다. 마지막 대접재앙을 마감하는 완성의 의미로서 과연 공중이 무엇이기에 이런 십자가의 최후의 순간이 여기에 오버랩 될까요?

 
그동안 대접을 쏟은 장소를 열거해 보면 첫 번째는 땅에 쏟았고, 두 번째는 바다, 셋째는 강과 물 근원, 넷째는 해, 다섯째는 짐승의 왕좌, 여섯째는 유브라데강 그런데 마지막 일곱째는 공중에 쏟았습니다.

성경에서 공중은 바로 사탄의 권세가 활개 치던 그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 공중이 보이는 하늘이냐? 아니면 세상 영계냐? 아니면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리 인간의 변화 성숙관점에서 본다면 물리적 하늘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공중이란 사탄의 활동영역이라는 곳이고, 또 사탄은 사람들 생각 속에서 역사한다는 점, 그리고 사탄의 지배 즉 왕국 역시 천국처럼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인간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 혹은 생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생각을 떠나서 무얼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의 타락이란 결국 생각의 타락이고, 세상의 말세란 곧 사람들 생각이 악해졌다는 것이고, 믿음의 성장 역시 내면적인 것이지 외면이 아닙니다. 즉 우리 내면에서 땅이 우리 육이라면 하늘은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생각은 사탄에게 무방비로 내어주었던 활동영역이었습니다. 이제 이 부분까지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골3:9-10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했습니다. "지식에 까지"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조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생각을 악으로 조정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생각을 주관하시지만 사탄도 우리 생각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대접재앙은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하므로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갈망하는 마지막 성화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후10:3-5에서는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도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엡4:13-14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럼 악의 생각이 심판을 받은 그 영적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18절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하늘의 천둥번개가 내리칩니다. 이처럼 은혜 받은 마음의 하늘에도 천둥번개가 칩니다. 천둥번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경외하고 두려운 줄 아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죄가 이렇게 두려운 줄 알게 됩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천둥 번개가 요란하고 나팔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 떨었는데 천둥번개는 바로 하나님 두려운 줄 알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을 경건이라, 경외라고 말합니다. 우리 문란한 생각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바른 믿음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면 어떻게 함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5:7에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하면서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8절)고 말씀합니다. 악행을 볼 때 하나님은 뭐하시는가 그러지 말고 우리 위에 더 높은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촛불”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러시아에 농노제도가 성행하고 있을 때, 악마 같은 감독관이 있어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무고한 사람에게 쇠고랑을 채우기도 하고, 또 농노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 집의 하녀로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누군가 참다못해 반항을 하면 그 반항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이러다보니 마침내 농노들 사이에 이런 공론이 났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 감독을 죽여 버리자, 몰래 죽여 버리자,”고 막 합의가 되려던 참이었는데 딱 한 사람, 표트르 미하일로프라고 하는 사람이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참고 당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실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악질 감독을 죽이는 것을 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쉬고 즐기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을 하는 날인데도 이 악한 관리인은 부활절에도 농노들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평과 불만 속에서 마지못해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하일로프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쟁기질을 하였습니다.


그는 움직이는 쟁기 위에다 촛불을 켜놓은 채 일을 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촛불이 꺼지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 감독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꺼지지 않는 촛불을 보면서 그 못된 감독은 “내가 졌다. 네가 이겼다!”하더니 혼이 빠져 나가버린 듯 맥없이 말위에서 떨어져 그만 배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는 후로 농토의 주인은 농노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악의 생각이 심판을 받아 하나님 두려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사랑이 강력한 파문으로 다가옵니다.


18절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천둥번개만 요란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 이래 이 만큼 큰 지진이 일어난 적이 없는 대지진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나를 위한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그 사랑이 마음의 잔잔한 감동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파문으로 다가온 것을 말합니다. 눈물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신앙의 수준입니다.


눅7:37-38에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랬습니다.


이 일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눈물과 향유로 부어드린 사건입니다. 여기에 대해 눅7:47에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큰 사랑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눅8:2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했듯이 귀신 떠나고 나니 그렇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생각 속에서 악의 생각이 떠나고 성령의 생각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의 사랑 혹은 징계를 통해서 미련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공중 즉 우리의 생각 속에 쏟는 대접재앙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보내주신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사랑이 성숙해져야 생각이 변화됩니다. 우리 모두 그동안 마음 바쳐 하나님 섬기지 못했던 것을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더욱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하나님 사랑 크신 줄 알아, 불신앙의 악한 생각 다 떠나고 마음과 뜻과 생명까지라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온전하고 성숙한 믿음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