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부어지는 일곱 대접 5 (계 16:12-14)

nam씨 2024. 10. 24. 19:08
 
부어지는 일곱 대접 5 (계 16:12-14)

12.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여섯째 천사의 대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초기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를 아실 것입니다. 이성봉 목사는 6.25동란 무렵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심한 고문과 조롱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공산당원이 잔인한 고문 끝에 조롱하며 발길로 걷어차며 말했습니다. "어이 영감 천국 좀 보여주지?" "예 보여 드리지요." "죽어서 말고, 지금 보여 달란 말이야." "예 지금 보여 드릴께요." 그러자 공산당원은 잘 걸려들었다 싶어 지금 눈앞에 당장 보여 달라고 독촉했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 뭐라고 말했을까요?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드릴 수 없고 천국지점은 내가 보여 드릴 수 있는데 내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성경적인 말이고 성령께서 주신 지혜가 아니고는 대답할 수 없는 답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항상 천국이 있고 또 천국을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도 천국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삶일까요? 문자대로 보면 여기 여섯째 대접 재앙은 대접을 큰 유브라데 강에 쏟는 모습입니다. 이 때 강이 말라 전쟁로가 예비되고 개구리 같은 더러운 귀신의 세 영이 온 천하 임금들을 모아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대한 견해에는 동서양의 군대가 충돌, 아스완댐 건설로 인한 분쟁, 적그리스도의 세력의 교회 공격, 어린양의 군대를 대적할 적그리스도의 군대, 종말에 나타날 최후의 전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치러오는 원방의 모든 세력 등의 설이 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는 아직도 불확실한 이해가 많으므로 참고만 하고 계시록의 본질대로 복음의 신령한 관점에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당시 중동 지역에서는 겨울 우기가 끝나면 강물도 줄고 땅도 마르고 전쟁하기 좋은 때가 오는데 본문은 이러한 계절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방의 왕들이 콩가루처럼 무력했지만 이제는 마음을 돌리고 준비하고 준비하며 벼르고 벼르다가 연합군을 만들어 유브라데를 건너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브라함이 메소포다미아에 살다가 유브라데를 건너 가나안에 오게 된 그 배경도 깔려 있습니다. 유브라데가 세상이라면 유브라데 건너 가나안은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만큼 은혜를 크게 받을 때 있을 좋은 면과 시험이 되는 두 면을 말씀합니다. 즉 주님을 목말라 사모하는 좋은 면과 아울러 한 편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려는 그 심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럼 천국의 소망을 주실 때 어떤 일이 있습니까?


1. 죽음에 대한 육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12절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유브라데를 큰 강이라 했는데 큰 강은 건널 수 없는 강을 말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 이 강을 건너서 타향으로 간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향해 가는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믿음 없이는 넘어가지 못하는 강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습니다. 죽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 어떻게 가나요. 교사는 예수 믿음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죽어야 가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도 맞는 대답입니다. 믿음으로 마음의 천국이 임하고 성도의 육체가 사망함으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본문에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큰 강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음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2:14-15)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죽음의 공포가 사라집니다. 우리 육신으로는 횡재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크게 체험하면 천국의 소망이 활짝 열리기 때문에 두려움과 미지의 강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은혜를 크게 받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세상에 대한 미련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사망의 두려움은 육신의 감정이지 영의 감정이 아닙니다. 그런데 강렬한 천국소망이 비쳐오므로 육의 감정까지 바꾸어졌습니다. 강물이 다 말라서 강 좌우편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여기 동방이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서의 동방은 이방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사46:11에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이라 한 것처럼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원방에서 오는 모든 세력을 통칭하는 하는 말인데 좁게는 우리 육신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셨는데 왜 세례요한부터입니까?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부터 침노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 침노를 당한다는 말은 ‘비아제타이’(biavzetai)는 폭력을 쓰다, 강제로 들어가다는 의미를 가진 ‘비아조’(biavzw)의 중간태 혹은 수동태로서, 중간태로 보면 강제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폭력을 사용함을 의미하고, 수동태로 보면 '난폭하게 다루어지다, 압박을 당하다, 폭력을 허용하다'등을 의미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부르심과 견인은총의 강력함과 아울러 성도에게 부어지는 사모하는 열정을 말함입니다.

눅16:16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면과 아울러 천국소망이 임하면 육도 지나치게 설쳐 세상에 손을 놓거나 건전하지 못한 사이비종말론이라든지 신비주의에 심취되거나 사탄이 더 깊이 침투하면 집단자살 등 일을 그르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그런 소동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비는 믿지만 신비주의는 배척합니다. 사탄이 틈 타서 결말이 좋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믿지만 상식 없이 성령대망운동하다가는 큰 일납니다. 은혜를 크게 체험해도 이렇게 육신이 덩달아서 날뛰기 때문에 체험이 깊어질수록 더욱 진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진리로 세우신 후에 오순절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아직 우리는 육을 입었기에 날마다 진리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2. 그러니까 천국소망이 생기면 육신의 생각들도 덩달아 나서려고 합니다.

13-14절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여기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방한 악의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가령 용이 사탄이라면, 짐승은 본능의 존재 육신이요, 거짓선지자는 미혹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 세 영은 완전수 3이요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으니 아무도 거칠 것이 없는 군대입니다. 또 개구리 모양으로 나타났으니 그 입에 쉬지 않는 반복성을 뜻합니다. 거기다 마치 모세처럼 이적까지 행하여 증거를 보이니 넘어가지 않을 왕이 어디 있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천국에 대한 육신의 반응이 이와 같습니다. 은혜 받지 못했을 때는 천국에 무관심하고나 죽음이 두려워 거부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한 후에는 달라집니다. 육신이 더 좋아 흥분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은 은혜 받지 못해도 방해물이요, 은혜를 받아도 시험을 주는 방해물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미혹에 뛰어난 개구리 같은 세 영이 등장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즉 개구리 같은 세 영이 이렇게 그들을 미혹해야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만큼 동방의 왕들이 동맹을 맺길 주저하고 그 강을 넘어 침략함을 주저함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약하고 늘 분산되어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너머를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은 항상 약하고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어도 육신적인 마음은 죽음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이 천국의 소망으로 넘치게 되면 이미 말씀한 대로 육신은 달라집니다.



마치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함께 살자던 베드로와 같아집니다. 그래서 세상에 충실하지 못하고 은혜에 심취하거나 세상을 떠나려고만 하는 비현실적인 사탄의 미혹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 좋은 것 같지만 대단히 비정상적인 삶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드디어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집니다. 즉 주권자인 나의 온 마음을 포섭하여 죽음의 강을 건너 주님과 따로 거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바울도 경험했지만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빌1:23-24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그러나 사명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소망과 아울러 사명의 현실에 충성하는 균형이 잘 잡힌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좋다고 모든 일을 제쳐놓은 체 날마다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시험입니다.



그래서 은사집회 잘못하면 악한 영이 침투하여 사탄의 소굴이 되버립니다. 회개와 예배와 순종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바로 서면 은혜와 은사는 넘치지만 더 큰 능력과 황홀한 엑스타시를 따르다가는 더러운 귀신이 틈 타는 등 곁길로 나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체험할수록 더욱 육신적인 감정을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3. 그러니까 은혜 받으면 우리가 근신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14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여기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이란 넓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요, 좁게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모으더라." 한대로 우리 육신도 천국의 갈망이 더욱 커져 갑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크게 체험할 수록 진리에 서서 정신 차려 신앙생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고 맙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15절의 교훈은 앞의 사건이 다가올 역사의 사건이라기보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어디에 이르렀든지 무엇을 체험했든지 진리에 서서 근신하며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드시도록 항상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최후까지 최선을 다할 것은 맡기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마24:42-27)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같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따로 있고 싶을 만큼 은혜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진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 아무리 좋더라도 변화산의 은혜에 도취되어 우리 할 일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탄의 시험입니다. 인류 최후의 전쟁터는 아마겟돈이지만 개인적인 최후의 전쟁터는 하나님 나라를 두고 벌어지는 성도의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를 깊이 받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굳게 서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가장 아름답고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