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1:6-14  사9:1-7,

이태리 알프스 산에 있는 한 마을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당 안에는 사면 벽 둘레에 구약시대의 선자지들의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이 다 같은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보면 맨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큰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이동상들 즉,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고, 그들의 눈은 갈보리 산을 향하여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여러 선지자 중에도 예수님에 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는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예고할 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고(이사야 7:14)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라고 예언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9장에 가서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은 참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한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오늘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은 참 빛이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 빛,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빛 은 물리적 빛이 아니라, 영적인 빛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성화를 보거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면 예수님 주변에 광채가 빛나는 후광을 보는데, 그것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부르는데 곧 하나님의 빛을 말합니다. 요일1:5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빛을 안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신약 본문 요1:9에서 세례 요한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증거 합니다. 모든 인생은 이 빛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거듭나서 영적인 눈이 뜨지 못하면 아무리 큰 빛이 눈앞에 와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세상의 거짓 빛을 향해 방황을 계속합니다. 세상의 현란해 보이는 '거짓 빛'들은 과연 어떤 것들입니까? 세상의 물질과 권세, 명예, 향락 등입니다. 그런 것들이 인생의 빛인 줄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향해 돌진하고 또 돌진을 합니다. 여름밤 밖에 백열전구를 껴 놓거나 모닥불을 피워 놓으면 이 빛을 향해 날 파리나 나방이 등이 밤새 몰려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면 충돌해서 죽었거나 불에 타 죽은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현란해 보였는데, 사실은 죽음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세상 거짓 빛을 따르는 자들의 결국입니다.

그러나 참 빛이 되신 예수님께로 나오는 자에게 생명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찬송가 52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의 작사자 아이작 왓츠 목사는 세계의 만왕들이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리스도는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내용의 찬양입니다. 이 찬송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마도 식인종들이 살고 있던 남해제도를 다스리던 죠지 왕이 그의 백성들에게 새 헌법을 주고 이교도 정부에서 기독교 정부 조직으로 바꾼 축복된 일일 것입니다. 즉 1862년의 성령 강림축일에 통가, 퍼지사모아 등지에서 온 약 5,000명의 토인 들이 반얀 나무 밑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들의 맨 앞에는 죠지 왕 자신이 앉아 있었고 그 죠지 왕의 뒤에는 많은 힘든 전쟁에서 왕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추장들이며 용사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연륜의 무게로 체구들은 구부정했고 눈은 침침해서 잘 보이자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크리스천이 된 기쁨과 사랑과 소망으로 가득차서 그들의 기쁨은 측량할 길이 없었고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찬송 햇빛을 받는 곳마다를 부르면서 예배가 시작 되었는데 이교도요 식인종의 어두운 세계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무상의 기쁨 속에서 드리는 이 엄숙한 예배에서 과연 아이작 왓츠 목사가 뜻한 이 찬송의 진의가 무엇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했습니다. 그날은 크리스천 왕과 크리스천 헌법 하에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참 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께 경건 되게 예배를 드리는 첫 모임의 날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천국이 지상에 건설되는 영광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남해제도에는 무서운 식인종이 살고 있던 섬들로서 통가 도는 제일 사나운 섬이었습니다. 1821년 인근의 피지 도는 백인들의 선교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통가도의 토인들도 이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통가도의 야만인들은 이 백인들의 종교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카누를 보내었으나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쟁 카누를 타고 쏜살 같이 빠른 속도로 이 피지도 연안에 상륙했는데 그전과 같이 피지도 토인을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성경을 사러 온 토인들이었습니다. 이 성경은 영어로 쓰여 저 있고 그 토인들은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데 이 한권의 성경을 사러 250마일(1,000리) 이나 되는 상상도 못할 먼 바닷길을 이 적고 나약한 카누를 타고 모험을 했던 것입니다. 사나운 맹수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 식인종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여 이들이 인간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 복음을 전한 주의 종들의 기쁨은 어떠했겠으며 복음을 통한 변화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했겠습니까? 더욱이 이날은 구원 받은 토인들의 왕인 죠지 왕이 백성들을 불러 모아 놓고 크리스천 왕국임과 크리스천 헌법을 선포하는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을 모신 자마다 이처럼 새로워집니다.

 

2.예수님은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되십니다.

구약 본문 사9:1-2에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했습니다. 여기 스불론, 납달리, 해변길, 요단 저편 등은 모두 갈릴리 지방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들은 이스라엘의 변두리로 늘 외국의 침략을 먼저 받고 이방인과 혼혈되어 고통이 가득하고, 같은 동족으로 부터도 이방인 취급을 받아 유대인의 멸시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곳에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빛 되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는데, 먼저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2절에 말씀처럼 큰 빛이 되신 예수님이 오시면 세상 사람들이 고통의 흑암도, 사망의 그늘도 다 물러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흑암은 인간 세상의 온갖 죄악과 고통, 미움, 질병, 갈등, 그리고 사망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빛은 이러한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인생의 참 빛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인생의 참 빛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요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생명의 빛이 가득한 곳에 천국입니다. 계21:23~24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 그래서 천국에는 태양이 필요 없습니다. 햇빛이 없어도 예수님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미 내 안에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얻은 영생입니다. 다음에 창성과 즐거움을 더하게 됩니다. 사 9:3에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했습니다. 주께서 주신 즐거움은 육체적인 즐거움과 환락의 세상적인 즐거움이 안인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는 진정한 영적 기쁨, 곧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에서 오는 거룩한 즐거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노예 상태 가운데 있지 않게 됩니다. 사9:4에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했습니다. 눅4:18-19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이 말씀이 자기에게 응하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말씀처럼 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죄의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단의 종노릇하며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늘 기업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자유 하는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참 소망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만 사랑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빛 되신 예수님을 모신 자는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됩니다.

신약 본문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를 든다면, 첫째는 신분의 변화입니다. 어떻게 신분이 변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을 내 삶의 왕으로 모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다운 삶입니까? 주님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입니다. 즉 주님이 나에 대해 모든 결정권을 갖도록 나를 그분께 맡기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분이 결정 하시는 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욕대로 살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을 끌고 나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내가 중심이 되어 내 생각과 내 욕심과 내 영광을 따라 살게 되었지만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뜻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삽니다. 주님을 만나 변화 된 바울처럼 무엇을 하든,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삽니다. 에릭이라는 청년이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100m 단거리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영국뿐 아니라 많은 외신들도 이 청년을 주시하였고, 많은 팬들이 그 활약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릭은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지망생으로 신앙이 투철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기가 주일에 배정이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에릭은 프랑스로 가는 배 위에서 배정 표를 받자마자 올림픽 선수단 단장에게 경기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일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금메달을 위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에릭은 100m 에서는 세계가 놀랄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국도 에릭에게 기대한 바가 컸습니다. 그런데 에릭이 자신의 신앙의 문제로 100m를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올림픽 위원회에 건의를 해서 100m를 포기하고 400m로 자신의 종목을 바꾸었습니다. 짧은 거리, 짧은 시간동안 최대의 순발력과 최대의 운동력을 발휘해야 하는 단거리 선수에게 400m를 뛰라는 것은 결국 모든 경기를 포기하란 의미와도 같습니다. 이 사실이 영국 신문에 기사화 되었고, 에릭은 그 사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앙이냐? 명예냐? 영국과 전 세계에 이 청년의 무모한 결단에 대한 기사가 돌았습니다. 영국에서도 비난이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비아냥거렸습니다. 영국의 왕자가 와서 에릭을 달래 보지만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왕자가 달래도 변하지 않는 에릭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난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에릭의 누나는 에릭이 올림픽 대표선수로 프랑스에 간다고 했을 때 못마땅하게 여기며 만류했습니다.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육상선수로 뛰면서 금메달을 딸 생각을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에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나, 난 하나님을 위해서 뛰는 거야, 난 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걸 느껴" 누나는 그 말이 허풍인 줄 알았지만 동생이 모든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주일 경기를 포기한 것을 보고 동생의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돌아왔습니다. 400m 트렉에서 몸을 풀고 있던 에릭에게 누나가 쪽지 한 장을 보냅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겠다." 사무엘 상 2장30절의 말씀입니다. 누나가 동생이 주일 경기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프랑스로 뒤따라 온 것입니다. 그 400미터 결승 경기 관람석에서 쪽지를 보낸 것입니다.

에릭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지만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쓰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고통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하나님께 드리며 자기 자신의 달란트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결국 에릭은 4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누나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영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세상이 난리가 났습니다. 드디어 자신을 부인하고 고통을 선택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명예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도 새로운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에릭은 그 올림픽 이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지지에도 불구하고 육상선수로서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전쟁이 벌어지니 곧 귀국하라는 영국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다가 세계 2차 대전 말기에 일본 수용소에서 하늘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금메달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부인하며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국에서 뿐만이 아닌 중국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살면 손해 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더 사랑하시고 더 높여주십니다.

1924년 에릭이 당시에 올림픽 경기에서 했던 일을 배경으로 “불의 전차”라는 스포츠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분 오스카상을 받은 유명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가지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1.예수님은 참 빛이 되신 분이십니다.

2.예수님은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되십니다.

3.빛 되신 예수님을 모신 자는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됩니다. 할렐루야!

 

주님과 연합된 성도 사56:1-8, 15:1-11

 

어느 선교사가 태국 항공기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튜어디스에게 전도를 할 생각으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스튜어디스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선교사가 한참동안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스튜어디스가 돌아와 하는 말 "아무리 승객 명단을 뒤져봐도 그런 분은 이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습니다."하더랍니다. 세상에는 구주이신 주님을 모른 채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4가지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소속감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어디에 소속되어야 행복할 수 있는가를 본능처럼 알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한계성입니다. 나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 있으며, 그 한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유일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유일성의 감각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를 존중하며 살게 됩니다. 넷째는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감각을 바르게 가질 때 값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른 감각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연합되어 그분을 기뻐하고 또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은 우리를 승리의 포구, 행복의 포구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구약 사56:1-8, 신약 요15:1-11의 말씀을 중심으로 주님과 연합된 성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과의 연합은 주님과 동질화됨을 의미합니다.

 

1)사람은 누구와 연합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에덴동산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부족함이 없는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극은 사단의 미혹을 받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과의 연합 대신 거짓의 아비요, 도적이요, 강도인 사단과 연합을 도모함으로 발단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 만나기가 두려워 지고 주님 보기를 회피하게 됩니다. 결국 에덴에서 축출되게 됩니다. 사단이 주는 온갖 쓴 뿌리와 저주와 고통이 그들의 가정과 인류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비극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과의 연합을 버리고 사단과 연합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름을 받아 열두 제자 중 하나가 되는 은총을 입은 사람이요, 주님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돈 전대를 맡은 사람이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주와 복음을 위해 특별한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영광을 얻은 자였지만 그를 미혹하는 사단과 결합함으로 주님을 은 삼십에 팔고, 저주 받은 운명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주님께 연합된 사람들과 사단과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생명 되시는 주님과 연합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주님과 연합을 위해서는 장애되는 요소를 과감히 제해야 합니다.

오늘 신약 본문 요15:2에 보면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했습니다과수원을 경영하는데 얼마나 많은 일손이 필요한지 겨울철을 제외하고 항상 바쁩니다. 그 일 중 하나가 가지치기입니다. 쓸모없는 가지를 가려 잘라 주는 일입니다. 그래야 튼튼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주님과 잘 연합하여 좋은 열매 맺으려면 내 안에 쓸모없는 것들을 잘라 주어야 합니다. 교만이라는 가지를 잘라 주어야 합니다. 사단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이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교만의 마음을 부추겨 넘어지게 했습니다. 유다에게도 그런 교만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사는 북쪽 갈릴리 출신의 다른 열한 제자와 달리 남쪽 가롯이라는 교육 여건이 좋은 도시 출신의 유다는 학력도 다르고 똑똑한 것이 그의 교만함이 되어 주님과 진정한 연합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뜻의 가지를 잘라야 합니다. 유다는 나름대로의 뜻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의 가르침과 하시는 일은 자기의 뜻과는 도무지 맞지가 않았습니다. 내 뜻 버리고 나의 주인이요, 왕이요, 복의 근원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주님의 뜻에 맞춰야 되는데 반대로 자기의 뜻대로 하려다 안 되니까 주님과 연합을 버리고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탐심과 정욕의 가지를 잘라 버려야 합니다. 사단은 하와 속에 있는 탐심을 부추겨 미혹했습니다. 3: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했습니다. 유다의 결정적인 약점은 물질에 대한 탐욕이었습니다. 그는 가끔 돈 전대에서 돈을 훔치기도 했고, 주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몽땅 부어드린 여인을 향해 책망한 것도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물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탐심에 눈이 어두워 주님까지 파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탐욕, 정욕, 명예 권세욕을 잘라버려야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나무에 벌레나 진드기가 잔뜩 붙으면 이파리가 시들면서 열매는커녕 꽃 도 피지 못합니다. 탐심이나 정욕은 벌레나 진드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깨끗이 제해야 합니다. 사단은 이러한 것들로 주님을 시험했지만 주님은 그러한 시험을 다 이기심으로 아버지께 연합된 순종의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연합을 훼방하는 모든 것들을 과감히 자르고 주님과 연합되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과 연합된 자는 주님 안에 거하여 삽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 주님과 연합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을 위해 전에 좋아하던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과감히 버렸습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자기 안에 꿈틀대는 옛사람의 성품을 죽이고 버리는 경건에 힘썼습니다.“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20)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내가 철저히 악에서 죽을 때 생명의 예수님께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이 접목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면 주님께서 우리 성품이 되시고 우리 생명이 되시고 우리 능력이 되십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고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도, 염려할 것도 없게 됩니다. 중국의 내지 선교를 한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의 간증에 의하면 영적으로 매우 곤고할 때에 영국에서 온 그의 누이의 편지에 오빠는 가지이므로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기만 하세요.’라는 내용을 보고 잠시 잃어버린 영성을 다시 회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듣다보면 깨끗한 심령으로 그 분 안에 머무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해집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마음과 생각과 뜻에 점점 동화되어 갑니다. 나무와 가지의 조직이 같아져 간다는 뜻입니다. 그 분의 영과 생명의 진액이 우리의 영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는 자신의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을 사모하는 일 밖에 할일이 없습니다. 성령의 내부수리를 거쳐 꿈틀거리는 권능이 나타납니다. 드디어 밖으로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열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 의의 평강한 열매, 빛의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 전도의 열매 등으로 나타납니다.

2.주님과 연합된 성도는 삶을 통해 주님을 드러냅니다.

 

1)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로 삽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긴다는 표시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을 온전히 지켜야 할까요? 안식일은 그냥 안식하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표지가 안식일이고 그날을 구별되게 지키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표지를 삼으셨을까요? 주님께 연합된 자들은 주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날입니다. 그러기에 그날을 구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 것을 하나님 것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신고로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첫날, 주일을 안식하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하는 그 개념은 똑같습니다. 2절과 6절에안식일을 더럽히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더럽힌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날을 더럽힌다는 말은 그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되게 그날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모르고 내 맘대로 그날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고 이날을 통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하며 살라고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날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날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이 누구를 위해 존재합니까? 주일을주님의 날로 만들지 못하고 내가 내 멋대로, 내 편리함대로 사용하는나의 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연합된 자라면 적어도 이날은 주님을 위한 날로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안식일을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에 하나가 그것입니다. 출애굽기 20: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하셨고, 심지어는 출애굽기 31:13~14절에는 이날을 표징으로 삼고 이날을 더럽히면 죽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연합된 자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가 주일을 자기의 사사로운 일을 하는 날로 만들지 않고 거룩히 지킬 줄 압니다.

 

2)악행을 버리고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하는 자로 삽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망할 것이고 그들은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타락 중에 가장 무서운 타락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이사야2:8~9절에서는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했습니다. 이스라엘 땅 전체가 우상이 가득하고 자기 손으로 지은 것을 공경하고 천한 자나 귀한 자나 가릴 것 없이 다 그 우상 앞에 절하는 모습을 보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 악행을 버려야 하나님과 연합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자식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세상 연락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세상 명예, 권세가 우상이 될 수 있고, 탐심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연합된 성도는 주님의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행실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주님 마음을 품고 선한 일에 부한 자가 될 때 주님은 기뻐하시고, 그 상을 반드시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놀부 마누라가 장에 갔습니다. 다들 놀부 마누라의 고약한 성질을 아는지라 슬슬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간 큰 거지 한 명이 놀부 마누라에게 오더니 "마님, 한 푼만 줍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술기가 발동한 놀부 마누라는 지나가던 똥개 한 마리를 잡아와서는 "네가 이 똥개에게 아버지라고 한번만 부른다면 내가 동전 한 닢을 주지" 라고 말했습니다. "한번 부르면 한 닢이라굽쇼? 그럼 열 번 부르면요?" "그럼 당연히 열 닢을 주지."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이 거지는 정말로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하고 열 번을 불렀습니다. 놀부 마누라는 배꼽이 빠져라 웃고는 약속대로 동전 열 닢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거지는 더욱더 목청을 돋우어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해요, 어머니!!" 남을 골려주려던 놀부 마누라는 졸지에 똥개 마누라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연합된 자답게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것으로 심고, 선한 열매를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언약을 믿고 소중히 여기며 삽니다.

56:4절 하반 절에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6절 하반 절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이방인들을 언급하십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정상인이든 장애인이든, 환경이 어떤 환경이든, 출신지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든 언약을 붙잡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6절 하반 절~7절을 보세요.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언약을 믿고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었으나 불신앙의 사람들은 언약을 우습게 여기고 소홀히 여기다가 망했습니다. 언약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께 순종했던 노아와 언약을 우습게 여긴 그 시대 사람들을 보십시오. 언약을 소중히 여겼던 아브라함과 롯의 모습과 언약을 농담으로 여기거나 무시한 소돔 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 입니까? 언약을 소중히 여긴 야곱은 조부 아브라함과 부친 이삭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언약을 대수롭게 여긴 에서는 언약의 복을 동생에게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의심치 않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언약을 믿지 못했던 자들은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언약을 믿지 않았을 때는 십자가 사건 후에 크게 낙담하여 다시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다가 성령 충만을 받고 충성스런 사명 자들이 되었습니다. 계시록에서 주님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3:8) 했습니다. 주님께 연합된 자들은 이처럼 언약을 믿고 소중히 여기며 삽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약속하신 언약대로 복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주님과 연합된 자는 주님이 보장해 주십니다.

 

1)하나님의 집에서 영영히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주님과 연합된 자들은 그가 이방인이든 장애인이든 차별치 않으시고 누구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의 은혜로 믿음 안에서 다 존귀한 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주님을 믿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큰항아리 속에 물이 가득 차 있는데 그 물 속에 컵이 들어 있습니다. 컵이 물속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물이 컵 속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컵이 물속에 있는 동시에 물이 컵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내 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동적으로 주님이 가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참으로 복 받은 자들입니다. 14:13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했습니다. 주와 연합된 성도의 죽음은 곧 예수님께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앞서간 성도들과 천군 천사들과 더불어, 함께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와 연합된 자들의 죽음은 신앙 공동체에게는 큰 손실이 되지만 자신에게 오히려 영광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집에서 영영한 기쁨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56:7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와 연합한 자들을 기쁘게 해주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에서 기쁘게 한다는 말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15: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했습니다.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거하는 기쁨은 세상에서 얻는 순간적인 기쁨과 다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주는 기쁨과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금세 다시 없어지는 순간적인 것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는 참 기쁨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살았던 바울은 큰 박해를 받으면서도,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이러한 신령한 기쁨이 우리 안에도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3)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자가 됩니다.

56:7 “--그들의 번제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했습니다.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가 귀한 것은 하나님이 그 예배를 기꺼이 받으시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가인의 예배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책망했던 범죄 하면서 형식적으로 예배드렸던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처럼 받지 않는 예배는 드리나마나한 가치 없는 예배, 헛된 예배가 됩니다.

 

주님께 참으로 연합된 자는 예배를 드려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가 됩니다. 성결한 삶을 살기를 힘씁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며 말씀을 따라 말씀에 붙잡혀 살기를 힘씁니다.

영국의 유명한 조지 뮬러 목사는 독일 사람으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 공부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뮬러 목사는 평소 많은 고아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며 공부했는데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68:5)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뮬러 목사의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바로 뮬러 목사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뮬러 목사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라면 나는 고아들을 돌보는 총무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고아를 돌보는 사명을 주셨으니 길도 열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고 결국 고아원을 세우는 길을 얻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면 항상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보실 때 나의 기뻐하는 종아!, 나의 사랑하는 종아!, 내 마음에 합한 종아!, 내 마음을 시원케 하는 종아!, 내가 존귀하게 여기는 종아!,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인정해 주시고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의 은총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 합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주님과 동질화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와 연합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됩니다. *주님과의 연합을 위해서는 장애되는 요소를 과감히 제거해야 됩니다. *주님과 연합된 자는 주님 안에 거하여 삽니다.

 

주님과 연합된 성도는 삶속에서 주님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로 삽니다. *악행을 버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로 삽니다. *언약을 믿고 소중히 여기며 삽니다.

 

주님과 연합된 성도는 주님이 보장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영영히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영영한 기쁨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나 사단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주님께 연합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스스로 종이 된 자유자 요8:31-44, 벧전1:11-2

 

어느 교회 권사님의 취미는 강아지(해피)를 기르는 것이었습니다. 강아지를 위하여 꾸미고, 다듬어 예쁘게 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귀를 보라색으로 염색을 하고, 발톱을 빨간색으로 메뉴퀴어 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강아지를 위해 돈 쓰는 것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강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온 동네를 밤새도록 찾아다닙니다. 결국 못 찾았습니다. 목사님께 전화해서 그 강아지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구역 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강아지를 찾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온 마음에 설움이 가득차서 오열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강아지를 찾게 해 주세요 한참을 울고 기도 했는데, 그만 온 밤을 꼬박 새워서 철야 기도를 한 것입니다. 새벽 기도회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다 잠간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그 권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개 권사야! 너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애통하여 보았느냐? 너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밤새도록 찾아 본 일이 있느냐? 그 영혼을 위해 밤새도록 울어 본 일이 있느냐? 너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물질을 아낌없이 내 놓았느냐? 없는데요. “너는 개 권사다.” 그러더랍니다.

 

성도다운 모습을 지니고 살아야 주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되고, 자신에게 복이 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스스로 종이 된 자유자라는 제목으로 참 신앙인의 모습이 무엇인지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1)진리를 알아야 자유 함을 받습니다.

 

본문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는데, 진리라는 말은 알레데이아인데 “..하지 않는다.”숨기다라는 두 단어가 합해져서 만들어졌습니다. “숨기지 않는다.” 즉 진실, 사실, 참 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에 의해서 속박을 당하고 불행해졌다는 말입니다. 진리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성경말씀입니다. 또한 유일하신 진리로 우리의 영원한 속죄 주요, 구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속박, 율법과 사단의 속박, 사망에 대한 두려움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분임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말은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고, 체험하며 믿음으로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속적으로 동행할 때 주어집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 우리 선조들은 미신의 얽매임 속에 살았습니다. 못도 함부로 박을 수 없었고 여행도 아무 날이나 할 수 없었습니다. 이사 가는 날도, 이사가 살아야 할 집의 방향도 정해져 있었고 결혼 날짜도, 결혼해야 할 상대방도 사주팔자로 계산해야 했습니다. 얽어매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제는 만유를 지으시고 섭리하시고, 심판하실 예수님의 인도만 따르면 됩니다.

 

2)죄의 정죄에서 벗어나야 자유 함을 받습니다.

 

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영접하여 생명 얻는 회개를 한자들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과거의 죄와 현제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자범 죄를 짓고 수시로 회개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보시고 너는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얻는 칭의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데 누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죄에서 자유 함을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방종에 방임하여 살지 않습니다. 날마다 옛사람이 죽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 모습이 바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요, 그 과정이 바로 성화입니다.

 

3)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살므로 자유자가 됩니다.

 

본문 요8: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주 안에 거할 때 영원한 하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성도의 참 소망이 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15:55-57에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죽음 이후에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늘 처소가 있음을 알고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삽니다. 14: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고백하며 삽니다. 이 소망을 가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 나고,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참 진리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 하는 백성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는 주님이 주신 지혜로 바른 인생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1)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나그네 된 행인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서신서 본문 벧전2:11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했습니다. “나그네란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는 비록 외국에서 집을 세내어 꽤 오래 산다 할지라도 그곳의 영구거주자가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법적 권리나 지위가 없습니다. 그는 낯선 땅에 거하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입니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바는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요, 유랑 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가는 것인데, 오늘에 볼 때에 미래라는 것도 얼마 있지 않아 현재가 되고, 현재도 곧 과거가 되고 마는 길가는 행인 같은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나그네만이 아니요, 행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의 거주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하늘 시민이요, 땅에 속한 이 세상의 시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적인 표준과 방법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과 천국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2)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자로 삽니다. 믿는 자의 고향은 천국입니다. 믿는 자는 세상과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세상의 관습과 생활방식대로 살지 않고 천국의 방식대로 삽니다. 그러한 삶은 앞서간 믿음의 조상들이 잘 보여 주었습니다. 11:8-11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이 땅에 살 때에 세상에 욕심을 두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믿음을 따라 죽었으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음의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며 환영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위해 히11: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믿음으로 잘 준비하는 삶을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를 소망합니다.

 

3)영혼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삽니다. “육체의 정욕이 란 육체의 악한 욕망, 충동. 정욕. 색욕 등을 의미합니다. 이는 육체에 관한 것들에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육체가 어떤 것을 소유하기를 열렬하고 간절하게 바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강하고 통제가 어려우며, 자주 의지에 거스려 행하려 합니다. 5:19-21에 육체의 열매에 대해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간음,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살인, 술 취함, 방탕함 등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영혼을 거스려 싸웁니다. 육체는 그 속에 비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충동과 정욕을 담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억제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손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이 영혼의 자유를 속박하고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습니다.

 

야생마를 다루는 것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야생마를 자연 그대로 방치하여 제멋대로 날뛰며 살게 하는 방법입니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원래 행동하던 것처럼 그냥 방치하여 키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야생마의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야생마를 아예 죽여 없애는 방법입니다. 한마디로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야생마에게 멍에를 씌운 후 훈련시키는 방법입니다. 말의 입에 멍에를 씌운 후 교육하여 사람이 원하는 데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솔직히 야생마를 길들이는 방법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무관심이거나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야생마와 같은 정욕과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욕을 제멋대로 방치하면 그 사람은 악인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욕심과 정욕을 아예 없애려고 하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고, 폐인이 됩니다. 아무리 힘센 소와 말도 멍에를 메우면 꼼짝 못하고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기독교는 야생마에게 멍에를 씌우고 훈련시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정욕에 예수의 멍에를 씌우고 경건하게 살면 주님의 영광스런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고,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3.성도는 주님 위해 스스로 종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1)주님은 종의 모습이 되어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죄인 괴수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로운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사53장에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 함을 받은 성도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잘 먹고, 잘 입고, 오래 사는 것이 아름다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주님을 본받아 기꺼이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본문 벧전2:21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주님위해 종으로 드리는 삶은 주님을 본받는 영광스런 삶입니다.

 

2)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는 나를 위해 생명까지 희생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 것을 잘 압니다. 이 사랑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지만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입으면서도 합당하게 여기며 기쁨으로 감내합니다. 성도는 이익과 손해에 대하여 얽매일 것이 없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어도 감사하고 저렇게 되어도 감사하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3)주님의 종으로 사는 삶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본문 16-17절에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했습니다.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것은 탐욕이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자유로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섬김으로 뭇 사람들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빌1:29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 당연히 고난도 따를 줄 알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골 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감옥에 갈 때 간수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미우시죠? 당신에게 고통을 주는데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때 킹 목사는 대답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들이 아무리 나를 투옥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무리 나를 위협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을 협박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사랑을 당신들은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그의 사랑이 인종차별의 벽까지 무너뜨린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에는 엄청난 상급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기꺼이 주님의 종으로 자처하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1)진리를 알아야 자유 함을 받습니다.

2)죄의 정죄에서 벗어나야 자유 함을 받습니다.

3)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살므로 자유자가 됩니다.

 

.성도는 주님이 주신 지혜로 바른 인생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1)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나그네 된 행인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2)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자로 삽니다.

3)영혼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삽니다.

 

.성도는 주님 위해 스스로 종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1)주님은 종의 모습이 되어 본이 되셨습니다.

2)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3)주님의 종으로 사는 삶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참 진리가 되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 함을 받게 된 성도는 개 권사처럼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본 받아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처하며 주님의 발자취 따라 살다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가장 귀중한 만남 요135-42

지난 329일 한국일보 사회면에 "한 여자 10년 등친 거머리"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어느 간호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간호사로 병원에서 근무를 했는데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 어느날 근무를 하는데 한 청년이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왔습니다. 준수하게 생긴 이 청년은 간호사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자신은 서울대학교 법대 나와 1차 시험에 합격한 고시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의 타고난 외모와 달변에 끌린 그녀는 그때부터 그 청년과 꿈 같은 연인생활을 시작했습니다.“고시만 붙으면 이까짓 돈이 문제냐, 판검사가 되면 결혼해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아보자는 맹세를 믿고 박봉을 쪼개 꼬박 꼬박 생활비를 대었습니다. 좋은 혼처 다 뿌리치고 10년동안 뒷바라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기꾼이었습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림까지 차리고, 고시 준비하라 준 돈을 생활비와 유흥비로 탕진하였습니다. 여대생 두 명에게도 똑같은 수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녀는 6000만원을 보상하라고 고소했지만 이미 마음도 몸도 인생도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젊은날 잘못된 만남은 인생은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배우자 뿐 아닙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부모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따라 대통령의 아들도 될 수 있고, 죄수의 딸도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친구, 어떤 스승, 어떤 책, 어떤 직업, 어떤 지도자, 어떤 교회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행복해 질 수도, 불행해 질 수도 있습니다. 보다 좋은 인생살이를 할 수도 있고 힘겨운 인생살이도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빛의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만남이 어떻했든지 일시에 불행한 만남을 반전시키는 만남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귀한 만남입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어떤 만남을 통하여 지옥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 천국같은 삶으로 변화됩니다. 아무리 괴로운 만남도, 아무리 슬픈 만남도, 아무리 풀리지 않는 만남도 예수님을 만나면 괴로움이 변하여 기쁨이되고 슬픔이 변하여 환호가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면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면 용서받고 용서하면서 살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진정 만나기만 하면 모든 불행한 만남을 일거에 변화시켜 버립니다. 아무리 부모를 잘못 만나 가난하게 산다고 하여도 예수님 만나면 일시에 천국의 부자 됩니다.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영적 부자가 됩니다. 아무리 좋지 못한 친구를 만나 방황한다하여도 예수님 만나면 희망찬 인생길이 펼쳐집니다. 아무리 좋지 못한 배우자를 만났다해도 예수님 만나면 배우자를 사랑하게 되고 가정이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진정 예수님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만남은 우리 예수님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가난이 인생을 파멸로 이끌지 못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질병이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어떤 악조건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행복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만남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 946장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 예수 보다 더좋은 친구없네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 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많은 나의 참 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우리나라 선교 초기 교인인 서상륜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13살 때 부모님을 여위었습니다. 좋은 부모 만나지 못했습니다. 가난합니다. 고아가 된 이 사람은 살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성에서 나는 고려인삼을 사 가지고 만주에 가서 팔았습니다. 인삼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장사를 하다 31살에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열이 오르고 쓰러지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돈있을 때 그 좋아하던 사람들 다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코트랜드에서 파송 된 메킨타이어 선교사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습니다. 죽어가는 그를 살렸습니다. 서상륜에게는 메킨타이어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가장 고귀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일년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이제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질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번역인 로스 성경을 로스 선교사님과 함께 번역을 합니다. 황해도 장면에 있는 송천(솔내, 소래)에 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합니다.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가 세워집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서울에 새문안 교회를 새웁니다. 처음 14명이 세례를 받습니다. 모두 서상륜이 전도한 사람들입니다. 황해도, 평안도 할 것 없이 부산까지라도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평생 평신도로 살며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집을 헌납하여 교회를 지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선교사님께서 그가 헌납한 집과 똑같은 기와집을 노년에 사주었다고도 합니다. 예수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가정이 바뀝니다. 사회가 바뀝니다.

 

왜 예수 만나는 것이 그렇게 가장 고귀한 만남입니까?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36,41)

대통령만 만나도 좋아하고 대통령 아들이 되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사장 아버지만 만나도, 대기업 아들 만나면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은 보통 만남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분을 만났을 때 그가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안드레의 고백을 보십시오(41). 메시야이십니다. 예언된 메시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 전부를 맡기고 말씀을 듣고 좇을 만한 분입니다(35-37). 스승 요한의 말을 듣은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37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듣고(에쿠산)"라는 말은 단순한 들음이 아니라 듣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동의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좇았습니다. 듣고 좇아간 결과가 무엇입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세주, 그리스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듣고 좇아가면 메시아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분이시고 진정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38년 동안 절망하면 병이 든자도 예수님을 만나면 그 질병에서 벗어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장례 행렬이 멈춥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면 용서를 받습니다. 도끼로 인간을 죽인 살인만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절망과 실패 가운데 자살을 결심한 사람도 예수님 만나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한센씨병 환자가, 혈루증 앓는 여인이, 앉은 뱅이가, 나인성 과부가 예수님 만나 새롭게 됩니다. 행복해집니다. 병든 아들, 죽은 아들 만나 지옥같은 인생살이었는데 천국으로 화하였습니다. 세상에 누구를 만난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는 나의 구세주. 예수 예수)

인생의 모든 풍랑를 단번에 잠재울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설교만 듣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성경공부만 하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봉사만 전도만 친교만 하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 만나지 못하면 헛된 것입니다. 예수 만나 봉사하고 전도하고 친교하여야 샘솟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구역 예배를 드리러 갔다고 합니다. 구역예배를 마치고 난 후에 목사님께 가지 않고 있으니까 구역원들이 "목사님, 바쁘실 텐데 가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역예배를 마치고 고스톱 판이 벌이기 위해서라고 했답니다. 이유는 처음 나온 교인들에게 취미를 붙여 주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 글을 보니까 저녁에 부부가 함께 모여 구역예배를 드리게 했다고 합니다. 잘 모이더니 어느날 부터인가 여자들은 나오지 말고 남자들끼리만 모이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 예배 드리고 이부에는 술판을 벌이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나를 치료하시는 예수님, 나를 도우시는 예수님, 나를 위로하시는 예수님, 부활하셔서 지금도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어떤 경우든 우리를 받아 주시고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38-39)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좇아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랍비여라고 합니다. 아람어로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말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사장인데 과장님이라고 불르면, 대통령인데 아저씨라고 부르면, 집에 갔는데 자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몇 년전 우리 교회 어린이 중에서 저를 보면 아저씨 하였습니다. 감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줌마는 아니니까 아저씨라고 불러도 별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성도님이 저를 교회에서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저씨라고 부르면 그것 듣기에 거북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선생님 합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그들을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어떤 경우든 우리를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하여 무관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좇아오는 제자들을 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데아오마이)"라는 말은 특별이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물어봅니까? "무엇을 구하느냐?" 이미 그들의 소원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만족 시켜 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신분도 몰랐고 행하고자 하는 일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어디 계시냐고 묻는 그들에게 와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나를 따라 오면 장차 그들이 찾는 궁극적인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명확한 약속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시몬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아십니다. 요한의 아들인 것을 아십니다. 시몬이라고 말합니다. 시므온 말의 본래의 뜻은 듣는다는 뜻입니다. 좋게 말하면 잘 듣는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귀가 얇은 사람입니다. 이했다 저랬다하는 사람 쉽게 바꾸는 사람, 변덕이 심한 사람,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우리도 귀가 얇습니다. 누가 한약 좋다하면 한약 먹고 양약 좋다하면 양약 먹는 사람들입니다. 가치관도, 세계관도, 인생관도, 내세관도 뚜렷하지 못합니다. 쉽게 흔들립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의 연한점 다 아시면서도 받아 줍니다. 그리고 버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배신합니다. 저주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베드로 버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사용하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첫날부터 밤새 같이 있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10시는 유대 시간법에 따르면 오후 4시이지만 로마 시간 법에 따르면 오전 10시입니다. 아마 오전 열시였을 것입니다. "그날 함께 거하니" 볼 때 밤을 같이 세웟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함께 한 후 메시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저 듣고 좇아감으로 되어지는 일도 있지만 우리의 성숙이나 능력있는 사역, 인격과 습관의 변화 등은 함께 있을 때 받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찬송가 449장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세상에서 이런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분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도둑과 함께 하면 잘해도 도둑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주님의 위대한 작품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쓸모 없는 돌같아도 예술가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헐값인 악기도 위대한 음악가가 붙들면 최고급의 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이 보잘 것 없는 것같지만 태양과 만나면 7곱 색깔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 . . . . . . 도가 하나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위대한 음악가의 손에 들어가면 감미로운 음악이 출산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인격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받아 주시고 함께하시는 예수님 만나면 안드레가 한시대 쓰임받았듯이 요한이, 베드로가 한시대 쓰임받았듯이 우리 인생에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은 누군가에게 소개해 주고 싶고 맡기고 싶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40-42).

그분들이 인생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소개해 주시십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따르더니 좀 좋은 사람 나타났다고 예수님을 따라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소개하면 내가 데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기 때문에 훨씬 더 값진 인생이 펼쳐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과감하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안드레를 보십시오. 다음날 오전 10시가 되어 그는 바로 누구에게 갔습니까? 형제 베드로에게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분입니다. 나와 가장 이해관계가 밀접한 분에게 소개하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만난 메시야는 금광이나 다이아 몬드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위대한 것을 만난 것입니다. 성격 급한 베드로는 즉각 예수님을 찾아 갑니다. 우리가 사람을 예수님께 소개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시몬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현재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잠재력, 그의 가능성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름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장차 베드로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충동적인 시몬이 요지 부동한 게바(아람어) 베드로(헬라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훈련시켜 시대를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사용하십니다. 어부입니다. 그저 어부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 세상을 변화시킨 사람, 세상에 참 행복의 길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가 예수를 소개하여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그의 인생이 변화됩니다. 이 얼마나 소중한 만남입니까?

구 소련의 의사 콘필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범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의사를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에 한 중환자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죽음이 인생의 종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생의 소망을 품고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지십시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의 간곡한 전도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후 닥터 콘필드는 어느 한 암환자를 수술해주면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콘필드는 교도소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콘필드에게 수술을 받은 암환자는 극적으로 회생하여 독실한 크리스쳔이 되었습니다. 이 암환자의 이름이 바로 알렉산드르 이사비치 솔제니친입니다. 세계인이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계가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면 인생이 바뀝니다. 가정이, 세상이 직장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행복한 세상,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자 소아시아와 유럽이 복음화되었고, 이레니우스가 예수님을 만나자 프랑스가 복음화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건너온 보니페이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독일이 기독교 나라가 되었고 패트릭이라는 16살 난 포로 소년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아일랜드가 복음화되었고, 언더우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한국이 복음화되고, 아도니람 저드슨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미얀마가, 허드슨 테일러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중국이 복음화되었던 것입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했는데 그것은 그 어머니 헬레나의 신앙적 감화력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예수님을 만나 이름 모를 한 하녀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름 모를 하인도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인생이야 말로 가장 값진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 중에 가장 귀중한 만남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그랬듯이 안드레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4:27)"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6:22)"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8:20)"

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나고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 (요한복음 47-14)

우리의 믿음 생활을 두 가지 큰 형태로 구분해 보게 됩니다.

하나는 물을 길러 오는 형태의 신앙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속에서 솟아나는 형태의 신앙생활입니다.

물을 길러 오는 신앙생활은 항상 다시 갈증을 느끼지만, 속에서 솟아나는 신앙생활은 항상 구원의 감격 속에서 충만한 생활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게 됩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세상에서 물을 길러 오는 신앙생활은 피곤할 뿐입니다.

 

1. 수가성의 여인은 타성화 된 모든 신앙생활인의 모형입니다.

성서적 배경을 보면, 특히 유대인에게 우물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을 짓기 전에 우물부터 파야 했습니다. 그만큼 물이 귀한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유목민들에게 우물은 생명 줄과 같았습니다.

구약을 보면 우물 때문에 서로 다투고 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물 때문에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갈라서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여러 번 우물을 양보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수가성의 우물도 야곱이 판 우물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시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여인은 남들과 어울릴 수 없는 여자이었습니다.

본시 우물가란 모든 동네의 여인들이 만나서 이런 저런 소문을 듣게되는 곳입니다. 결혼을 5번씩 한 이 여인은 항상 동네 사람들로부터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독하고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던 이 날도 남의 시선을 피하여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어쩌면 그의 영혼 깊이 갈망하는 무엇이 컸던 여자였습니다.

 

주님과의 몇 마디 대화 중에 벌써 이 여자는 주님을 선지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질문이 예배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영적 갈급함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현실에서는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영적 의미에서 오늘 감동 없이 믿는 우리들의 모습이요, 영적 만족을 찾지 못하고 있는 타성화 된 신앙인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2. 사람을 의식하며 물 길러 온 이 여인에게서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께 향한 신앙심은 있었으나 사람이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길을 피하여 남들이 없는 사이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자신의 약점이 들어 날까 늘 불안 해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마시고 살아야 했으니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오늘도 이런 부류의 신자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감동도 없으면서 매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면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껏 믿음의 생활을 하느라고 하면서도 속에서부터 샘솟는 기쁨도 없이, 언제나 갈 한 심령으로 있는 상태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동 없이 믿는 생활이기에 교회의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그래서 통 교인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사도 신경은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교인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서 사람을 피해 버립니다.

 

그러니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하게 됩니다.

몇 년씩 교회에 나와서도 자기를 들어내질 않습니다. 마지못해 직분을 감당합니다. 억지로 봉사하고, 기쁨 없이 찬송도 부릅니다

물 길러 오는 일은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물을 길어 와야만 하였습니다.

주일이 되어 교회 나오는 것이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와야 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 수가성의 여인과 같은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이 여자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물 길러 오는 신앙생활은 힘만 듭니다.

물을 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주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갈 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런 물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런 물이 있으면 내게 주어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렇게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지겹습니다. 우선 사람이 싫습니다. 교인들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인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인들과는 교제를 멀리하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가까이 지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수가성의 여인 같은 존재가 아닌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3. 참된 신앙생활이란 속에서부터 샘솟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갈 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속에서 샘솟는 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게 합니다.

다시 갈 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변화시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내 힘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갈증을 느낍니다.

내 능력과 내 지식과 내 의지로 믿음생활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니 힘이 들고, 외롭고, 사람이 싫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매일 물 길러 오는 신앙생활이 있는가 하면, 속에서 샘솟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내고 있습니까?

성령 없이 믿는 신앙생활과 성령 충만함으로 믿는 신앙생활입니다.

성령 없이 지식으로 믿는 신앙, 성령의 체험이 없이 귀로 듣고 믿는 신앙,

성령의 감화감동을 느끼지 못하면서 그저 오랫동안 믿고 있는 신앙,

그런 신앙생활에서는 변화란 없습니다. 획기적인 자기 혁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제직 세미나를 하고, 청지기직 수련회를 해도 변화되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무리 수 십년 강단에서 외치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가정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물을 길러 와야 하듯이 감격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속에서 샘솟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힘으로 이끌림 받는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감화감동 하심이 모든 성도들 위에 임했을 때, 이제는 물을 길어 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샘물과 같은 성령의 힘으로 가만있지를 못했습니다.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저들은 이제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폭포수 같이 용 솟는 믿음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씀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결코 내 의지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들이 살아나듯이, 뼈들이 움직이듯이, 큰 군대가 되어 일어나듯이 성령의 힘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생활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과의 대화에서 이 여인처럼 진실로 찔리는 무엇이 느껴져야 합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였을 때 이 여자는 솔직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사실 네가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동거하는 남자도 남편은 아니고 그저 사는 것뿐이라고 지적 받았을 때 이 여자는 주님의 말씀에 거꾸러졌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때때로 나의 죄악의 비밀을 지적해 줍니다.

<말씀>은 숨겨놓은 비밀을 들추어냅니다.

<말씀> 앞에 정직해져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들으면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몇 십년, 아니 대를 이어 모태 신앙이라도 그것은 물 길러 오는 신앙생활이지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은 아닙니다.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선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말씀>을 사모합니다. 주일을 기다립니다. -멘이 절로 나옵니다.

찬송 부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속에서부터 우러나는 감격과 힘찬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우물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선 사람을 싫어합니다. 교인들을 피합니다. 목사를 싫어합니다. 교역자들을 멀리합니다. 자기 주장만 내 세웁니다.

처음에 이 여자가 예수님께 향한 태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남자로서 어찌 사마리아인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구하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요즘도 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속으로 핀잔을 주는 심령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물 길러 오는 신앙생활입니다.

속에서 샘솟는 믿음이 되어야 전도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희생도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이 속에서 샘솟는 믿음으로 전환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좀 노력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구도자(求道者)의 심령을 가지고 기도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벽 기도회와 수요 기도회에도 빠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육체의 연습도 약간의 유익이 있듯이 영혼을 위하여 정진하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게 될 확률이 많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1세기는 과학첨단 기술이 어느 때보다 발전하리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생명공학 분야가 최첨단을 걷는 공학이 될 것이라고들 합니다.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체의 부속을 갈아 끼운다 해도 고물 차는 고물 차일 뿐, 새 것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새 것이 되려면 주안에서 성령의 용광로에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서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우리 모두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도록 성령체험의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 중에서 용서하는 것 보다 더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용서란 틀림없이 잘못을 범한 쪽에서 용서를 구할 때 베풀어주는 관용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베드로에 대한 용서는 그런 것과 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맹세하면서,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부인했으니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괘씸한 일입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한번의 그런 추궁도 없이 도리어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했던 제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같은 말을 세 번씩 반복하여 물었습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이 세 번 물은 것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한 것을 다시 회복 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1. 주님은 자기를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지 못했던 제자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자기를 맹세하며 부인했던 제자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오늘 이 질문은 자기를 저주하면서 까지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자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묻는 질문이기도합니다. 
우리도 몇 번씩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존재들이 아니겠습니까? 
정치적 위협 앞에서, 아니면 경제적 위기 앞에서, 세상의 출세와 명예의 이해 관계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존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와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질문은 그렇게 가볍게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의 성숙도를 묻는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하지 아니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속에 담긴 뜻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성숙 단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인가를 살펴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2. 주님을 대하는 신앙의 단계를 보면 몇 가지 단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보면서 이 신앙의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먼저 '본토, 일가 친족 네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첫 단계는 <떠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뜻은 구별시킴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던 그런 자리에서 구별시켜 떠나게 합니다. 
구습을 좇아 행하던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단계가 믿음의 첫 단계입니다. 
     
EX: 그래서 옛날에 선교사들이 세례 문답을 할 때 물었던 질문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떠날 자리에서 떠났는가를 확인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일을 다 없이 했습니까? 
단지들을 다 버렸는가? 
술, 담배 하던 일을 다 끊었는가? 
놀음하던 일을 다 끊었습니까? 
이중생활 두 집 살림하던 일을 다 그만 두었는 가? 등등... 
모두 떠나야 할 자리에서 떠났는가를 물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첫 출발은 떠나는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2) 다음 단계는 따라가는 단계입니다. 말씀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실은 지금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사를 들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따라 순종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그렇게 편안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의심도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는가?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가는 생활입니다.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등이 심합니까? 
때로는 의심도 생깁니다. 
때로는 괴롭기도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는 생활이 그렇게 편한 삶은 아닙니다. 
그래도 순종하면서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대부분 아마 이 단계가 제일 많은 단계이라고 봅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드리는 단계입니다. 
아브라함은 고민하면서 모리아 산에 올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헌신이라고 합니다. 
헌신이란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헌신하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단계를 보면, 
① 떠나는 단계, 
② 따르는 단계, 
③ 그리고 드리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베드로에게 물은 질문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베드로의 신앙의 성숙의 단계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이 그저 좋아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가 좋아서, 목사님이 좋아서, 성가대가 좋아서 이렇게 무엇인가 좋아서 예수를 따르는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즉, 그런 신앙을 좋아하는 단계의 신앙이란 말입니다. 
EX: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좋아해서 결혼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자기 나 좋아해?" 그렇게 묻습니다. 
상대방이 그저 좋아서 하는 결혼이 있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감정이 없으면 어떻게 결혼이 성립되겠습니까 마는... 
결혼이란 것을 좋아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아서 교회에 나오고, 좋아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고, 좋아서 교회 일에 참여도 해봅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좋아서 했던 결혼이기에 싫어지면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좋아서만 예수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기쁠때나 슬플때나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 참 신앙생활입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이 언제나 도와달라고만 하는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결혼 생활이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대하여 언제나 도와만 달라고 한다면 그것도 온전한 관계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에서 어려울 때 도와달라고 하고, 의지해 보려고 예수를 믿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뭐 나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모두 약한 존재들이요, 제한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전능자의 도움을 구하고 바라는 것이 나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단계를 보통 <믿음의 단계>라고 봅니다. 
대부분, 우리는 모두 도와 달라는 것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주님 앞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도와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러나 가장 깊어진 단계는 좋아하는 단계도 아니고, 무엇인가를 도와 달라는 단계도 아니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것을 내어 주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코 자기만을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주려는 행위입니다. 
이 주려는 것은 어떤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마음에서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귀한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능가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묻고 있습니다. 
믿고, 따르고 하는 그런 단계에서 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날 율법사가 어느 계명이 제일 큰 계명인가하고 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모든 계명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마22:36-40) 
     
3.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얼마나 믿느냐? 네가 나를 얼마나 따르느냐? 보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좋아하느냐?' 
'네가 나를 믿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주님이 좋아서만 주님을 따르는 단계는 아닌지? 
아직도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 마음에서만 따르는 단계는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한 단계 더 깊어진 사랑의 단계에 들어서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우리는 말씀의 법을 따라 살기를 무척이나 애씁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사람들만 의식하게 됩니다. 
누가 주님을 제일 가깝게 따르는 제자인가? 
누가 주님께 인정을 받는 제자인가? 
그래서 서로 시기하고 경쟁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서 베드로도 그렇게 주님께 말했었습니다. 
이런 단계의 신앙생활은 아직도 율법주의적 신앙의 단계입니다. 
어느 계명이 더 크냐고 물었던 율법사와 같은 단계의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주님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몬 베드로! 아직도 네가 다 
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 앞에 베드로는 이제 달라졌습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감히 주님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 
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내 속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바로 우리들도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① 사랑에는 내가 없어집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아직도 그 사랑은 깊어진 사랑은 아닙니다. 
② 사랑은 내 것이란 것도 없어집니다. 
내 것을 주장하는 한, 아직도 그 사랑은 깊어진 사랑은 아닙니다. 
③ 사랑은 자존심도 없어집니다. 
자존심이 살아있는 한 아직도 그 사랑은 깊어진 사랑은 아닙니다. 
④ 사랑은 오직 그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옥합을 깨어 향유를 주님 발에 부었던 여인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이 여인의 신앙은 주님 당시에 다른 사람들의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신앙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자신의 행위가 인정받기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값비싼 향유를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를 칭찬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들 곁에 있지만 이 여인은 내 죽음을 예비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일도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최대한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분명 성숙한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그렇게 고백하면서 삽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잘 믿는다고, 더 주님의 말씀대로 지키면서 산다고, 그렇게 말할 수야 있겠습니까?" 마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것을 주님이 아시지 아니합니까!" 
이런 단계에까지 이르는 신앙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부활의 권능 요20:1-10, 고전15:50-58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 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 권위를 만방에 널리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성도로서 개신교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길을 뻗쳐 칙령 거역 죄로 기독교 대표인 세오졸프를 체포하여 파리 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 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하였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신 성령 증거 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이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가던 루이 14세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 왕"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세우고 감옥으로 들어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그를 석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중요한 두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탄절이요, 또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절기요, 부활절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인간의 구속을 완성시킨 절기입니다. 즉, 성탄이 인류 구속의 시작이라면 부활절은 인류구속을 완성한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바로 깨닫고 믿는다면 이 두 절기의 축복과 은혜는 한없이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부활의 권능”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대적 자들과 사단의 권세를 이긴 권능입니다.

1)대적 자들과 사단의 세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무리들은 불법으로 재판하여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언도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로마 군병들에 의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될 때 저들은 승리자 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 한 후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을 것입니다. 백성을 미혹케 하던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자부하고 안심했을는지도 모릅니다.

2)예수님을 처형한 후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 후 부활하실 것을 여러 말씀으로 암시하고 예고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2:13-21).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찾아와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자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마 12:39-40). 그 외에도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마 16:31), 변화산 사건 후 갈릴리에서(마 17:22-23),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직전(마 20:17-19)에도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들이 마음에 걸려 그들은 가이사 황제의 인을 쳐 예수님의 무덤을 인봉하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로마 병정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3)그러나 생명 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절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올라갔다가 무덤 문이 열려 있고 시신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녀는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줄 알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절) 묻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 몇 차래 말씀하셨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무덤을 찾아 왔을 때 무덤이 비어 있고, 주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24:4 이하에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아 두려워하고 있을 때 두 천사가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2.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권능입니다.

1)주님의 부활은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그 사망 권세는 오늘까지도 죽음의 위력을 앞세워 거짓과 불의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거짓됨으로 오염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없도록 모두 거짓으로 물들여 졌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세력 앞에,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죄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기억도 하시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의롭다 인정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모든 죄와 죄책에서 해방을 받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작품 [부활]은 카츄사라는 한 여성의 기구한 일생을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카츄사는 귀족 네흘류도프의 집에 하녀로 있으면서, 네흘류도프의 의하여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유형 수가되어 시베리아로 갔습니다.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 들판에서 부활절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찾아온 네흘류도프와 함께 "주는 실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죄에 얽매였던 카츄사의 영혼이 자유함을 얻게 되고, 부활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부터의 해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에서 찾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죄의 세력을 부수고 살아나신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2)주님의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입니다.

사망 권세를 잡은 마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것은 그가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종노릇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오신 것과 관련하여 요일3:8절에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 한분의 희생으로 인류를 위한 속죄의 길,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생하는 길을 다 닥아 놓으신 것입니다.

프랑스 북쪽에 칼레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1347년 백년전쟁이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칼레는 영국군에 포위되었습니다. 다른 도시는 다 점령되었는데 칼레만 점령되지 못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프랑스군은 영국군에서 생명을 걸고 저항 해서 영국군에게 가장 골치 아픈 곳이었습니다. 영국군을 가장 괴롭힌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에 의하여 완전 포위되었습니다. 포위 된지 1년 정도 지나게 되니 이제 음식이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공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칼레는 이제 굶어 죽든지 항복하든지 둘 중에 하나 길을 선택하여야 하는 기로에 섰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며칠 버티기 힘든 최악 상황이어서 결국 백기를 걸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겠다!"고 해서 칼레 시는 영국 왕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다 할 테니 생명만은 헤치지 말아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영국왕은 "좋다. 그러면 시민들의 목숨은 보장하마. 그러나 그 동안 우리를 괴롭힌 대가는 받아라. 칼레 시민 대표 6명을 보내라. 그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벌은 끝낸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6명이 시민들을 대신해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였던 위스타슈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죽겠다고 나섰습니다. "칼레의 시민들이여, 5명만 더 나오라. 용기를 가지고." 이 때 시장도 나섰고, 칼레의 핵심 인물, 귀족들이 한 명 한 명 앞으로 모두 7명이 나왔습니다. 한 명을 빼야 하는데 서로 안 빠지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비를 뽑아서 한 명을 빼기로 하여 한 명이 뽑혔습니다. 그 사람은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으로 가서 “나를 제일 먼저 죽이십시오.” 에드워드 3세 영국왕은 이런 모습을 보고 모두를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나대신 죽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소리 없이 가장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너 대신 죽었으니 너는 생명을 얻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할렐루야!

3)부활은 시기와 미움과 증오를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무리들은 시기와 미움과 증오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온갖 모욕으로 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의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운명하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시기와 증오와 미움을 이긴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못난 제자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한 번도 책망하지 아니했습니다. 도리어 사랑을 확인하는 말씀만 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자기를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책임 추궁의 말 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만 반복해 물었습니다. 이 사랑 앞에 그는 녹아졌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녹아져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 앞에 예수 믿는 자들을 칼과 맹수와 권력으로 박해했던 로마도 녹아버렸습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젊은 집사 스데반이 돌로 몰매를 맞으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고, 그 포악한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 보좌 위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놀라운 사랑의 근원이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들어간 슈바이처나, 문등이 촌으로 들어간 다미엔이나, 그리고 미개한 지구촌의 곳곳마다 들어가 지금도 자신을 불태우는 많은 주의 종들을 보게 됩니다.

3.성도는 부활의 권능을 가진 자들입니다.

1)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만나주시고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과 동행해 주십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도움을 의뢰할 수 있고 필요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승리하는 삶을 위한 가장 완벽한 조건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승리가 바로 주님과의 동행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영적인 승리에 있어서 학벌이나 문벌, 재력 그리고 세속적인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내 삶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시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선결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2)부활의 권능을 가진 성도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 됩니다.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으므로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독이 제거된 독사와도 같아서 겉모양은 여전할지라도 전혀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 중에는 그를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약4:7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 할 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가르칩니다. 두려워 피할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적하면 그가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이 성취됨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는 우리를 해할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주의 약속을 불신하여 용기를 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마귀의 정체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빨과 발톱이 제거된 사자는 아무도 해롭게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가진 자답게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주님과 함께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것을 소망하며 삽니다.

살전 4: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고전15:53에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했습니다.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16-20) 부활하신 주님은 지상 명령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내 가족,부모,형제를 구원 해야합니다.북한 동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활의 권능은

☆.대적 자들과 사단의 권세를 이긴 권능입니다. *대적 자들과 사단의 세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후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그러나 생명 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권능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시기와 미움과 증오를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성도는 부활의 권능을 가진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만나주시고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가진 성도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 됩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것을 소망하며 삽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세 개의 십자가 요1917-27

 

성경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중심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인간의 죄악을 알며,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곧 새 생명을 얻는 것이며, 십자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도 잊을 수 없고 항상 묵상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이고 구원의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가 죽어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저주스런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고 칭합니다. 고난주간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고 친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종려주일) 그곳에서 보내신 일주일의 삶을 묵상하며 지내는 시간입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바르게 깨달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해골이라 이름 붙여진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세워졌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십자가이지만 세 개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 다릅니다.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 멸망의 십자가

 

예수님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 하는 죄인은 반란자나 노예들을 극형에 처할 때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들에게는 아무리 무거운 죄를 범했다 해도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아 죽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그야말로 반인륜적이고 극악무도한 죄인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형인 십자가 형틀에 달린 것입니다. 첫 번째 십자가는 죄의 결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십자가였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범한 모든 죄악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종류가 어떠하든 결국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누구도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가 첫 번째 십자가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회개할 기회마저도 놓쳐버린 십자가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예수님을 조롱하고 불신했던 멸망의 표상(表象)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멸망 그 자체를 보여주는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전형을 보게 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은 후에 영원한 지옥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의 완악함을 첫 번째 십자가를 통해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막가는 인생종착을 보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1996(10)에 우리 사회에서도 소위 <막가파>란 범죄 조직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어 간 자들입니다. 첫 번째 십자가를 보면서 깨닫는 것은 구원은 누구에게나 다 열려있지만 그렇다고 구원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화)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밀양>을 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빈정거림이 나옵니다. 전도연씨가 열연한 주인공 신애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슬픔과 번민에 휩싸인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어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대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신애가 유괴범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러 왔다.” 고 하자 유괴범은 너무나 평안한 얼굴을 한 채 나는 용서받았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충격을 받고 교도소를 나와 쓰러지고 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 후 영화는 내내 신애의 방황을 묘사합니다.

 

이 영화는 죄 사함 받았다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의 믿음을 이렇게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 믿으면 다 용서 받았다.’ 면서 자기 죄에 대한 애통함도 없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는 고백 한 마디 없는 살인자, 그가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자기 죄를 눈물로 회개해본 적이 없이, 죄를 반복해 짓고 살면서 단순히 예수가 내 죄를 위해 죽었으니, 나는 용서 받았다.”는 교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뛰게 될 줄 아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곡해한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죄를 범하면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회개하지 않고 그냥 막가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가 그런 류의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339절에 보면 이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조롱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을 마치 꾸짖듯 모독하고 조롱합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힐 장면입니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가 메시야가 아니냐? 네가 구세주가 아니냐? 그런데 왜 죽느냐? 정말 메시야라면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자신처럼 십자가에 달렸으니 자신과 비슷하게 무슨 흉악한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함께 십자가를 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행악자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죗값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행악자를 보면서 죄의 결말, 죄의 보편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행악자가 달린 첫 번째 십자가를 천천히 바라봅시다. 그리고 좀 더 앞으로 나가봅시다. 그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면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났으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을 마감했습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죄인으로 죽었으니 하나님께 정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는 영원한 죽음, 즉 영벌에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행악자가 달린 십자가는 영원한 죽음의 십자가였습니다. 영원한 멸망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이 귀동냥으로 들은 것은 천만분의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마치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자신이 하나님 위에 있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을 믿을 바에 내 주먹을 믿겠다고 외쳐댑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을 기회가 생기는데도 일부러 피합니다. 지옥으로 치닫는 열차를 타고 있지만 천국의 기차로 갈아탈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짐에도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그냥 타고 지옥을 향해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고마운 나의 지인이, 지금 첫 번째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십시오. 추수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십자가 회개의 십자가

 

이 사람은 비록 흉악한 죄를 범했으나 회개한 자의 십자가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란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즉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참으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을 이 사람을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이 선물이 너무나 비싸서 도무지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란 것입니다. 값이 너무 비싸면 가격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화랑에서 고가로 값을 매겨 놓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1500년경에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그림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에는 '프라이스레스'(Priceless)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니까 값으로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쓸모없는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준 것이 바로 두 번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것도 죽는 순간에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사람을 죽이며 흉악범으로 잡힌 이 사람,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이 죄인도 구원해 주신 예수님, 그렇다면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을 보여준 십자가가 바로 두 번째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수 있는 죄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가 큽니다. 아무 공로 없는데 나를 사랑하신 주님, 보잘 것 없는데 어느 순간엔가 나를 부르신 주님, 자격이 없는데 자녀로 삼아주시고 기업을 이을 자로 세워주신 주님, 그 주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습니다.

 

(찬송가 3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아멘.

 

 

세 번째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구원의 십자가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 죽은 속죄(贖罪)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 십자가는 이제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의()를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존경과 영광과 찬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희생, 봉사, 사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드린 희생 제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감격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름을 확인시켜 준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일까요? 죄의 세력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의의 세력을 사랑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완성이며, 사명의 완성이며, 죄인을 위한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말과 이론이 아닙니다. 뜨거운 마음과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말과 이론이 아닌 우리를 향한 뜨거운 마음과 실천으로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은혜가 무엇인지도, 구원과 영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게 합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음지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많은 봉사자들, 그들이 이토록 희생하며 봉사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작 왓츠(Isaac Watts;1674-1748)는 찬송가 143장에서 4절과 5절에서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고 눈물의 찬송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이제 아무리 포악한 죄인이라도 저 십자가를 볼 때 마음이 녹아집니다. 아무리 패륜아들도 저 주님의 십자가를 대할 때 눈물로 되돌아서게 됩니다. 술주정뱅이도, 그리고 탕자도 저 십자가 앞에서 결단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살리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감격의 목이 메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세 십자가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주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나 같은 죄인이 어디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오늘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한 주간 동안 묵상하면서 새로운 주님과의 사랑을 이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예화 1) 렘브란트(Rembrandt, 1606-69)의 그림 중에 세 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es)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정중앙에는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우편에 두 강도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모여서 야유를 퍼붓는 군중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모퉁이 한구석에다가 그림자에 가려 간신히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 그려 넣었습니다. 미술가들은 이 사람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렘브란트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그날 폭도들과 함께 동참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때 그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달린 강도들처럼 천국이냐 지옥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입장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어둠을 빛으로 밝힌 예수님 요한복음 181-11

 

인디언들의 구전동화 중에 빛과 어두움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해와 별, 그리고 어두움이 살았다고 합니다. 별은 해와도 만날 수 있고, 어두움과도 만날 수 있었지만, 해와 어두움은 서로를 알지 못했습니다. 별은 해에게 어두움을 알려주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해는 결코 어두움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빛이 전혀 없는 밤, 깜깜한 동굴에서도 해가 들어가만 어둠은 곧 환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별은 해에게 어두움을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별은 어두움은 곧, 빛이 없는 상태일 뿐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빛보다 어두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을 때 나타나는 상태일 뿐이었습니다. 어두움은 진리의 빛을 모를 때 생깁니다. 빛이 생길 때 어두움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에 어두움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 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 실망하기보다 그 속에서 빛을 비추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로 그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워낙 어두워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빛이신 예수님을 몰라보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는 음모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은 잡히실 각오를 하신 듯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가끔 제자들과 기도 모임을 갖는 곳이기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는 곳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곧 되어질 일(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계실 곳을 노출시키신 것입니다.

 

1. 십자가을 향하는 기도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까지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말은 기름을 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자신을 고통의 기름틀에 집어넣고 마치 기름을 짜듯 자신을 쥐어짜는 고난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예수님은 이런 간절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하게 기도했던지 이마에서 흘린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22:44). 왜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까? 그 목적은 단 한 가지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어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며칠 전부터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 밑에다 실내화 한 짝을 던져놓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엄마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는 거니?” 그때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교회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으면 아침에 일어나 그 실내화를 찾으려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게 되는데, 바로 그때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무릎 꿇고 기도하기 위해 그런 거예요.” 한 번 시도해 볼만한 좋은 가르침입니다.

 

기도에는 치유와 회복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누구라도 다 할 수가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누가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그 역사하는 힘에 강도가 다를 뿐입니다. C.S.루이스가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쁨 속에서 속삭이시고 우리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우리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확성기다.” 그리고 또 한 마디 그 분이 여러분을 기다리신다.”라고 했습니다. Tomas Tenney는 그의 기도서에서 주님,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제 영혼이 아려옵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대한 그런 깊은 영혼의 울림이 있습니까?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 했는데 실상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흡이 끊겼다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시고 습관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예수님의 기도 습관을 막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리려 십자가의 고난은 더욱 강렬하게 기도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끈질긴 기도는 빛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어두움의 사람들

 

그런 반면에 빛을 가로막고 어둠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주님을 팔리라는 지적을 받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습니다. 유다는 그 길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왔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는 곳이라 유다가 알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야 유다를 어두움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유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자기의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의 혁명을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출세시키고 세상의 권력을 나누어주고 부귀영화의 야망을 채워주기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자기의 기대를 접었습니다. 이참에 차라리 돈 몇 푼이라도 챙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여튼 유다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주님을 배신하고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왔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입장입니까? 빛의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어둠의 편에 있습니까? 가족과 가정의 행복을 위한 편입니까? 육신의 건강과 안일을 위한 편입니까?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한 편입니까? 좋습니다. 가족과 가정, 건강, 행복, 부귀영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런 것은 세상 나라에 속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나라든지 돈이나 사람의 힘으로, 권력으로, 칼이나 창 같은 병기로는 절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돈이나 권력과 사람 그리고 창칼 같은 무기가 무슨 힘이 있는 줄 아십니까? 사실 엄격히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런 것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잡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나사렛 예수라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예수님께서 내로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유다를 비롯한 그 모든 사람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비록 권력의 힘을 뒤에 업고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으나, 이 한마디에 겁을 먹고 땅바닥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권력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어떤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돈이나 병기를 가지고는 절대로 행복해지거나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 합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것으로 무엇을 이루고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직도 어둠에 빠져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보고 제자들은 하나같이 긴장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것저것 생각도 안 해보고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가까이에 있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에 모두 싸우려는 자세를 취하며 주위가 살벌하게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자칫 잘 못하면 서로 피를 보는 살상의 사건이 발생하게 될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빛을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혈기를 부린다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혈기는 감정의 발로입니다. 감정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그 아픔이 오래 갑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혈기로는 절대로 빛의 세계를 이루지 못합니다. 때로 교회를 위한다는 핑계로, 복음을 전한다는 구실로 혈기를 앞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2:13).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흥분하여 검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칼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52에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세계는 칼로 이루지 못합니다. 빛의 세계는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혈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는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를 위하여 칼과 무기, 돈과 혈기 그리고 감정을 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드립니다.

 

3. 빛의 세계를 위하여

 

그러면 빛의 세계는 무엇으로 됩니까? 본문 1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빛의 세계는 고난을 잔을 마심으로 만들어집니다. 고난의 잔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손해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양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힘든 일을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감정을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남을 이해하고 내가 양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서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가 있는 곳에 빛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은 캄캄하게 어두웠습니다. 그 어둠을 틈타 예수를 파는 자 유다와 로마의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는 아랫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유다는 돈에 눈이 어두워졌고, 군대들은 상관의 명령에 어두워졌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는 아랫사람들은 교권에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감정에 혈기를 부려 잠시나마 어두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핏방울이 떨어지도록 기도하여 어둠을 빛으로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어둠을 버리고 빛 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력이나 사람의 힘이나 돈에 의존하지 맙시다. 감정에 치우치거나 혈기를 부리지 맙시다. 기도하며 고난의 잔을 마십시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시다. 희생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빛의 나라가 성도의 심령에, 성도의 가정에, 우리 교회에 세워질 줄 믿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성도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에 빛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요18:1-11

이집트 콥트교회 인도자 자카리아 보트로스(Zakaria Botros)는 이슬람권에서 가장 복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위성 방송을 운영하면서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 들고 둘을 비교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모슬렘들이 이 방송을 보고 개종하고 있습니다. 매일 접속자만 6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모슬렘들이 진정한 복음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과격 이슬람 단체에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현상금 1억 달러를 걸었습니다. 그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데 두렵지 않습니까?” 하고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실 뿐입니다. 저는 매 순간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매를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찔림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 것을 믿을 때, 주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심을 믿을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미리 알고 준비하는 자가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십자가의 수난을 받을 것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에게 몇 차례 예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하실 것과 승천, 그리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을 것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평소 자주 가셨던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간절한 기도로 수난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복음서 본문 1-2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감람산 사이에는 “암흑”이란 뜻을 가진 기드론 시내가 있습니다. 지금은 산림도 없고 집들이 많이 지어지고 해서 별로 험하게 보이지도 않지만 그 당시에는 골짜기가 깊어서 많이 험했다고 합니다. 옛날 다윗 왕이 피난 갈 때 이 기드론 골짜기를 건넜고 아사왕은 여기서 모친의 우상을 불살랐고(왕상 15:13), 요시아 왕 때에는 이곳이 공동묘지가 되었었고(왕상 23:6), 지금도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는 공동묘지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을 찾아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동산이 바로 감람산 한 옆에 붙어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겟세마네"란 기름을 짠다는 뜻입니다. 그 곳에 가보니까 지금도 상당히 큰 감람나무 들이 많은데 그 감람나무들이 예수님 계실 때 있었던 나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마치 기름을 짜듯 간절한 기도를 드리실 때 땀이 피방울이 되어 나올 정도로 십자가를 예비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서신서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도 믿음과 기도로 준비하고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예수님께 십자가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듯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사도 바울에게는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신 것은 십자가의 길이 메시야의 길이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길이고,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쓰디쓴 고난의 길이기에 피하고 싶은 길이고, 돌아가고 싶은 길이고, 멈춰 서고 싶은 길이지만 기꺼이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도 바울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피하여 가라. 돌아가라. 멈춰 서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결박이 기다리고 있지만 사명의 길을 걸어라. 환난이 닥칠 것이니 담대 하라. 결박과 환난을 만나게 될지라도 되돌아서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에 편안한 날을 별로 못 가졌다. 알라바마 감옥에 다섯 번 투옥되었다. 내 집이 두 번 폭파되었다. 나와 내 가족을 죽이겠다는 위협을 거의 며칠에 한 번씩 받아왔다. 나는 칼에 찔려 거의 죽을 뻔하였다. 더 이상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을지 정직하게 말해서 나 자신 의심스럽다. 정말 조용하고 쉽게 살고 싶은 유혹을 시간마다 받는다. 그러나 이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내가 힘을 얻고 굴하지 않는 원인은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나의 멍에를 메면 너희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말씀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흑암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가를 배웠다. 주님을 믿을 때 고통은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하였다. 나의 개인적인 불행은 나를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랑스럽게 나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다고 한 말을 실감 있게 이해한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 성도들 역시 주님을 따라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그 길 이후에 부활과 영생의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들은 비록 십자가의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항상 기도로 준비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영생을 준비하는 자들이 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도와 충성스런 믿음으로 살다가 주님이 예비하신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준비 된 자는 장예 물과 고난을 피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갑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인간의 생각을 앞세워 그리 하실 수 없다고 했다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베드로를 나무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자 결단하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마치신 후 가롯 유다의 인도를 받고 온 무리들 앞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온 줄 다 아시고 5절에 “내가 그니라”하시며 당당히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8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묵묵히 당당하게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서신서 본문에 보면 바울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두로의 제자들, 빌립의 네 딸들과 아가보가 사람의 인정을 앞세워 가지 못하도록 만류했지만 바울은 사람의 생각 보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명자로서 믿음과 기도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만류할 때 13절에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만류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준비된 자의 모습입니다. 영적으로 무장하여 준비 된 자들은 앞에 있는 장애물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가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나 준비 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3절에"유다가 군대 및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슬픈 사실은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며 배우고 고락을 같이 하던 제자 가룟 유다가 선생을 배신하고 자기의 선생을 체포하려고 무리를 이끌고 그 앞장을 서서 올라온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안내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이끌고 온 무리를 보면, 로마의 군대,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종들,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진 무기는 등과 횃불, 검, 몽치, 병기 등등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 하는 세력은 어느 시대나 예수를 배신한 배신자들과 세상권력과 또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부패된 교권주의자들입니다.

예수께서 특별히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함께 깨어 기도할 것을 당부했으나 그들은 육신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졸고 자다가 엉겁결에 유다가 이끌고 온 무리들과 마주 대하게 되었을 때 10절에 보면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러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시몬 베드로가 왜 검을 차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때 분위기를 봐서 아마도 호신용으로 검을 차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의 종의 처지에 있는 하잘 것 없는 말고라는 자가 신이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선봉에서 깝죽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의분이 왈칵 솟아올라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칼을 빼서 말고를 쳤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칼이 빗나가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 떨어뜨렸습니다. 주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된다고 나무라시며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주님이 잡혀가실 때 다 도망을 치고, 베드로는 주님이 예고하신대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이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부족한 자들의 모습이요, 기도로 무장하여 준비하지 못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물론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 하다 성령 충만을 받고 담대한 믿음으로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하다 위대한 순교자들이 되었지만 준비하지 못했을 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항상 깨어 준비된 믿음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사명 감당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복음서 본문 11절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과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명상하기도 하며 찬송을 부르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고 확인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확신한 후에는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기도생활이며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한 기사(記事)는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고통의 길, 형극(荊棘)의 길을 선택하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편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시밭길을 택할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택해야 할 것인가? 타협해서 무사하게 여생을 보낼 것인가? 오욕과 수치가 기다리는 그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이러한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고난의 잔"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한>에서 예수님의 이러한 선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습니다. "명령에 따라 고통을 받는 것은 자의로 고통 받는 것보다 쉽다. 여럿이 함께 고통 받는 것은 혼자 고통 받는 것보다 쉽다.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것보다 쉽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의(自意)로, 혼자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고통을 모두 선택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고통의 선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서신 서에 나오는 바울 역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14절에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하며 더 이상 만류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카고에 폴라드 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러한 갈등 속에 지내던 폴라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뿐더러 육체도 시들해져서 당뇨와 신경계통의 병으로 침대 속에 누워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 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기도 모임에서 참석하였고 옆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한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이여,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은 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명을 저버리고 자기의 고집대로 살려고 했던 자아와 욕심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자아가 죽는 것을 느낄 때에 그의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왔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찬송 시로 적었는데 그것이 찬송가 425(217)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 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일은 우리에게 최고, 최선의 은총의 길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로 삽시다.

1.미리 알고 준비하는 자가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2.준비 된 자는 장예 물과 고난을 피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갑니다.

3.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우리 모두 멀리 인생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미리 믿음과 기도로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명의 길을 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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