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알지니 요8장31-36, 요삼1:1-8
미국에서 흑인 노예 해방 운동을 일으킨 배후에는 『엉클 톰슨 캐빈』, 우리말로 『톰 아저씨의 오막살이』라는 말로 번역 된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스토우 부인이 썼는데 이 부인은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며서 귀한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이 부인을 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얼마 자라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 부인은 마음이 얼마나 슬펐는지 언제나 딸 생각에 살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마음이 그렇게 아픈 것을 생각하다가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슬픔을 당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노예들의 형편을 보았습니다. 흑인의 어머니는 딸이 죽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팔려감으로써 가족끼리 사방으로 흩어져 생이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스토우 부인은 나는 내 딸이 죽어서 이렇게 슬픈데, 살아서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흑인 어머니들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는 것을 소설에 그대로 묘사했습니다.
그 책이 출간되어 많은 사람이 읽게 될 때에 그야말로 미국 사람의 양심을 찔러 깨웠습니다. 미국의 도처에서 흑인 노예는 반드시 해방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약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져 인류 해방과 자유의 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이 쓰인 이후 19세기 초부터 지구촌에 강력한 민족자결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각처에서 강대국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약소민족들이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자유를 향한 대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3.1운동도 그 책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남의 나라의 속국이 되고, 사람들의 종이 되고, 물질의 종이 되고, 욕망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 되고, 사단의 종 등이 되어 산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오늘은 온갖 것에 메어 종노릇 하는 데서 벗어나 참 자유 함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진리를 알지니”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성도는 진리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서 본문 요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했습니다. 이는 내가 임의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할 때 비로소 자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 의 원어는 '텐 알레데이안' 인데 유일하신 진리를 의미합니다.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분명한 진리로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본문 36절에서도 “그러므로 아들(예수 그리스도)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속적으로 동행할 때 주어집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 우리 선조들은 미신의 얽매임 속에 살았습니다. 이사 가는 방향도, 날짜도 아무 날이나 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 날짜도, 결혼해야 할 상대방도 사주팔자로 계산해야 했습니다. 얽어매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와 복음의 진리가 자유를 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참 진리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주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진리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복의 근원이시며, 주관자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경외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요 17:3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주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살아 갈 때 우상과 잘못된 습관과 미신으로부터, 죄와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 하며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새로운 삶도, 참 자유함도, 구원도 가능하게 됩니다.
존 아담스(John Adams)의 실화전기 '피케언 사람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영국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플래처(Fletcher)를 중심으로 “바운티”(Bounty)라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남태평양 피케언(Pitcairn)섬에 들어가 인디언들을 설득하여 공동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9년 뒤 집단 공동 사회는 실패하였습니다. 보통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모두 발생한 것입니다. 12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며, 폭력, 성도덕의 문란, 알코올 중독 등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지도자였던 플래쳐 역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존 아담스는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정리합니다. 그러던 중 성경책을 발견합니다. 9년 동안 읽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던 책이었습니다. 아담스는 배가 오기를 기다리며 두 달 동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다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담스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경책을 들고 피케언 섬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섬은 새로운 세계가 되었습니다. 피케언 사람들은 영국인의 영향으로 불과 9년 사이에 술주정꾼이 되고 폭행자와 성적 문란자가 되었지만 아담스가 알게 된 진리는 아담스뿐만 아니라 섬 전체를 소생시키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이론이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나도 그것 가지고는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진리 자체가 되시고,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 고백하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소망 가운데 믿음과 사랑으로 살게 하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고 믿어 참 자유 함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는 진리 안에 거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서 본문 요8:31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했습니다. 그리고 서신서 본문 요삼1:3-4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했습니다. 우리가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를 수없이 지으면서도 죄인 줄도 모르고, 죄의 종노릇하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중생의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새 신분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제자,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 성도 등의 새 이름, 새 신분의 사람으로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진리와 상관없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진리를 믿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자로 살기를 힘쓰고 진리를 생명처럼 지키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 하는 자로 삽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진리의 말씀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가 너무 속박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성수 하라, 죄 짖지 말라, 술 취하고 방탕하지 말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사랑으로 섬기라, 선한 일에 힘쓰라, 게으르지 말라, 등 등”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을 속박한다고 생각하여 아버지 집을 떠나 마음대로 살았던 탕자처럼 사는 것을 자유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책임이 따르고 심판이 따르게 되는 방종입니다.
진리 안에서 참 자유 함을 가진 사람은 진리 안에서 사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기도,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미움을 받기도, 박해를 당하기도, 심지어 죽음을 당하기도 하면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며 삽니다. 16세기 영국의 순교자 가운데 존 후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결혼을 주장한 것과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놓고 축사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카토릭의 교리인 화체설을 부인하였다는 죄목으로 1553년 런던탑에 투옥되었습니다.
1년 반 이상 감옥에 갇혀 있던 그에게 한 친구가 찾아와서 이렇게 권하였습니다. "인생은 달콤한 것이지만 죽음은 쓰디쓴 것이네. 이 점을 생각하고 고집을 버리게나." 적당하게 타협하여 죽음을 피할 것을 종용하였던 것입니다. 후퍼는 깊이 생각한 후 친구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세에서의 생은 이생보다 더 달콤하다네. 그리고 지옥의 고통은 죽음보다 더 쓰다네" 결국 그는 얼마 후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맞게 된 후퍼는 사형 집행관들을 위해 복을 빌어준 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고 외친 다음 순교의 제물이 됐습니다. 그의 순교는 영국교회가 개혁의 틀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신앙은 세상과의 타협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의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과 감동과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진리 안에 거하여 살기를 소망합니다.
3.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진리를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8:5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붙잡혀 주님의 도구로, 진리의 일꾼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모습이 진리를 위해 사는 모습입니다.
서신서 본문 5절에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했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행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형제 곧 나그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진리를 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물질로 섬기고, 은혜를 나누고, 사랑으로 섬기고, 복음을 나누고, 유익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나그네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그네로 나타 나셨고, 19장에는 하나님의 천사인 나그네가 롯의 집에 와서 롯의 대접을 받습니다.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하며 피하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은 나그네이십니다. 마태복음 25:35에는 오른편의 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그리고 왼편의 염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예수님은 자신을 나그네와 동일 시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다 잠깐 머물다 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도 벧전 2:1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나그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하니”라고 합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피스토스’입니다. 신앙이란 말은 ‘피스티스’입니다. 두 말이 비슷합니다. 참 신앙의 사람은 신실합니다.
욥기서에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이라고 칭찬하셨는데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나그네를 잘 대접한 것이었습니다. 욥기 31:32에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베푸는 자가 진리를 위해 사는 자입니다. 서신서 본문 8절에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은 자기가 전도하여 지금은 귀한 일꾼이 되어 있는 가이오에 대한 사도 요한의 사랑은 무척 각별했던 것 같습니다. 15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성경인 요한삼서 속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그렇게 자기가 사랑했던 가이오를 격려하면서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바로 2절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지는 놀라운 복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받은 가이오의 마음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이 사도 요한의 사랑을 받았던 가이오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님 안에서 사랑을 베풀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란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요한을 무척 기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면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로, 물질로, 마음으로, 기쁨으로 사랑하고 베푸는 삶을 사람들이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이요,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책을 썼던 성자 토마스 아 켐피스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토마스야, 네가 너무도 나를 사랑하고 내 뜻을 받들어 살려고 하니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기 원하노라 네 소원을 말하라." "주님,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니다. 내가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으니 말하라."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소원이 없습니다." "아니다. 말하라." 세 번이나 물어봐도 여전히 토마스 아 켐피스는 "더 이상 소원이 없사옵니다. 주님 한 분 함께 하심에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네 번째 음성이 들려옵니다. "토마스야, 너는 세상에 아무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장 좋은 것을 가졌느니라."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진리 안에서 살고,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가장 행복하고 좋은 삶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진리를 바로 알고, 진리 안에서 살고, 진리를 위해 살게 되므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을 받고 살다가 다시 오실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님 맞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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