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스스로 종이 된 자유자 요8:31-44, 벧전1:11-2

nam씨 2015. 8. 21. 18:02

스스로 종이 된 자유자 요8:31-44, 벧전1:11-2

 

어느 교회 권사님의 취미는 강아지(해피)를 기르는 것이었습니다. 강아지를 위하여 꾸미고, 다듬어 예쁘게 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귀를 보라색으로 염색을 하고, 발톱을 빨간색으로 메뉴퀴어 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강아지를 위해 돈 쓰는 것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강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온 동네를 밤새도록 찾아다닙니다. 결국 못 찾았습니다. 목사님께 전화해서 그 강아지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구역 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강아지를 찾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온 마음에 설움이 가득차서 오열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강아지를 찾게 해 주세요 한참을 울고 기도 했는데, 그만 온 밤을 꼬박 새워서 철야 기도를 한 것입니다. 새벽 기도회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다 잠간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그 권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개 권사야! 너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애통하여 보았느냐? 너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밤새도록 찾아 본 일이 있느냐? 그 영혼을 위해 밤새도록 울어 본 일이 있느냐? 너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물질을 아낌없이 내 놓았느냐? 없는데요. “너는 개 권사다.” 그러더랍니다.

 

성도다운 모습을 지니고 살아야 주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되고, 자신에게 복이 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스스로 종이 된 자유자라는 제목으로 참 신앙인의 모습이 무엇인지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1)진리를 알아야 자유 함을 받습니다.

 

본문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는데, 진리라는 말은 알레데이아인데 “..하지 않는다.”숨기다라는 두 단어가 합해져서 만들어졌습니다. “숨기지 않는다.” 즉 진실, 사실, 참 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에 의해서 속박을 당하고 불행해졌다는 말입니다. 진리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성경말씀입니다. 또한 유일하신 진리로 우리의 영원한 속죄 주요, 구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속박, 율법과 사단의 속박, 사망에 대한 두려움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분임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말은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고, 체험하며 믿음으로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속적으로 동행할 때 주어집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 우리 선조들은 미신의 얽매임 속에 살았습니다. 못도 함부로 박을 수 없었고 여행도 아무 날이나 할 수 없었습니다. 이사 가는 날도, 이사가 살아야 할 집의 방향도 정해져 있었고 결혼 날짜도, 결혼해야 할 상대방도 사주팔자로 계산해야 했습니다. 얽어매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제는 만유를 지으시고 섭리하시고, 심판하실 예수님의 인도만 따르면 됩니다.

 

2)죄의 정죄에서 벗어나야 자유 함을 받습니다.

 

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영접하여 생명 얻는 회개를 한자들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과거의 죄와 현제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자범 죄를 짓고 수시로 회개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보시고 너는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얻는 칭의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데 누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죄에서 자유 함을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방종에 방임하여 살지 않습니다. 날마다 옛사람이 죽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 모습이 바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요, 그 과정이 바로 성화입니다.

 

3)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살므로 자유자가 됩니다.

 

본문 요8: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주 안에 거할 때 영원한 하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성도의 참 소망이 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15:55-57에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죽음 이후에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늘 처소가 있음을 알고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삽니다. 14: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고백하며 삽니다. 이 소망을 가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 나고,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참 진리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 하는 백성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는 주님이 주신 지혜로 바른 인생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1)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나그네 된 행인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서신서 본문 벧전2:11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했습니다. “나그네란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는 비록 외국에서 집을 세내어 꽤 오래 산다 할지라도 그곳의 영구거주자가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법적 권리나 지위가 없습니다. 그는 낯선 땅에 거하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입니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바는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요, 유랑 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가는 것인데, 오늘에 볼 때에 미래라는 것도 얼마 있지 않아 현재가 되고, 현재도 곧 과거가 되고 마는 길가는 행인 같은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나그네만이 아니요, 행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의 거주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하늘 시민이요, 땅에 속한 이 세상의 시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적인 표준과 방법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과 천국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2)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자로 삽니다. 믿는 자의 고향은 천국입니다. 믿는 자는 세상과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세상의 관습과 생활방식대로 살지 않고 천국의 방식대로 삽니다. 그러한 삶은 앞서간 믿음의 조상들이 잘 보여 주었습니다. 11:8-11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이 땅에 살 때에 세상에 욕심을 두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믿음을 따라 죽었으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음의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며 환영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위해 히11: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믿음으로 잘 준비하는 삶을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를 소망합니다.

 

3)영혼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삽니다. “육체의 정욕이 란 육체의 악한 욕망, 충동. 정욕. 색욕 등을 의미합니다. 이는 육체에 관한 것들에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육체가 어떤 것을 소유하기를 열렬하고 간절하게 바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강하고 통제가 어려우며, 자주 의지에 거스려 행하려 합니다. 5:19-21에 육체의 열매에 대해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간음,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살인, 술 취함, 방탕함 등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영혼을 거스려 싸웁니다. 육체는 그 속에 비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충동과 정욕을 담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억제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손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이 영혼의 자유를 속박하고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습니다.

 

야생마를 다루는 것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야생마를 자연 그대로 방치하여 제멋대로 날뛰며 살게 하는 방법입니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원래 행동하던 것처럼 그냥 방치하여 키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야생마의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야생마를 아예 죽여 없애는 방법입니다. 한마디로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야생마에게 멍에를 씌운 후 훈련시키는 방법입니다. 말의 입에 멍에를 씌운 후 교육하여 사람이 원하는 데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솔직히 야생마를 길들이는 방법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무관심이거나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야생마와 같은 정욕과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욕을 제멋대로 방치하면 그 사람은 악인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욕심과 정욕을 아예 없애려고 하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고, 폐인이 됩니다. 아무리 힘센 소와 말도 멍에를 메우면 꼼짝 못하고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기독교는 야생마에게 멍에를 씌우고 훈련시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정욕에 예수의 멍에를 씌우고 경건하게 살면 주님의 영광스런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고,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3.성도는 주님 위해 스스로 종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1)주님은 종의 모습이 되어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죄인 괴수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로운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사53장에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 함을 받은 성도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잘 먹고, 잘 입고, 오래 사는 것이 아름다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주님을 본받아 기꺼이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본문 벧전2:21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주님위해 종으로 드리는 삶은 주님을 본받는 영광스런 삶입니다.

 

2)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는 나를 위해 생명까지 희생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 것을 잘 압니다. 이 사랑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지만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입으면서도 합당하게 여기며 기쁨으로 감내합니다. 성도는 이익과 손해에 대하여 얽매일 것이 없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어도 감사하고 저렇게 되어도 감사하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3)주님의 종으로 사는 삶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본문 16-17절에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했습니다.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것은 탐욕이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자유로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섬김으로 뭇 사람들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빌1:29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 당연히 고난도 따를 줄 알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골 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감옥에 갈 때 간수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미우시죠? 당신에게 고통을 주는데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때 킹 목사는 대답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들이 아무리 나를 투옥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무리 나를 위협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을 협박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사랑을 당신들은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그의 사랑이 인종차별의 벽까지 무너뜨린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에는 엄청난 상급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기꺼이 주님의 종으로 자처하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1)진리를 알아야 자유 함을 받습니다.

2)죄의 정죄에서 벗어나야 자유 함을 받습니다.

3)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살므로 자유자가 됩니다.

 

.성도는 주님이 주신 지혜로 바른 인생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1)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나그네 된 행인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2)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자로 삽니다.

3)영혼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삽니다.

 

.성도는 주님 위해 스스로 종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1)주님은 종의 모습이 되어 본이 되셨습니다.

2)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3)주님의 종으로 사는 삶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참 진리가 되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 함을 받게 된 성도는 개 권사처럼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본 받아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처하며 주님의 발자취 따라 살다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