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을 보게 하옵소서 (벧전 3:10)
기독교가 탄생한 지 35년 만에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수난의 기간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억울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날 때 주변에 있던 신자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빨리 로마를 떠나도록 권유하여 베드로는 멀리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 도성의 외곽에 나와 잠간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시는 순간 베드로는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운지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물으니 주님은 "나는 로마로 다시 들어가 십자가를 지려 하노라"하고 대답하십니다. 그 유명한 쿼바디스라는 영화에 바로 그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다시 로마를 향해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로 지셨으나 그는 십자가를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아내가 염려할 때 "사랑하는 아내여, 두려워말고 주님을 잊지 마시오"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 아내도 능력이 생겨서 주님을 위해 함께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장 어려웠을 때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전했습니다. 특히 핵심적인 말씀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너희 형제간에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고 누구를 고발하거나 해롭게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악독한 말을 금하고 형제간에 화목하고 사랑하고 좋은 날을 기다리라는 권면의 말씀을 베드로전서와 후서에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 3장은 부부간에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의 인격 전체를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또 남편은 아내가 연약한 그릇인 줄 알아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대인관계는 겸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외에도 베드로전서 3장은 형제간의 우애하고 악한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고 악독을 품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등 많은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현실 생활에서도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이고 주님 앞에 설 때 잘했다는 칭찬과 상급을 주시고 수고와 슬픔, 가난과 질고가 없는 광명의 세계, 좋은 날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좋은 날을 보게 하실까요?
첫째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 3: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은 폐할 수 없습니다. 쌍방의 약속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득이 할 때는 사정을 말하고 변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일화 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끝내 그 거짓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20개의 거짓말을 또 만들어야 되고 이어서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어 마침내 자신의 인격이 파탄에 이르고 나아가서는 남의 인격에 피해를 입힌다"고 말했습니다. 약속이라는 말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믿음직한 사람은 약속을 잘 이행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미혼 남성들의 경우 결혼상대의 첫째 조건이 용모라고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인물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혼 여성들의 경우에도 결혼상대의 첫째 조건이 용모였다고 합니다. 잘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틀림없는 사람입니다. 약속 지키는 것이 체질화되고 습관이 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쌍방의 약속을 변개하지 않을 것이며 장차 결혼생활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은 용모가 아무리 좋아도 함께 살면 평생을 두고 가슴 치고 눈물 흘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갈라디아서 3:15에서 약속, 언약 이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사람들끼리의 약속도 지키거늘 하물며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의 따르면 유언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유언은 자녀들에게 미리 물어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미리 작정하고 일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성사되지 않고 죽어야 성사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언약은 "너희를 위해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날 보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언약하신 모든 말씀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는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나 마침내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언약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돌아가셨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돌아가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장차 좋은 날을 보게 할 것을 언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기를 "장차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고 창대하게 할 것이다. 너를 돕는 자는 도와줄 것이고 너를 해하는 자를 해할 것이다. 네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될 것이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세월이 흘러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어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기근이 들어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가지 말라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죽을 고비를 당합니다. 또 무자한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인의 몸종을 통해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자식 때문에 결국 집안에 불화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더디고 삶은 힘이 들자 아브라함의 믿음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창세기 17장에서 "전능하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하시면서 다시 한 번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후손들에게서 왕손이 나오고 대적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차지하고 살 것이다. 내가 언약을 지킬 것이다"라는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오래 참는 훈련을 잘 마쳤습니다.(히 6:14-15).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고 최선을 다하지만 위태하고 불안하고 염려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오래 동안 훈련시키시던 계획처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의 계획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내의 훈련을 시키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바라보고 나가면 마침내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고 좋은 날을 보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좋은 날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좋은 날을 주시고 삶의 꽃이 피고 희락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9)라는 말씀처럼 덕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자신에게 선하고 이웃에 대하여 선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한테는 좋은데 상대편에게 해가 되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에게는 좋은데 나에게는 해가 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좋아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좋아야 그것이 선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면 잘못입니다. 신앙은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덕입니다.
얼마 전 조찬기도회가 있어서 이른 새벽에 나가는데 제 맞은편에 오던 차에서 말쑥한 신사가 비닐봉지를 들고 내리더니 앞뒤를 살피면서 화단의 가장자리 울타리 속에 그것을 집어넣고 얼른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버린 것은 쓰레기봉지였습니다. 아마도 아내가 쓰레기봉지를 버리고 가라고 성화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신사는 아무도 못 봤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아무데나 버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자기는 기쁘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절
대로 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덕을 끼칠 때 좋은 날을 보게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 하는데 마지막 단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루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루게 되면 현실생활에서 좋은 날을 보게 되고, 또 주님 앞에 설 때 천국가게 되므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는 말씀처럼 신앙의 단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느끼면서 한 단계 한 단계씩 올라가야 합니다. 나 한 사람 기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잘 되어야 되고 좋아야 되는데 남은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절대 덕이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날 보기 원하시면 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는 말씀처럼 덕을 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나는 없는데…, 나는 못 배웠는데…"하며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고개 들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간순간 덕을 세우고 살아가면 어깨 펼 날을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과 백인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옥살이도 하고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자그마치 27년 동안 옥에 갇혀 수난을 겪었습니다. 마침내 옥에서 나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모든 정적들을 사면하고 모든 원수들을 다 용서하고 모든 저주하고 싶은 사람들을 다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대통령 직무를 잘 수행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그는 특유의 웃음을 남기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충만으로 심령의 평강이 충만하여 마음에 여유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덕을 끼치는 인격적인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는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령이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환경 중에도 예배하는 여러분의 삶은 곧 성령이 함께 하는 삶인 줄 믿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예수 믿었고,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 성령은 누구십니까? 성령은 곧 예수님의 신입니다. 예수님은 몸으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영으로는 올라가셔서 거룩한 신으로 내려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신 분이십니다. 그 성령이 순간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은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아멘으로 순종하면 남이 모르는 가슴속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때로는 잘 했다고 칭찬을 하시고, 때로는 힘들 때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끊을 것을 끊고 돌아설 곳에서 돌아서면 육신의 정욕으로는 끊을 수 없고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끊고 돌아설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때부터는 어떠한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체험하고 앞길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되어 승리 롭게 살아갈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는 말씀처럼 성령을 거역하고 무시하면 성령은 매우 섭섭해 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마치 자녀가 시험을 잘못 쳐서 성적을 잘못 받아 왔어도 자녀는 자녀인 것과 같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저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할 텐데…"하며 더 염려하고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래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저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황에 따라서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훈련의 시련을 겪으면 "하나님이 날 버리셨나?"하고 염려합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고 말씀하시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하고 우상숭배를 했다가 하나님을 믿었다가 하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은 하늘의 구름이 사라질지라도 땅이 해어질지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령께서 뭐라고 하시든지 아멘 하고 순종하며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시고 내 영혼에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템플대학에서 사회 저명인사 4,043명을 초청하여 학술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그 사람들의 교육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고졸 이상인 사람이 4,043명 중 69명밖에 안되었습니다. 나머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졸이거나 아니면 그 이하의 무식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교육수준이 낮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가 되고 재벌도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를 했는지를 조사를 했더니 그들은 한 번 목표를 정한 것이 있으면 그 목표대로 나가고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영향을 준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는 가난한 집의 자손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하고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삶의 지혜를 주시고 결단력과 인내력과 절제력을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좋은 인격자가 되고 이 땅에서도 좋은 날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은 광야와도 같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도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 물이 없고 뜨겁고 배고프지만 먹을 것이 없고 한 발작 발을 디딜 때마다 뱀과 전갈, 들짐승들이 위협하는 매우 불안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날을 바라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좋은 날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이 지나는 광야와도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힘들고 어렵고 위험하고 막막하고 답답한 때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하신 말씀은 절대로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덕을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깨달음을 주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좋은 날을 바라보며 그 날에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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