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자하면 살리라 요12:20-32, 행7:54-60
요즈음 방영되는 고려 거란 전쟁을 보면서 흥미를 위해 과장한 내용도 있겠지만 현종이 훌륭한 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되고, 현종을 곁에서 잘 보필한 강감찬 모습을 보면 죽기를 각오하고 거란 군과 대항하여 대 승리를 가져 온 내용이 큰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도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자들은 추한 모습으로 결국 죽음을 자초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왜적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배를 가지고 막강한 수군을 자랑하는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必死則生(필사즉생),必生則死(필생즉사), 즉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전선 12척으로 왜선 133척과 맞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장수들을 소집한 충무공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투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그러한 말로 군사들을 독려했습니다. 현종이나 감감찬의 자세, 충무공의 말은 영적 싸움터에 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성도들의 영적 싸움은 총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세상이라는 영적 싸움터에서 세상의 전투처럼 눈에 보이는 적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영들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싸움입니다.
세상의 전투는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살아남지만 영적 전투는 먼저 내가 죽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고,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 같이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야 좋은 군사가 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은 먼저 고된 훈련을 통과하고서야 군인다운 군인으로 준비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 받은 사람은 먼저 죽음을 통과해야 강한 군사로 싸우게 됩니다. 예수께서 ‘죽어야 산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옛 사람이 죽은 사람은 내 욕심, 자존심, 자만, 자랑, 이기적인 마음, 공명심, 내 마음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틈만 나면 뒤집혀 올라오는 수많은 상처들, 그리고 더럽고 부끄러운 죄성까지...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노라.’ 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죽고자 하면 살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복음서 본문의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며칠 동안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말씀 중 일부입니다. 마침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겠다고 왔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의 죽음을 여러 번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죽으실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그가 "영광을 받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제자들은 이 가르침에 대해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는 것이 어떻게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피치 못할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것도, 죽음의 처절한 현실을 감추려는 것도, 죽음을 부인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큰 고통이 따르는 죽음을 싫어 하셨고, 번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인류에게 죄 사함을 받는 길도, 구원 받아 영생에 이르는 길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은 죄인 된 우리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효과를 밀알에 비유하셨습니다. 밀 알 하나가 땅속에 들어가서 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속에 떨어져 죽고 썩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때 새로이 싹을 내고 자라서 수많은 밀알을 맺습니다. 그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의미와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고구려 시대에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북극 추운 지방에서 얼음과 눈 속에 사는 에스키모인 들에게도 고려장과 비슷한 풍습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고민합니다. 그들의 풍속에 따라 연로한 어머니를 추운 얼음집 바깥 얼음 위에 업어다 놓을 때가 되었는데, 또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성화인데 이 아들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 미루고 미루다 어머니의 거역할 수 없는 엄한 분부에 따라 어머니를 업어다가 눈밭에 앉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그러지 말고 집으로 가시자고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호소합니다. 이 때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곰의 밥이 되지 않으면 곰이 굶어죽고 곰이 굶어 죽고 없어지면 너희들 나의 자손들은 먹고 살 식량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오래 전부터 이렇게 얼음 위에서 곰의 밥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곰은 이 추운 겨울에 사람 고기 외에는 다른 먹을 것이 없고 사람은 곰 고기 외에 먹을 음식이라고는 없는 곳에서 생긴 풍속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이 많은 늙은 부모가 자식들의 음식이 되기 위해 곰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주께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역설적인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런 의미를 넘어 성경의 예언대로, 주께서 이미 말씀 하신 대로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입니다. 이어서 승천의 영광,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고난 없는 영광은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옛 사람이 죽음으로 다시 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믿음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2.예수님은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참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서 본문 25절에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자기 생명’은 ‘프쉬케’란 단어로서 현재 우리 몸의 생명을 뜻하고, ‘영생’은 ‘조에’로서 ‘영원한 생명’곧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육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은 고행이나, 자기 자신을 학대하거나, 자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를 처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고 했는데,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부자 관원이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목적도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서 인 것을 주님은 아시고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제자들도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너희는 너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모른다고 하시며,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되 물으셨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마치 장작불과 같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욕구가 만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욕구가 만족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이 행복과 불행은 모두 육체의 욕구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먹고 싶은 욕구, 입고 싶은 욕구, 가지고 싶은 욕구, 이기고 싶은 욕구, 높아지고 싶은 욕구, 명예를 얻고 싶은 욕구 등 욕구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욕구는 마치 장작불과 같은 것입니다. 장작불은 타면서 더 많은 장작을 필요로 합니다. 장작을 집어넣으면 불이 더 커지고, 불이 커지면 장작을 더 필요로 합니다. 우리 욕구도 만족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점점 커지는 것인데, 그것이 욕구의 성질입니다. 그래서 욕구를 채워서 얻은 행복은 금세 더 큰 욕구가 생겨서 사라지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으로 가득찼던 사울이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면서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므로 주님을 따르는 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미워한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최고의 학문을 배운 지성인이었고, 사회적으로는 공회의원이라는 막강한 권세를 가졌고, 당시 특권중의 특권인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편안하게 권세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유력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그동안 자신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믿는 자들을 박해한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이고 죄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특권과 세상적인 영화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지금까지 누렸던 세상의 것들을 잃은 것에 대하여 하나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 받는 영원한 하늘의 상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 역시 장차 받을 하늘의 상급을 소망하며 죄악의 낙을 누리는 애굽 왕자의 지위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핍박과 고난이 오는데 성도가 육신의 생명을 사랑하여 죄악과 타협하지 말고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주의 진리를 좇아 살면 진정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육의 소욕을 버리고 참 생명과 하늘 상급에 소망을 두고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스데반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찬란하게 별처럼 빛나는 신앙인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자신을 돌을 들어 치는 무리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는 천국의 문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스데반을 응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던 성도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피하면서 주님의 분부대로 흩어져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말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고, 주님 닮은 삶으로 주님을 증거 했으며, 죽음으로 생명의 주님을 증거 함으로 죽기까지 충성한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사울을 비롯한 수많은 죄인들이 옳은 데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본받은 순교자들이 거룩한 피를 흘린 터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일제가 식민정치를 하던 시절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기독교계가 이에 항의하고 거부하자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말로 회유하며 선동하였고, 이에 많은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끝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사람 중에 하나가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던 주기철 목사님으로, 그는 신사 참배를 정면으로 항거하다가 일본 순사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탄압을 받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수를 버리고 내가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하며 ‘일사각오’ 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결국 1938년 평양 감옥에 투옥되어 5년간 옥살이 하던 중 1944년 감옥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 직전에 쓴 고난의 명상록이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내가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영광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대답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으리이까?” 하는 명상록입니다.
기독교 백년이 좀 넘는 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세계의 제일가는 기독교 국가가 된 우리나라의 신앙의 축복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된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자의 흔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교의 피의 흔적을 기억하시고 은혜와 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한국교회 성도를 부러워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려면 한국인 목사님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믿음위에 세워진 신앙의 흔적입니다.
순교의 흔적은 지워 지지 않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순교자 스데반의 흔적은 세계의 복음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순교자 스데반 이라고 호칭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세를 맞이하여 점점 믿음의 열정이 식어가고, 믿음이 떨어 져가는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살기를 힘쓰는 것 박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스데반의 믿음을 본받아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죽고자 하면 살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참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스데반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아멘.
<2024. 03. 08.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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