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부어지는 일곱 대접 8 (계 16:19-20)

nam씨 2024. 11. 14. 17:05

부어지는 일곱 대접 8 (계 16:19-20)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이제 마지막 일곱째 천사의 대접 2번째 시간입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온 세계 사람들이 사랑한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가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사생활은 매우 문란하여 작품을 쓰는 시간 외에는 ‘타락’과 ‘방종’과 ‘술’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1841년 여름, 이 작가의 가장 사랑했던 딸이 세느강에서 익사를 당하게 됩니다.



이 작가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 딸의 얼굴을 하얀 천으로 덮으며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작가는 그 날부터 그 어수선한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경건훈련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돌아보며 불후의 명작을 집필했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입니다.


이렇듯 완악한 우리 인간에게는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고난이 그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랑, 혹은 고난의 은혜로 악이 심판을 받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먼저는 마음의 천둥번개로 가득하듯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마음에 큰 지진이 일어나 더 이상 가만 있을 수 없어 가슴 치며 회개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감동이 파문으로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계속하여 고난의 은혜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3. 마음에서 세상이 사라지고 무너집니다.


19절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여기 큰 성은 바벨론을 말합니다. 바벨론성은 느부갓네살 왕이 건설한 것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성이 크고 높고 두꺼운데다 깊은 강물이 성을 두르고 있어서 이론상으로는 무너질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다가 바벨론은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사라진 바벨론인데 왜 바벨론 성이 갈라지고 무너진다고 말씀할까요? 그래서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계시록은 미래의 전개될 세속의 역사를 말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 바탕을 둔 어떤 신령한 진리를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의 세상이 무너질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빌3:7-9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큰 성”이라 한 이유는 뭘까요? 그만큼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말이고, 또한 성을 정복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잠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일평생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할 대상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런데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건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했으며 온갖 시험거리로 성도를 괴롭혀 왔는지 하나님의 철천지원수였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세상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천국을 방해하고 우리를 복 받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7:13-14에 예수님께서 경고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셨습니다. 수억 수십억 수백억의 오고가는 많은 인생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던 이 세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갈라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몇 갈레로 갈라졌나요? “세 갈레로 갈라지고” 3이라는 숫자는 합해져 있을 때는 대단한 결속력과 능률을 자랑하지만 한 번 분열하게 되면 좀체 하나 되기 어려운 수입니다. 사업을 해도 3사람이 하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여행을 해도 세 가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4:9-12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하셨습니다. 두 겹도 튼튼한데 삼겹이면 얼마나 튼튼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벨론은 삼 겹이 아니라 세 갈레로 갈라졌습니다. 이제는 아무 능력이 없게 되었고, 도리어 다투다가 자멸하고 말 위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미혹할 힘이 없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미혹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 세상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다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하나님 앞에 완악했던 마음도 열리게 됩니다.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바벨론만이 아니라 만국의 성이 무너지는데 여기 만국의 성은 무엇일까요? 당시 만국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침략하기 위한 성이 아니라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성이엇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막혀 있어야 좋은 성입니다. 이 성벽은 크고 높을수록 좋고 견고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성이란 매우 배타적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성이 아닙니다. 만국의 성입니다.


이 말씀은 넓게는 은혜 받은 성도로 인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빗장을 풀고 변화 받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좁게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열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완고한 마음들 고정관념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토록 배워도 자기 고정관념 내려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막16:14에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돈 문제도 그렇습니다. 돈이란 쓰면 없어지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더 생긴다는 건가 하면서 의심합니다. 그러나 잠11:24-26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시기도 했다 가져가시기도 했다 고난의 연단 속에서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고난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20-21절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맹렬한 진노란 하나님의 우리의 악에 대한 노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잔이 아니라 진노의 잔, 나아가 진노의 포도주 잔입니다.



진노의 잔이라고만 해도 되는 걸 진노의 포도주 잔이라 한 이유는  포도주는 포도를 포도주 틀에서 짓밟아 뭉개어 짜서 단단한 새 부대에 담아놓으면 나오지도 못하고 꼼짝 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서 잘 발효되어 좋은 포도주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고난의 사랑이고 징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66:10-12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짓밟으신 결과 “각 섬도 없어지고” 섬은 육지에서 멀고 외로운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육지로 귀양 보내는 것보다 요한처럼 섬으로 귀양 보내는 것은 더 가혹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은혜를 받고서 더 이상 하나님을 멀리 하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부르짖게 됩니다.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아야 하는데 평안해지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인내를 이루끼까지 연단을 계속하십니다(약1:4).


그 다음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산악은 그 특징이 높고 험함입니다. 그래서 쉽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산악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더 이상 힘들지 않고 기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최고의 장애는 바로 우리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으로 섬기면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를 쉽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5:8-10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도 고난의 길을 가셨으니 우리들도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십시다. 고난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에서 세상이 사라지고 무너지며, 완악했던 마음으로 열리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더욱 기쁨으로 섬기는 아름다운 믿음의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