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일 (1:1-11)

 

서론을 간단히 말씀 드리면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속입니다. 누가복음이 전편이라면 사도행전은 후편입니다. 누가가 썼고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인데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행하신 사역을 기록한 것이라면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셔서 역사하신 일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일은 약 네 가지입니다.

 

1.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3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그러시기 위해서 늘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평강을 주시고 복을 주시고 음식을 잡수셨고 창 자국 못자 국까지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확신의 사역을 하십니다. 여러 가지 일로, 은사로, 체험으로, 꿈에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우리 구주되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3년 반 동안 이 믿음의 사역을 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이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져야 구원입니다. 이 사실에 나도 포함됨을 경험해야 진정한 구원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고 체험 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4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십니다.

 

24: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14:16에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하셨습니다.

 

성령은 성경강림으로 교회에 이미 임하셨는가? 아니면 지금도 기다려야 받는가? 하는 것은 그동안 신학적 논제였습니다. 이 두 주장대로 해 보니 후자를 주장하는 교회가 더 열매가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임하셨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 것으로 끝나니까 별로 열매가 맺히지 않았지만, 지금도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성령에 관해서 관심을 갖고 사모했기 때문에 많은 열매가 맺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가지 함께 라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임하셨고 또 충만히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셨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나 더욱 충만히 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을 대망해야 합니다. 간구해야 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충만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3. 관심을 영적인 것에 두게 하셨습니다.

 

6-8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믿고 추구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메시아관은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모든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고 세계를 다스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만 아시는 것이고 너희는 오직 성령 받아 예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권능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영적이며, 또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에는 인간의 유능이 통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요,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으로는 이스라엘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일도 성령님을 강조하고 존중할 때 잘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통하여 성령님에 관해서 많은 관심 갖기를 바랍니다.

 

4. 재림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9-11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 두 사람은 천사입니다. 그리고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상징입니다. 천사의 말대로 구름 타고 가신 주님은 구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신 주님도 전해야 하고 오실 주심도 전해야 합니다. 오신 주님을 믿을 때 중생한다면 오실 주님을 믿을 때 성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재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이 되어야 흰옷 입고 주님을 기다리며 충성하여 믿음이 온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확신을 가집시다. 성령을 기다리십시다. 권능을 받아 증인 됩시다. 재림을 기다립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무엇을 할 때인가? 사도행전 1:4-8, 2:1-13

찬 송 : 182, 183, 184, 190, 197, 185.

 

 지금 무엇을 할 때인가

오늘은 예수님 승천주일이고 다음주일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성령강림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로 50일째 되는 날을 기준으로 하여서 성령강림주일로 지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지낸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1:4-8절의 말씀입니다.

(1:4-8)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고 마태 복음서에도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그의 제자들이 보는 중에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사모하고 기다리기를 열흘, 드디어 오순절 날이 이르고 불같은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였습니다.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신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말씀하신 것입니다.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6:7-8)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20:21-22)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말씀하셨고 일찍이 세례 요한도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한바 있습니다.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믿고 성령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간구 하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믿음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할렐루야!!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그 성령은 그때,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만 역사 하신 성령이 아닙니다. 오순절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하신 성령은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간구하는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은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은혜 받는 것도 때가 있고 성령 받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농사일도 모두 다 때가 있습니다. 세상만사는 모두가 적당한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적당한 때(시기)가 없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큰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에 3천 잠언을 기록하였는데 그 중에 전도서 3:1의 말씀을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성도들은 이때와 시기를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16: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일 때 모였습니다. 그리고 기다릴 때 기다리고, 기도할 때 기도하고, 성령 받을 때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그들은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잘 지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무엇을 행하여야 할 때입니까?

 

 

1.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각각 흩어지지 말고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택하신 성지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오늘의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를 떠나지 말고 또 열심히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120명이나 모였으니 다락방은 꽉 차서 참으로 용신하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불편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말씀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모일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 멘>

그런데 요즘 모이기를 게을리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모일 때 은혜받고 성령 받고 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제자들이 이와 같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기를 열흘, 마침내 하늘이 열리고 불같은 성령이 저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였습니다. 할렐루야!!

(2: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들은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마지막 말세가 가까울수록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믿음이 식어져서 모이기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든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모이지를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이 되면 자꾸만 무슨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주일날 대형 사고가 제일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이 모든 사탄의 궤계와 시험을 능히 이기고 항상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고서 열심히 모이기를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2. 지금은 말씀을 믿고 열심히 기도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하신 말씀을 믿고 제자와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오순절 날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아마도 120명이 다락방에 모여서 잡담이나 하고 또 세상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면 성령은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 성도들도 모여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십니다말세에 남종과 여종들에게 물 붓듯 부어 주리라(2:17-18)고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모이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천국 문의 열쇠입니다.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방법은 오르지 기도밖에 없습니다.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33:2-3) 일을 행하는 여호와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3. 성령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믿고 기다렸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주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간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간구할 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불같은 성령을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 멘>

 

<184>

불길 같은 주 성령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 하셔서 영광 보여 줍소서

성령이여 임하사 우리 영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고 하신 말씀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하신 말씀을 믿고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임하였던 불길 같은 성령이 나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4.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세상만사가 때가 있듯이 은혜 받고 성령 받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회개도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면 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할 기회를 예수님이 여러 번 주었는데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해야 할 때 즉 닭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슴 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어느 때는 정말로 말씀이 꿀 송이 같이 은혜가 되는가 하면 어느 때는 말씀이 은혜가 안 되고 잡념만 생기는 때가 있습니다.

또 설교 시간 30분 전체가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에 단 한마디의 말씀이 나의 심장을 찌르는 것과 같은 생동하는 말씀이 되어서 온 전신이 전율하는 것과 같은 은혜를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을 만한 때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만나는 시간을 많이 갖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 시간을 많이 갖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1주일에 우리가 공식적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11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1주일에 주일날 1시간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주일예배까지 빼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1주일에 한 시간 예배드리는 사람과 열 한 시간 예배드리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시간에 내게 은혜가 강물같이 충만하게 임할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들은 열심히 모여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최적의 순간입니다. 은혜 받을 만한 최고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잃어버리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일평생 해온 농사일도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그 시기를 놓치면 농사는 피농하게 됩니다. 은혜 받는 것도 성령 받는 것도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신령하신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예수님의 사도들과 120명의 성도들은 드디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성도들도 이 시간 성령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지금은 나가서 전파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 받고서 나가서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열매입니다. 성령 받고 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골방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성도들이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루에 3천 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고침 받고 귀신이 쫓겨 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성령 충만히 받고 나가서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이기도 합니다.

(16:15-16)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열심히 모이기를 힘 쓸 때입니다.

말씀을 믿고 기도할 때입니다.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고 열심히 간구 하여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았으면 나가서 전해야 할 때입니다.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가서 열심히 예수를 증거하여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눈을 고칩시다 (9:17-19)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이 시간에 “눈을 고칩시다.”라는 제목입니다. 눈이 보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눈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11:7에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그랬습니다. 빛이 아름다운 것도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6:22-23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이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관(觀,볼관)이라고 하는데 관에는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교회관 국가관 경제관 우주관 등등 어떤 것이든 관자가 붙이면 그 세계에 대한 눈이 됩니다. 그러므로 눈이 잘되면 한없는 축복이지만 잘못되면 한없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눈은 봄으로 복되듯 우리 눈으로 남이 볼 수 없는 귀한 것을 본다면 진짜 보배입니다.

 

그 이야기가 본문에 나타납니다. 본문은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만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눈이 열렸습니다. 진짜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벗어야 할 비늘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의 비늘, 공정함을 모르는 편견의 비늘, 바로 앞에 것 밖에는 보지 못하는 근시의 비늘, 더 나은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유치의 비늘, 땅에 것만 보고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는 비늘도 있습니다.

 

눈을 고치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1. 성경이 보입니다.

 

눈에 비늘을 벗은 사울이 맨 처음 했던 일이 있습니다. 행9:20-22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서야 성경의 핵심을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배운 온갖 조각 지식이 예수를 만난 다음에 구슬 꿰듯 다 꿰졌습니다. 성경에 박식해도 예수를 모르면 성경을 모른 것입니다.

 

그래서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하셨고, 고후3:14에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성경을 읽어도 수박 겉핧기입니다.

 

가장 보배는 성경을 보는 눈입니다. 사울이 그걸 몰랐기에 예수 믿는 자를 증오하고 잡아들이고 죽이고 멀리 다메섹에까지 원정 가서 믿는 자를 잡아오려고 했습니다.

 

행 18장을 보면 아볼로는 예수를 알았지만 더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행18:24-28에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는 사람이었지만 성령세례에 대한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신령한 삶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성경을 예수로 해석하고, 또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아가서도 열리고 계시록도 열립니다. 성경 66권이 밝히 열립니다.

 

2. 눈을 고치면 자신이 보입니다.

 

딤전1:15에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의인이라 할 만큼 훌륭한 사람입니다. 빌3:4-6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다음부터 이 모든 것을 해로 알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나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에 얼마나 악하게 행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이 죄인이라 했을 때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한 고백은 아닙니다. 교리적으로는 예수 믿었으니 의인입니다. 성령으로 변화 받았으니 성품도 의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과거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감사할 수 있고 그래야 진정으로 뉘우친 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305장 찬송처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 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찬송할 수 있습니다. 죄인임을 알지 못하면 이 감격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걸 알았기에 바울은 더욱 주를 위해 생명 바쳐 살기를 원했습니다.

 

3. 눈을 고치면 은혜가 보입니다.

 

바울의 눈이 고침 받은 또 다른 증거가 고후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자기를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보았습니다. 진리 안에서 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우리들은 특별한 관계가 없지만 예수 안에서 보면 그 어떤 혈육보다 더 귀한 형제요 자매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나는 자녀입니다. 새 사람입니다. 권세 있는 사람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천사가 수종을 드는 사람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주신 자기의 새 자화상을 인정하고 확신하며 살아갈 때 기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사랑하시는 귀한 존재라고 믿으면 귀한 존재로 살게 됩니다.

 

복음서의 행적과 기적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기록입니다. 우리들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믿음만 가져도 예수님처럼 기도의 성공자가 되고, 바람과 풍랑도 꾸짖어 잠잠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분이 성령 충만을 경험했을 때 천지만물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전에는 보이는 것도 다 슬프고 허무했지만 은혜 받고 보니 누구 한 사람 예쁘지 않는 사람 없고 어떤 무엇하나도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수 윤복희 씨가 그랬다고 합니다. 은혜 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그 감격을 억누를 수가 없어 집집마다 다니며 ‘윤복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디에서 뮤지컬 공연이 있으니 꼭 참여해 주십시오.’ 하면서 안아주고 다녔다고 합니다. 눈이 열리면 은혜가 보입니다. 말씀으로 눈이 열립니다. 여러분은 말씀으로 눈이 열려졌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4. 눈을 고치면 사명이 보입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이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로 봉사하다. 섬기다는 의미인데 일생 목숨 바쳐 감당해야 할 위로부터 부름 받은 일입니다. 사명은 절대적이고 불변의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절대 응해야 하며 우리 생명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독일전란 때 자유를 애호하는 자였다. 나는 이것을 보수하기 위하여 대학교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독재자의 탄압 아래서 모든 대학교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다시 신문 편집자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독일의 자유를 위하여 글을 쓰던 유명한 저술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은 히틀러의 탄압 아래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전에 교회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 나는 교회에 대하여 애정과 탄복을 느끼는 바이다." 이처럼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인류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눈이 열린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5. 눈을 고치면 천국이 보입니다.

 

빌1:23-24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육신을 떠나 천국에 가고 싶은 욕망이 더욱 크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천국이 보이지 않으니까 천국 가고 싶지 않지요. 천국이 보이기만 해 보세요. 바울과 같이 됩니다.

 

고후 12장에 나오는 천국 간증은 바울의 간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으면 천국을 가보지 않았지만 천국이 믿어지고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믿음이 다가 아닙니다. 소망도 넘치시기 바랍니다. 천국찬송을 장송곡으로 생각하는데 장송곡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불러야 할 천국찬송입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진 자만이 진정 천국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눈 먼 자도 뜨게 하신 만병의 대 의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사울의 눈의 비늘이 떨어진 것처럼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눈에 무지와 편견의 비늘이 떨어지고 고침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성경이 보이고 자신이 보이고 은혜가 보이고 사명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는 가장 눈이 밝은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강림주일설교. 각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신 성령 하나님 (사도행전 21~4 )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아버지께서 약속 하신 것을 기다리라”(1:4,5)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그 대로 열흘이 지나서 성령이 강림 하셨습니다. 이날을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이라고 부르는데, 오순절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오늘입니다.

 

특별히 올해 성령 강림주일에는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현장예배를 회복하는 의미로, 총회의 지침에 발맞추어 오늘을 예배 회복의 날로 선포하며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2천 년 전에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하셨던”(2:2,3) 성령 충만의 역사가, 오늘 예배하는 00교회의 모든 성도의 머리위에, 심령위에, 삶의 모든 시간 위에 회복으로, 능력으로, 소망으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도, 성령이 누구이신지, 성령이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세 가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성령은 누구신가에 대해서, 2. 성령은 어떤 일을(나에게) 하시는가에 대해서, 3. 마지막으로 성령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짐)을 고백해 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말씀 드릴 때 성령의 큰 감동 주심으로, 성령의 실체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첫째, 성령은 누구이신가?(어떤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해 오해하거나, 너무 쉽게 생각하기를, 성령은 능력이나 힘(Power)을 행사하는 존재, 특별한 체험을 하게하고,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하면 연상되는 것이, 뜨겁다, , 바람, 비둘기 이런 것들을 연상합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면 예언, 방언, 신유(병 고치는 은사), 축사(귀신 쫓아내는 사역) , 신비한 기적이나 이적 현상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성령이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런 인식은 성령을 아주 제한적으로, 그리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생각 할 때 복잡할 것 없이 단 하나의 명확한 인식만 가지면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십니다.아멘. 우리 함께 따라 해 보겠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십니다아멘.

 

성경에서 성령이 하나님 이라는 단언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11절에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의 210절에서는, “~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일을, 성령도 동일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땅을 판 돈을 일부 숨긴 아나니아에게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3~4)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성령을 속이는 것이 때문에, 이 또한 성령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다른 많은 기록에서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성령은 분명하게 삼위일체 하나님 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정의 할 때 가장 중요한 용어가 동일 본질이다. 구별은 되지만 구분은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신데 세 분의 위격(位格, persons,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별되어 일하고 계시지만, 본질적으로 구분(분리) 되지 않는 하나의 본체라는 말입니다. (The three persons are distinct, yet are one "substance(실체,본질), essence(본질) or nature(본성,성품,특성)". 들으셔도 말이 어렵죠. 신학 공부하신 분들도 어려워하는 용어입니다.

 

이 말씀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열이나 순서나 능력이나 위치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불려 진다고 해서 서열이 두 번째 라는 뜻이 아니고, 성령님이 세 번째로 불려 진다고 해서 힘이 제일 약하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한 전지전능하심으로 함께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을 대할 때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라고 부르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학생이나 목회자가 아닌 이상 굉장히 어색합니다.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우리가 성령을 대할 때, 단순히 성령님 이라는 인식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을 대하듯이, 성자 예수님을 대하듯이,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남달라지실 겁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해 드릴 때, 위로와 평강의 은혜가 넘치도록 임하게 될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항상 바라고 원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의 충만하신 강림의 역사가, 모든 인생의 믿음의 여정 위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둘째, 성령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1)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 하시고, 예수님이 가르치고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이 세 가지가 성령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직접 말씀 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다”(15:23), 성령이 예수님을 증거 하시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2-13) 성령이 진리로 인도 하시죠.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성령이 예수님의 모는 언행을 복습하게 해 주시죠.

 

이렇게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이 구원자요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사역, 이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함께 미래를 약속 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계속 알아 가시려면 절대적으로 성령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죄와 사망에 대해서,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진리와 거짓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성령을 통해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성령이 하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은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중생, Born Again) 하십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3,5)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새 삶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고, 죄에서 돌이키기로 진심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에 성령은 그 믿는 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십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영접) 누구나 다 이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령은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고, 들어가게 하시는 도움의 역할을 해 주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결코 새 사람(의인)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하고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거듭 날 때의 상황, , 믿음, 고백, 회개가 내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거듭남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조건들이 계속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있다면, 이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11:6)고 했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즐겨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고 계시다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라고 했으니, 매일 같이 구원자 예수님을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 속에 당당히 살아가고 계시죠. 그렇게 하고 계시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2:5, 16) 했으니,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죄와 악에서 돌이키려는 시도를 계속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계시다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잘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스스로 점검 해 보시고, 내가 거듭난 사람으로 무엇에 소홀하고 있는지 계속 점검하고 내 믿음을 지켜가야 합니다.

 

3)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아멘.

 

성령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사역 중에 이토록 눈물 나는 말씀 구절이 있을까요? 가족도 나를 위해 함께 슬피 울어주지 않는 각박한 세상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지라도,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고 버릴지라도, 오직 성령 하나님은 내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영원히 내 삶을 지켜 주시고, 내 상처를 아파하시고, 내 힘듦을 안타까워하시고, 내 실패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인생의 괴롭고 쓴 맛을 본 후에라도, 다시 돌이켜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위로자요, 상담자요, 인도자가 되시기 때문에, 찾고, 긴급호출 하시면 언제나 응답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에 대해서 설명 드린 이 세 가지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꼭 기억 하십시오.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것, 성령의 중심 된 사역은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시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들어 주실 수도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하려고만 고집 부리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고단해 지는 것입니다

 

3. 셋째, 성령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태도

 

오늘 성령 강림 주일, 그리고 예배 회복의 날을 기점으로 나는 앞으로 성령 하나님을 대하면서 이 세 가지만은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새로운 다짐을 스스로 고백해 보겠습니다. 힘차게 따라하시고, 그대로 실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따라합니다.

 

첫째,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

 

둘째, 성령을 소멸하지 말자.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셋째, 내 몸은 성령의 전이다.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너희 몸은 ~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우리 몸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프면 성령도 아프고, 내가 기쁘면 성령도 기쁘고, 내가 못된 짓 하면 성령은 근심 하십니다. 내가 성령에 의지 하지 아니하고 유리방황하면 깊이 탄식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면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 이후 00교회 모든 성도는, 각 자의 자리에서 삶의 예배자로 온전하게 회복되시길 바라며, 그 삶의 자리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능력 주심과 소망 주심이 강하게 역사하는 성령 충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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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셔서, 믿음 가운데 승리의 길을 걸어가도록 은혜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천국 가는 그날 까지 오직 성령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기쁘고 행복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순절의 뜻: 성령 / 21-13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오순절에 된 일입니다. 우리 교회 월력(月曆)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지는 다만 둘이라고 어떤 분은 말하였습니다. 하나는 부활절, 또 하나는 오순절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절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복음의 내용이 교회에 주어졌고 오순절에는 성령께서 오심으로 큰 능력이 교회에 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교회에 성령께서 오신 일은 실로 큰 일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떤 공장의 시업(始業)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공장 안에 들어가니까 잘 수리하고 기계를 잘 정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은 매우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거기 단추와 같은 작은 스위치를 저보고 누르라고 해서 그걸 누르니까 갑자기 소리가 나면서 모든 기계가 돌아가기를 시작했습니다.

 

스위치를 누를 때 그 기계 속에 동력이 들어간 까닭입니다. 물건을 생산하려고 할 때, 공장의 기계를 정비하는 것도 필요하지마는, 동력이 없이 기계만 가지고는 일을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여러 기관도 있고, 조직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정비가 되었다고 하지마는 교회에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오순절을 기념하는 주일인데 우리가 초대교회에 돌아가서 어떻게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하였는가 이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十四十六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내려가서 十六절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예수 임께서 마지막 저녁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四十일 동안 제자들에게 다 나타나신 후에 바로 승천하시기 전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 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몇 날이 못 되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텐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분부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명령을 했습니다.

 

이 약속과 명령대로 제자들을 비롯하여 그들과 같이한 이들은 꼭 순복 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순복 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에 계속해서 모였습니다.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간구의 기도만은 아니었던 줄 생각합니다. 과거 그들의 여러 가지 실패한 것과 여러 가지 잘못된 것과 여러 가지 죄도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열흘 째되는 날, 과연 약속대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그 믿음, 주님이 분부한대로 순복하는 그 순복, 죄를 회개하면서 간구 하는 그 기도, 주님의 약속이 꼭 이루시리라고 기다리는 그 마음, 이런 모든 것은 성령을 받는 전제조건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준비가 있은 후에 성령께서 약속하신 대로 임하였습니다. 이런 전제조건은 언제나 변치 않는 줄 압니다. 지금도 참된 믿음이 있고, 순복하는 마음이 있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교회에는 성령께서 충만히 임재 하십니다.

 

 

사도행전 장에서 우리가 읽었지마는 성령께서 임재 하실 때에는 두 가지 상징이 같이 따라옵니다. 하나는 급한 바람소리가 들렸고, 또 하나는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나는 바람, 하나는 불, 이 두 가지가 상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성경을 보아도 이 신약시대에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도 성령께서 임재 한 기록은 있지마는 이런 현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첫 번에 이와 같은 성령이 임한 것은 이런 상징을 통해서 성령의 성품이 어떠한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가 바람을 잠깐 생각해보면, 이 바람이라고 하는 것에는 생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 헬라 말에나 히브리말에는, 바람이라고 하는 말이 영이라는 말, 숨결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원리를 가르치실 때에 바람을 이야기하면서 바람이 불기는 불지마는, 우리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자가 꼭 이러하니라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스겔 三十七장을 보면 그의 이상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어떤 골짜기에 가니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는 말씀이네가 이 마른 뼈를 향해서 이렇게 예언을 하여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

 

바로 이 말씀 가운데 생기라고 하는 말은 숨결 혹은 바람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그와 같이 예언할 때에 사방에서 생기가 그 마른 뼈 속에 붙어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부활하여, 일어서게 되었는데, 보니까 큰 군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도 곧 성령은 생명이요, 성령이 임하는 곳에 중생이 있고, 성령이 임한 곳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또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능력의 상징입니다. 비바람이 아무리 부드럽지마는 엄동설한의 찬 눈을 다 녹여 버립니다. 반면에 급하고 강하게 부는 바람은 바다 물결을 요동케 합니다. 심지어 산을 가르게 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였다는 욥기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바람으로 임하였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 사람들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 불같은 혀가 보였다고 하는 뜻도 역시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언제든지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 가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실 때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으나 밤에는 그 구름기둥 가운데 불이 보였습니다. 즉 불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혹은 가멜산상에서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한 사실도 우리가 기억합니다.

 

불은 빛을 의미합니다. 불은 순결을 의미합니다. 불은 뜨거운 열을 의미합니다. 그들 위에 성령이 임하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에 빛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므로 하나님으로 충만해졌다 고 하는 뜻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그리스도로 충만해졌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므로 진리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니 생명으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으로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 이라는 뜻은 쉽게 말하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릇에 물이 가득하면 그 그릇은 별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빈 그릇이 소리가 많이 납니다. 빈 수레가 소리가 더 많이 납니다. 이 제자들도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기 전에는 쓸데없는 소리가 더러 들렸습니다.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이냐, 누가 왼편에 앉을 것이냐, 누가 크냐 하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그 심령, 성령이 충만한 그 가정, 성령이 충만한 그 교회는 잡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누가 크냐고 불평하는 소리는 말할 것 없고 심지어 어떤 교회서는 싸움하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은혜가 충만치 못해서 그렇습니다. 충만하면 소리가 없습니다.

 

또 여러분 기억하세요. 어떤 그릇에 무엇이 충만하면 다른 것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물리학상으로 불가입성의 원리라고 하지요. 동일한 공간에, 동일한 시간에 두 물체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이 가득할 때에는 그것이 좀 나오면 들어갈 수 있지마는 가득하면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가운데 충만하면 세상의 잡념이나 여러 가지로 불결한 생각이나 교만이나 허영심이나 이런 것들이 들어갈 수 없는 줄 압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가 충만하지 못하므로 종종 잡념이 들어가고 허영심이 들어가고 정욕이 들어가고 불결한 생각이 침노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은혜가 충만하면 잡념이 못 들어갑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또 보세요. 무엇이 충만하면 넘쳐서 흐릅니다. 컵에 물이 가득하면 물이 넘칩니다. 이 때에 제자들과 一二0명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니 이와 같은 충만한 은혜가 넘쳐흘렀습니다.

 

우선 입으로 넘쳐흘렀습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가 가득 하니 자연히 입을 벌리게 될 때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니 자연히 그리스도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우리가 읽은 대로 오순절에 특별한 한 가지 이적이 더 따랐는데 그것은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사는 유대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지방 말들을 다 합니다. 이 때에 성령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 지방 사람들의 말, 즉 외국 방언을 말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참 이상한 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마는 사실 깊이 생각하면 그다지 큰 이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각각 그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줄 압니다. 그러치 않아요? 가령 성령께서 우리 한국사람에게 말할 때에는 한국말로 지도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미국사람한테 말할 때에도 한국말로 하겠습니까? 영어로 하는 줄 압니다.

 

중국 사람한테 말할 때에는 중국말로 성령께서 지도하는 줄 압니다. 요컨대 여기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말하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한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진리로 말씀하셨지마는 언제든지 알아듣게 말씀했습니다.

 

전에 평양에서 어떤 시골 목사가 가서 서경회를 한 번 해달라는 부탁을 하니까 그 목사가 조금 있다가 대답하는 말이그 교회에 내 설교를 알아들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나요?하고 물어 보더랍니다.

 

설교는 어려운 술어를 쓰면서 하는 것이 혹 자기 지식의 자랑이 될는지는 모르지마는 남이 알아듣지 못하면 암만 깊은 설교를 해도 쓸데없는 줄 압니다. 성령께서는 다른 이들이 알아듣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개인으로 전파할 경우에도 그 사람이 알아듣게 말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압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충만하니 자연히 사랑이 넘쳐서 유무상통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이 손으로 넘쳤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니 자연히 그 하나님의 사랑이 손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미쳐서 유무 상통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그 때의 교인들 가운데는 베고픈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혹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주머니 끈은 풀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때 주머니 끈이 다 풀렸습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넘쳐서 베고픈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교회에도 이와 같은 성령의 은혜가 충만해서, 우리 교회 가운데 배고픈 사람이 하나도 없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 온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사랑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이것이 넘쳐서 이 땅에 베고픈 사람이 없는 나라가 될 때가, 속히 왔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힘써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들은 성령의 사랑이 충만할 뿐 아니라 성령의 다른 열매도 넘쳐흘렀습니다.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모든 열매도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장 마지막에 이들의 생활 모습을 이런 말로 기록하였습니다.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모든 은혜가 넘칠 때에 이와 같은 생활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이런 말씀으로 소개했습니다.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예수 님께서는 성령과 불의 세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의 경험을 이런 말로 기록해서 지금까지 남겼습니다.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의 마음 가운데는 아무리 침묵할래 야 침묵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불붙는 무엇이 있어서, 답답할 뿐 아니라 그 불이 골수에 사무쳐서 잠잠 할래 야 잠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의 불이 붙은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휫휠드(Whitefield)라고 하는 분은 기도할 때에 늘 이런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주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요한 웨슬레 같은 이는 청년들에게 흔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청년들이여 네 영혼이 하나님의 불로 항상 불타게 하여라.우리의 심령 속에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해서 이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의 불길이 붙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이 사랑의 불길을 던지러 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본래 은혜를 받았었는데 그 불이 꺼지는 것 같아서 다시 불 일 듯 일으키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혹은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일할 때에 물론 지식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하고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이 하나님의 불길이 그 심령 속에 붙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남녀전도회가 있고 학생회가 있고, 청년회가 있고, 평신도 회가 있지마는 이런 단체만 조직한다고 무슨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단체 가운데, 단체를 지도하는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랑의 불이 붙을 때에만 그 단체, 그 기관이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오순절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구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구할 것은 이 성령의 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불입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불이 우리 교회에 임하고 나아가서 온 교회에 임하고 이와 같은 불이 천리를 요원의 불과 같이 붙어서 모든 부정과 불의와 부패를 불살라 버리고 이 땅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정의와 질서와 화평이 이룩되기 위하여,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한경직 목사


16:19-34/ 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16:25)

 

바울과 실라의 빌립보 전도의 일화가 사도행전 十六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점을 친다고 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 준 일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감사히 생각하는 것보다도 그 여자를 통해서 자기에게 들어오던 수입이 없어지는 것이 분해서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이 사람들은 온 성을 요란케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 로마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풍속을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송사 했습니다.

 

그 때에 관원들은 사정을 잘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그냥 많은 매를 때리라고 명령하고 매를 친 후에 깊은 감옥에 가두고 발을 착고(着固)에 채워 두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바울과 실라가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바울과 실라는 그 날 밤중쯤 되어서 성경에 있는 대로 기도를 드리고 또 하나님을 찬미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혼란 가운데서 간수는 결국 회개하고 온 가정이 주를 믿게 되었고 바울과 실라도 석방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일화를 생각하면서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이라는 말씀을 잠깐 묵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바울과 실라가 찬송과 기도를 드린 때는 매우 깊은 밤이었습니다. 또 그들이 처한 환경도 말하자면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고, 착고에 발이 채워져 있고, 억울한 매를 많이 맞았으니 마음도 답답할 것이고 몸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루에는 낮도 있고 밤도 있습니다. 인간 생활에도 낮같은 때가 있고 밤 같은 어두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도 때가 있습니다. 무사할 때가 있습니다. 봄 동산과 같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옛 글귀와 같이,천하는 태평춘(天下太平春)이요 사방은 무일사(四方蕪一事).이런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밤과 같은 때가 또 있습니다. 어두운 때가 옵니다. 위기, 역경, 비상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갈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환난의 밤, 질병의 밤, 실패의 밤, 슬픔의 밤, 사망의 밤도 올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깊은 밤에 바울과 실라와 같이 기도와 찬송으로 깊고 어두운 밤을 변화시켜 승리의 새 아침이 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신앙의 위대한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는 이런 때에 흔히 낙심합니다. 실망합니다. 타락합니다. 자학하고 자멸하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러한 깊은 밤이 올 대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기 바울과 실라와 같이 우선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도 야고보서 十三절 이하에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의 밤이 올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병든 자가 있느냐 교회의 장로를 청하여 기도할 것이니라했습니다.

 

환난의 밤이 올 때에 특별히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시편 一一六편에서 몇 절을 읽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부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했습니다.

 

환난의 밤이 올 대에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五十十五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환난의 밤에 그를 부르면 건져 주시겠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깊은 밤, 십자가를 내일 아침에 둔 가장 캄캄한 깊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승리하시고 새로운 힘으로 십자가를 대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에 처자와 우 양을 많이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서 돌아옵니다. 거의 요단강 가에까지 왔는데 자기 형 에서가 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마중 온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이 왔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까 겁이 났습니다. 말하자면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자기는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얍복강 여울 옆에서 밤새도록 어떤 분을 만나서 씨름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기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야곱이 깊은 밤에 기도를 통해서 마지막에는 승리를 하였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변해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승리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깊은 환난의 밤에 기도로써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요나도 적은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가라고 하는 니스웨로는 가지 아니하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 길이 평안할 리가 있습니까?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바다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물고기 배속가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범죄와 실패의 깊은 밤에 요나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결과는 그런 사람이 변해서 위대한 선지자 요나, 모든 니느웨 사람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자가 된 것입니다.

 

유혹과 시험의 밤은 기도만이 승리합니다. 다니엘, 느헤미야 같은 애국자들이 깊은 민족적 밤에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하는 얘기를 우리가 구약 가운데서 읽어봅니다.

 

국가적 위기를 당할 때에도 먼저 힘쓸 것은 기도입니다. 역경의 밤, 고통의 밤, 슬픔의 밤을 당하는 이가 있습니까?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때야말로 특별히 기도를 힘쓸 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를 힘쓰면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고 할지라도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는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에는 기도가 변해서 찬송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둘째로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찬송이었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에도 기도하는 이는 마지막에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는 찬송으로 마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되면 자연히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밤이 아무리 캄캄해도 어둡고 괴로워도 찬송은 부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절 이하에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그래서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슬픔의 캄캄한 밤에도 기도하는 이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과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꽃 가운데서도 타지 아니할 것이요, 강을 건널 때에도 침몰치 않을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이들은 캄캄한 밤에도 주의 음성을 듣고 오히려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미국에서 마치고 폐가 약해져서 미국 서 남방 뉴멕시코주의 알바버치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있는 장로교 요양원에 가서 한 년 동안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동안에 한 번은 거기에 와서 오래 치료하던 환자 한 분이 세상을 떠나서 저녁에 추도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저도 참석했는데, 그 추도 예배의 다른 순서는 다 잊어버렸지마는 그 예배 도중에 고인의 젊은 부인이 조가를 직접 부르던 모습을 지금까지도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찬송가를 독창하였는데 그 독창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에 세상 떠난 이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폐가 약해져서 그 요양원에 치료하러 오게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사귀어 그 장래에 가정을 이루기로 서로 약속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처럼 병으로 공부를 못하게 되니 대학을 졸업한 그 여자는 멀리 버지니아주에서 그 곳까지 와서 병원 원장의 서기 일을 보면서 그 환자의 치료비를 도와주면서 사랑하는 이를 간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불행히도 그 남자의 병이 중해져서 의사는 얼마 살지 못하겠다고 최후의 선언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자는 목사에게 찾아가서, 자기는 일생을 이 남자와 같이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의 병이 악화되어 며칠밖에 살 수 없다고 하니 이 남자의 성이라도 인계 받을 수 있도록 결혼식을 좀 해 달라고 청구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풍속에 의하면 남녀가 결혼하는 경우에는 남자의 성을 여자가 받아서 아무개 부인이라 불리 우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처음에 좀 주저했지마는 부탁이 간절하고 또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결국 허락을 했습니다. 마침내 남자는 침대에 누워 있고 여자는 신부로 단장을 잘 하고 병실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그 여자는 병원에서 계속 일하면서 이 남자를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그 정성에 의해선 지 결혼식을 한 후에 그 남자는 거의 년을 더 살았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년을 더 산 것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여자는내가 지금까지는 한 남성을 위해서 내 온 몸과 마음을 바치며 봉사해 왔지마는 이제는 이 병원에 들어오는 모든 환자를 위해서 내 일생을 바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또 사실 그대로 했습니다. 그 후에 이 분이 병원을 위해서 어떻게 열심이었던지 그 병원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일을 봅니다. 온 병원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이 부인을 특별히 방문하기 위해서 알바버그에 내렸던 일이 있습니다. 또 제가 지난 월에도 미국 남방을 여행할 때에 전화로 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거의 八十이 됐는데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부인의 일생을 보면 문자 그대로 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과 봉사의 생활을 계속해온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밤의 노래 소리는 특별히 아름답게 들리지 않습니까? 가을밤의 기러기 소리가 얼마나 더 아름답게 들립니까? 여름밤의 두견새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립니까? 장량(張良)의 옥통소의 소리는 강동자제(江東子弟) 천명의 간담을 녹였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 동양의 사화는 너무나 유명한 얘기지요. 캄캄한 밤에 부르는 찬송은 다른 이들에게 큰 감화를 줍니다. 큰 환난의 밤에도 믿음으로 위로를 받아서 늘 화평과 즐거움과 신앙과 봉사의 생활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큰 감화를 주고 무언의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사실 그런 이들이 많은 줄 압니다. 二五 때에 혹은 다른 때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렸습니다. 혹은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신앙으로써 찬송과 기도를 계속하면서 꾸준히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고 여러 가지로 봉사를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밤에 기도와 찬송의 생활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에게 축복이 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밤에 찬송은 특별히 아름답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깊은 밤중에 억울한 가운데서 기도와 찬송을 불렀더니 그 결과로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긴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마는 이 결과로 간수가 회개하고 온 가족이 회개하였습니다. 아마 다른 죄수들도 회개한 죄수가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때에 부르는 기도와 찬송은 하늘에까지 미칩니다.

 

깊은 밤중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리는 기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찬송은 하늘에까지 미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헛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의 일 절과 같이 훗날이 춥고 어둡고 찬송을 끊지 마세요. 아무리 날이 춥고 어둡다고 하지마는 찬송을 끊어서는 아니 됩니다. 계속해서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문자 그대로 환난과 고통의 밤을 지나가는 이들도 적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기억하십시다. 이럴 때일 수록 기도와 찬송을 끊지 마셔야 합니다. 더 열심히 불러야 합니다. 밤은 늘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일의 아침이 옵니다. 그렇게 캄캄하던 욥의 밤도 결국은 지나갔습니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밤이 왔다고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새벽 전이 제일 어둡다고 합니다. 나의 당하는 밤이 매우 캄캄하면 캄캄할수록 벌서 그 밤이 거의 지나가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도와 찬송으로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올시다.

 



새롭게 되는 날 (319-21) |2019년설교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이 시간 새롭게 되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독수리가 30년 쯤 살면 부리나 발톱이나 날개가 낡아 더 이상 사냥하지 못함으로 생을 유지할 수 없는 시기가 오는데 그 중 극히 일부의 독수리는 낡은 부리를 바위에 부딪쳐 빼고 새 부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다 새 부리가 나면 그 부리로 발톱을 물어뜯어 뽑고 깃털 역시 뽑아버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모한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 구실을 다하면서 40년가량을 더 산다고 합니다.

 

이 말이 성경에 있는 것을 보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103:5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웰빙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건강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행했지만, 요즘은 힐링이라는 용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힐링(healing)이란 치료나 치유를 뜻하는 영어 단어로 그만큼 현대인들이 지쳐있고 몸과 마음의 치유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힐링은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진정한 힐링은 어떻게 옵니까?

 

1. 깨끗이 씻음 받을 때 옵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했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은 영원불변의 영적 공식입니다. 그대로 해보세요. 그래서 야고보는 병들었을 때 죄를 고하며 기도하라 했습니다.

 

57:21"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66:18에는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하셨습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예수를 핍박하던 삶은 가시채를 발길질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도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야를 죽였을 때 그의 심령은 진액이 마르고 그의 가정에는 칼이 떠나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한 로마의 왕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갈등으로 아들 크리스파스를 죽인 후 죄책감으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신전에 사죄하러 갔지만 신관은 로마 신전에서는 사죄의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죄의 길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골도바의 감독 호레야스를 통하여 십자가의 무한의 은혜를 듣고 제자가 되고 비로소 평안을 얻었습니다.

 

119:165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했습니다. 에서를 맞는 얍복강의 야곱과 같이 자기를 낮추고 낮추며 하나님을 높이고 높이며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죄가 남아있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평강 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2.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14: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것만큼 평안하고 즐거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리는 것보다 먼저 은혜를 받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12:32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리라하셨고, 12:49-50"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셨습니다.

 

서울 한남동에 어느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여러 복잡한 문제로 항상 근심하며 다투고,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고 술을 마셔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시골에서 올라온 아주머니를 가정부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언제나 평안해 보였고 찬송하며 명랑했습니다. 주인이 사는 안방은 지옥이었지만, 가정부 아주머니가 사는 행랑채는 천국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가정부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도 기쁨이 없는데 아주머니는 남의 집에 살면서도 늘 기쁘니 그 이유가 뭐요?" 가정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도 없고 또 아무 것도 가져가지도 못합니다. 입을 것과 마실 것이 있으면 족하고,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셨으니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즐거울 뿐입니다. 이제 병들면 이 몸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갈 것이니 아무 걱정도 없고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자신이 지금까지 헛 세상 살아온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처럼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은 어떤 지각보다 더 뛰어나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4: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셨습니다.

 

3. 마귀를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불안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이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했습니다. 마귀만 떠나면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평안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은 더 강도 높게 신앙 생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만있으면 마귀는 자기를 은폐하고 다가와 온갖 도적질하고 죽이는 일을 자행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면서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습니다. 영적 세계를 알고 신앙생활해야 오해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러신고 하나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만드시고 참 하나님의 사람만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없어서도 그 시험을 예방하기 위해서 더욱 강도 높게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16:7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하나님께서도 기쁘시게 해주십니다. 에녹을 보세요. 일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니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우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가 땅에 살아도 천국생활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기뻐하십니다. 69:30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그래서 찬송하는 다윗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찬송하면 성령이 임하시고 영적 권세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은 전도를 기뻐하십니다. 화목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5:10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했습니다.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2:26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 보세요.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은 약 800만 분의 1이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섬겨 복 받을 확률은 100%입니다. 뜬구름 잡지 말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5.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3:15-17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4:5-6에도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 하셨는데 우리 성도들을 바라보는 저의 마음이 늘 그렇습니다. 이 땅 위에는 여러분을 절망에 빠뜨릴 일들이 많은데 분별하지 못하고 시험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자연치유가 100배는 나아요. 나쁜 선택을 해서 하나님 원망하지 말고 더 좋은 치료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합니다. 천국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힐링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고 은혜 받고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지혜와 지식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큰 도우심 받고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가장 기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성령 충만 (19:1-7)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성품이나 행실로는 천국에 갈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양심적으로 시인한다면,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했다면 구태여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티끌만큼도 죄가 없으신 분으로 어떤 죄인이든지 그 예수님만 믿으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공로로 죄 사함과 구원을 얻게 됨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겨우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것은 내 힘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리가 곧 믿는 자의 승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문제는 지금 내가 그와 같이 담대한 믿음과 승리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낱 이론일 뿐 우리의 현실은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고난이나 실패를 당하게 되면 위축되고, 두려워하기 잘합니다,

 

상황에 따라 때로는 불신자처럼 타협하기까지 하는 연약한 모습 속에서 과연 믿음이 승리한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뜻이면

 

사도 바울이 우상이 극심하고 음란한 고린도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에베소를 거쳐 안디옥으로 귀환함으로 험난한 2차 선교 여행을 마감하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해안에 위치한 아시아의 최대의 도시로 고고학적 발굴과 복원을 통해서 얼마나 거대한 도시인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한 몇 가지는 도서관과, 24000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거대한 극장과, 120년에 걸쳐 세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라 일컫는 아데미 신전과 공공연한 집장촌의 유적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도 고린도 못지않게 죄악이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이 몇 가지만 꼽아 보아도 당시 에베소 사람들이 무엇에 소망을 두며 살았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를 떠나 안디옥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 잠시 들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좀 더 에베소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붙잡지 않아도 오래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에베소에서는 왠지 거절을 하고 떠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18: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18: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현재 계속적으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열망하시는 작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무슨 일을 결정할 때 기준이 사람들이 얼마나 원하는 가가 아니며, 자기에게 얼마나 유리한가가 아니며, 항상 하나님이 얼마나 원하시는가에 최우선을 두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사람들이 머물러 있기를 원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미련 없이 떠나고, 설령 에베소 사람들이 원치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투지와 용기와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강점이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2차 선교 여행 때 아시아 선교를 원했으나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뜻을 돌이켰으며, 그동안 거친 선교지마다 고난이 막심했으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역을 계속해온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돌아오리라고 하던 바울의 말이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것 같아도 세상에서 그 어느 약속보다 확실한 약속인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붙잡을 때는 뿌리치고 떠났던 바울 사도가 3차 선교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삼고 다시 찾아간 이유가 바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전략적으로 중요한 에베소를 이처럼 바울이 뒤늦게 찾아가게 하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쉽게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를 다시 방문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주님의 제자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여기서 윗 지방은 일차 선교 여행 코스가 대부분인 다소-더베-루스드라-이고이온-안디옥-라오디게아 등을 거쳐 에베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마감하며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복음의 씨를 뿌리고 떠나간 사이에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에베소까지 와서 그들에게 물을 주어 제자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러나 아볼로의 약점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러므로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은 에베소의 제자들의 신앙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 누군가 아볼로 보다 더 능한 사람의 가르침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하나님이 바울 사도를 에베소로 다시 보내신 것입니다.

 

이는 내 생각대로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 없으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생의 시계를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야 하고, 내가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자만하지 말아야 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것만이 제일 좋은 믿음인 것입니다.

 

2. 믿음의 필수조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다시 돌아와서 아볼로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질문이 무엇입니까?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 같은 질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많이 들었지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잘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기 자신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 교회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하였을까요?

 

에베소 교회 제자들이 바울이 씨를 뿌리고 아볼로 물을 준 복음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구원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에베소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에베소 교회 하나만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가 동서양이 만나고 헤어지는 교차점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를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의 거점으로 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요한의 물세례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증인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만으로는 그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맨 나중에 사도 바울을 에베소에 다시 보내어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한 후 안수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소아시아의 오순절 예루살렘 교회가 되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같은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에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로 이 열둘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에베소 교회의 G 12의 원형 셀이었습니다. 비록 평신도들이 모인 에베소 교회일지라도 마침내 성령 충만한 소아시의 오순절 교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또한 잘 믿는 사람이었으나, 고난이 닥쳐왔을 때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 약골들이 과연 어떻게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한데 모이게 하시고 성령 충만을 받게 하신 후에 비로소 그들이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와 선교사로 쓰임을 받게 하신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을지라도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좋지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고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기가 더 쉽습니다.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필수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필수는 성령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무능력하고, 기쁨이 없고,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고, 불신자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원인이 바로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할 모든 평신도들이 반드시 받아야 할 필수 학점인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교회

 

그렇다면 죄악이 가득한 에베소를 바울과 열두 명의 제자들이 과연 어떻게 변화를 시켰을까요? 과연 성령 충만한 에베소 교회 안에는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1) 핍박을 개의치 아니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도 바울의 강론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와 같이 불순종과 비방과 도전의 세력들 때문에 부득불 회당에서 철수 하여 두란노 서원으로 이동해야만 할 정도였습니다.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이전에 회당은 안식일 밖에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오히려 두란노 서원에서는 날마다 강론하므로 체계적인 제자훈련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자그만 치 이년간 하는 동안 그 소문을 듣고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바울에게 찾아와서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는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등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탄생하는 명실공이 아시아의 복음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2)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동반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서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시작한 제자훈련은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증하여 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 중에 하나가 바울이 직접 안수를 하지 않고 다만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귀신 들린 자나 병자위에 얹으면 고침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계속적으로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희한하다는 말은 두드러지고 예외적인 이라는 뜻으로 초자연적인 기적이 말씀의 역사와 더불어 뒤따랐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역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3) 아데미를 이기고 승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래 동안 각종 우상과 아데미 신에 의해 짓눌려있던 에베소 지역에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지를 보여주는 희한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그 결과 에베소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영적인 경외감과 더불어 주 예수를 계속적으로 높이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하였습니다.

 

심지어 마술을 행하던 사람이 마술에 관한 책을 불사르고 그와 더불어 주님의 말씀은 더욱 부흥하여 힘을 얻는 영적 승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기서 힘은 통치 세력과 권능을 가리키며, 흥왕은 점점 커진다는 미완료 동사이고, 세력을 얻는다는 말도 점점 강해져서 많은 일을 하게 되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당시 에베소에 얼마나 말씀과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였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후일에 에베소에서 기독교의 승리를 증명하는 하나의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원래 아데미 신상을 안치하는 토대였던 것을 후에 한 그리스도인이 아데미 신상 대신에 십자가를 세우고 이런 비문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데메아스(Demeas)는 마신 아데미의 거짓 상을 없애고 그 자리에 모든 우상을 추방하는 이 표적을 두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 승리에 찬 불후의 그리스도의 상징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바울 사도가 열두 명으로 시작한 에베소 선교에 삼년 동한 혼신을 쏟고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에베소 교회를 영적으로 매우 수준 높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에베소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전반부에는 수준 높은 삼위일체와 예정론과 구속신학만이 아니라, 후반부에는 성령 충만한 성도의 구체적인 생활지침까지 신앙의 양면을 균형 있게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와 같은 에베소서는 오늘에 이르도록 많은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올바른 신학과 성령 충만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은혜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기나긴 아시아와 마게도냐 선교를 접고 그의 평생의 소원인 로마를 향해 나아가는 대장정의 비전을 에베소에서 구체화시켰습니다.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만 믿으면 다가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지라도 성령으로 거듭나고, 현재 내가 성령의 통치에 온전히 굴복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약화시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가 헛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이 헛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겨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복음전파의 장애물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회개하고 사모하고 구하는 성도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일하고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에게 오늘도 변함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만 잘 믿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조건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문제는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 성령 충만을 받았으면서 복음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겨우 구원은 받겠지만 성령 충만한 전도자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늘에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를 위해 열두 제자의 비전을 품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을 믿고 겨우 주일만 지키는 형식적인 신자가 되지 말고 아데미 신과 같은 우상과 죄악에 눌려 있는 영혼을 구하는 전도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미문에서 성전으로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이 시간에는 미문에서 성전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은 예수 이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세 사람이 서로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책에서 읽어본 바다에 관해 설명하면서 바다란 정말 좋은 곳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옆 사람은 피서차 다녀온 바다를 떠올리며 찰삭대는 파도와 시원한 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지막 사람은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들은 진정 바다를 아는 사람들이 아니군요. 책에서 본 바다도, 물놀이를 하던 얕은 바닷가도 바다를 말하기엔 불충분합니다. 저는 얼마 전 해저를 탐험할 기회가 있었는데 해저에 가보니 정말 저 바다 깊은 곳의 물고기와 수초, 생명이 꿈틀거리는 곳, 끝이 없는,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차마 입으로 설명 할 수 없는 곳이 바다였어요."

 

우리 믿음도 주님을 알아도 과연 얼마나 깊이 아는지, 주님의 이름과 그 주님에 대해서만 아는지, 아니면 그 주님의 선하심을 체험해 보고 아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은혜의 깊은데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절름발이로 태어난 일생 거지가 베드로가 외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서 미문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평생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전 문밖에 앉아 구걸만 하고 살던 거지가 일순간에 예수 이름을 만나 그의 인생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세상 말로 기차게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은혜 안에 들어가 기뻐 뛰며 찬송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 이름의 기적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1.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가까우시기 바랍니다.

 

1-2절을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했다고 했습니다.

 

이 거지가 다른 곳도 아닌 성전에까지 나왔다면 아무리 장애자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고전12:22-23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장애인들도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상상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을 받고 큰일을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스티븐 호킹 박사라고 루게릭병을 앓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장애인들도 최소한의 도움 말고는 물리치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이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지만 왜 놀라운 도움을 받은 걸까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얼 했든 하나님과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은 제삼시(오전 9), 제육시(정오), 제구시(오후3) 등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 역시 때를 맞춰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순간 그는 항상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성전은 성령 충만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에 나타난 부흥의 역사도 꼭 동기가 거룩했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김일성의 남침 위협이 어느 때보다 커서 모두들 긴장하며 날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결혼 진학 승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철야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고 은혜를 주셨고 아름다운 믿음의 결실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거룩한 동기를 가졌어도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것보다 동기는 대단하진 않아도 하나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 더 귀합니다.

 

그래서 히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했습니다. 울어도 하나님 앞에서 울면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기뻐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면 그것이 효자입니다. 심지어 나쁜 동기로 왔다가 은혜 받고 참 믿음의 사람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동기로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가까우면 시험들 일 말고 뭐가 있습니까? 나쁜 친구 가까이 하면 물들 일 말고 무엇이 있나요. 복 있는 사람은 죄를 멀리하고 성경을 주야로 읽는다 했습니다. 아무리 박학박식해도 하나님을 멀리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올해는 무엇보다 죄나 세상 가까이 하지 마시고 주일성수 잘하시고 예배 참여 잘하시고 늘 말씀보시고 찬송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저주의 미문에서 은혜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비밀입니다.

 

2. 어떤 식으로든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4-8절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앉은뱅이는 때 아닌 밤에 홍두께 식으로 갑자기 된 일이라 걷고 뛰고 찬송하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도 계획도 의도한 바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 할 때 그는 누군가 도움을 주려나 보다 돈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가 걷기를 구한 것도 아니요, 걸을 만한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즉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100% 타의에 의해서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소리 지르며 잡아 일으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한 얼떨결에 움직인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순종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겨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의든 타의든 무엇에 떠밀려서 하든지 예수 복음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법도 신앙도 없는 이방 땅에서 얼마나 두렵게 살았습니까? 얼마나 두려웠으면 사라 때문에 죽을까 봐서 사라를 아내라 하지 않고 이복누이라고 했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데리고 온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과 동맹한 연합군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책임감을 느낀 아브라함은 계산도 해보지 않고 얼떨결에 자기 수하의 종들을 이끌고 4개국 대 연합군과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큰 승리를 거둡니다. 싸우니까 싸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나약한 자였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싸워보니 승리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의든 타의든 자원하든 억지로든 무슨 이유로든 예수 이름, 예수 복음에 서서 나가보시라는 말씀입니다.

 

4:22을 보면 이 사람의 나이가 40여 세였다고 했습니다. 인생 나이 40여 세란 해볼 만큼 다 해보고 인생이 뭔지 아는 나이입니다. 그만 방황하고 정신 차려 살아야 할 불혹의 나이입니다. 불혹(不惑)이란 이젠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40년간 무엇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40여 년간 스스로 움직여 보지 못한 사람인지라 나는 못한다, 나는 걸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영원히 거지일 수밖에 없다는 바위덩이보다 더 강한 고정관념이 그를 지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런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소리치며 강하게 잡아 다니니 얼떨결에 거부할 수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1,500년 동안 실패와 실패의 연속 속에서 나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하다가 은혜 받았다고 하니까 얼떨결에라도 나도 그렇게 믿고 나아와 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공로 없을지라도 예수 안에서 나를 구원하신 것을 믿고 날마다 감사 찬송하면 그 놀라운 은혜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로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남이 은혜 받은 것에서 도전을 받았든지, 아니면 징계 가운데 살 길을 찾는다든지, 무슨 이유로든 예수 복음을 시인하며 찬송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8-10"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그는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였습니다. 21:17-21"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거지의 믿음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망이라면 나도 저 건강한 사람들처럼 성전 안에 들어갈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신세 한탄은 충분히 자연스런 추측입니다. 그 증거로 그가 낫자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사도들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가며 하나님을 찬송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앉았던 성전 미문에 대해서 역사가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이 문은 고린도식 건축 양식으로 은으로 도금해 입히고 금을 박은 아름다운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울 미(), 미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미문에 앉은뱅이 거지가 앉았으니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는 성전을 관리하는 레위인들이나 출입하는 자들에게 달갑지 않는 눈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건강해진다면 어서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나음을 받자 성전으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앞서간 많은 성도들처럼 나도 하나님 나라의 은혜 속에서 살 수 없을까? 하는 강렬한 소망을 가진 자만이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생활로 이끌어주는 강력한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기쁨 가운데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부러워서 견딜 수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주시려고 해도 사모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후6:2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했고, 107:9"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 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했습니다.

 

얼떨결의 순종도 좋지만 사모의 한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항구적인 은혜생활의 기초입니다. 구원을 사모하고 진리를 갈망하던 영혼이 예수 복음을 만날 때 그는 위대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예수 안에서 이렇게 베풀어 놓으시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은 그의 공로도 사도들의 공로도 아니었습니다. 3:12-13"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직 예수 공로에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구주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영적 변두리에서 방황하며 거지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 시간 진실로 예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 안에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 그 은혜를 감격하며 영원히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미문의 거지에서 성전 안의 영광스런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받는 행복한 가정 (5:1-11, 18:1-4 )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사랑하는 우리 주은혜교회의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셋째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고, 오늘 넷째 주일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성경상에 나타난 두 가정을 비교하면서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고 또 어떤 가정이 불행한 가정인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어떤 화가 한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림 도구를 챙겨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생각하다가 밭에서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추수를 하는 농부들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려놓고 보니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래도 제일 아름다운 그림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개선하여 돌아오는 말 탄 장군을 그려보았으나 역시 온전치 못한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 화가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을 포기하고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고 어린 자녀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정성껏 지은 맛있는 저녁 식사를 차려 놓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화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주 대조적인 두 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가정은 불행한 가정이고 또 한 가정은 아주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행복한 가정, 축복 받는 가정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행복한 부부와 불행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부부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그 모든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유독 단 한가지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게 된 것입니다. 부부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정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가정의 기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혼자서 독처하는 것 보다 둘이 함께 짝을 이루어서 사는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축복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또한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의 아들들에게 축복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불행한 부부입니다. 불행한 부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장의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행복한 부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두 부부를 비교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먼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한창 강하게 역사 하실 때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4:3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가 은혜를 받고 모두가 성령이 충만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모두가 한 뜻과 한마음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4:32-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일러라

 

그런 중에서 구부로 출신 요셉이라고도 하고 바나바라고도 하는 사람이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밭을 팔아서 전액을 교회에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헌금으로 빈민 구제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 일을 활발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에 대한 소문이 온 교회와 예루살렘 안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두 부부가 이 소문을 듣고 자신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판 값의 절반을 감추고 절반만을 베드로 사도 앞에 갔다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축복과 칭찬은커녕 성령을 속인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왜 하나님께 남들이 하지 못하는 거액의 헌금을 하고도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이며, 또 오늘의 우리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오늘 이 시간에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이 부부는 형식적인 외식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한 액수는 바나바가 한 헌금의 액수보다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그 액수가 기록되지 않아서 자세히는 알 수가 없지만 분명히 아나니아는 자기의 밭 판돈의 절반만 헌금을 하여도 바나바가 한 헌금의 액수보다 많으니까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정성된 마음으로 드리는 진실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고서 칭찬을 받으니까 자기도 그렇게 하여서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23:23-27)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바로 이와 같이 외식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밭을 판 액수에서 절반만 하여도 감히 다른 사람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액수이기 때문에 절반은 감추고 절반만 가져다가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이 되었습니다.

 

(2) 성령의 역사를 거슬리고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이 말을 듣는 순간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엎드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된 사실을 모르고 그의 아내 삽비라가 다시 베드로 앞에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5:8-11)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한 말 중에 본문 9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에게 해와를 만들어 주셔서 배필을 삼아 주신 것은 부부가 서로 도우라고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부부의 목적인데 그들은 부부가 서로 함께 꾀어서 하나님을 속이는 범죄를 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부부가 합심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부부가 많이 있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아담과 해와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음은 물론 그의 후손 모든 인류에게 원죄라는 굴레를 씌워 주었습니다.

롯과 그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실 때에 천사의 말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빨리 소알 성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데 두고 온 재산과 물질의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아서 그만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는 부부가 공모하여 온 나라안에 바알이라는 우상을 퍼뜨리고 그 바알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모두 잡아다가 처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과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나라를 도탄 중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그 외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3)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부부가 뜻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 아니고 부부가 꾀하여 사탄의 뜻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부부가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과 헌신을 다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뜻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면 어찌합니까?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라도 하나님 앞에 잘못하면 다른 한쪽이라도 경성하고 깨달아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권면하고 시정하여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는데 오히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이 공모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도 까딱 잘못하면 사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항상 경성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항상 깨어서 경성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나태하고 게을러서 신앙이 잠들어 있으면 반드시 사탄은 가라지를 뿌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항상 기쁨과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또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마귀로 틈탈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3.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 18장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로마에 살고 있다가 AD49-50년 글라우디오가 황제가 된 후에 모든 유대인들과 외국인들을 로마에서 강제로 추방할 때 고린도로 와서 거주하다가 바울이 전도차 고린도에 왔을 때에 바울 일행을 만나서 바울을 크게 도운 사람입니다.

 

(1)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열성적이고도 체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8:26절을 보면 에베소에 머물 때에 아불로라고 하는 사람이 열심히 회개의 복음과 세례를 외치는 전도를 듣고 그를 초청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기도 한 사람입니다.

두 부부는 참으로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합심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였습니다. 로마에서 쫓겨나서 방랑의 생활을 할 때에도 항상 어디서든지 믿음을 잃지 않고 항상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 한 사람입니다. 무슨 일에나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먼저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했고, 교회보다는 내 집 먼저 생각했습니다. 무슨 조그만 일만 있어도 교회를 등한시하고, 무슨 핑계만 있으면 예배를 빠지는 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들의 실상이 아닙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또 누가 왔다고 해서, TV에서 재미있는 연속극을 하기 때문에 그것 보느라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습니까? 이제는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병들어 고통 당할 때는 하나님! 한 번만 살려 주시면 다시는 죄짓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하고 약속해 놓고도 병나니까 잔칫집 가느라고 주일도 빼먹고, 또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하느라고 주일 빼먹고 고단하다는 핑계로 저녁예배는 아예 제쳐놓고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여러분들이 아닙니까?

 

(2)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선교 사역을 잘 도왔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을 잘 도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 일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두 부부는 고린도에서 바울 일행을 만나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 그들은 장막 깁는 일로 돈을 벌어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돕는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하였습니다.

(16:3-4)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바칠 수 있는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당시에는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바울을 훼방하는 무리들도 있었는데 브리스길라 부부는 마음을 같이하여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돕는 후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을 돕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이 두 부부가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마음을 같이 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입니다. 특히 사라는 그의 남편 아브라함의 말에는 절대 순종하는 모범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남편의 말이라면 무슨 말에든지 잘 따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더욱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수넴에 사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여인의 이름도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그의 남편과 상의하여서 자기 집 앞으로 항상 지나다니는 엘리사를 강권하여서 자기 집에 초청을 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또 방 한 칸을 새로 마련하여 모든 가재도구와 집기를 완비하고 엘리사 선지자가 언제든지 와서 편안히 쉴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축복하셨는데 무자 하던 가정에 아들을 낳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약 누가복음 1장에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입니다. 두 부부는 참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무자 하였습니다. 어느 날 사가랴가 반차를 따라서 성전에 직무를 수행하러 들어가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약정된 열 달이 지나고 그의 가정에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두고두고 칭송 받는 축복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이와 같이 믿음 좋은 사람으로서 뜻을 같이 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여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축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둔 보화가 되었습니다.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상급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 성도들은 이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귀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부부가 연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가정이 보면 외짝 믿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부부가 모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가정이야말로 참으로 축복 중에 축복을 받은 가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모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오히려 부부가 꾀하여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두 사람이 다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고 부리스길라 부부와 같다면 더 말할 것이 없이 금상첨화 일텐데 문제는 그렇지 못한데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쪽 하나라도 믿음이 좋아야 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가정과 같이 두 사람이 똑같이 믿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이 체험적인 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가정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대대로 그의 후손들이 천대까지 하나님의 축복 받는 후손들이 되며 쇠하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한 말씀과 같이 부부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부부는 합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부부가 또는 온 가족이 합심을 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여 영원히 쇠하지 않는 축복과 상급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사랑하는 우리 주은혜교회의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셋째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고, 오늘 넷째 주일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성경상에 나타난 두 가정을 비교하면서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고 또 어떤 가정이 불행한 가정인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어떤 화가 한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림 도구를 챙겨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생각하다가 밭에서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추수를 하는 농부들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려놓고 보니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래도 제일 아름다운 그림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개선하여 돌아오는 말 탄 장군을 그려보았으나 역시 온전치 못한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 화가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을 포기하고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고 어린 자녀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정성껏 지은 맛있는 저녁 식사를 차려 놓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화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주 대조적인 두 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가정은 불행한 가정이고 또 한 가정은 아주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행복한 가정, 축복 받는 가정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행복한 부부와 불행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부부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그 모든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유독 단 한가지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게 된 것입니다. 부부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정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가정의 기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혼자서 독처하는 것 보다 둘이 함께 짝을 이루어서 사는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축복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또한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의 아들들에게 축복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불행한 부부입니다. 불행한 부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장의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행복한 부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두 부부를 비교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먼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한창 강하게 역사 하실 때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4:3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가 은혜를 받고 모두가 성령이 충만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모두가 한 뜻과 한마음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4:32-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일러라

 

그런 중에서 구부로 출신 요셉이라고도 하고 바나바라고도 하는 사람이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밭을 팔아서 전액을 교회에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헌금으로 빈민 구제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 일을 활발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에 대한 소문이 온 교회와 예루살렘 안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두 부부가 이 소문을 듣고 자신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판 값의 절반을 감추고 절반만을 베드로 사도 앞에 갔다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축복과 칭찬은커녕 성령을 속인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왜 하나님께 남들이 하지 못하는 거액의 헌금을 하고도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이며, 또 오늘의 우리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오늘 이 시간에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이 부부는 형식적인 외식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한 액수는 바나바가 한 헌금의 액수보다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그 액수가 기록되지 않아서 자세히는 알 수가 없지만 분명히 아나니아는 자기의 밭 판돈의 절반만 헌금을 하여도 바나바가 한 헌금의 액수보다 많으니까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정성된 마음으로 드리는 진실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고서 칭찬을 받으니까 자기도 그렇게 하여서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23:23-27)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바로 이와 같이 외식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밭을 판 액수에서 절반만 하여도 감히 다른 사람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액수이기 때문에 절반은 감추고 절반만 가져다가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이 되었습니다.

 

(2) 성령의 역사를 거슬리고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이 말을 듣는 순간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엎드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된 사실을 모르고 그의 아내 삽비라가 다시 베드로 앞에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5:8-11)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한 말 중에 본문 9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에게 해와를 만들어 주셔서 배필을 삼아 주신 것은 부부가 서로 도우라고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부부의 목적인데 그들은 부부가 서로 함께 꾀어서 하나님을 속이는 범죄를 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부부가 합심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부부가 많이 있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아담과 해와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음은 물론 그의 후손 모든 인류에게 원죄라는 굴레를 씌워 주었습니다.

롯과 그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실 때에 천사의 말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빨리 소알 성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데 두고 온 재산과 물질의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아서 그만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는 부부가 공모하여 온 나라안에 바알이라는 우상을 퍼뜨리고 그 바알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모두 잡아다가 처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과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나라를 도탄 중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그 외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3)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부부가 뜻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 아니고 부부가 꾀하여 사탄의 뜻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부부가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과 헌신을 다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뜻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면 어찌합니까?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라도 하나님 앞에 잘못하면 다른 한쪽이라도 경성하고 깨달아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권면하고 시정하여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는데 오히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이 공모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도 까딱 잘못하면 사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항상 경성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항상 깨어서 경성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나태하고 게을러서 신앙이 잠들어 있으면 반드시 사탄은 가라지를 뿌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항상 기쁨과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또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마귀로 틈탈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3.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 18장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로마에 살고 있다가 AD49-50년 글라우디오가 황제가 된 후에 모든 유대인들과 외국인들을 로마에서 강제로 추방할 때 고린도로 와서 거주하다가 바울이 전도차 고린도에 왔을 때에 바울 일행을 만나서 바울을 크게 도운 사람입니다.

 

(1)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열성적이고도 체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8:26절을 보면 에베소에 머물 때에 아불로라고 하는 사람이 열심히 회개의 복음과 세례를 외치는 전도를 듣고 그를 초청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기도 한 사람입니다.

두 부부는 참으로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합심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였습니다. 로마에서 쫓겨나서 방랑의 생활을 할 때에도 항상 어디서든지 믿음을 잃지 않고 항상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 한 사람입니다. 무슨 일에나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먼저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했고, 교회보다는 내 집 먼저 생각했습니다. 무슨 조그만 일만 있어도 교회를 등한시하고, 무슨 핑계만 있으면 예배를 빠지는 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들의 실상이 아닙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또 누가 왔다고 해서, TV에서 재미있는 연속극을 하기 때문에 그것 보느라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습니까? 이제는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병들어 고통 당할 때는 하나님! 한 번만 살려 주시면 다시는 죄짓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하고 약속해 놓고도 병나니까 잔칫집 가느라고 주일도 빼먹고, 또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하느라고 주일 빼먹고 고단하다는 핑계로 저녁예배는 아예 제쳐놓고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여러분들이 아닙니까?

 

(2)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선교 사역을 잘 도왔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을 잘 도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 일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두 부부는 고린도에서 바울 일행을 만나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 그들은 장막 깁는 일로 돈을 벌어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돕는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하였습니다.

(16:3-4)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바칠 수 있는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당시에는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바울을 훼방하는 무리들도 있었는데 브리스길라 부부는 마음을 같이하여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돕는 후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을 돕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이 두 부부가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마음을 같이 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입니다. 특히 사라는 그의 남편 아브라함의 말에는 절대 순종하는 모범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남편의 말이라면 무슨 말에든지 잘 따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더욱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수넴에 사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여인의 이름도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그의 남편과 상의하여서 자기 집 앞으로 항상 지나다니는 엘리사를 강권하여서 자기 집에 초청을 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또 방 한 칸을 새로 마련하여 모든 가재도구와 집기를 완비하고 엘리사 선지자가 언제든지 와서 편안히 쉴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축복하셨는데 무자 하던 가정에 아들을 낳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약 누가복음 1장에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입니다. 두 부부는 참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무자 하였습니다. 어느 날 사가랴가 반차를 따라서 성전에 직무를 수행하러 들어가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약정된 열 달이 지나고 그의 가정에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두고두고 칭송 받는 축복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이와 같이 믿음 좋은 사람으로서 뜻을 같이 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여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축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둔 보화가 되었습니다.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상급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 성도들은 이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귀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부부가 연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가정이 보면 외짝 믿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부부가 모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가정이야말로 참으로 축복 중에 축복을 받은 가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모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오히려 부부가 꾀하여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두 사람이 다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고 부리스길라 부부와 같다면 더 말할 것이 없이 금상첨화 일텐데 문제는 그렇지 못한데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쪽 하나라도 믿음이 좋아야 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가정과 같이 두 사람이 똑같이 믿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이 체험적인 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가정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대대로 그의 후손들이 천대까지 하나님의 축복 받는 후손들이 되며 쇠하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한 말씀과 같이 부부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부부는 합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부부가 또는 온 가족이 합심을 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여 영원히 쇠하지 않는 축복과 상급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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