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   (행 2:1-4)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첫째는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하는 사건과 둘째는 내가 그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사건일 것입니다. 성령님이 초대교회에 임하신 사건은 지구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인류 최대의 사건이냐 하면 비로소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절을 교회의 생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까지는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으로는 도무지 풀지 못하는 문제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풀리지 않던 사건을 풀리도록 한 날이 성령님의 강림일 입니다. 이 날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후 오십 일째 되는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이 보혜사란 영어로는 돕는 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슬픔을 당하고 있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있을 때 하나님이 언제나 동고동락하시면서 우리의 주인으로 함께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주의 일을 한다는 것처럼 고문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목회 한다는 것처럼 저주는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고,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고, 사람이 거듭나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며, 능력과 기적도 성령의 역사로! 열매 맺는 신앙생활, 능력 있는 신앙생활도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함께 행1:4, 5절을 읽겠습니다. "4)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10일이 지난 후 성령님은 강림하셨고 모여서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사람들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이 약속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때로부터 약 830년 전에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진 약속이기도 합니다. 욜2:28,29절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고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누구에게 주십니까? 행2:3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만이 아니라 어떤 제한된 숫자나 특별한 사람에게만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먼데 사람! 즉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들 속에 저와 여러분이 들어 있는 줄 믿습니다. 이 약속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부어준다는 약속입니다.

특별히 38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무슨 말씀입니까? "회개한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먼데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니 이 약속은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받은 여러분들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행1:8절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권능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여러분의 일생을 드리기를 원합니까? 어느 정도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 이 질문에 "아멘"을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령을 대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행1:15절에는 이 사람들의 수가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는 열두 사도가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도 그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중에 있었고, 예수님의 동생들이었던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누이동생들(마13:55-56, 막6:3),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던 여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집 안의 장남 아닙니까? 장남이 집 안을 책임져야 하는데, 매일 밖으로만 나돌고 집 안 일은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에게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지요? 요한은 아예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7:3-5)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했던 이 형제들이 120명중에 있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 성령 강림 역사를 소개하면서 중요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은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같이 기도를 해도 서로 다른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어 "주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대선의 모든 식구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고 서로 사랑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리워하는 오순절의 모습입니다.

2.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임하셨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임하셨습니다. 어떤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까?
  
첫째는 약속을 붙잡고 기다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인 장소는 "다락방"(행1:13)이었습니다. 일명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 승천의 광경을 바라본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오순절 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승천 할 때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들은 사람은 500여명 정도였지만 10여일 동안 그 약속을 변함 없이 믿고 기다린 사람의 수는 120명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1:14)

어떤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붙잡고 기도에 전무 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약속의 말씀을 강하게 붙잡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관심이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남아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성령 받는 일보다 더 관심 있는 일이 있는 사람들은 그 곳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정말 관심을 많이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는 성도들을 볼 때에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과 교회에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일과 주님의 교회에 대한 관심이 그 외의 어떤 것에 대한 관심보다 더 크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먼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은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가 많습니다. 많은 소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소리가 있습니다. 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습니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방언을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오순절에 주신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20:19-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이 성령을 주신 목적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내 보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심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확신하시고 이 고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인하여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이것을 기대합니다.

1)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불신자가 신자로, 전에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들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2) 인격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장악하기 시작하니 인격이 변화됩니다. 삶이 변화됩니다. 언어가 변화됩니다. 생활이 달라집니다. 열매가 없었던 사람이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3) 능력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들의 몸을 통해서 나타나니 그들이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결심해도 되지 않던 일이! 마음을 먹어도 되지 않던 일이! 그렇게 몸부림치고 안타까워 울어도 되지 않던 일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립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심령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행2:26) 즉 마음의 기쁨과 육체가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다윗의 예언이지만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이와 같이 썩을 수밖에 없는 육체이지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않지만, 마음이 괴로우면 십리길만 가도 지친다."고 했습니다. 스펄젼은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는 웃는 은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만이 참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적인 사건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신실하게 기도하고 성령을 대망 하는 성도들과 교회들에게서 오순절 적인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는 줄 믿습니다.

모쪼록 성령강림절에 우리 모두 성령을 대망 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존재의 변화, 인격의 변화, 능력의 변화, 심령의 변화를 맛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강림주일설교. 각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신 성령 하나님 (사도행전 2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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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아버지께서 약속 하신 것을 기다리라”( 1:4,5)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그 대로 열흘이 지나서 성령이 강림 하셨습니다. 이날을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이라고 부르는데, 오순절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오늘입니다.

 

특별히 올해 성령 강림주일에는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현장예배를 회복하는 의미로, 총회의 지침에 발맞추어 오늘을 예배 회복의 날로 선포하며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2천 년 전에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하셨던”( 2:2,3) 성령 충만의 역사가, 오늘 예배하는 00교회의 모든 성도의 머리위에, 심령위에, 삶의 모든 시간 위에 회복으로, 능력으로, 소망으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도, 성령이 누구이신지, 성령이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세 가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성령은 누구신가에 대해서, 2. 성령은 어떤 일을(나에게) 하시는가에 대해서, 3. 마지막으로 성령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짐)을 고백해 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말씀 드릴 때 성령의 큰 감동 주심으로, 성령의 실체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첫째, 성령은 누구이신가?(어떤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해 오해하거나, 너무 쉽게 생각하기를, 성령은 능력이나 힘(Power)을 행사하는 존재, 특별한 체험을 하게하고,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하면 연상되는 것이, 뜨겁다, , 바람, 비둘기 이런 것들을 연상합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면 예언, 방언, 신유(병 고치는 은사), 축사(귀신 쫓아내는 사역) , 신비한 기적이나 이적 현상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성령이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런 인식은 성령을 아주 제한적으로, 그리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생각 할 때 복잡할 것 없이 단 하나의 명확한 인식만 가지면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십니다. 아멘. 우리 함께 따라 해 보겠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십니다 아멘.

 

 

성경에서 성령이 하나님 이라는 단언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 11절에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의 2 10절에서는, “~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일을, 성령도 동일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땅을 판 돈을 일부 숨긴 아나니아에게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 5:3~4)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성령을 속이는 것이 때문에, 이 또한 성령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다른 많은 기록에서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성령은 분명하게 삼위일체 하나님 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정의 할 때 가장 중요한 용어가 동일 본질이다. 구별은 되지만 구분은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신데 세 분의 위격(位格, persons,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별되어 일하고 계시지만, 본질적으로 구분(분리) 되지 않는 하나의 본체라는 말입니다. (The three persons are distinct, yet are one "substance(실체,본질), essence(본질) or nature(본성,성품,특성)". 들으셔도 말이 어렵죠. 신학 공부하신 분들도 어려워하는 용어입니다.

 

 

이 말씀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열이나 순서나 능력이나 위치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불려 진다고 해서 서열이 두 번째 라는 뜻이 아니고, 성령님이 세 번째로 불려 진다고 해서 힘이 제일 약하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한 전지전능하심으로 함께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을 대할 때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라고 부르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학생이나 목회자가 아닌 이상 굉장히 어색합니다.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우리가 성령을 대할 때, 단순히 성령님 이라는 인식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을 대하듯이, 성자 예수님을 대하듯이,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남달라지실 겁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해 드릴 때, 위로와 평강의 은혜가 넘치도록 임하게 될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항상 바라고 원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의 충만하신 강림의 역사가, 모든 인생의 믿음의 여정 위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둘째, 성령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1)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 하시고, 예수님이 가르치고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이 세 가지가 성령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직접 말씀 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다”( 15:23), 성령이 예수님을 증거 하시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2-13) 성령이 진리로 인도 하시죠.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4:26) 성령이 예수님의 모는 언행을 복습하게 해 주시죠.

 

이렇게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이 구원자요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사역, 이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함께 미래를 약속 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계속 알아 가시려면 절대적으로 성령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죄와 사망에 대해서,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진리와 거짓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성령을 통해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성령이 하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은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중생, Born Again) 하십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3,5)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새 삶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고, 죄에서 돌이키기로 진심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에 성령은 그 믿는 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십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영접) 누구나 다 이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령은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고, 들어가게 하시는 도움의 역할을 해 주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결코 새 사람(의인)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하고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거듭 날 때의 상황, , 믿음, 고백, 회개가 내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거듭남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조건들이 계속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있다면, 이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11:6)고 했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즐겨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고 계시다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 라고 했으니, 매일 같이 구원자 예수님을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 속에 당당히 살아가고 계시죠. 그렇게 하고 계시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2:5, 16) 했으니,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죄와 악에서 돌이키려는 시도를 계속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계시다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잘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스스로 점검 해 보시고, 내가 거듭난 사람으로 무엇에 소홀하고 있는지 계속 점검하고 내 믿음을 지켜가야 합니다.

 

 

3)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성령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사역 중에 이토록 눈물 나는 말씀 구절이 있을까요? 가족도 나를 위해 함께 슬피 울어주지 않는 각박한 세상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지라도,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고 버릴지라도, 오직 성령 하나님은 내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영원히 내 삶을 지켜 주시고, 내 상처를 아파하시고, 내 힘듦을 안타까워하시고, 내 실패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인생의 괴롭고 쓴 맛을 본 후에라도, 다시 돌이켜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위로자요, 상담자요, 인도자가 되시기 때문에, 찾고, 긴급호출 하시면 언제나 응답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에 대해서 설명 드린 이 세 가지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꼭 기억 하십시오.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것, 성령의 중심 된 사역은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시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들어 주실 수도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하려고만 고집 부리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고단해 지는 것입니다.

 

 

3. 셋째, 성령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태도

 

오늘 성령 강림 주일, 그리고 예배 회복의 날을 기점으로 나는 앞으로 성령 하나님을 대하면서 이 세 가지만은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새로운 다짐을 스스로 고백해 보겠습니다. 힘차게 따라하시고, 그대로 실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따라합니다.

 

첫째,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30)

둘째, 성령을 소멸하지 말자.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셋째, 내 몸은 성령의 전이다.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너희 몸은 ~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우리 몸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프면 성령도 아프고, 내가 기쁘면 성령도 기쁘고, 내가 못된 짓 하면 성령은 근심 하십니다. 내가 성령에 의지 하지 아니하고 유리방황하면 깊이 탄식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면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 이후 00교회 모든 성도는, 각 자의 자리에서 삶의 예배자로 온전하게 회복되시길 바라며, 그 삶의 자리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능력 주심과 소망 주심이 강하게 역사하는 성령 충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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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셔서, 믿음 가운데 승리의 길을 걸어가도록 은혜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천국 가는 그날 까지 오직 성령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기쁘고 행복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목사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행 1:4~8)

터키 공화국에서 처음 자동차를 생산했을 때의 일입니다. 터키 역사상 처음으로 자동차를 생산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통령과 관료들은 물론, 온 국민들까지 그 일에 대단한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민 대표들이 국회 의사당에 모여서 시승식 축제를 열고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동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온 국민과 관료들의 박수를 받으며 출발한 차가 30m도 못 가서 퍽퍽 하더니 발동이 꺼지고 탁 서버렸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대통령도 당황하고 국민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의아해했습니다. 자동차 생산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술자가 쏜살같이 달려나왔습니다. 그는 자동차 점검을 막 끝내고는 땀을 씻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자동차에 연료도 넣지 않고 출발을 했던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좋았는데 기름이 떨어져서 차가 중간에 멈추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도 있습니다. 똑똑합니다. 환경도 좋습니다. 의욕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있으면서도 한 가지가 부족해서 성공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의 그 무엇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바른 신앙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립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앞에 ‘오직’이란 단어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오직' 이란 말은 '좌우간', '어쨋든', '다른 건 다 없더라도', 성령이라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힘이 원동력이며 추진력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첫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이어령 박사의 ‘아들이여, 이 산하를’ 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꼬마가 할아버지의 수염을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있었어요. 어느 날 이 꼬마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밖에 내 놓고 주무세요?" 할아버지는 질문을 받고 금방 대답할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얘야, 미안하단다. 나도 미처 생각을 못한 일인데 오늘밤에 한번 자 보고서 대답 해주마." 그러고는 그냥 돌려보냈어요. 할아버지는 그 날 밤에 수염하고 씨름을 합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자니까 답답하고 수염을 내놓고 자니까 이상하고 그래서 밤새도록 수염을 가지고 씨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 할아버지와 비슷하지는 않았는지요? 교회를 다녀도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지 성령이 내 밖에 계시는지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미국을 성령 충만한 세상으로 만들었던 유명한 부흥사 찰스 피니 목사는“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듯이,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도 죄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순종도, 충성도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탄은 목사라고 해서 중직자라고 해서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확실히 의지하는 성령의 사람이라면, 그가 어린아이 일지라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성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로마서 8장 9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12장 3절은“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 성령이 임할 때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 받은 자가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삶의 문제 대부분이 해결됩니다. 죄의식과 정신적인 갈등, 긴장과 의심, 두려움 때문에 방황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 문제들은 참된 자유와 평안과 쉼과 확신으로 바뀝니다. 죽음의 공포 때문에 긴장하며 마음의 불안을 가진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면 놀라운 안식과 쉼을 얻습니다. 악한 습관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보고 숨어살며 또 마음이 어두운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면 거기서 해방되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기 때문입니다.

"권능"은 영어로 파워(power), 헬라어로 "두나미스(dunamis)"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천둥과 번개를 발하는 하나님의 힘"이라는 뜻이며, 기적을 이루는 힘과 귀신을 내어쫓는 것 같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죄와 사탄의 세력과 육신과 세상을 이길 힘을 갖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안팎으로 변화시킵니다.

영국에 유학가서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온‘알라미라’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알라미라가 고국에 돌아와 보니 땅 전체가 풀이 자라지 못하는 황량한 사막이었습니다. 강물이 흘러가지 않는 사막이라 농사도 목축도 할 수 없는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그는‘하나님,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큰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을 받고 능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성령의 능력은 비젼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에게 광야 어딘가에 분명히 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사막한 가운데에서 물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날마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줄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반대하여도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6개월간 날마다 기도하며 찾던 중 축축한 모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깊이 파고 들어가니까 사막 한 가운데서 생수가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 후로도 그는 사막한 가운데에서 그런 물줄기를 15군데나 더 찾았습니다. 그는 그 물을 퍼내어서 목장을 만들고 밭을 일구어 과일과 채소도 생산했습니다. 결국 이 공동체가 이스라엘의‘키부츠(qibbutz)’라는 집단농장이 되었습니다. 한 청년에게 임한 성령의 권능을 통해 사막이 채소농장으로 변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은 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그 주님이 나를 통해서 능력으로 역사 해 나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집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서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증인이 되라'가 아니라 '증인이 되리라' 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증인이 되게 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의 증인이 되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되리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되게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을 증거 하는 주체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권능은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 갈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증인으로 살지 못한다면 권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의 권능을 받고 난 후에 나아가서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일을 위하여 성령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 권능은 증인된 삶을 살 때에 나타납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증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무디 선생은 교인들에게 자기 손에 들고 있는 컵에서 어떻게 공기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기 펌프로 빼면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무디 선생은 "그렇게 하여 진공이 되면 컵이 깨집니다." 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많은 빗나간 대답들이 있은 후 무디 선생은 미소를 지으면서 주전자를 들고 컵에 물을 가득 부었습니다. "자 보세요. 공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할 때 무디 선생은 “그리스도인이 생활에서 공기를 빼려고 하듯이 죄를 제거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로지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짐으로 죄를 제거하고 승리의 삶을 살수 있음” 을 가르쳤습니다.

신학자 반하우스는 현대에 “자폐증 크리스챤”이 많음을 한탄하였습니다. 자폐증이란 표현하지 않는 증세입니다. 반하우스 박사는 "현대 크리스챤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이해하였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자폐증 아이를 가진 부모가 얼마나 슬프고 안타깝습니까? 그와 같이 자폐증 크리스챤을 둔 하나님 아버지도 몹시 슬프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 반드시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하여 거듭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임해야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처럼 성령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심으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과 능력을 받아 땅 끝까지 주님을 증거 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드디어 로마에 들어가다     사도행전 28:16-28

 

사도행전에 마지막은 바울이 로마로 입성하는 것으로 끝을 냈습니다. 그가 팡파르를 울리면서 입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으로 초라하게 입성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로마 입성은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이 책을 규정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를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의 입성은 개인적이었고, 초라한 것이었지만 유럽 전체가 변하는 그런 입성입니다.

어떤 한 개인의 삶이 그저 세상에 태어나서 배우고,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 가고 결혼하고 잘 살다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지만, 어떤 한 사람의 생애는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생애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로마의 입성은 유럽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입성이었습니다.

 

16,

로마에 들어갔는데 바울을 지키는 그 군인이 바울을 계속 따라다니지 않고 바울을 자유롭게 놔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신용을 얻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자유롭게 예수님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굉장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축복이란, 참된 기쁨이란 감옥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부자가 되었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건강하냐 병들었느냐가 아닙니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가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큰 기쁨과 축복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삼일 후에 신분이 높은 유대인을 초청해서 자신의 처지를 말합니다.

 

17-19,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유대인들 중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불러서 자신을 변명하고 자기의 삶을 설득을 합니다. 자기가 민족을 배반했거나 조상들의 규모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복음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했습니다. 타협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그가 할 수 있는 겸손을 다합니다. 머리 깎으라면 머리를 깎습니다. 머리 기르라면 머리를 기릅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제사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런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갈등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겸손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들이지만 그가 인간적으로 복음이 훼방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 체면 같은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는 열심히 자기를 변호합니다.

 

간혹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예수 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례히 행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복음이지. 복음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겸손하게 자기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내가 민족을 배반하거나 우리 조상이나, 우리 민족들의 규모를 내가 흩으러 놓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20절입니다.

내가 이렇게 죄인이 되어 로마에 온 것은, 내가 돌아다니면서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 이유는 한가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쇠사슬에 매였다. 그럼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메시아이신, 인류의 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다시 똑같은 결론에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외에는 나는 모든 것을 분토로 여기겠다." 그가 지식이 없어서도 아니요, 관심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고상하신, 참으로 인류의 왕이신 참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예수 외에는 모든 것을 다 감추어 버리겠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가치, 참된 진리를 붙잡은 것입니다.

 

21-22,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아 우리는 편지 받은 일도 없고 이스라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시끄럽게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아는데 너의 사상이 무엇인지 들어보자'라고 반응을 합니다.

이 말씀에 참 위로가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점은 '뭐든지 부딪쳐 봐라.'입니다. 선입감, '저 사람은 전도가 안될 것이다.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를 반대할 것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가 하고 싶던 일들을 주저 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변명하는 것도 이런 뜻이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부딪쳐 보니까 당신의 얘기를 좀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두드리세요. 안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또 두드려 보세요. 저 사람은 전도 안 될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또 두드려 보세요. 하나님이 그 사람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켜 놓은지 모르는 겁니다. 과거로 현재를 다 규정하지 마세요. 바울은 그렇게 두드렸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시는지 모릅니다. 안되면 또 부딪치고, 안되면 또 부딪치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좀 들어보자'

 

23,

일자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바울이 있는 곳에 왔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울은 강론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딴소리 안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도행전이 끝나는 31-32절을 한 번 보십시오.

거기서 무엇을 가리켰습니까? 첫째는 하나님 나라요,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십자가만을 말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부활만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다른데 관심이 많아요. 다른데 관심이 많으면 중요한 것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자기를 제한시키는 겁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지 알아요.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옵소서."우리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욕심을 가지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썩어질 것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죠. 이것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전할 때 그 앞에 표현들을 보십시오.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했던'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은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세 오경의 율법은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 선지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를 전하지 않고 예수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교파를 전하지 않고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교파나 교단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을 전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어떤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이름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이런 설교를 하니까 두 가지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24-25,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마가복음 16:15-16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복음을 전하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현실입니다.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복음에 대해서 귀를 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마음을 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내용을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는데 그 내용을 사도행전에 쓰고 있는 겁니다.

 

26-27,

이사야가 오래 전에 이 문제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아무리 전해 줘도 망할 사람들은 안 들어요. 망할 사람들은 꼭 망해야 속이 시원해. 말을 안 들어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성령의 음성을 전해 줘도 너무너무 답답하게 안 들어요. 자기 백성들이 포로에 잡혀가서 뼈아픈 고통을 겪을 것을 말해 줘도 백성들은 안 들어요. 그걸 보면서 바울이 이사야의 예언을 말하는 겁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것은 반어법의 표현입니다. 결론은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말해도 안되는구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사람이 되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 쪽에 서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두 세계 속에서 왔다갔다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도 있고, 성령 체험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편에 서세요. 이성과 지식과 경험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분명히 서세요. 두세계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28,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의 이 복음이 이방인에게 흘러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8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메시아를 보내도 그들은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복음을 이스라엘이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어디까지 왔습니까? 여러분과 나에게까지 왔고, 이 복음은 온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복음이 오면 온 세상이 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요, 이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사도행전 전체 요절이 무엇입니까?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셨고 교회가 생기며 복음이 증거 되고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옴으로 복음이 온 세계로 퍼져 갔습니다. 결국은 성령이 임하여 능력을 받고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의 중심 메시지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어떤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까? 큰 교회입니까? 작은 교회입니까? 조직이 잘된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크던 작던, 능력을 받아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땅끝까지"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듣지 못하는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까지를 의미합니다.

 

29,

(없습니까?) 없으니까 없다고 써 놨지요.

그러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있습니다.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논쟁을 하며 물러가더라" 그들 사이에 상당한 논쟁이 있더라. 이것이 개역에는 빠져 있습니다.

 

30-31,

제일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이 엄청난 복음이 바울에 의해서 세계의 수도라하는 로마에 전해지는 데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셋방, 이것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죄수가 셋방에서.

사도 바울은 큰 장소에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건물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는 건물에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제도에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가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있는 교회가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교회가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셋방살이 하는 사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방에서도 큰 일은 일어납니다.

2년 동안 셋집에서.

그 거대한 로마가 하루아침에 기독교 국가로 변화된 것은 사도 바울에게 셋집에서 조용하게 교육받았던 사람에 의해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큰 것이 큰 일은 아닙니다. 조용하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빛처럼 소금처럼 스며들어간다면 일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30-31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쓰고 있고, 내가 사도행전을 쓰고 있고,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귀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모든 세상에 미치게 하옵소서

 

바울아! 두려워말라!  사도행전 27:21-44

 

사람은 누구든지 한 두번쯤은 실수를 하게 되고, 또 사람은 누구든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왜 두려운가? 일반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마음이 두려움에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도적이 제발 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렵고 걱정이 생기고 불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때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어떤 기대나 소망이 사라진 상태요, 더 이상 노력해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 우리는 갑자기 두려워지고 좌절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탄 배에는 276명이 타고 있었는데 근 14일동안을 밤에는 별을 볼수가 없고, 낮에는 햇빛을 볼 수 없는 칠흑같이 캄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대광풍이 일어나서 언제 이 광풍이 끝날지 몰라 물결이 계속해서 파도가 넘실대는 상황에서 이제는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동안 굶주렸습니다. 이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그 절망 중에서 일어나서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21절입니다.

여러분, 누가 지도자입니까? 모든 사람이 절망에서 갈길을 잃어버렸을 때 홀연히 일어나 난관을 헤치고 길을 보여주며 인도해주는 사람을 가리켜 지도자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이 좌절했을 때 그는 한가운데서 서서 담대하게 그들의 갈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사람이 죄인인가 죄인이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누가 이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을 건져내서 소망을 주고 갈길을 인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절망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경솔히 항해를 하게 된 결과 재산을 잃어버리고, 배도 손상을 입게 된 것에 대해서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하려고 일어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일어난 이유는 불안과 초조와 절망 속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해 '여러분들이여, 안심하십시오. 당신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들어지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죽지 않습니다. 한 사람도.' 안십하십시오. 이 말을 하기 위하여 사도바울이 일어납니다.

 

22절,

 

물건을 잃어버렸다든지, 배가 깨졌다든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집이 불났다든지, 사업이 파업했다든지, 물론 그것이 아깝지요. 그러나 사업하다가 부도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증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오늘 네 생명을 뺏어가면 네것은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배는 부서진다. 모든 재산도 없어진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안심하라, 너희 생명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별빛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햇빛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수위가 낮아진것도 아닙니다. 고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절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떻게 바울이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서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을까요? 놀라운 일이죠.

 

23-24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폭풍 중에, 높은 파도 중에 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제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두려워말라. 염려하지 말라. 너는 분명히 가이사앞에 서게 될 것이고 여기의 수 많은 사람들은 다 내가 네게 붙여 주었다. 그는 그 말을 들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전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십자가와 부활하심을 증거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 가도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라고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를 통해서 굉장히 중요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계속되는 폭풍 속에서 바울도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으로 염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염려하고 있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염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햇빛이 계속 안보입니다. 별빛이 계속 안보입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떠 신앙인에게 의심이 오기 시작합니다. 흔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바울도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기적도 보았지만 어떤 한 상황에서 실제로 어려운 일을 계속 겪고 있습니다. 문제가 풀리지를 않습니다. 한달이 가도 안풀리고 두달이 가도 안풀립니다. 이 때 누구든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굳세게 잡았던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루 아침에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에는 무려 25년의 세월을 투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엉망이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부인을 뺏길뻔 했습니다. 첩에서 애기를 낳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5년의 시간을 투자하면서 그를 고쳐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가 갈라질 때 현장에 있던 사람입니다. 물이 없을 때 바위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본 사람입니다. 그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40년동안 반복되는 그 험한 여행에서 모세가 흔들린 겁니다. 모세는 젖과 꿀리 흐르는 가나안 땅에 못들어 갔습니다. 그것이 모세입니다. 모세도 인간적으로 고민했던 흐,ㄴ적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그랬습니다. 예레미야도 더 이상 예언을 못하겠다고, 다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붙들어 쓰십니다. 그런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불안하다가도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때 이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이제는 고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현재 받고 있는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때 하나님은 숨어 계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숨어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은 침묵해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나타날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 않습니다. 이제 곧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윈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제 곧 나타나십니다.

 

두 번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즉시 말하지 않고 하루쯤 뜸을 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절말적인 시간이라면 우리는 당장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젯밤에 하나님이 사자가 내게 말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24시간쯤 기다린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겁니다. 폭풍우가 계속되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도 바울은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죽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여유를 봅니다. 폭풍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23절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나의 속한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다 믿는다고 하죠. 그러나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하는 겁니다. 저기 계시냐, 내 마음에 계시냐. 나의 하나님이냐, 나의 아버지냐 하는 문제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 아버지냐 하는 겁니다. 내 아버지가 아니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그에게 속했고 그분이 내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돌립니다. '내 안에 계신 그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바울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23절과 24절에서 왜 하나님께서 폭풍속에서 이런 말씀을 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24절을 다시 읽읍시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히 나타납니다. 왜 내가 너를 살려주는가? 왜 276명의 사람이 너 때문에 생명을 얻게 되는가?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명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병들어도 안죽고 망해도 안죽습니다. 내생애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이루어야 할 그 사명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이 그를 죽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꿈이 있습니까? 왜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세상에 태어난 사람마다 다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먹고 살다가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위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진 사람, 그는 영원히 외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대 죽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를 보기 전까지는.

또 한 가지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의 사람들이 산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을 보면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사람의 의인의 무게는 예루살렘 전체의 죄악의 무게와 같습니다. 의인 한 사람이 이렇게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봐주셔서 그렇습니다. 의인 몇 사람 때문에 이렇게 살게 된 것입니다. 무룸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순교를 한 사람들의 피가 있기 때문에 이만큼 사는 겁니다.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이 살게 됩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 때문에 북한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너는 죽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바울 너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을 살려 주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25-26절,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이 반드시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선언한 후부터 광풍이 사라지고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27-28절,

육지가 가까워 온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빠져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람에 밀려 가는 것 같아도 그 바람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9-32절,

 

여러분, 왜 상황이 변합니까? 바울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때문입니다. 여러분, 거룩한 성도의 기도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삽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잘살게 되는 지를 모릅니다. 이 사공들은 상황이 좋아지니까 잔꾀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지금이야 말로 탈출할 시간이다'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물, ㅁ이물이라는 것은 배의 앞뒤를 말합니다. 거루는 구명 배입니다. 뒤에 닻을 놓는 척 하면서 구명보트를 타고 몰래 빠져 나가려고 합니다. 바울이 그것을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군인에게 말합니다. 저사람들 가면 다 죽소. 그래서 그 거루를 짤라 버립니다. 다시 배안에 모든 사람이 있게 됩니다.

 

33-38절,

오천명을 먹이던 모습하고 비슷합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이 왔습니다. 그들이 비축해 두었던 마지막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35절을 보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으매" 무슨 생각이 듭니까? 여러분, 유라굴로 광풍이 아니면 감사하면서 먹겠어요? 잘난줄 알고 먹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눈물의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사람은 눈물의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열심히 직장에서 일하면서, 땀흘리면서 먹는 그 음식이 귀한 것입니다. 그 때에 감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보름 동안에 그 지치고 피곤한 그 암흑 속에서 지내다가 밥을 먹게 되었을 때 어찌 그들에게 감사가 없겠습니까?

 

39-41절,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배는 배는 인간의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진다는 사실입니다.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안깨지게 해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배는 깨져 버립니다. 짐도 배도 다 깨져 버립니다. 여러분 소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지 못합니다. 의지할 것이 있으면 그것이 사람이건, 돈이건, 권력이건, 인간이 의지할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할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의지할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내게 많은 소유가 있다 할지라도 그 소유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결국 그 배는 깨지게 됩니다. 배가 깨지게 될 때 사람들은 그 배에서 나와야 합니다. 물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수들이 탈추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죄수가 탈출하면 간수가 대신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인들은 죄수를 죽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수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부장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바울을 죽이지 못하게 합니다.

42-44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이것이 우리 인생의 결론입니다. 인생의 결론은 다 좋게 될 것입니다. 지금 고난이 있지만, 역경이 있지만 마침내 사람들을 다 구원한 것처럼, 짐은 다 없어 졌지만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부장을 이용하십니다. 유라굴로의 광풍도 이용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 구원을 받았더라.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몇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유라굴로의 광풍이 있지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을 지라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로마로 향하는 바울  사도행전 27:1- 20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제는 배를 타게 되는데, 지금까지 고생했으면 이제는 대가가 주어질만한데 그는 나이가 들어서 또다시 정처없이 떠나게 됩니다. 그의 모습은 영광스럽고 자유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으로서 백부장의 호송을 받으며 쇠사슬을 맨채 떠나야 합니다.

 

1-2절,

바울 혼자만 호송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었던 죄수들과 함께 한 팀이 되어서 한 배를 잡아가지고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이 호송책임자로 선택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때 소유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집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쇠사슬뿐입니다. 그는 가고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지 못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소유한,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탄배는 죄수들을 호송하는 특수한 배가 아니었고 아시아의 해변에 각 곳에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짐을 실어 나르는 그런 운항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죄수들 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많은 왕래하는 사람들, 약 273명의 사람들이 같이 한 배에 탔습니다.

 

2절에 보니까 작은 위로가 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게도냐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간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9:29에 보면 에베소에서 대소동이 일어날 때입니다. 바울이 피신을 해나가는데 대신 잡힌 사람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입니다. 크게는 안나타나는데 작게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사도행전 20:4에도 핍박이 왔을 때 두로아에 미리 가서 바울의 길을 마련해 줍니다. 유일하게 아리스다고가 바울이 호송되어 가는 그 배에 같이 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3절,

 

이러한 바울에게 또 하나의 위로가 있었는데 그것은 가이사를 떠나 시돈에 잠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전도했던 사람, 안면 있던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큰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사랑을 크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일듯 말듯하게, 잠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은 굉장히 나쁜 여행입니다. 왜냐하면 기후가 나쁜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절기를 마치고 겨울이 닥치는 시기입니다.

 

4-6절,

이 배는 정상적인 항해를 하지 못하고 구브로 해안 쪽으로 항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라라고 하는 곳에서 배를 바꿔 타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로마로 가는 큰 배 알렉산드리아호를 탑니다.

 

7-8절,

배가 정상적으로 가지 못하고 바람 때문에 여러 날을 걸려서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7절과 8절, 16절에 보면 간신히, 간신히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풍랑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를 볼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육지의 경험도 많았지만 비교적 바다의 경험도 많았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없이 들락날락 했는데 고린도후서 11:25에 보면 자기가 3번 파선했다는 경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풍랑 때문에 배가 깨진 경험을 3번씩이나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다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지금 날씨가 굉장히 안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9-10절,

바울의 경험과 그의 신앙적인 통찰력으로 보면 이번 여행은 위태하다는 느낌을 받은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여기에 조금 있다가 여행을 하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권면을 하지만 그의 신분이 뭡니까? 죄인입니다. '죄인이 무슨 말이 많아.' 죄인의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의견은 묵살을 당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배의 경험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만 이 말속에는 예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예감한 대로 이 배는 큰 광풍을 만나서 배가 깨어지고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경험을 실제로 하게 됩니다. 바울의 의견을 백부장 율리오는 듣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11절,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주의 말을 더 믿러라'

 

또 그럴듯한 말입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사실 바다와 기후에 대해서 선장과 선주만큼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 말로 그들은 전문가입니다. 여러분, 모든 얘기를 전문가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보다는 바다의 경험이 많은 산장과 선주의 전문가의 말을 듣는 것이 백부장으로서는 올바른 선택이었고 사리분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죄수요 외모도 별볼일 없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바울이 착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별로 그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뭘알아?

 

12절,

그들은 선장과 선주의 충고에 따라 뵈닉스 그레데 항구에 가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동북을, 한편으로는 동남을 향하는 곳이었습니다. 드디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배는 떠납니다. 떠나는 날 아침,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역시 노련한 전문가의 말이 맞구나. 우리는 그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잘한것인가?'

 

13-15절,

그러나 순풍은 영원한 순풍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축복을 받았는데 그것이 영원한 축복인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고난도 영원한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이나 축복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을 때 축복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을 때에 고난도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그들은 항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왠 일입니까? 얼마 가지 못해서 섬 한 가운데서 유라굴로라고 하는 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배가 밀려가고 자기 맘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대로 쫓겨가더라. 

인생이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대로 가는게 인생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끌고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죽어도 될거에요.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사업이 잘 되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관관계가 생각대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은 내가 끌고 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아닙니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래 그렇게 생각할수록 불행은 계속됩니다.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난 이 배처럼 우리는 할 수없이 끌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왜 이사람들이 이런 고난 안에 있게 되었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의 권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람의 말에 따르기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죄수가 무엇을 알랴, 선장과 선주의 말보다 더 좋은 충고가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바울의 충고를 듣지 않았을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하는 눈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리오라는 백부장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의 충고는 보통사람의 충고라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누구와 의논을 하십니까? 우리는 잘못된 충고를 받아들여서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전문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습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세상에 잘갈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훨씬 좋아져야할 것입니다. 전문가가 꼭 필요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있어야합니다. 정치, 교육, 사회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목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실 하나는 전문적 지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충고때문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뭘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영적분별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영적 분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요, 곧 믿음의 선택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새벽마다 무릎꿇고 1년만 기도하세요. 그러면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알려주실 것입니다.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는데 1년을 기도하지도 않고 어떻게 한 번에 단순하게 결정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무서운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사람이 전문적이지 않아도 좋아요. 그 사람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순풍에 속았다는 것입니다. 방향을 돌리는 순간에 순풍이 순하게 불었다.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습니다. 역시 전문가가 다르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시적인 승리가 영원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라랍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고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그것이 잘됐나, 못됐나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했나, 안합했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잘되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라고 생각된다면 그일은 다시 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람부터 찾습니다. 나중에 심각한 상황에 들어서면 그때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가 해볼만 하면 내가 다 해버립니다. 이것저것 다해 보고 나중에 오는 곳이 하나님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오셔서 축복받기를 바랍니다. 순풍에 속지 마십시오.

 

세 번째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순풍에 돛단 것이 아닙니다. 인생 자체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는 삶입니다. 인생은 결코 잠잠한 호수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안죽습니까? 죽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안듭니까? 병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폭풍과 광풍이 몰아쳤을 때 배에 있던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게 되었구나하는 공포만이 있었습니다. 광풍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어떤 운명이 주어집니까?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15절,

노젓는대로 안갑니다. 방향 잡는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시련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노력으로 예수 믿어지지 않습니다. 내 방법대로 예수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둘째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사람은 내 노력이 소용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16-17절,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 소망을 거는 겁니다. 거루는 거룻배입니다. 작은 배를 이용해서 배에다 동아줄로 배를 묶는 작업을 합니다. 스루디스는 암초입니다. 돛을 내리지만 안되고 그래서 쫓겨갑니다. 이제는 선장의 기술도 백부장의 명령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의 노력이 더 거치장스러울 뿐입니다. 이제는 배안에 모든 짐을 버려야 합니다.

 

18-19절,

제일먼저 무엇을 버립니까? 짐.

 

아까워서 어떻해요? 그래도 다 버려야 합니다. 짐을 다 버려야 합니다. 우선 살아야 되니까. 짐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벌었던 것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옷도 소용없고, 자동차도 소용없고, 다 내던져야 합니다. 이런 걸 알면서도 우리는 열심히 이런 것들을 끼고 삽니다.

여기보면 짐도 버리고, 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소유는 무거운 짐입니다. 소유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물질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만이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합니다.

배가 밀려 가는대로 가더라. 15절, 18-19절,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렸다.

 

20절,

절망입니다. 칠흑같은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어두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폭풍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본질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여기에서 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시작이 일어납니다.

 

주님앞에 엎드리십시오. 겸손하고 온유하게 항복하십시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내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사도행전 26:19-29

     

'자존심'을 국어 사전에서는 "제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가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좋은 이미지를 주기도 하고 나쁜 이미지를 주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는 좋은 이미지의 자존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의 탁월한 문학자 중의 한 분인 이은상 씨는 자존심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자존심이란 결코 배타가 아니다. 또한 교만도 아니다.  다만 자기 확립이다. 자기 강조다. 자존심이 없는 곳에 비로소 얄미운 아첨이  있다. 더러운 굴복이 있다. 넋빠진 우상 숭배가 있다. 위대한 개인, 위대한 민족이 필경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이 자존심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존심의 개념도 이와 비슷하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아첨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서 이 자존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안에서는 왕자처럼 처신하면서 세상에 나가면 걸인처럼 행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어느 성경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바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장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경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과 총독, 그리고 많은 고관들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 두 팔을 들고 당당하게 말하는 바울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아그립바 왕에게 응수한 바울의 이 한마디는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다른 말로는 더 이상 멋있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합니다.

바울은 특별한 혐의 사실도 없이 2년이 넘도록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의 형무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울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려고 백방으로 애쓰던 당시 유대 지도자들로 인해 유대인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총독 베스도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을 석방하자니 유대인의 감정을 건드릴 것 같고, 그대로 가두어  두자니 별다른 혐의 사실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한 바울은 자신이 무혐의 처리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로마 황제로부터 직접 재판을 받는 것뿐이라고 판단하여 로마의 최고 법정에 상소를 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죄수를 황제 앞으로 보내려면 뚜렷한 죄목이 첨부되어야 했던 당시 관례로 보아 바울은 총독에게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미묘한 정치적 사건으로 고심하던 그 때, 총독은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의 통치자로 있던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동생의 내방을  받게 된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과 함께 최종 결정을 내릴 작정으로 다시 공판을 열게 되었으며,  본문이 바로 그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먼저 아그립바 왕을 향해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만났으며, 무엇때문에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문을 엽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드디어 그가 증거하고자 했던 핵심,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총독 베스도는 참지 못하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기세에 바울이 압도당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25절).

그리고는 바울은 확신에 찬 시선을 이제 아그립바 왕에게로 돌렸습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먹었던 대상은 총독이 아니라 왕이었습니다. 총독에게는 지난 번 재판에서 이미 할 이야기를 다 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왕과 그의 누이동생 버니게를 향하여 복음 증거를 계속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은 선지자를 믿으며 예수의 이야기도 알고 있는 분입니다. 구약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장차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인류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 구원자가  되신다고 분명히 예언했습니다. 왕이여, 보시옵소서.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삼 일만에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야입니다.  왕이여, 이 사실을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시면 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하는 도다." 이 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는 형편없는 것이라고 얕잡아 보는 멸시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네가 몇 마디의 웅변으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비아냥대는 것입니다. 아마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 정도에서 그만 입을 다물고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절).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요. 여기에서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한마디는 사도 바울의 자존심을 통쾌하게 대변할 뿐만 아니라 함축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왕이여, 당신은 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의 승자는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하는 의미가 들어  있고, "예수 없는 왕자보다도 예수 있는 죄수가 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나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하는 메시지도 들어 있습니다. 또한 "나는 당신에게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는 뜻도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왕이고, 또 한 사람은 죄수입니다. 화려한 자주색 왕복을 걸친 자와, 쇠고랑을 차고  냄새나는 죄수복을 입은 자가 지금 대면하고 있습니다. 왕의 곁에는 그의 누이동생인 버니게가 번쩍거리는 보석으로 온 몸을 치장하고 앉아 동정과 경멸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바울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진홍색 정장을 차려입은 총독과 행정 장관들, 그리고 로마 군대의 기라성 같은 장교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가장 화려한 신분에 속하는 그들은 권세와 부를 소유하고, 인생을 즐기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지혜를 그 누구보다 많이 터득했다고 자부하는 자들로서 재판정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20대 중반을 넘기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들이고, 바울은 이미 50대를 바라보는 장년입니다. 그들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는 처지인지라 바울이 기가 조금 꺾였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비굴합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왕을 부러워합니까?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기에게 없는 것이 남에게 있을 때 냉소하는 병적인 무엇이 그에게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는 끝까지 떳떳하고 의연했습니다.

   

자존심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바울이 이렇게 대단한 자존심을 가진 배후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고 하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자마자 그는 밑바닥부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가치관의 변화요, 패러다임의 변화였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 부귀 영화를 보는 눈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예수를 발견한 다음부터 그는 누구를 보아도 당신도 나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자존심을 가지고 왕자처럼 살았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거지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어느 정도로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인가를 성경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보면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했지요? 또 고린도전서 7장 7절에서도 그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 믿고 아름답게 변화된 처녀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예수 잘 믿는 처녀들이 결혼하기 어려운 세상인데 그 당시는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혼기가 찬 처녀들이 결혼을 해야 하나,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하나 하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바울에게 상담을 해 왔습니다. 이때 바울이 여러 가지 설명을 하는 중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는 처방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그는 믿음 좋은 처녀들이 할 수 있으면 자기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존심입니까? 우리가 그 수준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존심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봅니다.

       

세상 부귀영화는 헛되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과 같은 자존심을 가져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부귀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을 봅시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므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노라."  현대어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다 내버렸다." 이처럼 예수 믿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디모데전서 6장  7-8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는 굳이 세상  부귀 영화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뜬 성철 스님은 평생을 바쳐 진리를 추구하던 구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선 구도자였습니다. 그가 만약 예수를 알았더라면 그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초등학생의 교과서를 비롯해서 몇 트럭 분의 책을 실어 날라다가 읽으며 그 깊은 산골에 있는 절간에서 세상과 사오십 년을 단절하고 벽을 쳐다보며 도를 닦았답니다. 그리고 그가 터득한 도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였습니다. 결국 인생은  그저 인생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반드시 도를 닦아야만 터득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란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당시 황제였던 루이 16세는 하루아침에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언제 단두대로 끌려나가 죽임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그는 손톱이 뭉개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벽에다 이런 말을 썼다고 합니다.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조금이나마 깨어있는 사람은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며 부귀 영화가 한낱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귀 영화를 기뻐해서 스스로 그 속에 깊이 빠져든다는 데 있습니다. 요즘 사회 일각에서 과소비가 또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이 과소비를 합니까?  그들의 소망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가장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귀 영화가 헛된 것인 줄 알지만 이것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자조 섞인 소리를 하면서 거기에 목숨을 겁니다. 여전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도리가  있나요? 그들은 부귀 영화의 허구성을 알면서 속는 자들이요, 속는 줄 알면서 더 몰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부귀 영화가 얼마나 헛되고,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분명하게 깨달은 자들입니다. 검은색이 검다는 것을 쉽게 알려면 그 옆에 흰색을 놓고 비교해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얼마나 검은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사야 51장 6절을 흰색으로 주셨습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여기까지는 검은색입니다.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흰색입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서 알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마음을 주어야 할 것과 주지 말아야 할 것, 부러워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헛된 것을 손에 쥐고 아옹다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를 모른 채 헛된 것에 속아서 세월을 보내는 사람을 보면 상대방의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바울처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나처럼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가진 의와 평강과 희락  둘째로, 우리가 세상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돈을 다 쏟아  부어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이미 세상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러분, 먹고 마시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왕하고 견줄 만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그에 비해 바울은 떡 한 조각으로 겨우 연명하는 죄수 신세가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마음의 평강과 세상 사람이 모르는 희락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7세에 왕이 된 아그립바는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평생을 마음을 조리며 살아야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권좌를 넘보는 듯한 사람이 있으면 중상모략을 해서 그를 제거해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자유함이 있을까요? 무슨 대단한 기쁨이 있을까요? 버니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왕의 누이동생이지만 이미 몇 차례의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와 오빠에게 얹혀 사는 처지였습니다. 그  마음에 평안이 있었을까요? 왕비의 옷을 걸치고 진수성찬을 먹는다고 그 마음에 진정한 삶의 기쁨이 있었을까요? 더욱이 당시 세간에는 오빠인 아그립바 왕과의 사이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어디 그 뿐인 줄 압니까?  로마 황제가 여행을 왔을 때 그를 유혹하여 황제의 정부로  들어가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여자에게 자유함이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는 믿지  않고 겉만 요란하게 꾸미는 사람들을 볼 때 자기에게  있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들이 그들에게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긍지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말하면, 우리는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분은 나이가 많은 것 때문에 소망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또 어떤 분은 새벽부터 밤까지 땀을 흘려 수고하지만 한평생 가난의 질고를 뛰어넘지 못하는 절망과 답답함에 싸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사람이 모르는 은혜, 곧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골고루 받았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의 염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오늘을 사는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일은 모든 것이 주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에도, 내일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가 있고 그 자유로 인해 누리는 심령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에게 이 자유함이 있나요?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긍지를 가지고 그들과 대면할 수 있었고,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영생을 가진 자

셋째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자존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세에서  영원히 누릴 영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실 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영생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즉 왕이 되어 한평생을 희희낙락하면서 살았다 할지라도 영원히 사는 생명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반문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이 영생만 소유한다면 거지 나사로와 같은 인생을 살더라도 후회할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은 너무 소중한 것이라 세상의 다른 것은 다 포기할지라도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아그립바 왕처럼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영원토록 후회하는 패배자가 되어버립니다. 무슨 일이든 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생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에 따라 한 인간이 잘 살았느냐, 잘못 살았느냐 하는 인생의 질이 결정됩니다. 한번 태어난 목숨은 언제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끝이 좋으려면 영원히 누릴  영광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끝을 좌우하는 권세를 가진  예수를 우리 안에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서 뭐라고  하십니까?"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예수님을 붙들고 영생을 소유한 자는 끝을 바로 잡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패는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인의 수명이 많이 길어졌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남자는 67세이고 여자는 75세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부인의 나이보다 다섯 살 이상이면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부인 혼자 12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는  계산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예전에 평균 수명이 41세일 때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 합시다. 41세에 죽으나 67세, 혹은 75세에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저는 우연한 기회에 어느 목사님과 함께 비행기의 2등석을 탄 일이 있습니다. 의자와 의자 사이가 넓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스튜어디스도 얼마나 친절하게 잘  섬기는지, 열 몇 시간을 오는데도 3등석에 앉아서 올 때보다는 피곤도 덜하고 기분이 훨씬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비행 청사에서 입국 수속을 받느라고 줄을 서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옆에 있는 목사님을 쳐다보니까  그분이 나를 향해 씩 웃는 것이었어요. 나도 따라서 씩  웃었어요. 2등석에서 열 몇 시간을 쾌적하게 여행한 사람이나 3등석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비행기에서 내리고 보니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데서 나오는 쓴웃음이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그립바와 같은 팔자 좋은 생을 살다가 종착역에 서는 사람이나, 거지 나사로 처럼 힘겹게 살다가 종착역에 서는 사람이나 돌이켜 보면 다를 것이 없어요. 굳이 다른 것을 찾는다면 편히 산 사람이  배가 좀 더 나왔다거나 주름살이 덜 있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마지막에 영생을 붙들었느냐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붙들었느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이 납니다. 바울이 볼 때 아그립바 왕은 끝을 잘못 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왕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같은 처지였습니다. 세상에서 잠시 죄수로 살다 내세에서 영원히 왕자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잠시 왕으로 살다 내세에서 영원히 죄수로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이므로, 바울은 자신의 결박당한 것 외에는 그들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바울과 같은 자존심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 살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은 아그립바와 버니게를 부러워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를 모신 당신 자신에 대한 모욕입니다. 또한 쇠사슬을 차고 외로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초라하게 보입니까? 당신은 어딘가 잘못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인생을 향해서 비굴하게 구걸하는  자와 세상 부귀 영화를 하늘의 영광보다 부러워하는 자가 있다면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하셔서 그 능력으로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과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증거 하던 바울의 그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베스도 앞에서    사도행전 25:1-27 

오늘 25장에 보면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4장과 25장 사이에는 2년이라는 세월이 있습니다. 바울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바울에 대한 재판의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미결상태로 2년 동안 감옥에 있게 됩니다. 총독이 바뀝니다. 벨릭스 총독에서 베스도 총독으로, 그렇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2년의 시간만 흘렀을 뿐입니다. 아무 것도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감옥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2년이란 시간이 허무하게만 흐른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2년 전에 바울이 무죄를 선언을 받고 감옥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죽이기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40명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25장을 보면 그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2년동안 사도 바울을 잘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의 쉬지 못함을 2년동안 쉬게 하십니다. 바울에게 안식년을 주신 것입니다. 감옥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위로하시고 축복해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쉰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쉰다는 것이 영적인 재충만과 하나님의 사랑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 후임으로 베스도 총독이 부임을 했습니다. 부임을 한지 3일 후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총독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만나게 됩니다.

 

1-3,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은 2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꼭 죽여야 했습니다. 총독이 바뀐 것을 기회로 해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송을 시킬려고 합니다. 그들은 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매복했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스도는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유대인들의 의견을 들어줄려고 합니다.

 

4-5,

베스도는 유대인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다시 와서 너희가 송사한 이야기를 말하고 문제가 있으면 그를 즉시 예루살렘으로 후송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울은 죄가 없기 때문에 바울을 송사할만한 실제적인 증거와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걸고 넘어질려고 해도 걸고 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6-7절이 그 내용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적인 관점에서도 바울을 재판정에 세울 수 없었고 성전이나 로마의 법에도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에 바울을 송사할 수 없었습니다. 증거를 실제로 댈 수가 없었던 것이죠.

8절이 그 내용입니다.

 

이제 베스도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송사하려고 듭니다. 정치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자리가 든든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재판하려고 하니 전혀 재판을 할 증거가 없습니다. 베스도는 두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결국 베스도는 바울에게 이런 요청을 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겠느냐?' 그러나 단호하게 바울은 베스도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로마 가이사의 법정에 서서 가이사에게 재판받기를 원합니다.'

 

9-12절의 내용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 받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를 로마의 법정에 서게 하라. 나는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 정식으로 요청을 합니다. 고민에 빠진 베스도는 배석 심판 위원과 함께 의논을 한 결과 다음과 같은 재판 결과를 내립니다. '네가 가이사에게 재판을 호소했기 때문에 너는 가이사에게 갈지어다.'

재판이 종결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바울을 재판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가이사 외에는.

왜 베스도가 정치적인 부담을 가지면서 이런 결정을 했겠습니까?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스도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가야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을 이렇게 하기로 생각 했는데 다른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너는 로마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재판을 이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도 이렇게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을 이끌고 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사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업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런 결정이 났을 때 베스도에게는 두 손님이 찾아 옵니다. 아그립바 왕과 그의 여동생인 버니게가 베스도를 찾아 옵니다.

 

13-14,

여기를 보면 베스도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나타납니다. 자기도 모르게 베스도는 가이사의 재판에 이 재판을 이송한다고 하니까 불안한 것입니다. '내 결정이 잘한 것인가? 이 결정뒤에는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그래서 그는 아그립바 왕이 왔을 때 일종의 재판 상담을 요청을 합니다. '내 전임인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속을 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바울이라.'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내용들을 15-21절 사이에서 그는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해서 감옥에 집어넣었는데 그 사람을 재판해 보니까 문제는 유대인들이 고소를 했지만 그 사람에게서는 전혀 잘못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물증이 없었고 증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송치하기를 원했지만 자기가 보기에는 바울은 죄가 없기 때문에 바울의 소원대로 이 사람을 가이가의 재판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15절에서 21절까지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아그립바 왕에게 상담을 합니다.

 

여기 상담하는 내용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18-19절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무죄에 대해서 주장하는 부분을 베스도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형사적인 증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그 주장 때문에 생긴 문제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장에 가는 이유는 예수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입니다. 재산싸움이니, 사기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교도소에 가지, 예수님 때문에 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얘기 하다가, 부활을 얘기 하다가, 십자가를 이야기 하다가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이 누구의 얘기입니까? 베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사람의 문제는 형사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의 문제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깊이 생각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들이 송사를 보았습니다. 벨릭스의 재판을 보았습니다. 베스도의 재판을 보았습니다. 이 세 사람의 얘기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주장한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요,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주장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의 입장을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에게 정확히 전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딛치게 됩니다. 문제에 부딛히는데 문제는 그 내용이 예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당하셨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고민을 하십니까? 다 자기 문제요, 욕심의 문제요,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런 일로 인한 고난입니다. 자기 분수껏 살지 못한데서 오는 고난입니다. 그런 문제들로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려 놓은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그렇게 바삐 돌아다니고, 밤새고 하는 일들이 무엇 때문입니까?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고생을 하고,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어야겠습니까? 다 시시한 것이 때문에,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인간의 정욕 때문에, 다 이기적인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수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를 믿은 후에 자신의 문제 때문에 고난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고난을 당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고생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은 누구 때문입니까?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분수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욕심 때문에 오는 고난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고생은 남는 것이 없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고통스럽고...

 

우리가 아무리 못 살아도 세끼는 먹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들, 아무리 큰 집을 소유한들, 여러분의 몸을 누일 수 있는 것은 침대 하나 뿐입니다. 아무리 에어로빅을 해서 살을 빼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70-80세면 족합니다. 더 이상 못삽니다. 그런 인생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값지고 보람있게. 고생은 했으면서도 수모는 겪었다 할지라도 내가 보람있는 삶을 사느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감옥에도 들어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바울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한 해답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결말은 허무함뿐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갈지라도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삶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삶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의 재판 상담을 하는 데 그는 재판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딴데 있었습니다.

 

22,

바울 좀 보자.

23,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아주 화려하고 웅장하고 권위있는 왕의 신분을 표시하는 옷을 입고 바울에게 나타납니다. 천부장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을 다 초청을 해서 신문소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베스도의 명을 따라 초라한 바울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한 그림을 보게 됩니다. 불륜과 죄로 가득찬 내면에는 그런 것이 있지만 겉으로는 화려하고 품위있고 권력있는 높은 지체의 왕과 비록 죄수의 몸으로 끌려 나와 있지만 하늘의 영광과 그리고 놀라운 복음의 능력으로 가득차 있는 여기한 초라한 한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평가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느냐로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성공했다. 이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자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 갖기를 원하고 권력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치장을 잘했어도 그 속에 불륜이 있고, 거짓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감옥에 있고 낮은 자리에 있고 별볼일 없어도 영광스러운 소망이, 사랑이 있는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도 희생도, 손해도 기뻐하는 그런 축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양심에 부끄럼움이 없게 하시고, 신앙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바울처럼 주님을 전하는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벨릭스 앞에서의 바울의 재판   사도행전 24:1-27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샤랴로 호송이 됩니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벨릭스 총독에게로 호송이 된 바울은 거기서 3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먼저는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벨릭스의 후임인 베스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일이고, 세 번째는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는 일입니다. 오늘 읽은 24장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던 기록이고, 25장은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는 재판기록이고, 26장은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는 기록이 되겠습니다.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재판 과정에서 2년동안 감옥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다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핍박과 고난과 역경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돌에 맞고, 쫑겨다니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정말 수없는 많은 일들을 배웁니다. 그러나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이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휴식과 기다림과 인내를 배워야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1절부터 재판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옮겨 가는 중에 40명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만 대제사장과 장로 무리들은 가이사랴까지 와서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면서 재판을 합니다. 이때 더둘로라고 하는 말을 대신하는 변론사까지 대동합니다. 요즘의 변호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더둘로가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3가지로 고소를 하면서 아첨을 합니다.

 

2-4,

3가지 죄목으로 고소를 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을 소요케했다는 죄목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바로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고소를 합니다. 세 번째는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5-9까지 나와 있습니다.

 

아마 이 세가지 중에서 로마 사람들을 거스렸던 말은 소요를 일으켰다는 말일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소요가 일어나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죄목은 성전을 모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변론사 더둘로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염병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전염병을 가진 사람처럼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전염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영향력을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을 가든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더둘로의 변론에 대하여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줍니다. 당신도 당신 자신을 변호해 보십시오. 10-13절이 바울이 변론하는 내용입니다.

세가지를 이 부분에서 배울 수가 있는데 더둘로의 말과 사도 바울의 말이 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벨릭스에게 하는 말이 틀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재판장에게 존경하는 말을 씁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런데 3절에 보니까 더둘로의 말을 보십시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그냥 존경하는 재판장님 대신에 굉장히 아첨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이 재판장을 부를 때 재판장으로서의 예의와 존경을 표시하지만 더둘로와는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시편 12:3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사람은 언제나 말에 과장이 있고 거짓된 아첨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한 언어를 씁니다.

 

다음으로 더둘로의 고소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바울이 아주 논리적으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10-13에 보면 '당신이 아시듯이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온지가 열흘밖에  안됐다는 것입니다. 또 성전에서 내가 변론한 것을 누구도 본 일이 없다는 거에요. 누구와도 변론을 안했기 때문에. 회당에서도 내가 당신들이 고소하는 것처럼 소요를 일으키고 변론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증거가 실제로 그 사람들이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 없으니까. 이렇게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딱잘라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또 좋은 점은 자기가 한 것은 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세가지를 그가 인정을 합니다. 나는 내 조상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 말은 했다는 거에요. 나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 다시 말하면 구약의 성경을 믿는다. 세번째 나는 의인과 악인이 부활할 것을 믿는다. 라고 선언을 합니다. (14-15)

사도 바울의 고백은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이렇게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믿고 부활을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죄가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천부장도 그 유대인들의 소요 속에서 바울을 뽑아 내었을 때 아무리 바울을 조사해 봐야 바울에게서 체포할 만한, 그리고 감금할 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470명의 군인으로 가이사랴로 호송을 시켰던 것이 바로 바울의 죄목이 뚜렷하게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법정에서 '예스' ''를 아주 분명하게 했습니다.

 

세 번째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6절입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낀 것이 없다'

자기가 재판 앞에 섰는데 거짓말을 하거나 상황을 좀 바꾸거나 이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꿉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말하고, 그런 것을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하면 그 순간은 피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은 피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순간을 피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하여 순간의 거짓말과 아첨과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자기가 던진 그물에 자기가 걸립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장한 최후의 보루를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양심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양심에 있어서 시꺼먼 양심. 어떤 사람은 양심을 부인한테 맡기고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다시 양심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양심을 가지고는 살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사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 없기를...'

 

사실은 우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다는 말처럼 부러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우리 모두가 부끄럽게 살고 있기 때문에. 큰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작은 거짓말은 하고 살고, 큰 강도는 아니지만 작은 것들은 사기를 하며 살고 있어요.

죄라고 하는 것은 들킨 죄가 있고, 안들킨 죄가 있지요.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들킨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안들킨 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아니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교도소 안갈 사람이 있어요? 다 우리는 뭔가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자기의 재판에, 자기의 말에 최후의 보루는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비슷한 말을 로마서 9:1-2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정말 내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지 이건 성령님이 아시고 내 양심이 안다.'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한다고는 하지만 그는 언제나 떳떳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왜 위대한지 아세요? 그가 남달리 열심히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는 정말 열심히 복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그는 떳떳했어요. 왜 우리는 힘이 없는가? 떳떳한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세상 앞에서 좀 떳떳했다면. 우리는 적당하게 많은 것들과 타협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힘없게 만듭니다. '세상 살면 다 그렇고 그런거다' 하면서 타협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자기가 더 많은 형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떳떳하게, 공명정대하게 내가 양심에 부끄럼 없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언제나 공명정대 했습니다. 숨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국에서 한 일을 낱낱이 말합니다. 해외에서 성도들의 구제금을 가지고 돌아온 것과 자기가 결례를 드린 것과 이런 것을 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다면 부활을 믿는다고 말한 것뿐이다.

 

21,

얼마나 그가 공명정대하게 살았는지 보여줍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은 잠을 잘 못잡니다. 괴롭기 때문에. 떳떳한 사람이 힘이 있습니다.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겼을 때 세상은 변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그런 재판을 맡은 총도이었지만 바울의 그 진실에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천부장이 쓴 편지의 내용과 벨릭스가 직접 재판을 해 보니까 바울이 한 말과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정직이 이긴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거짓은 순간을 이깁니다. 그러나 정직은 끝을 이깁니다. 오늘 이 벨릭스가 마지막 판결을 내립니다.

 

22-23,

 

바울에 관한 재판은 3심입니다. 3번 재판을 하는데 1심에 결론은 유예입니다. 결정을 안내리고 천부장이 예루살렘에서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재판이 끝났는데 바울에게는 2가지의 축복이 안겨졌습니다. 먼저는 바울에게 '무죄요' 결정이 났다면 바울에게는 살해의 위험이 있습니다. 40명이라는 사람이 먹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에 감옥 밖으로 나오면 언제 살해를 당할지 모릅니다. 형을 결정받지 않고 감옥에 있는 것은 바울 자신이 살해위험으로부터 보장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벨릭스가 '바울은 보류다' 이렇게 명령하면서 '너희는 바울을 잘 지켜라' 하면서 무엇을 주라고 했어요. '자유'를 주라고 했고, 친구를 마음대로 사귀게 해라. 그러니까 바울은 보호를 받으면서도 그 보호 아래서 자유도 누리고 복음도 전하는 그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고생을 하던 바울이 감옥에 들어간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2년동안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복음도 전하고.

 

24-25절을 보세요.

재판을 맡았던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죄수는 떳떳해요. 교만한 게 아니라, 굉장히 자신감이 있어요. 이 모습에 벨릭스 총독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불러내요. 자기 부인과 함께. 그리고 '네가 믿는 것을 얘기좀 해봐라.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드느냐.'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정직과 담대함.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3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의에 대해서, 절제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을 듣고 벨릭스가 겁을 먹었습니다. 두려워해요. 왜그래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사람이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누구냐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26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총독이 바울의 인격에 감화를 받았지만 어떻게 하면 돈을 받을까, 혹시 자기에게 돈좀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해서 바울을 자주 불렀습니다. 현대의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때의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이 총독에게는 두가지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신앙적 관심이 있었고, 돈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 아닙니까? 돈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여러분, 둘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넘어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겠다는 거 아니에요. 교회 안다닌다는거 아니에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돈을 벌고 교회를 가겠다는 거지요. 다하고 시간 남으면 교회 다닌다는거지요. 그리고는 암에 걸렸을 때에야 '그때 잘할걸' 그러나 소용없습니다. 좋은 시간은 나를 위해 다 쓰고, 마지막 헌 시간은 주앞에 드립니다. 이런 소리죠.

 

27,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소요가 무서워서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계속 보류를 하는 것입니다. 2년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이 재판을 못하고 후임인 베스도가 이 재판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떠나지만 하나님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지나갑니다. 재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30년전의 재벌이 어디있습니까?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만이 영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남은 시간, 떳떳하게 사십시오.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사십시오. 부인 앞에 떳떳하십시오. 남편 앞에서도 떳떳하십시오. 교회에서도 떳떳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영원히 그사람에게 함께 있을 것입니다.

 

짧은 세상을 사는데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이 없게 살게 하옵소서

 

 

                   사도행전 23:12-35  바울을 해하려는 사람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서원한 사람이 약 40여명이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께서 아시고 사도 바울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기위하여 그 전날밤에 환상을 보여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자기를 죽이려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결사대가 40명이 있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우리는 직장에서 자기 싫어하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힘들어요. 가정에서 서로 마음맞지 않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가시방석인 것 같애. 그런데 40여명이나 되는 사람이 바울을 죽이겠다고 이렇게 결심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지금 이런 일이 북한이나 공산권에서 전도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일어나고 있어요. 생명의 위협이 일어나고 있어요. 실제로 공산권에서는 생명을 내걸고 예수를 믿습니다. 옛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 그대로 있습니다.

 

12,

사도 바울을 도와주려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은 40명입니다. 그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서원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는 결코 죽지 않고 로마로 입성하게 될 것이다.'  40여명의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천부장에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 바울을 우리 공회로 보내달라고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천부장의 손에서부터 이 대제사장의 손에 들어가려는 그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숨었다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14-15절이 그 내용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살인음모에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협조를 하기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40명만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더 죽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10-11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의인들은 계속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이 의인들이 받는 핍박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의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지 아니하면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쾌락을 누리면서 살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위기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16절에 보면 바울의 생질이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에게 가르쳐 줍니다.

16,

바울의 생질이 누구인지는 여기에 한 번 나오기 때문에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위기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그 위기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배 주변에 여러 가지 위기가 벌어지고 있는 데 내가 모를 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리미리 그것들을 막아주셨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도 모를 위기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다 막아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교통사고 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데, 죽을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마다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여러분과 내가 여기까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천사람이 넘어지고, 만사람이 넘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하고 낙담한 일이 있을지라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17-19,

사도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백부장을 통하여 천부장에게 다고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제밤에 나타나신 주님 때문에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기 떠문에 체포당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당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늘 가까이 하면 어떤 위기가 여러분을 덥친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천부장에 가서 바울의 생질이 이야기를 합니다.

 

20-21,

천부장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천부장은 이말을 듣고 이상하게 그가 바울을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그는 신앙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이상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신자까지도 사용하시고 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시에 군대를 풀어가지고 바울을 보호해 줍니다.

 

22-25,

모든 일과가 끝난 밤 3시 야간을 틈타서 바울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도록,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바울 하나를 이동하기 위해서 보병이 몇 명이에요? 200, 마병이 몇 명? 70, 창군이 몇 명? 200명 총 470명을 동원합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멋쟁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건 돈도 안줬는데 약 500여명 사람이 바울을 태울 말까지 제일 안전한 지역으로 바울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면 돈이 안듭니다. 내가 하면 돈들어요. 하나님이 하면 모든 일이 쉬워요. 놀라운 일입니다. 또 시키지도 않았는데 천부장이 총독에게 편지까지 씁니다. 변호해 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간단합니다. '너는 로마를 보아야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죽지 않아요.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그 종을 통하여 시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을 결정을 하고, 헌신을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을 위해서 사십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돈을 벌고 직장 생활을 하는 겁니까?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런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편지내용을 보겠습니다. 26-30절까지입니다.

천부장은 자기가 본 사실을 그대로 총독에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유대인은 바울을 죽이려고 했고, 또 죽이려고 40명이나 있었지만 자기가 보니까 죽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체포할 이유도, 감금할 이유도 자기가 보기에는 죽일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에요.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던 장면하고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잡아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여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빌라도가 재판을 해 봅니다. 예수에게 십자가에 처형할 이유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빌라도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이고 율법에 대한 문제이지 이 사람이 법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그러나 모든 국민들은 아우성을 칩니다. '예수를 죽이시오, 예수를 죽이시오' 사실은 국민들이 아우성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뒤에 배후세력이 있어요. 바로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너무나 고민스러워서 예수를 채찍에 맡깁니다. 굉장히 때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좀 누그럽게 할수 없을까 해서 예수님을 채찍에 때리지만 사람들은 그것가지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빌라도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가이사의 편인가, 아닌가' 정치적인 문제로 끌고 들어가니다. 빌라도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정치 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알기 떠문에 할수없이 예수님대신에 바라바를 놓아주고 죄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똑같은 얘기가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똑같은 얘기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기 사건에 휘말려가지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우리가 흠을 잡혀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의 대형사고에 그리스도인들이 관계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목사가 예수를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기 사건 때문에 감옥에 들어갑니다. 어떤 때는 너무도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보고 바울을 보십시오. 그들에게서 죽을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체포할 일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일어나서는 안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적인 일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31-35,

결국 사도 바울은 최악의 위기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보호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데 죄수의 몸으로 갑니다. 끌려갑니다. 그러나 결국은 로마를 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내노력으로 됐든, 다른 사람의 노력으로 됐든 간에 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된 것입니다. 교회에 매를 맞고 오든, 그냥 내 발로 찾아오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내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의 가정과 나의 건강과 나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한다는 그런 일들은 우리가 종종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도와 주셨다'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보게됩니다.

우리를 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 일 때 불려갑니다. 그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왜 이런 일이'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때는 그아이는 그때 데려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되어지기에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때 그 사람을 데려가나?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절대절명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피하게 하시고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실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꾸어서 구원하실 때도 있고, 천사를 보내어서 구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바울과 실라를 구원하실 때는 지진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보면 천사를 보내거나 지진을 일으키시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바울을 빼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꼐서 바울의 생질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고, 부장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고, 총독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살해 위기로부터 빼내 주셨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간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여러분을 괴롭히고, 파괴하려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런 말씀을 붙잡기를 바랍니다. 또한 "내가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생각에 집중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안지켜주시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우리 개인개인이 바울이 가진 비젼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냥 그냥 살지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도우심이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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